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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의 오후 - 남자, 나이듦에 대하여
우에노 지즈코 지음, 오경순 옮김 / 현실문화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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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독신(獨身). 홀로 산다는 것인데, 아 참 외롭겠다, 한다, 다들. 이라는 한자도 참 모나게 외롭게 모질게 괴팍하게 생겼다. 은 일단은 혼자라는 뜻인데, 이 혼자라는 것은 비정상적이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홀로만 특이한 것이 독특인데 여기에도 을 쓰니 말이다. 결혼을 하지 않고, 가족과도 떨어져 혼자만이 사는 것은 특이하다는 인식, 어쩌면 찌질하다는 인식이 이 단어의 뜻에 들어가 있는 듯도 싶다. 독신은 또한 불쌍하다. ‘돕는 사람이 없다는 의미가 이 에 담겨있다.

늙어서 자식이 없는 사람을 이라 했고, 남편이 없는 여자를 이라 했으며, 자손이 없는 이도 이라 했다. ‘개싸움’, ‘원숭이를 잡아먹는 큰 원숭이’, ‘고립된 산’, ‘외발이’, ‘짐승 이름’. 이 모두 에 담긴 뜻이다. 하나 같이 괴상하기만 하다. 지금까지의 독신은 이렇게 괴상한 존재였다. 나도 어쩌면 이 괴상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부터를 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현재는 분명 이니 말이다.

현재까지 이 세상에서 만으로 34년을 넘게 살았다. 몇 달 후면 35년을 채운다. 세상의 기준으로 결혼 적년기이거나 지나고 있거나, 이다. 그런데 30년을 넘으면서는 주변에서 언제 독신을 면하느냐고 아우성이다. 그걸 내가 어찌 알겠느냐 만은, 과연 이것을 면해야만 하는 것이지도 나는 아직 의문이다. ? 남과 다르지 않기 위해서? 자식과 자손을 위해서? 어디 가서 개처럼 싸움질이나 할까봐? 누구를 잡아먹을 지도 모르니까? 다시금 짐승이 될까봐? 그리들 염려인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 많지만 할 수 있는 것도 많다. 그런데 혼자가 아닌 이들에겐 할 수 있는 것들뿐일까? 독신을 면한 이들에게 해야 할 것이 태산이고 해서는 안 될 일들도 가득하며 피곤한 일들의 연속임을 주변의 비독신자들에게서 본다. 그럼에도 무엇이 독신을 비참하게 하는가? 그 무엇이 독신을 비정상인 쯤으로 여기게 하는가?

이 책에 의하면 현재 30대 비혼남이 세상 끝날까지 혼자 살 확률은 3분의 1이다. 3명 중의 1명이 나일 가능성은 농후하다.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덤덤하기도 하고, 혼자면 어때 싶기도 하고, 외로울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독신주의자는 아닌 듯하다. 결혼을 생각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독신을 생각한 것도 아니다. 그런 걸 생각할 여유도 이유도 그리 없었으니까.

