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조권의 개념이어 수조권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최태성의 고급한국사> 11강, 20강, 29강, 주제사 21강, 주제사 22강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고대(신라)의 제도는 녹읍제와 녹읍제의 폐지, 그리고 녹읍제 부활로 이어집니다. 고려 이후의 수조권과는 달리 고대 녹읍제는 수조권(여기서는 조세에 대한 수취 권한으로 한정하겠습니다.)에 더하여 공물과 역에 대한 권리를 관리에게 부여합니다. 수취에 대한 국가의 권리를 몽땅 이양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은 곧 군사력을 의미하고, 이는 왕권약화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신라 중대에 가장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했던 신문왕이 이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죠. 그래서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합니다. 관료전은 역을 제외한 수조권과 공물에 대한 권리입니다. 하지만  신문왕 사후 얼마 가지 않아 경덕왕 때 녹읍이 부활합니다. 왕권이 약화되었다는 의미이죠.

 

신문왕과 경덕왕 사이의 왕인 성덕왕 때 국가가 백성에게 직접 정전을 지급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정전의 정확한 성격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들이 있지만, 정전은 국가의 토지 장악력이 상당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문왕에 이은 성덕왕 때까지는 왕권이 꽤 강했다는 뜻입니다.

 

 

  

 

고려 토지제의 기본은 전시과입니다. 田과 柴, 곡물과 땔나무입니다. 관리는 직역의 대가로 녹봉과 함께 곡물과 땔나무를 거두어들일 권리를 갖습니다. 18과로 나누어 전지와 시지의 크기를 결정하는데, 18과인 이유는 관리의 품계가 총9품, 각각의 품계에 정품과 종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도 마찬가지로 18과입니다. 대상 토지는 전국의 토지입니다.

 

전시과는 5대 경종 때 처음 시행되어 시정전시과, 7대 목종 때 개정하여 개정전시과, 11대 문종 때 다시 개정하여 경정전시과의 순으로 발전됩니다. 개정될 때마다 지급 대상이 줄어듭니다. 시정전시과는 전직과 현직 모두에게 줄뿐 아니라 관품에 더하여 인품도 고려하여 지급합니다. 개정전시과는 인품을 빼고 전, 현직 관리에게 관품에 따라서만 지급합니다. 경정전시과는 여기에 전직을 또 뺍니다. 오직 현직 관리에게만 관품에 따라 지급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지급할 토지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18대 의종 때 무신의 난과 23대 고종 때 몽골 침입을 거치며 전시과 제도는 거의 붕괴됩니다. 몽골은 전 국토를 유린하고 있고 왕실은 강화도로 도망가 있는데 무슨 제도가 남아 날 수 있겠습니까? 개경으로 환도한 24대 원종은 유명무실한 전시과를 폐지하고 녹과전을 실시합니다.

 

녹과전은 관리에게 녹봉을 지급하지 않고 오로지 토지에 대한 수조권만을 주는 것입니다. 이때 대상 지역은 경기도에 한합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경기지역이 수조권의 대상으로 한정되는 것은 조선의 과전법에서도 이어집니다. 여하튼 기존의 녹봉과 수조권을 지급하던 것에서 녹봉을 주지 않는 것은 아마도 몽골의 침입으로 창고가 텅 비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녹과전은 전시과에서 과전법으로 이행하는 중간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전법은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 때 실시되었지만, 사실상 고려가 아니라 조선의 토지제도입니다.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은 이미 위화도 회군을 거쳐 조선 건국의 기초 작업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위화도 회군이 권문세족의 정치 권력을 빼앗은 것이라면,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권문세족의 대농장을 몰수하고 신진사대부가 주축인 관리들에게 수조권을 지급한 것입니다. 물론 기본 1/10세로 돌아감으로써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 주었습니다.

 

과전법은 전,현직 관리들에게 경기지역 토지에 대한 수조권을 주었습니다. 또한 수신전과 휼양전이라는 이름으로 관리가 사망했을 때, 부인과 자식에 대한 생계 대책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수신전과 휼양전은 세습됩니다. 직역의 대가인 수조권은 세습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고려와 조선 모두 수조권은 세습불가입니다. 그런데 수신전과 휼양전의 존재로 인해 사실상 세습의 길이 열립니다. 그 결과 과전이 부족하게 되어, 세조에 와서는 수신전과 휼양전 자체가 폐지됩니다.

