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행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정태원 옮김 / 태동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추리 소설이나 서스펜스 영화를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이 장르는 대략 3가지로 흘러가지 않나 생각되어진다. 첫째는 사건이 일어난 후 범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궁금증. 종반부에 이르러서 예상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사람이 진범임이 드러났을 때 이야기는 극도의 쾌감을 전한다. 두번째는 범인을 미리 밝혀주고, 범인을 잡고자 하는 주인공과 아슬아슬한 추격전. 과연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으며, 어떻게 붙잡을 수 있는지가 흥미진진하다. 세째는 범인이나 또는 추격자의 트릭. 범죄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또는 범인을 어떻게 유인해서 잡아들이는지에 대한 방법 그 자체가 흥미를 끌어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 소설 <백야행>은 이 세가지 부류로 구분하기에는 어려울듯 싶다. 물론 소설의 종반부에야 범인을 확실히 밝힌다는 점에서 첫번째로 볼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관심있게 책을 읽는다면 아마 첫 살인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 순간부터 범인을 예상할 수 있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혹시나 결말 부분에 어떤 반전이 숨어있지 않을까 기대도 해보지만 그건 그냥 기대로 묻어두어야만 한다. 그렇다고 두번째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범인을 드러내놓고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추측은 하지만 정작 본격적인 추격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더군다나 새로운 사건이 계속해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첫번째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세번째 분류에 속해 기상천외한 어떤 트릭을 숨기고 있는냐 하면, 실제로 책을 읽어가면서 범죄의 방법에 대한 궁금증은 그다지 크지 않다는 점에서 비껴가고 있다고 하겠다.

그럼 도대체 이 소설은 무슨 재미로 읽는단 말인가? 솔직히 범인도 이미 알아챘고, 기발한 방법이 동원되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는 것만으론 책을 읽는 동력이 조금 모자라다. 그래서 중반부의 후반부터는 조금 지루한 감이 없지않다. 그럼에도 책의 결말을 기대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그 점이 이 책의 장점이라고 볼 수 있겠다. 도대체 왜 이 사건은 발생한 것인가? 라는 이유에 대한 궁금증. 바로 왜라는 측면에 이 소설의 재미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오사카의 한 동네. 전당포 가게 주인이 짓다 만 건물의 내부에서 시체로 발견되어진다. 사건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1년 후 근처 아파트에 살던 주부 한 명이 자살인지 사고인지 모를 이유로 죽는 일이 발생한다. 두 사건은 연결된듯 하지만 그 고리를 찾을 순 없고 결국 유야무야된다. 시간은 흘러 전당포 가게 주인의 아들과 주부의 딸이 초등교 5년에서 어느덧 중학생이 되고, 또 고등학생이 되고... 이렇게 시간은 흘러간다. 그리고 그들 주위에선 이상하게도 계속 범인이 밝혀지지 않는 사건들이 발생한다. 첫번째 사건이 발생한 후 19년간의 행적을 담아낸 소설은 마침내 범인을 밝히고 그들이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를 이야기한다.

소설 속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이 사건의 발단은 부모가 부모로서의 역할을 내팽개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로리타 컴플렉스까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유아에 대한 성의 집착이나, 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해선 자식도 팔아먹는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삶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관심없는 엄마 등등.

원래 자신에게는 모성이라는 것이 결여되어 있다고 야에코는 생각하고 있었다. 료지를 낳은 것도 아이를 원해서였던 것이 아니라 낙태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요스케와 결혼한 것도 이것으로 일하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내와 엄마라는 역할은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답답하고 따분한 것이었다. 그녀는 아내와 엄마가 아닌 늘 여자이고 싶었다.(하권 257쪽)

상처받은 자가 상처를 감싸안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 받은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남에게 주고 마는 세상의 섭리가 무서워진다. 그것이 섭리가 아니라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만의 행태라면 좋을 것을... 세상은 가끔 낮이 찾아오지 않는 끝없는 백야일지도 모른다. 소설의 주인공은 이 백야를 어떻게든 살아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 종착지는 어디일까? 이해할듯 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분노가 함께 서려있는, 조금은 허탈한 추리소설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유의 감옥 올 에이지 클래식
미하엘 엔데 지음, 이병서 옮김 / 보물창고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고 난 첫 느낌은 어렵다는 것이다. 동화적 양식을 띠고 있고, 무한한 상상력을 지닌 이야기 덕분에 감탄하면서도,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언뜻 감이 잡히지 않아 난감하게 만든다.

