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삼국지 1 - 한중일 삼국의 바둑 전쟁사 바둑 삼국지 1
김종서 지음, 김선희 그림, 박기홍 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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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생활 3년에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어느 서당개는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기도 하고, 또 어떤 개는 같은 3년에 라면을 끓인다고도 하는데, 나의 이 3년이 나에게 이런 경험을 하게끔 할 줄은 미처 몰랐다. 사실은 이 알라딘 서재와는 직접적 상관성은 없지만, 어차피 이런 경험을 하게 된 경위의 바탕엔 이 서재가 있기때문에, 이런 경험, 곧 만화책 읽고 리뷰쓰는 생각지 못한 경험을 하게된 것은, 그야말로 서재 생활 3년이 준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만화를 거의 즐기기 않는 나로서는 언제 이야기한 바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중고등학교 때 필독서였던 강백호가 나왔던 만화 『슬램 덩크』나 손오공 나왔던 만화 『드래곤 볼』도 읽지 않은 만화와는 담싼 사람이었고 사람이며 사람일 것이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란 얘기다. 그런데 이전까지 내가 읽었던 유일무이한 만화가 있었으니, 군대있던 시절에 아이큐점픈가 뭔가에 연재되었던 일본 만화 『고스트 바둑왕』이 바로 그것이다. 이 만화는 많이들 아시겠지만, 히카루라는 한 소년이 어떨결에 바둑 귀신(사이)에 들려 초절정 바둑고수(프로기사)가 되어간다는 성장만화적 얘기를 담고 있다. 귀염고 깜찍한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유쾌하게 들려(보여)주는 바둑이야기가 무척 재미있었고 흥미로웠다. 이 만화를 통해 침체되어가던 일본 바둑계가 활력을 얻은 바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인기를 끌었던, 개인적으로는 참 잘된 만화로 생각된다.

그런데, 지금와서는 이렇게 말해야 하겠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만화는 유이무삼하다고. 앞으로도 그럴가능성이 농후하다고.(권수로만 말한다면, 『고스트 바둑왕』의 경우 단행본으로도 읽은 바 있는데, 그게 20권 완결인가 그렇다. 이걸 그냥 하나로 치자.) 그 추가된 만화가 이 책 『바둑 삼국지 - 한 중 일 삼국 반상의 전쟁』이다. 현재 1, 2권(1권은 "전쟁의 시작", 2권은 "영웅의 탄생"이다.)이 나와있는데 이번에 이 두 권을 읽게 된 것이다. 출간 소식은 익히 알고 있었고, 전에 이 만화가 파란에 연재될 당시 모 카페에 누군가 가끔 옮겨와 몇 번 본 적이 있기는 하다. 단행본으로 1, 2권이 나와서 사 볼까 하다가, 리더스가이드 사이트에서 리뷰도서로 선정되었기에 거기에 신청해서 공짜로 받아 읽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생전 처음 만화 리뷰도 쓰게 된 것이고. 어쨌거나 만화는 안 읽는(거의 싫어하는) 내가 만화 읽고 리뷰 쓸 줄은 3년 전엔 미처 몰랐더랬다.

사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만화는 사실 만화여서라기보다는 바둑이야기이기 때문에 읽게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나는 다만 만화를 본 것이 아니라 바둑이야기를 읽은 것이 되는 셈이다. 조금 더 달리 말하면, 이전의 그 만화가 만약 만화가 아닌 형식의 활자본이나 영화로 나왔더라도 나는 봤을 거란 얘기고, 이번의 이 『바둑 삼국지』도 그러했을 거란 얘기다. 완전히 달리 말하면, 그러니까 나는 여전히 만화는 싫어하지만, 바둑을 좋아한다는 그런 얘기다.

바둑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어언 20년이 좀 못 된 것 같다.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때던가 중학교 때 TV에서 보았던 프로바둑기사의 대국장면이 꽤 인상 깊었고, 이후 대학에 와서 바둑을 거반 독학해서 현재 초보수준은 면하게 됐다.(이 얘기는 예전에 이창호 관련 책 리뷰에 써놓았던 것 같다.) 이후로 바둑을 너무 좋아해서 바둑 카페나 동호회도 가입하고, 바둑리그 등도 쫓아다니면서 바둑을 즐겼고, 즐기고 있으며, 즐길 것이다.

