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정리된 한국사나 중국사 연표는 아주 많다. 그래도 다시 그렸다. 내게 필요한 만큼만 간략하게, 기억하기 쉽도록 그렸다. 평생교육원 강좌를 듣고 있는데, 워낙 기초가 없어서 대략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를 함께 읽으려고 한다.

 

<상•주 - 춘추전국 - 진•한 - 위진남북조 - 수•당 - 송•원•명•청> 은 선생님이 처음부터 외우라고 한 것이다. 한국사는 중국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꼭 필요하다고 하셨다. 그런데 무조건 외우는 것 보다 맥락을 훑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나이에 막무가내 암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재미도 없고.

 

 

 

한국사는 앞으로 하나씩 배우며 정리할 테니, 중국사 연표에 대해서 몇 가지만 짚어 보겠다. 다행히 재작년에 읽은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가 도움이 된다.

 

역사를 배운다고 하면 일단 구석기 - 신석기 - 청동기 - 철기 , 뭐 이렇게 나누고 본다.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신석기 시대는 약 1만 년 전 (BC8000년) 에 시작되었고, 청동기는 언제부터일까? 발굴된 유물로 추정하기 때문에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고, 4대 문명에는 모두 청동유물이 있으니 대략 BC 5000 ~ BC 2000 사이에 이들 지역에서는 청동기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중국은 BC 2000, 우리나라는 BC 1500 ~ BC 1000 사이로 추정한다.

 

희랍과 중동지역에서는 철기가 이미 BC 2000년경에 시작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지역마다 편차가 매우 커서, 중국은 춘추 말에서 전국 초 (BC 5세기 경) 에 철기가 들어 왔고, 우리나라는 BC 300~ BC 400 사이로 본다.

 

새로운 유적이 발굴될 때마다 달라지는 이런 연대를 외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하 ․ 은 ․ 주 와 우리나라 고조선은 대략 청동기 시대라는 것만 기억해야겠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김혜린의 만화 《불의 검》은 우리 민족이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는 시대를 그려내고 있다. 불의 검이라는 말 자체가 불로 단단히 벼리어 낸 철검을 말한다.

 

 

왕조는 전설의 왕조 정도로 치부되다가 최근 궁전 유적이 발견되면서 실제 왕조라는 의견이 우세해 지고 있다.

 나라는 갑골문으로 유명해서 기억하기 쉽다. (예전에는 은나라라고 했다.)

나라는 공자가 사랑한 나라다. 어릴 때 달달 외웠던(왜 이걸 외웠을까?) <요순우탕문무주공> 의 태평성대 중 주 나라를 통치한 인물이 문왕(무왕의 아버지), 무왕(주 건국), 주공(무왕의 동생)이다. 요임금과 순임금은 전설적 인물이고, 우왕은 하나라, 탕왕은 은나라를 통치했다. 공자는 주나라의 주공이 만든 사회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주나라의 정치제제가 봉건제이다. 우리가 서양 중세 시대를 봉건제로 알고 있지만, 봉건제란 말은 주나라의 통치 제도를 가리키던 것이다. 나중에 서양사를 번역하면서 봉건제란 말을 빌려 쓴 것이다. 형태는 비슷하다. 다만 주나라의 봉건제는 혈연적인 반면 서양의 봉건제는 쌍무 계약에 기반하고 있다.

주의 봉건제에는 천자가 있고, 각각의 영토는 제후들이 다스린다. 이 제후들이 형제, 사촌 기타 등등 천자의 혈연들이다. 결국 봉건제란 위로 천자를 모신 제후들이 아래로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하나의 커다란 가족을 지향하는 체제이다.

 

춘추전국 시대는 주나라의 질서가 붕괴하면서 100~200여개의 제후국들이 패권을 다투던 춘추시대 (BC770~BC403)와 이 제후국들이 통합되어 7개의 군웅으로 경쟁하던 전국시대 (BC403~BC221)를 합친 기간이다. 이 시기에 도입된 철이 세상을 바꾸며, 전쟁의 규모를 키웠다. 자고로 신무기 개발은 살상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춘추전국’의 대구로 보통 ‘제자백가’를 떠올린다. 춘추천국 시대는 제후들과 군웅들의 패권 다툼이 치열했던 만큼 사상의 백가쟁명도 엄청났다. 춘추전국 시대의 사명은 극심한 혼란을 끝내고 평화와 안정을 되찾는 것이다. 그 방법은 부국강병이며, '백가'들은 제각각 부국강병의 길을 놓고 다투었던 것이다.

 

이 시기 대표적 사상가가 다름 아닌 공자이다. 공자뿐 아니라 맹자, 노자와 장자, 묵자, 한비자 등 기라성 같은 중국의 사상가들이 이 시기에 한꺼번에 출현했다. 공자는 BC 551 ~ BC 479 에 살았다. 이 무렵에는 신기하게도 중국뿐만 아니라 여러 문명의 최고의 사상가들이 활동했던 시기다. 희랍의 소크라테스(BC 5세기)와 인도의 석가모니(BC6세기)도 비슷한 시기의 인물이다. 이후 약 500년이 지나 예수가 탄생했고, 다시 예수 탄생  600여 년 후에 이슬람교가 창시되었다.

 

춘추전국시대의 공자가 이상으로 삼았던 정치 체제는 주나라의 봉건제다. 공자의 仁은 곧 克己復禮 인데, 이 때 禮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예절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제도 전반을 의미한다. 공자가 돌아가고자 한 제도가 곧 주나라의 주공이 이루고자 했던 정치 체제이다. 춘추전국의 혼란 속에 공자는 옛 태평성대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길을 모색했다.

 

나라는 진시황과 만리장성, 분서갱유로 대변된다. BC221년 진시황이 군웅할거를 끝장내며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수립했다. 진시황과 함께 승리한 사상은 한비자의 법가였다. 법가 이외의 제자백가 특히 유가의 것들은 사람이든 책이든 산채로 파묻고 불태워 버렸다. '법대로!'를 외치던 진나라의 가혹한 통치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반란인 진승·오광의 난을 불러왔고, 진나라는 15년 만에 멸망했다. 진의 통치는 비록 짧았으나, 춘추전국시대 여러 나라가 쌓아 둔 성을 연결하여 완성한 만리장성은 지금까지도 중국의 상징이 되고 있다. 중국을 China라 부르는 것도 진 Chin에서 비롯되었다.

