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기자로 산다는 것
시사저널 전.현직 기자 23명 지음 / 호미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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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시사(時事)에 민감하지 않은 나로서는 일간지 하나 제대로 챙겨보지 않는다. 정 따분하고 심심할 때, 혹은 화장실에 정이 들고갈 만한 것이 없을 때, 그때나 펼쳐보는 것이 신문이다. 그것도 대강대강 제목정도만 훑어볼 뿐이고, 신간안내나 바둑기사 등을 세심히 볼 따름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시사에 둔감한 편이다. 세상사에 둔감한 것은 어느 한 군데 흥미롭게 말붙이지 못하는 소외의 삶을 주기도 하지만, 세월아 내월아를 읊기에는 여간 편한 것이 아닐 수 없기도 하다.

요즘은 워낙에 인터넷이 발달해서인지, 워낙에 할 짓이 없어서 죽치고 인터넷이나 들여다봐서인지,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참 시시한 시사들을 어느 정도는 접하게 된다. 이게 인터넷의 장점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행여 요즘 어데 몇 사람 모인 곳에서, 특히나 내 나이 또래 사람들의 모임에서 이런 시사 얘기는 워낙에 찬밥대우이니, 시사에 대해 자발타발적으로 둔감할 때나, 타발적으로나마 민감한 지금이나 시시하기는 마찮가지다. 그러나 간혹 알고 싶지 않은 가운데 알게된 세간의 소식들이 나를 종종 분노케 한다. 이번의 이랜드 사태가 그렇고, 또한 시사저널 사태가 그러하다.

그런데, 시사에 한 없이 둔감하다는 것이 어느 은둔자적 행각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 이상에는 알고 싶지 않은 것과 더불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상존한다. 어찌 어찌 하여 알게 된, 그리하여 우리를 분노케 하는 사건 사고들이 그런 종류의 것이리라. 우리를 분노케 하는 것, 그것이 소리소문 없이 지렁이 담넘어 가듯 넘어갈 때, 우리 한 때 분노하지 않아 좋일지언지, 더 큰 분노와, 어쩌면 분노할 새도 주지 않을 파멸이 우리에게 닥쳐올지 모른다. 그러나 이 천박한 세상은 만인이 분노하여도 그 분노케 한 자들은 여전히 지렁이론 모자로 구렁이가 되고, 담 넘어가는 것에 성이 안 차, 담을 뚫고 부셔서 지나가버리는, 개탄할 따름이다. 그것은 한 때의 우리 풀뿌리 분노가 결집되고, 연대하여 하나의 거대한 저항이 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기도 하다. 아직 그 끝을 보지 못한 이랜드 사태에서는 우리 분노하는 사람들이 더욱 큰 목소리로 뭉쳐주길 바라는 바이다.

여기 또다른 분노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다. 그들은 곧 시사저널의 전 · 현직 기자들이며(어쩌면 前 시사저널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사저널의 이름이 이미 자본의 노예들에 의해 더렵혀졌기 때문이다. 시사저널이란 이름은 시사저널 기자들과 독자들의 것이지만, 이 더렵혀진 이름을 떨치고 다시 새로이 시작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시사저널을 사랑했던 독자들이며, 또한 이번 사태를 보며 다분히 분노한 이땅의 민중들이다. 그들은 왜 분노하는가? 그야말로 저 더러운 자본세력에 의해 우리 민중들이 끝끝내 지켜내야할 언론이 무참히 짓밟혔기 때문이다.

"삼성 이학수 부회장의 인사 전횡 의혹을 다룬 경제면 기자를 금창태 사장이 인쇄 직전 단계에서 삭제"하는 어처구니 없는 짓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에 항의하는 편집장과 기자들을 징계하고, 또한 그에 반발하는 이들에 대해 고소 고발하는 등의 무지목매한 짓거리를 신나게 벌였던 것이다. 이에 시사저널 기자들은 파업이라는 극단적 태세에 돌입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하무인인 시사저널 경영진과 결별하고 만 것이다. 결국 시사저널 기자들을 거리로 내몬 자본권력과 그 하수인들에 분노하는 기자들과 그들과 함께 분노하는 시사모(시사저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발족되기에 이른다. 이 분노하는 사람들을 누가 말리겠는가? 여기서 나는 이런 분노가 강한 저항이 되고, 우리의 권리를 지켜내고, 또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새삼 확인했다.

금창태 사장이 기사의 질이 떨어져 직접 삭제했다는 변명을 한다지만, 수차례의 편집과 교정을 거친 기사가 편집인들의 눈에 이상 없이 통과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사장의 눈에만 수준낮은 기사였는지 난 모르다가도 또 모르겠다. 편집권이 누구에게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작태에 더욱 말도 안되는 변명을 짓거리는 저 사람은, 도대체 어떤 인간일까 하는 의문이 먼저 든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은 "남 우세스러운 짓'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는데, 저 사람은 비범하기가 하늘을 찌를 듯한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뭐라고 해야할지 난감한 상황이다. 이 시사저널 사태의 핵심에는 바로 '남 우세스러운 짓'도 개의치 않는 저 한 없이 비범한 인간 이상이거나 이하의 분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직도, 언론의 '정도'를 걷겠다는 이들이 있"는 곳에 말이다. 아 이 비범한 것들을 우리는 어찌 해야 하는가?

