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의 종말 - 평균이라는 허상은 어떻게 교육을 속여왔나
토드 로즈 지음, 정미나 옮김, 이우일 감수 / 21세기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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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매일 아침 일곱 시 삼십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고등학교 중퇴가 최종 학력인 서태지는 노래 『교실 이데아』에서 대입 중심의 교육을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그 후 이십여 년이 흘러간 오늘의 교실은 어떤가. 등교 시간은 달라졌어도 고등학교의 교실 이데아는 그때 그 시절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수능은 전국의 학생을 단일한 시험으로 줄 세우는 획일적인 입시제도이다. 학생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고민한다. 하지만 진로에 대한 고민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는 교육환경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은 전부 똑같은 EBS 문제집을 풀고, 똑같은 내용을 같은 기간에 이수하고 있다. 학생들의 꿈을 판가름하는 것은 수능 점수다. 어른들은 진로 고민을 제쳐두고 ‘일단 대학부터 가서 고민하라’고 강요한다.

 

우리 삶에서 ‘자유로운 선택’은 굉장히 중요하다. 어느 대학에 진학할 것인지, 어느 회사의 물건을 구매할 것인지, 어떤 사람과 결혼할 것인지 등 작은 일상에서부터 인간의 삶 전체는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누리기 위해, 우리의 운명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선택지를 고른다. 즉 자유롭고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개인의 선택에 대한 독립성을 보장받고, 그러한 자유로운 선택 자체가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평균의 종말》(21세기북스, 2018)을 쓴 교육신경과학 분야의 권위자 토드 로즈는 이러한 개인의 선택에 대해 진정 자유로운 선택이었는가를 묻고 있다.

 

 

 평균주의는 우리에게 대가를 치르게 했다. 사회는 우리 모두에게 학교와 직장생활과 삶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특정의 편협한 기대치를 따라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되려고 기를 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되되 더 뛰어나려고 기를 쓴다. (93쪽)

 

 

직업을 선택할 때 우리는 나의 행복을 위해, 자아실현을 위해 직업을 선택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게 모르게 ‘평균의 시대’ 속에 살고 있다. 평균 점수, 평균 몸무게, 평균 연봉 등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평균이란 단어를 자주 접한다. 국어사전에서는 평균을 ‘여러 사물의 질이나 양 따위를 통일적으로 고르게 한 것’이라고 나와 있다. 말 그대로 평균이란 각 개체의 특성이 획일화 또는 표준화된 형태로 수렴되는 상태이다. ‘평균의 시대’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오래 됐다.

 

19세기 과학자 아돌프 케틀레는 스코틀랜드 군인들의 가슴둘레를 측정한 뒤 평균 가슴둘레 치수를 계산했다. 그는 평균 가슴둘레 치수에 가장 근접한 군인이 완벽한 신체를 갖춘 ‘참된 군인’이라고 주장했다. 모든 인간의 특성이 정확히 평균을 따른다고 주장할 논거가 부족했으나 케틀레가 제시한 ‘평균적 인간’은 완벽한 사람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케틀러의 ‘평균적 인간’ 이론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수많은 연구가 뒤를 이었다.

 

영국의 유전학자 프랜시스 골턴은 케틀레의 ‘평균’ 개념을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았으나 일부 그의 이론을 수용하여 평균으로 계층을 구분하려고 했다. 이렇게 되자 ‘평균적 인간’은 객관적이고 표준적인 기준이 되었고, ‘정상’을 판단하기 위해 국가의 개입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나올 수 있었다. 골턴이 창시한 우생학은 ‘인종 청소’의 이론적 틀로 발전되었다.

 

1940년대 미국 클리블랜드에서는 이상적 신체 치수를 가진 여성을 뽑는 대회가 개최되었다. 여성의 이상적 신체 치수는 1만 5,000명의 젊은 성인 여성들로부터 수집한 신체 치수를 계산해서 나온 ‘평균값’이었다. 대회 주최 측 관계자는 완벽한 신체를 가진 여성에게 ‘노르마(Norma: ‘정상’을 뜻하는 ‘normal’에서 따온 이름)라는 별칭을 붙였으며 클리블랜드 박물관에 ‘노르마’ 조각상이 전시되었다.

 

평균의 시대 속에서 ‘평균’은 ‘정상’ 또는 ‘우수함’의 의미로 혼동된 채 사용되었고, ‘평균’은 인간을 평가하는 하나의 준거가 되었다. 평균주의는 표준화된 교육 과정 안에서 똑같은 교재로 학습하는 공교육이 형성되는 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교육이 획일적으로 이뤄지면 학생 개인마다 취향을 살릴 기회가 부족해진다. 그리고 교육 과정에 따라가지 못한 학생은 학습 의욕이 떨어진 ‘열등한 학생’으로 평가받는다. 저자는 평균 점수로 학생의 성적 성취도를 평가하는 방식이 학생 개인의 소질 및 적성을 제대로 보지 못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사실 저자는 ‘평균주의 교육’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다. 중학생 시절 그는 ADHD 장애 판정을 받아 평균 점수를 받지 못한 ‘학습지진아’였고 성적 미달로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중퇴 이후 그는 대학입학자격 검정시험을 통과해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평균의 종말》은 저자의 경험과 ‘평균의 허상’을 증명해주는 연구 결과를 제시하면서 개인 고유의 재능과 취향을 외면하는 평균주의 교육을 비판한다.

 

저자는 평균주의 교육 또는 시스템을 탈피하고 주체적인 사회로 발전하기 위해서 ‘개개인학(science of the individual)이라는 학문을 만들었다. 그는 평균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세 가지 개개인성의 원칙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들쭉날쭉의 원칙, 두 번째는 ‘맥락의 원칙’, 그리고 마지막은 ‘경로의 원칙’이다. 각 개인의 특성은 같을 수 없다. 들쭉날쭉하기 때문에 인간의 특성을 ‘평균’에 근접한 기대치에 맞출 수 없다. 인간의 성격은 하나로 똑 부러지게 규정하기 어렵다. 인간은 상황에 따라 외향적인 행동을 할 수 있고, 또 내향적인 행동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적절한 상황과 맥락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본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성공한 사람이 걸어갔던 삶의 경로를 똑같이 따를 필요가 없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각자에게 적합한 삶의 경로가 있다.

