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 - 철학과 과학을 넘나드는 사고력 강의
김재인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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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컴퓨터가 대화를 나눈다. 대화 상대편이 컴퓨터인지 진짜 인간인지 대화 당사자인 사람이 구분할 수 없다면 그 컴퓨터는 진정한 의미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인공지능을 판별하는 기준으로 알려진 튜링 테스트(Turing test)이다.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과연 기계는 생각할 수 있을까?”라는 철학적 질문을 통해 진짜 인간의 반응과 컴퓨터의 반응을 구분하려고 했다.

 

하지만 미국의 철학자 존 설 ‘중국어 방(chinese room)’ 논증을 제시하여 튜링 테스트의 한계를 지적한다.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방 안에 있다. 방 안에는 중국어 문장을 만들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있다. 방 안에 있는 사람은 문틈으로 들어오는 중국어로 적힌 질문을 받으면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답변을 보낸다. 질문자는 중국어 방에 있는 사람이 중국어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중국어 방에 있는 사람이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할 줄 안다고 해서 그가 중국어에 능숙하다고 말할 수 없다. 존 설은 ‘중국어 방’의 역설을 들면서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컴퓨터가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어느 쪽이 옳은지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하물며 우리가 인간의 마음이나 의식을 100% 이해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아직 스스로가 어떻게 자의식과 마음을 갖게 됐는지,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컴퓨터의 기능이 인간과 유사하다면 컴퓨터가 인간의 마음을 갖는다고 믿는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은 인간의 총체적 지적능력을 초월한 초인공지능이 어느 순간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라며 두려워한다.

 

‘철학의 위안’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두 권의 책이 있다(한 권은 고대 로마의 철학자 보이티우스가 쓴 것이고, 또 다른 한 권은 알랭 드 보통의 에세이집이다). 우리는 철학이라고 하면 어렵고 지루한 학문으로 생각한다. 과연 철학은 인공지능 시대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차분하게 해줄 수 있을까? 철학이 편안함과 정서적 위안을 주는 차(茶)가 될 수 있을까? 위안까지는 아니지만, 우리 마음속에 맴도는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과 걱정을 가라앉히는 데는 철학만 한 게 없다.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동아시아, 2017)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시도한다. 김재인이 서울대에서 강의한 ‘컴퓨터와 마음’이라는 제목의 철학 강좌를 정리한 책이다. 저자는 질 들뢰즈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책에 들뢰즈에 대한 언급(133, 174쪽)이 빠질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읽기 전에 지레 겁먹을 필요 없다. 이 책에서 들뢰즈는 저자의 논변을 ‘거들고 있는’ 엑스트라다. 사실 이 책에서 주연급으로 나오는 철학자는 플라톤데카르트다.

 

저자는 튜링의 오래된 질문, 즉 “과연 기계는 생각할 수 있을까?”에 대한 답변을 내놓기 위해 몸과 마음, 생각, 시간 등에 관한 주제들을 놓고 ‘사고 실험’을 시도한다. 인공지능 기술을 이해하는 것(과학적 접근법)과 철학적 성찰(인문학적 접근법)은 인공지능 시대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창이 아니라 하나의 창구로 통하는 겹창이다. ‘마음’과 ‘의식’은 인간의 영원한 숙제요, 탐구대상이다. 고도의 과학기술을 자랑하는 시대지만 아직 마음과 의식의 헤아릴 수 없는 복잡성과 깊이에 대해 밝혀낸 것은 없다. 따라서 철학의 궁극적 목표는 결국 마음과 의식의 본질을 알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 그 ‘내공’을 획득하기 위한 것인지 모른다. 저자는 이 ‘내공’이 실질적으로 우리가 배워야 할 것, 즉 ‘창조성’이라고 말한다. 문제를 제기하고,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 목표를 세우는 것 등의 창조적인 일에는 많은 시행착오가 따른다. 인공지능이 시행착오, 즉 ‘버그(Bug)’를 만나면 작동이 멈춘다. 창조적인 일은 인공지능이 해야 할 몫이 아니다. 따라서 창조성은 ‘인간다운 삶’을 위해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할 능력이다.

 

저자는 초인공지능의 등장을 두려워하는 일부 독자들을 안심시킨다. 그는 인공지능을 지나치게 ‘의인화’하는 분위기가 인공지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고 지적한다. 튜링의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변은 이렇다. “기계는 (인간처럼) 생각할 수 없다.”