더욱 가관은 아직까지도 정기구독하는 이들에게 괜한 보상 안해주려는 가련한 심사에서인지, '짝퉁'이래나 '결호 방지용'이래나 하는 것들을 뿌려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들은 코미디언 언저리 어느 쯤에 있는 분자들일 것이다.(이렇게 말하면 코미디언들께서 충분히 화내실만 하지만 참아 주시라.) 웃어야 하는가, 울어야 하는가? 시사저널 기자들은 울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웃기지도 않은 자들이 웃기고 있으니 울어야 할 밖에. 그러나 그들의 울음은 분노의 울음이다. 그 분노의 울음의 분노의 울림으로 일파만파 커져갔고, 마침내 그 울림이 하나되어 이 웃기는 작태에 옷깃을 여미고 얼굴빛을 고쳐 서게 만들었다. 시사기자단은 이전의 명품 시사저널의 정신과 가치를, 그리고 이땅의 민중들이 반드시 누려야할 언론의 자유를 저 더러운 자본으로부터 지켜내기로 한 것이다.

"사실과 진실의 등불을 밝힌다, 이해와 화합의 광장을 넓힌다. 자유와 책임의 참 언론을 구현한다."라는 정신아래 그것을 온전히 구현해온 시사저널들의 기자들. 그들은 거리로 내몰리었을 지언정, 굴복하지 않고 울분과 분노를 품었다. 그리하여 강인하게 저항하고 참 언론을 온몸으로 지켜내기 위해 세상에 호소했고, 그 호소에 우리 많은 민중들은 오롯이 화답하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이 미치도록 아름다운 것은 그간의 울분과 분노와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 거대한 희망과 이상을 심어 놓을 것이다. 아니 이미 심어져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에서 어쩌면 금창태 사장에게 고마움의 애정을 건내주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사저널을 이제 온 국민의 저널로 날개달아 주었으니 말이다.(맛간 아이디어, "온국민저널"이란 제호 괜찮지 않나요? ㅎㅎ 아 저 못난 '국민'이란 말이 조금 거슬리는구만.)

'참언론실천시사기자단'란 긴 명칭에는 홍길동의 호부호형하지 못하는 서글픔보다도 더 큰 아픔을 담고 있다. 제 이름을 제가 부르지 못하는 것을 어찌 호부호형하지 못하는 아픔에 비하겠는가 마이다. 성룡의 'Who am I?"란 영화에서처럼 그들이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린 것도 아닌 다음에야 부르고 싶어도 저 더러운 자본이 손에 쥐고 한낱 법이란 칼로 부르지 못하게 막고 있으니 저 긴 이름만큼이나 긴 서글픔 담고 있다. 그러나 이 긴 이름을 우리 힘주어 말함에 있어, 우리는 끝끝내 '참언론'을 수호하는 자들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참언론'을 분명히 '실천'하고도 남을 '시사기자단'이 되고야 말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것이 여기 이 책, 바로 시사저널 전 · 현직 기자들이 엮은 『기자로 산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이전의 시사저널의 정신과 가치와, 참언론 실천의 노력과, 사실과 진실을 밝히고자한 구구절절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만날 수 있다. "기자로 산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이기에 이 시사저널의 기자들은 오늘 이 험난한 길을 가는 것인가를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참언론실천시사기자단'이란 길고 긴 이 이름이 왜 그들에게 값하는 이름인지를 알고 싶다는 이 책을 읽어보길 강력히 권한다. 여기서 더 이상 떠벌이는 것은 자칫 아둔한 잡설에 지나지 않을까를 염려할 따름이다.(다만 한 가지 잡설을 덧붙이자면, 이 책을 읽고 나서야 www.sisaj.com에 당장에 달려가서 정기구독을 단박에 약정하는 단호함과 신뢰를 이 책은 나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승주 모 나무 님과 아프(면) 락사스님의 영향으로 가입한 이 사이트에서 계속 로그인이 안 돼 이래저래 고생을 좀 하긴 했지만, 그 고생을 감수하고도 충분한 남음이 있었기도 했다.)

"기자로 산다는 것"을 나는 간혹 꿈꿔보기도 했지만, 이 책을 읽고 서는 아예 손사래를 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 시사저널 전 · 현직 기자들처럼 살아야 진정한 '기자'가 되는 것이라면 나는 꿈에라도 기자가 될까 두려울 따름이다. 그만큼 기자 한 번 제대로 해보자면 이 사람들만큼 해야되겠고, 그러자면 나는, 한숨만 나올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 '참언론실천시사기자단'의 앞으로 보여줄 진정한 저널, 그 저널의 독자만큼은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참언론실천시사기자단의 독자로 산다는 것은 나에게, 성우제 식으로 말하면 "기적이자 축복"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기자로 살고 있는 한, 자 이제 우리 이런 사람들의 독자로 살아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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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7-31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저도 찬조출연하는군요. :)
이 땅의 정의과 기본이 지켜지는 그날까지.

