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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롯한 당신 - 트랜스젠더, 차별과 건강
김승섭 외 지음 / 숨쉬는책공장 / 2018년 5월
평점 :
별 게 아니게 보이는 무심함이 온 우주를 멍들게 할 수 있다.
(김살로메, 《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 54쪽)
올해로 ‘여성 참정권 운동(Suffragette, 서프러제트)’ 100주년을 맞는다. 여성 참정권 운동이 처음 불붙기 시작한 것은 1848년 뉴욕에서 열린 세계 최초의 여성권리대회 때다. 그로부터 수많은 여성이 투옥되는 등 참정권을 획득하기 위한 여정이 시작됐지만 제일 먼저 여성에게 투표권을 준 나라는 영국도, 미국도 아니다. 1893년 뉴질랜드가 최초이다. 우리나라는 1948년 제헌헌법부터 여성들의 참정권을 보장했다.
참정권은 국민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본적 권리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하고도 소중한 국민의 기본권을 누리지 못하는 여성이 있다. MTF 트랜스젠더(male-to female transgender, 트랜스여성)이다. 태어날 때 지정받은 성별과 스스로 생각하는 성별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트랜스젠더라고 한다. 남성으로 태어났으나 성별을 여성이라고 생각하면 트랜스여성이고, 반대의 경우는 트랜스남성(female-to-male transgender, FTM 트랜스젠더)이다. 트랜스남성 역시 트랜스여성과 마찬가지로 투표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
국민의 대다수는 시스젠더(cisgender)다. 시스젠더는 신체적인 성별과 자신이 생각하는 성별 정체성이 일치한다고 느끼면서 살아간다. 시스젠더가 투표를 하려면 신분증을 꼭 지참해야 한다. 시스젠더 입장에선 신분증을 챙기고 오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트랜스젠더에게 신분증 확인은 불편하고 두려운 일이다. 우리나라 주민등록증 번호 체계는 신원 확인에 유용하다. 13자리 숫자에 출생연도, 출생지, 그리고 성별 등의 정보가 포함된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의 첫 번째 숫자는 성별을 의미한다[*]. 트랜스여성은 현재 여성으로 사회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정받은 성별은 변경되지 않아 남성의 호적을 유지하면서 살아간다. 트랜스젠더 대부분이 호르몬 투여만으로 혹은 일부 외과적 수술만으로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따른 사회생활이 가능하지만, 주민등록증 등 공문서상 법적 성별은 자신의 사회 생활상 성별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트랜스젠더는 신분증 확인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시스젠더의 편견과 차별이 두려워서 투표장에 가지 않는다.
트랜스젠더는 너무 많은 불편함을 안고 살아간다. 병원에서도, 은행에서도, 신용카드 만들 때 정말로 많은 설명을 해야 하고 심지어 양해를 구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법적 성별 변경과 관련된 법률이 제정되어 있지 않다. 호적 정정은 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또 절차도 복잡하다. 시스젠더에 속한 사람들은 트랜스젠더가 마주하는 불편함이 어떤 건지 잘 모른다. 미국의 역사가 헨드릭 빌렘 반 룬(Hendrik Willem van Loon)의 책 《무지와 편견의 세계사》(생각의길, 2018) 첫 문장을 빌리자면, 시스젠더는 ‘무지(無知)’라는 골짜기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트랜스젠더는 이 골짜기에 들어올 수 없다. 시스젠더, 이성애자가 다수인 골짜기에 트랜스젠더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는 ‘편견’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오롯한 당신》(책공장더불어, 2018)은 ‘무지’의 골짜기에서 벗어나 트랜스젠더에 대해 가장 깊이 들여다볼 수 있도록 견인하는 책이다. 이 책은 김승섭 교수 연구팀이 발표한 트랜스젠더 의료 접근성 문제를 다룬 논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논문과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시행착오가 많았다. 트랜스젠더의 건강 문제에 대한 국내 연구 자료가 전무한 상황 속에서 연구팀은 총 282명의 트랜스젠더를 만나 설문조사를 했다. 대부분 학술 연구는 정부 지원금을 받으면서 진행한다. 그러나 김승섭 교수 연구팀은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한국연구재단에 두 차례나 연구비 신청을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크라우드펀딩(시민의 후원, 기부 등으로 자금을 모으는 방식)으로 연구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연구팀 조사에 따르면 국내 트랜스젠더들은 의료혜택을 받지 못한 채 의료적 트랜지션(medical transition)을 받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트랜스젠더들이 성을 바꾸는 의학적 트랜지션인 정신과 진단과 호르몬요법, 외과적 수술 등이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항목으로 분류돼 있다. 많은 시스젠더가 트랜스젠더에 대해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의학적 트랜지션이다. 트랜지션은 어느 한순간에 마치 마법과 같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호르몬요법은 체형과 피부 · 목소리를 변화시키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다. 성전환수술은 호르몬요법으로 불가능한 신체적 변화를 얻기 위해 시행된다. 여기에는 안면윤곽 성형술, 목젖 성형수술, 유방 절제 · 확대술, 고환 · 정관 절제술, 자궁 · 난소 난관 절제술 등이 포함된다. 트랜스젠더가 의학적 트랜지션을 받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높은 의료비용 때문이다. 트랜스젠더가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의료 시설이 부족한 점도 문제다. 설문조사에 응답한 일부 트랜스젠더는 호르몬 요법을 해주는 의료 기관이 없어서 의료적 처치를 받지 않는다고 답했다. 외국에서는 트랜스젠더를 위한 정부의 의료지원이 확대되는 추세다. 연구팀은 미국 · 유럽에서 의료적 트랜지션을 위한 의료진 교육과 수련 과정을 편성하고 있는 데 반해 한국 의과 대학의 교육 과정에는 이 같은 내용이 포함되지 않아 트랜스젠더의 건강 문제를 이해하는 한국 의료 전문가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조금 더 생각해보면 ‘별 게 아니게 보이는 무심함’이 누군가를 힘들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연구에 참여하면서 많은 트랜스젠더를 만난 김승섭 교수의 자기반성은 이분법적 성별을 요구하는 우리 사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트랜스젠더의 목소리에는, 내게는 더없이 ‘자연스럽고 익숙한’ 어떤 것들로 인해 고통을 받는 누군가가 살아있는 세상이 있었다. 은행에서 신원 확인을 위해 신분증을 보일 때,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 그들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을 나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19쪽)
트랜스젠더의 인권 문제는 시스젠더에겐 다소 낯설고 난감할 수 있는 사회적 과제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든지, 자기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면 적어도 편견 없이 트랜스젠더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이 받는 고통을 알아야 한다. 트랜스젠더도 ‘국민’의 한 사람이며 기본권을 보장해줘야 한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편견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트랜스여성을 비꼬는 일부 급진 페미니스트들(TERF)에게 한 마디 전하고 싶다. 당신들의 편견과 차별, 그리고 소수의 문제에 대한 무심함이 누군가를 멍들게 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고. 트랜스젠더를 ‘오롯한 인간’으로 봐줬으면 좋겠다.
[*]
1900~1999년에 태어난 남성 : 1
1900~1999년에 태어난 여성 : 2
2000~2099년에 태어난 남성 : 3
2000~2099년에 태어난 여성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