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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전환 -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 ㅣ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8
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 길(도서출판) / 2009년 7월
평점 :
자본주의 4.0의 등장
요즘 조선일보에서 특집기사로 연재하고 있는 '자본주의 4.0' 이 화제다. '자본주의4.0' 이란 소프트웨어 버전처럼 진화단계에 따라 숫자를 붙일 때 네 번째에 해당하는 자본주의라는 뜻이다.
자본주의 1.0은 '보이지 않는 손' 을 주장한 애덤 스미스로 대표되는 자유방임의 고전자본주의 시대를, 자본주의 2.0은 1930년대 정부의 역할을 강조한 케인즈의 수정자본주의, 자본주의 3.0은 1970년대 시장의 자율을 강조한 신자유주의 시대를 말한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자본주의의 모순과 병페적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대안이 바로 '자본주의 4.0' 이다.
자본주의 4.0은 그동안 빈부격차를 등한시한 이전 구식 자본주의 버전(?)들과 차원이 다르다. 시장의 기능을 존중하고 선두에 선 대기업이 더 큰 성공으로 나아가도록 하되, 중소기업에도 공정한 기회를 제공해 성공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
조선일보의 자본주의 4.0 특집 연재 이후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자본주의 4.0의 실체와 자본주의 시대 규정에 대해서 많은 찬반 논란의 양상을 펼치고 있다. 더구나 그동안 시장경제주의를 옹호하던 보수 성향의 조선일보가 진보 성향의 언론에서나 언급할 수 있는 '따뜻한' 자본주의를 특집 편성을 하면서까지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진보 성향의 전문가들에게는 '자본주의 4.0' 의 정체성과 실효성 여부에 대해서 그냥 짚고 넘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자본주의 4.0' 이 이전의 자본주의의 시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대안이 될 것인지 아니면 그저 겉멋든 보수 언론의 '위선' 에 불과한 관념적인 이론으로 남게 될지 전문가와 독자들 사이에서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
시장경제주의 기능이 강조되는 자본주의의 병폐적 현상을 극복하자는 취지는 좋으나 자본주의 4.0에서 강조되는 내용들은 자본주의 극복방안으로 대안으로 그동안 줄곧 제시되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을 비추어 볼 때 '자본주의 4.0' 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처럼 강조하는 것은 시기상조인거 같다. 그리고 숫자를 붙여서 '게임 시리즈 버전' 처럼 구분하고 있는 조선일보의 자본주의 시대 구분 방법은 기존에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자본주의 분류 방식을 답습하고 있을 뿐 전혀 새롭지가 않다. 일반적으로 중, 고등학교에서는 '애덤 스미스의 고전적 자본주의→케인즈의 수정자본주의→대처와 레이건의 신자유주의' 라는 형식으로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도식적 분류에 근거한 자본주의 4.0을 홍보하기 전에 따뜻하지 않은, 특히 빈곤층이나 노동자,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냉소적' 으로 대하는 한국 특유의 자본주의 사회 현상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먼저 진단하고 개선하는 것이 최우선인거 같다. 무엇보다도 시장의 기능이야말로 개인들의 욕망을 보듬어서 가장 조화롭고 아름다운 선택을 이끌어내 풍요로운 부를 가져다분다는 시장지상주의자들의 달콤한 속삭임에서 벗어나는 발상의 '전환' 이 필요하다.
