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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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늘 아침 출근길에 보니, 학교 후문가에 장미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어버이날도 지났고, 스승의 날도 지났는데, 아직 뭐가 남았길래 꽃타령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하긴 어버이날이나 스승의 날은 카네이션으로 불이 났을 것인데, 오늘은 장미 한 송이 송이들이 어여쁘게 포장되어 거리에 진열되어 있었다. 아직도 꽃 줄 날이 남았는가보다 했다. 그러고보니 이 꽃 주는 5월에 어느 누군가에게도 꽃을 줘 본 기억이 없다. 멀리 계시는 부모님께 자못 송구스럽다.

왠 꽃일까 했던 의문은 이내, 오늘이 5월의 셋째 주 월요일, 성년의 날이라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물어 듣고야 해결되었다. "만 20세가 된 젊은이들에게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짊어질 성인으로서 자부심과 책임을 부여하는 날"로 문화관광부까지 나서서 주관하는 날이란다. 기실은 장미꽃 상인들이 주관에 후원에, 북치고 장구치는 것도 모자라 꽹과리까지 요란스레 쳐 대는 날인 줄 알았다. 내가 성년이 되던 날, 후배들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받은 기억도 나고, 더불어 백석의 시집을 받은 감회로 잠깐은 즐겁기도 하였다. 세월은 훌쩍 지나고 나는 낼모레 서른을 바라보는 서른 즈음, 세월은 유수와 같다는 고인의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지금이다. 그런데, 이 땅의 젊은 동량(棟梁)들은 오늘 성인이 되었다. 기쁜 일이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이 땅의 성인이 된 그들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다. 축하하는 바이다.

그런데 왜 일까? 어제 나는 이 책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은 탓으려니 했다. 이 땅의 이 젊은이들은 오늘 성년이 되었지만, 성년이 되기도 전에, 아니 세상에 태어나 울음 울고, 제 어미 아비에게 재롱도 부리기 전에, 굶주리어 죽어간 그들이 생각난 이유는. 브라질 세아라 주의 크라테우스라는 곳엔 "태어난 지 며칠 혹은 몇 주 되지 않아 배고픔과 쇠약, 설사, 탈수 등으로 숨진 이름 없는 아기들의 무덤", 곧 '이름도 없는 작은 이들의 묘'가 있다는데, 그들은 오늘 이 기쁜 성년의 날을 맞아 보지도 못하고 참혹한 굶주림에 그렇게 이름도 없이 죽어갔단다. "1분에 250명의 아기가 이 지구상에 새로이 태어나는데, 그 중 197명이 이른바 제3세계라 불리는 122개 나라에서 태어난단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수가 곧 이런 '이름도 없는 작은 이들의 묘'에 묻히는 운명을 맞는 거야." 이것은 그 무슨 아이러니일까? 우리 이 땅의 아이들이 성년을 맞은 오늘은 그들, 그 '이름도 없이' 죽어간 그 아이들의 죽음의 또다른 비극은 아닐까? 갑자기 마음 한 켠이 답답하고 울울(鬱鬱)하다.

왜 하필 어제 나는 이 책을 읽었고, 또한 왜 하필 오늘은 '성년의 날'이어서, 붉게 활짝핀 장미꽃 한 송이 받아보지 못하고 굶어 죽어간 저 절반의 사람들을 생각하며 울적해지는가? 오늘 이 땅의 성년을 맞은 이들에게 살갑게 축하의 말을 전하지 못하며 하루 종일을 힘없게 지내야 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그리고 그 절반은 굶주리지 않으며, 또한 그 절반은 배불리 먹으며, 또 그 절반은 배가 불러터져 남겨 버리는가? 무엇인가 불합리한 것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그럴 수 없을 것만 같다. 또한 그래서는 더더욱 안 될 것만 같다. 아니 결코 그래서는 안 되어야 한다.

유엔 식량 특별 조사관인 장 지글러는 그 원인들이 "전쟁과 정치적 무질서로 인해 구호 조치가 무색해지는 현실, 구호조직의 활동과 딜레마, 부자들의 쓰레기로 연명하는 사람들, 소는 배불리 먹고 사람은 굷는 현실, 사막화와 삼림파괴의 영향, 도시화와 식민지 정책의 영향, 특히 불평등을 가중시키는 금융과두지배", 그리고 신자유주의라는 피도 눈물도 없는 무차별적인 정책 등을 들고 있다. 가난은 결코 가난한 자들의 죄가 아니라는 것, 그들이 게으르고 무능력해서도 아니고, 타고난 원죄, 죄앗을 씨앗을 품어서도 아니라는 얘기다. 모든 것은 저 저열(低劣)한 이 세계의 돈의 지배자들의 탐욕과 그들의 교묘한 이데올로기에 갖혀서 절반의 굶주리어 죽어가는 이들에 대한 무관심한 우리들에게 그들의 굶어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다. 아니, 그것은 큰 벌 받아 마땅할 죄악이다.

