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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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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늘날 불평등, 그 중에서 경제적 불평등은 전 세계적인 이슈다. 이는 그저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시장의 힘과 정치적 권모술수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생겨난다. 자본주의는 오랜 기간에 걸쳐 사회의 나머지 구성원들을 희생시키면서 상위 계층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움직여 왔다. 부자는 갈수록 부자가 되고, 부자 중에서도 최상층은 더 큰 부자가 되고 있다. 반면, 중산층은 공동화되어 가난한 사람이 갈수록 더 늘어나고 있다. 또한, 사회적 기회는 기득권자들이 독식하며 양극화의 심화와 승자독식이라는 불평등은 우리들이 해결해야할 공동의 숙제가 되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의 대가』에서 미국의 부자들이 담장 공동체(gated community)에 살면서 호화로운 혜택을 받는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다고 경고한다. 한국사회의 부자들 역시 ‘영훈국제중학교’ 입시 비리 사건에서 보았듯이 온갖 탈법으로 자신들만의 성을 쌓아가기에 바쁘다. 최근 ‘부유세’ 논란 속에서도 1%의 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이 나머지 다수의 약자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관념을 심어 주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우리를 설득한다. 이에 대해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렇게 말한다.

 

부자들의 부의 증가는 부와 소득의 위계에서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고사하고 부자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낙수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악명이 자자하지만 그나마도 갈수록 환상이 되어가고 있는 계층 상승의 ‘사다리’는 오늘날 점점 더 통과할 수 없는 수많은 격자들과 넘을 수 없는 장벽들로 바뀌어가고 있다. ‘경제성장’은 소수에게는 부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수많은 대중에게는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의 급격한 추락을 의미한다. (59쪽)

 

 

컵을 피라미드같이 쌓아놓고 위에서 물을 부으면 제일 위의 컵에 물이 다 찬 뒤에 그 아래에 있는 컵으로 물이 넘치게 된다. 이처럼, 대기업이나 수도권을 우선 지원하여 경제가 성장하게 되면 그 혜택이 중소기업이나 소비자, 지방에 돌아간다는 주장이 바로 낙수효과(Trickle Down)이다. 이런 논리라면 역사는 기득권이 영원히 보존되는 형국이 될 것이며, 아마 기득권자들은 이런 세상이 영구화되길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바우만은 이런 현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오늘날 불평등은 자체의 논리와 추진력에 의해 계속 심화된다.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도움이나 추진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외적 자극이나 압력, 충격 같은 것은 전혀 필요 없다. 오늘날 사회적 불평등은 역사상 최초로 영구기관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수많은 실패 끝에, 인간들은 마침내 영구기관을 만들어 작동시키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22쪽)

 

 

대기업이 잘 되면 덩달아 중소기업과 일반 소비자들한테도 혜택이 돌아간다는 이 ‘낙수효과’는 정부가 경제정책을 대기업 중심으로 가져가는 데 주요 근거가 됐다. 정부가 감세를 통해 대기업과 부유층의 부를 늘려주면 결국 총체적인 국가의 경기를 자극해 경제발전과 국민 복지가 향상된다는 것이다. 1990년 초 미국에서 시행된 이런 정책은 문제점이 드러난 지가 오래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이런 잘못된 믿음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 전면적인 경제 시스템의 교체 없이 박근혜 정부가 내세우는 ‘창조경제’, ‘경제민주화’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불평등 구조의 희생자들이 분노하기는커녕 부자 감세와 복지 예산 삭감에 동의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바우만은 잘못된 현상의 비밀을 우리가 암묵적으로 수용하는 거짓 믿음들에서 찾는다. 거짓 믿음은 '경제성장은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소비는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인간들 사이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다', '경쟁은 사회 질서의 재생산과 사회 정의의 필요충분조건이다'의 네 가지로 정리된다. 이런 믿음들 때문에 사회적 불평등은 자신을 스스로 영속화할 수 있는 능력에다 자신을 선전하고 강화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게 됐다.

 

그러나 바우만은 다시 자문한다. '길을 달리 하겠다고 마음을 바꾸기만 하면 될까, 우리가 길을 바꾸기만 하면 현실이 바뀌고 우리에게 행위를 명하는 현실의 냉혹한 요구들이 바뀔 것인가.' 결국, 사회적 불평등의 행진을 막을 방법은 거짓 믿음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는 '작가의 역할'을 예로 든다.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 엘리아스 카네티는 『말의 양심』에서 "진짜 작가로 만드는 요소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것에 책임을 지려고 하고 말의 실패에 속죄를 하려고 하는 갈망"이라고 썼다.

 

바우만은 "세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비합리적인 행위"라면서 "세계에 사는 주민들은 거주권을 매정하게 거부당하지 않는 한 예언자의 길로 들어서지 않는다"며 여전히 암울한 미래를 예견했다. 이어 "우리는 파국을 맞이해야만 파국이 왔다는 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면서 "그러나 시도해보지 않는 한, 거듭해서 더욱 더 열심히 시도해보지 않는 한 그 생각이 틀렸는지는 결코 알 수 없다"는 다소 힘 빠진 결론을 맺었다. 경제학적인 관점으로 바람직한 미래를 위한 비전을 제시한 스티글리츠의 『불평등의 대가』를 먼저 읽은 독자라면 바우만이 대안으로 제시한 내용이 추상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적 수사와 은유를 곁들여 ‘거짓믿음’의 실체를 분석하고 그것이 심화되는 과정을 분석한 데는 공감할 대목이 많다.

