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어떻게 살아남을까
우에노 지즈코 지음, 박미옥 옮김 / 챕터하우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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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자유에 있다. 원하는 직업을 자유로이 선택하고, 사용자와의 교섭에 의해 노동조건을 협정하는 권리가 인정된다. 시장경제는 간혹 오류가 없는, 합리적인 시스템으로 치장되곤 한다. 정부의 정책 실패 이후에는 시장의 논리를 무시한 탓이라는 진단이 내려진다. 이러한 진단은 ‘신자유주의’라는 경제이론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원래 신자유주의는 복지병과 생산성 저하로 몸살을 앓던 영국과 미국에서 1980년대에 대처리즘(Thatcherism),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 등의 이름으로 등장했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주요 내용은 규제 완화, 공기업의 민영화, 노동시장의 유연화, 정부지출 축소, 감세를 통한 기업경쟁력 제고, 산업구조조정 등이다.

 

경제적 및 정치적 자유가 신장된다 하더라도 먹고사는 것이 힘겹다면 인간다운 삶이라고 볼 수 없다. 일을 하면서도 언제나 가난에 허덕이는 이른바 ‘노동하는 빈곤층’, 비정규직 문제는 오랫동안 계속 미뤄진 난제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전체 정규직 노동자의 절반을 훌쩍 뛰어넘은 지 오래다. 정규직들은 살아남기 위해 신자유주의의 허구적 차별을 순순히 받아들이지만, 비정규직을 무시하는 만큼 자신의 존엄성도 파괴된다.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상황은 공포 그 자체이다.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서는 숨 쉬는 자유조차 허락받지 못할 것처럼 지친 일상의 문화가 계속되고 있다.

 

노동시장으로 진입하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 증가는 질적 저하를 대가로 이루어진다는 것에 그 심각성이 있다. 신자유주의 노동시장은 바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양산을 통해 그 경쟁력을 확대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여성 노동의 대다수는 비정규직의 얼굴을 하고 있다. ‘노동의 유연화’가 여성 노동자들을 점점 더 조직적으로 주변부 노동예비군으로 이용한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국가는 재생산노동(가사, 양육)의 책임을 여성에게 일차적으로 부여하면서 여성 노동력을 비정규직의 형태로 노동시장에 흡수하려는 정책을 추진한다. 국가는 여성을 한낱 아이 낳는 기계로 본다.

 

그렇다면 이렇게 고통스러운 여성의 현실을 바꿔낼 희망적인 전략은 있는가? 여성의 사회참여 확대를 위한 ‘젠더 평등 정책’이 답인가? 여성 노동이 존중되고 고용환경이 개선되는 노동정책. 참 좋은 정책이다.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여성 평등’으로 포장된 신자유주의 정치는 여성을 기만한다. 마치 붕어빵 속에 붕어가 없듯, ‘여성 평등’ 속에 ‘여성’이 없는 격이다. 여성 노동자들조차 신자유주의 전략에 포섭되는 이유는 젠더 평등 정책, 여성 할당제 등을 절호의 ‘기회’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페미니스트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上野 千鶴子)는 여성의 고용 참여를 환영하고, 페미니스트 못지않게 ‘여성 평등’을 내세우는 신자유주의 정권의 전략을 의심한다.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일본은 1985년에 ‘남녀고용기회균등법(균등법)을 제정했다. 1991년에 육아휴직법, 2001년에 가정폭력방지법이 만들어졌다. 우에노 지즈코는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일본 여성의 삶이 좋아졌는지 팍팍해졌는지 되돌아본다. 그녀가 내린 결론은 ‘Yes or No’다. 좋은 점이 있고, 나쁜 점도 있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선택을 강조한다. 여성은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따라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게 됐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선택지'는 다양해졌다. 그렇지만 정부가 이야기하는 여성의 의제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맞물려 이뤄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지배세력은 여성을 가족 내 보살핌의 일차적 책임자로 규정한다. 가족 중에서도 여성이 돌봄 노동 영역을 부담하고 있다. 여성의 재생산 노동에 대한 고려 없이 진행되는 젠더 평등 정책은 가부장적 성차별 구조를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신자유주의는 여성의 생산, 재생산 노동의 이중 부담과 희생을 강요하고 성적 불평등을 확대하고 있다. 그리고 정규직 여성 노동자와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간의 양극화(여여 격차)가 고착하고 있다.

