비행사의 낭만적인 최후, <남방 우편기>

시간을 두고 반복해서 읽으면 지루할 법도 한데 <어린왕자>만큼 역시 비행사가 주인공으로 동증하는 생텍쥐페리의 소설들은 언제나 늘 새롭다.

그의 첫 장편인 <남방 우편기><야간 비행>은 스물여섯 살 때부터 우편비행 일에 종사하면서 유럽과 남미를 하늘로 오갔던 경험을 토대로 한 작품이다. 당시만 해도 비행이란 추락과 실종의 위험이 상존하던 때였다.   

하지만 생텍쥐페리는 그런 역경에서도 절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위험천만한 경험을 소설 창작으로 융화시켰다.  폭풍우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항로를 이탈해버린 비행기, 지상과의 연락은 끊어지고 연료는 바닥나가고 오직 구름 사이로 스치는 불빛 한 점을 희망으로 기수를 돌린다. 그 불빛은 밤하늘에 영롱하게 빛나는 별빛이다. 

생텍쥐페리의 실종은 그의 1931년 작 <남방 우편기>의 이야기와 너무도 닮아있다.  작가는 이미 자신이 곧 겪게 될 불의의 사고를 미리 직감하고 있었던 것일까?    생텍쥐페리는 소설 속 비행사의 죽음을 낭만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나의 동료여......  그러고보니 여기에 보물이 있었군. 자네가 그토록 찾아다니지 않았나?
이 모래언덕 위에서, 양팔을 십자 모양으로 벌리고 얼굴은 저 짙푸른 만을 향한 채 있는 자네, 그날 밤 자네는 어찌나 가볍던지.....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자네는 얼마나 많은 밧줄을 풀어놓았던가. 벌써 공기처럼 가벼워진 베르니스. 자네는 오직 친구 하나만을 남겨 두었더군. 거미줄 한 가닥이 겨우 그대를 붙잡고 있으니 말일세......
 그날 밤 자네는 훨씬 더 가벼웠지. 갑자기 현기증이 났을 거야. 그 때 자네 머리 위로 별에서 보물이 반짝였겠지. 
아주짧게. 아주 덧없이 !
 내 우정의 거미줄이 자네를 가까스로 붙들고 있었지만 불충한 목동인 나는 아마도 잠들어 있었던 모양이네.     (생 텍쥐페리, [남방 우편기] pp 275)  

 

<남방 우편기>의 줄거리를 간략히 소개하자면 주인공인 자크 베르니스는 비행기로 우편물을 운송하는 비행 조종사다. 그는 주느비에브라는 여인을 사랑하게 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한다.  주느비에브는 사랑하는 남자를 혼자 두고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만다.  자크 베르니스는 지상을 떠나 하늘 위로 나는 순간동안만 사랑하는 여자를 잃어버린 슬픔과 절망을 극복하려고 한다. 하늘 어딘가에 있을 주느비에브를 만나기 위해서 그는 위험천만한 비행을 시도하기도 한다. 결국, 그의 위험한 비행은 불의의 사고로 이어졌으며 그는 외딴 사막에 불시착한 이후, 원주민에게 피살당한채 발견됨으로써 소설은 끝이 난다.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구절은 베르니스의 동료가 행방불명된 그의 주검을 발견하고 있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지금까지 읽은 소설 중에 기억이 남는 엔딩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낭만적인 죽음의 결말을 꼽으라고 한다면 이 소설의 결말을 꼽고 싶다.  주인공의 비행기 사고가 '낭만적' 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어색한 감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주인공의 최후를 묘사하는 수많은 소설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다.    결말을 읽을 때마다 작가의 죽음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베르니스는 사막 위에서 싸늘하게 주검이 된 것이 아니다.  그의 죽음에도 밤하늘의 별빛은 반짝거리고 있다.   죽은 베르니스의 머리가 향하고 있는 저 하늘 위에 떠있는 별에는 분명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주느비에브가 살고 있을 것이다.  베르니스는 그녀가 살고 있는 천국의 별로 떠났던 것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남방 우편기>의 마지막 장면을 읽으면 언뜻 김광섭의 <저녁에>라는 시가 떠오르기도 한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김광섭 <저녁에> -  
 

 

저녁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잉태하고 있는 인간의 삶 그것처럼 어둠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그래서 저녁은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 의 관계를 탄생시키는 시간이지만 동시에 그것들의 사라짐을 예고하는 시간이다.    <남방 우편기> 속 베르니스를 둘러싼 밤이라는 배경 역시 그렇다.  베르니스는 밤하늘의 별빛 삼아 사랑하는 연인의 부재가 만들어낸 고독을 달래보려고 하지만 시간이 너무나도 짧고 한순간이다.   새벽이 되면 별빛이 사라지게 되듯이.    자녁은 밤이 되고 새벽이 되는 어쩔 수 없는 한계적 운명을 지니고 있다.

'저녁'이라는 공간 때문에 화자인 '나' 와 별과의 만남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지만 아직도 자신들의 관계가 정다운 사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인연이란 언제 어디서든 다른 존재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의 마지막 명구절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김광섭의 시는 미술 작품으로 변용된다.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년 

 

화폭 속에는 수많은 점들이 박혀 있다. 김광섭의 시 내용을 비추어보면 그림을 가득 차고 있는 점들은 밤하늘 위에 수놓은 별들이다. 저기 저 수많은 점들로 이루어진 밤하늘의 수천개 별들의 무리 사이에 시 속 화자인 '나' 와 소설 속 자크 베르니스가 그토록 찾고 싶어하는, 사랑하는 사람이 살고 있을 것이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는 사랑한다는 것은 ‘길들이는 것’ 이라는 문장이 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존재들은 서로가 서로를 ‘쳐다 봄’으로써 소중한 사랑으로 맺어지게 된다.  하늘에 떠있는 별들은 무수히 많은 것들이지만 참으로 소중한 사랑으로 길들여지는 존재는 그 중에서도 오직 ‘별 하나’ 뿐이다.

하루에 한 번쯤이라도 서재 블로그에 글을 남기거나 이웃분의 서재에 방문하는, 이 사소한 행위도 어떻게 보면 인연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지금도 서로 얼굴도 모르는 분들끼리 온라인 공간에서 만나서 댓글이나 글을 읽는 것도 하나의 인연이다.  우리는 누구나 어디에서 다시 만날지 모르는 관계이다. 사람의 운명을 알 수 없는 법이다.  어떻게 하다보면 우연히 다른 장소에서 만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이 순간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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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1-09-25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낭만적인 소설, 페이퍼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댓글 주고 받는 이 관계들. 참 소중하다고요. 꼭 얼굴을 보지 않아도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요. 그런데 <야간비행>은 어땠어요? cyrus님.

cyrus 2011-09-26 12:46   좋아요 0 | URL
제가 글을 쓰다보니 잘못 적었네요. 비행사의 죽음이 나오는 이야기가
<남방 우편기>라는 소설이고요.. <야간비행>은 제목 그래도 야간비행을
담당하는 조종사들의 고달픈 삶을 그린 내용이에요. 개인적으로 저는
멜로적 요소가 있는 <남방 우편기>를 인상깊게 읽어서그런지 <야간비행>은
다시 읽어도 마음에 크게 와닿지가 않았어요. ^^:;

