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레랑스, 의미와 원리에 관하여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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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똘레랑스'라는 게 이제는 그리 새삼스러운 단어는 아니다. 저 먼 타국 파리에서 택시를 몰던 한 사람이 어느날 홀연히 날아와 이 '똘레랑스'라는 걸 던져 준 후로, 우리에게 이 말은 비교적 유행을 제법 탔다. 그래서 이제는 '똘레랑스'하면, "아 그거"할 정도는 된다. 많이 들어보고 대충은 뭔지 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는 '대충'에 들어가야 하겠다.

'똘레랑스'라는 그리 새로울 것 없는(?) 개념을 접했을 때 우리는 대체로 수긍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충 그 개념은 어지간히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그 개념을 머리로만 아는데 지나지 않았다. 하나의 단어, 하나의 개념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새로울 것 없기' 때문은 아니다. 분명 '똘레랑스'가 우리에겐 신선한 충격일 순 없었지만, 하나의 '새삼스러운 각성'일 수는 있었다. 그간 치우쳐 두었던 것이었기에, '아 그런 게 있었지', '그거 당연히 좋은 거지' 정도의 각성이랄까, 일깨움 말이다.

흔히 '관용'으로 번역할 수 있는 '똘레랑스'하면, 타인을 존중하고 그 차이를 인정하는 자세를 말한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차별하고 '틀린 것'으로 규정하여 폭력을 가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세 살 먹은 어린아이라면 모를 수 있는 그런 인지상정(人之常情)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동양에서 오랫동안 추앙받아온 성인의 말씀 중에 '和而不同'이 있으니, 이것은 차이의 조화로움에 대한 지극한 경지의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런 화이부동의 자세를 하나의 이상으로 생각해 온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을 견지하지 못하고 다만 하나의 이상일 뿐으로 치부해 왔던 것이다. 그 치부되어 온 것에 대한 '새삼스러운 각성', 그것이 홍세화가 던져 준 '똘레랑스'였다.

지금 우리사회에 이 '똘레랑스'가 또한 새삼스레 요구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그것이 현재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도 '새삼스레'에 강조점이 찍힌다. 새삼스럽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아주 오래전부터 암묵적으로 혹은 아주 절실하게 '화이부동' 내지 이 '똘레랑스'가 요구되어 졌던 것이다. 그래서 항상 '똘레랑스' 혹은 '관용'에 대한 요구는 여전히 '새삼스럽'지만, 그런 만큼 항상 현재적이고 절실하게 요청되어지는 개념인 것이다. 아니 지금까지 개념으로만 머물러 왔던 이것이 이제 실천적 운동으로 생동해야 할 것이 요구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책세상문고>판의 얄팍한 책자 하나가 우리에게 유의미하게 다가온다. <책세상문고 - 우리시대>시리즈의 72번째 책자를 우리는 유심히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바로 하승우의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이다. 하승우는 "홍세화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고 또 공감한다"면서

   
  외세와 기득권 세력에 시달려 위축되고 경직된 한국 대중에게 이성을 길잡이 삼아 현실을 비판하고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똘레랑스라는 개념은 필요하다. 제국주의와 반공 이데올로기, 군부, 재벌 등 많은 상대와 싸우다 보니 자신을 되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진보 세력에게도 문제를 솔직히 인정하고 차이를 환대하는 똘레랑스의 개념이 요구된다.(8쪽)  
   

고 천명한다. 그는 이 똘레랑스를 "편견에서 벗어나 사물의 옳고 그름을 토론하고 잘못된 불의를 바로잡겠다는 적극적인 관용"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에는 '똘레랑스'와 '관용'이 마냥 똑같은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담겨있다. 그러나 '똘레랑스'의 번역어로서의 '관용'이 우리가 익히 들어아는 '관용'과 다르다는 번역의 엄밀성을 따져 묻는 것은 다소 불필요하게 보이기도 한다. 문제는 '똘레랑스'와 '관용'이 어떻게 다르다는 개념적 논의에서 한발 나아가 '똘레랑스'가 어떤 것이고, 그 개념이 어떻게 우리의 실천적 자세로서 활용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점을 분명히 한다. "똘레랑스가 죽은 개념이 아니라 현실에서 살아 숨쉬는 개념"이길 바라고 그러하기에 "그 개념이 등장하고 성장한 구체적인 맥락"과 "그 개념이 자리 잡기까지의 시행 착오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실천적 '사회 윤리'로서의 '똘레랑스'가 가능하게끔 하기 위한 필수요소가 된다.

저자는 이러한 동기하에 이 소책자에 가히 '똘레랑스'의 역사를 추적하여 담아내고자 하는 지나친 욕심을 부린다. 분명히 그 욕심은 이 얄팍한 책자에서 풀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책세상문고>가 으레 그러하듯이, 이 책 또한 '똘레랑스'의 모든 것을 찾게끔 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담당할 따름이다. 그 안내자로서 충실히 성공하기 유해서는 다분히 유혹적이고 매력적이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책세상문고> 시리즈가 이런 역할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책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는 그런 점에서 충분히 성공의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똘레랑스의 역사를 추적하는 과정은 얼핏 지난한 일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것을 얼마나 압축적으로 간단명료하게 보여주느냐와 동시에 흥미까지 더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이 관건을 하승우의 이 책은 어느 정도 해결한 것처럼 보인다. 제1장 '똘레랑스의 등장과 형성'에서 그는 똘레랑스의 기원을 고대 아테네로까지 확장시키면서 볼테르와 헨드릭 빌렘 반 룬의 논지들을 언급한다.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관련해서 고대 아테네 사회에서 우리는 똘레랑스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 '중세의 종교 분쟁'에서 비롯된 톨레랑스의 탄생(혹은 재발견)의 비극을 전한다.

   
  똘레랑스는 피의 연못에서 개화했다. 똘레랑스를 꽃피운 결정적인 계기는 성 바돌로매 축일의 학살이다. 당시 프랑스 국왕의 어머니였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음모에 따라 구교도들은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에 모인 신교도들을 학살했다. 파리에서만 3,000여 명의 신교도가 죽었고 프랑스 전역에서 2만 명 가량의 신교도가 학살되었다. 신교도들은 생존을 위한 반격을 시작했고 종교 전쟁의 불길은 유럽 전역으로 번졌다.  
   

이런 비극적 사건의 연속을 통해 '똘레랑스'의 필요성이 전면에 부각되었던 것이다. 살육을 멈추고 피의 비극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똘레랑스'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똘레랑스는 다분이 종교적 관용이라고만 정의내릴 수 없다. 종교적 관용일 뿐 사회 정치적으로 이것이 적용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은 중세의 종교적 요구가 곧 정치적 사회적 요구와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 해결된다. 곧 종교적 똘레랑스는 곧 정치적 똘레랑스였던 것이다.

중세의 암흑을 벗어나 '광신에서 이성으로'의 변화의 시대에 똘레랑스는 "자신의 삶과 환경을 주체적으로 통제하는 자유로운 개인의 신념"으로 변해간다. "밀에게 똘레랑스는 개인의 자유 실현뿐 아니라 사회의 화합과 진보를 위한 필수 조건"이었던 것이다. 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이런 똘레랑스의 필요성이 확대되었던 반면 사회주의에서는 이질적인 것이라는 편견을 갖지만, 하승우는 "사회주의는 똘레랑스를 거부할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똘레랑스의 기원과 탄생, 그 사회적 필요성의 요구, 똘레랑스 확대의 과정 등을 고대 아테네에서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주의에까지 걸쳐 살펴본다. 그러나 그런 방대해 보이는 작업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흥미를 놓치지 않게하는 간단명료함을 버리지 않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이 똘레랑스라는 것의 모습은 크게 2가지로 대별된다. 미국산 탈러런스와 유럽산 똘레랑스가 그것이다. 미국으로 넘어간 똘레랑스는 미국식 발음으로 탈러런스(tolerance)가 되면서 똘레랑스와 발음 "뿐만 아니라 내용상으로도 차이가" 생기게 된다. 하승우는 그 차이를 구분하면서 탈러런스는 "타협을 추구하는 관용"이고 똘레랑스는 "정의를 부르짖는 관용"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탈러런스가 가지는 위험성이 부각되는데 "미국 사회의 탈러런스는 이성적인 것(타협을 하려면 이익을 계산할 이성이 필요하다)이고 다원주의와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자율적인 조절을 내세우는 다원주의의 현실은 사실 부패한 정치와 자본의 결탁으로 얼룩져 있다". 반면 똘레랑스는 탈러런스와 마찬가지로 '이성적인 관용'이지만 "'정의'와 '연대'를 강조하는 '뜨거운 이성'이"고 "정의를 위해 서로 연대하는 것"이며, "사회를 적극적으로 바꾸려" 하는 것이라고 하승우는 말한다. 이런 점에서 하승우는 우리 사회에 탈러런스적인 관용이 아닌 똘레랑스적 관용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탈러런스와 똘레랑스의 구분을 짚고 가는 것이며, 자세히는 아니지만 번역어로서의 '관용'과 동양적 똘레랑스의 냄새가 나는 '화이부동'이나 '중용(中庸)' 등과도 다소간 다르다는 것은 살짝 언급하고 있다.