 

우에노는 ‘기이한 관계’라는 표현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여성 혐오 현상이 내셔널리즘과 뒤엉킨다고 지적한다.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 비기득권층으로 전락한 사람들(남성)이 내셔널리즘에 기대려 한다.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내부에 적을 만드는 전략으로 ‘여성 혐오’, ‘혐한’을 조성한다. 정치권에 향해야 할 일본인의 분노가 여성, 한국인에게 쏟아지고 있다. 우에노는 혐오를 부추기고 방관해온 고이즈미, 아베 정권을 비판한다. 신자유주의는 ‘성공한 여성’을 앞세워 성차별 해방 분위기 조성과 여성을 경제적 주변부로 몰아내는 ‘여성 빈곤화’를 동시에 달성한다. 그런데 내셔널리즘은 결혼하지 않는 ‘성공한 여성’과 페미니스트를 저출산 문제의 주범으로 몰아세워 공격한다.

 

우에노는 페미니즘이 대응하기 어려운 상대가 신자유주의라고 말한다. 신자유주의 장벽은 그렇게 견고할까? 신자유주의 사회의 여성 문제는 복합적인 원인이 중첩된 골치 아픈 문제이다. 그녀는 여성 친화적인 정책 추진에 속도를 내는 사회적 분위기가 페미니즘의 비약적 발전이라고 이야기하는 반응에 냉정한 시선을 던진다. 페미니즘이 대중화되는 과정이 신자유주의의 흐름과 겹치기 때문이다. 《여성은 어떻게 살아남을까》는 페미니즘의 대중화와 신자유주의 시대에 마주하는 일본 여성 문제의 현주소를 조명한다. 우에노는 이 책에서 ‘여여 격차’와 여성 분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페미니즘의 투쟁 방식을 지적하면서, 그 원인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진지하게 성찰한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질문은 의미심장하다. 페미니스트들은 지금 바닥을 향한 경쟁을 강요하는 비정규직화에 맞서 자신을 저항주체로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될, 힘겹지만 중요한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려운 도전에 직면한 가운데 페미니스트가 먼저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 신자유주의의 벽을 무너뜨리게 될 작은 구멍을 뚫으려면 ‘연대하는 힘’을 키워야 한다. 인간은 연대를 통해 발전하고 인간다워진다. 연대는 거대한 장벽을 깨는 힘인 ‘집단성’과 ‘상호신뢰’를 회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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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3 15: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9-03 18:24   좋아요 1 | URL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현상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분석해야 하는데, 일부 남성들은 저출산과 비혼 문제의 원인을 무조건 여성 탓으로 돌립니다. 이런 적대적인 반응으로는 저출산 문제를 절대로 해결할 수 없어요. 여성이 아니라 사회에 분노해야 합니다.
 
복학왕의 사회학 - 지방 청년들의 우짖는 소리
최종렬 지음 / 오월의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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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실업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을 나와서 다녀본 직장이라는 게 대학교 행정실에 계약직으로 일한 것과 지금 다니는 기계제품을 판매 · 설치하는 회사이다.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고 싶어도 이직할 곳을 찾기가 만만치 않고, 잘못하다간 정말로 오갈 데 없는 백수가 될까 봐 두렵기도 하다. 청년 실업에 대한 뉴스를 들을 때면 남 일 같지 않다. 정말 생각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은 말이 실업이다. 거기에 지방대 출신은 취업 전선에서 가장 불리하다는 말까지 들으면, 따뜻한 말 한마디 정도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청년 실업도 서러운데, 지방대 출신이라고 해서 이 사회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도 너무 서글프다.

 

지방대 재학생과 졸업생, 학부모를 심층 면접하여 분석한 복학왕의 사회학(오월의봄, 2018)을 다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맙소사! 지방대생이 행복하게 살려면 뭘 해야 하는 거야?” 게으른 것도 아니고 다들 열심히 살려고 고군분투를 하는데도 해답이 보이지 않는다. 지방대생의 삶이 왜 이 지경이 됐나.

 

복학왕의 사회학은 계명대학교 사회학과 최종렬 교수의 논문을 보완한 책이다. 논문 제목은 복학왕의 사회학: 지방대생의 이야기에 대한 서사 분석이다. 복학왕은 매주 수요일 네이버에 연재 중인 웹툰이다. 지방대 생활의 사실적인 모습을 묘사해 호평을 받고 있다. 저자는 지방대에서 10년 이상 가르치면서 만난 청년들이 웹툰에 나온 지방대생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연구를 진행했다. 저자는 6명의 지방대 재학생과 17명의 지방대 졸업생, 그리고 지방대생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묻고 얻은 답변을 분석했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터놓고 이야기할 기회가 없는 지방대생의 서사를 새롭게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그래서 저자는 감정을 제대로 들어주는 상대가 없다는 점에서 지방대생을 소수자로 본다. 특정 지역, 특정 학교에 국한된 현상의 구조를 전체 지방대 학생에게 적용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는 위험은 분명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일반화된 경험적 사실을 도출하는 것이 연구의 주된 의도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다.