잘잘라 2011-09-26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아느은~~~
이 소절만 자꾸 부르게 되요^^

우편비행을 하며 그에 관한 소설을 쓰고, 비행 중에 실종된 작가 생텍쥐베리와
알래스카에 살며 그에 관한 글을 쓰고 사진을 찍다가 곰의 습격으로 사망한 작가 호시노 미치오, 두 사람의 마지막이 안타깝고도 아름답게 펼쳐지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나의 마지막은 어떨지, 어떻기를 바라는지.. 생각하게되네요.

cyrus 2011-09-26 12:52   좋아요 0 | URL
알고보니 시 구절에서 따온 가요도 있더군요. ^^

저는 생의 마지막 페이지에 천상병 시인의 시 구절처럼
살아온 세상이 아름답다고 적을 수 있는 후회없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이 드네요 ^^
 

 

 

* 관련 강의 제목:  한국정부론 2주차 강의 (2011.9.19)   

  관련 내용 동영상: 지식채널e [180도의 진실]

                           5.18 민중항쟁 동영상 (5.18 기념재단 www.518.org/

  

    

  뒤집어 볼 수 있는 그림  

  

     

주세페 아르침볼도 <요리> 1570년 

 

식탁 위에 은쟁반에 담은 통구이 요리가 차려져 있다. 이제 곧 시식을 하기 위해서 쟁반 뚜껑을 열어놓는다.  새끼 양과 닭을 통째로 구웠다.  제목의 의미 그대로 보게 된다면 그림을 보는 관찰자는 '요리' 를 상징하는 기름기가 배어날 정도로 노릇노릇하게 구운 통구이 음식을 묘사한 단순한 그림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통구이 음식만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이 그림에는 분명 '사람' 도 그려져 있다. 단, 쟁반 뚜껑을 열려고 하는 두 손만 보이는 정체불명의 인물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림을 뚫어지게 쳐다봐도 사람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을 180도 완전히 뒤집은 상태에서 보자.     

 

   

 

그림을 뒤집어 보라고 해서 설마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얼굴을 뒤집어서 본다거나 아예 모니터 기기를 통째로 뒤집어보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 

 










 

  

혹시 그런 분들이 있을까봐 위의 그림을 180도로 뒤집어봤다.    

  

 

  

 

그림을 뒤집는 순간, 통구이 요리는 한순간에 그로테스크한 모습의 사람 얼굴이 등장한다.  새끼 양 통구이는 사람의 이미와 귀가 되었고 닭 통구이는 눈과 코가 되었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면 약간 벌어진 입도 볼 수 있다.   통구이를 담은 은쟁반은 어느새 그로테스크 인간의 머리에 씌어진 모자가 되었다.    그림 속에는 통구이 요리뿐만 아니라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그로테스크 모습의 사람 역시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림을 보는 시선의 틀을 깬 뒤집어 볼 수 있는 그림 자체가 신기하고 놀랍지만, 그림의 형식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런 그림이 최근에 나온 것이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에 처음으로 세상에 선보였다는 점이다.   

독특하면서도 재미있는 그림을 제작한 주세페 아르침볼도(1527?~1593)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으며 그가 화가로 활동할 때 동시대 화가로는 미켈란젤로가 있다.   이탈리아 출신 화가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이나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지역을 기반으로 활약하였으나 아르침볼도는 밀라노에서 화공으로 활동하다가 1562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으로 활동의 무대를 옮겨 그 곳에서 궁정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아르침볼도 <베르툼누스의 모습을 한 루돌프 2세>  1590년 

   
  베르툼누스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들판과 정원의 신이다. 아르침볼도는 국가의 최고 경영자인 황제가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해서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다는 점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기 위해 통치자를 식물을 자라나게 한 위대한 신으로 효과적으로 묘사하였다.
 
   

 

일반적으로 궁정화가라면 자신에게 막대한 재정적 지원과 예술적 후원을 해주는 왕과 그의 일가의 권위를 높일 수 있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당시 모든 궁정화가들은 군주를 신이나 영웅, 초인, 성자로 묘사했다. 그런데 아르침볼도는 그런 관례를 버리고 황제를 식물의 조합체로 표현했다. 

당시 왕들은 기괴하기 짝이 없는 아르침볼도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루돌프 2세(1552~1616)가 왕좌에 오르게 되면서부터 아르침볼도의 재능이 인정받기 시작했다.   국왕은 불경스럽다고 화가를 꾸짖기는커녕 그가 그린 각종 사물의 조합으로 표현한 자신의 초상화뿐만 아니라 그 밖의 다른 그림들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동물과 식물을 아울러 사람의 머리를 형용한 괴기한 그림을 제작한 아르침볼도의 예술적 재능은
저속한 취미를 가진 화가라 하여 오랫동안 무시되었으나 초현실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재평가되었다.    

아르침볼도의 그림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사물 혹은 그림을 바라보는 방식이 꼭 한 가지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시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눈에 비친 세상 만물의 외양과 내면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400여 년의 아르침볼도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화려한 휴가' , 5.18 광주민중항쟁

 

사진출처: 5.18 기념재단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정승화 계엄 사령관을 대통령 시해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하면서 군부의 권력을 장악한 12·12 사태가 일어나게 된다.   

유신독재체제에 이은 신군부 세력의 탄압정치는 국민의 불만을 고조시키고 전국적으로 산발적인 학생 시위가 이어졌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시민 집회가 대규모로 진행된 이후, 신군부는 더 이상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5월 17일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각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계엄군을 주둔시켰다.  

5월 18일 광주 전남대학 학생들이 등교가 저지되자 계엄령과 휴교령 해제를 외치며 시위를 하였다. 그러나 계엄군은 공수특전단과 탱크 등을 동원하여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계엄군의 폭력 진압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되었다.



 

계엄군의 폭행 

(사진출처: 5.18 기념재단)

  

5월 20일 계엄군에 의해 모든 시외 전화가 두절되어 광주는 고립되었고, 계엄군은 시민에게 발포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 언론들은 광주 항쟁을 불순분자와 폭도들에 의한 난동으로 왜곡, 보도되기에 이른다.

계엄군의 발포로 수십여명의 시위 학생들이 사망하였으며, 이에 시민들은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칭하며, 경찰서나 계엄군으로부터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을 시작하였다.

5월 22일 시민들은 계엄군을 몰아내고 도청을 차지 '5.18사태 수습 대책 위원회'를 결성하고 사태 수습에 들어갔으나, 계엄군의 협상 거부로 협상이 결렬되고 27일 계엄군의 총공세로 많은 희생자를 낸 광주 민주화 운동은 막을 내렸다.   

결국 피의 진압으로 5.18 광주민중항쟁은 끝났지만 1995년에 당시 신군부세력이었던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구속되어 그동안 정권과 언론에 의해 가려지고 있었던 광주민중항쟁의 진상이 규명되기 시작했다.  양심적인 민주인사들과 민중운동에 의해 전두환 정권의 역사의 심판대에 세움으로서 항쟁의 정당성은 온 천하에 입증될 수 있었다.   

 

 

 두 개의 동영상 감상에 대한 단상  

이번 주 월요일에 있었던 '한국정부론' 수업 시간에 지식채널e의 '180도의 진실' 과 5.18 광주민중항쟁 관련 동영상을 동시에 보게 되었다.   동영상을 보고 난 뒤에 교수님은 각자 학생들에게 동영상 수업과 관련된 소감을 물어봤다. 

