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식인 - 서구의 야만 신화에 대한 라틴아메리카의 유쾌한 응수 서울대 인문 강의 시리즈 7
임호준 지음 / 민음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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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사순절(四旬節) 기간에는 예수의 행적을 생각하며 고기를 먹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사순절은 ‘40일’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으며 부활절까지 주일을 제외한 40일의 기간을 일컫는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사순절은 예수의 삶을 묵상하는 기간이자 경건의 훈련을 하는 경건한 기간이다. 카니발(carnival)은 사순절을 앞두고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며 즐기는 기독교 전통 축제이다. 카니발이란 말은 ‘육식 금기’를 뜻하는 라틴어 ‘carne vale’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가면과 화려한 복장을 하고 카니발에 참여할 수 있어 이때만큼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평등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은 시끌벅적한 축제처럼 보이는 카니발에서 인간의 깊은 내면을 열어 보여주는 유용한 열쇠를 찾아냈다. 인간은 질서에 순응하여 살면서도 동시에 전복을 꿈꾼다. 바흐친에 의하면 카니발은 인간의 이런 이중적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는 문화 현상이다. 카니발은 해방된 삶이다. 카니발 기간에는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모든 것이 무질서 상태가 된다. 보통의 삶에 제약을 가하던 모든 금기와 구속이 일시적으로 제거된다. 카니발은 ‘거꾸로 뒤집힌 세상’이다. 모든 금기가 제거된 카니발에서는 거꾸로 된 논리, 반대로 된 논리가 상식을 제압한다. 왕이 거지가 되고, 거지는 왕이 되며, 성직자는 모독당하고 광대는 추앙받는다. 권위는 추락하고 금욕주의는 조롱당한다.

 

사람이 인육을 먹는 풍습을 ‘카니발리즘(cannibalism)이라 한다. 이 용어는 과거 식인 풍습이 있다고 알려진 서인도제도의 카리브 인들을 가리키는 스페인어에서 유래됐다. 15세기경 서인도제도에 처음으로 가본 스페인 정복자들은 카리브 인들이 인육을 먹는다고 믿었다. 스페인의 후원을 받아 바하마 제도에 도착한 콜럼버스(Columbus)는 항해 일지에 카리브 해 식인종의 존재에 대해 언급했다. 역사적으로 사람이 인육을 먹는 행위는 여러 가지 이유로 행해졌다. 주술 혹은 미신이나 종교에 의해 인육을 먹으면 특별한 힘이나 현상이 나타나거나 먹은 사람이 생전에 갖고 있던 힘을 이어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먹을 것이 부족했을 때 생존을 위해 인육을 먹는 경우도 있다.

 

서구인들은 자신들의 우월성을 유지하려고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설정했다. 그러면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풍습과 신앙은 ‘야만인’의 특성으로 알려졌고, 서구인들의 상상력에서 나온 ‘식인종 신화’는 유럽 전역에 전파되었고, 식인종은 야만인의 표본이 되었다. 야만인은 문명인에게 길들지 않은 존재를 지칭했다. ‘식인종 신화’는 야만인들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즐거운 식인》은 문명인들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식인 풍습을 ‘카니발’의 관점으로 재해석한 라틴아메리카의 ‘식인주의’를 소개한다. 식인주의. 국내에서는 생소한 용어이지만, 1920년대 브라질에서 처음 시작된 저항 예술을 설명하는 데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개념이다. 식인주의는 라틴아메리카의 주체적인 문화적 정체성이다. 라틴아메리카의 모더니스트들은 식인주의를 내세워 식인종 신화에 맞서 유쾌하게 응수했다. 야만인 담론, 식인종 신화가 유럽인의 문명 우월주의를 부각하기 위해 식인 풍습을 ‘혐오 행위’로 보게 했다면, 식인주의는 유럽인의 시각이 반영된 식인 풍습을 라틴아메리카인들이 즐기는 ‘축제 행위’로 바꾸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바흐친이 확인한 ‘카니발’의 특징과 비슷하다. 라틴아메리카의 식인주의는 서양 문화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골라 먹는’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식인주의 운동은 유럽 문화를 씹고, 뜯고, 맛을 보면서 소화해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자산으로 만들려는 문화 운동이다.

