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서평단 알림
독서 - 김열규 교수의 열정적 책 읽기
김열규 지음 / 비아북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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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나의 계절이다. 가로수 줄지어 늘어 선 길, 떨어지는 낙엽을 아삭아삭 밟으며, 깃세운 바바리코트 처량히 날리며, 걸어가는 처진 어깨의 뒷모습의 나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데, 나는 말라만 간다. 가을 하늘은 맑고 푸르러 높게 보이고, 온갖 곡식이 차고 넘쳐, 말에게까지도 먹일 양식이 많이도 돌아가니 말은 살찐다. 그리하야 이 가을은 天高馬肥요 秋高馬肥다.

그래서일까? 하늘은 높푸르고 모든 것들은 살찌는데, 왜 남자들은 외롭고 쓸쓸할까? 가을이 남자의 계절이라고 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바리코트나 팔아먹자는 상술만도 아닐 것이기 때문에. 하여간 내가 높고 외롭고 쓸쓸한 남자여서, 바야흐로 나의 계절이냐? 아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잖은가? 세상은 풍요롭고 하늘은 맑고 높아, 잔잔히 부는 바람이 살포시 책장을 넘겨주어 책읽기 좋다는 것일까? 그럴듯 하지만은, 이도 난 잘 모를 일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무슨 가을에만 읽자는 것은 아니잖은가? 하도 책을 안 읽는 현실속에서 태어난 고육지책만도 아닐 것이고. 여하튼 가을은 책읽기에는 좋은 계절임이 분명하고, 그래서 난 이 계절에 안성맞춤한 인간이길 바라고, 그래서 나의 계절이(었으면 한)다.

엊그제 촉촉히 가을비가 내렸다. 날은 하루가 다르게 싸늘해져만 간다. 가을은 선선해야 가을이다. 싸늘한 가을은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나를 상상하지 못하니 말이다. 벤치에 앉아서(혹은 누워서) 한가로이 시집을 펼쳐들고, 세월아 네월아, 아 가을은 외롭운 심사, 한 줄 시 속엔 이내맘을 담아 읊으면, 그 어찌 풍경 좋은 멋진 그림이 아니겠는가?

허송세월 보내는 것도 모자라 쓰는 것에도 죄다 허송한 떠벌림 뿐이니 참 한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변경하자면, 가을이고, 외롭기도 하고, 바쁜 일상들, 초조한 마음들 모이다 보니, 한가로이 책읽이나 편히 읽어봤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기에 구절구절 허한 마음 담아 늘어놓은 것이려니 해주기 바란다.

내가 책을 어줍잖게 심하게 읽기 시작한 것은 10년이 되지 못한다. 그도 하 긴 세월이라, 이제는 거반 활자중독에 가깝다고들 한다. 그래서 내 눈은 피곤하다. 버스 안에서도, 화장실에서도, 길을 걸으면서도, 내 눈은 한가롭지 못하다. 길을 걸으면서, 특히 출근하는 10분 남짓의 거리에서도 나는 책을 펼쳐들고 걷는다. 초기에는 이런저런 돌출물에 부딪혀 무릎팍도 솔찬히 깨졌다. 애꿎은 사람들에게도 충돌하고. 그런데 이제는 그런 일들이 거의 없다. 잘도 피해다닌다. 낯선 곳에서는 여전히 힘들지만.

책읽기에 푹 빠져지내는 축에서 나도 한가락 한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 분한테는 명함도 못 내밀 것 같다. 어줍잖게 책읽기는 어쩌고 저쩌고 떠들 수가 없다. 올해로 77세가 되는 이 분은 최근 『독서』라는 책을 펴내 나같은 풋내기들에게 한 수 가르침을 주신다.

   
  읽는 것, 그 자체에 홀려 있었던 것이다. 철들기 전 내가 제대로 사랑한 첫 대상은 읽기인지도 모른다. 읽기는 나의 첫사랑이었던 것이다. 읽기는 재미있고 신나고 신기했다. 매력덩어리였고 사랑스럽기 짝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해서, 심지어는 책읽기가 첫사랑이라고 고백하는 77살의 이 노교수는 이 책에서 자신의 독서인생의 자서전을 써나간다. 위의 인용문에 쓰인 과거시제는 모두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 이 분은 살아계시니까 말이다.

   
  모르는 것, 그게 바로 인생일지도 모른다. 삶은 그런 것이다. 그러기에 삶은 앎이 되려고 무진, 무진 애를 쓴다. 삶이란 모르는 걸 하나 하나 알아가는 과정이다. 삶은 앎을 향한 행보(行步)이다. 아니, 아예 삶을 앎이라고 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
내게 앎 없이 삶은 없다. 앎이 삶이고 삶이 곧 앎이다. 그러니 내게 읽기 없는 삶 또한 있을 수 없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읽음이 앎이다. 앎은 삶이다. 그렇다면 읽기가 삶이고 삶이 읽기이다. 이건 자명한 일이다.
 
   

김열규 교수의 인생론이라고 해야 할까? 아님 독서론이라고 해야 할까? 삶은 앎(알아가는 과정)이고, 앎은 곧 읽기다. 그래서 그의 삶은 읽기다. 이건 "자명한 일"이다. 그렇게 자명한 일이기에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살아온 여정을 풀어냈는데, 그게 죄다 책읽기 얘기다. 읽기로 시작해서 읽기로 끝나고 있다.(아직 끝난 건 아니지만) 오죽했으면 "책님들이시여! 고맙습니다!"며 큰절을 해댈까.

