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의 정원
랄프 스키 지음, 공경희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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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만들어 낸 작은 천국, 정원

세상에 천국이 있다면 어딜까. 철따라 수많은 빛깔의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고, 사시사철 젖과 꿀이 흐르고, 온갖 종류의 새가 노래하며 아름다운 음악이 들리고 향기로운 바람이 불어오고, 풍요와 사랑이 넘치는 낙원의 땅 천국은 인간들에게는 꿈의 이상향과 같은 곳이다. 그래서 천국은 낙원의 동의어로 이해되고 있다. 인간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꼭 천국으로 가기를 동경한다. 하지만 우리가 죽어서 혼이 되어 소원대로 천국에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먼저 이승을 떠난 이들이 천국으로 무사히 안착되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어쩌면 천국이라는 낙원은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는 가상 공간일지도 모르겠다.  

기독교에서는 참된 신자가 죽은 후 그 영혼이 가서 영원한 축복을 누리는 장소가 천국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반드시 사후의 세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지배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곳을 말하며, 현세에도, 또 인간의 마음속에도 존재한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천국은 꼭 인간의 삶과 동떨어진 상상의 공간에 불과한 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 삶의 주변을 둘러본다면 '천국'이라는 단어를 수식어로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장소가 많이 있다.

우리는 훌륭한 자연 경관을 보게 된다면 '천국에 온 기분이 든다'라는 감탄사를 연발한다. 많은 이들이 찬사를 마다하지 않는 자연 경관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인간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만들어낸 멋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일부 몇 몇 인간들 중에는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오랫동안 만끽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자연이 만들어 낸 아름다움을 원본 그대로 완벽하게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위해서 인간이 발명한 것이 바로 '정원'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취향에 맞게 돌, 물, 꽃, 나무 등의 자연재료를 통해 미적인 구역을 만들기 시작했다. 비록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만들어낸 경관과 비교하기에는 부족한, 인공적인 공간에 불과하지만 정원 한 가득 차 있는 세상의 온갖 색으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만가지 꽃들의 아름다움과 각각의 존재감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안정시켜주기에 충분하다. 정원이 딸린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곳이야말로 자신을 위한 '작은 천국'인 셈이다.  

 
 

 고흐의 정원을 아십니까?

자연이 만들어 낸 아름다움이 묻어나 있는 정원은 세상의 모든 것을 표현하고자 했던 화가들에게는 자신의 예술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아틀리에(atelier)인 동시에 삶의 일부에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지상의 천국’이었다. 프랑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는 죽기 전까지 지베르니의 정원에서 수많은 그림들을 탄생시켰다.  

  

 

 클로드 모네  <수련>  1916~1922년경 

 

   
  모네가 그린 정원의 풍경과 우명한 <수련> 연작은 대부분 지베르니 정원에서 탄생된 작품들이다. 모네는 부인과 자녀들을 무척 사랑하게 여길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그 다음으로 모네가 좋아했던 것이라면 바로 지베르니 정원일 것이다.  
   

  
그에게는 지베르니의 정원은 단순히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그림을 그려낼 수 있는 예술적 영감의 장소 그 이상이었다. “내 그림과 꽃 이외에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없다.” 라고 말할 정도로 모네라는 사람을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진, 자신만의 개인적인 공간인 것이었다. 자신의 가족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모네에게 정원은 아내와 자식 다음으로 가장 사랑했던 대상이었으리라. 모네가 세상을 떠난 지 80여 년이 지난 지금, 모네의 정원 지베르니는 후세의 예술가와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위대한 명소가 되었다. 모네는 우리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감상하는 법’을 이 정원에 남겨놓고 갔던 것이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화가들 중에는 모네처럼 정원을 열광적으로 사랑했으며 정원의 아름다움을 한 폭의 캔버스에 담고자 하였다. 특히 모네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인상파 화가들 같은 경우에는 공통적으로 정원의 모습을 그린 그림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자연을 하나의 색채현상으로 보고,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고자 했다. 인상파 화가들에게는 사계절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는 정원의 풍경이야말로 자신들이 추구하는 예술을 구현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  <귀가 잘린 자화상>  1888년 

 

인상파 화가들 중에는 모네처럼 정원이 딸린 집을 마련해서 그 곳에서 창작 활동을 펼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반대로 정원을 소유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원의 풍경을 사랑했고, 그것을 표현한 화가도 있었다. 그가 바로 ‘해바라기’ 연작으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다. 지금까지도 고흐가 남긴 작품들을 본다면 ‘해바라기’ 연작 이외에도 고달픈 일상을 끝내고 어두운 방 안에서 감자를 먹는 소시민들,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듯이 역동적으로 그려낸 별이 빛나는 밤 그리고 자살하기 직전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밀밭까지 고흐라는 이름은 잘 몰라도 그의 그림을 한 번 보는 순간, 영원히 잊혀버릴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가 모네처럼 정원을 무척 사랑했으며 600여 점이 넘는 작품들 중에 정원의 풍경을 그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더군다나 외로운 독학이 만들어 낸 자신만의 예술적 능력과 지향하고자 하는 미적 가치가 다르면 분을 참지 못할 정도로 외고집이 강했던 그의 인상을 생각한다면 안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정원을 연관시킨다면 대조적인 느낌이 떠오른다. 특히 그는 자신의 고향인 네덜란드에만 정착했던 것이 아니라 영국에서부터 프랑스 파리, 프로방스, 아를, 뉘에넨, 오베르까지 한 곳에 머무르는 생활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오랜 방황이 만들어 낸 방랑 생활 그리고 발작과 정신병으로 인한 병원 생활이 고흐의 인생 중 절반을 차지했다. 당연히 고흐에게는 모네처럼 정원을 딸린 집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흐가 정원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고흐는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 준데르트에서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목사가 꿈이었던 그는 성격 부조화로 전도와 설교를 버리고 화랑점원 일을 시작하지만 사랑의 실패와 아버지와의 불화로 젊은 생을 방황하다가 동생 테오의 권유로 그의 나이 30이 되어서야 늦게 그림을 시작한다. 정식 미술교육도 받지 않고 그림도 어려서 일찍 시작한 것도 아니었지만 고흐는 렘브란트, 야곱 반 로이스달, 장 프랑수아 밀레 등 선대의 화가들의 그림을 독학으로 공부하면서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들을 그려냈다.

그러나 화가로서의, 아니 고흐라는 이름을 가진 사나이의 인생은 무척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다. 고흐는 37세라는 짧은 인생을 살면서 몇 명의 여자들에게 자신의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좋아하는 감정을 고백해보지만 연애로 결실을 맺어본 적이 없었다. 방황 속에서 혼란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있는 고흐를 아껴주고 이해해주실 줄만 알았던 부모님조차도 고흐의 괴팍한 성격과 예측할 수 없는 행보를 탐탁하지 않게 여겼다. 특히 자신처럼 목사의 길로 가길 원했던 아버지로서는 화가로 전향하여 한 곳에 정착된 생활을 하지도 못하고 있는 가난한 아들의 모습에 무척 실망스러웠다. 그나마 가족 중에서 고흐의 심정을 너그러이 이해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동생 테오 밖에 없었다.    

 

 빈센트 반 고흐  <병원 안뜰> (아를 요양원 정원)  1889년 

(<반 고흐의 정원> pp 74)

 

외곬인데다가 조울증에 가까울 정도로 상대하기가 까다로운 고흐의 성격상 그 누구도 그와 친해지려는 사람이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신 발작까지 일으키게 되면서 주변 사람들은 고흐를 더욱 멀리하기 시작했다. 고흐는 차라리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고, 자신의 성격에 조롱하거나 멸시하지 이들이 살지 않는 정신병원과 요양원에서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다. 프랑스 아를에서 정신 발작을 일으킨 빈센트 반 고흐는 1889년, 생레미라는 지방에 위치한 정신병자들이 모인 요양원에 자진 입원한다. 오랫동안 방황으로 인해 바람 잘 날이 없었던 생의 의지를 다잡기 위한 것이었다. 요양원에 도착한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 “(요양원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방식으로 미치거나 정신 나간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병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를 잊어버리고 있다”고 썼을 정도였다. 