 

수신전과 휼양전은 고려의 구분전 및 한인전의 성격과 유사합니다. 단 고려의 구분전과 한인전은 6급 이하 하급 관리의 유족과 직역이 없는 자식에게 각각 지급합니다. 그런데 6급 이하 관리의 직은 원칙적으로 세습되기 때문에 구분전과 한인전은 직이 세습되는 동시에 소멸됩니다. 직이 세습되면 직역에 대한 수조권이 자연 세습되기 때문에 구분전과 한인전은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고려말 공양왕 때 처음 실시된 과전법은 조선 7대 세조 때에 직전법으로 바뀝니다. 역시 토지 부족의 문제입니다. 수신전과 휼양전도 없애고, 전직 관리도 제외하고 오로지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지급합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관리가 퇴직을 하거나 죽으면 남은 가족의 생계가 막막해집니다. 현직에 있을 때 최대한 긁어모아야 합니다. 농민에 대한 수탈이 심해집니다. 또한 무엇보다 내 땅에 대한 욕구가 증가합니다. 퇴직 시 반환해야 하는 수조지가 아니라 세습이 가능한 사유지가 필요해 집니다. 이런 상황에 따라 수조권을 기반으로 한 전주전객제는 쇠퇴하고 소유권을 중심으로 한 지주전호제가 우세해집니다. 수조권과 소유권의 대립에서 소유권이 승리하게 됩니다.

 

급기야 13대 명종에 와서는 직전법이 폐지되고 녹봉제가 전면 실시됩니다. 그동안 녹봉과 함께 수조권이 지급되던 것이 순전히 녹봉만 지급되는 방식으로 전환됩니다. 이는 곧 수조권의 폐지이며, 전주전객제라는 토지 제도의 소멸입니다. 조선 전기의 마지막 무렵에 와서 그동안 우리를 숱하게 괴롭히던 수조권이 마침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와우 ^^

 

조선의 토지 제도에서 아직 남은 것이 있습니다. 조선은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에 등록된 <조선왕조실록>을 가질 만큼 기록이 풍부한 국가입니다. 단순히 토지지급 방식뿐만 아니라 이런 제도 아래 실제로 관리들이 어떻게 수조권을 행사했는지, 즉 조세의 수취방식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더 자세한 공부를 ;;

 

과전법 아래에서 수취방식은 처음 답험손실법이 시행되다가 4대 세종 때에 공법으로 바뀌었습니다. 수취방식이 문제가 되는 것은 해마다 풍흉의 상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수조권은 정률제입니다. 기본이 수확량의 1/10세입니다. 매해 수확량이 달라지기 때문에 매해 수조권을 가진 관리가 가져가는 양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기준을 어떻게 정해야 할까요? 보는 사람에 따라 대풍일수도 있고 조금 괜찮은 수확일 수도 있습니다. 수취방식은 이런 문제 때문에 발생합니다.

 

답험손실법은 전주인 관리 자신이 답사하여 직접 결정하는 것입니다. 3등급으로 나누었는데, 고양이 손에 생선을 맡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많이 가져가려고 하겠지요? 이 때문에 우리의 세종대왕께서 대규모의 여론조사를 하셨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수취법을 결정하면 가장 합리적이겠는가를 자그만치 17만 명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공법입니다.

 

공법은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전분6등 법을, 당해 연도의 풍흉에 따라 연분9등 법을 시행하는 것입니다. 연분9등은 해마다 달라집니다. 상상에서 하하 까지 9단계입니다.

 

 

 

1결은 300두의 수확을 할 수 있는 토지의 면적입니다. 결은 토지의 절대 크기가 아니라, 토지의 수확량에 따른 면적입니다. 토지가 비옥할수록 1결의 크기는 작고 토지의 질이 나쁠수록 1결의 크기는 커집니다. 이론적으로는 관리가 어떤 상태의 토지에 대한 수조권을 갖든 문제가 없습니다. 전분6등급으로 낮은 등급의 땅을 받는다고 해도 결국 절대 면적은 그만큼 계산해서 더 커질 것이기 때문에 관리의 입장에서 결을 기준으로 한 수조권은 매우 합리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할 것은 전분6등이 아니라 연분9등입니다. 예를 들어 70결의 수조권을 가진 관리가 중중년에 거둘 수 있는 곡물의 양은 얼마일까요? 두(斗)라는 단위는 참고로 예전에 우리도 쓰던 말입니다. 쌀 한말, 두말 할 때의 그 말이 바로 두(斗)입니다. 그러나 공법은 매우 복잡하여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최저세율인 1결당 4두가 이후 관행처럼 굳어지다가, 조선후기에 가서 영정법으로 법제화됩니다. 땅을 많이 가진 지주에게 매우 유리한 제도였습니다.