<독신의 오후>란 책에 눈길을 준 것은 주변의 흔한 인사말도 있었지만, 결혼이란 걸 해야하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대로 혼자 사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고 해서일 것이다. 중년 혹은 노년의 독신 여성이 들려주는 남자들의 독신이야기? 아니 독신 남자들의 노후 대비서? 그래, 내가 독신으로 산다면 늙어서 어떻게 될까, 하는 궁금함이, 독신의 선배가 들려주는 노하우를 엿보고 싶은 욕심이, 여자가 뭘 안다고 독신 남자에게 조언일까, 하는 호기심이 이 책에 관심을 가지게 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처음엔 독신도 괜찮아 하는 응원과 격려였다가, 나중에는 독신도 쉽지 않네 하는 걱정 반 두려움 반의 충고가 되었다. 3분의 1이 독신으로 산다는데, 더 이상 은 특이하다에 붙여 쓰면 안 될 만큼 보편성을 가질 텐데 독신이 뭐 어때? 독신을 자네에게 권하네, 하고 어느 독신의 일본 할머니께서 나에게 권한다. 그런데 남자 독신은 여자 독신에 비해 진짜로 찌질하게 살기 쉽거든, 그러니 내가 가르쳐주는 방법을 잘 익히고 연습하시게, 하는 친절한 음성이 귀에 들린다. 독신으로 찌질하게 사는 남자들의 예가 어쩌면 나의 오후가 아닐까 하는 강한 확신이 드는 터라, 이 할머님의 충고를 되새기고 되새겨서 찌질을 면해야겠다는 결심을 하려던 찰라, 두려움이 엄습해 오고야 만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독신의 오후’, 그러니까 젊은 독신이 아닌 늙은 독신에 큰 관심을 둔다. 그런데 오후에서 조금 시간이 더 흘러 저녁을 넘어 한밤중으로 깊이깊이 들어가 늙고 병들어 죽기 직전의 독신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다. 인간은 곱게 죽지 않는다고. 죽기 직전의 독신을 염려하는 대목들이 많다. 어익후! 내가 독신으로 늙으면, 날 간병해 줄 사람은 누굴까? 시설에 들어가 정말 골골대고 죽을까? 아직은 생각하기 싫지만, 독신으로 산다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그래서 이 책은 그 때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독신으로 어떻게 하면 재밌게 살 수 있을까가 아니라, 독신으로 죽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를 말하는 책이라고나 할까?

결국은 두려움이 강하게 마음속에 흐른다. 그래서 결혼을 해야겠다, 생각을 하면, 저자는 결혼하고 나서도 혼자가 될 거야, 그러니 사람은 누구나 독신의 오후를 준비해야겠지, 하고 말한다. 어익후! 이 책의 제목은 독신의 오후라는 비유적인 표현보다는, ‘독신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방법정도로 직접적으로 고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인문보다는 실용서에 포함시켜야 할 정도로.

나는 아직 독신의 오전쯤일터이다. 좀 더 쓰다면 정오로 하자. 그러니 아직은 오후는 아니다. ‘독신의 오전이란 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저자에게 오전도 요청해 볼까? 여기에는 아마도 섹스의 문제를 따로 한 장 이상 담아야지 싶다. ‘오후에서는 부족했던 부분이다. 더불어 경제적 준비에 대한 문제도 심도 있게 다루어야지 싶다. 독신으로 재밌게, 멋지게 살자! 더불어 죽을 날도 대비하자! 그런 책이 나와야겠지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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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 마피아
토마스 키스트너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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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FIFA[Fede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는 우리말로는 '국제축구연맹(國際蹴球聯盟'으로 번역된다. "세계 축구의 중심이 되는 국제조직."이라고 DAUM 백과사전에서는 소개하고 있다. 자세한 소개를 보자

한 나라를 대표하는 단일 축구협회만이 가맹할 수 있으나 영국만은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의 4개 협회가 각각 회원국으로 승인되었다. 회원국은 2002년 1월 현재 204개국이다. 목적은 경기 추진, 각국 협회간 우호증진, 경기규칙의 준수 등이다. 4년마다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월드 컵 축구대회)를 주관한다. 조직으로는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총회와 집행위원회, 집행위원회를 자문하는 18개의 상설위원회가 있다. 총회는 2년에 1번씩 개최되며 FIFA 정관 개정, 재정·회계 승인, 회원국 승인 등 FIFA의 주요 사항을 결정한다. 집행위원회는 회장과 7명의 부회장, 16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며 FIFA 사무의 대부분을 처리한다.

 

UN, 즉 국제연합 가입국이 현재 193개국이라고 위키백과에 나와 있는데(몇 년도 기준인지는 모르겠음.), 피파는 2002년에만 204개국이 가입되어 있다. 명실상부 세계적 기구임에 틀림없다. 세계 축구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 이 단체의 구성은 위와 같다. 회장 1명과 부회장 7명, 그리고 위원들. 그리고 사무총장. 이 사람들은 세계 축구의 수뇌부가 되겠다. 그런데, 이 책 <피파 마피아>에 의하면 결국은 회장 1명 뿐이다. 나머지는 들러리, 꼭두각시, 하수인 등등에 지나지 않는다. 과연 이 국제적 기구가 이럴 수가 있을까? 이 책의 내용이 과연 진실일까?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진실이라면 이건 코미디다. 저자는 이러한 작태를 마피아에 견주고 있는데, 책을 읽으면 마피아도 이 정도는 아닐 것 같다. 그들도 나름 조직의 체계는 있을 터.