 

나라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다. 한자, 한문, 한족 등의 漢이 BC202년에 세워진 한나라의 漢이기 때문이다. 진이 영토 면에서 하나의 중국을 이루었다면, 한은 문화 면에서 하나의 중국을 완성하였다. 공자의 유가사상을 국가 통치의 원리로 삼아 공자를 성인의 반열에 올린 것도 한나라다. 그러나 한나라 자체는 한무제 이후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지향했다. 한무제는 비단길을 개척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무제의 명령으로 흉노를 토벌하기 위해 대월지를 찾아나선 장건이 대월지와의 동맹에는 실패했지만, 서역으로 가는 사막길(비단길)을 개척했다.

 

중국이 우리나라 역사에 본격 등장하는 것도 이 즈음이다. BC 2세기 무렵 고조선은(위만조선)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아우르는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고조선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한무제는 5만 대군을 보냈다. 고조선은 1년간의 치열한 항쟁 끝에, BC 108년에 멸망하였다. 한나라는 고조선에 군현을 설치했으나, 조선의 유민들은 고구려와 부여 등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한족의 통치에 대항하였다. 한사군을 완전히 몰아낸 것은 고구려의 미천왕 시기로, 313~314년 이다. 약 400여 년간 한반도의 중심부를 중국이 통치하던 시기가 있었던 것이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는 우리가 잘 아는 위․ 촉․ 오 삼국시대의 그 위 나라다. AD220, 221, 222년에 나란히 위, 촉, 오가 세워졌다. 삼국지가 하도 유명해서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보다 더 잘 알려졌으니 보탤 것은 없다. 그러나 조조의 위나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은 아니다. 조조 아래에 있던 사마 가문이 권력을 접수하여 나라를 세우고 280년에 삼국을 통일했다. 열매를 딴 것은 조씨가 아니라 사마씨 였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중국은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진나라의 불안한 정세를 틈타 대대적으로 밀고 내려온 것은 사막과 초원지대의 유목민들이었다. 진시황의 진(사마씨의 진과는 달라유~)나라가 만리장성을 쌓은 것도 북방 유목민족 때문이었다. 한나라 때에는 흉노족들이 부족을 통합하여 흉노제국을 건설하고 400년간 한나라와 충돌을 거듭했다. 유럽 역사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훈족도 흉노족을 가리킨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과 중국의 대립 구도를 보여주는 표이다. 우리 역사에도 심심찮게 출몰하는 이름들이 보인다. 몽골제국(원나라)과 여진족의 청나라는 북방 유목민이 아예 중국 전체를 지배했다.

  

 

 

 

다시 위진남북조 시대의 남북조로 돌아가 보자. 간단히 말하면 만리장성 아래로 내려온 유목민족들이 중국의 화북 지방을 차지하여 다투어 나라를 세우고(북조), 한편으로 한족은 강남으로 쫓겨나서 여러 왕조를(남조) 갈아치운 시기다.  이 시기는 춘추전국 시대에 이어 중국 역사상 두 번째의 혼란기이자, 중국 최초의 호·한 융합기이다. 북쪽은 오랑캐인 유목민이, 남쪽은 한족이 차지한 채 서로 섞이기 시작했다.

 

여하튼 제갈공명이 이름을 휘날리던 삼국시대부터 수나라가 중국 땅을 다시 통일할 때까지 360여 년간의 혼란기를 퉁쳐 위진남북조시대라고 한다.

 

이 기간 동안 남북에서는 여러 왕조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꼴을 보면 알겠지만 이때는 자기들 살기도 바빠 우리나라와는 커다란 충돌이 없었다. 물론 고구려가 민족의 방파제로서 이런저런 침략을 겪기는 했다. 그럼에도 남북조의 혼란기는 고구려가 재빠르게 동북아시아의 주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수와 당이 중국을 통일하자 고구려와의 충돌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한 하늘에 두 태양은 없다는 거겠지. 그렇게 다가오는 7세기는 동아시아의 격동의 시대를 예고했다.

 

나라는 589년에 다시 중국을 통일했다. 수나라에 의해 유목민인 호족과 농경민인 한족이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호•한 일체의 세계가 마련되었다. 수나라는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농민 봉기가 이어지자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단명한 왕조이지만 수나라가 중국 역사에 가지는 의의는 균전제, 조용조, 부병제, 과거제 등을 확립하여 당나라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고려시대에 처음 실시된 과거제가 이미 수나라 때에 만들어졌다는 사실!

 

나라는 618년에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북방 유목민의 세계를 아우르며 세력을 확장하였다. 위협을 느낀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당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고, 당나라의 태종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안시성에서 대패하였다.

 

이후의 역사는 잘 알다시피 신라의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나•당 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이어진 나•당 전쟁에서 신라는 당나라를 물리치고 676년 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우리민족은 옛 고구려의 땅을 대부분 빼앗겼다. 다행히 빼앗긴 고구려의 땅은 698년 대조영이 세운 발해에 의해 다시 회복되었다. 이때부터 사실상 한반도는 발해와 신라라는 두 국가가 공존하는 남북국 시대가 되었다. 그 결과 8세기 후반에는 당 • 발해 • 신라가 상호 견제하며 세력 균형을 이루었다.

 

당나라는 문화의 절정기를 구가하던 현종 말년부터 쇠퇴에 접어든다. 양귀비로 인해 시작되는 쇠락은 절도사라는 무인세력들에 의해 가속화된다.  당나라는 907년 절도사 주전충에 의해 멸망하고,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까지 약 70년간 절도사 세력들이 패권을 다투는 5대10국의 혼란기가 이어진다.

