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하느님
조정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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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살아간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다.

그런데 정말로 그런가?

조정래의 소설을 읽다보면, 삶이란 운명이라는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모습으로 비쳐진다. 물론 그 허우적대는 모습이 서로 다르다는 점에서, 그리고 바다에서 의지하고 있는 것(항공모함을 탄 사람이 있을수도, 튜브를 탄 사람이 있을수도, 산산조각난 나무를 의자하는 사람도 있겠다)이 다르다는 것에서 개인적 차이가 나지만 말이다.

이번 소설은 일제시대때 강제징용된 소작농의 아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일본군으로 끌려가서 몽고와 소련 연합군과 싸우다, 소련군의 포로가 된다. 살아남기 위해 다시 소련군으로 복무하며 독일군과 맞선다. 다시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이번엔 독일군이 되어 미군과 대결한다. 그리고 미국으로 포로가 되어 옮겨졌으나, 다시 미국과 소련의 협약에 의해 소련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겪어야만 하는 생존만을 위한 삶이란 처절하다. 포로수용소에서, 전쟁터에서 이들은 사람이 아니다. 그저 단순히 전쟁 무기이며, 숫자일뿐이다. 배고픔을 견디고, 추위를 견디고, 쏟아지는 총알을 피해 도망친 것은 고향에 있는 가족때문이다. 돌아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었다. 설령 돌아갈 곳이 없다 하더라도 생명은 쉽게 저버릴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은 주인공뿐만 아니라 그 주변 인물들도 계속 선택의 상황에 놓인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자유로운듯 보이지만 그 실상을 보면 한도라는 것이 주어져 있다. 시대적 상황이 부여하는 선택인 것이다. 이들의 삶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 그리고 저렇게 살 바에야 라고조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연민을 자아내는 비참함에 몸서리 쳐진다. 그래도 끝까지 놓지 않는 것은 희망이었다.  

그런데 소설을 읽고나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이들에게 주어진 선택의 상황이 현재 어떻게 주어져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분명 그들보다 더 인간적이고, 더 풍요하고, 더 자유로운듯 하지만 여전히 우린 운명이라는 울타리안에서만 선택이 가능하다.

IMF가 그렇고 FTA가 그렇다. 상황이 우리를 선택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 선택이 삶을 결정짓고 있다. IMF의 터널을 지난 지금 FTA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자유경쟁이라는 허울좋은 시장에서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게 된 사람들은, 이제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옆에 두고 약육강식이 삶의 법칙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선택의 여지는 없는가?

소설 속에선 이들이 소작농이었기에 더욱 억울한 운명의 파고를 겪는다. 세월은 흘렀지만 운명이라는 파도의 성격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사람의 넋을 놓게 만드는 사나운 파도는 그것을 견딜만한 사람들에겐 닥치지 않는다. 아니다.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것이 다르기에 그 존재감도 다를 것이다. 항공모함에게 그깟 파도쯤이야 무슨 대수겠는가. 하지만 나무판자에 의지하고 있는 사람에겐 크나큰 생명의 위협이다.

운명이라는 바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수영을 할 줄 아는 능력보다도 오히려 날개가 필요하다. 살아가는 기본 바탕 자체를 바꾸는 수밖에 없다. 바다에서 하늘로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내가 있는 곳이 바다임을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자각 속에서 '오 하느님'을 외치고 날개를 달기 위해 팔을 허우적댈 것이니 말이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오! 하느님, 불쌍한 어린 양들을 버리지 말아주시옵소서.