 

이 책은 저자가 소개하는 철학 용어와 철학자들의 입장들을 이해할 수 있으면 마치 실타래가 풀리듯 한 호흡에 끝까지 내달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철학과 과학을 넘나드는 사고력 강의’라는 부제를 감안하면 과학보다는 철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느껴져서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너무나도 많은 철학적 내용을 다루다 보니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한 채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부분이 보인다. 170~175쪽에 저자가 새뮤얼 버틀러《에레혼》(김영사, 2018)의 ‘기계들의 책’을 인용한 내용이 나온다. 버틀러는 기계를 하나의 ‘유기체’로 이해했으며 기계도 인간처럼 진화하여 ‘재생산(생식)’ 체계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버틀러의 생각을 ‘기계(기술)의 진화’를 예언하는 입장인 것처럼 설명했는데, 실은 버틀러는 ‘기계의 진화’를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기계의 진화’로 인해 인간이 기계에 종속되는 미래를 풍자하고 비판하기 위해 《에레혼》을 썼던 것이다. 따라서 《에레혼》의 ‘기계들의 책’은 기계의 진화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위한 내용으로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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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6 0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4-26 11:40   좋아요 0 | URL
인공지능의 시대가 와도 불평등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돈, 정보, 그리고 기술을 가진 자가 더 많은 이익을 가질 것이고, 이들을 중심으로 부가 편중될 것 같습니다. 인공지능 도입으로 일자리를 잃거나 그만 두어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빈부 격차는 더욱 커질 것입니다.
 
중세의 아름다움 - 김율의 서양중세미학사강의 My Little Library 2
김율 지음 / 한길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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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4월 중순이 지났다. 지금부터 다음 달 독서모임 ‘우주지감’ 선정도서를 읽기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다음 달 선정도서는 ‘두 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달 독서모임 선정도서를 아직 안 읽었다. 이 와중에 나는 엉뚱하게도 다른 책들에 눈길을 준다. 벌써 다음 달 독서모임 선정도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망중한을 즐기다가는 망한다. 생각이 많아지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을 안 읽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책을 읽고 있다. 그중에 고른 책이 《중세의 아름다움》(한길사, 2017)이다. 책의 주제에 이끌려서 고른 게 아니다. 이 책을 고른 것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중세의 아름다움》은 다음 달 ‘우주지감’ 선정도서와 관련이 있다. 내가 이 책을 읽는 건 다음 달 독서의 추진력을 얻기 위한 것이다.

 

아름다움의 의미에 대한 통찰은 미학의 오랜 주제이다. 미학을 공부하면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정 상태나 경험을 스스로 살펴보게 된다. 이 과정은 미적 조화를 통해 완성된 예술작품들을 다시 삶 속으로 환류하게 하는 융통의 장을 열어준다. 따라서 미학은 엄연한 지성사의 일환이다. 중세철학을 전공한 김율 교수가 쓴 《중세의 아름다움》은 중세미학의 존재를 추적한 사유의 기록이다. 저자는 중세미학이 갖는 역사적 · 상징적 의미는 무엇인지, 중세를 대표하는 신학자들의 시선에 따라 중세의 아름다움이 어떻게 변모해왔는지를 살핀다.

 

중세미학은 비례와 조화를 강조했던 고대미학(고대 그리스, 로마)을 뿌리로 삼아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접근한다.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한 탐구 방식은 고대미학이 물려준 자산이었다. 즉 중세에도 ‘아름다움’은 배척당하지 않았다. 중세에 스테인드글라스, 고딕 양식 등이 유행됐다는 사실은 아름다움이 중요하게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중세미학은 그리스도교 문화 자체의 성격에서 유래한다. 그리스도교는 신의 존재 자체를 통해 아름다움(‘신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리스도교가 지향하는 아름다움은 초월적 존재인 신을 시각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최상의 속성이다. 고대미학의 개념적 유산인 비례와 조화 같은 범주는 신의 속성에 포함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감각적 아름다움에 대한 지성적 아름다움의 우위를 유지하면서 신을 눈에 ‘보이는’ 존재로 격상시켰다. 중세 신학자들은 신 자체의 아름다움에 주목한다.