 

누군가는 지방대생을 생존 경쟁에서 낙오된 패배자라고 말한다. 또는 지방대라 부르지 않고 지잡대(지방의 잡스러운 대학)라고도 부른다. 주로 지방대생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일종의 자조적인 속어로, 패배주의를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는다. 사회학자 김홍중은 오늘날 청년층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생존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이들을 각자도생에 익숙한 생존주의 세대라고 불렀다.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시선으로는 지방대생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학생들에게 질문한다.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학생들은 한결같이 가족과 함께 평범하게 사는 것을 행복의 가치로 삼았다. 이들에게 생존은 가족 안에 머물면서 생활하는 것이다. 경쟁이 치열한 취업 전선에 뛰어들지 않는다. 그들은 공부, 입시, 스펙 경쟁 속에서 처지고 낙오했던 쓰라린 경험을 겪었거나 이미 그 경험을 하기 전에 위축되어 있다. 그래서 어차피 도전해도 실패한다고 체념하면서, 그런 자신의 모습에 대해 겸연쩍어한다. 저자는 적극적으로 자기계발을 하지 않는 지방대생의 감정 상태를 성찰적 겸연쩍음이라고 표현한다. 생존을 위한 자기계발 의지보다 가족의 행복을 위한 자기보존 의지가 강할수록 행복을 위한 목표를 높게 잡지 않는다. 자신과 가까이에 있고, 얼마든지 자주 만날 수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도 평범한 행복을 추구하기에 실패로 귀결되는 도전을 해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주변 환경에 익숙한 학생들은 가족 밖, 더 나아가 지방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저자가 만난 지방대생들의 행동 양식은 적당주의 집단 스타일로 요약된다. 지방대생뿐만 아니라 지방대 졸업생, 부모들 대부분은 적당히 돈을 벌고, 적당히 즐기면서 가족과 함께 사는 소소한 일상을 꿈꾼다.

 

그렇다면 지방대생은 어떻게 하면 가족지방이라는 이중 울타리에 벗어날 수 있을까? 지방대생들이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 수 있도록 대학과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을 해야 한다. ‘대학생활을 즐겨라!’라는 말조차 쉽게 꺼내기 힘든 지금의 지방대는 기운이 팔팔한 자유로운 영혼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자기 세계에 갇힌 무기력한 영혼들이 캠퍼스를 배회한다. 저자는 미적 체험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는 것이 가족주의에 벗어나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대학이 미학적 폴리스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가 단번에 이해하기 힘든 용어를 쓴 것에 약간 불만이 있다. 왜냐하면, 용어 자체에 인문학적 향기가 물씬 풍기고 책을 접하지 않은 독자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일부 독자는 저자가 문제 해결 대안으로 제시한 미학적 폴리스개념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기도 한다. 저자가 제시한 미학적 폴리스는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는 교육 기관을 뜻하지 않는다. 새로운 타자들을 만나 상호 작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저자의 대안이 이상적이지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지방대생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도 여전히 자기 세계에 갇힌 채 살아가는 지방대생들이 있다.

 

복학왕의 사회학을 읽고 한동안 마음이 부대꼈다. 지방대 졸업생의 위치에 서서 대학교에 일하는 동안 다양한 모습의 지방대생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취업에 번번이 실패해서 졸업을 유예하는 친구들, 이러한 반복되는 실패에 지쳐버린 친구들, 그리고 주변 친구들이 겪은 상황을 지켜보고 나서 지레 겁먹어 도전을 꺼리는 친구들. 이들이 만족할 수 있는 해결책은 금방 나오지 않겠지만,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지방대생들의 목소리를 사회 전체에 울릴 수 있는 공적인 서사 형태로 듣는 일이다. 이 일은 책상에 앉아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귀 기울여 듣는 작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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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1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8-22 11:51   좋아요 1 | URL
대구에 일자리가 줄어들면, 지방경제가 침체될 뿐만 아니라 지역에서 누릴 수 있는 문화자본도 줄어들어요. 이러니까 대구가 서울이나 다른 지방에 비해서 문화 공간이 부족해요. 특히 서점과 책방! 지역에 다양한 문화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지 않으면 문화에 대한 지역주민의 관심도 단순해져요. 그래서 대구에 오래 살면 보수적인 집단 분위기를 쉽게 벗어나지 못해요.

syo 2018-08-21 18: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왜 눈물이 나지?? ㅠ_ㅜ

cyrus 2018-08-22 11:53   좋아요 0 | URL
이 책을 보면서 대학생 시절 생각이 많이 났어요. 저도 얼른 취직해서 소박하게 지내면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마음가짐도 보수적인 환경이 만들어 낸 생각이었어요.