열악하기 짝이 없는 정신병원과 요양원 생활은 고흐의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가두어 버릴 정도로 거의 지옥에 가까웠다. 더욱이 불시에 그를 습격하는 발작은 고흐에게는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불청객이었다. 하지만 고흐는 간간히 정신이 온전히 들 때 그림을 그리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특히 병원과 요양소 안에 위치한 정원을 그리는 것이 고흐에게는 유일한 낙이었다. 오랫동안 병원과 요양소에서 생활한 환자들에게는 병원의 정원마저도 그저 지루하고 따분한 공간에 불과했지만 외출마저도 할 수도 없는 고흐는 자신이 지내고 있는 감옥 같은 방의 작은 창문을 통해서라고 정원의 모습을 한 폭의 캔버스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비록 자신이 소유한 정원은 아니었지만 고흐는 꽃과 나무가 있는 곳이라면 언제든지 그림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거대한 밭과 수풀이 자라고 있는 오베르의 전원적인 풍경에서부터 고흐와 친분을 유지했던 가셰 박사의 집 안 있는 작은 정원까지, 그가 남긴 수많은 데생과 유화 작품들 중에는 꽃과 나무를 그린 것들이 많다. 

 

  

빈센트 반 고흐  <정원에 있는 마르게리트 가셰>  1890년 

 (pp 96~97)  

   
 

가셰 박사는 고흐의 정신 질환 치료를 담당하는 의사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그 누구도 알아주지 못했던 고흐의 예술을 인정해준 고흐에게는 몇 안 되는 친분적인 인맥 중의 한 사람이다. 고흐 역시 자신을 호의적으로 대해주는 가셰 박사를 위해서 몇 점의 초상화를 남기기도 했다. 가셰 박사의 집에 있는 정원의 풍경을 그린 적도 있는데, 마르게리트는 가셰 박사의 딸이다.

 
   

 

무엇이 고흐를 정원의 풍경에 매료되도록 했던 것일까. 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일부 내용에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고흐에게 정원은 지옥 같은 삶에 숨통을 트일 수 있는 생의 의지를 불어넣어 주는 활력소인 동시에 자신만의 ‘천국’이었던 것이다. 

“ 이제 나는 자연 앞에서 예전처럼 그렇게 무기력하지 않다. ”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 1881월 중순, pp 33)


정원은 사람의 손길이 거친 인위적인 자연의 공간이지만 고흐는 정원이라는 특정 공간 속에서도 사람들이 찾지 못했던 정원 특유의 아름다움을 포착하였다. 그에게는 정원은 자연의 모습을 탐구하기에는 적당한 장소였다. 정원은 도시처럼 소란스럽지 않으며 인적이 드문 조용한 곳이다. 그 어느 누구도 고흐의 그림 작업을 방해하지 않았고 자신의 모습에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만나지 않아도 되었다. 고흐는 꽃과 나무로 이루어진 정원에서만큼은 안정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 이 정원이 나를 꿈꾸게 합니다 '

고흐는 정원을 단순히 그림을 편안하게 그릴 수 있는 평온한 공간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정원에서 자라나는 꽃과 나무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자연이라는 조화로운 현상은 오랫동안 잊혀진, 그리고 고흐가 그토록 찾고 싶었던 따사로운 유년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주게 만들었다.   

 

 

빈센트 반 고흐  <에텐 정원을 회상하며>  1888년  

(pp 44~45)

   
  정원을 대상으로 그린 고흐의 그림 중 유일하게 상상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그림의 왼쪽에는 고흐의 누이와 어머니이며 오른쪽에는 하녀가 정원을 가꾸고 있다. 고흐는 캔버스에 칠해진 보라색과 노란색이 어머니의 성격을 상징한다고 믿었다. 이 그림을 통해서 그는 단순히 정원에서 노닐던 기억을 회상한 것이 아니라 유년 시절, 포근하고 따뜻했던 어머니와의 관계를 그림으로나마 기억하고 싶어 했다.  
   

 

어린 시절의 고흐가 지낸 준데르트 지방에 위치한 목사관에는 정원이 있었다. 고흐의 어머니는 고흐와 그 밖의 자녀들이 집 근처의 정원에서 마음껏 뛰어 놀게 하는 것이 자녀들에게 안전한 장소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고흐는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그곳에서 테오를 포함한 다섯 동생들과 함께 어울려 노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리고 정원에서 자라나는 꽃과 나무를 보는 것만으로도 어린 고흐에게는 자연은 재미있는 장난감인 동시에 예술적 상상력을 자아내는 대상이었다. 심각한 발작과 정신 질환 속에서도 고흐는 목사관의 정원의 모습 그리고 그 곳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추억까지 영원히 잊지 않았다.


“ 병을 앓으면서 다시 준데르트에 있는 집의 모든 방을 보았단다. 정원의 오솔길, 화초, 주변 풍경, 들판, 이웃, 묘지, 교회, 집 뒤쪽 텃밭, 묘지의 키 큰 아카시아나무에 튼 까치 둥지까지. ”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 1889년 1월, pp 15~16)


 

  

 

빈센트 반 고흐  <도비니의 정원>  1890년 

(pp 104)

 

자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외곬 성격인데다가 때때로 찾아오는 정신적 발작으로 괴로워야했던 고흐에게는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우러나오는 정(情)을 그리워했으리라. 그런 허기진 애정 결핍은 정원을 통해서 행복했던 유년 시절의 추억까지 회상하기에 이르면서 혼자서 외롭게 고독을 달래보려고 했다. 고흐에게는 정원은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집이며 정원에서 자라나는 꽃과 나무들이 자신의 고독한 심정을 이해해줄 수 있는 친구이자, 애인이며 그리고 가족이었다. 개인 정원은 아니었지만 그는 따뜻한 정이 오고가는 대화를 나누는 가족과 같은 삶을 꿈꾸려고 했고 어린 시절의 잃어버린 정원의 모습을 망각의 틈바구니 속에서 찾으려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살로 짧은 인생을 마감함으로써 고흐의 꿈은 이루어질 수 없었지만 정원 속에서 행복했던 시절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고흐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는 안락한 지상낙원이었다. 

   

 


 '꽃'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고흐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가 있는 채마밭> (부분)  1887년 

   (pp 15)

 

동생 테오와 닥터 가셰, 우체부 직원 룰랭이 고흐에게는 그나마 친분이 유지할 수 있었던 인물들이었지만 고흐에게는 그들과의 관계만으로도 ‘밑 빠진 항아리’와 같은 애정 결핍을 채울 수가 없었다. 자살하기 전까지 수많은 편지를 교류함으로서 형제애를 돈독히 유지했던 동생 테오의 자화상을 단 한 점 그리지 않는 대신에 정원의 모습을 수십 점이나 그려낸 고흐의 창작 활동을 본다면 얼굴 한 번 제대로 보기 힘들 정도로 자신과 떨어져 지내는 동생보다는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정원에서 피어나는 말 못하는 꽃들이야말로 고흐에게는 친숙한 존재였을 것이다. 고흐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장소에는 그 장소 특유의 환경적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릴 때는 인습적인 기법보다는 ‘자연의 언어’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계절에 따라 변화되는 자연의 모습을 표현하는 데 강조하였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는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김춘수 <꽃> 중에서 -



 

김춘수 시인이 쓴 시구처럼 고흐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나게 해주는 정원 속의 꽃들을 동경의 대상으로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자신도 꽃처럼 누군가 ‘빈센트 반 고흐’라는 이름을 불러주기를 원했으며 ‘화가’라는 의미 있는 존재로서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를 갈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의미 있는 존재로 알아준 것은 오히려 고흐가 동경하면서도 행복한 기억들을 꿈꾸고자 했던 정원 속의 꽃들이었다. 해바라기 그리고 정원 속 꽃과 나무의 모습을 담아낸 그의 그림들은 ‘빈센트 반 고흐’라는 이름을 위대한 화가의 반열에 올려주었다. 또한 고독한 예술가의 인생을 기억해주는 음악까지도 나오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고흐가 사랑했던 정원의 모습은 많이 변했고 이제는 고흐의 흔적을 느낄 수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고흐’라는 이름의 꽃은 시들지 않았다. 죽은 뒤에서나마 후대 사람들로부터 한 폭의 캔버스로 ‘자연의 언어’를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예술적 염원이 인정받게 됨으로써 예술계에서 절대로 지지 않는 위대한 ‘꽃’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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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11-29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네의 수련 저 그림이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 첫 장면으로 나오더라고요. 진짜 아름다웠어요. 그림만큼이나. 저는 고흐의 해바라기 좋아해요. 정말 오랫동안 좋아했는데 요즘은 그림이 그림이고, 나는 나이고. 암스테르담의 우중충한 거리가 생각나서 예전 사진을 들여다봤더니 렘브란트 미술관에도 갔더라고요. 그래서 렘브란트 다큐 찾아보고.. 요즘 그런 식. 뭔가 많이 공허해요.

cyrus 2011-11-30 23:43   좋아요 0 | URL
저도 고흐의 해바라기 좋아해요, 사실 고흐는 해바라기뿐만 아니라
꽤 많은 꽃과 나무들도 그렸더군요. 특히 아이리스를 그린 그림도 좋았고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아이리시스님의 공허한 마음을 달래줄 수 있습니까? ^^;;
어제는 날씨가 좋다가 오늘은 갑자기 비가 내려서 그런지
오늘따라 옆구리가 많이 춥더군요 ^^;;

꽃도둑 2011-11-29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수없이 보아왔지만 오늘 새삼
<병원 안뜰> 아를 요양원 정원이 새롭게 다가오네요. 너무 섬세하고 아름다운 색으로
넘쳐나요,. 저렇게 따뜻할 수가 있다니...

