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의 페미니즘×민주주의
정희진 외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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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요구되고 있지만,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견고한 분야에선 여전히 여성의 사회 참여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물론 페미니즘 논의가 주목받으면서 이전보다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요소는 많이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여성은 동등한 존재로서가 아닌, ‘남성에 의해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는 인식 역시 뿌리 깊게 남아 있기도 하다. 따라서 제도적인 측면에서 여성의 권리가 많이 신장하였다고는 하나, 여전히 남성보다 불평등한 위치에 놓여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여성의 정치 참여 확대를 비롯해 고용조건 개선, 권익 · 지위 향상 등 아직도 해결해야 할 많은 현안이 남아 있다.

 

여성의 지위를 높이고 사회참여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정치에의 참여가 특히 중요하다. 하지만 여성 공천 할당제는 선거 공천 때마다 매번 반복돼 왔던 문제이지만 실제로 현실화하지는 못했다.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 시도지사 후보로 등록된 이 중 여성은 6명에 불과했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출마한 여성 후보는 35명이다.[1] 6·13 지방선거는 집권 여당의 압승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여성의 자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더불어민주당은 광역단체장에 여성을 공천하지 않았고, 기초단체장도 고작 11곳에 후보를 내 7명이 당선됐다. 선거 과정에서도 여성 후보들을 향한 ‘혐오’의 시선은 일상화돼 있다. 페미니스트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 녹색당 신지예 후보의 선거 벽보를 한 남성이 훼손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남성은 페미니스트 후보가 당선되면 남성의 일자리가 빼앗길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선거 벽보를 훼손했다고 진술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젠더는 일상생활부터 국가정책, 사회운동, 지식사회에 이르기까지 가장 첨예한 논쟁 주제 중 하나다. 페미니즘을 모르면 인간과 사회 현상을 온전히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깨닫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기존의 남성 중심적 문화를 비판하고 있다. 문제는, 미투(#MeToo) 이슈에 대한 상반된 반응에서 보듯이 젠더 이슈 인식이 남녀에 따라 극심한 격차를 보인다는 점이다. 여성 문제 인식에 대한 남성들의 문화 지체 현상은 우려할 만한 상황이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당선되었는데도 왜 우리 사회에 변화가 없을까. 젠더 이슈는 정치에서 늘 주변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 문제를 다른 사회적 문제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하는 인식은 우리나라 정치권의 젠더 감수성(gender sensibility) 수준을 보여준다.

 

이번에 나온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X민주주의》 교유서가, 2018)오랜 가부장적 권위주의로 얼룩져왔던 한국의 민주주의와 정치적 지형을 7명(정희진, 권김현영, 손희정, 한채윤, 서민, 손아람, 홍성수)의 페미니즘 시선으로 바라본 책이다. 지난해에 열린 <한겨레21> 페미니즘 강연 내용을 엮은 것이다. 정희진은 가부장제 사회의 남녀 관계를 ‘톰과 제리’로 비유한다. 톰과 제리는 한쪽이 불행해야 한쪽이 행복해지는 적대적 모순 관계이다. 고양이와 쥐가 함께 어울리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고양이 톰이 ‘남성’, 생쥐 제리가 ‘여성’이라고 한다면 남성과 여성은 섹스하는 적대적 모순 관계이다. 남녀는 서로 사랑하고 결혼해서 가족을 구성할 수 있지만, 힘과 위계질서에 의해 유지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힘들고 불행한 삶에 직면한다. 그렇기 때문에 젠더는 정치적 문제가 된다. 젠더는 경험상 개인적이고, 사소한 문제일지 몰라도 그것의 생성과 작용은 결코 개인적이지만은 않다. 페미니스트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The personal is political)임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정희진은 문재인 정부의 유일한 약점이 ‘젠더’라고 지적한다. 문재인 정부는 민주주의와 ‘촛불 혁명’을 시대정신으로 해서 집권했다. 하지만 일부 진보세력은 여성 문제, 성소수자 문제를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남성 연대의 도덕적 우월감은 여 · 야, 보수 · 진보 할 것 없이 공고하다. 진보 정권도, 보수 정권도 그랬다. 젠더 이슈는 뒷전이다. 쟁점화가 안 되고 별 필요 없는 것처럼 그냥 묻혀버린 것이다. 권김현영은 80년대 민주 세력이었던 ‘40대 서울 남성 연대’가 한국 사회의 기득권이 되면서 젠더 이슈를 외면했다고 진단한다.

 

페미니스트 문화비평가 손희정은 ‘남성 검사(檢事)’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한국영화가 드러낸 왜곡된 남성성과 남성연대를 분석한다. 한국영화에 등장하는 검사는 도덕성과 정의감을 지킬 줄 아는 모범적이고 훌륭한 남성으로 묘사된다. 불합리한 사회의 모순에 대항하는 정의감을 가졌고, 음모론을 파헤치는 ‘시민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 영화 속 남성 검사는 ‘나만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나르시시즘이 반영되어 있다. 이 뻔뻔한 남성의 나르시시즘은 자신을 사회의 중심으로 내세우고 ‘다른 문제’, ‘다른 목소리’를 배제한다.

 

보수 정치인들은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 발언을 하나의 정책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고, 당사자인 성소수자들은 모욕감과 위화감을 느끼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도 성소수자의 인권은 계속 ‘나중으로’ 밀리고 있다. 성소수자 인권은 인권의 보편성이 아니라 이해관계의 특수성에 의해 ‘나중의 일’로 치부된다. 한채윤(비온뒤무지개재단 상임이사)은 성소수자 차별 및 혐오를 합리화하는 종교(동성애를 반대하는 기독교)와 정치의 정경유착에 주목한다. 법학자 홍성수는 혐오표현을 소수자집단에 대한 혐오에 근거해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혐오표현은 뿌리 깊은 편견과 차별이 감정 차원을 넘어 현실 세계로 드러난 문제이다. 홍성수는 혐오표현의 문제에 대응하고 해결할 길을 찾는 것은 민주 사회를 위한 최소한의 요건이라고 말한다.[2]

 

여성 문제에 대한 관심도는 한 사회의 시민의 눈높이와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나타낸다. 어느 나라의 민주주의든 그 성숙도는 여성과 소수자를 대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 한국의 페미니스트 7인은 일상의 여성 문제와 성소수자 문제를 우리 사회 최대의 정치적 상황으로 여긴다. 그들의 이러한 사유는 정치와 민주주의를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회과학자의 비판 정신과 결부돼있다. 그들이 끝도 없는 의문부호를 던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젠더 권력은 왜 현실 정치로 사소화되는가(정희진)”, “왜 남자들은 여성혐오를 하면서까지 여자들을 침묵시키려고 하는가(서민)”, “대중문화 속 여성은 왜 수동적일까?(손아람)결국엔 날 선 질문들의 끝을 독자에게 겨눈다. 남성만 진보가 아니고 여성과 성소수자와 수많은 다양한 목소리들이 진보를 말했다. 우리는 사실 미완의 민주주의가 작동되는 사회 속에 살고 있다.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X민주주의》는 그간 남성, 가족, 이성애 중심의 ‘정상 시민’이 주도한 운동에 머물렀던 민주주의의 외연을 넓혀줄 것은 물론 넓게는 페미니즘 및 성소수자 운동에서 사적인 생활 영역과 공공 영역이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실마리를 준다.

 

 

 

 

[1] 「6‧13 지방선거 여성 정치인 유리절벽 여전…광역·지자체 장은 남성 중심」 (여성소비자신문, 2018년 6월 25일)

 

[2] 홍성수의 강연 내용은 그의 저서 《말이 칼이 될 때》(어크로스, 2018)에 나온 내용과 거의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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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8-07-01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s://www.youtube.com/watch?v=bGaG4pR0GWE

제가 페미니즘을 비판하지 않더라도 사회에서 페미니즘의 비판적 시각이 많더군요.