김열규 교수는 대중적으로 그리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닌 듯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알려지기 쉽지 않은 국문학이 전공이고, 그 중에서도 여러모로 소외된 구비문학과 민속학 쪽으로 연구를 많이 했으니 말이다. 그가 펴낸 책들도 부지기수다. 대부분의 것이 "한국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원형과 궤적을 찾아다"닌 결과물들이란다. 내가 그를 처음 읽은 것은 그의 탁월한 저서 『욕, 그 카타르시스의 미학』이란 책 달랑 한 권이다. 예전에 이 책을 우연찮게 발견하고 집어들어 읽었는데, 참 흥미로운 대목들이 많아서, 저자였던 '김열규' 이름 석자를 머리속에 각인 시켜 놓았더랬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이 이 책이다. 그의 이 독서인생 자서전을 읽으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경이롭다"는 단 한마디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저렇게 70평생을 책에 푹빠져 지낼 수 있을까 생각하면 다른 말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읽는다는 것은 '아는 것'도 '아는 짓'도 아니었다. 그건 '되는 것'이었다. 내가 나 아닌 다른 뭔가가 되는 것. 그렇게 나만의 세상이 만들어지는 걸 실감하곤 했다."는 그는 어쩌면 그 자체가 곧 수십권의 책이 되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읽기는 황금 캐듯이 해야 한다. 흙더미와 돌더미를 헤치고 광맥을 헤집고는 가까스로, 그리고 신통하게 금덩이를 캐내듯이 책도, 글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읽는 일은 그래서 발굴하기와도 같은 것이다. 글줄은 그리고 문맥은 광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모래바닥 위를 흐르는 개울에서 사금을 훑어내듯이 책이며 글을 읽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게 글을 읽는 최종 목적이고 수확이다. 최종 결승점이다. 마지막 유종의 미이다.
 
   

그는 얼마나 많은 황금을 가지고 있을까? 77년 평생을 캐었으니 그의 머리와 온몸과 맘은 황금으로 가득 채워져있지 않을까? 그의 이 책을 읽으면서 반짝였던 그 황홀한 금빛은 그래서일지 모르겠다.

이 책은 그가 평생을 함께 해온 책이야기, 읽기 이야기다. 스스로 써내려간 자신의 독서자서전 말이다. 그리고 그의 인생자서전이다. 그가 아이였던 시절부터, 노년의 지금에 이르기까지 읽기가 첫사랑이었다는 고백에서부터 책님에게 감사하기까지, 얽히고 설킨 독서의 여정들이 낯낯이 빛나고 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아 웃음까지 준다. 책을 빌려보던 어린 날의 추억이었겠지만, 애틋한 연애의 감정도 살포시 피어난다.

책과 책읽기에 대한 그의 애정과 성찰은 남다르다. 누워서 읽는 것에도 어엿한 이름이 붙어있을 줄이야. 그는 누워 읽는 것을 2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엎드려서 책을 읽는 '와독(臥讀)'"이다. 흔히 臥를 누을 와로 알지만, 이 한자는 신하가 황제에게 예를 올릴 때의 모습을 뜻한다. 간혹 사극에서 보듯이 황제 앞에서 어지간한 신하들은 반듯하게 엎드린다. 그래서 이 臥는 엎드릴 와가 된다. 배를 깔고 엎드려 책을 읽은 것이 와독이다. 두번째는 "반듯하게 누워서 책을 읽는 '앙독(仰讀)'"이다. 우러를 앙(仰)자를 썼다. '앙독'. 참 멋진 말 아닌가? 개인적으로 앙독은 좀 불편해서 거의 쓰지 않는다. 이제부턴 책을 우러러 보기도 해야겠다.

   
 

그러니 초등·중등·고등학교에 걸쳐서 국어 교과서며 문학 교과서에 웃음 읽기를 위한 내용이 드물거나, 심지어 없다시피 하다는 것은 인류에 대한 역적질과 다름없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과 한국문화가 웃음 읽기에 인색한 것은 여간 불행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김선달과 정수동을 아주 특출하고 영특한 한국인으로 존경해야 한다. 그들은 위인 명단에 올려야 한다. 벼슬이나 해먹은 자들의 이름만 높다랗게 내걸면 햇빛을 가려서 국민 건강에도 해롭다.

서가에 꽂힌 책, 책상에 높인 책, 끼니때 밥상 옆에 놓인 책, 어린 시절 가슴에 묻은 책, 방바닥에 흩어진 책……. 책도 차지한 자리에 따라서 신분도, 계급도 달라진다.

 
   

그의 책과 책읽기에 대한 명석하고 빛나는 통찰은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그는 책만 읽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읽고 자연을 읽고 모든 것을 읽고자 한다. "머리 위에 설레고 있는 나뭇잎들은 나더라 자기들이 지표에 던지고 있는 그림자의 무늬를 읽으라고 속삭인다." 그래서 그는 그 나뭇잎이 보내는 글자들을 읽는다. 나뭇잎의 "저 잔주름을 신성문자처럼" 어김없이 읽어내는 것이다. 나도 그에게 신성문자처럼 읽혀질 수 있을까 꿈꿔본다.

이젠 좀 읽기를 고만하시라고 조언하고 싶기도 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시력은 좋으시단다. 그러나 세월은 막을 수가 없는 것. 여전히 책읽기를 탐하는 그에게 돋보기는 필수품이다. 여전히 책읽기에 빠져 살고 있을 것이다. 밥을 먹으면서, 산책을 하면서, 한가로이 누어서, 시시때때로. 그런 그에게 아쉬움은 "미처 못 읽은 책들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일 수 밖에.