 

나라는 960년에 건국되어 중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실은 반쪽짜리에 가까왔다. 당나라가 무인세력에 의해 망하는 것을 본 송나라는 처음부터 무인을 배격하고 철저한 문치주의를 표방했다. 이때 등장한 집권 세력이 바로 사대부이다. 어떤 강사의 표현에 의하면 돈많고 힘은 없는 글방 도령의 이미지. 힘깨나 쓰는 놈들한테 얻어 터지고 뺏기기 딱 좋은 상황인데, 실제로 송나라의 역사가 그랬다. 강성한 북방민족들에게 막대한 재물을 공납하며 평화를 유지했다. 첫 상대는 거란족, 그리고 뒤이어 여진족, 마지막으로는 몽골족이다.

 

중국 땅의 일부를 차지한 거란족이 916년 거란국(요나라)을 세워 송나라와 대립하였다. 이 거란이 바로 송과 친하게 지낸다는 것을 빌미로 고려에 쳐들어왔다가 강감찬과 귀주에서 맞붙은 그 거란이다. 까불다가 못생긴 강감찬에게 된통 당했다는 것이 어릴 때 읽은 책에 나왔더랬다.

 

거란의 지배를 받던 여진족이 1115년 금나라를 세우고 송나라와 손을 잡고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항상 그렇지만 적이 제거되고 나면 다음 차례는 동지의 뒤통수를 치는 것. 금은 송나라를 공격하여 화북지방을 차지하고, 송나라는 강남으로 도망가 남송 시대를 맞게 되었다.

 

우리가 송나라로 부르는 이 시기는 실제로는 송과 요, 이어서 송과 금이 중국의 남북에서 대립한 시기다.  그러나 이런 대립은 바람처럼 등장한 몽골의 칭기즈 칸에 의해 한방에 날아갔다.

 

제국은 1271년 쿠빌라이 칸에 의해 세워졌다. 쿠빌라이는 칭기즈 칸의 손자다. 1206년에 칸으로 추대된 칭기즈 칸과 그 후손들은 유라시아 대륙을 싹 쓸어 대제국을 건설했다. 다만 서유럽 일부를 눈앞에 두고 오고타이 칸(2대 칸으로 징키즈 칸의 아들)이 죽는 바람에 서유럽은 가까스로 대재앙에서 벗어났다. 1231년 몽골이 고려에 1차 침입하여 우리나라 역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삼별초, 팔만대장경, 충자 돌림 고려국왕 등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을 많이도 보태줬다.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양아치의 '치'에는 다루가치의 '치'라는 역사가 새겨져 있다. 치는 몽골어로 사람을 뜻한다.

 

나라는 1368년 주원장에 의해 건국되었다. 원 • 명 교체기는 여•말 선초와 겹치면서 우리 역사에도 자주 등장한다. 드라마 <정도전> 에도 친원파와 친명파의 대립이 치열하다. 고려 말 신진사대부 세력은 친명파였는데, 조선 건국 후 주원장은 정도전을 엄청 미워한다. 정도전도 주원장이 죽은 어수선한 틈을 타 요동을 회복하려 했지만 이방원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이후 우리민족은 요동회복의 꿈을 잃어버렸다.

 

중국 땅에 다시 한족 국가를 세운 주원장은 한 •당 • 송과 같은 이전 한족 왕조의 유교 전통을 되살렸다. 조선도 유교 이념에 따라 명나라와 조공의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명에 대한 사대의 전제는 명나라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조선 전기의 사대는 "왕권의 안정과 국제적 지위 확보를 위한 자주적 실리 외교"라고 평가 받는다. 이와 달리 조선 중기의 사대는 우리가 알고 있는 부정적 의미의 그 사대이다. 「박시백의 만화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 중기의 사대는 "사대란 중화의 나라 명을 정성으로 받는 것." "효와 같고 어쩌면 무조건적인 신앙과도 같은 것" 이다.

 

중국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자금성!, 베이징에 자금성을 세운 것이 바로 명의 영락제이다. 명나라는 임진왜란에 참여한 이후 재정적 압박이 심해진데다 내분에 시달리다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했다.

 

나라는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1616년에 세운 후금이 이름을 바꾼 것이다. 청은 1644년 이자성의 난을 진압하며 중국 대륙을 차지하였다. 명 • 청 교체기는 조선 땅에 또 한 차례의 피바람을 몰고 왔다. 명을 치기 전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청나라는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략하였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다. 호란을 막기 위해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펴다가 쫓겨났고, 서인 반정세력의 배금친명 정책으로 조선의 국토와 백성이 유린당했고, 인조는 삼전도에서 역사상 전무후무한 치욕을 당했으며, 이후 북벌이라는 허울 좋은 구호가 노론의 강력한 집권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영화 <최종병기 활>과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의 역사적 배경도 병자호란이다.

 

오랑캐라고 무시당했던 여진족은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와 발해의 지배를 받던 말갈족이다. 이들은 청대에 들어와 스스로를 만주족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들 오랑캐가 세운 청나라의 강희제,옹정제,건륭제는 그 어느 왕조보다 훌륭한 통치를 이룩해냈다. 현재 중국 대륙의 지도를 완성한 것도 청대의 업적이다. 티베트, 신장, 몽골 등이 이때 중국에 편입되었다.

 

중국의 근대사는 우리와 비슷하다. 1840년 영국과의 아편전쟁이 중국 근대의 시작이다. 이후는 서양 열강에 의해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는 신세... 그러다가 일본의 침략을 받고... 물론 우리처럼 완전한 식민지를 겪지는 않았지만, 반식민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런 와중에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는 멸망하고, 중화민국의 시대로 접어드는데...

 

화민국은 1911년 신해혁명 이후 1912년에 수립되었다. 쑨원이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신해혁명은 미완의 혁명이었다. 쑨원이 군벌인 위안스카이에게 임시 대총통을 물려주면서, 중국의 미래는 혼돈 속에 빠져들었다.  배신의 아이콘이라고 불리는 위안스카이는 민중과 민족을 배반했고, 중국은 군벌 세력과 반군벌 세력으로 나뉘었다. 그에 더하여 반군벌 세력은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국민당과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공산당으로 쪼개져 대립하였다.

