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신성가족 -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 희망제작소 프로젝트 우리시대 희망찾기 7
김두식 지음 / 창비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의 사법계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들은 현재 굴욕까지는 아니더라도 시련 혹은 당혹의 시간을 맞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우리사회에서 사법부에 대한 불신은 뿌리 깊지만, 한때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우야무야 넘겨오면서 그럭저럭 넘겨온 것이 사실이고, 그 사이 조금씩의 변화는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많은 부분들은 가리워지고, 여전히 많은 시민들이 그들을 불신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또 한 번의 폭풍이 닥쳐왔으니, 그들이 당혹해 할 것은 분명한 것이다. 신영철 대법관이 일으킨 그 파동은 사법부 전체를 뒤흔들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검찰은 끝모를 굴욕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지금, 사법계는 당혹스럽고, 굴욕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또한 언제나 처럼 '이 시련의 시간'이 지나가면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늘 하는 얘기지만, 이 위기를 계기로 자성하고 반성하면 커다란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일지도 모른다. 

보수 정당과 언론에서는 뭐 별일 아니라고 여기는 듯하고, 진보 쪽에서는 또 대단히 야단이다. 뭐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쨌든 이번 사태의 결론이 단순히 신영철의 사퇴, 검찰의 반성 등으로 매듭지어진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법계가 대단히 옳은 방향으로 변신하여 전국민의 신뢰와 사랑을 듬뿍 받게 된다고는 그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마당에 입 아프게 사법계에다 대고 떠들어봐야 그다지 변화하는 것은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그게 그렇게 변화하기 쉬운 것은 아니니 그렇다고 조용히 입닥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어리석고 무모하고, 바보같은 노릇이지만, 자꾸자꾸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떠들고 지적해야 하는 것은 고금의 진리이되,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하고 미움을 받는 일이어서, 큰 맘 먹고 덤비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어쩌면 김두식 교수도 그런 맘을 먹고 이 책 『불멸의 신성가족』을 펴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김두식 교수는 우리의 사법계를 '신성가족'에 비유하고 있는데, 이는 마르크스의 언사를 따온 것이다. 이는 둘 다 그 말이 보이는 외면의 거룩함을 뒤로한 채 비판적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썩 좋은 말은 아니다. 오늘날의 사법계가 말 그대로 신성한 어떤 것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지들 스스로 무언가 신성한 것처럼 여기고 남들고 구분하며 지들끼리만 지지고 볶고 하는 행태를 비판하기 위한 것일 터이다. 이를 지나친 표현, 무례한 표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적절하고 적확한 표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를 대라고 하면, 그걸 몰라서 묻냐고 반문하기에도 딱 좋다. 여하튼 우리는 그들이 이룩한 '신성가족'의 외부에서 모든 것을 듣고 보고, 느끼고 체감하며 한편으론 부러워하면서, 한편으론 욕을 하면서 그렇게 저마다 그 특별나신 나리님들의 신성한 영역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 

박원순 변호사가 이끄는 희망제작소의 <우리시대희망찾기> 프로젝트 중 하나를 김두식 교수가 맡아 내놓은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이 프로젝트가 뭐 대단한 작업이고, 표방한 대로 그 희망을 찾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지금까지 교육, 노동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작업한 결과물이 나와 있고, 사법 영역을 다룬 이 결과물이 그 프로젝트의 7번째 작업이다. 김두식 교수의 주도로 이 작업은 사법계 안팎을 구성하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사법계의 '풍경'과 내면을 탐구하고 있고, 프로젝트 명과 같이 그러한 작업을 통해서 어떤 희망을 보기 위함일 터이지만, 이 책이 담고 있는 영역은 사법계의 다종다양하고 뿌리 깊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문제점들을 보다 깊이 있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을 상대로 하는 설문조사와는 다르게, 조사 인원은 적지만 보다 내밀한 부분까지 엿볼수 있는 조사방법을 택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장단점이 있겠지만, 이 책이 보여주는 사법계의 문제점들은 그다지 신선하다거나 충격적이라거나 하지 않다. 또한 그리 내밀해 보이지도 않고 비밀스럽지도 않다. 왠지 우리 모두 다 아는 사실을 그저 나열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확인해 주고 있는 것같다. 오히려 불쾌했던 점도 있는데, 그것은 애써 예전보다는 그나마 많이 나아졌다고 수차례 강변하는 언설이 곳곳에 있었다는 점이다. 예전엔 이렇게 나빴는데,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 이런이런 문제가 있다 정도에 그치고 있는 부분이다. 

우리가 뻔히 알고 있는 전관예우의 문제들, 당연히 알고 있는 브로커의 문제들, 드라마를 통해서 오히려 구구절절 드러나는 판검사가 부자집 아가씨를 찾는 문제들 등등, 뭐 뻔히 들어 알고 보아 욕하는 뻔한 문제들을 반복한 것이라는 비판도 가능해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문제고 그것을 재확인하는 데에서 오는 아픔은 배가되게 하는 책으로서, 그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최후의 성역 법조계 최초 인터뷰"라는 데에 그 의의를 높이 사주기로 하자. 앞서 말했듯이 자꾸자꾸 떠들어 대고 욕을 해야 조금이라도 변화하니까 말이다. 

김두식 교수는 이 책의 말미에서 그간 많은 변화와 노력으로 뿌리깊은 악습과 관행을 벗어버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들이 새삼 지적하면서, 그러한 문제들이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며 연결된 까닭에 정확히 무엇이 뿌리인지 진단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대략 요약하면 그 뿌리는 "의사소통의 부재와 원만함이라는 신성가족 이데올리기"라고 지적한다. 그러니까 의사소통의 부재라는 것은 판검사나 변호사의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것이고, 원만함의 문제는 '관계'에서 오는 문제라는 단순한 지적인데, 이게 그리 우리의 뇌리를 자극하는 어떤 뛰어난 지적과 냉철한 분석이라고 보기에는 심히 어려워만 보인다. 누가 그걸 몰라서 이 야단인가 말이다. 어쩌면 김두식 교수로서도 이런 결론이 쑥스러운 듯, 이 프로젝트의 결론 혹은 목표를 "억지로 찾아본 희망"이라 명명한다. 이 말은 어쩌면 희망이 없다에 다름아닐지 모르겠다는 뉘앙스다. 그렇게 억지로 찾아 내놓은 희망이란게, '시민'이라고 한다. 참 너무 억지로 찾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고, 어쩌면 김두식 교수의 냉혹한 비판이 반어적으로 담긴 표현이 아닐까 하면서 혀를 내두리게 된다. 도대체 어쩌라는 거니? 

결국 이 못난 사회에서는 당연히 '사람'만이 희망이다. 그러나 그 모든 잘못과 죄악 또한 이 모든 '사람'들의 것이 분명하다. 사람이 변화하고 달라져야지만이 모든 것이 변화하고 새롭게 될 것이다. 어떻게 변화해야 하나? 검사에게 당당히 말을 건내라고? 고작 그것뿐인가? 어쩌면 이것은 일반 시민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무책임한 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순간 불쾌해진다.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사회구조적 문제 중의 하나가 이 신성가족에게도 예외가 아닌 사실을. 그러니까 우리가 변화해야 한다는 것은 근본적인 대안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소리는 누구나 다 한다. 그러니까 누구나 다하는 소리는 함께 같이 하되, 그것만 주구장창 떠벌이면 그건 전문가 쯤 되는 사람들에게는 좀 아니다 싶다는 거다. 구조가 바뀔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뱉어내어야 하잖은가? 여러가지 사법 개혁의 제도들을 마련해야 하잖은가? 배심원제의 도입, 판검사 임용의 개혁, 변호사의 확충, 기타등등, 기타등등. 결국은 '시민이 희망'이겠지만, 그건 너무 멍한, 그리고 당연한 결론이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역시나 아직은 요원하기만 한 이 신성가족의 해체가 아닐까 한다. 김명민이 열연했던 그 '불멸'한다는 이순신 장군도 수백년전 돌아가셨고, 드라마도 끝났는데, 이 '불멸의 신성가족'은 언제 멸하게 될까? 여전히 궁금하고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이니, 이 책을 읽고는 울화통만 터질 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딧불이 2009-06-28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댁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어여쁘고 앳된 처자까지 데리고... 울화통이 터지더라도 멸하지 않는 신성가족..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잘읽었습니다.

