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왕국의 게릴라들 - 삼성은 무엇으로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가
프레시안 엮음, 손문상 그림 / 프레시안북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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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다들 '뉴하트'의 디질랜드 속에서 헤맬 때, 나는 KBS에서 방영한 '쾌도(快刀) 홍길동'을 봤다. 지성과 김민정의 '뉴하트'가 세간의 주목을 받을 때, 드라마에 곧잘 폐인되는 나도 무척이나 궁금했어지만, 나는 그래도 홍길동과 허이녹(유이녹)을 택했다. 왠지 모르게 나는 이 드라마에 끌렸다. 사극은 드라마에 고정 시청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장르다. 현재 각 방송사에서 방영하고 있는 드라마 중에서도 사극이 차지하는 비율이 꽤나 높은 것은 그 이유에서다. 간혹 사극 열풍을 등에 업고 퓨전 사극을 표방하는 드라마들이 곧잘 있었지만, 정통 사극에 비해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번 '쾌도 홍길동'도 마찬가지였다. KBS에서는 전에도 '쾌걸 춘향'이라는 퓨전 사극을 방영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거의 재미를 못봤다.(지금 생각해 보는 '쾌걸 춘향'은 사극이라고 보긴 힘들겠다.)

이전까지의 퓨전 사극이 이처럼 재미를 못 본 것은, 그것이 '퓨전'으로서의 재역할을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정통 사극은 다소간의 첨가와 상상이 가미되긴 했겠지만, 그것의 역할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그것을 흥미롭게 전달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퓨전 사극은 이와 다르다. 우선 '퓨전'을 표방했다는 것은 고전과 현대를 절묘하게 조합하겠다는 의도를 내포한다. 그런 가운데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하며 현대적 의미를 강하게 담아내야만 그것이 흥행을 떠나서 성공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게 된다. 그간 퓨전 사극이 대체로 '실패'했다고 말할 때에는, 이러한 '퓨전'이 가지는 의미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는 뜻이 크다.

내가 볼 때 이번 '쾌도 홍길동'은 그런 식의 실패는 전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 퓨전 사극이 제대로 '성공'했다고 당당히 말해야겠다. 비록 그것이 '뉴하트'라는 강적을 만나서 대중의 관심을 강하게 끌지는 못했지만, '쾌도 홍길동'은 그것이 표방한 '퓨전 사극'으로서 그 역할을 최대로 발휘했고, 다양한 재미와 함께 당대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의미심장한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다. 지금까지 보였던 모든 사극(정통과 퓨전을 통털어) 중에 가장 성공적이고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담아낸 최고의 사극을 꼽으라면, 약간의 주저와 함께 이 '쾌도 홍길동'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쾌도 홍길동'은 고전소설 '홍길동전'을 각색한 퓨전 사극이다. '홍길동전'은 누구나 다 아는 고전소설로, 완전한 영웅소설이다. 비범한 재질을 가지고 태어난 홍길동이지만, 서자라는 출생의 한계에 의해 고난에 부딪히고, 그는 세상에 대한 변혁을 꿈꾸며 세상과 싸우다, 결국 율도국이라는 이상의 나라로 간다는 그런 이야기다. 그런데 이 퓨전 드라마는 대략적 구도는 고전 '홍길동전'과 비슷하지만, 그 전개과정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사회비판 의식도 당대적 의미를 무척이나 반영했다.

우선, 홍길동은 서자로 태어난 것, 재능이 출중한 비범한 인물로 태어난 것 등은 비슷하지만, 그가 커나가는 과정에서 영웅의 기상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설정이 다르다. 그는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인정하고 시정잡배로 살아간다. 그러던 중, 그는 자기와 같은 소외된 사람, 태생적으로 한계지어진 사람을 보고 그로부터 세상의 모순과 억압을 보게된다. 그러나 그는 그런 세상에 자신이 그들의 대신해서 맞서 싸울 의지를 갖지는 못하다가, 차츰차츰 변화되고, 자각한다. 세상과 맞서 싸워서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이다.

홍길동과 그의 일당들(이 드라마 속에서 활빈당은 홍길동과 그 일당들이 의도한 명명은 아니었다. 어쩌다 사람들이 지어준 것에 불과했다.)은 더이상 주저하지 않고 세상과 강하게 맞서 싸우고, 자신들이 선택한 왕을 세우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 왕의 세상과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애초에 다른 것이었고, 그들이 선택하여 세운 왕의 세상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세상을 꿈꾸는 것조차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그 둘의 대결은 불가피한 것이 된다. 결국 홍길동과 그 일당들은 고전과는 달리 다분히 현실적으로 강한 왕의 군대에 의해 죽어갔고,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그렇게 꿈으로만 남게 된 것이다.(이 드라마 속에서 홍길동이란 인물의 현실성은 고전과는 달리 굉장히 부각된다. 그만큼 그는 영웅의 면모는 절대 아니다. 이 드라마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영웅의 모습은, 일개의 시정잡배일지언정, 세상의 모순과 억압, 그로부터 소외된 자신과 민중을 보고, 격분하여 세상을 바꾸고 변화시키고자 미약하게나마 맞서 싸울 때, 민중들이 그에게 부여한 명예가 되는 것, 그것이 진짜 영웅이라는 것이다.)

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서, 홍길동과 그 일당들의 결말은, 확실히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죽음으로 끝났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러나 살아남은 노승과 곰이를 통해, 그리고 홍길동을 기억하는 많은 민중들의 가슴속에 홍길동은 영원히 살아있고, 여전히 세상을 변혁을 꿈꾸는 것이라고 말한다. 노승은 이렇게 말한다. "어느 세상에나 홍길동은 있다"고. 바로 이것이 이 퓨전 사극 '쾌도 홍길동'이 이 불합리한 사회에 전하는 메세지다.(참고로, 여주인공 이녹이란 인물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내가 볼 때 허이녹(유이녹)으로 분한 성유리가, 지금까지 그가 맡은 모든 역할 중에 가장 연기를 (성공적으로) 잘 한 것이 이 드라마다. 이녹 또한 많은 아픔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항상 밝고 착한 마음으로, 순수하게 살아가는 인물이고, 도저히 악할 수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녀가 끝내 홍길동과 함께 한다는 것은, 그렇게 순수하고 선한 민중들이 그 순수과 선함 그대로를 간직하고 착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홍길동이 꿈꾸는 그런 세상이란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 얘기를 너무 오래 장황하게 했지만, 그것은 이 '쾌도 홍길동'은 너무나 재미있었고, 감동적이었으며, 꿈과 희망의 메세지를 담은, 그러면서도 지금의 현실을 우습게 풍자하기도 하고, 비판적 칼날을 날리기도 한, 정말 성공적이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에 이제 종영했지만, 이 드라마의 마지막 메세지, 즉 "어느 세상(시대)에나 홍길동은 있다"는 메세지와 최근에 읽은 『삼성왕국의 게릴라들』이 강하게 겹쳐졌기 때문이다.

