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문학 출판시장에 시집이 많이 출간되고 있지만, 생각보다 잘 안 읽혀지기도 하는 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사람들, 책을 잘 안 읽는 국민으로 유명한데 그 짧은 시들이 수록된, 읽기 편한 시집마저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 이전, 다시 말하자면 일제 강점기 시대부터 해방 전후 시대까지 활동한 시인의 시집들도 만나기 어려워졌다. 정지용, 윤동주, 김소월, 김영랑 등 일제 강점기 때 활동했으며 대한민국 사람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유명 시인들의 작품들이 간간이 시 전집 형태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들마저도 현대의 독자들에게 외면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제 이들의 시는 한국 문학사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으며 국어 교과서나 수능 언어영역 문제집, 그리고 수능시험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대한민국 수험생들을 위한 글이 되어 문학적 가치와 작품성이 격하되고 말았다. 이들의 문학적 작품성과 가치는 암기 위주의 입시교육에 파묻히게 되었다.
글의 시작부터 본의 아니게 우리나라 시집에 대한 비관적인 현실을 언급하고 있는데 사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루에 100여 권 정도씩 사이트에 소개되는 수많은 신간도서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인 이 시 전집 때문이다.
한하운 , , , 왠만하면 EBS 언어영역 문제집에 나오는 한국 시인들의 작품들을 줄줄이 꿰뚫고 있는 수험생들의 이 사람의 시를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국어 교과서나 언어영역 문제집, 그리고 수능 모의고사 정도에 이 시인의 작품이 한 번 나올까 말까할 것이다. (내가 고등학생 3년 생활동안 교과서, 문제집, 수능 시험지 통틀어서 한하운의 시를 접한 적이 없었다) 그런 시인의 작품이 전집으로 나올 줄이야.
그러나, (대략 추정하면) 연세가 50대 이상인 분들에게는 이 시인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한하운은 우리나라 문학사에 보기 드문, (본인에게는 문학사에서의 자신의 기록을 혐오했겠지만) 나병 환자 시인이다. 그가 당시 활동하던 1950~60년대 때에는 나병은 무시무시한 병이었으며 특히 이 병에 걸린 환자들은 아예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멸시를 받아야만 했다. 나병은 나균이 감염되어 피부가 썩어가는 병이다. 나병은 전염병이기도 하지만 격리가 필요한 질환은 아니며 성적인 접촉이나 임신을 통해서도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의학기술이 발달되지 못했던 옛날에는 나병에 걸리기만 하면 쉽게 치유할 수 없는 불치병이었으며 환자의 눈만 마주쳐도 병균이 옮긴다고 생각했다. 얼굴과 손에 썩어간 채 살아가는 나병 환자의 모습에 대한 혐오증이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병 환자들에게 문둥이라고 부르면서 천시하였다.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 나병 환자들은 정상인들의 핍박과 멸시를 피하기 위해서 전남 고흥군에 위치한 소록도에 갇혀 살아야만 했다. 그래서 지금도 소록도에는 나병 환자들이 격리되었던 병원 시설이 남아 있기도 하다.
이런 분위기의 시대 속에서 한하운은 1949년, 첫 시집을 발간하면서 나병 시인으로써 문단에 첫 발에 내딛게 된다. 그의 시에는 문둥이로서 살아가면서 겪은 병마의 고통과 사람 대접 받지 못한 채 살아가야하는 서러운 삶을 노래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대체적으로 슬프기도 하여 대중들의 감성을 자극하였으며 지금도 <파랑새><보리피리><황토길> 등이 애송되고 있다.
흉칙한 괴물, 그렌델을 아십니까?
<한하운 전집>의 출판을 알게 되면서 작가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게 되면서 때마침 그 때 읽고 있었던 그렌델이라는 괴물이 떠올렸다. 그렌델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이름이기도 하다.
고대 영웅 서사시의 원작을 토대로 만든 애니메이션 영화 <베어울프>
하지만, 2년 전에 우리나라에 개봉했던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베오울프>를 보신 분이라면 '그렌델' 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았을 것이다.