   
  그런데 지금 내게는 '또 다른 나'가 되고 더불어서 우리가 될 친구가 없다. 몇몇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귀하게 남은 몇은 모두 멀리, 멀리 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내게는 '또 다른 나'이자 '우리'가 자그마치 둘이나 남겨져 있다. 바로 자연과 책이다. 그 둘은 이제 나의 천복이다. 그중에도 책 읽기라는 천복에 다다르기까지의, 온갖 내 삶의 자국이 이 책에 찍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나의 천복은 김열규 교수의 그것에 하나를 더 보태야 할 것 같다. 김열규 교수가 가르쳐주는 독서론, 곧 인생론을 읽게 된 것이 나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이 책을 덮으면서 앞으로는 길을 걸으면서는 책읽기를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는 가로수의 낙엽을 상형문자처럼 읽어야하니 말이다. 책만 읽는 것이 아니라 자연도 읽어야겠다. 이 또한 나의 천복이니, 나는 김열규 교수보다는 더더욱 다행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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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10-25 0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은 썼다 하면 장문에 탁월한 리뷰를 쓰십니다~ ^^
교과서에서 웃음을 뺀 죄에 공감하며 저자와 님의 천복에도 동참하고 싶네요.
이 가을엔 책과 더불어 낙엽의 신성문자를 읽으러 나들이도 자주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6행시 짓기에 장문의 심사평을 올려주셔서 품격있는 이벤트가 되었어요. 자칭 심사위원장님 고맙습니다~ 사례는 인천가서 할랍니다! ^^
 
9월이여, 오라 - 아룬다티 로이 정치평론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혜영 옮김 / 녹색평론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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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9월이다. 세월은 유수와 같아서 지긋지긋하게도 흐르고 흘러서, 어느새 다시 또 지긋한 9월이다. 더위에 지치고, 삶에 지쳤다. 이 구닥다리같은 표현이 너무 진부해서 욕하려다가도 이보다 더 정확한 말을 찾기가 어려웠기에, 다들 그렇기에 아마 이 말이 진부한 것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여간 요즘 나는 좀 이상하다.

왜 이상하냐고 묻지는 마시길. 어느 봄날 연약하게 타오른 촛불이 모여, 수 개월을 버티며 큰 불길을 이루는가 싶더니, 슬그머니 꺼지고 마는 것이 한탄스러워서도 아니고, 우리의 대통령께서 하시는 일들에 하나하나 쫓아다니면서 욕하지 못해서도 아니다. 그저 날이 더워서, 그냥 그래서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은 요즘이다.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으면 하기도 하다.

아룬다티 로이의 『9월이여, 오라』를 읽은 것은 지난 달이다. 부쩍 더웠던 8월에 읽었으니, 나는 그만 더 덥고 지쳤다. 그런데 놓을 수 없어서, 그 뜨거움을 참고 끝내 읽어내었다. 혹시나 로이가 부르는 그 9월이 오면 어떨까 하는 기대감에서일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지만.

9월 하면 떠오르는 것. 많겠지만, 언뜻 떠오르는 것이 쑥스럽지만, 내 생일이다. 내 생일 어느 한 날이 이 9월에 속해 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이 9월은 음력 9월이다. 하여간 9월은 9월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9월 하면 떠올리는 비극이 있으니, 오는 11일이 몇 번 째 기념일인지 모르지만, 무고한 사람들이 무수히 죽은 미국의 대도시 한 복판에서 일어나 9.11 테러가 그것이다. 9월을 떠올리는 미국인들에게는 아마 이 사건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기억일 것이다. 그 숫자 만큼은 아닐지 모르지만, 준미국인이라고 자부하며 동경하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아마 많이들 이 날을 기억하며 안타까워할지 모르겠다.

이 9.11에 대한 여러 음모론도 있고 하지만,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니, 가슴 아프게 잊지 말아야 할 날이긴 하다. 그러나 이 날을 더욱 오래도록 간직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그 날을 핑계 삼아 여전히 활개를 치며, 이곳저곳을 위협하고 들쑤시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세계 여러 곳곳에 매월매월을 가슴 아픈 기념일들로 아로 새기게, 그러고들 있다.

아룬다티 로이가 친절히 증언하듯이, 많은 이들(그러나 대다수의 미국인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준미국인들도 아니다.)이 이 9월을 아픈 기억들로 채우고 있다. 9.11에 그렇게 가슴 아파하며 이 날을 기점으로 복수의 칼날을 앞세워 세계곳곳으로 돌진하는 그들이, 그 이전의 9월을 세계 곳곳에 지울 수 없는 공포와 협박과 폭력과 살인들로 점철시켰던 역사를 또렷이 서술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사태는 더 나빠졌다가 조금씩 나아질지 모릅니다. 아마도 하늘에 작은 신(神)이 있어서 우리에게 올 준비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금과 다른 세계는 가능할 뿐 아니라, 이미 오고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들 중 많은 사람은 이 여신을 맞이하기 위해 여기에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고요한 날, 주의깊이 귀기울이면 나는 그녀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87쪽)  
   

이 인도의 당찬 여 소설가는 이렇게 희망차게 선포한다. 앞에서는 몇백줄에 걸쳐 참으로 암혹한 역사와 현실을 고발하면서도 끝내 몇줄에는 이 희망을 남겨 놓은 것은, 그녀의 잔인함일까? 모를 일이지만, 그녀가 왜 "9월이여, 오라"고 말하는지를 이 대목에서 알 듯 하다. 그녀가 원하는 9월은 지금까지의 그 비극들로 가득한 9월이 아닌, "지금과는 다른 세계"에서의 9월, 아름다운 여신이 희망을 가득 품고 오는 그런 9월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지금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나는, 그래서 모든 것이 지치고 짜증나고, 의욕이 하나도 없는 지금, 이 지금은 9월이지만, 나는 "그녀의 숨소리를 들을 수" 없다. 아직 로이의 9월은 아닌 게 분명하다. 적어도 이 한국에서는 또다시 9월의 아픔을 떠올리기 일보직전인 것도 같다. 이 빌어먹을 9월은 가라.

나는 아룬다티 로이가 꿈꾸는 그 9월, "어느 고요한 날" 들려오는 여신의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간다. 그녀는 "저주받은 운명"이기 때문이다. 아룬다티 로이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나는 오래도록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도 그녀처럼 "저주받은 운명"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작가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 생각 있는 모든 이들은 아룬다티 로이의 그 "저주받은 운명"을 고스란히 이어 받으시길 기원하면서, 다시 한 번 로이의 그 말을 되새긴다.

