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드스타킹은 지난 4월 한 달 동안 바쁘게 달려왔습니다. 벌써 한 달이 지났다는 게 신기합니다. 4월 30일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두 번째 모임을 마지막으로 한 주간 휴식기에 들어갔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인 5월 14일부터 모임을 재개합니다.
지난주 일요일에 레드스타킹 멤버들과 술 모임을 했습니다. 새로 문을 연 수제 맥줏집에 모였습니다. 그 날이 마침 레드스타킹 멤버 한 분의 생일이었습니다. 맥줏집에서 생일 파티를 하게 됐습니다. 그 날에 저는 《과학 혁명의 구조》 독서 모임에 참석했고, 독서 모임이 끝난 후에 맥줏집으로 이동했습니다. 저를 포함한 멤버 네 명이 맥줏집에 일찍 도착했습니다.
네 명이 모여서 나눈 대화의 주제 역시 페미니즘이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술 모임도 월요일 정기 모임처럼 느껴졌습니다. ‘젠더’에 관한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 은○ 님이 제가 작성한 나영 님 강연 후기[1]를 언급했습니다. 은○ 님은 제 글의 내용 일부가 잘못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은○ 님의 지적을 받았을 때 매우 놀랐거나 기분 상하지 않았습니다. 예상했던 지적이었거든요. 문제가 된 제 글의 내용을 인용하겠습니다.
성은 단순히 섹스(Sex)만을 의미하지 않아요. [중략] 젠더(Gender)도 ‘성’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렇지만 생물학적 성을 의미하는 섹스와는 조금 다른 의미입니다. 젠더는 사회학적 성을 의미합니다. 유전자에 의해 남성과 여성이 결정되는 것이 생물학적 성이라면, 사회학적 성은 생물학으로 타고난 성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회나 문화에 의해 수행된 역할을 의미합니다.
틀린 내용은 아닙니다. 그런데 나영 님은 섹스와 젠더의 의미를 조금 다른 관점으로 설명했어요. 그러니까 나영 님은 ‘섹스는 생물학적 성, 젠더는 사회학적 성’이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섹스와 젠더를 구분하는 ‘교과서적 정의’에 의문을 제기하는 입장을 드러냈습니다. 제가 그 내용을 후기에 쓰지 못했습니다.
나영 님이 강연했던 당시 그 날을 복기하면 이렇습니다. 나영 님이 청중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섹스와 젠더, 이 두 개의 단어는 뭘 의미하는 걸까요?”
페미니즘을 공부한 청중들은 당연히 ‘섹스는 생물학적 성, 젠더는 사회학적 성’이라고 대답했어요. 그러자 나영 님은 또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말씀하신 대로 상대방의 성별이 섹스인지 젠더인지 쉽게 구분할 수 있나요?”
아주 자신 있게 첫 번째 질문에 대답한 청중들은 나영 님의 두 번째 질문에는 침묵했습니다. 저도 대답하지 못했어요. 몰랐던 것이죠. 이 두 번째 질문은 ‘(섹스와 젠더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 ‘구분할 수 없다’라는 답변을 내놓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의 준말)’는 아닌 것이죠. 이 질문은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두 가지 의문을 갖게 만듭니다. 하나는 ‘섹스와 젠더는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가?’이고, 또 하나는 ‘섹스와 젠더를 구분하는 교과서적 정의를 누가 정했는가?’입니다.
이미 나영 님은 작년에 나온 《그럼에도 페미니즘》(은행나무, 2017)에 수록한 글을 통해 젠더 개념의 모호성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 윤보라 외 《그럼에도 페미니즘》(은행나무, 2017)
이제는 누구나 ‘섹스는 생물학적인 성이고, 젠더는 사회적인 성이다’라는 정의를 마치 답안지에 적어낼 정답처럼 이야기하지만, 그렇다면 과연 ‘생물학적인 성으로서의 여성’이라는 범주는 어디까지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 성별을 구분하는 기준 중에서 ‘생물학적으로 이미 결정된 것’과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것은 과연 얼마나 있을까? (나영, 『여성을 사랑하는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 131쪽)
작년에 《그럼에도 페미니즘》을 읽었습니다. 강연에 나온 나영 님의 두 번째 질문은 처음 들어 본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그럼에도 페미니즘》에 수록된 나영 님의 글을 다시 읽었을 때 부끄러웠습니다. 사실, 그 책을 읽은 당시에 나영 님이 대단한 분인지 몰랐어요. 레드스타킹 모임 활동을 하면서 나영 님의 존재감을 알게 됐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는 과정, 즉 독서 방식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저는 눈으로 페미니즘을 ‘읽으면서’ 여성학자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착각이었고, 크나큰 실수였습니다. 혼자 공부하면 종종 이런 실수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특히 남자가 혼자서 책으로 페미니즘을 공부하면 정작 중요한 내용을 간과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기 쉽습니다.
