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아이 펭귄클래식 21
오스카 와일드 지음, 김전유경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세상에서 참다운 행복은 남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에게 주는 것이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싱적인 것이든,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행동이기 때문이다.
 
 - 아나톨 프랑스 -  

  

  

  동화 같은 9개의 단편들  

 

 

<행복한 왕자>라는 제목을 듣게 되면, 누구든지 ' 아! 그 동화. ' 라고 떠오르게 된다. 어떤 이는 어렸을 때 눈물을 훔치면서 읽었던 동화이며 또 어떤 이는 유치원 시절에 어여쁜 선생님이 구연하는 이야기로 들었을 것이다.  

굳이 소개 안 해도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많은 이들은 이 이야기를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라고 생각한다. 내용은 읽어보면 동화 같은 구성을 띄고 있다. 그러나 <행복한 왕자>는 단편소설로 분류된다. 아일랜드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이 이야기를 포함한 짤막한 단편소설들을 모아 출간하면서 이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 (1854~1900)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행복한 왕자>가 발표된 당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오스카 와일드가 생전에 화려하고 대중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문학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생전의 화려한 인기들은 그의 머릿속에 나온 작품들 때문이 아니었다. 기성 사회의 흐름을 무시한 채 온 몸을 장식하고 있는 와일드 특유 패션 감각과 잘 생긴 외모 그리고 재치있는 언변 때문에 '오스카 와일드' 라는 이름을 상류층의 사회에 알릴 수 있었다. 작가로서의 명성은 상류층에서의 명성과 비교하면 길지가 않다. <행복한 왕자>가 수록된 단편집이 출간되었을 때는 책이 그다지 많이 팔리지 않았으며 지금도 오스카 와일드의 대표작이라고 일컫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는 출판사로부터 한 번 출판 거절당한 이력이 있었으며 출간 당시만해도 그렇게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행복한 왕자> 외 총 8편을 읽게 되면 그 당시 출판사들이 오스카가 쓴 원고를 손사레쳤는지 알 수 있다. 소설 구성과 내용면에서는 아쉬운 점이 없다. 대중들이 좋아하지 않을법한 느낌이 든다. 다시 말하자면, 독자들의 시선을 끌 수 없는 흡인력이 부족하다. 동화 같은 와일드의 단편소설들은 어린이들에게는 좋아하겠지만 어른들에게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로만 볼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향한 오스카 와일드의 냉소적인 시선    

이 작품의 서문을 쓴 이안 스몰은 그와 관련된 편지와 글들을 통해서 실제로 오스카 와일드는 자신의 유일한 핏줄인 두 자녀를 사랑스럽게 여겼던 자상한 아버지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소설들은 단순히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로만 볼 수 없다. 이 짧은 단편소설들에서는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해 물질만능주의가 팽배되어 가고 있던 유럽 사회에 대한 그의 시선을 읽을 수 있다. 

<행복한 왕자>에서 왕자는 도덕주의자이다.  자신의 발 밑에 위치하는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몇 몇 사람들이 가난과 추위에 고통받고 있는 사실에 슬픔에 빠진다. 그래서 자신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금, 자신의 두 눈을 이루고 있는 푸른 사파이어 그리고 자신이 쥐고 있는 칼자루에 박힌 붉은 루비를 절친한 존재인 제비를 통해서 보내게 한다. 온 몸에 박힌 황금을 거의 다 때어낸 왕자는 예전과 같은 화려한 황금색이 감돌지 않았고 그냥 허름한 돌덩어리로 전락하고 만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왕자의 동상이 초라해졌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동료들 따라 따뜻한 곳으로 이동하지 못하면서까지 왕자의 덕행이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준 제비 역시 너무 쓸쓸하게 최후를 맞게 된다. 하느님의 구원으로 왕자와 제비는 따뜻한 천국으로 인도되면서 이야기는 헤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왕자와 제비의 참된 덕행의 실천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외면하는 도시 사람들의 모습은 작품을 다 읽었어도 뒷맛이 개운치 않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쓸모 없어진 왕자의 동상을 용광로에 녹여 다시 새로운 동상을 만들기로 결정하는데 끝내 녹여지지 않은 납으로 이루어진 왕자의 심장은 쓰레기터에 버려지고 만다. 이를 통해 본질적인 내면보다는 겉으로만 보이는 화려한 이면을 중시하는 인간의 심성을 확인할 수 있다. 

<별에서 온 아이>에서도 <행복한 왕자>에서 말하고자 하는 교훈과 유사하며 이에 대한 와일드의 생각이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야기가 시작하는 부분에서는 나무꾼들의 대화를 통해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의 양극화와 불평등을 냉소적으로 비꼬고 있다.  

  " 왜 우리가 기뻐하는 거지? 인생은 부자를 위한 것이지 우리 같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데 말이야. 숲에서 얼어 죽거나 짐승에게 잡아먹히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 
   다른 하나가 대답했다. 
   " 맞아. 대부분이 몇몇 사람에게 돌아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아주 적은 양을 나누어 가지지. 세상은 불공평해. 슬픔을 제외하고는 평등하게 나눠지는 게 아무것도 없어. "

            - [별에서 온 아이] 오스카 와일드, 김전유경 역, 펭귄클래식코리아, p 206 -   

이런 냉소적인 마음은 우연히 숲에서 별에서 온 아이를 발견되는 장면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훗날 별에서 온 아이를 키우게 된 착한 마음씨를 가진 나무꾼은 이 아이를 가엾게 여기면서 자신의 집으로 데러오려고 하지만 동행한 나머지 나무꾼들은 자신들의 가난한 처지를 이유로 대면서 이 아이를 키울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아이를 감싸고 있는 망토를 달라고 우기기도 한다. 부에 집착하면서도 자신의 영리를 위해서는 연약한 갓난아기마저 외면하는, 인간성이 상실된 자본주의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병리적인 사회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도덕한 행동을 하게 된다. 착한 나무꾼의 손에서 기른 별에서 온 아이는 남을 이해하지 않고 무조건 괴롭히는 불량 소년으로 자라고 만다. 비행에 대한 죄값으로 별에서 온 아이는 두꺼비 얼굴에다가 뱀의 몸을 가진, 기괴한 괴물로 변하게 된다. 못된 심성으로 가득찬 자신의 모습을 알아차리고 나서야 자신이 지금까지 저지른 과오들을 반성하게 된다. 그 후로 별에서 온 아이는 과오들을 스스로 반성하기 위해서 착한 일들을 하기 시작하며 결말에 이르러서는 아이는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으며 그토록 찾고 싶어했던 진짜 부모님을 만나게 된다. 옛날부터 전해내려오는 예언대로 별에서 온 아이는 선정을 베푸는 왕이 된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읽게 되면 독자들에게 교훈을 주는 동시에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소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오스카 와일드는 무슨 의도에서인지 이 이야기에서는 예상치 못한 반전으로 마무리짓는다.  