마립간 2018-07-01 14:42   좋아요 0 | URL
https://www.youtube.com/watch?v=IooGFjEyR3M
https://www.youtube.com/watch?v=EBzEQaRzUTY

추가 동영상입니다.

cyrus 2018-07-02 12:01   좋아요 0 | URL
페미니스트 사이에서도 ‘내부 비판’과 성찰을 통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페미니스트를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이 처음으로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페미니즘을 비판합니다. “나는 알고 있는데, 너희 페미니스트들은 그것도 모르고 있냐”, “니들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틀렸으니 니들은 페미니스트가 아니야!”는 식으로 공격하니까 그 과정에서 페미니즘의 진짜 의미가 변질되고,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됩니다. 세 편의 동영상을 다 봤는데요, 이미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인지한 페미니즘의 문제점이 나옵니다. 하지만, 페미니즘을 왜곡한 내용도 있었습니다.

마립간 2018-07-02 12:09   좋아요 0 | URL
어떤 부분이 왜곡된 내용입니까?

이미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인지한 페미니즘의 문제점‘을 남성이 지적하면 안 되는 것인가요?

cyrus 2018-07-02 12:18   좋아요 0 | URL
마립간님 두 번째 댓글의 첫 번째 동영상 50초 화면에 보면 ‘여성을 위해 희생하고 양보해He for she!!’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그렇게 생각한 페미니스트가 있겠죠. 그렇지만, ‘He for she’는 여성을 위해 남성에게 강요하자는 뜻의 구호가 아니에요. 이 동영상을 만든 사람이 페미니즘을 제대로 공부했고, 페미니즘을 비판했다면 ‘He for she’의 원래 의미를 알려줬어야 했어요.

그리고 제가 이미 페미니즘이 인식한 문제에 대해서 ‘남성’이 지적하지 말라고 언급했습니까? ‘페미니스트를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을 ‘남성’으로 보셨나요? 저는 ‘페미니스트를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이 남성이라고 상정하지 않았어요.

마립간 2018-07-02 12:26   좋아요 0 | URL
첫 번째 지적은 받아들이겠습니다.

두 번째 답변은 잘 납득이 되지 않는군요.

제가 이미 페미니즘이 인식한 문제에 대해서 ‘남성’이 지적하지 말라고 언급했습니까? ; cyrus 님에 대한 반문이 아니라, (여성)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반문입니다. 보다 일반화하면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은 남녀를 불문하고 용인하지 않는다‘가 제 판단입니다. 그래서 저는 페미니즘이 종교화하고 있다고 했었죠.

‘He for she’를 제외한 대부분의 내용에는 동의하시나요?

cyrus 2018-07-02 12:38   좋아요 1 | URL
저는 페미니즘을 처음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남성은 페미니즘을 비판할 수 없다’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그땐 워마드의 존재를 몰랐고, 시간이 좀 지나서야 워마드를 알게 됐어요. 마립간님이 말씀한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남성을 허용하지 않는 워마드를 뜻하겠군요.

지난달에 워마드를 비판하는 글을 썼어요.
http://blog.aladin.co.kr/haesung/10166605

제가 페미니즘 강연에 참석해서 배운 내용, 페미니즘 독서 모임 활동을 하면서 들은 내용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페미니즘의 종교화’라는 마립간님의 지적에 동의합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워마드의 종교화’인데, 페미니스트라면 짚고 넘어 가야 할 문제입니다. 워마드의 성소수자 혐오 및 차별에 대해서 지적하는 여성주의 학자들이 있습니다. 마립간님이 언급한 동영상에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페미니스트’를 지적한 장면이 있는 걸로 압니다.

마립간 2018-07-02 13:41   좋아요 0 | URL
의견 감사합니다.

요즘 제가 알라딘에 어울리는(?) 사람인가 싶어 잘 방문하지 않지 않아 cyrus 님의 워마드에 대한 글을 읽지 못했습니다.

의견 교환 감사합니다.
 

 

 

 

완벽히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인 입장이란 환상에 불과하다.

현실에서 우리가 취하는 어떤 입장도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민경, 《페미니스트 선생이 필요해》 63쪽)

 

 

 

 

대구중앙도서관동성로에서 걸어서 충분히 갈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내일모레(23일)에 동성로 일대에서 제10회 대구퀴어축제가 열립니다. 뜻깊은 행사에 맞춰 박차민정 님의 《조선의 퀴어》(현실문화, 2018)를 읽어보고 싶어서 중앙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했습니다. 이때가 5월 중순이었고, 때마침 나온 《지금 여기 페미니즘X민주주의》(교유서가, 2018)도 같이 신청했어요.

 

 

 

 

 

한 달 지나고 나서 신청도서 처리 결과를 확인했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한 권은 취소됐습니다. 그 한 권이 《조선의 퀴어》였습니다. 취소 사유는 이렇습니다. “여러 연령대의 이용자가 이용하는 공공도서관 소장 도서로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어 제외되었습니다.”

 

 

 

 

 

이 책의 부제는 ‘근대의 틈새에 숨은 변태들의 초상’입니다. 혹시 사서가 이 책을 ‘변태들’이 나오는 음란한 도서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원래 퀴어(queer)‘괴상한’, ‘기묘한’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였고, ‘괴상한 존재’, ‘변태’로 취급받은 동성애자를 멸시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의 퀴어》는 ‘변태’로 오인된 근대 조선의 퀴어들을 재조명한 책입니다. 박차민정 님은 오래전부터 퀴어 이론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연구하신 분입니다. 퀴어 페미니스트뿐만 아니라 여성주의 연구가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책이 바로 《조선의 퀴어》입니다.

 

그런데 이 책이 ‘공공도서관 소장 도서’로 적합하지 않다니…‥. 퀴어라는 주제도 페미니즘인데 어째서 《조선의 퀴어》는 공공도서관에 들어갈 수 없었을까요? 아마도 사서는 퀴어를 진짜 ‘변태’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이 책이 청소년의 정서에 해로운 내용이 있을 거로 판단한 것 같습니다. 공공도서관에 ‘페미니스트 사서’ 채용이 시급합니다. 대구중앙도서관 사서가 정말로 ‘퀴어’를 싫어하는지 궁금해서 《페미니즘을 퀴어링!》(봄알람, 2018)을 신청했습니다. 책 제목에 ‘페미니즘’이 들어가 있으니 이번에는 사서가 올바른 결정을 할 거로 믿습니다.

 

 

 

 

 

 

 

 

 

 

 

 

 

 

 

 

 

 

 

 

 

 

 

 

 

 

 

 

 

 

 

 

* 애너매리 야고스 《퀴어 이론 : 입문》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12)

* 수잔 스트라이커 《트랜스젠더의 역사》 (이매진, 2016)

* 케이트 본스타인 《젠더 무법자》 (바다출판사, 2015)

* 주디스 핼버스탬 《여성의 남성성》 (이매진, 2015)

 

 

 

과거에는 ‘변태성욕자’, ‘동성애자’를 욕할 때 ‘퀴어’를 사용됐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퀴어는 다양한 성적 정체성, 성 지향성이 있는 ‘성소수자’를 아우르는 단어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퀴어를 ‘변태’, ‘해롭고 위험한 존재’로 인식하고 비하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퀴어 혐오(트렌스젠더, 게이, 레즈비언 혐오)를 일삼는 사람, 동성애와 퀴어 축제를 반대하는 보수 기독교인, 그리고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로 알려진 트랜스-배제적 페미니스트가 있습니다.

 

 

 

 

 

 

 

 

 

 

 

 

 

 

 

 

 

* 쉴라 제프리스 《래디컬 페미니즘》 (열다북스, 2018)

 

 

 

트랜스-배제적 페미니즘은 ‘젠더 비평적 페미니즘(Gender-Critical Feminism, GCF) 또는 ‘문화(주의) 페미니즘(Cultural Feminism)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TERF’로 통일하여 쓰겠습니다. TERF에 속하는 쉴라 제프리스제니스 레이먼드는 트랜스젠더 자체를 부정해서 성별 불화를 겪는 사람을 ‘트랜스섹슈얼리즘’이라고 부릅니다. 그녀들은 성전환 수술을 허용하는 의료 정책에 반대합니다.