   
 

 (그러나) 작가는 그렇게 쉽게 외면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저주받은 운명이다. 작가라면 늘 아픈 눈을 뜬 채로 있어야 한다. 날마다 창문 유리에 얼굴을 바짝 대고 있어야 하고, 날마다 추악한 모습들의 목격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낣아빠진 뻔한 것들을 새롭게 이야기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사랑과 탐욕, 정치와 지배, 권력과 권력의 결여―이런 것들에 대해서 되풀이하여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된다.(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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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8-09-06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 그동안 어디 숨어계셨던거예요~~~~

순오기 2008-09-07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 그동안 어디 숨어계셨던거예요~~~~ 2 ^^
연애를 한 거라면 봐 드려야지 뭐~~~

멜기세덱 2008-09-08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었던적은 없어요....
굳이 숨었다면야,....알라딘에 숨었겠죠....ㅎㅎ

2008-09-10 17: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8-09-10 17:39   좋아요 0 | URL
전....무조건.....아프님따라./....ㅋㅋㅋ

2008-09-10 2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웽스북스 2008-09-16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은 썼다하면 이주의 리뷰래요~ 아 완전 대단! ㅋㅋㅋ

반딧불이 2008-09-17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당선과 9월의 어느 한 날.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이매지 2008-09-17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멜기님은 썼다하면 이주의 리뷰 ㅎ
부럽부럽 ㅎㅎ
어쨌거나 축하드려요 ~

순오기 2008-09-18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은 썼다하면 이주의 리뷰 당선~~ 축하 축하!!^^

마늘빵 2008-09-22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은 당선쟁이! 축하해욤.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고전예술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고전예술의 세계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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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이 뭐하는 사람인지는 대충 들어 알고 있다. 뭐, 미학자라던가? 모 대학에서 미학관련 강의를 하는 교수(겸임교수)시다. 그런데 아마도 요새 많은 사람들, 촛불시위에서 마이크 들고 뛰어다니는 그를 보고 환호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를 그냥 진 교수 정도로만 알지 않을까? 그가 대학에서 뭘 가르치고 전공이 뭔지를 아는 사람들은 그 중에 많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미학이 뭔지, 그의 전공 영역을 내가 건드리려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난 미학의 미자도 모른다. 따라서 단순히 그를 진(중권) 교수님으로만 아는 사람들을 탓하려는 것도 아니다. 진중권 교수가 이번에 새로 '야심차게' 내어놓은 책 『서양미술사Ⅰ』을 읽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이 사람이 참 궁금해졌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뭘하는 사람이지를 집요하게 따져봐야겠다는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 교수님으로 아는 한편에는, 디워 덕에 또 많은 사람들이 진중권을 영화평론가쯤으로 기억하고 있지는 않을까? 뭐,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해대며, 디워에 목숨건 네티즌들을 얼빠지게 만들어버렸던 그 악명높은 이름이 진중권이었으니 말이다. 그 전에는 황우석 덕분에 매장되기도 했던, 독설가로도 진중권은 널리 알려졌더랬다. 그 전에는 저 수구꼴통 파시스트들에 필마단기로 돌진했던 무모하기까지한 돈키호테이기도 했더랬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대스타 반열에 등극하셨다. 미친소를 타고 촛불 밝힌 곳에 마이크를 들고 설치고 다닌다. 많은 이들이 환호하고 난리도 아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진중권 교수는 예전의 모든 단점(장점?)들을 여실히 발휘한다. 따자고짜 마이크를 적이고 나발이고 들이밀고 인터뷰를 하는 거침없음, 그러다가 전경에게 몇 대 얻어맞기까지 하면서, 왜때려요 쏭을 탄생시키셨다.

도대체 이 사람 뭐하는 사람이야? 그럴 것 같아서일까? 이번에 그가 펴낸 이 책은 그가 마련한 자신의 정체성 홍보차원은 아닐까? 이 책을 지금 읽으면서, 각양각색 활약하고 다니는 진중권의 모습을 보면서, 각종 토론에서 시원스레 쏟아내는 그의 말발을 들으면서, 나는 참 오하고도 묘한 생각에 잠긴다. 아 이사람 참 알수 없는 사람이구나.

그렇게 아 쑤시고 다니는 데가 없는 이 사람, 알고 보니 이 책 저 책 참 많이도 냈다. 책 날에게 대표작들은 아마도 그의 전공관련서들만 올려놓은 것 같다. 이 밖에도 수십권의 책이 있을텐데. 아무튼 내가 읽은 이 책은, 내가 읽은 진중권의 책이 많지도 않지만, 그가 펴낸 그의 전공관련 책들로서는 처음이다. 그래서인지 진중권이 미학자인줄은 알고 있었지만, 전혀 미학하고는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생각해왔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 진중권에게는 이런 모습이 본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 이상한 생각에 잠겼다가도, 아프리카에서 그의 활약을 보면서는 아니 이런 사람이 어떻게 이런 책을, 하는 오묘한 생각에 다시 혼란스러워지기도 했다.

예술하는 사람, 미술하는 사람, 아니 예술이니 미술이니 안다는 사람치고, 그처럼 그렇게 날카롭고 집요하고 빈틈없고, 하여간 참 냉철한 사람은 없지 않은가? 이게 진중권에게 있어서는 명실상부 편견이구나 하는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자 이제 책 이야기를 간단히 하자. 진중권이 들려주는 미술이야기는, 참 아이러니하면서도 재밌다. 미술에는 관심없는 나이지만, 그래서 미술은 아는게 없고 볼지도 모르지만, 이 책을 빠르게 독파할 수 있었던 데에는 진중권에 대한 애정이 있기 때문이었 가능성이 크다. 나는 그를 중권이형이라고 부르고 싶어지니 말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나는 내가 싫어하는, 아니 좋아하지 않는 것에 대한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을 만큼 맘 좋은 사람은 아니다. 여기에 진중권이 풀어주는 이 미술이야기에 나름의 장점이 있을 것이란 확신, 그 증거는 내가 이 책을 다 읽었다는 것 뿐이다.

