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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 ㅣ 펭귄클래식 80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권화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Happy Birthday! 『공산당 선언』
2월 21일. 오늘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그것'의 생일이다. 오늘이 바로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공산당 선언』이 처음으로 세상에 등장한 날이다. (책의 출간을 '생일'이라고 표현하기에 어색하다. 차라리 '공산주의' 유령의 생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합하다. 문득 궁금한 점. '공산주의 유령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문장 하나만 써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잡혀갈 수 있는건가?)
연도수로만 따지면 정확히 164돌이다. (1848년에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이때부터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모든 유럽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신화에 갇혀진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져버린 지 21년이 지난 지금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들은 서점에 볼 수 있으며 인문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는 마르크스 사상은 여전히 연구대상 중의 하나이다. 아무래도 『공산당 선언』이 번역되고 읽혀지고 있다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뭔가 읽을 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라는 이름은 많이 들어봤어도 지금도『공산당 선언』을 읽어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정말로 마르크스 사상을 공부하거나 연구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잘 읽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마르크스가 직접 쓴 원전 텍스트보다는 간략하게 마르스크의 사상을 소개하고 있는 개론서로나마 접했을지도 모른다. 과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당당하게 『공산당 선언』을 읽는다면 그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자못 궁금하다. 어린 시절에 '공산당은 싫어요!'라는 문구를 귀가 아플 정도로 들었을 노년층들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지도. 어찌 보면 책 제목에 나온 '공산당'이라는 말 때문에 『공산당 선언』읽기에 대해서 막연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7, 80년대 민주화 운동이 한창 꽃이 피우던 시절에는 유신과 5공 독재 정권의 탄압 속에서도『공산당 선언』을 읽는 데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감옥에 갈 각오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민주화 시대가 찾아오고 냉전의 벽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음지에 숨어있던 마르크스는 드디어 햇빛을 볼 수 있다. 그동안 국내에게 몰래 유입되어 온 마르크스의 사상 및 사회주의 관련 책들이 대량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두려움 없이 '공산당'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우리 사회 속에는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책을 읽는데도 주위 사람들의 눈총은 여전하다. 심지어 작년에는 법원은『공산당 선언』을 포함한 국내에 번역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물들을 이적표현물이라고 판결했다. 여전히 법의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국가보안법 덕분인 것이다.
'공산주의'의 반댓말은...?
혹자는 공산주의의 반대는 '민주주의'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전체주의'나 '독재'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부터 수많은 국민들에게 '세뇌'와 다름없을 정도로 주입시켜온 반공 이데올로기의 영향 때문에 민주주의에 반하는 의미로 받아들인 탓도 있지만 결정적으로는『공산당 선언』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것도 또 하나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취업 준비에 얽매여 사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지 못하고 있는 요즘 대학생들은 그러한 생각을 가지기가 쉽다.
아무나 지나가는 대학생에게 물어보라. 아마도 대부분은『공산당 선언』이라고 하면 민주주의에 반대되는 내용이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쓴 책이라고 생각할걸. 심지어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생전 처음 들어 본 것처럼 여겨지는 학생도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정확히 모르는 건 이해가겠다만 고등학생 윤리나 사회 교과서에 등장한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데 모르고 있다는 것은 젊은 세대들 중에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이가 드물다는 점이다.
공산주의의 반대말을 정확하게 꼬집어 말 할 수는 없지만 굳이 반대되는 개념을 꼽으라면 '자본주의'가 적당하다. 『공산당 선언』을 직접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책은 민주주의를 반대하고자 쓴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사회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부르주아지에 대한 반대를 기표 삼아 공산주의의 방침을 세상에 공표한 글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짚어내다
특정 사상이 담긴 고전이라고 하면 내용이 딱딱하고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거기에다가 글자만 빽빽하게 적혀 있고 베개 두께만한 분량이라면 고전 읽기를 지레 겁먹기 마련이다. 하지만 『공산당 선언』은 생각보다 분량이 많지 않다. (국내에 번역, 출판된 수많은 텍스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100 페이지 채 안 되며, 50페이지도 넘지 않는 분량이다.
