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그리스 철학 빈틈없는 철학사 1
피터 애덤슨 지음, 신우승.김은정 옮김 / 전기가오리 / 2017년 7월
평점 :
품절


 

 

 

그리스를 흔히 서양 문명의 젖줄이라고 한다. 민주주의가 태동했고 올림픽이 처음 열린 곳이니 과언이 아니다. 그뿐이랴. 오늘날 서양 학예의 뿌리는 그리스에 있다. 문학은 호메로스헤시오도스에서 시작되어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로 이어져 내려왔고, 역사학은 헤로도토스에서 시작되어 투키디데스, 플루타르코스로 이어졌다. 철학은 서양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에서 시작되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면서 기초가 다져졌다. 자연과학도 탈레스로부터 시작되었다. 탈레스는 ‘최초의 과학자’로도 알려져 있다. 의학은 히포크라테스에서 체계화되어 갈레노스에게로 이어졌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삶과 철학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가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이전 서양 철학의 씨앗이라고 할 ‘초기 그리스 철학’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자료가 많지 않다. 초기 그리스 철학은 대체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 철학으로 분류되는 철학자 중에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인물도 있다. 따라서 초기 그리스 철학을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으로 명명하는 것에 어폐가 있다. 초기 그리스 철학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저작은 흔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빈틈없는 철학사’ 첫 번째 시리즈인 《초기 그리스 철학》(전기가오리, 2017)은 덜 알려진 서양철학사의 시작점을 파악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빈틈없는 철학사’는 고대 철학 및 이슬람 철학을 전공한 피터 애덤슨이 진행하는 팟캐스트이다. 방송에 언급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라서 저자의 생생한 입맛이 살아 있다.

 

철학과 과학을 흔히 관련성이 적은 개념 쌍으로 여긴다. 그런데 초기 그리스 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탈레스는 최초의 철학자이자 최초의 과학자이다. 탈레스는 밤하늘만 바라보고 걷다가 우물에 빠지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무능한 철학자에 대한 풍자보다는 탈레스의 과학적 성취를 예견하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탈레스는 꾸준히 천체를 관찰해 일식을 정확하게 예언하는 데 성공했다. 탈레스가 활동한 시대에 태동한 철학과 과학은 따로 분리된 학문이 아니었다. 철학과 과학의 연관성은 초기 그리스 철학의 특징 중 하나이다.

 

의학도 과학의 범주에 포함되는 학문이다. 그래서 이 책에 ‘의학자’로 알려진 히포크라테스를 다룬 내용이 있다. 피터 애덤슨은 히포크라테스를 고대 철학과 과학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히포크라테스는 질병을 ‘신이 내린 저주’로 보지 않고, 의학의 신성함을 배제했다.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는 만물의 근본을 탐구한 철학자들이다. 만물의 근원에 대한 관점의 차이는 있지만,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은 자연에 대해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고 이를 만족시키기 위한 지적 활동이 시작되면서 과학이 태동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그들은 신에 향한 종교적 경외감을 넘어서지 못했으나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작품 속에 드러난 ‘비이성적인’ 신 관념을 탈피하려고 했다. 크세노파네스는 신을 인간처럼 묘사한 시인의 권위를 처음으로 비판한 철학자다. 그는 인간의 형상을 모방한 신은 인간 본성이 반영된 존재라고 비판했다. 크세노파네스의 생각은 플라톤으로 이어진다. 플라톤은 시인을 부도덕하고 무가치한 것을 모방하는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서양철학에서 최고의 철학자가 소크라테스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어떤 문헌이나 기록으로 남긴 일이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최고의 철학자로 인정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초기 그리스 철학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문헌 또한 남은 게 없다. 그러나 이미 사라지고 없다는 이유만으로 서양철학사의 씨앗을 무시한 채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라는 이름으로 자라난 고대 철학의 새싹을 본다는 건 철학 공부의 첫 단추를 잘못 채운 것이나 다름없다.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의 활약 덕분에 고대 철학은 ‘인간과 세상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더 풍부한 자료와 문헌상의 소중한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oren 2018-01-05 20: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탈레스가 우물에 빠진 이야기의 ‘가장 오래된 출처‘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에 따르면)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라고 해서 마침 그 대목만 일부러 찾아 읽어봤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비록 자신이 직접 쓴 문헌이나 기록이 하나도 없지만, 제자인 플라톤의 방대한 저작을 통해서 너무나 자세하고도 풍성하게 알려진 덕분에 도리어 ‘문헌이나 기록이 매우 풍부하게 남아 있는 철학자‘로 볼 수도 있지 싶습니다. 그걸 뒷받침하는 가장 단적인 예가 아마도 다음과 같은 ‘해설‘이 아닐까 싶습니다.
* * *
플라톤이 쓴 대화편 가운데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대화편을, 사건이 전개되는 시간순으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테아이테토스》→《에우튀프론》→《크라튈로스》→《소피스테스》→《정치가》→《소크라테스의 변론》→《크리톤》→《파이돈》
-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작품해설> 중에서

cyrus 2018-01-06 15:20   좋아요 1 | URL
소크라테스를 다룬 플라톤의 책이 뭐가 있는지 궁금했는데, 마침 oren님이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셨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

sprenown 2018-01-05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라? 연초부터 수준높은 철학이야기..바람직 합니다
이글을 계기로 앞으로 치열하고,수준높은 철학논쟁,철학베틀로
이어지길 기대합니다 철학 좋아하시는 알라디너님의 가열찬 참여 바랍니다!^^.