 

라틴 아메리카인들에게 있어서 식인주의는 모든 민중이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진정한 자유와 평등한 웃음이다. 라틴 아메리카 지성인들은 식인주의 운동을 통해 유럽 식민주의적 권력의 억압과 위선을 깨부수고, 자신이 속한 세계에 생성과 갱생의 기운을 불어넣으려고 했다. 카니발은 유럽 기독교 문화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흐친이 현재까지도 살아있다면 유럽을 ‘씹어대고 배설하는’ 라틴 아메리카의 카니발 문화를 보면서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그는 카니발에 주목한 책을 다시 썼을 것이다.

 

 

 

 

※ Trivia

 

* 11쪽

어떨결에 → 얼떨결에

 

 

* 39, 40쪽

1943년 → 14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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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8-12-07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흥미롭군요. 일단 보관함에 담았습니다.

cyrus 2018-12-08 08:20   좋아요 0 | URL
라틴아메리카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책입니다. ^^

2018-12-07 14: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2-08 08:39   좋아요 0 | URL
기독교, 이슬람교는 중동에서 시작됐어요. 서로 다른 면이 많지만, 조금은 비슷한 면도 있어요. ^^

페크pek0501 2018-12-08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복과 지배는 어느 쪽에서 보느냐,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거역할 수 없는 진리가 있지요. 모든 인간은 존중 받아야 한다는 것.

오자를 잘 밝혀 놓으셨네요.

cyrus 2018-12-09 16:08   좋아요 0 | URL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 현상은 다양한 관점으로 볼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 평가가 달라질 수 있어요. 모든 인간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진리는 절대 진리죠.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관계를 읽는 시간 - 나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바운더리 심리학
문요한 지음 / 더퀘스트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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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사람은 친숙한 것을 좋아하고 낯선 것을 불편해한다. 심리학에 ‘단순노출 효과(Mere Exposure Effect)라는 용어가 있다. ‘단술노출 효과’란 자주 보는 것만으로 호감이 증가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미 알고 있는 악마가 아직 알지 못하는 악마보다 낫다’라는 서양 속담처럼 새로운 것은 호기심과 동경을 불러일으키지만, 불확실성에서 비롯되는 불안감과 경계심도 동반한다. 따라서 친숙함은 익숙한 것에 길들게 함으로써 낯선 상대방에 다가서거나,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는 동기를 저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낯선 사람, 낯선 경험에 대한 새로운 접촉과 관계 맺기를 가로막는 것이다. 따라서 풍성하고 성숙한 인간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친숙한 것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

 

흔히 인생을 항해에 비유한다. 항해에는 반드시 여러 개의 목적지가 있다. 그곳에는 가족, 친구 등이 모여 살고 있다. 인생이란 항해에서 어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것인지 명확히 결정해야 한다. 한 번뿐인 인생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지, 어떤 사람들과 함께 항해하고 싶은지 고민해야 한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려면 ‘건강한 인간관계’로 나아가는 길목을 알려주는 ‘나만의 항해 지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해마다 달라지는 지리 정보를 재빨리 감지하고 이를 지도에 반영해 업데이트를 해야 하듯이 ‘인간관계 지도’도 상황에 맞게 바로바로 업데이트할 수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모든 인간관계의 틀을 가정 안에서 배우게 된다. 사회에서 맺는 동료나 친구와의 관계는 이미 형제자매와의 관계에서 그 틀이 만들어진 것이며 결혼 후의 부부관계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를 보고 배운다. 어머니의 애정은 아이에게 안도감을 주었고 어머니가 곁에 있을 때 아이는 낯선 주변을 더 많이 탐색했다. 심리학자 존 보울비(John Bowlby)의 연구에서 볼 수 있듯이 어려서 어머니와 올바른 애정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아동은 성장한 이후 대인관계를 잘 갖지 못한다. 그러나 무조건 자녀를 사랑하기만 한다고 해서 자녀가 올바르게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의 과보호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부모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성향이 강하고,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것을 두려워한다. 애착 대상, 즉 부모로부터 분리될 때 또는 분리될 것을 예상했을 때 느끼는 불안을 그대로 방치하면 대인관계를 피하거나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어린 시절 몸에 밴 이러한 애착의 패턴들을 지닌 채로 가정을 떠나 사회로, 결혼 관계로 나아간다. 우리가 흔히 관계 맺기 어려워하거나 빈번히 실패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정확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 문요한은 인간관계 속에서 나도 모르게 저지르게 되는 실수와 갈등의 원인이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깨우쳐주고, 동시에 인생의 발목을 잡는 과거의 관계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조언한다. 《관계를 읽는 시간》을 관통하는 열쇳말은 ‘바운더리(boundary)다. 바운더리는 인간관계에서 ‘나’와 ‘내가 아닌 것’을 명확히 구분하는 자아의 경계인 동시에 관계의 교류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통로이다. 건강한 바운더리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은 두 가지 기능을 필요로 한다. 하나는 ‘보호’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교류’이다. 전자는 자신을 돌보는 것이며, 후자는 상대방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인간관계가 생긴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인간은 부정적인 자아상을 갖게 되는데, 이 책에서는 순응형, 돌봄형, 지배형, 방어형이라는 4가지 틀로 나타난다.