『공산당 선언』이 출간되었을 당시, 산업혁명으로 인해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있을 19세기 중반의 유럽사를 이해하고 있다면 이 책을 읽고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한다. (혹은 마르크스 사상을 소개하고 있는 개론서를 먼저 읽고 있는 상태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공산당 선언』은 사상서의 범주로 포함되고 있지만 일종의 역사 기록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산업혁명 이후의 19세기 근대 유럽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역사적 기록이 담긴 의미가 있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이 쓰인 지 수백여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가 비판하고 있는 산업혁명 이후의 유럽 사회의 모습은 현재 자본주의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채 무장된 신자유주의에 물든 대한민국의 사회 모습과 너무나도 유사하다.
마르크스는 사회 구조, 그 중에서도 계급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물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질 가운데 돈, 땅, 기계 같은 자본을 만들어내는 '생산수단'을 가졌느냐, 갖지 못했느냐에 따라 계급이 생긴다고 봤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생산수단을 가진 계급을 '부르주아지', 반대로 이것을 가지지 못한 계급을 '프롤레타리아트'로 나누었다.
부르주아지가 등장하기 전까진 이전의 사회는 타고난 신분에 의해 결정되는 계급사회였다.그러나 부르주아지가 등장한 후 신분은 '돈'을 가진 정도에 의해 결정되어졌다.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그 전보다는 사람들에게 더 큰 자유를 가져왔다는 점에서는 분명 성공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냉혹함에 대해 마르크스는 더욱 냉혹하게 비판한다.
마르크스가 말하고 있는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동으로 생산되는 자본의 이익을 프롤레타이라로부터 착취한다고 봤다.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사회적 지위를 내세워 좀 더 많은 자본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거래가 작용하도록 만들었다. 이들에게는 일을 하는 '인간' 노동자들마저도 자본을 생산하는데 적합한 '현금 계산'에 필요한 수단으로 생각했다.
부르주아지는 사람을 그의 '타고난 상전들'에게 묶어놓았던 잡다한 봉건적 끈을 갈기갈기 찢고, 사람들과 사람 사이에 벌거벗은 이해와 냉혹한 '현금 계산' 이외에는 다른 어떤 연줄도 남지 않게 했다. 부르주아지는 종교적 열광, 기사도적 열정, 속물적 감상 등의 성스러운 황홀경을 이기적인 타산이라는 차디찬 물속에 집어던졌다. 부르주아지는 사람의 인격적 가치를 교환가치로 해소시켰으며, 특허를 통해 얻은 취소될 수 없는 무수한 자유 대신에 단 하나의 파렴지한 자유, 상거래의 자유를 세웠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종교적, 정치적 환상에 의해 가려진 착취를 벌거벗고 후안무치하며 직접적이고 잔인한 착취로 대체되었다.
- 마르크스 & 엥겔스 『공산당 선언』중에서, pp 231 -
'냉혹한 현금 계산'이라는 표현처럼 '차가운' 자본주의, 일명 신자유주의의 모습을 예견하고 있는 듯하다. 기업가로 대표되는 부르주아지는 나날이 부를 획득하고 있는 반면에 프롤레타리아, 즉 노동자들은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한 채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 모습이다. 불균형된 생산 거래 관계로 인해 사회적으로 약한 계층들이 불리할 수 밖에 없고 이들에게는 자신을 일자리에서 쫓아내버리는 자본주의의 얼굴이 너무나 차갑고 냉혹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않으며 자본을 획득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그 범위를 넓히려고 한다.
생산물의 시장을 끊임없이 확대해야 할 필요는 지구 표면 전체에 걸쳐 부르주아지를 쫓아다닌다. 부르주아지는 어디에서나 둥지를 틀어야 하고, 어디에서나 정착해야 하며, 어디에서나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부르주아지는 세계시장을 착취함으로써 모든 나라에서 생산과 소비에 범세계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반동들에게는 매우 분한 일이었지만, 부르주아지는 공업의 발아래에서 그것이 딛고 서 있는 민족적 기반을 파내어 버렸다.