 

 

 

 

 

 

워마드(WOMAD)는 TERF을 표방하는 여초 성향 커뮤니티입니다[1]. 본인들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직 생물학적 여성의 권리 신장을 지향합니다. 워마드는 남성은 절대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워마드는 게이와 트랜스 남성의 여성 혐오에 대항해 ‘미러링’으로 비판합니다만, 문제는 게이와 트랜스 남성을 비꼴 때 쓰는 워마드 용어가 ‘성 소수자 혐오표현’이라는 점입니다.

 

 

 

 

 

트랜스 여성도 워마드가 적대하는 대상입니다. 워마드는 트랜스 여성을 ‘남성’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여성 운동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트랜스 여성의 성전환 수술을 비꼬기도 하고, 트랜스젠더를 싸잡아서 ‘젠신병자(트랜스젠더+정신병자)라고 비하합니다. 이 단어에 성별 불화를 겪는 트랜스젠더를 ‘정신장애인’으로 바라보는 비하적인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지만 트랜스젠더는 더 이상 정신장애가 아니며, 이를 질병으로 규정하면 실제로 트랜스젠더에 대한 편견 및 낙인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 홍성수 《말이 칼이 될 때》 (어크로스, 2018)

* 김승섭, 레인보우 커넥션 프로젝트 외 《오롯한 당신》 (책공장더불어, 2018)

 

 

 

혐오표현은 소수자를 부정하고 차별하거나 배제하려는 언어입니다. 따라서 ‘젠신병자’는 트랜스젠더라는 성소수자를 여성 운동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배제하는 효과를 낳는 혐오표현입니다. 쉴라 제프리스는 트랜스섹슈얼리즘을 ‘인권 침해’로 규정하면 의료적 트랜지션 즉, 성전환 수술 · 호르몬요법 등을 불법화하는 데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그녀의 주장에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성 소수자 차별과 억압이 워낙 강고해서 트랜스젠더에 대한 실태 파악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국내 의학 전문가들은 트랜스젠더들이 제대로 의료서비스를 받았는지 관심을 주지 않았어요. 의학 교육 과정에서 의료적 트랜지션에 필요한 지식 및 기술에 대한 수련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요. 의료적 트랜지션을 규제하면 부작용이 생길 우려가 있습니다. 트랜스젠더의 건강을 악화시키는 불법 의료적 트랜지션이 음지에서 성행할 수 있습니다.

 

 

 

 

 

저는 ‘페미니즘’과 ‘퀴어’가 서로 연관이 없는 별개의 단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퀴어/퀴어 이론’을 흠집 내기 위한 수단으로 페미니즘과 퀴어를 따로 구분 지어 사용되는 것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달에 1차 불법촬영 편파 수사 규탄시위가 열렸습니다. 이 시위는 미투 운동이 확산된 이후에도 바뀌지 않는 사회 전반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시위였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시위 참가 조건이 문제 있다고 봅니다. ‘생물학적 여성’ 자체를 인정한다는 건 결국 페미니즘이 꾸준히 비판했던 젠더 이분법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일입니다. 젠더 이분법의 선택지는 단 두 개입니다. ‘생물학적 남성’과 ‘생물학적 여성’이죠. 젠더 이분법은 성소수자인 ‘제3의 성’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젠더 이분법에 기초한 시위 참가 조건은 트랜스 여성의 참여를 막는 것이고, 트랜스 여성에 대한 차별입니다. 트랜스 여성도 성희롱 · 성폭력(시스젠더에 의한 성폭력과 성소수자 간의 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성소수자 사회 안에서도 성폭력을 인지하고 제기할 수 있도록 공론화되어야 하는데 아직 그런 기회가 부족합니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은 동성 간 성소수자 간의 성폭력을 공론화하기 더 어렵게 만듭니다.

 

 

 

 

 

 

 

 

 

 

 

 

 

 

 

 

 

 

 

* 권김현영 엮음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교양인, 2018)

* 이민경, 최현희, 최승범 외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해》 (동녘, 2017)

 

 

 

정희진 님은 성소수자와 이성애자를 구별하는 차별하는 태도가 가부장제의 원리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퀴어는 인간의 성별을 양성으로 고정하려는 가부장제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젠더들이라고 말합니다. 여성 순혈주의는 불가능합니다[2]. 현재의 워마드는 여성 순혈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페미니스트는 이 심각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내부 비판을 하지 못하는 걸까요? 루인 님은 국내에 페미니즘과 퀴어의 상호 관계성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면서 논쟁적 문제에 ‘몸을 사리는’ 페미니스트들의 태도를 지적했습니다[3].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 모두 공부해야 할 것들이 많은 학문입니다. 둘 중 하나를 공부하는 건 벅찬 일이에요. 하지만 공부하지 않은 것을 모른다고 해서 복잡한 논쟁 주제를 자꾸만 피해야 할까요? 내가 관심 있는 학문이 조금씩 뭔가 잘못되고 있는데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야 할까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유로 논쟁을 피하려는 태도, ‘나중에’ 생각해보겠다면서 신중한 척하는 태도. 이 모든 행동은 잘못된 현상을 유지하게 해주는 ‘몸 사리는’ 태도입니다. 달리는, 아니 모든 사람이 행복할 때까지 달려야 할 페미니즘에 ‘중립’은 없습니다[4].

 

저는 지난 달 초에 공개적으로 약속했습니다. 싸다구 맞을 각오로 페미니즘을 공부하겠다고요[5]. ‘중립’이라는 이름에 숨어서 페미니즘 내 문제를 소극적으로 지켜봐야 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쉽게 결론 내리기 어려운 페미니즘 논쟁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내놓아도 어차피 욕먹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타당한 비판도 받을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1] 워마드 회원 전체가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건 아닙니다. 워마드 일부가 성소수자를 혐오합니다. 성소수자 문제에 관심 있는 워마드 회원을 실제로 만나봤습니다.

 

[2] 정희진,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215쪽.

 

[3] 루인, 『트랜스젠더 운동, 페미니즘과 동성애 운동과의 관계: 미국과 한국의 경우』, 2012년 3월 1일, ‘Run To 루인’ http://runtoruin.com/1955

 

[4]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하워드 진).

 

[5] [싸다구 맞을 각오로 공부하기] http://blog.aladin.co.kr/haesung/10078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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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애니비평 2018-06-21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 진보운동사 원로 여성운동가들은 독재와 군부에 저항하며, 민주화와 노동운동과 같이 여성운동을 전개했지만, 워마드 등장에서 그분들의 노력이 무너지는 걸 보면서 참 안타까울 뿐입니다.

cyrus 2018-06-22 11:57   좋아요 0 | URL
페미 강연 때 어느 여성주의 연구가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제는 사회주의 여성 페미니스트들의 삶과 업적에 주목해야 한다고요. 워마드 중심의 급진 페미니스트 활동이 크게 부각되고 많이 알려지고 있는 상황이 페미니즘 발전을 고려할 때 바람직하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페미니즘이 워마드의 페미니즘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다른 관점으로 여성 문제에 접근하는 페미니즘이 상당히 많아요. 여러 갈래로 이루어진 페미니즘이 발전하려면 페미니즘 내부 비판과 성찰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페미니즘이나 여성 운동가의 업적도 알려야 합니다.

syo 2018-06-21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퀴어 책을 도서관에 들여놓으시려는 사이러스님의 노력을 비롯해, 전개하신 모든 논지에 대부분 동의합니다. 근데 퀴어 책을 들여놓지 않는 이유에 대한 사이러스님의 추측은 뭔가 좀 귀엽습니다ㅋㅋㅋㅋ 설마 그래서일려구요 ㅋㅋㅋㅋ

도서관이 페미니즘 책도 웃으면서 들여놓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페미니즘 책 신청을 거부하는 일부 도서관에 대한 제보도 있잖아요. 별로 맘에 안들지만 안 들여놓으면 난리치겠지, 하는 마음에 어거지로 들여놓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근데 가뜩이나 페미니즘 책도 맘에 안 드는데, 이제 퀴어놈들까지 설쳐? 근데 퀴어 책은 안 들여놨다고 난리 치는 분위기도 아니고, 퀴어는 여성에 비해 훨씬 더 마이너하니까, 어렵지않게 나가리시키는 건 아닐까요?