 

《관계를 읽는 시간》은 인간관계 변화의 출발점으로 ‘바운더리’에 주목한다.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되풀이하고 있는 관계 방식, 이것을 이해하고 바꾸지 않는 한 관계에서 겪는 괴로움도 반복된다. 그 관계 틀을 알아보고 바꾸는 여정은 ‘바운더리 심리학’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한다. 바운더리 심리학은 ‘지금 모습으로 충분하다’는 위로의 심리학이 아니라 관계를 재구성하는 ‘변화의 심리학’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관계 맺음이 유난히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은 성장 과정을 뒤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런 성찰을 바탕으로 지금 여기에서 내가 또 어떠한 형태의 애착 관계를 반복하고 있는지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 이 책이 그럴싸하게 심리학을 이용한 자기계발서와 구별되는 점은 단기적으로 처방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스스로 문제 원인을 알아볼 수 있게끔 하는 데 있다. ‘족집게’ 자기계발서가 당장의 문제 상황을 잘 해결해 주는지 몰라도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는 못한다. 우리가 관계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방향을 설정하지 않으면 복잡하게 꼬여버린 인간관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또 관계가 회복한다고 해서 그다음부터는 아무 문제없이 잘살게 되는 건 아니다. 살아가면서 문제는 계속 생길 수밖에 없다. 저자는 사람을 만나면서 반드시 겪게 될 사회적 고통(이별 또는 상대방 간의 갈등에 직면하면서 느끼는 고통)은 관계를 잘 돌보라는 신호라고 말한다. 어떤 난감한 상황을 만나든 그 상황을 풀어가는 과정이야말로 자신의 관계를 돌아볼 기회이다.

 

개별적인 인간은, 그리고 그런 두 인간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당연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 형성된 내 관계에 대한 바운더리는 몸과 마음에 익은 습관과 같아 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쉽지 않다. 자신의 삶에서 상대방과의 관계가 늘 불편했다면,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중요한 문제라면,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나 자신과 정직하게 만나는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대화하는 일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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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12-02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자신과의 대화는, 저의 경우엔 일기 쓸 때와 혼자 산책할 때 가능한 것 같습니다.

cyrus 2018-12-02 12:39   좋아요 1 | URL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일정에 맞추면서 살아가게 되면 내 자신을 제대로 돌아보는 여유마저 줄어드는 같아요. 그래서 혼자서 나만의 시간을 보내기가 힘들어요.
 