 

군벌세력과 제국주의 일본을 물리치기 위해 국민당과 공산당은 두 차례에 걸쳐 국공합작을 하였다. 그러나 1차 국공합작 이후에는 1차 국공내전을, 2차 국공합작 이후에는 2차 국공내전을  치루었고,  최종 승자는 마오쩌뚱이 이끄는 공산당이 되었다. 1949년 마침내 중국은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으로 탄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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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5-05-07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말리님~
[빨래하는 페미니즘] 리뷰 따라왔다가 방문해서 처음인줄 알았더니,
[금요일엔 돌아오렴]이랑 세월호 관련 책을 님의 방에서 보았던 기억이 있네요.

이렇게 멋진 리뷰라니요~
저, 이거 출력해서 사용해도 되나요?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딸이랑 아들에게만 보여줄께요.

좋은 리뷰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말리 2015-05-07 11:10   좋아요 1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하고요.
도움이 되신다면 얼마든지 사용하셔도 됩니다.
격려해 주셔서 외려 고맙습니다. ^^

희맨 2019-01-02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만리장성에 대한 역사를 궁금해 하던중 이곳까지 오게되어 님의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간략하게 잘 정리가 되어 있어 좋았습니다. 사실 이것도 좀 길다는 느낌이 있긴 하지만... 암튼 감사합니다.

빛나 2019-07-04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잘 읽었어요^^

리은 2020-04-02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 정말 정리 잘되서 쏙쏙들어왔어요:)
감사합니다~

강희맘 2020-04-04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멋진 자료입니다.
저도 우리 딸과 친구들이랑 세계사 책을 읽고 있는데 참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진우 2020-06-02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학생들과 수업하는데 이용해도 될까요?

말리 2020-06-07 16:04   좋아요 0 | URL
네, 그런데 쓴지 오래된 글이라 수정해야 할 부분이 있을 것 같아요.
특히 연표의 경우는 자료에 따라 조금씩 연대가 다르기도 하고요. 기준을 건국으로 삼느냐 통일로 삼느냐에 따라 좀 갸우뚱 하시는 부분도 있으실 거예요. 연표는 제가 최근에 사용하는 것으로 수정해서 올려놓겠습니다. 참고가 되신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도움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

전북역사 2021-03-09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학생들에게 참고용으로 나눠줄 연표를 찾다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정말 훌륭한 자료를 혹시 수업하는데에 사용해도 될까요?

말리 2021-03-10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도움이 되신다면 얼마든지요.
 

11. 명 · 청 제국 그리고 동아시아

 

 

 

 

 

 

1. 명나라가 이끄는 동아시아

 

지난 주말 끝난 드라마 <정도전>의 배경인 여말선초는 중국의 원·명 교체기이다. 이인임을 필두로 하는 권문세가는 북원과의 화친을, 신진사대부들은 명과의 사대외교를 주장하며 서로 대립하였다. 명의 주원장은 북원을 몰아내고 다시 중국 땅에 한족의 통일왕국을 세웠다. 명은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이웃 나라에 조공·책봉 관계를 요구하며 세계의 중심으로 자처하였다. 고려도 명과 사대의 관계를 맺었는데, 사대의 전제조건은 드라마 <정도전>에서 정몽주가 밝힌 바와 같이 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주원장은 이인임을 견제하고 정몽주를 압박하는 등 고려 말, 조선 초의 한반도 내정에 간섭함으로써, 반발을 샀다. 그것은 여말선초에 몇 번이나 시도된 우리민족의 ‘요동정벌’ 에 대한 명나라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거대한 중국대륙의 한쪽 귀퉁이 작은 땅이지만, 우리민족은 끝까지 중국에 맞서 독립왕조를 이어올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우리민족은 중국 변방의 호족들과 연합하거나 때로는 대립하면서 국력을 강화했다. 정도전은 주원장이 죽고 명의 후계다툼이 시작되자, 요동을 차지할 절호의 기회로 삼고 요동정벌을 추진하였으나,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함으로써, 요동정벌의 꿈은 사라졌다.

  

  <출처 :http://study.zum.com/book/15561>

 

조선 건국에 관해서는 어떤 책보다 드라마 <정도전>이 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요즘 부모들은 아이들을 너무 TV로부터 차단하는 경향이 있다. 아예 TV가 없는 집들도 꽤 많다. 그러나 EBS의 다큐들 예를 들면 <빛의 물리학>, <수학과 문명>, 네셔널 지오그래픽의 <코스모스> 등 훌륭한 프로그램들이 너무 많다. 나도 어릴 때 이런 프로그램을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웠고, 요즘 아이들이 부러웠는데, 막상 부모들은 TV를 무조건 나쁜 것으로 치부하니, 유수의 학자들이 참여해 수백억을 들여 만든 프로그램 보다 더 잘 가르칠 선생님과 자료를 어디에서 찾을 수있을런지, 참 아쉽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 시절 푹 빠져 본 드라마, 영화, 만화에서 배운 것보다 더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이 또 있을까? 아이들이 유해한 것도 좀 보고, 시간도 낭비해가며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제레미 벤담은 요즘 엄마들이 매우 좋아할 듯하게, “내 인생의 매 순간은 계획되어 있다.” 며 일분일초도 낭비하지 않고 살았지만, 그가 남긴 최대의 유산은 ‘판옵티콘’ 이다. 효율성과 유용성의 극단에서 탄생한 것이 숨 막히는 감시체계였다.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질식해 버릴지도 모른다. 한 시간 달달 외워 조선 -이성계ー1392년 따위나 기억하는 것이 물론 훨씬 효율적인 투자일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 <정도전>에 분노하고, 가슴벅차하고 또 함께 눈물을 흘렸던 일곱 달의 긴 시간들만이 결국 우리의 삶에 남아 우리와 함게 하는 역사가 될 것이다.

 

 

2. 임진년, 전쟁에 휩싸이고

 

1392년 조선이 건국 된지 딱 200년 만인 1592년에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쳐들어 왔다. ‘임진’년에 ‘왜’가 일으킨 ‘난’, 임진왜란이다. 7년 만에 끝난 이 전쟁의 결과로 일본은 정권이 바뀌어 에도막부 시대가 열렸고, 조선의 요청으로 군대를 보냈던 명나라는 더욱 쇠약해져 만주족(여진족)이 새운 청나라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일어난 조선에서는 큰 정치적 변화가 없었다.