감은빛 2018-08-21 23: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방대 졸업생이라 공감이 많이 가네요.
아마도 저 역시 시민단체 활동가라는 직업을 택하지 않았다면,
기나긴 실업의 늪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거라는 생각을 가끔해요.
활동가가 아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저자의 대안은 별로 대안으로 느껴지지 않는군요.

한편으로 저는 대학이 너무 많고,
대학을 나와도 딱히 인생에 도움될 것이 없는
그러니까 대학 다니면서 대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입시 학원의 연장처럼 단순히 각종 자격증과 스펙 쌓고,
고시 준비하는 그런, 굳이 대학생이 아니어도 될 활동을 대학에서 하는 것이 문제다 싶어요.

대학입시와 대학생활과 취업준비까지 쓸데없이 허비하는 시간이 너무 많다 여겨요.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뭔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혹은 잘 하는 것을
통해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특히 요즘처럼 뭐든 찾아보면 다 알 수 있고,
요즘 젊은 분들처럼 뭐든 척척 잘 하는 사람들이라면 말이죠.

cyrus 2018-08-22 11:57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이 책의 저자가 내세운 대안이 ‘대학만능주의’로 빠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구에서 활동하는 여성운동 단체들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단체는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입니다. ‘레드스타킹’처럼 독서와 여성운동을 병행하는 중소 규모 단체도 있습니다. 대구에 ‘레드스타킹’과 비슷한 단체가 또 있는데요, 작년 5월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나쁜 페미니스트’입니다. 집회, 독서모임, 페미니즘 강연 등을 기획 · 진행하고 있습니다.

 

 

 

 

 

 

7월 30일에 ‘나쁜 페미니스트’와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이 공동 주최한 페미니즘 강연이 열렸습니다. 강연 제목은 ‘다문화주의, 페미니즘, 그리고 교차성’입니다. 강연자는 김보명 서울대 여성연구소 객원연구원입니다. 김보명 선생님은 요즘 제가 주목하고 있는 여성학자입니다. 레드스타킹 멤버들을 만나게 되면서 이 분이 쓴 논문과 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제주도 예맨 난민 문제가 불거진 이후로 ‘일부’ 페미니스트는 난민 보호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무슬림 남성 난민’이 성폭력을 저지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스갯소리로 한국에 오고 싶어 하는 난민을 ‘남민(男民)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여성 차별과 (성)폭력을 정당화하는 이슬람 문화가 우리나라 사회에 들어올까 봐 걱정합니다. 이방인에 대한 낯선 감정, 그리고 낯선 존재에 대한 두려움.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본능적인 감정입니다.

 

 

 

 

 

 

 

 

 

 

 

 

 

 

 

 

 

 

 

* 마사 누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민음사, 2015)

* 마사 누스바움 《혐오에서 인류애로》 (뿌리와이파리, 2016)

* 카롤린 엠케 《혐오사회》 (다산초당, 2017)

 

 

 

그런데 이 ‘공포’ 감정이 무슬림 남성 난민과 이슬람에 투사되면 어떻게 될까요? 무슬림 남성 난민은 여성을 잔인하게 억압하는 ‘악마’가 되고, 이슬람은 여성 억압을 일삼는 반인륜적 종교로 인식합니다. ‘무슬림 남성 난민=이슬람=악마’로 연상되는 공포 감정이 확산될수록 실제로 검증되지 않은 공포도 더해지고, ‘가짜 뉴스’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난민을 ‘여성을 위협하는 존재’ 또는 ‘사회에 해로운 존재’로 규정합니다. 미국의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 그리고 사회 전체를 보호한다는 핑계로 타자를 거부하고 혐오하는 반응을 ‘투사적 혐오(projective disgust)라고 말합니다. 투사적 혐오는 자신과 다른 사회 구성원 또는 타자를 ‘오염원’으로 규정하도록 가르칩니다.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무슬림 남성 난민이 한국 여성을 위협할까봐 두려워합니다. 워마드 회원들은 무슬림 남성과 이슬람을 조롱하는 발언을 합니다. 그러나 무슬림 남성 난민과 이슬람에 향한 투사적 혐오는 상상적 차원에서 일어날 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무슬림 남성 난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난민을 두려워하는 반응은 ‘실재보다 강력한 상상적 차원’에서 일어난 감정입니다. 실제로 자신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은 무슬림 난민 남성에게 분노와 혐오를 투사하는 상상은 타자를 배제하고 혐오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기여합니다. 독일의 언론인 카롤린 엠케(Caroline Emcke)는 혐오는 “느닷없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고 양성”된다고 말합니다[주1]. 따라서 우리 사회에 제주도 예맨 난민 수용을 반대하고, 혐오하는 목소리가 늘어난 것은 갑자기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김보명 선생님은 난민 수용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언어를 분석하여 여성들이 왜 ‘난민 혐오’에 몰두하는지 배경에 주목했습니다. 무슬림 난민 남성을 비난하는 여성들은 무슬림 남성의 폭력성을 강조하기 위해 무슬림 남성에게 학대받은 무슬림 여성의 피해 경험 사례를 ‘전시’합니다. 김보명 선생님은 한국 여성의 안전을 확보하는 명목으로 무슬림 여성의 피해 사례를 동원하고 전시하는 언어를 ‘페미니즘의 언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서사는 무슬림 여성을 ‘피해자’라는 고정된 틀 안에 가둡니다. 즉 남성 중심 무슬림 문화에 저항하는 무슬림 여성의 힘과 목소리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 권김현영 엮음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교양인, 2018)