지금 고흐는 뭘하고 있을까요?
자신이 그리워하던 정원에서 거닐고 있을런지도...^^

cyrus 2011-11-30 23:44   좋아요 0 | URL
요양소나 병원 내부라면 먼저 쓸쓸한 분위기가 나기 마련인데
고흐가 그린 병원은 꽃과 나무가 있는 정원을 표현해서 그런지
꽃도둑님에게는 마음이 드셨는가보군요. ^^

맥거핀 2011-11-29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과 그림에 한편으로는 마음이 좋아지면서도, 사실 솔직히 말해서 잘 정돈된 정원을 보면, 누군가는 저거 관리한다고 고생좀 했겠네, 이 생각부터 먼저 드니, 이거 문제가 좀 있지요? (때로는 너무 잘 정돈된 정원을 보면, 이상한 공포심마저 들 때가 있어요.^^;) 아무튼 그림은 좋네요. 특히 <도비니의 정원>이라는 그림이 아주 좋네요.

cyrus 2011-11-30 23:46   좋아요 0 | URL
ㅎㅎ 맞아요, 정원 가꾸는 것도 쉬운게 아니죠.
저는 어렸을 때 정원 딸린 집을 가진 것이 꿈이었는데,, 식물 하나
가꾸는 것도 쉽지가 않더군요. 물 잘 줘야되죠, 햇빛 조절도
잘 해야되고,, 하여튼 관리해야될 게 많아서 수많은 식물이 자라는
정원을 관리한다는 것은 정말 부지런하고 식물을 사랑하느 사람만이
가능할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
 
다산어록청상 푸르메 어록
정민 지음 / 푸르메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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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투 한 벌을 지키고자 했던 러시아의 관리  

 

 

 

영하 40도를 오고가는 혹한기가 이어지고 있는, 사람 인적이 드문 한밤중에 러시아 뻬쩨르부르그의 거리에는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유령이 떠돌고 있다.  

아까끼라는 이름의 유령은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특별한 요구를 하는 것으로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특히 눈보라가 몰아치는 새벽에 문제의 거리를 지나가게 된다면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까끼를 만날 수 있다. 유령 아까끼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깃을 잡아채며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면서 요구를 한다. 

    " 난 네놈의 외투가 필요해!"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존재를 마추친 사람들은 당연히 기겁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유령은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지 않았다. 그저 외투가 필요하다고 고통스럽게 호소할 뿐이었다. 유령 아까끼는 왜 저승으로 떠나지 못한 채 외투 한 벌을 찾는 데 뻬쩨르부르그를 배회하고 있던 것일까?  

아까끼는 죽기 전에는 관청에 근무했던 하급 관리였다. 비록 처세 능력이 부족한데다 비천한 신분 때문에 관리직으로서 많은 급료를 벌어들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맡은 임무에 성실히 수행하면서 관리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근검절약을 하면서까지 관리 생활을 하면서 얻은 수입으로 화려한 외투 한 벌을 마련하게 된다. 평생동안 낡은 외투만 입고 지낸 아까끼는 오랫동안 모아놓은 수입으로 구입한 새 외투 한 벌이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수많은 관리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연회에 참석할 때에도 새로 장만한 외투를 입고 나타나 그동안 하급 관리라는 직함 때문에 드러나지 못했던 자신의 존재감을 마음껏 뽐내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아까끼에게는 새 외투를 입고 있는 순간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까끼의 행복한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연회에 참석하고 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강도에게 새 외투를 도둑맞게 되었다. 그는 거리에 보초를 서고 있는 경찰들 심지어 상급 관리까지 찾아가 외투를 도둑맞은 자신의 사연을 알렸다. 하지만 이들은 외투 한 벌을 도둑맞은 하급 관리의 사연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의 슬픈 사연이 외면당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아까끼는 그 충격으로 심한 독감에 걸리고 말았다. 러시아 특유의 겨울 날씨를 이겨내지 못한 채 외투를 찾고 싶어했던 아까끼는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이후 뻬쩨르부르그에는 자신의 외투를 찾아 달라고 호소하는 유령이 떠돌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외투를 찾지 못한 채 주위의 조롱 속에서 죽어 간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였다. 

 

    

 왕의 남자였다가 하루아침에 유배객이 된 조선의 관리  

 

  

다산 정약용 (1762~1836) 

 

1762년, 명망 있는 벼슬 집안에서 태어난 다산 정약용은 어릴 적부터 영특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4세에 이미 천자문을 익혔고, 7세에 한시를 짓기 시작했다. 다산은 한창 젋은 20세부터 본격적으로 입신(入身)의 생활을 하기 시작했는데 28세의 나이에 벼슬에 올라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펼쳤다. 거기에다가 그 당시 임금이었던 정조에게 인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관료생활은 탄탄대로였다. 정조의 지극한 총애 덕분에 정약용은 대왕의 최측근 관료로서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나 관리로서의 부귀영화는 한순간에 바닷가의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정조가 승하하고 난 후에 터진 천주교를 박해한 신유사화(辛酉士禍)에 연루되면서 천주교도인이 많았던 정약용 가문은 한순간에 풍비박산나게 되었다. 다행히도 다산은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이 때부터 기나긴 유배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전라남도 강진에서의 유배 생활이 무려 18년 동안이나 이어질 줄은 다산 본인은 예감하고 있었을까? 한순간에 부귀영화를 잃어버린 그에게는 강진에서의 유배생활은 무척 고통스럽고 보고 싶은 가족을 만날 수가 없었던 외로운 시기였지만 후세 학자들에게는 실학 사상이 완성될 수 있었던 다양한 분야의 학문이 다산(多産)할 수 있었던 위대한 시기였다.  

 

 

 조선의 관리가 러시아의 관리에게 해줄 수 있는 충언   

다산은 유배 생활을 지내는 동안 퇴계 이 의 글이 실린 <퇴계집>을 읽으면서 얻게 된 느낌을 단상으로 하루에 한 편씩 기록하였다. 기록의 결과물은 지금의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이라는 이름의 저작으로 남게 되었다. 말 그대로 <퇴계집>을 읽으면서 느낀 맑은 생각들을 기록한, 다산 본인을 위한 개인적인 문집인 것이다. 

책 제목의 '청상(淸賞)'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산의 맑은 생각들은 현대인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삶의 자세 전반에 대한 성찰과 충고를 담고 있다. 다산의 <도산사숙록>에는 인생의 대선배로써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의 체험에서 깨닫거나 성찰 뒤에 얻게 된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다. 

책에 수록된 몇 몇 단상들 중에는 고골의 소설에 등장하는 하급 관리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에게도 충언을 해봄직할만한 내용이 있다. 비록 태어난 곳과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다르지만 관료 경험을 따져본다면 다산이 훨씬 선배격인 셈이다. 그리고 다산은 대왕의 총애를 듬뿍 받을 정도로 고급 관리로써 화려한 명예를 누려 본 적도 있다. 말단 하급 관리로 지낸 아까끼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경력을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도산사숙록>에서의 다산의 모습은 과거의 부귀영화를 회상하여 자랑을 한다거나 그 때의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고 있다. 화려했던 관리로써의 부귀영화 시절은 다산의 인생에서는 그저 지나가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기나긴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다산은 많은 것을 깨달았다. 한 때 누리고자 했던 부와 명예는 한순간의 욕심일 뿐이며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달라지는 순간 자신에게 굽실거렸던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다산은 보고, 느꼈던 것이다.  

'밤 한 톨'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단상에서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대상이 상실된 후 겪게 되는 인간의 상반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밤 한 톨을 도둑맞은 어린아이의 심정은 외투를 도둑맞은 아까끼와 비슷한데다가 부와 명예에 대한 욕망과 집착으로 점칠된 속세에 달관하는 경지에 이른 다산의 고고한 태도가 한층 더 부각되고 있다.  