 

 

3. 오늘날의 중국을 만든 청나라

 

중국은 한족의 나라라고 하지만, 중국 역사를 통해보면, 농경민족인 한족과 유목민족인 여러 호족들이 번갈아 가며 혹은 서로 대치하며, 왕조를 교체해 왔다. 현재 중국의 틀을 완성한 청나라는 만주족(여진족)이 세운 나라다. 그러나 청나라는 한족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고 유교가치관을 받아들였다. 한족과 유목민족을 하나로 통합하여, 중국문화의 옹호자를 자처했다. 그러나 변발과 만주복 착용을 강제하면서, 반청적인 인사를 철저히 탄압하였다.

 

 

현재 중국을 구성하는 수많은 소수민족들 중 상당부분이 청나라 때 와서 중국의 영역으로 입되었다. 티베트, 대만, 신강(신장), 서장(시짱) 등을 식민화하였다. 청나 

라는 새로이 편입한 영토에 먼저 한인 관료나 군인을 보내 중국식 체제로 바꾸고 한인들을 그 지역에 이주시켜 민족 융합 정책을 실시했다. 그 외 장족, 후이족, 조선족 등 50여 소수민족이 자의든 타의든 현재 중국이라는 한울타리 안에서 살고 있다. 지금도 중국은 소수민족의 독립 움직임을 철저히 탄압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달라이 라마에 대한 중국 정부의 탄압은 티벳 독립 나아가 소수민족의 독립과 관련된 민감한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4. 일본과 청나라로 향한 조선

 

명〮〮· 청 교체기에 조선의 가장 유명한 인물은 광해군일 것이다. 기울어가는 명나라와 세력을 키워가는 청나라 사이에서 조선을 지키기 위해 어느 편에도 기울지 않는 등거리 외교정책을 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낸 명에 대한 감사와 사대를 주장하는 세력에 의해 쫓겨났다. 그 결과 조선은 급격하게 명에 기울었지만, 중국의 운명은 이미 청나라에 들어갔고, 조선은 잘못된 선택으로 두 차례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병자’년에 ‘오랑캐’에 의해 일어난 ‘난’, 병자호란이다. 이제 조선은 청나라에 사대의 예를 해야 했다.

 

조선은 일본과 청나라 양쪽과 다 전쟁을 치렀지만, 이후 200여 년 간은 평화로운 시기로, 청나라에는 연행사를, 일본에는 통신사를 보내 문물을 교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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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대서양을

     헤쳐 나가는

     유럽

 

 

 

 

 

 

 

1. 바다로 나서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1492년은 콜럼부스가 서인도제도에 도착한 날이다. 이 사건이 세계사의 한 획을 그은 이유는 단지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위상이 뒤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면서 수탈과 착취를 기반으로 하는 제국주의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유럽 국가들은 야만에 가까웠고, 발달된 과학과 눈부신 문명은 동양에서 만개하였다. 몽골의 대도를 찾아서, 인도와 중국의 진귀한 물품들을 구매하기 위해, 유럽의 종교인, 학자, 상인들이 아시안 드림을 꿈꾸며 먼 길을 가로질렀던 것이다.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 남쪽의 캘리컷으로 연결되는 항로를 열었던 것도 이슬람 상인이 차지하고 있는 육로를 피해 직접 인도에 가서 값진 향료를 사오기 위해서였다. 에스파냐의 입장에서는, 육로는 이슬람에, 인도양 항로는 포르투갈에 가로막힌 상황에서, 인도로 가는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밖에 없었는데, 지구가 둥글다면 서쪽으로 가도 결국은 인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서쪽 항로를 개척하게 되었다. 서쪽 바다 즉 대서양을 가로지르던 콜럼부스는 거기가 어딘지도 모른 채, 1492년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하게 되었고, 지구의 지리적 구조에 무지했던 15세기 유럽인들은 그곳을 서인도, 처음 도착한 섬들을 서인도제도, 그곳에 살던 원래 주민들을 인디언이라고 이름 붙였다.

  

 

에스파냐인들이 도착한 멕시코 및 남아메리카 대륙에는 아스텍, 마야, 잉카라는 오래된 문명과 거대한 제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확연히 밝혀지지 않은 몇몇 이유들로, 이 찬란했던 문명은 겨우 수 백 명의 에스파냐 침략군에 허무하게 무너졌고, 그 이후 대부분의 지역이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되어 무자비하게 착취당했다. 남미의 많은 국가들이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만이 스페인어 대신 포르투갈을 사용하고 있다. 그들이 매일 사용하고 있는 언어 자체가 치욕의 역사를 아프게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도 한글을 소중하게 지켜 낸 우리민족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요즘에 와서는 모든 국민들이 영어에 목을 매는 희한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지만, 후대에 가면 아마도 이 비정상적인 시대는 희화되어 한낱 웃음거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여하튼 남미 고대 문명의 몰락에 대해서는 총, 칼을 만들 수 있는 철기 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다는 점, 원주민 내부의 갈등이 극심했던 시기라는 점, 그리고 유럽인들이 가져온 전염병에 전혀 내성이 없었다는 점들이 그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에스파냐는 뜻하지 않게 남미대륙을 차지하고 수많은 은광을 독점하면서 16세기 유럽 세계의 최강자가 되었다. 식민지의 부를 바탕으로 스페인의 무적함대, 아르마다는 대서양을 호령하며, 스페인 제국의 위용을 자랑하였다.

 

 

2. 유럽의 새 강자, 영국과 프랑스

 

에스파냐의 지배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세기가 바뀌며 유럽의 강자도 바뀌어 갔다. 16세기가 에스파냐였다면, 17세기는 네덜란드가, 18세기는 프랑스와 경쟁하던 영국이 최종 승자가 되었다.