오늘 내가 서 있는 지금 이 곳은 운명의 기류에서 어디쯤인지 돌아보고 싶다.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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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마켓 스타
가쓰라 노조미 지음, 양억관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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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0년차 공무원 노무라 사토시. 새로운 정책으로 1년간 민간기업에서 특별연수를 받게된다. 하지만 부임처는 시 외곽의 할인마트점. 종업원 72명이 근근히 버티고 있는 곳이다.
소설은 주인공 노무라와 종업원들간의 충돌을 재미있게 묘사한다.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나오는 소설은 웃음 뒤에 숨은 교훈을 하나 남겨준다. 쳇바퀴 같이 돌아가는 일상, 그냥 묻혀 지내면 쳇바퀴를 굴릴 뿐이지만 자신이 변한다면 쳇바퀴도 변하다고 이야기한다.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복지부동의 표산 공무원 노무라. 다 쓰러져가는 할인마트의 꿈도 없이 그럭저럭 하루를 버텨나가는 종업원들. 노무라는 진급을 하고 싶고, 종업원들은 정리해고의 대상이 되고싶지 않다. 하지만 예전처럼 살아간다면 결과야 뻔한 일. 노무라는 민간기업을 대하던 무사안일주의에서 벗어나 정말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우치게 된다. 종업원들은 하루하루 포기하던 삶에서 꿈을 하나 둘 찾아간다. 포기하고 있었던 삶 속에서도 실은 나름대로 가치를 찾으려 했던 사람들은 노무라의 패기와 뭉쳐 일을 저지른다. 매출의 가파른 성장세. 인간의 의지가 구조마저 바꾼다는 소설의 내용은 현실 속에서 가능한 일인지 더듬어 볼 일일테지만, 희망을 품게 만든다.
엄마는 친구 있어? 친구가 어쩌구 저쩌구 하는 건 미숙한 어린애들이나 가지는 환상이다. 평생의 친구가 되자고 굳게 맹세한들 생활환경이 바뀌면 눈 깜짝할 사이에 마음에서 지우ㅝ져버린다. 대체 친구가 있어 뭘 하겠다는 거야.(40쪽) 마트의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지만 마트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니노미야. 생각도 말도 모두 쌀쌀맞지만 정작 마음은 따뜻하다. 그리고 노무라에 의해서 그 마음이 활짝 빛을 발하게 된다.
모순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아무리 억울한 일이 있어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어떻게 이 애에게 가르칠 수 있을까(135쪽) 니노미야의 지독한 비관적 자세. 하지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자세야 말로 바로 희망으로 가는 첫 발일 수도 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첫 발은 살아가는 그 정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책임지고 싶지 않으니까, 지난번과 똑같은 일만 계속하겠지. 책임지면 되잖아. 누구의 눈치를 볼 것도 없이 자기 생각대로 해서 그냥 책임을 지면 폼 나잖아. 지금 하는 일에 대해 의문을 가져봐.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야. (243쪽)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변화는 바로 이 말부터다. 관례대로 전례대로 살아가는 삶은 책임을 회피하는 자세로부터 나온다. 내가 책임지면 어때? 새롭게 시작해보는 것도 괜찮잖아. 만약 당신이 지금 이 현실이 못마땅하다면 말이야...
죽음이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거야. 우린 지금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고 있어. 잘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만. 내일 죽을지도 모르니까 오늘을 즐기며 살아야 하지 않겠어?(280쪽)
책임지는게 괴로울 거라고 생각하지 말자. 내 일을 만들어 그것을 즐겨보자. <슈퍼스타>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괜찮아, 잘 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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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 걸
마이조 오타로 지음, 김성기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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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당신은 살인마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소설은 살인마마저도 이해하는 친절한(?) 아이코가 주인공이다. 물론 처음엔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돌아오면서 낙관론자로 변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삶이란 안개속을 걸어가는 길. 그저 죽지않고 살아가기 보다는 길을 걷는 즐거움을 얻는 게 좋을 것이다. 

걸어가야 할 길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지만, 그 거리는 불화실하고 덧없는 거니까. 말하자면 길은 멀지만 거리는 무상하다는 거네. 바로 그거야. 자꾸 세상과의 거리감 따위를 생각하면 노구치 씨나 하스미 씨처럼 높은 데서 뛰어내리거나...(21쪽)

아이코는 아마도 중학생인 것 같다. 자신이 짝사랑하는, 아니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사랑을 얻지 못하고, 화가 나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소문날까봐 근심걱정이다. 다음날 학교에서 아이들이 그 다른 남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를 화장실로 끌고 가고, 아이코는 먼저 선수를 쳐 마키의 얼굴을 박살낸다. 그런데 잠을 잔 그 남자아이는 실종됐다. 잘린 발가락만이 집으로 배달되어 왔다.