 

정말이지 이 책의 내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국제축구행정을 책임지는, 세계적인 축구 축제를 주관하는 피파가 과연 이렇게 주먹구구로 운영되는지, 회장이라는 사람의 독단과 독선이 이렇게 오랫동안 작용할 수 있는지, 그게 국제기구인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 뿐이다.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 없는 건, 지금까지 피파의 역사를 보면 또 얼추 맞지 싶다.

 

이들은 축구의 축자 정도만 알고 있는 것 같다. 진정한 축구, 진정한 축구팬을 외면하고 이들은 돈과 권력 맞는 쫓고 있다. 그런데 몇 십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다. 왜일까? 왜일까 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가 더 궁금하다. 개선의 여지도 보이지 않는다. 이 책에서도 개선의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이책은 그 주먹구구 마피아들을 고발하기 위한 목적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의 축구팬들은 이 축구를 이용한 돈과 권력의 노예들, 축구 정치가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저 축구를 좋아할 뿐. 그것을 자기들 멋대로 이용하고 치부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이들을 어떻게 벌할 것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곧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피해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방법이 있을까? 오늘부터 축구를 보지 말자? 이 책을 읽는 내내 그것이 무척 답답했다.

 

저자의 고발에서 약간은 불편한 점도 있었다. 우리 대한민국의 4강 신화에 얽힌 음모론 등도 불편했지만, 그보다는 아프리카나 소수 국가의 축구협회에 대한 약간의 비하의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거대한 축구 인프라를 갖춘 독일의 축구협회와 축구장도 변변히 없는 국가의 축구협회가 동등한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을 무척 부정적으로 보는 저자의 시선은 무척이나 불편하다.

 

피파는 국제기구이기 때문에, 그리고 스포츠단체이기 때문에 느슨한 감시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외부의 어떤 압력도 거의 받지 않는다. 돈의 압력만 빼고. 오히려 축구를 이용하여 외부에 압력을 행사할 뿐이다. 결국의 자체의 정화만이 해결책이지 싶은데, 요원한 길이 분명하다. 어찌해야하나 어찌해야 하나. 답답하다. 그저 축구만 재밌게 보면 그만일까? 잘 모르겠다. 토마스 키스트너 같은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들을 모든 이들에게 알리는 노력을 계속한다면 무언가 바뀌지 싶다. 지금으로선 그러는 수밖에 없지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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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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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이 일상의 삶과 무관하게 저 하늘의 별만을 보는 것이라면 가난한 사람들이 지적하듯 철학은 한가한 일이나 쓸모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떠받드는 현실 감각 역시 그들 자신을 빈민으로 양산하는 현실에 대한 추인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노예의 자기 위안에 불과할 것이다. 이처럼 철학과 가난한 사람이 대립하는 곳에서는 철학도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도 불행하다. 철학은 기껏해야 현학적 유희이거나 비현실적 몽상에 불과한 것이 되고, 가난한 사람은 현실 논리를 재빨리 추인함으로써 영리한 노예, 성공한 노예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서로 조롱하고 적대하면서 철학과 가난한 사람이 함께 불행하다면, 역설적이게도 각자의 구원은 서로에게서 오는 게 아닐까. 삶의 절실함과 대면하면서 철학자는 새로 철학을 배우고, 앎의 각성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은 삶을 새로 살지 않을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위대한 탈레스를 재치 있게 조롱했던 총명한 하녀가 어느 밤 다락방 창문을 열고 밤하늘의 별을 보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 거창한 물음에 역시나 거창하게 혹은 선문답처럼 대답을 내어놓을 이들은 역시나 철학자들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혹은 '문학이란 무엇인가?'처럼 분위기 잡고 썰을 풀어나가면 뭔가 있어보이는 듯한 이 물음. 소크라테스가 어쩌고, 플라톤이 어쩌고, 공자, 맹자, 노자 타령을 늘어놓아야 왠지 있어보이는 듯한 느낌. 어느 순간에 우리는 '철학하고 앉아 있네'란 욕 아닌 욕을 듣게 마련이다. '철학하고 앉아 있네' 이것은 과연 욕인가? 역시나 여기에 담긴 의미는 쓸데없는 헛소리를 짓거리는 이들에 대한 비하를 담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철학의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은 듯 하다.