 

이제 불평등은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특단의 대책이 없는 한 현재의 불평등 문제는 완화되기는커녕 악화일로를 걷게 될 것이다. 시장에 대한 맹신을 거두고 정부 및 시민사회가 보다 더 적극적이고 명확한 의지를 가지고 대처해나갈 때 비로소 희망이 생긴다고 말한다. 현실을 직시해야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 사회 공통적인 문제에 대해 공감하고, 책임의 범위를 넓혀 나갈 수 있는 미래를 위해서는 먼저 인식의 전환을 가로막고 있는 시장경제의 ‘거짓 믿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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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자유]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폭력의 자유 -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
김종철 지음 / 시사IN북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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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방진 신문팔이

 

 

 

 

 

 

 

우리는 누구나 녀석을 알고 있었다. 녀석은 정말 이상한 신문팔이였다. “동아일보요, 서울신문이요, 중앙일보요, 민국일보요, 내일 아침 한국이요, 내일 아침 조선이요, 경향신문 있습니다. 신아일보 있습니다.” (238쪽)

 

 

 

이상한 신문팔이 소년은 매일 저녁 9시쯤 좌석 버스로 서대문을 지날 때면 각종 신문을 외쳐댄다. 비좁은 시내버스를 비집고 올라와서도 정작 신문을 파는 데는 정신을 쓰지 않는 듯이 보인다. 그는 신문을 파는 일보다는 자신이 외쳐대는 대사를 즐기면서 그것 때문에 웃음을 참지 못해 하는 건방진 신문팔이 소년이었다. 잠깐 버스가 서 있는 동안에 신문을 팔면서도 서두르지 않고 여유 만만하게 외쳐대는 그 목소리와 느긋하면서도 일정하게 이어졌다 끊어지는 대사가 특이했다. 그 자신 그런 대사를 즐기고 있음이 틀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본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

 

지난 가을 추석날 저녁. 어떤 사내가 밤 버스를 타야 하는데 그날은 걸어서 광화문에서 서대문을 걸어가게 되었다. 문득 버스를 보낸 소년이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달이 비친 밤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리는 것을 사내가 엿들었다. 버스에서 외쳐대는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추석날 저녁 이후 며칠 뒤부터는 그 소년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소년이 버스를 놓쳤거나 아니면 감기라도 걸려 못 나오는 것일까? 그런데 10여 일이 지나도 소년의 모습을 목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이 다시 나타났다. 그는 잠바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예의 웃음기를 잃지는 않았으나 무엇인지 허전한 표정을 지으며 버스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옆구리에는 신문 뭉치가 들려 있지 않았다. 신문도 팔지 않으면서 왜 버스 정류소에서 배회하고 있는 것인가.

 

사내 하나가 광화문에서 서대문까지 걸어서 가다가 그 소년을 만났다. 둘이 대면한 것이다. 사내가 소년에게 신문을 팔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소년은 민국일보라는 신문사가 폐간되어 버리는 바람에 동아, 서울, 중앙, 민국일보라고 외칠 때 리듬에 맞춰 부르는데, 민국 일보가 없어져서 어색해 버린다는 거였다. 그 소년은 민국일보가 폐간되자 신문을 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년은 신문 파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민국일보를 뺀 채 다시 외치는 연습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신문을 팔 것이라고 했다.

 

“말하나마나지요. 신문을 팔아야지요. 그렇지만 아직 소리가 그전처럼 신이 나질 않아요. 민국일보가 다시 나와 준다면 좋겠지만......” (247쪽)

 

 

소년이 다시 신문을 파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연습이 잘 안 되는 모양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도록 소년은 나타나지 않았고, 민국일보는 다시 복간되지도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 권력의 앞잡이가 된 신문들

 

이청준의 단편소설 <건방진 신문팔이>가 발표된 해는 1974년. 이때는 한국 언론의 암흑기였다. 유신 정권의 통제 속에 공정한 보도를 해야 할 신문은 강제적으로 폐간되었다. 민국일보처럼 정권에 밉보인 끝에 폐간하는 신문이 많았다. 일부 신문은 시퍼런 권력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서 그들의 앞잡이 역할을 했다. 권력의 힘을 믿고 폭력의 자유를 선택한 것이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만큼 민족 정론지를 자처한다. 자신들이 일제에 항거했으며,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화 불씨를 지폈고, 민주화 이후에는 권력 감시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불행하게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이런 일방적인 주장을 사실이라고 믿는다. 특히 젊은이들은 이들 거대 신문사들이 어떤 치욕스러운 역사를 감추고 있는지 짐작도 하지 못한다.

 

사실 역사를 돌아보면 한국 언론은 이미 일제 강점기부터 폭력의 자유를 마음껏 누려왔다. 강자인 일본 제국주의와 군사 독재에 언론의 자유를 포기하고 약자인 민중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유를 누렸다.

 

 

 

 

 

 

 

동아일보는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을 자신들이 항일 민족지였다는 주장의 근거로 내세운다. 1936년 8월 10일 독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를 지워서 게재한 곳은 몽양 여운형 선생이 사장으로 있었던 조선중앙일보였다. 그러나 그때는 인쇄 품질이 좋지 않아 총독부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11일 뒤 동아일보에도 일장기가 지워진 사진이 게재된다. 이길용 기자가 경영진 몰래 편집해서 올린 사진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송진우는 이길용 기자를 불러다 “성냥개비로 고루거각을 태워버렸다”고 호통을 쳤다. 이사장 인촌 김성수와 고위 간부들은 사진 한 장 때문에 신문사가 무기정간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전전긍긍했다.