cyrus 2018-01-06 15:22   좋아요 0 | URL
제가 철학을 대충 이해하는 것 같아서 독자적으로 공부할 생각입니다. 이게 얼마나 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
 
담론과 진실 미셸 푸코 미공개 선집 2
미셸 푸코 지음, 오트르망 옮김 / 동녘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의 별명은 미친 소크라테스였다. 이 별명을 붙여준 사람은 소크라테스(Socrates)의 제자 플라톤(Plato)이다. 진중권의 설명을 빌리자면, 소크라테스는 입으로 논증하는 철학자였다면 디오게네스는 몸으로 논증하는 철학자였다.[1] 실제로 디오게네스는 자기 생각을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행동파철학자였다. 세계 정복을 나선 알렉산드로스(Alexandros)가 디오게네스를 부러워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디오게네스는 평생을 거리에 버려진 커다란 통 속에서 살았다. 그는 햇볕을 쬐기 위해 통 밖으로 나와 있었는데, 마침 알렉산드로스가 디오게네스를 만나러 왔다. 알렉산드로스는 철학자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말해 보라고 했다. 디오게네스는 왕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햇빛을 가리고 있으니 비켜주세요.” 디오게네스는 이 말 한마디로 콧대 높은 젊은 왕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왕의 부하들이 무례한 디오게네스를 꾸짖으려고 하자, 왕은 부하들을 말리면서 만약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었을 것이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모두가 부러워하고 숭앙하는 권력자였다. 디오게네스는 돈도 권력도 없는 거지였지만 당당했다. 한 사람은 세계 정복을 열망했고 다른 한사람은 햇빛이면 만족했다. 디오게네스는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기존의 지식의 가치를 조롱하고 비판했다. 그의 냉소적인 철학을 견유주의(Cynicism)라고 부른다. 디오게네스가 권력을 냉소하는 방식은 간단하다. 권력자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솔직하게 표현하려고 했다. 디오게네스의 발언 태도는 모든 것을 말하기’, ‘솔직하게 말하기’, ‘진실을 말하기 등에 가깝다. 이 말하기 행위는 고대 그리스어로 파레시아(parrhesia)’라고 한다. 파레시아는 고대 그리스, 로마 철학자들이 지향했던 삶의 원칙이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인생 말기에 파레시아를 주목했다. 담론과 진실, 파레시아1982년 프랑스에서 진행되었던 파레시아1983년 미국에서 총 여섯 번으로 진행되었던 담론과 진실 강연 내용을 채록하여 정리한 것이다.

 

파레시아라는 단어는 그리스도교 텍스트에서도 등장한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파레시아는 신과 교인과의 관계 속에서 신의 교리에 진실성 있게 접근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교의 파레시아는 고대 철학자들과 푸코가 이해하는 파레시아와 전혀 다른 개념이다. 푸코의 파레시아는 신이 아닌 사회 전체에 적용되며 비판적 실천에 초점을 맞춘다. 푸코는 강연에서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비극(悲劇) 작품, 플라톤 등 고대 그리스 · 로마 시대의 문헌들을 인용 소개하여 파레시아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설명한다. 파레시아는 권력자 앞에서 담대하게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이며 민주정 체제가 허용하는 시민(아테네 시민권에 여성과 노예는 포함되지 않았다. 아테네의 여성은 정치 참여에서 제외되었다. 파레시아의 시대적 한계이다)의 기본 권리이다. 파레시아를 행하는 파레시아스트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대중의 분노와 역반응을 감수하면서 발언한다.

 

푸코는 소크라테스와 견유주의의 파레시아를 비교, 분석한다. 소크라테스는 윤리적 파레시아다. 소크라테스가 강조한 명제 너 자신을 알라(Nosce Te Ipsum)’는 자기 자신에게 향한 질문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의심하고 반성하는 행위가 함축되어 있다. 즉 자기를 이해하는 것은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는 자기 돌봄이다. 자신의 무지를 정확히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 그것은 진실을 말하는 파레시아 개념과 중첩하게 된다. 견유주의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급진적 파레시아다. 견유주의 철학자들은 과격한 방식으로 기성 질서를 비판한다. 소크라테스는 기성 질서를 비판하면서도 현재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견유주의 철학자는 주류를 거부한다.

 

푸코는 파레시아를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현실 전체를 제대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삶의 기술로 이해한다. 따라서 파레시아스트가 되려면 먼저 자아비판이 이루어져야 하며 대중 앞에서 떳떳하게 진실을 알리는 담대한 용기가 필요하다. 물론, 파레시아스트도 상대방의 정당한 비판을 받을 수 있으며 상대방의 의견에 경청해야 한다. 파레시아스트의 말 속에는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실천 의지가 반영되어야 한다.

