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의 만감일기 - 나, 너, 우리, 그리고 경계를 넘어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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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선생님께

안녕하십니까? 오슬로의 먼 하늘 아래에서 강건하신지요? 저는 선생의 10년 독자이자, '88만원세대'란 이름조차 갖지 못한, 대한민국의 30대 초년병입니다. 먼저, 이렇게 선생께 편지를 띄우게 된 것은, 최근 펴낸 선생의 『만감일기』을 읽고 10년 독자로서 느낀 바가 남다르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선생께 한풀이도 하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의 일기가 던져주는 "그 어떤 정답도 제공해" 주지 않지만, 그 뜨거운 '화두'들에 저는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선생의 오랜 독자로서, 매번 선생의 저서들은 나온 즉시 구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 『만감일기』도 읽은 것은 몇 날 전의 일입니다. 읽는 내내 선생의 "무거운 번뇌, 번민"들이 제게도 뜨겁게 다가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생께 이렇게 편지를 띄우게 된 것이지만, 이렇게 쓰기까지는 여러번 찢고 다시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우연찮게도 이명박 씨가 제1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날이더군요. 취임식을 지켜보면서, 선생께 편지 띄우기를 더는 미룰 수 없었습니다.

얼마 전 대한민국의 20대에게 '88만원세대'라는 자랑스러운(?) 이름을 부여해 준 우석훈 선생의 책 『88만원세대』가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 후로 여전히 이 '88만원세대'는 착취와 억압 속에 사는 이 시대 20대들에게 비극적이게 뜨거운 화두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88만원세대'라는 명명 속에 제가 들어갈 자리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30대의 반열에 들어섰고, 이제는 이 사회의 그 비열한 메커니즘 속에서 살아남기에 바등거릴 수 밖에 없는, 지금의 20대와 함께 바리케이이드도 짱돌도 들지 못하는, 이도저도 할 수 없는 그런 처지일 뿐입니다.

제 20대의 오롯한 10년을 저는 선생의 독자로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서른이 되고, 지금에 이르렀지만, 어떻게 된 것인지 제 삶은 점점 더 가난해지고 비참해 지는 것만 같습니다. 선생을 읽는다는 것의 결과였던 것일까요? 이런 의문이 선생께는 죄스러운 것이지만, 선생이 부르짖던 좌파적 심성들에 공감하고, 그렇게 살고자 했지만, 지금의 제 현실, 우리 현실은 그 전보다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는 지금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제 20대의 10년을 선생을 알지 않았더라면, 선생을 읽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저는 어땠을까? 지금의 제 삶이 조금은 여유가 있었을까? 이 사회가 한결 좋게 여겼을까? 삶에 희망이 있었을까? 저는 그랬을 것이었다고 봅니다. 선생을 알지 못했고, 선생의 사유들을 읽지 않았었더라면, 제 20대의 10년을 타인을 이기기 위해 보다 치열하게 살았을 것이고, 사회의 경쟁 속에서 보다 가열차게 싸워 이겼을 것이고, 경제적 부를 꿈꾸고, 이 나라 이 민족의 부국강병을 꿈꾸며, 언젠가 나도 부자로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박노자 선생을 알고, 선생의 사유에 지극히 공감하는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빛과 희망도 이 사회에서는, 지금의 제 현실에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국가주의라는 이데올로기 하에서, 모든 국민이 국가에 충성하고 희생할 것을 강요당하고, 신자유주의라는 무자비한 메커니즘에 갇혀 인간이 인간을 밟고 뭉개야 하며, 내 민족, 내 나라만이 제일이고, 타인을 배제하는 이 사회에서 풍요롭고 여유 있게 산다는 것은, 아니 어떻게라도 살아남는 다는 것은, 정말 생각할 수록 무서운 것이기만 합니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 부하고 귀한 것 또한 부끄러운 일"[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라는 공자의 말로 위안을 삼아야 할까요? 누군가는 패배주의자의 자기 변명이라고 욕하겠지만, 적어도 선생으로부터 배운 바대로라면, 제게는 지금의 이 패배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겠습니다.