그것과 별개로 하나만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사이러스님은 퀴어 이론이 페미니즘의 하위개념이나 부분집합이라고(혹은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거나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계신가요??

cyrus 2018-06-22 12:01   좋아요 0 | URL
syo님의 생각이 그럴 듯합니다. 아마도 사서는 중앙도서관에 페미 책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거예요. 중앙도서관에 <퀴어 이론 : 입문> 있고요, 중앙도서관은 다른 대구 공공도서관들보다 동성애, 레즈비언 관련 책들을 더 많이 갖추고 있어요. 십 년 전에 나온 페미니즘 책들은 서고가 아닌 자료실에 있어요. 중앙도서관은 페미니즘, 퀴어를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가 다량으로 보관되어 있는 곳이에요. 취소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아서 도서관 홈피 게시판에 글을 남기려고 해요. ^^

퀴어 이론이 페미니즘의 ‘하부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은 원래 ‘하나’였습니다. 왜냐하면, 페미니즘과 퀴어 모두 가부장제 사회가 만들어낸 성차별을 해체하려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의 학문에는 여러 갈래의 길(급진적 페미, 사회주의 페미, 레즈비언 페미, 에코 페미 등)이 있어요. 퀴어 이론도 ‘여러 갈래의 길’ 중에 하나에요. 저는 페미니즘과 퀴어가 처음에는 한 길로 쭉 가다가 어느 순간부터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페미니즘과 퀴어를 가르는 간격이 너무나 많이 커졌어요. 이 간격을 좁힐 수 있도록 ‘새로운 길’을 터야하는데 그게 바로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이에요. 그런데 TERF는 상호교차성 페미니스트를 ‘쓰까페미’라고 부릅니다. 급진적 페미 관점에서 퀴어 페미 또는 상호교차성 페미를 비판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자신들의 페미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쓰까’라고 놀리고 멸시하는 건 분열과 갈등을 초래하는 일입니다.

syo 2018-06-22 12:49   좋아요 0 | URL
으음, 사이러스님의 말씀이 제 눈에는 퀴어 이론이 페미니즘의 ‘하부 개념‘ 혹은 ‘부분 개념‘ 이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페미니즘의 여러 갈래 중 한 갈래‘ 라는 표현은 그야말로 퀴어 이론이 페미니즘의 지류라는 뜻이지 않겠습니까?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이 가부장제 사회가 만들어 낸 성차별을 해체하려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말씀은 정론이지만,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두 학문이 ‘하나‘ 이거나, 한 학문이 다른 한 학문의 ‘갈래‘의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당위가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저는 원래 두 학문이 같은 학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A는 B이다˝가 참이라고 해서 A와 B가 등가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B는 A이다˝가 붙어야지요. 퀴어 이론이 페미니즘과 ‘하나‘의 학문이려면 ˝퀴어 이론은 페미니즘이고, 동시에 페미니즘은 퀴어 이론이다˝ 라는 말이 합당해야 하는데, 그렇게 느껴지시나요? 이 문장이 마치 ˝천문학은 과학이고, 동시에 과학은 천문학이다.˝ 라는 문장만큼 어색하게 느껴지시지는 않으시는지요. 만약 그렇다면 사이러스님께서는 ‘하나‘라는 표현을 통해 페미니즘이 퀴어 이론을 ‘품고‘ 하나가 된 그림을 그리고 계신건데요.

현재 퀴어 이론이 대부분 페미니즘의 자장 아래 연구되고 있는 현실이나 페미니즘이 퀴어 이론에 제공하는 양분에 대해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구요, 퀴어 이론을 연구하시는 논퀴어 연구자들의 노고를 부정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남성이 아무리 페미니즘을 열심히 연구하고 실천하여도 남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결코 접근할 수 없는 경험, 해서는 안 되는 발언, 페미니즘 학문 안에서 움켜 쥐려고 해서는 안 되는 헤게모니가 있는 것처럼, 퀴어 이론 안의 논퀴어 페미니스트에게도 마찬가지의 제약조건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지점들은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이 함께 어깨를 겯고 앞으로 나가는(실제로는 페미니즘이 퀴어 이론을 부축하고 함께 가는 양상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구요) 동등한 별개의 학문의 꼴로 귀결될 수 밖에 없도록 하는 근거가 아닐까요.

‘하나‘라는 말씀으로 주장하고 싶으신 윤리적 당위성에는 저도 100퍼센트 동의합니다. 함께 가야죠. 그렇지만 ‘페미니즘‘이라는 깃발 하나만 들고 싸워 나가다 보면 쉬이 간과될 수 있는 그 ‘차이‘가 종국에는, 되돌리려면 어마어마한 비용을 감수해야 할 결정적 틀어짐을 낳을까 우려합니다. ‘인간 해방‘에서 말하는 인간이 백인 부르주아 남성만을 부르는 말이었듯, ‘성 해방‘에서 말하는 성이 논퀴어만을 부르는 말이 되지 않게 하려면, 아직 상대적으로 미약하고 의존적인 학문일 수 있지만, 퀴어 이론의 독자성과 자생성을 끝까지 지켜줘야 하지 않을까요? 제 생각입니다.

만약 처음 사이러스님께 드렸던 질문에 퀴어 이론이 페미니즘의 하위개념이라고 생각한다는 대답을 주셨다면, 저는 아, 그러시구나, 하고 말았을 것 같아요. 그건 그냥 견해차이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길고 구구절절 택도 없는 개인 의견을 피력한 것은, 사이러스님의 대답과, 그 대답 뒤에 이어지는 설명들이 정합적이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포스트를 통해 사이러스님이 말씀하시고 싶었던 말씀에는 하나도 반대하는 게 없는데도, 지엽적인 이야기로 이렇게 스압공격을 가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ㅎㅎㅎ

허허허....

cyrus 2018-06-22 15:30   좋아요 0 | URL
사과하지 않아도 됩니다. syo님의 의견은 올바른 지적입니다. 제 생각이지만, 레드스타킹 멤버들이 질문하고, 소신 있게 의견을 밝히는 syo님을 만나면 엄청 좋아할 것 같습니다. ^^

다시 생각해보니까,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은 하나’라는 주장이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의 ‘연대’를 강조하기에 적절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에 쫓겨 급하게 생각하고 댓글을 쓰다 보니 앞뒤가 맞지 않는 의견이 나와 버렸네요.

페미니즘이 단순하게 ‘여성을 위한 학문’이었다면 퀴어 이론은 ‘페미니즘의 하부 개념’, ‘페미니즘의 부분 개념’으로 볼 수 있어요. 그렇지만 성차별에 고통 받는 존재는 여성만 있는 게 아니라, 남성, 성소수자, 장애인도 포함합니다. 페미니즘은 여성을 포함한 가부장제의 억압, 성차별에 억눌려 있던 모든 사회구성원이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학문입니다. 남성,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이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듯이 가부장제 사회를 해체하는 방식도 다릅니다. 그래도 저는 여러 갈래로 나뉜 페미니즘이 ‘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동일한 가치와 입장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서 협력하고 연대하면 공통 목표를 달성할 수 있어요. 하지만 공통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가치와 입장을 가진 사람들도 연대할 수 있어요. 후자의 연대는 각자 고유의 가치와 입장을 존중하는 전제로 공통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식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협력과 연대가 이루어지면 어떤 특정한 가치와 입장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위계질서가 없어야 해요. 이 위계질서가 작동되면 연대가 불가능해요.