 

 

보전(보성전문-고려대의 전신) 이사실에서 이 사실을 전화로 연락 받은 인촌은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 급히 동아일보사로 오는 자동차 안에서 인촌은 히노마루(일장기) 말소는 몰지각한 소행이라고 노여움과 개탄을 금할 수 없었다. (33쪽)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운 사건은 동아일보보다 조선중앙일보가 먼저라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정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 사람들의 뇌리 속에는 '동아일보가 먼저'라는 생각이 우세하다. 왜냐하면 동아일보가 창간기념일 등을 통해 그동안 '일장기 말소 사건'을 자신들의 최대 업적인 양 대대적으로 미화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1922년에 물산장려운동을 홍보했을 정도로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받았고, 수시로 폐간을 당하여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기부터 친일 행적을 보이기 시작했다.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김성수는 학병을 모집하는 글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쓰는 한편, 전쟁물자 지원에도 앞장서는 친일 활동을 하였다.

 

조선일보는 1937년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을 ‘아군’이나 ‘황군’으로 불렀다. 그해 12월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1면 머리기사로 ‘아군의 승승장구’를 대서특필했다. 친일신문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일제 기관지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폐간년도인 1940년까지 조선일보의 신년호 1면은 대부분 일본왕의 신년 하례행사와 총독의 연두사로 채웠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친일 행각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놀라운 건 해방 이후 이들의 생존 방식이다.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 논란이 거셌던 1945년 12월, 동아일보는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한다”는 왜곡 보도를 내보낸다. 실제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를 주장한 쪽은 미국이고 소련은 시기가 짧을수록 좋다는 의견을 냈다. 동아일보의 보도는 명백한 오보였지만 그 여파는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동아일보의 보도 이후 신탁통치에 찬성한 세력은 좌익으로 몰리고 친일파와 미국을 상전으로 모시는 외세의존 세력들이 오히려 지배계층을 재구성했다. 다수 국민들의 반식민지․반외세 감정을 포착해 ‘신탁통치는 또 다른 식민통치’라는 선전구호 아래 국내의 자주·민주세력을 매도하고 친일파를 다시 등장하게 만들었다.

 

민족 자주의식을 말살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데 앞장섰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해방 이후에 신문 보도를 통한 이념 갈등을 고착화시켰다. 일제의 앞잡이들이 해방 이후 미군의 앞잡이가 됐던 것처럼 이 신문들은 좌익을 적으로 내몰면서 일제 시절에 쌓은 권력 기반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민족지를 참칭하는 것은 참으로 후안무치한 일이다.

 

 

 

 언론탄압 속 한 줄기 희망, 동아투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반공을 명분으로 친일파 공화국의 탄생에 주도적으로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군부의 5·16 군사 쿠데타를 적극 지지했으며 유신독재를 노골적으로 찬양했다. 여기에 중앙일보도 찬양 일색의 기사와 논조를 보내기 시작했다. 정권의 폭압에 눈 감고 인권유린을 외면하고 역사를 왜곡했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을 폭도들의 반란으로 매도했고 전두환 정권이 내려 보낸 보도지침을 충실하게 따랐다.

 

박정희 정권이 구사한 가장 반민주적인 통치행위는 언론의 비판에 재갈을 물린 공작이었다. 유신독재 아래서는 수시로 긴급조치를 선포해 특정 이슈에 대한 언론의 비판적 보도를 금지했다. 언론 공작 중 가장 심한 것은 비판적 언론인의 강제해직과 광고탄압이었다. 특정 언론사가 눈 밖에 나면 그 광고주들을 겁박해서 수입원을 틀어막았다. 국가안보를 위해 설치한 중앙정보부 같은 국가정보기관이 광고주인 기업인을 겁박하는 야만적 공작을 담당했다.

 

1974년 젊은 동아일보 기자들 중심으로 10.24 자유언론 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중앙정보부는 이 신문에 광고를 게재해 온 기업들을 압박했다. 동아일보는 곧바로 광고 해약사태에 직면했다. 신문은 광고면을 백지로 둔 채 인쇄됐다. 정권 측의 광고탄압이 알려지자 전국적으로 성원광고들이 답지했다. 그러나 독자들의 성원광고는 지속적으로 장기화할 수는 없다. 그것으로 신문사의 광고 수입을 대체하기엔 턱 없이 모자랐다.

 

당시만 해도 동아일보사의 총수입은 대체로 구독료와 광고료가 반반 정도여서 지금에 비하면 광고 수입의 비중이 그다지 높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영상 광고료 수입은 매우 중요했다. 광고 수입의 숨통을 조이는 공작으로 신문사 사주 측은 결국 비판적 기자들을 해직시키면서 중앙정보부와 타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동아일보사는 130여명의 기자를 해직시켰다.

 

당시 동아일보에서 거리로 쫓겨난 기자들이 결성한 동아일보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는 언론 뿐 아니라 한국의 정치, 사회문화, 학계 및 교육 분야에서 실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1977~78년 엄혹하던 유신독재 말기에도 이들은 ‘동아투위소식’이라는 제3의 언론을 만들어 배포했다. 제도권 언론이 보도하지 않는 반독재 시위와 인권탄압 사건들을 게재했다. 정권 측이 가만 둘리 없었고 동아투위는 위원장과 총무 상임위원 전원이 불법 연행, 구속, 기소당했다. 동아투위의 등장은 한국의 언론사와 민주화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제도언론에 맞서 언론의 사명을 일깨워주었다.