'비참(悲慘)'하다는 말은 오늘날 이 세상의 현실에 두고 말해야만 타당할 것이다. "더할 수 없이 슬프고 끔직"한 현실이 이것 말고 그 무엇이 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수십의 시체들이 산을 이루고, 저 브라질의 '이름도 없는 작은 이들의 묘'는 늘어만 가고 있다. 젖먹이 아이들의 분유에도 세계의 자본과 금융과두지배자들의 돈놀이가 존재하고, 쌀 한 톨, 밀 한 알 가지지 못해 굶주리 배를 부여잡을 힘도 없는 아프리카의 참혹한 민중들 뒤로 몇몇 금융자본가들의 베팅게임에 남아돌아 썩아가고 있는 이 불합리한 현실 말고 그 어디에 '비참'이란 말을 붙일 수 있으랴? 나는 다른 것을 찾는 것을 포기하겠다.

저자 장 지글러는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해 무척이나 염려하고 있다. 부록으로 주경복 교수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명료한 설명이 담겨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잘 신자유주의를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안다. 신자유주의가 그 무엇이더라도, 이 세상을 어떤 놈들이 좌지우지하며 주물러 대더라도, 저 죽어가는 이들을 밟고 내가 살아간다는 현실은 정말 말도 안된다는 사실을. 굶어 죽어가는 절반을 두고, 우리 절반이 살아남는다는 것은, 곧 그 절반이 굶어 죽어 사라진 후, 우리 절반의 절반이 또 그 꼴을 당하고야 말 것이라는 자명한 예측을 나의 이 멍청한 머리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말하나 마나, 세상의 절반이 굶어 죽어가는 이 현실은 불합리와 비참함과 죄악이라는 것을, 나는 이것 하나는 분명히 알겠다.

몇몇 매체들에서 오지를 탐험하고, 기아와 전쟁의 현장을 탐방하고, 구호의 손길을 사뿐히 뻗는 모습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때 몇 번의 전화다이얼을 돌려본 기억으로 오늘 나는 생색이라도 낼 수 있는 그런 인종이 못된다. 가끔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을 찔끔했었다고, 어떻게 저런 일이 이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느냐고 분노의 혈기를 머리끝까지 솟아올렸다고, '쯧쯧쯧' 세치 혀로 세상의 현실을 한탄했었던 적 있었노라고 자랑스레 떠버릴 수 있는 그런 인종 또한 되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오늘 이 성년의 날이 마냥 기쁘지 않았던 것은. 아 이 못난 인간아! 아 우리 못난 인간들아! 오늘 우리는 울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지글러의 말에 난 겸허히 귀 기울여 경청해야 할 것만 같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이 있다." 과연 그럴까? 내가 그런 생명체이긴 할 걸까? 오늘 내가 하루 종일 우울했었던 것에서 내가 그런 생명체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희망을 걸어보고 싶을 뿐이다. 누가 그랬을까?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고. 그런데 '빵'도 없이는 더더욱 살 수 없고, 어느 꽃 피는 봄날 화창한 5월의 셋째 주 월요일에 붉은 장미 한 송이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오늘 저 성년의 장미 한 송이 받아든 그 젊은이는 알고 있을까? 존 스튜어트 밀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고 했다지만,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고픈 맘도 전혀 없이 배부른 우리들은, '배부른 돼지'가 못내 부러울 저 굶어죽어가는 세상의 절반의 사람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우리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을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희망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내내, 내가 이런 글쓰기의 여유나마 즐기고 지금 이 순간에도 굶주리어, 너무나 굶주리어 배고픔의 울음 한 번 크게 울지 못하고 죽어간 아이들의 영령들에 미안한 마음 가득하다. 또 답답해진다. 그냥 희망만을 부여 잡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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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18 21:58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갈라파고스 2007년 11월 도서목록에 있는 책으로 2007년 11월 8일 읽은 책이다. 관심분야의 책들 위주로 읽다가 알라딘 리뷰 선발 대회 때문에 선택하게 된 책인데, 이런 책을 읽을 수록 점점 내 관심분야가 달라져감을 느낀다. 총평 물질적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이 책에서 언급하는 "기아의 진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막연하게 못 사..
 
 
마늘빵 2007-05-22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곧 읽어볼 생각입니다. :)

멜기세덱 2007-05-22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보셔야 합니다. 그들이 '아프'지 않게 말이에요.ㅎㅎ

마노아 2007-05-31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주의 마이리뷰 당선이군요! 멜기세덱님 축하해요^0^

멜기세덱 2007-06-01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황스럽네요. 어처구니 없는 현실에 한숨쉬고 한탄하고 푸념에 절망만 늘어놓은 것을...이주의 마이리뷰라니...

프레이야 2007-06-01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선 축하합니다!!

이매지 2007-06-01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세덱님 조금 늦었지만 축하드려요^^

멜기세덱 2007-06-01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배혜경님, 이매지님> 감사합니다.