순오기 2009-07-06 0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랜만에 리뷰가 올라왔군요~ 블로거뉴스 특종이나 우수리뷰로 팍팍 밀어봅니다.^^
 
괴물의 탄생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4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마태복음 7:20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지 1년이 넘었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 온 나라가 "경제를 살리자"는 구호 아래 저마다 "경제! 경제!"를 외쳤고, 지금의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켰다. 이명박은 "경제, 경제"를 외쳤고, 과연 '천국'에 들어간 것이다. '경제'는 우리사회의 오랜 숙명이요 정의다. "잘 살아보자"는 구호는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했고, 이명박의 리바이벌 속에 새 정부를 탄생시켰다. "잃어버린 10년"에서 잃어버린 대상은 무엇보다 '경제'였고, 우리는 저마다 '경제'를 염원했다. '천국'으로 들어간 이명박은 그 잃어버린 '경제'를 찾아주마 하고 굳게 약속하고, 천국의 집, '청와대'에 입성한 것이다.

세계적 경제 위기 속에서 우리 사회는 휘청대고 있다. 모든 뉴스가 전하는 소식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울고 있다. 고등어니 갈치니, 반토막이니 다섯토막이니 하는 소리가 씁쓸한 개그로 다가오는 것은 우리네 해학인지 모르지만, 듣는 이에 따라서는 자조적 풍자의 칼날에 상처를 입고 있을 것이다. 누구든 오늘날의 경제(상황)을 말하며, 죽을 지경이라 하소연 하지만, 저마다 말하는 그 '경제'는 엄밀한 의미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우선, 나의 경우 경제는 여전히 소원한 대상일 뿐이다. 세계 경제의 위기가 현재로서는 내게 직접적으로 준 폐해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이것이 나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우리 사회가 어떤 식으로든 '경제'에 엮여 있음을 인정해야만 하겠다. 한갓 어린아이에게도 그 책임여하에 관계없이 경제는 치명적일 수 있는 것이니까.

사실 '경제'라고 하는 것에 나는 학문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관심 밖의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경제 위기를 대하는 나의 자세는 여전히 관망이다. 쏟아지는 경제 위기 뉴스에 지겨워하며, '거 좀 잘 하지"라고만 생각할 뿐이다. 이런 나에게 누군가는 비난할지 모른다. 우리는 경제와 직·간접적으로 무관치 않기에, 그저 관조하고 관망하는 것은 무책임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무엇을 하여 이 경제를 살릴 수 있단 말인가?

'경제(經濟)'라는 것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준말이라고 한다. "세상을 다스리고(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여기서 '經'은 '治'와 통한다. 그런 점에서 이 '경제'란 말은 다분히 지배자의 입장에서 국가를 운영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유교적 사회에서 '경세제민'은 하나의 왕도였던 것이다. 이것은 근대 민주적 성격의 사회에서 추구되어야할 '경제'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인다고 하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경제'가 최소한의 '경세제민'을 이루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 할 것이다.

서양에서 'Economy'라 하는 것을 우리는 '경제'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이 단어의 어원을 찾아보면, 그리스어의 'oikos'와 'nomia'의 합성으로, "집을 관리하다"의 의미였다. 달리 말하면 '가정살림'이라고 직역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절약'의 의미가 강조되고 있는 단어라고 할 것이다. 이 단어가 우리에게는 '경제'라고 번역되지만, 이런 점을 미뤄볼 때, 서양의 'Economy'는 '제(濟)'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여러 점에서 동양의 경제와 서양의 'Economy'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근대적 성격의 경제는 서양에서 들여온 것이지만, 오늘날의 경제는 또 이와는 다른 양상과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경제'에 대한 학문적 정의로서 "생산, 분배, 소비의 순환으로 이루어지는 부의 사회적 재생산 과정"이라는 것도 현실적 경제와는 정확히 부합한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한국사회에서만 보더라도 이 '경제'의 의미는 계층, 세대, 지역, 계급 등에 따라 저마다 다른 것 같다. 경제적 여건에 따라 계층을 구분할 때, 부유층, 중산층, 서민층, 빈곤층 등으로 나는다면, 이들에게 의미하는 '경제'는 천차만별이다. 서민, 특히 빈곤층에게 '경제'는 하루하루를 연명할 수 있게하는 그 어떤 것인 반면, 중산층에게 경제는 현 상황을 유지하면서 좀더 재산을 늘리고, 보다 풍요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극소수의 부유층에게 경제는 어떤 의미일까? 나는 쉽사리 상상하기 어렵지만, 이들에게 '경제'는 곧 '자신'이 아닐까 싶다. 돈과 권력을 자유자재로 부리고 이 사회를 지배하며, 절대자가 되게 해주는 것이 곧 이들에게 '경제'의 의미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목도리를 건네준 그 시장 아주머니에게 경제는 무엇일까? 배추 파는 아주머니에게 경제는 배추 한 포기를 더 파는 것일테고, 국밥집 주인에게 경제는 국밥 한 그릇 더 파는 것일테다. 강남의 복부인에게 경제는, 땅을 사랑하는 것이고,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는 것이다. 오늘날 직장인들에게 경제는 주식과 펀드가 대박을 터트리는 것이다. 이것은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대명제가 지니는 각각의 모습들이다.

이명박 정부가 "경제를 살리겠다"는 약속은 지난 1년간 급하게 진행되고 있다. 분명히 그들은 약속을 지키고 있다. 이들은 '경제'를 살리겠다고 했으도, 우리 사회 속의 다양한 경제의 의미와 모습들을 특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외치는 '경제, 경제'가 우리 어린 백성들은 모두 자신이 의미하는 경제일 것이라고 오해했다. 더 악화된 경제 상황 속에서 현 정부에게 왜 공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가 라고 반문할 수 있을까? 내가 볼 때 현 정부는 정확하게 그 공약을 이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들이 말했던 경제는 다름 아닌 부유층을 위한 경제였다. 이는 이전에도 폭로되었던 바지만, 우리는 애써 간과했고, 그럼으로서 우리는 그들이 거짓말쟁이였다고 욕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거짓말을 한 적이 없지만 말이다. 부유층을 위한 경제, 그들만 만들어가는 경제를 살펴볼 때, 여기에는 동양 전통으로서의 경제, 곧 경세제민의 모습도, 서양에서의 가정살림을 의미하는 'Economy'의 모습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사회는 곧 '괴물'을 탄생시킬 뿐인 것이다.

자칭 C급 경제학자 우석훈은 이러한 '괴물'을 탄생시킬 한국사회의 경제의 구조적 모순과 문제점들을 파헤친다. 그것이 바로 "한국경제대안 시리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1권 『88만원 세대』에서는 세대간 판이한 '경제'의 모순된 모습을 지적했고, 2권 『조직의 재발견』에서는 '조직의 덫'에 갖힌 한국 경제를 고발한다. '평화 경제학'이라 할만한 3권『촌놈들의 제국주의』에 이어 이 책 『괴물의 탄생』은 이 시리즈의 결론으로서 세계 경제내 한국 경제의 모습과 그 결과를 예측하고, '괴물' 탄생의 비극을 막기위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석훈에게 있어 오늘날의 한국경제는 지극히 비정상적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저마다 떠벌이는 경제의 의미와 모습을 다름에도 불구하고, 경제를 이끌어 가는 지배층들을 한결같이 자신들만의 경제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성을 구제한다는 제민은 방기한지 오래고, 가정살림을 돌보는 'Economy'는 가정파탄으로 향하게 하는 경제가, 오늘날 한국경제의 모습이다. 그로써 탄생하게 될 괴물은, 가히 위협적인 것임이 분명하다.