 

 

    

 

 

과연 우리 사회에 자발적으로 비판하는 파레시아스트가 많이 나올 수 있을까? ‘숙의(熟議)’, 말 그대로 깊이 생각하고 충분한 의논을 통해 문제를 판단하는 사회 분위기가 정착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자유로운 논의를 위해 판을 잘 깔아야 한다. 숙의민주주의 발전이 더딘 사회에 파레시아스트의 등장을 바라는 것은 근시안적인 기대감이다. 썩은 내 나는 입으로 민주주의를 들먹이면서 파레시아스트인 것처럼 행세하는 형편없는 자가 나올 수 한다. 우리는 '진실'의 가면을 쓴 사기꾼을 경계해야 한다.

 

 

 

 

[1] 진중권 앙겔루스 노부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prenown 2017-11-21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에서 퍼질러 앉아 있는 디오게네스가 생각납니다.^^. 사리사욕을 버려야 ‘파레시아‘가 가능하겠지요...

cyrus 2017-11-22 14:04   좋아요 1 | URL
주류에서 파레시아스트가 나오기 힘들어요. 주류를 비판하면 주류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잃어버려요. 사익을 포기하면서까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주류로부터 배척당해요.

2017-11-21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1-22 14:10   좋아요 1 | URL
대구 경북은 보수의 텃밭이 아니라 순실그네가 활개치던 놀이터에요.
 
신화와 미신, 그 끝없는 이야기
새뮤얼 애덤스 드레이크 지음, 윤경미 옮김 / 책읽는귀족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해마다 10월 31일이 되면 미국에서는 핼러윈(Halloween)이 열린다. 핼러윈은 악령을 쫓는 고대 켈트인(Celts)의 축제에서 유래됐다. 켈트인들은 죽은 영혼, 정령, 악마, 마녀 등이 10월 31일 밤에 살아난다고 믿었다. 핼러윈을 ‘악령들의 축제’라고 불리는 건 이런 까닭이다. 핼러윈은 불길한 의미의 신성한 의식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즐기는 재미있는 축제가 되었다. 축제의 밤이 되면 아이들은 악마, 마녀, 만화영화 캐릭터 등으로 분장하다. 아이들은 ‘사탕을 주지 않으면 장난을 치겠어(Trick or Treat)’라는 말을 하면서 집마다 돌아다닌다. 핼러윈을 즐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핼러윈의 유래를 얼마나 이해하는지 알 수 없지만, 핼러윈은 고대인들의 미신에서 유래된 전통문화다. 미신이 없었으면 10월 31일은 그저 그런 보통 날로 남았을 것이다.

 

민간에 전해지는 미신은 비과학적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꽤 많은 사람이 미신을 믿는다. 심지어 손해를 보면서까지 따르기도 한다. 칼 세이건(Carl Sagan)은 허무맹랑한 미신이 휩쓰는 세상을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The Demon-Haunted World)’이라고 했다. 때로는 미신을 ‘아직 증명해내지 못한 과학’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래도 미신은 비과학적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과학적 이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기한 일들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이럴 때 사람들은 미신을 떠올린다.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 사이에 벌어진 틈은 미신이 스며들기 딱 좋은 위치이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동서양 미신들을 수집 · 정리한 새뮤얼 애덤스 드레이크(Samuel Adams Drake)는 미신이 인간의 삶에 끼친 영향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가 쓴 《신화와 미신, 그 끝없는 이야기》(책읽는귀족, 2017)는 미신의 유래를 밝히고 이 그릇된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력을 알려준다.

 

미신은 역사가 기록되기 전부터 등장했다. 미신은 지금까지도 그림자처럼 인간을 따라다니고 있다. 오늘날 미신은 과거의 어리석은 믿음으로 무시 받기에 십상이다. 하지만 드레이크는 미신의 긍정적인 가치를 강조한다. 드레이크의 말에 따르면 미신은 과학과 비과학(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신기한 일들) 사이의 공허한 심연의 틈을 메우는 상상력이다. 상상의 부재는 우리 삶을 공허하게 만들어버린다. 삶의 재미를 잃은 채 단조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메울 수 없는 처절한 공허함을 느낀다. 그 공허함은 새로운 상상, 즉 미신으로 채워진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이나 자연현상 속에서 인과관계를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한두 가지 사례로부터 확실한 인과관계를 발견하면 그다음부터는 세상의 일을 예측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이 순리대로 돌아가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으며 쉽게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미신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어떻게든 극복하고픈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자양분 삼아 더욱 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사람들은 종종 중요한 일을 앞두고 머리를 감지 않는다거나, 손톱을 깎지 않는 등의 행동을 하면서 ‘징크스(jinx)’를 피하려고 한다. 어이없는 미신이 만들어 낸 비과학적 치료법에 대한 맹신이 존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온갖 치료법을 찾게 된다. 대부분은 실패를 겪게 된다. 실패는 금방 잊힌다. 특별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 어쩌다 거의 죽어가던 사람이 기사회생하면 그것은 기억되고 전승된다. 그래서 미신은 확실한 치료법으로 둔갑하여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지게 된다. 미신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어떤 일을 상대방 또는 주변 환경 탓으로 넘겨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또 심각한 피해를 초래하기도 한다. 드레이크는 병을 고칠 수 있는 식물에 대한 미신의 오류와 위험성을 경계했다. 드레이크가 살았던 과거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비과학적인 치료법 또는 치유의 부적에 매달리며 시간과 돈을 쏟아붓고 있다.