하지만 아이는 그리 오랫동안 그 도시를 다스리지는 못했다. 고생을 너무 심하게 한 데다 너무 힘든 시험을 거쳤기 때문이었다. 삼 년이 지난 아이는 죽었다. 그리고 아이의 뒤를 이어 다시 사악한 왕이 도시를 다스렸다.

                                                   - [별에서 온 아이] p 227 -  

올바른 미덕보다는 부에 대한 끝이 없는 원초적 탐욕 그리고 따뜻한 휴머니즘은 사라지고 이기심이 많아져버린 세상을 표현하고 있다.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마음씨 착한 왕자들이 여러 명 있다고 해도 이 세상이 성서 속 낙원처럼 될 수가 없다. 오스카 와일드는 단편소설들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폐해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인격적 완성으로 구축된 인간성과 박애주의를 강조하고 있지만 도덕주의로만으로는 사회의 병리적인 문제점들을 고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입장 역시 피력하고 있다.  


 

  작품의 구성대로 살아간 오스카 와일드의 삶  

이 두 작품 말고도 나머지 작품들 속에서도 선과 악으로 대비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런 설정을 통해서 오스카 와일드는 도덕적 가치 확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설정된 선과 악의 대비는 이율배반적인 구도를 이루면서도 동등한 타당성과 현실성이 느껴진다. 어쩌면 이런 소설 속 설정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소설을 쓴 오스카 와일드의 삶 역시 이율배반적이었다. 이미 사회의 부조리한 이면을 꿰뚫은 오스카 와일드 역시 하나의 인간에게 미치는 사회의 거대한 기류를 거부할 수 없었는가 보다. 우리에게 오스카 와일드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자상한 아버지라는 모습보다는 생계와 인기를 위해서 사교계에 발을 내딛었던 독특한 이력과 동성애자라는 면이 더 많이 부각되기 마련이다. 더욱이 정신보다는 미적 가치와 감각을 중시하는 유미주의의 주창자라는 이미지가 더해져져서 오스카 와일드라고 하면 비도덕주의적인 인상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의 늘그막 인생을 알게 되면 오스카 와일드라는 작가가 딱하게 여겨질 것이다. 동성애 혐의로 인한 감옥 생활을 하고난 뒤 그는 가난하고 불우한 삶을 살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가 사랑하던 자식들을 이제 다시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병으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의 인생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해준 소설 속 주인공 행복한 왕자를 연상케 해준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사랑과 온정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말로는 비참하였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서 화려하고 밝은 면은 어두운 면에 가려지고 말았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스스로 파괴했지만 결국에는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한 채 버려져야만 했던 불쌍한 왕자처럼 말이다.

 

 * 사진 출처  http://blog.naver.com/ruthkim0212?Redirect=Log&logNo=700176874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살던 용산 평화 발자국 2
김성희 외 지음 / 보리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TV 모니터 안에서 본 용산 

군대에서는 저녁 점호하기 전에 30분동안 뉴스를 시청해야하는 장병들이 지켜야할 생활 규정이 있다. 점호를 하기 시작하는 9시 30분까지동안 모든 소대는 당직 간부들의 통제하에 뉴스를 시청하게 되는 것이다. 절대로 그 시간에는 뉴스 이외에는 다른 TV 프로그램을 볼 수 없다. 사회세상에 관심 없던 사람들도 군인이 되면 어쩔 수 없이 뉴스를 보게 된다. 하지만 말만 간부 통제이지 실제로는 당직 간부가 모든 소대가 뉴스를 보고 있는지 일일이 확인하기가 힘들다. 하루 당직근무를 서는 간부마다 스타일이 다르다. 아예 당직실 밖으로 나갈 생각을 안 하는 간부도 있고, 가끔 소대원들 몰래 돌아다니면서 장병들이 뉴스를 보고 있는지 안 보는지 확인하기도 한다. 뉴스 이외에 다른 프로그램을 몰래 보다가 재수 없게 간부에게 적발되기도 한다. 

내가 일병 3호봉이었던 2009년 1월 저녁, 여느 날과 다름없이 소대원들이 생활관 한 곳에 모여 뉴스를 시청하였다. 그 때 소대 왕고였던 K 병장이라는 선임이 있었는데 소대 왕고답게 그의 손에 리모콘이 쥐어지게 되면 짬이 안 되는 소대원들은 아무 군말 없이 K 병장이 보는 TV 채널을 봐야만 했다.  리모콘의 절대권력을 가진 병장들은 뉴스보다는 연예인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기 마련이다. 그러나 K 병장은 일반 병장들과는 다르게 뉴스를 잘 보는 편이었다.  

그 때도 딱 정확히. 시곗바늘이 9로 향하는 순간, K 병장은 자신의 손에 쥐고 있던 리모콘으로 뉴스가 하고 있는 채널로 돌렸다.  

K 병장이 돌려놓은 채널의 뉴스 속 장면에는 옥상 위에는 커다란 불길과 시커먼 연기에 휩싸여있었고, 그 불길을 제거하기 위해서 거대 포크레인에 연결된 컨테이너 박스 안의 경찰 특공대들은 호스로 화재를 진압하고 있었다.   

 ' 뭐지?. 사람이 살고 있는 옥상 위에 커다란 화재가 일어난건가? '  

나는 부주의로 인한 단순 화재 사고인줄 알았다. 하지만 뉴스 자막을 본 순간, 내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용산 4지구 철거민 망루 농성 화재 진압 중 철거민 5명, 경찰 특공대 1명 사망 

알고보니, 옥상 망루 위에서 용산 재개발에 반대하는 철거민들의 시위와 그 시위를 진압을 하기 위한 경찰 특공대가 서로 대치를 하다가 큰 화재 사고가 일어난 것이었다. 그 사고로 인해서 망루에 있었던 시위에 참여한 철거민 5명이 사망하였고 시위를 진압하던 경철 특공대원 1명이 사망한 사고였다.    

그러자, 뉴스를 보고 있던 K 병장은 욕설과 함게 한마디 내뱉었다.  

   " XX, 아무리 자신들이 못산다고 그렇지 경찰 특공대가 투입할 정도로 저렇게 시위를  

   과격하게 하는지 몰라. "

마침 옆에 있던 상병 선임도 K 병장의 말에 한 마디 거들었다. 

  " 그러게 말입니다. 괜히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 특공대 한 명이 죽었다니. 

  그 죽은 경찰 특공대 XX가 불쌍합니다. " 

K 병장은 이런 암울한 뉴스을 못 봐주겠다면서 다른 뉴스 채널로 돌려버렸다. 그러고는 곧 전역하면 저런 시끄럽기만한 세상에서 생활해야한다는 생각에 암울하다고 말했다.   