 

저자는 학생 개인의 능력을 부각하는 새로운 대안 교육 방식들을 제시하는데, 그중 하나가 자격증을 수여하는 교육제도이다. 저자는 학생의 실력이 검증된다면 학위 대신에 자격증을 수여하자고 주장한다. 이게 과연 우리나라 교육 실정을 극복하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서 자격증은 취업을 위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스펙 중 하나다. 자격증은 일정한 실력을 인정하여 주는 증서인데, 우리나라의 자격증은 취업을 위해 반드시 따야하는 가산점으로 활용되고 있다. 자격증을 많이 딴다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재능이 뛰어나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기업들은 직원을 채용할 때 (기업이 요구한) 자격증을 소유한 지원자를 우대한다. 결국, 자격증도 획일화된 평균주의 교육의 수단으로 변질할 수 있다. 저자의 말대로 평균주의가 망친 교육을 개선하려면 먼저 기업부터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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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1 1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12 11:47   좋아요 0 | URL
문제 많은 낡은 사회제도를 고수할수록 그 제도에 유리한 소수 특권층만 유리해져요. 그들은 변화를 두려워해요. 오랫동안 누려온 특권들을 포기해야 되니까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낡은 사회제도에 손해를 보는 다수 사람들도 변화를 두려워해요. 왜냐하면, 변화하는 과정에 겪게 될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피하고 싶어 해요.

레삭매냐 2018-06-11 13: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느 신문 칼럼인가 기사를 보니,
지금 21세기 한국의 노동상황이 기원전 로마의
노예들이 처해 있던 상황과 다를 바가 없다는
글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교육제도와 시스템으로 노동을 기업/재벌에
예속된 현재가 서글퍼지네요.

cyrus 2018-06-12 11:51   좋아요 1 | URL
네, 슬프지만 현대판 노예가 많습니다.. ^^;;

책읽기는즐거움 2019-10-13 1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시지만 이제 수능으로 대학가는 친구들은 전체의 반의 반도 안됩니다. 시대가 변했는데 교육은 그대로 라는 말씀을 하시려면 변화된 부분은 반영하시는게 더 완벽한 글이 될 거 같아요. 물론 전체적인 논지는 공감합니다. 제가 평가할 수준은 아니지만요^^;

cyrus 2019-10-14 07:42   좋아요 0 | URL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미혼이라서 최근 입시 현황을 잘 몰랐습니다.. ㅎㅎㅎ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3년이나 지났는데 그 사이에 많이 변했군요.
 
선을 넘어 생각한다 - 남과 북을 갈라놓는 12가지 편견에 관하여
박한식.강국진 지음 / 부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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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의 변화를 이처럼 뚜렷이 국민에게 각인시킨 건 실로 오랜만이다. 4·27 남북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가 큰 폭으로 변화하고 있다. 6월 12일 북·미 정상회담 등 대형 이벤트도 줄줄이 이어진다. 보수 정부가 집권한 9년간 얼어붙었던 과거(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비롯한 ‘불확실한 미래’를 희망으로 확 바꿔버린 순조로운 분위기를 보고 있자니 국민으로선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성공의 기대는 다른 형태의 불안과 맞닿아 있다. 이 소중한 희망의 불씨를 끝까지 살려낼 수 있을까. 북한은 정말 변화한 것인가, 예상치 못한 돌발 변수로 인해 ‘4·27 판문점 선언’이 휴지가 되는 건 아닐까, 남북 모두 평화통일의 자체적 역량 결집은 가능한가 등 반신반의의 자문이 그치지 않는다. 그 근저에는 정전 협정 이후 65년간 쌓인 남북 간의 불신과 안보를 정치에 악용하는 ‘안보장사꾼’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이 도사리고 있다.

 

서울신문 강국진 기자가 묻고 국제관계학 전문가 박한식 교수가 답한 대담집 《선을 넘어 생각한다》(부키, 2018)냉전적 사고의 틀 안에 만들어진 열두 가지 편견을 거론하고, 그 편견들에 대해 반박한다. 박한식 교수는 50여 차례 북한을 방문할 정도로 현장 경험이 풍부하다. 그의 대표적인 공로는 지미 카터와 빌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의 방북을 중재한 일이다.

 

우리에게 문화적으로, 언어적으로, 관습적으로 남아 있는 가장 질긴 편견이 바로 ‘북한의 악마화’ 프레임이다. 반공 만화영화 <똘이 장군>에서 김일성 주석은 사악한 돼지로 묘사되었고, 그가 죽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아버지보다 권력욕이 많은 ‘악마의 자식’, 또는 ‘독재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집권 초기부터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미사일을 쏘아 올리고 핵실험을 거듭하면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었던 시절을 생각해 보라.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김정은을 ‘로켓 맨’, ‘미치광이’라고 조롱했다.

 

‘북한의 악마화’ 프레임 다음으로 오래된 편견은 ‘북한 붕괴설’이다. 북한 내부의 이상 조짐이 알려지면 국내 언론과 다수 전문가는 ‘북한은 머지않아 붕괴할 것’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북한은 주적이며 안보를 철저하게 내세우는 보수 정당은 과거 정부(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 지원 정책을 물고 늘어져서 ‘북한 핵무기 개발을 위한 퍼주기’라고 비난했다. 이 세 가지 프레임은 남북 관계 개선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대표적인 편견이다. 이러한 편견이 만들어진 프레임은 북한 문제를 냉철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접근해야 할 정책결정자들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특히 북한을 너무나도 잘 모르는 일반 시민들도 이 프레임의 덫에 걸리기 쉽다.

 

박 교수는 쿠데타가 일어난다고 해도 절대로 북한은 붕괴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북한은 ‘1인 독재 체제’로 작동되는 국가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북한을 움직이게 하는 건 조선노동당이다. 조선노동당은 민족 단결과 집단주의를 강조한다. 숙청과 처벌로 권력 중심부의 인사가 교체되더라도 그 빈자리에 새로운 얼굴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최고 지도자가 죽는다고 해도 북한은 무너지지 않는다. 북한 지도부를 ‘악의 축’, ‘미치광이’, ‘주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북한과의 대화를 어렵게 만든다. 박 교수는 이러한 시각을 바탕으로 한 대북 정책을 ‘안보 접근법’이라고 말한다. 그는 군비 증강 능력을 내세워 북한을 견제하는 안보 접근법을 비판한다. 안보 접근법이 반영된 대표적인 대북 정책이 경북 성주에 배치된 사드(THAAD)다. 군사적 압박에 직면했던 북한은 미국의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핵 무력·경제 건설 병진 노선’이라는 전략적 노선을 고집했다. 남북 간의 갈등이 지속되었을 때 군비 지출이 늘어났다. 박 교수는 통계 자료를 공개하면서 ‘퍼 주기’ 프레임의 허상을 지적한다. 2011년 연평도 폭격 이후 국회는 군사력 구축을 위해 추가예산을 증액시켰는데, 대북 지원 예산의 2배가 되는 돈이다.