 

 

 

 진보 신문도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동아일보, 한겨레신문 전직 기자였으며 현재 통아투위 위원장으로 활동 중인 원로 언론인 김종철은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거대 신문사들의 치욕스러운 역사를 공개한다. 그러나 진보 진영에 위치하는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역시 연륜이 느껴지는 원로 언론인의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이들 역시 공정한 언론의 사명과 어긋나는 행보를 보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은 이승만 정권 시절 조선일보, 동아일보보다 가장 많은 발행부수를 기록한 중도 노선 신문이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보도를 많이 내다가 잠시 폐간되기도 했다. 4월 혁명 이후 출범한 장면 내각 정권 시절에 복간되었다. 그러나 거대한 권력의 대세 앞에서 공정성과 중립성을 그대로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경향신문도 5.16 군사 쿠데타를 찬양하고 한때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장면 내각을 비판하는 논조를 펼쳤다.

 

한국 언론 보도의 가장 큰 문제점을 두 가지를 꼽자면 이념에 치우친 편향적인 논조를 펼친다거나 특정인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킬 수 있는 자극적인 상업주의적 보도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박연차 게이트 사건에 조중동 보수 언론과 경향, 한겨레 등 진보 언론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인신공격성 보도를 내놓았다. 그랬다가 노 전 대통령 사망 이후 보수, 진보 언론은 추모 보도를 내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추모 열기에 보수, 진보 언론이 합세했다. 노 전 대통령이 죽기 전까지만 해도 ‘노무현 죽이기’에 나섰던 언론이 ‘노무현 살리기’로 돌변한 것이다.

 

 

 

 

 ♣ 힘있는 사람이 두려워하는 신문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최근 종편채널 JTBC는 가장 영향력 있고 신뢰도 높은 손석희 보도담당 사장을 앵커로 내세워 사실·공정·균형·품위를 강조하는 뉴스의 시작을 알렸다. 종편채널에 재벌 기업들이 주주로 참여한 사실을 본다면 방송의 공정성을 기대하기 힘든 구조다. 과연 ‘언론-기업’으로 연결된 침묵의 카르텔을 JTBC가 깰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할 일이다.

 

‘힘 있는 사람이 두려워하는 뉴스’뿐만 아니라 신문도 나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권력과 대자본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공정한 사실을 보도할 수 있는 자유언론의 가치가 확립되어야 한다.

 

필화사건으로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당한 천관우 선생은 권력 앞에서 공정의 정도를 상실하고 무기력해지는 언론계를 ‘연탄가스 중독’의 비극이라고 표현했다. 연탄, 그리고 대놓고 기사 검열에 나서는 중앙정보부 기관원이 사라진 지 30여 년이 지났지만 한국 신문은 왜 ‘힘 있는 사람이 두려워하는 신문’이 되지 못하는가?

 

힘없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폭력의 자유를 누리던 시대는 지났다. 한국 언론이 ‘보이지 않는 힘’을 무서워한다면 균형성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보수와 진보 매체는 종합적인 시각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언론 보도가 위축된다면 공론의 장이 축소될 수 있다. 수용자의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위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진실성이 있는 보도를 위해 검증의 저널리즘을 실천한다면 언론 보도의 신뢰를 높일 수 있다.

 

한국 현대사와 함께했던 언론의 옹졸한 행보가 남긴 흔적을 보면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조중동에 대한 분노에만 그쳤다면 이 책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다. ‘힘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신문’은 있어도 힘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은 훌륭한 언론인들도 있었다. 그들의 업적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 역사 앞에서 대하는 우리들의 올바른 자세이다. 특히 언론인을 꿈꾸는 젊은이라면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의 책은 필독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프랑스의 원수 샤를 드골은 반민족적 행위를 일삼은 독일 나치 협력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기 시작했다. 이때 가장 먼저 법의 심판을 받은 피고인들은 언론인들이었다고 한다.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던 시기 때 독일을 찬양하고 연합군과 드골 세력을 비난했던 기록의 증거들 때문에 ‘히틀러의 나팔수’들은 처벌을 받게 되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이 있다. 문장의 힘은 무력(武力)을 무력(無力)화시킨다. 하지만 펜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자신의 심장을 날카롭게 찌를 수 있는 무시무시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진짜 언론인은 힘 있는 사람을 찬양하는 건방진 ‘나팔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힘 있는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정론직필의 ‘명사수’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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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노동 - 노동은 우리의 감정을 어떻게 상품으로 만드는가
앨리 러셀 혹실드 지음, 이가람 옮김 / 이매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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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웃으세요, 웃으면서 일하세요!

 

“일곱 살짜리 애를 업고서 눈길을 헤쳐 가며 공장에 데려가고, 데려오고 했어요. 아이는 하루 열여섯 시간씩 일했죠. 애가 기계 옆에 서서 일하는 동안 제가 꿇어앉아 음식을 떠먹인 적도 많았어요. 아이가 기계 옆을 떠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기계를 멈출 수도 없었으니까요.” 이 아이는, 증기기관에 석탄과 물을 공급하듯 일하는 동안 식사를 공급받는 ‘노동의 도구’였다. 벽지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는 어느 아이의 어머니가 1863년 영국 아동고용위원회에 제출한 증언을 칼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인용한 것이다.