이 책 『괴물의 탄생』이 네 권의 "한국경제대안 시리즈"를 마감하면서, 예견한 '괴물의 탄생'은 이전의 1권에서부터 예상되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서 주목할 부분은 결국 '대안'의 제시다. 어떻게 이 무지막지한 '괴물'을 '해체'할 것인가? 우석훈은 이것을 몇가지 제시하고 있다. 한국 경제에 "공공성과 생태, 문화적 가치"를 높이는 것, 사교육을 해체하고, 기존의 대학서열화를 해체하여 이른바 "국립대 통합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 지방의 자치와 문화를 살리며, 공공부문, 특히 제3부문을 살려내어 국민 경제를 균형있게 유지하는 것이 그가 말하는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사실 어떻게 보면 명철한 대안이라고 하기 어렵고,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뻔한 것 같아보이는 대안이 어쩌면 절실한 대안이어야 하는 한국사회의 모순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저는 시장이 모든 것을 경정하는 상태는 지옥이고, 그렇다고 조직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상태(즉 사회주의 상태)도 지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두 가지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찾을 것인가, 그게 학자로서의 저에게 던져진 큰 질문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사이에서 불안하지만 안정성을 잃지 않는 국민경제, 그것이 바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혹은 '신뢰의 자본주의'라고 생각하며, 한국 경제의 대안이 그런 모습 가운데 하나이기를 원합니다. 그런 제3부문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그것이 곧 장기적으로 평화를 담보하는 평화경제라고 저는 봅니다. 그래야만 지금과 같이 토목경제가 해체되고, 한반도 생태계와 국민경제가 최소한의 공존을 추구할 수 있는 생태적 전환이 가능할 것입니다." 

 
   

우석훈이 추구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나는 그리 기대하지 않지만(인간의 얼굴을 한 괴물은 괴물일까? 인간일까?) 많은 부분 그의 말에 긍정하고 동의한다. 평화경제로 가는 길에 우리가 반드시 넘어서야할 것은 분명 '괴물'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일테다. 그런 점에서 우석훈이 "왜 경제성장이 필요한가, 여기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 오히려 지금 단계의 한국 경제에 절실한 질문"이러고 할 때, 이 질문을 한다고 그들이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나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우리 모두가 만들어낸 시스템이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비단 "앞으로 몇 년간 내리게 될 수많은 경제적 선택과 개인적 판단, 그것들만이 우리가 이 불행한 흐름에서 벗어나 살 길을 찾는 데에 현재로선 미결인 채로 남은, 거의 유일한 요소"라고 찝찝한 자위만 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석훈은 "우리는 지는 법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좀더 급진적인 방법들을 택하면 안 될까? 아직은 잘 모르지만, "10년 후 사교육 없는 한국, 완전고용의 한국, 평화국가 한국, 그리고 생태국가 한국에서 우리 모두 다시 만났으면 한다는 희망"을 말하기 위해서는 우석훈의 소극적 자위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얼마전 영화 <괴물>이 흥행한 적이 있다. 한강에 출현한 괴물을 무찌르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비록 소수지만 가족이었고, 그 가족의 연대였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괴물을 무찌르는' 유효한 방법을 이 영화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민주 주체들의 연대를 통해 나는 우석훈이 희망하는 그것을 얻어낼 수 있다고 본다. 그럴 때에 우리는 "지는 법이 없"는 것이다. 역사의 심판, 결국은 정의가 승리한다는 그런 마스터베이션은 뒤로 미루고, 지금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서로 살을 부비며, 연대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이 현실을 타개해 나가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우석훈이 제시한 그러한 대안을 목표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우석훈과는 조금 달리 택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경제, 경제"를 외쳐댔지만, 그래서 이명박은 '천국'에 들어간 것 처럼 보이지만, 천국에는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만이 갈 수 있다고 했다. 이명박 정권 하에서 이명박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여 천국에 들어갈 자로 이 리뷰를 읽는 당신이 해당될 것은 아닐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이 강부자 뜻대로 행할 때 그가 천국에 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사회를 지도하고 경영하는 이들은 "국민 뜻대로", 나아가 우리의 모습을 우리 뜻대로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그럴 때에 우리 사회는 천국 언저리에는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천국은 아버지 뜻대로, 우리 사회는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스스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 조종법] 서평단 설문 & 리뷰를 올려주세요
인간 조종법 - 정직한 사람들을 위한
로베르 뱅상 , 장 레옹 보부아 지음, 임희근 옮김 / 궁리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누군가를 조종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떡주무르듯 마음대로 조종한다는 것은 언듯 들어서는 인간윤리에 어긋나는 악행일 따름이다. 그런데 보통의 경우에서 기계를 작동시키듯, 파일럿이 비행기를 조종하듯 인간을 제멋대로 조종하는 일은 찾아보기 극히 어렵다. 티비에서 보이는 체면술사가 그러해 보이지만 알고보면 이것도 거의 짜고치는 고스톱 아니던가?

자 여기에 조금은 의아스럽고, 어쩜 그런 책이 있을까, 하고 궁금해할 책이 나왔다. 프랑스의 사회심리학자(이들은 무슨 일로 그런지는 잘 이해가지 않지만 자신들을 '사회심리학자'로 부르면서 애써 '심리사회학자'와 구분한다. '사회심리학'과 '심리사회학'은 차이는 크다면 크고 적다면 적지 않을까? 곳곳에 보이는 이런 학자연하는 사람들의 노름이 간혹 이 책을 따분하게 만들고, 쓸데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인 로베르 뱅상 줄과 장 레옹 보부아의 책 『인간 조종법』이 바로 그것이다. 과연! 이 책이 비행기나 헬리콥터 조정법처럼 인간을 조정하게끔 해 주는 그런 방법들을 담고 있을까? 짐작하시듯이, 천부당 만부당, 당연지사로 '아니다'다.

   
  보통 하는 말로는, 남에게 영향을 끼치는 행동(누군가로 하여금 그 사람이 자진해서라면 하지 않을 어떤 행동을 하도록 설득하는 일)을 가리켜 '조종'이라 할 수 있다. 조종자가 자기중심적인 사람일 경우, 그는 자기가 명분을 성취하기 위해 끌어들이려는 사람과 자기 자신 사이에 이익 공동체가 성립된다고 실제로 확신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문제 삼는 것은 그런 조종이 아니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조종은 설득하는 행동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행동 기술'에 의지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지는 고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만약 조종자가 자신이 하는 행동의 의미를 명료하게 의식하고 있는 경우라면, 조종당하는 사람은 자기를 목표로 삼은 이 조종 작업을 여간해서 따돌리기 어렵다.(67쪽)  
   

말하자면 이 조종은 사람이 사람을 '꼬시는' 여러 행위(언행)들이다. 이를테면, 가게 점원이 손님에게 물건을 사게 한다거나, 어떤 자선단체에 기부하게 한다거나, 보험에 들게 한다거나, 공중전화를 사용할 동전을 얻는다거나, 과자 사먹을 천원을 타낸다거나 할 때, 그것을 아주 효과적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것이 조종이라면 우리는 끊임없이 조종하고 조종당하며 살고 있었고, 살고 있으며, 살아 갈 것이다. 하다못해 시장통에서 흥정을 하는 것도, 이 책의 저자들에 의하면 조종의 기법 중 어느 한 가지에 해당하기도 한다.