바둑을 즐기면서 프로기사들을 알게되고, 바둑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듣고 하면서, 꽤나 흥미로웠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 최강, 절대 최강으로 프로바둑기사 이창호가 근 10여년을 위풍당당 굴림하고 있었고,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 등이 한국바둑, 나아가 세계바둑계에서 승승장구하며, 한국바둑이 세계 최강의 면모를 지켜오던 때이다. 이창호가 조금은 주춤하지만, 여전히 절대 고수로서(중국에서는 여전히 신적인 존재로 여긴다.) 당당하고, 신흥 세계 최강의 등극을 노리는 이세돌, 초일류기사로 도약한 박영훈, 최철한 등이 여전히 한국바둑의 최강라인을 구성하고 있다. 조금이나마 바둑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세계 바둑 최강 한국의 이런 면모들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한국의 프로기사들이 그간 꾸준히 물리쳐 왔던 중국과 일본의 기사들에 대해 알게 되고, 나아가 동양 삼국(한, 중 일)의 바둑 혈전이 어떻게 펼쳐 왔는지를 간간히 듣게 된다. 그러면서 한국 바둑이 현재의 세계 최강을 이룬 것은 근 30년이 못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 전 타계하신 고 조남철 9단과 한국기원 초창기에 활약했던 원로 기사들의 얘기에 이르고, 그때 당시 현대 바둑의 기틀을 다져오며 500년 이상 동양 바둑계를 주름 잡았던 일본의 전설적 기사들의 이야기로 연결된다. 혼인보 슈샤쿠는 여전히 전설이며, 가깝게는 다케미야, 후지사와, 조치훈 등의 활약상 들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게다가 현대바둑계의 독보적 천재 오청원의 무소불위 활약상 등은 바둑을 더욱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아무튼 이런 바둑사의 전설적 기사들을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각설하고, 이 만화 『바둑 삼국지』는 현재까지 근 30년을 한국이 세계 최강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벌어졌던 한, 중, 일의 바둑 각축이 어떻게 펼쳐졌는지 흥미롭게 그려내고자 한다. 그 시작, 곧 바둑 "전쟁의 시작"에 조훈현이라는 백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기사의 이야기가 놓인다. 그야말로 조훈현은 바둑황제로서 세계 최강 한국 바둑을 만든 태조격이다. 조훈현이 1989년 제1회 잉창치배에서 수많은 어려움을 뒤로하고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한국은 세계 바둑 최강으로서 발동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대회는 중국 출신의 대만 부호 잉창기씨가 거금 40만 달러를 우승 상금으로 내걸며, 4년마다 한 번씩 개최하는 가히 바둑 올림픽이라 할 수 있다. 당시로서는 최고의 상금이 걸리 세계 최대의 국제바둑대회였다.(여전히 그러할 것이다.) 여기에 조훈현은 혈혈단신으로 출전한다. 당시로서 한국 바둑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열세였고, 중일 슈퍼대항전에서 녜웨이핑이 연전연승하며 중국 바둑계에 희망으로 떠오르던 상황에서, 이 대회를 통해 중국이 세계 바둑계의 최강으로 일본을 확실하게 눌러버리고자 하는 야심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던 차였다. 따라서 주최측에서는 일본을 꺾는 것에 관심을 가졌을 뿐, 형식상 국제대회임을 갖추기 위해 한국에서는 단 1명만 참여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나마 조훈현이 국제무대에서 이름을 나타내고 있었기에 형식적으로 출전 자격을 주게 된 것이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조훈현이 연전연승을 하며, 결승에 오르게 될지. 그렇더라도, 결승에서는 중국 바둑계의 희망 녜웨이핑이 버티고 있었다. 조훈현이 거기까지만일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조훈현은 아니었다. 악전고투 끝에 제5국까지 가며 네웨이핑을 누르고 초대 바둑 올림픽의 우승자로 등극하게 된다. 우승하기까지 주최측의 편파적인 대회 운영은 가히 몰상식적이었다. 초읽기에서 조훈현에게 유달리 불리하게 적용한다던지, 대회 장소 및 일정을 무리하게 잡는다던지 하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다. 아무튼 그런 가운데서 우승한 조훈현은 일약 한국 사회에서 주목을 받으며, 우승 후 입국하면서 카퍼레이드를 한 유일무이한 한국 프로 기사가 된다. 그로 인해 한국 바둑이 붐을 이루고, 최강의 면모를 유지하기 위한 비밀병기들이 탄생하게 된다.

(2권 리뷰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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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목과 알까기 밖에 못하는 나, 바둑전쟁에 빠지다!!
    from Save the Earth! Fire Blog! 2008-11-29 19:21 
    바둑 삼국지 카테고리 만화 지은이 박기홍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년) 상세보기 오목과 알까기 밖에 못하는 나, 바둑전쟁에 빠지다!! 먼지 쌓인 바둑판과 바둑알을 찬물에 씻어내고... 지난 화요일(25일) 소란스런 겨울숲을 산책하며 감귤빛으로 물들어가는 인천 앞바다가 굽어보이는 철마산 등줄기에 올랐다가, 인천지방공무원연수원 쪽으로 내려갔습니다. 다 읽은 책을 연구원 내 도서실에 반납하고 새로 읽을거리를 빌릴 생각으로 집을 나선터라, 철마산에서 연수..
 
 
순오기 2008-05-15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러니까 멜기님은 만화를 본게 아니고 바둑을 즐겼다는 얘기군요.^^ 좋아요!
아래서 두번째 문단 '당시로서 한국 바둑은 일본에 비해 열쇠(?)였고'...열세겠죠?

멜기세덱 2008-05-15 12:08   좋아요 0 | URL
ㅋㅋ, 민망해라....핑계라면, 새벽에 잠안자고 쓰다보니...ㅋㅋㅋㅋ

readersu 2008-05-15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2권 리뷰까지;;;