하승우가 우리 사회에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똘레랑스, 즉 "사회를 적극적으로 바꾸려"는 관용이다. 그렇다면 이런 똘레랑스가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지 그 작동 원리를 알아야 "희망의 사회 윤리"로서 똘레랑스가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승우는 그 기본 원리를 5가지로 제시한다. 먼저 '인간의 완전함에 대한 부정'에서 똘레랑스는 출발한다. 인간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에서 출발할 때 독선과 독단을 버리고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똘레랑스가 작동할 수 있다. 똘레랑스는 "완전무결함을 부정하지만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는 개인의 자발성을 존중"하는 원리가 기본이 되는 것이다.

나머지 원리들을 나열하면 똘레랑스는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고 극단을 거부하는 태도"가 요구되며, "폭력을 거부하는 이성적인 토론과 설득"을 통해 작동된다. 이와 함께 빼어놓을 수 없는 것은 '차이와 다양성의 존중'이다. 마지막으로 '공화주의와 자유의 실현'을 목적으로 똘레랑스는 작동되는 것이다.

   
 

똘레랑스는 공화주의와 파트너를 이룬다. 그리고 공화주의의 개인주의는 이기주의가 아니다. 공화주의는 자신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만큼 타인의 자유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 똘레랑스는 참견할 수 있는데도 참견하지 않는 것이다. 똘레랑스는 인내의 다른 형식으로, 자신의 견해를 다른 사람에게 강제할 능력이 있지만 그렇게 하기를 신중히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똘레랑스는 덕(virtue)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68쪽)

똘레랑스는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공익에 참여하지 않는 개인주의는 똘레랑스가 아니라 이기주의와 통한다. 똘레랑스에는 자신의 자유만이 아니라 타인의 자유까지 키기려 하고 이를 위해 사회적 연대를 강조하는 개인주의, 공화주의가 깔려 있다.(72쪽)

 
   

 그러나 이러한 똘레랑스의 기본 원리를 토대로 똘레랑스가 작동한다고 하더라도 그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무엇을 똘레랑스하고 무엇을 똘레랑스하지 않을 것인가, 즉 무엇을 앵똘레랑스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극단을 앵똘레랑스하는 것이 똘레랑스의 원리인데 사실상 똘레랑스와 앵똘레랑스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현실 사회에서 이 똘레랑스가 제대로 작동할 것인지는 의문이고, 그런 한계를 뛰어넘지 않고서는 자칫 탈러런스와 같이 권력과 자본에 결탁하여 사회 정의는 커녕 개인과 민중을 억압하고 지배계층에 복종하는 부작용을 낳기 십상인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인지하고 똘레랑스가 어떻게 그 한계를 넘어 현실 사회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가 중요한 관건이 된다. 하승우의 이 얄팍한 책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현실 사회에 어떻게 이러한 똘레랑스를 적용할 수 있을까에 대해 논의한 제4장 '똘레랑스와 접붙이기'라고 할 수 있다. 하승우는 "똘레랑스라는 개념에 영양분을 주는 것은 현실이고 그 현실을 바꾸는 힘은 대중의 실천"에 있기 때문에 이런 접붙이기 작업이 꼭 필요함을 역설한다.

사실 "홍세화는 이미 그런 접붙이기를 시도"한 적이 있다. 하승우도 우선 홍세화가 한국 사회에 똘레랑스를 소개하고 한국 사회에 그것을 실험해 보았지만, 아쉽게도 그것이 성공을 거두지 못했음을 반성적으로 성찰한다. 그것은 "한 번의 시도로 완성될 수 없기에" 이런 성찰을 통해 새로이 "평가하고 보완"하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똘레랑스가 이 현실 사회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먼저 '차별하는 똘레랑스'가 제시된다. 그것은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한 차별"로서 정당한 차별이고 "차별하는 똘레랑스는 똘레랑스를 실천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사실 동양에서 차별은 차이에 대한 억압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동양에서는 차별이 전제가 되어 조화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여기서 차별은 사물들로 하여금 각기 제자리를 찾게 함으로써 혼란스럽지 않게 하는 것을 뜻한다. 제자리를 찾게 한다는 것은 신분으로 묶어두려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지위와 개성, 재능이 제 역할을 다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일의 순서를 구분하고 합당하게 함으로써 부당한 간섭이나 강제 없이 공동체의 삶이 유지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차별은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상황을 바로잡는 것이다. 기득권 세력이 가하는 처벌을 그들에게 돌려주는 것은 질서를 바로잡는 차별이다.(118쪽)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한 차별"을 통해서 똘레랑스가 접붙여질 땅이 조성되면 이어서 '시민의 접촉을 보장하는 공간'이 확보되어야 하고 '자율성과 연대감을 기르는 자치'로 숙성시키며, '자신의 가치를 되새기는 존엄'란 물을 주어 똘레랑스가 완전히 이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똘레랑스가 그 한계를 극복하고 이 사회에 정의를 지켜내는 사회 윤리로서 개화할 수 있을 것이다.

하승우는 이런 원대한 희망을 아주 간단히 소책자에 담아내고 있지만 그것이 그만큼 간단한 문제이고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이 소책자가 우리 사회에 똘레랑스의 필요성을 다시금 각인시키고 그것의 실천적 생동을 요구하는 경적으로서의 가치는 크다. 하승우가 이 책의 제목을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라고 한 데에는 그 희망의 절실함과 그 이룸의 어려움을 함께 담아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쉬운 점은 똘레랑스가 한국 사회에 접목될 수 있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해 씨앗의 발아라는 필연적 과정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저자의 이후 작업이 요청된다. 이 책에 안내된 참고문헌을 통해서 똘레랑스를 찾아 읽고 있게 된 것은 이 책이 그 역할을 다 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저자의 희망처럼 똘레랑스가 우리 사회에 '희망의 사회 윤리'가 될 수 있는 마음이 간절해 진다. 그래서 이 소책자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그 희망을 공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을 공유할 때, 그래서 똘레랑스가 이 사회에 뿌리내릴 때 이 책이 그 역할을 다 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역할을 하기에 이 얄팍한 책자는 부족함이 없다. 다음은 하승우의 제안이다. 그와 함께 우리도 '같이 걷자.'

   
 

제법 긴 여행을 했다. 똘레랑스라는 개념은 실천하는 행동으로 나타날 때 생명을 얻는다.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개념은 그저 관념일 뿐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은 마침내 아버지에게서 '호부호형(呼父呼兄)'을 허락받고도 집을 떠났다. 홍길동은 개인의 만족이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음을 알았던 것이다. 그는 역적으로 몰리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사회의 부조리와 맞서 싸웠다. 똘레랑스는 홍길동이 나섰던 그 길고 긴 길 위에 있다. 미래의 청사진 같은 건 없다. 걸어가며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긴 과정과 수없이 많은 만남이 있을 뿐. 똘레랑스의 뜻은 그 길의 끝에 있는 약속된 미래가 아니라 바로 그 길에 있다. 같이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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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인문학 -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얼 쇼리스 지음, 이병곤.고병헌.임정아 옮김 / 이매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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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인문학(人文學)이 어떻게 조우(遭遇)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이 둘의 조화는 둘 중 어느 하나가 끝장나야 가능했다. 이를테면, 지지리 가난한 어느 시골집 장남이 고학(苦學) 끝에 출세하여 교수가 된다거나, 학문을 한답시고 공부만 하다가 지지리 가난에 어쩔 수 없이 인문학을 끝장내고 굶어죽는 경우다. 그러니까 모 아니면 도다. 전자의 가능성은 말하자면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경우의 수와 비슷하다. 또한 그것이 가난을 극복하고 인문학을 꽃피운 것이냐 물으면 고개를 갸웃 할 수밖에는 없다. 옛날식 드라마 줄거리가 생각나는 것은 비단 나 뿐은 아닐 것이다. 온 가족은 뼈가 닳도록 고생하면서도 장남 하나 출세시키기에 여념이 없고, 그렇게 출세하여 장남은 뽀대나게 살아도 그 나머지 가족은 여전히 가난에 시달리는, 비극적 가족사의 줄거리는 이 가난과 인문학(비단 인문학 뿐만은 아니지만)의 접점에서 줄곧 일어나는 상황이다. 결국 가난과 인문학이 정답게 손잡는 경우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방금 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 가난과 인문학이 정답게 손잡은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고 말이다. 이름하여 '희망의 인문학'이라고 해야겠다. 그간 극소수의 가난한 이들에게 인문학은 희망일 수도 있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야망의 인문학' 쯤 되려나? 이 야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순간에 가난과 인문학은 정답게 손을 잡는다. 그렇다면 '어떻게'라는 질문이 다시 제기되기 마련이다. 어떻게 가난과 인문학이 정겹게 손을 잡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말이다. 나 같은 범인(凡人)으로서는 불가능해 보이기만 한다.