선생을 통해 이 사회의 배반적 역사, 국가와 제국주의의 폭력, 신자유주의의 냉혹한 무한경쟁, 타자에 대한 억압과 배척, 권위주의, 사상의 자유에 대한 억압과 구속 등이 얼마나 뿌리 깊고 굳건하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면서, 저는 누구 못지 않게 분노하고 아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분노하고 아파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거기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가령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피부가 검은 청년들을 노르웨이 오슬로 시의 캄캄한 길거리에서 갑자기 만날 때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겁'을 느낀다. 이것을 인터넷 일기에서 솔직히 '고백(?)'할 때 무의식 속에 내재돼 있는 '나'의 인종적 편견을 스스로에게 알려 '자정'을 다짐함으로써 나름의 반성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또 이를 읽은 독자들이 '아, 나에게도 그러한 부분이 있구나!'라며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여 같은 반성의 길로 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소통'의 순기능이 아닐까?(7쪽)  
   

도대체 저는 얼마나 고백하고, 자정을 다짐하며, 반성해야 할까요? 선생이 줄곧 비판해 온 그것들을 제 몸이 무비판적으로 행하고 있는 것을 자주 볼 때마다, 소름이 끼칩니다. 그때마다 반성은 한다지만, 또 반복하는 저를 봅니다. 선생의 독자로 10년을 살아왔는데도 말입니다. 그때마다 뼈아프게 아파하고, 치를 떨며 분노하고, 이 사회의 그 모든 악을 몰아낼 듯한 의분을 갖지만, 거기까지 뿐입니다. 선생은 고백하고, 자정하며, 반성하는 '소통'을 말하지만, 그러한 소통을 통해 변화와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까? 왜 저는 그러하지 못 하는 걸까요?

솔직히 이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힘겹습니다. 더 솔직히는 잘 살고 싶습니다. 남보다 더 부유하고, 건강하며, 풍족하게 즐기며, 여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자면 이 사회가 원하는 대로, 남을 이기고, 그들 위에 홀로 우뚝 서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금의 제가 그것을 원하기만 하면 이룰 수 있는 이 사회가 요하는 어떤 능력도 힘도 소유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선생을 통해서, 이 모든 것이 허상이고 허황된 이 사회 지배층들의 교묘한 술법임을 알게 되었고, 머리속에서나마 함께 공존하고, 남을 존중하며, 가난한 자와 소외된 이들에 대해 함께 연대하고, 사회 곳곳의 그 악한 이데올로기에 맞서 부르짖고, 고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잘 알기에, 지금은 무척 괴롭고 아픕니다.

선생이 꿈꾸는 "'나'와 '타자' 사이에서 지위와 돈, '국민에의 소속' 여부 등의 매개가 없는, 진정한 의미의 공산적 사회"를 선생의 독자로 살아오면서 저도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회는 그것을 좌파라 욕하고, 빨갱이라 낙인 찍으며, 강한 거부감을 표시합니다. 가까운 친지에게도, 친구에게도, 그런 저의 생각과 사상을 말하기가 무서울 정도입니다. 선생도 느끼듯이 이것은 "우리로부터 계속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두렵"습니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선생께 한탄하고 울부짖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에 이명박 씨가 취임하면서 말한 바는, 기업이 잘 되는 나라, 경쟁력 있는 나라, 그 경쟁에서 살아남아 이명박처럼 성공의 신화를 이루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저는 향후 5년의 절망을 상상했습니다. 제가 너무 지나친 것입니까? 어쩌면 선생도 저와 같은 절망을 보시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 현실에서 저는, 그리고 선생은, 나아가 선생께 공감하는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앞으로도 선생의 글을 꾸준히 읽어간다면 그 해법을 찾을 수 있을까요? 고민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며 해답만을 요구하는 어리석음인 줄 알지만, 얼마나 더 그 답을 찾고자 괴로워 할 수 있을지 저 스스로도 저를 믿지 못할 것만 같습니다.

