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중국의 원․명 교체기는 우리나라의 여말․선초와 맞물린다. 명을 세운 주원장은 조선 건국의 주도세력인 정도전과 대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이 500년 왕업을 유지해 나가는 동안 명나라는 만주족인 청나라에게 대륙의 지배권을 빼앗기고 멸망했다.

 

명이 쇠퇴하고 후금(청)이 성장하는 배경에는 1592년 임진왜란이 있다. 100년간의 전국시대를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명가도’를 요구하며 조선을 침략했다.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을 경우 순망치한의 위기에 빠질 것을 염려한 명은 조선에 원군을 파병했다. 16세기 말, 한반도에서 동아시아 삼국이 맞붙은 것이다. 전쟁은 승자 없이 애매한 상태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

 

쇠퇴기에 있던 명은 임진왜란으로 재정 위기가 더욱 심해졌고, 이 틈을 타서 만주족이 후금을 건국하고 명나라를 압박했다. 다시 한 번 북방의 이민족이 한족을 누르고 중국 대륙을 정복한 것이다. 청나라는 강건 성세를 구가하며 번창했지만, 19세기 중엽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양열강의 침략으로 쇠퇴를 거듭했다. 19세기는 중국뿐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의 대부분이 서양 열강의 식민체제 아래 재편되는 시기였다.

 

 

 

 

1. 명나라가 이끄는 동아시아

 

이름 속에 ‘원 주살’을 다짐했던 주원장은 1368년 원나라를 북방으로 몰아내고 난징에 명나라를 세웠다. 명나라는 3대 영락제 때 정점을 찍고, 임진왜란을 겪으며 급속히 쇠퇴하다, 1644년 이자성의 난에 의해 망했다. 300년을 채 채우지 못한 한족의 왕조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홍무제(주원장)는 한족의 지배 문화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고, 성리학을 관학으로 삼아 유명무실해진 과거제를 부활했다. 관료와 학생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계층을 형성했는데 이들 신사가 지배 계층이 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영락제는 조선의 세조와 비슷하게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황제에 올랐다. 정난의 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등극했지만, 명나라 최고의 치세를 펴며 세력을 확장하였다.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고 오늘날 베이징 여행의 상징이 된 자금성을 지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p281>

 

영락제는 무엇보다 조공․책봉 관계를 통한 국제 질서 확립에 힘을 쏟았는데, 이를 위해 환관들을 각지에 파견하였다. 그 중 환관 정화가 이끈 선단은 동남아시아와 인도, 아프리카 해안까지 진출하였다. 정화의 선단은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고 한다. 만약 명나라가 막강한 해상력을 계속 유지했다면 서구열강이 아시아를 침략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나라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로 7차례 원정후 중지했다. 여하튼 ‘정화의 원정’에 동행한 중국인들이 세계 각지에 정착하면서 화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신종은 조선 후기의 사대부들이 가장 숭상하던 명나라 황제이다. 그가 임진왜란 때 원군을 파병한 만력제이기 때문이다. 신종은 장거정의 개혁을 통해 쇠퇴하던 명나라를 일으켜 보려 하였으나, 임진왜란 파병 이후 악화된 재정난을 극복하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북방의 누르하치가 만주족을 통일하고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청나라의 등장이었다. 이로써 명나라가 이끌던 동아시아 질서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2. 임진년, 전쟁에 휩싸이고

 

한국사와 겹치므로 통과.

 

 

3. 오늘날의 중국을 만든 청나라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후금을 세운 만주족은 우리나라와 얽힌 역사가 깊다.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후금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만주족은 금을 건국한 적이 있다. 거란족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남쪽으로 쫓아낸 유목민족이 여진족 즉 만주족이다. 윤관이 별무반을 만들어 여진족을 무찌르고 동북9성을 쌓았을 때만 해도 여진족은 고려에 조공을 약속하며 동북9성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고려 문벌귀족들이 수성이 어렵고 귀찮다는 이유로 동북9성을 돌려주었는데 여진족은 이를 바탕으로 세력을 키워 금나라를 건국하고 거꾸로 고려에 사대를 요구해 왔다. 이때도 고려의  문벌귀족은 사대를 받아들였다. 인종 때 잇달아 발생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의 중심에는 금에 대한 귀족세력들의 대립이 있었다.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화북지방을 차지하고, 남쪽으로 쫓겨 간 송의 귀족들이 세운 남송과 대립하며, 몽골족이 유라시아를 휩쓸기 전까지 금-남송-고려의 삼각균형 체제를 형성하였다. 여진족은 고대까지만 해도 말갈족이라고 불렸다. 고구려와 발해의 피지배민에 말갈족이 속해 있었다. 이들은 숙신, 읍루라고 불리기도 했다. 말갈족 - 여진족 -만주족이라고 이름을 바꾸며 이 북방 유목민족은 고구려부터 조선까지 천년이 넘도록 우리민족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다.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2대 황제가 된 홍타이지는 명나라 공격 이전에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조선을 침략했다. 명과 청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표방한 광해군이 인조반정에 의해 쫓겨나자 조선은 친명배금으로 돌아섰다. 친명배금이라는 구호 외에는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조선은 두 차례 모두 패배하고 삼전도의 치욕을 겪으며 항복했다. 조선은 오랑캐라 얕보던 청과 사대 관계를 맺어야 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세 명의 황제는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이다. 강건 성세라고 불리는 이 130 여년 동안 청나라는 닭 모양 같은 오늘날의 중국 국경선을 대부분 완성했다. 내몽골, 신강, 서장, 타이완, 티베트 등이 중국의 영토가 된 것이 이때부터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청나라는 요, 금, 원에 이은 정복왕조이다. 다수의 한족을 통치하면서도 유목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강압정책과 회유책을 병용하였는데, 역대 정복왕조 중 가장 효율적으로 한족을 통치하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한족에게 호복과 변발을 강요하면서도 만주족과 똑같이 관료에 등용하였으며, 한족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였다. 과거제를 유지하고 명대부터 지배계층으로 군림했던 신사의 특권도 보장하였다. 한족 신사계층을 청나라 통치의 지지층으로 육성한 것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청대는 명대에 이어 경제도 발전하였다. 아메리카의 고구마, 옥수수, 감자 등이 서양을 통해 수입되었고, 양쯔강 하류는 이런 상품화폐작물을 재배하여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명나라는 정화의 원정에서 보듯이 주변국들과 조공무역에 힘쓴 반면, 청나라는 통상을 요청하는 서양 세력에 맞서 쇄국정책을 실시하였다. 광저우에서만 공행이라는 관허 상인에게 서양과의 무역을 허락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의 비단, 차, 도자기 등은 서구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며 유럽의 ‘시누아즈리 Chinoiserie (중국양식)'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청나라로부터 수입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서구열강은 무역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비열한 방법까지 서슴지 않았다. 영국이 자국에서도 금지하고 있는 아편을 청나라에 밀매한 것이다. 이른바 아편전쟁은 이런 부도덕한 국제무역에 의해 촉발되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실제 주인공인 앨리스 리델 자매이다. 19세기 영국사회의 중국양식 유행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쓰인1865년 중국은 이미 1,2차 아편전쟁에서 패배하고 서구열강의 반식민지 상태로 떨어지고 있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중국도 중세를 지나 근세로 접어들면서 서민 경제가 발달하고 덩달아 서민 문화도 발전하였다. 서양열강은 경제적 침탈과 함께 선교에도 열을 올렸는데, 특히 종교전쟁 이후 서구 세계 내에서 세력이 약해진 가톨릭은 예수회를 조직하여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선교 활동에 나섰다. 명나라 말기의 마테리오 리치와 청나라 초기의 아담 샬도 예수회 선교사이다. 아담 샬은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와도 교류가 있었는데,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10년간 볼모생활을 하였다. 소현세자는 아담 샬을 통해 서양의 과학과 천주교에 눈을 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명나라는 성리학을 관학으로 삼았지만, 현실과 유리된 채 철학적 사유에만 몰두한 성리학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기도 했다. 성리학은 유학에 대한 주희의 해석학이다. 명나라의 왕양명은 유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여 지행합일을 강조한 양명학을 발전시켰다. 성리학에 대한 또 다른 반성은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한 실학이다. 양명학과 실학은 조선에도 도입되어 조선 후기 사회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조선의 주류세력인 교조적 성리학자들에 의해 배척되었다.