 

 

 

아마도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한국 여성이 무슬림 여성의 피해 경험을 공론화하는 일은 피해자 여성을 지지하는 동시에 무슬림 남성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반(反) 성폭력 활동이 될 수 있다고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슬림 여성의 피해 경험 사례만 지나치게 부각하는 것은 ‘피해자 중심주의’ 담론에 벗어나지 못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권김현영 선생님은 피해자 경험을 공론화하면서 무조건 피해자 편에 들어주는 언어는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주2]. 한국 여성(페미니스트)이 무슬림 남성 난민이 일으키는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슬림 여성에게 ‘피해자로서의 역할’만 부여한다면, 그것은 ‘피해자 존중’이 아닙니다. 권김현영 선생님은 피해자를 무조건 지지하거나 오직 피해 사실만 호소하는 일을 ‘권리의 형식을 띤 타자화’라고 했습니다[주3].

 

 

 

 

 

 

 

김보명 선생님은 “페미니즘은 난민 혐오의 주체 세력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일부’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즘’을 내세워 난민 수용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워마드 회원들은 남성 난민과 이슬람을 혐오하는 발언을 합니다. 선생님은 우리나라 페미니즘이 지금보다 더 용감해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용감했습니다. 그분은 ‘혐오와 공포’를 넘어선 페미니즘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경계 없는 페미니즘’이라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열었습니다. 선생님은 “페미니즘은 나의 세계를 넓히는 사상”이라고 말했습니다. 공감합니다. ‘나의 세계’에 갇힌 페미니즘은 다양한 여성의 경험, 언어, 정체성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의 세계’를 넓히려면 사유의 범위를 좁히게 하는 ‘경계들’을 없애야 합니다. 그 ‘경계들’이란 인종주의, 종교, 문화, 섹슈얼리티 등입니다. 복잡한 ‘경계들’에 연루된 특정 여성 집단의 경험과 목소리를 재현하고 분석하는 페미니즘이 바로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입니다.

 

 

 

 

[주1] 카롤린 엠케, 정지인 옮김, 《혐오사회》, 다산초당, 2017, pp. 22~23.

 

[주2] 권김현영, 『성폭력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교양인, 2018, pp. 50~51.

 

[주3] 같은 책, pp.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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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을 퀴어링!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페미니즘 이론, 실천, 행동
미미 마리누치 지음, 권유경.김은주 옮김 / 봄알람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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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애 중심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의 삶은 정치학과 철학의 주제가 되지만, 여성의 삶은 의학과 생물학의 주제로 간주한다. 특히, 근대 이후 공 · 사 영역 분리의 성별화가 가속화되면서, 남성의 삶은 더욱 공적인 것이 되었고 여성의 삶은 더욱 사적인 것이 되었다. 이로 인해 ‘당신은 여성인가, 남성인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부딪히게 되는 문제가 되었다. 다른 사람이, 즉 의사가 당신의 성별이 무엇이라고 정해준다면 어떻게 될까? 단 두 가지의 선택 중 하나로 ‘당신은 남성입니다’ 또는 ‘당신은 여성입니다’라고 말이다. 당신이 스스로 남성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남성’이라고 정해준다면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그러나 당신은 스스로 여성이라고 생각하는데 ‘남성’이라고 정해준다면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을 것이다. 자신이 여성인데도 남성으로 호명하는 순간, 주체는 ‘성 정체성(gender identity)의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의사가 판정한 성별 결과에 따라 분홍색 혹은 파란색 옷으로 구분되어 입혀지며, 손에는 인형 또는 장난감 로봇이 쥐어진다. 성별에 따라 다른 대접을 받는 것은 차별적이지만, 근원적으로 단 두 가지의 성별을 지정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폭력적인 일이다.