먼저 떠오른 생각은 세상은 하나의 공간과 하나의 시간에 따라 구성되어진 곳이 아닐수 있다는 것. 즉 사람마다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어우러져 살아가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음, 그렇게 말하면 안되겠다. 세상은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사람의 수만큼 많은 세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 이런 무한한 세상에 대한 이야기는 단편<조금 작지만 괜찮아>와 <보로메오 콜미의 통로><교외의 집>에서 살펴볼 수 있을듯 싶다. 자동차 속에 그 자동차가 정차할 차고가 있다는 발상이나, 보이는 무한의 점을 향해 자신도 무한의 시간을 여행해야 한다는 것, 집안은 아무 것도 없이 바로 문과 문이 통하는 공간 등은 그야말로 상상력의 무한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이런 무한의 공간을 통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다른 단편 <미스라임의 동굴> 이나 <자유의 감옥> <여행가 막스 무토의 비망록> <길잡이의 전설>등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이야기로 비쳐진다. 자유의 감옥이라는 표제 그대로 이야기의 촛점을 맞추어 읽다보면 마치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는듯한 착각에 빠져드는듯 싶다. 선택의 순간에 주어지는 무한한 자유가 주는 두려움과 불확실로 인한 공포로 인해 차라리 세상이 흘러가는대로, 또는 누군가의 명령에만 그대로 따라가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면 말이다.

현실이 괴로워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그 탈출의 경로를 스스로 선택해야만 한다는 상황이 그를 더욱 괴롭힌다. 그래서 미스라임의 동굴 속의 그림자는 빛의 세계로 나갈 수 있는 바로 문 앞에서 돌아서며, 자유의 감옥 속의 주인공은 결코 미래의 어떤 문도 열어젖히지 못하는 것이다. 여행가 막스 무토는 실제로 자신이 목표로 세웠던 것을 잊어버리고, 점차 눈 앞의 사태에만 매몰되어져 간다. 길잡이는 끝내 자신의 꿈을 버리고, 현실과 타협합으로써 꿈의 세계와 맞닥뜨렸을 때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자유 앞에서 주춤하는 이들 주인공들이 모두 비참하다거나 불행해보이지는 않는다.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불쌍해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네 마음 속에서 동경해온 대상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되면, 훨씬 자유로워질 수 있을거야.

<미스라임의 동굴> 의 레프요탄 박사의 말이다. 레프요탄은 과연 현실의 고통을 없애주는 정치가인지, 아니면 진짜 현실로부터 벗어나 가짜 세상속에서 대중을 마음대로 지배하는 독재자인지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인물이다. 따라서 위의 말 또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즉, 훨씬 자유로운 몸이 실제론 자신을 구속하는 요소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이 소설을 읽어나가는 어려움이다.

물론 이런 혼돈은 개인적인 것이리라 여겨진다. 그럼에도 이렇게 지금 내가 혼란스럽게 책을 읽어나간 것은 현실의 내가 혼란한 지점에 서 있기 때문이며, 이런 혼란한 세상 하나를 내가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게 뭐 어쨌다는겨'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다른 또 하나의 세상을 가질 것이며, 따라서 꿈을 꾸는 것이 행복한 그런 세상 또한 나는 가질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따라서 <자유의 감옥>에 나오는 인샬라처럼 아무런 선택을 하지 못하고 현실 속에서 눈이 먼 상태로 남아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꿈이 구속이 될지도 모르는 두려움을 안고서라도, 꿈이 진정한 자유가 될 수 있는 세상의 문을 향해 다가가 마침내 그 문을 열어 젖힐것이라는 희망을 품는다. 그리고 바로 이 희망도 또는 반대로 절망도 이 책 <자유의 감옥>에선 독자들 스스로가 선택해서 취하는 책이 펼쳐놓은 천차만별의 세상일련지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강타하고 엄청난 피해가 일자 미국은 아우성이다. 늑장대응이라는 비난과 함께 인종차별 문제까지 들고 일어났다.  게다가 허리케인 5등급의 리타가 다시 멕시코만을 위협하자, 이번엔 지구온난화에 미온적인 자세를 보였던 부시를 질타하는 소리도 나오고 있다. 아마도 정치적 색깔을 띠고 있는 공격성 비판으로 보이긴 하지만 일견 무시못할 부분이기도 하다. 온난화로 인해 허리케인의 강도가 거세어지고 있다는 분석은 아마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지 않을까 싶다. 