멜기세덱 2008-05-15 12:10   좋아요 0 | URL
언제 쓸런지는 몰라요....ㅋㅋㅋ
 
대한민국 욕망공화국 - 어느 청년백수의 날카로운 사회비평서
신승철 지음 / 해피스토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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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나 '욕망'은 있다. 백수가 아니라 흑수(黑手)를 가진 저 아프리카 오지의 어느 청년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불특정 다수 혹은 개인, 즉 인간을 지칭하여 '(어느) 누구'라 하지만, 제시된 첫문장의 그 '(어느) 누구' 속에는 단지 인간만을 지칭하진 않는다. 달리 말하면 '모든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언어학적으로 '욕망'한다는 것은 주체는 유정명사(有情名詞)이어야 할 것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무정명사까지도 '욕망'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을 '욕망공화국'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대한민국 욕망공화국』속의 '욕망'은 그 단어의 사전적 정의 및 철학적 정의(혹은 구분)를 언어학적, 사회과학적으로 철저히 구분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할 때, 여기서의 '욕망'은 '(본능적) 욕구'에서부터 '의욕' 혹은 '욕심'까지도 포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욕망'은 전천후에서 발동하고 있는 종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떠한 식물이라도 그 자체로 성장과 번식을 위해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이 또한 욕망(욕구)라고 할 때에, "모든 것은 '욕망'한다"는 단언은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이 단언을 증명하자고 나서는 것은 아니다. 또한 욕망의 정의가 어떻고, 그 사전적 의미가 어떠하며, 그 용법이 어떻게 제한되어 사용되어야 할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의 저자 신승철도 그렇다고 보여진다. "이 책은 즐기라고 있는 것이지 연구하라고 있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가 정의하는 욕망이라는 것은 간단히 "현 사회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생명에너지"다. 살고자 하는 모든 에너지로서의 '욕망' 속에는 세상의 무수히 많은 것들이 포함될 수 있는 광범위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는 섣불리 분류하고 구분하자고 나서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수 있다.

어쨌든 그러한 욕망이 어느 누구에게나 있고, 어떤 사회에서건 존재한다고 할 때, 굳이 대한민국이 '욕망공화국'입네 선언하고 자시고 할 필요성은 없어보인다. 그러나 저자가 애써 그렇게 부르짖는 이유는 이 "자연스러운 생명에너지"로서의 욕망이 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종종 '유죄'가 되고 억압되며 통제되고 있다는 현실 분석, 현실 인식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회의 보수, 기득권층은 이전에 보이지 않던(실은 감추어져 왔던) 새로운(새로이 발견되는) 욕망의 표출을 질타하고 억압하려고 하는 것은 저자의 별다른 분석이 아니더라도 익히 잘 알고 있는 것이잖은가? 그러나 저자의 이런 선언이 그렇게까지 식상치 않은 것은 지금까지 이러한 욕망해방을 떳떳이 요구한 이들이 많지 않다는 반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담고 있는 것은 짤막짤막한 칼럼형식의 글이다. 이러한 각각의 글들은 나름대로 다양한 "대한민국의 욕망의 모습"들을 담고 있다. 그러한 욕망들이 어떻게 발현되고 있고, 저자마에게 추구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며, 이를 느슨한 차원에서 분석하고, 거기에 가해지는 사회적 억제까지도 설명하고자 노력한다. 부제에서 제시한 "날카로운 사회비평서"로서 기능하기에는 다소간 부족함을 보이는 '느슨함'이 있다. 백수의 삶속에 펼쳐지는 소소한 욕망들, 어린 조카를 통해 보는 연예인에 대한 애정 등에서부터 섹스, 휴대폰, 홈쇼핑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보이는 불특정 개인(혹은 다수)가 가지는 욕망의 모습들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대다수가 저자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것들이다. 뿐만아니라 사회적 문제들, 그러니까 종교와 정치, 현 정권의 욕망 구조도 분석해 내고 있다.(다소 부족한 면(일단 양적으로)이 있지만)