 

미신은 인류의 순수한 믿음과 상상을 토대로 형성된다. 인간은 공허한 심연의 틈을 메우기 위해 상상적인 봉합을 시도해 왔다. 작가는 하얀 종이 위에 서서 상상력으로 현실과 비현실의 공허한 틈을 봉합한다. 그들은 미신을 문학적 소재로 삼았고 독자들은 허구의 서사를 자연스럽게 믿었다. 미신에 근거한 허구의 서사가 때론 새롭고도 재미있는 현실을 창조한다. 미신은 말도 안 되는 내용임을 알면서도 삭제하기 힘든 상상력의 또 다른 이름이다. 즉 ‘그렇게 믿고픈 마음’이 만들어낸 생각의 결과물이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미신으로부터 많은 부분을 속박당하거나 의지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 책에 인용된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말은 옳다. 이 말은 '미신이 출몰하는 세상' 속에 살아가는 현명한 사람들의 모순적 태도를 지적할 때 쓸 수 있다. 현명한 사람은 미신에 코웃음을 치면서도 미신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쩔쩔맨다.

 

“현명한 사람도 멍청한 사람처럼 미신을 믿는다.”

 

우리는 미신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활개치는 세상에 놓여졌다. 그래도 미신이 있어서 삶은 무미건조하지 않다.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11-01 2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1-02 13:21   좋아요 0 | URL
요즘 군중을 노리는 테러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어요. 우리나라도 조심해야 됩니다.

sprenown 2017-11-01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완전한 인간, 불확실한 세계.아무리 과학과 이성이 발달한다 해도 미신은 없어지지 않을거예요.점집도 여전히 성업중..아마 인공지능이 점쟁이 역할을 할겁니다.ㅎㅎ 인간의 불안과 두려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테니까요..그래서 축제로 변형이되는것 같아요.

qualia 2017-11-02 00:03   좋아요 1 | URL
그래도 우리 한국은 유독 미신이 창궐하는 것 같지 않나요?
점집이 21세기 초에도 한국처럼 성행·성업 중인 데는 세계에 아주 드물지 않을까 하는데요. 점집 주 고객층도 20대~30대 젊은 층이라고 하죠?

cyrus 2017-11-02 13:24   좋아요 0 | URL
네. 인간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만들어진 행사가 축제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축제를 즐기면 혼자 있을 때 느끼는 불안감을 잊을 수 있으니까요. ^^

이하라 2017-11-01 22: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아초월 심리학이나 대체의학의 효과가 검증되고 있으니 미신으로 치부되는 모두가 미신일 수만은 없는 것 같아요. 일부는 미신이란 이름으로 검증이 미뤄져 왔던 널리 알려져 있지만 숨겨진 과학이 아닌가 싶어요...

qualia 2017-11-02 00:41   좋아요 2 | URL
《미신으로 치부되는 모두가 미신일 수만은 없는 것 같아요.》

위 말씀에 동의합니다. 진짜 미신에 가까운 것이 오히려 상식이나 과학으로 대접받고 있는 사례는 꽤 많을 듯합니다. 역으로 미신으로 취급받고 있는 것들이 오히려 숨겨진 과학일 수 있는 사례도 많을 거예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넋 · 혼 · 혼령 · 영혼 · 심령 · 영성 · 유체이탈 · 임사체험 · 사후 세계 같은 논제들도 미신 혹은 신비주의와 과학 사이에 놓여 있다고 봅니다. 해서 저것들과 관련된 다양한 신화와 이야기들, 종교인들의 경험담, 심지어 세계적 임상 의학자들의 체험적 연구와 주장들이 한낱 미신으로 치부되는가 하면 동시에 이제는 어엿한 과학적 탐구 대상으로까지 올라선 상황이죠. 과학이 아무리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인간 뇌를 겨우 5% 정도밖에 파악하지 못했고, 광대무변한 우주도 겨우 5% 정도밖에 파악하지 못한 인류가 저것들을 미신과 신비주의로만 치부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거라고 봅니다.

cyrus 2017-11-02 13:31   좋아요 0 | URL
미신이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과학적 검증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미신의 실체를 판단할 수 있는 과정이 실행되어야 합니다. 그 과정을 거치고 난 후에 미신이 과학인지 아닌지 판단해도 늦지 않아요.

레삭매냐 2017-11-01 2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핼로윈 또한 현대판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하나의 축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전에는 추수감사절 쇼핑이 대세였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미국에서 핼로윈이 크리스마
스 다음으로 소비를 많이 하는 시즌이 되
었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서양 풍습인지라 우리나라에서
는 몇몇 소수들만이 즐기는 행사가 아닌지
싶더라구요.

cyrus 2017-11-02 13:33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에 핼러윈 문화가 정착된 것을 자본주의의 힘을 받은 ‘세계화‘의 결과로도 볼 수 있겠어요.