드팀전 2007-06-09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많이 늦었지만 축하드려요.^^
 
스승의 옥편 - 한문학자의 옛글 읽기, 세상 읽기
정민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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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에 인천 교보문고 나들이를 갔다가 이 책을 만났다. 지하1층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교보문고에 들어서면 제일 처음보이는 신간서적 코너를 살펴보다 이 책이 눈에 확 띄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정민 선생의 책을 좋아해서 그의 신간소식에 귀를 기울여 왔었다. 그 즈음에는 『다산선생 지식경영법』과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이란 책이 연이어 출간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던 때였다. 이 책이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과 같은 시기에 출간되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승의 옥편'이라! 그 자리에서 집어들고 <책머리에>를 읽어보았다. "지난 10년간 쓴 글을 모았다.", "책 속에는 올해 열다섯이 된 둘째의 다섯 살 때 이야기부터 최근 이야기까지가 섞여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그의 삶의 향기가 진하게 배어있는 책이란 얘기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2권의 책과는 그 성격이 사뭇 다른 종류의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여러 편의 단문들을 모아두고 있다. 이 책의 제목과 같은 제목의 단문이 책의 첫머리에 실려 있는데, 나는 그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보았다. 그가 지금의 한문학자가 되기까지 이런 스승의 삶의 가르침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누덜누덜해진 스승의 옥편을 보면서 눈시울을 적셨던 제자 정민의 모습이 아른거려 그만 책을 덮고 제자리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사실 교보문고 나들이의 본래 목적은 책사러가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 책을 구경하는데 있다. 간혹 몇 권의 책을 사오기도 하지만, 그날 구경한 책들을 메모지에 꼼꼼히 적어오는 것에 주 목적이 있다. 그 날도 이 『스승의 옥편』을 메모지의 가장 윗편에 굵은 글씨로 적어놓고, 집에 와서 알라딘의 보관함에 담아 놓았다. 보관함에 담아 놓은 책은 오래 묵히는 것이 많았지만, 이 책 만큼은 며칠을 묵히지 못했다. 그렇게 이 책을 주문하여 구입한 후에 책상의 한 자리에 올려두고 매일 몇 편씩 읽어갔다. 사실 단숨에 읽어도 별 무리없는 책이지만, 그럴 수 없었던 것은 10년의 삶의 향기가 배어있는 이 책에서 정민 선생의 진한 향기를 맡기는 조금의 시간과 여운을 가져야만 했던 것이다.

한문학자라고 하면 흔히 좀 보수적일 것 같고, 고리타분하고, 지루한 옛 사람들의 사상을 되풀이하는 것을 일삼는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많은 부분에서 그것은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고전이라는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지루함의 대명사니까 말이다. 하지만 또한 많은 부분에서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많은 한문학자들이 고전을 현대라는 시대적 요구에 맞게 재해석하고 재구성해내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뤄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한문학자들 가운데 가장 선두주자는 바로 정민 선생이 아닌가 한다. 그의 책 『미쳐야 미친다』나 최근에 나온 『다산선생의 지식경영법』등이 그런 작업의 성공적 결과물이다. 그런데 그런 작업 속에서는 옛사람은 살아 있고 오늘의 사람은 어느 틈으론가 사라져 버린다. 정민 선생의 이런 작업들 속에서 그의 면모를 살펴보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성격이 사뭇 다르다. 한 두 쪽의 짧은 글들은 그의 생활 풍경들을 그리고 있다. 기존의 그의 작업들과 비슷한 방식의 글들은 이 책의 1부와 4부에 실려 있기는 하지만, 다른 부분들에서는 정민이라는 개인의 삶과 생각들이 고스란히, 그리고 솔직한 고백으로 울려나고 있었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4학년짜리 누나가 덧셈 뺄셈을 못하고 일곱 살배기 제 동생이 못내 한심했던지 제가 가르치겠다고 먼저 나섰다.
  "7 빼기 5는 뭐야?" "7 빼기 5?" "그래! 7에서 5를 빼면 뭐냐구?" "7!" "뭐? 어째서 7이야! 7에서 5를 뺐는데?" 누나의 말꼬리가 조금 올라간다. 답답하다는 듯 동생이 말한다. "자! 여기 7이 있지?" "그래." "그리구 여기 5가 있지?" "그래." 동생은 손가락으로 5를 가린다. "7에서 이렇게 5를 빼고 나면 7만 남잖아? 그러니까 7이지." 할 말 잃은 누나가 쪼로록 달려와 말한다. "아빠! 얘 좀 봐. 7에서 5를 빼면 7이래요."
  나는 에디슨이 생각나서 기특해서 혼자 막 웃었다. 
    -「에디슨이 생각나서」전문, 144쪽.

이런 그의 '생활 속의 단상'들에서 정민이라는 개인의 삶과 사유를 엿본다는 것은 이전의 그의 성공적 작업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그가 한문학자로서 살아온 인생의 여정들 속에 이런 내면이 있었다는 사실들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그의 한문학자로서의 성공적 작업들, 그러니까 고전을 현대적으로 번역해 내고 그것은 오늘날에 적합하게 재구성해내는 그의 고전을 보고 해석해 내는 시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그의 내면의 고백과 같다. 정민이라는 한 개인이 올곧이 살아있는 책이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이 책을 그는 소리소문없이 세상에 내어놓은 까닭은?