노승은 말한다. "어느 세상에나 홍길동은 있다"고. 세상을 노려보고, 그 불합리에 격분하며, 그러한 세상의 변화를 꿈꾸는, 그런 홍길동은 언제, 어디서나, 그 누구에게나 존재한다고. 그래서 세상은 조금씩 변화하고, 차츰 살만한 세상으로 변해가게 된다고. 그것이 느리고 더딜 것이지만. 그런데, 그런 노승의 말이 다만 허황된 이상에 지나지 않을까 우려할 필요는 없다. 그 증거, 곧 이 시대에 살아있는 홍길동들이 여럿 있음을 이 책 『삼성왕국의 게릴라들』은 증명하고 있다. 삼성 비자금을 양심고백한 김용철 변호사, 김용철 변호사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세상에 선전포고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삼성 족발 체제를 파헤집고 있는 김상조 교수, "나를 고소하라"며 삼성과 정권의 유착관계와 X파일 물고 늘어지는 노회찬 국회의원, 삼성과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심상성'이라 불리는 심상정 국회의원, 기자정신에 투철하여 모든 두려움을 누리고 공익과 민중을 위해 당당히 삼성 X파일을 취재 방송한 이상호 기자, 삼성의 무노조 신화의 폭력에 맞서 민주노조 건설을 위해 투신한 김성환 위원장 등이 그들이다.

이 책 『삼성왕국의 게릴라들』이 증거하는 이들은 대한민국, 곧 삼성 이건희 회장의 왕국에서 그 거대 왕과 맞서서 진정한 대한민국, 곧 이 나라 민중들이 주인되는 세상 건설을 위해 투신한 게릴라들이다. 아니 세상의 변화를 꿈꾸고, 세상의 악을 노려보고, 고발하며, 투철하고 혈혈단신 싸우는 이 시대의 홍길동들이다. 그래서 퓨전 사극 '쾌도 홍길동'을 보면서, 그리고 그 드라마가 세상에 전한 희망의 메세지를 보면서, 나는 이들을 떠올리고, 이들이 이 시대의 홍길동들이며, 그래서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들은 드라마 속의 홍길동처럼, 자신이 왜 세상과 맞서야 하고, 싸워야 하는지, 그들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차츰차츰 자신과 민중들이 고통당하고 착취당하며, 세상이 점점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부당하고 불합리한 불한당들의 억압과 폭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되었고, 그것과 당당히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닐까? 이들은 태어나길 영웅으로, 투사로 태어난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우리의 영웅들이다. 삼성과 맞서는 것은 그들 스스로도 말하듯이 두려움 그 자체다. 드라마 속의 홍길동도 그런 두려움에 갈등했다. 그러나 끝내 홍길동은 꿈꾸었다. 그 꿈은 이제 다시금 이 게릴라들, 아니 이 시대의 홍길동의 후예들, 분실들에 의해 다시 꾸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땅의 소외된 자, 핍박받는 자, 착취당하는 자, 불합리에 굴복하여 울고 있는 자, 아니 우리 모든 민중들에게 우리도 이제 '홍길동'이 될 것을 말하고 있다.

지금 이들이 싸우고 있는 것은, 그들이 맞서 싸워 이루어 낼,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이녹이와 같은 우리 무지하지만 순수한, 살아가는 그것 자체가 선한, 그런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으로 가는 데에, 삼성이 자꾸 걸린다. 그래서 그들은 삼성과 싸우고 있다. 이것이 희망 아닌가? 드라마 속의 홍길동처럼 다만 꿈으로만 기억되고 사라져갈지라도, 세상은 그 사라져가 만큼 변화할 것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 속에서 모든 민중들이 홍길동이었다면, 세상은 당장에 변화했을 것이고, 홍길동의 꿈은 현실이 되지 않았을까?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이 시대 홍길동이라 불릴 명단에 김용철, 사제단, 김상조, 노회찬, 심상정, 이상호, 김성환 다음으로 우리들의 이름을 하나씩 적어볼 생각은 없으신지? 내 이름도 저 어디 말단에 적힐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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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불온서적을 읽자!' 서평이벤트2 <삼성왕국 & 비정규직>
    from 진보생활문예 『삶이 보이는 창』 2008-08-27 15:42 
    의 서평이벤트 2 '불온서적을 읽자!' 서평이벤트2 이번에는 '불온서적을 읽자!' 서평 이벤트 2편이 찾아왔습니다. 지난 이벤트에서는 신청이 많이 저조했습니다. 조금 급하게 진행되면서 홍보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탓도 있었고, 서평도서 3권 중에 [말해요 찬드라]를 제외한 [공장은 노동자의 것이다]와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는 조금 무거운 주제의 책이며, 발간된지 시간이 좀 지나서 시의성을 많이..
 
 
가시장미 2008-03-27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평과 서평을 한꺼번에 감상하게 되었군요. ^^ 이 시대에 홍길동이 정녕 있단말입니까~ 제가 그들을 잘 몰라서 인지도 모르겠지만, 있다면 빨리 나타나줬으면 좋겠네요.
'명박씨가 사실은 저는 명박이가 아니에요~~' 라고 말하기 전에요. ㅋㅋ

2008-03-27 1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 - 그 많던 언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 지음, 김정화 옮김 / 이제이북스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작가 박완서가 “그 많던 싱아들은 다 어디로 갔”는 지를 끈질기게 묻고 있을 때, 사라져 버린 것은 비단 ‘싱아’뿐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 많던’ 싱아들이 결국 다 사라져 버리고 나면 ‘싱아’라는 말도 사라질 것이지만, 아직까지는, 적어도 박완서의 소설 제목으로서는 ‘싱아’라는 말은 박제(剝製)처럼 살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싱아’가 사라지기 전부터 계속 사라져 왔고 사라져 가는 ‘그 많던’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언어들이다.

  다니엘 네틀과 수잔 로메인은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에서 “그 많던 언어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 지를 추적한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언어들이 사라져 왔는지, 어떻게 사라져 왔고, 또 사라져 가고 있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결국에는 앞으로도 더 많은 언어들이, 현재 지구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약 6천여 종의 언어 중에 대부분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럼으로써 저자들은 이 사라져 가는 언어들을 그대로 지켜보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대책을 마련해서 그 언어들을 보존하고 유지시켜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언어가 소멸한다거나, 잔인하게도 사멸(死滅)되어진다고 하는 것에 우려를 표명(表明)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처음은 아니다. 그간 언어학계와 사회 일각에서 종종 언급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들의 이런 우려의 표명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추적하는 언어의 사멸과, 그에 대한 우려가 가일층 강도 높게 읽히는 이유는, 이러한 언어의 사멸이 단지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현재 각계에서 동의하고 있는 생태계 파괴와 오염의 문제가 이 언어의 사멸의 추세와 함께 동반하고 있음을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끌어내면서, 언어의 사멸이 생태계 전반의 문제를 대표하는 척도(尺度)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인식은, 아직 학계에서도 생소한 ‘생태 언어학’이란 학문 범주(範疇)를 이룬다. 어떻게 언어와 생태, 즉 자연이 관계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본다면 어렵지 않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들이 볼 때 “언어들의 멸종은 전 세계적인 생태계 붕괴 현상의 일부”인데, 이는 “인간들의 언어들 속에” 이 생태계 전반과 긴밀하게 관계되는 “자연 환경에 대한 상세한 지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생태계의 파괴는 곧 다양성의 상실로 이어지고, 이것은 생태계 전반의 존립을 위협하는 엄청난 재앙과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언어에서도 마찬가지로 언어 다양성의 상실은 “우리 모두에게 손실을 안겨 주는 것이다.”