 

나름 문학에 종사하는 나에게 문학 또한 이 철학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가 어쩌고 소설이 어쩌고, 시를 쓰고 자빠졌고, 소설쓰고 자빠졌네는 욕에 다름 아닌 현실. 결국 여기에는 '불필요함'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철학이라는 것이, 문학이라는 것이 일상과는 저멀리 떨어져있어 하등의 쓸모를 갖지 못하는 현실.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미개하고 무식하여 그 쓸모를 알지 못하고 멀리하고 있다고 탓할 수도 있겠지만, 과연 그렇다고만 할 수 있을까? 무식한 우리들의 탓일까?

 

고병권은 이 책에서 이런 물음에 답하려 한 듯 하다. 무식의 하녀만의 탓이 아니라는 다정한 대답이 나온다. 일종의 양비론을 펴고 있다. 일상을 저버리 철학과 철학자도 나쁘고, 철학을 버리고 사는 일상의 하녀도 나쁘다. 일상과 철학의 조화를 바라고 추구하는 듯하다. 그래! 좋게 보면 좋은 말이고, 맞는 말이다. 일상의 철학, 이름하여 실용철학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나는 고병권의 의견에 일부분 반대한다. 어찌 하녀를 탓할 수 있을까? 전적으로 철학자를 탓해야 옳다. 그들이 남겨놓은, 고병권의 말대로 일상을 저버린 철학을 탓해야한다. 그들의 철학이 우리의 일상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았기에 그것은 쓸모 없음으로 우리 하녀와 같은 이들에게 인식되었고, 괜한 소리를 짓거리면 '철학하고 앉아 있네'란 수모를 당해야만 했던 것이 아닐까? 일상을 포용한 철학, 일상을 변화시키는 철학을 철학자들이 먼저 내어놓는다면, 우리 하녀와 같은 이들은 어느 순간에 모두다 이 철학을 하고 앉아 있을 것이다. 왜? 이 철학이 우리 삶에 이렇게 필요하니 말이다.

 

고병권은 <철학자와 하녀>에서 이러한 일상의 철학을 말하고 있다. 일상과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삶의 장소에서 발견한 철학, 저 높은 곳에서의 고담준론이 어떻게 우리의 일상에 적용될 수 있는지를 짧게나마 직접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인지 짧막한 글에서 느끼는 바가 많다. 내 머리속에 명쾌함을 심어주는 표현도, 금과옥조같인 메모해두고 두고두고 보고 싶은 글귀도 많다.

 

그러나 고병권의 이 글은 우리 일상에 복무하는 철학일까? 과연 실용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 무지의 하녀들이 이 글을 읽고 철학하게 만들 수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그가 보는 일상은, 그가 겪은 경험은, 그가 돌아본 세계는 아마도 대다수의 하녀들이 보지 못한 곳, 가지 못한 곳, 겪지 못한 경험일 뿐이다. 더 낮은 세계로 임해야 하지 싶다. 별은 3개 반 정도만 주고 싶었다. 그러나 반개는 없어서 인심쓰고 4개를 준다. 그가 낮은 세계의 철학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담긴 별 반개를 더한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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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철학자들 -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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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져야 할 것은 따져 물어야 한다. 따져야 할 것을 제대로 따져 묻지 않은 우리 사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불신과 반목과 거짓의 병폐가 넘치지 않은가? 흔히 우리에게 독일은 달랐다. 독일은 아무래도 따져야 할 것을 제대로 따져 물었다고 알았다. 하지만 이본 셰라트의 이 책을 보면 여전히 제대로 묻지 않은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단호히 따져 묻기 어려운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철학이라는 것이 그런 종류의 문제다.