옛사람의 글을 현대적 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한문학자가 한문을 한글로 번역한다는 것 또한 예외가 아니가. 한자 한 글자 한 글자에 다 뜻이 있어, 그것을 문자 그대로 풀어내기만 한다고 그것이 번역이랄 수는 없다. 그 안에 담긴 상황과 문맥을 함께 풀어내야 진정한 번역일 것이다. 그런 작업들의 어려움을 엿볼 수 있는 인상깊은 이야기가 이 책 속에 담겨있다. 한시를 번역하다가 '텅 빈 산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로 했던 것은 그의 스승은 '빈 산 잎 지고 비는 부슬부슬'이라고 더욱 간단히 바꿔버렸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것은 시가 가지고 있는 운치와 운율과 여운을 더욱 살려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민 선생은 "정신이 번쩍 들었"고 '아찔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그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정민 선생의 문학적 감수성을 이 책에서 자주 엿볼 수 있다. 특히나 그는 시를 좋아하는 것 같다. 여러편에서 시를 읽으며 느낀 감회들을 적고 있다. 보통 한시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서정주나 신석정, 김용택의 시들도 즐겨 읽는 듯하다. 그런가 하면 어린 시절 부르던 동요나, 학창시절 음악시간에 배웠던 노래들에 얽힌 단상들도 이 책에는 등장한다. "피곤한 공부는 공부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말은 또한 명문장이다. 그의 문학적 감수성, 그리고 주변 생활의 단상에서 오는 다양한 사유 속에서 그의 고전의 현대화 작업들은 보다 창조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은 아닐까?

또한 이 책에서는 그가 자식을 키워오면서 느끼는 기쁨들과, 세상의 여러 씁쓸한 단상들, 그리고 지난 추억에 대한 구수한 정취까지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정민이란 한 개인이 있기까지의 희로애락을 이 책 한 권에 담아놓은 것이다. 옛 글 뒤에 묻혀있던 오늘날의 한 한문학자가 옛글이 아닌 자식의 글로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옛사람의 풍취 그 이상으로 정민이란 개인의, 우리 시대의 뛰어난 한 학자의 짙은 내면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애착이 간다는 3부의 '생활의 발견'에 모은 글들이 그만큼 나에게는 값지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이 책의 뒷부분에 독서에 관한 좋은 글들이 담겨 있지만, 오히려 그것은 다만 부록에 지나지 않게끔 느껴진다. 이 책의 진한 정민이란 사람의 향기에 깊게 취할 따름이다. 언젠가 그의 이런 글들이 후대의 사람들에게 옛글의 명문으로 기억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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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 - 박노자의 한국적 근대 만들기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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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박노자를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아껴 읽어왔다. 『당신들의 대한민국1, 2』에서부터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나를 배반한 역사』, 『하얀 가면의 제국』에 이르기까지, 그의 저서들을 열심히 탐독했다. 분명히 그의 필치는 나름의 매력이 있었고, 다루는 주제들도 나의 관심사 중의 하나였지만, 그의 이런 저서들을 탐독하게 만든 것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들이 나를 화끈거리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아마도 그런 것이 있었더랬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읽고서 나는 이런 화끈거림을 살뜰히 느꼈다. 부끄러움에 고개숙이기 보다는 '우리들의 대한민국'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박노자에게 매력 만점을 주었고, 나는 그를 칭찬하는 리뷰를 쓰게 되었다. 그를 '경계인'이라고 애써 치부하면서, 그러기에 그런 날카로운 지적들이 가능하다고, 우리가 숙연히 받아들이고 고쳐가야하지 않겠냐고. 그렇게 박노자의 첫 저서에 평을 단 적이 있었더랬다.

그 후로 계속된 박노자 읽기에서 나는 더이상 그의 저서에 어떤 평도 달지 못했다. 무엇때문이었을까? 그의 저서들을 읽어갈 수록 나의, 그리고 우리의 부끄러움들이 너무도 무섭게 까발겨져서, 더이상은 고개를 들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다만 박노자 잘한다를 속으로 뱉어냈을 뿐이었다. 한가지 이유를 첨언한다면, 그를 이제는 더이상 '경계인'으로 규정할 수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귀하한 법적 한국인 박노자를 경계인이라 규정했던 내게는 '그는 나와 다르고, 우리와 다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에서 오는 관용이랄까? '남이니까 그런 소리가 가능한거지'라는 타자화였을까? 그런 것들이 분명 있었더랬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박노자를 우리와 다른 타자로 규정하는 '경계인'의 칭호를 붙여둘 수가 없다.

끊임없이 까발리고, '고발'하는 그에게 나는 이제 '우리'라는 동질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나 아닌, 우리 아닌 박노자의 진심어린 충고를 받아들이기엔 우리의 부끄러움이 너무 크고, 그의 충언을 받아들이고 '우리'를 반성하고 성찰하기 위해서도 이제는 그를 우리 안에 끌어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럴때 그의 까발림은 충언이 되고, 그의 고발은 우리의 반성과 성찰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는 지금 저 먼나라 타국땅 노르웨이 오슬로에 가 있다.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귀화한 그가, 저 먼 타국 노르웨이로 날아가버린 이유가 무엇일지 난 궁금하다. 그는 왜 노르웨이로 날아갔는가? 우리 (대학)사회가, 우리 사학계가 그를 진정 '우리'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단지 나의 추측일 따름이지만, 그의 우리 가까이에 있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며, 가까이서 '까발리고 고발' 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말이다.

