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어록청상 푸르메 어록
정민 지음 / 푸르메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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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투 한 벌을 지키고자 했던 러시아의 관리  

 

 

 

영하 40도를 오고가는 혹한기가 이어지고 있는, 사람 인적이 드문 한밤중에 러시아 뻬쩨르부르그의 거리에는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유령이 떠돌고 있다.  

아까끼라는 이름의 유령은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특별한 요구를 하는 것으로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특히 눈보라가 몰아치는 새벽에 문제의 거리를 지나가게 된다면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까끼를 만날 수 있다. 유령 아까끼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깃을 잡아채며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면서 요구를 한다. 

    " 난 네놈의 외투가 필요해!"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존재를 마추친 사람들은 당연히 기겁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유령은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지 않았다. 그저 외투가 필요하다고 고통스럽게 호소할 뿐이었다. 유령 아까끼는 왜 저승으로 떠나지 못한 채 외투 한 벌을 찾는 데 뻬쩨르부르그를 배회하고 있던 것일까?  

아까끼는 죽기 전에는 관청에 근무했던 하급 관리였다. 비록 처세 능력이 부족한데다 비천한 신분 때문에 관리직으로서 많은 급료를 벌어들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맡은 임무에 성실히 수행하면서 관리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근검절약을 하면서까지 관리 생활을 하면서 얻은 수입으로 화려한 외투 한 벌을 마련하게 된다. 평생동안 낡은 외투만 입고 지낸 아까끼는 오랫동안 모아놓은 수입으로 구입한 새 외투 한 벌이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수많은 관리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연회에 참석할 때에도 새로 장만한 외투를 입고 나타나 그동안 하급 관리라는 직함 때문에 드러나지 못했던 자신의 존재감을 마음껏 뽐내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아까끼에게는 새 외투를 입고 있는 순간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까끼의 행복한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연회에 참석하고 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강도에게 새 외투를 도둑맞게 되었다. 그는 거리에 보초를 서고 있는 경찰들 심지어 상급 관리까지 찾아가 외투를 도둑맞은 자신의 사연을 알렸다. 하지만 이들은 외투 한 벌을 도둑맞은 하급 관리의 사연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의 슬픈 사연이 외면당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아까끼는 그 충격으로 심한 독감에 걸리고 말았다. 러시아 특유의 겨울 날씨를 이겨내지 못한 채 외투를 찾고 싶어했던 아까끼는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이후 뻬쩨르부르그에는 자신의 외투를 찾아 달라고 호소하는 유령이 떠돌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외투를 찾지 못한 채 주위의 조롱 속에서 죽어 간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였다. 

 

    

 왕의 남자였다가 하루아침에 유배객이 된 조선의 관리  

 

  

다산 정약용 (1762~1836) 

 

1762년, 명망 있는 벼슬 집안에서 태어난 다산 정약용은 어릴 적부터 영특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4세에 이미 천자문을 익혔고, 7세에 한시를 짓기 시작했다. 다산은 한창 젋은 20세부터 본격적으로 입신(入身)의 생활을 하기 시작했는데 28세의 나이에 벼슬에 올라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펼쳤다. 거기에다가 그 당시 임금이었던 정조에게 인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관료생활은 탄탄대로였다. 정조의 지극한 총애 덕분에 정약용은 대왕의 최측근 관료로서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나 관리로서의 부귀영화는 한순간에 바닷가의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정조가 승하하고 난 후에 터진 천주교를 박해한 신유사화(辛酉士禍)에 연루되면서 천주교도인이 많았던 정약용 가문은 한순간에 풍비박산나게 되었다. 다행히도 다산은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이 때부터 기나긴 유배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전라남도 강진에서의 유배 생활이 무려 18년 동안이나 이어질 줄은 다산 본인은 예감하고 있었을까? 한순간에 부귀영화를 잃어버린 그에게는 강진에서의 유배생활은 무척 고통스럽고 보고 싶은 가족을 만날 수가 없었던 외로운 시기였지만 후세 학자들에게는 실학 사상이 완성될 수 있었던 다양한 분야의 학문이 다산(多産)할 수 있었던 위대한 시기였다.  