 

이본 셰라트는 히틀러의 범죄에 부역한 철학자들을 추적하여 아직 그들에 대해 따져 물어야 할 것을 제대로 따져 묻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 중점에 하이데거와 슈미트가 있다. 이본 셰라트는 이들을 주 타깃으로 하는 듯 하다. 하이데거가 히틀러 정권에 부역했다는 의심은 대중적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혐의가 어느 정도이고 그것으로 인해 하이데거가 어떠한 처벌을 받았는지는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본 셰라트는 하이데거의 과오가 큰데 반해 그 행위에 대한 처벌은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이 책의 부제는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다. 그렇다면 하이데거의 철학이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었는가를 따져야 하지 않았을까? 이본 셰라트가 들고 있는 하이데거의 부역의 증거들은 그의 편지들, 그의 글들, 그의 침묵들(히틀러의 반인권적 반학문적 반철학적 박해들에 대한)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철학이 어떻게 히틀러 정권에 이용되었는지를 묻고 따져야 하지 않았을까?

 

하이데거의 과오에 대한 처벌이 적절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에 와서 부관참시라도 해야겠다고 나서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 아닌가? 이 책을 읽으면서 이본 셰라트가 오늘날 이 히틀러의 부역자 하이데거가 얻은 철학적 지성으로서의 전세계적 명성이 못마땅해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하이데거가 남긴 그의 철학사상을 폐기해야 할까? 그의 책을 금서로 지적해야 하는 걸까? 그것은 또한 히틀러의 방법과 무엇이 다를까?

 

나는 이본 셰라트가 더 정확히 따져 물어야 했다고 본다. 이 책의 부제처럼 말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이 히틀러에게 어떻게 도움이 되었고, 이용되었는지를 조목조목 따져서 밝혀야 했다고 본다. 그것이 인정되었을 때 그의 철학은 자연스레 폐기되고 말 것이 아닌가? 그것이 아니라면, 그의 철학은 철학대로 두어야만 했다. 이본 셰라트가 지적하고 있는 하이데거의 오점은 그의 철학이 아니라 처세에 있다. 그런 점에서 '히틀러의 슈퍼맨'이란 칭호가 하이데거에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해켈은 범유럽 차원의 '일원론자 동맹(Monist League)을 결성하고 인간이 생물학 법칙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강연했다. 인종의 순수성에 대한 해켈의 집착은 갈수록 커졌으며 아리안 인종의 힘을 보호하기 우해 우생학을 제시했다. 생물학을 따르지 않는 사회는 약한 사회가 될 것이라고 해켈은 역설했다. 그는 아픈 사람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약을 쓰는 것은 자연선택을 방해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하층민, 병자, 장애인, 걸인, 부랑자, 범죄자에게는 현대의학과 번식할 권리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이들 약자는 인간을 오염시키고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다. 따라서 해켈은 대량 안락사를 주장했다.

"악으로부터의 구원은 고통 없고 효과 빠른 독약에 의해 완수되어야 한다."(96~7쪽)

 

해켈의 이 말도 안되는 우생학은 "훗날 국가사회주의의 핵심 전제"가 되었다. 오늘날 이 우생학은 폐기되었다. 해켈의 사상은 히틀러의 인종청소, 유대인 박해에 핵심 전제가 되고 그것의 타당성을 뒷받침하는 사상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해켈과 그의 사상의 히틀러와 함께 종료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가의 사상 또한 그러한가? 그것에 대한, 즉 하이데거의 철학에 대한 문제점을 이본 셰라트의 이 책이 적절히 지적하고 있지는 못한 듯 하다.