춘향전의 나라가 그리워 이 땅에 오셨다고 하셨지요?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계시지만, 선생이 계시는 곳은 먼 하늘 너머 노르웨이의 오슬로입니다. 그리고 선생은 춘향전의 아름다움보다 이 나라 이 땅의 잔인하고 참혹하며, 무자비한, 폭력적 현실들을 더 많이 알게 되셨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춘향전의 나라가 그리우십니까?

   
  글쎄, 아집인지는 모르겠지만, 북방의 먼 땅에서 매일 밤 한국의 산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향수의 눈물을 흘릴지언정 그 '나리님'들에게 백기투항할 생각은 없다. 이건 이념문제 이전에 인간으로 존재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실존적 문제이다. 물론 이용 가능한 모든 방법들을 다 동원해, 국내 대학들이 학생과 교직원에 의해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자율적인 공공공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지만, 이 '작은 왕국'들이 민주공화제가 되기 전까진 거기에서 녹봉을 받아 먹고살긴 싫다. 물론 어느 날 향수가 하도 깊어져 나중 일은 생각도 안 하고 그냥 훌쩍 한국으로 돌아가버릴지도 모르겠는데, 어차피 나 같은 사람을 받아줄 데도 없을 테니 다 실체 없는 공상인 듯도 싶다. 어쨌든 '나리님'이 영접받는 광경을 목도한 그때 그 순간은 내겐 절망의 순간이었다.(34쪽)  
   

지금까지 선생의 글들을 읽으며, 저는 선생의 그런 절망의 순간들을 수도 없이 보았습니다. 구태여 태어난 나라를 뒤로 하고, 집도 절도 없는 이 나라의 국적을 갖은 것은 왜인지 묻고 싶습니다. 애써 좋은 것만 보고, 즐거운 것만 알고, 행복하게 사실 수는 없으셨던 건가요? 10년의 독자에게 선생은 선생의 그런 절망만을 얘기해야 했던 것입니까? 누군가는 선생을 일러 독설가라고 말하더군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생을 외부인으로 치부하고 내 나라, 내 조국만을 감싸고 돌 때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선생은 더 이상 외부인이 아니기에, 선생의 그런 독설이 뼈아프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저는 선생을 '경계인'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어디까지나 현실이 그러합니다. 이 나라 이 땅에서 선생을 그 경계 내부로 진정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내부로 들어오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들도 선생이 있는 그 경계로 나오라고 말이죠. '나'와 '타인'의 그 경계에 설 때, 우리 사회는 선생이 꿈꾸는 그 이상적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 가운데는 그 경계에 설 것을 상상하지만, 내부에 있는 제 무거운 몸은 한 발걸음도 경계쪽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저는 '마네킹'이 되고 '로봇'이 되어가고 있는 것인가 봅니다.

   
  끔찍한 사실이지만 우리 사회의 개인 대다수는 '개인'이라기보다는 '마네킹'에 더 가깝다. 무슨 제복이나 장교복, 귀족복을 입히면 입힌 대로 그 모델이 되는 것이다. 외물로부터 자유로운 '나'는 없어지고 외부의 '표준' 욕망들이 그대로 내면에서 복제되고 만다. SF 영화에서 로봇이 세상을 지배하기도 하지만 사실 지금 우리 사회에도 겉으로만 '인간'처럼 보이는 '로봇형 인간'의 비율이 꽤나 높다. 더 끔찍한 문제는 그들을 프로그램하는 자들도 '로봇'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40~41쪽)  
   

죄송합니다만, 여기서 이 편지를 그냥 접겠습니다. 괜히 한탄만 하고 말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여기까지 적고 더이상을 말하지 않아야 될 것 같습니다. 좀 더 선생의 '만감'을 화두로 삼아 되새겨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1년 후, 5년 후, 아니 10년 후면, 또 이런 한탄만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내일 또다시 오늘 말하지 못한 남은 속내를 참지 못하고 토해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자꾸 정신이 혼미하여져서 그만 그쳐야 되겠습니다. 선생께 이 마치지 못한 편지가 전해질지는 모르겠지만, 이 편지가 선생께 일말의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할 뿐입니다. 이국의 먼 하늘 아래 오슬로에서 건필하시길 기원합니다.