최근 세간에 빙글빙글 마야라는 살인마로 인해 시끄럽다. 세쌍둥이를 토막내고 유기한 살인범. 또 하늘소리 라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폭동이 야기된다. 소설에선 살인마의 시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대목이 한 부분을 차지한다. 세상이 온통 괴물이라면 괴물을 바라보는 삶을 살 것인지, 차라리 괴물이 될 것인지 고민스러운 부분이다.

혼자 부들부들 떨기보다는 차라리 괴물의 일부가 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262쪽)

가엾어와 귀찮아가 늘 서로 싸우고 있어. 요지의 소중한 가엾어가 꼴사납고 시시껄렁한 귀찮아한테 지지 않았으면 좋겠어.(95쪽)

아이코는 자신이 사는 마을에 폭동이 일어나는 어수선할 때 자신을 찾아온 마키에게 망치로 일격을 당해 병원에 실려간다. 그러면서 마키가 죽음의 강을 건너는 장면이 환상으로 나타난다. 그 환상은 자신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다. 이 환상의 공간에 아이코를 살리고자 하는 사람과 그녀를 죽음쪽으로 데려가려는 사람들 사이에 유혹 작전이 펼쳐진다. 이 공간은 순전히 자신의 상상력에 달려 있다는 것이 재미있다. 그리고 이 상상력 속에서 갑자기 아이코는 빙글빙글 마야라는 살인마의 머릿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의 영혼이 살인마에게 빙의가 된 것이다. 모든 사람은 어떤 끈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이 부분 또한 상당히 재미있는 상상이다.

겨우 현실로 돌아와 숨을 쉬게 된 아이코. 그는 살인마의 머릿속을 경험한 덕분인지 살인마의 심성까지도 이해하게 된다. 살인마의 행위 그 자체도 결국 자신을 찾고자 하는 행복하고자 하는 즐겁고자 하는 행위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말로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지 어떤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즐겁다고 느끼는 마음이 진실이라면, 더 이상 문제될 게 없다. 만사 오케이. 나는 내 존재를 의심하는 것조차 즐기고 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건 즐거움이다....그러니까 지금 사람들이 하고 있는 행동은 본인들이 택한 가장 즐거운 일이다. .. 즐겁다. 여전히 멍청한 짓만 하고 있지만.(312쪽)

인간은 뭔가 즐거움을 찾아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으니까(314쪽)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돌아온다면 아이코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일들은 그저 지루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벌인 일들이니까 말이다. 그것이 모두 용납될 수 있을까? 귀찮아에서 벗어나 가엾어로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소설은 그 시선을 희생자 뿐만 아니라 가해자에게도 돌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세상이 그토록 고리따분하게 돌아가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세상이 아수라장이 되더라도 이해하라고...

 

사족:실은 가해자의 심리를 이해하기 보다는 인터넷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실감나게 만든 소설이기도 하다. 가상의 현실이 현실을 어떻게 유린해 가는지 소설은 조용히, 그리고 살며시, 그리고 돌려서 이야기하고 있다. 아니, 그냥 대놓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워낙 다른 이야기들이 강렬하다보니 잘 드러나지 않은 것 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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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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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은 것은 몇 주 전인데 이제서야 자판을 두드린다. 붕어에 가까운 기억력으로 8편의 단편 내용을 떠올려보려 하지만 쉽게 생각나진 않는다. 나쁜 소설과 국기게양대 로망스, 수인 정도가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정도다. 어쨋든 소설이 꽤 재미있는 반전으로 끝을 낸다는 공통점이 있어 읽는 재미가 솔솔하다.