학생들의 소감은 대체로 천편일률적이었다. '180도의 진실' 동영상을 보면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거나 '5.18 민중항쟁' 동영상을 통해서 광주에서 일어난 신군부의 잔인한 행위뿐만 아니라 민주화로 발전할 수 있는 역사적인 날을 잊지 않을 것이라는 등으로 짤막하게 소감을 남겼을 뿐이다.    

내용이 서로 연관이 없어보이는 두 가지 동영상을 통해서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알리고 싶은 의도가 있었을텐데 학생들은 한 가지 동영상에 대한 소감만 언급할 뿐이었다.  

 

개인적으로 두 가지 동영상을 보면서 느낀 것은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메시지는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관점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단, 강의 내용에 대한 나의 생각 역시 교수님의 본래 의도에 어긋날 수도 있다.   

대부분 학생들은 시민군에게 가하는 신군부의 무자비한 폭력 영상을 보면서 민주화 운동을 억압한 신군부 정권이 나쁘다는 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물론 수많은 시민을 잔인하게 폭력과 살인을 행사한 신군부의 반인륜적인 진압은 절대로 발생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현상을 다른 시선을 바라보게 되면 시민과 학생들에게 무기를 내민 집안에 참여한 군인들 역시 민중항쟁에 참여하는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신군부에 희생된 피해자라고 생각된다.  

내가 본 5.18 민중항쟁 동영상의 말미에는 민중항쟁 참여 이후 정신적 트라우마로 인해 정신질환을 앓는 시민이 등장하였다.   그만큼 인정사정 없이 곤봉을 휘두르고 군화로 짓밟는 폭력이 만들어낸 공포와 혼란이 한 사람의 기억 속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기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폭력이 낳은 정신적 트라우마는 시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군인들 역시 가지고 있다.  몇 년 전에 5.18 관련 다큐멘터리를 통해 보게 된 것인데 당시 항쟁 진압에 참여했던 군인이 인터뷰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진압 가해자 입장인 군인은 그저 죄 없는 시민에게 무자비하게 가한 폭력 행위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이룰 정도라고 토로하기도 하였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양면성' 은 조세희의 <난쏘공>에 수록된 '뫼비우스의 띠' 에 볼 수 있다. 

생활이 어려운 앉은뱅이와 꼽추는 아파트 재개발로 살고 있는 집을 헐값에 빼앗기게 되자 복수를 결심하고 준비한다.  결국 부동산업자를 묶고 돈을 빼앗은 그들은 부동산업자를 차에 태워 불을 질러 살해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막상 부동산업자를 살해하고 난 뒤에 두 사람의 태도는 상반된 입장을 보이기 시작한다.   앉은뱅이는 부동산업자에게 훔친 돈으로 강냉이 기계를 사서 재기의 인생을 펼쳐보려는 희망의 꿈에 부풀게 되지만 반면에 꼽추는 앉은뱅이와는 다르게 살인에 대한 죄의식을 느끼고 후회하게 됨으로써 앉은뱅이의 계획에 동행하지 않게 된다. 

결국 부조리한 세상사에 엮여져 있는 인간의 관계를 들여다보면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알 수 없는 왜곡된 현실의 상황이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기묘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방적인 고정관념으로 보는 것이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니다.  

며칠 전에 쓴 글에서도 밝혔지만 지금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은 앞면과 뒷면을 구별할 수 없는, 발생원인과 결과를 놓고 시비를 가릴 수 없게 돌아가고 있는 '뫼비우스의 띠' 처럼 복잡한 세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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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09-25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진짜 시루스님이 사진이랑 그림 보여줄 때 너무 좋아요.^______________^

cyrus 2011-09-25 19:59   좋아요 0 | URL
이거 매주 수업시간에 강의 내용 요약, 느낀점 써서 교수님 개인
홈페이지에 올리는 일종의 과제물이랍니다. 과제물로 제출하기 전에
서재 블로그에 페이퍼 형식으로 써봤습니다. 제출할 때 불필요한 내용들은
빼야겠지만요. 그래도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
 
거대한 전환 -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8
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 길(도서출판) / 2009년 7월
평점 :
일시품절


 

  자본주의 4.0의 등장    

요즘 조선일보에서 특집기사로 연재하고 있는 '자본주의 4.0' 이 화제다.  '자본주의4.0' 이란 소프트웨어 버전처럼 진화단계에 따라 숫자를 붙일 때 네 번째에 해당하는 자본주의라는 뜻이다.   

자본주의 1.0은 '보이지 않는 손' 을 주장한 애덤 스미스로 대표되는 자유방임의 고전자본주의 시대를,  자본주의 2.0은 1930년대 정부의 역할을 강조한 케인즈의 수정자본주의, 자본주의 3.0은 1970년대 시장의 자율을 강조한 신자유주의 시대를 말한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자본주의의 모순과 병페적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대안이 바로 '자본주의 4.0' 이다. 

자본주의 4.0은 그동안 빈부격차를 등한시한 이전 구식 자본주의 버전(?)들과 차원이 다르다. 시장의 기능을 존중하고 선두에 선 대기업이 더 큰 성공으로 나아가도록 하되, 중소기업에도 공정한 기회를 제공해 성공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   

조선일보의 자본주의 4.0 특집 연재 이후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자본주의 4.0의 실체와 자본주의 시대 규정에 대해서 많은 찬반 논란의 양상을 펼치고 있다.   더구나 그동안 시장경제주의를 옹호하던 보수 성향의 조선일보가 진보 성향의 언론에서나 언급할 수 있는 '따뜻한' 자본주의를 특집 편성을 하면서까지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진보 성향의 전문가들에게는 '자본주의 4.0' 의 정체성과 실효성 여부에 대해서 그냥 짚고 넘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자본주의 4.0' 이 이전의 자본주의의 시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대안이 될 것인지 아니면 그저 겉멋든 보수 언론의 '위선' 에 불과한 관념적인 이론으로 남게 될지 전문가와 독자들 사이에서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   

시장경제주의 기능이 강조되는 자본주의의 병폐적 현상을 극복하자는 취지는 좋으나 자본주의 4.0에서 강조되는 내용들은 자본주의 극복방안으로 대안으로 그동안 줄곧 제시되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을 비추어 볼 때 '자본주의 4.0' 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처럼 강조하는 것은 시기상조인거 같다.   그리고 숫자를 붙여서 '게임 시리즈 버전' 처럼 구분하고 있는 조선일보의 자본주의 시대 구분 방법은 기존에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자본주의 분류 방식을 답습하고 있을 뿐 전혀 새롭지가 않다.   일반적으로 중, 고등학교에서는 '애덤 스미스의 고전적 자본주의→케인즈의 수정자본주의→대처와 레이건의 신자유주의' 라는 형식으로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도식적 분류에 근거한 자본주의 4.0을 홍보하기 전에 따뜻하지 않은, 특히 빈곤층이나 노동자,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냉소적' 으로 대하는 한국 특유의 자본주의 사회 현상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먼저 진단하고 개선하는 것이 최우선인거 같다.   무엇보다도 시장의 기능이야말로 개인들의 욕망을 보듬어서 가장 조화롭고 아름다운 선택을 이끌어내 풍요로운 부를 가져다분다는 시장지상주의자들의 달콤한 속삭임에서 벗어나는 발상의 '전환' 이 필요하다.  