 

 

 조선의 관리가 러시아의 관리에게 해줄 수 있는 충언   

다산은 유배 생활을 지내는 동안 퇴계 이 의 글이 실린 <퇴계집>을 읽으면서 얻게 된 느낌을 단상으로 하루에 한 편씩 기록하였다. 기록의 결과물은 지금의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이라는 이름의 저작으로 남게 되었다. 말 그대로 <퇴계집>을 읽으면서 느낀 맑은 생각들을 기록한, 다산 본인을 위한 개인적인 문집인 것이다. 

책 제목의 '청상(淸賞)'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산의 맑은 생각들은 현대인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삶의 자세 전반에 대한 성찰과 충고를 담고 있다. 다산의 <도산사숙록>에는 인생의 대선배로써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의 체험에서 깨닫거나 성찰 뒤에 얻게 된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다. 

책에 수록된 몇 몇 단상들 중에는 고골의 소설에 등장하는 하급 관리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에게도 충언을 해봄직할만한 내용이 있다. 비록 태어난 곳과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다르지만 관료 경험을 따져본다면 다산이 훨씬 선배격인 셈이다. 그리고 다산은 대왕의 총애를 듬뿍 받을 정도로 고급 관리로써 화려한 명예를 누려 본 적도 있다. 말단 하급 관리로 지낸 아까끼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경력을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도산사숙록>에서의 다산의 모습은 과거의 부귀영화를 회상하여 자랑을 한다거나 그 때의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고 있다. 화려했던 관리로써의 부귀영화 시절은 다산의 인생에서는 그저 지나가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기나긴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다산은 많은 것을 깨달았다. 한 때 누리고자 했던 부와 명예는 한순간의 욕심일 뿐이며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달라지는 순간 자신에게 굽실거렸던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다산은 보고, 느꼈던 것이다.  

'밤 한 톨'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단상에서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대상이 상실된 후 겪게 되는 인간의 상반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밤 한 톨을 도둑맞은 어린아이의 심정은 외투를 도둑맞은 아까끼와 비슷한데다가 부와 명예에 대한 욕망과 집착으로 점칠된 속세에 달관하는 경지에 이른 다산의 고고한 태도가 한층 더 부각되고 있다.  

 

우연히 한 어린아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울부짖으며 참새처럼 수도 없이 팔짝팔짝 뛰는 것을 보았다. (중략) 하도 참혹하고 절박해서 얼마 못 가 곧 죽을 것만 같았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봤더니, 나무 밑에서 밤 한 톨을 주웠는데 다른 사람이 그걸 빼앗아갔다는 것이었다. 아아! 천하에 이 아이가 우는 것처럼 울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저 벼슬을 잃고 세력이 꺾인 자나, 재물을 손해보고 돈을 다 써버린 자, 그리고 자식을 잃고 슬퍼 실성할 지경이 된 사람도 달관한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두 밤 한 톨의 종류일 뿐이다.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계" 중에서, pp 30)

  

다산은 한 때 한 순간의 사건으로 인해 물거품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벼슬의 명예에 대해 크게 절망했던 순간이 있었다. 자신의 인생을 든든하게 지원할 줄 알았던 정조 대왕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대한 슬픔을 시로 표현할 정도로 유배 생활의 시작은 다산의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였고 고난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유배 생활을 지내면서 중년의 다산은 젊은 시절, 과거에 집착했고 상실된 명예로 가득한 부귀영화가 인생에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 다른 단상에서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한 인생의 과정 속에 느낄 수 있는 고락(苦樂)에 대처할 줄 알아야 한다고 적고 있다.  