이런 문제와는 별도로 온난화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보면, 그 대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다른 문명의 문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듯 싶다. 일반적으로 문명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과학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근거없는 낙관 속에 빠져 있다. 배가 터지게 먹고나서 소화제 먹으면 된다는 식의 발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반면 온난화에 대한 논의에선 이산화탄소의 발생량을 줄이자는 식의 해결책이 나오고 있다. 즉 배터지기 전에 조금 덜 먹어보자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다. 지구가 따뜻해지면 지구의  온도를 떨어뜨릴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보자는 방식이 아니고서 말이다.  문명이 일으킨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인간의 욕망의 크기를 조절하자는 생각은 인간이 자연을 완전히 정복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조금 비켜간 겸손한 방식일지도 모른다.(물론 여기에도 선진국이 후진국에 대한 오염수출산업이라는 경제논리가 숨어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책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은 바로 이런 근거없는 과학적 낙관론을 기반으로 한 서구 문명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돋보인다.

갑자기 돌은 하나의 상징이 된다. 지금 이 순간, 이 돌은 서구과학이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의 결정체가 된다. 계산, 증오, 희망, 공포, 모든 것을 측정하려는 시도.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어떤 공감보다도 강한 것- 돈을 바라는 욕망.

그러고 보니 이 책이 마치 문명비판서처럼 느껴질련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시계에 의해 자신의 삶을 지탱해간다. 거기에 약간의 변화만 주면 거의 언제나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또한 '스밀라...' 는 재미있는 추리소설이다.

한 아이가 옥상에서 떨어져 죽는다. 경찰은 자살로 생각하지만 주인공 스밀라는 절대 자살이 아님을 확신한다. 그것은 옥상 위에 남겨진 아이의 발자국 모양새를 보고서 판단한 것이다. 스밀라는 그린란드인으로서 눈과 얼음에 대한 탁월한 지식과 감각을 지니고 있다. 스밀라는 왜 아이가 죽었는지 알아보려 한다.

소설은 아이의 죽음을 발단으로 그 뒤에 감추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어떻게 하나로 연결되어지는지 매우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155센티미터의 스밀라가 톡톡 내뱉는 말이나 갑작스런 행동들 하나하나는 그녀를 굉장히 매력적으로 만든다.

자신에게 잉여가 있을 때나 사랑이 일어나는 것이다. 기초적인 본능들, 굶주림, 잠, 안전에 대한 요구로 환원되고 나면, 사랑은 사라지고 만다.

라고 이야기하는 스밀라는 그러나 그 밑바탕에 한없는 애정을 지니고 있다. 단순히 소년의 죽음으로 치부할 수 있건만 그녀가 그토록 그 죽음의 원인을 캐고자 했던건 아무래도 소년을 사랑했기 ‹š문이리라. 때론 냉소적으로, 세상에 무관심한듯 보이지만, 그녀는 삶을, 자유를 사랑했다. 이런 그녀의 모습은 현대인의 외로운 사람들을 그대로 비쳐주는 것 같다. 외로움에 익숙해진 사람들, 하지만 그 속에 감추어진 한없는 따뜻함. 스밀라는 바로 현대인들의 자화상이자, 점차 잃어버리고 있는 체온이다. 어느 순간 느닷없이 찾아오는 그리움의 대상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이 재미있는 이유는 사건의 얼개와 그것을 풀어가는 캐릭터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모두 흥미롭기 때문이다. 