 

<자본론>이 출간된 지 백여 년이 지난 뒤 미국 델타 항공의 승무원 연수센터 강당이다. “여러분, 근무할 때는 진심을 담아 웃어야 합니다. 미소는 여러분의 가장 큰 자산입니다. 나가서 그 자산을 활용하세요. 웃으세요. 진심을 담아서 웃는 겁니다. 진심으로 활짝 웃으세요.” 강의를 하는 조종사는 미소를 승무원의 자산이라고 말했다. 얼핏 보기에는 공장 노동에 시달리는 19세기의 어린이와 20세기의 승무원을 둘러싼 환경의 차이는 아주 큰 것 같다. 그러나 이 둘의 차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생각지 못한 공통점에 이르게 된다. 승무원의 경우 서비스를 제공할 때의 감정 상태도 서비스의 한 부분이다. 그들은 항상 웃으면서 일을 해야 된다.

 

 

 

 

 ♣ 정신을 병들게 만드는 감정노동

 

미국의 사회학자 혹실드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자신의 감정을 고무시키거나 억제하는 것을 ‘감정노동’이라고 불렀다. 그는 미국 항공회사의 승무원과 추심원을 대상으로 감정노동에 대한 연구를 하였으며, 타인의 기분을 좋게 하는 승무원이나 타인을 불쾌하게 하고 위축되게 만드는 추심원이 하는 일을 똑같이 상대방의 감정을 변화시키기 위해 수행하는 노동이라고 보았다. 항공 승무원과 추심원으로 대표되는 감정노동의 양극단을 묘사한 이유는, 이 두 극단 사이에 놓인 직업들에서 요구하는 감정적인 업무의 엄청난 다양성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미국 전체 노동자 중 3분의 1 이상이 감정노동을 포함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인정받지도 못하고, 존중받지도 못하며, 고용주들이 업무상 스트레스의 원인으로 고려한 적도 거의 없다시피 한 업무 차원을 경험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감정노동자 덕분에 공적 생활 속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날마다 완전히 모르거나 또는 거의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믿고 즐겁게 거래할 수 있는 것이다. 혹실드는 기업의 세계에 전면과 후면이 있다고 본다. 전면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후면은 그 서비스의 내용을 추심한다. 사회복지사, 주간 탁아 보모, 의사, 변호사는 비공식적인 직업 규범과 고객의 기대를 고려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감정노동을 감독한다. 감정노동에도 성별 차이가 있다. 남성이 종사하는 직업 중 감정노동을 포함하는 직업은 4분의 1 정도이지만, 여성이 종사하는 직업에서는 그 비율이 절반을 넘는다.

 

지속적인 감정의 억제, 감정 관리는 어떤 결과를 낳을까?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거짓된 자아를 지속적으로 연출하는 것은? 혹실드는 자아도취적 거짓 자아를 발전시키는 것이 남성에게 더 큰 위험이라면, 이타주의적 거짓 자아를 발전시키는 것은 여성에게 더 큰 위험이 된다고 말한다. 노동자들의 감정노동의 대가로 기업은 이윤을 거둬들이지만, 상업적 목적을 위해 내면의 실제 감정과 달리 특정한 감정을 표출하는 업무를 오래도록 하게 되면 노동자들은 자기 소원, 소외, 진정성 상실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고 한다.

 

 

 

 

 ♣ 감정노동자, 함부로 대하지 말자

 

과잉 친철은 누구에게나 부담스럽다. 대형마트에 들어서면 여성 점원은 예의 ‘고객님 어서 오십시오’라며 허리를 90도로 꺾는다. 일순간 고객은 혹시 아는 사람인지 눈길을 주게 된다. 인사와 말투는 깍듯하고, 미소 역시 안면 신경을 마비시킬 정도로 얼굴에서 지워질 줄 모른다. 처음 어리둥절했던 심사는 이내 어색하고 불편함으로 바뀐다. 고객과 점원 사이, 무언가 설명하기 힘든 감정의 충돌과 부조화가 일어난 것이다.

 

감정노동자들의 감정적·정서적 소진은 일차적으로 대기업들의 고객제일주의 탓이다. ‘고객은 왕’이란 슬로건에 맞추자면 접객 종사자들은 노예 아닌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상품의 질로 승부하는 고도 자본주의 시장에서 이러한 웃음과 친절 마케팅은 시대착오적인 게 분명한데, 여전히 상품의 조악함과 경영진의 무능을 엄폐하는 유효한 수단이 되는 서글픈 현실이다.고객은 또 어떠한가. 정말로 ‘왕’으로서 손색이 없는가. 종업원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듯, 고압적인 자세로 억지를 부리고 함부로 하대를 하며 스스로 못난 꼴을 보인 ‘진상’ 손님은 아니었는지, 반성은 하되 아니라고 자신하기는 어렵다. 기업주와 함께, 우리 모두가 감정노동자의 노동강도를 참을 수 없는 수위로 높인 주범인 것이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가족 관계에서도 어린아이가 아니면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다 드러내지는 않는다. 부모 또는 자식으로서 감정 관리를 하고 기본예절을 지킬 때 화목한 가정이 유지된다. 물론 감정노동자와 고객의 관계는 경제적 거래 관계라는 조건이 있지만, 거래에 합당한 만큼 주고받는 것이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겠는가? 아무리 돈을 준다 한들 거기에 욕설을 듣고 뺨 맞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지는 않을 터. 둘러보면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 중에도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감정노동과 그 치유에도 관심을 가져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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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아이들 (양장) - 히로세 다카시 반핵평화소설, 개역개정판
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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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은 처음엔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가 있었다는 보도를 전해 듣긴 했어도 대단한 사고가 아니라는 공식 발표가 곧바로 있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뒤로 들려온 소문에 따르면 일대는 완전히 공포의 도가니라는 것이었다. 하긴 이 병원에 수용된 아이들만 오늘도 벌써 오전 중에만 일곱 명이 죽었다. 대체 오늘 하루 동안에 몇 명의 아이들이 시체 처리실로 보내질 것인가.” (117쪽)