 

우연히 한 어린아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울부짖으며 참새처럼 수도 없이 팔짝팔짝 뛰는 것을 보았다. (중략) 하도 참혹하고 절박해서 얼마 못 가 곧 죽을 것만 같았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봤더니, 나무 밑에서 밤 한 톨을 주웠는데 다른 사람이 그걸 빼앗아갔다는 것이었다. 아아! 천하에 이 아이가 우는 것처럼 울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저 벼슬을 잃고 세력이 꺾인 자나, 재물을 손해보고 돈을 다 써버린 자, 그리고 자식을 잃고 슬퍼 실성할 지경이 된 사람도 달관한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두 밤 한 톨의 종류일 뿐이다.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계" 중에서, pp 30)

  

다산은 한 때 한 순간의 사건으로 인해 물거품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벼슬의 명예에 대해 크게 절망했던 순간이 있었다. 자신의 인생을 든든하게 지원할 줄 알았던 정조 대왕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대한 슬픔을 시로 표현할 정도로 유배 생활의 시작은 다산의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였고 고난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유배 생활을 지내면서 중년의 다산은 젊은 시절, 과거에 집착했고 상실된 명예로 가득한 부귀영화가 인생에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 다른 단상에서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한 인생의 과정 속에 느낄 수 있는 고락(苦樂)에 대처할 줄 알아야 한다고 적고 있다.  

 

즐거움은 괴로움에서 나온다. 괴로움은 즐거움의 뿌리다. 괴로움은 즐거움에서 나온다. 즐거움은 괴로움의 씨앗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를 낳는 것은 동정(동정)이나 음양(음양)이 서로 뿌리가 되는 것과 같다. 통달한 사람은 그러한 까닭을 알아 깃들어 숨어 있는 것을 살피고 성하고 쇠하는 이치를 헤아려, 내 마음이 상황에 응하는 것을 항상 뭇사람들이 하는 것과 반대로 한다. 그런 까닭에 두 가지가 그 취향을 나누고 기세를 죽인다. 

([고락에 대처하는 방법] "우후 이중협을 증별하는 시첩의 서문' 중에서, pp 50) 

  

樂生於苦, 苦者樂之根也. 苦生於樂, 樂者苦之種也.
   

 

즐거움은 괴로움에서 나오며 괴로움은 즐거움의 뿌리이다. 그리고 괴로움은 즐거움에서 나오며 즐거움은 반대로 괴로움의 뿌리이다. 다산이 말하고 있는 역설적인 문장은 우리 삶에 마주치며 반복되고 있는 화복(禍福)의 순리를 표현하고 있다. 동시에 화복의 순리 앞에 마주친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외투 한 벌에 웃고 울어야 했던 러시아 하급 관리 아까끼다. 외투 한 벌로 인해 고락의 감정을 한꺼번에 느껴야했던 아까끼는 화복의 순리를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결국 화복의 순리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탓에 자신 스스로 몸과 정신을 파괴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성을 지닌 동물이라고 하는 인간이라도 어떠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면 어린아이 수준의 단순한 감정을 지니는 경우가 있다. 즐거움을 오랫동안 누리다보면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고 즐거움을 오랫동안 누리고 싶은 기대와 열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마는 욕심 그리고 집착으로 변질된다. 반대로 하늘이 무너질듯한 절망을 느끼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괴로움의 나락 속으로 빠진다. 괴로움이라는 늪에 깊숙하게 빠진 이상 정신을 옥죄게 만드는 이 위험천만한 마음에서 헤어나오기가 쉽지 않다.   

관리 그리고 인생의 대선배인 다산이 병들어 죽어가는 러시아 하급 관리 아까끼에게 자신이 터득한 삶의 지혜를 알려줬다면 아까끼는 유령이 되면서까지 외투에 집착하는 기이한 상황이 연출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지키는 집" , 수오재(守吾齋) 

다산은 유배생활을 통해서 실학 사상을 집대성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을 반추함으로써 그 경험으로부터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 자신의 남은 여생을 통해 삶의 지혜를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수신'(修身)이라 함은 '자신의 몸을 지킨다'라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수신의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학문 수양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리고 석가모니, 예수와 같은 성인의 경지에 오르지 않는 이상 다양한 삶의 변화 속에서 변하기 쉬운 인간의 유동적인 마음이 한결같이 유지된다는 것도 쉽지가 않다. 

그러나 다산은 '나'(自)라는 존재를 온전히 유지하여 스스로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한 다산의 태도는 '수오재기'(守吾齋記)라는 유명한 수필에서 알 수 있다.  정민 교수가 편집한 <다산청상어록>에서는 '수오재'라는 명칭을 통해 다산이 스스로 깨닫아 독백하는 장면이 있는 일부 내용만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전체적인 내용을 볼 수는 없지만 이 부분만으로도 다산이 후세의 사람들에게 말하고자하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무릇 천하의 사물은 모두 지킬 것이 없다. 오직 나만은 마땅히 지켜야 한다. (중략) 오직 이른바 '나'라는 것은 그 성질이 달아나기를 잘하고, 들고 나는 것은 일정치가 않다. 비록 가까기에 꼭 붙어 있어서 마치 서로 등지지 못할 것 같지만, 잠깐만 살피지 않으면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이록(利祿)으로 꼬이면 가버리고, 위협과 재앙으로 으르면 가버린다. (중략) 한번 가기만 하면 돌아올 줄 모르고, 붙들어도 끌고 올 수가 없다. 그래서 천하에 잃기 쉬운 것에 '나'만 한 것이 없다. 마땅히 꽁꽁 묶고 잡아매고 문 잠그고 자물쇠로 채워서 굳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나를 지켜라] "수오재기" 중에서, pp 43)

 

내용만 봐서는 다산이 직접 '수오재'라는 명칭을 붙인 걸로 이해하기 쉽지만 책에서 생략된 내용에 보면 알 수 있듯이 다산의 맏형인 정약전이 자신의 집에 붙인 것이다. 다산은 처음에는 형이 만들어낸 집의 명칭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수오재'라는 의미에 대해서 형을 통해 알게 되고 난 뒤, 다산의 마음가짐은 달라졌다. 그는 유배 생활 이후, 자신의 지난 부귀영화의 삶이 허망했음을 깨닫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현상적 자아에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 자아인 '나'를 지켜야 한다는 깨달음에 도달한 것이다. 본질적 자아, 즉 내면적 자아를 유지할 때 비로소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거나 유혹당하지 않게 된다.  

형은 자신의 집에 스스로 명칭을 붙여 자신을 지키고자 했고, 그 동생은 그러한 마음의 수양을 기(記)를 통해서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저본으로 삼고자 했다.  이런 자세야말로 바로 지식과 행동이 서로 일치된다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인 것이다.

오늘날처럼 복잡하면서도 하룻밤 자고나면 쉽게 변화되는 이 세상 속에서 '성찰', '수신', '청상'이라는 단어는 고리타분한 고어에 불과하며 그런 일상에 쫓기듯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실천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에는 다산이 학문적 성과를 이룰 수 있었던 공부 방법과 수많은 저작을 펴낼 수 있었던 비법, 공부의 기본 자세,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에서부터 거처의 규모와 생활의 법도, 재산 증식과 경제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산이 들려주는 삶의 성찰과 충고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비록 유배에 묶인 몸이지만 그가 쓴 맑은 글 속에는 여전히 세태를 꿰뚫어보는 지성과 함께 묻어나는 '인생의 대스승'으로서 살가운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높은 관리에서 하루아침에 유배객이 된 다산은 자신의 처지에 좌절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해 5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어마어마한 책의 권수로 남겨진 학문적 업적만으로 다산 정약용의 업적을 평가하기에는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는 학자이기 전에 민의(民意)를 먼저 생각했던 관리였다.실용에 맞지 않으면 임금 앞에서도 승복하지 않았고, 진리를 위해서라면 주자(朱子)와도 맞섰으며, 처절한 불행 앞에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았던 다산에게서 다시금 삶의 혜안(慧眼)을 구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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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11-27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하에 잃기 쉬운 것에 '나'만한 것이 없다.」

요즘 읽는 책마다 그 속에 '내'가 있어서
'거 참, 여기 저기 나를 많이도 흘리고 다녔구나.'
싶던 차에 저 말을 읽으니, 참,
아픕니다.

cyrus 2011-11-29 12:26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요. 저는 어제 학교 수업 시간에 이고그램 평가를
해봤는데요.. '나'라는 존재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본인 스스로 자신의 본질적 모습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하더군요,
다산 선생의 짧은 말씀이 한 쪽 어깨를 내리치는 죽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

yamoo 2011-11-27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민 샘 책이 눈에 들어오네요~ 정민 샘 글 좋지요~^^

다산이 지은 책이 500권이 넘는답니다! 후와~~ㅎㅎ

cyrus 2011-11-29 12:27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이 분이 쓰신 글을 좋아하면 즐겨 읽는 편입니다.
가끔씩 생각나면 다시 읽기도 합니다. ^^

아이리시스 2011-11-29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와- 500권. 저는 어젯밤부터 <흑산> 읽는 중인데 정약용 형제의 삶은 매번 읽어도 매번 대단해요. 얼마나 잘 까먹는지 읽을 때마다 새롭고..^^

cyrus 2011-11-30 23:47   좋아요 0 | URL
최근에 나온 김훈의 신작이 정약용과 관련된 이야기였군요,
저도 꼭 읽어봐야겠는데요 ^^
 

 

  

  과제 준비의 어려움  

항상 학기중은 언제나 바빴지만, 이번 주 같은 경우에는 조별 과제가 많아서 정신이 없었던 시기였다. 조별 과제는 여러 명의 조원들과 함께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별 과제보다는 편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조별 과제는 어떤 조원을 만나느냐에 따라 작업하는 데 편할 수도 있거나 아니면 본인이 힘들어 질 수 있다. 조원 중에는 전혀 친하지도 않는, 타 과 학생이 한 두 명 있는데 조별 과제를 준비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려는 성향이 있다면 본인뿐만 아나리 다른 조원들 입장에서는 피곤하고 기피하고 싶은 대상이다.  