 

청나라는 한족의 문화를 존중했지만, ‘문자의 옥’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학문의 검열이 심했던 때이기도 하다. 이런 분위기에서 유학자들은 개인적 의견이나 가치관을 주장하기 보다는 옛 문헌에서 확실한 증거를 찾아 실증적으로 경서를 설명하려고 하였다. 고증학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청나라의 고증학이 탈정치적인 성격을 갖는데 반해, 조선의 실학은 사회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경세치용의 학’ 으로 기능했다.

 

 

 

4. 일본과 청나라로 향한 조선

 

 

한국사와 겹치므로 통과.

 

 

추기 : 중국 전근대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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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슬람 세계를 누빈 나라들

  

 

정통 칼리프 시대(642)에 사산왕조 페르시아를 무너뜨린 이슬람 세력은 20세기 초까지 서아시아 지역을 지배하였다. 다양한 민족의 여러 왕조가 명멸했으나, 신기하게도 이들은 모두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이슬람 세계를 이어갔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교를 세우고 정복활동을 시작한 무함마드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한 정통 칼리프 시대, 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까지는 아랍인들이 이슬람세계의 주인이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1055년 토그릴 베그가 바그다드를 점령하면서 이슬람 세계의 주인은 튀르크족으로 바뀌었다. 튀르크는 6세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유목제국을 세운 돌궐족이다. 돌궐족은 7세기 동아시아 십자외교의 한축을 담당하기도 했다. 돌궐-고구려-백제-왜가 세로축을 수․당-신라가 가로축을 형성하며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나당연합군이 승리하자 돌궐은 당에 의해 서쪽으로 밀려났다. 11세기에 이 돌궐족의 한부족인 셀주크 튀르크가 이슬람 세계의 주인이 된 것이다. 셀주크 튀르크는 토그릴 베그의 할아버지인 셀주크 때에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1258년 몽골이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이름뿐인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켰다. 칭기즈 칸의 자손인 훌라구가 이슬람 세계를 재패하고 일한국을 세웠다. 일한국은 7대 칸인 마흐무드 가잔 시기에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228>

 

몽골이 물러간 이후 이슬람 세계는 다양한 세력이 등장하였다. 13세기에는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가, 14세기에는 오스만 튀르크가, 15세기에는 티무르 제국이 지배하였다. 16세기에 일어난 사파비 왕조는 페르시아의 영광을 되살리려 하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티무르는 일한국이 무너진 후 옛 몽골의 터전을 누비며 15세기 중앙아시아의 강자로 떠올랐다, 몽골의 후손을 자처한 티무르는 몽골제국의 부흥을 꿈꾸며 대규모 정복활동에 나섰다. 티무르는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하나로 연결하여 페르시아-이슬람 문화를 발달시켰다.

 

15세기 말 티무르 제국이 무너지면서 이 지역이 튀르크인과 페르시아인 지역으로 나뉘자, 이스마일 1세가 이 틈을 비집고 사파비 왕조를 일으켰다.(1502) 이스마일 1세는 시아파 이슬람교를 국교로 삼고 아케메네스 왕조와 파르티아, 사산왕조의 뒤를 이어 페르시아의 영광을 되살리려 하였다.

 

 

 

 

 

2. 세 대륙에 걸친 나라, 오스만 제국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오스만 1세는 튀르크계 이슬람이다. 13세기 셀주크 튀르크가 몽골과의 싸움에서 패하면서 작은 나라들로 나누어질 때, 비잔티움 제국과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작은 나라를 이루었다. 발칸반도까지 세력을 확장하던 바예지드 1세는 14세기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로 이름을 날렸지만, 티무르를 공격하다 앙카라 전투에서 패하고 포로로 잡혀가 죽었다.

 

  

 

잠시 주춤했던 오스만제국은 무함마드 2세 때인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고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켰다. 크리스트교의 천년제국을 무너뜨린 것이다.

 

셀림 1세는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를 꺾고, 이집트를 지배하던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켰다. 이집트에 있던 칼리프로부터 칼리프를 물려받아 술탄-칼리프가 되었다. 셀주크 튀르크 이래 술탄과 칼리프가 분리되었던 체제에서 다시 정교일체의 체제를 갖추고 명실상부 이슬람의 종주권을 장악했다.

 

오스만제국의 전성기는 술레이만 대제 시절이다. 유럽을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프레베자 해전을 통해 지중해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술레이만은 정복뿐만 아니라 법전을 만들고 체제를 정비하는 등 오스만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17세기에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절정에 달하였다. 지중해를 둘러싼 세 대륙이 오스만의 깃발 아래 놓였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하여 대부분의 비서구권 국가가 그러했듯 서양제국주의의 침탈 아래 찢겼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오스만 제국은 세 대륙, 20개 민족, 육천만 명의 인구를 거느리며, 이슬람의 정신으로 페르시아의 전통과 튀르크의 기질, 아라비아의 솜씨를 버무려 거대한 문화를 발달시켰다.

 

대제국이 대부분 그러하듯 관용의 정신으로 여러 민족을 아울렀다. 자치권과 종교적 자유를 허용하는 밀레트 제도가 대표적이다. 특징적인 군대조직으로는 예니체리가 있다.

 

동서무역로와 지중해를 장악하여 무역이 크게 발달하였다. 커피가 널리 퍼져 나간 것도 오스만제국 때이다. 그들이 커피를 즐겨 마시던 카웨가 유럽으로 전파되어 카페가 되었다. 서유럽의 카페는 자유로운 토론과 모임의 장소로 이후 시민 혁명에도 영향을 끼쳤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며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오스만 제국은 대부분의 영토를 잃고 1922년 멸망했다. 현재 터키 공화국이 튀르크족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3. 인도의 새로운 전통, 무굴 제국

 

 

 

 

인도 왕조를 특징짓는 핵심어는 종교이다. 철기시대 아리아인들은 다수의 원주민을 지배하기 위해 카스트제도에 바탕을 둔 브라만교를 신봉하였다. 인도를 처음으로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는 BC6세기 석가모니가 만든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쿠샨 왕조 때는 마우리아 왕조 시기의 상좌부 불교 보다는 중생 구원을 주장한 대승 불교가 성행하였다. 인도 고대국가를 완성한 굽타 왕조 때는 마침내 힌두교가 탄생하였다. 힌두는 신드라는 지역 이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신드가 힌두로, 힌두가 인도로 전해지며, 힌두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즉 힌두교는 인도의 종교라는 뜻이 된다.

 

인도의 중세는 이슬람교가 들어온 시기이다. 10세기 말부터 이슬람 세력의 침입이 본격화되고, 1206년에 인도 최초의 이슬람 왕조가 탄생하였다.

