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히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인 입장이란 환상에 불과하다.
현실에서 우리가 취하는 어떤 입장도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민경, 《페미니스트 선생이 필요해》 63쪽)
대구중앙도서관은 동성로에서 걸어서 충분히 갈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내일모레(23일)에 동성로 일대에서 제10회 대구퀴어축제가 열립니다. 뜻깊은 행사에 맞춰 박차민정 님의 《조선의 퀴어》(현실문화, 2018)를 읽어보고 싶어서 중앙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했습니다. 이때가 5월 중순이었고, 때마침 나온 《지금 여기 페미니즘X민주주의》(교유서가, 2018)도 같이 신청했어요.
한 달 지나고 나서 신청도서 처리 결과를 확인했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한 권은 취소됐습니다. 그 한 권이 《조선의 퀴어》였습니다. 취소 사유는 이렇습니다. “여러 연령대의 이용자가 이용하는 공공도서관 소장 도서로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어 제외되었습니다.”
이 책의 부제는 ‘근대의 틈새에 숨은 변태들의 초상’입니다. 혹시 사서가 이 책을 ‘변태들’이 나오는 음란한 도서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원래 퀴어(queer)는 ‘괴상한’, ‘기묘한’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였고, ‘괴상한 존재’, ‘변태’로 취급받은 동성애자를 멸시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의 퀴어》는 ‘변태’로 오인된 근대 조선의 퀴어들을 재조명한 책입니다. 박차민정 님은 오래전부터 퀴어 이론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연구하신 분입니다. 퀴어 페미니스트뿐만 아니라 여성주의 연구가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책이 바로 《조선의 퀴어》입니다.
그런데 이 책이 ‘공공도서관 소장 도서’로 적합하지 않다니…‥. 퀴어라는 주제도 페미니즘인데 어째서 《조선의 퀴어》는 공공도서관에 들어갈 수 없었을까요? 아마도 사서는 퀴어를 진짜 ‘변태’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이 책이 청소년의 정서에 해로운 내용이 있을 거로 판단한 것 같습니다. 공공도서관에 ‘페미니스트 사서’ 채용이 시급합니다. 대구중앙도서관 사서가 정말로 ‘퀴어’를 싫어하는지 궁금해서 《페미니즘을 퀴어링!》(봄알람, 2018)을 신청했습니다. 책 제목에 ‘페미니즘’이 들어가 있으니 이번에는 사서가 올바른 결정을 할 거로 믿습니다.
* 애너매리 야고스 《퀴어 이론 : 입문》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12)
* 수잔 스트라이커 《트랜스젠더의 역사》 (이매진, 2016)
* 케이트 본스타인 《젠더 무법자》 (바다출판사, 2015)
* 주디스 핼버스탬 《여성의 남성성》 (이매진, 2015)
과거에는 ‘변태성욕자’, ‘동성애자’를 욕할 때 ‘퀴어’를 사용됐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퀴어는 다양한 성적 정체성, 성 지향성이 있는 ‘성소수자’를 아우르는 단어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퀴어를 ‘변태’, ‘해롭고 위험한 존재’로 인식하고 비하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퀴어 혐오(트렌스젠더, 게이, 레즈비언 혐오)를 일삼는 사람, 동성애와 퀴어 축제를 반대하는 보수 기독교인, 그리고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로 알려진 트랜스-배제적 페미니스트가 있습니다.
* 쉴라 제프리스 《래디컬 페미니즘》 (열다북스, 2018)
트랜스-배제적 페미니즘은 ‘젠더 비평적 페미니즘(Gender-Critical Feminism, GCF)’ 또는 ‘문화(주의) 페미니즘(Cultural Feminism)’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TERF’로 통일하여 쓰겠습니다. TERF에 속하는 쉴라 제프리스와 제니스 레이먼드는 트랜스젠더 자체를 부정해서 성별 불화를 겪는 사람을 ‘트랜스섹슈얼리즘’이라고 부릅니다. 그녀들은 성전환 수술을 허용하는 의료 정책에 반대합니다.
워마드(WOMAD)는 TERF을 표방하는 여초 성향 커뮤니티입니다[1]. 본인들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직 생물학적 여성의 권리 신장을 지향합니다. 워마드는 남성은 절대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워마드는 게이와 트랜스 남성의 여성 혐오에 대항해 ‘미러링’으로 비판합니다만, 문제는 게이와 트랜스 남성을 비꼴 때 쓰는 워마드 용어가 ‘성 소수자 혐오표현’이라는 점입니다.