그렇다. K 병장 말대로 2009년 1월 20일 이후, 내가 머무르고 있는 부대 밖 대한민국은 무척 시끄러웠다. 특히, 용산에서는 자신들의 살아갈 권리를 지키기 위한 철거민들의 필사적인 울부짖음과 분노로 들끊었다.   

  

 

  6인의 만화가의 시선으로 본 용산 

군인이라는 신분은 사회에 대한 입장 혹은 정부에 대한 자신의 의견들을 공공장소에서 밝힐 수 없다. 군법에 어긋난 규정에 입각하여 심하면 가볍게 징계, 심하면 구속 처리까지 갈 수 있다. 점호를 하기 전에 뉴스를 본다고는 하지만, 점호 전의 군인들의 군기를 확립하기 위한 일종의 통제수단에 불과하다.  뉴스에서 FTA  반대 시위 장면이나 미국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 장면을 보더라도 군인은 이에 대해서 언급해서는 안 된다. 군인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를 지켜나가야 할 대한민국의 국력을 대표하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인 시절에는 용산 참사에 대해서 심도있는 뉴스나 자료를 접하기가 어렵다. 대한민국 정부와 관련된 민감한 사회문제나 시안은 군 부대에서는 언급을 잘 안하기도 한다. 그래서 군인이었을 때 뉴스 소식을 보게 되면 당연히 뉴스에서 전하고 있는 입장에서만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검찰이 용산 시위와 관련된 철거민들을 구속했다는 뉴스를 보게 되면, 철거민들은 졸지에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이라고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된다.  일반인과 다른 제한되고 특수적인 환경 때문에 군인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의도치 않게 현상을 단면으로만 보게 되고, 그로 인해 형성되는 인식의 폭 역시 제한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인식의 문제보다 더 심각한 점은 일방적이면서도 편파적인 언론과 TV의 정보 전달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중들의 인식 문제이다. 대중들은 하나의 현상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을 접할 수 있는 정보 매체들을 다루줄 아는 것은 물론이며 스스로 생각하고, 현상의 깊은 의미를 파고들어 볼 줄 아는 고도의 통찰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김성희, 김수박, 김홍모, 신성식, 앙꼬, 유승하. 이 6인의 만화가들은 우리나라 국민들과 정부가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아니 사건 자체뿐만 아니라 그 사건의 이면까지도 외면하려던 용산 참사와 철거민들의 이야기들을 만화로 재구성하였다.  

만화가들의 각기 다른 개성이 담겨진 서로 다른 6개의 시선들이지만 이들이 보는 시선은 모두 하나같이 한 방향이다. 경찰은 용산 참사에 희생된 5명의 철거민을 사회에 반하는 폭도라고 일방적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용산 시위와 관련된 철거민들을 특수공무집행 방해라는 이유로 구속 조치를 내렸다. 그리고 올해 11월 11일에는 2009년 용산 시위 당시 참여했으며 그 시위로 인해 사망한 故 이상림 씨의 아들인 이충연 용산 4구역 철거민 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징역 5년 선고를 받게 되었다.  

6명의 만화가는 용산 참사에 희생된 철거민들을 폭도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왜 그들이 폭도가 되었는지 그들의 삶을 한 컷 한 컷에 채워 넣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시 한 번 용산 참사의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우리처럼 똑같은 이웃이며 아버지였던 그들

자신들이 세웠던 옥상 망루 안에서 세상을 떠난 이상림, 양회성, 이성수, 한대성, 윤용헌 씨는 우리와 다를게 없는 평범한 일상을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용산 참사를 일으킨 폭도이기전에는 가족들 먹여 살리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하며 가정 살림을 책임져야하는 아버지들이었다. 그리고 비록 가난한 형편이었지만 항상 친구들이나 가족들 앞에서는 웃음이 가득하며 동료들과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 주위에 볼 수 있는 이웃들이었다. 

고생 끝에 얻은 작은 집과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직장이 있는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은 거대한 바위에 부딪히는 계란이 되어야 했다. 재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강제적으로 마을을 철거하려는 대기업과 그 밑에서 대기업의 든든한 보호 아래 철거민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용역들을 하루하루 상대해야만 했다. 같은 동병상련의 처지인 동네 철거민들이 모여 자신들의 생존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고군분투하였지만 이들에게는 벅찬 일이었다.  

결국, 자신들보다 막강한 힘과 권리를 가진 대기업이라는 거대한 바위 앞에 용산 철거민들의 투쟁은 여지없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심지어 시위 중에 사망한 5명의 철거민에 대한 보상과 위로금을 정부로부터 지급받지도 못하였다. 지금도 용산 참사 범국민 대책위원회와 정부는 보상과 위로금 문제로 협상중이다. 정부는 그들에게는 불행한 사고에 대해서 유감과 사과를 표명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려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충연 씨의 판결 소식을 접한 어머니 전재숙 씨는 “있는 사람들은 살고, 없는 사람들은 죽는 나라가 된 것 같다” 고 지금까지 마음 속에 쌓아왔던 분노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현재도 용산 철거민들은 일용직에 나서면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국제 엠네스티 아이린 칸 사무총장은 용산 참사 사건에 대해서 불법행위다 아니다 규정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사태를 수습하느냐가 우선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용산 철거민에 대한 정부의 안일한 자세를 비난하며 이들을 위한 배상이 마련될 것을 촉구하였다.  

참사기 일어난지 이제 2년째 접어들어가고 있다.  내년 1월 20일은 용산 참사 희생자 추모 2주년이 되는 날이다. 용산 참사의 진상 규명과 희생된 이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 유가족과 철거민들은 지금도 투쟁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단지 그 목적에 연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거대한 화마 속에서 쓰러진 5명의 철거민들이 생전에 꿈꿔왔던 것. 지금보다 더 나은 희망적인 삶을 찾기 위해서, 그리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살아갈수 있는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서 차가워지고 있는 날씨 속에서도 오늘도 투쟁을 벌이고 있다.

 

  

 

* 기사 출처 

경향신문 2010년 11월 11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11112153395&code=940702 

 

뷰스앤뉴스(아이린 칸 국제엠네스티 사무총장 관련 기사)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56994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이조부 2010-11-28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저도 이 책 읽고 친구한테 선물로 줬는데 반갑네요~

이런 일이 또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뜻대로 아마 안되겠죠

cyrus 2010-11-29 18:1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이런 일이 더 이상 생기길 바라고 있지만 세상이 꼭
밝은 면만 있는 것도 아니기에 안타까울 뿐이네요.
 
그렌델 펭귄클래식 53
존 가드너 지음, 김전유경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발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 서정주 <문둥이> - 
 

  

  나병 시인, 한하운을 아십니까?