 

즐거움은 괴로움에서 나온다. 괴로움은 즐거움의 뿌리다. 괴로움은 즐거움에서 나온다. 즐거움은 괴로움의 씨앗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를 낳는 것은 동정(동정)이나 음양(음양)이 서로 뿌리가 되는 것과 같다. 통달한 사람은 그러한 까닭을 알아 깃들어 숨어 있는 것을 살피고 성하고 쇠하는 이치를 헤아려, 내 마음이 상황에 응하는 것을 항상 뭇사람들이 하는 것과 반대로 한다. 그런 까닭에 두 가지가 그 취향을 나누고 기세를 죽인다. 

([고락에 대처하는 방법] "우후 이중협을 증별하는 시첩의 서문' 중에서, pp 50) 

  

樂生於苦, 苦者樂之根也. 苦生於樂, 樂者苦之種也.
   

 

즐거움은 괴로움에서 나오며 괴로움은 즐거움의 뿌리이다. 그리고 괴로움은 즐거움에서 나오며 즐거움은 반대로 괴로움의 뿌리이다. 다산이 말하고 있는 역설적인 문장은 우리 삶에 마주치며 반복되고 있는 화복(禍福)의 순리를 표현하고 있다. 동시에 화복의 순리 앞에 마주친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외투 한 벌에 웃고 울어야 했던 러시아 하급 관리 아까끼다. 외투 한 벌로 인해 고락의 감정을 한꺼번에 느껴야했던 아까끼는 화복의 순리를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결국 화복의 순리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탓에 자신 스스로 몸과 정신을 파괴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성을 지닌 동물이라고 하는 인간이라도 어떠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면 어린아이 수준의 단순한 감정을 지니는 경우가 있다. 즐거움을 오랫동안 누리다보면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고 즐거움을 오랫동안 누리고 싶은 기대와 열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마는 욕심 그리고 집착으로 변질된다. 반대로 하늘이 무너질듯한 절망을 느끼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괴로움의 나락 속으로 빠진다. 괴로움이라는 늪에 깊숙하게 빠진 이상 정신을 옥죄게 만드는 이 위험천만한 마음에서 헤어나오기가 쉽지 않다.   

관리 그리고 인생의 대선배인 다산이 병들어 죽어가는 러시아 하급 관리 아까끼에게 자신이 터득한 삶의 지혜를 알려줬다면 아까끼는 유령이 되면서까지 외투에 집착하는 기이한 상황이 연출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지키는 집" , 수오재(守吾齋) 

다산은 유배생활을 통해서 실학 사상을 집대성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을 반추함으로써 그 경험으로부터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 자신의 남은 여생을 통해 삶의 지혜를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수신'(修身)이라 함은 '자신의 몸을 지킨다'라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수신의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학문 수양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리고 석가모니, 예수와 같은 성인의 경지에 오르지 않는 이상 다양한 삶의 변화 속에서 변하기 쉬운 인간의 유동적인 마음이 한결같이 유지된다는 것도 쉽지가 않다. 

그러나 다산은 '나'(自)라는 존재를 온전히 유지하여 스스로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한 다산의 태도는 '수오재기'(守吾齋記)라는 유명한 수필에서 알 수 있다.  정민 교수가 편집한 <다산청상어록>에서는 '수오재'라는 명칭을 통해 다산이 스스로 깨닫아 독백하는 장면이 있는 일부 내용만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전체적인 내용을 볼 수는 없지만 이 부분만으로도 다산이 후세의 사람들에게 말하고자하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무릇 천하의 사물은 모두 지킬 것이 없다. 오직 나만은 마땅히 지켜야 한다. (중략) 오직 이른바 '나'라는 것은 그 성질이 달아나기를 잘하고, 들고 나는 것은 일정치가 않다. 비록 가까기에 꼭 붙어 있어서 마치 서로 등지지 못할 것 같지만, 잠깐만 살피지 않으면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이록(利祿)으로 꼬이면 가버리고, 위협과 재앙으로 으르면 가버린다. (중략) 한번 가기만 하면 돌아올 줄 모르고, 붙들어도 끌고 올 수가 없다. 그래서 천하에 잃기 쉬운 것에 '나'만 한 것이 없다. 마땅히 꽁꽁 묶고 잡아매고 문 잠그고 자물쇠로 채워서 굳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나를 지켜라] "수오재기" 중에서, pp 43)