이러한 저자의 욕망 분석이 보여주는 장점은 일단 저자의 체험에서부터 오는 솔직함이다. 개인적 자위, 폰섹스, 화상채팅, 일종의 동성애 경험 등의 다소간 지나쳐 보이는 솔직함은 씁쓸한 웃음까지 짓게도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는 이 책의 장점으로 꼽을 만하다. 용기가 가상하다고나 할까? 저자의 경험이 이 대한민국이란 사회의 다양한, 수많은 저마다의 욕망을 섭렵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 일부분 만이라도 개인의 솔직한 고백(?)을 들으면서 재미와 함께 공감을 형성할 수 있다고 본다.(적어도 나는) 그로부터 조카의 연예인에 대한 (기성세대가 볼 때는) 맹목적 욕망에 대한 억압적 기성세대의 태도에서 보듯이, 이 사회가 어떻게 개인의 그 자연스러운 욕망들을 억압하고 구속하는지, 나아가 (동성애, 대마초, 성매매 등을) 범죄시하는지를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은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문제는 이러한 공감이나 수긍은, 이 책이 제시한 '욕망공화국'으로서의 선언적 의미에 값하기에는 부족함이 따르는 것이라는 데에 있다. 이 책이 아쉬운 대목이다. 이 책이 아니었더라도 이 정도의 공감과 수긍은 우리 사회에 있어오지 않았던가? 그런 점에서 이 책이 가지는 보다 새로운 의미의 '욕망해방'의 선포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대한민국은 이전부터 욕망이 지배해온 나라였고, 전세계 어느 나라나 사회가 다 그러했고,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 새로운, 즉 저자가 말하는 "자연스러운 생명에너지"로서의 욕망의 해방, 곧 욕망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보다 정교하고 철저한 욕망의 분석, 욕망 구조의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욕망을 순환시키는 경제, 리비도 욕망경제에 대한 대안적 연구가 자본주의의 시장경제를 넘어서는 경로를 제시해 줄 것이라는 점에서 현재의 욕망 코드는 탈코드화를 위한 새로운 경로를 제시해주는 길"이라는 저자의 설명처럼 이 책이 그 "현재의 욕망 코드"를 부분적으로는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탈코드화를 위한 새로운 경로를 제시"하고 있지는 못하며, 이를 이 책을 읽은 독자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넓은 강을 건너야만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가 보았던 그 "욕망해방운동의 미래"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저자가 친절히 안내해 준 "라이히의 『성해방』과 가따리의 『욕망과 혁명』이라는 책을" 어쩔 수 없이 읽어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이 책들을 "꼴리는 대로" 읽기에는 부담 백만배다.(라이히의 책과 가타리의 책을 검색해 보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책은 대부분 절판 혹은 품절이다. 동명의 책 제목으로는 검색도 어렵다. 자주 들어본 이름들인데, 이렇게 절판과 품절이 맹휘를 떨치는 것은 참 아쉬운 부분이다.) 어쨌든 이 책을 비교적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고, 간간히 웃을 수 있어 나쁘지 않았다. 저자가 보다 '날카로운' 욕망해방선언을 추후라도 해주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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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선거이야기 - 1948 제헌선거에서 2007 대선까지
서중석 지음 / 역사비평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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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선거는, 그래서 아주 흥미롭게 관전했던 선거는, 1987년의 대선이다. 왠지 모르게 나는 기호 1번 노태우가 당선될 거라고 예견했다. 87년에 나는 몇 살이었지? 10살이 안 됐을 나인데, 뭘 안다고 예견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 예상은 적중했다. 보통 사람처럼 얼굴 넙데데한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음을 자고 일어나 아침 먹던 자리에서 듣고 우쭐했던 기억이 있다. 이후로 나는 김대중이 대통령이 될 때까지 모든 대선에서 당선자를 적중했다. 그때까지 내게 선거권은 없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하면 천만다행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선거권을 행사한 건 2002년 대선이었던 것 같다. 1998년 지방선거 때 내게 투표권이 있었나 잘 모르겠고, 있었더라도 안 했을 가능성이 100%다. 2000년 국회의원 선거 때는 분명히 내게 투표권이 있었지만, 투표를 한 기억은 없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최초의 투표권 행사는 2002년 대통령 선거가 아니라 그 전에 있었던 지방선거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군대에서 착취당하고 있었고 거기서는 거의 강제였기 때문이다. 하여간 기억하기로는, 그러니까 흥미롭게 관심갖고 투표하기로는 2002 대선이 처음이다.

그때 내가 노무현을 뽑았는지는 반신반의다. 이회창은 확실히 안 뽑았다. 그런데, 이 때 처음으로, 그러니까 내가 투표권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의 예측이 최초로 빗나갔다. 이회창이 되는 줄 알았는데, 노무현이 되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 결과로는 사실 나는 뭐가 뭔지 몰랐다. 아 지금 생각해보니 정몽준을 뽑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때 나는 이 사람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것이 영 맘에 차진 않았다. 사실 그 사람이 피파 회장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고, 괜히 왜 대통령 하겠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어쨌든 안 될 건 뻔한 일이고, 이왕 나왔으니, 표를 좀 주면 피파 회장 되는데 나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더랬다. 그야말로 뻘 생각, 뻘 짓이다.(군인은 선거일 전 부재자 투표를 한다. 그래서 내가 투표할 당시에는 여전히 정몽준은 후보였고, 사퇴 전이었다. 그래서 기억을 안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모르지만, 노무현을 뽑았는지 정몽준을 뽑았는지, 영 모르겠다.)

그 후로부터, 제대해서는 거의 모든 선거에 참여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 예측은 곧잘 맞았던 것 같은데, 내가 투표한 후보가 당선 된 일은 전혀 없었다. 이거도 어찌 보면 뻘짓인데, 좋게 말하면 이상과 현실은 괴리라고 할까? 그런데 이 뻘 짓은, 앞서의 뻘 짓, 그러니까 2002년 대선에 나온 정몽준이 피파 회장 되는데 좀 도움이라도 줄까하고 그에게 아까운 내 한 표를 헌신할까 했던 그 생각의 뻘 짓과는 전혀 다른 뻘 짓, 혹은 현실과 괴리된 이상이었다.

민주노동당을, 그도 아니면, 보수꼴통 아닌 사람에게 전적으로 투표를 해왔다. 그러나 그들이 당선된 일은 전무하다. 이 뻘 짓이 진짜 뻘 짓이 아니었다는 미약한 증거가 2004년에 나타났었다. 민노당의 국회진출 말이다. 그래서 나는 계속적으로 뻘짓을 해왔고, 요 전에도 뻘짓을 했더랬다. 4년 후에도 뻘 짓을 할 예정이다.