 

인도의 마지막 왕조인 무굴 제국은 또 하나의 이슬람 왕조이지만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였다. 종교 뿐 아니라 언어, 예술 등에서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융합한 힌두-이슬람 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13세기 몽골제국이 유라시아를 휩쓸 때도 델리술탄 왕조는 살아남았다. 히말라야 산맥이라는 천연 요새 덕분인지 몽골로서는 별 가치가 없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몽골제국이 거의 궤멸 된 16세기가 되어서 인도 땅에 새로운 ‘몽골 제국’이 수립되었다. 바부르의 ‘무굴 제국’이다. 무굴은 페르시아어로 몽골을 의미한다고 한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바부르는 부계로는 티무르의 5대손, 모계로는 칭기즈 칸의 15대손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스스로 몽골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바부르가 인도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단적으로 말하면 인도는 몽골인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인데, 이 몽골인은 이슬람교를 믿었다.

 

무굴제국의 전성기는 바부르의 손자 악바르 때이다. 영토를 확장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였을 뿐 아니라, 힌두교를 관용하는 한편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융합하는 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무굴제국을 특징짓는 요소는 힌두-이슬람 융합 문화이다. 현재도 파키스탄의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우르두어는 이슬람 지배자들이 인도 용병을 부리기 위해 만든 언어이다.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장점을 통합하여 만든 시크교도 지금까지 인도 인구의 2~3%가 믿고 있는 종교이다. 어디 있는지, 어느 시대인지는 몰라도 누구나 한번은 들어보고 사진으로 보았을 타지마할 역시 무굴제국이 만든 힌두-이슬람 문화의 결정체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6대 아우랑제브는 무굴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하였으나 이슬람 제일주의를 지향하면서 무굴제국의 쇠퇴를 촉발하였다. 힌두교도와 시크교도 등 비이슬람교도의 반란이 일어났다. 1707년 아우랑제브가 죽자 지방 세력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제국은 델리와 그 주변을 다스리는 작은 왕국으로 축소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무굴제국은 1858년 명목상의 마지막 황제가 폐위되고, 영국국왕이 인도 황제를 겸하면서 공식 멸망했다. 영국의 식민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서구열강들이 인도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것은 15~6세기부터이다.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 서남 해안의 캘리컷에 도착한 이후 포르투갈이 인도양 향료무역에 끼어들었다. 무굴제국의 아우랑제브 사후 영국과 프랑스가 해안으로 침투하여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영국은 프랑스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고 인도의 지방 정권을 하나씩 격파하였다. 인도는 이렇게 ‘영국의 젖소’가 되어갔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바닷길의 동서무역로를 따라가면 믈라카 해협이라는 지름길이 나타난다. 무역풍까지 불어 해상무역에는 더없는 요충지이다. 믈라카는 원래 인도 출신 이주민들이 사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이슬람 상인들과 손을 잡고 동남아시아 최초의 이슬람국가가 되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그러나 포르투갈이 인도양 항로를 개척하면서,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네덜란드의 식민지로 다시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을 겪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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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남경태 선생님이 팟 캐스트 <만화 조선왕조실록>에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우리는 일본 역사를 너무 모른다. 삼국시대에 잠깐 나왔다가 뚝 떨어져 임진왜란에 한번 나오고, 또 한참 지나서 강화도 조약에 나오는 식. 일본역사는 이렇게 찔끔 찔끔 할 것이 아니라 전체 역사를 조금 자세히 배울 필요가 있다.” 대충 이런 의미의 말이었다. 맞는 말씀이다 싶었는데, 그렇다고 따로 일본사를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일본은 일본이니까..., 왠지 알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또 거부감도 들고.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에도 일본은 곁다리로 찔끔 나오는 식이다. 물론 제한된 책에 세계 모든 나라의 역사를 통으로 다룰 수는 없다. 그랬다가 공부하는 우리 머리도 터져 버릴 것이다. 세계사적 사건만 따라가기에도 벅차니 말이다.

 

하지만 또 일본은 일본이다. 우리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일 뿐 아니라, 근현대 시기에는 제국주의 국가의 하나로 세계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미치고 있다. 우리 역사의 차원에서도, 세계사의 차원에서도 소홀히 다룰 수 없는 나라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초보적 차원이나마 일본 역사를 개괄해 본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기원전 1만년 경은 세계사적으로 신석기 시대이다. 일본도 그런데, 일본은 이 시대를 조몬 시대라고 부른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조몬 토기가 발굴되었다고 붙인 이름이다. 조몬은 새끼줄이란 뜻으로, 조몬 토기에는 새끼줄 모양의 무늬가 있다.

 

기원전 300년경에 한반도에서 벼농사와 철기가 전파되면서 일본은 야요이 시대를 맞는다.  도쿄의 야요이 지역에서 조몬 토기와는 다른 특징을 가진 야요이 토기가 발굴되었다.

 

조몬 시대와 야요이 시대의 일본에는 이렇다 할 국가가 없이, 수백의 부족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일본사 편지 p35>

 

일본 역사에서 처음으로 중앙 집권 국가가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은 4세기부터다. 이 시기를 야마토 정권기라고 부르는데, 야마토 지역에서 이런 거대한 무덤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우리나라의 고인돌, 이집트의 피라미드, 영국의 스톤헨지 등도 마찬가지지지만 그 용도가 무엇이든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강력한 권력이 존재해야 한다. 즉 거대 건축물은 계급 사회와 강력한 권력의 존재를 입증한다.

  

 

<EBSi 세계사개념다지기>

 

야마토 정권이 중앙 집권 국가를 이루었다고 해도 여전히 지방 호족 세력들이 매우 강성했다. 일본은 당대 중국이나 한반도와 같이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지 못했다.

 

쇼토쿠 태자(574~622)는 일본 최초의 헌법을 제정하고 불교를 중흥하여 호류사를 창건하는 등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아스카 문화 발전에도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현재 학계에서 쇼토쿠 태자가 실존 인물인지를 놓고 논란이 있다는 것이다.

 

쇼토쿠 태자가 죽고 호족인 소가 씨 가문이 세력을 잡자 정변이 일어나 다시 강력한 중앙집권화가 추진되었다. 호족들의 토지를 덴노에게 귀속시킨 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세금을 부과하는 등 당을 모방한 율령체계를 구축하였다. 이를 다이카 개신(645)이라고 한다. 다이카는 일본이 처음으로 사용한 연호이다.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3년 뒤인 663년 일본은 수 백 척의 배를 만들어 백제를 돕기 위해 달려왔다. 백제와 왜(당시 명칭)의 밀접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인데, 왜는 지금의 금강 하구인 백강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크게 패했다. 이후 왜와 한반도의 긴밀한 관계도 끊어졌다.

 

7C 말에 덴무 천왕은 처음으로 ‘일본’이라는 국명과, ‘덴노(천황)’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EBS강의에서는 8C 나라시대에 '본격' 사용했고, 그 이전부터 있었다고 했다.

 

일본은 백강에서 당과의 전투 이후 당의 문물을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710년에는 수도를 아스카에서 나라로 옮겼다. 나라시대(710~784 or 794)가 열린 것이다.

 

나라시대의 핵심 기치는 ‘당풍’ 이다. 당처럼 따라 하기 위해 견당사를 파견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한자를 적극 사용하여 <일본서기>라는 역사서를 편찬했다. 당나라 수도 장안의 주작대로를 본떠 헤이조쿄를 만들었다. 왕권 강화를 위해 도다이사를 짓기도 했다. 일본이라는 국호도 이때부터 본격 사용되었다. 그러나 당풍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755년 안록산의 난 이후 쇠퇴해 가는 당을 지켜보며 일본은 당풍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고유문화를 되찾기 시작했다. 

 

덴노 가문의 거듭된 불행을 계기로 수도를 지금의 교토에 있는 헤이안쿄로 옮겼다. 이때부터를 헤이안 시대(794~1185)라고 하는데, 헤이안 시대는 당풍에 대비되는 국풍의 시대였다. 국풍의 핵심은 다시 지방 세력이 권력을 잡는 지방분권 제도와 일본 고유문화이다.