우리나라 문학 출판시장에 시집이 많이 출간되고 있지만, 생각보다 잘 안 읽혀지기도 하는 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사람들, 책을 잘 안 읽는 국민으로 유명한데 그 짧은 시들이 수록된, 읽기 편한 시집마저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 이전, 다시 말하자면 일제 강점기 시대부터 해방 전후 시대까지 활동한 시인의 시집들도 만나기 어려워졌다.  정지용, 윤동주, 김소월, 김영랑 등 일제 강점기 때 활동했으며 대한민국 사람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유명 시인들의 작품들이 간간이 시 전집 형태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들마저도 현대의 독자들에게 외면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제 이들의 시는 한국 문학사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으며 국어 교과서나 수능 언어영역 문제집, 그리고 수능시험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대한민국 수험생들을 위한 글이 되어 문학적 가치와 작품성이 격하되고 말았다. 이들의 문학적 작품성과 가치는 암기 위주의 입시교육에 파묻히게 되었다.   

글의 시작부터 본의 아니게 우리나라 시집에 대한 비관적인 현실을 언급하고 있는데 사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루에 100여 권 정도씩 사이트에 소개되는 수많은 신간도서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인 이 시 전집 때문이다.  

한하운 , , ,  왠만하면 EBS 언어영역 문제집에 나오는 한국 시인들의 작품들을 줄줄이 꿰뚫고 있는 수험생들의 이 사람의 시를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국어 교과서나 언어영역 문제집, 그리고 수능 모의고사 정도에 이 시인의 작품이 한 번 나올까 말까할 것이다. (내가 고등학생 3년 생활동안 교과서, 문제집, 수능 시험지 통틀어서 한하운의 시를 접한 적이 없었다) 그런 시인의 작품이 전집으로 나올 줄이야.   

 


  


그러나, (대략 추정하면) 연세가 50대 이상인 분들에게는 이 시인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한하운은 우리나라 문학사에 보기 드문, (본인에게는 문학사에서의 자신의 기록을 혐오했겠지만) 나병 환자 시인이다. 그가 당시 활동하던 1950~60년대 때에는 나병은 무시무시한 병이었으며 특히 이 병에 걸린 환자들은 아예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멸시를 받아야만 했다. 나병은 나균이 감염되어 피부가 썩어가는 병이다. 나병은 전염병이기도 하지만 격리가 필요한 질환은 아니며 성적인 접촉이나 임신을 통해서도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의학기술이 발달되지 못했던 옛날에는 나병에 걸리기만 하면 쉽게 치유할 수 없는 불치병이었으며 환자의 눈만 마주쳐도 병균이 옮긴다고 생각했다. 얼굴과 손에 썩어간 채 살아가는 나병 환자의 모습에 대한 혐오증이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병 환자들에게 문둥이라고 부르면서 천시하였다.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 나병 환자들은 정상인들의 핍박과 멸시를 피하기 위해서 전남 고흥군에 위치한 소록도에 갇혀 살아야만 했다. 그래서 지금도 소록도에는 나병 환자들이 격리되었던 병원 시설이 남아 있기도 하다.

이런 분위기의 시대 속에서 한하운은 1949년, 첫 시집을 발간하면서 나병 시인으로써 문단에 첫 발에 내딛게 된다. 그의 시에는 문둥이로서 살아가면서 겪은 병마의 고통과 사람 대접 받지 못한 채 살아가야하는 서러운 삶을 노래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대체적으로 슬프기도 하여 대중들의 감성을 자극하였으며 지금도 <파랑새><보리피리><황토길> 등이 애송되고 있다. 

 

  

  흉칙한 괴물, 그렌델을 아십니까? 

<한하운 전집>의 출판을 알게 되면서 작가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게 되면서 때마침 그 때 읽고 있었던 그렌델이라는 괴물이 떠올렸다.  그렌델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이름이기도 하다.  

 


고대 영웅 서사시의 원작을 토대로 만든 애니메이션 영화 <베어울프>

 

하지만, 2년 전에 우리나라에 개봉했던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베오울프>를 보신 분이라면 '그렌델' 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았을 것이다.    

 

* 영화 제목에서는 ' 베오울프' 라고 하고 있지만, 펭클클래식 판본에서는 ' 베어울프 ' 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영어법 표기가 혼동하고 있어서 여기서는 ' 베어울프' 라고 명시하겠다.

이 헐리우드 제작 영화는 원래 고대 영국에서 쓰여진 가장 오래된 서사시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덴마크의 흐로드가르 왕의 용사들을 잔인하게 잡아 먹어버리는 괴물 그렌델을 덴마크의 이웃나라인 게아타스의 젋은 무사 베어울프가 무찌르게 되면서 주인공 베어울프는 케아타스의 왕이 된다. 이 영웅적인 왕은 자신의 나라를 위협하는 존재인 용을 무찌르게 되느데 용과 싸우고 난 뒤에 부상으로 사망하게 된다는, 일종의 영웅담이다.  

헐리우드 영화 <베오울프>의 내용 역시 서사시의 원전 내용을 토대로 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인간 형태로 변신하여 아름다움으로 베오울프를 유혹하기도 하는 그렌델의 어머니가 등장하는데 유명한 헐리우드 섹시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가 분하였다. (이 글에서는 사족이지만 극장에서 이 영화를 직접 봤다. 인간 형태로 변한 그렌델의 어머니는 누드 상태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실제로 안젤리나 졸리의 몸매를 본떠 만들어 캐릭터를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지루하기만한 영국 서사시 원작의 영화 내용 속에서 제일 기억나는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안젤리나 졸리가 분한 그렌델의 어머니의 첫 등장 장면을 언급할 것이다. 남자 관객들이 왜 그 장면을 꼽는지 직접 영화를 보게 되면 알 것이다) 

이 영화에서 그렌델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는, 그야말로 무서운 괴물로 등장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어머니 앞에서는 연약한 아기(?)가 되는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나 원작의 서사시의 주인공은 뭐니뭐니해도 영웅 베어울프다. 그렌델은 착한 영웅의 이미지와 반대되는 악의 이미지이며 영웅인 주인공을 띄우기 위해 희생되어야하는 캐릭터에 불과하다.   