스밀라는 이 소설을 통해 삶과 자유는 욕망의 크기를 줄여나갈때 더욱 커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외로운 이들이여, 스밀라를 사랑해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 인생의 이야기 행복한책읽기 작가선집 1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수학이나  과학이 현실과 멀어진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사는데 지장 없는데 무엇하러 배우는지 모르겠다는 불평도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그냥 잔뜩 숫자가 나열되어 있고, 뜻모를 암호같은 공식만 가득할 뿐 그것이 개인의 삶을 영위하는데 어떤 쓸모가 있을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원자폭탄이 떨어짐으로 인해 세계대전이 종말을 고하고, 그 이후 세계권력의 재편이나 힘의 싸움에서 핵은 결코 현실과 멀어진 적은 없다. 지금도 그 핵을 에너지로 쓸지, 무기로 쓸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끌고 당기는 국가간의 게임을 하고 있으며 이것은 우리의 생명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그 폭탄의 괴력을 알아챈 것은 물리학이었으며, 따라서 내가 직접 손으로 느끼고 눈으로 보지 않을지라도 수학이나 과학은 삶의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컴퓨터 없는 삶을 상상하기도 힘든 요즘엔 더욱 그 알듯 모를듯한 공식들이 전혀 쓸모없는 어떤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생활패턴 자체를 완전히 뒤바뀌도록 만드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수학, 과학의 근원적인 힘인 것이다.

테드 창의 단편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과학철학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SF라고만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 작품도 있어 판타지와 SF가 섞여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듯 싶다. 1+1=2라는 가장 상식적인 생각이 무너진다면 과연 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 원리라고 생각했던 것들의 토대가 무너지는 순간 우리는 기우뚱거릴수밖에 없다. 솔직히 나는 그것이 무너지는 바로 그 순간을 상상하는 것조차 힘들다. 하지만 테드 창은 바로 그런 순간들을 포착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흥미롭다.

특히 페르마의 최단 시간의 원리를 소개하고 있는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는 우리의 사고가 시간적 흐름 속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발한 착상을 하고 있다. 즉, 나의 행동이 어떤 원인을 거쳐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과가 나와 있는 원인적 행동을 취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빛이 물을 통과할때 굴절을 하는데 그 굴절한 빛이 도달한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는데 걸린 시간이 최소가 되는 것만큼 굴절하게 된다는 것이다. 빛이 그대로 직진하면 빠르지 않을까 생각하겠지만 물 속에서 빛의 속도는 느려지기 때문에 물 속에서의 거리가 어느 정도 더 짧았을 때 전체 시간이 짧아질 수 있으므로 굴절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 운명론을 떠올리게 만든다. 순차적인 경로를 통한 인생의 흐름이 아니라 이미 도달점이 정해져 있고, 그 도달점을 향한 길마저 정해져 있다는 것. 그 길이 바로 운명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따라서 오히려 빛의 성질인 페르마의 원리대로 살아가지 않는 우리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이미 운명론과는 거리를 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할수도 있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게 만든다.

이 외에도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나 <지옥은 신의 부재>같은 경우는 전혀 딱딱하지 않으면서도 굉장히 유쾌한 즐거움을 준다. 특히 <외모...>는 다큐멘터리 기법을 이용해 똑같은 현상에 대해 다양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옮겨적듯이 써내려가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의 입장차를 담아내고 있는 것에 감탄하게 된다. 외모에 대한 감상을 없애주는 기계를 착용할 것인지 말것인지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들은 어떤 한쪽에 치우침없이 서술하면서도 우리네 사회가 어떻게 잘못 굴러가고 있는지를 통렬하게 보여주고 있다. <라쇼몽>이나 <오!수정>이 기억의 다름을 이야기하고 있긴 하지만 이것 또한 사람들의 처지에 따라 그것을 기억하는 모양새가 달라지는 것에서 재미를 느끼듯, <외모...>가 비록 기억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입장차가 한 현상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다양한지, 정말 흥미진진하다.

