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산업혁명 - 수평적 권력은 에너지, 경제, 그리고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
제러미 리프킨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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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는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았다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를 아우르는 대제국이었던 로마 제국의 멸망 원인은 지금도 풀리지 않는 서양사의 수수께끼 중의 하나다. 내부의 부패, 국가기구 비대화, 납 중독 등 수많은 가설을 놓고 역사가들은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외에도 로마 멸망에 대한 흥미로운 가설들이 많은데 일부 역사학자들은 자연환경적 문제 측면에서 로마 멸망의 원인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로마 제국이 번영했을 당시만해도 국토에는 삼림이 무성했다. 풍족한 자연자원이 산재되어 있을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워 점차적으로 영토를 확장한 이후에는 오랫동안 평화로운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번영기를 누리게 되었다. 당시 로마 제국이 움직일 수 있었던 경제력의 가장 크나큰 원천은 농업에서 비롯되었다. 전쟁으로 획득한 넓은 토지들은 농지로 식민지화함으로써 정부 수입의 90% 이상을 조달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력을 형성하게 만드는 로마의 경제구조는 로마의 쇠퇴를 재촉하게 만드는 지름길이 되고 말았다. 국유화된 토지들은 어느새 로마 귀족들이 잠식하게 되면서 그들이 경영하는 대농장(라티푼디움, Latifundium)이 로마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삼림으로 가득찼던 토지는 점점 황폐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최악의 자연환경 상태가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농업 생산권을 쥐고 있는 로마의 귀족들의 탐욕은 끝이 없었다. 토질이 악화된 상태라도 농사 지을 땅이 있다면 어디든지 간에 자신의 농장을 만들었다. 로마 제국이 전쟁을 통해서 영토를 확장하는 것처럼 귀족들은 자신이 소유한 농장들의 크기를 점점 넓혀만 갔다.  

 

무분별한 라티푼디움의 증대는 안 그래도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토지를 더욱 악화되게 만드는 문제점을 낳게 되었다. 그리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풍족한 토지가 줄어들게 되자 농업에 종사하던 농민층들은 농경지를 버리고 도시로 향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농업에서 비중 있게 수입을 조달받았던 로마 제국의 경제력은 하락세로 돌아서게 되었다. 하루 아침에 왕관의 주인이 바꿔 있을 정도로 치열한 권력다툼의 소용돌이로 인해 중앙통제력은 약화되었고, 내부적인 혼란에 틈 타 외부의 침략자들은 호시탐탐 로마를 노리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번영을 누릴 것만 같았던 로마 제국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속 내용 그대로 멸망에 이르고 말았다. 『돈 키호테』를 쓴 스페인의 소설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로마 제국의 황금기를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하지만 대제국답게 멸망하는 과정 역시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았다. 로마 제국은 지속 가능한 자연 환경을 개발하는 미래지향적인 대안을 간과한 채 그렇게 자멸하고 말았다.

 

 

 

 

 석유 시대의 종말도 멀지 않았다

 

 

다음과 같이 소개한 로마 제국의 멸망 과정설은 제러미 리프킨의 『3차 산업혁명』에 소개되어 있다. 로마 제국의 멸망이 우리 현대인에게 시사해주고 있는 중대한 교훈은 전해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지속 가능한 삶을 전망하지 못한 채 무분별하게 진행되는 자원개발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로마 제국의 멸망 사례를 보면서 혹 눈치를 채셨는지...?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로마 제국은 경제 생산 의존도를 농업에만 치중한 탓에 멸망한 것인데 로마 이야기가 우리나라와는 무슨 상관 있느냐고.

 

그렇다면 로마 제국을 '우리나라'로, 국가 경제력 발전에 주요 기반이 되었던 농경지로 사용된 토지를 '석유'라고 바꿔서 생각해보자. 이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딱 답이 나온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자원 의존도, 즉 '석유' 의존도가 높은 국가다. 이 '석유'가 우리나라 경제가 작동하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중요한 자원이다. 만약에 이 지구상에 남아 있는 석유가 고갈된다면 우리나라의 앞날은 안 봐도 뻔한 일이다.

 

요즘 국제 관련 신문기사를 보게 된다면 아시겠지만 '그리스 사태와 유로존' 다음으로 비중 있게 다루는 소식이 바로 '이란 제제'에 대한 것이다. 이란 핵무기 개발 의혹에 대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국들이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장기화하고 국방수권법 제제가 더욱 강화될 경우 이란의 석유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나라와 일본은 경제적인 타격을 입을 우려가 있다. 이란사태가 악화될 경우 전세계 원유공급 차질에 따른 유가급등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유가 상승은 무역수지를 악화시키고 물가를 올리면서 성장률을 떨어뜨린다. 1979년, 이란의 석유수출 전면중단에 의해서 발생하게 된 제2차 오일 쇼크와 같은 일이 또 다시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중동 4개국 국빈방문 중 두 번째로 순방국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알 나이미(Al Naimi) 석유광물부 장관과 접견한 이 대통령. 이 접견을 통해서 우리나라 정부는 사우디 정부로부터 안정적인 원유를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2012.2.7, 사진출처: 뉴시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불확실한 국제 정서의 변화에 대한 정부의 대응책이다. 우리나라가 할 수 있는 대응책은 매우 한정되어 있다. 우리나라 정부는 이란산 원유도입 감축이 최소화되도록 외교적 노력을 강화하고 대체물량 확보, 비축유 활용 등의 대책을 마련할 수 있는 '자원외교'를 펼치고 있는 중이다. 특히 올해 2월에 이루어진 이 대통령의 터키와 중동3개국 국빈방문은 '원유·오일 달러 확보'를 목표에 중점을 둔 중요한 외교활동이었다. 이 대통령의 자원외교는 미국의 이란 제제에 따른 비상시 원유수급선 다변화라는 소기의 목표를 일정 정도 달성했다는 성과가 있었지만 문제는 현 정부가 대대적으로 국제적인 성과로서 홍보하고 있는 이 자원외교는 단지 현실적인 국제 정세의 변화에 대한 대안책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제러미 리프킨은 여전히 화석연료에 의존하고 있으며 불확실한 리스크들이 기다리고 있는 현 시대의 진행과정에 대해서 다양한 사례와 근거 자료를 통해서 그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특히, 세계 최대의 원유 생산국인 미국의 자원 개발에 대해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리프킨의 설명에 따르면, 1차 산업혁명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다시피 영국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증기기관에서 출발한다. 증기기관 기술은 또 다른 기술의 업종들의 발전에도 상쇄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증기기관 기술을 이용한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책과 잡지 등이 빠르게 전파되었고, 이는 글을 아는 '노동인구'를 탄생시켰고, 이들은 한층 복잡해진 문명을 운영하고 체계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2차 산업혁명의 근원은 석유와 전기다. 공장에 전기가 들어가고, 석유로 굴러가는 자동차가 대량 생산되기 시작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그리고 상업광고는 이 시기를 대표하는 '상징'이며 지금까지도 국제 경제는 석유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다.

 

그런데 문제는 석유는 유한한 자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석유가 고갈된다면 지구상의 모든 국가 생존에 있어서 위험의 직면에 마주서게 된다. 그리고 석유에 채굴하는 데 드는 비용만 해도 경제적 효율성으로 따져 본다면 비효율적이다. 거기에다가 2010년에 발생했던 멕시코 만 원유 유출 사고처럼 환경오염 사고가 발생한다면 국가적으로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게 된다. 화려한 자본주의의 황금기와 함께 했던 석유 시대의 종말도 이제 멀지 않은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부터 채굴 가능할 수 있는 석유량이 한정될 것이라는 주장이 이미 제기되어 왔었지만 '석유'를 통해 국가 경제가 운용될 수 있는 자금을 확보하고 있던 서방국들은 애초에 이들을 '회의론자'라고 하여 무시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근거들이 속속 들어 밝혀지게 되고, 서방국의 이란 체제 이후 불확실성의 경제적 리스크(Risk)가 일어날 수 있는 국제 경제에 또 다시 불길한 기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3차 산업혁명의 청사진

 

 

이러한 불확실한 시대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위해서 리프킨은 '3차 산업혁명'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인터넷'과 '재생 에너지'. 이 두 가지 요소가 만나 결합해 '3차 산업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제안하고 있는 3차 산업혁명의 다섯 가지 핵심 요소를 간단하게 축약해서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재생 가능 에너지로 전환

 2) 재생 가능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미니 발전소가 있는 건물 증축

 3) 수소 저장 기술 및 보존, 보급

 4) 인터넷과 동일한 원리로 작동하는 에너지 공유 인터그리드(Inter-gtid)

 5) 교통수단을 전기를 이용한 연료전지 차량으로 교체

 

 (p. 59)

 

 

네 번째로 소개한 '인터넷과 동일한 원리로 작동하는 에너지 공유 인터그리드(Inter-gtid)'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자면 수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정보를 창출해 서로 공유하는 것처럼 재생활용할 수 있는 미래의 자원 역시 공유하여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3차 산업혁명 시대에서는 수 백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집, 사무실, 공장에서 재생 에너지를 생산하고,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듯이 `에너지 인터넷'을 통해 녹색 전기를 나눠 사용할 수 있으며 수 천 만개의 새로운 직업을 창출하고 지속가능한 지구촌 경제를 위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3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재생 에너지 체계'에 주목했다. 건물들이 자체적으로 에너지를 생산하고, 그 에너지의 일부는 수소로 저장하는 한편 생산된 에너지는 녹색 전기 인터넷을 통해 배분되고 플러그인 자동차에 사용돼 0%의 탄소를 배출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이러한 전망은 '분산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형태의 시대로 변모할 것이라고 이어지고 있다. 전통적이고 중앙 집중형 수직적인 경제 및 정치조직에서 탈피하여 수평적으로 조직된 '협업'이 핵싱이 되어 인류는 보다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

 

 

 

 

 지속 가능한 미래의 시대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제러미 리프킨의『3차 산업혁명』은 '화석연료 시대'의 종말을 선언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기업, 정부, 시민사회를 위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기의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인류들에게는 희망적인 메시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미래 예측을 보다 설득력 있게 구색을 갖추기 위해서 산업혁명의 변천과정을 굳이 '패러다임의 변화에 의한 인과 관계'라는 틀에 맞춰서 설명한 점은 '3차 산업혁명'이라는 신선한 아이디어를 진부하게 느껴지도록 만들고 말았다.