   

  '인간' 이 되고 싶어하는 철학적인 괴물 그렌델

하지만, 존 가드너가 재구성한 베어울프에서는 괴물 그렌델이 주인공이다. 일종의 패러디 기법 차원으로 작품 제목 역시 <그렌델>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그렌델 역시 흐로드가르 왕의 용사들을 죽이는 괴물로 등장하고 있지만, 잔인함과 공포로만 가득찬 괴물로 등장하지 않는다. 자신이 흉측한 모습의 '괴물' 로 살아가고 있는 정체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되며, 오히려 자신들보다 더 잔인한 본성을 드러내는 인간들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그렌델의 모습은 판편의 철학자를 연상하게 한다. 이 작품에서는 그렌델의 심적 고통과 갈등들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영화 <베오울프>를 본 나나 독자들에게는 새롭게 재구성한 베어울프의 이야기가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고 있는 그렌델의 본성은 인간과 흡사하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 될 수 없었다. 아니, 인간으로 분류할 수도 없는 존재다. 그의 모습은 무시무시하고 흉측한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이야기 시작 부분에 그렌델은 고목 사이의 틈에 발이 끼이면서 혼자서 빠져나오려고 애를 쓰게 된다. 그러다가 그런 모습을 흐로드가르 왕과 그의 일행들이 우연히 목격하게 된다. 왕은 정체불명의 짐승이 나무에 있는 거을 보고 호기심을 갖게 된다. 어두운 동굴에서만 살았던 그렌델은 이 때부터 인간이라는 존재를 처음 만나게 된다. 그는 지금 한쪽 발이 고목 틈에 끼여 움직일 도리가 없었으며 애초에 왕과 일행들을 해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왕과 그 일행들은 인간이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짐승에게 섣불리 다가가기가 두려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왕이 여섯 명을 골라냈다. " 가서 돼지를 가져오너라. "  

  " 네, 폐하! " 

  그들은 그렇게 대답한 뒤 말을 타고 사라졌다. 나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모든 것이 미친 짓 같았지만 어쨌든 나는 기뻐서 웃었다. 그러자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서더니 부들부들 떨면서 나는 올라다보았다.  

  - <그렌델> 존 가드너, 김전유경 역, 펭귄클래식코리아, p 35 -  

몇 시간동안 나무에 발이 끼인채 자신을 도와주기를 바랬던 그렌델은 기쁨의 정서를 표시하기 위해서 웃고 있지만, 왕의 일행들 입장에서는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내는 위협적인 울음소리에 불과하다. 그리고 왕의 일행들은 일제히 그렌델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갑작스런 인간의 공격에 그렌델은 당황하게 되며 공포감에 질린 상태에서 비명을 질러대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에게는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 저것을 포위하라! "   왕이 소리쳤다.   " 말을 지켜라! " 

  그러자 나는 지금 내가 상대하고 있는 것이 우둔하고 기계적인 황소가 아니라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것. 일정한 패턴을 만들어내는 동물이자 이제껏 본 중 가장 위험한 동물이라는 사실을 갑작스럽게 깨달았다. 나는 비명을 질러 그자들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덤불 뒤에 숨어서 말안장에 있떤 긴 막대와 활, 창을 꺼내 들었다.  

  " 미쳤어, 다들 제정신이 아니야 ! " 

 - p 36 -  
 

 

결국에는 어미의 등장으로 그렌델은 살아남았지만 그는 동굴 밖 세상의 무서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스스로 각인하게 된다.

 

 나는 내게 일어났던 일 모두를, 내가 깨닫게 된 것들 모두를 어미에게 이야기하려고 했다. 세상이 얼마나 의미 없는 대상들로 가득 차 있는지를, 우주가 얼마나 잔인한지를.

 - p 37 -   

속마음에는 인간과 유사한 이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성적인 존재인 인간은 그렌델을 포악한 괴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렌델 입장에서는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적인 자세로 인간들을 공격했던 것이다. 이렇다보니 그렌델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육하는, 겉으로는 괴물이었던 규정 불가의 존재가 정말로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괴물이 되어야만했던 그렌델과 한하운

한하운의 자서전에서도 소설 속 그렌델이 겪어야만 했던 괴물로서의 멸시와 시선과 유사한 상황을 언급하고 있다.  

 

고향 땅 함흥에 돌아왔으나, 이 꼴로 집에 들어갈 수가 없다. 더욱이 동리 사람의 눈이 무서워서 도저히 밝은 낮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진종일 이 오기를 기다렸다. (중략) 이제는 정말로 문둥이가 된 서러움에 하루 종일 잔디에서 울었다. 내가 나를 생각해 보아도 내 값이 정말로 한 푼어치도 되지 않는 것 같다.  

  - 한하운 <나의 슬픈 반생기> 중에서 -

삶에 대한 분노로 가득찬 한하운과 그렌델이 그나마 위안과 안정을 느끼게 할 수 있게 해준 것은 역설적이게도 '어둠' 으로 가득찬 밤과 동굴이었다. 이들은 사람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스스로 어둡고 음습한 환경에 생활하는 괴물 같은 인생을 선택하게 되었다.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가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이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 한하운 <파랑새> -  

이 시에서 한하운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세계에서 새로운 존재로 살고 싶은 욕구를 죽어서나마 파랑새가 되고 싶다는 갈망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지금 어디선가 파랑새가 되면서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내가 숨을 내쉬면 남아 있는 생명도 함께 빠져 나갈까?  짐승들은 내 아래 펼쳐진 깊은 협곡처럼 검고도 고요하게, 아무 생각도 없는 무심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은 기쁨인가? 

 저것들은 나의 파멸을 즐기며 사악하게, 너무나도 어리석게, 나를 계속 쳐다본다.  

  " 하찮은 그렌델이 우연히 당한 거야. " 

 나는 속삭인다.  " 너희 모두가 그럴 것처럼. "  

 - p 211 -  

하지만 그렌델은 서사시의 결말대로 베어울프의 손에 죽고 만다. 한 번 괴물은 영원한 괴물로 남게 되는걸까?  소설 마지막 장면에서 인간을 향한 그렌델의 냉소적인 독백을 읽을수록 그의 죽음이 안타깝게만 느껴진다. 괴물에게는 인간처럼 희망과 자유, 그리고 구원을 바랄 수 없는 존재인 것일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0-11-26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네요. 한하운과 그렌델을 이렇게 연결시켜 놓을 수도 있군요.
저도 한하운 이름만 들어봤지 실제로 알려고 하지 못했습니다.
그렌델 읽어보고 시어지는데요?
베오울프가 애니메이션이었나요? 그냥 영환 줄 알았는데...크

cyrus 2010-11-27 14:58   좋아요 0 | URL
저도 개봉 당시 보러가기 전에 영환줄 알았는데,,
어린이 관람자들을 겨냥할뻔한(?) 애니메이션이었더군요.
만화는 만화인데,, 어린이들이 보기에는 잔인하고 선정적인 장면이
있어서,, 아마도 18세 미만 관람자 불가일겁니다. ^^;;
그리고 유명 헐리우드 배우들이 더빙에 참여했는데
앤소니 홉킨스, 존 말코비치, 그리고 그렌델의 어머니 목소리로는
당연히 안젤리나 졸리가 참여했습니다.

반딧불이 2010-11-27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하운 전집이 출간되었군요. 반가운 소식 고맙습니다.

cyrus 2010-11-27 14:56   좋아요 0 | URL
도서관에서 한하운 전집을 희망도서 신청했는데,,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시뿐만 아니라 작가의 산문들도
수록되어서 800여페이지 정도 될겁니다.