모두가 인기를 원한다 - 관심에 집착하는 욕망의 심리학
미치 프리스턴 지음, 김아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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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독서 모임에 새로운 사람이 참석하면 자기소개를 해야 한다. 요즘은 모임 내에서 자기소개할 때 나이와 직업이 아닌 ‘관심사’를 얘기한다. 한 번은 내 소개할 때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내 소개가 끝나자마자 독서모임 지인 한 분이 나를 ‘알라딘 파워 블로거’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민망해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는 사실대로 말해야 할 것 같아서, 파워 블로거는 아니라고 말했다.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생각이 든 것은 파워 블로거라고 불릴 만한 기준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당연히 파워 블로거는 인기가 많다. 하루 평균 블로그 방문자 수, 이웃 수, 포스트의 ‘좋아요’ 수, 댓글 수 등이 많으면 파워 블로거로 볼 수 있다. 내 블로그의 하루 평균 방문자 수는 100~150명이다. 가끔 200명 이상이 나올 때도 있다. 하지만 구글의 검색 로봇 작동으로 인해 방문자 수가 비정상적으로 많이 나오는 경우일 수 있다. 현재 내 블로그를 즐겨 찾는 이웃 수는 1655명이다. 수치상으로 보면 많다고 볼 수 있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파워 블로거라고 명함을 내밀기도 민망스럽다. 2년 전부터 적극적으로 대화하려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이웃을 잘 받지 않는 편이고, 자체적으로 이웃 수를 줄이고 있다.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내 관심사를 알리고 싶지 않다.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온 이웃들의 글만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피하게 됐고, ‘좋아요’ 수와 댓글 수는 일 년 전과 비교하면 눈에 띄게 많이 줄어들었다. 계속 이런 상황이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 아무리 혼자가 편한 사람이라도 인기에 향한 욕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블로그나 SNS를 계속하면 친밀감뿐만 아니라, 자기 현시 욕구나 ‘자신의 좋은 점을 알아주면 좋겠다’는 감정 욕구도 생긴다. 블로그와 SNS는 인정의 욕구를 모델로 하고 있다. 자신의 사진이나 글을 봐줄 사람이 없다면 블로그와 SNS는 무용지물이다. 이 두 매체는 타인에게 자신을 전시하는 행위, 그리고 이에 동참하는 타인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이 결합은 곧 자신이 타인에게 어떤 식으로든 인정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신은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고 생각하게 된다. 오래전 블로그 활동에 푹 빠져 있었을 때, 내가 알라딘에서 인기가 많은 줄로만 알았다. 시간을 지난 뒤에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엄청난 착각이었다.

 

《모두가 인기를 원한다》는 내 과거 속의 착각을 되돌아보게 만든 책이다. 이 책은 인기와 타인의 인정을 얻고 싶은 인간의 심리와 그 원인을 치밀하게 밝힌다. 저자는 2001년 예일대 교수 시절에 ‘또래 집단에서의 인기’라는 제목의 강연을 열어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책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누구나 인기를 원한다. 우리가 인기를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뇌의 반응이다. 그런데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정말 어렵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호감을 사고, 박수를 받는 게 생각만큼 만만치 않다. 남들한테 잘 보이려고 적극적으로 다가왔더니만 오지랖 부린다며 싫어하고, 그냥 조용히 지내면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으면 왠지 상대방의 무심한 반응에 서운한 마음이 든다. 이렇듯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흔히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입맛에 맞게 나를 바꾸거나 ‘대화 좀 하자’는 식으로 상대방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기 위해 애쓴다. 결국, 우리는 혼자가 되거나, 다른 사람들의 지지를 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인간의 타고난 욕망은 우리 삶에 지속해서 영향을 준다.

 

그런데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인기가 많은 사람이 되면 행복할까? 인기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원만하고 폭넓은 인간관계의 척도를 SNS상의 ‘좋아요’ 수치나, 자신에 대한 언급 즉 ‘태그’를 통해 증명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정을 받아야 행복한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에 저당 잡힌 인생을 사는 셈이다. 저자는 인기를 ‘지위(status)‘호감(likeability)으로 나누어 인기의 속성을 분석한다. 지위형 인기는 누구나 원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인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호감형 인기는 상대방의 기분을 좋아지게 하게 만든다. 호감은 함께 하면 즐겁거나 친근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저자는 호감형 인기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지만 대부분 사람은 지위형 인기를 선호한다. 왜냐하면 자신보다 높은 지위를 가졌거나 영향력이 높은 사람을 보기만 해도 뇌의 보상 중추가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지위형) 인기를 향한 욕망을 조절하기는커녕 의식조차 하지 못한다. 이렇다 보니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지 못한다. 그들은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 답답해하며 괴로워하면서도 자신이 인기 없는 이유를 남 탓으로 돌린다. 상대방을 손쉽게 통제할 정도로 지위를 가진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서열화한다. ‘인간관계의 서열화’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갑질’이라는 부작용을 초래한다. 과도하게 지위를 통해 자기 존재 증명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들의 행동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불쾌감을 주는지 깨닫지 못한다.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뇌는 타인을 우등하거나 열등한 존재로 분류한다.