진보신당이 원내진출에 실패했다. 사상 처음으로 한 정당에 당원으로 가입하고, 알게 모르게 선거운동도 나름 하고 다녔다. 좌측 상단을 보면 저 로고를 아직도 달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내가 사는 지역구에는 후보도 안 낸 정당이 진보신당이다. 비례대표에게나 투표했을 뿐이다. 3%를 못 넘겨서 비례대표 하나 못 얻었다. 이런, 여전히 뻘짓이다. 그러나 나는 4년 후에도 이 뻘짓을 할 예정이다. 왜일까? 앞서 뻘짓이 뻘짓이 아닐 거라는 미약한 증거를 보았듯이, 어쩌면 나는 그 마약과도 같은 극소량의 마취제와 취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그게 중독성 짙은 마약이 아니라, 양약이고, 적절한 사고이고, 희망한 행동이란 생각, 아니 그 증거를 최근에야 굳혔다. 어떻게? 이 책 서중석의 『대한민국 선거이야기』를 보고 말이다. 이 책은 "1948 제헌선거에서 2007 대선까지"의 선거 앞다마 뒷다마 이야기들을 강연 형식으로 쉽고 재미나게 엮어내고 있다. 옆집 할아버지가 본인 살아온 얘기, 보아온 얘기, 진반 구라반 엮어가며 술술술 토해내듯이, 저자 서중석은 그렇게 지난 선거 이야기들을 쉼없이 토해낸다. 선거가, 그때 그때 누가누가 될 지 찍기놀이의 재미만이 아니라, 그 자체에서 어떤 슬프고 비참하고, 때론 우스꽝스럽고, 때론 감동적이기까지한 그런 재미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거를 나처럼 뻘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뻘짓이라도 하자고 하고, 50%는 뻘짓을 왜하냐고 한다. 그리고 당연 안한다. 선거를 한 놈이나 안 한 놈이다 매한가지로 선거를 비판하고 별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실망한다. 과연 그런가? 과연 그랬다. 경우에 따라서 다르긴 하지만. 그런데 서중석은 꼭 그렇지마는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선거는 참으로 비관적인 문제점을 많이 지니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한국 사회에서 선거가 굉장히 역동적인 역할을 했던 사실을 부인하기가 어렵다는 겁니다"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이 책을 읽어보니 과연 그랬다.

해방 직후 1948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보통선거가 실시되고, 제헌국회가 설립된다. 보통선거 말이 쉽지, 우리나라가 실시한 이 보통선거는 다른 당시 선진국에 비해 가히 비약적으로 빠른 것이다. 알고 보면 참 혁명적인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후 선거에서 간간히 실망한다. 번번이 이승만 할아버지가 대통령이 되는 걸 보면 그렇다. 그런데, 서중석은 이렇게 말한다. "대통령 직선제도 이승만이 영구집권하기 위한 일환으로 도입했지만, 그것이 두 번째 직선제 선거인 1956년 5 · 15선거에서부터 그의 발목을 잡았고, 1960년 3 · 15선거로 파멸하고 말거든요. 마치 한 편의 그리스 비극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리스 비극보다 짜증나는 일이지만, 참 아이러니컬하기도 하고 묘하다고도 생각된다. 선거가 이승만을 결국 끌어내린 것이라고, 서중석은 이야기 한다. 선거의 힘.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그로부터 군부독재가 이 세상을 수십년 간 지배하는 악몽이 시작되지만, 결국 선거가, 그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부분에서, 박정희의 죽음을 불러오고, 전두환의 장기집권 야심을 무마시킨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런데, 그게 너무 지지부진, 느리게만 보여서, 문제이기도 하고, 그 영향력을 알아보기가 어렵기도 하다. 좀 빠른 혁명이었다면 수많은 목숨은 살아남지 않았을까? 아니다. 빠른 혁명은 더많은 희생을 요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근데 이건 잘 모르겠다.

여하튼, 이후 87년 대선은 내가 적중한 선거이지만, 지금의 내 생각으로는, 아니 일반적으로는 그 결과는 불행이었다. 이후 김영삼의 선택과 그를 선택한 우리의 선택은 선거를 믿을 수 없게 만들었고, 그나마 정권교체를 이뤘다는 의의는 있지만, 우리를 여전히 힘들게한 김대중, 감동의 주인공이 되어 반짝했지만, 결국 반짝으로 끝나버린 노무현. 이런 과정들, 그러니까 선거를 통한 변화들을 보면 차츰, 느리게,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이라고도 보여진다. 그러나 이명박이 되어서는 그래, 좀 후퇴했다고 치자. 그런데 가슴아프게도 서중석은 "6월 민주항쟁 이후 민주주의는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진전되고 있었고,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은 혼탁함이나 타락상이 그다지 보이지 않았던 깨끗한 선거였습니다. 정책대결, TV 토론이나 유권자의 자발적 참가, 국민경선대회 등 신선한 선거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가 일정한 궤도에 오른 감을 주었는데, 불과 몇 년도 안 되어 여러 가지 면에서 후퇴했을 뿐만 아니라 퇴행적인 면도 노정되니 마음이 가볍지 않습니다. 역사가 일직선으로 진보하는 것이 아니고 나선형적 변화를 갖는다고 배웠지만, 너무나 빨리 온 후퇴요 퇴행이었습니다."라고 토로한다. 너무 빨리 온 퇴행이라고 말이다.

그러서 좀 나도 가슴아프지만, "1967년 선거로부터 4년 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는 신선한 바람이 부는 등 선거사에서 각별히 기억할 만한 활기와 유권자 의식을 보여주었습니다. 앞으로 있을 선거는 2007년 대통령 선거처럼 재미었는 무기력한 선거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덧붙여 2008 총선처럼 더 무기력한 선거가 되어서도 안 되겠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기대와 희망을 품고 있는, 선거를 통해 희망을 만들어 가고자 하는 서중석을 말을 듣고, 그래 나도 앞으로 이 뻘짓아닌 뻘짓을 계속하리라고 다짐해 본다. 여하튼 아직 선거는 뻘짓이다. 아니 뻘짓 아닌 뻘짓이다. 그런데, 나중에, 어쩌면 아주 나중에, 내가 여전히 젊을 적에, 혹은 늙으막히, 그도 아니면 죽은 후에라도, 나 또는 나 아닌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선거는 뻘짓이 아니었어. 그건 혁명이었어. 그래 선거가 혁명이 되게끔, 나는 뻘짓을 계속하자. 아주 느르고 더딘 혁명일지라도. 아 근데, 4년 후 진보신당, 혹은 하나된 진보세력이 조금은 활개를 폈으면 좋겠다는 좀 빠른 혁명의 메세지라도 있었으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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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8-04-26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처음 치른 선거는 시의원/구의원 등등 뽑는 선거였는데...한번에 6명을 뽑아야 하는데 누가 누군지도 몰라서 그냥 당을 보고 찍었던 기억이 나네요 ㅎㅎ 작년 대선은 선거안했고-_- 이번 총선은.....거의 死票가 되어버렸지만 ㅎㅎ