세상에 굳건하게 버티고 서 있는 사고의 기틀을(그 사고를 규정하는 언어에 대한 소설이 많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의심하고 깨뜨려보는 테드 창의 이야기들은 정말 놀랍고 재미있다. 그리고, 그 깨어진 사고의 틀 속에서 현실에 대한 깨우침을 전해준다는 점에서 테드 창은 항상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icaru 2005-09-16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무쟈게 사보고 싶네요....아..책이 탑을 그것도 여러개의 탑을 만들어 가고 있는데..(이런 덴장...!)

물만두 2005-08-30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리게 만드는 매력이 있죠^^

하루살이 2005-08-30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카루님의 탑이 무너지는 순간을 고대하며...
아~그런데 얼마나 기다려야하죠 물만두님.
 

로알드 달 지음, 정영목 옮김 / 강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모든 禍의 근원은 욕심에 있다고 선인들이 말씀하시고, 경서를 통해 주의를 주건만, 으례 당연한 가르침임에도 당연하게 지켜내지 못하는데서, 그런 말씀들이 세월의 잊혀짐 속에서도 굳건히 남아 우리의 눈과 귀로 전해져오는 것은 아닌가싶다.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 시기 질투하지 말라 같은 명령투의 금언들은 간혹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조차 갖지 못한채, 그저 지켜야만 하는 무엇으로 인식되건만, 실행은 무던히도 힘들다. 아마 금지된 행동이 가져올 결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말고는 정작 그 말씀들이 힘을 가질 수 있는 어떤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는 탓일지도 모른다. 아니, 근거의 빈약보다는 차라리, 욕망의 실현이 가져다 줄 달콤함이 잘못된 결말이 불러올 참혹함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일련지도 모른다.

이런!!! 로알드 달의 <맛>이라는 이 단편집은 너무나도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나는 엉뚱하게 이다지도 딱딱한 소리를 해대고 있다니... <맛>을 읽는 재미는 마치 맛있는 과자가 다 없어질까봐 조심조심해서 하나하나 꺼내먹는 것에 비유될정도로 크다.  마지막 반전이 가져다주는 유쾌함과 통쾌함. 그래서 오히려 그 마지막 반전  앞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잠시 읽는 것을 멈추고 싶을 정도다. 이 반전을 읽고 나면 이 이야기가 끝이 난다는 점이 너무 아쉬워서 말이다.

<맛>에 실려있는 단편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은 어떤 일관된 흐름을 가지고 있다. 먼저 주인공이 집착하는 무엇인가를 소개하고, 그것을 발견한 다음, 그것을 얻기 위한 작업에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집요한 작업의 과정 속에 드러나는 주인공의 심리 묘사는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행동이나 대화를 통해, 마치 내가 그 탐욕의 현장 바로 그곳에 있으면서 주인공인마냥 착각할 정도록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그리고 바라던 바를 얻어낸 것 처럼 느끼는 바로 그 순간, 성취감이 느껴질 정도의 느긋함이 어떤 여유로움을 주는 바로 그 순간에 로알드 달은 독자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 갈긴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독자는 눈알이 튀오나올 정도록 아프기 보다는 웃음보가 터져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리고서 가슴 깊게 다가오는 탐욕의 허무함과 상실감.

자, 그 뒤통수를 맞고도 당신은 바로 그 어떤 것에 집착해 조마조마해하며 살아갈 것인지 저자는 입가에 웃음을 띠운채 넌지시 묻는다. 독자에게 어떤 직접적인 설교를 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의 욕심이란 것의 끝없는 확장과 그 허무한 결말을 통해 작가는 유쾌한 삶의 행로를 살짝 보여주는 것 같다. 내가 웃어제낀 바로 그 어리석은 탐욕의 주인공처럼 되지 말라는 충고로 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5-08-30 14: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살이 2005-08-30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이제 별 다섯 개 주는 거 정말 부담스러워지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