 

  시장경제의 유토피아적 망상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 마디로 완전히 유토피아이다. 그런 제도는 아주 잠시도 존재할 수가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게 되어 있다. 인간은 그야말로 신체적으로 파괴당할 것이며 삶의 환경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94쪽)  

 

자기조정 기능으로 작동되는 시장자본주의는 오로지 시장가격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경제다. 그러나 폴라니는 시장자본주의가 말하는 자기조정 기능이라는 것은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에 의해서는 절대로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곧 국가 개입의 불가피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없는 경제란 있을 수 없고, 또 그런 경제는 역사상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애담 스미스가 언급한 이윤을 추구하는 인간이 원시시대부터 존재했다는 가설에도 반기를 든다.  폴라니는 스미스가 <국부론>을 쓴 1776년을 자본주의의 원년으로 보지 않는다. 1834년의 스피넘랜드법(빈민구제법)의 폐지에 따라 인민들이 먹고 살 길은 임금노동으로만 가능하게 되고 노동시장의 형성과 함께 ‘자기조정 시장 ’ 이 완성돼 현재의 자본주의가 도래했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가 결코 시장경제 자체를 철폐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아담 스미스가 제창한 '보이지 않는 손' 에 의한 시장의 합리적 질서 또는 하이에크의 자기조정적 시장 기능에 동의하지 않고, 시장경제란 시장만능주의자들이 신봉하는 '유토피아' 일 뿐이라고 갈파한다.  또한 그는 화폐, 토지, 노동 등을 다른 생산물과는 다른 허구적 재화라고 칭하면서, 이들 재화가 지나치게 그 힘을 발휘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위기를 촉발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나 케인즈처럼 시장경제의 비인간성, 비합리성을 지적하기보다는 시장경제 자체가 현실과 괴리된 망상이라는 점을 밝히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이른바 자기조정적 시장의 논리는 국가를 배제할 뿐더러 시장이 힘을 가지면 가질수록 국가와 사회는 시장에 복속된다고 보았다. 이는 결국 인간의 자유와 이상, 희망을 파괴하고 그 결과는 참담할 수밖에 없다고 간파하였다.   

폴라니는 이런 현상을 피하려면 마르크스식의 시장 부정도 아니요, 케인즈식의 국가 개입도 적절치 않으며 '사회'라는 실체를 제대로 살리는 것이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즉 국가나 시장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의 역할에 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시장 확장은 국가의 의도적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고, 국가 역시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생성된 것이어서 ‘사회’ 가 더 높은 차원의 제도라는 의미이다.  

폴라니가 원하는 '사회' 는 인간의 자유와 가치를 분명히 하고, 국가와 시장을 인간의 존엄에 복무할 수 있는 자유로운 세상이다.  국가와 시장이 아닌 사회 속의 노동조합, 지자체, 소비자·생산자 조합 등 다양한 인간 집단 사이의 내부적 의사소통과 연대를 강조한다. 이들 사이의 대화와 이해, 관계망은 핵심요소다.

  

  '악마의 맷돌' 로 작동되는 시장경제

폴라니는 이 책에서 시장경제를 '악마의 맷돌(Satanic Mills)' 이라고 불렀다.  시장경제의 거짓 신화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시장의 미신에 빠져 타인에 대한 보살핌을 저버릴 때 인간이 얼마나 비참해지는지를 보여준다.  가령 노동력을 기업을 이끄는 부르주아 마음대로 처리하면 그것을 담고 있는 인간의 육체적, 심리적 실체마저 하나의 소유물로 사회변화에 노출되어 희생되고, 자연은 오염되고 파괴된다.

그의 말대로라면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이익에만 찾으라고 가르치는 우리의 자녀 교육법은 '신자유주의' 가 만들어낸 시장경제의 주술이 빚어낸 서글픈 환각이다. 상품이 될 수 없는 것,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한 분별력을 차츰 잃어가면서 우리는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부터 자꾸 멀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경제는 시장이 아니라 사회적 제약에 좌우됐다고 보는 칼라니는 시장경제의 재앙 또한 경제를 다시 사회적 통제 안에 가두어 둠으로써만 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최근의 세계경제는 경제위기가 다시 거론되고 있는 풍전등화로 치닫는 형국이다.  그런데 아직 경제적 이윤을 따지기 좋아하는 몇몇 호모 에코노미쿠스들은 '악마의 맷돌'을 내던지기보다 보다 더 잘 돌릴 수 준비에만 여념이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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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9-24 1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선일보의 '자본주의 4.0'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읽으면 생각이 달라질지 모르지만, 말씀하신 바가 전부라면 기존에 늘상 해오던 얘기와 크게 다른 것은 없는 것처럼 보여지네요. 대기업이 더 큰 성공을 거두게 하되, 중소기업에도 공정한 기회를 제공한다라...사실 그런건 지금까지도 늘 해오던거니까. 다만 문제는 그들 나름으로 정의한 '공정한 기회'라는 게 문제긴 하지만요.

그저 4.0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서 현혹시키는 것으로 일단은 보이네요. 대기업들 옹호하는 기사나 안쓰면서, 그리고 혹은 삼성 문제와 관련된 기사나 쓰면서 그런 얘기를 하면, 그래도 일단은 관심가지고 들어라도 볼텐데..

cyrus 2011-09-24 20:24   좋아요 0 | URL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잠깐 조선일보의 자본주의 4.0에 대해서
언급하셔서 요즘 주의깊게 보고 있는 내용입니다. 취지는 분명 좋긴 하나
과연 대기업이 노동자들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 수 있을지 실현성에
의문이 들긴 해요. 그리고 자본주의 4.0이라는 제목으로
외국 학자의 책도 국내에 번역되기도 했는데 아직 이 책은 읽지 못했어요.

맥거핀 2011-09-24 21:10   좋아요 1 | URL
일단 이름부터가 좀...cyrus님이 잘 정리하셨지만, 고전자본주의, 수정자본주의, 신자유주의라는 이미 기존에 널리 알려진 이름들이 있어요. 근데 그걸 1.0이니 2.0이니 해대면서, 마치 소프트웨어 새로운 버전 붙는 식대로,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것처럼 현혹을 시켜놨네요.(자본주의는 오류 수정의 역사이지, 그것을 발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조선일보가 기존에 잘 하던 식이긴 합니다. 외국학자 하나가 어디서 뭐 하나 만들어내면 이때다 싶어서 가지고 와서 써먹는거죠. cyrus님이 말씀하신 칼 폴라니 책은 그래도 검증된 책이니까 많이 다르겠지요. (요즘 돌아가는 걸 보며, 경제 공부를 해야할 것 같아서 경제학 책을 여러 권 사다놨는데 읽지 못하고 있네요. 암튼 좋은 서평에 이런 댓글이라 죄송..-_-)

cyrus 2011-09-24 23:01   좋아요 2 | URL
아니에요, 죄송해하실거 없어요 ^^;;
자본주의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자본주의가
조선일보가 표현한대로 발전하는 순으로 오해하기 쉬울 우려가 있을거라고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이리시스 2011-09-24 21: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악마의 맷돌. 완전 쏙 들어오는 비유네요. 예전에 다른 서점 블로그에서 한창 이 책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길래 리뷰들이 좋아서 그때 찜해뒀어요. 그때도 다들 평이 좋았던 걸로 기억이 나요. 저는 맨날 이 책 볼 때마다 <제3의 길>을 먼저 읽어야겠다 하는데.