트랜스 여성도 워마드가 적대하는 대상입니다. 워마드는 트랜스 여성을 ‘남성’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여성 운동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트랜스 여성의 성전환 수술을 비꼬기도 하고, 트랜스젠더를 싸잡아서 ‘젠신병자(트랜스젠더+정신병자)’라고 비하합니다. 이 단어에 성별 불화를 겪는 트랜스젠더를 ‘정신장애인’으로 바라보는 비하적인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지만 트랜스젠더는 더 이상 정신장애가 아니며, 이를 질병으로 규정하면 실제로 트랜스젠더에 대한 편견 및 낙인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 홍성수 《말이 칼이 될 때》 (어크로스, 2018)
* 김승섭, 레인보우 커넥션 프로젝트 외 《오롯한 당신》 (책공장더불어, 2018)
혐오표현은 소수자를 부정하고 차별하거나 배제하려는 언어입니다. 따라서 ‘젠신병자’는 트랜스젠더라는 성소수자를 여성 운동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배제하는 효과를 낳는 혐오표현입니다. 쉴라 제프리스는 트랜스섹슈얼리즘을 ‘인권 침해’로 규정하면 의료적 트랜지션 즉, 성전환 수술 · 호르몬요법 등을 불법화하는 데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그녀의 주장에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성 소수자 차별과 억압이 워낙 강고해서 트랜스젠더에 대한 실태 파악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국내 의학 전문가들은 트랜스젠더들이 제대로 의료서비스를 받았는지 관심을 주지 않았어요. 의학 교육 과정에서 의료적 트랜지션에 필요한 지식 및 기술에 대한 수련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요. 의료적 트랜지션을 규제하면 부작용이 생길 우려가 있습니다. 트랜스젠더의 건강을 악화시키는 불법 의료적 트랜지션이 음지에서 성행할 수 있습니다.
저는 ‘페미니즘’과 ‘퀴어’가 서로 연관이 없는 별개의 단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퀴어/퀴어 이론’을 흠집 내기 위한 수단으로 페미니즘과 퀴어를 따로 구분 지어 사용되는 것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달에 1차 불법촬영 편파 수사 규탄시위가 열렸습니다. 이 시위는 미투 운동이 확산된 이후에도 바뀌지 않는 사회 전반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시위였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시위 참가 조건이 문제 있다고 봅니다. ‘생물학적 여성’ 자체를 인정한다는 건 결국 페미니즘이 꾸준히 비판했던 젠더 이분법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일입니다. 젠더 이분법의 선택지는 단 두 개입니다. ‘생물학적 남성’과 ‘생물학적 여성’이죠. 젠더 이분법은 성소수자인 ‘제3의 성’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젠더 이분법에 기초한 시위 참가 조건은 트랜스 여성의 참여를 막는 것이고, 트랜스 여성에 대한 차별입니다. 트랜스 여성도 성희롱 · 성폭력(시스젠더에 의한 성폭력과 성소수자 간의 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성소수자 사회 안에서도 성폭력을 인지하고 제기할 수 있도록 공론화되어야 하는데 아직 그런 기회가 부족합니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은 동성 간 성소수자 간의 성폭력을 공론화하기 더 어렵게 만듭니다.
* 권김현영 엮음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교양인, 2018)
* 이민경, 최현희, 최승범 외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해》 (동녘, 2017)
정희진 님은 성소수자와 이성애자를 구별하는 차별하는 태도가 가부장제의 원리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퀴어는 인간의 성별을 양성으로 고정하려는 가부장제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젠더들이라고 말합니다. 여성 순혈주의는 불가능합니다[2]. 현재의 워마드는 여성 순혈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페미니스트는 이 심각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내부 비판을 하지 못하는 걸까요? 루인 님은 국내에 페미니즘과 퀴어의 상호 관계성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면서 논쟁적 문제에 ‘몸을 사리는’ 페미니스트들의 태도를 지적했습니다[3].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 모두 공부해야 할 것들이 많은 학문입니다. 둘 중 하나를 공부하는 건 벅찬 일이에요. 하지만 공부하지 않은 것을 모른다고 해서 복잡한 논쟁 주제를 자꾸만 피해야 할까요? 내가 관심 있는 학문이 조금씩 뭔가 잘못되고 있는데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야 할까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유로 논쟁을 피하려는 태도, ‘나중에’ 생각해보겠다면서 신중한 척하는 태도. 이 모든 행동은 잘못된 현상을 유지하게 해주는 ‘몸 사리는’ 태도입니다. 달리는, 아니 모든 사람이 행복할 때까지 달려야 할 페미니즘에 ‘중립’은 없습니다[4].
저는 지난 달 초에 공개적으로 약속했습니다. 싸다구 맞을 각오로 페미니즘을 공부하겠다고요[5]. ‘중립’이라는 이름에 숨어서 페미니즘 내 문제를 소극적으로 지켜봐야 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쉽게 결론 내리기 어려운 페미니즘 논쟁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내놓아도 어차피 욕먹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타당한 비판도 받을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1] 워마드 회원 전체가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건 아닙니다. 워마드 일부가 성소수자를 혐오합니다. 성소수자 문제에 관심 있는 워마드 회원을 실제로 만나봤습니다.
[2] 정희진,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215쪽.
[3] 루인, 『트랜스젠더 운동, 페미니즘과 동성애 운동과의 관계: 미국과 한국의 경우』, 2012년 3월 1일, ‘Run To 루인’ http://runtoruin.com/1955
[4]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하워드 진).
[5] [싸다구 맞을 각오로 공부하기] http://blog.aladin.co.kr/haesung/10078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