비로그인 2010-11-27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오울프와 한하운 ^^

"베오울프" 는 보면서 나름 재밌게 보면서도 많은(?..^^) 생각을 했는데 cyrus님 얘기를 들으니 그때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한하운 전집 은 요새 조금씩 읽고 있네요~

cyrus 2010-11-27 23:39   좋아요 0 | URL
저도 얼른 그의 시를 접하고 싶네요.^^
 
이성적 낙관주의자 - 번영은 어떻게 진화하는가?
매트 리들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구에 종말은 없다

어느 일간지의 북섹션에서 매트 리들리의 신작도서에 대한 소개를 접하게 되면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주장의 내용들이 흥미로웠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류의 미래가 낙관적이다는 전망이 담긴 책이었다.  그리고 책이 왠지 도발적으로 느껴졌다. 자연적인 삶을 예찬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와 화학 약품 사용의 위험성을 경고한 레이첼 카슨을 비판하기도 하며 지금 지구촌의 거대 화두인 지구 온난화 문제와 녹색 성장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듣보잡이라는 '듣도 보지 못한 잡놈' 이라는 뜻의 인터넷 은어가 있다. 아마도 이 책의 저자가 듣보잡 전문가라면 독자들은 이 책의 내용과 제목을 쉽게 외면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나온 이 도발적인 책의 저자는 <게놈><붉은 여왕> 등 과학 베스트셀러를 쓴 대중적인 과학 저술가로 유명한 매트 리들리이다. 작가의 인지도 덕분인지 '이성적 낙관주의자' 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벌써부터(책을 읽지도 않았는데!) 저자의 주장이 수긍이 가는 느낌도 날 법하다. 

  

 

  신문기사에서 이미 읽어버린 책 

그런데 북섹션을 먼저 본 게 독서의 흠이었다. 간혹 북섹션을 담당하는 기자들은 자신이 소개하려는 책이 좀 더 잘 팔리기 위해서 책 내용을 과장하게 쓴다거나 혹은 노골적으로 책의 주요 내용을 대놓고 소개하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아마도 내가 접한 <이성적 낙관주의자> 북섹션 기사는 후자에 속한다.    

(참고문헌과 찾아보기 내용을 제외한) 총 540페이지의 두꺼운 책을 50여줄로 된 신문기사에서 이미 읽어버린 셈이다. 그리고 이 두꺼운 책을 굳이 다 읽을 필요도 없었다. 이 책의 해제를 담당한 이인식 과학문화연구소장의 글에서도 이 책의 주제를 접할 수도 있고, 고맙게도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변역가 조현욱 씨의 글에서도 다시 한 번 저자의 주장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과감하게 완독하지 않았다. 북섹션 기사와 이인식 소장의 서문, 그리고 옮긴이의 글만으로도 이 책의 중요 논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자의 논지를 간략히 소개하자면 인류가 지금까지의 번영의 시대로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집단지능' 덕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집단지능에 대한 언급은 책의 프롤로그뿐만 아니라, 이인식 소장의 해제문에서도 볼 수있다)   인류의 지능이 집단 내에서 서로 교환하여 새로운 문화가 탄생되었고, 오랜 세월을 거쳐 축적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남녀가 서로 만나 섹스를 하여 새로운 후손들이 번성하듯이 인류의 아이디어 역시 결합하여 인류의 두뇌가 점점 더 진화됨고 동시에 보다 수준 높은 문화들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인류 번영의 힘에는 과학이 있어야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의 책을 읽었던 근본적인 목적은 매트 리들리의 낙관주의적 미래상에 대한 근거를 알고 싶었다.  도대체 무슨 근거를 가지고 인류와 지구의 운명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일까?  

   

 

  방대한 분량의 자료에 비해 빈약한 통계자료

이 책의 저자가 과학, 사회, 인류학, 역사 등 다양한 학문을 넘나드는 통계자료와 참고문헌들을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지만, 이인식 소장은 매트 리들리의 주장에도 약간의 허점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의 서평에서도 저자가 제시한 통계자료가 애매하며 이를 이용하여 자의적으로 해석한 대목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하긴,  540페이지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책에 몇 줄 밖에 안 되는 주장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독자들이 저자의 주장에 수긍할 수 있을 정도의 도표와 그래프가 많이 없어서 저자의 근거를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표와 그래프 역시 조작 가능성 우려와 오류적 해석이 있을 수도 있지만, 복잡한 수치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책은 11장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챕터의 시작에만 그래프만 등장할 뿐, 글 내용에는 단 한 번의 사진자료나 그래프, 도표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책에 수록된 그래프는 총 11개뿐인 것이다. 이 그래프만 가지고 저자의 주장을 수긍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으며 문자로 설명하고 있는 통계자료와 수치들은 통계학 지식이 전무한 독자들에게는 읽기 어려울 수 있다.  

  

 

  대충 얼버무리고 있는듯한 내용들 #1 - 핵 감축이 되어가는 세계

사실, 세계 정세에 대해 깊이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지 못해서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비는 격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러나 매트 리들리는 자신의 낙과주의적 전망을 강조하기 위해서 현재의 정세의 어두운 점을 심도 있게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느껴지기도 했다.  

9장 '전환점 소동 - 1900년 이후의 비관주의' 라는 챕터에 포함되어 있는 '핵 아마겟돈' 이라는 작은 꼭지의 글의 결말은 너무 낙관적으로 마무리짓고 있다.  

 핵 감축은 단지 운이 좋았던 덕분일지 모른다. 아직도 위험이 아주 사라진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특히 한국과 파키스탄 국민들에게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좋아졌지 나빠지지 않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 매트 리들리 <이성적 낙관주의자> p 446~447 -

 

요즘 북한의 도발로 인한 한반도 정세의 긴장감 조성 탓인지 모르겠지만, 주장의 말이 그리 수긍이 가지 않았다. 세계의 평화적인 안정 도모하기 위해서 지난 5월에 UN에서 '2010년 NPT 평가회의' 가 개막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러시아 간에 '새로운 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 을 체결하였다. 이번 회의에 참석한 국가 정상들은 한목소리로 '핵 없는 세계' 를 만들자고 촉구했지만,  미국과 러시아가 체결한 협정이 제대로 이행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그리고 이번 회의에서 미국은 감축보다는 비확산 쪽으로 감안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들이 불리한 입장에 처하면 '국제 사회의 규칙' 이라는 명분 아래에 미사일 감축협정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이번에 맺은 러시아 간의 새로운 무기감축협정 역시 얼마나 신뢰성이 오래 갈 수 있을지 불분명하다.  

  

 

   대충 얼버무리고 있는듯한 내용들 #2 -  

  가상의 시나리오에 불과한 아프리카의 웃음  

10장 '오늘날의 양대 비관주의 - 2010년 이후의 아프리카와 기후' 에서는 아프리카 국가의 빈곤율과 저성장 문제의 오류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 대륙의 경제적 성장을 위한 그의 대안은 가상의 시나리오에 불과하다. 