멜기세덱 2007-07-31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면)약사써 님은 찬조출연이시라기보단, 특별출연이라고 해두죠...ㅎㅎ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 -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굴레를 벗고 자주의 새 역사를 여는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 혁명 연구모임 지음 / 시대의창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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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는 다분히 우리에게 낯선 곳이다. 남미하면 제일 먼저 축구를 떠올릴 따름이다. 좀 더 나간다면 브라질의 삼바나 아마존 정도 되겠다. 중미 지역이야 더 말할 것도 없이, 단순히 우리에게 여행지 그 이상은 아니다. 결국 우리에게 중남미 지역은 다분히 오리엔탈리즘적 인식에 쌓여있다. 어느 TV프로그램의 오지탐험 코너의 단골 무대가 아프리카이거나 중남미 지역이라는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듯이 말이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볼리비아, 페루 정도 남미 지역 국가들이 떠오르는 건 축구와 상관된다. 그 밖에 멕시코나 코스타리카 정도가 떠오르지만, 축구이거나 휴양지이거나 오지이거나다. 또는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서의 오랜 옛날에 갇혀있을 따름이다.

중남미는 우리 인식가운데 매우 '흥분된' 상태로 놓여 있다. 헐리우드 영화에 쇄뇌된 영향 탓이기도 하겠지만, 우리와는 지역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매우 먼 나라이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그만큼 우리는 중남미를 잘 모른다. 이 정열의 대륙에는 지금까지 끊임없는 혁명의 연속으로 발전해 왔다. 그 중심에 우리에겐 체 게바라가 상징적으로 떠오른다. 흥분과 혼란과 정열과 혁명의 대륙 중남미에 또 하나 새로운 혁명이 진행되고 있으니, 그 주역은 베네수엘라의 체베스란 인물이다.

자칭 '볼리바리안 혁명'이란 기치아래 베네수엘라는 온갖 혼란과 어려움 끝에 혁명의 기초를 닦았다. 차베스가 집권하면서 민중들의 거의 일방적 지지아래 '급진적' 혁명이 진행중이다.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에 맞서 21세기 신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자원의 국유화를 추진하고 토지의 재분배 등 혁명적 정책들을 저돌적으로 진행시키고 있다. 무엇보다도 차베스는 미 정권을 등에 업은 매판자본가와 보수세력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볼리바리안 서클의 민중조직의 집중적 지지하에서 이 모든 혁명 정책들을 강력하게 추진해 오고 있다.

아마도 전세계의 지도자 중에서(김정일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는 지도자가 차베스가 아닐까 한다. 그는 어떻게 이런 높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까? 그의 다양한 혁명 정책들을 확인하게 된다면 이런 현상을 충분히 이해할 법도 하다. 사회의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민중을 위한 정책들을 시행하고 있는데, 그것도 가장 기본적 민중 복지 정책으로써 무료교육과 의료서비스의 확대에 집중되고 있다. 세상의 어느 지도자도 이런 무조건적 민중 복지 강화 정책을 펴기에는 무척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차베스는 그걸 하고 있으니 이런 민중의 지지는 날로 높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독재정권과 일부 부유 지배층의 억압아래 억눌려 궁핍하게 살아온 베네수엘라 민중들에게 이런 차베스는 구세주일 수밖에 없으리라.

차베스의 볼리바리안 혁명의 궁극적 목표는 중남미의 통합이다. 강력한 제국 미국에 맞서기에는 베네수엘라는 지극히 약소국이며, 세계의 조폭 부시에 비해 차베스 골목대장일 따름이다. 미 제국의 신자유주의의 확산아래 중남미는 죽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차베스의 생각이다. 따라서 미 제국과 '맞짱'뜨기 위해서는 중남미의 통합에 따른 공동의 대응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차베스의 급진적 혁명이 다분히 공상만은 아님을 확인시켜준다. 베네수엘라만의 혁명으로는 21세기를 살아남기에는 불가능할 따름이다.

이 책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를 읽으면서 차베스에 대한 급호감을 갖게 되는 한편, 또다른 근심거리가 생기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베네수엘라의 혁명이 성공적 기로를 타고 있고, 더 나아가 차베스는 중남미의 통합을 위해 절실히 노력하고 있는 점을 볼 때 차베스를 적극 지지하지만, 이것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우리에게 미국은 너무나 거대하고 무서운 세력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차베스와 베네수엘라, 그리고 베네수엘라의 혁명에 응원을 보내는 모든 이들이, 차베스 이후의 베네수엘라를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차베스의 다양한 민중을 위한 정책들이 너무나 급진적이기 때문에 즉흥적이라고 판단될 수도 있다. 그것은 그것이 오랜 지속성을 갖기에 너무 힘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동반한다. 지역공동체를 활성화하면서 민중들의 의식을 키우려는 노력이 있지만, 민중들은 배고픔 앞에서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차베스의 혁명 정책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느냐 하는 점에 이 혁명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본다.