 

페미니즘의 출발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성인 섹스(sex)와 문화적으로 구성된 젠더(gender)를 구분하는 데서 비롯됐다. 이를 토대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을 정치적 주체로 집단화하고, 권리 향상을 위한 연대를 강조해 왔다. 그러나 의료적 트랜지션(medical transition)으로 여성이 남성이 되고, 남성이 여성이 되는 세상에서 페미니즘이 ‘여성’이라는 성적 범주만 강조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후천적으로 형성된 젠더 영역으로 들어가면 페미니즘은 혼란에 빠진다. 그래서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은 성적 본질주의, 즉 본질적으로 결정된 성 정체성은 없다고 말한다. 즉 선천적으로 타고난 섹스도 젠더의 넓은 의미에 포함된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젠더를 ‘원본 없는 모방’[주1]이라고 말했다. 젠더는 고정되는 것이 아니고, 수행되는 오직 그 순간만큼만 가변적인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여성을 여성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여성으로 지칭된 존재가 여성 정체성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버틀러는 젠더든 섹스든 완성된 채로 존재하는 원본은 없다고 말한다. 버틀러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페미니즘을 여성의 권리향상 차원을 넘어 레즈비언, 게이, 트랜스젠더, 드래그 퀸(drag queen, 남성이 공연이나 오락을 목적으로 여장을 하는 것)까지 포함한 성소수자의 섹슈얼리티 문제로 확장한다. 이러한 급진적인 인식론은 퀴어 이론(queer theory)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퀴어는 본래 동성애자들을 멸시하는 호칭이지만, 버틀러에 이르러서는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의미를 고정하는 모든 담론 권력에 저항하는 전복적 단어로 자리 잡는다.

 

《페미니즘을 퀴어링!》(봄알람, 2018)은 페미니즘 운동과 퀴어 운동에 관한 문제의식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책이다. 이 책을 쓴 미미 마리누치(Mimi Marinucci)는 페미니즘 시각에서 퀴어 이론을, 또 퀴어 이론 시각에서 페미니즘을 새롭게 해석할 뿐 아니라 페미니즘 자체를 다시 쓰고 있다.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규제와 규범이 만든 사회적 산물이다. 저자는 페미니즘이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포괄하는 급진적 이론이 되려면 섹스 안에 전제된 문화적, 제도적 통제를 꿰뚫어봐야 하며 어떤 특정한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만 강조하는 다양한 형태의 억압 체계에도 비판적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마리누치가 시도하는 것은 페미니즘 운동과 성소수자 운동의 연대, 즉 ‘퀴어 페미니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저자는 퀴어 이론가들로부터 이론적 수혈을 받는데, 이 책에서도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와 버틀러, 그리고 게일 루빈(Gayle Rubin)의 사상에 대한 인용을 만날 수 있다. 마리누치는 푸코, 버틀러, 루빈의 사상을 분석과 비판의 방법론으로 삼아 페미니즘 담론을 해체적으로 읽어냄으로써 ‘퀴어 페미니즘’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책의 제목 ‘페미니즘을 퀴어링!’은 페미니즘 운동과 퀴어 운동은 연대할 수 있다는 선언적 진단이며, 좀 더 급진적인 젠더-섹슈얼리티 이론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표현이다.

 

페미니즘 운동과 퀴어 운동을 연대하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퀴어 이론은 젠더 이분법과 섹슈얼리티 이분법(이성애/동성애)뿐만 아니라 여성학과 게이 및 레즈비언 연구도 해체하고 있기 때문이다[주2]. 그렇다고 해서 페미니즘 운동과 퀴어 운동의 연대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페미니즘 운동과 퀴어 운동은 공통으로 ‘주변인들의 목소리’로 시작됐다. 이 두 가지 운동에 뛰어든 모든 사람들, 즉 프롤레타리아 여성(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흑인 여성(흑인 페미니즘), 그리고 성소수자 등은 기존의 공고한 이성애 중심 가부장적 사회에서 배제된 ‘주변인’의 존재인 동시에 권력을 교란할 수 있는 목소리와 언어를 가졌다. 그들의 목소리는 ‘이상한(queer)’ 것으로 치부되었지만, 개인적 목소리가 점점 모여서 더 커질수록 페미니즘 운동과 퀴어 운동은 ‘정치적인 것’으로 발전한다. 따라서 페미니즘 운동은 자매애를 넘어서 더욱 강력한 ‘주변인들의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 퀴어 페미니즘 운동에 뛰어든 모든 사람은 ‘퀴어’하다. 퀴어한 주변인들이 자기 삶을 정당화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정체화하는 것이 퀴어 페미니즘의 실천 방식이다.

 

 

 

 

[주1] 미미 마리누치 지음, 권유경 · 김은주 옮김, 《페미니즘을 퀴어링!》, 봄알람, 2018, pp. 136.