여러 갈래의 페미니즘이 있는데 딱 한 길만 좋다고 해서 그것만 갈 수 없어요. 이 길도 가고, 저 길도 가보는 거죠. 아니면 두 개로 갈린 길의 간격을 없애는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페미니즘의 연대가 ‘공통 목표(가부장제 사회가 만들어 낸 성차별을 해체)를 달성하기 위해 페미니스트들이 여러 갈래의 길 위를 달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페미니즘과 퀴어는 하나’라는 표현을 썼는데, 제가 봐도 아닌 것 같습니다.. ^^;;

이 답글의 의견이 이해되지 않거나 그래도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하면 말씀해주세요.

syo 2018-06-22 18:20   좋아요 0 | URL
대구에 내려가면 사이러스님 손에 붙들려 얄짤없이 레드스타킹에 참여하게 되는 건가요ㅋㅋㅋㅋㅋ 어쩐지 사이러스님이 syo 너 이놈 내려오기만 해라, 하며 벼르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저의 착각인가요 ㅎㅎㅎ

cyrus 2018-06-23 11:25   좋아요 0 | URL
레드스타킹은 해치지 않아요.. ㅎㅎㅎㅎ 이분들과 계속 만나보면 마음이 편해질 거예요. 페미 뽕에 제대로 취합니다.. ^^

2022-06-15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22 12:16   좋아요 0 | URL
소중한 의견 감사합니다. 워마드가 ‘생물학적 여성’을 지향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처음 알았습니다. 어제 쓴 글에 밝혔듯이 워마드가 TERF를 표방한다고 해서 워마드 전체가 성소수자를 혐오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부’가 성소수자 혐오를 하고 있다면, 또 다른 ‘일부’는 성소수자 문제에 관심이 있습니다. 성소수자 문제에 관심 있는 워마드 일부는 ‘젠신병자’, ‘똥꼬충’ 사용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근본 없는 페미니즘>, 꼭 읽어보겠습니다. 어제 글을 쓰고 나서 그 책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저도 ****님을 위해 페미니즘 문헌을 추천합니다. 나영 님이 학술지에 게재한 글입니다. 제목이 <지금 한국에서, TERF와 보수 개신교계의 혐오선동은 어떻게 조우하고 있나>입니다. 레드스타킹 멤버가 공유한 글입니다. 저는 나영 님의 글을 참고해서 워마드를 비판하는 글을 썼습니다.

http://www.academia.edu/36485411/%EC%A7%80%EA%B8%88_%ED%95%9C%EA%B5%AD%EC%97%90%EC%84%9C_TERF%EC%99%80_%EB%B3%B4%EC%88%98_%EA%B0%9C%EC%8B%A0%EA%B5%90%EA%B3%84%EC%9D%98_%ED%98%90%EC%98%A4%EC%84%A0%EB%8F%99%EC%9D%80_%EC%96%B4%EB%96%BB%EA%B2%8C_%EC%A1%B0%EC%9A%B0%ED%95%98_.pdf

2018-06-22 1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22 14:23   좋아요 0 | URL
링크 화면 중앙에 ‘READ PAPER’라는 작고 희미한 글자가 보이시나요? 화면 아래로 스크롤 내리면 그 글자 바로 밑에 본문이 뜹니다. ****님이 말씀하신 비밀번호가 PDF 다운로드할 때 입력해야 하는 비밀번호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본문 화면이 나오지 않으면 다시 알려주세요. 제가 이 글을 보는 방법을 알아볼게요.

2018-06-22 1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22 15:51   좋아요 1 | URL
트페미 중심으로 전개되는 ‘탈 코르셋 운동’이 강압적으로 느껴진다고 말하는 여성들이 있어요. 네, 페미니즘도 사람이 만든 학문이라서 무조건 완벽할 수 없고, 비판받을 수 있어요. 페미니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좋아요. 하지만 단순히 문제점이 많다는 이유로 ‘페미니즘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페미니즘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은 동의하기 힘듭니다. 저는 TERF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TERF도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TERF는 비판 받을 만한 페미니즘입니다. 제가 ‘워마드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제 입장을 ‘팔이 안으로 굽는 태도’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워마드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는 발언이 페미니즘을 왜곡하고, 편견을 재생산한다고 생각해요. 반 페미니스트는 워마드와 다른 노선의 페미니즘을 공격할 때도 ‘너희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페미니즘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특히 남성)이 페미니즘을 판별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은 일입니다.

페크pek0501 2018-06-23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리는, 아니 모든 사람이 행복할 때까지 달려야 할 페미니즘에 ‘중립’은 없습니다[4].˝
이 문장을 읽고 이런 글이 생각났어요.
˝언어의 세계에 중립이란 없기 때문이다, 지성의 반대말은 절충, 균형, 원칙... 이런 사고들이다.˝(정희진처럼 읽기, 202쪽.)

cyrus 2018-06-25 12:32   좋아요 0 | URL
첨예한 갈등이 나오는 문제에 한 가지 대답을 선택하는 건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예요. 그러나 계속 피하면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요원해질 것이고, 문제에 휘말린 당사자들은 더 괴로울 거예요. 욕을 먹거나 비판을 받더라도 자신의 의사를 밝혀야 합니다. 자신이 말한 입장이 아니면 잘못을 떳떳하게 인정하면 됩니다.

마립간 2018-07-05 08: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cyrus 님의 제게 언급한 페이퍼이기에 반복해서 읽고 곰곰이 생각 ... 중입니다.

1) 단편적으로 앞 선 댓글 대화로 페미니즘의 비판을 거부한다면 워마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2) 퀴어 이론이 페미니즘보다 상위 개념이다. (보편성에 비춰.)
3) 정희진처럼 읽기 ; 지성의 반대말은 절충, 균형, 원칙이라면 ... 지성과 비슷한 말은 독선, 불균형, 무원칙일까...
4)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하워드 진) ; 하워드 진의 중립 기준은 무엇일까. 지구? 태양? 우리 은하? 아니면 13차원의 우리 우주 universe?

제가 읽은 책은 <여성의 남성성>뿐이지만, 우리 나라 (또는 알라딘에서 언급되는) 페미니즘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알 수 있죠. 흑백 인종을 갈등으로 남녀불평등을 덮으려는 것은 비겁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남녀불평등(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빌미로 인종 갈등, 퀴어 문제를 덮으려는 것을, 저는 더 비겁하다고 봅니다.

우리나라에는 인종 갈등이 없기에 남녀불평등만 문제로 보는 분도 계시구요.

비로그인 2019-03-11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adical Feminist가 아닌 TERF라는 멸칭을 아무런 설명 없이 사용하시는 데서 악의를 느껴집니다
글쓴 분께서는 워마드와 트랜스젠더리즘에 반대하는 모든 스탠스를 묶어서 혐오라 말씀하고 계시는데 이는 옳지 않습니다. 게이 커뮤니티의 여성혐오와 트랜스젠더리즘의 여성혐오적 측면, 전환수술의 부작용 등에 대해 얘기하는 건 분명히 필요하고 이러한 태도를 혐오로 낙인찍으며 발화를 막는 퀴어커뮤니티의 경향에 대해서도 재고해보시길

cyrus 2019-03-11 22:57   좋아요 0 | URL
TERF에 대한 정의를 설명했는데요. TERF라는 용어와 그 의미를 제가 만들었습니까? 렏펨을 TERF라고 단정적으로 규정하면서 명시한 적이 없습니다. 이 글의 첫 번째 각주에 ‘워마드 회원 전체가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썼습니다. TERF나 워마드를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쓴 적도 없고요. 나현 님의 논리대로라면 페미위키의 ‘TERF’ 항목 작성자도 악의적으로 렏펨을 보는 사람이겠네요.

이번에 나온 <미투의 정치학>의 머리말은 정희진 님이 쓰셨어요. 머리말 중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최근 몇 년간 일부 페미니스트(렏펨, 터프.....) 역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를 주장하고 있다.” (30쪽)

정희진 님이 ‘터프’와 ‘혐오’를 언급하셨는데, 여기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게이 커뮤니티의 여성 혐오도 분명 심각한 문제인 것 맞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렏펨이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미러링으로 성소수자 전체를 혐오하는 방식은 오히려 성소수자 혐오를 재생산하고 확대한다고 생각합니다.
 