 

결국,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실천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남한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북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박 교수는 남과 북 모두 필요한 것은 동질성을 강조하는 통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남북 모두 서로 ‘마음의 경계’를 만들지 않으려면 이질성을 수용해야 한다. 남북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가 북한의 이질성을 수용하려면 오래된 냉전적 사고방식과 종북 프레임을 털어내야 한다.

 

북한에 대한 불신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문제는 우리 내부에 있다. TV를 켜면 북한학 교수, 기자, 정치인, 심지어 북한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정치평론가들이 나와서 북한과 남북관계에 대한 의견을 밝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한심스럽기만 하다. 여전히 ‘보수-진보 진영’ 논리로 북한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단선적인 해석과 논의는 판 전체가 달라진 현 상황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물론 지금 이 순조로운 남북 관계의 분위기를 계속 유지하려면 북한 문제에 대한 합의와 이념을 초월한 건설적 논쟁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당연히 거쳐야 한다. 다만 논쟁과 검증이 소모적으로 흘러 본말을 전도시킨 사례가 적지 않았던 우리의 경험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으로 남는다. 북한에 향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요즘, 앞으로는 ‘(북한을)모르는 것이 약이다’가 아니라 ‘모르는 것은 독’이 될 수 있다. 이제는 객관적으로 북한을 바라보면서 정확하게 얘기해야 할 시점이다. 더 많은 이들, 특히 통일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많이 알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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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us_fugit 2018-06-02 2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한은 형이하학적 가치를 중시하는데 반해 북한은 형이상학적 가치를 중시한다는 점과 저자가 말하는 ‘변증법적 통일론‘이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cyrus 2018-06-03 12:21   좋아요 1 | URL
이 책을 읽기 전에는 통일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했어요.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도 없었어요. 앞으로 한반도의 정세가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변화 분위기를 어느 정도 감지하려면 북한을 공부해야겠어요. ^^

레삭매냐 2018-06-02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십 년 동안 앵무새처럼 북한 스스로 붕괴론
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그 많은 전문가
들이 입을 닫고 있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최근 D일보에서 무속인을 동원해서 신종 참언
을 신문에 게재한 사건은 대한민국 언론사에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일이었습니다.
양식이 있는 기자들이라면 데스크와 사주에게
마땅히 항의해야 할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결어를 읽어 보니 어쩌면 남북관계는 부부관계
와도 같은 게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
습니다.

cyrus 2018-06-03 12:30   좋아요 0 | URL
전문가들은 자신의 잘못된 주장에 대해 인정하지 않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이니까요. ^^;;

생각보다 북한 붕괴설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사람들은 북한이 불리한 소식을 접하면 ‘곧 북한도 망하겠구나‘하면서 ‘지금이야말로 북한을 무너뜨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말합니다. 북한과의 전쟁을 참 좋아해요. 전쟁이 일어나서 미국 등과 연합한 남한이 승리한다고 해도 우리 역시 잃을 게 많아요. 북한이 쿠데타로 무너져도 후폭풍을 남한이 감당해야 합니다. 골치 아픈 일이죠. 북한이 스스로 무너지거나 북한을 공격해서 통일을 원하시던 분들이 북한 붕괴 후를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합니다. 과연 어려워진 북한 주민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까요? 먹고사니즘에 익숙한 분들이라서 또 반대할 것입니다. 남한 주민들 살기 힘든데 북한 사람들 많이 챙겨준다고 불만을 늘어놓을 거예요. 하여튼 북한 문제만 나오면 자기주장이 강하고, 남의 의견을 듣지 않는 사람들은 ‘좆문가‘에요.


레삭매냐 2018-06-03 14:51   좋아요 1 | URL
지금 정부는 몰라도 지난 9년 동안 보수정부의
무능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을 잃었습니다.

엠비시절에 연평도 포격으로 연평도 주민들이
인천으로 피난나왔을 때만 해도 정부에서 무
대책으로 일관해서, 인천 찜질방 주인장이 주
민들에게 자신의 찜질방을 무료로 제공했었습
니다.

그런데 갑자기 통일이 되어 북한 주민이 수백
만 명이 남한으로 내려 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진짜 대책없습니다.

전쟁으로 해결하자는 무지막지한 발상의 제공
자 중의 한 명은 중앙일보 논설위원인 김가짜
(패러디입니다*)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전쟁으로 3일만 버티면 이길 수 있다는 헛소리
를 해서 놀란 적이 있습니다.

강남대로에 미사일 한 방만 떨어져도 생지옥이
될 텐데, 1분에 만발이상 포격할 수 있는 장사정
가 불을 뿜으면 그 잘난 강남의 아파트숲과 빌딩
은 온전하게 무사할 수 있을까요. 무대책 무대안
으로 무장한 어느 정당의 미래를 보는 것 같은
기시감이 드네요.