 

[주2] 같은 책, pp.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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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종교인들은 종교를 믿음과 구원이라는 추상적 개념보다는 기독교, 불교, 이슬람 등 구체적 종교 형태를 통해 이해한다. 이들은 각 종교 신도의 생활과 경전 내용을 통해 종교의 의미를 유추하기도 한다. 대부분 종교는 보수적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과거의 전통을 지키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수의 종교인은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데 요청되는 비판의식을 거부하고, 이전 것을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 결과적으로 현재의 종교는 비판적 사유가 작동되는 것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고, 더 이상 변화하기를 거부하는 행보를 보이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종교 내 성차별문제는 오랫동안 비가시화되어 왔다.

 

워마드에 천주교의 성체(聖體)를 훼손한 사진이 올라와 큰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밀떡에 주황색 글씨로 낙서가 되어있고, 일부가 불타 검게 그을려 있는 사진이 문제였다. 천주교에서 성체는 현존하는 예수의 몸을 가리킨다. 성체를 훼손하는 행위는 예수를 직접 모욕한 것으로 해석된다. 일부 워마드 회원들은 여성을 억압하는 종교는 사라져야 한다면서 천주교뿐만 아니라 기독교, 이슬람를 조롱하는 게시물을 올리기도 했다.

 

 

 

 

 

이슬람교 경전 코란을 불태우는 사진이 게시되면서 또 다른 논란이 일었던 바 있다. 해당 사진은 실제 경전을 소각하는 장면을 찍은 것이 아니다. 워마드 회원이 직접 코란을 불태워 찍은 사진도 아니다[1]. 그러나 이 게시물을 올린 회원은 이슬람 바퀴벌레라는 표현으로 이슬람과 남성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지금도 워마드에는 종교를 비하한 게시물이 남아 있다.

 

워마드의 성체 훼손 논란에 대해서 혹자는 천주교가 워마드의 자극적 행동에만 지적할 것이 아니라 종교 내 성차별 문제를 본격적으로 들여다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런 의미에서 각 종교계도 성차별 문제에 대한 자성이 필요하다. 하지만 종교 내 성차별 문제를 들여다 볼 때 반드시 피해야 할 오류가 있다. 종교가 여성을 차별하고, 혐오한다는 주장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공통으로 가부장제적 전통을 지니고 있다. 성경이나 코란에 보면 여성은 남성보다 수동적이고 열등한 존재이며 동시에 파괴적인 성적 에너지의 소유자로 간주하여 남성에 의해 철저하게 관리 통제돼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

 

 

 “신이 부여한 특권에 따라, 남성은 여성에 대한 권위를 지닌다. 여자의 부정행위가 의심될 때는 훈계하라. 여자를 가두고 매질하라.”

 

(코란 443[2])

 

 “정숙한 옷차림을 한다.” (디도데 전서 29)

 

 “바지나 청바지가 아니라 원피스나 치마를 입는다.”

  (신명기 225[3])

 

 

기독교와 이슬람에는 여성 억압을 정당화하는 교리나 규율이 있다. 그렇다면 시대에 뒤떨어진 교리를 전파하고, 여성을 무시하는 종교는 사라져야 하는가? 그리고 예수와 무함마드는 성차별주의자인가? 그들은 남자라서 조롱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워마드는 종교를 모욕하는 행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과연 이게 극단적이어도 충분히 의미 있는 여성 운동이라고 볼 수 있을까?

 

기독교와 이슬람을 여성 혐오 종교로 규정하고, 더 나아가 예수와 무함마드를 조롱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워마드의 행동은 논증적으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다. 그리고 여성 권리 신장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양한 전략을 선택할 수 있는 여성운동의 특성상 워마드의 종교 비하는 전략적으로 문제가 있다.

 

 

 

 

 

 

 

 

 

 

 

 

 

 

 

* 에마 골드만 외 그곳에 가면 다른 페미니즘이 있다(르몽드코리아, 2018)

* 레이첼 헬드 에반스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 본 1(비야토르, 2018)

 

 

 

기독교와 이슬람은 여성 혐오 종교라는 주장은 누구나 동의한다. 여성을 차별하는 내용이 있는 경전의 구절 몇 개만 찾아내면 종교의 문제점을 언급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의 문제점만 지나치게 부각하면 여성을 동등하게 바라본 경전의 해석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게 된다. 성경, 코란 등 종교 복음서는 여성 차별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왔지만, 그 속에 훌륭한 업적을 남긴 여자 성인(聖人), 여성 신도를 찬양하는 구절도 있다. 경전이나 복음서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전승되고 공유되어 왔다. 이 과정에서 가부장적 권력을 쥐고 있는 남성 종교인들은 여성을 높이 평가한 구절들이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삭제했다. 그리하여 기독교, 이슬람 내 여성 신도들은 경전의 구절을 새롭게 재해석하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 엄익란 금기, 무슬림 여성을 엿보다(한울아카데미, 2015)