 

일본 고유 문자인 가나 문자가 만들어지고, 가나 문자로 쓴 문학 작품이 인기를 끌었다. 현재 일본의 2000엔짜리 지폐에도 이 시대 최고의 인기 소설인 <겐지 모노가타리>의 한 장면이 담겨 있을 정도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헤이안 시대에 새로이 등장한 직업(?)이 있으니, 일본의 대표적 아이콘인 사무라이다. 지방 분권 세력들은 권력이 커지고 재산이 많아질수록 자신을 지켜줄 존재가 필요했다. 사무라이가 이 역할을 담당했는데, 경호뿐만 아니라 세금을 걷고 토지를 지키는 일을 했다. 사무라이라는 말은 가까이에서 호위하는 사람, ‘侍’의 일본식 발음이다.

 

사무라이는 점점 세력이 커지면서 집단을 이루었고, 크게 성장한 ‘무사단’은 귀족뿐 아니라 덴노에 맞설 정도로 강력해졌다.

 

12세기 말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일본 최고의 사무라이에 올랐다. 덴노 보다 강한 권력을 쥐게 된 미나모토는 덴노로 부터 쇼군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덴노를 쫓아내는 대신 상징적 입지를 보존해 주고, 일본을 통치할 실질적인 권한을 갖게 된 것이다. 이렇게 쇼군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시대를 막부 시대라고 부른다. 이슬람 왕조로 비교해 보자면 칼리프와 술탄이 분리된 것과 비슷하다.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는 정교일치의 수장이었으나 셀주크 튀르크의 침략을 받자, 정치적인 실권을 튀르크에게 넘겨주고 종교적 수장으로서의 상징성만 가졌다. 물론 일본의 덴노는 종교적 수장이 아니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EBSi 세계사개념다지기>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된 1192년부터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1868년까지 약 700년 동안 쇼균이 지배하는 막부 시대가 지속되었다. 우리로 치면 무신정권이 700년간 지속된 셈이다. 그동안 덴노는 상징적으로 존재했지만, 사람들로부터 거의 잊혀 갔다.

 

막부체제는 기본적으로 봉건제이다. 쇼군이 지방의 영주 즉 다이묘에게 토지를 나눠주면 다이묘는 이에 대한 대가로 충성을 맹세한다. 중국이나 유럽의 봉건제도 그랬지만 봉건제는 지방분권 체제이므로 언제든지 다이묘가 세력을 키워 쇼군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다. 또한 충성의 대가로 더 이상 줄 것이 없는 쇼군은 쇼군으로서 군림하기 힘들다.

 

1192년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세운 가마쿠라 막부는 몽골의 침입 이후 1333년경에 몰락했다. 일본은 카미카제라는 태풍 덕분에 몽골을 막아낼 수 있었지만, 그 대가가 적지 않았다. 대몽 방어전에 다이묘들이 참전하여 싸웠지만, 일본 땅에서 치러진 전쟁에서 쇼군이 다이묘에게 나눠줄 수 있는 영토나 재물은 전혀 확보될 수 없었다. 전쟁 준비에 막대한 군비를 쏟아 넣은 데다 다이묘들이 떠나가면서 가마쿠라 막부는 몰락했다.

 

일본의 두 번째 막부는 아시카가 가문이 세운 무로마치 막부이다. 무로마치 막부는 1338~1573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후반기 100년(1467~1573)은 전국시대라고 불린다. 막부의 권한이 약화되고 다이묘들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일본 역사상 가장 걸출한 3명의 인물이 서로 다투던 때가 바로 전국시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오다 노부나가는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조총을 수입하여, 전쟁 양상을 바꾸어 놓은 인물이다. 통일을 목전에 두고 사망하여, 그의 부하였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를 통일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열도를 통일하였지만 그의 시대는 그리 길지 않았다. 1585~1598까지 14년 간 일본을 통치했다. 이 사이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는 조선을 거쳐 명과 나아가 인도를 정복하려 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하지만 최후의 승자는 참고 기다렸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도요토미가 죽자 에도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이에야스가 반대 세력을 누르고, 1603년 덴노로부터 쇼군의 칭호를 받았다. 에도막부(1603~1868)가 열린 것이다.

 

  

  <EBSi 세계사개념다지기>

 

애도막부의 대표적 정치체제는 산킨고타이제 - 參勤交代 제도이다. 전국의 다이묘들은 모두 2년에 한번씩 1년 동안 에도에 와서 살아야 했고, 1년을 채우고 돌아갈 때도 자신의 아내를 인질로 남겨두어야 했다. 봉건제의 기본은 유지하되 대신 다이묘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강력한 중앙 집권적 감시체계를 마련한 것이다.

 

산킨고타이 제도는 경제 ․문화적으로 뜻하지 않은 발전을 가져왔다. 전국의 다이묘들이 많은 일행을 데리고 에도로 오고가게 되자 교통이 확대되고 숙박 시설이 늘어났다. 일본은 해양 국가이지만 전 국토의 80%가 산지이기도 하다. 화산 폭발로 인한 높고 험준한 산 때문에 교통이 불편하고 물자의 왕래도 어려웠다. 오랫동안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던 이유도 지형에 따른 영향이 컸다. 그런데 산킨고타이 제도로 교통이 확대되고 숙박 시설이 많아지자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활발해졌다. 상업과 문화가 발달하면서 지역 간의 격차도 점점 줄어들게 되고 일본 열도는 점차 하나로 통합되어갔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에도막부 시대에 아리타 자기가 유행하였다. 아리타 자기의 시조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끌려간 이삼평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아리타 자기는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 서양에 수출되었다. 도자기가 깨지지 않게 종이로 잘 싸서 배에 실었는데, 이때 사용했던 종이 중에 우키요에가 많았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우키요에는 에도시대에 유행했던 풍속화로 목판으로 대량 인쇄되어 싼값에 살 수 있는 장식용 그림이었다. 서양인들은 아리타 자기와 함께 포장지인 우키요에에도 매료되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19세기 프랑스 인상파들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데, 고흐의 작품들에도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

 

에도시대는 평화의 시대였고 일본의 문화라고 할 만한 것이 꽃을 피운 시기이다. 가부키가 처음 공연된 것도 이때이다. 우키요에나 가부키와 같은 문화는 에도시대에 급성장한 상공업자들 사이에 유행했기 때문에 조닌 문화라고 불린다.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조선과의 관계도 1609년 기유약조를 통해 회복되었고, 이후 조선으로부터 12차례의 통신사가 다녀갔다. 조선의 통신사는 선진문물을 배울 수 있는 매우 소중한 기회였다. 임란의 영향으로 이삼평 등 도공들만 많이 끌려간 것이 아니라 성리학 특히 이황의 성리학이 전해져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황에 대한 연구가 얼마나 활발했던지 지금도 이황을 연구하려면 일본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에도막부도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처럼 쇄국정책을 썼는데, 단 네덜란드하고만 교역하며 서양문물을 접했다. 네덜란드와 교역을 위해 나가사키에 인공섬인 데지마를 만들었다. 네덜란드를 통해 발달된 서양 학문이 도입되어 난학이라 불렸다.

 

에도 시대 말기에는 외국에서 유입된 성리학이나 난학에 대항하여 일본 고전 문화를 강조하는 국학 운동이 일어났다. 국학은 19세기 존왕양이 운동과 정한론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EBSi 세계사개념다지기>

 

19세기는 서양 제국주의가 아시아로 눈을 돌린 시기다. 청은 아편 전쟁에 패배하고 1842년 영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난징조약으로 홍콩을 영국에 뺏겼을 뿐 아니라 이후 몰려든 서양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반식민지 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청의 패배를 지켜본 일본은 1854년 별다른 충돌 없이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었다. 4년 뒤에는 미․일 통상 조약을 맺으며 경제적 침탈을 더욱 거세게 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런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에도막부에 대한 반대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이묘들이 “막부의 쇼군을 몰아내고 덴노를 다시 중심에 세워서 서양 세력을 물리치자” 며 존왕양이 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이 운동의 성공으로 에도막부는 권력을 덴노에게 이양하고 종말을 맞았다. 17세의 청년 덴노 메이지가 전권을 가지며, 일본 근대사의 획을 긋는 메이지 시대(1868~1912)가 열렸다.