저자들이 말하는 무슨 특화된 듯한 무슨무슨 조종법들은 사실 너무나도 흔한, 우리가 의식, 무의식적으로 자주 써왔던 것들에 다름 아니다. 사람들에 따라 그 정도 및 효과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요즘은 '낚시'가 대세다. "문간에 발 들여놓기", "문전박대 자초하기" 등으로 번역을 그럭저럭 잘 해놓았지만, 이름만 붙였을 뿐, 저자들이 새로이 창안하여 만든 그야말로 인간을 제멋대로 조종하는 특허낸 기술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것을 소홀히 볼 일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아는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에 있다고들 하잖은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해온 방법이지만, 우리가 자주 쓰고 아는 그런 방법들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은, 그것을 보다 효과적으로 적절하게 현 생활 속에서 유용하게 사용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럴때에 우리의 생활은 좀더 윤택해지지 않을까? 그건 몰라도 우리의 작은 수고를 좀 덜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책 제목인 "인간 조종법"을 수식하는 부제격의 "정직한 사람들을 위한"이라는 말은 참 쓸데없는 것이지만, 홍보용 문구인 "프랑스인들이 꼽은 최고의 커뮤니케이션 지침서"라는 말은 이 책이 조종이 아닌 '커뮤니케이션', 나아가 인간관계에 어느 정도의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어 홍보용 이상의 도움을 우리에게 준다. 이를테면, "딱지 붙이기의 기능" 같은 것일텐데, 이것은 "추상적, 심리적, 도덕적 특성을 지닌 예비 행위에 방금 참여한 사람에게 어떤 타이틀을 붙여서 높여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일종의 칭찬하기일 수 있겠다. 많이들 써왔듯이 이는 우리의 인간관계를 보다 긍정적이게 만들어 주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한가지 더 들어보자. 우리는 스킨쉽이 우리에게 어느 정도 감정과 정서에 좋은 영향을 주는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여기서는 이것을 일컬어 '접촉 기법'이라고 명명했다. 지나가는 손님에게 슬쩍 손을 가져다가 접촉하면서 친근함을 표현하면, 상품 판매율이 괄목할 정도로 늘어난다는 것이 실험을 통해서 검증되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이, 그러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으면서, 혹은 안다고 하지는 못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실행하고 실행당했던 것들을 잘 정리해서 묶어 놓고 있다. 실험을 통해서 검증까지 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유효적절한 도움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런 방법을 넘어, 인간관계에 있어서 어떤 것이 중요한 것인지를 알려준다는 데에 있다. 억압이 되었건, 설득이 되었건, 권위에 위해서건, 꼬임에 의해서건,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꼭 시켜야 하겠거든, 그러니까 그 누군가가 내가 원하는 그 무엇인가를 해준다고 할 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얘기다. 아무래도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는가? 그 무엇이 범죄행위에 버금가는 어떤 것이 아닌 이상에야 말이다. 그것을 여러 조종기법을 심도있게 추적하고 분석해온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앞의 여러 장에서 낚시, 문간에 발 들여놓기, 덫 기법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는 자유롭다는 느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자유롭다는 느낌은 특정 행위를 손쉽게 얻어내도록 해주는 보조장치(낚시나 덫 기법에서의 첫 결정, '문간에 발 들여놓기' 기법에서 예비 행위)가 아니라, 상대방을 그 행위 속에 참여시키려 할 때 꼭 있어야 할 열쇠였다. 그러므로 자유롭다는 느낌은 분명, 조종자에게 도움이 되었다. 말하자면, 부담이 적은 첫 행위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중에 좀더 부담이 큰 다른 행위도 실행할 수 있도록 미리 포석을 깔아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이 자유롭다는 느낌 자체가 조종의 우아한 기술 중 하나일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른바 '마음대로 하십시오' 기법이 그것이다.(211~2쪽)  
   

저자들이 재차 강조하듯이 "개인은 그가 자유롭다고 느끼는 상황에서만 효과적으로 조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롭다는 느낌을 주는 것, 다시 말하면, 자발적 행위가 될 수 있도록 그러한 조건과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보다 자유자재의 조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자발성이 지극히 요구되는 분야는 아무래도 교육(학교교육이나 가정교육 등)일 것이다. 저자들이 예시한 다음 내용을 살펴보자.

   
 

1. "얘야, 나는 네가 뛰어내리면 좋겠다. 물론 하느냐 안 하느냐는 네 문제이니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렴."

2. "얘야, 네가 뛰어내리면 나는 기쁠 거야. 내 말 잘 알아들었니? 만약 안 뛰어내리면, 넌 일요일날 친구들하고 영화 보러 못 갈 줄 알아라."

3. "얘야, 나는 네가 뛰어내리면 좋겠다. 뛰어내리면 딸기 아이스크림 사 주마."

4. "얘야, 나는 네가 뛰어내리면 좋겠다. 뛰어내리면 자전거를 사 주지."

 
   

저자들이 제시한 4가지의 경우는 모두 아버지가 아들의 담력 혹은 용기를 키워주기 위한 이유가 담겨 있는 조건문들이다. 위의 모든 조건에서 아이가 뛰어내렸다고 가정했을 때(번역상에 문제였을까? 아버지가 아이를 강물에 뛰어내리라고 자꾸 권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우리의 통념과 윤리에 부적합하잖은가? 프랑스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말이다. 무언가 상황이 다를 것 같은데, 번역상에서 좀 신경을 써줘야지 싶다. 이 책에서는 비슷한 예로 정원에서 물에 뛰어내리기 놀이같은 것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것도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아무튼 번역자 혹은 편집자의 설명이 덧붙여져야지 싶다.) 아이의 자발성이 도드라지는 것은 1번과 3번이다. 2번은 협박에 가깝고, 4법은 아이를 물신만능에 빠지게 하기 십상이다. 오늘날 우리 부모들이 하는 작태가 거반 2번가 4번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입안이 씁쓸해진다.

교육에 있어서 자발성, 혹은 자기 주도적 학습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을 유도하고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은 교사 혹은 학부모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대단히 유용한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아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냈다고 느낄때에 나타나는 그 교육적 효과는 아이를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자라게 해 줄 것이 분명하다. 이 책의 아쉬운 점도 이 부분이다. 좀 더 그런 활용법이 강조되었으면 좋았을 법하지만, 아무래도 이들이 사회심리학자다보니 그러한 요청의 응답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울 수도 있겠다. 다만, 이 책이 그러한 역할을 감당할 이에게 좋은 영감과 영향을 주기 바랄 뿐이다.