 

1986년 4월 26일, 당시 소련이었던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에서 원자로가 폭발하는 사고가 났다. 이 사고로 방사선 피폭 때문에 56명이 사망했다. 고도 방사선에 피폭된 사람은 20만 명. 이 중 2만 5000명 정도가 사망한 걸로 알려졌지만, 그린피스는 이 사건 때문에 20만 명이 사망했다고 집계하고 있다.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뒤에 회고하기를 체르노빌 사고 수습 비용이 소련 1년 예산과 맞먹었으며, 그 때문에 소련이 붕괴했다고도 언급할 정도니 사고의 피해 정도는 실로 엄청나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국제 원자력 기구(IAEA)가 정한 원자력 사고 척도에서 최고 등급인 레벨 7에 해당한다. 그러나 외양으로는 일단락 난 것처럼 보이는 체르노빌과 달리, 후쿠시마 사태는 진행 중이다. 지금 2년 전 그 때의 사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고가 남긴 위험한 흔적을 어떻게 처리할 지가 걱정해야 한다. ‘등급’이 모자랄지도 모르는 이 사태야말로, 현대 문명을 운용하는 인간들의 위기 감지 능력이 얼마만큼 경화되었는지를 증명한다.

 

문제는 방사능의 흔적을 모른다는 것이다. 오히려 일본 정부는 그 흔적을 지우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방출된 방사능은 보이지 않는 적이다.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며,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다. 보이지 않는 것과의 싸움. 없는 듯 우리 안에 존재하는 적. 그 없는 것에 오장육부에 침투하고 그 없는 것에 DNA 구조가 바뀐다. 그것은 인류의 그늘이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소설로 형상화한 일본 작가 히로세 다카시의 소설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보면 그 그늘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섬뜩하다. 원자력 발전소 간부인 아버지 안드레이는 사고 직후 결사대의 일원으로 뽑혀 발전소 뒤처리 작업 중에 사망해 영웅 칭호를 받는다. 소설은 안드레이의 아내 타냐, 그리고 아들 이반과 딸 이네사가 사고를 축소 은폐하기에만 급급한 당국에 의해 아무런 보호조치도 받지 못한 채 격리 수용된 상황을 그리고 있다. 방사능 피폭자의 주검은 참혹하게 묘사되어 있다. 1945년 히로시마 원폭 참상의 피해를 실감나게 그려낸 나카자와 케이지의 만화 『맨발의 겐』의 한 장면이 연상된다.

 

“그녀(타냐)가 내민 팔에는 이네사보다 어린 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안겨 있었다. 드문드문 남아 있는 머리카락, 얼굴 전체에 뒤덮여 부풀어 오른 검붉은 반점 무늬들이 그 아이의 고통스러운 최후를 말해주고 있었다. 목덜미에서부터 가슴까지 제 손으로 쥐어뜯은 손톱자국이 무수하게 남아 있었다.”

 

핵발전소의 안전성에 대해서 전문가들은 천재지변이나 폭격에 약하다는 점을 위험요인으로 든다.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발생할 경우 핵발전소는 곧바로 핵폭탄이 된다는 것이다. 방사능 물질은 냄새도 색깔도 없지만 한 번 누출될 경우 대량의 치명적인 피해를 낳을 뿐 아니라 후유증 또한 극심하다. 세계 곳곳에서 방사능 누출 사고가 일어났고, 체르노빌의 경우 러시아 등지에서 무려 30만 명이 방사능에 오염되었다. 그 외에도 핵폐기물의 안전한 저장과 처리가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어려우며, 온배수로 인한 열 오염 문제도 심각하다고 한다.

 

전 세계의 반핵 평화 운동가들의 반대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체르노빌 이후 전 세계의 핵발전소는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늘어났다. 그 와중에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일어났다. 원전사고가 발생한 지 2년이나 지났지만, 일본 정부의 대책 마련은 뒷북이다. 재미있게도 옆에 있는 한국 정부 역시 일본 정부의 모습을 따라간다는 점이다. 오늘 국립수산과학원은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오염수가 우리나라 바다에 유입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전문가들의 발표만으로 방사능에 노출되기 쉬운 우리나라는 과연 안전하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오염수가 유입되지 않는다하더라도 오염수가 남아있는 해역에서 자란 물고기들이 우리나라 연근해로 유입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보도의 진실이 명확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심은 더욱 커져만 갈 뿐이다.

 

히로세 다카시의 책은 쉽다. 초등학생들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책이 쉬운 이유는 전문가들이 어렵게 말하기 때문이다. 원전산업을 장악한 독점기업과 그들을 비호하는 국가는 대중이 원전의 악취 나는 비밀에 접근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때 당근을 받아먹은 전문가들은 원전산업의 훌륭한 방호벽이다. 더 재미난 것은, 전문가들조차 원전 사고가 추후에 확대될 피해의 정도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점. 체르노빌의 경우 국가는 피해자들을 분산시키고 의사들에게 함구령을 내림으로써 원전 사고와의 관계성을 영영 알 수 없게 만들었다.