 

그리고 기업, 정부, 시민사회와 함께 서로 공동으로 '협업'함으로써 수평적 조직관계에서 이루어진 3차 산업혁명으로 변화할 것을 주장한 그가 EU를 포함한 세계 각국의 정상들에게 자신의 아이다어를 공유하고 제안한다는 것은 그의 생각 속에는 여전히 수직적 조직관계의 영향력에 의한 기성 세세대의 관성이 남아 있는 듯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저자의 모순적인 논리의 문제라기보다는 특정 시대에 유지해오던 특정 기성 세대의 패러다임을 탈피하여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는 대목으로 보고 싶다. 이전의 역사적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한 사람의 천재가 패러다임의 변화를 주도한다고 해서 단번에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변화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각인되어 있지 않은 이상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과정 중에서는 신구 세대 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진통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그가 소개한 사례들에 대해서도 꼼꼼한 지적을 덧붙이자면 리프킨은 '분산 자본주의'를 설명하기 위한 사례 중 하나로 무담보 소액대출로 세계적으로 큰 이목을 집중받은 적이 있었던 그라민 은행 소개하고 있는데 사실 작년부터 그라민 은행의 한계점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서민들을 위해 소액을 저리무담보로 대출해 준다는 그라민 은행의 발상은 분명 좋은 취지인 것은 분명하나 신용이 낮을수록 금리가 높아진다는 금융의 현실적인 본질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라민 은행 설립에 대한 세계적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던 무하마드 유누스 총재는 은행의 대출지원금 오용 문제를 이유로 불명예 퇴진에 이르게 되었다.  리프킨의 신작이 그라민 은행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던 작년에 출판된 것을 감안한다면 저자 입장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할 수도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는 현재 몽유병에 걸린 듯하다. 화석연료에 기반한 산업 시대가 점점 시들어져가고 지구는 잠재적으로 세상을 뒤엎을 기후변화에 직면해 있다는 증거가 쌓이고 있는데도 인류는 대체적으로 현실은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석유와 천연가스에 대한 중독을 달래기 위해 점점 줄어들고 있는 화석자원을 찾는 데에만 급급하고 있다. 실제로 최종 단계에 들어섰다면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일에 대한 상상을 뛰어넘는 불편한 제안을 피하려고 애쓰면서 말이다.

 

(p. 46)

 

 

이 책에서 리프킨은 친환경적인 자원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채 여전히 석유의 힘에 의존하고 있는 미국 정부를 겨낭해서 비판하고 있지만 미래에 대한 미국 정부의 근시안적인 태도가 그저 남일 같지 않게 느껴진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의존했으며 미국식 문화를 자연스럽게 이식받은 '자원 의존도' 우리나라도 리프킨이 이 책에서 전달하고 있는 경고와 거시적인 대안을 설명하고 있는 메시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아이디어에서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변화의 단초들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미국을 끔찍이도 싫어할 정도로 '반미주의자'로 잘 알려진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자신의 애독서 목록에 제러미 리프킨의 책 한 권을 꼭 포함시킬 정도로 재생 가능한 미래의 에너지를 창출하기 위한 변화의 흐름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베네수엘라의 경제는 거의 석유 산업에서 의존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는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이 쓴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보수, 진보를 떠나서 정책결정자, 즉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국가의 통치자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구체적인 플랜을 구상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실천적인 리더십이 필요하다. 세상은 미래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데, 우리나라는 지금 반대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스럽기도 하다. 올해 치르게 될 대선을 통해서 우리 손으로 뽑게 될 차기 정책결정자가 세상의 변화를 제대로 인식할 줄 알고, 미래를 준비하는 거시적인 안목을 지닌 사람이기를 원하는 것은 내 개인적인 욕심에 불과한 것일까?  차기 정책결정자가 되려고 하는 대선 후보자라면 애독서 목록에 제러미 리프킨의 책 한 권 정도쯤은 포함되어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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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2-05-26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모든 것을 떠나 이렇게 분석하고 예측하는 사람들은 신기합니다. 막연히 이럴 것 같아..가 전부인 저는 그저 부러울 뿐이죠...

재생에너지에 관해서는 리프킨의 예측이 맞으면 좋겠습니다. 석유는 이제 끝을 보이고 있는 게 맞으니까요. 그 결말이 전쟁이 아닌 재생 에너지였으면 정말 좋겠어요.

cyrus 2012-05-27 17:5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꼬마요정님 ^^

저도 이 책 읽으면서 저자의 주장이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생각들이 실현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했어요. 좋은 미래를 위해서라면
실현되면 좋겠지만요 ^^;;

노이에자이트 2012-05-27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프킨이 염려하는 것이 화석에너지 과다사용,쇠고기를 얻기 위해 수많은 숲을 목초지로 바꾸는 것이죠.그래서 채식전도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cyrus 2012-05-27 17:55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이 책에서도 내용 중간에 <수소 혁명> 때 주장해 온
수소 에너지 사용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나와썽요, 참고로 글 마지마겡
우고 차베스가 읽었다던 리프킨의 책이 <수소 혁명>입니다. ^^

노이에자이트 2012-05-27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석유의존도를 줄이자고 우리 정부가 자동차 소유 허가제를 추진한다면 아마 엄청나게 욕을 얻어먹을 걸요.
 
그대 아직도 부자를 꿈꾸는가 - 우리 시대 부모들을 위한 교양 강좌
심상정 엮음 / 양철북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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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에서 '부자 아빠, 가난한 아들' 까지

 

 

 

 

 

 

한때 우리나라에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책이 장안에 화제였던 적이 있었다. '부자아빠와 가난한 아빠는 어떤 행동에서 차이가 나는가?' 하는 점이 독자들, 특히 자녀를 두고 있으며 가족들을 부양하고 이끌어나가고 있는 가장들로 하여금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1997년 발간된 로버트 기요사키의 책은 부의 축적을 성실한 노동의 대가라기보다 적극적인 투자의 과실로 부각시키며 자산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즉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올리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안정된 직장을 구할 수 있다" 라는 식의 가르침은 이제는 가난한 아빠의 낡은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 책이 출간된 이후로 성실한 근로에 대한 절대적인 찬사를 '우둔한 행위' 또는 자식에게 경제적 빈곤을 세습시키는 '미련한 행동'으로 절하한 면도 있었지만투자를 위한 부의 축적이 현명한 자산관리라는 의식의 전환에 촉매 역할을 했다.

 

이 책이 출판되고 난 이후부터 덩달아 부자 되는 '재테크 공부하기' 열풍이 불었다. 이때, 대중들이 바라본 경제학은 재테크 기술을 알려주고, 그래서 부자가 되게 하는 학문 정도로 치부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독서 시간은 세계에서 거의 꼴찌 수준인데, 부자 되기 위한 재테크 공부는 정말 대단한 것이다. 심지어 모 신용카드 광고회사의 카피처럼 '부자 되세요' 가 덕담처럼 유행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부자 되기를 공부한 수백만 명이 모두 부자가 되었을까? 그리고 재테크 열풍에 힘입어 탄생된 '부자아빠'들은 자신들의 부의 축적 방식을 자식들에게 제대로 물려주었을까?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아빠' 예찬론을 포함한 재테크 부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한 서적에서 말하는 일명 '돈 버는 원리'는 간단히 말하자면 '부동산과 주식 투자' 두 가지로 집약된다. 그런데 개인의 부동산 소득과 주식 소득 자체는 일을 하지 않고 얻어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부자 되기 위한 재테크 관련 책들은 일을 하지 않고 돈을 버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이런 방법으로 일하지 않고 돈을 버는 사람은 '로또복권' 당첨자만큼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전체 취업자 가운데 대부분은 일을 해서 돈을 벌어 생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해서 생활하고자 하는 건전한 사회의식보다는 일을 하지 않고 돈을 벌어 부자 되기를 바라는 사회의식이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미덕으로 여겨지고 있다.

 

 

 

 

출처: 조선일보 (2011년 11월 14일자)

 

 

 

그리고 '부자아빠' 밑에서 자라난 자식들도 '부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게 되어 또 다른 '부자아빠', '부자엄마'가 나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지금의 현실은 정반대다. 장년층은 자산도 많고 현금 흐름은 좋아졌는 반면에 청년층들은 취업, 결혼 그리고 내 집 마련도 어려운 형편에 처해졌다.  세대 간 부의 간극이 더 벌어지는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아빠, 부자 아들'에서 이제는 '부자 아빠, 가난한 아들'로 바뀌고 있다. 직장에만 들어가도 신분 상승이 보장되던 5060세대의 장년층과 달리 지금 젊은 세대는 아무리 노력해도 자산 축적 기회가 제한된다. 이러한 세대 간의 부의 양극화는 사회구조적 불평등을 형성하게 되어 심각한 사회문제로 고착화하게 되는 것이다.

 

 

 

 

 

 그대 아직도 부의 욕망을 꿈꾸는가

 

 

부자가 되고 싶은 것은 누구나 바라는 바이며, 자녀도 부족함이 없이 자라기를 바란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시키고, 저축이나 용돈관리 등 경제관념을 심어 주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자식들에게 어떤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부모는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단 부자가 된 다음의 일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자신은 비록 가난하게 살았을지라도 자녀들에게만큼은 가난의 대물림을 이어받지 않게 하는 것이 모든 부모들의 마음이다. 그래서 부족하지 않을만큼 자녀들에게 많은 투자를 하게 된다. 안정된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는 소위 명문대라고 불리우는 대학교에 입학해야한다. 수많은 비용을 들이면서까지 교육비에 투자한다. 부모님의 지원에 떠밀려 자녀들은 외국어에 능통하기 위해서는 원어민 강사들이 가르치는 외국어 학원을, 'SKY'에 들어가기 위해서 강남에 위치한 입시 학원을 다니게 된다. 수험생들은 취미 생활을 보낼 수 있는 여가와 잠 잘 시간 없이 하루의 절반을 학교 교실, 학원 그리고 독서실에서 보낸다. 이들과 항상 함께 하는 유일한 것은 수능 문제집뿐이다.

 

친구?  교실, 학원, 독서실에는 자신처럼 공부만 하는 친구들이 있지만 함께 놀 수 있는 시간이 없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옆에 있는 친구는 경쟁자다. 그 친구들보다 높은 성적을 받아야만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 공부한 내용들이나 수능시험에 도움이 되는 중요한 정보를 서로 공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친구들 간의 정보 공유는 자신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손해라고 생각한다. 이렇다보니 동일한 공간 속에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는커녕 어떻게든 남들보다 앞서려는 욕심에 서로 눈치만 볼 뿐이다.