그의 까발림과 '독설'적 고발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김일성 동상'과 '이순신 장군 상'의 담긴 이데올로기적 동질성을 말했을 때, 외국인 노동자(특히 동남아 및 아랍)를 대하는 우리의 오리엔탈리즘적 모순과 식민주의, 제국주의적 행위들에 대한 그의 냉혹한 필담에서 나는 진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화끈거릴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서도 옷깃을 여미며 그의 목소리를 경청했던 것이다. 여기 『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를 읽으면서도 달라질 것은 전혀 없었다.

이 책은 "이 사회를 지배하여 개개인에게 체제를 뒷받침할 '경쟁의 영웅'이 되게끔 감요하는 '힘'의 논리를 예쁘게 포장하는 군대, 스포츠, 종교 등 각종 담론들을 해부하여 그들의 '고상함' 두에 숨겨져 있는 진짜 내용이 무엇인지"를 고발하고 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힘'과 '폭력성'들을 추적하면서, 우리 사회 안에서 그것들이 어떤 모습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어떠한 과정을 통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게끔 조작되어 있는가를 탐구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우리 안의 '폭력'을 까발리고 '고발'함을 통해서 우리를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부제가 "박노자의 한국적 근대 만들기"라는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고발'과 까발림, 현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폭력적', '힘'의 논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작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탐구는 우리의 근대가 '한국적'이지 못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왜 한국적이지 못했던 것일까? 그 원인을 추적하고 고발하는 그는 이제 제대로 된 근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한국적 근대'를 만들고자 하는 박노자의 '한국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우리의 역사 해석에서의 '힘'의 논리는 고대로까지 수렴된다. 삼국시대 피비릿내 나는 전쟁 속에서 무참히 죽어간 이름모를 민중들은 역사의 어느 페이지에도 기록되지 못했다. 얼마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주몽>에서도 고구려의 '민족적' 힘의 번성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을 뿐이다. 이에 우리는 열광했고 공전의 히트를 쳤다. 우리 안에 내재된 이 폭력성은 곳곳에 숨어 있다는 것을 박노자는 세세히 까발린다.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의 배타성과 폭력성을 비롯해서, 교육에 있어서의 적자생존, 강한 '힘'을 가진 인간육성, 위인전에 담긴 '힘' 있는 영웅에 대한 숭배 등 이러한 '힘'의 담론은 종교, 역사, 교육, 문화 등등 어느 곳에서도 잠재해 있다. 강한 국가를 꿈꾸었던 개화기 인사들의 '경찰국가의 이상'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우리의 절대적이고 신성한 '국방의 의미'라고 여기는 징병제에 담긴 내막까지도 속속들이 추적해 내고 있다.

일제시대 '유도'가 유입되는 과정에서 어떤 논리가 작용했는지를 추적하는 그의 작업 또한 흥미롭다. "얼핏 보면 '일상의 당연한 부분'으로만 보이는 무술 수련이, 태권도를 위시한 여러 무술 종목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권위주의 시대가 끝난 뒤에도 계속 이 사회의 각종 지배 담론들과 복잡한 유착 관계를 유지한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우리 사회의 "가장 일상적이고 생활적인 것들이, 보이지 않게 가장 정치적일 수도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기억해야 할 것을 박노자의 말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날 '테러'를 보는 의식의 기반들은 어떻게 형성되었고, '동북공정' 논란에서 엿보이는 우리의 '힘'의 논리들 또한 해부하고 있다. 나혜석이란 한 여자를 끌어들이면서 근대가 던져준 여성의 고통을, 국가주의에 의해 잃어버린 우리의 개체성, 개인성을, 그리고 지역감정에 이르기까지, 박노자의 우리 사회의 '폭력'과 '힘'의 논리들의 원인자들을 찾아나선다.

이러한 대부분의 것들은 바로 우리의 '근대'형성기에서 적지않은 오류를 범하며 형성되었다는 것을 박노자는 진중하게 탐구하고 있다. 오늘날의 "체제의 수사와 권력관계의 현실 사이에서의 괴리는, 100년 전과 결코 다르지 않다"고 그는 말한다. 또한 "소위 '신성한 국방의 의무'가 실상 국가에 의한 상명하달적인 생활양식의 훈련을 받을 권위주의 사회 남성 구성원의 '사회화 의무'를 의미"하는 우리 사회의 이런 폭력성들은 "일제 말기의 총동원 체제와 식민지 이후의 남북한 군사주의 문화였"음을 그는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국적 근대'를 만들 수 있을까? 박노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개인 차원의 적극적인 저항은, 저들이 강요하는 생활 방식을 생각과 몸으로 동시에 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적으로 버티기" 힘들다. 쉬운 방법으로는 "어쩔 수 없이 재벌이 만드는 물건을 쓰더라도 노동 탄압과 극우 정당에의 기부로 악명을 얻은 악질 재벌들의 물품을 보이콧하고, 학벌 타파를 위해 분투하는 시민단체들을 할 수 있는 대로 지원하고, 합법적인 병역 거부와 대체 복무를 위한 친화적 여론을 인터넷 등을 통해 조성하는 등 한 개인이 온몸을 내던지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들이 있겠다. "바로 현 체제가 인간의 심신을 파괴하고 인간의 행복추구권을 빼앗는다는 의식"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박노자는 말한다. 그럴 때 우리의 '폭력의 세기'는 마감될 수 있을 것이다. "'힘의 숭배'는 생명 파괴의 길이요, 죽임의 길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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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4-18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을 때마다 부끄러움이 앞서서 선뜻 집어들지 못하는 이름 중 하나입니다. 리뷰 잘 보았어요.^^
 