짜라투스트라 2018-06-02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북한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cyrus 2018-06-03 12:31   좋아요 0 | URL
아마도 조만간에 출판사들은 북한과 트럼프 관련 책들을 만드느라 바빠질 것입니다. ^^

이하라 2018-06-03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만큼의 노력이 더해져야할지는 모르겠지만 화해와 타협의 시간이 될거라는데는 믿음이 가고 있습니다. 이런 날들이 북한에 대해 알아야겠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아요.

cyrus 2018-06-03 12:33   좋아요 0 | URL
과거에는 ‘적을 아는 마음‘으로 북한을 이해했지만, 이제는 ‘협동 파트너를 아는 마음‘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

북다이제스터 2018-06-03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미국이 북한의 세계 8위 석유 매장량과 히토류 광물 가치에 눈독들이고 있거든요. ㅎㅎ 가치가 7천조 억으로 예상된다고 하니 과거 군비산업 경제를 훨씬 뛰어넘기에 대치국면을 이젠 분명 중단할 것 같습니다. ㅎㅎ

cyrus 2018-06-03 12:35   좋아요 0 | URL
제가 걱정을 하는 이유가 제 주변에 수구 세력의 프레임에 길들어진 사람들이 많아서 그래요. 제가 사는 곳이 대구예요.. ㅎㅎㅎ 이번 달 선거 결과 소식에 당선된 자한당 소속 정치인들을 안 봤으면 좋겠어요. ^^;;

2018-06-03 0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03 12:39   좋아요 0 | URL
이번 기회에 북한도 남한에 대해 천천히 알아가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남한 사람들이 북한을 신뢰할 수 있거든요. 일제 강점기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불행한 시대였지만, 반공 이데올로기가 당연시했던 유신 시대도 불행한 시대였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불행한 시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잖아요.

transient-guest 2018-06-07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이 전문가지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들이 더 많아요. 그저 TV에 나와서 돈되는 말을 하고 정치색에 따라 떠들어대는...알아야죠.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전두환-노태우때 어린 시절을 보낸 저는 반공학습이나 방위성금 같은 걸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납니다.

cyrus 2018-06-07 11:40   좋아요 1 | URL
이 책에 전두환의 대북 정책을 ‘일부’ 칭찬한 대목이 있습니다. 저자는 아웅산 테러 사건 이후에 전두환이 북한과의 대화를 적극적으로 시도한 행보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어요. 그리고 북한에 대한 평화접근법 계보를 ‘노태우-김대중-노무현’으로 잡고 있습니다. 이 내용에 대해선 독자들마다 의견이 갈릴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전두환-노무현 정권의 대북 정책이 권력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보여주기 식’ 정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 - 인지 과학이 밝힌 진보-보수 프레임의 실체
조지 레이코프 & 엘리자베스 웨흘링 지음, 나익주 옮김 / 생각정원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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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주면,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할 수 있다.” 프랑스의 전설적인 미식가 장 브리야사바랭(Jean Brillat-Savarin)이 한 말이다. 불가능할 것 같은가? 가능하다. 음식은 문화의 산물이다. 음식에는 출신지, 성장 환경, 성품 등 다양한 단서가 녹아들어 있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가를 보고 그 사람의 성격과 취향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무심결에 내뱉은 말이나 사소한 행동도 성격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된다. 말과 행동 속에 우리의 사고행위를 지배하는 은유가 있다. ‘은유는 추상적인 개념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어법이다. 예컨대 보이지 않는 손은 자유시장주의 경제학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은유이다. 그들은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의 자율기능을 극대화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손개념에 기반을 둔, 수요와 공급이 자연스럽게 균형을 찾는다는 전통 경제학 패러다임에는 문제가 있다. 일단 전통 경제학의 가정은 비현실적이다. 경제학이 전제로 하는 세계는 완벽할 정도로 합리적이지만 현실은 다르다. 합리적일 것 같은 인간은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며, 결과가 뻔한데도 어리석은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철학에서 말하는 객관주의는 하나의 항구적이고 정확한 기준이 있다는 신념을 토대로 진리 또는 세계를 평가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언어는 그 자체로서 객관적 · 절대적 의미를 있게 된다. 그러나 인지과학자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는 언어는 객관적이지 않으며 낱말은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관점을 통해 구성된다고 반박한다. 인지과학에서는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관점프레임(frame)이라고 말한다. 프레임은 세상을 바라보는 구조화된 정신 체계이다. 레이코프는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에 연패한 민주당의 패인을 분석하여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와이즈베리, 2015)라는 책에서 공론을 장악하는 프레임의 힘을 소개했다.

 

보수를 대표하는 공화당이 만든 프레임은 서민의 지지를 얻기 위한 효율적인 선전 선동 수단이 되었고, 다수의 서민들은 부자 위주의 정책을 펴는 공화당에 표를 줬다. 공화당이 강조하는 보수주의적 프레임은 가부장적인 엄격한 아버지모형이다. 보수주의자들은 도덕적 권위와 개인적 책임, 자유 시장(사회적 다원주의, ‘보이지 않는 손’), 자수성가 등을 말한다. 진보주의적 프레임은 보수주의적 프레임과 정반대인 자애로운 부모모형이다. 진보주의자들은 사회적 약자에게 자애로움을 베풀고 타인과 협동할 수 있는 공동체의 역할을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정치권은 유권자를 보수주의자, 진보주의자, 중도 이렇게 구분하는데 사실은 대다수의 유권자는 보수와 진보 성향을 동시에 가진 이중 개념을 가지고 있다. 보수주의자들은 중도세력이 선호할 만한 적절한 프레임을 내세웠지만, 진보주의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펼 프레임을 만들지 않았다. , 민주당은 공화당에 맞설 수 있는 전략을 수립하지 못해 선거에서 번번이 패배했다.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에 끌리는가(생각정원, 2018)은 레이코프의 신작이지만, 기존에 나온 여러 권의 책에서 제시한 은유’, ‘프레임’, ‘엄격한 아버지/자애로운 어머니 모형’, ‘이중 개념등을 대담 형식으로 설명한 책이다. 대담 형식으로 인지과학의 중요성을 알린 책으로는 이기는 프레임(생각정원, 2016)이 있는데,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에 끌리는가는 독일에서 이기는 프레임보다 먼저 출간된 책이다. 레이코프의 대표작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정독했고, 그가 이 책에서 말한 인지과학 용어들을 충분히 이해했다면 이번에 나온 대담집을 복습하는 차원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도 좋을 듯하다. 아니면 안 읽어도 된다.

 

그런데 레이코프의 주장에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가 말하는 이중 개념에 대한 설명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의 양육 모형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직장에서는 엄격한 아버지 모형으로 살다가도 가정에서는 자애로운 부모 모형으로 사는 사람이 있을 거고, 그 반대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레이코프의 양육 모형은 이성애 중심 · 정상 가족 구조를 전제한다. 그는 미혼모가 엄격한 아버지 모형으로 살아간다고 단정한다.