 

이 책에 소개된 아우구스티누스, 위(僞) 디오니시우스, 토마스 아퀴나스, 요한네스 둔스 스코투스는 신학자(또는 철학자)로 알려졌지만, 자신의 시대에 ‘미학’을 입힌 중세미학의 완성자라 할 수 있다. 물론, ‘중세의 아름다움’에 대한 네 사람의 인식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저자는 중세시대에 지속적으로 주장됐던 ‘아름다움’의 본질을 상세히 정리하고 이를 고대미학과 비교 고찰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름다움을 감각이 아닌 ‘이성’으로 파악한다. 이성적인 사랑, 즉 그리스도교가 강조하는 인격적 사랑은 최고의 아름다움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 창조한 이 세상 전체가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세상에 은밀하게 숨겨진 신의 섭리, 즉 아름다움을 읽어내려고 했다. 디오니시우스는 전설에 등장한 성자의 이름이다. 위 디오니시우스는 익명의 신학자이다. 지금도 그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선(善)’과 빛, 그리고 아름다움을 조화시키려고 했다. 위 디오니시우스 미학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선과 같다. 이 아름다움이 존재할 수 있는 원인은 신이다. 그리하여 아름다움은 신의 이름으로 드러내는 ‘사랑’이 된다. 아퀴나스는 아름다움을 ‘보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말하는 ‘보인다’는 것은 시각적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시각과 지각을 포함한다. 아퀴나스는 아름다움의 의미를 눈으로 느끼는 감각적 상태가 아닌 정신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앎의 대상’으로 확장했다. 그리고 비례와 조화가 잘 이루어진 사물에서 볼 수 있는 ‘완전성’을 아름다움의 조건이라고 했다. 스코투스는 ‘색채’의 아름다움에 주목한다. 그에게 아름다움이란 ‘색채를 포함하는 조화’이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조화로 설명되는 아름다움에 주목했으나 색채를 아름다움(조화)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요소로 봤다.

 

중세는 ‘암흑’으로 봉인된 구시대가 아니다. 근대 이후 이성을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의 독주가 지속하면서 중세는 ‘암흑의 시대’로 폄하된 채 학자들조차 거들떠보지 않았다. 고대 문화의 가치를 재발견한 신고전주의자들은 고대미학, 르네상스 미학에 주목했을 뿐 중세미학을 평가 절하했다. 그래서 중세미학에 대한 해명을 기본과제로 해 중세 지성사를 재조명한 《중세의 아름다움》은 큰 의미가 있다. 저자는 중세는 암흑의 시대가 아니라 ‘다채로운 빛의 시대’였다고 말한다. 묻혀버린 중세를 재발굴하는 것이 단순히 과거를 돌아보는 차원에 그치는 게 아니다. 주류 시각으로 기술된 미학 또는 미술사는 '아름다움'의 의미와 작품 해석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를 새롭게 재편하는 담론을 생각할 때 중세미학의 재발견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암흑의 시대’라고 가르치던 학교 속 역사 교과서의 유통기한은 끝난 지 오래다. 이제 ‘암흑’에 가려진 중세의 다채로운 면모를 찾으려는 연구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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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증 - 사이코 북스 03
이반 워드 지음, 태보영 옮김 / 이제이북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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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는 진화에 핵심적인 생존의 필수 요소이다. 진화론적으로 볼 때 공포 자극에 대해 불안을 느끼지 않는 사람보다 여기에 과잉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의 생존 가능성이 높다. 대부분 사람은 뱀에 공포를 느낀다. 뱀에 대한 공포는 진화론적 접근 방식이 통용된다. 오랜 야생 생활을 한 원시 인류는 뱀을 위험 대상으로 인식했다. 따라서 뱀에 대한 공포는 원시 인류가 위협적인 존재에게 대항하며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체득한 습성이라는 점에서 진화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고소공포증이나 광장공포증처럼 실질적인 위험이 실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느끼는 공포를 ‘공포증(phobia)’이라 부른다. 공포증이 신체적 반응(경직된 몸, 식은땀, 두근거림 등)을 일으키는 원인에 대해선 아직 명확한 과학적 근거가 없다. 프로이트(Freud)의 제자인 어니스트 존스(Ernest Jones)는 공포증을 부조화, 모순의 요소들이 포함된 감정 상태라고 규정했다. 그리하여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공포증을 바라본다면, 공포증은 ‘비합리적인 두려움’[1]이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한 진화론적 측면만으로 공포증이 발생하는 원인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포증을 진화의 산물로 보는 관점이 ‘생물학적 이론’이라면, 정신적 외상(trauma)이라는 자극이 가해져서 공포증이 유발된다고 설명하는 것은 ‘외상 이론’이다. 앨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영화에는 정신적 외상에 시달려서 극심한 공포에 시달리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히치콕은 이런 인물들의 동기를 설명하거나 극적인 결말을 유도하기 위해 외상 이론이 반영된 장면을 연출했다. 이반 워드(Ivan Ward)《공포증》(이제이북스, 2002)은 히치콕의 영화 <새>에 반영된 외상이론과 영화에서 표현된 등장인물의 공포증을 분석한다.