 

아이들 간의 경쟁심은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부모들의 욕망에 제대로 맞물려서 형성된 것이다. 특히 IMF 외환위기의 여파를 피부로 느꼈으며 그 후에 등장하게 되는 개방과 경쟁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를 목격한 지금의 장년층은 전보다 더 경제적 이익을 누리고 싶어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 한다고 해서 쉽게 돈을 벌 수 없다. 개인의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서라면 남들보다 더 앞서가야 했다. 이른바 우리나라 사회에 경쟁 체제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교육에도 신자유주의 원리가 도입되면서 경쟁교육이 점차 강조되기 시작하면서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경쟁 체제에 물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의 모습은 오히려 부자가 되기능커녕 먹고 살기도 힘들 정도로 악화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여기저기서 불만의 소음이 나오고 있는 중이다. 신자유주의가 부추긴 부의 욕망은 그것을 바라는 서민들의 삶과 마음을 더욱 더 옥죈다.

 

 

 

 

 '연대, 소통 불능',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우리 사회

 

 

 

 

 

출처: 한국경제

 

 

서로 의사소통이 안 되도록 독립된 밀폐공간에 갇힌 두 죄수 A와 B에게 각자 똑같은 제안을 한다. 만약 둘 다 순순히 범행을 자백하면 비교적 가벼운 형벌이 내려질 것이며 한 사람은 순순히 자백했는데 다른 사람이 부인한다면, 자백한 사람은 정직에 대한 보상으로 석방이 되며 대신에 부인한 사람은 무거운 형벌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둘 다 부인한다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똑같은 형벌을 내릴 것이라는 내용이다.

 

만약, 이 두 죄수가 같은 장소에서 함께 심문을 받는다면 서로 눈짓을 주고 받아 둘 다 범행을 부인함으로써 가장 가벼운 형벌만 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두 사람 사이에 의사전달이 전혀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은 최상의 시나리오가 되는게 쉽지 않다. 만약 상대편 죄수가 자백하지 않는다는 확신만 있으면 동지의식을 발휘해 같이 버티겠지만, 문제는 그가 어떻게 할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데 있다. 자신은 그를 믿고 버텼는데 그가 자백을 해 버렸다면 자신은 무거운 형벌을 받게 되는 억울한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이며, 이 상황은 마치 두 죄수가 하나의 잔인한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경쟁을 강조하는 입시 교육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회 전체가

소통과 연대를 하지 못한 채 치열하게 경쟁만을 고집하는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두 죄수가 최악의 상황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결정적으로 두 사람 다 함께 가벼운 형벌에 처할 수 있는 대안을 선택하기 위한 일말의 합의를 도출할 수 있는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폐쇄적인 상황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좀 더 유리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타심보다는 이기심을 작동하게 된다.

 

정태인 성공회대 교수 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은 경쟁 체제로 이루어진 입시 사교육의 현장을 죄수의 딜레마로 비유하고 있다.

 

 

 

한번 볼까요. 여러분이 지금 여기에 다 빠져 있어요. 사교육을 살펴봅시다. 모두 사교육을 하지 않는 게 제일 유리해요. 상대방이 사교육을 하지 않는 경우, 여러분은 어떻게 할까요? 다 사교육을 하지 않는데 내 아이만 사교육을 하면 성적이 올라갈까요, 안 올라갈까요? 그러면 사교육을 해요, 안 해요?  자, 걸려들었죠? (웃음) 여러분은 죄수의 딜레마에 걸려든 거예요. 모두 사교육을 해요. 그럼 내 아이만 사교육을 안 시키면 내 아이 성적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죠? 그러니까 사교육을 해요. 그래서 모두 사교육을 시키는 현상이 나타난 겁니다. 이제 죄수의 딜레마예요. 굉장히 강력해서 빠져나가기 힘들어요.   (pp 61)

 

 

 

경쟁만 강조하는 사교육은  '남들 다 하니까'라는 이유와 뒤처지지 않게 키우고 싶다는 학부모의 소박한 욕심이 자녀의 집중력 저하 현상을 조장하고, 학부모로서의 관계가 끊어지면 부모와의 연결고리까지 상실해버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상대방이 하고 있는 것을 똑같이 하지 못하게 된다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스스로 인식한다. 특히나 경쟁 체제 내에서는 남들이 하고 있는 것을 하지 못하면 경쟁에서 불리해질 수밖에 없으며 뒤쳐지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경쟁 체제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상대방보다 더 월등해져야 하지만 그러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상대방으로부터의 견제도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 끝에 원하는 목표를 이루어낼 수도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희생이나 비용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피 튀기는 경쟁 체제의 사회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지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를 받아들인다. 결국에는 실속 없는 경쟁만 이어지게 된다.

 

조금은 단순한 발상이지만 사회 구성원들 간의 소통으로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끝이 보이지 않는 경쟁 체제가 중단시킬 수 있다. 정태인 교수의 지적처럼 우리나라 아이들, 아니 우리나라 사회에서 살아가는 국민들은 서로 소통하며 협력하는 법을 모른다. 오히려 서로 돕고 살아가는 건 자신에게 손해만 가중되는 피곤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을 서로 이해해주고 양쪽 다 최선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협력적인 방안을 모색한다면 우리나라 사회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개선될 수 있다. 그러나 소통하고 연대하는 방법을 모른다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자신에게 손해만 들어오는 체제를 고집하게 된다.

 

 

 

 

 돈 많은 부자보다는 소통과 연대를 할 줄 아는 개념있는 사회인으로 만들자

 

 

정재인 교수뿐만 아니라 '시골의사' 박경철, 스타 강사로 이름을 날리다 지금은 교육평론가로 전향하여 우리나라 입시교육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있는 이범 등은 경쟁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한 목소리고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개선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소통과 연대, 그 기본적인 상식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기본적이면서도 아주 중요한 상식을 대중들이 자각해야 하는 것이다. 소통과 연대 불능의 사회가 유지된다면 결국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만 부를 독식하게 되고 탐욕의 집착은 내 옆의 이웃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며 그러한 상처는 언젠가는 나에게도 고스란히 돌아오게 되어 있다.

 

배가 난파당합니다. 어떤 사람은 구명조끼도 없이 그냥 떨어지고 어떤 사람은 구명조끼를 입고 있어요. IMF 때는 구명조끼를 입지 못한 사람의 손을 잡아주고 해서 전원이 살아남았는데 지금은 달라요?  나만 구명조끼를 입고 있으면 괜찮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면 나도 따라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왜냐면 보이지 않는 강철로 묶어 있어서 공멸합니다. 지금과 같은 대기업 중심의 혹은 약탈적 경제체제는 자기파괴적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박경철, pp 42)

 

 

 

이 책은 '개념' 있는 부모가 되기 위한 새로운 삶의 안목을 제시해주고 있다. 자녀들에게 돈 많은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보다는 자신뿐만 아니라 옆에 있는 상대방들과 함께 행복해지게 만드는 '개념' 있는 사회인으로 만들 것을 주문하고 있다. 소통 불능의 사회를 살고 있는 지금, 이러한 문제가 고질병으로 남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는 훗날 사회를 이끌어나가게 되는 자녀들을 잘 가르쳐주는 방법 밖에 없다. 자녀들에게 '공부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부모 입장에서는 쉬울테니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자' 라고 요구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것이야말로 자녀들의 인성을 위한 도덕교육이기도 하다.

 

정말 생각이 트인 부모라면 우리나라 사회를 대표하는 지성인들의 조언에 감탄하게 되며 바로 자녀들을 위한 교육으로 실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성인들이 제안하고 있는 이 기본적인 내용들을 그대로 실천하는 부모가 없으리라고 보지 않는다. 인간의 사고는 한 번 오랫동안 유지될수록 그것을 단번에 개선하고 변화를 적응하기가 어려워하는 특성이 있다.

 

이 책을 읽게 되는 독자층을 단순히 자녀를 둔 부모로만 국한시키기에는 책에서 말하고 있는 중요한 교훈들의 메리트를 감안한다면 너무나도 아깝다. 이제 막 사회를 이끌어나가고 부모가 되어 자녀를 두게 될 우리 젊은 세대들도 읽어도 무하다고 본다. 좋은 학교에 다니기 위한 선행학습은 좋지 않지만 부모가 되기 전에 미리 '개념 부모'가 될 수 있는 삶의 공부는 미리 해두면 좋다. '개념 부모'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를 포함한 사회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 미리 가슴으로 느낄 줄 알아고 실천할 줄 알아야 개념 있는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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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3-31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전에 두 번째 읽었어요. 이 책 참 좋아요.
읽다 보면, 특히 교육에 관한 부분은 정말 깊은 공감을 끌어내요.
몸에 와 닿는 실제적인 부분들이니까요 저한테는......과연 어떻게 실천하며 살아야 할는지 항상 고민되긴 하지만, 부모들도 제대로 된 공부를 해야 한다는 데 동감해요.
이 책은 제가 읽어보고 구입한 몇 안되는 책 중 하나랍니다.ㅎㅎ

cyrus 2012-04-01 13:4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 같은 젊은 세대들은 취업 때문에 결혼을 미룬다거나
포기하는 경향이 많은더 그렇다고 해서 교육 문제를 너무 무관심하는 것도
안 좋다고 봐요. 사람 인생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
저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저는 이 책을 도서관에 대출해서 읽었는데 내용이 너무 좋아서
구입하고 싶네요 ^^

잘잘라 2012-03-31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념 부모’되실 소질이 아주 아주 많~으신 cyrus님! 오늘 날씨 정말 끝내줍니다. 알라딘 서재에 계시지 말고 어디 데이트라도 나가주세요. 제발!

cyrus 2012-04-01 13:49   좋아요 0 | URL
어제 날씨가 너무 좋더군요, 그래서 외출은 하긴 했는데 과연 데이트는
언제 할지는 모르겠네요 ^^;;

2013-03-21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제3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많은 자연재해, 기근, 종족분쟁은 선진국의 정부나 국제원조 기구, 국제여론 등의 관심을 촉구하고 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희생자들은 점차 망각의 제물이 되고, 문제 자체의 존재마저 잊혀버리지. 그리고 깊은 고독 속에서 죽어가게 돼. 처음에는 강했던 국제적인 연대감도 시들해지고.