 

 

  여성은 은유적으로 국가 전체의 엄격한 아버지일 수 있습니다. 흔히 미혼모의 경우에 그렇습니다. 이런 미혼모는 가정 내 권위적인 남성 인물의 부재를 자신이 보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엄격한 아버지 모형을 신봉하는 여성은 자녀들이 순종하지 않을 때 그들을 때리기도 하죠. 여성도 가정에서 엄격한 아버지의 역할을 맡을 수 있으며 정치에서 은유적인 엄격한 아버지일 수 있습니다. (본문을 요약 · 발췌했음, 135~136)

 

 

부부 관계를 맺지 않고 혈연관계가 아닌 아이를 입양한 미혼모는 엄격한 아버지 모형을 신봉할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자애로운 부모일 수 있다. 예컨대 전통적인 흑인 공동체 속에 살아간 흑인여성은 부모가 부재한 남의 아이를 양육한다. 백인 사회학자들은 이러한 흑인 공동체의 양육 방식을 이성애 중심 정상 가족 제도에 벗어난 일탈로 규정한다. 그들은 가모장(家母長) 명제를 내세워 생계를 부양하는 흑인여성을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권위적인 나쁜 어머니로 인식한다.

 

 

 핵심을 말하자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을 해야만 하는 흑인여성은 일터에서 복종적인 유모가 되려는 압력에 부딪히며 자신의 가정에서는 강력한 인물이라는 이유로 가모장으로 낙인찍히는 것이다. (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144)

 

 

따라서 미혼모의 양육 방식을 엄격한 아버지 모형으로 판단하는 레이코프의 주장은 혼자서 아이를 돌보는 흑인 미혼모의 육아 방식을 설명하는 데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흑인여성의 열등함을 드러내는 인종차별적인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악용될 수 있다. 레이코프는 미혼모의 양육 모형을 설명하면서 인종문제를 간과했다. 그리고 그는 백인 중심의 이성애 중심 · 정상 가족 구조라는 프레임을 의식하지 못했다. 프레임을 장악한 세력은 해당 분야의 주도권을 쥐고, 대중은 이미 형성된 프레임으로 세상을 파악한다. 학자도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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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5-28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제가 보는 세상 역시 프레임으로 만들어
진 거겠죠.

cyrus 2018-05-29 07:41   좋아요 1 | URL
우린 언론이 만들어낸 프레임에 빠지기 쉬워요. 그런데 이걸 간파하는 게 어려워요.. ^^;;
 

 

 

미국 자유민주주의의 역사는 인종 차별에 대한 저항의 역사이다. 즉 흑인 민권운동(African-American Civil Rights Movement)에 뿌리를 두고 있다. 1863년 노예해방령 이후 혹독한 시련과 투쟁의 시기를 견뎌내야만 했던 흑인 민권운동은 이제 단순히 흑인 해방을 넘어 유색인종과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이 존재하는 미국 사회의 정치 · 경제적 모순에 대해 저항하는 시민운동으로 확대되고 있다.

 

 

 

 

 

 

 

 

 

 

 

 

 

 

 

 

 

* 마틴 루서 킹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예찬사, 2015)

 

 

 

마틴 루서 킹은 1963년 워싱턴의 링컨기념관 앞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고 말했다. 그는 ‘공민권을 위한 행진 시위’에서 인종 차별이 없는 사회의 도래를 꿈꾼다는 취지의 연설로 수만 명의 청중을 감동하게 했다. 킹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꿈은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백인 경찰의 흑인에 대한 린치, 유명 커피숍에서의 흑인 차별 등은 인종차별이 남아 있는 미국 사회의 엄연한 현실이다.

 

윌리엄 에드워드 B. 듀보이스는 20세기 초 일찍이 피부색에 따른 인종차별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심각한 문제가 될 거로 내다봤다.

 

 

 

 

 

 

 

 

 

 

 

 

 

 

 

 

 

 

* W. E. B. 듀보이스 《니그로》 (삼천리, 2013)

 

 

“오늘날 우리는 세계를 지배하는 지역 전체에 퍼져 있는 근거 없는 가정, 즉 피부색이 열등함을 상징한다는 가설에 직면하고 있다.”

 

(듀보이스, 《니그로》 12쪽)

 

 

그로부터 백여 년이 지난 지금, 듀보이스의 말은 여전히 진실로 다가온다. 인종, 피부색 등에 따른 차별이 옳지 않다는 것은 보편화된 논리다. 그럼에도 편견에 시작된 차별이 지속되는 것은 그 논리가 행위로 이어질 만큼 머릿속에 각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절판] 알라 라탄시 《인종주의는 본성인가》 (한겨레출판, 2011)

* 스티븐 제이 굴드 《인간에 대한 오해》 (사회평론, 2003)

 

 

 

 

 

 

 

 

 

 

 

 

 

 

 

 

* 조지 오웰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이론과 실천, 2013)

 

 

 

미국을 대표하는 지도자들은 인종 차별에 대해 어떤 의심을 하지 않았다.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 중 한 명인 토머스 제퍼슨은 ‘평등’과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는 흑인의 열등한 면을 믿었으며 1801년에 백악관이 완공되었을 때 백악관 내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10여 명의 흑인 노예들을 데려왔다. 사실 백악관은 흑인 노예들의 강제 노동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남북전쟁에 승리하여 노예해방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에이브러햄 링컨은 지독한 백인우월주의자였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내 보수파들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백인의 짐(The White Man’s Burden)’을 내세웠다. 이 표현은 영국의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이 쓴 시의 제목이다. 키플링은 공공연히 제국주의를 옹호했고, 미개한 유색인종을 바르게 이끌 수 있도록 지배하는 일은 백인이 짊어져야 할 짐이라고 주장했다. 키플링처럼 인도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조지 오웰『러디어드 키플링』(《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수록)이라는 글에서 키플링을 ‘배타적 제국주의자’로 규정하여 비판했다. 키플링이 만든 ‘백인의 짐’은 식민주의자, 인종주의자들이 자신의 지배 행위를 미화하기 위해 자주 인용됐다.