 

여하튼 공법은 풍흉의 정도와 토지의 비옥도를 수조권을 가진 전주가 아니라 국가에서 기준을 제시한다는 것에 의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법은 매우 복잡합니다. 관리가 농간을 저지를 수 있는 여지도 여전합니다. 기준만 국가가 정해줄 뿐 수취는 전주가 직접하기 때문입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겠지요?

 

성종 때 등장한 수취방식이 관수관급제입니다. 수조권은 관리에게 여전히 있지만 수취는 전주가 아니라 관, 즉 국가에서 직접해서 관리에게 전달해 주는 방식입니다. 100두를 수취하면 그대로 100두를 전주에게 말 그대로 전달만 합니다. 관리의 부정을 차단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다가 명종 때 직전법이 폐지되고 녹봉제가 전면 시행되면서 관수관급제도 사라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조세를 걷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수조권은 국가가 가진 조세의 권리를 관리에게 이양해 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수조권이 소멸되면 조세의 권리는 국가가 가집니다. 국가가 직접 조세를 걷어서, 직급에 따라 녹봉을 주는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취제와 관련된 토지제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특히 기출 문제를 보면, 강의나 교재를 달달 외운다고 다 풀 수 있을까 싶은 의구심이 듭니다. 일단은 무엇보다 원칙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교재 뒷부분의 <주제사>를 보면 흐름을 이해하는 데 조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태성의 고급한국사 p262>

 

 

1. 기본은 수조권입니다.

 

직역의 대가로 녹봉과 함께 관리에게 토지에 대한 수조권, 즉 세금을 걷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는 것이 (물론 우리에게) 이 복잡한 문제의 원인입니다. 깨끗하게 녹봉만 줬다면 이게 무슨 문제겠습니까? 다행히 (?) 조선 명종 때에 와서 녹봉제가 전면적으로 시행됩니다. 수조권이 사라지죠. 당연히 전주전객제도 소멸됩니다. (물론 관리의 수조권을 말합니다. 토지에 대한 국가의 조세는 당연히 계속되겠지요.)

 

 

 

 

여하튼 이때까지 국가가 관리에게 직역의 대가로 지급하는 것은 녹봉과 수조권입니다. 그런데 고려 원종 때에 와서는 국가 창고가 텅 비어 녹봉을 주지 못하고 오로지 토지 즉 수조권만 주기도 합니다. 경기지역의 땅에 한해 수조권만을 주는 이 제도를 녹과전이라고 합니다. 녹과전은 고려 전시과와 조선 과전법의 중간 단계로 보시면 됩니다.  

 

 

2. 수조권은 조세에만 해당할까요?

 

기본적으로 수권은 세에 대한 권리인 것 같습니다.

수취제도는 조세, 역, 공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중국 당나라의 조(租)용(庸)조(調)제도와 유사하다고 합니다. 세종실록에 "전(田)이 있으면 조(租)를, 신(身)이 있으면 역(役)을 징수하고, 호(戶)단위로는 공물을 징수하니 이것이 옛 조용조의 법에 부합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답니다. 조세-조(租)-전(田), 역-용(庸)-신(身), 공물-조(調)-호(戶)입니다. 조용조라는 말을 알아야 합니다. 시험 문제에 관료전이 조용조를 거두는 것 운운 이런 지문이 나오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수조권은 고려의 전시과나 조선의 과전법 모두 조세에 대한, 즉 토지에 대한 권리입니다. 그런데 통일신라도 그럴까요? 녹읍과 식읍은 조세, 역, 공물 모두를 취할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위의 표를 자세히 보면,  녹읍에 수조권, 공납, 역이라고 표기함으로써, 수조권은 조세에만 해당하는 것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습니다.