코드 훔치기 - 한 저널리스트의 21세기 산책
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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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를 아는가? 잘 알다시피 그는 신들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 프로메테우스가 건내준 이 불로 인해 인간은 밝은 세상, 곧 文明의 세계를 열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에게는 '코카서스 산중에서' 영원히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얻었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윤동주, 「간」부분)

고종석. 그는 프로메테우스가 아직도 저 '코카서스 산중에서' 간을 쪼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지금, 21세기의 서막에서 불이 아닌 '코드'를 훔치고 있다. 인류가 불로써 개안(開眼)을 얻었다면 새로이 맞이하는 세 번째 천년에는 새롭게 변화할 세상과의 접속이 필요한 것일까? '코드'가 맞아야 '접속'이 가능할 터이다. 이 '불확실한' 21세기에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접속'하여 생존의 전류가 흐를 수 있는 '코드'가 필요하다. 이 코드를 고종석이 훔치고 있다.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제우스의 응징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판도라의 상자를 기억하는가? 온갖 악과 질병과 고통이 온 세상에 퍼져나갔다.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친 대가라나. 이 상자가 닫혔을 때 그 안에 희망만이 남았다고 한다. 고종석이 '코드'를 훔친 대가는 무엇일까? 그의 '우둔과 경박'에 대한 비난과 질타일까? 인류에게 주어질 또다른 판도라의 상자일까? 그 둘 모두일수도 있겠다.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는 '미리(먼저) 생각하는(아는) 자'란 의미를 갖고 있다. '선지자(a prophet)'라고 옮길 수 있을 터이다. 선지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곧, 예언이 된다. 그러므로 그는 예언자이기도 하다.

"모색은 부분적으로 전망이다. 모색이 일반적 전망과 다른 것은 그 속에 의지나 욕망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망은 일종의 예언이다."(8쪽)

고종석은 여기서 21세기를 모색한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전망'이다. 또한 그것은 '일종의 예언'이다. 그는 조심스러워 하지만, 그가 훔쳐내고 있는 '코드'는 프로메테우스가 훔친 '불'이며, 따라서 그는 프로메테우스이길 자처한 것이다. 곧 우리 에피메테우스들을 일깨우는 선지자요, 예언자가 된 것이다. "너무 구체적인 예언은 엇비슷하게 맞추었더라도 꼬두리를 잡히기 쉽다. 추상적으로 두루뭉실하게 얘기함으로써 도망갈 구멍을 미리 마련해 놓는 것이 슬기롭다."며 넋두리를 부리긴 하지만 말이다.

'예언'하면 아무래도 노스트라다무스가 생각이 난다. 곳곳에서 많은 이들이 지금도 자신들을 예언자라고 떠벌이지만, 아직까지 노스트라다무스란 이름을 따라 올 자는 없어 보인다. 고종석 자신의 훔쳐낸 그 '코드'의 비밀들이 21세기를 살아갈 우리,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에게 유효하게 된다면, 그를 이렇게 불러도 좋으리라. '고'스트라다무스 라고. 그럼 '고'스트라다무스 고종석이 펼치는 21세기의 예언들을 맛보는 것이 좋겠다.

고종석이 21세기의 '코드'를 훔쳐내려는 발상은 아무래도 그 자신에게서 온 것은 아닌 듯 하다. 그보다 앞서서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가 먼저 21세기를 예언했다. 『21세기 사전』(1998)이 그것인데, 지금은 대부분의 인터넷 서점에서 품절이다. 구해 보고 싶어도 구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자크 아탈리의 예언이 어떤 것인지는 고종석이 언급하는 정도밖에는 알 수가 없다. 아무래도 썩 신통치는 않은 모양이다. 신통한 것이었다면 여전히 잘 팔리고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아니면 어쩔 수 없고.

아탈리의 21세기 예언을 살짝 보면 "갈기갈기 터지고, 희희낙락하고, 야만적이고, 행복하고, 무분별하고, 기괴하고, 살아내기 어렵고, 해방적이고, 소름끼치고, 종교적이고, 세속적이고 … 그것이 21세기일 것이다."라는 식이다. 고종석은 얼핏 그 말에 동의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21세기도 틀림없이 모순의 시대일 것이다." '모순의 시대'라!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고, 둘 다 일 수 있고,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즉, 갈피를 잡을 수 있다는 말인데, 애초에 21세기를 예언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라는 소리인가? 그렇다면 이 책 『코드 훔치기』는 '책 앞에'를 써놓고는 더는 자판을 두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모순의 시대'란 역설에서 무언가 특별한 의미찾기를 그는 '모색'하고 있다.