교육과 관련해서 저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주의해야 할 부분은 이러한 조종의 기법들이 자유로운 느낌을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창조적인 행위들을 이끌어 내기보다는 단순한 재생산을 수월하게 만들어 줄 뿐이라는 사실이다. 기성세대들의 인식, 윤리, 문화 들을 아이들이 자유로운 느낌으로 재생산할 뿐인 것이라는 얘기다. 참고하고 숙고해야할 지적이다. 그런 점을 보완하면서 보다 효과적인 교육방법, 교육심리학 등이 연구되고 그 결과물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사족으로, 번역자 혹은 편집자의 다소 무성의함을 언급하고 끝내자. 각종 조종 기법들을(원서에서 아마도 쉬운 말로 풀어서 명명했을테지만) 쉬운 우리말로 풀어낸 것은 긍정적인 일이지만, 곳곳에서 보이는 학술 및 전문용어들이 무지막지하게 돌출하고 있다는 점을 우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주석이라고는 저자의 것뿐이어서, 편집자가 과연 무엇을 했는지 좀 의심스럽다. 아무래도 편집자가 주를 대어야 할 곳이 많아 보인다. 그리고 번역상에 다소간의 오류가 있어 보인다. 예를 들면 289쪽의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실제로 그 가게 점원에게 다른 생각이 없었다면 왜 굳이 다른 옷과 한 벌을 이루는 바지를 따로 할인 판매했겠는가? 그것도 상의와 바지를 따로 팔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앞부분의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멋진 바지를 내걸고 대폭 할인판매하고 있다고 유혹하여 그 바지를 사러 들어온 손님에게 그와 더욱 멋드러지게 어울릴 할인 안 되는 상의를 권유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상업전략이라는 얘기 중에 위 인용문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앞뒤가 안 맞잖은가? 첫 문장에서는 다른 생각(손님을 유인할 생각)이 있어서 "다른 옷과 한 벌을 이루는 바지를 따로 할인 판매했"다는 얘기다. 이에 자연스럽게 이어지려면 같은 얘기 아닌 다른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문맥상 "~에도 불구하고"에 적절히 호응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그런데 다시 앞 문장과 같은 의미가 반복된다. "상의와 바지를 따로 팔 수 있었"다는 얘기는 바로 앞 문장에 나오는 말 아닌가? 여기서는 문맥상 "그것도 상의와 바지를 같이 팔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가 되어야 자연스럽잖은가? 원서를 대조하지는 못했지만, 원서의 오류이던가, 번역상의 오류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무튼, 이런 옥의 티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여러면에서 나름의 장점들이 많다. 이어지는 후속작업, 연구, 그리고 각계의 활용방법들의 성과들이 많이많이 나와주기를 기대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모 에로스] 서평을 올려주세요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 내 몸을 바꾸는 에로스혁명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6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삼십 평생을 연애 한 번, 찐한 사랑놀음 한 번 못 해 본 나같은 사람에게, 연애가 이러쿵 저러쿵, 사랑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은 한낱 사치일 뿐이다. 아니 어쩌면, 그나마의 위로 혹은 위안 삼는 자위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을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를 구성지게 뽑아 제낄지언정, 그 씨앗을 어디에 심어야 할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사랑이 뭐길래?" 도대체가 알 수가 없다. 알 수 없는 그것에, 언제부턴가, 스스로로부터, 때론 타의에 의해서 집착하고 집착하게 된다. "여자 친구 없냐?" "장가가려면 얼런 여자를 사귀어야 한다"느니 하는 말들에서부터, 괜히 쓸쓸해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나기까지, 세상은 수시로 나를 괴롭힌다. 드러워서라도 내 한 평생 사랑 한 번 해보고 말리라! 젠장.

사랑이야기들, 연애담들, 사랑학개론들, 사랑은 이렇게 담론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어쩌면 사랑을 팔기 위해 안달인 세상같다. 연애 고수들은 모든 이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몸발이 좋은 사람들, 얼굴이 꽃미남에 동안인 인사들, 게도 안되면 말발이라도 자지러지는 인간들, 그들은 줄곧 연애전문가로 통한다. 연애와 사랑이 시시절절 끊이지 않는다. 다만 대상이 수시로 바뀔 뿐이다. 하여간 잘도 한다. 삼십 평생에 하나 있을까 말까한 내 경험을 걔들은 무시로 해치우고 만다. 대단하다. 대단한 고수들.

우리는 그들을 연애박사, 연애대장 쯤으로 부른다. 누가 박사학위를 준 것은 아니지만, 나름 그들도 사랑 혹은 연애에 자신을 전문가쯤으로 여기는 듯 하다. 솔직히 인정한다. 그들이 많은 여자를 사귀는 데에도 나름의 노하우와 전략이 있을 것이다. 그게 능력이든, 돈이든, 얼굴이든, 말발이든 간에, 그것도 개뿔 없는 나와 비교해서는 대단한 장점들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제 그런 수식, 혹은 명명들을 거둬들여야 할까 보다. 이 시대에 연애 고수들에게 "니들이 사랑을 알아?" "공부 좀 더 하셔"하고 온갖 자신감 충천하여 건방지게 떠들고 나온 이가 있으니, 그가 다름 아닌 고전평론가 고미숙 선생이다. 중년의 나이에 참 용감도 하셔라. 그에 대한 이미지는 사실 사랑의 '사'자로 모를 위인처럼 보일 뿐인데, 자칭 사랑의 달인 납시오 하며, 사랑에 대한 썰을 마구마구 풀어댄다. 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도대체 이 중년의 아줌마(고 선생께 죄송스럽지만, 양해 바란다)가 뭘 안다고, 사랑의 달인 타령일까? 쪼끔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이 책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를 읽을 자격이 충분히 되는 셈이다. 우선, 읽기 전에 아줌마라고 얕보고 들어가진 말길 충고한다.

고미숙 선생이 보기에 요즘 세대, 정확히는 근대 이후의 세대, 더 정확히는 신자유주의와 자본이 점령한 80년대 이후의 요즘 젊은 세대들은 제대로 된 사랑을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에, 사랑은 이런 것이야, 이쯤 해야 사랑한다고, 연애한다고 말할 수 있지, 하고 조언한다. 고미숙 선생이 지적하는 요즘 세대의 사랑의 문제는 대략 이런 것들이다. 첫째, 사랑과 연애의 고수들이 판을 치는 '연애공화국'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안에 진정한 사랑을 하는 이들은 없다는 것. 둘째, 순정 아니면 냉소, 선수 아니면 스토커, 사랑과 섹스, 차고 차이고 등으로 대별되는 사랑 공식의 그 무식한 이분법. 셋째, 사랑에 대한 말도 안되는 상상과 이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삶과 유리된 사랑. 이런 것들이 오늘날 사랑에 대한 잘못된 인식들이라고 지적한다. 대단히 동의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사랑에 대한 잘못된 인식들, 곧 사랑에 대한 '오만과 편견'은 다만 개인적 인식의 잘못 만이 아니란 사실, 그 사실을 고미숙 선생은 이어서 분석한다. 이 사회는 총체적 구조 속에서 사랑에 대한 헛된 망상을 조장하고 왜곡시킨다고 보는 것이다. 국가, 사회, 학교, 가족, 문화 등등등. 이 모든 것들이 자본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 속에서 사랑을 왜곡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 일례가 되는 것이 사랑은 곧 소비가 되는 현실이다. 모든 사랑의 진행과정은 그야말로 소비의 진행이다. 첫만남은 스타벅스에서 차를 마시고, 영화를 보는 것은 이제 공식이 되어 버렸다. 무슨무슨 데이는 특별한 사랑을 창조하는 것 같지만, 기실은 조장된 소비문화일 뿐이다. 이 데이데이에 맞춰서 사랑이 진행될 뿐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거듭 당부하거니와, 절대 상품을 주고받는 식으로 사랑을 확인하지 마시라. 물론 선물은 중요하다. 하지만, 진짜 소중한 선물에는 '삶의 서사'가 묻어 있어야 한다. 즉, 나의 일상의 리듬과 무관한 선물이란 그야말로 쇼에 지나지 않는다. 일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쇼"가 되는 순간, 아무리 정성을 다한다 한들 결국 화폐로 환산될 수밖에 없다. 특히 요즘같이 상품과 예술의 경계가 모호한 시대에는 정성과 화폐가 분리되기 어렵다. 갖은 정성을 다한 선물일수록 가격에 비례한다. 따라서, 그 노선을 취하는 순간, 이미 그 사랑은 화폐권력의 장에 포획되어 버린다. 그 다음부터는 일상의 모든 흐름에 상품의 혼이 따라붙게 된다. 처음엔 얼떨결에 따라했던 작업들이 나중엔 자신의 본성인 양 전도되어 버리는 것이다.(197~8쪽)

 
   

그렇게 우리의 사랑에 대한 인식은 전도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뻔한 사랑, 밋밋한 사랑일 뿐이고, 점점더 자극적이 되고, 이벤트가 가장 소중한 사랑이 되어 버리고, 본말은 전도되고, 나와 네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네가 세상의 물질과 소비를 사랑하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일찍이 혜은이는 말했다. "만나서 차마시는 그런 사랑 아니야, 전화로 얘기하는 그런 사랑 아니야, 웃으며 안녕하는 그런 사랑 아니야"라고. 밋밋한 사랑 공식들, 연애 과정들 속에서 사랑은 점점 그 힘을 잃어갈 뿐이다. 그러니 더 자극적인 요소들을 찾아간다.