  언어가 생태계의 일부인지, 아니면 언어는 곧 생태계의 전부인지를 따지는 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유의미하겠지만, 어쨌든 언어와 생태계의 연관은, 그 소멸 현장이 공통되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관련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들이 우려하는 것은 몇 가지 점에서 언어에 대한 우리 사회 일반의 인식에 의한 것이다. 언어가 단순히 의사소통의 매개 역할 뿐만 아니라, 인류의 생각과 정신, 그리고 사회 문화를 폭넓게 담고 있는 유산이기에, 그러한 언어의 사멸은 소중한 인류 문화유산의 소멸이며, 복원 불가능한 상실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언어가 각 사회의 정신적, 문화적 소산이며, 그 사회의 사고와 인식을 주관하는 매개로서, 각 사회 개개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지표라고 할 때, 언어의 상실은 곧 그 정체성의 상실임을 저자들은 강조한다. 결국 언어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대변하고 있음으로서, 그 가치와 보존의 정당성을 여실히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들이 추적하기에 최근 200년간의 언어의 변화, 그 중에서도 소멸의 양상은 인류 기원의 시작과 그 맥을 대동소이(大同小異)하게 같이한 오랜 언어의 역사적 양상과 대비할 때 매우 특이한 면모를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등 몇몇 세계 언어들이 확산됨에 따라 많은 소규모 언어들이 사멸하고 있다. 오늘날의 지구촌에서는 세계 인구 중 약 90퍼센트가 백 개 정도밖에 되지 않는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인간 사회가 이렇게 급진적으로 재편됨에 따라 영어와 몇몇 세계 언어들이 지배적인 지위를 가지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재편이 “적자생존”의 사례를 보여 주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런 상황은 결코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조건 아래서 자유로운 선택과 경쟁이 이루어진 이상적인 시장경제 체제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주장할 것이다. 지배적인 언어의 등장은 사회적 변화가 불균등하게 일어남에 따라, 선진국들과 개발도상국들 간에 현저한 자원의 불균형이 생긴 데서 나온 결과이다.(41쪽)




  저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이 책 전체에서 충분히 입증되고 남음이 있다. “자유로운 선택과 경쟁이 이루어”지는 ‘시장경제 체제’가 ‘이상적인’ 것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작금의 언어의 사멸이 단순히 어떤 자연적 흐름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지적은 타당하다. 생태계 파괴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는 것은 이른 바 산업화와 공업화의 근대적 발전 이데올로기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급성장한 서구 근대 국가들의 산업화와 공업화 공세에 전 세계의 생태계는 무분별하게 파괴되기에 이른 것이고, 오늘날에는 신자유주의와 경제 논리의 미명 아래 이러한 발전 이데올로기가 합당한 것으로 치장된다. 생태계가 치명상을 입었음을 우려하고 경고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왔으니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생태계 파괴의 원인은 저자들이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생태계와 언어의 관련성에 비추어, 언어 사멸의 제1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 사회 변화는 자연적인 흐름이면서 필연이고, 그에 따른 언어의 변화가 수반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고 하기에는, 일부 선진국들의 언어가 대다수의 소수 언어들을 잠식(蠶食), 살해(殺害)해 나가는 현상을 볼 때 매우 부당한 것이 내재해 있다고 생각된다. 저자들의 말처럼, 산업화와 공업화를 앞장서서 세계에 전파했던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행각에 의해 사회적, 국가적 불균등이 생겨나고, 이러한 불균등 심화와 그에 따른 강압과 억압, 그리고 직 · 간접적 통제에 의해 언어가 사멸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언어의 변화, 즉 언어의 생성, 변화, 소멸은 그 언어가 기반으로 하는 사회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사회의 변화는 곧 언어의 변화를 의미하며, 이는 그 둘의 관계에 입각할 때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 언어가 통째로 포기되어지고, 이른 바 언어가 자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는 그렇게 곧이곧대로 자연스러움을 부과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언어 제국주의, 언어 식민주의’란 명명에서 볼 수 있듯이, 제국의 언어가 식민지의 언어로 강요되는 현 실태는 불합리하고도 참혹한 언어 말살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들은 이 책에서 언어의 소멸과 관련한 명명(命名)을 두고 논하면서, ‘언어의 자살’이란 명명에는 동의하지 않고 있다. 언어가 급변하는 사회에 맞게 자연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유야무야 넘어갈 문제가 아님을 이미 앞에서 언급 했듯이, 그것은 언어가 살해된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타살이란 측면이 강하다. 간혹 소수 언어의 사용자들이 자발적으로 자기네 언어를 포기하고 제국의 언어를 선택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근원에는 자발성의 측면보다는 경제적 생존 논리에 의한 무의식적 강압이 작용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니엘 네틀과 수잔 로메인의 입장은 타살로 보는 것에 가깝다. 번역본이기 때문에 원문에서의 표기가 어떤 것인지를 찾아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사멸’이라고 부르듯이 그들의 논조 또한 피살되어지는 것으로 보는 성향을 느낄 수 있다. 여하튼 언어가 그렇게 사멸해 가는 것에 대한 일각의 이런 경각심을 모두가 호기(豪氣)롭게 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촘스키로 대변되는 변형생성론자들의 논법을 따르는 이들의 경우 언어는 그 기저에 심층구조상의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어의 이러한 변화 내지 사멸은 크게 우려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이런 심층구조의 동일한 보편성을 십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항상 심층구조로 발화되고 사용되는 것이 아니란 점을 고려한다면, 그리하여 그러한 심층구조 상의 생각이 각각의 사회의 사고방식 및 문화, 정체성에 따라 제각기로 표현되어지고 발화되어진다는 것을 확인할 때 확실히 그런 언어들이 사라지고, 다양성이 극소수 몇 개의 언어만의 획일성으로 점철되는 것은 쉽게 넘길만한 일은 아니다. 언어가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러니까 9개가 같고 1개가 다른 대동소이한 것이라 하더라고, 약 6,000여개의 언어가 가지는 다양성의 폭, 즉 ‘소이(小異)’한 것들의 개수는 6,000개 그 이상이며, 이것들이 사라진다고 할 때, 언어의 이런 보편성만으로 대수롭지 않게 보기에는 그 손실은 크나큰 것이다.