 

내용만 봐서는 다산이 직접 '수오재'라는 명칭을 붙인 걸로 이해하기 쉽지만 책에서 생략된 내용에 보면 알 수 있듯이 다산의 맏형인 정약전이 자신의 집에 붙인 것이다. 다산은 처음에는 형이 만들어낸 집의 명칭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수오재'라는 의미에 대해서 형을 통해 알게 되고 난 뒤, 다산의 마음가짐은 달라졌다. 그는 유배 생활 이후, 자신의 지난 부귀영화의 삶이 허망했음을 깨닫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현상적 자아에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 자아인 '나'를 지켜야 한다는 깨달음에 도달한 것이다. 본질적 자아, 즉 내면적 자아를 유지할 때 비로소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거나 유혹당하지 않게 된다.  

형은 자신의 집에 스스로 명칭을 붙여 자신을 지키고자 했고, 그 동생은 그러한 마음의 수양을 기(記)를 통해서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저본으로 삼고자 했다.  이런 자세야말로 바로 지식과 행동이 서로 일치된다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인 것이다.

오늘날처럼 복잡하면서도 하룻밤 자고나면 쉽게 변화되는 이 세상 속에서 '성찰', '수신', '청상'이라는 단어는 고리타분한 고어에 불과하며 그런 일상에 쫓기듯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실천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에는 다산이 학문적 성과를 이룰 수 있었던 공부 방법과 수많은 저작을 펴낼 수 있었던 비법, 공부의 기본 자세,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에서부터 거처의 규모와 생활의 법도, 재산 증식과 경제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산이 들려주는 삶의 성찰과 충고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비록 유배에 묶인 몸이지만 그가 쓴 맑은 글 속에는 여전히 세태를 꿰뚫어보는 지성과 함께 묻어나는 '인생의 대스승'으로서 살가운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높은 관리에서 하루아침에 유배객이 된 다산은 자신의 처지에 좌절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해 5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어마어마한 책의 권수로 남겨진 학문적 업적만으로 다산 정약용의 업적을 평가하기에는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는 학자이기 전에 민의(民意)를 먼저 생각했던 관리였다.실용에 맞지 않으면 임금 앞에서도 승복하지 않았고, 진리를 위해서라면 주자(朱子)와도 맞섰으며, 처절한 불행 앞에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았던 다산에게서 다시금 삶의 혜안(慧眼)을 구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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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11-27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하에 잃기 쉬운 것에 '나'만한 것이 없다.」

요즘 읽는 책마다 그 속에 '내'가 있어서
'거 참, 여기 저기 나를 많이도 흘리고 다녔구나.'
싶던 차에 저 말을 읽으니, 참,
아픕니다.

cyrus 2011-11-29 12:26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요. 저는 어제 학교 수업 시간에 이고그램 평가를
해봤는데요.. '나'라는 존재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본인 스스로 자신의 본질적 모습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하더군요,
다산 선생의 짧은 말씀이 한 쪽 어깨를 내리치는 죽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

yamoo 2011-11-27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민 샘 책이 눈에 들어오네요~ 정민 샘 글 좋지요~^^

다산이 지은 책이 500권이 넘는답니다! 후와~~ㅎㅎ

cyrus 2011-11-29 12:27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이 분이 쓰신 글을 좋아하면 즐겨 읽는 편입니다.
가끔씩 생각나면 다시 읽기도 합니다. ^^

아이리시스 2011-11-29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와- 500권. 저는 어젯밤부터 <흑산> 읽는 중인데 정약용 형제의 삶은 매번 읽어도 매번 대단해요. 얼마나 잘 까먹는지 읽을 때마다 새롭고..^^

cyrus 2011-11-30 23:47   좋아요 0 | URL
최근에 나온 김훈의 신작이 정약용과 관련된 이야기였군요,
저도 꼭 읽어봐야겠는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