 

 - 장 지글러『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갈라파고스, pp 152 -

 

 

 

 

 

 

 

 

 조용히 닫혀버린 세계의 창문

 

 

 

 

 

 

2010년 10월 29일 새벽 12시 50분 경. 광산에 69일 간 매몰되었다가 기적적으로 구출된 33인의 칠레 광부들 이야기를 끝으로 MBC '김혜수의 W'은 방송을 처음 시작한 지 5년 만에 폐지되었다. 방송에서 'W'의 마지막 메시지가 전해졌다. 평화, 반전 그리고 희망이었다. 'W' 5년의 역사를 되짚는 영상물도 공개됐다. 프로그램 진행자 김혜수는 클로징멘트로 "W에 힘이 되고 싶었다. 짧은 만남, 시청자에 감사하면서도 죄송하다"는 말로 자신의 심경을 표현했다. 오래전부터 프로그램 폐지설과 관련된 갖가지 논란이 거셌던 것과 비교해 조용했다. 종영 사실은 방송 말미 진행자의 짧은 작별인사로 전해질 뿐이었다. 'W'는 늦은 심야 시간대에 방영되었고 시청률도 그리 높지 않았지만 매주 금요일만 되면 피곤함에 눈꺼풀이 무거워져도 꼭 '본방사수'했다. 단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빼어난 미모를 지닌 김혜수를 보려고 한 것은 아니다. 'W'는 세계 대륙별 곳곳에서부터 일어나고 있는 시사 소식들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었던 '세계의 창문'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본 해외 시사 프로그램 중에서 기존에 있었던 해외 시사 정보를 뉴스 형식으로 전달되는 진행 방식을 탈피한 수준 높은 교양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비록 낮은 시청률과 높은 제작비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MBC 경영진에겐 얼른 폐지하고 싶은 골칫거리였지만.  세계의 평화, 반전 그리고 희망에 대한 염원을 간직한 채 'W'는 늦은 밤 그렇게 조용히 사라졌다.

 

우연의 장난일까?  폐지된 ‘W'의 빈자리에는 '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이 채워지게 되었다. 그 당시 케이블 채널의 '슈퍼스타 K' 열풍을 공중파인 MBC도 무시 못했던 것이다. 오디션. 재능 있고 끼 많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꿈과 목표를 위해서 경쟁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경쟁' 시스템에서 살아남는 것은 쉽지 않다. 오디션에 참가한 100만 명의 인물들 중에서 단 한 사람이 최종 우승하게 되고 대중들의 관심과 인기는 우승자, 단 한 사람에게 집중하게 된다. ‘약육강식’의 냉혹한 논리가 지배된 지나친 경쟁주의를 강조하는 우리나라 신자유주의적 사회의 모습과 별 반 다를 게 없다. 'W'에는 신자유주의의 힘에 사로잡혀 고통과 억압을 당하는 제3세계 및 개발도상국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좀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자신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신자유주의'라는 화려한 옷을 걸쳐 입었지만 '자유'를 누리기는커녕 더욱 더 불평등, 빈곤 그리고 기아에 허덕여야 했다. 심지어 한정된 자원을 둘러싸고 같은 민족들끼리 서로 총을 겨눠야 하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연출하고 있다.

 

지금 (EBS를 제외한) 3사 공중파 방송 중에서 ‘W'만큼의 수준 높은 해외 시사 교양 프로그램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그나마 유일한 시사 교양 프로그램으로 남게 된 KBS 2TV의 '세계는 지금은' 마저도 존립성이 위태위태하다. 지금은 토요일 아침 8시에 방송되고 있지만 원래는 금요일, 주말을 제외한 평일에 밤 8시 20분부터 방영했다. 'W'보다는 시청자들의 눈에 띌 수 있는 좋은 시간대에 방영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저조한 시청률의 부진을 면치 못했나보다. 토요일 아침으로 개편된 이후 방송 분량은 전보다 축소되었다.

 

'W'의 폐지 그리고 '세계는 지금'의 개편 확정이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집중되어 있는 시청자들에게는 '아웃 오브 안중'에 불과할 뿐이다. 세계 지구촌의 사회 모습을 생생하게 안방으로 전달하는 공익성 프로그램들이 사라지거나 점점 방송 분량이 줄어드는 현상을 시청자들의 입맛에 맞는 방송 개편 그리고 방송 제작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방송국의 선택에도 잘못은 있지만 한편으로는 대중들의 부족한 인식 탓도 간과할 수 없다. 한반도 땅 덩어리를 넘어 저 멀리 바다 건너 세상에 대한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인식과 관심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 심지어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열악하다고 생각하는 아프리카 대륙까지도 'K-Pop' 열풍의 근원지인 한국의 문화를 주목하고 있는 반면에 정작 우리는 그런 나라들의 문화를 제대로 바라보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 관광, 여행 가고 싶은 동경의 국가 아니면 먹고 사는 데 있어서 자신과 별 상관없는 남의 나라일 뿐이다. 그나마 여행지로 가고 싶고 많이 알고 있는 나라는 미국 그리고 유럽 국가들뿐이다. 부르키나파소, 라이베리아, 르완다를 알고 있고,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드물다. 가난한 나라들을 찾아가 보거나 그런 나라에서 살아 보지 않은 우리는 그 곳에 사는 아이들을 죽어가게 만드는 영양실조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그들의 고통을 진심으로 함께 아파하지 못하는 것이다.

 

 

 

 

 남북 내에서 금기시되는 기아

 

 

 학교에서는 기아문제를 가르치는 일이 금기로 여겨지고 있는 건가요?

 

 

 맞아. 일종의 터부로 여겨지지. 이런 현상은 오래도록 지속되어 왔단다. 브라질의 조슈에 데 카스트로(전 FAO 이사회 의장)은 1925년에 이미 자신의 유명한 저서 『기아의 지리학』에서 이 '금기시되는 기아'를 언급했지. 그의 설명은 흥미로워. 사람들이 기아의 실태를 아는 것을 대단히 부끄럽게 여긴다는 거야. 그래서 그 지식 위에 침묵의 외투를 걸친다는 거야. 오늘날 학교와 정부와 대다수 시민들도 이런 수치심을 가지고 있단다.

 

 

 - 장 지글러『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갈라파고스, pp 82~83 -

 

 

장 지글러의『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단지 드라마에 출연한 현빈이 이 책을 서 너 번 읽었다고 해서 유명해진 건 아니다. 그동안 알려지지 못했던 기아 문제의 냉혹하면서도 현실적인 사정을 낱낱이 밝혀내고 있으며 이러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여러 가지 잘못된 원인들을 다각도로 소개하고 있다.

 

저자의 지적대로라면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나라 대중의 잘못된 시선도 기아 문제를 금기시하려는 인식의 영향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이라고 볼 수 있다.

 

초, 중, 고등학교를 통틀어 북한의 기아 실상을 소개하는 교육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북한의 아이들이 제대로 된 끼니를 먹지 못한 채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설명만 언급할 뿐 뼈만 보일 정도로 말라가는 북한 아이들이 담긴 영상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북한 주민들이 겪고 있는 참혹한 가난, 정부가 배급하고 있는 식량마저 손대지 못하는 기아의 실태를 우리나라 학생들이 제대로 알지 못할 우려가 있다. 비단 학생들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세계의 기아 문제를 파악할 수 있는 외국 시사 교양 프로그램의 폐지는 세계 기아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만들 수 있는 기회마저 차단하는 원인이 된다.

 

유엔 산하 세계식량계획(WFP)식량농업기구(FAO)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올해 굶주릴 위기에 처한 북한 주민이 300만 명으로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세계일보, 2011년 12월 1일자) 이 수치는 작년에 북한에서 굶주림에 시달린 것으로 파악된 600만명의 절반 수준으로, WFP와 FAO가 북한의 곡물 생산량이 작년보다 8.5% 증가할 것이라는 추산치를 반영한 것이다. 보고서 내용만 봐도 희망적이다. 하지만 최근의 정세를 감안한다면 죽한 민의 기아 문제가 보고서의 내용대로 낙관적으로 해결하기가 어려워보인다.

 

WFP 보고서에서 제시한 수치를 토대로 식량지원 규모를 결정한다. 곡물 생산량이 증가할 것으로 내다보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 규모가 지난 해에 비해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굶주림에 시달리다 죽어가는 북한 주민들이 발생하더라도 자체적 핵 억지력을 포기하지 않을 북한 정권의 노선을 고수하게 된다면 아무리 곡물 생산량이 증가한다 해도 기아 문제 해결에 있어서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리고 자연 재해의 피해를 무시할 수 없다. 홍수와 같은 자연 재해는 주민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곡물 재배에 피해를 줄 뿐더러 대량으로 난민이 발생할 시, 문제는 심각하다. 물 난리 속에 살아남아도 난민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굶주림에 의한 죽음뿐이다. 더욱이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백두산 화산 폭발 조짐에도 어떠한 피해 방지 대책도 강구하지 못하는 정권의 태도가 북한 기아 주민을 두 번 죽이는 꼴이 되고 있다. 북한은 올해 신년 공동사설을 통해 "현시기 인민들의 먹는 문제, 식량 문제를 푸는 것은 강성국가 건설의 초미의 문제"라면서 식량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했건만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의 길을 핵무기 문제와 결부시킴으로써 북한 내 기아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북한 기아 실상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고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조금이라도 보장해주지 못하고 있는 남한 정부나 굶주리는 주민들을 그대로 방치한 채 핵 무기 개발에 집중하고 있는 노선을 주민들이 '위대한 수령'의 은혜에 입고 있다는 날조된 언론으로 무마하려는 북한 정부나 상황은 다를 뿐 기아 문제를 금기시하는 인식과 태도는 비슷하다.  

 

 

 

 

 

 기아 문제를 외면하게 만드는 비합리적인 세계질서

 

 

풍요가 넘쳐나는 행성에서 날마다 10만 명이 기아나 영양실조로 인한 질병으로 죽어간다. 기아로 인한 떼죽음은 참으로 끔찍한 반인도적 범죄이다. 가장 약한 사람들이 제일 먼저 당하는 사회적 고통이 굶주림이다. 그래서 기아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해지는 구조적 폭력이다. 2005년 기준으로 10세 미만의 아동이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으며, 비타민A 부족으로 시력을 상실하는 사람이 3분에 1명꼴이다. 세계인구의 7분의 1이 심각한 만성 영양실조 상태에 있다. 120억명의 인구가 먹고도 남을 만큼 식량은 풍부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이를 확보할 경제적 수단이 없다. 세계시장에서 농산품의 가격은 투기의 영향을 받는다. 투기꾼들은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높은 식량가격을 감당할 수 있을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부자나라들은 자국의 농민들에게 최저가격을 보장한다며 남아도는 농산물을 폐기처분하거나 생산을 제한한다. 식량가격이나 생산량 결정, 식량의 공평한 분배에 구호기구는 속수무책이다. 세계시장만이 힘을 갖고 있고 그 시장은 잔인하다.

