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목소리들 - 그 많던 언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 지음, 김정화 옮김 / 이제이북스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작가 박완서가 “그 많던 싱아들은 다 어디로 갔”는 지를 끈질기게 묻고 있을 때, 사라져 버린 것은 비단 ‘싱아’뿐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 많던’ 싱아들이 결국 다 사라져 버리고 나면 ‘싱아’라는 말도 사라질 것이지만, 아직까지는, 적어도 박완서의 소설 제목으로서는 ‘싱아’라는 말은 박제(剝製)처럼 살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싱아’가 사라지기 전부터 계속 사라져 왔고 사라져 가는 ‘그 많던’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언어들이다.

  다니엘 네틀과 수잔 로메인은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에서 “그 많던 언어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 지를 추적한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언어들이 사라져 왔는지, 어떻게 사라져 왔고, 또 사라져 가고 있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결국에는 앞으로도 더 많은 언어들이, 현재 지구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약 6천여 종의 언어 중에 대부분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럼으로써 저자들은 이 사라져 가는 언어들을 그대로 지켜보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대책을 마련해서 그 언어들을 보존하고 유지시켜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언어가 소멸한다거나, 잔인하게도 사멸(死滅)되어진다고 하는 것에 우려를 표명(表明)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처음은 아니다. 그간 언어학계와 사회 일각에서 종종 언급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들의 이런 우려의 표명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추적하는 언어의 사멸과, 그에 대한 우려가 가일층 강도 높게 읽히는 이유는, 이러한 언어의 사멸이 단지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현재 각계에서 동의하고 있는 생태계 파괴와 오염의 문제가 이 언어의 사멸의 추세와 함께 동반하고 있음을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끌어내면서, 언어의 사멸이 생태계 전반의 문제를 대표하는 척도(尺度)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인식은, 아직 학계에서도 생소한 ‘생태 언어학’이란 학문 범주(範疇)를 이룬다. 어떻게 언어와 생태, 즉 자연이 관계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본다면 어렵지 않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들이 볼 때 “언어들의 멸종은 전 세계적인 생태계 붕괴 현상의 일부”인데, 이는 “인간들의 언어들 속에” 이 생태계 전반과 긴밀하게 관계되는 “자연 환경에 대한 상세한 지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생태계의 파괴는 곧 다양성의 상실로 이어지고, 이것은 생태계 전반의 존립을 위협하는 엄청난 재앙과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언어에서도 마찬가지로 언어 다양성의 상실은 “우리 모두에게 손실을 안겨 주는 것이다.”

  언어가 생태계의 일부인지, 아니면 언어는 곧 생태계의 전부인지를 따지는 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유의미하겠지만, 어쨌든 언어와 생태계의 연관은, 그 소멸 현장이 공통되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관련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들이 우려하는 것은 몇 가지 점에서 언어에 대한 우리 사회 일반의 인식에 의한 것이다. 언어가 단순히 의사소통의 매개 역할 뿐만 아니라, 인류의 생각과 정신, 그리고 사회 문화를 폭넓게 담고 있는 유산이기에, 그러한 언어의 사멸은 소중한 인류 문화유산의 소멸이며, 복원 불가능한 상실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언어가 각 사회의 정신적, 문화적 소산이며, 그 사회의 사고와 인식을 주관하는 매개로서, 각 사회 개개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지표라고 할 때, 언어의 상실은 곧 그 정체성의 상실임을 저자들은 강조한다. 결국 언어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대변하고 있음으로서, 그 가치와 보존의 정당성을 여실히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들이 추적하기에 최근 200년간의 언어의 변화, 그 중에서도 소멸의 양상은 인류 기원의 시작과 그 맥을 대동소이(大同小異)하게 같이한 오랜 언어의 역사적 양상과 대비할 때 매우 특이한 면모를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등 몇몇 세계 언어들이 확산됨에 따라 많은 소규모 언어들이 사멸하고 있다. 오늘날의 지구촌에서는 세계 인구 중 약 90퍼센트가 백 개 정도밖에 되지 않는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인간 사회가 이렇게 급진적으로 재편됨에 따라 영어와 몇몇 세계 언어들이 지배적인 지위를 가지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재편이 “적자생존”의 사례를 보여 주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런 상황은 결코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조건 아래서 자유로운 선택과 경쟁이 이루어진 이상적인 시장경제 체제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주장할 것이다. 지배적인 언어의 등장은 사회적 변화가 불균등하게 일어남에 따라, 선진국들과 개발도상국들 간에 현저한 자원의 불균형이 생긴 데서 나온 결과이다.(41쪽)