맹자 왈 공자 왈 하는 이 지지리 가난뱅이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버틸 수 있겠는가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대화술로 중무장한 가난뱅이라도 이 험한 세대에서 최소한의 커뮤니케이션을 획득하리라고 보기 어렵다. 시(詩)를 쓴다고 골방에 처박혀 원고지를 구겨 온 방구석에 널브러트린 가난뱅이가, 소설을 쓰는 청승맞은 가난뱅이가, 그림을 그린다고, 음악을 한답시고 나대는 가난뱅이가, 어찌 밥 먹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말이다. 흔히 글쟁이 하겠다면 굶어죽기 십상이라고들 했다. 예술한답시면 또 그 꼴 날 거라고도 했다. 말하자면 인문학으로 먹고 살기 어렵다는 사실은 고금의 진리였다. 이 인문학이야 그 옛날 양반들이 하던 것이었으니, 농사 지어 하루 먹고 하루 사는 이들에게 맹자 왈 공자 왈을 논하는 것은 한가한 노릇이기보다 반역에 가까운 것 아니겠는가. 인문학 그것은 굶어죽는 지름길이었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어떻게 인문학이 가난한 이들과 만날 수 있을까? 이 의문에 앞서 '왜'라는 의문사를 먼저 붙여야 하겠다. 왜 인문학이 가난한 이들과 만나야 하는가를 풀어야, 그 다음 '어떻게'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굶어 죽겠다고? 왜? 죽을 때 죽더라도 고고하게 죽으려고? 가난해도 폼 나게 살다가 폼 나게 죽으려고? 이 또한 나는 한낱 범인에 지나지 않기에 대답을 찾을 길 없다.

왜 인문학이 가난한 이들과 만나야 하고, 어떻게 그 둘이 조우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의 해답을 공자님도 소크라테스도 말해주지 않은 듯하다. 아마 그들의 시대에는 이 질문이 불필요한 질문이었을 게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우리와는 무척이나 달랐으니 말이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에 이 질문은 절실해졌다. 가난한 이들도 그들의 가난을 끝장낼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자유는 있으되 그 자유를 맘대로 누릴 수 있는 자유는 없다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자유를 던져두는 것, 그것을 무엇으로 가능케 할 것인가? 얼 쇼리스가 말한다, "희망의 인문학"이 있다고.

얼 쇼리스는 인문학이 가난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한다. 왜 인문학이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가? 나는 길지만, 얼 쇼리스의 그 명쾌한 답변을 옮겨야만 하겠다.

   
 

  여러분들은 이제껏 속아왔어요. 부자들은 인문학을 배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인문학을 배우지 못했잖아요? 인문학은 세상과 잘 지내기 위해서, 제대로 생각할 수 있기 위해서, 그리고 외부의 어떤 '무력적인 힘'이 여러분에게 영향을 끼쳐올 때 무조건 반응하기보다는 심사숙고해서 잘 대체해나갈 수 있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공부입니다. 저는 인문학이 우리가 '정치적'이 되기 위한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정치적'이라고 말할 때는 단지 선거에서 투표하는 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보다는 좀 더 넓은 의미를 갖고 있는데요, 아테네의 정치가였던 페리클레스는 '정치'를 '자족에서부터 이웃, 더 나아가 지역과 국가 차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활동'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부자들은 바로 이런 넓은 의미로 정치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협상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잘 살기 위해, 또 힘을 얻기 위해 정치를 이용합니다. 부자는 착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못됐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회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데 필요한 효과적인 방법을 더 잘 알고 있는 이들이 바로 부자들이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류층이나 중산층들은 모두 인문학을 공부했을까요? 결코 그랬을 리가 없겠지요. 하지만 그들 중에는 분명히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있었고, 그런 공부가 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더 잘 살 수 있도록, 삶을 더 즐길 수 있도록 인문학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인문학이 여러분을 부자로 만들어줄까요?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단, 돈을 많이 벌게 해준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삶이 훨씬 풍요로워진다는 의미에서의 진정한 부자로 말입니다.

  부자들은 사립학교나 비싼 학비를 내는 대학교에서 인문학을 배웁니다. 그것이 모든 단계에서의 정치적 삶을 배우는 한 방법인 셈이지요. 저는 우리 사회에서 가진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정말로 차이가 있다면 바로 이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사람에게서, 그리고 사람들이 소유한 것들에게서 나오는 진정한 힘, 합법적인 힘을 갖고자 한다면 반드시 정치를 이해해야 합니다. 인문학이 도와줄 것입니다.

-얼 쇼리스,『희망의 인문학』, 217~8쪽.

 
   

내가 이 긴 문장을 인용하면서, 수십 타의 자판을 두드리는 수고를 하면서도 한 치의 망설임도 가지지 않았음을 강조해야 하겠다. 그 말은 어느 줄의 몇 문장은 빼놓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렇게 옮겨 놓고는 밑줄이라도 긋고, 굵은 글씨로 돋보이게 할 문장을 골라보려 했지만 그마저도 포기했다. 어느 것 하나 뺄 수도 없고, 또한 무엇 하나 더하고 덜함 없이 구구절절 중요한 문장이라고 판단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 문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얘기다. 자 여러분들도 다시 한 번 제대로 읽어보시라. 길다고 해서 대강 훑고 온 이들에게 드리는 말씀이다. 내 리뷰는 제쳐놓고 이 인용문만이라도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읽어보시라 이 말씀이다.

얼 쇼리스는 말한다. 니들은 속았다고. 우리를 이 지지리 가난 속에 얽매어 놓는 이 세상의 간악함(나는 얼 쇼리스가 어떤 '무력적인 힘'이라고 한 것을 간악함이라고 표현한 것이다.)의 해법이 인문학에 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인문학은 가난한 자들에게는 지지리 궁상이었다. 얼 쇼리스는 다시 말한다. 세상의 이 간악함에서 벗어나는 길은 우리가 정치적이 되어야 하는 것 뿐이라고. 그래서 무식하게 이판사판으로 나갈 것이 아니라 좀 더 똑똑해지고 교묘해 져서 이 간악함을 물리쳐야 한다고 말이다. 그것은 이판사판 공사판이 아니라 "진정한 힘, 합법적인 힘"으로 이 간악에 맞서는 최선의 방법이다. 정치, 그것을 알 때에 얻어지는 이 힘을, 인문학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문학을 이 가난한 자들이 왜 배워야 하는지를 말하는 얼 쇼리스의 이 네 문단의 강변을 통해 나는 무릎을 치며 탄복해야만 했다. 어떤가? 그럴듯하지 않은가? 똑똑하지 못한 가난뱅이는 지지리 궁상을 가난으로 떨어야 했다. 어쩌다가는 패악으로 치닫고 말이다. 우리 20년대의 신경향파 문학이 보여주는 대강의 줄거리가 그렇듯이 불 지르고 살인과 약탈로 결말지어지듯 말이다. 제도 외적으로 가난이 치를 떨 때, 그것은 제도권이라고 하는 세상의 간악에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깨갱댈 수밖에는 없다. 그러니 이제는 인문학으로 똑똑해져서 이 무력적인 힘을 한번 비웃어주고 그것을 가지고 놀면서 가난을 극복해 보라고 얼 쇼리스는 말한다. 가난한 자들이여 인문학을 배워라.

그러나 '어떻게'가 남는다.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 맹자 왈 공자 왈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저 좋은 거라니 좋은 것이려니 하는 정도는 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것도 나 밥먹여 주지 않으니, 그걸 해서 무엇 하겠냐는 것을 절감한다. 그러나 해야 된다고 얼 쇼리스는 말한다. 그래 해야 된다고 하자. 그럼, 한 시라도 손 놓아서는 밥 먹지 못하거늘, 언제 그 지리한 인문학 노릇을 하겠는가? 바로 '어떻게'가 남는 지점이다. 어떻게 인문학과 이 지지리 궁상 가난이 만날 수 있겠는가?

이 문제는 책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해결될 수 없는 곳에 놓여있다. 말하자면 '돈'이 걸린다는 얘기다. 선생도 필요하고, 장소도 필요하다. 그래서 얼 쇼리스는 다만 보여주기만 한다. 그는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면서 지원을 받아내고 협조를 구한다. 하나씩 하나씩 시작해가면서 각계의 호응을 얻어낸다. 다분히 성공적이다. 얼 쇼리스라는 한 사람에 의해서 파생된 이 인문학 프로젝트는 대단히 성공적으로 해를 거듭해가면서 그 효과를 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얼 쇼리스라는 몇몇의 지성인들을 통해 가능했다는 점은 문제다. 그렇다면 이 '어떻게'의 해법을 찾기는 불가능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내가 얻은 결론이다. 얼 쇼리스가 보여주고 있듯이, 그것이 사회 일각에서 작은 불빛으로 빛나고 있다면 그것을 사회적으로 큰 불이 되게 하는 방법, 곧 이 사회가 가난한 이들이 인문학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어 지원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사회는 '무력적인 힘'으로 지배되고 있지 않은가? (아 이런,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는구만!) 가난한 이들이 80%가 넘으니,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은 어찌 보면 어렵지 않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가난한 이들이 정치적이 되었을 때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렇다면 그것은 인문학을 가난한 자들이 배워야 가능하고, 또, 또, 또. 자 결론은 다시 얼 쇼리스에게로 돌아가야 하겠다. 얼 쇼리스라는 사람이, 그리고 이 가난을 끝장내는 유일한 길이 인문학을 배워야 함을 자각한 이 땅의 가난한 이들이, 하나씩 둘씩 나타난다면 그래서 조금 늦고 힘들다고 하더라도, 한 줄기 희망은 점차 큰 줄기의 불기둥으로 변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여간 어려운 문제다.