* [절판] 하이다 모기시 이슬람과 페미니즘(프로네시스, 2010)

 

 

 

이슬람 페미니스트 아스마 바를라스(Asma Barlas)는 이슬람 문화권에 있는 여성 차별의 원인을 코란에서 찾지 않는다. 그녀는 무슬림 여성을 동등하게 대하라고 강조한 무함마드의 계시를 왜곡하고, 차단한 남성 종교인 및 학자들의 가부장적 권력이 무슬림 여성 차별을 강화한 주된 원인이라고 주장한다[4].

 

비무슬림 또는 비무슬림 학자들은 경전의 편파적인 해석을 무시한 채 이슬람과 코란 자체가 여성 혐오를 조장하는 원인이라고 비난한다. 이러한 편견은 반이슬람주의라는 탈을 쓴 극우 세력을 결집하게 만드는 서사로 작용한다. 이슬람을 비하하고, 코란을 불태우려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몇몇 워마드 회원의 주장은 반이슬람 · 반난민 정서와 맞닿아 있다. 따라서 종교와 난민을 배척하는 워마드의 발언은 페미니즘 방식의 언어라고 보기 어렵다.

 

종교 내에 쉬쉬하고 있는 여성 차별 및 성폭력 문제는 종교적 차원의 문제를 넘어선 사회적 문제이다. 남성 중심, 가부장적으로 해석되고 전달된 경전은 평등의 관점으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면서 경전이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변질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종교 내 성차별 문제는 남성 종교인의 절대적 권위와 위계 구조를 문제 삼아야 근절할 수 있다. 종교 자체를 여성 혐오의 온상으로 생각하는 워마드의 극단적인 입장은 종교 내 페미니즘 운동의 노력을 축소하는 부작용을 불러일으킨다. 워마드는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은 잘못 찾았다.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종교 내 성차별 문제를 어떻게 근절해야 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1] 워마드 회원이 코란을 직접 불태운 것이 아니라 과거 외국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사진을 가져다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구글이나 유튜브를 검색하면 동일한 사진과 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워마드 회원 코란 불태웠다게시물에 발칵외국 사진 재탕 확인 휴우~”], 동아일보, 2018711)

 

[2] 앙리 텡크, 신은 여성 혐오자인가?, 그곳에 가면 다른 페미니즘이 있다, 151, 르몽드코리아, 2018. 

 

[3] 레이첼 헬드 에반스,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 본 1, 179, 비아토르, 2018.

 

[4] 엄익란, 금기, 무슬림 여성을 엿보다, 60~62, 한울아카데미,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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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8-01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교인의 입장에서 볼 때 개신교 특히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전래된 장로교 교단의 보수
성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개신교 내에서 여성 신자들의 수가 압도적
이지만 실질적인 교회를 운영하는 결정권을
가진 목사 장로들의 수는 남성자들이 독차지
하고 있거든요.

보수정당인 개신교계를 강력한 우군으로
삼아 여성과 성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정책을
고수하려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교계의 자정 능력은 1도 믿지 않습니다.

cyrus 2018-08-02 14:28   좋아요 0 | URL
저도 종교가 스스로 개혁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실 종교 내 성차별 문제는 십 년 전에도 거론된 적이 있었어요. 그땐 종교계 인사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느꼈을 뿐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았어요.

stella.K 2018-08-01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워마드가 무섭긴 무섭더군.
근데 놀라거나 흥분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해.
그만큼 여성으로서 억눌려 온 세월이 얼마냐?
거기에 대한 반작용인데 저 정도 가지고 되겠어?
그런데 사람은 갈 때까지 가봐야 안다고
저러다가도 아, 이건 옳은 방법이 아니겠구나
깨닫고 다시 이성적인 방법을 찾아가지 않을까?
어디나 극단주의는 있어왔어.
하지만 그건 오래 가지 못하지.
물론 또 다른 형태로 바뀔 수도 있지만.
그냥 사탄 마귀의 작용이야. 어쩌겠니?ㅋㅋㅠ

cyrus 2018-08-02 14:36   좋아요 0 | URL
글쎄요. 워마드는 계속 극단적인 노선만 고집할 거 같아요. 그들은 온건적인 방식을 좋아하지 않아요. 워마드가 온건적인 여성운동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 건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자신들과 다른 여성운동, 특히 교차성 페미니즘을 ‘쓰까‘라고 조롱하고 무시하는 태도가 별로예요. 자신들의 행동이 무조건 옳다고 믿는 우월적인 성향이 있는데, 이걸 페미니스트의 전형적인 태도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