 

 <EBSi 세계사개념다지기>

 

메이지 덴노는 일본의 122대 덴노이다. 700년 의 막부시대 동안 덴노는 아무런 실권도 없었고 심지어는 먹고 살기가 힘든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도 관심이 없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던 덴노가 19세기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으면서 갑자기 권력의 핵심으로 수직 상승했다.

 

이런 상황에서 메이지 정부는 전국을 돌며 덴노의 존재를 알리고 더 나아가 덴노를 신격화해야 했다. 그들은 BC 660년 진무 덴노가 일본을 건국했다는 신화를 실제 역사로 바꾸었다. 신화에 따르면 덴노는 태양의 신 아마테라스의 자손이므로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이다. 일본 역사 2500년 동안 덴노 가문은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왔으므로 메이지 덴노 역시 인간인 동시에 신이 된다.

 

1945년 쇼와 덴노가 항복 선언을 하면서 신이 아닌 인간임을 고백했다는 우스꽝스럽고도 기이한 이야기는 이런 신격화의 결과이다. 우리가 일제강점기 때 강요당했던 “황국신민의 서” 같은 것들도 사실 급조된 것이나 다름없다. 덴노는 위기의 순간 거지에서 왕자가 된 일종의 신데렐라가 아닌가 ! 하지만 지금도 많은 일본사람들은 여전히 덴노를 존경하고 떠받들기까지 하고 있다. 지금 덴노는 상징적 존재이지만 제국주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덴노를 언제 다시 신격화할지 모르는 일이다. 일본의 요즘 위험한 행보를 보면.

 

 

다시 근대사로 돌아가 보면 메이지 유신을 성공적으로 단행한 메이지 정부는 1889년 메이지 헌법을 만들고 본격적으로 서양 열강을 따라 제국주의의 길로 나아갔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청나라에 승리하고, 10년 뒤 1904년 러일전쟁으로 러시아마저 꺽은 뒤,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점했다. 1929년 발생한 세계 대공황을 타계하기 위해 제국주의 전쟁을 확대한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1941년 마침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제2차 세계대전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그 결과는 쇼와 덴노의 인간고백과 함께한 무조건 항복 선언이다.

 

전쟁에 참패하고도 운 좋게도 일본은 부활했다.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격화된 미소 냉전체제에서 미국의 파트너(?)로 선정되었을 뿐 아니라, 냉전체제의 대리전이었던 한국전쟁을 통해 경제적으로 급격한 성장을 이루고 오늘날의 경제대국으로 도약했다.

 

일본의 우익이 득세하고 있는 배경에도 미국의 반공정책이 크게 작용했다. 광복 후 우리나라의 친일파들이 미국의 필요에 의해 살아남아 권력을 행사했듯이, 태평양전쟁의 전범인 일본의 우익 역시 미국의 반공정책을 빌미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현재 아베 수상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만 해도 A급 전범 피의자였지만 석방이 되어 일본 자민당을 이끌고 수상까지 한 인물이다. 아베가 자꾸 망언을 하고 군사대국화를 꿈꾸는 이유도 여기에 뿌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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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목 국가에서 정복 국가로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만리장성 위쪽의 유목민족이 처음 한족지역으로 내려와 왕조를 세우기 시작한 것은 남북조 시대부터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단순히 호․한 융합기라고 하고, 당 멸망 이후부터에야 비로소 정복왕조라고 부른다. 요, 금, 원, 청이 대표적 정복왕조인데, 만리장성 아래의 한족 땅에 유목민이 세운 나라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왜 북위 같은 북조의 나라들은 제외되는 것일까? 답은 역사가 마음(?)이다. ^^

 

정복왕조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비트포겔에 의하면 정복왕조란 두 가지 요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강의에서 보는 것처럼, 한족 땅에 왕조를 세우는 것뿐만 아니라 유목민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 남북조 시대에 북쪽의 5호 16국을 통일한 북위는 한화정책을 채택하여 선비족 고유의 문화와 제도를 버렸다. 호족이 한족에게 흡수된 것이다.

 

이에 반해 요와 금과 원은 한족과 호족을 분리하는 이중 통치 체제를 만들어, 문화 수준이 높은 한족을 원활하게 통치하면서도 유목민 특유의 제도를 지켜 나갔다. 또한 고유의 문자를 개발하여 한족에 동화되는 것을 방지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최초의 정복 왕조는 거란(요)이다. 907년 당나라가 망하고 5대 10국의 혼란기가 오자, 그 틈을 타고 916년에 거란족이 세웠다. 거란은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936년에 황허 강 북쪽의 연운 16주를 점령하고 나라 이름도 요로 바꾸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절도사들이 권력을 분점 하던 5대 10국 시대는 960년에 건국된 송나라에 의해 979년에 마감되고, 송나라는 중국을 재통일하였다. 그러나 완전한 통일은 아니어서 만리장성 아래의 연운16주는 여전히 요가 차지하고 있었다. 송과 요의 계속된 대치 과정에서 1004년, 결국 요가 승리하고 송과 요는 ‘전연의 맹’을 통해 형제 관계를 맺었다. 송이 형님으로 체면치레를 하였으나, 실상은 돈으로 산 평화와 다름없었다. 이후 100년 넘게 송은 해마다 요에게 막대한 양의 선물을 해야 했다.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에 요나라는 고려를 세 차례 침입하는데, 그 배경에는 송이 있었다. 송과 대립하는 상황에서 요는 배후에 있는 고려와 친선을 맺어 후방을 안정시키려 했던 것이다. 고려의 영토가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1차 침입에서 거란은 송과의 단교를 약속받고 오히려 강동6주를 고려에 넘겨주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거란은 재차 삼차 침입을 했지만, 귀주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더 이상 고려를 침략하지 않고, 송-요-고려가 세력 균형을 유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북동쪽에서 서서히 세력을 키워가던 또 하나의 유목민족이 있었다. 여진족이다. 요나라와 싸우면서 힘을 기른 여진족은 1115년에 금나라를 세웠다. 송나라는 금을 이용하여 요가 차지하고 있는 연운 16주를 회복하려고 금과 손을 잡았다. 금은 1125년 요를 멸망시키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송을 공격하여 수도를 점령하였다. 이를 정강의 변이라고 부른다. 이로 인해 금나라는 화북지방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고, 송은 양쯔강 유역으로 쫓겨 가서 1127년 남송을 건국하였다. 이로부터 100여 년간은 화북의 금과 강남의 남송이 마주보는 형국이 지속되었다.

 

 

2. 양쯔 강 이남에서 일어난 송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당나라는 절도사에 의해 망했다. 현종 후기의 안록산도 절도사였고, 907년 당을 멸망시킨 주전충도 절도사였고, 이후 70년간 계속된 5대10국 시대도 절도사들이 주도했다. 그리고 960년 송나라를 건국한 조광윤도 절도사였다. 절도사는 변방(번진)의 군사뿐만 아니라 행정과 치안을 책임진 수장이었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무인세력이라 할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호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칼을 싸악 거두어 철조 불상을 만들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가, 하남 하사창동 철조 석가여래 좌상에 얽힌 이야기로 전해오는데, 그만큼 새로운 왕조가 만들어지면 제일 무서운 것이 지방 세력이 가지고 있는 무력이다.