 

 

 

 

 

 

 

 

 

 

 

 

 

 

 

 

 

* 수전 브라운밀러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오월의봄, 2018)

* [절판] 제임스 H. 콘 《맬컴 X vs. 마틴 루터 킹》 (갑인공방, 2005)

 

 

 

하지만 역사가 ‘신화’가 되고, 역사적 인물이 ‘위인’으로 박제되면 역사와 인물의 한계 그리고 누락되거나 잊힌 진실을 외면하게 된다. 흑인 민권운동에 뛰어든 ‘남성’ 흑인 지식인은 성차별 문제와 여성의 강간 피해 문제를 중요한 문제로 간주하지 않았고, 흑인의 노동을 착취하게 만드는 백인 중심 자본주의 체제에 적극적으로 비판하지 않았다. ‘인종 차별 철폐’와 ‘흑인 해방’ 사이에 ‘흑인 여성’이 있어야 할 자리는 없었다. 듀보이스는 ‘니그로 혈통’의 장점으로 ‘강한 형제애’라고 내세웠다.[1]

 

 

 

※ 흑인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들

(단편적으로 언급된 책도 포함)

 

 

 

 

 

 

 

 

 

 

 

 

 

 

 

 

 

 

 

 

 

 

 

 

 

 

 

 

 

 

 

 

 

* 재닛 윌렌, 마조리 간 《노예제도에 반대한 여성들, 자유를 말하다》 (초록서재, 2016)

* 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

* [절판] 사빈 보지오-발리시 《저속과 과속의 부조화, 페미니즘》 (부키, 2007)

* [절판] 수잔 앨리스 왓킨스 《페미니즘》 (김영사, 2007)

* [절판] 소피아 포카 《포스트페미니즘》 (김영사, 2000)

 

 

 

 

흑인 페미니즘은 흑인 남성 중심의 ‘형제애’와 ‘흑인 해방’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비판사회이론이다.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흑인 남성과 흑인 여성 모두 억압하는 자본주의, 이성애 중심에 기반을 둔 가족, 가부장제, 백인우월주의 등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남성 중심 역사에 가려진 흑인 여성운동가, 여성 작가들의 삶과 업적을 발굴하여 주목한다. 킹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만큼이나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흑인 여성의 권리를 찾기 위해 1851년 미국 오하이오주 ‘여성권리대회’에서 말한 소저너 트루스의 연설 한 자락은 일상 속 인종 차별, 성차별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 윤보라, 김홍미리, 나영, 박이은실, 손희정 외 《그럼에도 페미니즘》 (은행나무, 2017)

 

 

 저기 저 남성이 말하는군요. 여성은 탈것으로 모셔 드려야 하고, 도랑은 안아서 건너드려야 하고, 어디에서나 최고 좋은 자리를 드려야 한다고. 아무도 내게는 그런 적 없어요. 나는 탈 것으로 모셔진 적도, 진흙구덩이를 지나도록 도움을 받은 적도, 무슨 좋은 자리를 받아본 적도 없어요. 그렇다면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날 봐요! 내 팔을 보라구요! 나는 땅을 갈고, 곡식을 심고, 수확을 해 왔어요. 그리고 어떤 남성도 날 앞서지 못했어요. 그래서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나는 남성만큼 일할 수 있었고, 먹을 게 있을 땐 남성만큼 먹을 수 있었어요. 남성만큼이나 채찍질을 견뎌내기도 했어요. 그래서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난 13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들 모두가 노예로 팔리는 걸 지켜봤어요. 내가 어미의 슬픔으로 울부짖을 때 그리스도 말고는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소저너 트루스의 연설, 《그럼에도 페미니즘》 『여성을 사랑하는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 인용)

 

 

 

지금도 페미니즘 책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지만, ‘흑인 · 유색인 페미니즘’은 ‘서구 백인 페미니즘’에 비해 소개되지 않고 있다. 출판사들이 흑인 · 유색인 페미니즘이 ‘우리나라 페미니즘’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것일까? 아니면 흑인 · 유색인 페미니즘이 ‘이해하기 쉬운 페미니즘’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출판계가 대중(특히 여성)의 기호와 취향에 맞는 페미니즘만 골라 찾는 행태는 문제가 있다.

 

 

 

 

 

 

 

 

 

 

 

 

 

 

 

 

 

 

 

* 벨 훅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문학동네, 2017)

* 록산 게이 《나쁜 페미니스트》 (사이행성, 2016)

* [절판, 읽을 거예요!] 앨리스 워커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 (이프, 2004)

 

 

 

 

 

 

 

 

 

 

 

 

 

 

 

 

 

* [절판 / 안 읽었어요!] 안젤라 데이비스 《미국, 아직도 노예제 국가?》 (사람소리, 2013)

 

 

 

그나마 국내에 많이 알려진 흑인 페미니스트들을 꼽자면 벨 훅스, 록산 게이, 앨리스 워커가 있다. 페미니스트 작가로 확대하면 조라 닐 허스톤, 토니 모리슨 등이 있다. 이슬람 혐오, 인종주의, 여성 혐오, 자본 착취에 반대하는 투쟁을 펼친 안젤라 데이비스도 국내 페미니스트들이 주목해야 할 흑인 페미니스트이다. 2013년에 그녀의 약전(略傳)과 인터뷰, 그리고 그녀가 쓴 글을 선별해서 묶은 《미국, 아직도 노예제 국가?》 (사람소리, 2013) 가 출간되었지만, 소리 소문 없이 절판되었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안젤라 데이비스를 소개한 유일한 책이 《저속과 과속의 부조화, 페미니즘》 (부키, 2007)이었다. 그런데 이 책도 절판되었다…‥.