2008년 2월 25일 자정에
선생의 10년 독자 올림.

(이 편지가 공교롭게도 내 100번째 리뷰가 됐다. 그런데 이것은 공교로운 것만은 아니다. "讀書百遍義自見"이라고 했던가? 어쩌면 이렇게 100권의 책을 읽고 되새김질 한 나에게도 일말의 "스스로 깨우침"의 그 경지에 살짝 턱이라도 걸게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100번째 리뷰를 쓰면서, 그 백편이 주는 '義自見'을 생각하자니, 이 100번째의 자리에 무언가 뜻과 의미를 두어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중에 『박노자의 만감일기』를 읽었던 것이고, 오래 묵혀두다가 이렇게 100에 맞춰 리뷰, 아니 편지를 썼다. 100번째 리뷰가 다 쓰지 못한 편지가 될 줄은 몰랐지만,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고, 조금이나마 내 삶에서 스스로 깨닫게 도와준 것은 바로 박노자였다. 그러하기에 이 100번째가 박노자의 차지가 되기에 마땅했던 것이다. 아무튼, 박노자 선생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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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2-26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정에 쓴 편지를 며칠만에 알라딘에 들어온 제가 읽게 되었군요.
우리 딸도 이 책을 읽고 많은 공감과 울분을 느낀다고 하더군요.
전, 아직 읽지 못해서...

멜기세덱 2008-02-26 14:52   좋아요 0 | URL
ㅎㅎ 어쩐지 제 서재가 그간 고요하더군요.....ㅎㅎ

Jade 2008-02-26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 사람의 가슴도 울분으로 들쑤셔놓으시네요. 하지만 "어떤 능력도 힘도 소유도 전혀 없"다는 이유로 저들의 논리에 포섭당하는 것이야 말로 저들이 가장 바라던 것이 아니겠어요? 분노하고 아파할 수 있는 감수성 이야말로 무언가 달라질 수 있는 시작이라고 믿어요 저는 ㅎㅎ

그런데 멜기님, 이런 절절하고 진심어린 편지는 반려자분께 쓰셔야지요! ㅎㅎ

멜기세덱 2008-02-26 14:52   좋아요 0 | URL
이런 편지를 보냈다가는 따귀맞기가 십상 아닐까요? ㅋㅋ

2008-02-26 1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26 14: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홍수맘 2008-02-26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휴~. 짐 옆지기가 읽고 있는 중인지라 기다리고 있는데 님 글을 보니 빨리 읽고 싶어 근질근질 하네요.

잘 지내고 계시죠? 서서히 우리 홍/수의 방학이 끝나가니 그땐 더 열심히 마실 다닐께요.

멜기세덱 2008-02-26 23:36   좋아요 0 | URL
홍/수 때문에 제가 좀 서운했었더랍니다....ㅋㅋㅋㅋ

bookJourney 2008-02-26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노하고, 아파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 그 순수함이 부럽습니다.

멜기세덱 2008-02-26 23:37   좋아요 0 | URL
순수하지 못해서가 문제에요...제가....ㅋㅋ

프레이야 2008-02-26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새로운 형식의 리뷰, 감명깊게 읽었어요.
경계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백번째 리뷰라니, 더욱 뜻깊습니다.

멜기세덱 2008-02-26 23:38   좋아요 0 | URL
형식을 따져본건 아니지만, 그다지 새로운 형식도 아닌 것 같은데...ㅎㅎ
근데, 따져보니깐, 이게 정확히 백번째 리뷰는 아닌 것 같더라구요...
밑줄긋기가 2개나 있어서리....ㅎㅎ

2008-12-31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8-12-31 01:22   좋아요 0 | URL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