 

모든 인간관계의 핵심은 ‘호감’이다. 인간관계 문제로 힘들어하고 있다면 혼자 끙끙 고민하는 대신 이 책을 읽어보자. 어떤 유형의 인기를 추구했는지, 호감을 얻는 데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에 따라 어떻게 삶이 변화했는지 추적한 연구 결과는 그동안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인기의 강력한 영향력을 증명하는 동시에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을 알려준다. 블로그와 SNS은 갈등과 변화 대신 안정과 평안만을 갈구하는, 인정 욕구가 강한 사람에게 최적화된 공간이다. 이 속에서 우리는 타인에게 인정을 받을 때 삶 전체가 행복하고 의미 있다고 느끼고, 인정받지 못하면 자신은 불행하고 살 가치가 없다고 느낀다. ‘친구’와 ‘추종자’만 남아 있는 거울로 이루어진 온라인 공간은 우리의 뇌를 취하게 한다. 과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 Trivia

 

 

리뷰 제목은 타니가와 니코(谷川ニコ)의 만화 제목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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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2 17: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1-02 17:07   좋아요 2 | URL
알라딘에 접속해서 직접 만나지 않더라도(못하더라도) 책 얘기만 해도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느낌이 나지 않네요. 제가 이런 말을 하니 알라딘의 ‘늙다리’가 된 것 같네요.. ㅎㅎㅎㅎ

독서모임 활동하고 있어서 그런지 얼굴 보면서 책 얘기하는 게 더 재미있어요. 만나면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영감을 얻거나 좋은 책을 알게 돼요. ^^

오후즈음 2018-11-02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봐야 겠습니다. 사실 인기 많은것보다 진짜 소통할수 있는 몇이 더 소중할수 있긴합니다

cyrus 2018-11-04 17:39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신뢰감을 느낄만하고, 마음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나기가 쉽지 않아요.

레삭매냐 2018-11-02 22: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인기가 있고 싶고 좋아요~를 백개
받고 싶습니다.

이웃도 사양하지 않고 받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
이 들 적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책
읽고 독후감 쓰고를 반복한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독서모임에 나가서
신나게 떠드는 게 이제 유일한 삶의 낙
이 되어 버렸네요.

cyrus 2018-11-04 17:42   좋아요 0 | URL
독서모임은 한 달에 한 두 번 정도 진행되니까 모임에 자주 오는 분들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크게 느껴져요. ^^

북프리쿠키 2018-11-03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러셀 할부지가 책을 읽는 이유는 첫째는 좋아서, 둘째는 자랑하고 싶어서 ^^; 라고 이야기 했네요.
때로는 부질없는 일들을 하며 사는 게
인생 아닌가 합니다.ㅎㅎ
파워블로거 맞습니다. 맞구요^^

cyrus 2018-11-04 17:48   좋아요 1 | URL
러셀 옹의 말씀이 제가 생각한 것과 비슷하네요. ㅎㅎㅎ

저는 남들이 좋아하는 책이나 베스트셀러를 읽지 않는 성격이라서 ‘아싸형 독서‘ 스타일이에요. 그래서 제 알라딘 서재 블로그 이름이 ‘개썅마이리딩‘입니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책이 뭔지 알고, 잘 고르는 인싸형 독서를 하는 사람들이 파워블로거가 될 가능성이 높아요. ^^

카알벨루치 2018-11-03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이런 담론은 너무 좋은 듯합니다 진짜~ㅋㅋ담론까진 아닌가 ㅎㅎ

cyrus 2018-11-04 17:50   좋아요 1 | URL
담론은 아니더라도 평소에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 느낀 점을 터놓고 얘기하는 건 좋은 일이에요. ^^

stella.K 2018-11-03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 알라딘 파워 블로거. 재미있는 소개야.
근데 그거 사실 아니니? 빼기는...
그래도 자기 소개는 좀 계발할 필요는 있겠어.
좀 없어 보인다. 알라딘에서는 있어 보이는데. 이상하지? ㅋㅋ

예전에 나도 하루 조회수 그 정도는 됐는데
북플 생기고 나서 급격히 줄어들어서 아예
조회수 카운터 제거해 버렸잖아.
나름 그게 내 인기도를 반영했었는데 말야.ㅠ

cyrus 2018-11-04 17:57   좋아요 0 | URL
저는 책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알라딘 블로그 있다고 얘기 안 해요. 알라딘은 아는데, ‘알라딘 서재‘, ‘북플‘을 모르는 사람이 많을 걸요. 북플은 책을 엄청 좋아하는 사람들만 모인, 세상이
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 마을 같아요.. ㅎㅎㅎ