가난한 자들이 정치적이 돼야 하고, 정치적이 되기 위해서는 인문학을 통하는 길이 최선임을 얼 쇼리스가 말해주고 있지만, 얼 쇼리스처럼, 그리고 그와 동조하는 지성인들이 몸소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 한 또한 그것은 공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책 『희망의 인문학』이 우리 가난한 자들과 가난하지 않은 지성인들에게 읽혀야 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일단 우리 사회에 얼 쇼리스는 등장한 것처럼 보인다. 이 책의 번역자들인 <광명시 평생학습원>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이미 얼 쇼리스처럼 이 인문학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이미 작은 불빛을 밝혀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장작도 얹어 놓고, 가끔은 기름도 들이붓고, 그 인문학 불길에 이 가난한 몸 또한 던져 태우면서, 그렇게 그렇게 차츰 큰 불줄기 만들어 가면, 되는 것 아닐까? 이 책이 이 간악한 세상에서 금서가 되지 않는 한, 또한 금서가 된다고 하더라도, 읽어야 하고, 읽혀야 한다. 『희망의 인문학』으로 우리 다시 한 번 불온해 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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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7-11-06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브리핑에서 제목을 보는 순간 희망의 인문학이겠구나,했어요- 요즘 신이내렸나 ㅋㅋ 이 책을 만났을 때의 두근거림이라니! ㅎㅎ 성공회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성프란시스 인문학교나 관악인문대학, 수원인문대학, 제주희망대학 등도 있답니다- 예스24에 여기에 책을 지원하는 모임이 있는데, 알라딘에도 리뷰를 종종 올리시는 '인식의힘' 님께서 운영하고 계신답니다.

멜기세덱 2007-11-06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인식의 힘님....내 그 분이 그럴 줄 알았아요....ㅎㅎ
좋은 일을 좋은 분들께서 하시네요...ㅎㅎ(에고 부끄~~)
알라딘에서도 그런 일을 하면 참 좋을텐데.....ㅎㅎㅎ

물만두 2007-12-11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멜기세덱 2007-12-12 01:11   좋아요 0 | URL
헉!! 감사합니다^^

마늘빵 2007-12-11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멜기세덱님 사고 치셨군요!!! 우와와. 대형사고 쳤습니다!

멜기세덱 2007-12-12 01:11   좋아요 0 | URL
이런 일도 다 있군요. 다 아프님 덕분이에요...ㅎㅎ

아영엄마 2007-12-11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세덱님~ 일등 하신 거 축하드립니다~~. 대박 터트리고 올해 마무리 하시는군요~. ^^

멜기세덱 2007-12-12 01:1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임용고사 붙는 것보다 이게 더 기분이 좋은 것 같아요.ㅎㅎ

웽스북스 2007-12-11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멜기세덱님 정말 축하드려요!!!! 내년 책값은 걱정 없으시겠어요 아 부러워라~

멜기세덱 2007-12-12 01:1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근데 앞으로 한 3달은 걱정 없겠네요.ㅎㅎ

웽스북스 2007-12-12 13:12   좋아요 0 | URL
아이쿠, 제가 너무 과소평가 했었나보네요- 이 자기중심적 사고 ㅋㅋ

이매지 2007-12-12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악! 멜기님이 1등 하셨네요 !!
놀라서 낼롬 달려왔어요~
축하드려요 >ㅁ<
부럽부럽부럽 ㅎ

멜기세덱 2007-12-12 01:13   좋아요 0 | URL
아이고! 감사합니다. 저도 이게 웬일인지 모르겠네요.ㅎㅎ

라주미힌 2007-12-12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헉.... (기절) ㅎㅎㅎ

멜기세덱 2007-12-12 21:34   좋아요 0 | URL
(가슴을 잡고 흔들며, 따귀를 때려보기도 하고, 눈꺼풀을 뒤집어까보기도 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찬물을 얼굴을 확 끼얹고나서야 정신을 차리는 듯한 라주미힌님을 보며)

주미니형.....괜찮으세요? ㅎㅎㅎㅎ

코코죠 2007-12-12 0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그리고 원하시는 다른 일도 분명 이루어질 것이에요. 이건 좋은 일이 일어날 조짐이로군요^ ^

멜기세덱 2007-12-12 21:33   좋아요 0 | URL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 같아요....
ㅋㅋ
바라지도 못하구요...ㅎㅎ

뽀송이 2007-12-12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멋지게 한 해 마무리 하시는 것 같아 부럽습니다.^^

멜기세덱 2007-12-12 21:3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아직 올해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좀더 기대를 해 봐야죠...ㅎㅎ
난 아직 배고푸당...ㅋㅋ

다락방 2007-12-12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부러워서 달려왔어요!! 축하합니다 :)

멜기세덱 2007-12-12 21:34   좋아요 0 | URL
ㅎㅎㅎ 너무 늦게 오셨쎄요...ㅎㅎ
감사합니다...ㅎㅎ 모든게 다 다락방님 덕분이에요...?ㅎㅎㅎ

순오기 2007-12-13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축하합니다!
이런 건 메인에 대문짝만하게 달아 놔야 하지 않을까요?
축하부터 올리고 일등 리뷰도 찬찬히 잘 읽었습니다! ^^
댓글은 주렁주렁... 추천은 짠돌이? ㅎㅎㅎ

로쟈 2007-12-13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무스탕 2007-12-13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한 건 크게 하실줄 알았습니다. 하하하~

chika 2007-12-13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축하드립니다!! 멜기세덱님께성 원하시던 즐찾배가운동은 저절로 되겄슴다! ㅋ

프레이야 2007-12-13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해요~~~ 세덱님^^

dalpan 2007-12-13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여세를 몰아~

리치보이 2007-12-14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마노아 2007-12-14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당선 사실을 지금 알았어요. 멜기세덱님 축하드려요! 이건 진짜 너무 부러운 일이잖아요^^

드팀전 2007-12-14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해요

miony 2007-12-14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축하드립니다.^^

라로 2007-12-16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모낫!!!!축하해요!!!!이제 애인만 생기면 되겠네!!!!요!!!!ㅎㅎㅎㅎ

가시장미 2007-12-16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축하드려요. ^^ 아.. 어떻게하면 저런 리뷰를 쓸 수 있을까요?
저도 여러모로 반성을 해보아야 할 것 같네요.
아잇! 갑자기 제 서재에서 지우고 싶은 리뷰가 막 생각나네요.
대충써서 올린 리뷰들 있잖아요 ㅋㅋ
앞으로는 썼다 지웠다, 고민하고 고민하면서 리뷰를 써야 할 것 같네요.
멜기님께 중요한 것을 배웁니다. :)

이름없는꽃들 2007-12-18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책을 꼭 사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민중은 현명하다고들 말하지만, 더욱 현명해지고 지혜로워지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절망을 많이 느끼는 요즘 저부터 시작해 주위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문학을 함께 공부해 나가는 작업을 해야겠어요.

시비돌이 2007-12-22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당분간 책 값 걱정안하시겠네요. ^^
 
다산어록청상 푸르메 어록
정민 지음 / 푸르메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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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김제동 어록(語錄)이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 어록 중에 하날 가져오면 이런 식이다. “키가 작았던 나폴레옹은 자기 자신의 키를 땅으로부터 재면 다른 사람보다 훨씬 작은 키지만, 하늘에서부터 재면 자신의 키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높은 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도 희망을 가지시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세요.” 키도 작고 볼품없는 외모에 그다지 특별한 재능이 있어보이진 않지만, 말은 참 빠르고 재미나게 잘하는 김제동의 어록이 연일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화제가 되었던 데에는 이런 식의 촌철살인(寸鐵殺人)과 같은 반전과 당대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일순간 꺾어버리는 단순명쾌한 사고의 역전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폴레옹의 일화를(그것이 실제 있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용케도 찾아와 다만 입으로 옮겨놓았을 따름인데도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겐 주옥과도 같은 교훈을 주고 있기에, 김제동만의 어떤 호소력을 높이는 말하기 방법이 곁들여져서이겠지만, 한때나마 화제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면서 흔히 어록(語錄)이란 말이 유행이 되었다. ‘누구누구 어록’이라고 해서 재미난 말들, 혹은 말실수들 같은 것을 모아놓고 웃고 즐기는 것이 유행 아닌 유행을 탔다. 가장 최근의 것으로 내가 아는 것 중 하나는 전거성, 즉 전원책 변호사가 텔레비전 토론 등에서 한 발언들을 모아놓은 어록이다. 그 사람 말은 참 황당무계한 면이 없지 않지만, 가히 격분에 찬 말하기 모습은 너무 웃기게 재밌다. 아무튼 이 어록의 유행이 다만 웃기는 말모음 정도로 저급화되긴 했지만, 그 유행을 이끌었다고 할 수 있는 김제동의 말모음은 충분히 ‘어록(語錄)’이란 말이 지니는 무언가 거창하고 대단스런 의미에 값하는 것이지 싶다.

  정민 선생도 이 어록의 유행을 감지했던 것일까? 그랬다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요즘 무슨 어록이니, 누구 어록이니 하는데, 누구누구 말실수나 모아놓고 웃고 즐기는 것에 ‘어록(語錄)’이란 거창한 명칭을 붙여놓은 것이 못내 불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어쩌면 정민 선생은 이 어록 유행에 종지부(終止符)를 찍고 싶었을지 모른다. “어록이란 이런 것이다” 하고 말이다. 어록(語錄), 말씀 어(語)에 기록할 록(錄)을 쓰는 이것은 그냥 흔하디흔한 말들을 기록하여 모아놓은 것은 아니다. 말 중에서도 말씀이 될 만한 것을, 그러면서도 그것을 베끼어 써서 책으로 만들어 낼 만큼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민 선생은 어떻게, 무엇을 가지고 이 저급화된 어록의 유행에 종지부를 찍을까?