 

  

 

그 많은 영토와 은광을 가졌던 에스파냐는 왜 몰락했을까? 에스파냐는 국내 공업을 발전시키지 않고 동양의 사치품과 다른 가의 공산품을 사들이는데 막대한 부를 낭비했다. 그러나 더 큰 원인은 펠리페 2세의 극단적인 종교 탄압에 있었다. 펠리페 2세는 카톨릭교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유럽에서 벌어지는 온갖 종교 전쟁에 끼어들었다. 또 에스파냐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펠리페 2세가 이들을 추방하면서 상업과 금융이 붕괴했다.

 

한편 네덜란드는 펠리페 2세의 종교 탄압에 대항한 끈질긴 투쟁 끝에 독립을 쟁취하고 유럽에서 가장 자유로운 국가가 되었다. 사상과 종교 문제로 탄압받던 유럽의 지식인들과 과학자, 종교 지도자 그리고 에스파냐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대거 네덜란드로 모여들었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등의 근대철학자들도 네덜란드에서 출판 활동을 했다. 또한 유대인들의 선진 금융기법과 다이아몬드 세공 등의 기술을 바탕으로 네덜란드는 상업과 금융 중심지로 일약 발돋움 하였다. 조선술도 발전하여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1/3 정도의 비용으로 상선을 건조해 내었다. 그 결과 전체 유럽 상선의 3/4을 가진 유럽 최대의 해운국이 되었다. 조선으로 표류하여 온 하멜이 하필 네덜란드 사람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유럽 한 귀퉁이의 조그마한 나라가 단번에 유럽 패권을 쥐게 된 것은 사상과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자 유럽의 우수한 인재들이 한꺼번에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과학과 철학은 물론 상업, 금융, 출판 등 다양한 분야의 뛰어난 인재들이 이루어낸 성과야말로 네덜란드가 17세기 유럽의 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이었다.

 

영국은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하면서 유럽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초기 영국은 네덜란드와 연합하여 에스파냐에 대항하고, 네덜란드 독립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가 유럽 최대의 해운국이 되자 두 나라는 몇 차례의 전쟁을 통해 패권을 다투었다. 17세기 중후반 무렵부터 네덜란드는 위축되기 시작했고, 영국이 우위를 차지했다.

 

17세기 후반에는 프랑스가 유럽의 패권을 두고 영국과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며 국력을 신장했으나, 이후 재정의 고갈로 쇠약해졌다. 이후 유럽의 패권은 영국이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다.

 

 

3. 서유럽을 따르는 중·동부 유럽

 

러시아는 그리스 정교와 비잔티움 문화를 수용하며 유럽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며 발전했다. 러시아가 유럽의 일원으로 등장한 것은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 때부터다. 표트르는 서유럽의 정치·경제·군사 제도를 본보기 삼아 러시아를 개혁하였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등의 중·동부 유럽도 프랑스의 절대왕정과 서유럽의 정치,경제 체제를 받아들여, 국력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이들 중·동부 유럽 국가들은 서유럽과는 달리 농노제가 여전히 기승을 부렸다. 서유럽은 봉건제가 붕괴하고, 부르주아가 성장하고, 근대정신과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서서히 근대적 국가로 발전해 나간 반면, 서유럽을 압축적으로 뒤따른 중·동부 유럽은 철저한 체질 개선을 이루지 못한 채 외양만 쫓아갔던 것이다. 그 부작용으로 농노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다.

 

 

4. 유럽을 살찌운 대서양 무역

 

16세기 이후 서유럽 국가들은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아시안 드림을 꿈꾸던 야만적 국가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변신하였다. 보통 17세기는 과학의 시대, 18세기는 산업혁명의 시대, 19세기는 부르주아의 시대로 불린다. 뉴턴과 갈릴레이, 증기기관과 방직기계의 발명이 자본주의시대를 선도해 낸 것이다.

 

그런데 이 연구 개발의 막대한 자금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콜럼부스 이래 서유럽 여러 국가들이 앞 다투어 침탈한 식민지의 희생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남아메리카의 은광과 대규모 농장, 그리고 아프리카 노예가 오늘날 서구 문명의 밑거름이 되었다. ‘신사의 나라’로 통하는 영국의 이면에는 ‘노예무역’ 이라는 잔혹성이 감추어져 있다.

 

  

 

대규모 은광시대가 끝나자, 유럽 열강은 아메리카 각지에서 담배, 커피, 면화, 사탕수수 등의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여 막대한 이득을 취하였다. 그런데 아메리카 원주민들만으로는 노동력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사냥해 와서 강제 노역을 시켰다. 그러자 노예 자체가 커다란 상품이 되었고 유럽 각국은 노예무역에 뛰어들었다. 사람이 상품이 된 것이다.

 

삼각무역은 세 대륙, 유럽에서 출발한 상선이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를 거치며 어떤 상품들을 거래하는지 잘 보여준다. 유럽에서 총기와 잡화를 실은 배가 아프리카 해안에 도착하면, 실어온 물건들을 아프리카의 노예와 맞바꾼다. 노예를 실은 배는 다시 아메리카에 상륙해서, 대농장에서 노예들이 생산한 설탕과 면화 등을 다시 실어온 노예와 맞바꾼다. 유럽의 공업제품과 아프리카의 노예, 아메리카의 설탕 등을 엮는 삼각무역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 삼각무역으로 가장 덕을 본 나라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17세기 후반부터 150년 동안 340만 명의 흑인 노예들을 실어 날랐다. 영국 산업혁명의 종자돈은 바로 이 아프리카 흑인들의 눈물이었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유대인 학살, 전쟁의 책임 등에 대한 독일의 사과를 당연시하는 이들 근대 유럽 열강들은 그러나 아직도 아프리카 노예들의 희생, 남아메리카 원주민 학살 등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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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7-02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월드컵을 보니 남미 국가들은 서로 말이 통해서 ( 스페인어를 사용해서 ) 전반전 끝나고 들어갈 때 한바탕 싸우고 그랬죠. 말이 통해니 서로 욕하는 게 다 들리는 겁니다. ㅎㅎㅎㅎ. 새삼 한국어'가 소중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말리 2014-07-03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떨때는 전세계가 단일한 언어를 사용한다면 언어를 둘러싼 별 미친짓거리도 없을라나 싶다가... 글케되면 그게 지구제국화 되는 거겠죠 ㅎ;;

2018-01-26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9. 넓어지는 이슬람 세계

 

 

 

 

 

 

 

 

 

 

1. 이슬람 세계를 누빈 나라들

 

무함마드가 7세기 초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 공동체를 건설한 이래, 이슬람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세 제국에 걸친 거대한 제국을 이룩했다.