  다니엘 네틀과 수잔 로메인이 이 책에서 생태 언어학적 측면에서의 언어의 사멸을 고찰하고 있고, 그 원인으로 공업발전만을 강조한 서구의 경제논리에 따른 각기 사회의 불균형성을 들고 있지만, 아울러 그것이 현실적으로 적용되는 구조는 ‘언어 식민주의’적, ‘언어 제국주의’적 양상을 보인다. 초강대국 미국의 언어인 영어와 강대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의 언어들 아래 재편(再編)되어진 중심부, 주변부의 언어들의 역학(力學) 관계로 파악하는 것이 이른바 ‘언어 제국주의’적 양상인데, 그러한 논리에 따르면, 주변부들의 언어가 급속도로 제국의 언어의 강압 아래 굴복하고 복속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그러한 논리를 직접적으로 가져오진 않지만, 일부분의 서술에서도 그런 제국주의 논리가 언어의 사멸에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찾아 낼 수는 있겠다.




우리는 언어 정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규모가 큰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실질적인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준다면 사람들 스스로 그것을 깨달을 것이다. 따라서 강제로 사람들을 “현대화”시키려는 시도들은 잘되어도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고, 잘못되면 다른 문제들을 덮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현대의 세계 경제에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영어나 다른 세계어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모국어를 잃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쉽사리 양자택일을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만약 그들에게 스스로 개발 조건을 정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기회가 주어진다면 사람들은 흔히 양쪽에 모두 유리한 방안을 찾아낼 것이다. 즉 지역 사회의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보다 광역의 경제 및 정치 체제에 적절히 전략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렇게 되면 철저한 다중 언어 사회가 이루어져서 그 사회에서 쓰이는 모든 언어가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받고 상호 보완적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중심지 언어와 주변 언어들이 오랜 갈등을 겪는 동안 변방의 사람들은 진정한 선택권을 부여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선택은 인권의 측면에서 그 자체로서 바람직한 일일 뿐 아니라, 경제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에 모두 이로운 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248쪽)




  저자들은 언어의 사멸 양상을 추적하면서 언어가 기하급수적(幾何級數的)으로 근 200년에 걸쳐 소멸되고 있으며, 그것은 생태적 파괴의 양상과 우연 이상으로 일치한다고 근거를 들어 주장한다. 그들은 언어가 인류의 자원이며, 그 소멸은 인류에게 커다란 손실을 안겨주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생물의 다양성 보존과 함께 언어의 다양성도 유지, 보존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위의 인용문에서 우리는 그들이 추구하는 언어적 다양성의 형태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철저한 다중 언어 사회(多重言語社會)’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각의 지역 사회의 자율성을 유지시키고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지켜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제국주의적인 외부의 근대적 발전의 강요와 억압은 그들의 자율과 권리를 파괴하고, 결국에는 모든 다양성을 말살하는 것일 뿐, 아무런 득 될 것은 없다.

  이러한 ‘다중 언어 사회’를 이루기까지 필요한 것은 아직까지 남아 있는 언어적 다양성을 유지 보존하고, 그것이 오랜 기간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여러 가지 대안들이 필요하다. 저자들은 그러한 대안 찾기도 빼놓지 않고 있다. 여기서 그것을 열거하지는 않겠다. 여러 가지 대안들이 있고, 그러한 대안들이 조속히 실천에 옮겨져야 할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저 강대국 언어의 사용자들이 이러한 생태 언어적 현실에 대하여 보다 경각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그것을 유지 보존해야 함을 인식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들이 거기에 무관심하고 외면할 때 소수 언어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그 많던 싱아”를 따라서 어디론가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러한 대안들과 해결책들, 그리고 조속히 처리해야할 구체적인 방법들은 데이비드 크리스털의 『언어의 죽음』에서 보다 잘 설명되고 있다. 그 책과 함께 이 책을 읽는 것은 매우 유효한 독서 방법이기도 하겠다.

  언어의 사멸은 우리 아닌 타 언어 사용자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언어를 어떻게 구분 짓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 내부에서도 언어는 사멸하고 있다. 방언도 엄밀히는 언어 중의 하나이고, 그것은 한국어 내부의 언어적 다양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 또한 표준 한국어에 밀려 점차 사멸되어 가고 있다. 특히나 우려스러운 것은 다분히 독특한 점들을 보여주는 제주도 방언이 급속도로 사멸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어학계의 우려가 크다. 이런 내부의 문제이기도 한 언어의 사멸에 관한 우려를 우리는 보다 넓은 시야와 애정으로 바라보고 대처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우리와는 상관없는 듯이 보이는 저 머나먼 타국의 소수 언어들이 사멸해가고 있는 현실은, 곧 우리 전 인류의 공통된 손실로 다가올 것이다. 또한 우리 안에서도 그러한 전 지구적 손실이 이루어지고 있음에 우리는 인류에게 끼친 손실에 대해 반성해야 할 것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영어 몰입 교육’이니, ‘영어 공교육 강화’니 하는 것들도 언어의 사멸의 과정에 있어 초기 단계에 진입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영어를 배제하자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다양성을 유지하고, 다중 언어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제1언어인 한국어로 우리의 정체성을 갖추고, 영어를 비롯한 다양한 언어들을 존중하고 배워가면서 언어적 다양성을 통해 전 인류와 소통하고 공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고 노력해야 할 이상이다.

  한국인으로서 우리와 이웃한 중국, 일본 등과 역사적으로 불편한 관계를 맺어오긴 했지만, 이런 언어적 다양성을 추구할 때, 우선적으로 이런 이웃의 언어를 존중하고 배워나가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당시 제국의 언어인 중국의 문자를 통해 한 · 중 · 일은 무리 없이 소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불가능하고, 가능해지려면 영어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아시아가 연대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삼으려 한다면 이 이웃한 나라들만이라도 제각기 다른 나라의 언어로 말하고, ‘내 언어’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국인과 한국인, 그리고 일본인이 한 자리에서 중국인은 한국어로 말하고, 한국인은 일본어로 말하며, 일본인은 중국어로 대화하는 모습 속에 다중 언어 사회의 구체적 모습이 희망적으로 담겨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영어 공교육 강화’의 필요성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에게 획일적으로 적용되는 ‘共교육’이 아니라 ‘公교육’이어야 하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최상의 영어교육이 제공되는 것이 곧 공교육의 모습이다. 이것은 나아가 다중 언어 공교육으로 이어져야 한다. 나는 우리 사회가 내 언어로 생각하고 사고하며, 타인의 언어로 말해주고 전달하는 다중 언어 사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은 저 독재(獨裁) 정부가 그렇게 노래만 불렀으나 도달할 수 없었던 ‘인류 공영에 이바지’하겠다는 목표에 가장 효과적으로 도달하는 길이 될 것이다.