그렇다면 친한 친구들이 나와 같은 조원이라면?  많은 학생들이 조별 편성할 때 가장 선호하는 유형이다. 과제를 준비하는 데 서먹한 기분도 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한 친구들도 믿을게 못 된다. 아무래도 친구들 사이에서는 우정이라는 것이 있어서 나름 열심히 참여하려고 하지만, 꼭 한 명은 슬쩍 눈치를 보면서 참여하는 척만 하는 친구 녀석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대학 과제는 혼자를 하든,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하든...  결론은 쉬운 게 없다. -_-;;   

  

 

  상금에 눈이 멀다

과제 타령은 여기까지만 하고, 사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과제라는 것은 다른 이름으로는 '리포트'(Report)라고 부르기도 한다. 리포트를 쓰는 방법에 관한 책을 읽어보면서 알게 되었는데 리포트의 정의를 논문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 '논문'이라고 하면 자신이 연구하거나 공부하는 주제에 대해서 자신의 주장 또는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작성하는 글이다. 평소에 글쓰기에 대한 훈련을 하지 않은 학생들에게는 리포트 한 개 쓰는 데 고역으로 여기기 마련이다. 

그래도 필자 같은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리포트를 작성하는 방법을 습득했으며 일상적으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리포트 쓰는 데 크게 어려움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올해 2학년 1학기까지 포함하면 지금까지 3학기를 수학(修學)했는데 단 한 과목을 제외하고는 리포트 점수는 상위권에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리포트 작성에 대한 자신감을 많이 가진 상태라서 최근에 학교에서 주최한 리포트 공모전에 참가해보려고 했었다.  말 그대로 자신이 작성한 리포트를 제출하여 가장 잘 쓴 리포트에 상장과 상금(!)을 수여하는 대회이다. 1등이 30만원이었다! 

며칠 전부터 리포트 공모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이번 학기 때 쓴 '진보와 보수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한국정부의 역사'라는 주제로 쓴 리포트를 제출해보려고 했다. (리포트 속 내용의 일부는 지난 달에 페이퍼 형식으로 쓴 적이 있었다) 당시 리포트를 본 교수님도 좋은 평가를 주셨고, 내용의 일부를 쓴 페이퍼 역시 나름 반응이 좋아서(^^;;) 솔직히 공모전 수상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감이 너무 지나쳤던 것일까? 기존에 쓴 리포트 내용을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보완하면 좋았을 것을, 다른 과목 과제 준비하느라 소홀하게 준비를 했다. 준비할 수 있었던 많은 기간동안에 어영부영하다가 제출 마감날 3일 전이 되어서야 드디어 공모전에 제출하기 위한 리포트의 내용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이제 곧 준비해야 할 과제가 많은 상태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작성한 과제를 보완하는 데 열중해야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과제의 내용이 어떻게 보완해야 되는지 염두하기 보다는 어떻게든 잘 써서 리포트 공모전에 상금을 타고 싶은 마음만 앞섰다. 결국에는 주말에는 잠을 제대로 하지 않을 정도로 좀 더 새로운 내용으로 다듬었다.  

이제 작성한 과제를 담당교수님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다 된 것이었다. 교수님은 필자가 쓴 과제를 보고 대회추천서에 과제 내용에 대한 평가를 기록해야만 했다. 리포트 대회에 교수 추천서도 같이 제출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교수님께서 추천서만 작성해주신다면 모든 게 끝인줄만 알았다.  

공모전 마감 기간이 전날에 교수님에게 교수 추천서를 받으려고 연구실에 직접 찾아갔다. 그러나 하늘 높이 찌를 것만 같았던 공모전에 대한 자신감은 하루만에 한 풀 꺾이고 말았다.  

교수님은 리포트 내용이 예전보다 더 못했다고 제대로 된 지적을 하셨다. 문장 중에 간혹 주어가 빠져 있었고, 내용 결론과 느낀점이 너무 진보적인 관점으로 치우쳐서 균형적이지 않다는 등 하나하나 문제점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 설명해주셨다. 교수님이 지적하신 부분을 들으면서 나름 표정 관리를 한답시고 웃는 얼굴로 대답했지만,,,  실상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니었다.   

리포트가 지적당한 사실이 부끄럽다기보다는 교수님이 지적하신 부분을 내일 제출 마감날까지 보완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그리고 막상 다시 해야한다는 생각에 무척 난감하였다. 교수님은 제출 마감날까지라도 꼭 다시 보완해서 제출하려고 당부하셨다.  

한 시간동안 교수님의 지적을 듣고 난 뒤에서야 연구실에 나오는 순간, 온 몸의 기운이 한꺼번에 쭉 빠져드는 기분이 들었다. 정작 해야 될 과제는 많은 상황에 이미 작성한 과제를 또 수정해야 하는, 힘든 시련을 겪어야 한다는 점이 혼자 감당하기가 무척 버겁게 느껴졌다.  

 

  

  '공모전 상금' 과 '학점' 사이에서의 갈등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면서 혼자서 곰곰이 생각을 했다.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공모전 제출용 과제를 수정할 것인지, 아니면 이번 학기 학점을 결정 지을 수 있는 이제 막 시작도 해보지 않은 수많은 과제들을 해야 할 것인지 고민했다. 

나름 열심히 준비한 공모전을 위한 과제를 포기하면 공모전 상금이 아깝게 느껴졌고, 반대로 공모전을 위한 과제에만 열심히 하다보면 정작 해야 할 과제들을 준비하는 데 지체할 수 있었다. 

결국, 오랜 고민 끝에 공모전 과제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공모전은 내년에도 개최하기 때문에 그 때를 기약했다. 그리고 아직 제대로 된 구상도 하지 못한 다른 과제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1월이 끝나가기 전에 과제들을 마무리 짓게 되면 12월부터 기말고사 공부에 대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길 수 있다. 꼭 다가올 상황, 즉 기말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얻어야하는 목표를 위해서 공모전이라는 기회 비용을 포기한 것이다.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았던 리포트 공모전의 상금에 얽매였던 집착이 사라진 탓일까? 

그 이후로 다른 과목 과제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준비할 수 있고, 거의 완성이 다 되어가는 상태이다. 과제가 완전히 작성되더라도 부족한 부분이 있는지 다시 고쳐야하겠지만, 공모전 상금에 대한 욕심이 만들어 낸 집착에서 벗어나면서부터 일이 수월하게 풀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크게 버릴수록 크게 얻을 수 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無所有)는 난초에 대한 스님의 집착과 관련된 일화가 잘 알려진 너무나도 유명한 수필이다. 스님은 한 때 난초에 집착하다가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알고 친구에게 난초를 돌려주고 나면서부터 무소유의 역리를 깨닫게 되었다.  

스님은 난초가 없어진 이후부터 서운하고 허전함보다는 홀가분한 마음을 느끼셨고 그 이후로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필자는 스님과 같은 삶의 진리를 깨달은 것은 아니지만 리포트 공모전 포기 이후로 리포트라는 글을 쓰는 나의 모습에 대해서 스스로 반성하고 내가 모르고 있었던 부족한 부분을 알 수 있었다. 

만약에 공모전에 교수님의 추천서 없이 개별적으로 제출했다고 상상해보자. 운이 좋게도 대회에 당선되면 좋겠지만 결과는 꼭 좋은 쪽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공모전에 당선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충만한 상태에서 입선마저도 하지 못한다면 실패에 대한 정신적 충격과 상실감이 무척 컸을 것이다.   