시장경제의 유토피아적 망상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 마디로 완전히 유토피아이다. 그런 제도는 아주 잠시도 존재할 수가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게 되어 있다. 인간은 그야말로 신체적으로 파괴당할 것이며 삶의 환경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94쪽)
자기조정 기능으로 작동되는 시장자본주의는 오로지 시장가격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경제다. 그러나 폴라니는 시장자본주의가 말하는 자기조정 기능이라는 것은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에 의해서는 절대로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곧 국가 개입의 불가피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없는 경제란 있을 수 없고, 또 그런 경제는 역사상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애담 스미스가 언급한 이윤을 추구하는 인간이 원시시대부터 존재했다는 가설에도 반기를 든다. 폴라니는 스미스가 <국부론>을 쓴 1776년을 자본주의의 원년으로 보지 않는다. 1834년의 스피넘랜드법(빈민구제법)의 폐지에 따라 인민들이 먹고 살 길은 임금노동으로만 가능하게 되고 노동시장의 형성과 함께 ‘자기조정 시장 ’ 이 완성돼 현재의 자본주의가 도래했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가 결코 시장경제 자체를 철폐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아담 스미스가 제창한 '보이지 않는 손' 에 의한 시장의 합리적 질서 또는 하이에크의 자기조정적 시장 기능에 동의하지 않고, 시장경제란 시장만능주의자들이 신봉하는 '유토피아' 일 뿐이라고 갈파한다. 또한 그는 화폐, 토지, 노동 등을 다른 생산물과는 다른 허구적 재화라고 칭하면서, 이들 재화가 지나치게 그 힘을 발휘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위기를 촉발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나 케인즈처럼 시장경제의 비인간성, 비합리성을 지적하기보다는 시장경제 자체가 현실과 괴리된 망상이라는 점을 밝히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이른바 자기조정적 시장의 논리는 국가를 배제할 뿐더러 시장이 힘을 가지면 가질수록 국가와 사회는 시장에 복속된다고 보았다. 이는 결국 인간의 자유와 이상, 희망을 파괴하고 그 결과는 참담할 수밖에 없다고 간파하였다.
폴라니는 이런 현상을 피하려면 마르크스식의 시장 부정도 아니요, 케인즈식의 국가 개입도 적절치 않으며 '사회'라는 실체를 제대로 살리는 것이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즉 국가나 시장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의 역할에 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시장 확장은 국가의 의도적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고, 국가 역시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생성된 것이어서 ‘사회’ 가 더 높은 차원의 제도라는 의미이다.
폴라니가 원하는 '사회' 는 인간의 자유와 가치를 분명히 하고, 국가와 시장을 인간의 존엄에 복무할 수 있는 자유로운 세상이다. 국가와 시장이 아닌 사회 속의 노동조합, 지자체, 소비자·생산자 조합 등 다양한 인간 집단 사이의 내부적 의사소통과 연대를 강조한다. 이들 사이의 대화와 이해, 관계망은 핵심요소다.
'악마의 맷돌' 로 작동되는 시장경제
폴라니는 이 책에서 시장경제를 '악마의 맷돌(Satanic Mills)' 이라고 불렀다. 시장경제의 거짓 신화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시장의 미신에 빠져 타인에 대한 보살핌을 저버릴 때 인간이 얼마나 비참해지는지를 보여준다. 가령 노동력을 기업을 이끄는 부르주아 마음대로 처리하면 그것을 담고 있는 인간의 육체적, 심리적 실체마저 하나의 소유물로 사회변화에 노출되어 희생되고, 자연은 오염되고 파괴된다.
그의 말대로라면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이익에만 찾으라고 가르치는 우리의 자녀 교육법은 '신자유주의' 가 만들어낸 시장경제의 주술이 빚어낸 서글픈 환각이다. 상품이 될 수 없는 것,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한 분별력을 차츰 잃어가면서 우리는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부터 자꾸 멀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경제는 시장이 아니라 사회적 제약에 좌우됐다고 보는 칼라니는 시장경제의 재앙 또한 경제를 다시 사회적 통제 안에 가두어 둠으로써만 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최근의 세계경제는 경제위기가 다시 거론되고 있는 풍전등화로 치닫는 형국이다. 그런데 아직 경제적 이윤을 따지기 좋아하는 몇몇 호모 에코노미쿠스들은 '악마의 맷돌'을 내던지기보다 보다 더 잘 돌릴 수 준비에만 여념이 없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