그의 예언은 앞서 그가 피할 구멍을 미리 파놓은 듯 한 넋두리와는 다르게 구체적이면서도 단호해 보이기까지 하는 것들이 많다. 이를테면 첫 장에서부터 그는 '사회주의의 미래'를 단호히 점친다.

"확실한 것은 두 가지다. 첫때, 사회주의가 살아남는다면 그것은 사회민주주의의 형태로서다. 사회주의 '체제'의 부활은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불가능하다. … 둘째, 그 살아남는 사회민주주의는 제3의 길이 아니라, 조스팽식 사회주의에 가까울 것이다."(22~3쪽)

이런 단호함 속에도 피할 구멍은 파놓는 치밀함도 엿보이긴 한다. 이것은 그의 명석함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단호함 속의 치밀함은 허무맹랑한 예언 속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 '치밀함'은 그가 단호하게 예언할 수 있도록 그의 사고의 끈을 잡아 물고 늘어지고 있기도 하다.

21세기에는 '개인주의 혁명'을 완성해야할 시기로 명명한다. 곧 개인들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예언의 말씀이다. 그는 21세기 시대의 정신 또한 부여한다. 곧 "더불어서 살겠다는 정신"이다. 그런가 하면 '여성 해방'에 대한 모색도 보인다. 이런식이다. 그는 예언하면서 명령하고, 시대의 정신을 부여하고, 모색한다. 그럴때에 21세기는 가치있어지고, 그 가치에 접속할 수 있는 '코드'를 고종석은 훔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처럼 40여개의 테제 속에서 21세기를 예언한다. '자연과 문명'의 미래를 예견하고, 지식인의 운명을 점치며, 민주주의를 모색한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지만, 그 많지 않은 테제를 통해 21세기를 살아갈 우리 인류가 붙들어야 할 가치들을, 구체적인 사안들에서부터 거시적 정신과 사고까지 다양한 '코드'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그의 예언들은 간혼 낭만적 여린 심성도 느껴진다. 문학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살아남을 것임을 예견하면서 "문학이 있기 때문에, 한 어린아이가 굶주려 죽는 것은 추문이 된다. 그것이 문학이 남아 있어야 할 이류"라고 제시한다.

사회주의를 말하고, 개인을 말하며, 우리와 타자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사회생물학에도, 문학, 권력, 종교, 언어, 노동, 민족주의, 생태주의, 교육, 문화와 정치, 전쟁, 도시, 세대, 생명공학, 마리화나에까지 이 많은 것들을 한 예언자 고종석이 말하고 있다. 그가 이 시대 프로메테우스인 사실을 다시 한 번 입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명석함과 박식함, 그리고 이 시대 인류에 대한 따뜻한 애정, 변화하는 세상을 바라보는 예리함, 그리고 그의 모색 속에 들어있는 '의지'와 '욕망'들을 통해 볼 때 그가 훔친 이 코드들은 믿음직스러운 예언임에 분명할 듯하다. 그것은 고종석이 '고'스트라다무스가 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믿거나 말거나, 그가 훔쳐 낸 '코드'로 우리 나중 안 자들은 동이 튼 21세기의 새벽 이때에 일찌감치 새로운 시대로 접속해 보는 것 어떠하겠는가? 분명한 것은 아무도 '선배 저널리스트의 우둔과 경박을' 비웃지는 못 할 것이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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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 우리 역사 바로잡기 1
이덕일, 김병기, 신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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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흔히 우리 역사의 자랑거리로 “역사상 한 번도 다른 나라를 침입한 적이 없다.”는 것을 말하곤 한다. ‘얼마나 자랑할 것이 없으면 그런 것을 자랑할까?’ ‘뭐, 내세울 것 없으니 임기응변으로 갖다 붙인 것 아니겠는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간혹 이런 생각들을 해오곤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또한 그만한 자랑거리가 없다. 드넓은 벌판을 누빈 징기스칸의 몽고나, 아직도 거대한 영토를 거느린 중국 등의 대제국의 역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찬양을 받아왔다. 우리의 역사에서 그렇지 못한 것을 한탄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래서일까? 주변의 다른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랑으로 내세우는 한편, 우리 역사에서 숨은 대제국의 역사거리가 없는가를 열심히 찾고 있지 않은가?

  사실 우리가 다른 나라의 침입을 수백차례 당한 것은 뼈아픈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우리 역사에서 다른 나라를 침범한 적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하기 어렵다. 어찌 과감히 ‘단 한 번도’를 내세울 수 있느냔 말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의 역사가 말 그대로 다른 나라를 침입하여 칼과 창을 흔들어 파괴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면 그것은 정말이지 자랑거리가 아니겠는가? 난 요즘들어 그런 생각을 해보곤 한다.