* 록산 게이 《나쁜 페미니스트》(사이행성, 2016)
저는 지금도 이 두 가지 의문에 대해서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페미니즘은 세상(또는 나)에 대한 질문과 고민을 마주해야 하는 학문입니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공부하기 쉬운 학문’이라 말할 수 없어요. 페미니즘은 ‘하나를 알면 열을 아는’ 학문이 아니에요. 그 반대입니다. ‘하나를 알아도 열은 모르는’ 학문입니다. 《나쁜 페미니스트》(사이행성, 2016)의 저자 록산 게이는 페미니즘은 ‘복수 명사’이며 그 속에 다양한 페미니즘이 공존한다고 말했습니다. 페미니즘의 ‘하나’를 안다고 해서 페미니즘을 완벽히 이해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힘겨운 일이지만 열 개 이상의 페미니즘을 공부해야 합니다. ‘하나’의 페미니즘만으로는 늘 시시각각 변하고 복잡해지는 세상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페미니즘이 세상을 읽고 해석하는 기능을 하지 못하면 또 다른 ‘차별’이 생깁니다. 지나온 페미니즘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투표권을 요구한 자유주의 페미니즘(1세대 페미니즘)은 ‘기득권’이라는 든든한 성(城)을 포기하지 못했고 인종과 계급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전미여성기구(NOW: 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를 설립한 베티 프리단은 여성운동에 뛰어든 레즈비언을 끌어안지 않았고 페미니즘의 교차성(intersectionality)을 차폐막으로 막아버렸습니다. 페미니스트도 ‘인간’입니다. 완전하지 않으며 때론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페미니스트의 실수나 한계를 근거로 페미니즘은 ‘불완전하고 문제 있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듯이 이 세상에 완벽한 학문은 없습니다.
오늘 안나 님의 서재에 은유 작가의 인터뷰집 《출판하는 마음》(유유, 2018)에 나오는 문장을 봤습니다.[2] 그 문장이 지금 저의 상황을 대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책을 만들어야 한다. 애정의 다함에 대해 나는 나를 자꾸만 의심해야 한다. 한순간의 안도가 한 권의 책을 망칠 수 있다. 어려운 이름, 책. 그렇다고 당신에게 내 싸다구를 후려쳐달라고 할 순 없지 않은가. 내 귀싸대기는 내가 후려 치는 걸로. (25쪽)
페미니즘에 대한 글을 쓸 때면 ‘부끄럽지 않은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으로 임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글을 다 쓰고 나서도 내가 배운 지식을 올바르게 표현했는지 의심합니다. 나름대로 생각해본 끝에 글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면 피드백을 합니다. 저는 얼마든지 싸다구 맞을 각오로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맞을 각오를 하고 레드스타킹에 들어갔습니다. 제 기준으로 볼 때 레드스타킹에 들어오면서 지금까지 멤버들에게 세 번 넘게 맞았습니다. 《젠더 무법자》 모임 첫날에 ‘남녀평등’이라고 말해서 얻어맞았고[3], 권김현영 님한테도 아주 세게 한 방 맞았어요.[4] 아! 제가 ‘맞았다’라는 표현을 썼다고 해서 레드스타킹을 ‘남자 패는 남성 혐오자들의 모임’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이 글에서 쓰고 있는 ‘맞았다’라는 표현은 ‘건전한 비판’을 의미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레드스타킹은 해치지 않아요!
[1] [“나도 고발한다”] 2018년 5월 2일 작성
http://blog.aladin.co.kr/haesung/10066052
[2] [출판하는 마음, 그 마음에 리스펙.]
http://blog.aladin.co.kr/hopeblossom_/10072261
[3] 2018년 2월 13일 작성
http://blog.aladin.co.kr/haesung/9903117
[4] [페미니즘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2018년 4월 17일
http://blog.aladin.co.kr/haesung/10031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