  

  <9세기 ~11세기 초의 이슬람 세계>

 

13세기 몽골제국이 세계 최초의 유라시아 제국을 건설하면서 이슬람 세계도 몽골의 침략을 받았다. 그러나 몽골이 물러간 후 이슬람 세계에는 다시 다양한 세력이 활약하며 이슬람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

 

 13세기에는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가, 14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이, 15세기에는 티무르 제국이 이슬람 세계의 대표자로 떠올랐다. 16세기에는 시아파 이슬람교를 국교로 삼은 사파비 왕조가 옛 페르시아의 땅을 차지하였다.

 

 

2. 세 대륙에 걸친 나라,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은 1453년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크리스트교 세계의 천년의 역사를 품은 도시를 손에 넣었다. 동로마제국은 이로써 멸망하고, 오스만제국은 계속 세력을 확장하여, 과거 이슬람 세계 전체가 그러했던 것처럼,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세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함으로써 지중해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17세기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절정에 달하였는데, 오스트리아 빈 근처에서 이란 국경 너머까지,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 일부와 모로코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전체에 오스만의 깃발이 꽂혔다.

  

  

오스만 제국은 세 대륙, 20개 민족, 6000만 명의 인구를 거느리며, 이슬람의 정신으로 페르시아의 전통과 튀르크의 기질, 아라비아의 솜씨를 버무려 거대한 문화를 발달시켰다. 오스만의 문화는 17세기 유럽인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에게 유럽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카페와 튤립도 실은 당시 오스만 제국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것이다. 이슬람 사제가 처음 마셨다고 알려진 커피는 ‘카파(혹은 카와)’, 카페 하우스는 ‘카웨’로 불리며, 오스만 제국 사람들에게 사랑 받았다. 튤립은 터키가 원산지인 야생화였는데, 오늘날에는 네덜란드의 상징으로 변해버렸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바자회(영어로 bazaar) 역시 오스만 제국의 ‘바자르’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스탄불에는 ‘그랜드 바자르’라는, 말 그대로 그랜드한-거대한 시장이 있는데, 1461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바자르란 원래 ‘덮여 있는 시장’ 이란 뜻으로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에는 세계 각국의 선박과 상인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자선 모금을 위한 일회적 시장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런 유럽 문화의 뿌리를 이슬람 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이 아니라 이슬람 세계와 아시아가 세계문화의 중심지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3. 인도의 새로운 전통, 무굴제국

 

16세기에 티무르의 5대손 바부르가 인도에 무굴제국을 세웠다. 무굴은 몽골이란 뜻인데, 몽골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티무르는 또한 이슬람교도이다. 그러므로 무굴제국은 인도-이슬람-몽골이 혼융된 국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무굴제국의 전성기를 이루어낸 악바르는 힌두교도와 비이슬람인을 억압하지 않고, 종교에 관계없이 화합을 추구하는 정치를 펼쳤다. 또한 토지개혁을 통해 농민들에게 공평하고 효과적인 경제정책을 실시하려 노력하였다. 세계사를 공부하다 보면, 성공한 제국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통치 원칙을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경제적인 평등이다. 민족이나 종교에 관계없이 평등한 경제활동을 보장하고 공평한 세금을 부과했다. 특히 농민들에게 토지를 골고루 분배하고, 일부 지배층에게 토지가 집중되는 것을 막았다. 다른 하나는 사상의 자유이다. 관용을 베풀어 각 민족의 독자적인 종교 활동을 보장해주었다. 먹고 사는데 어려움이 없고, 자신이 믿는 가치가 억압받지 않는 한, 제국은 평화롭게 유지될 수 있었다.

 

무굴제국을 통해 이슬람 문화와 힌두문화가 점차 융합되어 갔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라는 타지마할은 두 문화의 만남이 꽃피워낸 걸작이다. 이외에도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통합한 시크교, 힌두어와 인도어가 융합된 우르두 어, 아라베스크 무늬에 연꽃무늬를 결합시킨 건축 양식 등 이슬람 풍과 힌두 양식이 결합된 다양한 문화가 발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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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몽골제국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다

 

 

 

 

1. 유목 국가에서 정복 국가로

 

유목민족이 중국 대륙에서 처음 나라를 세운 것은, 한나라가 멸망한 후 위진 남북조 시대였다. 이후 수 문제가 대륙을 통일하고 중국은 다시 농경민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런데 당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유목민족인 거란족이 요나라를 세우고 이어서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웠다. 다시 중국 대륙에 유목국가가 세워진 것이다. 요나라는 한반도의 고려를 세 번이나 침략한 국가인데, 서희 장군과 강감찬 장군이 이를 물리쳤다. 중국의 농경민족은 당나라가 망하자 송나라를 세웠지만, 금나라가 송을 침략하여 송은 강남으로 쫓겨나 남송으로 축소되었고, 화북지방은 금나라가 차지했다.

 

2. 양쯔 강 이남에서 다시 일어난 송

 

당나라를 이은 송나라는 매우 발달된 경제를 이룩했다. 서민들의 경제력도 커졌고 서민 문화도 발전하였다. 그런데 군사력은 매우 약했다. 송나라는 이웃의 요나라, 서하, 금나라 등에게 막대한 재물을 선물하는 대가로 평화를 유지했다. 전쟁 보다는 비용이 적었지만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갈수록 국가의 빈부격차가 심해졌다. 귀족사회였던 송나라에서는 엄청난 토지를 소유한 지배계층은 세금을 내지 않고 일반 백성들이 모든 세금을 부담했다. 지배층은 더욱 부유해지고 일반 백성은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백성들은 세금을 감당하지 못했고 국가의 재정 또한 악화되었다.