솔직히 말하건대, 나는 이 책을 '서양미술사'를 파악해보자는 생각을 절대로 하지 않고 읽었다. 다만, 그림보는 재미라고나 할까? 혼자봐서는 전혀 모르겠는데, 중권이 형이 설명해 주는 그림 이야기는 나름 흥미로움을 준다. 그리고 그림책은 여간 빨리 읽히지 않는가? 그러면서도 곳곳에 독설가 답지 않은 명문들을 보여주는데, 이런 문장 어떤가?

   
  어떤 의미에서 '실재(reality)'란 합의된 세계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유일한 실재지만, 중세에 그것은 유일한 실재도, 중요한 실재도 아니었다. 중세에 '합의된' 진정한 실재는 감각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세계였기에, 가시적 세계를 보이는 대로 재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이는 현대 예술이 처한 상황을 닮았다. 카메라의 등장 이후 현대 예술에서도 재현은 의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미술사가 아순토는 여기서 중세 예술과 현대 예술 사이의 평행선을 본다.(81쪽)  
   

뭔 말인지 대충 감은 온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유일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것일지 모른다. 아무튼 이후 설명하는 중세 예술과 현대 예술의 어떤 공통점들이 나오는데, 알듯 말듯하다. 아무리봐도 중권이형이 보는 걸 나는 못보고 있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도 될 것만 같다. 중권이 형이니까.

"러시아어 문장을 이탈리아 문법으로 읽을 수 없듯이, 역원근법으로 그려진 그림을 선원근법의 문법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그림을 읽을 때는 그것을 그릴 때 사용했던 그 코드로 읽어야 한다."는 것은 참 많은 것을 시사한다. 뭐 그림만이 그러할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세상모든 만사가 이렇게 그림과도 통하는 것을 깨닫는 것은 내나름의 문법으로 족하다. 역원근법이니 선원근법이니 하는 것은 좀체 이해가 가지 않아도 말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뭐든지 뭘 알고나 보인다는 것이다. 누가 그랬듯이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여기 이 책에서도 통한다.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서구의 예술 역시 예로부터 미리 존재하는 텍스트의 시각적 번역이었다. 헤브라이즘은 서구에 성서라는 토대를 제공해주었고, 헬레니즘은 신화와 고대 저술가들의 문헌으로 서구 문명을 다채롭게 해주었다. 서구에서 제작된 대부분의 이미지는 이 문헌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그 제재들을 해독하는 데는 서구의 문화적 코드에 대한 이해가, 서구 문명을 만들어온 문헌들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169쪽)  
   

참 고마운 말이다. 애초에 이 책을 읽고 서양미술사를 제대로 한번 알아보자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아예 나는 포기하고, 그림이나 구경하자는 생각으로만 읽었다. 그런데, 중권이형의 친절한 설명덕분에, 그냥 볼때는 '아하'하는 탄식이 간혹 섞이기도 하니 기쁜 일이다.

여하튼 진중권을 전혀 모르고 읽었다가는 이 책을 아마도 다 읽지 못하고 놓아야했을지도 모른다. 참 보이는 것과는 다름을 느낀다. 그림을, 미술을, 예술을, 미학하는 눈은 우리가 보는 진중권의 눈은 아닐 것이다. 게기에는 뭔가 따듯한 감수성이 농후하지 않을까? 간혹 우리가 익히 잘아는 진중권의 독설들이 생각나는 서술도 있긴 하지만, 이 책에는 본디 진중권의 모습이 녹아들어있기도 하다. 짤막짤막한 그림과 함께 읽는 그림이야기들도 나름 흥미롭고, 좀 의외다 싶은 수학이야기, 별별 이야기들도 몇몇 있기도 하다. 아무튼 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있으신 분은 일독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아 이제 미술에 관심을 가져보자'하는 결심으로까지는 나아가지 않았지만, 이거 하나는 얻어가 보면 좋을 것 같다. 무엇보다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은 현대가 아닌가? 어디가서 아는체라도 해야지 않은가? "현대 예술의 과제는 가시적인 것의 재현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화'에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것이 또한 이미 수백 년 전에 엘 그레코가 하려고 했던 게 아닌가?" 어디 전시회라도 가면 요렇게 멋지게 한 마디 내뱉어도 좋겠다. 이게 1권이니까, 몇 권이 더 나올 것이다. 장담은 못하지만, 두번째 권쯤은 다시 따라읽어보고 싶음이 살랑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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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6-17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의 리뷰~ 여전히 장문에 어렵지만 충실히 읽었어요.
음~ 아직도, 앞으로도 계속 멜기님 팬 맞아요~ 맘 변한거 없어요.^^

최상철 2009-10-27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술사에 대해서는 아는 것만큼이 없어 쉽지 않아 보이는데요~
리뷰 읽고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디케의 눈] 서평단 알림
디케의 눈
금태섭 지음 / 궁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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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의 여신 디케(Dike)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법의 여신 디케는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손에는 칼을 쥐고 있으며,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다. 저울은 형평성을, 칼은 엄격하고 날카로움을 가리키며, 천으로 눈을 가린 까닭은 공평 무사하게 판결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다.(금태섭, 『디케의 눈』책날개에서)  
   

금태섭의 법이야기를 '재밌게' 읽었다. '법이야기가 이렇게 재밌을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법은 때때로 어렵고 곤혹스러운 것이 사실이지만, 세상살이가 그렇듯이 각양각색의 천태만상을 담고 있다. 그에 얽힌 이러저러 법이야기들은 간간이 우리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런 법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또 하나 추가된 셈이다.

