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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의 벽
요로 다케시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올해의 바보'는 이미 따놓은 당상
한 해가 저물 무렵엔 가끔 언론매체와 단체에서 '한 해 동안 가장 큰 논란을 부르거나 화제의 중심에 섰던 인물 또는 단체'를 관행처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다. 제목과 의미만 놓고 본다면 사회적으로 논란이 있었던 인물들을 비꼬는 듯한 의도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들을 시상하거나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우리의 자각을 다지자는 의미가 강하다. 지나 간 잘못을 훌훌 털어버리고 새로운 한 해에는 이제 다시는 그런 인물들이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염원도 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외국처럼 사회적으로 가장 논란이 되었던 인물을 직접적으로 선정하는 것은 없지만, '올해의 사자성어', '올해의 망언' 등을 통해 한 해동안 문제의 인물들이 펼친 활약(?)을 간접적으로 부각시켜준다.
우리나라도 외국처럼 작년 한 해를 빛내 준 '올해의 인물'을 뽑으라고 한다면 단 명만 선정하기에는 너무 적다. 선정 후보를 들자면 안철수 소장부터 시작해서 개그맨 최효종을 법적으로 고소하다가 도리어 대중들로부터 망신만 당했던 강용석 전 의원, 일명 '따먹수'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춘향전'을 왜곡한 발언을 했고 119 상황실의 소방관들에게 경기도지사로서의 위엄을 드러내는 데 고집했던 김문수 그리고 야당과의 상의도 없이 국가의 중대에 걸린 FTA를 날치기한 한나라당(아니다. 이제는 새누리당이다) 그리고 MB. 그야말로 후보들이 남긴 업적들이 쟁쟁하다. '올해의 인물'이라는 단어만 보자면 한 해동안 대중들이 기억해야 할 좋은 활동을 한 인물들이 선정되어야 당연하거늘 우리에게 씁쓸한 웃음과 분노를 안겨 준 세 사람들 중에서 올해를 빛낸 인물을 선정해야 된다니 영 마음이 개운치가 않다.
차라리 '올해의 인물' 대신에 '올해의 바보'라고 하는게 선정 의도에 가장 부합할 거 같다. 일반적으로 바보의 의미는 가정이나 사회 안에서 무용지물인 대상 또는 존재를 가리킨다. 하지만 요로 다케시에게 '바보'란 명석한 두뇌를 가지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단순한 바보로서의 의미보다는 자신이 알고 싶어하지 않는 것에 대해 스스로 귀를 닫아버리는 사람을 가리킨다.
요로 다케시가 제안한 '바보'의 의미를 우리 사회와 부합한다면 '올해의 인물' 세 명의 후보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상대방의 주장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채 자신의 주장만 고집하려는 경향이 있다. 아직 흑룡이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2012년이지만 벌써부터 '올해의 바보'가 되려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법원에 고소하는 것을 즐긴다는 강 전 의원은 타깃을 박원순 서울시장과 군 복무 면제 경력이 있는 그의 아들에게 향했지만 검사 결과 발표로 인해 또 한 번 '바보'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강 전 의원보다 남의 말 듣지 않는 더 한 '바보'가 있으니 바로 MBC의 김재철 사장이 아닐까 싶다. 정상적인 방송 운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김 사장의 사퇴을 요구하는 총 파업 사태가 장기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이유는 두문불출하면서 노조들의 얼굴을 마주하면서 대화를 하지 않으려는 사장의 뚝심 있는 고집에 원인이 있다. 아직 2012년 후반기가 많이 남아 있고, 또 한 번 정치계의 '바보'들의 활약이 예상되기에 벌써부터 선정을 운운하기에는 이르지만 방송 파업이 장기화가 된다면 김 사장이 '올해의 바보'로 선정되는 것은 따놓은 당상이다.
똑똑한 사람들은 왜 '바보'가 되는가?
남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게 되었는데 한 여성이 임신에서 출산까지 겪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여주고 난 후, 남녀 대학생들의 반응과 대답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조사 결과, 남학생과 여학생의 대답은 서로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 여학생들은 대부분 "다큐멘터리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내가 모르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며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지만 남학생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다. 전혀 새로운 게 없다"며 따분해하는 반응 일색이었다.