  그것은 바로 정민 선생이 엮고 첨언(添言)한 『다산어록청상(茶山語錄淸賞)』이다. 최근 다산을 연구하여 방대한 저술을 내보인 정민 선생이지만, 다산의 말과 글들이 어찌나 높고 귀한지 그 방대한 저술을 하고도 끝내 남은 귀한 말씀들이 있어, 아쉬운 마음에 모아 엮어 놓은 것이 이 책 『다산어록청상(茶山語錄淸賞)』이다. 그런데 이런 아이디어는 오롯이 다산 선생의 방법을 그대로 표절한 것이다. 다산은 이황의 『퇴계집』을 “매일 한 편씩 아껴서 읽”으면서 마음으로 공감한 귀한 글귀들을 모으고 거기에 자신의 생각들을 덧붙여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을 엮었다. 다시 정민 선생은 다산의 방법 그대로 다산의 글귀들을 모아 “말게 감상한” 『다산어록청상(茶山語錄淸賞)』을 펴낸 것이다. 말하자면 정민 선생의 「다산사숙록」인 셈이다.

  ‘다산어록(茶山語錄)’.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어록이야 말로 어록의 지존(至尊)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어록이라는 것이 ‘귀한 말씀’들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할 때, 그 귀한 말씀이란 것은 금가루를 갈아 먹인양하여 쓴 글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록으로 남겨 고이고이 간직하고 세대를 넘어 세월을 넘어 읽고 또 듣고, 길이길이 남기고 되새길 만한 그런 말씀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제동의 그 ‘말씀’들은 어느 정도 가치가 있지 싶은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도 좋게 보아줘도 그것이 세대를 넘기고 세월을 넘겨서까지 어록일성 싶지는 않다. 진정한 어록이란 이런 것이야 하고 보여줄 수 있을만한 ‘말씀’들이 어디 한갓 연예인의 입에서 쏟아진 것들이어야 쓰겠는가 하는 구시대적 사고에서 오는 그런 불순한 발상에서만은 아니다. 시대를 넘어 세월을 넘어 아직까지 우리에게 강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귀한 말씀들이 분명히 여기 있기에 그런 것이다.

  ‘청상(淸賞)’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맑게 감상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감상하는 이의 자세를 나타내는데, 감상하는 그 대상이 분명 맑고 청아하게 울릴 때에야 비로소 청상(淸賞)이 가능한 것이다. 정민 선생이 ‘청상’한다고 하였으니, 그가 그렇게 맑게 감상하는 것은 다름 아닌 다산 정약용 선생의 ‘귀한 말씀’이다. 다산의 방대한 저술들 중에 “삶의 자세 전반에 관한 성찰과 충고”를 추려 엮은 『다산어록청상(茶山語錄淸賞)』을 손에 들고 한 말씀 한 말씀 되새기는 것은 정말이지 “우리의 복이요” 큰 기쁨이다. 그래서 나도 “함께 나누고 싶다.”

  200년 전 쯤에 살았던 다산 선생의 말씀이 그 당시에도 그러했겠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산은 이렇게 말한다. “죽는 날 사람과 뼈가 함께 썩고, 한 상자의 책도 전하는 바가 없다면 삶이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人與骨俱朽, 一簏之書無所傳, 猶之無生.)” 여기에 정민 선생은 좀 더 격하게 덧붙인다. “마음공부를 하라 하면 ‘한가한 소리 하고 앉았다’고 빈정댄다. 책을 읽으라면 ‘따분한 말 좀 그만 하라’고 한다. 온통 돈 벌 궁리, 부자가 되어 떵떵거리고 살 생각뿐이다. 결국 이룬 것 없이 죽어 몸뚱이가 식기도 전에 이름과 같이 잊혀진다. 자식들은 그 재물을 두고 싸움질을 한다. 세상을 살다 가는 보람은 그런 것들 속에는 들어 있지 않다. 속에 품은 생각의 크기가 대인과 소인을 가른다. 개돼지도 배부르면 기뻐한다. 개돼지도 별 걱정 없이 살다가 간다.” 이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뼈아프게 다가오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돈만을 좇아가는, 썩어질 것들에만 충성하는, 물신(物神)의 광신자들만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 어찌 이와 같은 말이 주는 울림이 적다고 하겠는가?

  “성인(聖人)이 되느냐 광인(狂人)이 되느냐는 뉘우침에 달려 있다.(其聖其狂, 唯悔吝是爭.)”라거나 “진실로 부모에게 능히 효도하는 사람은 비록 배우지 않았더라도 나는 반드시 배웠다고 하겠다.(苟於父母能孝者, 雖曰不學, 吾必謂之學矣.)”는 다산의 어록에는 날카로운 칼날로 찔러오는 그 무엇이 있다. 항상 생각하고 반성해야 한다는 것은 미친놈이 되지 않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대학을 가고 대학원을 나와서 석사가 되고 박사가 된들 무엇 할 것인가? 이 시대 재주가 뛰어나고 박사들이 넘쳐난다지만 그 중에 사람구실 제대로 하는 진짜 사람을 몇이나 될까? 제 부모도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이 말씀들은 가히 촌철살인, 그 자체다.

  특히 다산 선생은 독서를 많이 하기로 유명하다. 다산의 말씀들 중에 독서에 관한 언급은 책 한 권으로 따로 엮어내어도 충분할 만큼 어느 하나도 소중한 말씀이 아닌 것이 없다. 다산은 독서의 방법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 보탬이 안 되는 책을 읽을 때는 구름 가고 물 흐르듯 해도 괜찮다. 하지만 백성과 나라에 보탬이 되는 책을 읽을 때는, 단락마다 이해하고 구절마다 깊이 따져 대낮 창가에서 졸음을 쫓는 방패막이로 삼아서는 안 된다.(凡無益於世之書, 讀之可如行雲流水. 若其書有裨於民國者, 讀之須段段理會, 節節尋究, 不可作午牕禦眠楯而已.)” 여기에 정민 선생의 이런 첨언도 또한 명쾌하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읽느냐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다산의 어록을 읽으면서 정민 선생이 청상(淸賞)한 바를 또한 훔쳐보는 것은 또 다른 기쁨이다. “평생 가까이에 두고 스승으로 삼을 책 한두 권을 갖는 것이 독서의 큰 보람이요 행복이다.” 정민 선생의 ‘청상(淸賞)’ 중에 하나를 좀 길지만 옮겨보자. “과문은 과거 시험장에서 쓰는 글이다. 실용과는 거리가 있다. 이문(吏文)은 아전들이 행정 실무에 쓰는 실용문이다. 요령만 있으면 된다. 고문은 삶의 지혜가 담긴 말씀이다. 배우기는 고문이 가장 쉽다. 과거 공부를 하는 사람은 과문만 공부한다. 고문을 공부하라고 하면 시험에 안 나오는데 왜 하느냐고 되묻는다. 고문을 열심히 익히면 과문은 저절로 잘 써진다. 과문에만 힘 쏟으면 고문도 안 되고 과문도 안 된다. 글은 테크닉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쓴다. 테크닉을 아무리 익혀도 정신의 뒷받침이 없이는 한 줄도 쓸 수가 없다. 과문을 배우는 지름길은 고문을 천천히 익히는 것이다. 좋은 글을 쓰려면 먼저 생각의 힘을 길러라. 글쓰기의 기술과 잔재주를 익히는 것은 별 도움이 안 된다. 기본기를 충실히 닦아라.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온다.” 다산 선생의 말씀을 좀 더 쉽게 옮기면서 보다 직접적으로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특히나 논술이라는 감옥에 빠져버린 어린 학생들에게 일침을 주는 또 다른 어록이다. 다산과 정민을 함께 읽는 두 배의 즐거움이 이 책 『다산어록청상(茶山語錄淸賞)』에 있다.