 

보이지 않는 핵과의 싸움.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구가 지구를 리셋(Reset)하는 공포 앞에서 인류 문명의 출구를 찾아야 하는 시간은 점점 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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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 - 신판
조영래 지음 / 아름다운전태일(전태일기념사업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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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한 청년이 온몸에 석유를 뿌렸다. 그리고 불길에 휩싸인 채 달려가며 외쳤다. 영혼 깊숙한 곳에서 솟구쳐 나오는 고통과 진실의 절규였다. 몇 시간 뒤 작고 초라한 주검이 덩그러니 남았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이기적인 셈에 골몰하던 머리들, 따뜻한 지붕 아래 안온하게 잠자던 가슴들, 빈곤은 오로지 게으름에서 비롯된다고 믿는 마음들 곳곳에 불꽃이 움트더니 이내 활활 큰불로 번져 갔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며 죽은 청년 노동자의 삶은 그렇게 불씨가 되어 마침내 노동 해방의 거대한 불길이 된 것이다.

 

전태일.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였던 그는 1970년 11월 13일, 스물두 살의 젊음을 던지며 노동자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라고 외쳤다. 살인적인 작업 환경과 형편없는 저임금에 시달리며 죽어 가는 노동자들에게 그것은 구원의 목소리였고, 알면서도 모르는 체 외면했거나 도무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반성과 눈뜸의 쇠망치였던 것이다. 지금도 서울 도심의 자연을 소생시킨 청계천에 전태일의 뜨거운 마음은 다시 태어나 세상을 밝히고 있다. 청계천 6가 평화시장 옆 버들다리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전태일 동상.

 

오늘은 8월 26일. 전태일이 태어난 날이다. 우리는 ‘노동자가 누려야 할 세 가지 큰 권리’를 외치며 자신이 읽고 있던 근로기준법과 함께 한 줌 재가 된 그 겨울날만 기억하고 있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권리 투쟁의 흔적은 서울 평화시장에 우뚝 서 있지만 본적은 대구 출신이다. (신기하게도 전태일의 본적과 생일은 나랑 똑같다) 봉제공의 아들로 태어나 대구에서 잠시나마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전태일은 진정 공부하기를 좋아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대구에서 잠시 공민학교(집안 사정으로 인해 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남대문초등학교를 1년 남짓,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를 몇 달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지만 학업에 대한 열의는 대단했다. 그 때의 기억은 전태일이 남긴 수기 중에서 소년의 감성의 느껴질 정도로 해맑기만 하다. 22년이라는 짧은 생애동안 전태일에게 이렇게 행복했던 시절이 또 있었을까?

 

아홉 번째 서브까지 성공시키고 게임이 끝났습니다. 시합장엔 요란한 박수갈채와 승리의 개가가 퍼지고 나는 일약 오늘 이 게임에서 마스코트가 되었습니다. 맑은 가을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깊었으며, 그늘과 그늘로 옮겨다니면서 자라온 나는 한없는 행복감과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서로간의 기쁨과 사랑을 마음껏 음미할 때 내일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며 내가 살아 있는 인간임을 어렴풋이나마 진심으로 조물주에게 감사했습니다. (55쪽)

 

그는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 사회 밑바닥을 전전하며 굶기를 밥 먹듯 했지만 자신의 배고픔보다 동생들의 배고픔을 더 아파했다. 가난 때문에 또래들처럼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던 전태일은 이때부터 자신의 여린 마음으로 스며드는 가난에 의한 고통을 벗어나려는 의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가고 기억하기 위해 흔적을 더듬어야 할 전태일의 고향은 너무나도 조용하기만 하다. 이러다가 가난과 굶주림에 지쳐 흘린 소년 전태일의 눈물마저 잊을까봐 걱정된다.

 

 

 

 ♣ ‘똑똑한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바보’가 되다

 

전태일의 삶은 정말 뼛속깊이 가난했다. ‘밑바닥에서’. 그의 인생은 말 그대로 ‘밑바닥에서’ 시작한다. 한창 공부할 나이에 전태일은 서울과 대구 등을 오가며 돈벌이에 나서야 했다. 궁핍하기만 한 현실이 싫어 부산, 서울, 대구를 오가며 전전하지만 어디를 가도 배를 곯는 신세는 마찬가지였다. 신문팔이, 구두닦이, 담배꽁초 줍기, 아이스케이크 장사, 우산장사, 손수레 뒤밀이 등... 그 시대 돈벌이가 될 만한 일이란 일은 다 하며 눈 붙일 새 없이 열심히 살았건만 가난의 굴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아버지 어깨너머로 재봉틀 일을 배운 전태일은 열일곱 나이에 평화시장에 위치한 봉제공장의 시다(견습공)로 취직했다. 재봉틀사와 재단 보조를 거쳐 드디어 재단사가 됐다. 그러나 봉제공장에서 나름 높은 위치라고 할 수 있는 재단사가 되어도 노동환경은 너무나도 열악했다. 휴식 없이 장시간 노동해서 그의 손에 쥐어진 돈은 쥐꼬리만 했다.