세계화의 하인들 - 여성, 이주, 가사노동 여이연이론 17
라셀 살라자르 파레냐스 지음, 문현아 옮김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필리핀 여성 이주가사노동자들은 세계화의 하인들이다.

 

(라셀 살라자르 파레냐스, 《세계화의 하인들》, 32쪽)

 

 

 

필리핀인을 가사도우미로 불법 고용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이명희에 대한 영장이 어제 기각됐다. 법원은 범죄혐의 내용과 수사 진행 경과를 볼 때, 구속 수사할 사유나 필요성, 상당성을 모두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어제 불거진 조재현에 대한 성폭행 의혹 소식에 가려 이명희 구속영장 기각에 대한 관심이 조금 묻힌 감이 있었다. 물론, 이 두 개의 사건 모두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규명해야 하며 특히 페미니스트라면 유심히 살펴보고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각에서는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합법화하면 부부 맞벌이가 쉬워져, 여성 경력단절이 해결되고 출산율도 높아질 거라는 주장이 나온다. 맞벌이 가정이 늘면서 가사도우미 수요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수요는 늘어나는데 불법으로 막혀 있으면 가격이 음지에서 형성돼 수요자들의 부담만 가중된다. 정부의 규제가 늘 해법이 될 수는 없다. 규제하면 오히려 더 교묘히 법망을 피하거나 음지에서 불법 활동 및 범죄가 독버섯처럼 퍼져나간다. 강남을 비롯해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에는 외국인 가사도우미 불법 고용이 만연하고 있다. 이자스민 전 국회의원은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고용하는 법이 도입된다면 우리나라 경제에 이득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일자리를 찾기 위해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특히 세계화는 난민을 생산하는 기제다. 자본이 확대 재생산되고, 축적되는 것처럼 인적 자원의 이동 또한 막을 수 없다. 난민 또는 이주자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코리안 드림’을 가슴속에 품은 개발도상국 출신의 외국인들은 어떤 직업도 전혀 마다하지 않는다. 자신의 교육 수준에 맞지 않는 더럽고, 힘든 일이지만 고국에 있는 가족만 바라보며 기피 업종에 뛰어든다. 우리나라에서의 이주노동자의 여성 비율은 국제결혼 추세에 따라 증가하고 있다. 이주를 결심하게 된 배경 및 원인은 다르지만, 여성 이주가 증가하는 것은 다른 대륙 국가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다. 특히 싱가포르와 대만, 홍콩에는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에서 온 여성들이 가사도우미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 여성 이주 가사노동자들이 처한 열악한 현실을 생각하면 외국인 가사도우미 합법화는 시기상조다. 예나 지금이나 외국인 여성 이주 가사노동자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를 떠받치는 ‘하인’이다. 합법이든 불법이든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고용하는 일은 ‘하인’을 고용하는 것과 같다. 《세계화의 하인들》(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개발도상국으로부터 더 잘사는 선진국으로 ‘여성 가사노동자가 수입’되는 과정을 조명하는 책이다. 이 책을 쓴 저자의 어머니는 미국으로 이주한 필리핀인이다. 저자는 필리핀 이주민들이 많이 사는 이탈리아 로마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필리핀 여성 이주 가사노동자들을 직접 만나 그녀들의 삶을 재조명했다.

 

여성은 아내와 어머니, 딸, 며느리가 되면 ‘정상 가족’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 보육, 요리, 청소 등의 가사노동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성별 분업 체계에서 ‘여성적’ 일의 본질은 가족 및 타인을 보살피는 ‘무급 가사노동’ 또는 ‘돌봄 노동’으로 규정된다. 과거 여성들이 무급으로 수행하던 가사노동 및 돌봄 노동은 세계노동력 시장에서 상품화되면서 특권계급 여성이 구매할 수 있는 ‘저임금 서비스’가 된다. 저자는 저임금 서비스 노동에 대한 요구가 급증함에 따라 가난한 이주 여성이 가사노동을 떠맡는 존재, 즉 ‘하인’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한다. 선진국의 특권계급 여성, 즉 여성 고용주는 ‘힘들고 더러운’ 집안일을 하기 싫다는 이유로 가사노동을 가난한 이주 여성에게 떠넘긴다. 이렇게 되면 ‘남성적’ 일과는 구분되는 ‘여성적’ 일이 ‘돌봄의 연쇄(care chain)라는 방식으로 강화된다. 외국인 여성이 이주하면 그녀가 해야 할 가사노동은 또 다른 가난한 여성이 떠맡게 된다.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성별 노동 분업이 가난한 국가로부터의 여성 이주를 통해 지속한다.

 

필리핀은 전체인구의 10%가 해외에 나가 일한다. 해외 취업자들은 대개 여성들이다. 필리핀 여성들은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이점 때문에 미국과 유럽은 물론 중동, 아시아 등 곳곳에서 가사도우미, 보모 등으로 인기가 있다. 여성의 해외 취업이 늘면서 ‘재생산 노동(가사노동, 돌봄 노동)의 국제적 분업’은 필리핀뿐 아니라 아시아 각국에서 노동이민의 새로운 추세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추세가 지속하면 이주 여성은 불평등한 사회구조 속에서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저임금 노동만 해야 하는 빈곤하고도 불리한 상황에 직면해야 한다. 그리고 타국에서 외롭게 생활하는 이주 여성과 고향에 남겨진 아이들의 정서적 불안정도 생각하면 이주 여성 문제는 간단치 않다. 따라서 외국인 가사도우미 합법화 논의는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이 책이 발간된 이후로 내가 터득하게 된 것은 모든 여성고용주들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서 일부는 자신의 이중일과의 부담에 도움을 받기 위해 가사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집안일이라는 더러운 일을 회피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중간계급과 상층계급의 과시적 소비의 징후로서 가사노동이라는 재화가 포함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14쪽, 한국어판 서문)

 

 

오랜 가부장제 문화에서 여성은 독립된 주체가 아닌 남성의 소유물이나 부차적 존재로 여겨져 왔다. 가부장제가 뿌리 깊던 당시 여성들에게 교육, 기술보다 아내, 엄마로서 해야 할 역할이 더 중시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성별화된 노동 분할 전략으로 여성의 빈곤화를 심화한다. 《세계화의 하인들》은 특권계급 여성이 이주 여성 노동자들을 어떻게 ‘차별’하며 불평등을 초래하는 위계적인 구조를 어떻게 만드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만 봐도 이명희가 얼마나 잘못한 일을 했는지 느낄 수 있다. 아마도 이명희는 ‘더러운 집안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 불법 가사도우미를 고용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고용할 수 있는 법이 생기면 걸레 드는 것을 싫어하는 잘 사는 마나님들이 엄청나게 좋아하겠는 걸?

 

 

 

 

 

* Trivia

 

1. 목차의 1장 제목과 본문 1장 제목이 다르다. 목차에는 ‘로마와 로스엔젤리스의 필리핀 이주 가사노동자’라고 표기되어 있고, 본문에는 로마와 로스엔젤리스의 필리핀 여성 이주 가사노동자’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목차의 1장 제목에 ‘여성’이 빠졌다.

 

2. 284~285쪽에 ‘흐몽인’, ‘흐몽 난민’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베트남, 중국, 라오스 등지에 사는 묘족(苗族)의 베트남어 이름이다. ‘흐몽’이 아니라 ‘몽(Hmông)’이라고 불러야 한다. ‘H’는 비음(鼻音)이므로 소리가 날 듯 안 날 듯 발음해야 하기 때문이다. 묘족을 설명한 대부분 인터넷 백과사전 항목에서는 ‘몽족’이라고 언급하지 ‘흐몽족’이라고 하지 않는다.