어쨌거나 4.0이든 4.5든 명칭이 문제는 아니겠죠. 이론은 이론, 현실은 현실이듯. 시루스님 언급처럼 마르크스도 부정하고, 케인즈도 부정하면서 '사회'를 주목하면 될텐데, 다양한 이익세력이 충돌하는 사회야말로 정말 실체로 정의하기가 힘들잖아요. 누구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잖아요. 부자가 웃으면 빈자는 울고, 빈자가 웃으면 부자는 울겠죠.

어제 네이버 메인뉴스에 신자유주의가 싫으면 탈북하라는 식의 제목이 떴던데 기사내용은 못 읽었지만 사회가 이미 이렇게 극단적이니 무섭더라고요. 신자유주의의 반대는 북한인가.. 한참 생각했어요.^^;

cyrus 2011-09-24 23:04   좋아요 2 | URL
맞아요, 역사교과서 개정안과 관련된 자유민주주의 표기 때문에
오히려 표기를 반대하는 학자들을 종북 인사로 규정하고 있으니,,
아이리시스님 말씀대로 이러다가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까닥하나
반대하다가는 빨갱이 소리 들을지도 모르겠네요 ^^;;

아이리시스 2011-09-25 00:11   좋아요 2 | URL
그런데 탈북 아니고 월북인가 봐요.^^;

노이에자이트 2011-09-24 22: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막연히 자본주의니 신자유주의니 하면서 심한 경쟁, 탐욕, 상업화 등등 상투적인 이야기나 하는 이들이 많죠.하지만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기원했는가 하는 문제를 정면으로 탐구하려면 역시 경제사의 고전을 읽어야 하며 칼 폴라니 책도 그런 시각에서 필요합니다.그리고 이 문제를 다루려면 역시 <자본주의 이행논쟁>을 공부해야죠.특히 자본주의를 막연히 상업화라고 여기는 통념을 치밀하게 비판하는 논문들이 빛나고 있습니다.이런 공부를 안 해놓은 얼치기 진보주의자들이 식민지근대화론을 대하면 친일파니 뭐니 인신공격이나 해대고 논쟁은 산으로 가버립니다.

폴라니의 시장론을 한국사에 적용한 것으로 부르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제 1부 일제하 사회경제적 변동이 있습니다.경제사 공부로 한국사를 접근하는 이들이 곰곰이 생각해볼 소재가 많습니다.폴라니 외에 경제사의 고전들이 많이 인용되어 있으니 참고문헌도 꼼꼼이 살펴보면 좋습니다.

cyrus 2011-09-24 23:12   좋아요 1 | URL
<거대한 전환>을 번역한 홍기빈 씨의 <자본주의>를 읽어보니깐
노자님 말씀대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지식인들 중에는 정작 '자본' 의
정의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많다고 하더군요,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마음 속으로 뜨끔했습니다. ^^;;
그리고 지금까지 자본주의를 너무 막연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생각도 해보게 되었고요.

맥거핀 2011-09-25 00:29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좋은 책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자본주의 이행논쟁>을 읽어보려고 서점을 뒤져보니, 거의 절판이고, 헌책방에만 몇 권이 보이네요. 그런데, 1984년판이 있고, 1997년판이 있는데 그 차이가 있나요? 혹시 아시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책 외에 <자본주의 이행논쟁의 새로운 전개>라는 책도 있는데, 이 책 다음에 읽어야할 책인가요? 아니면 다른 별개의 논의인지요..?)

노이에자이트 2011-09-25 15:39   좋아요 1 | URL
맥거핀 님 서재를 방문하여 알려드리겠습니다.
 
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001-468] 호밀밭의 파수꾼

 

 

  새로운 세상에 대한 불안감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 제2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 제4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 제6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 제8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 제10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중략)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 이 상 <오감도 제1호> 중에서 -

 

이상의 '오감도' 는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시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시적 상황은 단순하면서도 작가가 독자드에게 무엇을 알리고자하는지 의도가 불분명하게 느껴진다.   심지어 시인이 독자들을 향해 아무런 의미 없는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 시에서 등장하는 '아해'(兒孩)는 아이의 옛 말이다.  13명의 아이가 도로로 질주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의 모습에는 화자는 무섭다고 말한다.  하지만 왜 무섭게 느껴지는 독자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골목이 막혔건 뚫렸건, 아이들이 질주를 하지 않아도 화자는 어떠한 상황에 상관없이 막연하게 불안감과 공포를 느끼고 있다.  이상이 일제 강점기 시대에 활동한 시인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암울한 시대 속에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의 시인 자신이 느끼고 있는 정신적 불안을 상징하고 있다.    

 

독특한 내용의 시 '오감도' 속에서 볼 수 있는 시인의 정서적 불안감은 절망적 모더니즘 시대를 산 당대 식민지인들의 자화상이면서도 반면에 오늘날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 관계의 단절이 심화되어가는 우리 현대인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대상이나 세상을 대할 때 마음 속에는 극심한 불안감과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특히나 인간이 나이를 먹어감으로써 성장하면 할수록 곧 마주하게 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극대화된다.   특히 청소년기 때는 주변적 상황과 위치에 따른 갈등과 방황으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는 절정의 시기이다.

누구는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고 누구는 또래보다 먼저 사회로 나가 돈을 번다. 또 누군가는 제도권을 벗어나 울타리 없는 세상에 던져지기도 한다. 각자 처한 상황과 환경이 다르고 가슴 속의 꿈과 좌절의 비율도 다르겠지만 모든 젊음에 깃든 공통점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불안감이다. 기성사회의 벽은 높기만 하고,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와 가치관은 반항의 대상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어떤 운명을 가진 존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혼란스럽다. 

 

 

  홀든 콜필드의 이유 없는 반항  

 

"인생은 시합이지, 맞아,  인생이란 규칙에 따라야 하는 운동 경기와 같단다." 

"예, 선생님,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시합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시합은 무슨.  만약 잘난 놈들 측에 끼어 있게 된다면 그때는 시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측에 끼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시합이 되겠는가?   아니.  그런 시합은 있을 수 없다.    (pp 19)

 

감수성이 예민한 홀든 콜필드에게는 학교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 모두 바보들의 세계이다. 깊은 마음의 대화를 나누며 우정을 쌓아야 할 학교 기숙사는 겁주고 싸우는 공간이었고, 가정은 마음의 안식처가 아니라 숨어서 들어가거나 도망쳐야 할 대상이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는 운동 경기에서 볼 수 있는 '게임의 법칙'을 가르치는 비인간적인 교과목이었다.  운동 경기는 경쟁을 통해 승패를 가려야한다.  역사가 게임이라면 처음부터 보잘 것 없는 쪽에 선 경우에도 게임으로 성립될 수 있는지, 과연 게임에서 진 패자들은 어떻게 될 것인지, 홀든은 세상에 강한 의문을 던진다.  부정적인 의문 속에는 불합리하게 움직이는 인생에 대한 내면적인 두려움이 작용되고 있다.

