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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감옥 ㅣ 올 에이지 클래식
미하엘 엔데 지음, 이병서 옮김 / 보물창고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고 난 첫 느낌은 어렵다는 것이다. 동화적 양식을 띠고 있고, 무한한 상상력을 지닌 이야기 덕분에 감탄하면서도,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언뜻 감이 잡히지 않아 난감하게 만든다.
먼저 떠오른 생각은 세상은 하나의 공간과 하나의 시간에 따라 구성되어진 곳이 아닐수 있다는 것. 즉 사람마다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어우러져 살아가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음, 그렇게 말하면 안되겠다. 세상은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사람의 수만큼 많은 세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 이런 무한한 세상에 대한 이야기는 단편<조금 작지만 괜찮아>와 <보로메오 콜미의 통로><교외의 집>에서 살펴볼 수 있을듯 싶다. 자동차 속에 그 자동차가 정차할 차고가 있다는 발상이나, 보이는 무한의 점을 향해 자신도 무한의 시간을 여행해야 한다는 것, 집안은 아무 것도 없이 바로 문과 문이 통하는 공간 등은 그야말로 상상력의 무한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이런 무한의 공간을 통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다른 단편 <미스라임의 동굴> 이나 <자유의 감옥> <여행가 막스 무토의 비망록> <길잡이의 전설>등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이야기로 비쳐진다. 자유의 감옥이라는 표제 그대로 이야기의 촛점을 맞추어 읽다보면 마치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는듯한 착각에 빠져드는듯 싶다. 선택의 순간에 주어지는 무한한 자유가 주는 두려움과 불확실로 인한 공포로 인해 차라리 세상이 흘러가는대로, 또는 누군가의 명령에만 그대로 따라가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면 말이다.
현실이 괴로워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그 탈출의 경로를 스스로 선택해야만 한다는 상황이 그를 더욱 괴롭힌다. 그래서 미스라임의 동굴 속의 그림자는 빛의 세계로 나갈 수 있는 바로 문 앞에서 돌아서며, 자유의 감옥 속의 주인공은 결코 미래의 어떤 문도 열어젖히지 못하는 것이다. 여행가 막스 무토는 실제로 자신이 목표로 세웠던 것을 잊어버리고, 점차 눈 앞의 사태에만 매몰되어져 간다. 길잡이는 끝내 자신의 꿈을 버리고, 현실과 타협합으로써 꿈의 세계와 맞닥뜨렸을 때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자유 앞에서 주춤하는 이들 주인공들이 모두 비참하다거나 불행해보이지는 않는다.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불쌍해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네 마음 속에서 동경해온 대상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되면, 훨씬 자유로워질 수 있을거야.
<미스라임의 동굴> 의 레프요탄 박사의 말이다. 레프요탄은 과연 현실의 고통을 없애주는 정치가인지, 아니면 진짜 현실로부터 벗어나 가짜 세상속에서 대중을 마음대로 지배하는 독재자인지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인물이다. 따라서 위의 말 또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즉, 훨씬 자유로운 몸이 실제론 자신을 구속하는 요소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이 소설을 읽어나가는 어려움이다.
물론 이런 혼돈은 개인적인 것이리라 여겨진다. 그럼에도 이렇게 지금 내가 혼란스럽게 책을 읽어나간 것은 현실의 내가 혼란한 지점에 서 있기 때문이며, 이런 혼란한 세상 하나를 내가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게 뭐 어쨌다는겨'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다른 또 하나의 세상을 가질 것이며, 따라서 꿈을 꾸는 것이 행복한 그런 세상 또한 나는 가질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따라서 <자유의 감옥>에 나오는 인샬라처럼 아무런 선택을 하지 못하고 현실 속에서 눈이 먼 상태로 남아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꿈이 구속이 될지도 모르는 두려움을 안고서라도, 꿈이 진정한 자유가 될 수 있는 세상의 문을 향해 다가가 마침내 그 문을 열어 젖힐것이라는 희망을 품는다. 그리고 바로 이 희망도 또는 반대로 절망도 이 책 <자유의 감옥>에선 독자들 스스로가 선택해서 취하는 책이 펼쳐놓은 천차만별의 세상일련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