 

프로이트는 공포증을 어떻게 봤을까? 그는 공포증을 ‘마음속에 있는 공포의 근원’으로 가정했다. 아이들이 등교를 거부하는 증상을 ‘학교 공포증’이라고 한다. 학교 공포증이 있는 아이는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들을 만나기 두려워서 등교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아이의 등교 거부가 아이의 내면에 있는 ‘불안’과 관련되어 있다고 봤다. 학교 공포증이 있는 아이의 애착 대상은 엄마다. 아이가 엄마와 떨어져 있으면 불안해지고 안정감을 찾지 못한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유년기의 병적 불안’이 공포증 형성의 전제 조건이라고 주장했다.

 

《공포증》은 문고본 형태로 만들어진 책이라서 깊이 있는 내용이 부족한 편이다. 이 책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의존하다시피 공포증을 설명하고 있어서 공포증에 대해 다층적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저자는 멜라니 클라인(Melani Klein)의 이론을 인용했지만, 그녀는 프로이트 이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정신분석학자이다.

 

불안에서 비롯된 공포증은 친숙하지 않은 환경(또는 대상)에 적응하고자 나타날 때 나타나는 인체의 가장 기본적인 반응이다. 그러므로 공포증은 꼭 병적인 상황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정상적인 사람들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는 증상이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위험이나 고통이 예견될 때, 또는 예기치 않은 상황에 직면했을 때 공포증을 경험하게 된다. 공포증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공포증은 내 몸에 위험한 것이 아니라 나를 보호하기 위한 반응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을 피하지 말고 맞서는 태도가 중요하다. 불확실한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공포증은 가까워서도, 멀어서도 안 되는 어정쩡한 동반자다.

 

 

 

[1] 《공포증》 14쪽

 

 

 

 

 

 

※ Trivia

 

 

 

* 사자, 마녀, 의상(衣裳) : 가상의 위험들

* 그들은 말을 쏘았다, 그렇지 않은가? - 상징으로서의 공포

* 공포, 공포 : 에드거 앨런 포

 

 

 

이 책의 목차 제목이다. 밑줄이 친 목차 제목은 유명한 소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자, 마녀, 의상’C.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나니아 연대기》(시공주니어, 2005)의 1부 제목(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이다. 원제의 ‘Wardrobe’을 ‘옷장’, ‘옷(의상)’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공포증》의 역자는 루이스의 소설을 잘 몰라서 그런지 ‘옷’으로 번역했다.

 

 

 

 

 

 

‘그들은 말을 쏘았다, 그렇지 않은가?’호레이스 매코이(Horace McCoy)가 1935년에 발표한 소설의 제목(They Shoot Horses, Don’t They?)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작품은 아미티지 트레일(Armitage Trail)의 소설 『스카페이스』와 함께 동명의 번역본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의 역자는 러브크래프트(Lovecraft)의 작품을 번역한 정진영 씨로 ‘정탄’은 그의 필명이다. 아미티지 트레일과 맥코이의 소설 모두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 시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고, 두 작품 모두 영화화되었다.

 

 

 

 

 

 

 

‘공포, 공포’는 에드거 앨런 포(E. A. Poe)의 소설에 나오는 명대사를 패러디한 것으로 추정된다. 포의 미완성 장편소설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창비, 2017)의 주인공은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만나는 순간 두려움에 떨면서 ‘테켈리 리, 테켈리 리(Tekeli-li, Tekeli-li)’라고 외친다. 주인공이 엄청난 공포를 느끼면서 외치는 알 수 없는 말을 이반 워드가 ‘공포, 공포’로 패러디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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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9 1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2-09 17:43   좋아요 0 | URL
이것저것 주워들은 정보를 취사선택해서 정리하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고요, 책과 공부에 대한 애정이 많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단, 이게 너무 과도하게 지식을 표출하면 잘난 척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어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글을 쓰면 내용 조절을 하는데 쉽지 않네요. ^^;;
 
양육가설 - 부모가 자녀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탐구
주디스 리치 해리스 지음, 최수근 옮김, 황상민 감수 / 이김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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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너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강북에서 쭉 살자꾸나.