 

본인이 무장이었던 조광윤과 그의 후계자 또한 중국을 통일한 후에 무장 세력을 견제하면서 송나라를 철저히 문치의 나라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 결과 송나라의 군사력은 크게 쇠퇴하였고, 유목 왕조인 요와 금 뒤이어 원에 의해 계속되는 침략을 받았다. 다행히 강남 유역의 농업생산력이 크게 발달하고 각종 기술에 힘입은 수공업도 발달하면서 송나라는 유래 없는 경제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공부는 잘하고 부자인데 싸움은 못해서 힘센 놈들한테 연이어 터지거나 돈을 갖다 바치는 부자 글방 도령의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송나라의 정치는 정복 왕조와 밀접히 얽혀 있다. 송나라가 온전히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 대륙을 차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용은 정복왕조에서 다룬 그대로이다.

 

송을 건국한 조광윤은 황제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모든 관리를 과거 시험을 통해 선발하였다. 과거제는 수나라 때 도입되었지만, 송나라에 와서야 확립되었다. 송나라는 특히 황제 앞에서 직접 시험을 보는 전시를 시행하여 선발된 관리의 충성심을 높였다. 과거제는 유교적 지식을 갖춘 사대부가 사회를 주도하게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

 

송나라의 문치주의는 국방력 약화를 가져왔다. 송나라는 이웃나라와 형제관계 혹은 군신관계를 맺어 평화를 유지하였지만, 그 실상은 돈으로 평화를 산 것과 다름없었다. 해마다 막대한 양의 선물을 보내야 했는데, 전쟁 비용보다는 적었지만 커다란 재정적 압박이 아닐 수 없었다. 부국강병이 송나라의 당면과제가 되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204>

 

11세기 후반 신종 때에 왕안석은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는 가난한 소 농민과 임노동자, 중소 상인을 보호하여 국가재정과 국방력을 확충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대지주나 대상인의 이익과 상충되었고 맹렬한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고 말았다.

 

개혁에 실패한 송나라는 금나라의 공격을 받아 수도 카이펑을 빼앗기고 양쯔강 이남의 임안에 남송을 세웠다. 송나라의 영토는 대폭 축소되었지만, 바다를 통한 무역이 활발해지고 강남의 경제력도 크게 증가하여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강남의 경제력이 화북의 경제력을 능가하게 되었다.

 

남송은 1279년 몽골이 세운 원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송나라의 경제․사회․문화는 4 개의 'ㅅ‘ 으로 정리할 수 있다. 사대부, 성리학, 상업혁명, 서민문화 이다.

 

과거제와 문치주의에 의해 송나라는 사대부의 나라가 되었다. 성리학은 대의명분을 강조함으로써 황제권 강화에 이바지 했을 뿐 아니라, 화이사상을 통해 정복왕조의 침략으로 상처 입은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었다. 경제가 발전하고 활판 인쇄술의 발명으로 서적이 널리 보급되자 더불어 서민문화도 발달하였다.

 

이앙법 등 농업기술의 발달로 양쯔강 하류는 최대의 곡창지대가 되었다. 석탄이 널리 사용되면서 제철업과 자기산업 등의 수공업도 발전하였다. 농업과 수공업의 발달과 더불어 해상무역이 발전하면서 상업혁명이라고 할 만큼 상업이 발달하였다.

 

성리학적 질서를 바탕으로 사대부가 주도하는 문치의 나라,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 등은 마치 조선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 물론 규모의 차이와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해 조선 후기의 상품화폐 경제는 꽃을 피우기 전에 망하지만 말이다. 여하튼 송나라의 모습이 조선의 모습과 닮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중국의 4대 발명품이라고 부르는 것 중 제지술은 한나라 때이고 나머지 3가지는 모두 송대의 것이다. 제지술은 당과 아바스 왕조의 탈라스 전투 때 이슬람으로 전파되었다. 활판 인쇄술과 화약과 나침반은 원나라 때 모두 유럽으로 전파되어, 유럽의 르네상스를 촉발하였다.

 

 

 

3. 몽골의 정복, 이에 맞선 항쟁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206년 쿠릴타이(부족장 회의)에서 테무친이 칭기즈 칸으로 추대되었다. 몽골이 정복활동을 시작하자 이를 누구보다 환영하고 적극 협력한 사람은 이슬람 상인이었다. 중국에서 서아시아와 유럽까지 분열의 시대가 지속되자 초원길과 비단길이 몹시 위험해진 이슬람 상인들은 통합과 안정을 바랐다.

 

정복활동은 1227년 칭기즈 칸이 죽은 후에도 후계자들에 의해 계속 되었다. 자손들은 물려받은 정복지를 중심으로 4개의 한국(칸이 지배하는 나라)을 세워 분할 통치했지만 몽골제국은 하나의 거대한 유라시아제국이 되었다. 1271년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가 1279년 마침내 남송을 물리쳤다. 유목민족이 처음으로 중국의 모든 지역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4한국의 건국과 멸망 연대는 명확하지가 않다. 인터넷을 찾아보아도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온다. 모든 나라의 멸망이 그렇듯 단번에 망하기 보다는 거의 망했어도 또 백 여 년 이상 분열되어 명맥을 이어가기도 하기 때문에 연구자마다 시점을 다르게 잡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연대를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대한 몽골제국이 언제까지 지속되었고 어떻게 사라져갔는지가 궁금해서 대략 감이나마 잡아보려고 연대를 기록했다. 연대는 아래의 블로그를 참고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slee599&logNo=220221521179

 

 

 

 

4. 유라시아가 하나의 세계로 통합되다

 

칭기즈 칸이 거대한 제국을 세운 비법(?)은 누구나 궁금할 것이다. 칭기즈 칸은 부족 중심으로 뭉쳐 있던 전통 체제를 해체하고 용기와 충성심을 기준으로 군대를 편성했다. 이민족이라도 항복 시에는 몽골인으로 통합했다. 천호백호제라는 편제 시스템과 그의 친위 부대가 정복활동의 힘이 되었다.

 

몽골의 풍습에 따라 칭기즈 칸은 그의 아들들에게 영토를 분할해 주었다. 자손들은 정복활동을 계속했지만, ‘칸’이라는 후계자 자리를 놓고 극심하게 다투었다. 특히 맏아들 주치는 칭기즈 칸의 핏줄이 아니라 아내 보르테의 아들이라는 약점 때문에 주치와 그의 후손들은 계속 정통성 문제에 시달렸다.

 

여하튼 칸의 자리는 칭기즈 칸에서 오고타이, 구유크, 몽케, 쿠빌라이로 이어졌다.

 

오고타이 한국은 원 및 차가타이와 대립하다가 1310년에 통치자는 원에 항복하고, 영토의 다수가 차가타이에 병합되었다.

 

차가타이 한국은 중앙아시아를 차지했는데, 몽골제국이 망하고 난 뒤에 몽골의 후계를 자처한 티무르가 제국을 세웠던 곳이다.

 

킵차크 한국은 칭기즈 칸의 핏줄이 아니라고 소외되었던 주치의 아들 바투가 러시아 남부 지역에 세운 국가이다. 바투는 유럽 원정을 주도했다.

 

일한국은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명목뿐인 아바스 왕조를 무너뜨렸다. 처음에는 이슬람을 탄압하였으나, 이후에 이슬람을 국교로 삼기도 했다. 티무르에 의해 실질적으로 멸망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원나라를 건국하고 남송을 멸망시킨 쿠빌라이 칸은 수도를 유목지역의 카라코룸에서 오늘날의 베이징인 대도로 옮겼다. 원은 넓은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중국의 통치 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였지만, 몽골인 제일주의의 원칙을 고수하였다.