마음 속에 생긴 소유욕과 집착을 버리면 진정한 마음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스님은 '무소유'에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비록 짧은 한 순간이었지만 며칠동안 나의 정신과 육체를 괴롭혔던 집착에서 스스로 벗어난 후 뒤의 느낌은 정말 '자유'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홀가분한 기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무소유'의 마지막 문장 중에는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 라는 구절이 있다.  올해 리포트 공모전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단지 대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수학하면서 꼭 해야 될 과제, 리포트 작성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장기적인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미래의 발전이라는 2보 전진을 위해 잠시 1보 후퇴한 것뿐이다. 크게 버린만큼 언젠가는 크게 얻을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찾아 올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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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11-29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쉽지만 그런 것들을 통해 배워가는 거겠죠. 무슨 공모전이든 '순수한' 마음이어야 결과가 좋더라구요. 상금이 욕심나지만 열심히만으로 상금 보장이 없잖아요. 가만보면 시루스님은 되게 부지런하고 욕심도 많은 것 같아요. 물론 좋은 쪽으로!^^

학기 끝나가요, 힘내요.

cyrus 2011-11-30 23:53   좋아요 0 | URL
맞아요, 기회는 또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이번 일을 계기로 부족한 것도
모른채 자만했다는 것도 알게 되어서 좋았어요. 내년이면 3힉년인데
논문 쓰는 방법이나 따로 공부해야겠어요.

몇 분 뒤면 곧 12월 1일이네요, 정말 이번 학기, 아니 2011년도
얼마 안 남았네요... ㅠ_ㅠ
 

 

  

  논술고사에 대한 일시적인 동경(?)

고등학생, 그러니까 수능시험을 준비하던 고3 수험생이었을 때, 잠시나마 논술고사에 대해서 호의적인 동경(?)을 가진 적이 있다.     

그 때 당시만해도 나에게 '논술'이란 독서를 통해서 습득한 지식을 이용해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일종의 글쓰기 행위라고 생각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논술고사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한 특별반이 방과 후 교육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논술고사 특별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전교 10등 안에 들 수 있는 내신성적이 있어야하며 수능 모의고사에서 언어, 수리, 외국어영역이 1, 2등급 정도 받을 수 있는, 명문대 SKY를 목표로 둔 성적 최상위권자들만이 배울 수 있었다.  필자는 그런 친구들이 내심 부러워하면서도 살짝 열등감이 느꼈던 적도 있었다.  

그 때 필자의 내신성적은 전교 20등 안에도 들지 못하는 중위권만 맴도는 수준이었으며 수능 모의고사 시험 중에 가장 잘 나오는 등급이 언어영역 4등급뿐이었다.   

필자는 논술고사가 어떤 방식으로 출제되며 어떻게 공부를 해야하는지 너무나 궁금해서 전교 10등 안에 드는 친구가 항상 보는 EBS 논술고사 문제집을 본 적이 있었다.  살짝 훑어봤는데 몇 몇 출제문 중에는 내가 읽었던 책에서 인용된 것만 눈에 띄었을 뿐, 문제 유형은 무척 어렵게 느껴졌다.  그 이후로 논술고사는 정말 머리 좋고 공부 잘하는 학생들만 풀 수 있는 수준 높은 문제로만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논술고사에 대한 동경은 자기합리적인 위안 덕분에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 

공부를 잘 한다고 하는 성적 상위권자들은 학교 교과서와 문제집은 친할 수 있었지 책과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수능시험이 끝나자마자 쉬지도 못한 채 교과서에 나오지도 않는 생소한 내용의 지문을 반복해서 읽어대고 해답을 써내야하는 그들의 모습이 무척 딱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비록 수능성적은 완전 '개판'이었지만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들도 어려워하는 논술고사  

현재는 대학생이라서 요즘 수험생들의 학습 수준을 가늠해 볼 수는 없지만 예전과 다르게 중상위권 학생들도 얼마든지 논술고사를 통해서 명문대에 들어갈 수 있는 수준이 되어있지않나 생각해본다. 

안 그래도 수능시험의 난이도 수준이 점점 평이화되고 있는 마당에 대학 입시 관계자들은 수능성적의 동점자 처리에 대해서 난항을 겪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대학에서 출제되는 논술고사의 결과가 수험생들의 대입 전형에 변수가 될 수밖에 없다.  원래 논술고사는 창의적인 사고력을 요구하는 까다로운 시험 방식이지만 아무래도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대학 입장에서는 시험문제를 어렵게 낼 수 밖에 없다. 

이렇다보니 수험생뿐만 아니라 일선 학교 논술 교사들마저도 대입 전형 논술 문제가 너무나 어려워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상황까지 빚어지게 되었다. 


   

 

[논술 교사들 “솔직히 나도 문제 이해하기 어렵다”] 

경향신문  2011년 11월 18일

  

 

인용한 관련기사에 언급된 연세대와 고려대에서 출제된 논술고사 인용문의 내용과 문제를 보면 수험생 그리고 교사들 입장에서는 생소할 수 밖에 없다. 

테일러리즘은 경영 조직 부문에서 등장하는 개념이며 복지 예산에 관한 내용은 사회복지학과라면 공부할 수 있는, 대학생이라면 배우는 것들이다.   그런데 평생 학교 교과서 속 내용만 암기해왔던 수험생들 그리고 자신의 담당 과목만 학생들에게 가르쳐왔던 교사에게는 논술고사에 출제되는 인용문들이 낯설어 하게 되며 어떤 방식으로 공부를 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된다.

우리나라의 일간지에는 특정 요일마다 소개되는 특별 기사, 일명 섹션이 부록으로 딸려 있다. 그 중에 대부분 일간지에는 수험생들을 위한 '입시교육'에 관한 모든 정보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섹션이 있다. 

간혹 신문을 보게 되면 그런 특별 기사까지도 보게 되는데 수험생들을 위해 가끔은 대학교에서 만든 모의 논술고사 문제와 출제문을 게재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문제를 분석하여 설명하는 논술고사 교육 전문가의 답변도 같이 소개된다.      

 

 

 

 

 

 

 

 



한 번은 모 대학교에서 출제한 모의 논술고사 인용문을 본 적이 있었는데 내가 봐도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을 인용하고 있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심지어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중의 문장을 인용하여 출제문으로 제시하였다.   비록 '모의' 논술고사 문제였지만 실제로 이런 내용들이 출제되었다면 수험생들 입장에서는 출제문에서부터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논술고사를 대비하는 수험생들 중에서 단 한 번이라도 푸코와 들뢰즈라는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논술고사, 이대로 유지한다면...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문제의 난이도는 어려워져야 한다.  하지만 현행 교육 체계와는 한참 괴리된 대학원생 수준의 문제를 낸다면 논술고사의 참된 교육 목적과 취지가 변질될 우려가 있다.  

수험생들은 논술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 일선 학교의 논리고사를 가르치는 교사보다는 고액의 과외료를 기꺼이 지불해가면서 대치동 학원가의 논술강사에게 배울 것이다.  수험생 자녀를 둔 부모 입장에서는 논술고사로 인한 사교육비에 대해서 경제적 부담을 떠안게 된다.

정여울의 지적대로 현재 시행되고 있는 논술고사는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창의적인 사고와 소양을 배양시키기보다는 '해답'이라는 결과를 도출하는 획일적인 방식의 시험이 되고 말았다.  

엄청난 양과 시간을 입시교육에 쏟아붓는 수험생들에게는 독서 행위는 사치라고 생각한다.  즉,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고등학생들의 독서를 장려하기 위해서 공신력이 있는 교육기관에서 필독도서를 선정하고 있지만 이 역시 수험생들에게는 무용지물이다.   일각에서는 청소년들의 필독도서 목록이 청소년들의 지적 능력 수준에 맞지 않은 내용의 책이 대다수이며 그 수가 너무 과하다는 점 그리고 논술고사와 같은 단지 입시성적을 위한 부차적인 독서행위를 부추길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독서라는 기본적인 행위가 밑받침되어 있지 않은데다가 난해하기만한 내용이 출제되는 논술고사 때문에 되려 청소년들의 독서 행위 장려에 역효과를 줄 수 있다.

대학생인 지금, 요즘 고등학생들의 논술고사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수준은 아니지만 그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필자의 학창시절 때보다 더 많은 양에, 더 어려운 내용의 과목을 공부하고 있지 않는가 생각이 든다.    

오늘날의 논술고사는 학생들의 학습 능력을 측정하기 위한, 대학교 입학을 위한 기준으로만 남게 되었다.  '논술'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시험'이라는 이미지가 떠올리게 된다.  자신이 관심 있어하는 지식을 얻기 위한 자율적인 독서를 통해서 거기에 대해서 자신만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할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참된 '논술'이다.  요즘과 같이 매년 수험생들의 시기가 다가올 때마다 논술의 의미는 그렇게 점점 퇴색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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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1-11-18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허... 앞으로 인문계로 가고자 마음먹고있었는데 기사에 나온 논술문제를 보니 후덜덜하네요.. 교사들까지도 이해하기힘든 주제를어찌학생에게 쓰라는 건지요.. 쯔쯔.

cyrus 2011-11-22 00:2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이건 뭐,, 고등학생들에게 대학교 수준의 능력을 요구하고 있으니
논술고사가 수험생들에게 공부를 멀리하게끔 하는 부작용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고 생각이 드네요.