  이 밖에도 구구절절한 다산의 어록이 많다. “즐거움은 누림을 급히 하지 않아야 늙도록 이어지고, 복은 다 받지 않아야만 후손까지 미친다네.(樂不亟享, 延及耄昏. 福不畢受, 或流後昆.)”, “무릇 재물을 비밀스레 간직하는 것은 베풂만 한 것이 없다.(凡藏貨秘密, 莫如施舍.)”, “대저 이미 동서남북의 가운데를 얻었다면 어디를 가든 중국 아님이 없거늘, 어찌 이른바 동국으로 본단 말인가? 대저 어디를 가도 중국이 아님이 없을진대, 어찌 이른바 중국으로 본단 말인가?(夫旣得東西南北之中, 則無所往而非中國. 烏覩所謂東國哉! 夫旣無所往而非中國, 烏覩所謂中國哉!)” 등의 말씀들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이렇게 200년 전을 살았던 다산 정약용의 어록은 오늘날에도 구구절절이 유효하고 새롭다. 오랜 세월을 묵혀 읽어도 새롭게 발효되는 말씀이고 나서야, 진정한 어록이라 이름하는데 손색이 없지 않겠는가? 김제동 어록이 따라올 수 없는 지경에 다산의 어록이 있음을 새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정민 선생이 정리하여 첨언한 이 책 『다산어록청상(茶山語錄淸賞)』은 다만 인터넷 검색으로 간단히 찾아 여흥삼아 읽고 보는 김제동 어록을 비롯한 누구누구 어록과는 달리, 책상 위 한 곳에 고이 모셔두고 하루하루 읽고 되새기며 ‘맑게 감상’하고 나를 돌아보게 하는, 진정한 이 시대의 어록이지 싶다. 이쯤 돼서는 일전의 어록 유행도 더는 나대기가 어렵지 않겠나? 연암(燕巖) 어록이 나온다면 또 모르겠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서가에는 3, 4천 권의 책을 꽂아두고, … 마루에 올라 방에 들면 거문고 하나와 투호 하나가 있다. 붓과 벼루, 책상과 도서의 배치가 고아하고 정결해서 기뻐할 만하다.(揷架書三四千卷, … 上其堂入其室, 有琴一張, 投壺一口. 筆硯几案圖書之觀, 雅潔可喜.)”는 다산의 말이 어찌 내 마음과 똑같은지 너무 기쁘고 즐겁지 않을 수 없었다. 40세 이전에 4천 권의 책으로 방안의 네 벽을 채우고, 책상 위에는 볼펜과 연필을 채운 단정한 필통이 한 곁에 놓여 있고, 한 쪽엔 컴퓨터가 있으며, 한쪽 구석엔 기타와 피아노가, 또 다른 쪽엔 바둑판과 바둑알이 놓여 있는 곳, 들어서면 오랜 된 책 향기가 깊게 배어나오는 그런 서재 하나 갖고 싶은 내 마음이 간절하다. 다산이 기뻐했던 그런 공간과는 많이 다르면서도 그 맥은 다르지 않은 그런 공간, 그런 곳을 하루 빨리 마련하여 다산의 그 마음과 나의 이 마음이 서로 통하는 그 기쁨을 만끽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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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 - 미국의 식민지 대한민국, 10 vs 90의 소통할 수 없는 현실
지승호 지음, 박노자 외 / 시대의창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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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 초엔가, 서울 교보문고엘 심심풀이차 왕림한 적이 있었더랬다. 한 바퀴를 풀코스로 도는 데만도 한 시간을 족히 잡아먹고도 남음이 있으니, 이는 내 심심파적을 여한없이 달래주기에 딱 알맞은 놀이다. 여기서 가장 먼저 대면하는 곳은 신간서적 코너다. 이날도 신간들을 어영부영 살펴보던 차에 눈에 확들어오는 책이 있었더랬다.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禁止를 금지하라』, 멋있는 제목이라고 해야할까? 왠지 단순히 멋지다고만 할 수 없는 어떤 포스를 담고 있는 것같았다. '무슨 책이지?'란 의문이 들어 집어들었다.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새겨있었다. 딱 봐도 알만한 사람들말이다. 박원순, 조정래, 마광수를 비롯 <PD수첩>의 PD들. 이 사람들이 왜 이리 한데 모여있을까 하는 궁금증은 '지승호의 열 번째 인터뷰집'이란 안내로 이내 풀렸다. 그런데 지승호? 과연 못 들어본 이름이다. 탓하자면 나의 귀가 과문한 책임이지만, 지승호란 이름은 못 들어본 대로 지나쳐도 좋았다. 흥미를 끄는 책 제목과 관심을 끄는 인터뷰이들이 충만했으니 말이다.

집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 대강 목차정도를 훑어보고는 책장 한켠에 모셔져 있었다. 인연이 아직 아니었던 것일까? 아직 순서가 오지 않아서였던 것일까? 순서가 아직 안 왔다는 것은 그 전에도 사 놓은 책들, 그러니까 읽어주어야 할 책들의 목록이 이미 줄줄이 예약되어 있었다는 것이고, 인연이 아직 아니었다는 것은 아마도 지승호란 인터뷰어와의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그 예약된 목록들을 다 소화해 낸 것도 아닌데, 인터뷰어 지승호와의 인연은 얼렁뚱땅 시작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런 걸 인연이라고 하는 것이지 싶다. 어쩌면 그와의 인연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비판적 지성인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든가, 『마주치다 눈뜨다』, 『7인 7색』이란 인터뷰집이 이미 내 눈에 걸리기만 고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지승호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그 쟁쟁한 인터뷰이들 때문에, 나는 인터뷰어 지승호와의 인연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피할 수 없고 말았다.

최근에 나온 지승호의 인터뷰집 『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은 그 주범이고 말았다. 그 주범은 박노자, 한홍구, 진중권, 손석춘을 '납치해 심문'하고 나를 협박하고 있었으니 내가 어찌 피해갈 수 있었겠는가? 박노자나 한홍구는 내가 꾸준히 구해 읽는 1순위 저자들이고, 진중권은 최근 관심을 갖고 있던 이고, 손석춘은 얼마 전 읽은 그의 책 『과격하고 서툰 사랑고백』때문에 호감을 갖고 있던 이다. 결국 지승호는 알게 모르게 내 성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피할 수 없는 유혹의 손길을, 아니 유혹의 그물망으로 나를 덮쳐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지승호의 이 협박과 유혹의 구렁텅이에 풍덩 빠져버린 것에 그 어떤 불만이나 피해보상을 요고하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가령 "대학등록금 문제는 국민적 문제라고 볼 수 있는데, 문제는 학생들이 학교가 자신을 현금지급기로 취급해온 것을 더 이상 당연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30쪽), "이것이 더 이상 투자라기보다는 자본에 돈을 빼앗기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거나, 무료로 공부를 한다는 것이 나의 천부인권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되는데, 우리는 아직까지 자본하고 거래를 해서 뭘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31쪽)라는 박노자의 날카로운 지적을 속시원히 듣게 해준 데 대해서는 감사해야 하는 것이 지당하기만 하다.

한홍구는 어떤가? "피폭당해 죽은 한국 사람이 히로시마에 3만, 나가사키 1만, 모두 4만 명이 넘어요. 그런데 우리 역사책에서는 이걸 안 가르칩니다. 20세기 우리 역사가 정말 울퉁불퉁했다지만 하루에 3만 명이 죽은 날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지고 나서 4만 명이 죽었는데 이걸 역사 시간에 안 가르친다니까요. 왜냐하면 수십 년 동안 미군의 핵무기가 우리한테 있었잖습니까? 그래서 핵무기가 이렇게 나쁜 거라는 얘기를 하면 안 되는 거죠. 아직도 미국의 핵우산 속에 있다는 걸 다행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고요. 한반도의 핵 문제를 가지고 얘기하려면 이런 문제를 얘기해야죠."(193쪽)라는 말씀에 가만히 귀기울이게 된다. 이 아니 감사한 일 아닌가?

진중권의 인터뷰에서는 또한 실망시키는 않는 차갑도록 유쾌한 언설이 있다. "사람들이 미래를 못 보니까 자꾸 과거를 보는 거예요. 미래에 대한 프로젝트가 없으니까 기껏 정치권에서 나온 유일한 프로젝트가 운하를 파겠다는 거잖아요. 독일에도 운하가 있는데요. 석탄 나르는 것 외에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지 않아요. 그런데 요즘 같은 시대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석탄 나를 일은 없잖아요."(299쪽)라거나 "인구의 99퍼센트가 영어 해서 뭐해요. 자기 직업상 필요해서 하는 거라면 좋은데, 그게 아니잖아요. 재는 거잖아요, 성적으로 자르는 거. 일종의 과거 시험처럼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걸 하는 거죠. … 사람들이 영어를 유창하게 해도 무식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돼요. 그런데 그런 생각을 안 하잖아요. 발음 막 굴리는 무식한 애들 있잖아요.(웃음)"(303쪽)에서는 웃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이 외에도 그간 내 관심을 끌지 못했던 지식인들에 대해 접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는 것은 또한 귀한 이 책의 미덕이다. 홍세화, 김규항, 심상정이 그들이다. 막연했던 심상성의 이미지를 얼마간이라도 좋은 내용으로 채워넣을 수 있었고, 내 독서목록에 홍세화나 김규항의 책들을 집어넣어야만 하게 만들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구구절절이 인터뷰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밑줄 그어가면서 읽는 내내, 참 만족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인터뷰만의 모자람에서 오는 갈증을 또다른 것으로 채우게끔하는 그런 달콤한 유혹 혹은 맛보기로서 말이다.

인터뷰가 본시 영어인데, 영문으로는 interview라고 쓴다. 이게 'inter-'와 'view'의 합성이다. 'inter-'는 상호(相互)를 의미하고 'view'는 '보다'라는 뜻이 된다. 합쳐보면 '서로 보다'라는 뜻이 되는데, 그렇게 보면 인터뷰는 어원적으로 '서로 보는' 행위를 전제하는 것이 된다. 서로 보며 무엇을 하겠는가? 서로 쳐다보면서 대화하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때론 상대의 말씀을 경청해 듣는 것 아니겠는가? 근래에 우리가 인터뷰라고 하면 기자가 어떤 특정인을 상대로 무언가를 캐묻는다던지, 대학입시나 취업시험에서의 면접 등을 떠올리게 된다. 이는 대면하여 물음으로써 상대의 그 어떤 것을 알아내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찾아보니 'view'에는 '조사하다'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 조사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살펴 알아내는 것이다. 알고싶은 것을 밝혀 끄집어 내는 것 말이다.