(중략)
부르주아지는 모든 생산도구의 급속한 개선을 통해, 엄청나게 용이해진 통신수단을 통해 모든 민족, 심지어는 가장 미개한 민족까지도 문명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들의 값싼 상품은 그들로 하여금 중국의 모든 성벽을 쳐부수고 외국인에 대한 '야만인들'의 극도로 완고한 증오를 강제로 굴복시킬 수 있게 하는 중포(重砲)이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민족에게 멸망을 원치 않거든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을 채택하라고 강요하며, 자신이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들 한가운데 받아들이라고, 즉 그들 자신 부르주아가 되라고 강요한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그들의 형상대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 마르크스 & 엥겔스 『공산당 선언』중에서, pp 232~233 -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지가 전 세계에 자신의 상품을 팔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예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종류의 욕망을 갖게 되었고, 자신들의 강요에 의해 부르주아지의 세력에 지배당한 '미개한 민족'도 그 욕망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한다. 결국에는 '부르주아지'의 강요된 욕망이 또 하나의 '부르주아지'들을 만드는 것이다. 전 세계를 '자본주의적 문명'으로 만들고자 하는 부르주아지의 욕망은 국가 간의 자유 무역 거래를 통해 하나의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하려는 범지구적 신자유주의의 모습이다.
이것을 마르크스는 '민족적 일면성과 편협함은 점점 더 불가능해지고 수많은 민족적 지역적 문학으로부터 하나의 세계문학'(pp 233)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세계문학'을 요즘 말로 바꾸자면 '세계화'라고 할 수 있다.
1990년 대 초에 거론되기 시작했던 세계화 열풍에서부터 지금의 신자유주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동시에 경쟁의 이름으로 국가 간의 빈곤의 갈등을 부추겨 놓았다. 그 틈새로 밀려든 비참한 삶의 운명. 자본주의에 무장한 승리한 자본가들의 환호에 취해 그저 착취당한 채 빈곤한 삶을 살아가는 패배자의 아픔을 돌보지 않았다. 그러한 아픔을 뒤로 한 채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FTA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경제적 약소국가들에게 '부가 넘치는 자본주의 문명이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 채 강요하고 있다. 현대의 자본가들은 'FTA'의 형상대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공산당 선언』을 읽어야 하는 이유
마르크스는 이러한 부르주아지가 지배하는 사회를 개선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유재산의 철폐' 라는 정책을 제안한다. 사적 소유가 없어져야만 계급과 인간 사이의 차별이 근본적으로 사라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적 소유가 사라진다면 정말로 계급 간 차별이 사라질 수 있을까?
공산주의를 도입했던 국가들의 실제 모습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혁명을 통해 공산주의 사회를 이룩했던 스탈린, 모택동 등 정치가들은 물론이고 그런 국가들도 그 어떤 체제보다 더욱 인민들을 억압하는 심각한 폐해를 드러냈다. 그리고 3대 세습이라는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지도력을 고집하는 북한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공산주의 사상이 역사적, 과학적으로 증명해낸 하나의 법칙으로 귀결한 현실적 이론이라고 생각했지만 공산주의 사상 역시 문제점이 있는 유토피아에 불과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소상인과 소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로 굴러떨어지고, 부르주아 멸망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는 피할 수 없는 일이란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다.이러한 공산주의 유토피아의 공허한 헛점과 환상에만 고집한 공산주의 국가들은 하나씩 붕괴되거나 이전보다 더 가난한 국가로 전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회혁명 이론의 전제는 인간은 사회적 경제적 제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그리고 사회제도의 변혁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너무도 많은 억압과 부당한 자유가 바로 그런 사회변혁 이념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사상의 단순성과 편협성에 치우진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가 비판하고 있는 부르주아지 사회의 실상은 지금까지도 그러한 병폐가 만연하고 있는 지금도 곱씹어 볼만하다. 마르크스의 사상이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국가를 만들 수 있었고 사회 변혁을 꿈꾸던 젋은이들을 열광시켰던 이유는 단지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전투적 의지가 담겨진 문체와 문구만은 아닐 것이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부르주아지의 욕심 그리고 그들로 인해 경제적, 사회적인 면에서 프롤레타이라가 불리해져만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냉혹한 현실에 크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비판한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지금도 고민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다.
그리스를 중심으로 세계경제의 위기가 진행되고 있는 지금 『공산당 선언』을 다시 읽어보면,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이 적지 않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다. 계급투쟁이니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니 하는 교조적인 단어의 주술에 묶이지만 않는다면, 자본의 속성과 사회 불평등에 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비판이 수백 년 전에 쓰였다는 사실을 때때로 망각하게 할 정도다. 누군가는 이미 '실패'로 증명되버린 사상을 왜 읽고, 공부하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 작용하고 있는 사회에 대한 또 다른 시선을 바라볼 줄 알고,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