사실 혜은이는 열망했다. "가슴 터질 듯 열망하는 사랑, 사랑 때문에 목숨 거는 사랑"의 열정을 원했던 것이다. 살자고 사랑하고, 사랑하자고 사는 것인데, 죽을 이유는 하등 없어 보인다. 좀더 자극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의 사랑이다. 고미숙 선생의 말대로라면, 좀더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다 보면, 일찍 시들기 마련이다. 그런 사랑, 정말 아니다.

내가 사랑을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현대 사회에서 가장 큰 병통은 사랑과 섹스의 문제다. 사랑과 섹스는 하나도 아니고, 그렇다고 둘 도 아니다. 사랑 없는 섹스는 잘못일까? 섹스 없는 사랑은 숭고할까? 섹스는 섹스 자체로도 아름답고 가치 있다는 게 일단 내 지론이라고만 밝혀두자. 이런 사랑과 섹스에 대한 이분법적 인식의 틀도 결국은 근대 이후의 자본논리와 신자유주의의 논리가 만들어낸 괴상한 것일 뿐이라고 고미숙 선생은 말한다.

자 이쯤해서 고미숙 선생의 사랑학개론의 결론을 말해보자. 고미숙 선생은 프롤로그에서 우리에게 이 세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선 사랑의 주체와 대상은 곧 나라는 것이다. 자꾸들 사랑에서 나를 거세시켜 버리는 것, 이거 안 된다. 다음으로 실연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다. 또 다른 시작을 향해 힘차게 나갈 수 있는 행복한 기회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에로스는 쿵푸다.

에로스는 쿵푸다. 사랑하려면 공부하라. 이것이 결론이다. 사랑이라는 헛된 망상을 위해 정신줄 생명줄 놓는 인간들이 참 많다. 진정한 사랑은 창조적이고, 삶을 한결 충만하게 하며, 나아가 나와 너를 자유롭게 해 주는 그런 것이어야 하는데, 그럴려면, 인문학적, 정신적, 지성적 공부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알아야 사랑하지. 현대 사회가 벌여놓은 그 사랑의 공식들을 철저히 거부하고 그로부터 탈출하여 보다 창조적 사랑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공부가 필수다. 책도 많이 읽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난 책은 좀 읽는데, 왜 이러지?)

나아가 사랑은 혁명이다. "사랑, 노동, 지식은 우리 생활의 원천이며, 이것들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해야 한다."고 빌헬름 라이히가 말했다고 고미숙은 인용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왜 사회를 전면적으로 전복하기를 꿈꾸면서 사랑과 성적 관계에 있어서는 새로운 실험을 기획하지 않는 것일까? 사랑이야말로 혁명의 뇌관임을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대체 왜?(83쪽)

 
   

그렇다. 사랑은 창조적이어야 한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혁명은 세상을 전복하고자 한다. 사랑이 없다면, 무슨 수로 혁명이 가능할까? 세상의 그 구조적 오류들을 사랑으로 극복하고 전복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창조적 발상들을 위치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해야하고, 공부해서 사랑하고, 사랑해서 혁명하자는 것이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우리시대 모든 연인들이 연애와 쇼핑 사이의 이 은밀한 공모관계만 해체해도 신자유주의 체제는 휘청거릴 것이다, 라는. 세상에, 이렇게 간단하고 기막힌 혁명전략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니 청춘들이여, 아니 사랑에 빠진 모든 이들이여, 세상이 바뀌기를 정말 원하는가? 신자유주의에 저항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가장 먼저, 쇼! 하지 마라! 쇼! 그럼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는가? 그래서 창의성이 필요하다. 나의 사랑이 지닌바 특이성이 유감없이 발휘될 수 있는 사랑법을 창안하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고유한 사랑법을.(198쪽)

 
   

오호! 이런! 이쯤되면 혁명을 꿈꾸는 내가 안달해마지 않을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자 이제부터 혁명하자! 아니 사랑하자! 그럼 공부하자! 그런데 의문! 나 남들보다 책 많이 읽고, 인문학적 공부 열심히 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이모양이람. 사랑하고 혁명하는데 아무 문제 없는데, 왜 이러냐 이 말이다. 어이쿠! 고미숙 선생 친절히 말씀하신다. "정말 사랑의 열정을 맛보고 싶다면, 지금 당장 일상의 배치를 바꾸는 훈련에 돌입해야 한다."고. 그럼 그렇지! 젠장!

흥미로운 부분은 어떻게 공부해야 하냐는 대목이다. 사랑도 혁명도 혼자서는 못하는 법! 아니 그럼 공부는 혼자서해야 하잖은가? 기분 좋게도 공부는 여럿이서 하면 더 좋은 것이다. 세미나, 이것이 고미숙 선생이 제시하는 사랑을 공부하는 방법이고 전략이다. 일상의 배치를 바꾸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일상의 배치를 바꾸고, 함께 공부하고 사랑할 수 있는 이들은 찾아 나서고, 대화하고 토론하며, 공부하면서 눈이 번쩍 띄이는 사랑의 짝을 스스로 주체적으로 만들고 찾으라는 것이다. 흠흠! 쉬운일이 아닐 터이다. 내일부터라도 찾아나서야겠다.

알라딘에 많은 분들 들으시면 좋겠다. 우리 사랑하십시다. 아니 혁명하십시다. 아니 공부하십시다. 아니 '세.미.나' 하십시다. 자 난 내일 혁명하러 갈 참이다. 세미나 하러 갈 계획이다. 그렇다고 이상하게 보지는 마시라. 그냥 전부터 하던 것이었으니까, 일상의 배치가 바뀐 것은 아니다. 암튼 이제 알았으니, 다르게 보일 수도 있긴 하겠지만. 아! 혁명하고 싶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rch 2008-12-05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멜기님. 리뷰 곳곳에 정말 멜마에스러운 모습이 엿보여요. 아무래도 '그' 세미나엔 충성스러운 혁명가인 여성분이 좀 포진해야할 듯 싶어요. 일상의 배치를 바꾸는 것까지는 좋은데 딱 거기까지인 것만 같아서 말이죠. 아, 제가 너무 멜기님의 성정체성을 확정시켰나요? 이 밤. 뭐 그정도는 봐주실거라고 생각해요. 혹 똥덩어리 막 이렇게 퍼부으시는거 아니죠? 그럼 안 들리는척 해야겠다.^^

순오기 2008-12-06 0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라보~ 멜기님의 리뷰는 바로 이 맛이야!
밑밑한 사랑이야, 밋밋한 사랑이야? 어떤게 맞나요~ ^^

순오기 2008-12-07 11:50   좋아요 0 | URL
연음법칙에 따르면 밑밑한 사랑이 맞는거 같은데~ 정말 모르겠어요.

멜기세덱 2008-12-07 13:17   좋아요 0 | URL
밋밋한이 맞아요...ㅎㅎ^^

2008-12-09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심술 2008-12-07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야 원 나같이 귀찮고 애쓰는 거 싫어하는 사람은 머리아파서 사랑도 못 하겠네요.
 