 

듀보이스는 자신의 책을 “모든 새로운 것은 아프리카에서 나온다!(Semper novi quid ex Africa!)”라는 문장으로 마무리를 지었다.[2] 그는 아프리카의 자립적인 힘을 믿었으며 아프리카가 아픈 과거사를 딛고 세계의 중심으로 나아가길 희망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흑인이 아니면서 왜 흑인 페미니즘을 공부합니까?” 이 질문에 상세한 대답이 필요한가? 당연히 ‘페미니즘’이라서 공부하는 거지. 나는 항상 서구 백인 중심 페미니즘을 ‘페미니즘 역사의 시작’으로 보고, 페미니즘을 연대별로 구분하는 하이픈 페미니즘 담론에 거부감을 느낀다. 이 담론은 '독자적'인 흑인 페미니즘을 '제3세계 페미니즘(제3세대 페미니즘)'의 일부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흑인 페미니즘은 급진적 페미니즘, 더 나아가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수 있게 해준 가장 중요한 사상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새로운 페미니즘은 흑인 페미니즘에서 나온다. 흑인 페미니즘은 여성 문제를 단일화로 보는 시각을 비판하며 여성의 삶을 관통하는 다양한 구성요소들(젠더, 계층, 인종, 사회적 환경 등)을 인식한다. 너무나도 어려워서 잘 모른다는 핑계를 대면서 계층, 인종 문제를 외면한다면 그것 또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방관적인 자세이다. 여성을 억압하는 ‘다중의 문제’를 놓친다면 과거 페미니즘 운동의 실패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1], [2] 《니그로》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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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8-05-19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에서 흑인들의 전쟁 파병과 임무에서도 많은 차별을 받아왔네요.
유독 흑인들의 참전과 사망자수가 많은 것도 가슴 아픕니다.

cyrus 2018-05-23 15:28   좋아요 1 | URL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흑인이 차별받은 사례들이 아주 많습니다. 백인들에 의해 은폐되거나 잊힌 사례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 대부분은 승자나 지배자 위주의 기록이니까요.

2018-05-20 1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23 15:29   좋아요 1 | URL
흑인여성 못지않게 유색인 여성들에 대한 차별도 심합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

페크pek0501 2018-05-20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이 몇 세기인데 아직도 인종 차별 운운하는 뉴스를 보면 이해가 안 가요.
사람들의 두뇌에 한 번 심어 놓게 된 고정관념의 힘은 그렇게 센 것일까요?
인종 차별을 해도 된다는 고정관념은 언제 깨질까요?

cyrus 2018-05-23 15:32   좋아요 0 | URL
고정관념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고정관념은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다음에 태어날 사람들에게 전해집니다. 저는 고정관념의 탄생을 사회화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결국, 고정관념의 유해성을 막으려면 그것이 잘못 되었음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알려줘야 합니다.

psyche 2018-05-21 02: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국에서는 인종문제가 마음에 와닿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피상적으로는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많이 공감하지 못하는 거 같더라구요. 저 역시도 한국에 살고 있었을때는 백인 페미니즘에 많이 공감했었어요. 미국에 산 기간이 길어질 수록 경제적 계층보다는 유색인이라는 인종에 더 방점이 찍혀지더라구요. 페미니즘은 인종, 계층, 성적 정체성 등등에 따라 각자 다른 시각과 문제들이 있는데 암만해도 출판사에서는 팔릴 책을 내놓게 되니 서구 백인 중심의 책을 내놓는거 같아요. 아쉬운 일이죠.

cyrus 2018-05-23 15:34   좋아요 0 | URL
흑인, 유색인 여성의 주체성을 드러내는 영화 한 편 찾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다 읽고 나면 책의 주제와 관련된 영화 한 편을 볼 예정입니다. 지금 레드스타킹 멤버들은 흑인여성 문제를 다룬 영화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

AgalmA 2018-05-24 08:41   좋아요 2 | URL
psyche 님/
흑인인 벨 훅스나 록산 게이 책을 보면 중산층 백인 여성의 페미니즘이 주류가 된 문제점과 그것으로 페미니즘이 오도된 현상을 잘 짚어주더군요. 특히 벨 훅스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에서요.

cyrus 님/
토니 모리슨 원작 영화화 된 거 있음 좋을텐데...
유명한 <칼라 퍼플>은 다들 보셨겠죠?

cyrus 2018-05-24 14:11   좋아요 0 | URL
To. AgalmA님 / 생각해 보니 토니 모리슨의 소설 중에 영화로 만들어진 게 없군요. 영화 <더 컬러 퍼플> 다시 한 번 보고 싶네요. 레드스타킹 영화 모임 때 이 영화 보자고 건의하고 싶은데, 옛날 영화라서 안 될 것 같습니다... ㅎㅎㅎ

AgalmA 2018-05-23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인 민권운동이 페미니즘에 영향을 준 걸 생각하면 ‘강한 형제애‘는 여성 페미니즘의 ‘강한 자매애‘ 이론 형성에 영향을 줬다고도 볼 수 있겠군요

cyrus 2018-05-24 14:16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런데 여성의 동료애나 우정이 남성의 동료애만큼이나 긍정적으로 평가받지 못한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들은 동성애를 ‘정신적 사랑’으로 봤잖아요. 그런데 여성의 동성애는 비정상적인 사랑으로 간주되었어요.
 
노예선 - 인간의 역사 아우또노미아총서 60
마커스 레디커 지음, 박지순 옮김 / 갈무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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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명의 인류가 어머니 대지의 검은 아름다움을 떠나 새로 발견된 서부의 엘도라도로 옮겨지는 것. 그들은 지옥으로 떨어져 버렸다.”[1] 폭력과 학대 속에서 상처받으며 내일이 없는 삶을 살았던 흑인에게 이 세상 자체는 지옥이었다. 1700년~1808년은 기독교와 자본주의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황금의 시대’였다. 이 무렵 유럽의 백인들은 노예무역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백인들의 노예사냥으로 끌려가 아메리카에 매매된 흑인의 수는 수천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프리카에서 신대륙 아메리카로 가는 노예선. 차곡차곡 관처럼 포개진 흑인들.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아프리카에서 대서양을 넘어 아메리카까지 흑인 노예들을 배로 운송하는 과정을 ‘중간항해’라 한다. 노예선의 선원들은 중간항해 도중에 사망한(병사, 자살) 흑인들을 바다에 던져버렸다. 바다 위에 둥둥 떠 오른 흑인들의 시신 주변에 상어 떼가 몰려들었다.

 

《노예선 : 인간의 역사》(갈무리, 2018)충격적이고 참담한 인간의 어두운 이면을 보여준 책이다. 정사에는 철저히 무시됐던 노예 상인의 야만성을 폭로한다. 이 책은 ‘노예’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흑인해방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윌리엄 에드워드 듀보이스는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아메리카로 끌려와 눈물과 고통과 절망 속에 살아온 자신들의 역사를 ‘가장 장엄한 연극’이라고 비유했다.[2] 역사학자 마커스 레디커는 인류사의 ‘연극’이 펼쳐진 중심 무대인 노예선을 주목한다. 그는 잊힌 노예무역과 노예선에 대한 기록들을 모아 역사의 지평을 확대한다.