이 인터뷰집도 본시 그런 것이지 싶다. 무언가를 끄집어 알려내는 것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인터뷰집의 생명은 인터뷰어가 누구냐에 달려 있다. 이 책의 인터뷰어가 누구인지를 다시 살펴보게 되는 것은 별 일이 아니다. 내가 듣고 싶었던 박노자의 이야기, 내가 들을 수 없었던 한홍구의 또다른 이야기, 내가 알지 못했던 진중권의 재치와 위트 혹은 독설, 그리고 한편으론 그동안 관심두지 않았던 또다른 지식인들에게 흥미를 가지게 만드는 것, 이런 것들이 이 인터뷰집에 담겨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이 인터뷰집의 인터뷰어를 다시 보게 만드는 무언가로써 충분하지 않은가? 지승호. 그는 '무엇을 말하게 할 것인가?'를 항상 심도있게 고민하고, 결국은 그것을 말하게 하는 능력을 지녔음에 틀림없다. 그와의 인연을 이렇게 흥미롭게 시작하는 것은 새로운 즐거움이고, 또한 거대한 기대를 품게 만드는 것이며,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순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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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7-10-20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이 책 구입했어요.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금지하라는 '조정래'편만 읽었는데, 요 리뷰 읽으니 빨리 봐야겠단 생각이 드네요.

멜기세덱 2007-10-20 19:46   좋아요 0 | URL
저도 금지를 금지하라 빨리 읽어봐야 되는뎅...ㅎㅎ 특히 조정래 선생 편이요..ㅋㅋ

2007-10-20 15: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10-20 19:46   좋아요 0 | URL
저도 잘 알고 있는 걸요..ㅎㅎ
 
스포츠 키드의 추억
신윤동욱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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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말에서 스포츠(sports)는 외래어에 속할 것이다. 그것이 외국어가 아니라 외래어가 된 데에는 그만큼 우리 생활(혹은 언어생활) 속에 깊이 침투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국어로서의 'sports'를 우리말로 번역해보자면, 얼핏 '운동'이나 '체육' 정도가 될 텐데, 우리는 굳이 'sports'를 스포츠라 애써 말한다. 왜일까? 거기에는 스포츠와 운동과 체육이 가지는 그 어감과 어의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무언가가 있다. 근대 이후에 'sports'가 전해지면서 형성된 스포츠는 나름의 영역을 구축해왔고, 또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또는 각기 대중들의 일상적 차원에서 그것은 '운동'이나 '체육'과는 다른 담화상황에서 사용되어 왔다.

흔히 우리는 "운동하러 간다"고 하지 "스포츠 하러 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일반인들에게 실행되어 지지 않는 '스포츠'의 특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니까 스포츠는 아마추어리즘(amateurism)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프로 스포츠와 대비되는 아마추어 스포츠가 가지는 좁은 의미의 아마추어리즘이 아닌 보다 넓은 의미의 아마추어리즘 말이다. 달리 말하면 일반인들의 '스포츠 활동'을 우리는 '스포츠'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지성이 맨유 팀에서 첼시와 축구를 하면 스포츠지만, 우리 옆집 아저씨가 조기 축구팀에서 축구를 하면 다만 운동이지 스포츠가 되지 못한다. 재밌는 것은 박지성이 우리 옆집 아저씨와 함께 조기 축구팀에가서 축구를 해도 스포츠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스포츠는 보다 프로페셔널(professional)한, 직업적 전문적 영역의 운동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스포츠와 체육 사이의 관계는 또다른 측면에서 대별된다. 체육이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여지는데, 그 차이는 '체육 뉴스'가 아니라 '스포츠 뉴스'라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운동'되어지는 대부분의 것이 체육이라면, '운동'되어지는 것들 중에 '보여지는' 측면이 강한 것이 스포츠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체육 뉴스'가 아닌 '스포츠 뉴스'라는 조어에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두 가지에서 얻을 수 있는 스포츠의 영역은 보다 전문적이고 직업적이며, 대중에게 보여지는 영역의 운동 혹은 체육의 일부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말에서의 스포츠는 말이다.

그래서 이 스포츠는 근대 이후의 산물이면서 국가주의의 유효적절한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근대 이전에서도 체육이 이런 기능을 담당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근대 이후에 그것이 체육이나 운동으로부터 더욱 분화되면서 '스포츠'로서의 보다 강력한 영역을 구축했다는 의미에서 이것은 근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로부터 스포츠는 비판받아 왔다. 3S 정책으로서 대중을 선동하고 현혹하는데 이용된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현대에서 스포츠의 영역은 더욱 굳건해지고 그 영향력을 지대하게 확장해왔다. 이것은 스포츠가 3S 정책의 하나로서만이 아닌 그 어떤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근거이지 않을까? 여기 그 또 다른 무엇을 증거하는 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신윤동욱이다.

신윤동욱이란 이름을 몇 번은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 이름을 어떻게 해서 듣게 되었는지는 지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도 '디워' 논란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하는데, 그것도 확실치는 않다. 하여튼 신윤동욱은 『한겨레21』 문화부 기자로 그간 스포츠 부분을 담당해왔다. 그는 오래전부터 스포츠와의 인연을 뒤늦게 되돌아보며 스포츠 칼럼을 풀어나갔고 드디어 그것을 모아 이 책 『스포츠 키드의 추억』을 내어놓은 것이다.

   
    태극기에 갇힌 스포츠, 그것은 『한겨레21』에 연재했던 「스포츠 일러스트」의 주요한 주제였다. 거꾸로 비추니 부끄럽기도 하다. 스포츠를 이렇게 애국주의 프리즘으로 보았던 것은, 뒤집어 보면 내가 스포츠를 즐기는 방식이 애국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도 된다. 하여튼, 한국에서 그래도 정치적으로 올바르려고 하는 사람에게, 스포츠 보기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여전히 가벼운 커밍아웃이다. 이제는 스포츠를 인민의 아편으로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여전히 '스포츠를 좋아해?'란 질문에 의아해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6~7쪽)  
   

그에게 스포츠를 좋아한다는 사실의 고백은 아직 '커밍아웃'해야 할 것의 성질이다. 여전히 스포츠에 대한 어떤 경박함의 인식이 남아 있다는 얘기다. 적어도 이 사회의 지식인입네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이야기들 속에는 다분히 좌파스러운 부분이 많이 담겨있다. 스포츠를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좌파적이라는 사실에서 그가 스포츠를 좋아한다는 고백은 여전히 '커밍아웃'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좀 다르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스포츠 보기에 중독된 인생, 태극마크에 대한 집착은 되도록 버리고 스포츠를 보면서 인생도 느끼고 세상도 생각하자는 뜻"(7~8쪽)에서 이 책을 엮었다고 말이다.

"스포츠를 보면서 인생도 느끼고 세상도 생각하자"는 좋은 뜻에서 대부분 스포츠를 보지만, 그 스포츠를 봄으로서 느끼는 인생이나 세상은 다분히 경쟁적이고 약육강식적인 단면들이 대부분이어서 문제이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 스포츠를 전하는 주체, 곧 이 사회의 지배계극이 스포츠에 담아내고자 하는 부분들만을 전하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 이 책이 다루는 "스포츠중계에, 스포츠뉴스에는 제대로 나오지 않는 얘기"는 보다 넓은 시각에서 스포츠를 봄으로써 스포츠에 담긴 진정한 인생의 의미나 세상의 이면들을 엿보자는 것일테다. 하여튼 어느 시인이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고 했지만 신윤동욱을 키운 것은 팔할, 아니 그 이상이 스포츠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만 같다.

스포츠는 그를 어떻게 키웠을까? 그의 인생에 있어서 스포츠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스스로를 '스포츠 키드'라고 말하는 그의 스포츠의 추억을 무엇일까? 우리가 이 책을 따라 읽으면서 공감할 부분이 무척이나 많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 모두가 그와 함께 '스포츠 키드'이기 때문이다. "나는 농구대잔치의 마지막 팬클럽이다. 내 인생에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바로 그 시절이다. 내 인생에 그토록 순수한 몰입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15쪽)라고 말하는 신윤동욱처럼은 아니지만 우리가 추억하는 한때의 시절에 어느 하나의 스포츠가 있는 것은 대다수일 것이다.