* 영화 제목에서는 ' 베오울프' 라고 하고 있지만, 펭클클래식 판본에서는 ' 베어울프 ' 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영어법 표기가 혼동하고 있어서 여기서는 ' 베어울프' 라고 명시하겠다.
이 헐리우드 제작 영화는 원래 고대 영국에서 쓰여진 가장 오래된 서사시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덴마크의 흐로드가르 왕의 용사들을 잔인하게 잡아 먹어버리는 괴물 그렌델을 덴마크의 이웃나라인 게아타스의 젋은 무사 베어울프가 무찌르게 되면서 주인공 베어울프는 케아타스의 왕이 된다. 이 영웅적인 왕은 자신의 나라를 위협하는 존재인 용을 무찌르게 되느데 용과 싸우고 난 뒤에 부상으로 사망하게 된다는, 일종의 영웅담이다.
헐리우드 영화 <베오울프>의 내용 역시 서사시의 원전 내용을 토대로 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인간 형태로 변신하여 아름다움으로 베오울프를 유혹하기도 하는 그렌델의 어머니가 등장하는데 유명한 헐리우드 섹시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가 분하였다. (이 글에서는 사족이지만 극장에서 이 영화를 직접 봤다. 인간 형태로 변한 그렌델의 어머니는 누드 상태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실제로 안젤리나 졸리의 몸매를 본떠 만들어 캐릭터를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지루하기만한 영국 서사시 원작의 영화 내용 속에서 제일 기억나는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안젤리나 졸리가 분한 그렌델의 어머니의 첫 등장 장면을 언급할 것이다. 남자 관객들이 왜 그 장면을 꼽는지 직접 영화를 보게 되면 알 것이다)
이 영화에서 그렌델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는, 그야말로 무서운 괴물로 등장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어머니 앞에서는 연약한 아기(?)가 되는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나 원작의 서사시의 주인공은 뭐니뭐니해도 영웅 베어울프다. 그렌델은 착한 영웅의 이미지와 반대되는 악의 이미지이며 영웅인 주인공을 띄우기 위해 희생되어야하는 캐릭터에 불과하다.
'인간' 이 되고 싶어하는 철학적인 괴물 그렌델
하지만, 존 가드너가 재구성한 베어울프에서는 괴물 그렌델이 주인공이다. 일종의 패러디 기법 차원으로 작품 제목 역시 <그렌델>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그렌델 역시 흐로드가르 왕의 용사들을 죽이는 괴물로 등장하고 있지만, 잔인함과 공포로만 가득찬 괴물로 등장하지 않는다. 자신이 흉측한 모습의 '괴물' 로 살아가고 있는 정체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되며, 오히려 자신들보다 더 잔인한 본성을 드러내는 인간들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그렌델의 모습은 판편의 철학자를 연상하게 한다. 이 작품에서는 그렌델의 심적 고통과 갈등들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영화 <베오울프>를 본 나나 독자들에게는 새롭게 재구성한 베어울프의 이야기가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고 있는 그렌델의 본성은 인간과 흡사하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 될 수 없었다. 아니, 인간으로 분류할 수도 없는 존재다. 그의 모습은 무시무시하고 흉측한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이야기 시작 부분에 그렌델은 고목 사이의 틈에 발이 끼이면서 혼자서 빠져나오려고 애를 쓰게 된다. 그러다가 그런 모습을 흐로드가르 왕과 그의 일행들이 우연히 목격하게 된다. 왕은 정체불명의 짐승이 나무에 있는 거을 보고 호기심을 갖게 된다. 어두운 동굴에서만 살았던 그렌델은 이 때부터 인간이라는 존재를 처음 만나게 된다. 그는 지금 한쪽 발이 고목 틈에 끼여 움직일 도리가 없었으며 애초에 왕과 일행들을 해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왕과 그 일행들은 인간이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짐승에게 섣불리 다가가기가 두려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왕이 여섯 명을 골라냈다. " 가서 돼지를 가져오너라. "
" 네, 폐하! "
그들은 그렇게 대답한 뒤 말을 타고 사라졌다. 나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모든 것이 미친 짓 같았지만 어쨌든 나는 기뻐서 웃었다. 그러자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서더니 부들부들 떨면서 나는 올라다보았다.