OutErSider 2017-11-02 03: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교가 생활 곳곳에 스며들기 이전에는 한국 사회도 상당히 축제가 많았다고 합니다. 민속학자들이 많이 애석해 한다고 해요. 저는 기본적으로 모든 축제의 기원은 영적인 것에 대한 갈구, 더 근본적으로 귀신과의 교감을 위해 이뤄졌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저는 그렇개 확신합니다. 이성적인 것이 최선이긴 하지만, 그것에 모든 것을 다 맡기는 것은 사람에게 바람직하지 않죠. 지나친 합리주의가 도덕적 결벽을 낳기도 하고요. 필요악이란 단어가 있듯이 전 인간의 마음은 악마와의 교감도 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욕구를 풀어내고 자정할 수 있는 기능인 할로윈 같은 축제는 저는 정말 부러워요. 제 생각은 그렇네요.

cyrus 2017-11-02 13:36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에 핼러윈 문화가 정착되면 한국의 귀신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 수 있어요. 미국 축제라고 해서 무조건 미국 유령의 모습으로 분장해야 한다는 법은 없어요. 그런데 요즘 핼러윈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면 좀비 분장을 많이 선호하는 것 같아요.

transient-guest 2017-11-03 0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신‘이란 표현이 사실 좀 어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Christianity를 중심에 놓고 나온 개념이라고 예전에 들은 것 같아요. 핼러윈의 시작은 결국 캘트의 종교적인 행사였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게 기독교문화로 넘어오면서 ‘미신‘의 영역으로 보내진 거라고도 생각할 수 있고, 대다수의 고대종교나 과거의 신앙체계가 그런 방향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도 한인교회들을 중심으로 핼러윈 보이콧활동이 활발합니다.. 악마숭배의식이라나 뭐라나...-_-::

cyrus 2017-11-03 20:19   좋아요 1 | URL
핼러윈의 유래가 궁금해서 정보를 찾아봤는데요, 켈트인 축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쪽으로 설명한 내용도 있었어요. T-guest님 말씀대로 오늘날의 핼러윈은 기독교 문화의 색이 많이 반영되어 있어요. 그런데 한인 교회 사람들의 행동은 민폐인데요.. ^^;;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위즈덤하우스, 2015)은 춘추전국시대에 태동한 공자노자의 사상을 소개하여 노자는 공자의 어떤 점을 비판했고, 그것이 가진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한 책이다. 공자는 ‘인(仁)’이라는 보편적 기준을 내세워 세상의 혼란을 잠재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노자는 보편적 기준에 맞춰 가면서 살지 말라고 강조한다. 노자는 ‘인의 노예’가 되지 않아야 삶이 더욱 풍요로워진다고 보았다.

 

이 책에 《도덕경》뿐만 아니라 《논어》 문장도 나온다. 그래서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을 읽기 전에 예습하는 차원에서 《논어》를 봐 두는 것이 좋다.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에 《논어》 자로(子路) 편 23장의 원문과 그것을 풀이한 문장이 나오는데, 최진석 교수는 이 구절을 이렇게 풀이한다.[1]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군자화이부동, 소인동화불화)

 

훌륭한 사람(군자)은 각각의 차이를 인정하는 조화를 도모하지 모두 유니폼을 입혀 놓은 것처럼 하지 않는데, 좀 부족한 사람(소인)은 유니폼을 입혀 놓은 것처럼 똑같게 하려 하지 차이를 인정하는 조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군자는 자기중심과 원칙은 잃지 않으면서도 다른 이들과 잘 어울린다. 반면 소인은 상대방의 생각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특정 생각을 받아들이도록 일방적으로 강요한다. 그런 소인의 행동을 최 교수는 ‘유니폼을 입혀 놓은 것’으로 비유하여 풀이했다. 원문을 직역하지 않은 풀이는 봤어도 외래어가 들어간 풀이는 처음 본다. 살짝 튀긴 하지만, 원문을 이해하는 데 전혀 문제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화이부동’을 쉽게 풀이한 학자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 김학주 역 《논어》 (서울대학교출판부, 2015)

* 이을호 역 《한글 논어》 (한국학술정보, 2015)

* 김원중 역 《논어》 (휴머니스트, 2017)

 

 

 

* 김학주 : “군자는 화합이나 뇌동(雷同)하지는 않고, 소인은 뇌동하나 화합하지 않는다.”

 

* 이을호 : “참된 인물은 진정으로 화합하지 고개만 끄덕거리지 않는다. 하찮은 인간은 고개만 끄덕거리지 진정으로 화합하지 않는다.”

 

김원중 : 군자는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지만 [부화]뇌동하지는 않고, 소인은 [부화]뇌동하지만 조화를 이루지는 못한다.