 

정치와 군사는 몽골인이 독점하고, 제국 건설의 길잡이 역할을 한 색목인(이슬람인)에게 재정과 경제를 맡겼다. 양쯔강 아래에서 끝까지 저항한 남송의 한족은 가장 차별 당하였다. 세법도 달라서 한족은 더욱 무거운 세금 부담을 져야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몽골제국은 초원길과 사막길 그리고 바닷길까지 장악하며 유라시아의 육지와 바다를 하나로 묶었다. 대제국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교통․통신, 즉 ‘길’ 이다. 페르시아도 로마도 모두 수도로 통하는 길을 닦았다. 원의 수도 대도로 통하는 길은 역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주요 도로를 따라 일정 간격으로 배치된 역참에서는 숙박은 물론 수레나 말, 식량을 이용할 수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초원이나 사막까지 설치된 역참 덕분에 몽골의 관리는 하루에 450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었다.

 

몽골제국은 남송을 무너뜨림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던 강남의 풍부한 경제력을 확보하였고, 이슬람 상업망을 통해 새로운 경제 질서를 만들었다. 송 대의 3대 발명품도 모두 원을 통해 서양세계에 전해졌다.

 

몽골제국에는 많은 외국인이 드나들었다. 가톨릭이 전해졌고 라마교가 유행했다. 몽골은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보장하여, 각 종교 수도사들이 한자리에 앉아 일종의 종교 배틀을 벌이기도 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도 원의 수도 대도를 다녀온 여행기이다. 실제로 다녀왔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고는 하나 워낙 유명한 책이라.. 1492년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항해한 것도 대도를 찾아 나선 여행이었다고 한다. 몽골제국은 망했지만 아시안 드림은 여전했다고나.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217>

 

하나 된 유라시아제국을 통해 교류했던 것이 사람과 물자뿐만이 아니었다. 14세기 유럽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페스트균도 이 길을 따라 서양에 전파되었다. 흑사병은 중국 윈난 지방의 풍토병으로 들쥐가 그 매개체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219>

 

마지막으로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들을 쓰윽 살펴본다. 주로 중국 왕조들과 대립했지만, 우리나라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선비족이 북위를 세우고 화북지방을 차지하자 몽골초원을 장악한 유연은 당시 북위, 남조, 고구려와 함께 동아시아 4강 체제를 구축했다. 6~7세기에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돌궐제국은 7세기 동아시아의 십자외교의 한축을 담당했다. 가로축으로 수․당과 신라가 손을 잡고 세로축으로 돌궐-고구려-백제-왜가 연합하여 대결 구도를 형성했다. 수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한 배경에는 돌궐과 고구려의 연합을 저지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발해도 당을 견제하기 위해 돌궐과 손을 잡았다.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를 3차례나 침략했으며, 거란을 물리친 여진족의 금나라는 고려에 사대를 요구해서 관철시켰다. 몽골제국이야 말할 것도 없이 고려를 침략하여 전국을 초토화시키고 문화재를 불태우고,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고 내정에 간섭했다.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도 두 차례의 호란을 일으키며 조선에 재앙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사대부에게는 오랑캐에게 사대하는 굴욕도 안겨주었다.

 

 

중국을 마지막으로 중세편이 끝났다.

중국은 수와 당까지를 중세로 보는 강의도 있고, 송과 원까지를 중세로 보는 강의도 있다.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자의적일 수밖에 없으니 일률적으로 정해진 기준은 없는가 싶다.

여하튼 중세를 도표로 한번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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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허문명 이래 漢나라까지가 중국의 고대로, 중국의 정체성이 확립되었던 시기다.  중국의 중세는 위진남북조와 수․ 당 시대로, 세계 제국으로 성장한 시기다. 

 

7장 <장안에서 나라까지 굽이치는 동아시아>는 중국의 중세와 그 주변국(우리나라를 포함)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1. 통일로 가는 유목 세계와 농경 세계

  

<아틀라스 세계사 p28>

 

유라시아 대륙은 강을 중심으로 한 4대 문명 지역 즉 농경민 지역과 그 위쪽의 유목민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한나라 때 장건에 의해 비단길이 개척되었다지만, 이미 그 위쪽에는 유목민족에 의한 초원길이 만들어져 동서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출처: http://blog.naver.com/phklove0531/34769007>

 

중국은 역사 이래 끊임없이 다양한 유목민족에 의해 침략을 당해왔다.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은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유목민족들은 교역이 가능할 때는 교역을, 불가능할 때는 침략을 통해 농경민족과 교류(?)를 해왔지만, 유목이라는 생활 습성 때문에 약탈이 끝나면 항상 초원지대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한나라 말기, 혼란이 시작되면서 북방민족들이 장성 아래로 내려와 한족과 섞여 살기 시작했다. 게다가 위나라를 이은 진의 왕족들이 패권다툼을 치열하게 벌이면서, 싸움을 잘 하는 유목민을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 들이는 바람에, 유목민의 세력이 엄청나게 성장하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결국 진은 흉노족에게 망하였다. 이후 화북지방에는 다섯 부족의 호족들이 다투어 나라를 세웠는데 이를 5호16국이라고 한다. 진 왕실의 일족은 양쯔강 유역의 강남으로 내려가 새로이 나라를 세웠는데 이를 동진이라고 한다. 이후 황허를 중심으로 한 화북지방은 호족들이, 양쯔강을 중심으로 한 강남지방은 한족들이 양분하여 흥망성쇠를 거듭했는데, 이를 두고 남북조시대(북위부터 남북조라 부르기도 한다. 이때는 가운데 5호16국을 넣어야 한다.: 위진-5호16국-남북조) 라고 부른다.

 

위진남북조시대는 한나라가 멸망하고 삼국이 경쟁하던 AD 220년부터 수나라가 남북조를 재통일한 589년까지, 약 370년 정도의 혼란기를 이른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북조에서 5호 16국을 통일한 나라는 북위(439)이다. 북위는 선비족인데, 효문제는 화북지방의 한족을 다스리기 위해 한화정책을 채택했다. 한족을 호족의 문화로 흡수한 것이 아니라, 호족을 한족의 문화에 흡수시킨 것이다. 호족과 한족을 융합하려는 효문제의 노력은 어느 정도 효과도 있었지만, 내부의 갈등을 낳기도 했다. 

  

남조에서는 동진 시대부터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었다. 남하한 귀족들은 유랑민과 빈민을 모아 농토를 개간하여 거대한 장원을 소유하고 새로운 귀족 사회를 이루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북조에서는 불교가 발전했다. 한족의 우월감에 맞서 호족은 평등의식을 강조하는 불교를 받아들였다. 남조에서는 도교가 융성했다. 노장사상에 전통신앙과 신선사상을 결합한 도교는 혼란기 중국의 의지할 데 없던 민중 속을 파고들었다.

 

왕희지, 도연명, 죽림칠현 등이 이 시대의 귀족문화를 이끌었다. 귀족들은 현실 정치를 외면한 채 철학적 논의를 일삼으며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였다.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를 대표하는 네 가지 사상이 있다. 그 중 법가는 진나라의 사상적 기반이, 유가는 한나라의 통치 이념이 되었다. 도가는 위진남북조 시대에 와서 귀족들과 민중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그런데 차별 없는 사랑과 평등을 주창하는 묵가의 시대는 과연 올 수 있을까?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581년 수나라를 세운 양견이 589년 마침내 남북조를 통일했다. 농경민인 한족과 유목민인 호족이 하나의 나라를 이룬 호․ 한 일체의 세계가 마련된 것이다.