무엇보다도 강렬하게 인상을 남긴 3편을 포함해 대부분의 소설들이 웃음 뒤에, 나와  내 주변을 힐끗 돌아보게 만든다는 묘미도 있다. 내가 처한 위치, 또는 목적이 흐지부지되고 주위 환경에 동화되거나 또는 차라리 오해가 나은 착각이나 속내를 비쳐보일 수 없는 아부 등이 소설을 전반적으로 채색하고 있다. (게양대 국기를 훔쳐 생계를 유지하는데 게양대를 사랑하는 사람과 만난다. 소설만 읽어주겠다면서 결국엔 응큼한 행동을 한다. 거짓말의 냄새를 맡다가 어느새 거짓말을 풍긴다 등등) 

정말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지다.

그냥 날 내버려두세요 할 수 없는 사회적 동물, 인간. 사람과 사람 사이라는 뜻의 인간. 나의 정체성은 타인과의 관계로 형성된다는 인간. 이러니 내 이럴수밖에.

소설 속 등장인물의 갈팡질팡함이 꼭 내 마음 속을 닮아 애잔하면서도 부끄러운 웃음을 흘린다. 제발 내 무덤앞 비명엔 갈팡질팡하다 이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래도 어쩌랴 갈팡질팡하는 것이 숙명에 가까운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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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의 픽션
박형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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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으면서 들었던 첫 느낌은 당혹감이다. 음` 소설도 이렇게 쓸수 있는구나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고나 할까. 짧은 논문같은 느낌이 들었다가 일기장을 보는 것 같다가 꿈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가 기괴한 공상과학영화를 보는 것 같다가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지루하다거나 너무나 황당무계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무엇보다도 머리를 후려갈긴 것은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라는 단편이다. 마치 논문을 써내려가듯 소설 속 달걀이라는 단어를 집중 해부하면서 이것이 음란소설임을 증명한다. 작가의 후기에서처럼 친구들이 정말로 이 소설을 음란 소설로 치부하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글장난이 얼마나 그럴싸 하는지를 방증한다.

논쟁의 기술은 또 어떤가. 논쟁이라는 것이 토론과 달리 승부가 결정나는 한판 싸움임을 강조하며 그것이 생사와 맞먹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그 과정을 보고 있자면 정말 쓸데없는 것들을 끌여다들이는 한심한 작태에 웃음이 터져나오고, 논리가 아니라 치사함으로 승리를 거두고자 함이 결국 살인까지 이어지는 황당무계함을 보여준다.

그러고보니 유독 이 작가는 죽음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희미한 기억을 되살려보면 8편의 단편에서  적어도 5편은 죽는 모습이 나온다. 노란 육교는 아예 죽음으로 향하는 망자가 자전거를 타고 간다는 설정이다. 사는 것도 알지 못하는데 죽음이야 어떠하겠는냐라는 공자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일까? 요즘 사람들은 하루하루 살아가는데만 몰두해있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지 생각해볼 겨를조차 없다. 당장 죽음이 눈앞에 닥쳐온대도 눈하난 깜짝안할 태세다. 어쩌다가 이렇게 살고 있는 거지?

소설은 죽음을 통해 현재를 돌아보게 만든다고까지는 말하지 못하겠다. 그저 죽음이 죽음으로 그려지는 것 같다. 집착하지도 초연하지도 않은 상태. 죽음을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상태. 그렇다면 그것은 또 살아가는데 어떤 의미인가?

두유전쟁을 보면 애시당초 이런 질문을 던지지 말라는 것 같다. 머리기름이 유전적 가치를 지닌 한 사내를 둘러싼 미국과 한국의 대결은 그저 코미디일 뿐이다. 그러고 보면 소설 속에 나타나는 죽음은 코미디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에라, 모르겠다. 한바탕 웃으며 살아보자~. 이래저래 이세상도 저세상도 코미디 아닌가? 망상에 가까운 꿈일지라도 놓치거나 버리지말아야 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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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12-29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라~...하하하하
내년에는 순수문학책을 좀 읽어보려구요.
아마 하루살이님의 리뷰가 많은 도움이 될 듯 싶습니다.

하루살이 2007-01-02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도움이 될련지... 제멋대로 읽는 버릇이 많아서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