  저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이 책 전체에서 충분히 입증되고 남음이 있다. “자유로운 선택과 경쟁이 이루어”지는 ‘시장경제 체제’가 ‘이상적인’ 것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작금의 언어의 사멸이 단순히 어떤 자연적 흐름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지적은 타당하다. 생태계 파괴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는 것은 이른 바 산업화와 공업화의 근대적 발전 이데올로기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급성장한 서구 근대 국가들의 산업화와 공업화 공세에 전 세계의 생태계는 무분별하게 파괴되기에 이른 것이고, 오늘날에는 신자유주의와 경제 논리의 미명 아래 이러한 발전 이데올로기가 합당한 것으로 치장된다. 생태계가 치명상을 입었음을 우려하고 경고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왔으니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생태계 파괴의 원인은 저자들이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생태계와 언어의 관련성에 비추어, 언어 사멸의 제1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 사회 변화는 자연적인 흐름이면서 필연이고, 그에 따른 언어의 변화가 수반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고 하기에는, 일부 선진국들의 언어가 대다수의 소수 언어들을 잠식(蠶食), 살해(殺害)해 나가는 현상을 볼 때 매우 부당한 것이 내재해 있다고 생각된다. 저자들의 말처럼, 산업화와 공업화를 앞장서서 세계에 전파했던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행각에 의해 사회적, 국가적 불균등이 생겨나고, 이러한 불균등 심화와 그에 따른 강압과 억압, 그리고 직 · 간접적 통제에 의해 언어가 사멸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언어의 변화, 즉 언어의 생성, 변화, 소멸은 그 언어가 기반으로 하는 사회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사회의 변화는 곧 언어의 변화를 의미하며, 이는 그 둘의 관계에 입각할 때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 언어가 통째로 포기되어지고, 이른 바 언어가 자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는 그렇게 곧이곧대로 자연스러움을 부과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언어 제국주의, 언어 식민주의’란 명명에서 볼 수 있듯이, 제국의 언어가 식민지의 언어로 강요되는 현 실태는 불합리하고도 참혹한 언어 말살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들은 이 책에서 언어의 소멸과 관련한 명명(命名)을 두고 논하면서, ‘언어의 자살’이란 명명에는 동의하지 않고 있다. 언어가 급변하는 사회에 맞게 자연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유야무야 넘어갈 문제가 아님을 이미 앞에서 언급 했듯이, 그것은 언어가 살해된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타살이란 측면이 강하다. 간혹 소수 언어의 사용자들이 자발적으로 자기네 언어를 포기하고 제국의 언어를 선택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근원에는 자발성의 측면보다는 경제적 생존 논리에 의한 무의식적 강압이 작용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니엘 네틀과 수잔 로메인의 입장은 타살로 보는 것에 가깝다. 번역본이기 때문에 원문에서의 표기가 어떤 것인지를 찾아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사멸’이라고 부르듯이 그들의 논조 또한 피살되어지는 것으로 보는 성향을 느낄 수 있다. 여하튼 언어가 그렇게 사멸해 가는 것에 대한 일각의 이런 경각심을 모두가 호기(豪氣)롭게 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촘스키로 대변되는 변형생성론자들의 논법을 따르는 이들의 경우 언어는 그 기저에 심층구조상의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어의 이러한 변화 내지 사멸은 크게 우려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이런 심층구조의 동일한 보편성을 십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항상 심층구조로 발화되고 사용되는 것이 아니란 점을 고려한다면, 그리하여 그러한 심층구조 상의 생각이 각각의 사회의 사고방식 및 문화, 정체성에 따라 제각기로 표현되어지고 발화되어진다는 것을 확인할 때 확실히 그런 언어들이 사라지고, 다양성이 극소수 몇 개의 언어만의 획일성으로 점철되는 것은 쉽게 넘길만한 일은 아니다. 언어가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러니까 9개가 같고 1개가 다른 대동소이한 것이라 하더라고, 약 6,000여개의 언어가 가지는 다양성의 폭, 즉 ‘소이(小異)’한 것들의 개수는 6,000개 그 이상이며, 이것들이 사라진다고 할 때, 언어의 이런 보편성만으로 대수롭지 않게 보기에는 그 손실은 크나큰 것이다.