강북은 네가 살기 좋은 곳이란다.”

 

, 아버지. 하지만 저는 친구들 따라 강남에 가고 싶어요.”

 

    

 

 

만약 내 아이만큼은 제대로 키울 것이다라고 다짐한 부모라면 양육가설(이김, 2017)을 읽고 당혹스러울 것이다. 이 책을 쓴 심리학자 주디스 리치 해리스(Judith Rich Harris)가 강조하는 교육방식은 일반적인 부모가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이기 때문이다.왜 아이는 부모가 키우는 대로 자라지 않는가?” 이것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부모가 어떻게 행동하고 교육하느냐에 따라 자식도 그렇게 닮아간다는 뜻이다. 양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교육 전문가들은 부모에게는 자식을 사랑하는 만큼 옳고 그름을 인식시켜줄 책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아동발달에 대한 교재를 썼던 해리스도 잘못된 행동을 한 아이의 책임은 부모의 양육 태도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리스는 양육에 대한 믿음을 의심한다. 그녀는 양육‘(가정)환경을 동의어로 사용하는 교육법이 타당한지 검토하기 위해 양육에 대한 통념을 뒤집는 각종 연구결과와 사례 등을 제시한다. 그리하여 그녀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부모의 교육이 아이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양육은 하나의 가정(假定, assumption)에 지나지 않는다. 1998년에 양육가설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심리학계와 교육계는 이 책을 두고 찬반양론으로 첨예하게 맞섰다. 이제야 나온 국내 번역본은 2009년 개정판을 저본으로 삼았다.

 

심리학을 공부할 때 프로이트(Freud)B. F. 스키너(B. F. Skinner)를 지나칠 수 없다. 저자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양육가설의 진정한 창조주. 프로이트는 부모의 양육 방식과 교육을 본격적으로 접하는 유아기에 인간의 성격이 형성된다고 했다. 스키너는 행동주의 심리학을 완성한 학자로 유명하다. 그는 본성이냐 양육이냐 하는 논쟁에서 철저히 양육의 편을 들어줬다. 스키너는 모든 사람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보상체계를 만든다면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영향을 받은 교육심리학자들은 부모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유아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모든 사회에는 상황과 장소에 따라 다양하게 연결되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문화를 구성하게 된다.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학교, 나아가 사회 전체에 이르는 다양한 관계가 형성되면서 사회질서의 모습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가정은 인간의 사회화 과정에서 가장 근본적인 임무를 수행한다. 이런 이유에서 가정은 사회적 관습에 따른 올바른 가치판단의 기준이 형성되는 곳이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를 안정적으로 성장시킬 의무가 있다. 부모로부터 배운 각종 생활양식과 규범은 아이에게 그대로 전수되어 학교 교육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가정에서 부모의 역할이 아이의 일생을 좌우한다고 우리는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다. 그런데 양육가설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했던 사회화의 통념을 깨뜨린다.

 

해리스는 양육 가설을 대체하는 집단사회화(group socialization)’ 이론을 제시한다. 성장 중인 아이들이 끼리끼리 또래 집단을 형성하고 집단 활동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한편 청소년기는 사회화가 가장 왕성하게 이루어지는 단계이다. 청소년들은 부모가 있는 가정환경보다는 자신을 둘러싼 같은 나이, 같은 성별의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외부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고 또 모방한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듯이 아이들은 서로 친할수록 비슷한 언어(특히 또래 친구들끼리 통하는 은어와 비속어)를 쓰고, 비슷한 행동을 한다. 그래서 해리스는 아이의 성격이 유전적 요인의 영향을 받게되더라도 언어 선택 및 비속어 사용은 환경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비속어를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듯이 가르쳐도 소용없다. 아이는 또래에 동화되기 위해 비속어를 쓴다. 비흡연자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는 비흡연자가 된다? 양육 가설을 믿는 부모는 우리 남편은 담배를 싫어하고, 아이는 착해서 담배를 피우지 않을 거예요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부모보다 친구들을 따라하려는 경향이 있고, 친구들의 영향을 받은 아이는 부모가 키우는 대로 자라지 않는다. 여러분의 착한 아이는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친구들과 맞담배를 피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부모를 속일 수 있다[1].