이 책은 다만 스포츠에 얽힌 추억을 주구장창 나열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 스포츠에 담긴 다양한 이면들 속에서 그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들도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간혹 이런 서술을 보자. '나는 무조건 오래 뛰는 선수가 좋다. 오래 뛰는 언니들은 더 좋다. 즐기지 않으면 오래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맨날 맞고 한다면 오래 못한다. 언니들의 긴 선수 생명은 스포츠의 민주화를 상징한다."(24쪽) 우리나라 핸드볼팀의 언니, 혹은 아줌마 선수들을 보고 한 얘기다. 우리 사회의 스포츠에 담긴 어두운 이면들이 무척이나 많음을 우리는 이 책에서도 제법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체격 좋고, 얼굴 좋고, 스타일 좋은 청소년 대표팀이 좋다. '본 투 비'로다가, 애국심과 적당히 거리두기를 하는 그들의 태도는 더 좋다. 조국에 대한 비장미가 없으니까 상대에 대한 비정함도 없다. 내가 나카타에 매료됐던 바로 그 이유로, 청소년 대표팀에 매혹 됐다. 나는 근성 없는 한국 축구가 좋다.
  이제 그럴 때도 됐다.(30쪽)

 
   

우리 스포츠에서의 애국주의와 국가주의는 참 씁쓸하기만 하다.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이 어쩌다 일본에 지기라도 하면 치욕이니 어쩌니, 반면에 이기면 '도쿄 대첩'이니 하면서 얼토당토 않게 국가와 민족을 갖다 붙인다. 이 지지리 못난 궁상에서 이제는 벗어나 "애국심과 적당히 거리두기를 하는" 스포츠를 나 또한 보고싶다. "아버지 같은 명감독에 잘 따르는 여자 선수들이라는 '가부장 시나리오'가 완성된다. 유사 가부장에 유사 부녀 관계다. 한국 산업화의 눈물겨운 발전 모델과 유사하다."(58쪽)는 지적도 우리 스포츠가 여전히 품고 있는 문제들이다. 이런 우리 스포츠의 어두운 면들을 이 책은 곳곳에서 지적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이 단순한 스포츠 타령이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빌 생클리 리버풀 전 감독은 이런 '명언'을 남겼다. "어떤 사람들은 축구를 생사가 걸린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태도에 실망을 감출 수 없다. 축구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축구를 생사의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팬들에 의해, 축구 선수들의 생사가 위협당하고 있다. 축구의 역사는 '광기의 역사'이기도 하다.(78~9쪽)
 
   

비단 축구에서만은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 스포츠에 생사 이상을 걸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누구하나 스포츠에 어느 정도 걸지 않은 사람은 드문 것도 사실이다.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4강에 진출하는 날, 나는 군생활을 걸기도 했다. 무슨 말이고 하니, 당시 스페인과의 경기 중 나는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다. 위병소 옆에 마련된 면회실의 텔레비전을 몰래 틀어놓고 중계를 관전하느라 여넘이 없었다. 그때는 누가 오건 말건 축구가 중요했었더랬다. 우스갯소리지만 우리는 흔하지 않는 귀중한 것들을 스포츠를 위해 간혹 희생하고 살아가기도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책은 그러니까 이런 것들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스포츠에 담긴, 위에서 언급한 어두운 이면들과 함께 왜 이렇게 많은 것들을 스포츠에 걸고 살아가는가 하는 그 이유들을 엿보기도 하고, 정말이지 인생의 축소판같은 스포츠의 장면 곳곳에서 어쩔 수 없는 감동과 추억을 애틋하게 되돌아보기도 하고 있는 것이다. 신윤동욱에게는 농구가 무엇보다도 깊은 추억의 스포츠였듯이, 우리들 모두에게는 어떤 애틋한 스포츠 하나쯤은 갖고 있기 마련이고, 스포츠 스타에 대한 열광과 감동 하나씩쯤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이 책에서 저자와 함께 '스포츠 키드'였음을 자인하지 않을까 한다.

길게 쓸 리뷰가 아님에도 쓸데없이 길어졌다. 이 밖에도 세계 여러 곳에서 벌어진 스포츠 장면들을 이 책은 담아내고 있다. 이전의 기억들도 되새겨볼 수 있고, 우리가 몰랐던 스포츠의 이면들도 이 책을 통해 들여다보는 재미가 농후하다. 저자의 필치도 재치가 넘친다. 간혹 저자의 성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드는 '오빠'니 '언니'니 하는 언설이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불악무도한 전장군의 무식한 전술에 전도된 듯한 혐오감이 없지않지만, 대한민국에 한번쯤 '스포츠 키드' 아니었던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쩌면 우리모두는 '스포츠 키드' 아닐까? 이 사실에 자못 분개만 할 것은 아닐 것같다. 적어도 이 책을 읽고나서는 말이다. 이 책은 떳떳하게 나도 '스포츠 키드'였음을 커밍하웃하게 해 주는 충분한 응원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앞서 스포츠가 가지는 의미를 나름 짚어보았지만, 여전히 스포츠는 3S 정책으로서의 일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포츠 없이는 살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살아간다. 저자가 마지막 장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스포츠를 즐기되 "일주일에 3번 이상, 하루 30분 운동"(269쪽)도 함께 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하지 싶다. 그러니까 '스포츠=운동'까지는 아니더라도 스포츠는 스포츠대로 운동은 운동대로 어느하나 치우치지 않는 생활건강이 필수적이지 않을까? 한가지 더 붙이자면, 저자는 명확히 언급하지 않지만, 스포츠를 보는 맹목적 시선을 거두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을 통해서 그런 스포츠를 보는 보다 비판적 시선을 배울 수도 있다. 저자 신윤동욱에게서 말이다. 재밌게 읽히면서도 뼈가 있는 그런 책이라고 한다면 너무 극찬이겠지만, 약간 물렁뼈는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물렁뼈 하나쯤은 가지고들 계시라.

트집 : 이책은 편집에 약간 문제가 있다. 33쪽에 "1985년 훌리건의 난동으로 39명이 숨진 헤이젤 참사(32쪽 사진)"라고 했는데, 32쪽에는 아무런 사진도 없다. 그 사진은 뒷장 34쪽 상단부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또 있다. 131쪽 "34살 동갑내기 오모트(124쪽 사진)"를 보려면 124쪽으로 가면 안 된다. 거기엔 워메인지, 에토오인지 아님 드로그바인지 모를 축구선수 사진이 있을 뿐이다. 가려면 132쪽으로 가야할듯 싶다. 거기에는 노장 스키선수로 보이는 사진이 있다. 이런 실수는 좀 이해하기 어렵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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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9-27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윤동욱 기자가 이런 책도 냈군요. 이 기자분 한겨레21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기사 전담했던(?) 분이랍니다. 얼마전 책도 냈는데, 그 책이 이 책보다 먼저 나온거 같네...

멜기세덱 2007-09-27 16:01   좋아요 0 | URL
오늘 하루종일 답답해서 혼났어요. 우리학교는 이상하게 종종 알라딘이 안 될때가 있어가지구....ㅋㅋ
아 그랬었군요. 이름을 많이 들어봤다 했는데, 얼마전에 칼럼집을 낸 것이 있더군요. 그것도 함 읽어봐야겠군...추석 잘 보내셨죠?

비로그인 2007-09-27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나도 거의 다 읽었는데 흑흑... 멜기님 리뷰에 밀려서 난 리뷰도 못 올리겄네 ㅠㅠ...
넘 잘쓰셨다... 추천!

멜기세덱 2007-09-27 16:02   좋아요 0 | URL
헉!
전 체셔님이 리뷰 쓰실까봐 걱정이에요. 어째, 뭐만 쓰면 그렇게 인기가 폭발이신지....저 막 후달려요....ㅋㅋㅋ

2007-09-27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09-27 16:03   좋아요 0 | URL
아 그게 그거군요. 좋은 정보 감사...
저는 추석을 그럭저럭 외롭게 잘 보냈어요....ㅎㅎㅎ

심술 2007-09-27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따금 알라딘에 안 들어가져요. 동병상련하는 분이 있으니 왠지 덜 외롭네요.

멜기세덱 2007-09-27 21:40   좋아요 0 | URL
제가 있는 곳은 대학교인데요, 여기 전체 망에 문제가 있는거 같아요. 제 컴퓨터가 안 들어가지면, 다른 컴퓨터도 안 들어가지더라구요....이상하게시리..
집 컴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데 말이에요....
도대체가 답답해서리....

잃어버린우산 2007-09-27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주문한 책인데, 리뷰 잘 읽었습니다.

멜기세덱 2007-09-27 21:40   좋아요 0 | URL
재밌게 읽으시길 바라요....ㅎㅎ

프레이야 2007-09-27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그인 안 하고 들어왔는데 추천하려고 로그인 했네요.^^

멜기세덱 2007-09-27 21:41   좋아요 0 | URL
담부턴 로그인 하고 들어오세요. 추천 안하려다가도 추천하시게....ㅋㅋ

시비돌이 2007-09-28 0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포츠가 나쁜 양부모라는 얘기군요. ㅋㅋ

멜기세덱 2007-09-28 09:41   좋아요 0 | URL
나쁜 양부모라기보다는,
친부몬데, 알고보니 이 부모가 입양아였다거나 혼혈이었다 정도요...ㅋㅋ
그렇다고 부모를 버릴 순 없다...뭐 이런거죠....ㅋㅋ

시비돌이 2007-09-28 09:43   좋아요 0 | URL
아, 그런거구나, 꼼꼼히 읽지 않고 단 댓글이라 금새 표시하네요. 어쨌든 나쁜 양부모도 버리긴 힘들잖아요. ㅋㅋ

twinpix 2007-09-30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굉장히 잘 쓰셨네요. 서평단 도서로 받아서 리뷰 써야 하는데, 이 리뷰보니 감탄만 나옵니다. 'ㅁ'

멜기세덱 2007-09-30 22:51   좋아요 0 | URL
잘 쓰긴요 무슨...좋게 봐주셔서 그렇죠...ㅎㅎ
근데, 감탄만 나오시는게 좋아요. 토까지 나오면 지지잖아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