 

배고픔을 무기로 삼는 자들도 있다. 칠레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는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매일 0.5ℓ의 분유를 무상으로 배급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분유 시장을 독점하고 있던 다국적 기업 네슬레는 제값을 주고 사겠다는데도 협력을 거부한다. 미국이 사회주의 개혁 정책으로 미국기업의 이익이 침해받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미국은 칠레 군부의 쿠데타를 도왔고 아옌데는 1973년 대통령궁에서 최후를 맞는다. 부르키나파소의 젊은 장교 토마스 상카라도 인두세 폐지와 토지 국유화로 4년 만에 식량을 자급자족하게 만들었지만 역시 프랑스의 사주를 받은 친구에게 살해당했다.

 

이 두 사건은 '민영화, 규제철폐, 예산감축'이라는 신자유주의의 경전이 어떻게 해서 제3세계 어린이들의 영양실조와 높은 유아사망률로 이어지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제국주의적 자세를 멈추지 않는 선진국과 곡물자본이 굶주려가는 나라를 둘러싸고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곡물시장의 '균형가격'을 맞추고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 반군에 대한 지원도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는 기아의 비극이 실은 부패로 유지되는 그 나라 정부와 관료, 그리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거나 풍부한 자원을 갖고 있지 않으면 결코 관심을 갖지 않는 국제사회가 저지른 '범죄'라는 분석은 여러 사례로 명백하게 입증된다.

 

 

 자연도태설이 만들어 낸 잘못된 진보의 신화

 

 서구의 부자 나라 사람들을 사로잡는 신화가 있어. 그것은 바로 자연도태설이지. 이것은 정말 가혹한 신화가 아닐 수 없어. 이성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류의 6분의 1이 기아에 희생당하는 것을 너무도 안타까워해. 하지만 일부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불행에 장점도 있다고 믿고 있단다. 그러니까 점점 높아지는 지구의 인구밀도를 기근이 적당히 조절하고 있다고 보는 거야. 너무 많은 인구가 살아가고 소비하고 활동하다 보면 지구는 점차 질식사의 길을 걷게 될 텐데, 기근으로 인해 인구가 적당하게 조절되고 있다는 얘기지. 그런 사람들은 기아를 자연이 고안해낸 지혜로 여긴단다. 산소 부족과 과잉인구에 따른 치명적인 영향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죽지 않도록 자연 스스로 주기적으로 과잉의 생물을 제거한다는 거야. 강한 자는 살아남고 약한 자는 죽는다는 자연도태설, 이 개념에는 무의식적인 인종차별주의가 담겨 있어.

 

 -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갈라파고스, pp 38 -

 

 

 

성직자였던 토머스 맬서스는 1798년에 인구 법칙에 관한 내용이 담긴 『인구론』을 발표했는데, 세계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여 25년마다 두 배가 되지만, 식량의 증가는 산술서열을 따르므로, 가난한 가정은 산아제안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보조가 지원은 중단되어야 하고, 질병과 배고픔은 가슴 아픈 일이기는 해도 이 사회에 필수적인 기능을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책이 출판되자마자 유럽의 지배층에서 널리 읽혔고, 산업화 초기의 국민경제학자들과 기업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더 안타까운 것은 맬서스의 주장이 오늘날에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여 기아 문제에 있어서 왜곡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1859년,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을 통해 지구의 여러 가지 환경 요인이 변화함에 따라 생물 종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당시 유행하던 맬서스의 『인구론』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와 종이 변하는 원인을 설명했다.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나타나는 '적자생존의 원리'를 통해 종의 변화를 설명한 것이다. 이러한 생물학적 원리는 사회도태 논리에도 적용하게 된다. 허버트 스펜서는 '사회진화론'을 주장하여 자연에서의 적자생존처럼 사회에서도 사회도태가 발생하고 경쟁에서 생존한 자들의 역사는 진보해 나간다는 생각했다. 기아의 위협이 없는 국가에 사는 사람들은 지구촌 기아 문제에 대해 일정한 선입견을 가지게 된다. 자연도태설에서 비롯된 잘못된 '기아예찬론'은 기아 문제에 대한 책임회피일 뿐이며 비양심적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저자는 그러한 인식 속에 숨겨진 무의식적 인종차별주의가 기아 문제를 외면하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는 원인으로 보고 있다. 
 

 

 

 

 간단하게 해결할 수가 없을 정도로 심각해진 세계의 기아 문제

 

 

식물이든, 동물이든, 인간이든,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최우선 과제는 먹을 것을 섭취하는 일이다. 너무도 뻔한 말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굶주리는 기아의 어린이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식량을 지원해야 한다?  이 말 역시 기아 문제를 해결할 때 자주 나오는 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쉽지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끝없이 반복되고 있는 비극을 방관할 수만은 없다.

 

저자는 기아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각국이 자급자족 경제를 스스로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휴머니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원리의 구조를 개선할 수 있는 대안이 자급자족 사회인 것이다. 하지만 그의 대안은 현실성이 떨어져 보인다. 그리고 자급자족 경제를 고집하다가 국가 경제가 몰락하고 주민들을 굶주리게 만든 북한의 역사를 기억해본다면 썩 설득력이 있는 대안이라고 볼 수 없다.

 

그리고 이 책의 에필로그에는 기아문제를 대처할 수 있는 세 가지 방안들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에 '인프라 정비'에 대한 그의 설명은 다시 한 번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제3세계 나라들의 인프라를 정비하기 위해 시급한 지원이 필요하다. 그들에게는 자본, 도로, 적당한 종자, 비축식량, 농경 전문지식 등 모든 것이 부족하다.  (중략)  아프리카 남쪽에는 엄청난 땅들이 놀고 있다. 그 땅들은 투자가 없이는 경작되지 못할 것이다. FAO의 통계에 따르면 개발도상국에서 정상적으로 경작되는 땅은 7억 헥타르 정도인데, 작은 투자로도 경작 면적을 두 배 이상으로 늘릴 수 있다고 한다. 나무를 베거나 보호 구역에 손대지 않아도 말이다. 현재 북아프리카에서 사용하고 있는 농경 기술이 있다면 토지를 중대하게 손상(살충제를 많이 사용하거나, 다량의 비료를 사용하거나)하지 않고도 민감한 지역을 보호하고 환경 시스템의 재생력을 고려하면서 남쪽에서 경작지를 늘릴 수 있다.

 

 - 장 지글러『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갈라파고스, pp 167~168 -

 

 

 

 

기아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황폐한 자연 조건, 전근대적 농업 시스템이나 후진적 정권의 미숙한 국가 운영 등도 무시할 수 없는 배경이다. 아프리카 대륙에 식량을 손쉽게 운반할 수 있는 철도를 세우거나 인간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땅에 농작물들을 심는다면 주민들을 먹여살릴 수 있는 식량이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앞에서 지적한 자급자족 경제 대안의 허점처럼 '인프라 구축'을 강조하는 대안 역시 과거의 실례를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상황에서 비롯된 오류로 이루어져 있다. 19세기 후반 제국주의의 바람이 유럽 대륙을 휩쓸게 되면서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아시아, 아프리카 등의 세계로 진출, 자본 창출의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서강 열강들은 그 당시 미개한 아프리카 대륙을 개척하기 위한 사업 수단으로 철도를 건설하였다. 넓은 땅에 철도를 세워 놓음으로써 그 곳에서 자라나고 생산되는 식량들을 손쉽게 운반하기 위해서였다. 서강 열강의 기업들은 철도 건설 목적을 아프리카의 토착민들에게 식량을 쉽게 제공할 수 있고 배 불리게 먹을 수 있는 '공공 사업'이라고 말했찌만 거짓일 뿐이었다. 주민들을 위한 공공 사업은커녕 철도 건설에 수많은 토착민들의 노동을 착취했다. 결국에는 철도 사업은 식량 생산을 통한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지극히 기업을 위한 사업의 일환인 것이다.

 

세계 여론을 동원하면서까지 모든 경제 지배자들이 서로 합의 하에 기아 문제가 심각한 제3세계 국가의 경제적, 사회적 인프라를 지원한다는 것은 긍정적인 대안이 될 수도 있지만 단순히 기아 무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강대국들이 인프라 구축에서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협약과 회의를 통해서 인프라 구축을 마련하는 데 힘 쓰면 좋겠지만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의 사례처럼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

 

장 지글러의 대안은 기아 문제 해결에 있어서 분명히 현실에서 필요한 해결책인 것은 사실이나 벌
써 자본의 무시무시한 힘에 이끌려 간 채 '경제 불황'의 질환을 낳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현 세계의 상황을 봐서는 현실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는 낙관론에 불과하다. 그만큼 세계의 기아 문제는 모든 국가가 서로 머리를 맞싸매어 오랜 고민을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해져버린 것이다. 이제는 식량지원이 기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이라는 대안은 현실과 동떨어진 진부한 논리가 되어버렸다.

 

 

 

 

 가까이 있었지만 제대로 보지 못했던 불편한 진실

 

 

 

 

세계의 부를 탐식하고 있는 '사회지도층'들이 주원처럼 가난을 이해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텃밭이나 다름없는 '신자유주의' 비판서를 소파에 앉아

편안하게 읽게 될 날이 과연 찾아 올까?

