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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ㅣ 행복한책읽기 작가선집 1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수학이나 과학이 현실과 멀어진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사는데 지장 없는데 무엇하러 배우는지 모르겠다는 불평도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그냥 잔뜩 숫자가 나열되어 있고, 뜻모를 암호같은 공식만 가득할 뿐 그것이 개인의 삶을 영위하는데 어떤 쓸모가 있을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원자폭탄이 떨어짐으로 인해 세계대전이 종말을 고하고, 그 이후 세계권력의 재편이나 힘의 싸움에서 핵은 결코 현실과 멀어진 적은 없다. 지금도 그 핵을 에너지로 쓸지, 무기로 쓸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끌고 당기는 국가간의 게임을 하고 있으며 이것은 우리의 생명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그 폭탄의 괴력을 알아챈 것은 물리학이었으며, 따라서 내가 직접 손으로 느끼고 눈으로 보지 않을지라도 수학이나 과학은 삶의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컴퓨터 없는 삶을 상상하기도 힘든 요즘엔 더욱 그 알듯 모를듯한 공식들이 전혀 쓸모없는 어떤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생활패턴 자체를 완전히 뒤바뀌도록 만드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수학, 과학의 근원적인 힘인 것이다.
테드 창의 단편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과학철학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SF라고만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 작품도 있어 판타지와 SF가 섞여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듯 싶다. 1+1=2라는 가장 상식적인 생각이 무너진다면 과연 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 원리라고 생각했던 것들의 토대가 무너지는 순간 우리는 기우뚱거릴수밖에 없다. 솔직히 나는 그것이 무너지는 바로 그 순간을 상상하는 것조차 힘들다. 하지만 테드 창은 바로 그런 순간들을 포착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흥미롭다.
특히 페르마의 최단 시간의 원리를 소개하고 있는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는 우리의 사고가 시간적 흐름 속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발한 착상을 하고 있다. 즉, 나의 행동이 어떤 원인을 거쳐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과가 나와 있는 원인적 행동을 취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빛이 물을 통과할때 굴절을 하는데 그 굴절한 빛이 도달한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는데 걸린 시간이 최소가 되는 것만큼 굴절하게 된다는 것이다. 빛이 그대로 직진하면 빠르지 않을까 생각하겠지만 물 속에서 빛의 속도는 느려지기 때문에 물 속에서의 거리가 어느 정도 더 짧았을 때 전체 시간이 짧아질 수 있으므로 굴절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 운명론을 떠올리게 만든다. 순차적인 경로를 통한 인생의 흐름이 아니라 이미 도달점이 정해져 있고, 그 도달점을 향한 길마저 정해져 있다는 것. 그 길이 바로 운명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따라서 오히려 빛의 성질인 페르마의 원리대로 살아가지 않는 우리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이미 운명론과는 거리를 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할수도 있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게 만든다.
이 외에도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나 <지옥은 신의 부재>같은 경우는 전혀 딱딱하지 않으면서도 굉장히 유쾌한 즐거움을 준다. 특히 <외모...>는 다큐멘터리 기법을 이용해 똑같은 현상에 대해 다양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옮겨적듯이 써내려가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의 입장차를 담아내고 있는 것에 감탄하게 된다. 외모에 대한 감상을 없애주는 기계를 착용할 것인지 말것인지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들은 어떤 한쪽에 치우침없이 서술하면서도 우리네 사회가 어떻게 잘못 굴러가고 있는지를 통렬하게 보여주고 있다. <라쇼몽>이나 <오!수정>이 기억의 다름을 이야기하고 있긴 하지만 이것 또한 사람들의 처지에 따라 그것을 기억하는 모양새가 달라지는 것에서 재미를 느끼듯, <외모...>가 비록 기억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입장차가 한 현상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다양한지, 정말 흥미진진하다.
세상에 굳건하게 버티고 서 있는 사고의 기틀을(그 사고를 규정하는 언어에 대한 소설이 많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의심하고 깨뜨려보는 테드 창의 이야기들은 정말 놀랍고 재미있다. 그리고, 그 깨어진 사고의 틀 속에서 현실에 대한 깨우침을 전해준다는 점에서 테드 창은 항상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는 작가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