 

이 책에서 읽은 만한 대목은 차라리 제2부에 묶인 '히틀러의 적들'이다. 발터 벤야민, 테오도어 아도르노, 한나 아렌트 등 오늘날 그 이름도 찬란한 이 철학자들에 대한 이야기에 오히려 더 빠져들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앞부분을 제외하고 '히틀러의 적들'이란 제목으로 이 철학자들에 대한 자료를 보강하여 펴내는 것이 더욱 좋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이들이 '히틀러의 철학자들'이 아닐까? 반어적, 역설적 의미에서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는 강만준이 생각났다. 강만준의 책만큼이나 주가 많이 달려있다. 다양한 자료를 찾았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달리말하면 이본 셰라트가 하이데가 등의 철학적 문제, 즉 그의 철학이 어떻게 변질되었는지를 논박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곳곳에 흩어져 있는 인물의 행적을 추적하고 자료를 정리하는 능력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하기에 위에서 말한 것처럼 히틀러의 적들이 어떻게 고통받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 돋보이게 된 것이 아닐까?

 

이 책은 다큐로서 의미가 있다. TV프로그램으로 만들어 지면 더욱 좋았을 뻔 했다. 소설적 묘사도 제1부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못했다. 오히려 제2부와 어울려 보다 감동적으로 읽히게 만들 뿐이다.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더욱 아쉬운 것은, 아니 부러운 것은 독일의 문제에서 아직 제대로 따져 묻지 못한 것이 철학의 문제 정도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더욱 한심해 보이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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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라 브론토 사우루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 스티븐 제이 굴드 자연학 에세이 선집 3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 현암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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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제이 굴드 Stephen Jay Gould. 왠지 이 이름은 고생물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저자의 직업과 딱 어울린다고 생각한다.(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진화생물학 관련 책들을 얼핏얼핏보면서 이 이름을 들어서일 수도 있고, 고생물학자들은 아무래도 어느 굴들을 찾아다녀야 할 것만 같아서 일수도 있다.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그의 책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는 그 제목만큼이나 거대한 저작이다. 무려 800쪽에 조금 못 미치는 분량이다.(이쯤되면 양장이 어울릴 것 같다는 편견을 난 가지고 있다.) 내용도 나로서는 참 거대하게 느껴진다. 어느 작은 생물에서부터 공룡, 저 멀리 우주에까지 이른다.(고백하건대, 나는 이책을 다 읽지는 않았다. 아니 못했다. 시간도 없긴 했지만 그리 열심히 읽지도 않았다. 중반 이후부터는 선별적으로 읽긴 했지만, 그래도 3/4은 읽은 듯 하다. 점 하나까지 다 읽어야 리뷰를 쓸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니, 이러한 사실에 그다지 불편해 하시지들은 않길...) 그러나 굴드는 이 책을 대중적이라고 역설한다.(내가 분명 대중 가운데 하나라면 이 책은 그다지 대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굴드의 대중에는 아마도 나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모두 영광스러운 지적 전통인 알기 쉬운 과학을 되살리는 작업에 매진할 것을 맹세해야 한다. 그 규칙은 간단하다. 절대 개념적 풍부함을 손상기키지 않을 것. 모호하거나 모르는 부분을 건너뛰지 않을 것. 물론 전문용어를 쓰지 않되, 그렇다고 필요한 개념을 생략하지 않을 것(개념적 복잡성이 일상 언어로 전달될 수 있도록). 현재 미국에서 이런 양식의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 여럿 있다. 따라서 우리의 일차적인 임무는 그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고 누가 아닌지 식별해내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프란체스코와 갈릴레이의 인문학적 전통을 꿋꿋이 주장해나가야 하며, 핵심 요약이나 연출 사진과 같은 작금의 설득 이데올로기에, 즉 미국의 또 하나의 낡은 전통(반지성주의의 어두운 면, 파시즘의 전조가 될 수 있는 사려 없는 감성주의에 대한 호소)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12~!#쪽)

 