 

 

 

 

<최태성의 고급한국사 p262> 

 

신문왕 때 와서 국가의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했습니다. 관료전은 조세와 공물에 대한 권리는 가지되 역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것도 경덕왕 때 금방 부활합니다. 신문왕 때의 강력한 왕권이 그만큼 빨리 약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신문왕경덕왕 사이의 왕인 성덕왕은 정전을 농민에게 지급하여 토지에 대한 국가 통제력을 높였다는 것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3. 소작지인 경우 조세는 누가 낼까요? 전객입니다.

 

수조권을 기준으로 한 토지 제도는 전주전객제입니다. 전주는 수조권자 즉 국가가 직역의 대가를 지불해야 할 관리입니다. 전객은 토지 소유자입니다. 자작농인 경우 당연히 경작자 자신이 조세를 냅니다. 소작농의 경우는 어떨까요? 소작지의 주인은 소유자인 전객입니다. 그러므로 소작농은 조세를 내지 않습니다. 대신 소유자 즉 지주에게 지대를 냅니다. 보통 병작반수제라고 해서 지주와 소작인이 반반씩 가져갑니다. 그래서 지대가 1/2이 됩니다. 아래 표를 자세히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빨간색으로 표시한 소작농은 관리(여기서는 땅 주인)에게 지대를 내고 공물과 역만 국가에 직접 냅니다. 땅주인인 관리 즉 전객은 국가에 1/10 조세를 내고 공물을 바칩니다. 관리이므로 역에서는 제외됩니다.

 

 

 <최태성의 고급한국사 p262>

 

 

4. 공음전은 세습됩니다. 구분전과 한인전은요?

 

원칙적으로 수조권은 세습불가입니다. 양반전은 세습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귀족 사회의 특징인 5품 이상 관리에게 지급되던 공음전은 세습됩니다. 5품 이상의 관리가 죽어도 가족들은 먹고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6품 이하 하급 관리가 퇴직하거나 죽으면 그 가족들은 어떻게 될까요? 하급 관리의 가족을 위한 제도가 구분전과 한인전입니다. 구분전은 하급관리의 유가족에게, 한인전은 직역이 없는 하급관리의 자식에게 지급하는 수조권입니다. 세습되지는 않습니다. 군인전과 외역전은 수조권이 아니라 직역 자체가 세습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수조권도 세습되는 모양을 띱니다. 아래 표는 세습 토지를 표기해 놓고 있습니다.

 

 

 

<최태성의 고급한국사 p262>

   

 

<정재준, 통합한국사>

 

5. 고려 말 공양왕 때 시행된 과전법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과전법은 고려 시대에 시행되었지만 사실상은 조선의 수취제도입니다.

고려의 전시과와 마찬가지로 몇 번의 변화를 겪습니다. 미리 슬쩍 훑어볼까요? 아찔하군요. 그래도 전주전객제를 기반으로 한 과전법(직전법)은 결국 명종 때에 전격 폐지됩니다. 수조권이 폐지되기 때문입니다. 명종부터는 관리에게 녹봉만 지급하는 녹봉제가 전면 시행됩니다. 골치 아픈 수조권도 조선 전기까지만 알면 되니, 그나마 다행이겠죠?^^

 

 

 <최태성의 고급한국사 p264 : 요긴 오타가 있네요;; 찾아보셔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강 고려의 대외 관계

 

 

강의에 박스 칸이 많습니다. 내용이 많다는 얘기죠.;;

고려는 약 500년 동안 (918~1392),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우리 민족 최대의 위기도 있었지요.

몽골에 한방에 먹혔다면 지금쯤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고구려가 민족의 방파제였다면,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 역시 그에 못지않게 민족의 방패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 영광의 혹은 치욕의 역사를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1. 거란의 침입

  

<최태성의 고급한국사 19강 강의> 

 

1차 침입은 성종(993),

2차 침입은 목종이 강조의 변으로 시해당한 직후인 현종1년 (1010),

3차 침입은 현종9년 (1018)에 일어납니다.

 

그런데 거란은 왜 고려를 쳐들어 왔을까요? 영토를 넓히기 위해?