홀든에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거짓과 위선, 불의와 폭력, 모순이 가득한 곳이다. 엄격하고 무관심한 아버지와 날카로운 성격의 어머니, 옷차림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교장, 유일하게 의지했던 앤톨리니 선생에게 겪는 '기분 나쁜 경험' 등은 홀든을 세상 밖으로 밀어내고 냉소적인 반항아로 만든다. 그리고 세상은 다른 존재의 상처에 대해 눈길조차 주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냉소적이다. 센트럴 파크 남쪽에 있는 연못이 얼어붙으면 그곳에 살던 오리들은 어디로 가게 될지 누구 하나 관심을 갖지 않듯이.  

홀든이 왜 그렇게 반항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는지 작가는 독자들에게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공한 유대인 아버지, 교양 있고 예민한 어머니 사이에서 부유하게 자라면서 주류사회를 지향하는 청소년이 겪는 정신적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홀든이 속한 계급의 아이들은 사립 기숙사학교를 다니면서 좋은 집안 출신의 친구를 사귀고, 아름답고 자존심 강한 여학생과 사랑을 속삭이며, 아이비리그를 졸업한 다음 전문직에 안착함으로써 부모 세대의 안정된 삶을 이어가도록 강요받는 것이다.  그런 삶이 홀든의 정신을 속박하는 요소로 작용했고 이를 잠시나마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고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이유 없는 반항이었다.

끊임없이 투덜대고 반항하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세상을 욕하는 그가 언뜻언뜻 보이는 순수함, 세상의 얼토당토 않은 폭력 앞에서 겁을 먹는 장면, 학교와 집을 멀리 하면서도 한때 미워한 친구들을 떠올리고 먼저 죽은 남동생 앨리와 집에 남은 꼬마 여동생 피비를 그리워하는 모습 등은 겉으로는 거칠게 굴 망정 속은 어떻게든 세상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어린아이에 불과한 홀든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홀든이 '호밀밭의 파수꾼' 이 되고 싶은 이유   

하지만 홀든은 삶에 대한, 세상에 대한 의욕을 결국 놓지 못한다. 역겨운 세상을 도피하고 싶지만 결국은 살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가끔씩은 자신도 모르게 '잘 살아보자' 라는 생각이 불쑥 떠오른다는 점, 결국은 어른이 되고, 또 다음 세대를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을꺼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 주는거야. 애들이란 앞 뒤 생각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야. 그럴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건 그거야. 바보같겠지만 말이야.  

(pp 229~230)

  

<호빌밭의 파수꾼>에서 제일 유명한 홀든의 대사이면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홀든은 '파수꾼' 이 되고 싶어하는 생각을 본인 스스로 '바보같은 일'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홀든의 생각이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나 할 줄 아는 단순한 발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인간이 미지의 대상과 세계와 대면하는 순간이 오게 되면 '뜻밖의 현상' 이 벌어진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인간의 '현상' 이란 인간은 주의 깊고 명민해지며, 자신의 모든 감각 능력을 발휘하여 미지의 대상과 세계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알지 못했던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상상력 사전> pp 6) 

홀든에게는 자신의 내면을 위협하고 있는 세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스스로 극복하고자 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생각없이 달리고 있는 아이들을 지켜줄 수 있는 '호밀밭의 파수꾼' 이 되는 것이다.   이상은 그저 질주하고 있는 13명의 아해들을 무서워할뿐 방관하고 있는 반면에 홀든은 자신과 같은 동등한 상황을 겪게 될 호밀밭에서 놀고 있는 꼬마들을 지켜내고자 한다.   '파수꾼' 으로서의 임무는 홀든에게는 적대적인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면서도 더욱 더 성장해나가기 위한 '홀든 콜필드' 라는 주체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새로운 도전 과정이다.   그래서 홀든 콜필드라는 소년의 성장통은 소설이 발표된 지 50년이 된 지금까지도 수많은 독자들에게 많은 공감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샐린저의 소설이 미국 고등학교와 도서관에서 최고의 금기도서와 최고의 권장도서가 된 것은 역설적이다. 작가는 당초 성인들을 위해 이 소설을 썼지만 전 세계 10대들이 홀든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열광하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사람이 나이가 들고 성장한다는 것은 흔히 세상을 알아간다는 것으로 말한다. 세상살이를 잘 모르는 사람을 철이 없는 어린아이에 비유하기도 한다.  곧 다가오게 될 '어른' 들의 세계에 대한 불안감에서 비롯된 이유 없는 반항과 냉소가 철없던 행동과 생각으로 느껴지면서 어느덧 우리는 나이를 먹어 가는 것이 아닐까?     굳이 홀든처럼 '파수꾼' 이 될 생각은 하지 못하더라도 자신도 모르게  미지의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잊은 채 성장하고 있는 점이야말로 지극히 정상적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마음 속에는 공포와 두려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으로 발을 내딛기 위한 삶의 의욕과 도전 정신이 우리 스스로 발견하지 못하는 곳에 숨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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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1-09-21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년 전에 토론 모임에서 읽었던 건데...많은 주제로 열띤 토론을 했던 기억이 있네요. 기억에 남는 건, 홀든이 되고 싶은 사람이, 낭떠러지 옆에서 사람이 떨어지지 못하도록 하는 캐쳐가 되고 싶다는 거하고....센트럴파크 오리 얘기가 무척 인상적입니다. 택시 운전사에게 홀든이 얘기하던 오리 말이지요..ㅎㅎ
이 책 재밌죠?^^

cyrus 2011-09-23 19:05   좋아요 0 | URL
네, 언제나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면을 볼 수 있어서 좋은 소설인거 같아요.
처음 읽었을 때는 홀든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반복해서 읽게 되니깐
홀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고, 몇 몇 문장들 중에는 감명 깊게 읽었던 것도
있었어요. ^^

아이리시스 2011-09-22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은 속독하는 거예요? 학교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제도권에 반박할 용기도 없던 나는 지독하게 홀든이 되고 싶었지만 그러지도 못했다,와 비슷한 문장으로 예전에 책에 썼었는데. 저도 야무님처럼 학교 때 토론했었어요. 그때 대충 읽고 유럽여행 때 기차와 공원에서 읽는데, 진지하게 읽을 때의 나는 더이상 학생이 아니어서, 딱 한번쯤은 다시 학생이 되고 싶기도 했어요.