차베스 이후의 베네수엘라, 그리고 중남미를 상상할 때, 우려가 더욱 크게 남는 것은 왜일까? 그만큼 미 제국은 전세계를 독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차베스가 성공하기를 기원한다. 베네수엘라의 혁명을 넘어서 중남미의 통합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그러기 위해서 세계의 각국들이 미국에 어느 정도의 딴지를 걸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미국을 큰형님으로 깎듯이 모시는 우리나라는 좀 반성할 필요가 있겠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차베스에게 관심을 기울이자. 그러다가 우리를 향해 차베스가 "전 세계의 민중이여, 단결"하자고 도움을 요청해 올 때를 위해 우리의 힘을 키워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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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03 2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7-04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독한 한국인 - 중독과 거리두기 사이에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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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에나 논쟁은 있었더랬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한복음 1:1) 말이 있는 곳에 논쟁이 있다. 곧 인간의 논쟁은 '태초'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닐까? 논쟁이 없는 사회는 더이상 사회가 아닐 것이다. 전체주의 국가나, 왜곡된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논쟁은 있었더랬다. 다만 숨죽인 논쟁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역사는 어느 정도 큰 틀에서의 논쟁의 역사이지 않을까? 그래서일까? 논쟁의 추이를 따라가보는 것은 사뭇 재밌고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 시대 논쟁의 주역을 꼽자면, 이 사람 강준만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폭넓은 문제적 사안들에 강준만은 빠지지 않고 참견한다. 넉살이 좋은 것인지 이곳저곳 껴들지 않는 데가 없다. 그들 이런 참견을 두고 혹자들은 강준만의 오입질에 눈쌀을 찌푸린다. 때론 지나치달 정도로 안 껴드는 곳이 없는가 하면, 또 한편으론 강준만이 오죽 답답했으면 시시콜콜 그렇게 참견질을 하겠는가 하는 어느 정도의 수긍도 간다. 이런 강준만이 있기에 잠잘 뻔 했던 우리 사회 곳곳의 문제들이 들추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긍정적 의미부여를 해 볼 만도 한 일이다.

사실 내가 강준만이란 인물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그간의 내 관심사에 강준만은 그 주변부에서도 머무르지 못 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강준만의 '오입질'이 내 관심사 주변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한국 문단의 신진 문인들과 더불어 '문학권력'을 비판이 일기 시작할 무렵, 강준만은 빠지지 않고 『문학권력』으로 내 관심사의 경계를 침범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강준만 따라 읽기는 시작되었다. 그의 글들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가 다루는 것들이 다분히 '논쟁적'이어서, 싸움 구경하는 재미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그의 논쟁을 따라가면서부터 나의 관심사의 외연이 점차 확장되어 가고 있음을 고백한다.

얼마전 강준만의 『인간사색』이란 책을 읽다 말았다. 강준만식의 글쓰기를 한마디로 평하자면 '짜깁기'라고 하면 어떨까? 거기에 몇 마디 수식을 붙여주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를테면 '절묘한' 혹은 '창조적' 짜깁기라고. 그는 그간 내게 '짜깁기'에도 수준이 있고 품격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논지와 주제에 알맞은 다양한 텍스트들을 절묘하게 인용하는 능력은 강준만이 가장 뛰어나지 않을까? 그런데 그간의 읽기에서는 이런 것이 나름 흥미와 관심을 끌 수 있었던데 반해, 『인간사색』에서의 그의 짜깁기는 그런 절묘함과 창조성을 거의 갖지 못해, 읽기에 지루함과 괴로움만을 더해 주었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강준만식 짜깁기 수준의 고저를 『문학권력』과 『인간사색』을 비교해보면 그 극과 극을 맛볼 수 있을 듯 싶다.

『인간사색』을 읽다가 치워버리면서 어느 정도 강준만에 대한 허망함을 느꼈다고 해야겠다. 그런 중에 이 책『고독한 한국인』이 나온 것인데, 다소간 이 책을 선택하는데 망설임을 갖기도 했었다. 그러나 논쟁적 강준만에 대한 중독을 끊을 수는 없었지 않나 싶다. 그렇게 이 책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했고, 그간의 강준만식 짜깁기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그의 글쓰기를 맛볼 수 있었다.

이 책은 그가 <한겨레21>과 월간 <인물과사상> 등에 기고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그의 시론, 칼럼적 성격의 이 글들은 강준만식 글쓰기의 진수라고 하면 어떨까? 참견하기 좋아하고, 문제들을 들추기 좋아하고, 여기저기서 논쟁을 불씨는 당기기 좋아하는, 문제적 · 논쟁적 인간 강준만의 본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글들이기 때문이다. '고독한 한국인'이란 타이틀 아래 묶인 30편의 글들이 이런 맛들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그가 지속적으로 두드려 온 대통령 노무현과 유시민, 그리고 정치권에서부터 보수세력의 든든한 지원군 이문열을 큰 테마에서 다루고 있고, '대중의 고독'이란 테마 아래에서 우리 사회는 다양한 '고독성'을 강준만의 필치로 담아내고 있다. 아울러 지방 소외의 문제들을 적시하며 강준만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기도 하다.