 

 

 

 

 

[*] [이민 없는 한국]⑨이자스민 “맞벌이 늘어나는 韓…필리핀 가사도우미 허용 목소리↑』 이데일리, 2018년 6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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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2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22 15:59   좋아요 1 | URL
네. 페미니즘은 ‘정치적 올바름’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학문입니다. 페미니즘이 여성 문제에 접근하려면 젠더, 계급, 섹슈얼리티 등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야 합니다.
 
오롯한 당신 - 트랜스젠더, 차별과 건강
김승섭 외 지음 / 숨쉬는책공장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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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게 아니게 보이는 무심함이 온 우주를 멍들게 할 수 있다.

 

(김살로메, 《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 54쪽)

 

 

 

올해로 ‘여성 참정권 운동(Suffragette, 서프러제트) 100주년을 맞는다. 여성 참정권 운동이 처음 불붙기 시작한 것은 1848년 뉴욕에서 열린 세계 최초의 여성권리대회 때다. 그로부터 수많은 여성이 투옥되는 등 참정권을 획득하기 위한 여정이 시작됐지만 제일 먼저 여성에게 투표권을 준 나라는 영국도, 미국도 아니다. 1893년 뉴질랜드가 최초이다. 우리나라는 1948년 제헌헌법부터 여성들의 참정권을 보장했다.

 

참정권은 국민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본적 권리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하고도 소중한 국민의 기본권을 누리지 못하는 여성이 있다. MTF 트랜스젠더(male-to female transgender, 트랜스여성)이다. 태어날 때 지정받은 성별과 스스로 생각하는 성별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트랜스젠더라고 한다. 남성으로 태어났으나 성별을 여성이라고 생각하면 트랜스여성이고, 반대의 경우는 트랜스남성(female-to-male transgender, FTM 트랜스젠더)이다. 트랜스남성 역시 트랜스여성과 마찬가지로 투표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

 

국민의 대다수는 시스젠더(cisgender)다. 시스젠더는 신체적인 성별과 자신이 생각하는 성별 정체성이 일치한다고 느끼면서 살아간다. 시스젠더가 투표를 하려면 신분증을 꼭 지참해야 한다. 시스젠더 입장에선 신분증을 챙기고 오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트랜스젠더에게 신분증 확인은 불편하고 두려운 일이다. 우리나라 주민등록증 번호 체계는 신원 확인에 유용하다. 13자리 숫자에 출생연도, 출생지, 그리고 성별 등의 정보가 포함된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의 첫 번째 숫자는 성별을 의미한다[*]. 트랜스여성은 현재 여성으로 사회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정받은 성별은 변경되지 않아 남성의 호적을 유지하면서 살아간다. 트랜스젠더 대부분이 호르몬 투여만으로 혹은 일부 외과적 수술만으로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따른 사회생활이 가능하지만, 주민등록증 등 공문서상 법적 성별은 자신의 사회 생활상 성별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트랜스젠더는 신분증 확인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시스젠더의 편견과 차별이 두려워서 투표장에 가지 않는다.

 

트랜스젠더는 너무 많은 불편함을 안고 살아간다. 병원에서도, 은행에서도, 신용카드 만들 때 정말로 많은 설명을 해야 하고 심지어 양해를 구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법적 성별 변경과 관련된 법률이 제정되어 있지 않다. 호적 정정은 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또 절차도 복잡하다. 시스젠더에 속한 사람들은 트랜스젠더가 마주하는 불편함이 어떤 건지 잘 모른다. 미국의 역사가 헨드릭 빌렘 반 룬(Hendrik Willem van Loon)의 책 《무지와 편견의 세계사》(생각의길, 2018) 첫 문장을 빌리자면, 시스젠더는 ‘무지(無知)라는 골짜기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트랜스젠더는 이 골짜기에 들어올 수 없다. 시스젠더, 이성애자가 다수인 골짜기에 트랜스젠더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는 ‘편견’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오롯한 당신》(책공장더불어, 2018)은 ‘무지’의 골짜기에서 벗어나 트랜스젠더에 대해 가장 깊이 들여다볼 수 있도록 견인하는 책이다. 이 책은 김승섭 교수 연구팀이 발표한 트랜스젠더 의료 접근성 문제를 다룬 논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논문과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시행착오가 많았다. 트랜스젠더의 건강 문제에 대한 국내 연구 자료가 전무한 상황 속에서 연구팀은 총 282명의 트랜스젠더를 만나 설문조사를 했다. 대부분 학술 연구는 정부 지원금을 받으면서 진행한다. 그러나 김승섭 교수 연구팀은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한국연구재단에 두 차례나 연구비 신청을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크라우드펀딩(시민의 후원, 기부 등으로 자금을 모으는 방식)으로 연구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연구팀 조사에 따르면 국내 트랜스젠더들은 의료혜택을 받지 못한 채 의료적 트랜지션(medical transition)을 받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트랜스젠더들이 성을 바꾸는 의학적 트랜지션인 정신과 진단과 호르몬요법, 외과적 수술 등이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항목으로 분류돼 있다. 많은 시스젠더가 트랜스젠더에 대해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의학적 트랜지션이다. 트랜지션은 어느 한순간에 마치 마법과 같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호르몬요법은 체형과 피부 · 목소리를 변화시키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다. 성전환수술은 호르몬요법으로 불가능한 신체적 변화를 얻기 위해 시행된다. 여기에는 안면윤곽 성형술, 목젖 성형수술, 유방 절제 · 확대술, 고환 · 정관 절제술, 자궁 · 난소 난관 절제술 등이 포함된다. 트랜스젠더가 의학적 트랜지션을 받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높은 의료비용 때문이다. 트랜스젠더가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의료 시설이 부족한 점도 문제다. 설문조사에 응답한 일부 트랜스젠더는 호르몬 요법을 해주는 의료 기관이 없어서 의료적 처치를 받지 않는다고 답했다. 외국에서는 트랜스젠더를 위한 정부의 의료지원이 확대되는 추세다. 연구팀은 미국 · 유럽에서 의료적 트랜지션을 위한 의료진 교육과 수련 과정을 편성하고 있는 데 반해 한국 의과 대학의 교육 과정에는 이 같은 내용이 포함되지 않아 트랜스젠더의 건강 문제를 이해하는 한국 의료 전문가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조금 더 생각해보면 ‘별 게 아니게 보이는 무심함’이 누군가를 힘들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연구에 참여하면서 많은 트랜스젠더를 만난 김승섭 교수의 자기반성은 이분법적 성별을 요구하는 우리 사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트랜스젠더의 목소리에는, 내게는 더없이 ‘자연스럽고 익숙한’ 어떤 것들로 인해 고통을 받는 누군가가 살아있는 세상이 있었다. 은행에서 신원 확인을 위해 신분증을 보일 때,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 그들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을 나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19쪽)

 

 

트랜스젠더의 인권 문제는 시스젠더에겐 다소 낯설고 난감할 수 있는 사회적 과제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든지, 자기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면 적어도 편견 없이 트랜스젠더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이 받는 고통을 알아야 한다. 트랜스젠더도 ‘국민’의 한 사람이며 기본권을 보장해줘야 한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편견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트랜스여성을 비꼬는 일부 급진 페미니스트들(TERF)에게 한 마디 전하고 싶다. 당신들의 편견과 차별, 그리고 소수의 문제에 대한 무심함이 누군가를 멍들게 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고. 트랜스젠더를 ‘오롯한 인간’으로 봐줬으면 좋겠다.

 

 

 

 

[*]

1900~1999년에 태어난 남성 : 1

1900~1999년에 태어난 여성 : 2

2000~2099년에 태어난 남성 : 3

2000~2099년에 태어난 여성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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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9 16: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19 19:27   좋아요 1 | URL
그렇지만 소수의 사회적 약자를 지나치게 옹호하면 다수의 사회 구성원 또는 또 다른 사회적 약자가 차별을 받을 수 있어요. 페미니즘 문제나 성소수자 문제는 ‘정치적 올바름‘의 오류에 빠지기 쉬운 주제입니다. 상대방이 비판하지 않으면 스스로 이 오류를 감지하기 힘들어요.

