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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일인자 1~3 세트 - 전3권 (본책 3권 + 가이드북) - 1부 ㅣ 마스터스 오브 로마 1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7월
평점 :
작가 이병주는 소설에 인간의 세 가지 감정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흐느껴 우는 여인의 눈물, 발랄한 청춘의 웃음소리 그리고 성난 열정의 외침.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은 문장은 감동이 없다. 그 문장은 이미 죽었다. 한 권의 책으로 태어나자마자 사산(死産)한다. 반면 활어처럼 살아 숨 쉬는 문장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는 독자의 마음을 꿈틀거리게 한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 1부 《로마의 일인자》의 문장은 살아 숨쉰다. 로마인들의 돈과 권력을 둘러싼 기득권 세력과 그 체제에 대항하는 신진 세력 간의 암투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1부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를 주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천민 출신의 마리우스는 귀족으로 상승하는 데 성공했지만, 근본 없는 혈통이 그 인생의 발목을 잡았다. 자신에 대한 잡음을 잠재우려면 자신을 드높이게 하는 권위의 정당성이 필요했다. 마리우스는 파트리키(구 귀족) 출신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첫째 딸 율리아와 정략결혼을 한다. 이로써 그는 관직의 사다리에 오르는 기회를 잡았다. 그의 눈앞에 원로원으로 향하는 문이 활짝 열려 있다. 귀족 출신이었으나 자신의 미래가 불투명했던 술라도 운 좋게 카이사르 가문과 관계를 맺어 원로원 세계에 진입한다.
일부 독자들은 마리우스와 술라의 이야기만 봐도 로마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돈의 위력은 로마를 쥐어 잡을 정도로 실로 어마어마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로마를 단순히 돈의 제국 또는 욕망의 제국으로 단정할 수 없다. 권력자들의 이야기만 쫓아가면 이 소설의 또 다른 재미를 놓친다. 우리는 《로마의 일인자》를 읽음으로써 특별한 교훈을 얻으려고 한다. 로마의 권력형 비리와 정경 유착은 우리나라 사회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대를 초월하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확인한다. 하지만 나는 《로마의 일인자》를 돈과 권력 앞에서 조종당하는 인간의 헛된 욕망을 반성하도록 이끄는 반면교사로 삼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반성? 어림없는 소리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교훈을 되새기는 마음은 좋다. 그렇다고 역사소설을 읽는데도 미래를 위한 교훈를 찾아내야 하는가. 이건 역사소설을 지루한 역사 교과서로 만드는 뻔하고도 너무 진지한 발상이다.
《로마의 일인자》의 주연은 마리우스와 술라가 아니다. 이 장대한 드라마 속에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서브 주연’이 있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의 《로마의 일인자》 부문 여우주연상을 뽑으라면 율리아, 율릴라 자매를 공동 수상자로 선정하겠다. 이들이 없었다면 《로마의 일인자》는 남자 냄새만 풀풀 나는 ‘남자들의 이야기(History)’가 될 뻔했다.
율리아와 율릴라 자매는 각각 이성과 감성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언니인 율리아는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았는데도 곧 쉰을 바라보는 마리우스와 결혼한다. 그녀는 마리우스에게 호감을 느껴서 결혼한다고 말하지만, 그녀의 혼인 선택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그녀의 아버지 카이사르다. 카이사르는 가문의 명예를 한 단계 상승하고 유지하려고 신진 귀족 세력 마리우스를 끌어들였고, 권력의 사다리를 올라가고 싶었던 마리우스 역시 그 절호의 기회를 절대로 놓칠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율리아 몰래 정략결혼 준비에 착수했다. 《로마의 일인자》 1권에 카이사르와 마리우스는 자신들이 서로 원하는 궁극적 목표가 무엇인지 확인한 뒤에야 정략결혼에 대해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다. 카이사르는 두 아들의 출세를 위해 딸을 마리우스에게 팔아넘기고, 마리우스는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귀족의 딸을 소유하는 꼴이 된다.
《로마의 일인자》 1권에 남긴 어떤 독자서평에서는 이 장면이 너무 작위적이라고 지적했다. 그건 로마 사회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무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로마인들은 우리처럼 사랑을 전제로 결혼하지 않았다. 그들은 결혼을 개인의 입신양명, 더 아나가 사회에 책임지는 로마인들을 생산하는 의무로 여겼다. 특히 로마 여성들은 자신이 원하는 남편을 만나 결혼할 권리가 없었고, 가장이 고른 신랑감을 만나야 했다. 그 순간부터 여성의 보호자는 가장에서 남편으로 바뀐다. 이제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자녀를 재생산하는 존재로 살았다. 그녀들은 남편에 대한 사랑하는 감정을 함부로 표출할 수도 없었고, 거리 밖에서 손을 잡을 수도 없었다. 로마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품위 유지를 강조했다. 그래서 율리아는 집정관 자리에 오르기를 원하는 남편만 바라보고, 남편을 향한 애틋한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는 듯한 태도를 유지한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남성중심 사회 체제 속으로 편입시킨다.