그래도 이 책 읽으면서 무언가 희망이 생기기도 했어요 전. 17대 국회는 그 탄핵파동때문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잖아요 ㅎㅎㅎ 적어도 우리 MB님께서 딱 이대로 해주시면 5년뒤엔 뭔가 달라지지 않겠어요? ㅋㅋ

2008-04-27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8-04-27 23:06   좋아요 0 | URL
2005년쯤에 선거연령이 19세가 되었으니까요(그 전에는 20세?)
아마도 1998년 6월 4일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첫 선거였을 것 같습니다.

2008-04-28 0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을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김효순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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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책을 읽어오면서 간간히 드는 의문은, 도대체 이게 무슨 소용인가 하는 것이다. 소용이 없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를 테면, 공허한 시간을 때운다거나 지적 허영심을 채운다거나 혹은 폼을 잡는다거나, 이런 잡다한 소용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이런 소용들에 의해 책을 읽고도 남는 의문은 "남는 게 없다"는 아이러니다. 책을 읽어도 남는 게 없다는 의미에서 이것은 읽었지만 읽지 않은 것, 결국 비독서에 포함될 터이다. 자랑같지만 나도 지금까지 적지 않은 책을 읽어 왔는데, 솔직히 남는 게 얼마 없다. 공허한 시간을 채우기 위해 읽어왔지만, 결국 공허한 것은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그런 의문은 때때로 책 읽기를 멈추게 하고, 한번씩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무소용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만 같아서, 다시 이렇게 물어본다. 그럼 '어떻게' 읽어야 그나마 남는 무엇을 건져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어떻게' 책을 읽을까는 고민하면서 그 어떻게를 알려주는 '책'을 찾아다니는 역설적 행동을 해보기도 했다.

이른 바 '메타 독서'에 관한 책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내가 찾아 본 많은 것들 중에 그나마 도움을 받았던 것이 박민영의 『책 읽는 책』이었다. 이 책은 거의 고전과도 같은 『독서의 기술』이란 책의 내용을 보다 현대적이면서 실용적이고 실생활에 유용하게 재적용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박민영의 책을 읽으면서 잠시나마 책 읽기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거기서 주로 이야기 하는 것은 '멀티 독서'란 개념이다.(그 책을 찾기도 귀찮고 해서 감만으로 '멀티 독서'라고 했는데, 정확한 용어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박민영이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니까 한 권의 책을 읽고서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 책의 주제나 내용, 소재, 작가에 연관지어 같은 주제나 소재를 다룬 책이나, 그 작가의 다른 책들을 섭렵하는 방법이 바로 멀티 독서다. 그러면서 그 주제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고, 독서의 폭과 깊이를 확장시켜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독서의 기술』에서 말하는 방법과 그다지 다르지는 않은데, 박민영의 책에서는 보다 실전적으로 쉽게 그에 대한 방법을 안내해 주고 있다고 해야겠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드는 회의는 그러한 방법도 (사실 그런 독서 자체가 그리 쉬운 일도 아니고) 그리 효과적이지는 못하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바로는.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책들을 연이어 읽더라도, 그 주제에 대한 내 지식을 강화시키고 넓혀주는 것은 그 다양한 많은 책을 읽었다는 사실로부터 직접적으로 연유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왜 그런가를 고민해 봤는데, 답은 간단했다. 많은 책을 읽었지만, 그 어느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책을 좀더 '제대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죽 해오던 차에, 히라노 게이치로의 이 책 『책을 읽는 방법』을 읽게 됐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책을 읽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는데, 내가 첨언하면, 아마도 책을 '제대로' 읽는 방법을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어떻게? 히라노 게이치로의 대답은 비교적 간단했다. 천천히. '슬로 리딩'하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많은 책을 읽으려면 허영심을 버리고, 한 권이라도 뼈 속까지 쪽쪽 빨아 먹듯이 읽으라는 것이다. 이 생각의 연유 또한 간단하다. 세상에 쏟아지는 책들은 무수히 많고, 평생을 책에 빠져 살더라도, 그 많은 책들의 단 1%도 읽어내기 힘들다. 그렇다면, 단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책 한 권 속에는 글쓴이가 읽은 수십 수백 수천 권 분량의 책이 압축되어 담겨있기 때문에, 그 한 권을 제대로 읽으면 수십 수백 수천 권의 책을 읽은 것과도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는 허황돼 보이는 상상을 주장하고 있다.