[아버지의 편지] 서평단 설문 & 리뷰를 올려주세요
아버지의 편지
정민.박동욱 엮음 / 김영사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편지하면? 제일 안 좋은 추억으로 무조건 군대가 떠오른다. 훈련소에 입소해서부터 볼펜과 편지지를 던져주고는 다짜고짜 부모님에 편지를 쓰라는 황당무개한 강요를 시작으로, 자대배치를 받아서 정기적으로 편지쓰는 행사가 나를 참 막막하게 괴롭혔다. 대부분 첫 편지는 감회와 우수에 젖어 부모님께 눈물을 편지를 쓰기도 한다마는, 나는 이게 영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뭐 좋은 곳에 간 것도 아니고, 그렇게도 가기 싫었던 군대에 끌려가서 어리벙벙한 상태에서 부모님께 구구절절 받들어 올릴 어떤 말씀도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쓰라고는 하니까, 나의 상투적 문장력을 발휘하여 한 장 씩은 꼬박 채워 보내곤 했다. 다른 선임병의 편지까지도 대필한 기억이 난다. 어찌나 상투적으로 잘 썼는지, 대필했던 선임병의 부모님께서 그 편지를 보시고는 처음으로 아들 생각에 눈물을 흘리셨다나, 그런 풍문도 전해진다. 우리 어머니도 그랬을 것이다. 아무튼 좋지 못한 추억이긴 하지만, 이때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을 부모님께 편지를 쓸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였던 셈이다.

그러나 편지하면? 더욱 쓰라린 추억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교회 학생회 대표로 음악 경연대회에 출전해서 독창으로 입상한 적이 있었더랬다. 거기서 나를 알아보고(?) 친구의 친구에게서 편지가, 연서가 날아왔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여학생에서의 연서. 한 달 동안 답장을 쓸까 말까, 쓰면 어떻게 써야 할까? 우린 아직 서로 잘 모르지 않으냐, 아직은 공부에 전념하고 싶다, 에서부터 핑크빛 미래에 대한 상상까지, 오만가지 상상과 현실을 왔다갔다 하면서 답장을 썼다 지웠다, 다시 썼다 찢었다를 반복했다. 결국 한 달이 넘도록 답장 한 장을 못 썼더랬다. 그 여학생은 뭐하고 살까? 문득 궁금해진다. 내 답장을 심히 기다렸을 것인데! 쩝!

살면서 편지를 쓴 기억이 많지 않다. 이른 바 편지는 구시대적인 것이어서, 90년대에 들면서부터는 편지가 가지는 다양한 역할들이 다른 신시대적인 것으로 대체되었고, 이제는 아예 이 수고로운 글씨쓰기는 사라져 버린 듯 하다.

편지를 대체한 것은 흔히 이메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내 경험에 비추어봐도 이메일은 그 대체물이 되지 못한다. 이전의 편지가 담았던 수만가지 중에 이메일은 단순히 스팸 비스무리한 것만 가져왔을 뿐이다. 오히려 이 편지를 거반 대체하고 있는 것은 핸드폰과 문자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가까운 이들과 끊임없이 주고 받는 문자메시지는 하루 한 통의 편지의 양과 비견될 정도로 많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의 편지를 완벽히 대체하지는 못한다.

고미숙 선생의 인터뷰를 어느 동영상을 통해 우연찮게 본 적이 있었다. 옛날 옛적(?) 연애편지 얘기였다. 사랑타령만 하면 제대로된 연애편지가 아니라나, 거기엔 자신의 비전과 능력 등이 총체적으로 담기도록 연애편지를 써야했고, 연애편지를 잘 쓰는 사람들이 말도 잘하고 공부도 잘했다는 그런 얘기였는데, 어쨌든 중요한 것은 편지가 담아내었던 것은 이런 종류, 그러니까 지적이면서도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며, 길기도 하고 깊기도 한, 하고 싶었으나 얼굴 대면하고 말하지 못했던 말들을 편지는 고스란히 담아내 주었다.

편지는 일종의 거리감을 형성하고 있다. 누군가를 대면하지 못하고, 떨어져 있을 때에 편지는 그 거리를 넘어 의사소통의 기능을 담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편지의 거리가 편지의 속성을 다양하게 만들어 주었던 듯 하다. 얼굴 대면하고는 말하지 못했던, 닭살스런 말에서부터, 뼈아픈 말 등등, 못했던 말들, 자세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옆 한 이불 속에서 살면서도 뭔가 진중히 할 이야기가 있으면 편지를 쓰기도 하잖은가? 아무튼 편지가 가지는 이런 종류의 장점들을, 이 편지가 잊혀져 가는 지금 그 대체물들이 이어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선비, 그들이 자기 자신들에게 여러차례 편지를 썼다. 그것들을 엮은 것이 『아버지의 편지』다. 정민 선생이 그간 꾸준히 해왔던 고전 산문의 대중화 작업의 최근작 중 하나다. 그간의 작업들에 매우 만족하고 있던 차에, 이번 책에서 느끼는 만족은 좀더 색다른 종류의 것이다. 편지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날로 갹퍅해지는 세상 속에서 사라져가는 이런 편지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보편적인 아버지들의 엄격함과 자상함에서부터 팔불출스러운 우스움까지, 다채로움 재미와 감동을 느끼게 되었다.

편지에 대한 나의 추억은 위에서 따분하게 읊었기에 각설하고, 이 책이 담고 있는 아버지들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의 편지는 어려서 아버님을 여읜 나에겐 참 부럽고 안타깝게 하는 것들이다. 아들을 위해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쓰고 조언하며, 정성스레 편지를 써내려간 조선시대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내게도 있었다면, 아마도 내 삶은 지금보다는 나아지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런 의미에서 아버지의 상실은 비단 나뿐만은 아닌 것 같다. 현대 사회에서의 아버지는 아무래도 이 책에서의 아버지들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가부장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들에게, 혹은 자식에게 선경험자로서의 조언과 스승으로서의 훈계 등의 역할을 오늘날의 아버지가 감당하고 있느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의 아버지는 아들이 입시공부에 열중하기 위해 조용히 해야할 뿐, 그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존재일 뿐이고, 그 공부를 꾸준히 안정적으로 지속하게 만들어줄 돈 찍어내는 기계여야 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오늘날의 가족의 문제, 아버지의 문제를 고민하게 만든다. 오늘날 어떤 아버지가 자식에게 이런 편지를 쓸 수 있을까? 살기 위해 살아왔고, 자식들 키우기 위해 살아왔던 이 아버지들, 세상과의 경쟁에서 남과 싸워 이겨야할 강한 자식들로 키우기 위해 우리의 아버지들은 그저 기계적 역할만을 해올 뿐이었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아버지의 역할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아버지로 변질된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비단 가족, 아버지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회 전반이 갹퍅해 지는 현실에서 느긋한 편지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 돈을 잘 벌기 위해서 이러이러해라, 1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 절대로 남에게 지지 않기 위해 공부해라 등등, 이딴 소리 적어보내려고 편지를 쓴다면 미친짓이 아닐까? 여하튼 오늘날의 사회에서 편지는 괴상한 것이 되어 버렸다.

수도 없이 날아다니는 그 문자메시지 속에는 다만 공허하고 일회적인 것 뿐이다. 아들에 대한, 연인에 대한, 부모님에 대한, 친구에 대한,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깊고 넓은 이야기들이 사라져버리고, 일회적이고 상투적인 것들만 남아 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짧막한 대화들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쯤해서는 예전의 우정국이 사라지고 우체국이 된 것이 이해되기도 하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이를 본받아 우리도 다시 이 편지를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전에 좋아하는 후배와 크리스마스 겸 연말연시에 카드보내기를 해보자고 몇 차례 보낸적이 있었더랬다. 그것도 잊혀져가는 아름다운 것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 생일을 맞아서 얼마전에 후배놈들에게 생일 축하 메시지를 손수 적은 카드도 받아보았다. 이런 것들이 사라지는 요즘, 괜히 막막하고 따분하고 냉냉한 세상이라고 느끼는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니지 않을까? 모든 잊혀져 가는 것들을 되살릴 필요도 능력도 없겠지만, 이런 편지쓰기 만큼만은 되살리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쓰다보니 책 얘기를 많이 못했다. 내가 이 책에서 또한 주목한 것은 이래저래 웃긴 대목들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버지들은 다를 바가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버지들의 엄중함과 자야로움, 그리고 귀엽기까지한 모습들이 마구마구 떠올랐다. 몇 대목만 정리해 보자.