블로그을 기반으로 한 ‘서재‘에서 SNS형 ‘북플‘로 바뀌면서 글 쓰는 스타일, 글 선호도도 달라졌어요. 이제는 사진 위주의 게시물이나 일상을 주제로 한 글을 좋아하죠. 저처럼 오로지 책 얘기만 하는 사람의 글은 재미 없어서 보는 사람들이 없어요. ^^;;

꼬마요정 2018-11-04 1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야말로 제 맘대로 책 읽는 타입이라 정말 아싸형 입니다. 사실 글도 잘 못써서 북플이 그냥저냥 기록장이 되어버렸지만요. 북플 하면서 긴 글 쓰기가 어려워졌어요. 폰으로 하다보니 글이 길어지지가 않아요ㅠㅠ 밀린 리뷰가 너무 많아요ㅠㅠ

글구 cyrus님 알라딘 파워 블로거 맞지 않나요? ㅎㅎㅎㅎㅎㅎ

cyrus 2018-11-05 11:48   좋아요 0 | URL
독서모임 열군데 가서 ‘cyrus’가 누군지 물어보면, 저를 모르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ㅎㅎㅎ
 
페터 비에리의 교양 수업
페터 비에리 지음, 문항심 옮김 / 은행나무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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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자료실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페터 비에리의 교양 수업》을 발견했다. 내가 제일 관심 있어 하는 ‘교양’이라는 단어에 눈길이 갔다. 교양 있는 사람이 되는 일에 거부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과연 어떤 사람이 교양 있는 사람인가? 교양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독일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페터 비에리(Peter Bieri)‘자신을 위해 행하는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 (음, 이렇게 쓰고 보니까 무슨 의미인지 감이 오지 않는군) 비에리의 정의를 쉬운 말로 풀이하면 이렇다. 교양은 본인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양 있는 사람은 어떤 것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이 지식일 수 있으며 사물 또는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현상,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수 있다. 교양을 쌓기 위해선 개인적인 호기심이라는 매개가 필요하다. 교양을 쌓는 행위의 근저에는 이런 물음, 즉 호기심이 놓여 있다. 따라서 호기심은 세계를 더 넓고 깊게 이해하려는 지적 열망에 불을 지핀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교양에 대해서 말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독서’이다. 대부분 부모는 자녀가 책을 좋아하며 많이 읽는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처럼 책을 읽으면 참되고 바른 사람이 되는 길, 지식과 교양을 쌓으며 어려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 등 책을 통해 세상 살아가는 길들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독서는 우리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비에리는 책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가는 데 급급한 독서만으로는 교양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어머, 이거, 내 얘기잖아!) 교양인은 책을 읽으면서 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책을 읽은 후에 변화하는 존재이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교양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처럼 책을 좋아하고 교양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간과하기 쉬운 것이 바로 ‘독서 이후에 생긴 인식과 행동 변화’가 아닐까 싶다. 결국,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내면에 큰 변화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감동 없는 독서를 한 셈이다. 이러한 독서는 고독한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자신의 교양을 스스로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지식은 나를 위한 것뿐만 아니라 남을 위한 것이다. 제대로 아는 사람은 가짜 지식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으며 그런 유혹에 빠지기 쉬운 사람이 희생자가 되는 것을 막아준다. 따라서 교양인은 나를 스스로 지킬 줄 알며 상대방을 지켜 주기도 한다. 그러나 간혹 교양의 힘은 남을 지배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교양의 힘이 남을 지배하고 공격하는 무기가 되지 않으려면 다양성을 인지해야 하고, 상대방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처음에는 아는 것에 대한 우월감을 가졌더라도 곧 그 마음을 거둘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적 과시를 통해서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다. 이런 욕망을 가진 사람은 일반적으로는 상대를 무시하면서 가르치려고 한다. 자신의 지식을 뽐내면서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고 그것을 통해 욕구를 채우려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타인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에 대해 진솔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교양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 또는 자아상에 대해서 잘 안다. 즉 자신의 결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자신의 결점을 받아들인다면 ‘완벽하고 숙명적인 것’에 대해 의식할 필요가 없다. 지금 알고 있는 최신 지식도 시간이 지나면 구식이 되기 마련이다. 또, 완벽한 인간은 없다. 완벽한 인간이 되기 위해 결점을 숨기면서까지 살아갈 필요가 없다. 자기방어에 치중한 지적 욕구는 부질없는 욕구이다. 치열한 지적 탐구나 성찰이 없기 때문이다. 비에리의 말에 따르면 교양인은 새롭게 자신을 점검하고 평가하는 쉼 없는 작업을 하는 존재이다. 그런 작업이 가능하게 하려면 호기심을 계속 살려야 한다.