 

수나라는 대운하 사업과 고구려 정벌에 무리하게 국력을 쏟은 나머지 건국 후 40년도 못가 망하고 말았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짧은 치세였으나 수나라는 이후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끼치는 율령체제를 마련하였다. 민중들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어 주는 균전제(북위에서 처음 실시)를 근간으로 하여, 조용조의 세법과 부병제라는 군사제도를 확립하고, 과거제를 실시하였다. 수의 율령체제는 당나라로 계승되어 발전하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2. 말 달리는 한반도, 일어서는 일본

3. 백강에서 겨루는 동아시아 삼국

 

2절과 3절은 우리역사의 삼국시대를 다루고 있다. 한국사에서 자세히 공부했으므로 이전에 간략히 정리한 글을 링크하고, 여기서는 생략한다.

 

http://blog.aladin.co.kr/753199155/7916096

 

 

다만 한국사에 등장한 위진남북조 시대의 몇몇 나라들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겠다. 한국사 공부할 때 열심히 외웠던 나라들을 여기서 보니 새삼 반갑다. ^^ 연대별로 들여다보면 쉽게 연결이 된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170>

 

위나라는 3세기 동천왕 때 고구려를 침략했다.

 

고구려와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4세기인데, 고구려에는 소수림왕 때 전진의 순도가, 백제에는 침류왕 때 동진의 마라난타가 전해주었다. 전진은 5호16국 시대에 저족이 세운 나라이고, 강남의 동진 역시 5호16국과 경쟁하던 동시대의 나라이다. 고구려는 북조의 호족이, 백제는 남조의 한족이 불교를 전해준 것이다.

 

북위가 활약하던 5세기는 고구려의 전성기이기도 하다. 당시 동북아시아는 고구려를 비롯한 북위와 유연 그리고 남조가 4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6세기 전반의 양나라는 백제와 활발히 교류하였다. 무령왕릉은 양나라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이고, 성왕 때는 백제의 사신이 양나라의 그림에 등장한다. 양직공도 속의 백제 사신은 기품이 있어 보인다.

 

이 시기 한반도가 삼국시대로 나뉘어 오랫동안 경쟁할 수 있었던 것도 중국이 혼란기였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당장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마자 고구려를 침공했고, 곧이어 나당연합군에 의해 고구려와 백제가 망한 것을 보아도, 안심하고 우리민족끼리 경쟁할 수 있었던 배경은 중국이 한반도에 눈을 돌릴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4. 비단길에 실려 온 당나라의 봄바람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당나라는 안으로 제도를 정비하고 밖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세계 제국을 건설 하였다. 당나라의 제도와 문물은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퍼져 나가, 당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신라는 물론 발해와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정치 체제에도 오랜 기간 영향을 미쳤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618년에 건국한 당나라는 2대 태종과 6대 현종 시기의 전성기를 거쳐 현종 말기부터 쇠퇴하였다. 안사의 난과 황소의 난 등 반란에 시달리다 907년 주전충의 난으로 멸망하였다. 이때부터 조광윤이 송나라를 세워 통일한 979년까지 70여년은 절도사들이 난립한 5대10국 시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당태종 시기는 정관의 치로 불리며, 정치적 황금기를 이루었다. 영토를 확장하고 율령체계를 정비하였다. 아버지 당고조를 도와 건국한 과정이나 이후 황제에 오르는 과정이 조선의 태종 이방원과 비슷하다. 우리역사에도 고구려 정벌을 왔다가 안시성에서 패퇴하여 물러간 황제로 기록되어 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자 황제라는 측천무후는 태종의 후궁으로 들어왔다가 태종의 아들인 고종의 황후가 되었다. 고종대신 실권을 장악한 것도 모자라 아들들을 연이어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측천무후가 실권을 쥐고 있던 시기, 당나라는 신라와 동맹을 맺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영토를 확장하였다.

 

현종의 통치 시기는 둘로 뚜렷이 나누어진다. 개원의 치로 불리며 문화적 황금기를 이룬 전반기와 양귀비를 만나 몰락해 가던 후반기이다. 후반기에는 이슬람의 아바스 왕조와의 탈라스 전투에서 패해 비단길을 잃었다. 연이어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을 겪으며 현종뿐만 아니라 당나라도 급격히 쇠퇴했다. 8년에 걸친 안사의 난은 얼마나 재앙적이었던지 당나라 인구가 거의 1/4로 줄어 들었다.  

 

비단길을 잃은 당나라는 동서무역을 위해 바닷길을 개척했다. 이로써 초원길, 비단길, 바닷길이 모두 열렸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한나라가 고대제국을 완성하여 중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확립하였다면, 당나라는 세계적 제국을 건설하여 동아시아라는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특히 중앙행정 체제는 중세뿐만 아니라 근세까지도 여러 나라의 통치체제에 바탕이 되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중앙 행정체제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토지제도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토지 문제가 대두되고 이에 따른 세금이 국가의 중심 이슈로 떠오르게 되면, 왕조가 무너지거나 뿌리부터 흔들렸다.

 

당나라의 토지제도는 ‘균전제’ 이다. 국가가 일정 기준에 따라 농민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지급하면, 농민은 이에 대한 대가로 국가에 세금과 역을 제공한다. 균전제는 당나라에서 처음 시행된 것은 아니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북위가 처음 도입했고, 수나라가 이를 이어받아 제도화한 것을 당나라가 계승하여 확립한 것이다. 이전 한나라 때는 한전제를 실시하여 토지 소유 상한선을 두었지만, 실패하고 대농장이 발달했다. 균전제 역시 당이 쇠퇴함에 따라 장원제로 가는 수순을 밟게 된다.

 

국가의 기틀은 귀족이나 특권층이 아니라 民, 일반 백성이다. 민중의 기반이 튼실해야 세금을 통해 국가재정을 확보하고, 징병으로 국방을 튼튼히 할 수 있다. 그런데 동서를 막론하고 계급 사회에서는 점차 토지가 특권층에게 집중되고, 살기가 힘들어진 민중은 노비로 전락한다. 노비가 되면 국가에 대한 모든 의무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특권층에게 토지가 집중되어 민중이 줄어들고 노비가 늘어나면 국력 또한 약화된다. 멸망으로 가는 수순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도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재벌이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빈부격차가 극심하여 1%에게 부가 집중되면 국가의 재정은 악화된다. 사회복지 제도인 의료보험, 국민연금 등도 덩달아 약화되어, 사회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된다. 소위 trickle down이라는 논리로 재벌로의 부의 집중을 옹호하는 것은 이론의 유희에 불과하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당나라는 안사의 난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균전제를 바탕으로 한 조용조와 부병제는 안사의 난 이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토지제도는 특권층이 대토지를 소유함에 따라 장원제로 바뀌었다. 국가가 더 이상 농민에게 나누어줄 토지가 없어지게 되자, 세금제도와 군역제도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 세금은 양세법으로, 군역은 모병제로 바뀌었다. 경제적 평등 사회가 차등 사회로, 균등 과세가 차등 과세로 변화했다.

 

현종 후기부터 절도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각종 반란에 의해 시달리다 당나라가 멸망했다고 하지만, 그에 더하여 혹은 그로 인하여 토지제도의 근간이 무너지고 민생이 극심하게 악화된 것이 또 다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188>

 

당나라의 수도 장안(시안)은 ‘거대한 용광로’라고 불릴 만큼 국제적인 도시였다. 각국의 사신은 물론 유학생과 유학승, 화가와 음악가, 종교적 망명자들까지 북적거리며 화려하고 국제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주변 국가들은 발달한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다투어 받아들였다. 율령체제는 물론 유교와 불교, 한자를 수용하였고, 도읍을 만드는데 장안의 형태를 본떴다. 그리하여 동아시아는 점차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당나라의 천재 시인인 이백과 두보도 당 현종 시기에 활약한 인물이다. 이백이 자유분방하고 심미적이라면 두보는 사회비판적이었다.

 

 

 <수능특강 이다지의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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