 

양육가설이 나온 지 이십 년이나 지났다. 부모의 의무교육 및 책임을 강조하는 기존 교육방식의 근간을 뿌리째 흔들리게 하는 그녀의 주장은 지금 봐도 과감하다. 최근 청소년 폭행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소년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고, 가벼운 죗값을 받는 폭행 가해자들을 감안해서 폭행 사건의 책임이 부모에게 전가해야 한다고 보는 여론도 있다. 양육가설에 따르면 폭행 가해자의 부모는 아이를 잘못 가르쳤으니 피해 학생들의 고통을 생각해서 법적 책무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양육가설을 의심하는해리스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본다면 가해자 부모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의견이 나올 수 있다.

 

양육가설을 의심하는 저자의 주장을 자세히 알고 싶거나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직접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읽어보도록 권한다. 저자는 양육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저자는 자신의 주장이 자녀 교육을 소홀히 하는 철없는 부모들이 인용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2].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시작할 때부터 저자는 양육가설을 의심한다라는 식의 표현을 반복해서 썼다(몇 번 썼는지 직접 세어보시라). 내가 이 글을 쓰기 위해 고심해서 선택한 단어인 의심거부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곤란하다. 저자는 근거가 불충분한 양육가설이 모든 부모와 자녀들에게 적용되는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자녀교육이 서툰 남편들은 자식의 행동에 마음에 안 들면 아내에게 불만 섞인 핀잔을 늘어놓는다. 아니, 도대체 애를 어떻게 키웠기에 이 모양이야!” 이 말인즉슨 애를 잘못 키운 건 엄마 탓이라는 뜻이다. 분명 양육자는 부모 두 사람인데, 일부 남편들은 아이를 낳아줬고 집에만 있는 아내를 진짜 양육자라고 여긴다. 남편들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은 자녀 양육에 책임이 없다고 믿는다.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서 내 아이만큼은 똑똑하게 키우고 싶다고 생각만 하는 남편이 양육가설을 읽는다면 아이를 노심초사 돌봐야 하는 아내의 고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이다.

 

 

 

 

[1] 양육가설453

[2] 양육가설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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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6 1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2-07 16:45   좋아요 0 | URL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양육 책임을 묻는 듯한 말을 여러 번 한 적이 있어요. 그 말을 옆에서 들을 때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페크pek0501 2018-02-07 13: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을 키우면서 흔히 놓치기 쉬운 점이 있어요. 두 형제가 똑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 똑같은 환경에서 자랐다고 착각해서 놓치는 것. 두 아이의 환경이 같지 않다는 것이에요. 아이들은 님께서 쓰신 것처럼 친구의 영향을 많이 받아요. 또래 집단의 힘은 세지요. 어떤 친구를 사귀느냐 하는 것도 중요한 변수이고 또 어떤 경험을 했느냐 하는 것도 중요한 변수예요. 그러므로 똑같은 환경에서 자라나는 건 아니라는 걸 부모가 놓치면 안 될 것 같아요. 두 형제가 학교 환경까지 같지는 않잖아요.

어쨌든 좋은 부모가 된다는 건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저도 아이 키우면서 많이 부족했던 저 자신을 느끼곤 했어요.

cyrus 2018-02-07 16:49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남매, 형제, 자매뿐만 아니라 쌍둥이의 성격 또한 모두 같을 수 없어요. 자녀는 부모라는 내부 변수보다는 친구라는 외부 변수에 더 영향을 받기 때문에 어떤 친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질 수 있어요.

최수근 2018-02-07 1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자입니다. 서평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cyrus 2018-02-07 16:52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책 읽는 데 가독성에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책의 만듦새가 좋았습니다. ^^
 
