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노예선 - 인간의 역사 ㅣ 아우또노미아총서 60
마커스 레디커 지음, 박지순 옮김 / 갈무리 / 2018년 3월
평점 :
“천만 명의 인류가 어머니 대지의 검은 아름다움을 떠나 새로 발견된 서부의 엘도라도로 옮겨지는 것. 그들은 지옥으로 떨어져 버렸다.”[1] 폭력과 학대 속에서 상처받으며 내일이 없는 삶을 살았던 흑인에게 이 세상 자체는 지옥이었다. 1700년~1808년은 기독교와 자본주의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황금의 시대’였다. 이 무렵 유럽의 백인들은 노예무역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백인들의 노예사냥으로 끌려가 아메리카에 매매된 흑인의 수는 수천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프리카에서 신대륙 아메리카로 가는 노예선. 차곡차곡 관처럼 포개진 흑인들.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아프리카에서 대서양을 넘어 아메리카까지 흑인 노예들을 배로 운송하는 과정을 ‘중간항해’라 한다. 노예선의 선원들은 중간항해 도중에 사망한(병사, 자살) 흑인들을 바다에 던져버렸다. 바다 위에 둥둥 떠 오른 흑인들의 시신 주변에 상어 떼가 몰려들었다.
《노예선 : 인간의 역사》(갈무리, 2018)은 충격적이고 참담한 인간의 어두운 이면을 보여준 책이다. 정사에는 철저히 무시됐던 노예 상인의 야만성을 폭로한다. 이 책은 ‘노예’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흑인해방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윌리엄 에드워드 듀보이스는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아메리카로 끌려와 눈물과 고통과 절망 속에 살아온 자신들의 역사를 ‘가장 장엄한 연극’이라고 비유했다.[2] 역사학자 마커스 레디커는 인류사의 ‘연극’이 펼쳐진 중심 무대인 노예선을 주목한다. 그는 잊힌 노예무역과 노예선에 대한 기록들을 모아 역사의 지평을 확대한다.
아프리카 노예무역은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노예 상인들의 주도로 15~18세기 상업자본주의 확장과 더불어 나타났다. 17~18세기에는 아프리카 연안 지역에서 노예가 많이 잡혀 왔으나 19세기에는 아프리카 내륙 지역에서까지 많은 노예가 잡혀 왔다. 노예무역에 노예 상인들에 의한 무자비한 사냥만 있었던 건 아니다. 다호메이 왕국, 아샨티 왕국 등 오랜 옛날부터 번성했던 아프리카 국가들은 다른 아프리카 내 부족과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세력을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노예 상인들과의 거래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아프리카 왕국들은 전쟁 포로를 노예 상인들에게 주는 대가로 무기를 사들일 수 있었다.
노예선은 ‘떠다니는 지하 감옥’이었다. 이 거대한 지하 감옥이 망망대해로 나가면 ‘나무로 만든 세계’가 된다. ‘나무로 만든 세계’의 권력자는 선장이다. 배의 하갑판 속에서만 지내는 흑인 노예들은 ‘상품’으로 취급받았다. 이윤에 눈이 먼 노예 상인과 선원 들은 한 명이라도 더 채워 넣기 위해 좁은 하갑판에 인간 ‘상품’을 꽉꽉 채워 넣었다. 선장과 선원들은 식음 전폐를 하거나 반란을 도모하는 노예들에게 온갖 종류의 고문과 신체 절단을 서슴지 않았다. 선장이 선호하는 고문 방식은 구교모 채찍이다. 끝에 매듭이 달린 아홉 개의 끈이 있는 구교모 채찍은 노예의 고통을 극대화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이보다 더 끔찍한 고문은 상어가 돌아다니는 바닷가에 빠뜨리는 벌이다. 선장은 노예 한 명을 골라 상어에 잡아먹히는 대상으로 삼았고, 노예들은 자신의 동료가 죽어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다. 이러한 형벌은 노예들의 저항 의지를 꺾이게 하는 동시에 ‘권력자’로서의 선장의 영향력을 확립한다. 노예들은 알몸으로 채찍을 맞고, 끔찍하게 고문당하고, ‘떠다니는 지하 감옥’ 속에서 잠들었다. 마커스 레디커는 ‘권력자’이자 ‘지배자’인 선장 앞에서 소리 없이 사라졌던 흑인 노예의 역사를 복원시킨다. 노예선 안에 감금된 흑인 노예의 저항 문화도 해방한다. 이로써 ‘아무것도 아닌 것’들은 ‘의미 있는 역사’로 되살아난다.
가령 노예선 안에서 형성된 흑인 노예 공동체와 정서적 유대감을 새롭게 해석한다. 노예선에 갇힌 노예들이 ‘흑인’이라고 해서 출신지, 언어, 문화, 관습 등이 다 똑같은 건 아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언어로 대화를 나누었지만 한마음 한뜻으로 뭉쳤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 ‘두려움’, 그리고 ‘살아갈 희망과 꿈’이라는 공통된 감정들이 친밀감을 높여주었고, 서로 위로하며 의지하는 ‘뱃동지(shipmate)’가 생겼다. 노래는 집단 정체성을 하나로 묶고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가진 지식이 될 수 있다. 노예들은 뼛속까지 스며있는 슬픔을 노래로 만들었다. 저자는 노예들이 부른 노래는 ‘아래로부터의 저항’과 ‘창조성’을 동시에 가진 문화로 본다.
《노예선》은 미국 사회조차 망각해버린 흑인 노예제도 역사와 그에 대한 흑인들의 저항을 재현한다. 이 책에 정리된 ‘인간의 역사’는 단순한 흥밋거리나 학문적인 논쟁의 주제라기보다는 삶과 죽음이 교차했던 현장을 보여주는 진실한 기록이다. 책 안에 어른들이 보기에는 상당히 잔인하게 느낄 수 있는 기록들이 몇 개 있다. 그렇지만 고통스럽게 죽어가던 노예들의 울부짖음이 귓가에 맴도는 듯한 역사는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자본주의의 맹아가 본격적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한 황금의 시대 이면에는 무참히 파괴된 수많은 운명의 아픔이 있다.
* Trivia
선장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경우가 발생하게도 했다. (239쪽)
→ 발생하기도 했다
[1] 윌리엄 에드워드 듀보이스, 《노예선》 21쪽
[2] 같은 책, 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