홀든은 부조리한 학교를 벗어났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곳은 아무데도 없다는 점에서 여전히 절망적이긴 해도, 파수꾼을 꿈꾸는 일이 여전히 어렵긴 해도, 살아가는 한 방법인 건 맞아요. 그죠?

cyrus 2011-09-23 19:10   좋아요 0 | URL
소설 같은 경우에는 속독하는 편이고요,, 인문사회 역사 같은 경우에는
일주일 정도 걸리더라도 천천히 읽는 편이에요. 아니면 알고 싶은 주제의
내용을 읽을 때는 발췌해서 읽고요. 결국에는 책의 장르에 따라
읽는 속도가 다른거 같아요 ^^;;

아이리시스님도 이 소설을 두 번 이상 읽으셨군요. 저 역시 처음 읽을 때랑
또 다시 읽을 때의 느낌이 달랐어요, 비록 힘들고 절망적인 세상이지만
자신 나름대로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한거 같아요.
며칠 전에 이 소설을 등굣길 버스 안에서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해보기도 했었어요. '파수꾼' 정도는 아니더라도 절망적인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에 대해서요 ^^

루쉰P 2011-09-22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읽고 싶어지네여 ^^ 시루스님의 리뷰를 읽으니 내가 여태껏 호밀밭의 파수꾼을 제대로 안 읽었구나란 생각을 했어요. 오늘 지친 일상을 마치고 잠자리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리뷰를 보는데 시루스님의 리뷰를 읽으며 대 감동에 빠져 스마트폰으로 미친 듯이 댓글을 남기고 있어요. 정말 다시 읽고 싶네요. 전 주인공이 방황 끝에 신뢰한다고 믿을 수 있던 선생님이 그를 성추행하는 장면에서 너무 소름이 끼쳐 이 책을 깊이 보지 못 했거든요. 아 잠자리에 누워 정말 마음 속 깊이 읽었어요

cyrus 2011-09-23 19:12   좋아요 0 | URL
꼭 읽어보셔요. 이 소설은 학생부터 시작해서 어른들까지 세대를 불문하고
많이 읽혀지는 고전이니까요. ^^

사실 저도 처음에는 루쉰님이 언급하신 장면뿐만 아니라 홀든이 욕을 하는
서술 방식에 대해서 거리감이 있었어요. 그런데 반복해서 읽어보니깐
홀든의 모습이 어느새 저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

비로그인 2011-09-25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대학다닐때 일요일마다 책 읽고 얘기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소중했던 시간이었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 다른 생각도 좀 말해보고, 이렇게 인터넷 공간도 좋지만 서로 얘기하면서 내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참 매력이 있다 싶어집니다. 호밀밭의 파수꾼, 길 위에서 같은 소설을 볼 때마다 그 때 생각이 나네요.

요즘 대학가는 더 그런 여유가 없겠죠??

cyrus 2011-09-26 12:55   좋아요 0 | URL
네, 강의실에 만나면 여자 이야기에서부터(^^;;) 연예 뉴스까지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거 같은데,, 막상 생각해보면 살아가는데 도움이 안 되는
대화만 하고 있더라고요 ㅎㅎ 한편으로는 친한 친구들 간에 만남을 통해서
대화를 나눈다는 시간이 즐겁기도 합니다. 그런 시간이야말로 유일하게
누릴 수 있는 여유가 되거든요 ^^
 

    

 

 

 

 

 

 

 

   

 

  * 관련 강의 제목 및 내용 : 관료제론 2주차 강의 (2011.9.14)

  

 

  관료제의 어원  

관료제(官僚制, bureaucracy)는 '천으로 덮인 책상과 사무실' 을 뜻하는 bureau와 '통치' 를 뜻하는 cracy가 합쳐진 단어이다.    이에 따라 관료제는 사무실 안에 있는 책상에 앉아서 업무를 보는 관리들의 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베버의 관료제 모형  

 

 

막스 베버 (1864~1920) 

 

관료제는 예나 지금이나 국가의 행정 업무를 해결하기 위한 주요 수단이다. 현대 국가에서 관리의 특정 직위에 따른 권한은 법으로 정해져 있다. 권한이 인물이 아니라 직위 자체에 부여된다. 행정이 비인격적으로 집행된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관료제를 매우 합리적인 조직 형태로 봤다. 관료제는 현대적 합리성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그는 합리적이고 작업능률을 극대화할 수 있는 조직형태로서 관료제에 대한 이념형을 설정하였다.  (이념형이란 복잡한 사회 현상의 특징이나 모습을 파악하기 위해서 개념적으로 설정된 통일 모형을 의미한다) 

베버의 관료제이론은 지배유형에 따라 관료제의 형태를 분류하고 있으며 이념형의 입장에서 권위의 정당성을 기준으로 지배유형을 나누고 있다.   

 

  (1) 전통적 지배   

  

중세 봉건제도의 구조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정당성의 근거가 과거로부터 존속되어 하나의 전통이나 신념에 입각하여 이루어지는 지배 유형이다.   전통적 지배를 가산적 관료제라고도 한다.  국가가 군주의 사적인 세습재산으로 취급되는 가산국가의 관료제를 말하기도 하는데 우리나라 조선 시대의 관료제나 중세 시대의 봉건제에서 그 전형적 예를 찾아볼 수 있다. 

  

  (2) 카리스마적 지배   

 

히틀러와 무솔리니

  

'카리스마'(charisma)는 본래 크리스트교적 용어로 '은혜', '무상의 선물' 이라는 뜻이다.  즉 성령의 특별한 은혜를 뜻한다.  베버는 이 말의 원뜻을 확대하여 관료제 지배형태 개념으로 확립시켰다.  카리스마적 지배는 개인의 초인적 힘이나 자질에 의해 정당화되는 권위를 말한다. 카리스마적 권위는 장기적으로 계속하여 존재하게 되면 전통적 권위, 즉 전통적 지배(관료제)로 발전된다. 

  

  3) 합법적 지배  

합법적 지배는 제정된 법 질서가 가지는 합법성에 지배, 복종의 근거를 두는 것으로서, 기본적으로는 법의 지배를 의미한다. 이 경우 법질서는 인간의 주체적인 정치적 활동에 의하여 창조되고 변경될 수 있다는 신념이 전제가 되어 있는 것이다.   

 

  

 베버 관료제 모형의 한계  

베버는 합리성을 토대로 관료제 조직의 능률과 객관성, 안정성 등 순기능만 강조했을뿐 관료제의 비공식적, 비합리적인 요소 등의 역기능적 측면을 도외시했다.   

1930년대 미국의 사회학자들은 베버의 관료제 모형이 본질적으로 19세기 말 프러시아 왕조 시대의 정부조직과 군대조직을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어 시대 변화에 따른 관료제에 대한 수정론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조직의 비합리성, 수동적 인간관, 병리적 측면, 폐쇄적인 환경 등 역기능적 내용을 근거로 들어 관료제에도 한계가 있음을 평가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관료제 모형에 대해서 전면적 비판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지휘, 감독 체제의 계층제를 지나치게 중시하며 전문적 관료들의 무능함 등을 비판하고 있다.   1970년대에는 후기관료제(탈 관료제) 모형이 제시되었는데 정태적인 관료제의 변동 대응능력을 탈피한 동태적인 관료제 모형이 대두되었다.   새로운 관료제 모형은 조직에 처한 상황에 다라 조직 내부 구성 변동 능력이 탄력적으로 운용되어진다는 장점이 있다.  

  

 

 양날의 검과 같은 관료제 

관료제는 조직의 목표달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능률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능률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근본적인 요소에는 관료제 특유의 표준화된 규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행되는 활동은 공식적 임무로서 규정에 따라 배당된다.  동시에 같은 임무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명령권 역시 명확하게 할당되어진다.   