지식의 표정 - 인공지능 시대, 인간의 길을 탐색하는 열두 걸음
전병근 지음 / 마음산책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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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missive’순종적인’, ‘고분고분한을 뜻하는 단어다. 그렇다면 마그리트(Magritte)의 그림 제목을 직역하면 순종적인 독자(The Submissive Reader)’로 풀이할 수 있겠다. 마그리트의 그림에는 상식이 무너지고, 이성을 혼란에 빠뜨리는 모순이 있다. 마그리트는 그림을 통해 일상적으로 익숙한 인식의 틀을 바꾸려고 했다. 그는 우리가 당연한 현상이라고 여겼던 것이 사실은 아주 가변적인 특성을 보이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를 위해 그는 그림 속의 사물들을 엉뚱하게 배치하면서 관람객에게 충격을 주고 있다. 마그리트의 그림을 마주한 관람객들은 순종적인 독자처럼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순종적인 독자는 도대체 무얼 봤기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아마도 저 책 속에 독자가 살면서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세계가 펼쳐져 있으리라.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한 독자는 책에 헤어 나오지 못한다. ‘순종적인 독자는 마치 자석처럼 책에 이끌려 책을 읽는 재미에 푹 빠진다전병근의 지식의 표정(마음산책, 2017)은 독자들에게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지시하는 책이다. 이 책 속에 있는 열두 명의 인터뷰를 눈으로 읽노라면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상에 유연하게 적응하는 그들의 다양한 모습을 두루 만날 수 있다. 열두 명의 지식인들은 문학, 과학, 정치, 역사 등 각 분야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있다. 그들이 긴 세월을 내다보면서 뚜벅뚜벅 걷고 있는 지식의 길과 인간의 의미가 달라질 인공지능 시대를 바라보는 관점은 다르지만 읽고 쓰는 삶을 실천하는 모습은 다 똑같다.

 

대만의 문화비평가 탕누어(唐諾)는 독서를 경험해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바라보는 지속적인 경험이라고 말한다. 독자는 미지의 세계에 곤혹스러워한다. 그러나 훌륭한 독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색을 좋아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것이다. 독서를 즐기면서 느끼는 행복감은 새로운 책을 접할 때 생기는 곤혹감을 잊게 해준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는 서로 상충하는 지식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찾는 데 필요한 덕목으로 중용과 겸허를 꼽는다. 스웨덴 복지정책을 국내에 소개한 최연혁 교수는 정치교육을 통해 사회에 봉사하는 정치인을 육성하는 정치 전문화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새로운 것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독서, 논쟁이 불가피한 지식의 세계 속에 균형을 놓치지 않는 것 그리고 사회 발전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정치적 역량 강화는 성장하는 인간이라면 갖추어 할 기본적 자세들이다.

 

인공지능 기술 발전으로 인한 사회적 변화가 피부에 와 닿지 않은 사람들은 낙관적으로 장담하기 어려운 미래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막역한 걱정에 매달린 채 살아간다면 기술 발전을 통한 삶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역사가 유발 하라리(Yuval Harari), 인류학자 이상희, 진화생물학자 장대익은 공통으로 시대적 변화에 대응해 나갈 수 있는 기본적인 역량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변화는 역사의 흐름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자신들도 시대 흐름에 맞는 변화를 보여야 함은 물론이고, 새로운 것을 학습하는 태도를 지속해서 유지해야 한다. 과거를 넘어서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김명남은 번역, 이기호는 소설, 이충렬은 전기 문학에 투신하는 읽고 쓰는 인간이다. 이기호는 소설 읽기가 나 이외의 다른 사람과 더불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드는 정신적 훈련이라고 말한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몰입하는 인간이다. 한문학자 강명관, 문학평론가 유종호, 신경과학자 이대열의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상이 지금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류가 원해서 변화되고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변화를 익숙한 것의 상실이라는 부정적 선입견을 품고 있다. 변화하는 세상에 곤혹을 느끼지 않으려면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자신의 가치관을 열어두고 외부의 자극과 여러 현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계속해서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열린 마음으로 두려움보다는 변화를 당당히 받아들이고 인식과 시각을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을 때 변화를 수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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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3 1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1-15 12:43   좋아요 0 | URL
사람들은 돈벌이가 되는 신종 사업에 관심을 보이는 경향이 있어요. 비트 코인 열풍만 봐도 알 수 있어요. ^^;;

페크pek0501 2018-01-13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 1인이에요. 시대를 따라가기가 버겁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예전에 처음 컴퓨터를 배울 때도 그랬고 스마트폰을 처음 샀을 때도 그랬어요.
두려움보다는 변화를 당당히 받아들여야 할 텐데...

cyrus 2018-01-15 12:48   좋아요 0 | URL
솔직히 저는 뉴스를 보고서야 비트 코인 열풍을 알았어요. 새로운 유행을 빨리 알아내기가 쉽지 않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