- <그렌델> 존 가드너, 김전유경 역, 펭귄클래식코리아, p 35 -
몇 시간동안 나무에 발이 끼인채 자신을 도와주기를 바랬던 그렌델은 기쁨의 정서를 표시하기 위해서 웃고 있지만, 왕의 일행들 입장에서는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내는 위협적인 울음소리에 불과하다. 그리고 왕의 일행들은 일제히 그렌델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갑작스런 인간의 공격에 그렌델은 당황하게 되며 공포감에 질린 상태에서 비명을 질러대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에게는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 저것을 포위하라! " 왕이 소리쳤다. " 말을 지켜라! "
그러자 나는 지금 내가 상대하고 있는 것이 우둔하고 기계적인 황소가 아니라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것. 일정한 패턴을 만들어내는 동물이자 이제껏 본 중 가장 위험한 동물이라는 사실을 갑작스럽게 깨달았다. 나는 비명을 질러 그자들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덤불 뒤에 숨어서 말안장에 있떤 긴 막대와 활, 창을 꺼내 들었다.
" 미쳤어, 다들 제정신이 아니야 ! "
- p 36 -
결국에는 어미의 등장으로 그렌델은 살아남았지만 그는 동굴 밖 세상의 무서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스스로 각인하게 된다.
나는 내게 일어났던 일 모두를, 내가 깨닫게 된 것들 모두를 어미에게 이야기하려고 했다. 세상이 얼마나 의미 없는 대상들로 가득 차 있는지를, 우주가 얼마나 잔인한지를.
- p 37 -
속마음에는 인간과 유사한 이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성적인 존재인 인간은 그렌델을 포악한 괴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렌델 입장에서는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적인 자세로 인간들을 공격했던 것이다. 이렇다보니 그렌델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육하는, 겉으로는 괴물이었던 규정 불가의 존재가 정말로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괴물이 되어야만했던 그렌델과 한하운
한하운의 자서전에서도 소설 속 그렌델이 겪어야만 했던 괴물로서의 멸시와 시선과 유사한 상황을 언급하고 있다.
고향 땅 함흥에 돌아왔으나, 이 꼴로 집에 들어갈 수가 없다. 더욱이 동리 사람의 눈이 무서워서 도저히 밝은 낮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진종일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중략) 이제는 정말로 문둥이가 된 서러움에 하루 종일 잔디에서 울었다. 내가 나를 생각해 보아도 내 값이 정말로 한 푼어치도 되지 않는 것 같다.
- 한하운 <나의 슬픈 반생기> 중에서 -
삶에 대한 분노로 가득찬 한하운과 그렌델이 그나마 위안과 안정을 느끼게 할 수 있게 해준 것은 역설적이게도 '어둠' 으로 가득찬 밤과 동굴이었다. 이들은 사람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스스로 어둡고 음습한 환경에 생활하는 괴물 같은 인생을 선택하게 되었다.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가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이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 한하운 <파랑새> -
이 시에서 한하운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세계에서 새로운 존재로 살고 싶은 욕구를 죽어서나마 파랑새가 되고 싶다는 갈망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지금 어디선가 파랑새가 되면서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내가 숨을 내쉬면 남아 있는 생명도 함께 빠져 나갈까? 짐승들은 내 아래 펼쳐진 깊은 협곡처럼 검고도 고요하게, 아무 생각도 없는 무심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은 기쁨인가?
저것들은 나의 파멸을 즐기며 사악하게, 너무나도 어리석게, 나를 계속 쳐다본다.
" 하찮은 그렌델이 우연히 당한 거야. "
나는 속삭인다. " 너희 모두가 그럴 것처럼. "
- p 211 -
하지만 그렌델은 서사시의 결말대로 베어울프의 손에 죽고 만다. 한 번 괴물은 영원한 괴물로 남게 되는걸까? 소설 마지막 장면에서 인간을 향한 그렌델의 냉소적인 독백을 읽을수록 그의 죽음이 안타깝게만 느껴진다. 괴물에게는 인간처럼 희망과 자유, 그리고 구원을 바랄 수 없는 존재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