대부분의 문제들이 그간 강준만이 자주 다루어 왔던 것들이지만, 1장의 '대중의 고독' 편에 모인 글들은 강준만이 얼마나 다양한 주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나 대중가요의 '사랑타령'을 풀어낸 글에서는 세월따라 흘러간 대중가요를 흥얼대는 '노래하는 강준만'을 상상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무엇보다 이 책에서의 재미는 치고 받고, 되치는 강준만의 열띤 논쟁의 추이를 흥미롭게 따라갈 수 있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유별한 강준만의 사랑 혹은 애증을 이 책에서 확인하는 것은 또다른 즐거움이기도 하다.

강준만은 왜 이리 논쟁적일까 하는 의문을 가져보게 된다. 강준만은 그래서 다분히 문제적이다. 아니 문제적이기 때문에 논쟁적 인간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말했듯이 한국인은 고독하기 때문일까? 강준만도 한국인의 한 사람이기에 그 또한 고독하다. 고독한 인간 강준만에게 논쟁은 그의 고독해결의 유일한 통로일 수도 있지 싶다. 무엇이 먼저고 나중인지 알 수 없지만, 논쟁의 한 가운데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강준만은 어느 곳엔들 몸둘 데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는 고독할 밖에. 고독에 치여 숨죽이고 있자니 강준만은 참을 수 없어 사회 곳곳의 문제들에 불을 붙이는 이 시대 고독한 논쟁자가 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책 날개에서 강준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묵묵하고 성실하게 매일 글을 쓴다. 끊임없는 글쓰기를 통해 학문간의 경계, 전문가의 경계를 뛰어넘어 학문 신비주의에 갇혀 있는 지식을 대중화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또한 그가 고독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지 싶다. 하여간 고독한 인간 강준만의 논쟁은 우리를 흥미롭게 한다. 그러나 흥미를 넘어 강준만의 지적에 대한 일말의 깊은 사려를 우리가 보여주어야 그의 논쟁에 의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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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
윤지관 외 엮음 / 당대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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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나라가 영어에 웃고, 영어에 우는 나라, 아니 영어에 목졸리어 켁켁거리는 나라, 그 나라는 어디에 있을까? 아이들 동요에 "우리나라 좋은 나라"라고 하지만, 어쩌면 이젠 "우리나라 영어나라"로 고쳐 불러야 할 판이다. 학원들이 우리나라처럼 그렇게 많은 나라가 없다고들 하는데, 그 많은 작고 큰 학원들마다, 어느 동네 구석에 처박힌 보습학원에서까지도 파란눈의 원어민 영어선생이 존재하는 나라 또한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는 영어가 대세다. 영어를 해야 장차 먹고사는 일에 지장이 없다는 소릴까? 그렇다면 장차 나는 굶어 죽고야 말 것이다.

98년 복거일로 촉발된 영어공용어화 논쟁이 아니었을지라도 그간의 경향은 영어의 중요성이 점점 더 강조되어 왔다. 특히나 2000년 이후 거의 대부분의 대학에서 졸업인증이란 제도하에 영어를 못하면 졸업을 못하게 만들었다. 우리나라에 유학온 외국인들이 흔히 우리나라처럼 대학 졸업이 쉬운 나라가 없다고들 하지만, 우리나라 대학생들에겐 그 말이 그렇게 사실만은 아니다. 왜냐? 영어가 많은 학생들의 졸업에 제동을 걸기때문이다. 대학 나올려면 제 전공은 둘째치고 영어라도 좀 해야 된다는 얘긴데, 대학 졸업장이 목숨같던 이 나라는 이제 영어에 제 목숨이 달린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아니 돼버렸다.

대학가의 아침은 여전히 활달해 보인다. 그 중에서도 가장 활발한 사람들이 있다. 아침 수업에 바쁜 걸음을 총총히 옮기는 학생들에게 재빨리 전단지를 건내어 주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 전단지의 열의 아홉은 토익, 토플 강좌 안내지다. 대학들은 현수막과 대자보와 포스터들로 넘쳐난다. 그것들 다섯 건너 하나씩도 바로 이것들이다. 우리나라 모든 대학생들의 제1전공은 어쩌면 영어라고 해야 맞는 말인 것 아닌지 모를 정도다. 우리나라 대학이 이 정도니, 대학만 바라보는 중고생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아니 초등학교도 가지 않은 어린아이들까지도 영어학원은 필수코스가 되어버렸다. 결국 "우리나라 영어나라"라는 등식은 항등식이다.