 

 

 

콜럼비아 대학 최우수 졸업생으로 졸업한 수재에다가, 가난한 사람을 한 번도 가까이서 본 적이 없는 김주원(현빈 분).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만나온 모든 여자들과 달라도 너무 다른 길라임(하지원 분)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하자 그녀의 가난을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는『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을 서 너번 정도 읽어가면서 접해보지 못했던 '또 다른 현실'에 대해서 깊은 고뇌에 빠진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가상하지만 그녀의 가난은 책 한 권으로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평생 '몸'으로만 먹고 살아온 길라임과 달리 평생 '머리'로만 세상을 이해해 온 김주원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육체가 뒤바뀌는 기괴한 현상을 겪고 나서야 두 사람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성별의 몸을, 그것도 전혀 다른 계급과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진 상대방의 몸을 '입고' 살아가야하는 비현실적이고도 우발적인 사고가 역지사지의 상황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만약에 두 사람 간의 신체가 서로 바뀌지 않는 일이 생기지 않고 현실적인 이야기가 진행되었다면 주원은 라임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그녀에 대한 사랑을 쟁취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장 지글러의 책을 세 번 이상 읽는다고 해서 자신의 삶과 동떨어진 '가난'이라는 단어의 진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어쩌면 우리가 남의 '가난'에 대해서 어떠한 동정심이나 연민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최첨단의 미디어를 향유하고 있으면서도 어느 때보다도 서로를 '이해'하기 힘들어진 무관심과 몰이해에서 비롯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으로부터 멀리 있지 않은, 가까운 곳에 있는 '가난'의 비극을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어려움을 겪는 이웃이 있다는 것을 지각하지 못하는 무지에 너무 관대했다. 우리는 학교에서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은 전쟁이라고 배웠지 기아에 대해서는 배운 바가 없었다. 이런 무지를 확실하게 깨닫게 해준 책이다. 딱딱한 문체가 아니라 가슴으로 지구촌 최악의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출간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은 새롭게 대학생 필독 도서로 입에 오를 정도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주원처럼 단순히 '가난'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책을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주원 역을 맡은 현빈처럼 나름 폼 나게 독서하기 위해서 유식해 보이면서도 심각한 제목이 달린 이 책을 '읽은 척'하지 않길 바란다. 실제로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책은 '가난'에 대해서 소개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우리가 목도해야 할 전지구적인 사회 문제, 바로 '기아'인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텔레비전 속 다큐멘터리나 해외 토픽을 통해 볼 수 있는 '타인의 삶'만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불편하고도 잔혹한 진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기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그리 녹록치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비록 책에서 소개되는 사례들은 조금은 오래된, 세계적인 시차가 어긋나 있지만 시간만 다를 뿐 최악의 상황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책은 금융자본이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을 내세워 인권을 외면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세계의 불편한 진실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던 'W'의 창은 닫혀버린만큼 기아 문제의 심각성과 신자유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이 책만큼은 특히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 대학생들이라면 이 책을 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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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3-14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참 무지 맘에드는 리뷰를 만나는군요.
이 책은 고등학교 교실에서도 추천도서로 널리 알려져있습니다.
기아문제는 단순한 굶주림의 문제가 아니라
세게 경제가 굴러가는 작동원리인 것을 알게합니다.

누군가가 굶주려줘야 다른 누군가의 배가 부르다는
그야말로 인간 최악의 걸작품 인 것이죠.

저는 이 책을 읽고 기아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그 작동원리에 영향을 끼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정말 무기력감을 느꼈습니다.

언제 그 희망이 보일지...

cyrus 2012-03-16 01:07   좋아요 0 | URL
고등학생부터 시작해서 대학생들도 읽어보면 좋은 책이죠.
이 책뿐만 아니라 국내에 번역된 지글러의 다른 책들도 좋고요 ^^

저는 기아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식량 조달 문제가 이렇게 복잡하면서도
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하는 수 없이 기아 문제를
미화하여 낙관적인 전망을 내릴 수 밖에 없는 것도 안타깝고요.
무엇보다도 식량을 무기로 삼아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려는
정치권력들의 작태가 씁쓸했습니다.

stella.K 2012-03-15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김주원이가 콜롬비아 대학교 출신이었나? 웃겨.ㅋㅋ
이책 참 불편했어.ㅠ

cyrus 2012-03-16 01:09   좋아요 0 | URL
제가 그냥 지나치는 작은 정보도 기억하고 있는 편이에요.
웃긴 게 사실 장 지글러의 책을 읽는 현빈의 모습을 TV에서 본 것도
친구들이랑 곱창 먹다가 잠깐 봤던거에요. 제가 은근히 기억력이
좋은 편이거든요 ^^

그런데 막상 현빈처럼 책을 읽어보니 그리 편안하게 읽을 책이
아니더군요 ^^;;

아이리시스 2012-03-15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제목 기억 안나던 책이네요ㅋㅋㅋ 한비야님의 추천도서라 꽤 오래 전에 읽었는데도 충격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이후로 음식은 웬만해선 적게 먹고(꾸역꾸역 먹어도 결국 탈나거나 도로 나온다는;;) 조금만 해서 버리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실천도 노력해요!! 책 읽는 동안에는 쌀을 좀 싸들고 여행을 가야하나;; 가서 밥을 해줘야지;; 생각까지 들었던 슬픈 책이었어요.

cyrus 2012-03-16 01:13   좋아요 0 | URL
아~~~ 알겠어요! 아이리시스님 서재 댓글 남기다가 장 지글러의 책에
대해서 잠깐 언급한 적이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기아 문제를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게
불편했어요. 막상 기아 문제 해결은 이렇게 해야 된다고 말하는 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쉬운 일지만 한비야씨처럼 직접 그 곳에 가서
적극적으로 해결한다는 게 어렵잖아요. 최근에는 몇 몇 아프리카 국가에
여행을 금지하는 규정도 내리게 되었고요, 그나마 도움을 줄 수 있는게
유니세프 같은 곳에서 기금하는 것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거 같아요 ^^;;

차트랑 2012-03-16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암울하게 하는 것은
화폐전쟁의 쑹홍빈은 유니세프마저도 첨단 경제 저격수의 일부라더군요
제가 아는 학생 중 하나가 유니세프에서 일하는 꿈을 가지고 있는데...ㅠ.ㅠ
정말 이거..ㅠ.ㅠ

하긴 케인즈가 세상을 더 굶주리게하는 데 앞장서는 인물인데
말다했지 뭡니까요

그나저나 그 기억력,
쩜 많이 부럽습니다 ㅠ.ㅠ
 
바보의 벽
요로 다케시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올해의 바보'는 이미 따놓은 당상

 

한 해가 저물 무렵엔 가끔 언론매체와 단체에서 '한 해 동안 가장 큰 논란을 부르거나 화제의 중심에 섰던 인물 또는 단체'를 관행처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다. 제목과 의미만 놓고 본다면 사회적으로 논란이 있었던 인물들을 비꼬는 듯한 의도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들을 시상하거나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우리의 자각을 다지자는 의미가 강하다. 지나 간 잘못을 훌훌 털어버리고 새로운 한 해에는 이제 다시는 그런 인물들이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염원도 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외국처럼 사회적으로 가장 논란이 되었던 인물을 직접적으로 선정하는 것은 없지만, '올해의 사자성어', '올해의 망언' 등을 통해 한 해동안 문제의 인물들이 펼친 활약(?)을 간접적으로 부각시켜준다.

 

우리나라도 외국처럼 작년 한 해를 빛내 준 '올해의 인물'을 뽑으라고 한다면 단 명만 선정하기에는 너무 적다. 선정 후보를 들자면 안철수 소장부터 시작해서 개그맨 최효종을 법적으로 고소하다가 도리어 대중들로부터 망신만 당했던 강용석 전 의원, 일명 '따먹수'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춘향전'을 왜곡한 발언을 했고 119 상황실의 소방관들에게 경기도지사로서의 위엄을 드러내는 데 고집했던 김문수 그리고 야당과의 상의도 없이 국가의 중대에 걸린 FTA를 날치기한 한나라당(아니다. 이제는 새누리당이다) 그리고 MB. 그야말로 후보들이 남긴 업적들이 쟁쟁하다. '올해의 인물'이라는 단어만 보자면 한 해동안 대중들이 기억해야 할 좋은 활동을 한 인물들이 선정되어야 당연하거늘 우리에게 씁쓸한 웃음과 분노를 안겨 준 세 사람들 중에서 올해를 빛낸 인물을 선정해야 된다니 영 마음이 개운치가 않다.

 

차라리 '올해의 인물' 대신에 '올해의 바보'라고 하는게 선정 의도에 가장 부합할 거 같다. 일반적으로 바보의 의미는 가정이나 사회 안에서 무용지물인 대상 또는 존재를 가리킨다. 하지만 요로 다케시에게 '바보'란 명석한 두뇌를 가지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단순한 바보로서의 의미보다는 자신이 알고 싶어하지 않는 것에 대해 스스로 귀를 닫아버리는 사람을 가리킨다.

 

요로 다케시가 제안한 '바보'의 의미를 우리 사회와 부합한다면 '올해의 인물' 세 명의 후보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상대방의 주장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채 자신의 주장만 고집하려는 경향이 있다. 아직 흑룡이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2012년이지만 벌써부터 '올해의 바보'가 되려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법원에 고소하는 것을 즐긴다는 강 전 의원은 타깃을 박원순 서울시장과 군 복무 면제 경력이 있는 그의 아들에게 향했지만 검사 결과 발표로 인해 또 한 번 '바보'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강 전 의원보다 남의 말 듣지 않는 더 한 '바보'가 있으니 바로 MBC의 김재철 사장이 아닐까 싶다. 정상적인 방송 운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김 사장의 사퇴을 요구하는 총 파업 사태가 장기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이유는 두문불출하면서 노조들의 얼굴을 마주하면서 대화를 하지 않으려는 사장의 뚝심 있는 고집에 원인이 있다. 아직 2012년 후반기가 많이 남아 있고, 또 한 번 정치계의 '바보'들의 활약이 예상되기에 벌써부터 선정을 운운하기에는 이르지만 방송 파업이 장기화가 된다면 김 사장이 '올해의 바보'로 선정되는 것은 따놓은 당상이다.

 

 

 

 

 똑똑한 사람들은 왜 '바보'가 되는가?

 

남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게 되었는데 한 여성이 임신에서 출산까지 겪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여주고 난 후, 남녀 대학생들의 반응과 대답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조사 결과, 남학생과 여학생의 대답은 서로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 여학생들은 대부분 "다큐멘터리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내가 모르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며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지만 남학생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다. 전혀 새로운 게 없다"며 따분해하는 반응 일색이었다.