 

 

 

요즘 청소년 권장도서 목록에 《논어》가 종종 포함되기도 한다. 청소년 독자들을 위한 《논어》가 많이 나오고 있지만, 《논어》는 읽기 쉬운 책이 아니다. 《논어》를 여러 번 읽어도 공자의 사상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공자의 제자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 《논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꼭 그렇지만 않다.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공자의 사상을 이어받은 후대의 학자들이 정리하여 다듬어진 책이 《논어》다. 《논어》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성 있는 의도가 체계적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논어》를 끊임없이 정독하여 공자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려고 시도한다. 논어 자체가 갖는 모호성 때문에 풀이가 다른 주석서들이 많이 나오는 것이다. 김학주 교수의 말대로라면 《논어》의 사상을 얘기한다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다.[2] 특히 더 우스운 일은 자신이 생각한 것, 자신이 눈으로 본 《논어》 풀이가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공자가 경계한 소인의 행동이다.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이들은 자신의 생각에 딱 달라붙은 ‘보편적 기준’이라는 이름의 유니폼을 입고 행동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주장이 너무 강하다. 본인이 입고 있는 유니폼이 상대방에게 입으라고 강요한다.

 

 

 

 

 

 

 

 

 

 

 

 

 

 

 

 

 

 

* 신영복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돌베개, 2004)

 

 

 

신영복 교수는 ‘화이부동’의 ‘동’이 자기 존재의 확장을 위해 상대방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합병의 논리라면, ‘화’는 상대방의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공존의 논리로 해석했다. 최근에 《도덕경》을 읽어서 그런 것일까. ‘화’를 해석한 신 교수의 주장이 노자의 생각과 조금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노자는 ‘보편적 기준’을 강요하는 사회를 반대했다. 우리 사회에 ‘보이지 않는 유니폼’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유니폼의 상태가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잘 모를뿐더러 자신들이 입은 유니폼을 거부하는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다.

 

 

 

 

[1]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57~58쪽

[2] 《논어》(제2전정판, 2007년) 90쪽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prenown 2017-10-14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영복교수님의 화이부동 해석이 가슴에 와닿네요.
부화뇌동하지 않고 주체적 삶을 살면서도 화이부동 할수 있는 군자. 이상적인 인간이네요.

cyrus 2017-10-14 16:05   좋아요 1 | URL
<강의>를 처음 읽었을 때 신 교수님의 화이부동 해석이 마음에 크게 와 닿지 않았어요. ‘아, 그렇게 해석할 수 있구나’하면서 넘어갔어요. 그런데 도덕경과 논어를 여러 번 읽게 되니까 이제 좀 하나씩 뭔가 느끼기 시작했어요. ^^;;

2017-10-15 0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0-15 17:35   좋아요 0 | URL
동양철학 리뷰를 쓰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열심히 쓴 글이 지적받으면 기운이 빠져요.. ㅎㅎㅎ 추천한 책도 읽어봐야겠어요. ^^
 
철학 하는 여자가 강하다 - 능력 있는 현대 여성은 왜 무기력한가
레베카 라인하르트 지음, 장혜경 옮김 / 이마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너 바보야? 왜 말을 못 해? 저 남자가 내 사람이다. 저 남자가 내 애인이다. 왜 말을 못하냐고!”

 

 

드라마 <파리의 연인>에서 박신양이 핏대를 세우면서 말했던 이 대사는 드라마 방영 당시 최고의 유행어로 등극했다. 이 대사는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있다. 자타공인 의사소통 전문가들은 애초부터 남자와 여자의 언어 습관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남자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여자는 우회적으로 돌려 말한다. 여자는 과정을 얘기하며 감정을 공유하길 원한다. 반면 남자는 여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제를 해결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과정보다는 결론부터 이야기한다. 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2006, 동녘라이프)의 저자 존 그레이(John Gray)는 “태어날 때부터 남자는 화성인이고, 여자는 금성인이기 때문에 남녀 언어와 사고방식은 다르다”는 비유를 들었다. 그의 책을 감명 깊게 읽은 사람들은 남녀가 대화를 나눌 때 오해와 갈등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거라고 믿는다.

 

의사소통 전문가들은 남녀가 서로의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 원활하게 소통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남자는 여자의 말을 경청해주고 여자는 남자의 언어 방식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성이 이해해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보통 남자들은 끊임없이 허풍을 떨며 자신을 과시한다. 왜냐하면, 대화를 통해 상하 관계를 설정하기 때문이다. 남녀가 함께 일하는 직장, 특히 남자가 많은 부서에 여직원들과 말이 안 통하는 남자 직원이 꼭 한 명씩 있다. 이런 직원은 툭하면 여자 후배 직원들에게 원성을 낸다. 그리고 여자 직원이 매끄럽게 일 처리를 하지 못하면 “여자들은 안 돼”라고 면박한다. 남자는 자신이 상대방(여자)보다 우위에 있다는 점을 확인하려고 한다.

 

여자를 깔보고 무시하는 남자의 개소리에 당연히 화를 안 낼 수가 없다. 그러나 여자는 그 자리에 화를 내지 못한다. 만약 여자가 화를 내고 목소리를 높이면 불이익을 받는다. 이 상황에 의사소통 전문가들은 화를 내는 대신 참으라고 말한다. 여자가 그다음에 해야 할 일은 경청이다. 그렇게 되면 정면충돌의 비극을 피할 수 있고, 서로 마음에 상처받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마음의 상처를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은 여자이다. 여자들은 자기 의견을 거절당할 수 있다는 강박관념이 심한 편이다. 그래서 자신의 의견을 확실히 말하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이 자신의 의도를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런데 대부분 남자는 눈치가 없다. 여자들과 말이 통하지 않으면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여자를 쳐다본다.