대한민국은 단일민족이니, 단일어를 사용하느니 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지만, 역설적이게도 영어에 대해서는 우리의 단일어인 '한국어'보다 그 위상이 높다. 이게 무슨 민족적 각성의 문제니, 개탄할 노릇이니 할 계제는 아니지만, 영어만 유달리 고취되는 이 현상에는 무언가 비합리적 요소가 내재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왜 우리나라는 이토록 영어에 열광, 아니 광분하는 것일까? 그 궁금증들을 조금 풀어볼 수 있는 것이 이 책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다.

이 책은 영어와 영어교육 및 영어공용어화 논쟁에 대한 그 간의 여러 영어전문가들의 논고들을 모은 책이다. 그 논고들은 멀게는 90년대에 발표된 것들로부터, 가깝게는 200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에 발표된 것들이지만, 최근의 '영어' 문제, 즉 영어교육의 부실과 영어공용어화 주장의 부각들에 대한 비판의 논지를 중심으로 모인 것들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영어교육의 역사를 가늠해보면서, 현재의 이런 영어 현상이 이르기까지의 근원을 탐색하는 글이 있는가 하면, 어느 노영문학자의 영어교육에 대한 비판적 경험적 성찰도 담겨져 있다.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한 것인가』란 책으로 유명한 더글라스 루미스의 '영어회화'에 대한 비판적 논고도 있고, 1997년 『국어라는 사상』으로 일본의 산토리학예상을 수상한 이연숙의 "일본의 영어공용어화론"의 전개를 논한 글에 이르기까지 여러 영어학자, 영문학자들의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논고들은 다양한 제재들을 다루고 있지만, 전체가 하나의 문제, 곧 우리 안에 내재된 신식민주의적, 혹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적 '영어'의 문제를 중심적으로 비판되고 있다는 것이다.

유달리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영어의 '원어민'으로서 일본에서 영어회화를 가르치기도 한 더글라스 루미스의 '영어회화'에 대한 경험에서 비롯된 이야기들이었는데, 여기서 그는 미국인의 입장에서 우리들이 그렇게 영어회화에 열광하는 현상에 대한 의문을 갖고, 그것들이 하나의 '이데올로기'임을 역설하고 있다. 우리끼리의 '영어' 문제를 진정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듣는 것은 보다 설득력 있는 영어 담론으로 가는 길일 수도 있겠다.

하여간에 영어가 이처럼 문제적 언어가 되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상황은 아닐테지만, 우리나라만큼이나 '극성'인 나라 또한 없을 것도 같다. 전체 논지들이 영어가 가지는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성격과 아울러, 그것이 강조되는 경제적 논리로 인한 공용어화 발상의 문제점들, 나아가 영어회화만을 강조하는 우리나라 영어교육의 문제점들을 설득력 있게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영어 문제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해답들을 제시해 주고 있다.

기실 나는 영어 한마디 제대로 못 하지만, 현재 영어가 내 앞길에 지장을 줄 가능성은 앞으로도 극히 적어 보인다. 우리나라 수십 수만의 대학생들이 졸업을 해서 영어를 밥줄로해서 살아갈까 하는 것은 여전히 의문이지만, 그리 많은 이들이 영어때문에 밥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 것이다. 너무 성급한 예단일지 모르지만, 지금의 영어에 대한 이 대단한 열성들은 너무 많이 지나친 것이 아닐까? 어쨌거나 우리는 영어를 배우긴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더글라스 루미스의 마지막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의 말을 옮기며 자판의 두들김을 마치고자 한다.

"영어공부 자체가 추종적 태도에서 자유의 도구로 변화될 때, 일본인들이 느끼는 그 모든 영어에 대한 '특별한 어려움들'이 정말이지 마치 안개가 걷히듯 사라지게 될 것이다. 백인선생들만을 고용하는 외국어학원들에 대해서는 보이콧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 영어를 공부하고자 하는 일본인들은 서로들 앞장서서 동남아시아 사람들과 스터디그룹을 조직하여 아시아의 문화와 역사와 정치 그리고 아시아적 표현을 반영하는 새로운 아시아판 영어를 창출해야 한다. 그리하여 만약 아시아를 방문하는 미국인들이 이 새로운 아시아판 영어를 제대로 못 알아듣겠다고 투덜거리게 된다면 그때는 외국어학원에 나가야 할 사람이 바로 그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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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inpix 2007-07-01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저저번주엔가 SBS의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영어 콤플렉스에 대해 다루었던데요. 그것과 과련해서 읽으면 좋겠네요. 방송에서도 우리나라 80% 이상은 영어를 그렇게 능통할 정도로 필요치 않는다고 하던데, 유치원 때부터 영어 유치원에 보내려고 하는 행동이 안타까워 보이더라고요.