 

상향식 변화의 깔끔한 사례로는, 아프리카 전역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뜻밖에도 휴대전화에 신나게 몰입한 것을 들 수 있다. (중략) 휴대전화는 일자를 찾는 일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서비스에 대해 돈을 지불하고 받는 것도 가능하게 해준다. 휴대전화 결제 제도가 사실상 비공식적인 은행이자 지불 시스템이 됐기 때문이다. 가나의 티셔츠 제조업자들은 휴대전화 결제를 이용해 미국 바이어로부터 직접 돈을 받을 수 있다. (중략) 이 같은 진보는 아프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  p 484 ~ 485 -

  

선진국의 수준 높은 산업기술을 아프리카 대륙과 같은 개발도상국에게 전수하는 것도 좋지만, 선진국이 쉽게 참여에 호응해줄지 의문이다. 그리고 개발도상국 사이에서 드러나고 있는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의 독점 및 횡포, 그리고 보다 많은 자본 창출을 위한 다국적 기업과 선진국 간의 은밀한 커넥션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개발도상국들은 선진국의 힘에 밀려 자본의 이익과 혜택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기회마저 보장되지 못한 상황이다. 선진국들의 막강한 권력 사이에 끼인 채 빈곤과 질병의 고통을 겪으면서 흘리고 있는 아프리카의 눈물이 2100년에는 과연 웃을 수 있을지 낙관적으로 예상하기에는 아직 이르게만 느껴진다.  

     

 

  2100년 후, 이 책의 평가는?

인류의 수준 높은 번영이 있기에 저자의 낙관주의적 전망은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소개하고 있는 미래에 대한 저자의 긍정적인 예견들이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2100년에 태어난 후손들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신들의 미래를 정확히 예견한, 앨빈 토플러 버금가는 불멸의 미래학의 고전이 될 것인지 아니면 너무 낙관적으로 가득찬 허무맹랑한, 별 볼 일 없는 두꺼운 책이 될지는 그 미래의 후손들이 100년 전의 석학의 주장에 대해서 평가를 내릴 것이다.  

나는 이번 저자의 주장이 미래의 긍정적인 전망을 그리고 있는 최적의 가상 시나리오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이 최적의 시나리오를 통해서 역으로 인류의 밝은 미래를 위한 청사진을 모색하는데 유용한 자료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매트 리들리가 소개하고 있는 이 수많은 참고문헌과 자료들 중에서는 믿을만한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대한 데이터들을 종합하여 가상적인 미래를 구상하는 것보다는 앞으로의 낙관적인 인류의 미래를 구현하기 위해서 모든 국가들에게는 자신들의 국가적 이익을 지키는데 급급하기보다는 개방적이면서도 자발적인 참여 자세가 필요할 때이다.

  

 

* 기사 출처 

[멀고도 먼 '핵 없는 세계']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5665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 신의 존재에 관한 한 과학자의 견해 사이언스 클래식 16
칼 세이건 지음, 박중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적인가, 사기인가

 

3년 전에 ' 피눈물 흘리는 성모 마리아 상 ' 진실 여부의 문제가 유명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통해 전국으로 전파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날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하게 되었는데 과학 이론으로 풀 수 없는 이 미스터리한 현상에 대해서 취재를 한 것이었다.  

' 기적인가, 사기인가 - 나주성모동산의 진실 ' 이라는 제목으로 타이틀을 내걸고 전파된 방송에는 문제의 성모 마리아 상뿐만 아니라 동산 곳곳에 ' 예수의 피와 살점 ' 이라는 주장하는 신비로운 현상들에 대해 심도있게 조명하였다. 그리고 그런 초현상 논란의 중심에는 ' 윤 율리아 ' 라는 인물이 있었다. 윤 율리아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기적수를 이용하여 병들고 눈 먼 신자들을 치유했다고 주장하였으며 피눈물 흘리는 성모 마리아 상이 있다고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소문을 듣고 국내는 물론 해외 천주교신자들까지도 성모 마리아 상의 피눈물을 보기 위해서 나주성모동산으로 모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주성모동산에서 100일동안 취재했던 방송 제작진들 앞에서는 마리아 상에는 어떠한 기적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성당 관계자들의 의견들과 속속들이 밝혀지는 허위 정보들을 토대로 해서 나주성모동산의 기적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 나주성모동산 측은 방송 제작팀을 상대로 방송금지가처분 신청을 하였으나 기각이 됨으로써 취재 내용은 전파를 탈 수 있었고, 이와 관련된 문제가 일파만파 커지게 되자 천주교 광주대교구 측에서는 피눈물 흘리는 성모 마리아 상 문제는 ' 허황된 맹신이 만들어낸 비신앙적인 행위 ' 라고 공식입장을 밝혔으며 나주성모동산과 관련된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성직자에게는 파문 조치를 하기로 했다.

  

  

  신(God)이 출몰하는 세상

이 세상이 과학의 진보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미스터리한 자연현상들이 발생하고 있다. 국내에서 잠시 시끄러웠던 이런 종교적인 기적 현상은 전 세계 곳곳에서도 발생한 적이 있었으며 간혹 해외토픽감으로 등장하기도 하다. 이와 유사한 기적 현상으로는 일상 속 평범한 물건이나 자연물 속에서 발견하는 예수 그리스도나 성모 마리아의 형상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형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봇대 기둥을 타고 자란 포도나무 덩쿨이 만들어낸 착시현상이다. 

관련기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105&aid=0000013957  


사진을 보는 순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라고 보일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게 되면 포도나무 덩쿨로 뒤덮인 전봇대 기둥이다.  만약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 사진 속 형상을 직접 목격했다고 가정해보자. 처음에는 당연히  ' 어라!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형상이다! ' 라고 신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중에 이런 신기한 형상을 자세히 살펴본 후에는 생각이 달라지게 된다. ' 에이, 이거 전봇대 기둥의 나무덩쿨이잖아. ' 라고 말이다. 이렇게 생각의 변환이 이루어지는 것이 정상적이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이런 생각의 변환을 하는 것이 아니다.  

간혹,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 아니! 왜 저기에 예수의 형상이 있지. 이건 분명히 예수님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증명이다 ."  포도나무 덩쿨이 무성한 전봇대 앞에서 무릎을 꿇으면서 기도를 하는 광신적인 기독교신자들을 볼 수 있는 것은 뻔한 일이다.  

이런 광신적인 기독교신자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에는 우리 주변의 자연현상들은 다 하느님의 영적인 힘이 만들어낸 것이며 하느님이야말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위대한 분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의 자연현상을 근본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과학 이론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앞에서 언급했던 나무성모동산 문제를 예로 들자면, 신비로운 기적을 행하게 한다는 윤 율리아의 기적수(그녀는 그 기적수를 율신액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녀의 몸에서 나오는 오줌이다)를 공개하는 꺼리는 입장을 보여왔다. 그리고 제작진이 ' 예수의 피와 살점 ' 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물체에 대해서 과학적인 검사를 제의했지만 윤 율리아 측에서는 이는 '성체(聖體) 중의 일부' 라고 주장하면서 끝까지 거절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과학 이론은 종교인들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설명 불가능한 말이 되어버리며 과학이야말로 하느님의 성령에 위배되는 이단적인 학문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기독교, 천주교만 이런 현상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불교 경전에서 언급되는 3천년 만에 피운다는 신령스러운 꽃인 우담바라의 발견 역시 지나친 종교 신앙이 만들어낸 오류적 사고를 용인하게 만든다.   