  끝으로 사족을 더하자면, 몇 년 전부터 한글을 세계에 전파하자는 민족주의적 성향의 운동은 그것의 의도가 어떠하든지 간에 심사숙고(深思熟考)해야 할 일이다. 다니엘 네틀 등이 강조했듯이 언어에 있어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그 언어 사용자들의 노력이 필수적인데, 거기에다 한글의 우수성은 곧 한민족의 우수성이고, 그런 자긍심과 민족적 우수성을 전파하고자 하는 민족주의적 한글 전파 운동은 성공할 수 없는 외부의 억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글은 우수한 문자이지만, 또한 다른 문자들과 마찬가지의 장단점이 있다. 어떤 점에서 한글은 영어나 한자, 일본의 가타가나 보다 단점이 많을 수도 있고, 또 그와는 달리 그것들이 가지지 못한 많은 장점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한글이 만능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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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3-22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길~~어서 2차에 걸쳐 읽었더니 뭔 말인지...그래도 결론은 확실히 알아 들었어요.^^
"우리 사회가 내 언어로 생각하고 사고하며, 타인의 언어로 말해주고 전달하는 다중 언어 사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UN의 유네스코에서 까막눈(문맹) 퇴치에 크게 이바지한 사람들에게 '세종대왕상'을 수여하는데, 이것은 한글의 가치와 공적을 국제적으로 인정한 상징으로 우리의 큰 자랑거리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조선 블로그 - 역사와의 새로운 접속 21세기에 조선을 블로깅하다
문명식 외 지음, 노대환 감수 / 생각과느낌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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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블로그(blog)'는 원래 우리말이었다? '카페'도 실은 우리말이다? 조선시대에도 블로그를 운영하고 인터넷 카페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그야말로 기상천외(奇想天外)하고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책이 있다. '블로그'는 원래 우리말 '불로구(不怒口)'였고, '카페'도 '갑회(甲會)'였단다. '불로구갑회복원위원회'에서 편저한 이 책 『조선블로그』는 그 생생한 증거들을 담아놓고 있다. 21세기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블로그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니? 믿어지시는가? 믿거나 말거나.

사실 이 책은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얼마 전 발견된 '불로구(不怒口)', '갑회(甲會)'라고 적혀있는 고문서들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이 고문서들의 내용이 오늘날 우리가 블로그나 카페에 올리는 글들의 성격과 매우 비슷하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당시에 인터넷과 블로그가 없었을 뿐이지,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하는 블로그질을 불로구에 했었다는 거다. 여하튼 이런 우연한 발견에 힘입어 편저자들은 역사적 인물들이 '블로그'질을 하고 인터넷 카페를 한다면 어땠을까를 가정한다. 그렇게 태조 이성계와 세종대왕, 이순신이 블로그를 만들고, 실학자들이 모여 카페를 개설한다. 가상의 일이지만, 사료에 근거해 그럴 듯 하게 꾸며놓은 이 블로그와 카페에 접속하는 즐거움이 남다르다.

이 기발한 아이디어에만 감탄하고 말 일이 아니다. 더욱 감탄할 것은 역사상의 인물들이 21세기에 재탄생해 우리와 같은 인터넷 공간에서 일촌이 되고 이웃이 되어 그 속내를 솔직히 내뱉는다. 블로그나 카페에서 내뱉는 보다 솔직하고 거짓없는 글들에 네티즌들이 공감하고, 때론 논쟁하듯이, 편저자들은 철저히 역사상의 인물들을 21세기적 개인으로 창조해 낸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 역사적 고증에 근거한 것이다. 그것이 어느 정도 한계가 있지만, 이 색다른 시도에 역사는 어느덧 우리가 즐찾한 여느 블로그처럼 친근해 진다.

이성계와 일촌을 맺고, 세종대왕 블로그를 즐찾하면서, 의병 카페에 가입하고, 실학 카페에 정회원이 된다? 비록 그것은 가상의 일이지만, 역사 속 현장과 시공간으로 깊이 들어가 그 당대 역사 인물들과 동시에 호흡하게 만든다. 이것은 역사를 보다 흥미진진하게 체험하게 한다. 가령, 이순신에게 응원의 댓글을 달면 더욱 잘 싸워줄 것만 같고, 정암에게 딴지를 걸면 "그냥 가던 길이나 가시지요."라는 싸늘한 댓글이 날아올 것만 같다. 이것은 역사를 보다 생생하게 재현시키는 탁월한 역할을 담당한다.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역사 속 인물의 블로그를 즐찾한다는 것을.

아무튼 저자들은 이런 획기적인 기획을 앞으로 계속할 생각인 듯 하다. 고려 블로그도 나오고 삼국 시대 블로그도 나올 예정이란다. 싸이 미니 홈피와 접목해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무엇보다 블로그가 좋은 장점은 역사의 대상으로서만 제시되는 역사 속의 인물들의 속내가 비록 가상의 결과물이긴 하지만 비교적 사실에 가깝게 비춰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보다 그 인물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참신한 노력에 찬사를 보내며, 이 기획들이 꾸준히 출간되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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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3-03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재밌겠는데요?
멜기님 저 쾌도홍길동 1회 봤어요 ㅎㅎ 나름 재밌던데요?

마노아 2008-03-04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아주 재밌게 읽었어요. 아이디어가 어찌나 번뜩이던지요^^

순오기 2008-03-06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마노아님이 주신 민경이 책으로 봤지요.
창의성이란 게 이런 거구나~ 감탄하면서...^^
 
박노자의 만감일기 - 나, 너, 우리, 그리고 경계를 넘어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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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선생님께

안녕하십니까? 오슬로의 먼 하늘 아래에서 강건하신지요? 저는 선생의 10년 독자이자, '88만원세대'란 이름조차 갖지 못한, 대한민국의 30대 초년병입니다. 먼저, 이렇게 선생께 편지를 띄우게 된 것은, 최근 펴낸 선생의 『만감일기』을 읽고 10년 독자로서 느낀 바가 남다르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선생께 한풀이도 하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의 일기가 던져주는 "그 어떤 정답도 제공해" 주지 않지만, 그 뜨거운 '화두'들에 저는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선생의 오랜 독자로서, 매번 선생의 저서들은 나온 즉시 구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 『만감일기』도 읽은 것은 몇 날 전의 일입니다. 읽는 내내 선생의 "무거운 번뇌, 번민"들이 제게도 뜨겁게 다가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생께 이렇게 편지를 띄우게 된 것이지만, 이렇게 쓰기까지는 여러번 찢고 다시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우연찮게도 이명박 씨가 제1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날이더군요. 취임식을 지켜보면서, 선생께 편지 띄우기를 더는 미룰 수 없었습니다.

얼마 전 대한민국의 20대에게 '88만원세대'라는 자랑스러운(?) 이름을 부여해 준 우석훈 선생의 책 『88만원세대』가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 후로 여전히 이 '88만원세대'는 착취와 억압 속에 사는 이 시대 20대들에게 비극적이게 뜨거운 화두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88만원세대'라는 명명 속에 제가 들어갈 자리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30대의 반열에 들어섰고, 이제는 이 사회의 그 비열한 메커니즘 속에서 살아남기에 바등거릴 수 밖에 없는, 지금의 20대와 함께 바리케이이드도 짱돌도 들지 못하는, 이도저도 할 수 없는 그런 처지일 뿐입니다.