"동접 중에 불행히 놀이로 사람을 꾀어 그르쳐서 무리를 어그러뜨리는 자가 있더라도, 절대 그들 무리에 빠져서 휩쓸려 한통속이 되어서는 안 된다."(31쪽)

이황이 아들 준에게 보낸 답장의 한 대목이다. 나쁜 친구들하고 어울리지 말라는 내용이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바 없구나 하기도 하면서, 요즘 유난히 설레발치고 다니는 엄마들의 모습까지는 아닌 듯 싶어진다. 친구 아빠의 직장에서부터, 그 집 살림살이까지 다 따져서 놀애 안 놀애 정해지는 요즘의 것과는 아무래도 다른 종류의 친구사귐에 대한 조언일 것이다.

"조정의 잘잘못은 비록 말할 만한 것이 있더라도 진실로 마땅히 깊이 생각해서 매번 어쩔 수 없는 뒤에라야 말하도록 해라. … 어찌 입에서 나가기만 하면 문득 많은 세상일에 얽혀들면서도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핑계대는 게냐?"(149쪽)

박세당의 편지다. 아들이 앞뒤 안 재고 떠들고 다며 별별 문제들을 많이 일으켰나 보다. 그래서 일언지하에 말조심하고 훈계다. 이 말조심을 요즘의 위정자들에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은 나 뿐일까?

 "몹시 기다리던 차에 일을 맡긴 하인이 왔다. 편지 보고서 새아기가 무사히 해산한 것을 알았다. 또 사내아이를 낳았다니 기쁘고 다행스럽다. 나는 이미 늙었는데 네 형들이 잇달아 요절하는 화를 당하고 보니, 자손이 고단한 것을 늘 상심하고 아파했었다. 이제 이 아이를 얻었으니 만금을 얻은 것만 같구나. 새로 낳은 아이 이름은 '다손(多孫)'이라 하는 것이 좋겠다."(157쪽)

박세당의 또다른 편지다. 할아버지가 된 기쁨이 가득 담겼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들이 그토록 말조심 하라고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세상을 먼저 떴다. 그런 안타까움에서 일까? 귀하게 얻은 손자의 이름을 다손이라고 지어준다.

"조밥과 찬 짠지를 먹지만 평소처럼 편안하니, 너희는 절대로 내 걱정은 하지 마라."(233쪽)

"뱃속에 횟병 증세가 몹시 고약하여 통증을 없애고 싶구나. 예전에 기록을 보니 후추를 꿀에 버무려 알약을 만들 수 있다고 하더구나. 대두도 수십 알쯤 가져왔으면 좋겠다. 내 건강은 신경 쓸 것 없다."(238쪽)

박제가의 편지다. 이 대목들을 읽다가 박장대소했다. 무득 얼마전의 CF가 떠올랐다. "아들아~"로 시작해서, "아무것도 필요없다"하는 어떤 노부부가 나와서 웃음을 주었던 모 기업의 CF 말이다. 그 CF 시리즈를 보는 듯하다. 말하자면 "아들아~" CF의 조선시대 버전인 셈이다. 조밥과찬 짠지를 먹지만 괜찮다, 걱정마라, 하면 아들이 괜찮구나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 하겠는가? 애처롭기도 하고 재밌기도 한 대목이다.

무엇보다 압권은 박지원의 늙으막 시절의 편지다.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해보면, 박지원은 애교덩어리, 귀여움 덩어리가 아닐까 싶다.

"재선(在先) 박제가의 집에 있는, 우리나라로 건너온 중국 사람의 시필(詩筆) 몇 첩을 빌려 볼 수만 있다면 마땅히 요 며칠 사이의 답답증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 같구나. 하지만 그 인간이 꼴 같지 않고 무도하니, 어찌 지극한 보물을 잠시인들 손에서 내놓겠느냐? 그렇다 하더라도 모름지기 이를 빌려 오도록 해라."(196~7쪽)

꼴 같지 않고 무도한 인간이 박제가? 절친했던 박제가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렇다면서도 아들에게 그래도 빌려 오도록 하라는 건 또 뭔지! 게다가 호랑이 같이 생긴 박지원이 "고추장을 작은 단지로 하나 보낸다. 사랑에 놓아두고 밥 먹을 때마다 먹으면 좋겠다. 이것은 내가 손수 담근 것인데, 아직 잘 익지는 않았다."고 한 대목에서는 도무지 이 사람을 감잡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

박지원도 할아버지가 됐다. 할아버지가 됐다는 소식에 기뻐서 "응애응애 하는 소리가 종이 위에 가득하"여 일도 제대로 못하고 있잖은가? 손자의 삼칠일을 맞아서 "2백여 명의 관속들에게 아침에 국과 밥을 먹였더니 좋아하며 떠들썩하게 축하해주"더란다. 게다가 "나도 경술년에 순조 임금께서 막 태어나셨을 때 산해진미로 기쁨에 넘쳐 즐거워하면서 억조창생을 고무케 하시던 성심(聖心)을 가늠하겠더니라"며 그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이런 손자가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아이처럼 투정을 부린다. "이마는 넓고 솟았으며 정수리는 평평하고 둥근지, 어째서 하나하나 적어 보이지 않는 게냐? 답답하구나."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그럴까 이해도 하지만, 다음 대목에서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전후해서 보낸 소고기볶음은 잘 받아서 아침저녁 찬거리로 했느냐? 어째서 한 번도 좋다는 뜻을 보여주지 않느냐? 답답하고 답답하구나. 나는 육포나 장조림 등의 반찬보다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고추장도 내가 손수 만든 것이니, 맛이 어떤지 자세히 알려다오."(207쪽)

박지원에게는 요즘 나오는 휴대폰을 하나 사줘야 할 성 싶다. 요즘 애들처럼 수시로 문자를 날리면서 왜 내 문자 씹냐고 한바탕 야단을 칠 것만 같다. 박지원이 손수 요리를 해서 자식들을 챙기는 모습도 이채롭지만, 보낸 음식을 잘 먹었는지, 맛은 어땠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고 투정부리는 모습은 아이같기만 해서 참 즐겁다.

한 가지 발견한 사실은 박지원은 요즘의 이모티콘의 원조격이란 사실이다. 번역문에서 "껄껄"로 표현했고, 원문은 "好笑好笑"로 되어 있다. 요즘으로 치면 "ㅎㅎ" 나 "ㅋㅋ"인 셈이다. 아무래도 이 사람, 핸드폰 세대하고 제대로 통하지 싶다.

이 외에도 많은 대목들에서 재미와 감동을 함께 느낀다. 공부 방법이나 훈계 등이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곳곳에 감춰진 이런 감성어린 아버지의 모습들이 아름답다. 따분할 것만 같았던 조선시대 아버지들의 편지가, 이렇게 즐겁고 기쁜 감동을 줄 수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이제부터 우리도 이를 본받아서 아버지에게, 혹은 아들에게, 때론 부인에게, 형제자매에게, 그도 아니면, 아무에게나, 편지를 써보자. 삶과 사회가 한층 밝아지지 않을까? 밑져야 본전이나 손해 볼 것은 없잖은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08-11-30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안 봐서 모르지만 오랜만에 멜기님의 리뷰 재밌게 봤어요~ ^^
박지원 그양반 참 솔직한 사람이네요~ ㅋㅋ

파란여우 2008-12-01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이래서 서평을 나중에 쓰면 꼭 손해보는 듯한 느낌이 든단 말에요.
근데 멜님!(이렇게 부르니까 어째 멜랑꼬리한 ㅎㅎ) 제 글에 다음블로거 추천 했어요?
최신 추천자가 멜기세덱이므로 심증이 강하게 파도처럼 밀려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