사실 우리가 제삼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법이야기를 흥미롭고, 어쩌면 쉽게 읽고 즐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일상에서, 그리고 실제에서 법은 언제가 괴팍하고 딱딱하며 권위적이고 독선적이기까지하다. 그래서 골치아프고 어렵다. 이것은 법의 언어적 서술의 어려움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기보다, 그것의 실제 생활에의 적용에 있어서의 어려움을 말한다. 물론 법을 어떻게 풀어서 전달할 것인가 하는 언어의 문제도 분명 그 어려움의 원인일테지만,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은 어떤 상황에서 어떠한 법이 적용될 수 있는가의 문제, 그러한 법의 적용의 절차와 과정상의 복잡다단함의 문제일 것이다.

법은 역사이래 끊임없이 어려웠다. 근대 이전의 법은, 어쩌면 근대 이후 현재의 법도 그러할지 모르겠으나, 어려울 필요성이 있었다. 다른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역사 이래 법은 지배계층에 충실하게 복무해왔다. 이런 점에서 법의 기원은 모세가 받았다는 십계명의 이야기가 상징하듯이 '위로부터 주어진 것'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지배자의 지배와 통치의 수월성을 높이기 위하여 이 법은 언제나 통치수단, 지배수단으로만 기능해 온 것이다. 그러하기에 법은 민중 일반이 이해하고 적재적소에 적용하기 어려워야만 했던 것은 아닐까?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논란에서도 이런 견해를 뒷받침하는 일화가 보이기도 하니 말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서 법은 고도로 발달하고 세분화되고 명분화되었다. 보다 복잡해진 것이다. 사회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겠다. 이러한 사회 변화 속에서 법을 지배했던 지배계층은 법에 종속되었던 민중들과 일정부분 타협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 결과 법은 조금씩 지배계층만의 소유물로만 남아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법을 민중이 완전히 소유하기에는 여전히 법은 어렵다.

이러한 어려움은 크게 법의 체계상의 복잡함과 적용상의 모호함때문이 아닐까 한다. 다양한 법률과 법 체계 속에서 그 관계는 그물망처럼 얽혀있다. 그 그물 속에서 법에 종사하지 않는(못하는) 대다수의 민중들로서는 좀처럼 헤어나올 수 없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다양한 법(규정, 규칙, 명령, 법령, 민법, 형법, 헌법, 기타등등)의 적용에서 기인한다. 그 다양한 법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무엇을 규제하고 무엇을 규제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 그것이다. 금태섭가 『디케의 눈』의 많은 부분(「커피를 쏟고 24억 원을 번 할머니」,「가정의례에 관한 법률과 보신탕」,「원숭이 재판」등)에서도 지적하듯이, 현재의 명문화된 것을 어디에, 어떻게, 어디까지 적용하고 판단할 것인지 하는, 법의 모호함, 법의 테두리의 애매함이 오늘날 법을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최근 현 정권의 오만과 독선에 대항하여 연일 온 시민들이 쏟아져나와 거리에서 촛불을 들고 성토하고 있는 촛불시위와 관련한 불법시위 논란도 이런 법적 체계와 법 적용의 복잡함과 애매모호함때문에 기인하는 것이다. 현행 집시법은 최상위법인 헌법과 상호 모순을 이룬다. 집회 결사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이 이렇게 어렵고, 법의 해석과 판단이 이렇듯 모호하고,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거리가 되지 않느냐고, 금태섭은 궁시렁대고 있는듯하기도 하다. 그래서 금태섭은 법의 여신 디케를 다시 불러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왜 눈을 가리고 있는가? 금태섭은 이렇게 말한다.

   
  디케가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은 진실을 찾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고 하더라도 때로는 틀릴 수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법은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위험하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어떤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으로도 취우치지 않고 공평무사하게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기 위해 디케는 두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고, 금태섭의 말처럼 진실을 찾기 위한 최선을 노력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법의 담당자들은 항상 두 눈을 가리고 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법은 어렵고, 진실을 언제나 멀리 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누구의 눈으로 그 법을 보고, 적용하는가가 아닐까? 지금까지의 법이 지배계층을 위해 존속했다면, 이제는 민중을 위해 존속해야한다. 법의 주체가 민중이 되어야한다는 말이다. 국민배심제가 그런 역할을 할 수도 있을 듯 하다. 그렇게 되면 법이 쉬워진다고 한다. 나는 이렇게도 말하겠다. 그렇게 되면 진실은 보다 가까워질 것이다.

금태섭은 디케가 왜 눈을 가리고 있는지 궁금해한다. 나도 궁금하다. 그리고 금태섭은 "두건 뒤에 숨어 있는 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를 이렇게 궁리한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사명감에 불타는 날카롭고 광채를 띤 눈일까. 각자에게 정당한 몫을 나누어주기 위해서 저울 눈금을 주시하는 냉정하고 빈틈없는 혹은 약자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연민이 가득한 눈일까. 그보다는 오히려 찾기 어려운 진실 앞에서 끝없이 같은 질문을 되묻고 다시 생각해보는 고뇌에 찬 눈이 아닐까.  
   