제 20대의 오롯한 10년을 저는 선생의 독자로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서른이 되고, 지금에 이르렀지만, 어떻게 된 것인지 제 삶은 점점 더 가난해지고 비참해 지는 것만 같습니다. 선생을 읽는다는 것의 결과였던 것일까요? 이런 의문이 선생께는 죄스러운 것이지만, 선생이 부르짖던 좌파적 심성들에 공감하고, 그렇게 살고자 했지만, 지금의 제 현실, 우리 현실은 그 전보다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는 지금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제 20대의 10년을 선생을 알지 않았더라면, 선생을 읽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저는 어땠을까? 지금의 제 삶이 조금은 여유가 있었을까? 이 사회가 한결 좋게 여겼을까? 삶에 희망이 있었을까? 저는 그랬을 것이었다고 봅니다. 선생을 알지 못했고, 선생의 사유들을 읽지 않았었더라면, 제 20대의 10년을 타인을 이기기 위해 보다 치열하게 살았을 것이고, 사회의 경쟁 속에서 보다 가열차게 싸워 이겼을 것이고, 경제적 부를 꿈꾸고, 이 나라 이 민족의 부국강병을 꿈꾸며, 언젠가 나도 부자로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박노자 선생을 알고, 선생의 사유에 지극히 공감하는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빛과 희망도 이 사회에서는, 지금의 제 현실에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국가주의라는 이데올로기 하에서, 모든 국민이 국가에 충성하고 희생할 것을 강요당하고, 신자유주의라는 무자비한 메커니즘에 갇혀 인간이 인간을 밟고 뭉개야 하며, 내 민족, 내 나라만이 제일이고, 타인을 배제하는 이 사회에서 풍요롭고 여유 있게 산다는 것은, 아니 어떻게라도 살아남는 다는 것은, 정말 생각할 수록 무서운 것이기만 합니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 부하고 귀한 것 또한 부끄러운 일"[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라는 공자의 말로 위안을 삼아야 할까요? 누군가는 패배주의자의 자기 변명이라고 욕하겠지만, 적어도 선생으로부터 배운 바대로라면, 제게는 지금의 이 패배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겠습니다.

선생을 통해 이 사회의 배반적 역사, 국가와 제국주의의 폭력, 신자유주의의 냉혹한 무한경쟁, 타자에 대한 억압과 배척, 권위주의, 사상의 자유에 대한 억압과 구속 등이 얼마나 뿌리 깊고 굳건하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면서, 저는 누구 못지 않게 분노하고 아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분노하고 아파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거기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가령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피부가 검은 청년들을 노르웨이 오슬로 시의 캄캄한 길거리에서 갑자기 만날 때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겁'을 느낀다. 이것을 인터넷 일기에서 솔직히 '고백(?)'할 때 무의식 속에 내재돼 있는 '나'의 인종적 편견을 스스로에게 알려 '자정'을 다짐함으로써 나름의 반성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또 이를 읽은 독자들이 '아, 나에게도 그러한 부분이 있구나!'라며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여 같은 반성의 길로 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소통'의 순기능이 아닐까?(7쪽)  
   

도대체 저는 얼마나 고백하고, 자정을 다짐하며, 반성해야 할까요? 선생이 줄곧 비판해 온 그것들을 제 몸이 무비판적으로 행하고 있는 것을 자주 볼 때마다, 소름이 끼칩니다. 그때마다 반성은 한다지만, 또 반복하는 저를 봅니다. 선생의 독자로 10년을 살아왔는데도 말입니다. 그때마다 뼈아프게 아파하고, 치를 떨며 분노하고, 이 사회의 그 모든 악을 몰아낼 듯한 의분을 갖지만, 거기까지 뿐입니다. 선생은 고백하고, 자정하며, 반성하는 '소통'을 말하지만, 그러한 소통을 통해 변화와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까? 왜 저는 그러하지 못 하는 걸까요?

솔직히 이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힘겹습니다. 더 솔직히는 잘 살고 싶습니다. 남보다 더 부유하고, 건강하며, 풍족하게 즐기며, 여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자면 이 사회가 원하는 대로, 남을 이기고, 그들 위에 홀로 우뚝 서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금의 제가 그것을 원하기만 하면 이룰 수 있는 이 사회가 요하는 어떤 능력도 힘도 소유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선생을 통해서, 이 모든 것이 허상이고 허황된 이 사회 지배층들의 교묘한 술법임을 알게 되었고, 머리속에서나마 함께 공존하고, 남을 존중하며, 가난한 자와 소외된 이들에 대해 함께 연대하고, 사회 곳곳의 그 악한 이데올로기에 맞서 부르짖고, 고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잘 알기에, 지금은 무척 괴롭고 아픕니다.

선생이 꿈꾸는 "'나'와 '타자' 사이에서 지위와 돈, '국민에의 소속' 여부 등의 매개가 없는, 진정한 의미의 공산적 사회"를 선생의 독자로 살아오면서 저도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회는 그것을 좌파라 욕하고, 빨갱이라 낙인 찍으며, 강한 거부감을 표시합니다. 가까운 친지에게도, 친구에게도, 그런 저의 생각과 사상을 말하기가 무서울 정도입니다. 선생도 느끼듯이 이것은 "우리로부터 계속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두렵"습니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선생께 한탄하고 울부짖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에 이명박 씨가 취임하면서 말한 바는, 기업이 잘 되는 나라, 경쟁력 있는 나라, 그 경쟁에서 살아남아 이명박처럼 성공의 신화를 이루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저는 향후 5년의 절망을 상상했습니다. 제가 너무 지나친 것입니까? 어쩌면 선생도 저와 같은 절망을 보시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 현실에서 저는, 그리고 선생은, 나아가 선생께 공감하는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앞으로도 선생의 글을 꾸준히 읽어간다면 그 해법을 찾을 수 있을까요? 고민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며 해답만을 요구하는 어리석음인 줄 알지만, 얼마나 더 그 답을 찾고자 괴로워 할 수 있을지 저 스스로도 저를 믿지 못할 것만 같습니다.

춘향전의 나라가 그리워 이 땅에 오셨다고 하셨지요?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계시지만, 선생이 계시는 곳은 먼 하늘 너머 노르웨이의 오슬로입니다. 그리고 선생은 춘향전의 아름다움보다 이 나라 이 땅의 잔인하고 참혹하며, 무자비한, 폭력적 현실들을 더 많이 알게 되셨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춘향전의 나라가 그리우십니까?