중국의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완성했다고 하잖아요. 이 만리장성은 그 당시부터 (기원전 3세기) 북방의 유목민족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춘추전국시대부터 조금씩 쌓았다고 하니 그때부터 중국의 농경민족은 유목민족에게 시달렸던 것입니다. 거란도 그런 유목민족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유목민족들은 유목이라는 특성상 쳐들어오면 식량 따위를 빼앗고 금방 초원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요 거란족은 야심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만리장성 이남의 기름진 옥토에서 눌러 살기로 한 거지요.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은 발해도 무너뜨리고 송나라를 공격합니다. 그러자니 후방의 고려가 켕깁니다. 송나라와 친한 고려가 뒤통수를 치면 곤란한 거지요. 거란의 목적은 고려 땅보다는 고려와 화친을 맺어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게 말로 하지, 왜 군대를 끌고 왔냐고요? 소위 ‘눈앞의 현실’ 즉 힘을 보여주어야 화친이든 뭐든 말을 잘 듣지 않겠습니까?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200>

 

1차 침입에서 거란의 소손녕은 신라를 계승한 고려가 왜 고구려 땅을 갖고 있느냐 우리 땅이니 내놔라 어쩌고 하면서 으름장을 놓는데, 요걸 간파한 서희가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했다, 너네랑 놀려고 해도 여진이 방해한다, 여진이 차지한 강동6주를 우리한테 주면 송과는 안 놀고 너네랑만 친하게 지내겠다, 요렇게 세치 혀로 나불나불(죄송함다;;), 거란을 물리치고 당당히 압록강 동쪽의 6주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고려는 거란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송과 몰래 교류를 합니다. 거란은 당연히 약이 오르겠지요. 그런데 마침 이 때 강조의 변이 터집니다. 혹시 <천추태후>라는 드라마를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전 안 봤지만 채시라가 천추태후 역을 한 것은 기억합니다. 이 천추태후가 목종의 엄마죠. 김치양이라는 남자와 얼레리 꼴레리 하고 막 하여튼 그랬다지요. 여하튼 이 목종이 강조에 의해 폐위되면서 천추태후가 실각하고 현종이 즉위한 사건이 강조의 변입니다. 거란은 강조의 변을 구실 삼아 2차 침입을 합니다. 이때 개경까지 함락되어 현종이 피난을 가고 난리가 아니었답니다. 그래서 아마 개경에 나성을 쌓게 되는 것이겠지요. 하여튼 앞으로 현종이 친조를 하겠다고 약속하고 강화를 맺습니다. 하지만 거란이 퇴각하는 길에 양규가 활약하여 큰 타격을 입힙니다. 양규는 이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하지만 고려가 어떤 국가입니까? 북방 유목민에게 그렇게 호락호락 친조를 할 민족이 아닙니다. 현종은 개경에 돌아온 뒤 거란에게 쌩깝니다. 거란은 또 당한셈이지요. 다시 공격. 이것이 3차침입니다. 여기서 강감찬이 귀주에서 대활약합니다. 귀주대첩으로 거란을 막아냅니다.

 

3차례에 걸친 거란과의 싸움으로 송-요-고려의 세력 균형이 유지됩니다. 고려를 굴복시키지 못한 거란은 송을 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영원한 동지도 없고 적도 없는 것처럼 고려와 요는 사이좋게 지내기로 했습니다. 강동6주도 그대로 고려가 차지하고 친조 같은 굴욕도 없던 일로 하고요. 힘의 균등에 의한 평화가 찾아온 것이지요.

 

거란의 침입을 받은 고려는 물론 앗 뜨거워했겠지요. 그래서 개경에 나성을 쌓고, 압록강에서 도련포까지 '천리장성‘을 쌓습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당 침입에 대비해 쌓은 천리장성과는 다른 것이지요. 이때 초조대장경을 새깁니다. 불교의 힘으로 거란을 물리치겠다는 것이지요. 몽골 침입 때 초조대장경이 불타고 다시 판각한 대장경이 바로 팔만대장경입니다.

 

움... 너무 길었군요.