멜기세덱 2007-07-01 22:48   좋아요 0 | URL
전 국민이 영어 능통하면 뭐 손해볼 일이야 있겠는니까마는 능통을 강요당하는 사회의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아고, 딴 건 둘째치고, 저는 우리나라 '엄마'들이 아이들을 좀 고만 괴롭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답니다.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 근대 망령으로부터의 탈주, 동아시아의 멋진 반란을 위해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박노자를 좇아온 세월이 벌써 8년여가 되어간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충격에서 시작하여 이 책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그의 저서들을 꾸준히 읽어왔다. 박노자를 따라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닌다는 것은, 그 비정(非情)한 역사의 굴곡들로부터 우리 안에 숨겨져 있던 탐욕적 이데올로기의 잔재들이 발가벗겨진 그 당황스러움과 부끄러움의 수치를 면치 못함을 의미한다. 박노자는 그렇게 나에게, 또한 우리에게 그 추악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맞이해야함을 일깨우는 죽비 소리와도 같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그는 대한민국이라는 전근대적, 국가주의적 추태들을 들추어내어 우리들의 진정한 대한민국, 곧 “다양성의 나라, 평등한 나라”로 거듭날 것을 부르짖는다. 이어서 그의 작업은 우리안의 편견적 폭력과 차별의 일상화를 비판하고(『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우리 스스로가 제국주의의 희생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내재된 또 다른 제국주의적 면모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하얀 가면의 제국』). 역사학자로서의 박노자의 이런 작업들은 역사적 사실들을 추적하고 탐구하며, 그러한 역사 가운데서 오늘날 우리에게 당대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그리하여 오늘날의 현실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열어갈 수 있는 것들을 찾는 것이다. 그 전형적인 모습이 『나를 배반한 역사』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의 근현대 수난사를” 되돌아보면서, 오늘의 당대적 현실에서의 ‘수난’의 반복을 피할 수 있도록 조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그의 작업들은 『우승열패의 신화』, 『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등에서 계속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폭력적, 파쇼적, 전체주의적, 군사주의적, 국가주의적, 제국주의적, 오리엔탈리즘적 요소들을 끊임없이 추적해온 박노자. 그런 그의 이러한 작업들은 과연 어떤 의미에서 그 유효함을 가질 수 있을까? 끊임없이 까발리는 폭로성 작업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지나칠지 모르지만, 박노자의 이런 작업들이 단지 아무런 목표와 지향 없이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다지 높은 평가를 내리기에는 부족함이 있을 것이다. 그 부족함을 채우려 했던 것일까? 그간 8년여의 세월 동안 그를 좇아 온 우리에게 그는 그간의 작업들의 중간 기착점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 책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까지의 그의 저서들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의 비판적 자기성찰이었다면, 이 책은 그러한 성찰로부터 이루어낼 수 있는 발전적 모델을 제공한다. 그 모델이라는 것은 저자 박노자가 이 책을 일컬어 “‘반란적 동아시아’에 대한 지역 연대 지향적인 보고서”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동아시아의 연대’다. 그런 의미에서 그간의 작업들은 이 ‘동아시아의 연대’를 이루기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 수반되어져야 할 것들이었다. 왜냐하면 ‘동아시아’가 ‘연대’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의 반(反)동아시아적 요소들을 제거하고서야 그 연대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것이라고 여겨왔던 많은 것들이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집요하게 파헤쳐온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발전적 지향 없는 성찰과 반성은 어떤 의미에서 죄악일 수 있다. 역사의 반복은 그런 성찰과 반성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면서, 한편으로는 그 성찰과 반성을 토대로 새로운 역사의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것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박노자의 지금까지의 작업이 성찰과 반성이었다면, 이번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에서의 작업은 그것을 토대로 한 발전적 지향, 곧 새로운 대안을 찾는 노력인 것이다. 새로운 대안으로 내어 놓은 ‘동아시아 연대’의 가능성을 과연 얼마나 될까? 박노자를 따라서 그 가능성을 가늠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동아시아 연대’는 어떻게 가능할까? 박노자는 서두에서 “주체적 인간의 뿌리인 ‘반란성’을 상실한 동아시아인으로서 우리가 새롭게 지향해야 할 ‘반란자적 모습’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반란적 동아시아’가 될 때 우리는 새로운 지향을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간의 동아시아의 기존 권력과 가치는 지극히 서구적이면서도 제국주의적인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반란’이란 그런 “권력에 대한 반란, 기존 가치에 대한 반란”이다.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풀뿌리 동아시아가 된 지금의 현실에서 우리는 ‘반란’을 꿈꾸어야 하다. 그럴 때에 박노자가 말하는 ‘동아시아 연대’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아시아 연대’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동아시아 민중의 평화 연대의 뿌리는 곧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이라고 박노자는 과감하게 선포하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에서의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는 외침의 소리를 다시 듣는 듯도 하다. 여전히 공산당하면 치를 떨면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는 이승복들이 많은 이 사회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말하기에는 조심스럽다. 또한 ‘사회주의’라는 말에 대한 거부감도 아직은 여전하다. 어쩌면 그간 우리 안의 이러한 편견을 혁파할 것을 박노자가 그렇게도 부르짖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주체적 동아시아인으로서 ‘반란성’을 회복하고, 그간의 추상적 ‘동아시아’ 담론에서 벗어나 ‘실감으로서의 동아시아’를 이야기하며, 그 구체적 모델로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이 될 것이라는 것이 바로 박노자의 ‘동아시아 연대’ 구상이라고 할 것이다. 그 구상과 구체적 모습들, 그리고 그 가능성의 탐색을 동아시아 역사의 뿌리에서부터, 그동안 소외되어 왔던 역사적 실재에서부터, 그리고 우리의 “생활 속에서 느끼는 동아시아”에서부터 찾아가고 있는 것이 이 책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다.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란 제목은 이제는 우리가 동아시아에 대해 ‘알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국가주의가 사회 곳곳에 내재해 있어 몰랐던 개인과 종교의 자유가 이전의 동아시아에서는 보편적이었음(「승려는 왕에게 절해야 하는가」, 「니체보다 ‘이지’가 빨랐다」등)을 설파한다. 동아시아의 근대에 있어서 망령(妄靈)으로 지목되는 ‘유교’에 대해서도 우리는 “진보성이 강한 많은 유교 사상가들”이 있었음을 ‘무시’했고 알지 못했다. 니체보다도 빨랐던 이지(李贄)의 ‘열린 개인주의’도 있었다. 동아시아 담론에서 배제된 ‘이슬람’과의 공존은 이미 우리의 동아시아 역사에서 존재했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이런 수많은 동아시아적 가치들을 깨달을 때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 민중운동과 연대하는 길”에까지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국적의 신비화’가 얼마나 반동아시아적인지, 근대 권력과 독재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이데올로기’들, ‘관습’을 들먹이는 지배세력들의 자구책, ‘민족자본’이라는 미명 아래 숨어 있는 재벌자본가들의 논리, 뿌리 깊은 ‘숭미주의’, 신형 신흥종교의 문제 등등 20세기에 이식된 ‘망령’들을 벗어버려야 한다고 박노자는 말한다. 얼마 전 까지 학교에서 ‘교련’을 배웠던 사람들에게 쓴웃음을 짓게 하기도 하는, “국가적 상징 세계가 ‘국민’의 의식을 결정짓는 슬픈 광경”을 만날 수도 있다. 오늘날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준 열사’가 열사만은 아니었음을, 그 이면에는 친일의 모습도 있었음을 알게 되는 것은 충격이기도 하다. ‘이광수의 파시즘’을 명쾌하고 비판한 ‘1930년대 논객 김명식’을 알게 된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우리 역사의 자랑 ‘화랑’의 동성애 가능성을 읽는다거나, 미적 기준의 변화들, 필자의 경험담이 섞임 ‘국제결혼’에 대한 이야기, 개화기의 페미니스트들의 이야기들은 더욱 이 책의 흥미를 돋우기도 한다. 우리가 영원한 우방일 것이라고 여기는 ‘미국’에 대한 이야기 또한 빼놓을 수 없겠다.