내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주장을 허황돼 보인다고 말 한 데에는, 그가 주장하는 방법이 이미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독서의 이상적 방법을 우리는 초중고 국어 시간이나 독서 시간에 이미 다 잘 배운 바 있다. 요점정리 잘 돼서 국어 문제집에도 다 나와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른 바 '독서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겠다. 히라노 게이치로가 말하는 것도 전혀 특이한 것은 없고 우리가 다들 배웠던 독서의 방법이었다. 말하자면 히라노 게이치로는 니들이 배웠던 '독서의 정석'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수학에도 정석이 있다. 사실 정석(定石)은 바둑에서 유래한 말인데, 어떤 형태나 상황에서 흑백 간의 정해진 운석, 그리니까 일정한 수순에 따란 착수 방법을 말한다. 원리나 방법을 일컬을 때 흔히 정석이라고 하듯이 말이다. 내가 고등학교 때 정석이라는 수학책을 풀어본 적이 있었는데, 결국은 수학을 포기하게 됐다. 이유인 즉, 이 정석이란 놈을 풀면서는 시간도 많이 들고, 비효율적인 것 같고, 지루하고 답답하고, 미련해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원리, 원칙이라는 것이 얼핏보면 미련해 보이는 법. 독서의 정석을 말하는 이 책 『책을 읽는 방법』도 미련해 보이긴 마찬가진데, 히라노 게이치로는 당당하게 미련해지라고 말하는 듯 하다. 슬로우 슬로우, 느리게 느리게, 급하게 읽어 무엇하리. 저자 히라노 게이치로도 한때, 자신의 그런 느린 독서가 못내 걱정이었던 것 같다. 이 사람 저 사람 붙잡아 가며 물어봤더니, 다른 사람들도 사실은 자신과 다르지 않게 이런 느린 독서를 해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이렇게 당당히 말한다.

우린 사실, 적어도 나는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을 빨리 읽고 얼른 다른 책을 또 읽어야지,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책을 읽어야지 하는 분주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히라노 게이치로는 그건 되지도 않는 꿈이고 허상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남들도 다르지 않으니 걱정 말고 느리게 느리게, 그러면서 최대한 '제대로' 책을 읽으라고 내 어깨를 다독여 주고 있다.

이 책 『책을 읽는 방법』을 91쪽까지(제1부 '양에서 질의 독서로―슬로 리딩 기초편', 제2부 '매력적인 '오독'의 권장'―슬로 리딩 테크닉편) 읽으면서 내내 이건 나도 아는데, 너무 뻔한 방법 아니야, 그걸 누가 모르나, 하면서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별것 아닌 게 별것이었다. 정석이란 건 아주 간단했다. 천천히 읽으면서, 저자의 의도를 생각하고, 글에 쓰인 중심 단어들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해가 안되면 되돌아가 다시 읽고, 문장의 의미를 깊이 사색하고, 저자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 대답을 찾고,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사전도 찾고, 내 경험에 비추어 이해하고, 기타등등 기타등등. 이걸 누가 모르냐? 누가 몰라서 못하냐? 그런데 알면서도 못하지, 언제 그걸 그렇게 읽고 있어? 이게 정석이 어려운 이유다.

제3부 '동서고금의 텍스트를 읽다―슬로 리딩 실전편'을 읽으면서는 생각이 차츰 달라졌다. 그 뻔하게 잘 알았다고 생각했던 방법은 그저 머릿속에 관념으로만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히라노 게이치로가 그 구체적 방법들의 적용을 몸소 보여주면서는 아 이 방법들을 이렇게 활용해야 하는구나, 이렇게 읽으면 더욱 재밌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실천편에서 보여주는 테크닉의 활용 방법들이 비록 부분적인 것이지만, 이러한 방법들을 내 스스로에게 적용해서 또다른 나만의 독서 방법을 숙달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고, 그렇게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게 그리 쉬운 게 아니란 생각도 든다. 여전히 조급한 마음을 달래기에는 너무나 '답답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수학을 참 잘했던 친구 녀석이 있었는데, 그 놈은 1년 내내 얄팍한 수학 문제집 한 권만 들고 다녔다. 1년 동안 그것만 푸는 듯 했다. 어떤 날은 한 문제를 가지고 하루 종일 고민하는 모습을 봤다. 이런 미련한 놈, 그런데 수학 점수는 언제나 만점이다. 이 '분주한' 세상에서 책을 읽는 것 자체가 '답답'하고 미련한 짓이라고 생각한다면, 조금 더 답답해 져도 손해될 것 없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조금 답답해져야겠다. 히라노 게이치로처럼. 책을 '제대로' 읽는 방법은 뻔한 독서의 정석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책을 읽는 방법』에서 히라노 게이치로가 말한다. 동시에 그것은 책을 읽는 것이 참 어려운 노릇이구나 하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옛날 수학 잘하던 친구 놈처럼, 히라노 게이치로처럼, 책 한 권을 잡고, 한달이고 두달이고 물고 늘어져보자, 슬로우 슬로우, 슬로 리딩해 보자. 무턱대고 해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하다면서, 자연스레, 슬로우 슬로우 다음에 나올 '퀵퀵'이 따라오지 않을까? 우선은 슬로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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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e - 시즌 1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1
EBS 지식채널ⓔ 엮음 / 북하우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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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지식 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이건 도무지, 괜찮을 수가 없다. 무슨 지식이 이래? 이런 지식은 영 심기가 불편해지고, 눈물이 나고, 부끄러워져서, 이녹이가 쓰던 썬글라스가 필요해 진다.(이녹은 홍길동이 준 썬글라스를 부끄러울 때나, 눈물이 날 때면 쓴다. 너무 단순해서 자기 눈에 보이지만 안으면 아무도 자기를 못 보는 줄 안다. 그래서 맘대로 부끄러워도 되고, 맘놓고 울어도 된다.) 그러나 이 지식을 알고 나면, 도무지 이 썬글라스로도 달랠 수 없는 분노가 치민다.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이라고 했다. 가슴으로 '감동'하면서 읽는 '智識'이라고 했다. '지혜로운[智] 앎[識]'이라고? 도대체가 이게 어떻게 '지혜로운 앎'이 될 수 있지? 어떻게 이걸 가슴으로 읽을 수 있지? 어떻게 감동할 수 있지? 운디드니에 묻힌 성난 말의 죽음이 어떻게 지혜로운 앎이 될 수 있지? 커피 한 잔에 담기 저 불합리한 이윤 착취를 어떻게 가슴으로 읽을 수 있지? 햄버거 때문에 파괴되는, 죽어가는 환경과 자연을 읽고 어떻게 감동할 수 있지? 이 모든 불편한 진실로부터 어떻게 우리를 지혜롭게 하겠다는 거지? 도통 난 동의할 수가 없는 '智識'들이다.