 

실밥과 먼지, 소음이 가득하고, ‘햇빛을 잘 못 보는’ 공장. 어리게는 12살부터 시작하는 시다들과 19살부터 시작하는 미싱사들은 하루 14시간을 일을 하고 한 달에 두 번 쉬었다. 그러고도 점심 도시락을 싸오거나 사먹기가 어려웠다. 일하다가 병을 얻으면 치료가 아니라 해고를 당했다.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던 그는 이 ‘주인 있는 개보다 못한’ 이들의 현실을 지켜보며 조금씩 분노를 쌓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의 전태일은 순진했고 그런 그가 생각했던 해결책은 그 스스로 모범이 되는 재단사가 되어 여공들을 살피어주는 것이었다. 본인 역시 형편이 여의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도봉산 기슭에 살던 전태일은 버스 요금으로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주고 집까지 걸어 다녔다. 이따금 통금시간에 걸려 파출소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하지만 가진 것도 없는 그가 수백 번 호의를 베풀어봤자 달라질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은 불 보듯 뻔하다. 손바닥만한 물고기 한 마리가 거세게 밀려오는 물살을 거스르기 위해 애쓰는 꼴이었다. 작은 물고기가 아무리 애를 써봤자 거대한 물결은 움찔거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스스로 거센 물살에 밀려 한없이 떠내려갈 뿐이다. 그는 재단사가 되면 업주와 협의해 여공들의 처우를 개선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대화’로 근로조건을 개선한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아버지에게서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전해들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 그렇지만 누가 그것을 알아준단 말이냐? (전태일의 수기에서, 204쪽)

 

기업주들의 횡포 탓에 모범 재단사로서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그는 좌절한다. 그런 그는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다시 희망을 품게 되고 환희와 희열까지 느낀다. 법적으로 자신들의 노동시간과 휴일 시간, 건강 지침이 마련돼 있다는 사실, 태일이 꿈꾸던 작업 환경이 꿈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한 것임을 알게 되면서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는 어머니를 조르고 졸라 6개월 치 월급에 달하는 책을 사 밤새 읽고 또 읽는다. 제대로 공부를 해본 적이 거의 없어 밤새 읽어도 한 페이지를 넘기기가 쉽지 않았지만 근로기준법 조문을 해석하는 게 유일한 하루의 낙이었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지키며 노동자에게 인간다운 대우를 해주는 모범공장을 만들려는 사업계획을 세웠다. 실천방법은 다소 충격적이다. 그는 1970년 3월 17일 쓴 글에서 “나는 학력이 없으므로 대학 동창이 없다. 또한 집안 친척 중에도 나의 필요한 만큼의 자금을 될(댈) 만한 사람도 없다”“한쪽 눈을 사회에 봉사할 것이다. 눈을 사회에 봉사하고 나는 사회의 자금주를 소개받을 것”이라고 적었다. 같은 달 24일 한 일간지에 실린 실명자에 대한 기사를 보고 당사자에게 “저의 한쪽 눈을 김형 께 드리겠습니다.”고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생각이 맞는 재단사를 모아 ‘바보회’를 결성하기도 하고, 노동청에 건의를 하며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한 노력을 이어나가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동료 재단사들을 설득해 모임을 만들어나가기도 했지만 번번이 부(富)한 환경의 배부른 자들에게 기만당해야 했다.

 

반복해서 그려지는 태일의 좌절은 그가 왜 ‘오직 불타는 육신의 항의’로만 투쟁이 가능하다고 결정을 내렸는지를 설명해준다. 평화시장의 실상을 언론에 고발하는 데까지 소기의 성과를 거둔 그는 결심한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의 ‘호소’에 그쳐서는 안 되겠다고. 진정이니 호소니 청원이니 건의니 하는 따위와 근본적으로 다른 데모를 시작한 그는 가장 사랑했기에 가장 배신당했다 느끼는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치르기로 결심한다. 마침내 ‘바보’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품 안에 안은 채 불타올랐다.

 

 

 

 ♣ 친구여.....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전태일의 유서 중에서, 31쪽)

 

 

전태일이 산화한 지 65년이 지난 오늘,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이끌어 낸 학생운동, 노동운동의 역할과 그에 대한 평가는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심지어 대중과 여론의 냉소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개정판을 거듭하여 꾸준히 나올 정도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노동운동가 이전에 전태일이 가졌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 때문이다. 어린 소녀들이 빛이 들지도 않고 환기도 되지 않는 비좁은 공간에서 각성제를 먹어가며 장기간 노동에 시달리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것에서 시작한 그의 노동 운동은, 그 어떤 노동 운동보다 순수하고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125쪽) 전태일의 수기는 그의 정신이 시대를 뛰어넘는 생명력을 가지는 이유를 웅변한다.

 

전태일의 죽음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다. 그가 하루하루 거대한 현실의 벽 앞에서 투쟁했던 22년의 시간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억압과 착취의 관계가 이어진다한들 ‘인간 선언’이 되고자 한 그의 존재를 잊어선 안 된다. 신영복 교수의 말처럼 ‘우리는 그의 죽음보다 그의 삶을 먼저 읽어야 한다.’ 그의 삶을 아는 것이 죽음을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가 그토록 비장해지기까지 어떠한 서러움과 분노가 차곡차곡 쌓여왔는지, 한낱 개인에 불과한 그가 뿌리까지 썩어있는 사회를 마주하며 얼마나 많은 좌절을 겪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의 화형식은 그저 자극적인 하나의 이벤트로 느껴질 뿐이다. 단 한 번도 배불리 먹어본 적이 없는 불쌍한 가족들, 사랑하는 그 가족을 뒤로 하고 불길로 뛰어들기까지 안고 간 수많은 고민을 읽어내야만 비로소 ‘아름다운 바보’ 전태일을 제대로 만날 수 있다.

 

 

 

 

P.S.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읽을 때마다 어려운 법률용어나 한문이 나와 어려움을 느꼈을 때 똑똑한 대학생 친구 하나 있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가 바랐던 똑똑한 대학생 친구가 될 수 없지만 오늘 같이 뜨거운 무더위가 가라앉은 선선한 오늘만큼은 그의 생일을 글로나마 축하해주고 그의 흔적을 기억해주는 대학생이 되려고 한다.

 

 

태일이 형, 생일 축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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