 

  이렇게 ‘동아시아의 연대’를 위한 박노자의 작업은 오늘날에 있어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 속에서 한미FTA를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미국의 신식민지로서 재편되어가고 있는 이 마당에서, ‘동아시아의 연대’를 주창하는 것은 어쩌면 무모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박노자의 이번 작업이 그 무모성을 가리기 위해서는 보다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담론으로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적 탐구에서부터 가능성을 엿보았다면, 그것은 토대로써, 뼈대로써 기능할 뿐이다. 그 토대에 건물을 세우고, 뼈대에 살을 붙일 때 ‘동아시아 연대’의 가능성은 더 이상 가능성의 담론이 아니라, 실제적 담론이 될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 사회, 나아가 동아시아의 새로운 모델의 좋은 설계도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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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아 2020-11-29 0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후감이나 후기로 쓰는 글이라 생각하고 읽었는데, 글을 쓰는 실력이 정말 보통이 아닌 것 같군요. 문학 작품 심사위원 내지 평론가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댓글을 쓰려고 들어와 보니 아니나 다를까 ‘비평가의 서재‘라고 되어 있군요. 보통의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도 ˝우리들의 대한민국˝이란 책을 통해서 박노자 선생을 알게 되었고 사상적 지향성도 비슷해서 아주 친근하게 느끼지만 그분의 많은 저서들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오늘 비평가님의 글을 보면서 이렇게 글을 잘 쓰는 분은 처음 보는 것 같아서 놀라움의 흔적도 남기고 칭찬도 해드려야 될 것 같아서 서툰 글을 계속 엮어봅니다. 아마도 비평이나 평론이 직업일지도 모르겠군요. 저도 박노자 선생이 저술하는 책을 계속 주시하면서 또한 비평가님의 서평에도 관심을 가지고 볼 생각입니다. 문장을 얽어나가는 논리적 전개가 정말 치밀하고 체계가 완벽한 것 같습니다. 박노자 선생 같이 중생들과 프롤레타리아들에게 좋은 서평과 독후감으로 자비로운 보시를 많이 베풀어 주시길 부탁드리면서 두서 없는 글을 마무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