아이리시스 2011-11-19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는 건 이쪽저쪽 쓰면 되는데 이걸 점수화 하는 게 더 힘들 것 같지 않아요? 논술이란 게 어찌보면 답이 없는건데.. 답을 요구하잖아요. 더 타당성 있는 논거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정형화 된 답을 요구하는 건데.. 이걸 보니 소설보다 인문독서를 해야한다는 맨날 하는 다짐이 다시 불끈!

주말 잘 보내요, 시루스님.

cyrus 2011-11-22 00:27   좋아요 0 | URL
맞아요, 꾸준한 인문독서만이 논술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책 읽을 시간이 많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문제지만요. ^^;;

BRINY 2011-11-19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러니까 논술학원들이 성황을 이루고, 결국 뻔한 정형화된 답을 쓰게 되는 거겠죠.

cyrus 2011-11-22 00:2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오히려 논술학원 때문에 수험생 자녀를 둔 부모님 입장에서는
경제적 부담이 클 수 밖에 없어요.

마늘빵 2011-11-19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요일 경향신문 일면에 '들뢰즈', '푸코'의 이름이 있어서 얼마나 놀랐던지. 이게 무슨 일이야. ^^ 평가를 논술로 하는 건 바람직한데, 현행 논술고사는 이해도 안 되는 사상과 철학을 암기하여 풀어내는 시험이죠. -_-

cyrus 2011-11-22 00:30   좋아요 0 | URL
맞아요, 대학생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고등학생 수준에 맞지 않는
내용으로 논술시험을 친다는 점이 문제인거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암기하여 공부하는 것도 더욱 심각한 문제이고요. 철학과 인문학은
암기를 요구하는 과목이 아닌데 말이죠 ^^;;

노이에자이트 2011-11-19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르치는 사람이 무슨 말인지 모르고 횡설수설하고, 듣는 사람도 무슨 말인지 몰라서 횡설수설하고 그렇죠.

논술답안지가 거의 똑같은 답안이 많이 나와서 알고 봤더니 같은 학원에서 논술강의 듣던 수험생들이라서 그랬다네요.

cyrus 2011-11-22 00:31   좋아요 0 | URL
논술학원을 다녀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정말로 정해진 답안을 쓰도록
그렇게 가르치는가보군요.

노이에자이트 2011-11-22 16:41   좋아요 0 | URL
그럼요.유명한 사건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11-19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동감하는... ^^
이번에 제가 모학교 시험을 쳤잖아요. 그런데 문제가 너무 어려운거예요.
그래서 우리 교수님께 이런 문제가 나왔더라 했더니,
나도 못 풀겠다 하시더군요. 사람이 하두 몰리니 변별력을 위해서 점점 수준이 올라가는데
이 정도면, 중요한 핵심은 빼고, 세부 사항이나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 전문 사항만
파고들어야겠더라구요..... 머가 뒤바뀐거 같죠? ㅋㅋ

cyrus 2011-11-22 00:32   좋아요 0 | URL
대학교 시험도 논술고사처럼 나오게 된다면,, 이거 상상만 해도
끔찍한데요. ^^;;

루쉰P 2011-11-19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의 글을 읽으니 루쉰 선생을 글이 떠 오르네요. 예전에도 썼지만 중국의 과거시험을 빗대어 예전 중국에서는 집 대문을 두드릴 때 벽돌을 썼다고 해요. 근데 그 벽돌은 문 두드릴 때만 쓸모가 있어서 집에 들어가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죠. ㅋㅋ
중국의 과거시험이 그 벽돌과 같다고 루쉰 선생은 비유해 줬거든요. 지금의 논술고사가 그런 처지이지는 않는지란 생각을 하네요. ㅋㅋ

잘 지내시죠? 경외하는 대학생 시루스님 ㅋㅋㅋ

cyrus 2011-11-22 00:35   좋아요 0 | URL
루쉰님도 잘 지내시죠? 요즘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졌는데
경비 업무하시는데 몸조리 잘 하셨으면 해요. ^^

지금의 논술시험이나 옛날 과거시험이나 항상 시험이라는 것은 공부한 내용을
토대로 정형화된 답을 요구하는 형식인거 같아요. 물론 자신의 생각을
중점적으로 쓰도록 요구하는 시험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 시험은
객관식 아니면 주관식이잖아요. 주관식도 거의 문제 유형이
암기를 해야 풀 수 있는 것이고요. ^^
 

  

 

  인간의 욕구는 모두 '외투'에서 나왔다 

 

날씨가 무척 쌀쌀해졌다.  문득 겨울이 왔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면 겨울동안 입을 옷을 장만하게 된다.  필자는 이번 2011년의 겨울을 패딩으로 버틸 예정이다.  패딩 두 세벌 정도면 내년 봄까지는 따뜻하게 입을 수 있다. 

하지만 패딩 한 벌 가격이 만만치가 않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명품 의류 회사의 정품이라면 가격이 10만원 훌쩍 넘기기도 한다.  명품 의류 브랜드의 패딩은 착용감만 좋을뿐만 아니라 멋진 디자인에 착용할 때 드러나게 되는 옷 맵시가 살려져 있어서 가격이 높더라도 한 벌 정도는 구입하고 싶은 게 소비자의 마음이다. 

사실 옷이라는 물건은 입을 때 착용감만 좋으면 되지만 옷에 박혀 있는 조그만 제품 브랜드 로고까지도 고려하는 것이 우리나라 특유 소비 의식이다.  자신이 걸치고 있는 옷뿐만 아니라 손목시계, 가방 심지어 신발까지 명품 브랜드 회사의 로고가 박혀 있다면 상대방에게 과시하고 싶은 성향이 있다.  즉, 나라는 사람은 비싸면서도 품질 좋은 '명품'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타자에게 은연중에 알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명품을 구입하지 않는다거나 애용하지 않는 타자에게는 무시를 하거나 사회적 무리에서 은근히 소외되는 경우도 있다.  

 

욕구는 타고난 것이며 욕구를 강도와 중요성에 따라 5단계로 분류한 매슬로우욕구단계설의 내용을 살펴보면,,,   

 

 

 

1단계 욕구는 생리적 욕구로 먹고, 자고, 종족보존 등 최하위 단계의 욕구이다.  2단계 욕구는 안전의 욕구로 추위, 질병, 위험 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욕구이다. 장래를 위해 저축하는 것도 안전 욕구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3단계 욕구는 애정과 사회 소속에 대한 욕구로 가정을 이루거나 친구를 사귀는 등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 애정을 주고받는 욕구이다.  4단계 욕구는 자기존중의 욕구로 소속단체의 구성원으로 명예나 권력을 누리려는 욕구이다.  5단계 욕구는 자아실현의 욕구로 자신의 재능과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해서 자기가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성취하려는 최고수준의 욕구이다.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바로 자아실현의 욕구가 표출된 것이다.  

그러나 매슬로는 인간의 욕구를 강도나 중요성에 따라 계층적으로 배열한 것이지 결코 행복 그 자체를 계층적으로 배열한 것은 아니라고 봤다.   결국 인간이 원한다는 것은 위의 5단계 중에서 애정과 사회 소속에 대한 욕구일 수도 있고, 또는 안전의 욕구를 최우선으로 추구할 때도 있다.  각기 다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잠재력 개발을 통해서 나름대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욕구 특성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인물이라면 바로 니콜라이 고골의 <외투>에 등장하는 주인공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일 것이다.  

아까끼는 관청에 근무하는 하급 관리이다.  성실한 인품에도 불구하고 처세 능력이 부족하여 동료 관료들로부터 무시를 받는, 그야말로 존재감이 낮은 인물이다.   한 번은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가 너무 낡아 새로 맞추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하자 아까끼는 몇 년 동안 근검 절약하여 간신히 고급 외투를 마련하게 된다.   고급 외투를 입은 뒤로부터 아까끼의 존재감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의기양양, 맵시를 뽐내며 출근하여 관료 동료들과 상관에게 축하를 받은 그는 날아갈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즐거운 기분도 잠시,  관료들이 한자리에 모인 화려한 연회를 참석하고 난 후 흥건히 취한 상태에 집으로 귀가하는 도중에 강도에게 고급 외투를 빼앗기고 만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외투를 도둑맞은 아까끼는 경찰과 관료 유력 인사들에게 찾아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리게 되지만 돌아오는 것은 냉대와 무시, 호통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까끼는 고급 외투를 입지 않은, 그저 존재감 없는 하급 관리일뿐이었다.  러시아 특유 차디찬 겨울 날씨만큼이나 주위 사람들의 냉담한 반응에다가 외투를 찾을 수 앖는 절망감에 실의에 빠진 아까끼는 결국 독감을 얻게 되고 한을 품은 채 쓸쓸히 죽어간다.  그리고 그는 유령이 되어서도 자신의 외투를 찾아 달라고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호소를 하면서 다니게 된다.  