 

아프리카 노예무역은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노예 상인들의 주도로 15~18세기 상업자본주의 확장과 더불어 나타났다. 17~18세기에는 아프리카 연안 지역에서 노예가 많이 잡혀 왔으나 19세기에는 아프리카 내륙 지역에서까지 많은 노예가 잡혀 왔다. 노예무역에 노예 상인들에 의한 무자비한 사냥만 있었던 건 아니다. 다호메이 왕국, 아샨티 왕국 등 오랜 옛날부터 번성했던 아프리카 국가들은 다른 아프리카 내 부족과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세력을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노예 상인들과의 거래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아프리카 왕국들은 전쟁 포로를 노예 상인들에게 주는 대가로 무기를 사들일 수 있었다.

 

노예선은 ‘떠다니는 지하 감옥’이었다. 이 거대한 지하 감옥이 망망대해로 나가면 ‘나무로 만든 세계’가 된다. ‘나무로 만든 세계’의 권력자는 선장이다. 배의 하갑판 속에서만 지내는 흑인 노예들은 ‘상품’으로 취급받았다. 이윤에 눈이 먼 노예 상인과 선원 들은 한 명이라도 더 채워 넣기 위해 좁은 하갑판에 인간 ‘상품’을 꽉꽉 채워 넣었다. 선장과 선원들은 식음 전폐를 하거나 반란을 도모하는 노예들에게 온갖 종류의 고문과 신체 절단을 서슴지 않았다. 선장이 선호하는 고문 방식은 구교모 채찍이다. 끝에 매듭이 달린 아홉 개의 끈이 있는 구교모 채찍은 노예의 고통을 극대화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이보다 더 끔찍한 고문은 상어가 돌아다니는 바닷가에 빠뜨리는 벌이다. 선장은 노예 한 명을 골라 상어에 잡아먹히는 대상으로 삼았고, 노예들은 자신의 동료가 죽어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다. 이러한 형벌은 노예들의 저항 의지를 꺾이게 하는 동시에 ‘권력자’로서의 선장의 영향력을 확립한다. 노예들은 알몸으로 채찍을 맞고, 끔찍하게 고문당하고, ‘떠다니는 지하 감옥’ 속에서 잠들었다. 마커스 레디커는 ‘권력자’이자 ‘지배자’인 선장 앞에서 소리 없이 사라졌던 흑인 노예의 역사를 복원시킨다. 노예선 안에 감금된 흑인 노예의 저항 문화도 해방한다. 이로써 ‘아무것도 아닌 것’들은 ‘의미 있는 역사’로 되살아난다.

 

가령 노예선 안에서 형성된 흑인 노예 공동체와 정서적 유대감을 새롭게 해석한다. 노예선에 갇힌 노예들이 ‘흑인’이라고 해서 출신지, 언어, 문화, 관습 등이 다 똑같은 건 아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언어로 대화를 나누었지만 한마음 한뜻으로 뭉쳤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 ‘두려움’, 그리고 ‘살아갈 희망과 꿈’이라는 공통된 감정들이 친밀감을 높여주었고, 서로 위로하며 의지하는 ‘뱃동지(shipmate) 생겼다. 노래집단 정체성을 하나로 묶고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가진 지식이 될 수 있다. 노예들은 뼛속까지 스며있는 슬픔을 노래로 만들었다. 저자는 노예들이 부른 노래는 ‘아래로부터의 저항’과 ‘창조성’을 동시에 가진 문화로 본다.

 

《노예선》은 미국 사회조차 망각해버린 흑인 노예제도 역사와 그에 대한 흑인들의 저항을 재현한다. 이 책에 정리된 ‘인간의 역사’는 단순한 흥밋거리나 학문적인 논쟁의 주제라기보다는 삶과 죽음이 교차했던 현장을 보여주는 진실한 기록이다. 책 안에 어른들이 보기에는 상당히 잔인하게 느낄 수 있는 기록들이 몇 개 있다. 그렇지만 고통스럽게 죽어가던 노예들의 울부짖음이 귓가에 맴도는 듯한 역사는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자본주의의 맹아가 본격적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한 황금의 시대 이면에는 무참히 파괴된 수많은 운명의 아픔이 있다.

 

 

 

 

* Trivia

 

선장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경우가 발생하게도 했다. (239쪽)

→ 발생하기도 했다

 

 

 

[1] 윌리엄 에드워드 듀보이스, 《노예선》 21쪽

[2] 같은 책,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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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6 1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7 16:07   좋아요 0 | URL
네, 논란이 있긴 하지만 흑인도 노예제에 일조한 사실이 있습니다. 중잉집권제 아프리카 왕국은 포로로 잡힌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무역 상인에게 판 대가로 무기를 받았습니다. 그 무기로 다른 아프리카 종족이 사는 곳을 약탈했죠. 노예제의 역사를 바라볼 때 ‘가해자(백인)-피해자(흑인)’로 구분되는 이분법적 설정에 의존하면 안 됩니다.

stella.K 2018-05-16 15: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보니까 예전에 <뿌리>란 영화가 있었어.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을 영화화한.
초등학교 때 봤는데 정말 빨려들듯 봤지.
이게 또 세월이 흘러 다시 만들어졌는데
볼만도 한데 이상하게 보고 싶지가 않더군.
군함도도 보다 말았는데 잔인한 게 보기가 싫더라구.ㅠ

cyrus 2018-05-17 16:11   좋아요 0 | URL
읽을 때마다 가슴 먹먹하게 했던 역사 주제가 ‘흑인 노예’와 ‘일본 위안부’입니다. 보면 볼수록 도저히 인간의 행동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내용이 나와요. 이 고통스러운 역사를 널리 알리기 위해 평생을 바쳐 연구하는 분들이 존경스럽습니다.

2018-05-16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7 16:12   좋아요 1 | URL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읽기 시작한 이후부터 흑인 문화와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졌어요.. ^^;;

esmeral 2018-05-21 1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갈무리 출판사입니다.
『노예선』을 읽어주시고 서평과 오류 지적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려주신 1쇄의 오류를 갈무리 홈페이지 고칩니다 게시판에 공지하였습니다.
2쇄에서 수정하겠습니다.
http://galmuri.elogin.co.kr/index.php?mid=correct&document_srl=576070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