나는 디케의 눈은 "날카롭고 광채를 띤 눈"도 "냉정하고 빈틈없는" 눈도, "눈물을 흘리"고 "연민이 가득한 눈"도 아닐 것이라고, 아니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금태섭이 말하는 진실을 찾는 "고뇌에 찬 눈"도 아니어야 한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법의 여신이 가져야 할 눈은, 바로 민중의 눈이어야 한다. 민중의 눈으로, 민중이 주체가 되서, 법을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지 않을까? 21세기의 법은 민중의,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법이어야 한다. 이 민중의 눈은 아마도 금태섭이 말한 그 다양한 눈들의 총체적 합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 警告 : 本 書評은 알라딘 書評團에 當籤되어 出版社로부터 無償으로 圖書을 提供받아 作成된 것으로 本 書評의 內容을 全的으로 信賴하여 本 圖書의 購買 與否를 決定하는 것은 讀書生活에 深刻한 懷疑를 誘發할 수 있사오니, 이 點 留意하여 주실 것을 當付드리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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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학생선발지침 - 자유화 파탄, 대학 평준화로 뒤집기
하재근 지음 / 포럼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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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는 과연 어떤 기준과 지침을 가지고 학생들을 선발할까? 아마도 대한민국의 학부모라면 열에 아홉은 이 질문의 답을 알고 싶어할 것이다. 돈을 수백 들여서라도 그 답만 알려준다면 거뜬히 지불할 부모들도 많을 것이다. 그래서 저 강남의 유명학원, 유명강사들에게 엄청난 돈이 집중되고 있는가보다. 알고보면 그게 딱히 기밀 아닌 기밀인 셈인데, 어떤 이들에게는 이게 돈 꽤나 벌어주는 영업기밀이다. 그런데 큰일났다. 어느 이상한 사람이 이 영업기밀을 단돈 18,000원에 세상에 폭로하고 만 것이다. 서점에 가면 누구나 구할 수 있다. 그 이상한 사람이란, 얼마 전 백분토론에 디워논쟁으로 나오기도한(그래서 이상한 건가?) 하재근이란 양반이다. 이 사람이 떡하니 『서울대학교 학생선발 지침』이라고 써붙인 일급비밀(?)을 세상을 뿌린 것이다.

돈 꽤나 있는 집 자식들은 강남으로 몰린다. 없는 집 자식들은 빚을 져서라도 강남으로 몰린다. 이도저도 안 되는 집 잡것들은 강북으로 일산으로, 기타등등, 되는대로 집 근처 동네 학원이라도 몰려간다. 강남 최고 유명학원에는 수백명의 학생들이 끊이질 않는다. 수천명일지도 모르겠다. 유명강사들은 드넓은 강의실에 이 학생들을 빼곡히 쌓아놓고 열변을 토한다. 강남에만 몰려있는 대형학원들 몇 개만 싸잡아도, 몇 만은 족히 되지 싶다. 얘네들은 다 서울대 가고 싶어 할터이다. 그런데 서울대학교가 무슨 복지재단도 아니고 얘네들 다 받아줄 리 만무할 터이다. 지 말만 듣고 따라하면 서울대가 문제냐는 강사들 학원들이 강남에 널렸는데, 대부분은 낚인 셈이 될 터이다.

모든 학원은 낚시질이다. 그런데, 하재근이란 양반, 전국민 상대로 낚시질하고 있다. 이게 미치지 않고서는 가능하겠는가? 이렇게 떡하니 "서울대학교 학생선발 지침"을 공개하다니, 그럼 서울대는 어떻게 학생들을 뽑겠는가 말이다. 전국의 고등학생들을 죄다 서울대 입학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튼 궁금하기는 무지 궁금할 것이다. 서점을 기웃거리던 어느 학부모나 학생들이 이 책을 봤다면 필시, 혹하고 이 책을 집어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그 덕에 꽤나 팔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책이 "나처럼 해봐라 요렇게"식으로 서울대 가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는 책은 아니다. 그나마 그런 방법이라도 적고 있는 책이라면 심한 모멸감을 안 느낄 것인데, 이 책보고 옳거니 집어들고 누가 볼새라 몰래 집에와 펼쳐들고 열심히 탐독한 저 미혹한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실망과 좌절은 피해가지 않을 것이니, 하재근은 일단 석고대죄를 먼저 해야지 싶다.

겉표지를 보면 우선 빨간색 '샤'표시가 서울대를 향한 열망과 열정을 북돋운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게 하는, 무언가 비밀스럽게 글자에 살짝 장난질을 친, "서울대학교 학생선발 지침"이란 문구가 눈을 크게 뜨게 만든다. 이것만 보고 누가 볼까 무섭게 집어들고 나온다면 간단히 낚인 셈이다. 눈길을 살짝만 좌측으로 옮기면, 비교적 작은 글씨로 씨뻘겋게 새겨놓은 문구가 실망스럽다. "자유화 파탄, 대학 평준화로 뒤집기". 이 무슨 알듯 말듯한 소린가. 뭔 소린지는 모르지만 '서울대'라는데, 뭔가 있겠지 하고 집어든 어느 불쌍한 부모님들, 학생들 계실 것이다.

이 불쌍한 우리 학부모님들, 학생님들 중 이 책 머리말 이상 읽고는 실망을 금치 못한 분들 많으실 것이다. 언젠간 그 일급비밀을 말해주겠지 하고 끝까지 읽으신 분들 계실까? 아마도 없겠지 싶다. 우리 자식 서울대 한 번 넣어보겠다 했더니, 아무렴 18,000원에 그게 가당키나 하려고! 그래도 이왕 산 책, 어느 뭔 소리하는지 읽어나보자 하시는 분들 계셨다면 나름 다행스러운 일이니, 그런 분들은 사실 하재근에게 낚인 것도 아니고, 안 낚인 것도 아닌 셈이다.

알고 보면 이 책은 정확하게도 "서울대학교 학생선발 지침"을 꽤뚫고 있는 책이다. 어느 강남의 유명 강사들이 말하는 서울대 들어가는 방법과도 크게 다를 것 없는 얘기들이 담겨있다. 강남의 유명학원 강사들이 하는 말이 뭐 별 게 있겠는가? 돈 많이 쳐발라서 내 강의 듣고 시키는 대로만 하면 서울대 넣어준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재근은 이걸 보다 간단히 말한다. 서울대는 돈질이라고. 강남의 유명학원 강사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돈이 좀 안되면 연대, 고대도 비슷하다. 전국의 일류 대학교 들어가는 방법들이 이 책에는 덤으로 들어가 있다. 그렇다면 학부모님들 안 낚인 것이 분명할 터인데, 이게 이상하게 낚인 기분이 들 것이다. 여하간 낚인 것도 아니고 안 낚인 것도 아니다.