 

요로 다케시의『바보의 벽』에 소개된 실험 사례인데 여기서 우리 사회에 왜 똑똑한 사람들 중에 간혹 '바보' 한 두명이 있는지 알 수 있다. 남녀 학생들 간에 서로 다른 대답이 나오는 이유에 대해서 다케시는 남자는 출산에 대해 공감하고 싶은 의지가 없기에 여자처럼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없고, 발견하려는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결국 우리 사회의 정치인 혹은 지성인들을 비유하자면 이들은 미리 알고 있든 간에 자신이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미리 차단해 버리고 아예 상종도하지 않으려는 모습과 유사하다. 이러한 상태를 만드는 것을 다케시는 '바보의 벽'로 비유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바보의 벽'으로 인해 상대방의 주장을 귀담아 듣지 않으려고 하며 심지어 그들과의 대화조차 함께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해부학 전공자답게 인간이 스스로 '바보의 벽'을 만들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우리 머릿속에 있는 뇌를 주목하고 있다. 뇌는 지식, 환경 등 다양한 존재 대상에 대해 익숙함을 느끼게 된다면 지루해하는 성향이 있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과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뇌의 영향력을 인지하지 못한 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한 습성에 익숙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사고의 습성을 수식화하는 내용이 이채롭다. 뇌에 들어오는 정보를 x라 하고 그에 대한 반응을 y라고 하면 'y= ax'가 된다. '마음의 문의 열림 정도' 또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도' 등으로 다양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편해지고 싶으면 뇌 속의 계수인 a를 고정시켜 두려는 경향이 있다. 익숙한 현상으로부터 얻게 되는 평안함과 안정감 그리고 낙관적인 사고와 감정은 나태함으로 변하게 되며 그러한 인간은 생각을 고정시켜 놓고 일원적 사고로 살아가게 된다. 이처럼 되도록 편하게 살고 싶어 하고 새롭게 고민해야 하는 것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스스로를 바보의 벽에 가두는 것이다.

 

그래서 '바보의 벽'은 똑똑한 사람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생활하면서 만들게 되는 생각의 장애물이다. '바보의 벽' 만들기에 너무 길들어져 있게 된다면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쉽게 믿어버리고 이면에 존재하는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으며 진실에 다가서려고도 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가지게 된다. 문제는 잘못된 태도가 우리가 생활하는 삶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바보의 벽이 전쟁, 테러, 종교간 분쟁 등의 사회 문제로 발전하는 원인이 된다. 종교에만 빠지는 바보가 되면 극단주의자가 되어 자신의 종교 이외 다른 종교는 모두 배척하게 되고, 이는 국가 간, 또는 종교 간 분쟁을 야기 시킨다. 그리고 그러한 분쟁과 갈등이 심화될수록 거기에 휘말리는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제3자의 대상 또는 집단들에게도 피해의 악영향이 끼칠 우려가 있다. 스스로 '바보의 벽'을 만들어 노조들과 어떠한 협상이나 대화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장의 고집 때문에 이에 반발하는 노조원들의 분노는 더욱 커지게 되었고. 방송국 내의 장기화된 갈등에 의한 피해는 MBC를 시청하는 국민들에게도 확산될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집단적 불통 극복하기

 

사회에 만연한 폭력과 편견과 위선 그리고 세상의 크고 작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런 벽 때문이며, 이 벽을 스스로 허물 수 있어야 비로소 나를 포함한 우리 사회가 변화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서운 것은 바로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도시화된 현대 사회를 이미 뇌화(腦化)된 사회라고 말한다. 그것은 의식중심 사회이며 정보중심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정보로 규정한다. 매순간 변화하는 생명체인 자신을 불변의 정보로 파악해 버린다. SNS의 영향력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고 정보를 공유할 줄 아는 '집단지능'의 시대가 도래되었다고 하지만 매일마다 새로운 기종, 새로운 기능들이 셀 수 없이 쏟아지고 있는 정보기술의 범람에 의해 사회는 점점 더 뇌화되어가고 있다.

 

현대인들은 각자 자신만의 트위터 계정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온라인 인적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방들에게 공개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들은 리트윗을 통해 거대한 망으로 이루어져 있는 인적 관계 네트워크에 따라 전달된다. 하지만 이러한 트위터의 기능은 자신의 의견을 독단적으로 고수하려는 수단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하물며 트위터 속 내용이 현상의 본질을 왜곡했다거나 사실과 전혀 다른 심각한 오류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오히려 잘못된 트위터의 사용이  '잘못된 정보들만 공유하는 네트워크'라는 오명 하에 검열 또는 통제 대상으로 만드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정보는 지식이 아니며, 지식의 양이 사유의 질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단답형과 수치와 뻔한 정답의 도출을 중시하는 오늘날의 교육은 당연히 사고력을 위축시키며 심지어 사고할 동기조차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만 아니라 자신과 서로 다른 상대방과의 소통마저도 불가능하게 되는 집단적 불통 사회가 형성된다.

 

저자는 세상과 사물을 '움켜쥐고 만져볼 수 없는 애매함'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자신의 인식과 판단이 항상 옳다고 오해한다. 평생동안 햐얀 백조를 봤던 사람들이 검은 빛깔을 띈 백조 한 마리를 보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명쾌하지 않고 애매한 세상의 속성 탓에 같은 사건이나 사물을 접했을 때 반응이 제각각인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자신은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으며 알려고 하면 모두 알 수 있다고 자만한다. 자신의 판단이나 생각이 틀릴 수 있다고 회의를 품는 법이 없다. 집단적 불통은 사회의 진보와 화합에 있어서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2010년에는 정의, 2011년은 복지가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었듯이 (지금 섣불리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2012년에는 '소통'이 강조되는 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는 게 아니라 소통을 통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더 나아가 갈등를 해결할 수 있는 상생의 대안을 만들 수 있다. 결국, 집단적 불통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우리는 모두 각자 가지고 있는 바보의 벽을 깨트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변화지 않는 나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변하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나'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매일, 매 시간 다시 태어난다는 생각으로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발전하면 급변하는 세상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더욱 발전할 수 있는 동시에 소통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이루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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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2-03-06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명박 정부는 바보의 벽으로 만리장성을 쌓아 놓고 있는 중이지요?...
이제 그벽이 무너지려나 지켜보고 있습니다.
조금씩 갈라지고 있는 것 같긴 한데...거기다 접착제를 갖다 들이부을까 걱정입니다.

cyrus 2012-03-07 16:03   좋아요 0 | URL
조그만 참으세요. 곧 MB 정부도 끝나가니까요 ^^
문제는 차기 권력자를 잘 뽑아야할텐데 말이죠 ㅎㅎ
 
공산당 선언 펭귄클래식 80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권화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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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ppy Birthday! 『공산당 선언』

 

2월 21일. 오늘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그것'의 생일이다. 오늘이 바로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공산당 선언』이 처음으로 세상에 등장한 날이다. (책의 출간을 '생일'이라고 표현하기에 어색하다. 차라리 '공산주의' 유령의 생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합하다. 문득 궁금한 점. '공산주의 유령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문장 하나만 써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잡혀갈 수 있는건가?)

 

연도수로만 따지면 정확히 164돌이다. (1848년에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이때부터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모든 유럽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신화에 갇혀진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져버린 지 21년이 지난 지금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들은 서점에 볼 수 있으며 인문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는 마르크스 사상은 여전히 연구대상 중의 하나이다. 아무래도 『공산당 선언』이 번역되고 읽혀지고 있다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뭔가 읽을 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라는 이름은 많이 들어봤어도 지금도『공산당 선언』을 읽어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정말로 마르크스 사상을 공부하거나 연구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잘 읽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마르크스가 직접 쓴 원전 텍스트보다는 간략하게 마르스크의 사상을 소개하고 있는 개론서로나마 접했을지도 모른다. 과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당당하게 『공산당 선언』을 읽는다면 그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자못 궁금하다. 어린 시절에 '공산당은 싫어요!'라는 문구를 귀가 아플 정도로 들었을 노년층들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지도. 어찌 보면 책 제목에 나온 '공산당'이라는 말 때문에 『공산당 선언』읽기에 대해서 막연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7, 80년대 민주화 운동이 한창 꽃이 피우던 시절에는 유신과 5공 독재 정권의 탄압 속에서도『공산당 선언』을 읽는 데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감옥에 갈 각오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민주화 시대가 찾아오고 냉전의 벽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음지에 숨어있던 마르크스는 드디어 햇빛을 볼 수 있다. 그동안 국내에게 몰래 유입되어 온 마르크스의 사상 및 사회주의 관련 책들이 대량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두려움 없이 '공산당'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우리 사회 속에는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책을 읽는데도 주위 사람들의 눈총은 여전하다. 심지어 작년에는 법원은『공산당 선언』을 포함한 국내에 번역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물들을 이적표현물이라고 판결했다. 여전히 법의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국가보안법 덕분인 것이다.

 

 

 

 

 '공산주의'의 반댓말은...?

 

혹자는 공산주의의 반대는 '민주주의'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전체주의'나 '독재'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부터 수많은 국민들에게 '세뇌'와 다름없을 정도로 주입시켜온 반공 이데올로기의 영향 때문에 민주주의에 반하는 의미로 받아들인 탓도 있지만 결정적으로는『공산당 선언』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것도 또 하나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취업 준비에 얽매여 사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지 못하고 있는 요즘 대학생들은 그러한 생각을 가지기가 쉽다.

 

아무나 지나가는 대학생에게 물어보라. 아마도 대부분은『공산당 선언』이라고 하면 민주주의에 반대되는 내용이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쓴 책이라고 생각할걸. 심지어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생전 처음 들어 본 것처럼 여겨지는 학생도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정확히 모르는 건 이해가겠다만 고등학생 윤리나 사회 교과서에 등장한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데 모르고 있다는 것은 젊은 세대들 중에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이가 드물다는 점이다.

 

공산주의의 반대말을 정확하게 꼬집어 말 할 수는 없지만 굳이 반대되는 개념을 꼽으라면 '자본주의'가 적당하다. 『공산당 선언』을 직접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책은 민주주의를 반대하고자 쓴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사회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부르주아지에 대한 반대를 기표 삼아 공산주의의 방침을 세상에 공표한 글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짚어내다

 

 

특정 사상이 담긴 고전이라고 하면 내용이 딱딱하고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거기에다가 글자만 빽빽하게 적혀 있고 베개 두께만한 분량이라면 고전 읽기를 지레 겁먹기 마련이다. 하지만 『공산당 선언』은 생각보다 분량이 많지 않다. (국내에 번역, 출판된 수많은 텍스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100 페이지 채 안 되며, 50페이지도 넘지 않는 분량이다.

 

『공산당 선언』이 출간되었을 당시, 산업혁명으로 인해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있을 19세기 중반의 유럽사를 이해하고 있다면 이 책을 읽고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한다. (혹은 마르크스 사상을 소개하고 있는 개론서를 먼저 읽고 있는 상태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공산당 선언』은 사상서의 범주로 포함되고 있지만 일종의 역사 기록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산업혁명 이후의 19세기 근대 유럽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역사적 기록이 담긴 의미가 있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이 쓰인 지 수백여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가 비판하고 있는 산업혁명 이후의 유럽 사회의 모습은 현재 자본주의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채 무장된 신자유주의에 물든 대한민국의 사회 모습과 너무나도 유사하다.