조그만 메모수첩 2018-06-19 17: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정권 소외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문제네요. 일상과 의료 면에서의 고통만 어렴풋이 상상했을 뿐이었는데...ㅠㅠ 타고난 성별이든 선택한 성별이든 어떤 차별도 있어서는 안 되는데 사회는 평균에서 벗어난다는 것에 대해 부당한 억압을 가하는 거 같아요 😔

cyrus 2018-06-19 19:29   좋아요 1 | URL
저도 그랬어요. 선거 끝난 후에 이 책을 읽었어요. 트랜스젠더가 겪는 불편한 상황들이 이렇게 많을 줄 생각하지 못했어요.
 
당선, 합격, 계급 - 장강명 르포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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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준비가 됐는데 어디를 가도 내가 모자라대요.

나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세요.”

 

 

(박기영의 노래 『취.준.생』 중에서)

 

 

 

 

등용문(登龍門)은 출세의 문을 뜻한다. 중국 황하(黃河) 상류에 급류가 흐르는 협곡이 있다. 협곡 이름은 용문이다. 물살이 어찌나 센지 그곳을 거슬러 올라가는 데 성공한 잉어는 용이 돼 승천한다는 전설이 있다. 그런데 용문을 오르지 못한 잉어는 뭐라고 부를까? 용문에 오르려고 도전하다가 바위에 이마를 부딪쳐 상처를 입고 하류로 떠내려가는 잉어들을 ‘점액(點額)이라 한다. 점(點)은 상처를 입는다는 뜻이고 액(額)은 이마를 뜻한다. ‘점액’은 출세의 문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요즘 잉어는 멀리 황하까지 가지 않더라도 매일 등용문을 오른다. 오염 내성이 강한 잉어지만 수질 악화와 서식처 파괴 등 매일 용문보다 험한 길을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경기불황의 그늘이 짙어지면서 출세의 문턱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외국 연수를 다녀오고 자격증을 따고 성형수술까지 해도 원하는 직장 구하기가 낙타 바늘구멍 들어가기만큼이나 어려운 시대가 됐다. 개천에서 때때로 잉어도 나오고 용도 나오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 희망조차 없다. 부모 돈이 곧 실력이요, 능력인 세상에서 부모의 경제적 뒷받침이 없으면 꿈을 실현하기 어렵다. 학연, 지연, 혈연으로 똘똘 뭉친 사회에선 이미 출발선부터 지각인 사람들이 많다. 매일 차근차근 등용문에 올라가봤자 ‘금수저들’의 세계에서 사다리가 걷어치워 지기 일쑤다.

 

지금 우리 사회는 마치 계급주의 사회처럼 이른바 ‘신의 직장들’이 지나치게 주목받으면서 역주행을 하고 있다. 그 중심에 ‘공채(공개 채용)가 있다. 청년들은 너도나도 대기업 · 공무원 시험에 목을 맨다. 장기 불황에 비정규직 일자리가 넘쳐나자 ‘안정적 고용’에 눈높이를 맞추고 있다. 첫 직장을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으로 출발하면 평생 그 바닥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게 청년들의 인식이다. 공모전은 높은 상금과 인턴 등 실무 경험의 혜택까지 누릴 기회를 부여해 대학생들에게 인기가 높다. 그러나 공모전 경쟁률이 점점 더 높아지면 대학생들은 경력자들과 경쟁해야 한다. 공모전의 ‘전(展)’을 ‘싸울 전(戰)’으로 써야 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

 

기자 출신 소설가 장강명의 책은 사람들의 생각과 관심사, 현실을 반영한다. 《표백》(한겨레출판, 2011)은 모든 틀이 이미 다 짜여 있는 세상, 그 구조 속에서 옴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된 오늘날의 젊은 세대를 ‘표백세대’라 칭하며 자살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세계에 과시할 수 있는 반어적인 상황을 그린 소설이다. 《한국이 싫어서》(민음사, 2015)는 현실적 이유로 한국을 떠나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며 대중과 평단에서 공감을 이끌어냈다는 평을 받았다. 《댓글 부대》(은행나무, 2015)2012년 대선 당시 국가정보원의 댓글 조작을 통한 선거개입에서 모티프를 얻어 쓴 소설이다. 공교롭게도 이번에 나온 첫 르포르타주 《당선, 합격, 계급》(민음사, 2018)동시대의 현실과 호흡하는 그의 글쓰기와 궤를 같이한다. 이번에 그는 문학상과 공채 제도의 문제점을 파헤치고 들여다본다. 2년 넘게 작가는 공모전을 운영하는(운영하지 않는) 출판사 대표 및 담당자, 작가 그리고 작가 지망생 등 문학 공모전과 채용 시스템의 현실에 있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

 

장강명은 한국 공채 문화를 ‘지망생들의 세계’, ‘합격자의 세계’로 바라보면서 대학 입시, 기업 공채 제도, 자격증 시험 등으로 확장한다. 이 공채 문화를 계급사회를 조장하는 ‘한국만의 방식’으로 규정한다. 책은 한국 공채 문화의 현실의 면면을 쓸쓸하지만,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한국 공채 문화의 문제점은 ‘승자’ 그룹(‘등용’, ‘합격자의 세계’)과 ‘패자’ 그룹(‘점액’, ‘지망생들의 세계’)으로 분화시키는 무한 경쟁과 성과(성적) 중심주의다. 자격증과 공모전, 그리고 공무원 시험은 ‘무한 경쟁’이라는 사회의 파고 속에 있는 한 척의 구명보트와 같다. 모든 구직자가 아귀다툼으로 올라타면 구명보트는 당연히 뒤집힐 수밖에 없다. 한 번의 시험으로 모든 경쟁의 금을 넘어선 합격자들은 ‘용(龍)’이 되지 못한다. 어중이떠중이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철밥통’을 지키기 위해 인맥과 파벌을 보험으로 삼고 있어서다. 엘리트의식, 권위주의, 패거리주의에 찌들어 있는 곳이 ‘합격자의 세계’이다.

 

장강명은 ‘문학공모전’ 수상경력이 화려하다. 그러나 그는 문학공모전도 ‘일종의 채용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한국 사회의 등단 문화와 공채 문화 사이에 비슷한 점이 많다. 점수 또는 성과로 합격(당선)과 불합격(낙선)으로 나누고, 합격자 또는 당선자는 ‘그들만의 세계’의 구성원이 된다. 합격자는 우월감을 느끼고, 불합격자는 열등감을 많이 느끼면서 등용에 재도전한다. 이렇게 합격의 권위가 만들어 낸 울타리에 갇힌 사람들은 자신이 이룬 일을 자랑하기 위해 ‘간판’을 내세운다. 우리는 과대평가된 간판과 권위를 맹목적으로 신뢰한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간판을 차지하기 위해 ‘바늘구멍’ 같은 공채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취업 및 시험 준비에 매달려서 극도로 예민해진 사람들은 ‘용과 같은 괴물’로 변할 수 있다. ‘고시오패스(고시생과 반사회적 인격장애자를 뜻하는 소시오패스의 합성어)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실력과 능력을 갖추면 누구나 원하는 직장에 취업할 수 있으니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라는 말이 의미 없는 상황이 되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이 책, 《당선, 합격, 계급》이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만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합격의 권위’와 ‘간판’은 노력보다 배경이 더 중요하다는 불신을 낳게 한다. 시험 결과로 인생의 당락이 결정되는 한국은 ‘공채의 나라’이다. 특권과 차별이 용인된 공채의 나라에 사는 청년들은 꿈을 꾸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공채 문화가 ‘불공평한 생존 방식’임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한다. 우리나라의 ‘등용’은 문제가 많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계급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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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8 1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19 15:26   좋아요 1 | URL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지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일하는 게 힘들어 보였어요. 이제 좀 적응했다 싶었는데 인사발령이 나면서 새로운 곳에서 일하게 됩니다. 또 힘든 고생을 하게 되죠.

북다이제스터 2018-06-18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지 척^^

cyrus 2018-06-19 15:27   좋아요 1 | URL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