   
  글쎄, 아집인지는 모르겠지만, 북방의 먼 땅에서 매일 밤 한국의 산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향수의 눈물을 흘릴지언정 그 '나리님'들에게 백기투항할 생각은 없다. 이건 이념문제 이전에 인간으로 존재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실존적 문제이다. 물론 이용 가능한 모든 방법들을 다 동원해, 국내 대학들이 학생과 교직원에 의해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자율적인 공공공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지만, 이 '작은 왕국'들이 민주공화제가 되기 전까진 거기에서 녹봉을 받아 먹고살긴 싫다. 물론 어느 날 향수가 하도 깊어져 나중 일은 생각도 안 하고 그냥 훌쩍 한국으로 돌아가버릴지도 모르겠는데, 어차피 나 같은 사람을 받아줄 데도 없을 테니 다 실체 없는 공상인 듯도 싶다. 어쨌든 '나리님'이 영접받는 광경을 목도한 그때 그 순간은 내겐 절망의 순간이었다.(34쪽)  
   

지금까지 선생의 글들을 읽으며, 저는 선생의 그런 절망의 순간들을 수도 없이 보았습니다. 구태여 태어난 나라를 뒤로 하고, 집도 절도 없는 이 나라의 국적을 갖은 것은 왜인지 묻고 싶습니다. 애써 좋은 것만 보고, 즐거운 것만 알고, 행복하게 사실 수는 없으셨던 건가요? 10년의 독자에게 선생은 선생의 그런 절망만을 얘기해야 했던 것입니까? 누군가는 선생을 일러 독설가라고 말하더군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생을 외부인으로 치부하고 내 나라, 내 조국만을 감싸고 돌 때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선생은 더 이상 외부인이 아니기에, 선생의 그런 독설이 뼈아프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저는 선생을 '경계인'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어디까지나 현실이 그러합니다. 이 나라 이 땅에서 선생을 그 경계 내부로 진정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내부로 들어오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들도 선생이 있는 그 경계로 나오라고 말이죠. '나'와 '타인'의 그 경계에 설 때, 우리 사회는 선생이 꿈꾸는 그 이상적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 가운데는 그 경계에 설 것을 상상하지만, 내부에 있는 제 무거운 몸은 한 발걸음도 경계쪽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저는 '마네킹'이 되고 '로봇'이 되어가고 있는 것인가 봅니다.

   
  끔찍한 사실이지만 우리 사회의 개인 대다수는 '개인'이라기보다는 '마네킹'에 더 가깝다. 무슨 제복이나 장교복, 귀족복을 입히면 입힌 대로 그 모델이 되는 것이다. 외물로부터 자유로운 '나'는 없어지고 외부의 '표준' 욕망들이 그대로 내면에서 복제되고 만다. SF 영화에서 로봇이 세상을 지배하기도 하지만 사실 지금 우리 사회에도 겉으로만 '인간'처럼 보이는 '로봇형 인간'의 비율이 꽤나 높다. 더 끔찍한 문제는 그들을 프로그램하는 자들도 '로봇'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40~41쪽)  
   

죄송합니다만, 여기서 이 편지를 그냥 접겠습니다. 괜히 한탄만 하고 말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여기까지 적고 더이상을 말하지 않아야 될 것 같습니다. 좀 더 선생의 '만감'을 화두로 삼아 되새겨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1년 후, 5년 후, 아니 10년 후면, 또 이런 한탄만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내일 또다시 오늘 말하지 못한 남은 속내를 참지 못하고 토해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자꾸 정신이 혼미하여져서 그만 그쳐야 되겠습니다. 선생께 이 마치지 못한 편지가 전해질지는 모르겠지만, 이 편지가 선생께 일말의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할 뿐입니다. 이국의 먼 하늘 아래 오슬로에서 건필하시길 기원합니다.

2008년 2월 25일 자정에
선생의 10년 독자 올림.

(이 편지가 공교롭게도 내 100번째 리뷰가 됐다. 그런데 이것은 공교로운 것만은 아니다. "讀書百遍義自見"이라고 했던가? 어쩌면 이렇게 100권의 책을 읽고 되새김질 한 나에게도 일말의 "스스로 깨우침"의 그 경지에 살짝 턱이라도 걸게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100번째 리뷰를 쓰면서, 그 백편이 주는 '義自見'을 생각하자니, 이 100번째의 자리에 무언가 뜻과 의미를 두어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중에 『박노자의 만감일기』를 읽었던 것이고, 오래 묵혀두다가 이렇게 100에 맞춰 리뷰, 아니 편지를 썼다. 100번째 리뷰가 다 쓰지 못한 편지가 될 줄은 몰랐지만,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고, 조금이나마 내 삶에서 스스로 깨닫게 도와준 것은 바로 박노자였다. 그러하기에 이 100번째가 박노자의 차지가 되기에 마땅했던 것이다. 아무튼, 박노자 선생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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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2-26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정에 쓴 편지를 며칠만에 알라딘에 들어온 제가 읽게 되었군요.
우리 딸도 이 책을 읽고 많은 공감과 울분을 느낀다고 하더군요.
전, 아직 읽지 못해서...

멜기세덱 2008-02-26 14:52   좋아요 0 | URL
ㅎㅎ 어쩐지 제 서재가 그간 고요하더군요.....ㅎㅎ

Jade 2008-02-26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 사람의 가슴도 울분으로 들쑤셔놓으시네요. 하지만 "어떤 능력도 힘도 소유도 전혀 없"다는 이유로 저들의 논리에 포섭당하는 것이야 말로 저들이 가장 바라던 것이 아니겠어요? 분노하고 아파할 수 있는 감수성 이야말로 무언가 달라질 수 있는 시작이라고 믿어요 저는 ㅎㅎ

그런데 멜기님, 이런 절절하고 진심어린 편지는 반려자분께 쓰셔야지요! ㅎㅎ

멜기세덱 2008-02-26 14:52   좋아요 0 | URL
이런 편지를 보냈다가는 따귀맞기가 십상 아닐까요? ㅋㅋ

2008-02-26 1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26 14: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홍수맘 2008-02-26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휴~. 짐 옆지기가 읽고 있는 중인지라 기다리고 있는데 님 글을 보니 빨리 읽고 싶어 근질근질 하네요.

잘 지내고 계시죠? 서서히 우리 홍/수의 방학이 끝나가니 그땐 더 열심히 마실 다닐께요.

멜기세덱 2008-02-26 23:36   좋아요 0 | URL
홍/수 때문에 제가 좀 서운했었더랍니다....ㅋㅋㅋㅋ

bookJourney 2008-02-26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노하고, 아파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 그 순수함이 부럽습니다.

멜기세덱 2008-02-26 23:37   좋아요 0 | URL
순수하지 못해서가 문제에요...제가....ㅋㅋ

프레이야 2008-02-26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새로운 형식의 리뷰, 감명깊게 읽었어요.
경계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백번째 리뷰라니, 더욱 뜻깊습니다.