 

마르크스는 사회 구조, 그 중에서도 계급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물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질 가운데 돈, 땅, 기계 같은 자본을 만들어내는 '생산수단'을 가졌느냐, 갖지 못했느냐에 따라 계급이 생긴다고 봤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생산수단을 가진 계급을 '부르주아지', 반대로 이것을 가지지 못한 계급을 '프롤레타리아트'로 나누었다.

 

부르주아지가 등장하기 전까진 이전의 사회는 타고난 신분에 의해 결정되는 계급사회였다.그러나 부르주아지가 등장한 후 신분은 '돈'을 가진 정도에 의해 결정되어졌다.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그 전보다는 사람들에게 더 큰 자유를 가져왔다는 점에서는 분명 성공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냉혹함에 대해 마르크스는 더욱 냉혹하게 비판한다.

 

마르크스가 말하고 있는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동으로 생산되는 자본의 이익을 프롤레타이라로부터 착취한다고 봤다.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사회적 지위를 내세워 좀 더 많은 자본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거래가 작용하도록 만들었다. 이들에게는 일을 하는 '인간' 노동자들마저도 자본을 생산하는데 적합한 '현금 계산'에 필요한 수단으로 생각했다.

 

 

부르주아지는 사람을 그의 '타고난 상전들'에게 묶어놓았던 잡다한 봉건적 끈을 갈기갈기 찢고, 사람들과 사람 사이에 벌거벗은 이해와 냉혹한 '현금 계산' 이외에는 다른 어떤 연줄도 남지 않게 했다. 부르주아지는 종교적 열광, 기사도적 열정, 속물적 감상 등의 성스러운 황홀경을 이기적인 타산이라는 차디찬 물속에 집어던졌다. 부르주아지는 사람의 인격적 가치를 교환가치로 해소시켰으며, 특허를 통해 얻은 취소될 수 없는 무수한 자유 대신에 단 하나의 파렴지한 자유, 상거래의 자유를 세웠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종교적, 정치적 환상에 의해 가려진 착취를 벌거벗고 후안무치하며 직접적이고 잔인한 착취로 대체되었다.

 

 - 마르크스 & 엥겔스 『공산당 선언』중에서, pp 231 -

 

 

 

'냉혹한 현금 계산'이라는 표현처럼 '차가운' 자본주의, 일명 신자유주의의 모습을 예견하고 있는 듯하다. 기업가로 대표되는 부르주아지는 나날이 부를 획득하고 있는 반면에 프롤레타리아, 즉 노동자들은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한 채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 모습이다. 불균형된 생산 거래 관계로 인해 사회적으로 약한 계층들이 불리할 수 밖에 없고 이들에게는 자신을 일자리에서 쫓아내버리는 자본주의의 얼굴이 너무나 차갑고 냉혹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않으며 자본을 획득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그 범위를 넓히려고 한다.

 

 

생산물의 시장을 끊임없이 확대해야 할 필요는 지구 표면 전체에 걸쳐 부르주아지를 쫓아다닌다. 부르주아지는 어디에서나 둥지를 틀어야 하고, 어디에서나 정착해야 하며, 어디에서나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부르주아지는 세계시장을 착취함으로써 모든 나라에서 생산과 소비에 범세계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반동들에게는 매우 분한 일이었지만, 부르주아지는 공업의 발아래에서 그것이 딛고 서 있는 민족적 기반을 파내어 버렸다.

 

 (중략)

 

부르주아지는 모든 생산도구의 급속한 개선을 통해, 엄청나게 용이해진 통신수단을 통해 모든 민족, 심지어는 가장 미개한 민족까지도 문명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들의 값싼 상품은 그들로 하여금 중국의 모든 성벽을 쳐부수고 외국인에 대한 '야만인들'의 극도로 완고한 증오를 강제로 굴복시킬 수 있게 하는 중포(重砲)이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민족에게 멸망을 원치 않거든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을 채택하라고 강요하며, 자신이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들 한가운데 받아들이라고, 즉 그들 자신 부르주아가 되라고 강요한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그들의 형상대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 마르크스 & 엥겔스 『공산당 선언』중에서, pp 232~233 -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지가 전 세계에 자신의 상품을 팔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예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종류의 욕망을 갖게 되었고, 자신들의 강요에 의해 부르주아지의 세력에 지배당한 '미개한 민족'도 그 욕망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한다. 결국에는 '부르주아지'의 강요된 욕망이 또 하나의 '부르주아지'들을 만드는 것이다. 전 세계를 '자본주의적 문명'으로 만들고자 하는 부르주아지의 욕망은 국가 간의 자유 무역 거래를 통해 하나의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하려는 범지구적 신자유주의의 모습이다.

 

이것을 마르크스는 '민족적 일면성과 편협함은 점점 더 불가능해지고 수많은 민족적 지역적 문학으로부터 하나의 세계문학'(pp 233)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세계문학'을 요즘 말로 바꾸자면 '세계화'라고 할 수 있다. 

 

1990년 대 초에 거론되기 시작했던 세계화 열풍에서부터 지금의 신자유주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동시에 경쟁의 이름으로 국가 간의 빈곤의 갈등을 부추겨 놓았다. 그 틈새로 밀려든 비참한 삶의 운명. 자본주의에 무장한 승리한 자본가들의 환호에 취해 그저 착취당한 채 빈곤한 삶을 살아가는 패배자의 아픔을 돌보지 않았다. 그러한 아픔을 뒤로 한 채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FTA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경제적 약소국가들에게 '부가 넘치는 자본주의 문명이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 채 강요하고 있다. 현대의 자본가들은 'FTA'의 형상대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공산당 선언』을 읽어야 하는 이유

 

마르크스는 이러한 부르주아지가 지배하는 사회를 개선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유재산의 철폐' 라는 정책을 제안한다. 사적 소유가 없어져야만 계급과 인간 사이의 차별이 근본적으로 사라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적 소유가 사라진다면 정말로 계급 간 차별이 사라질 수 있을까?

 

공산주의를 도입했던 국가들의 실제 모습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혁명을 통해 공산주의 사회를 이룩했던 스탈린, 모택동 등 정치가들은 물론이고 그런 국가들도 그 어떤 체제보다 더욱 인민들을 억압하는 심각한 폐해를 드러냈다. 그리고 3대 세습이라는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지도력을 고집하는 북한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공산주의 사상이 역사적, 과학적으로 증명해낸 하나의 법칙으로 귀결한 현실적 이론이라고 생각했지만 공산주의 사상 역시 문제점이 있는 유토피아에 불과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소상인과 소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로 굴러떨어지고, 부르주아 멸망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는 피할 수 없는 일이란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다.이러한 공산주의 유토피아의 공허한 헛점과 환상에만 고집한 공산주의 국가들은 하나씩 붕괴되거나 이전보다 더 가난한 국가로 전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회혁명 이론의 전제는 인간은 사회적 경제적 제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그리고 사회제도의 변혁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너무도 많은 억압과 부당한 자유가 바로 그런 사회변혁 이념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사상의 단순성과 편협성에 치우진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가 비판하고 있는 부르주아지 사회의 실상은 지금까지도 그러한 병폐가 만연하고 있는 지금도 곱씹어 볼만하다. 마르크스의 사상이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국가를 만들 수 있었고 사회 변혁을 꿈꾸던 젋은이들을 열광시켰던 이유는 단지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전투적 의지가 담겨진 문체와 문구만은 아닐 것이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부르주아지의 욕심 그리고 그들로 인해 경제적, 사회적인 면에서 프롤레타이라가 불리해져만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냉혹한 현실에 크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비판한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지금도 고민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다.

 

그리스를 중심으로 세계경제의 위기가 진행되고 있는 지금 『공산당 선언』을 다시 읽어보면,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이 적지 않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다. 계급투쟁이니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니 하는 교조적인 단어의 주술에 묶이지만 않는다면, 자본의 속성과 사회 불평등에 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비판이 수백 년 전에 쓰였다는 사실을 때때로 망각하게 할 정도다. 누군가는 이미 '실패'로 증명되버린 사상을 왜 읽고, 공부하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 작용하고 있는 사회에 대한 또 다른 시선을 바라볼 줄 알고,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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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2-22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론의 순수성은 마치 과학적 성과의 중립성과
매우 유사해보입니다.

과학적 성과를 어떤 용도로 사용하느냐가
문제의 본질로 오해받는 경우가 많은 것은
마치 공산당 선언의 순수성을
권력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때 발생하는 문제의 본질로
비추어지는 경우가 왕왕있다고 느끼게되니 말입니다.

최근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를 읽고 느낀 바도 이와 다르지 않더군요.
유학의 본질은 유학을 사용하는 사람의 목적을 위해 충실한 시녀노릇을 합니다.
그러나 그 용도가 유학의 본질은 아닌데 말입니다.

공산당선언이 그 사용자들에 의해 변질된 덕분에
공산당선언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선입견으로 작용하는 듯 하여 안카까운 마음이 들어
글을 드리게 되는군요.

같은 맥락에서
칼 막스가 죽기 전에
자신은 절대로 막시스트가 아니라는 말을 남긴 것은
바로 이러한 형질의 변화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2-02-22 19:22   좋아요 0 | URL
사실 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면 자칫 마르크스의 사상을
잘못 이해하지 않을까 내심 조마조마했어요. 글에서도 밝혔지만
어떠한 사상을 공부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개론서를 먼저 보고
원전을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마르크스 사상 관련 개론서를 많이 보지 못해서 이번 기회에
한 번 읽어보려고 해요. 부족한 부분이 많을텐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꽃도둑 2012-02-22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인간적인, 무엇보다도 인류애적인, [공산당 선언]!
세뇌당하고 붉은 색으로 덧칠해놓은 색깔부터 벗겨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뜻은 옳았으나 가는 길이 잘못되었던 공산주의...
다시 공부해서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

오잉?
저 낯익은 붕어빵에 소주병은?..

cyrus 2012-02-22 19:2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알고 있다고 허풍 떠서는 아니되는
일이지요 ^^

겨울 날씨에 맞게 지금까지 붕어빵 바탕화면 쓰고 있었답니다.
이거 바탕화면 작년 겨울부터 썼었어요 ^^

2012-02-22 2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23 2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김정아 2012-07-19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보고 갑니다 ㅎ
도서관에 가서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에요 ㅎ
<공산당 선언>이 성경 다음으로 널리 번역하여 출간된 도서랍니다 ㅎ
만약에 마르크스가 생전에 저작권 보호를 받았다면 아마도 평~생을 배부르게 먹고 살고도 남았을 거라는데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