  다니엘 네틀과 수잔 로메인이 이 책에서 생태 언어학적 측면에서의 언어의 사멸을 고찰하고 있고, 그 원인으로 공업발전만을 강조한 서구의 경제논리에 따른 각기 사회의 불균형성을 들고 있지만, 아울러 그것이 현실적으로 적용되는 구조는 ‘언어 식민주의’적, ‘언어 제국주의’적 양상을 보인다. 초강대국 미국의 언어인 영어와 강대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의 언어들 아래 재편(再編)되어진 중심부, 주변부의 언어들의 역학(力學) 관계로 파악하는 것이 이른바 ‘언어 제국주의’적 양상인데, 그러한 논리에 따르면, 주변부들의 언어가 급속도로 제국의 언어의 강압 아래 굴복하고 복속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그러한 논리를 직접적으로 가져오진 않지만, 일부분의 서술에서도 그런 제국주의 논리가 언어의 사멸에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찾아 낼 수는 있겠다.




우리는 언어 정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규모가 큰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실질적인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준다면 사람들 스스로 그것을 깨달을 것이다. 따라서 강제로 사람들을 “현대화”시키려는 시도들은 잘되어도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고, 잘못되면 다른 문제들을 덮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현대의 세계 경제에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영어나 다른 세계어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모국어를 잃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쉽사리 양자택일을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만약 그들에게 스스로 개발 조건을 정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기회가 주어진다면 사람들은 흔히 양쪽에 모두 유리한 방안을 찾아낼 것이다. 즉 지역 사회의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보다 광역의 경제 및 정치 체제에 적절히 전략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렇게 되면 철저한 다중 언어 사회가 이루어져서 그 사회에서 쓰이는 모든 언어가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받고 상호 보완적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중심지 언어와 주변 언어들이 오랜 갈등을 겪는 동안 변방의 사람들은 진정한 선택권을 부여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선택은 인권의 측면에서 그 자체로서 바람직한 일일 뿐 아니라, 경제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에 모두 이로운 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248쪽)




  저자들은 언어의 사멸 양상을 추적하면서 언어가 기하급수적(幾何級數的)으로 근 200년에 걸쳐 소멸되고 있으며, 그것은 생태적 파괴의 양상과 우연 이상으로 일치한다고 근거를 들어 주장한다. 그들은 언어가 인류의 자원이며, 그 소멸은 인류에게 커다란 손실을 안겨주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생물의 다양성 보존과 함께 언어의 다양성도 유지, 보존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위의 인용문에서 우리는 그들이 추구하는 언어적 다양성의 형태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철저한 다중 언어 사회(多重言語社會)’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각의 지역 사회의 자율성을 유지시키고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지켜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제국주의적인 외부의 근대적 발전의 강요와 억압은 그들의 자율과 권리를 파괴하고, 결국에는 모든 다양성을 말살하는 것일 뿐, 아무런 득 될 것은 없다.

  이러한 ‘다중 언어 사회’를 이루기까지 필요한 것은 아직까지 남아 있는 언어적 다양성을 유지 보존하고, 그것이 오랜 기간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여러 가지 대안들이 필요하다. 저자들은 그러한 대안 찾기도 빼놓지 않고 있다. 여기서 그것을 열거하지는 않겠다. 여러 가지 대안들이 있고, 그러한 대안들이 조속히 실천에 옮겨져야 할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저 강대국 언어의 사용자들이 이러한 생태 언어적 현실에 대하여 보다 경각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그것을 유지 보존해야 함을 인식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들이 거기에 무관심하고 외면할 때 소수 언어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그 많던 싱아”를 따라서 어디론가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러한 대안들과 해결책들, 그리고 조속히 처리해야할 구체적인 방법들은 데이비드 크리스털의 『언어의 죽음』에서 보다 잘 설명되고 있다. 그 책과 함께 이 책을 읽는 것은 매우 유효한 독서 방법이기도 하겠다.