 
 

아파트 출입구에 있는 벽시계 밑에 핀 우담바라. 

그러나 대부분은 풀잠자리의 알이다. 

관련기사 http://www.ccdailynews.com/section/?knum=173743  

 

우담바라는 ' 부처 ' 를 의미하는 상상의 꽃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담바라가 피게 되면 길조(吉兆)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신령스러운 우담바라는 전국 곳곳에서 활짝 피우고 있다. 아니 꽃이 피우고 있다기보다는 심심찮게 어느 물건에나 달려있는 물체이다.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 '우담바라' 를 검색하면 자동차, 건물 등 어디곳이든 우담바라가 발견했다는 뉴스의 양이 꽤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신령스러운 꽃이라면 정말 일 년에 한 번 나와야 정말 신비스럽게 느껴지는데 말이다. 사실은 우담바라라고 하면서 발견되는 하얗고 미세한 물체는 실은 풀잠자리가 낳은 알이다. 그러니, 신기한 전설의 꽃을 봤다고 너무 지나치게 호들갑을 떨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 역시 지금까지 살면서 풀잠자리 애벌레가 낳은 알을 두 번은 봤다. 한 번은 시골에서, 또 한 번은 군대에서. TV에서 보던 것을 직접 보게 되니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우담바라라고 불리우는 그 풀잠자리 알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도 했다. 이번 올해는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대로 되지는 않았다. 처음 시골에서 본 건 2006년이었고, 두번째 군대에서 본 해가 2년 뒤, 2008년이었다. 2006년 11월에 쳤던 수능시험은 아주 보기좋게 말아먹었고, 2008년에 그 풀잠자리 알을 본 지 두 달 뒤인 유격훈련 중에 오른발에 골절상을 입게 되면서 3개월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만했다.  

  

 

  과학자와 종교인들이 서로 싸울수 밖에 없는 이유

그러나 이런 현상들을 언급하면서 '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 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아무 종교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 그리고 무신론자라고 해서 인류에게 보편적인 종교의 교리에 대해서 비난하려는 것도 아니다.  사실 지금 이 세상에는 '신' 이 있다고 증명하는 이론이 없거니와 '신' 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해주는 이론도 없다.   

종교는 인류의 정신적인 활동이므로 올바른 종교적 교리와 신앙을 전파하는 것이 기본적이면서도 아주 중요한 가치이다. 하지만 주장하는 내용에 대한 근거 없이 신야말로 지금의 모든 현상들을 만들어낸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말하면서 '과학' 을 내쫓는 것은 문제가 있다. 지구가 태양 주위에 돈다는 것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증명을 했으며 나무가지에 달려있던 사과가 갑자기 땅바닥으로 툭 떨어진 이 자연적인 중력의 원인은 아이작 뉴턴에 의해 밝혀졌다. 그런데도 이 모든 현상들이 창조주가 행하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칼 세이건은 이들에게는 과거에 쭉 이어져 있던 교리의 전통이 파괴되는 것을 원치 않으며 자연현상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려는 태도를 보인다고 주장하고 있다.   

칼 세이건의 주장을 유추하면 역사 속 과학과 종교 간의 대립이 지금까지도 이어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과학의 역사 속에는 등장하는 과학의 이론들은 그 전에 확립되고 있었던 패러다임을 변화화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의 자연현상에 대해서 끊임없는 탐구욕과 학계를 지배하고 있던 기존의 이론들에 대한 도전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설명할 수 없거나 혹은 과학 이론에 반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밝혀내려고 한다. 하지만 종교는 과학과는 정반대이다. 기존의 교리에 대한 거부감이나 반발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자인 칼 세이건은 종교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지 않는다. 인류에게 참된 정신적 가치와 희망을 전달하는 종교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과학이라는 학문으로 지금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자연현상의 메커니즘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해도 과학자들도 인간이기에 실수는 할 수 있다고 말하며 자신들이 습득한 과학적 지식을 내세워면서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현상을 제대로 검증 없이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는 태도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신이 있든 없든지간에 과학자들에게는 자연현상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검증하려는 자세를 가질 것을 강조하였으며 과학의 영역에 침범하여 헛된 이론을 가지고 대중들을 오도하는 종교를 비판하고 있다.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탐색이 필요할 때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는 '코스모스(Comsmos)' 적인 거대한 우주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칼 세이건의 책 제목처럼 우주 밖에서 본 지구는 정말 '창백한 푸른 점' 이다. 하지만 인류는 자신보다 더 거대한 우주와 자연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즉, 세상에 대한 무한한 탐구욕은 인류 고유의 전형적인 본성이기도 하다.

이 책은 생전에 칼 세이건의 강연 내용을 토대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이 강연의 제목은 '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탐색  ' 이었다.   

지금까지 신이 존재하다거나 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의 증명이 지금까지도 나오지 않는 이상,  '신' 에 대한 인류의 최대 논쟁은 무의미할 수 있다. 그리고 인류는 '신' 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 옳다 아니다라고 으르렁거리는 동안에 정작 '우리' 자신이 과연 누구인지에 대한 탐색을 점차 외면하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왜 여기 있는지 알지 못한다면, 삶이란 불가능하다. 

  -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중에서, 칼 세이건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p 275 재인용 -

 
   

톨스토이의 소설 속 한 구절처럼 지금 우리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다면 지금의 삶 자체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맨 처음 돌을 가지고 동물들을 샤낭할줄 밖에 몰랐던 원시인은 지금은 직접 기계들을 만들어 조작하면서 하늘을 날기도 하고 빠른 시간 내에 이곳저곳 이동하는 만능인이 되었다. 지금까지 이룩해온 인류 진보의 성과 뒤에는 지능이 있기에 가능했으며 지금도 뛰어난 지능 덕분에 살기 좋은 세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신' 이라는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는, 직접 지각할 수 없는 존재 여부에 지나치게 매달리기보다는 '우리' 라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0-11-22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적이 믿음의 수단이 된다는 자체가 얼마나 딱한 노릇인지...
나약한 믿음이라는 증거니까요.
지금 바로 이 순간을 진실되게 사는 것...그것이 기적이고 믿음입니다^^

cyrus 2010-11-22 21:11   좋아요 0 | URL
댓글이 명문장인데요. maggie님^^
알라딘이 없어지지 않는 한 maggie님 댓글도 잊혀지지 않을거 같네요.

2010-11-23 1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3 2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