 

왕안석은 대대적인 개혁을 통하여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 중·소상인을 보호하려 하였다. 그러나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당하게 된 고위 관리들의 반대에 부딪혀 개혁은 실패했다. 그 결과 송나라는 더욱 약해져서 결국 금나라에 의해 강남으로 쫓겨 가게 되었다.

  

 

 

KBS 사극 <정도전>에서도 이와 비슷한 역사를 볼 수 있다. 고려 역시 송나라와 마찬가지의 귀족사회였고, 대부분의 토지는 일부 지배층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정도전은 백성들의 집에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국가를 만들고자 했으나 고려라는 나라에서는 이것을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권력을 장악한 지배세력이 완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새로운 나라를 세워 모든 토지를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주고자 하였다. 이 정책을 ‘계민수전計民授田’이라고 하는데, 백성들의 수자를 계산하여 그 수대로 공평히 전답을 나누어 준다는 뜻이다. 비록 정도전은 계민수전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했지만, 완화된 개혁을 실시하여 착취구조를 철폐하고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도와주었다. 그 결과 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된 백성들은 쌀밥을 ‘이밥’이라고 불렀는데, 정도전이 왕으로 내세운 ‘이성계가 준 밥’ 이란 뜻으로 붙인 이름이었다.

  

 

 

화북지방을 금나라에 빼앗긴 송나라는 해상무역을 발전시켰다. 고려는 송나라와 교류하였는데, 송나라가 개발한 항로를 통해 이슬람 상인이 고려에까지 들어왔다. 수도 개경에서 가까운 벽란도는 국제 무역항으로 이름을 떨쳤다. Korea라는 명칭은 이 당시 이슬람 상인이 ‘고려’를 부르던 말에서 유래했다.

 

 

3. 몽골의 정복, 이에 맞선 항쟁

 

칭기즈 칸은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제국을 건설하고, 유라시아 제국을 하나로 묶은 인물이다. 중국 대륙은 물론 서쪽으로 이슬람 제국과 러시아, 헝가리, 폴란드 등의 유럽지역을 단숨에 휩쓸었다. 프랑스 등의 서유럽은 아무 대책 없이 곧 닥쳐올 재앙에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런데 서유럽의 코앞에서 기적처럼 몽골 군대가 사라졌다. 칭기즈 칸이 사망한 것이다. 몽골제국의 관습에 따라 새로운 칸을 추대하기 위하여 모든 군대가 정복활동을 중지하고 몽골의 수도로 되돌아 왔다. 그 덕분에 서유럽은 간신히 몽골제국의 포화를 면할 수 있었다. 몽골 제국은 칭기즈칸의 사후에도 정복활동을 벌였고, 유럽과 아시아의 양 끄트머리 일부만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라시아 대륙을 몽골제국의 이름 아래 통합하였다. 세계 최초의 유라시아 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아틀라스 세계사 : 서유럽과 일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라시아 제국이 몽골의 영토가 되었다. 고려는 원의 세력권 아래 놓이긴 했으나 끝까지 저항하여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4. 유라시아가 하나의 세계로 통합되다

 

몽골제국은 그 넓은 땅을 어떻게 다스렸을까? EBS 다큐 프라임의 <강대국의 비밀> 몽골제국 편에서는 그 답을 ‘관용’이라고 한다. 몽골제국은 침략 전쟁에서 보여준 무자비함과는 딴판으로, 통치에서는 그 어느 국가도 보여주지 못했던 관용의 정치를 펼쳤다고 한다. 일단 항복한 모든 민족은 몽골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으며, 민족과 지역에 관계없이 능력 있는 사람들을 고루 등용하였고, 피지배지역의 발달된 문물을 적극 수용하였다. 중국에서는 통치 기술과 제도를, 세금걷기나 살림살이는 이슬람에서, 정치와 군사의 주요직은 몽골이 맡았다. 각 민족은 자신의 문화와 종교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몽골제국의 평화 아래 유라시아는 동서 간에 문물을 활발히 교류하였다. 몽골제국 즉 원나라의 수도 대도는 각양각지에서 몰려 온 다양한 인종들로 넘쳐났고, 이슬람 사원, 절, 교회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곳이었다. 일종의 ‘종교 배틀’도 열렸는데, 각 종교를 대표하는 수도자들이 한 자리에 앉아 서로 논리를 가지고 공격하며 적절한 답을 하지 못한 경우 벌주를 마시는 대회였다. 유럽의 배타적인 종교 국가와는 달리 몽골제국에서는 서로 논쟁하며 다양한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다. 이런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관용이야말로 몽골제국을 세계제국으로 만들어준 기본 정신이었다.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드넓은 땅을 하나로 묶는 교통 통신망이 필수적이다. 고대 로마제국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는 속담에처럼, 거미줄 같은 도로망을 형성하여 통치의 효율성을 높였다. 초원지대를 질풍같이 말달리며 살아왔던 몽골민족은 도로대신 역참제를 만들었다. 역참에 말과 식량 숙박시설을 갖추어 두고 관리나 사절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람이 살지 않는 초원이나 사막에도 예외 없이 일정한 간격으로 역참을 두어 칸의 명령이 대도에서 유럽까지 열흘이면 전달될 수 있을 만큼, 훌륭한 교통 통신망을 구축하였다.

 

유럽인들은 죽기 전에 몽골의 수도 대도에 가보기를 꿈꾸게 되었고, 그 중에는 동방견문록을 남겨 유명해진 마르코 폴로가 있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 항해한 것도 대도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13세기에는 유럽이 아시안 드림을 꾸었을 만큼 아시아는 문화와 문물이 발달한 곳이었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신대륙 개척을 기점으로 유럽은 아시아에 앞서 나가게 되었으니, 역설적이게도 몽골제국은 잠자던 유럽을 흔들어 깨웠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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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서 2014-06-16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몽골의 칭기즈 칸이 나와 거대한 대륙을 통치하는 것을 보니 정말 위대한 사람 같다.
관용이라는 방법은 정말 좋은 것 같다.
칭기즈 칸이 그 많은 대륙들을 통치할 수 있게 만들어준 방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