 

이 책의 후반부는 문학과 교양의 관계에 대한 비에리의 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에리는 독자에게 왜 문학이 교양 쌓는 일에 중요한 것인지 알려준다. 그는 시, 소설 같은 문학 작품이 자신과 상대방의 내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문학적 이야기 속에는 인간의 복합적인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문학적 이야기는 수많은 등장인물과 그들이 처한 상황들을 마치 현재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야기를 읽는 독자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다층적인 존재인지 알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돌아보게 된다. 따라서 문학은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에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즘 사회는 오로지 대학 간판과 명함 따기를 위해서만 경쟁하고 공부할 뿐, 이 두 가지가 결정된 다음에는 거의 자기 성숙의 모색을 하지 않는다. 나는 대학 생활을 해 오면서 어렴풋이나마 교양의 중요성을 인식해 왔지만, 눈에 잡히는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기에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얇은 분량의 책(100쪽이 채 되지 않은 아주 가벼운 분량이다)은 나의 허점을 아프게 찌른다. 앞서 비에리가 강조했듯이 교양은 자기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자기에게 가장 필요한 교양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교양을 쌓겠다는 무리한 욕심을 내는 것보다 먼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면서 현재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그것이 교양 쌓기의 시작이다.

 

 

 

 

 

※ Trivia

 

 "아는 것이 힘이다.” 교양의 개념을 대표하고 있는 이 말에는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남을 지배하라는 뜻은 없습니다. (14쪽)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비에리가 이렇게 말한 의도가 궁금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이 명제가 오랫동안 식민지를 침략, 약탈하면서 구축한 서구 문명의 지배 질서를 유지하게 만든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여 왔다는 사실을 비에리는 전혀 모르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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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10-19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끝문장에서 - 반대로 그런 사실을 알고 비에리가 말한 것처럼 저는 느꼈어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로 저처럼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힘은 지배력을 갖게 되니까요.
앎을 찬양하되 지배는 하지 말라는... (아닌가요?)ㅋ

cyrus 2018-10-20 11:06   좋아요 0 | URL
페크님 말씀을 듣고 나서 제가 인용한 문장을 다시 읽어봤어요. 인용문 앞과 뒤에 있는 문장은 이렇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교양의 개념을 대표하고 있는 이 말에는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남을 지배하라는 뜻은 없습니다. 지식의 힘은 다른 데에 있습니다. 지식은 희생자가 되는 것을 막아줍니다. 뭔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불빛이 반짝거리는 곳으로 무작정 홀릴 위험이 적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이익 추구의 도구로 이용하려고 할 때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페크님 말씀대로 비에리는 “아는 것이 힘이다”의 악용된 사례를 지적하면서 경고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지식의 힘을 언급하고 있고요. 제가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너무 성급하게 생각했네요. 좋은 의견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

syo 2018-10-23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서부에 들러서 이 책을 빌려왔는데, 지금 제가 손에 든 이 책이 사이러스님의 손길이 닿은 그 책인가요?? ㅎㅎㅎㅎㅎ

근데 이러니까 갑지기 분위기 스토커...

cyrus 2018-10-23 19:59   좋아요 0 | URL
책의 분량이 적어서 오늘 하루 만에 다 읽을 수 있을 거예요.. ㅎㅎㅎ
 

 

 

섹슈얼리티(sexuality)의 해방은 멀고도 험하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규제를 통해 남성이 도달한 자기 만족적 섹슈얼리티 해방은 진보적인 의의를 지니지 못한다. 개인의 섹슈얼리티를 억누르는 사회적 제약을 해체하는 것이 섹슈얼리티 해방을 실천하는 ‘성 정치학(sexual politics)의 목표이다. 지금까지 성 해방론자들은 섹슈얼리티를 억압하는 기존의 질서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미셸 푸코 《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 (나남출판, 2010)