 

“여자가 정숙해야 남자에게 사랑받아”, “화가 나더라도 여자는 참아야 해”, “남자랑 말이 잘 통하려면 여자가 남자의 대화법을 이해하고 경청해야 해”

 

이 말들은 남자들이 여자의 귓가에 속삭일 때 하는 악마의 주문이다.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다양성이 담보되었다지만 동시에, 여전히 여성의 삶의 형태는 정형화된 ‘여성성’으로 모인다. 매일, 매 순간 여성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고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억압이다. 레베카 라인하르트(Rebekka Reinhard)《철학 하는 여자가 강하다》(이마, 2017)는 입에 재갈을 물린 채 질식하고 있는 현대 여성의 여성성에 대해 알려준다. 현대에 이르러 여성들도 남성 못지않은 경제력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그렇지만 레베카 라인하르트는 여전히 현대 여성들은 낡아빠진 과거의 ‘여성성’을 버리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저자는 여성도 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권력을 사용할 줄 아는 여성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반대로 권력이 없는 여성은 무력하고 소극적이다. 이들은 ‘남자로부터 인정받는 여자’가 되는 삶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이런 상황 속에 여성은 권력 문제에 무관심하게 되고, 남성을 뛰어넘는 능력이 있음에도 사회적 활동을 하는 기회를 얻지 못한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현대 여성들은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 향상’에 집중해야 한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저자가 강조하는 ‘권력’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권력’이라 하면 ‘남을 복종시키는 힘’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여자가 남자를 복종하는 상황을 죽어도 싫어하는 남자들은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페미니스트를 싫어하는 형님, 동생들아! 겁먹지 마시라. 때론 지나친 상상도 병이다. 권력을 가진 여성은 남자를 실컷 부려 먹는 이기적인 존재이고, 이들 때문에 남자가 역차별을 받아 불리해질 거라는 믿음은 망상에 불과하다. ‘권력’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단어다. 그러므로 ‘권력’을 무조건 나쁜 의미로만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권력’도 긍정적인 의미의 단어가 될 수 있다. 저자는 ‘권력’을 ‘어떤 일에 영향을 미치고 무언가를 일으키고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1]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삶을 바꾸거나 부당한 사회를 개선하려는 사람들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행동은 권력 구조를 변화시킨다. 따라서 권력은 한 사람 또는 하나의 거대한 집단이 영원토록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니다.

 

가부장제는 남성 중심의 시각과 권위를 위해 형성된 사회 형태이다. 가부장적 가족 안에서 남성은 가정사의 모든 일에 좌지우지하는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현실에서 어떤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는지 기지적함으로써 남성성에 대한 허상을 발가벗긴다. 그들의 노력은 남성 중심의 권력에 대한 도전이다. 남성의 기득권에 저항하고 도전할 힘이 있는 여성은 남성의 권력에 눈치받지 않고 스스로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여성도 권력을 독점하게 되면 ‘여왕벌 신드롬(Queen Bee syndrome)’ 문제가 발생한다. 조직 안에서 인정받는 여성은 자신의 능력 하나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여왕벌이 벌집 안에서 유일한 권력을 갖는 것처럼 출세를 원하는 여성 직원은 조직 내에서 쌓아 올린 자신의 권위를 다른 여성과 나누려고 하지 않는 성향을 보인다. 그 결과 여성 임원은 남성 직원에 대한 지지를 하게 되고, 다른 여성 직원이 겪는 부당한 차별을 묵과한다. 결국, 일하는 현대 여성은 ‘규격화하는 (가부장) 권력’[2]에 동조하게 된다. 나는 이것을 ‘가부장 권력에 동화(同化)된 여성’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하고 싶다. ‘여왕벌’이 많아지면 눈에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이 금이 가도 다시 원래 상태로 되돌아 말끔해진다. 깨뜨려도 쉽게 깨질 수 없는 유리천장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 상승을 막는다. 가족 내에서도 가부장 권력에 동화된 여성은 자신의 가부장적인 생각이나 가치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가부장적 위계질서에 익숙한 여성은 ‘갑’의 위치에 서서 부당한 권력을 행사한다. 따라서 가부장 권력은 상대적인 권력 서열화 방식으로 작동되고, 그 과정에서 불합리한 방식의 ‘갑질 문화’ 또는 ‘차별’을 재생산된다.

 

라인하르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권력과 도덕의 공존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녀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말을 인용하여 정당하게 사용하는 권력의 장점을 알려준다.

 

“권력은 행동하거나 무엇인가를 할 뿐 아니라 타인과 단결하고 그들과 협력하여 행동하는 인간의 능력과 부합한다.”[3]

 

도덕은 권력을 가진 자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윤리의식이다. 이것이 빠진 권력은 ‘권력을 가진 자가 독점하는 전유물’이 된다. 권력을 독점하는 자는 상대방이 자신의 권력을 노릴까 봐 전전긍긍하고, 자신에 반대하는 사람을 ‘부정 세력’으로 간주하여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인다. 제멋대로 해도 권력 많은 사람이 그러는 것은 괜찮다고 암묵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권력의 불평등성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남녀 모두 철학을 공부해야 한다. 철학을 공부하면 ‘권력’이 ‘배타적인 반란을 위한 나쁜 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철학 하는 여자’는 절대로 나쁘지도, 위험하지 않다.