장난스럽게 이야기했지만, 하재근이 말하는 "서울대학교 학생선발 지침"은 곧 돈질이라는 소리다. 머리말의 제목은 이렇다. "도박장 학교, 정글 사회". 비교적 정확하다. 그런데, 학교가 도박장이라는 데에는 좀 동의하기 어렵다. 도박에 있어서 총알이 많은 사람들이 딸 확률이 조금 높은 것이긴 하겠지만, 제대로된 도박장에서는 돈이 많건 적건 모두 잃는다. 그런데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돈 많은 인간들이 '딴다'. 그래서 제대로 된 도박장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그 돈많은 인간들이 이 도박장을 소유하고 있다면 얘기는 달라지겠다. 암튼 돈 놓고 돈 먹기, 돈 놓고 학교 먹기는 사실이다. 그렇게 돈 놓고 학교 먹은 인간들이, 정확히는 돈 많이 놓고, 일류 학교 먹은 인간들이, 이 사회를 죄다 먹는 것이 적나라한 현실이니까, 이 사회는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정글? 맞다.

하재근이 말하는 우리나라 일류 대학교의 선발 지침이라는 것이,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줄세워 놓고, 서울대부터 챙겨가고, 그 다음 일류대들이 챙겨가고, 어중이 떠중이들을 나머지 미천한 학교들이 마지못해 데려가는 방식이다. 이것, 사실 당당히 반박할 재간 있는 사람들 많지 않다. 진중권이 와도(안 오겠지만) 안 될 것이다. 그렇게 성적순으로 애들 챙겨가서, 제일 먼저 챙겨간 놈들이 반 먹고, 두번째 세번째 챙겨간 놈들이 또 반 먹고, 나머지를 또 제각각이 반먹고, 전국민의 80%가 얼마 안되는 것으로 연명하는 이 사회를 만든다. 몇 십년을 이 지침이 완벽하게 작동해 왔다. 이런 젠장.

하재근이 400쪽이 넘는 이 '지침'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이 사회의 학벌 문제다. 그런데 이 학벌에 걸린 것이,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총체적으로 작동하는 별 요상한 것이다. 그래서 학벌에 밀리면 모든 것이 밀리는 인생이 된다. "학벌사회 입시는 국민 절대다수를 패배자로 낙인찍는 게임"인 것이다. 이 학벌이란 게, 아까 성적순으로 나뉜다고 했는데, 알고 봤더니 이 성적순이 사실은 '재산순'이었다고 (모르는 사람빼고는 다 아는데) 하재근은 말한다. 그러니 아무리 학벌에 목숨 걸어봤자, 돈 없으면 그냥 죽어야할 뿐이다.

강력한 학벌주의는 대학의 서열에 따라,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끊질기게 이 사회를 병들게 한다. 하재근이 장황하게 대학서열타파, 학벌주의 타파를 말하면서, 그 원인과 대안들을 내어놓고 있지만, 사실은 이 모든 걸 우리는 다 알고 있고, 이것이 이른바 대학평준화 혹은 국립대 네트워크 구축으로 나아가야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재근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하는 것, 곧 '자유화' 기조에 따른 사회 전반의 변화가 곧 사회 파탄을 불러왔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결국 그것이 교육 파탄을 불러오고, 대학서열체제를 공고히 하며, 영원히 학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 굴레속에 갖혀있게 되는 것이다.

하재근이 이 알만한 이야기들은 너무 장황하게 해서 곧잘 지루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까지 애써 외면했고, 앞으로의 해결이 더욱 장황하고 지난하고 더딜 것임을 우리는 잘 안다. 하재근의 논리들이 촘촘하지 못한 부분들도 거슬리고, 특히나 박정희식 모델에 대한 지나친 긍정도 불만스럽지만, 대체적인 맥락에 있어 학벌이란 문제에 대한 원인과 결과, 그리고 대안들은 너무나 명확하기만 하다. 유일한 방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대학평준화가 과연 가능할까? 의문이 드는 것이라기보단, 그 길이 참 멀고 험하겠구나 하는 생각이다. 68혁명을 통해 프랑스의 학생들은 그것을 이루어냈다는 얘길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여차하면 피를 좀 많이 보고야 가능하지 싶다.

여하튼, 낚인 것도 아니고 안 낚인 것도 아닌 사람들은, 아무래도 좋다. 이 책을 어떻게 읽었건 간에, 이것 하나만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게 뭐냐하면, 오늘날 우리의 대학서열체제, 학벌주의, 그 지독한 굴레하에 벗어나지 못하는 입시지옥, 돈 놓고 돈 먹는 학교, 승자독식의 정글 사회 속에서, 우리 아이들은 '인간말종'으로 선발되고 길러질 뿐이라는 사실을. 제목을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하고 고민해 봤다. "인간말종 선발 지침". 하재근에게 이 제목을 권하지는 못하겠다. 이 제목으로는 책 팔기가 쉽지 않을테니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참 답답하고 갑갑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던 부분은, '언어'의 문제였다는 걸 고백하고 마쳐야겠다. 자유화, 경쟁, 자율 등등의 언어들이 학벌사회를 끊질기게 이어온 저 말종들에게 먼저 선점당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답답함이랄까?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자유화는 진정코, 절대 자유화가 아니다. 자유가 난 그런게 아니라고 확신한다. 젠장. 경쟁은 좋은 것이고 '투쟁'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는 농후한 것 같다는 생각도 갑갑해진다. 경쟁과 투쟁은 뭐가 다를까? 아이들에게 한없이 경쟁하라고 하면서, 노동자들이 투쟁하면, 학벌타파 투쟁하면, 이것은 간간히 죄악이 되는 세상이다. 누군가는 프레임 싸움이라는 말들도 하는 것 같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재근을 비롯한 학벌타파의 주도적 세력에서 이 언어적 문제들도 심각히 고민해 주었으면 싶다. 많은 사람들이 '평준화'란 말 앞에 가로치고 '저질'을 새겨놓고 있다는 것, 이런 것들이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하지 싶다. 모르겠다. 두서없다. 젠장. 난 학벌이 안 좋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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