반면에 그녀의 동생 율릴라는 남성중심 사회 체제에 거부감을 드러낸다. 그녀는 언니와 다르게 감성적으로 생각한다. 술라를 너무 좋아해서 그에게 사랑의 징표와 같은 풀잎관을 건네준 사실이 발각되자 부모는 화를 낸다. 심지어 그녀의 어머니는 율릴라가 가족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면서 심한 말까지 한다. 이건 매컬로가 일부러 과장해서 만든 설정이 아니다. 그녀는 로마 시대에선 지극히 정상적인 장면을 아주 실감나게 묘사했다. 결혼하지 않은 처녀는 부모 동의 없이 남자와 교제할 수 없고, 결혼도 못했다. 키스와 성관계마저도 용납하지 않았다. 남성이 지배하는 로마 사회에서 여성들은 정숙함(pudicitia, 푸디키티아)을 유지해야 로마인으로 대접받을 수 있었다. 정숙하지 못한 여성은 개차반 취급을 받게 되고, 심하면 가족들의 손에 죽게 된다. 일종의 명예 살인이다. 율릴라는 운 좋은 편이다. 카이사르의 나이가 조금만 젊었으면, 가장의 권한으로 율릴라의 삶을 강하게 통제했거나 죽였을 것이다. 술라는 그녀의 가벼운 행동을 좋아하지 않는다. 틈만 나면 포도주를 마시고, 자신의 몸을 쓰다듬어서 애정을 갈구한다. 지금 시대라면 율릴라의 욕구 불만이 이해되나, 로마 세계에서는 풍기문란을 일으키는 일탈 행위로 규정되었다. 포도주를 마시는 여자는 문란하게 인식했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애정 어린 스킨십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이 드라마에서 율리아와 율릴라는 비운의 여주인공들이다. 율리아가 율릴라보다 행복해 보인다고? 천만의 말씀. 율리아가 지적이고 현명한 여자라고 해도 그녀는 남성을 복종하고,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수동적인 여성일 뿐이다. 과연 율리아의 사랑은 진실일까? 그녀 또한 고결한 여성으로서의 존재감으로 돋보이려고 마리우스를 선택했을 수도 있다. 반면에 율릴라는 술라로부터 애정을 받지 못하게 되자 화려했던 외모의 빛이 점점 사라진다. 그녀는 혼자 포도주를 홀짝거리면서 흐느껴 운다. 이미 아버지의 깐깐한 통제를 지겨웠던 그녀는 남편의 통제마저 감당하지 못한다. 그녀 곁에는 고통을 이해해주고,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어째서 여자들은 절대로 자기가 할 일을 직접 선택할 수 없는 거야?” (《로마의 일인자 2》 38쪽)
가슴에 성난 열정을 품은 율릴라가 고작 할 수 있는 건 자신을 고립하게 하는 남성들의 벽을 향해 아우성을 치는 것뿐이었다.
매컬로는 자신의 출세작 《가시나무새》를 능가하는 불후의 걸작을 남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에게 로마를 종이에 복원하는 일은 형벌과도 같았다. 매컬로는 남성들이 만든 거대한 제국의 울타리 속에서 갑갑하게 지내야만 했던 로마 여성들의 삶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개인의 삶을 보장받지 못했던 로마 여성들이 처량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매컬로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로마 여성들의 삶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종이 위에 자신의 감정들까지 쏟아부었다. 그것이 바로 흐느껴 우는 여인의 눈물, 그리고 성난 열정의 외침이었다. 고맙게도 매컬로는 로마 남자들의 이야기 속에 파묻힌 여성들의 진짜 목소리를 되살렸다. 이런데도 어딜 감히 매컬로에게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찬양하는 시오노 나나미를 비비려고 하는가. 단지 로마를 소재로 역사소설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매컬로를 남성 영웅을 예찬하는 작가로 이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로마는 영웅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로마의 일인자》는 로마를 좋아하는 남성들을 위한 소설이 아니다. 조금은 불편해도 여성들이 이 소설을 읽었으면 한다.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의 작동 원리를 볼 수 있다. 페미니즘에 관한 독서에 관심 많은 누님들에게 추천한다. 이 소설 속에 페미니즘이 보인다.
※ 딴죽걸기
* 「굳어 있던 술라의 심장이 깨어났다. 느긋하게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하면서 깨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갑자기 세상과 맞닥뜨린 기분에 휩싸였다. 제우스의 이마에서 완전히 자라고 무장까지 갖춘 아테나 여신이 클라리온을 불며 튀어나왔던 것처럼.」 (《로마의 일인자 2》 318쪽)
제우스와 아테나는 그리스식 표기다. 로마식으로 제우스는 유피테르, 아테나는 미네르바로 써야 한다.
* 이 글은 해당 도서 서평 이벤트 참여를 위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