  일본의 역사왜곡의 지난한 문제에 골머리를 앓아오던 차에, 저 기세등등의 대륙의 지배자께서 우리의 역사를 갈아먹으려 하고 있으니, 양수겸장을 맞은 것이 아닌가? 난감한 노릇인 것은, 말도 안 되고, 허무맹랑하기까지 한 논리로 우리의 고대사를 가로채려 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우리의 역사학계에서는 당황한 탓인지 속수무책으로 이렇다 할 대응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다.

  나는 이런 현실 속에서 차라리 우리의 역사가 한낱 보잘 것 없는 영토를 차지해 왔다손 치더라도 ‘다른 나라를 단 한 번도 침입한 적이 없는’ 평화를 수호하고 지켜온 아름다운 역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일본의 역사왜곡이나 중국의 동북공정은 무력과 전쟁의 목적, 즉 대제국의 옛 꿈을 다시금 실현하고자함에 그 기저를 두고 있다. 이것은 다만 지나간 역사의 왜곡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거기에는 피와 전쟁의 참혹한 역사만을 남긴 제국주의의 부활의 꿈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는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들과 똑같은 논리, 똑같은 목적에서의 ‘이에는 이, 눈에는 눈’식의 대결적 대응은 바람직한 것이 못 된다. 예를 들어, 우리의 옛 역사에서 “광활한 저 대륙을 종횡무진 누비며 대제국을 지배했었다”느니 하는 대응 말이다. 제국주의에 제국주의로 맞서는 것은 끝없는 파멸을 자초하는 것일 터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역사가 사실과는 다르게 왜곡되는 것에는 어떠한 타협과 정치적 의도가 반영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주변 강대국의 무서운 의도가 숨어 있는 역사왜곡의 문제에 대해 유효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충실한 우리 역사의 발굴과 체계화가 필요하다. 허무맹랑의 논리에 실증적 사료와 논리적 역사기술을 내세운다면 그들의 역사왜곡은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는 다소 선정적 제목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동북공정에 보다 유효적절한 대응의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제목이 선정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우리 역사 인식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좀 위험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에 대한 제국주의적 대결이 바로 이러한 인식이다. 어린아이들의 싸움에서 흔히 보이는 것이 자기 아빠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서로 주장하는 것이다. “너희만 강대국이었니? 우리도 강대국이었어 임마! 까불지 말라고. 확 그냥!”식의 논리가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는 한 마디에 담겨 있지는 않은 것인가?

  그러나 이런 제목을 담은 의도가 보다 대중의 주목을 끌기 위한 방편이라고 보여질 뿐, 책 속의 내용은 꼼꼼한 사료를 바탕으로 한 고조선의 역사를 재검토하고 서술하고 있다. 말하자면, 고조선이란 나라가 역사적 사실일 뿐 아니라, 과거 중국 고대의 한나라와 견주어 손색없었던 강대국이었음을 강조한 것일 뿐이다. 난 적어도 저자들의 집필의도가 거기에 있을 뿐이라고 보고 싶다. 그들과 똑같은 제국주의의 끝없는 열망이 담겨져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들이 밝히고 있는 이 책의 의도를 “일제 식민사관과 중화 패권주의 사관은 한 세기 가까운 시차를 두고 있지만 두 사관의 한국사 공격이 고조선이란 동일한 대상에게 집중”되고 있고, “우리 국민들의 현재의 역사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식민사관’에 대해 그를 바로잡고자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 고조선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인식을” 갖게 하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우리 역사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인식”이다. 그것을 위한 이 책의 노력은 가히 높이 살만하다.

  이 책에서는 우선 국사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고조선이 어떻게 잘못되어 있는지를 조목조목 따진다. 우리 국사 교과서는 대강 훌터 보아도 오류와 정리되지 않은 서술임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고조선에 대한 우리 학계의 체계화되지 못한 역사서술의 문제가 담겨 있고, 또한 식민사관에 의한 역사 기술의 더 큰 문제가 담겨있다 하겠다. 우리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의 초석을 다잡는 것은 바로 우리 역사 교육의 현장부터가 시급하다고 하겠다. 고조선에 대한 신화적 인식은 우리의 역사의 기초를 단순한 신화로 치부하게끔 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역사 인식의 기초가 그런 오류를 바탕으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신화속의 고조선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역사적 사실로서, 정확한 역사 인식을 위해서 이 책은 단연 돋보이는 성과를 이루었다고 생각된다. 흔히 ‘고조선’의 ‘고’가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서 붙인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었다는 아주 기본적 사실조차 잘 모르고 있었으니, 다 아는 듯하지만 거의 모르고 있는 것이 우리 역사의 시작이랄 수 있는 ‘고조선’이 아닌가 한다.

  이 책은 이 외에도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고조선의 모습을 복원하고 있다. 전체적 맥락이 고조선이 광활한 영토를 차지했던 강대국이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다만 우리 역사가 광대한 제국의 역사를 가졌었다는 뿌듯한 자랑거리로만 다가오지 않길 바란다. 이 책이 우리에게 보다 가치가 있는 부분은 고조선에 대한 보다 정확한 역사 인식을 갖추게 하는 것임에 있다고 하겠다. 고조선을 알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 책이 적절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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