 

 

2. 여진족의 침입

 

 

<최태성의 고급한국사 19강 강의>

 

여진족은 전에 말갈족으로 불렸고 나중에 만주족으로 이름을 바꾸는 유목민족입니다. 고대에 고구려와 특히 발해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발해는 지배민족이 고구려인이고 피지배인의 대다수가 말갈인 즉 여진족이었습니다. 그러던 여진이 이제 중국 본토를 넘보게 된 것이지요. 여진은 금나라를 세우고(1115), 송과 손을 잡고 거란족의 요나라를 멸망시킵니다. 그런 다음 송을 양쯔강 쪽으로 밀어내고 화북지역까지 차지합니다. 이제 금과 남송 그리고 고려라는 새로운 삼각체제가 이루어집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206>

 

윤관이 여진을 무찌르고 동북9성을 차지한 것은 여진이 세력을 한참 키우고 있

을 때입니다. 1107년(예종)입니다. 처음에 한판 붙었다가 깨지고 난 뒤 윤관이 별무반을 만듭니다. 다시 다그닥 다그닥 말 타고 가서 샤사삭 무찌르고 동북 9성을 세웁니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p139>   

 

그런데 이때 고려사회의 꼬라지는 묘~합니다. 호족의 진취적 기상은 쏙 빠지고 문벌귀족의 향락적 풍토가 판을 칩니다. 당연히 전쟁을 싫어하고, 영토가 넓어지는 것도 별로 탐탁치 않습니다. 여진족이 끊임없이 탈환을 노릴테니 관리가 더 힘들다고 판단합니다. 윤관과 백성들이 피로 얻은 동북 9성을 문벌 귀족들은 조공을 받는다는 조건 아래 여진에게 홀라당 넘겨버립니다. 여진은 이 때 돌려받은 동북9성을 거점으로 금나라를 세워 다시 고려를 압박합니다. 조공은커녕 거꾸로 고려에게 사대를 요구하지요. 문벌귀족들은 이것도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이자겸, 김부식 등 개경파의 이런 사대사상은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촉발하게 됩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금은 동북9성을 돌려받을 때 한 약속을 지켜 송을 강남으로 몰아내면서도 고려는 침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때 의주를 고려에 양도하기도 합니다. 금과의 화친이 전혀 무익하지만은 않았다고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3. 몽골의 침입

  

 

<최태성의 고급한국사 19강 강의>

 

드디어 몽골이 고려로 쳐들어왔습니다. 13C 유라시아 제국을 일거에 통일한 그 몽골제국입니다. 1231년, 고종 18년 (고종은 조선이나 고려나 괴롭습니다.;;) 몽골 장수 살리타가 군대를 이끌고 들이닥칩니다. 이때 고려는 최우의 무신정권기입니다. 몽골은 7차례(실제로는 11차례) 침입을 하지만, 고려는 40년간 끈질기게 이 무시무시한 몽골제국을 막아냅니다. 지배층은 썩었어도 백성들은 가히 고구려의 후예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끝내 항복하여 원의 간섭을 받습니다만, 고려라는 이름만은, 즉 국가만은 잃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210~1> 

 

 특히 몽골장수 살리타를 단 한발의 화살로 꿰어 죽인 처인성(용인) 전투는 승려 장군인 김윤후와 처인성의 부곡민이 이루어낸 쾌거로 대몽항쟁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충주성을 끝까지 사수한 노비들의 중추성 전투에도 이 김윤후가 노비 문서를 불태우며 사기를 북돋우었다고 합니다.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 항쟁도 있지요. 이런 항쟁들이 계속되어 고려는 어떤 민족도 이토록 끈질기게 저항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몽골의 감탄을 자아냅니다. 이에 반해 최우 무신정권과 지배층은 강화도에서도 잔치를 열고 호화롭게 살았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p162>   

 

몽골 전쟁의 와중에 선덕여왕 때 지은 황룡사 9층 목탑과 거란 침입 때 판각한 초조대장경이 불탔습니다. 둘 모두 불교로 환란을 이겨내려 했던 호국불교의 상징인데요. 고려인들은 다시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여 불교의 힘으로 몽골의 침입을 물리치려하였습니다. 가히 불교의 나라답습니다.

 

4. 원 간섭기

 

 

<최태성의 고급한국사 19강 강의>    

 

유라시아를 지배한 몽골은 칭기즈칸 사후에 후손들이 정복지를 분할 통치합니다. 쿠빌라이는 몽골의 발흥지였던 땅과 중국을 통합하여 원나라를 세웁니다. 원나라는 고려의 독립을 인정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엄청난 간섭을 합니다. 이런 원나라에 찰싹 달라붙어 출세가도를 달리던 고려의 지배층이 권문세족입니다. 권문세족은 과거의 문벌귀족부터 전쟁을 통해 부상한 천민계층까지 다양한 세력이 통합되어 있습니다.