 

 

 

그렇지만 섹슈얼리티를 억압하는 기존의 질서에 반기를 들고, 여성의 성적 욕망을 긍정적으로 추구한 페미니스트들의 성 해방 담론조차 ‘섹스(섹슈얼리티)에 대해서 말하기’라는 성에 대한 근대적 담론의 개념 틀 안에 있었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에 따르면 근대사회는 섹슈얼리티의 각축장이었다. 부르주아는 (sex)에 대해 고백할 수 있는 공적 영역을 만들어내면서 ‘어느 성이 합법적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은밀하게 숨겨진 섹슈얼리티는 담론 안으로 들어오게 됐다. 섹슈얼리티는 권리 박탈과 금지를 통해서 규제만 되는 게 아니라 고백을 통해 재생산된다. 그가 규명한 문제는 성의 억압이 아니라 성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게 만드는 권력이다. 다시 말해 근대사회의 섹슈얼리티 담론은 인구를 관리 및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지식 권력(savoir-pouvoir)’의 산물인 것이다. 푸코는 근대사회에 시작된 이 지식 권력을 ‘교활한 속임수’라고 비판한다. 섹슈얼리티는 자유와 ‘자기 결정’의 보루인 것 같아 보여도 그것은 시대의 맥락에 따라 또는 권력의 의도에 따라 달라진다.

 

 

 

 

 

 

 

 

 

 

 

 

 

 

 

 

 

 

*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문학동네, 2008)

* 조형준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커뮤니케이션북스, 2016)

* 임옥희 《주디스 버틀러 읽기》 (여이연, 2006)

 

 

 

이러한 푸코의 논의는 성 해방 자체를 문제 삼은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입장과 궤를 같이 한다. 그녀는 섹스(생물학적 성), 젠더(사회적 성, gender), 섹슈얼리티 모두를 이성애적 지배 담론 중심의 문화와 사회가 반복적으로 주입해서 만들어진 구성물이라고 주장한다. 앞서 말했듯이, 섹슈얼리티와 마찬가지로 젠더도 역사적 맥락에 의해서 달라지는 가변적인 것이다. 이성애적 지배 담론은 전통적인 성(생물학적 성) 역할에 기반을 둔 이성애적 관계를 사회의 기본적이고 자연스러운 섹슈얼리티로 정당화하게 만든다. 이성애적 지배 담론을 지지하는 사회 속에서 말하게 되는 성은 이성애 관계에서 고려되는 ‘연애법’ 또는 ‘성애술’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이성애와 동성애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요청되는 성 역할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면서 만들어 간다. 이 반복적인 수행으로 인해 ‘이성애적 성 정체성’이 만들어진다. 이성애적 지배 담론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성별 이분법에 벗어난 성(sex)과 섹슈얼리티를 비정상 혹은 변태로 규정한다.

 

버틀러는 ‘남성 이성애자’, ‘여성 이성애자’만이 주체라고 보는 지식 권력인 가부장적 이성애주의의 문제점을 폭로하면서 페미니스트들이 바라던 성 해방은 ‘이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60년대에 불어 닥친 성 해방의 열기는 성별 이분법과 그것의 근원인 이성애적 지배 담론 둘 다 전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성(성)과 여성(성), 그리고 이성애와 동성애를 구분하는 것은 지식 권력이 만들어낸 섹슈얼리티 담론이며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발생시킨다. 그러나 이런 내부에 작용되는 지식 권력을 전복시키는 것 역시도 사회 내부의 실천 의지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이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포괄하는 급진적 학문이 되기 위해서는 일상에 맞닿아 있는 다양한 양상의 지식 권력을 분석하면서 균열을 일으켜야 한다.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 속에 다양한 목소리들이 있지만, 꼭 그것을 하나의 목소리로 수렴할 필요가 없다. 서로 다른 입장의 차이를 반목과 혐오로 치환될 수 없다. 그리고 그 차이를 무시하거나 덮어버려선 안 된다. 차이가 갈등과 분열이 되지 않으려면, 그 차이를 인정하고 이해해야 한다. 이것마저 어렵다면,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이 누군가에게 또 다른 배제와 폭력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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