이런 걸 지식이라고 가슴으로 읽고 감동하기엔 너무나 불편한 진실들이다. 하루 종일 바느질을 하고도 굶주리는 아이들이 있지 않은가? 피부가 다르다고 해서 차별받는 이들이 있지 않은가? 539시간 동안 일하고 받는 임금이 고작 70만 600원인 이들이 있는 것은 또 어찌하고? 오늘도 어디선가는 외톨이로, 왕따로 어느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아이들이 있지는 않을까? 몇 개의 번호로만 남아 기억되는 5.18의 영령들을 무엇으로 위로하겠는가? 이런 것들은 담고 있는데, 어떻게 이게 한가하게 감동이나 하고 앉아있을 지식이겠는가?

제발, 이것을 더 이상 지식이라고 말하지 말자. 냉철한 이성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분노하고, 폭발하는 행동이 되자. 헐리우드 영화를 보고 질질 짜면서 감동받고, 극장을 나와 좋았다면 그만이던 그런 싸구려 감동이 되서는 안되는 진실들, 이녹이의 썬글라스로도 감출 수 없는 이 거대한 불합리의 역사들, 여전히 착취당하고 억압받고, 굶주리고, 죽어가고, 고통받고, 미약한 힘으로 투쟁하는 그들이 아직 존재하고 있는 이상에는, 그들의 그 현실로부터 한가한 감동이나, 지혜로움을 얻는다는 것은 못할 짓이다. 감동할 시간도, 눈물 짤 시간도 허락되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주춤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어떻게? 이게 문제다. 이렇게 떠드는 나 조차도. 어쩌겠는가? 이런 불편한 진실들에 감동은 고사하고 애써 외면하고 모른체 하는 인간들이 너무 많은 걸. 또한 어쩌겠는가? 너무나 불편해서 왜곡하고 포장하고, 숨겨버리는 인간들이 있는 걸. 그들이 가려놓은 세상에서 그저 나 편한 것에 만족하고, 나 배부른 것에 만족하고, 나 대접받는 것에 고마워하며 사는 사람들이 우린 걸. 그러는 동안에 우리는 암묵적으로 그 불편한 진실의 원인자들이 되는 걸. 나 조차도.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울음을 참느라 애썼고, 감동하지 않으려고 용썼으나, 울지 않을 수 없었고, 마구마구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밖에는 내가 뭘 어찌 해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책을 읽고 마구마구 울고 있는 것 밖에는, 혼자는 그냥 화만 내고 말 수 밖에 없는, 그저 그럴 수 밖에 없는 내가 아닌가? 우리는 아닌가? 아 도무지 괜찮지가 않다. 괜찮지가 않잖아!

이 책을 만든 사람들은 왜 이걸 智識이라고 했을까? 왜 가슴으로 읽으라고 했을까? 감동을 느끼라고 했을까? 그래, 가슴으로 읽고 감동했으니 된 걸까? 그런 난 지혜로운 앎은 얻은 걸까? 그럼, 知識이 아니고 智識인 이유는 뭐지? 智에는 知가 갖지 못한 것이 있다. 바로 세상을 밝혀주는 태양[日]이다. 이 불편한 진실로부터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知가 아니라, 어두운 세상을 밝혀주는 따뜻한 햇빛으로서의 智이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그래서, 더, 괜찮지가 않다. 괜찮지가 않잖아!

이 리뷰를 너무나 하여 같이 아름다운 분께 바칩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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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3-30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아는것으로 끝낸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데... 어떤 행동, 어떤 실천을 해야 할지... 그저 부끄러울 뿐이군요.ㅠㅠ 그래도 이 책 읽고 하루 석 잔 마시던 커피를 끊었어요.

멜기세덱 2008-03-30 23:19   좋아요 0 | URL
아!! 커피를 끊어야 되는데......
순오기님 감사해요....ㅎㅎㅎ

bookJourney 2008-04-09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하여 옥 같으신 분께 ~ 멋지십니다! 리뷰를 쓰신 분도, 그 리뷰를 받으실 분도 ~ ^^

'知識'은 사실이나 정보의 단순한 조합이 아니고, '智識'은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군요.
이번 주 내내 구호로만 외치고 있는 '禁 커피', 차마 끊지는 못하겠고 하루 한 잔으로 줄여라도 보아야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