 

일단 원 간섭의 치명타는 영토축소와 다루가치 파견이겠지요. 다루가치는 일제 시대의 총독과 비슷하다고 배웠고요. 원은 화주에 쌍성총관부, 서경에 동녕부, 탐라에 탐라총관부를 두어 일대의 영토를 원의 직접적 지배 아래 둡니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p162>  

 

또 독특한 기관으로 정동행성이 있습니다.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고려에 설치한 기관입니다. 이 정동행성의 부서 중 특히 이문소가 골칫거리였습니다. 이문소는 대원관계 범죄를 다스리는 기구인데, 부원세력을 규합하고 그 이권을 대변하는 기구로 변질되었습니다. 백성들의 땅을 함부로 빼앗고 행패를 부려도 고려의 지방관은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일종의 치외법권적 권리를 누렸다는 거죠. 공민왕이 개혁을 하면서 가장 먼저 폐지한 것이 바로 이문소입니다.

 

그러나 결국 원나라도 기울기 시작합니다. 중국에서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고 주원장이 부상하면서 곧 원명 교체기가 시작됩니다. 이때를 틈타 공민왕이 개혁의 칼날을 뽑습니다. 공민왕은 정동행성이문소를 폐지하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하고, 요동을 칩니다. 원의 간섭을 모두 되돌려 놓습니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p167>    

 

특히 신돈을 등용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합니다.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침탈한 전田과 민民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둡니다. 땅은 원 주인에게, 노비는 양인으로 회복하여 국가의 기틀을 다집니다. 광종 때 호족세력을 약화시켰던 노비안검법을 상기하라고 하셨지요?

 

그러나 역사는 똑바로 나아가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돈은 권력에 탐닉하고 공민왕은 미쳐갔습니다.(?) 환관과 자제위에 의해 공민왕이 살해당하고 고려말의 마지막 개혁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5.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최태성의 고급한국사 19강 강의> 

 

고려의 지방행정조직이 5도 양계입니다. 북계와 동계, 이 양계의 목적이 북방 민족의 침입과 왜구의 침입을 막는 것입니다. 거란침입을 겪은 현종 때에 실시된 것입니다만, 고려 말에도 이 양쪽에서 정신없이 이민족의 침략이 계속됩니다. 이때 신흥무인 세력으로 부상한 대표자가 최영과 이성계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여서 어렵지는 않습니다. 드라마 <정도전>에서도 상세히 다루었고, <정도전을 위한 변명>이란 책도 아주 훌륭합니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p177>  

 

우왕과 최영이 요동정벌을 실행한 것은 명의 주원장 때문입니다. 공민왕이 회복한 철령 이북의 땅을 다시 내놓으라며 철령위를 설치한 것입니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명백한 국권침탈입니다. 그런데 이 철령위의 위치가 명확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쌍성총관부 자리라는 말도 있고 요동지역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극구 반대하다 결국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맙니다. 압록강을 다시 건넌 것이지만, 루비콘강을 건넌 것과 마찬가지죠. 위화도 회군으로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와 혁명파 신진사대부는 곧이어 과전법을 실시함으로써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조선 건국의 기초 작업을 마칩니다. 물론 조선건국은 이성계의 신흥무인세력과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신진사대부의 합작품입니다.

 

우왕~ 엄청 길어졌네요. 용서하세요 ~

 

 

* 이 글은 한국사 모임 카페에 올리려고 했으나 글이 용량을 초과해서 올라갈 수 없다고 하여

부득이 블로그에 올리니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최태성의 한국사 강의>를 제일로 꼽더군요. 저도 명성에 혹해 듣기 시작했는데... 재미있습니다^^. 특히 도표로 구조화(도식화라 해야 할까요?) 하는 정리방법이 마음에 꼭 듭니다. 보통 인문학 전공자들은 굉장히 싫어하던데, 저는 이과출신이라 도표나 그래프 엄청 좋아합니다. 딱딱 타타탁 정리가 되어야 머리에 쏘옥 들어오는 느낌이 듭니다.