 

 

 

[1] 《철학 하는 여자가 강하다》 10쪽

[2] 같은 책, 177쪽

[3] 같은 책, 200쪽 (저자가 인용한 한나 아렌트의 책은 《폭력의 세기》)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4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립간 2017-10-13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blog.aladin.co.kr/maripkahn/9622741

가부장적인 걸 싫어하는 여자들의 이중잣대
https://www.youtube.com/watch?v=BsSCdepDHcY

이 페이퍼에 링크된 동영상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신지요?

cyrus 2017-10-13 13:31   좋아요 0 | URL
‘가부장(제)‘를 막연하게 알고 있거나 확실하게 알지 못한 여자들은 자신의 이중 잣대가 가부장제의 영향에서 생겨났다는 사실을 잘 모를 것입니다. 18세기 영국 의 여권신장론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남성 중심 사회의 문화에 종속당한 여성을 비판했습니다. 이런 여성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도 교육을 받아야한다고 주장했죠. 저는 이제 여성들이 남성들의 사회에 종속당하지 않으려면 페미니즘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립간 2017-10-13 14:19   좋아요 0 | URL
cyrus 님은 위 동영상의 주장에 동의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위 동영상의 지적한 연애 기간의 이중잣대는 남성 중심 사화의 문화에 종속된 것으로 판단하는 (울스턴크래프트?) 사람의 주장에도 동의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cyrus 님의 의견에 대한 제 판단이 맞다면,
제가 알라딘 마을에서 데이트시 비용을 남녀 동등하게 분담하는 제안에 자칭 페미니스트를 포함한 많은 여성 알라디너가 반발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알고 계시겠지만, 이로 인해 다락방 님, 하이드 님과 저와의 페미니즘 논쟁이 시작되었죠.)

cyrus 2017-10-13 14:46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과 다락방님의 주장 근거를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엠마 왓슨처럼 더치페이를 찬성하는 페미니스트도 있습니다. 더치페이를 반대하는 페미니스트가 있고, 찬성하는 페미니스트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에 속합니다.

마립간 2017-10-13 14:55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동영상에 지적했던 연애하는 젊은 여성도 남성 중심 사회 문화에 종속된 가치관이 아니라 또 다른 페미니즘으로 해석할 여지는 없습니까?

그리고 cyrus 님이 가부장제 동화라고 표현했던 것도 또 다른 페미니즘으로 해석할 여지가 없습니까?

cyrus 2017-10-13 14:57   좋아요 0 | URL
글쎄요, 제가 거기까진 생각은 안 해봐서 뭐라고 말씀을 못하겠어요. ^^;;

마립간 2017-10-13 14:58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이나 하이드 님의 주장은 아니지만, 데이트 비용을 남자가 부담해야 하는 근거로 남녀 임금 격차를 이야기합니다. 임금의 양성 평등이 이루지면 그 때 부담하겠다고 합니다. 군대에서 양성 평등이 이뤄지면 군입대 하겠다는 논리와 동일하죠.

같은 논리라면 권력도 남녀 평등이 이뤄진 후에야 여성이 추구해야 되지 않을까 합니다만.

마립간 2017-10-13 15:07   좋아요 0 | URL
페미니즘의 모순을 다양성으로 변명하려 한다면,

남편이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면서 사랑했다고 (어쩌면 또 다른 페미니즘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stella.K 2017-10-13 1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너는 리뷰를 하랬더니 아예 한 편의 논문을 썼구나.
다른 글도 그렇지만 이 글은 정말 퍼팩트다.
지위를 얻으려 하지 말고 권력을 얻어라.
맞는 말 같다. 그런데 보통은 여성의 지위가 올라갔다고
얘기들을 많이하지.
하지만 권력을 잘 쓰기는 남자나 여자나 다 어려운 것 같다.
그러니까 결론은 철학을 하란 말이지.
이 책 괜찮은 책 같다.^^

cyrus 2017-10-13 14:47   좋아요 0 | URL
보통 지위와 권력을 동일한 의미의 단어로 생각하기 때문에 남녀 불문하고 지위 오남용 현상이 생겨요. 그 현상이 바로 갑질 문화에요.

페크pek0501 2017-10-14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하려면 철학하는 여자가 되어야겠군요. 그에 따른 공부는 필수고요.
제가 꼭 읽어야 할 책 같군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읽었는데 80프로쯤은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읽었었어요.

cyrus 2017-10-14 16:07   좋아요 1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 철학을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지만 항상 늘 그래왔듯이 생각만 하고, 실천을 안 하게 됩니다... ㅎㅎㅎ

마립간 2017-10-16 08:00   좋아요 1 | URL
저도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에 대해 대체적으로 맞는 말이라고 판단하지만,

페미니즘에서는 남녀 차이가 없는 현실에 대해, 성차별-차이를 인식, 고착하게 만든다는, 대표적인 페미니즘에 반하는 도서로 비판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