요로 다케시의『바보의 벽』에 소개된 실험 사례인데 여기서 우리 사회에 왜 똑똑한 사람들 중에 간혹 '바보' 한 두명이 있는지 알 수 있다. 남녀 학생들 간에 서로 다른 대답이 나오는 이유에 대해서 다케시는 남자는 출산에 대해 공감하고 싶은 의지가 없기에 여자처럼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없고, 발견하려는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결국 우리 사회의 정치인 혹은 지성인들을 비유하자면 이들은 미리 알고 있든 간에 자신이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미리 차단해 버리고 아예 상종도하지 않으려는 모습과 유사하다. 이러한 상태를 만드는 것을 다케시는 '바보의 벽'로 비유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바보의 벽'으로 인해 상대방의 주장을 귀담아 듣지 않으려고 하며 심지어 그들과의 대화조차 함께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해부학 전공자답게 인간이 스스로 '바보의 벽'을 만들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우리 머릿속에 있는 뇌를 주목하고 있다. 뇌는 지식, 환경 등 다양한 존재 대상에 대해 익숙함을 느끼게 된다면 지루해하는 성향이 있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과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뇌의 영향력을 인지하지 못한 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한 습성에 익숙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사고의 습성을 수식화하는 내용이 이채롭다. 뇌에 들어오는 정보를 x라 하고 그에 대한 반응을 y라고 하면 'y= ax'가 된다. '마음의 문의 열림 정도' 또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도' 등으로 다양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편해지고 싶으면 뇌 속의 계수인 a를 고정시켜 두려는 경향이 있다. 익숙한 현상으로부터 얻게 되는 평안함과 안정감 그리고 낙관적인 사고와 감정은 나태함으로 변하게 되며 그러한 인간은 생각을 고정시켜 놓고 일원적 사고로 살아가게 된다. 이처럼 되도록 편하게 살고 싶어 하고 새롭게 고민해야 하는 것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스스로를 바보의 벽에 가두는 것이다.
그래서 '바보의 벽'은 똑똑한 사람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생활하면서 만들게 되는 생각의 장애물이다. '바보의 벽' 만들기에 너무 길들어져 있게 된다면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쉽게 믿어버리고 이면에 존재하는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으며 진실에 다가서려고도 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가지게 된다. 문제는 잘못된 태도가 우리가 생활하는 삶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바보의 벽이 전쟁, 테러, 종교간 분쟁 등의 사회 문제로 발전하는 원인이 된다. 종교에만 빠지는 바보가 되면 극단주의자가 되어 자신의 종교 이외 다른 종교는 모두 배척하게 되고, 이는 국가 간, 또는 종교 간 분쟁을 야기 시킨다. 그리고 그러한 분쟁과 갈등이 심화될수록 거기에 휘말리는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제3자의 대상 또는 집단들에게도 피해의 악영향이 끼칠 우려가 있다. 스스로 '바보의 벽'을 만들어 노조들과 어떠한 협상이나 대화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장의 고집 때문에 이에 반발하는 노조원들의 분노는 더욱 커지게 되었고. 방송국 내의 장기화된 갈등에 의한 피해는 MBC를 시청하는 국민들에게도 확산될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집단적 불통 극복하기
사회에 만연한 폭력과 편견과 위선 그리고 세상의 크고 작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런 벽 때문이며, 이 벽을 스스로 허물 수 있어야 비로소 나를 포함한 우리 사회가 변화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서운 것은 바로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도시화된 현대 사회를 이미 뇌화(腦化)된 사회라고 말한다. 그것은 의식중심 사회이며 정보중심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정보로 규정한다. 매순간 변화하는 생명체인 자신을 불변의 정보로 파악해 버린다. SNS의 영향력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고 정보를 공유할 줄 아는 '집단지능'의 시대가 도래되었다고 하지만 매일마다 새로운 기종, 새로운 기능들이 셀 수 없이 쏟아지고 있는 정보기술의 범람에 의해 사회는 점점 더 뇌화되어가고 있다.
현대인들은 각자 자신만의 트위터 계정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온라인 인적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방들에게 공개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들은 리트윗을 통해 거대한 망으로 이루어져 있는 인적 관계 네트워크에 따라 전달된다. 하지만 이러한 트위터의 기능은 자신의 의견을 독단적으로 고수하려는 수단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하물며 트위터 속 내용이 현상의 본질을 왜곡했다거나 사실과 전혀 다른 심각한 오류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오히려 잘못된 트위터의 사용이 '잘못된 정보들만 공유하는 네트워크'라는 오명 하에 검열 또는 통제 대상으로 만드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정보는 지식이 아니며, 지식의 양이 사유의 질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단답형과 수치와 뻔한 정답의 도출을 중시하는 오늘날의 교육은 당연히 사고력을 위축시키며 심지어 사고할 동기조차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만 아니라 자신과 서로 다른 상대방과의 소통마저도 불가능하게 되는 집단적 불통 사회가 형성된다.
저자는 세상과 사물을 '움켜쥐고 만져볼 수 없는 애매함'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자신의 인식과 판단이 항상 옳다고 오해한다. 평생동안 햐얀 백조를 봤던 사람들이 검은 빛깔을 띈 백조 한 마리를 보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명쾌하지 않고 애매한 세상의 속성 탓에 같은 사건이나 사물을 접했을 때 반응이 제각각인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자신은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으며 알려고 하면 모두 알 수 있다고 자만한다. 자신의 판단이나 생각이 틀릴 수 있다고 회의를 품는 법이 없다. 집단적 불통은 사회의 진보와 화합에 있어서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2010년에는 정의, 2011년은 복지가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었듯이 (지금 섣불리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2012년에는 '소통'이 강조되는 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는 게 아니라 소통을 통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더 나아가 갈등를 해결할 수 있는 상생의 대안을 만들 수 있다. 결국, 집단적 불통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우리는 모두 각자 가지고 있는 바보의 벽을 깨트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변화지 않는 나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변하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나'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매일, 매 시간 다시 태어난다는 생각으로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발전하면 급변하는 세상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더욱 발전할 수 있는 동시에 소통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이루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