  언어의 사멸은 우리 아닌 타 언어 사용자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언어를 어떻게 구분 짓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 내부에서도 언어는 사멸하고 있다. 방언도 엄밀히는 언어 중의 하나이고, 그것은 한국어 내부의 언어적 다양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 또한 표준 한국어에 밀려 점차 사멸되어 가고 있다. 특히나 우려스러운 것은 다분히 독특한 점들을 보여주는 제주도 방언이 급속도로 사멸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어학계의 우려가 크다. 이런 내부의 문제이기도 한 언어의 사멸에 관한 우려를 우리는 보다 넓은 시야와 애정으로 바라보고 대처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우리와는 상관없는 듯이 보이는 저 머나먼 타국의 소수 언어들이 사멸해가고 있는 현실은, 곧 우리 전 인류의 공통된 손실로 다가올 것이다. 또한 우리 안에서도 그러한 전 지구적 손실이 이루어지고 있음에 우리는 인류에게 끼친 손실에 대해 반성해야 할 것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영어 몰입 교육’이니, ‘영어 공교육 강화’니 하는 것들도 언어의 사멸의 과정에 있어 초기 단계에 진입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영어를 배제하자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다양성을 유지하고, 다중 언어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제1언어인 한국어로 우리의 정체성을 갖추고, 영어를 비롯한 다양한 언어들을 존중하고 배워가면서 언어적 다양성을 통해 전 인류와 소통하고 공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고 노력해야 할 이상이다.

  한국인으로서 우리와 이웃한 중국, 일본 등과 역사적으로 불편한 관계를 맺어오긴 했지만, 이런 언어적 다양성을 추구할 때, 우선적으로 이런 이웃의 언어를 존중하고 배워나가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당시 제국의 언어인 중국의 문자를 통해 한 · 중 · 일은 무리 없이 소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불가능하고, 가능해지려면 영어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아시아가 연대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삼으려 한다면 이 이웃한 나라들만이라도 제각기 다른 나라의 언어로 말하고, ‘내 언어’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국인과 한국인, 그리고 일본인이 한 자리에서 중국인은 한국어로 말하고, 한국인은 일본어로 말하며, 일본인은 중국어로 대화하는 모습 속에 다중 언어 사회의 구체적 모습이 희망적으로 담겨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영어 공교육 강화’의 필요성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에게 획일적으로 적용되는 ‘共교육’이 아니라 ‘公교육’이어야 하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최상의 영어교육이 제공되는 것이 곧 공교육의 모습이다. 이것은 나아가 다중 언어 공교육으로 이어져야 한다. 나는 우리 사회가 내 언어로 생각하고 사고하며, 타인의 언어로 말해주고 전달하는 다중 언어 사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은 저 독재(獨裁) 정부가 그렇게 노래만 불렀으나 도달할 수 없었던 ‘인류 공영에 이바지’하겠다는 목표에 가장 효과적으로 도달하는 길이 될 것이다.

  끝으로 사족을 더하자면, 몇 년 전부터 한글을 세계에 전파하자는 민족주의적 성향의 운동은 그것의 의도가 어떠하든지 간에 심사숙고(深思熟考)해야 할 일이다. 다니엘 네틀 등이 강조했듯이 언어에 있어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그 언어 사용자들의 노력이 필수적인데, 거기에다 한글의 우수성은 곧 한민족의 우수성이고, 그런 자긍심과 민족적 우수성을 전파하고자 하는 민족주의적 한글 전파 운동은 성공할 수 없는 외부의 억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글은 우수한 문자이지만, 또한 다른 문자들과 마찬가지의 장단점이 있다. 어떤 점에서 한글은 영어나 한자, 일본의 가타가나 보다 단점이 많을 수도 있고, 또 그와는 달리 그것들이 가지지 못한 많은 장점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한글이 만능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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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3-22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길~~어서 2차에 걸쳐 읽었더니 뭔 말인지...그래도 결론은 확실히 알아 들었어요.^^
"우리 사회가 내 언어로 생각하고 사고하며, 타인의 언어로 말해주고 전달하는 다중 언어 사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UN의 유네스코에서 까막눈(문맹) 퇴치에 크게 이바지한 사람들에게 '세종대왕상'을 수여하는데, 이것은 한글의 가치와 공적을 국제적으로 인정한 상징으로 우리의 큰 자랑거리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