하지만 법과 규칙에 의해 엄격하게 표준화된 권위 및 조직 체제의 병리적 측면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올해 초 일어난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응한 일본 정부 관료들의 안일한 태도에서 관료제의 단점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원전을 운용하고 있는 도쿄전력은 원자로의 온도를 낮추기 위한 바닷물 주입 결정을 미루다가 초기의 수습 시기를 놓쳐 버렸다. 정부 관료 조직들의 사고 대응과 관련된 움직임도 늦었다.  총리는 원전 폭발이 발생한 지 1시간이 지나도록 보고를 받지 못했고, 자위대는 원자로 4곳이 손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냉각 작업에 즉각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이런 사태가 발생할 수 있었던 본질적인 이유는 일본 특유 의사결정 방식인 품의제에서 비롯되었다.

품의제란 정부 혹은 기업 관료제의 말단에서 기안된 결재서류가 밑에서부터 계통적 조직 구조를 따라서 순차적으로 상급자에게 회람돼 최종 결재권자에게 도달되는 일본식 의사결정 방식이다.  품의제는 조직 전체 구성원이 권한과 책임을 공유하는 장점이 있지만 단점으로는 위기 상황이 닥치면 신속한 의사결정을 할 수 없고 최고 의사결정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지금 일본 관료들은 ‘아주 열심히 책상 앞에서 문서를 기안하고 있을 것’ 이라고 말한다.

일본의 과도하게 매뉴얼화된 관료제가 대형 사고에 대한 늑장 대응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매뉴얼에 벗어나는 상황이 발생하면 일본의 관료제는 상황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관료제의 폐해와 행정의 경직성과 비효율성을 풍자하여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개그콘서트의 개그 코너 '비상대책위원회'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대규모 정전 사태와 관련한 전력거래소와 지식경제부의 허술한 대응책은 그동안 실체적으로 드러내지 못한 관료제의 역기능에 의해 만들어진 필연적인 사고였다.  

정전 사태가 발생하기 전인 오전 시간대에 전력 수요가 최고조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절전 안내방송이나 정전 예고 조처는 없었다.  전력거래소 규정에는 여유분의 전력이 백만 킬로와트 이하로 떨어질 때 정전 조치를 시행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백49만 킬로와트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단전에 들어갔으며 이에 대해 전력거래소는 상황이 급박해 사전 대처 차원에서 정전 조치를 내렸다고 밝혔다.   매뉴얼에도 없는 급박한 상황에 따른 대응책이였지만 과잉대응에 대한 지식경제부 보고는 늦었다.  

일본이 두 번이나 핵폭탄을 맞은 채 패전을 극복하고 선진국으로 급성정한 것도 관료들의 역할이 컸던 게 사실이다. 최악의 자연재해가 발생하기 전까지 일본이 지진과 원전 안전신화를 자랑할 수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매뉴얼에 따라 사회 시스템을 적절히 관리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일본 사회는 이번 사태를 통해 매뉴얼에만 의존하는 관료주의의 폐해가 어떤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체험했다. 관료주의 병폐 극복이라는 또 하나의 사회적 현실에 직면해 있는 셈이다.    

지금 우리나라도 국회에서 최악의 정전 사태의 위기대응에서 드러난 총제적 부실에 대해서 정부, 지식경제부, 관련 전력회사들에 대해서 책임을 추궁하고 있다.  단순히 '네가 ~식으로 했으니 네가 제일 잘못했다' 식으로 개인의 역량을 이유로 들어 책임을 추궁하는 것보다는 본질적으로 최악의 사태를 야기시킨 조직 운영 과정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나무 한 그루만 보는게 아니라 각각의 나무들로 구성된 숲도 봐야하듯이 조직구성원 개개인의 책임에만 보는 것보다는 그런 구성원들을 움직이게끔 하고 있는 조직 형태의 문제점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번 정전사태를 통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한 능률적인 전력 관리에도 힘써야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우리 사회를 이루고 있는 관료제도의 역기능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반면교사로 삼았으면 좋겠다.

  

   

 

* 관련자료  

[일본 관료병] 양기웅, 문화일보 칼럼, 2011년 3월 25일  

 

* 사진출처 

http://cafe.naver.com/pape7001.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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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1 0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1 16: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1-09-21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악!! 저 오늘부터 행정학 공부해요, 시루스님. 좀 싫어하는 과목인데(양에 질리고 학자이름에 질리고 이론에 질리고) 시루스님 생각하면서 해볼까 해요. 진짜 싫은데 좋은 척 하고 있는 거예요.ㅎㅎㅎ

관료제론,이라니. 흐흐흐흐흑.

cyrus 2011-09-21 16:21   좋아요 0 | URL
저 지금 공강이라 이웃분들 서재 방문하고 있었는데 ㅋㅋㅋㅋ
하필 오늘 저녁에 관료제론 수업이 있어요.. 내용이 관료제론이다보니,,
수업이 좀 지루하긴 해요.. ^^;;


노이에자이트 2011-09-23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료제 배울 때 '과두제의 철칙'이나 '엘리트 이론'도 배우나요?

cyrus 2011-09-23 19:13   좋아요 0 | URL
'엘리트 이론' 은 아직 안 배웠고요,, 이틀전 관료제론 수업 때
잠깐 과두제의 철칙은 언급되었어요. 이번 주까지는 관료제에 대한
기초적인 부분을 프린터로 공부하는 중이라서 다음주부터는 본격적으로
교재 내용 수업에 들어가게 되요.

노이에자이트 2011-09-23 23:51   좋아요 0 | URL
이 분야는 정치학 사회학 행정학이 함께 다루는 것 같아요.

cyrus 2011-09-24 20:27   좋아요 0 | URL
지금 제가 다니고 학교 행정학과에 신설된 과목 중에는
정치학과 경영학 영역의 비중이 크답니다.
제가 이번 학기 때 듣는 과목이 정치학이 있고요,,
그리고 경영학과 조금 관련이 있는게 인사행정학입니다.
정치학의 영역이랑 가까운 과목이 정책학이고요..
심지어 행정철학이라는 과목도 있답니다. ^^;;

노이에자이트 2011-09-24 22:34   좋아요 0 | URL
철학 앞에 다른 분과학문을 붙여놓은 게 많죠.경영철학 역사철학 사회철학 정치철학 과학철학 비교철학 등등...그러고 보니 사회학도 그러네요.경제사회학 역사사회학 체육사회학 법사회학 등 등...

행정학은 응용학문적 성격이 강하니까 법학 정치학 사회학 경영학 재정학의 여러 분야를 많이 도입한 것 같습니다.

cyrus 2011-09-24 22:57   좋아요 0 | URL
그래서 응용학문적 성격이 강하다보니 행정학이 지금까지도 연구가들 사이에서는 학문적 주체성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고 하네요.

행정학의 발달 기원으로 따져본다면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행정학을 법학에서 분리된 것으로 많이 보고 있답니다.
행정학이라는 학문을 처음으로 독립적으로 연구한 사람이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에요. 그가 행정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당시 법학 교수였고요.

제가 배우고 있는 수강과목 중에는 행정통제와 개혁이라는 과목이 있는데
밀의 공리주의, 로크, 루소의 사회계약설이 잠깐이마나 언급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제가 배우고 있는 내용이 진정 행정학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호하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양한 학문의 내용들을 겸해서
공부할 수 있어서 좋은거 같습니다. 행정학을 통해서 정치학,
경영학, 법학, 사회학의 주요 내용들도 같이 알 수 있거든요,

그런데 요즘 행정학이라고 하면 공무원을 되기 위한 암기식 과목으로만 생각하고
있으니,, 그 점에서 좀 아쉽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