멜기세덱 2008-02-26 23:38   좋아요 0 | URL
형식을 따져본건 아니지만, 그다지 새로운 형식도 아닌 것 같은데...ㅎㅎ
근데, 따져보니깐, 이게 정확히 백번째 리뷰는 아닌 것 같더라구요...
밑줄긋기가 2개나 있어서리....ㅎㅎ

2008-12-31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8-12-31 01:22   좋아요 0 | URL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법률사무소 김앤장 - 신자유주의를 성공 사업으로 만든 변호사 집단의 이야기 우리시대의 논리 10
임종인.장화식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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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는 물음이 있었다. 이 사회에서 "법 없이도" 살아가는 게 가능할까? 이 물음을 행간 사이사이에 심어가면서 내린 결론은, 사실 급좌절이다. 내 개인적 지론으로서는 "법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을 수록 좋은 사회라는 것인데, 사회가 근대화되면서 이 부류의 사람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다. 결국 사회는 점점 삭막해지고 피폐해졌다는 것. 경제가 제 아무리 발전하고 성장한다고 하더라도, 법이라는 억압적 체계하에서 민중은 말 그대로 착취되어왔다. 이제 근대적 산물로서의 법은 민중을 감시하고 구속해 오면서 지배층들의 지배를 공공히 하는데 봉사하여 온 것에 불과하다.

그만큼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법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필요악이다. 걸핏하면 "법 대로 하라"는 인간들이 언제든지 이 법 모르고 사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기 때문에, "법 없이" 살 사람들이 그나마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 몹쓸 법을 알기는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이 몹쓸 법을 아는 것이 힘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그 법을 가장 잘 아는 인간들을 사회의 지도층으로 내세우고 최고의 엘리트로 대우한다. 그와 반대로 "모르면 죽어"야 한다. 모든 사회가 언제나 법을 따지고 "법 대로" 하라며 들이댄다. 도무지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내 지론대로라면 이 사회는 더이상 좋은 사회가 아닌 것이 된다. 아 이 참 몹쓸 세상.

내 개인적 견해의 썰을 더 풀어보면, 인류가 무리에서 부족사회, 부족사회에서 국가사회로 변화해 오면서 형성되었을 윤리라든지 도덕, 나아가 규범과 법이라는 것은 민중적 자연스러운 요구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소수의 지배자들의 지배를 효과적이고 공공하게 만들기 위해 이런 윤리나 도덕, 그리고 보다 강력한 억압적 구조의 법이 만들어 진 것이다. 법에 대한 현란한 찬사가 사실은 다 구라요 뻥이라고 생각한다. 이 법이 수천년을 이어오면서 이제는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가둬놓아 버려서, 그 구속적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결국 그 법대로 살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근대 이전까지는 "법 없이도" 살아가는 사람이 많았고, 그들은 "법 대로 하라"며 들이대지 않았다. "법 대로 하라"고 들이대는 인간들의 태반이 갖은 자들이고 착취자들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모두들 "법 대로 하라"며 떠든다. 마치 모두가 지배층이 된 양, 서로를 협박하고 구속하지 못 해 안달인 것이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의 "법 대로"는 대부분의 민중들에게는 허상에 불과하다. 결국 "법 대로"하면 더 갖은 자가 반드시 이기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근거로? 이 책 『법률사무소 김앤장』(이하 『김앤장』)은 그 근거를 '확실히' 보여준다.

『김앤장』을 읽으면서 더 이상 "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 같은 생각은 더욱 공공해졌다. 현대적 법이 보다 민주적이고,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며, 공평무사해 졌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이런 허무맹랑한 수사를 여전히 믿지 않는다. 여전히 법은 갖은 놈들에게 유리하지 않던가? 법적으론 로펌도 아니지만 대한민국 최고 로펌임을 자랑하는 김앤장의 실체를 까발긴 이 책에 따르면, 이 최고 엘리트 집단인 로펌 아닌 로펌이 어떻게 갖은 자에 빌붙어서 지극히 "법 대로" 착취하고 억압하며, 권력에 영합하고 돈을 버는지 도무지 극악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법을 제 맘대로 해석하고 자유자재로 뜯어 고치면서 외국 투기 자본에 나라의 근간을 팔아먹고, 삼성 등의 재벌과 결탁하여 그들의 부를 증대시키며 그 콩꼬물에 빌붙어 사는지,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세력을 대신해 그들을 정리해주는 이 법률사무소는 이 "법 대로"가 어떤 의미인지를 확실히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예전에도 그랬고 여전히 그러하듯이, 이들이 말하는 "법 대로"는 있는 놈 맘대로란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있는 놈들이 잘 사는 세상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없는 사람들도 살 만한 세상이어야 하는데, 이 법이라는 것이, 이 법을 잘 안다는 놈들이, 법 대로 한다면서 없는 사람들을 더 못 살게 구는 세상에 도대체 무슨 희망이 있을까?

더 쓰다 보면 계속 욕만 나오고, 횡설수설에 주체할 수 없게 될까봐 두렵다. 그보다는 '김앤장'에서 법 대로 하자면 "명예훼손"으로 고발해 올까봐 그게 더 걱정이다. 이쯤해선 나도 이 법을 좀 알아야 하는 것일까? 적어도 "명예훼손"에 대해서는 말이다. 법률사무소 '김앤장'에 모인 수백명의 변호사들, 그리고 전현직 "권력의 핵심"이었던 고문들이 받는 월급이 수천에서 수억에 달한단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뭐빠지게 일해도 한 달 300벌기가 까마득한 이들이 태반인 이 사회에서 그들은 어떻게,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받을까? 난 이 물음에 말할 수 없다. 다만 그들이 있는한 우리 사회에서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도 이제 그 예외가 아니게 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에 댓글 다는 사람도 그러하다.

내가 이렇게 이 책 『김앤장』을 일독하고, 별 4개를 주며, 리뷰를 건방지게 써재끼는 것은, 여러분들께 이 책을 일독해 보십사 하는 것이다. 여러분들께 이 책을 일독해 보십사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이 책 『김앤장』을 읽고, '아 나도 이제 법 좀 알아야겠구나'를 일깨우고자 함이 아니라, 법 없이는 못 사는 이 세상에 대해 다만 일말의 한탄이라도 좀 느끼시라는 뜻에서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그랬고, 내 부모 형제가 그랬었다. 법 없이도 잘은 아니지만, 못나게라도 근근히 살다 갔고 살아 왔다. 지금까진 나도 그랬고 여러분도 그랬을 것이다. 잘은 못 살았서도 말이다. 그런데, 더 이상 그럴 수 없을 것만 같다. 아니 그럴 수 없다. 이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모두들 법 공부해서 판검사나 변호사가 되어야 할까? 내 머리론 곤란하다. 그러니 그냥 앉아서 뒤지는 수 밖에. 그러지 않으려면, 뭔가 해야되는데, "법 대로" 해선 그놈들에게 댈 게 아니지 않은가? 에라 모르겠다, 법이고 나발이고 난 모른다. 그냥 대갈빡으로 그놈들 면상에 쳐박고 싶은 심정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법 없이도 사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 참 좋은 세상이다. 그게 너무 먼 옛날의 일이어서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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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5 0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8-02-05 14:39   좋아요 0 | URL
저는 이거 나오자마자 장바구니에 집어넣는데, 우연찮게도....ㅎㅎㅎ

Jade 2008-02-05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사실 '김앤장'이란 로펌이 있는지도 몰랐었어요 -_-;;

멜기세덱 2008-02-05 14:39   좋아요 0 | URL
저도 몰랐어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