아까끼에게 외투는 혹한의 추위를 견디기 위해서건 최소한의 품위유지를 위해서건 아카키의 삶에서는 절대로 없어선 안 될 필수품이면시도 사회적 인정의 상징물이다.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설의 입장에서 본다면 외투는 아까끼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하나의 매개체이다.  

고급 외투를 구입하기 위해서 식사를 줄일 정도로 생리적 욕구를 자기 스스로 절제한 것을 제외한다면 아까끼는 외투를 통해서 러시아의 혹한을 보호할 수 있는 안전의 욕구에서 동료 관료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사랑과 사회 소속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했다.  만약에 아까끼가 외투를 도둑맞지 않았더라면 더 나아가 관료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존경을 받고 싶어하는 욕구, 더 나아가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을 성취하려는 자아실현의 욕구까지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은전 한 닢을 모은 거지의 사연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설은 중요성에 따라 계층적으로 배열한 것이지 결코 행복 그 자체를 계층적으로 배열한 것은 아니다.  욕구의 정도가 지나치게 되면 '집착'으로 변질되어 욕구를 통한 행복 추구는 커녕 오히려 고통과 번뇌만 따르게 된다.  외투에 집착하는 아까끼의 경우처럼 맹목적인 욕구는 때론 자신의 삶을 스스로 파괴하는 지름길이 되기도 하며 정작 자신의 삶에 중요한 또 다른 가치들을 무시하게 되는 처사를 행할 수 있다. 

피천득의 '은전 한 닢' 이라는 짤막한 수필에 등장하는 늙은 거지의 사연은 과연 인간의 소유하려는 욕구가 무조건 옳다고 볼 수 있는지 독자들에게 판단을 부여하고 있다.

 '나'는 자신이 지닌 은전 한 닢이 진짜인지 거듭 확인하는 중국 상해의 늙은 거지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자신이 은전 한 닢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릴 정도로 기쁘게 여기고 있다.    

 

" 이것은 훔친 것이 아닙니다.  길에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누가 저 같은 놈에게 일 원짜릴 줍니까?  각전(角錢) 한 닢을 받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동전 한 닢 주시는 분도 백에 한 분이 쉽지 않습니다.  나는 한 푼 한 푼 얻은 돈에서 몇 닢씩을 모았습니다.  이렇게 모은 돈 마흔 여덟 닢을 각전 닢과 바꾸었습니다.  이러기를 여섯 번을 하여 겨우 이 귀한 대양(大洋) 한 푼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돈을 얻느라고 여섯 달이 더 걸렸습니다. " 

그의 빰에는 눈물이 흘렸다.  나는, 

" 왜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 그 돈을 만들었단 말이오?  그 돈으로 무엇을 하려오? " 하고 물었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 이 돈, 한 개가 갖고 싶었습니다. " 

(샘터, pp 221~222) 

 

수필은 은전 한 닢을 가져 보는 것이라는 대답으로 결말을 맺게 되는데 '나'는 어떠한 논평도 하지 않고 있다.  거지의 행동에 대해서 독자들에게 상상력을 자극하는 동시에 독자의 판단에 맡기고 있는 것이다. 

거지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수중에 들어오는 은전 한 닢도 먹고 살아가기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대상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은전 한 닢만 가지고 하루 식사 세 끼를 할 수가 없다.  간난신고(艱難辛苦) 끝에 은전 한 닢을 얻기 위한 거지의 소박하고도 눈물겨운 노력은 가상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본다면 거지의 소망은 맹목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렵게 모은 돈 마흔 여덟 닢만 가지고도 식사 한 끼라도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실질적 가치였음에도 불구하고 거지는 그저 은전 한 닢이라는 교환적 가치를 얻을 수 있는 수단적인 대상으로만 인식했다.  은전 한 닢을 갖기 위해 여섯 달에 걸쳐 눈물겨운 노력을 한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손을 펴라  

 

 

 

 

 

 

 

  

 

법정 스님은 <무소유(無所有)>를 통해서 '무소유의 자세'를 갖춤으로써 인간은 욕구가 만들어 낸 소유욕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법정 스님의 결론은 스님이 입적하신 지금까지도 인생의 중요한 진리로써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지만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음으로써 탐욕과 집착에 벗어나는 것은 이미 욕구의 소유욕에 갇혀 버린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외투>의 아까끼와 <은전 한 닢>의 늙은 거지의 사례처럼 소유욕과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생을 스스로 파멸을 초래할 수 있으며 정작 중요한 삶의 가치를 얻지 못하게 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글의 결말을 박노해 시인의 짧은 우화로 마무리지으려고 한다.  아무리 이성과 지혜를 가진 똑똑한 인간이라도 욕구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면 우화 속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원숭이가 될 수도 있다.

 

 

  손을 펴라  

 

원숭이는 영리한 동물입니다.
토착민들은 이 영리한 원숭이를 생포할 때
가죽으로 만든 자루에 원숭이가 제일 좋아하는
쌀을 넣어 나뭇가지에 단단히 매달아 놓습니다.
가죽 자루의 입구는 좁아서 원숭이의 손이
겨우 들어갈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얼마 동안을 기다리면 원숭이가 찾아와
맛있는 쌀이 담긴 자루 속에 손을 집어넣습니다.
그리곤 쌀을 가득 움켜쥐고는 흐뭇해합니다.
그런데 쌀을 가득 움켜쥔 원숭이는 아무리 기를 써봐도
그 자루 속에는 손을 빼낼 수가 없었습니다.

놀란 원숭이는 몸부림치며 울부짖기 시작합니다.
손을 펴고 쌀을 놓아버리기만 하면 쉽게 손을 빼내
저 푸른 숲 속을 다시 자유롭게 누비며 살 수 있으련만
원숭이는 한 줌의 쌀을 움켜쥔 손을 펴지 못한 채
울부짖다가 결국 토착민에게 생포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손을 펴라
움켜쥔 손을 펴라
놓아라 놓아버려라
한 번 크게 놓아버려라 

(pp 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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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7 14: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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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8 17: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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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7 20: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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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8 17: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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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1-11-17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메슬로우의 욕구단계설 도덕시간에 배웠습니다.. 외운다고 얼마나 힘들었던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ㅋㅋ

저는... 이번겨울에 날만한 외투가 없는걸요... 하나 장만해야하는데 돈이업습니다 ㅋㅋ

cyrus 2011-11-18 17:26   좋아요 0 | URL
고등학교 윤리 과목에서도 매슬로우 이론이 나오는 걸로 알고 있어요.
배운 기억도 나고요. 그런데 심리학에 나올법한 이론이라서
외우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겠어요 ^^

이번 학기도 얼마 안 남았는데,, 저도 그냥 작년에 구입한 패딩 몇 벌만
으로 올해 연말을 버틸려고요 ㅎㅎ 방학 때 알바를 해서 새로 장만해야겠어요 ^^

마녀고양이 2011-11-17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은전을 갖기 위해 6달이나 노력한 거지가 멋지다고 생각해요.
남이 보기에는 무의미한 행위였을 수 있으나, 그것은 그만의 의미를 가진 행위였던거지요.
고급 외투의 경우도, 물론 맹목적인 부분이 있긴 하지만, 인간에게 자신만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게 아닐까 싶어요.

다 놓아버려야지요, 크게 한번 놓아버려야하지요,
하지만 진정 움켜쥐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한번 생각해 봅니다.

cyrus 2011-11-18 17:2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목표나 욕구가 과연 자신의 삶에 의미 있는지
꼼꼼이 생각해보는 것도 좋은거 같아요. ^^

꽃도둑 2011-11-18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리적 욕구나 안전의 욕구에서 허덕이고 있을 거 같은데요?
...그나저나 박노해의 시 '손을 펴라' 가 새롭게 읽힙니다.
그게 지금 가장 절실한 문제일 수도 있을 테니까 다른 건 보이지 않을 수도,,,
지금 저 손마자 풀어 버린다면 어쩌면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수도,,
어쩌면 누군가는 그럴지도 모를거라는 아주 짧은 생각을 해보게 되네요.

cyrus 2011-11-18 20:5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사람들마다 추구하는 욕구가 다르죠. ^^
저는 요즘 먹기 위한 생리적 욕구를 이기지 못해서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