이렇게 과학을 대상으로한 대중적 글쓰기를 천명한 저자는 책을 읽고야 알게 되었지만, 십수년간을 그것을 실천하고 실행해 왔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고, 그래서 그는 세계적인 명사의 반열에 오른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스스로 제시한 규칙을 이 책이 준수하고 있다고 판단할 능력을 나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 책이 일차적으로는 미국의 대중을 대상으로한 대중적 글이라고 보여지는데, 미국의 대중에 해당하지 않는 나에게는 그의 규칙들이 어떻게 적용되고 준수되었는지를 가늠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로 그 규칙들이 어긋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와 비슷한 분야에 관해 읽은, 나에게 있어 가장 대중적인 책은 전중환이 쓴 <오래된 연장통>이란 책이라고 생각한다.(절대 굴드보다 전중환이 위대하다는 얘기가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좀더 확장하면 굴드의 책보다 전중환의 책이 우리나라 대중들에게는 더욱 대중적일 터이다. 나에게 굴드의 책(한국어 본역본이라고 해야 더 정확하겠다.)이 대중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고 해서 굴드를 탓해서는 안 된다. 나는 오히려 이 책을 번역하고 출간한, 번역자와 출판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영어 원서를 읽을 능력도 시간도 없는 나이지만, 이 책이 정확한 번역일 수는 있어도 한국어로써의 잘된 번역은 아닐 듯 싶다.(내 생각일 뿐이다.)

 

무작위로 이 책의 어느 한 페이지를 펼쳐 보았다.

 

다시 말해서, 키위의 알은 결코 비정상적으로 커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몸집이 줄어든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주장은 전혀 같지 않다. 오래된 농담과 달리, 우리는 뚱뚱한 사람이 몸무게 때문에 키가 작은 것이 아님을 알고 있듯이 말이다.(162쪽)

 

여기서 '오래된 농담'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그 오래된 농담을 공유하지 못했기에 이 대목에서 조금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내 과학적 지식의 부족함도 원인이겠지만, 굴드의 대중적 글쓰기가 나에게는 공유하지 못한 문화적 한계 때문에 전혀 대중적으로 다가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간극을 번역자 또는 편집자가 채워넣어야 하지 않았을까? 번역에 있어서 대부분 직역한 부분이 많은 것 같고, 비문에 해당되는 문장들도 있는 듯 해서 가독성이 많이 떨어졌다. 첫 에세이부터 읽어가면서 나는 굴드의 비유와 예들을 거의 하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나에게는 이 책이 담고있는 진화생물학적, 고생물학적 지식의 설명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가장 큰 책임은 나에게 있겠지만, 그렇다는 얘기다.

 

굴드의 논법은 미국인들에게 꽤나 대중적이었을 듯 싶다. 흥미로운 것은 골드가 이야기를 시작해나가는 방법들이다. 잡다한 이야기, 전혀 연관성 없어 보이는 소재들을 가져와 이런저런,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어 가며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내가 공유하지 못하는 '대중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골드는 꽤나 출중한 작가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은 N. S. 셰일러와 윌리엄 제임스에 대한 21번 에세이다." 그가 가장 좋아한다는 21번 에세이를 읽어야 햇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나는 이 에세이가 도입부분 만큼은 아주 탁월하다고 느꼈다. 아이들 문화에서 오는 어휘의 변천을 탐구하면서 자신의 지난날의 경험으로 이어지고, 그로부터 한참을 흘러 본연의 주제로 들어가는 굴드식 어법이 흥미있었다. 거기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의 많은 부분 중에서도 <7부 지적 전기 - 생물학자>에 실린 21~23번 에세이와 <8부 진화와 창조>에 담긴 에세이들, 그리고 <9부 숫자와 확률>에서 야구와 연관된 엣세이를 나름 재미 있게 읽었다. 창조과학과 진화론의 논쟁은 승리자가 뻔한 싸움임에도 논쟁의 과정은 재미있고 흥미롭다. 그 오래된 역사를 전해주는 굴드의 이야기에 빠져 단숨에 읽어나갔다.(위에서 언급했던 불편함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 책에서 굴드는 일관되게 필연이 아니라 우연을 강조하는 느낌을 받았다. 더불어 종교와 과학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자신들의 역할만을 다 하면 된다는 점, 진화론이 인류의 기원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이런 점들을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의의가 있어서 나쁘지는 않았다. 결국, 내 능력의 부족함일터이다. 브론토사우루스를 응원하는 스티븐 제이 굴드와 더불어 브론토사우루스가 제 이름을 수성 혹은 되찾기를 바란다. 내가 이책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내 첵임만은 아니니, 힘내자 메르키세데크스!!(내 아이디 멜기세덱을 펼쳐읽으면 비슷해질 듯 해서)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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