 

이번 주부터 한국사 <공부모임>을 합니다. 뭐 일종의 스타디인데, 58년 개띠부터 86년 호랑이띠까지 세대를 아우르는 모임입니다.^^ 일단 가시적 목표는 ‘한국사 능력 검증시험’입니다. 각자 이유는 다르겠지만, 우리역사를 알아가는 과정이니 나쁘지는 않겠지요.

 

다음 주는 삼국시대가 주요 내용인데, 공부를 하다가 저도 그림(?) 좀 그렸습니다. 먼저 삼국의 왕들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았습니다. 사실 남이 해놓은 것도 도움이 되지만 직접 그려보는 것이 제일인 것 같습니다.

 

 

 물론 딱딱한 도표 보다는  이런 성장곡선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그런데 잘보면 연대 간격이 자의적입니다. 따라서 성장곡선의 모양이 엄정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설명할 것이, 따라서 외울 것이 많은 시기가 삼국마다 다 달라서 이렇게 그려 놓으신 것이겠죠.  어쨌든 세 나라를 겹쳐 놓으려면 간격이 각기 달라 불가능합니다. 세 곡선을 한꺼번에 놓으면 어떻게 될까 궁금해서 직접 그려보았습니다. 물론 개발새발 삐뚤빼뚤입니다. 그림판으로 그렸는데 손이 달달 떨려서 ;;

 

 

알다시피 4C는 백제, 5C는 고구려, 6C는 신라가 잘 나가던 시기입니다. 그래서 물고 물리는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4C에는 백제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죽이고, 5C에는 고구려의 장수왕이 복수를^^;; 하여 백제 개로왕이 죽습니다. 6C는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 성왕의 뒤통수를 쳐서 죽입니다. 나제동맹을 배신하고 함께 되찾은 한강유역을 신라가 낼름 집어삼킨 것입니다. 그 증표가 북한산 비봉의 순수비죠. 물론 북한산에 있는 것은 지표석이고, 진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 비봉 아래를 여러번 둘러 갔는데, 정작 비봉에 오르지는 못했습니다. 한번은 올라가다가 내려왔습니다. 엄청 험해서 잘못하다가는 떨어질 것 같아서 ㅠ.ㅠ.... 어쨌든 비봉이라는 이름 자체가 순수비에서 왔겠지요?

 

신라의 왕이름은 아직 외우지 못했지만, 고구려와 백제 왕의 이름을 외우고 나니, 저 어지러운 도표의 갖가지 사건들이 얼추 외워지기는 합니다.

 

 

복습삼아(?), 조금 더 잘 보여서 강의 교재의 삼국 성장 곡선도 올려 놓습니다. 빈칸도 채워보세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번 주에 배운 60갑자.

모두들 갑자년을 서기년으로 환산해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인터넷에 찾아보면 여러 가지 방법이 나온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은 계산법도 있지만, 그만큼 학습방법으로 유행이란 말이겠다. 하긴 이 방법을 알면 연도순으로 나열하라는 문제는, 예전에는 이런 문제 많았다, 외우지 않고도 풀 수 있다. 가령 조선 말기에 연이어 터진 복잡한 사건들, ‘을미사변 갑오개혁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사조약’ 정도는 그냥 풀 수 있다. 역사가 아니라 수학문제가 되는 셈이다. 수학에도 반드시 외워야 할 공식이 있는 것처럼 갑자년에도 꼭 외워야 할 두 가지가 있다. 천간(天干)과 지지(地支).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소위 ‘간지干支’라는 것을 외우고 있었다. 외웠다기보다는 저절로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매일 손가락을 짚어가며 운세를 살피셨던 덕분이다. 천간은 하늘의 기氣를, 지지는 땅의 (물)질質을 나타내며, 각각 10개와 12개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암기법으로는 10간과 12지가 조합하여 60갑자를 이루는 법칙만 알면 된다. 그런데 한걸음만 더 나가보면 사주팔자四柱八字라는 것의 의미도 조금 알 수 있다.

 

음양오행이란 말은 참 지겹도록 들었다. 이 지겨움 속에는 남자는 양, 여자는 음이라는 성차별 문화에 대한 반감이 숨겨져 있다. 그러나 음양오행은 음과 양의 차별이 아니라 음과 양의 끊임없는 변화를 성찰한다. 양이 극에 달하면 음이 되고 음이 그 끝에 이르면 양이 된다. 양이 곧 음이고, 음이 곧 양이다. 오행은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 다섯 가지를 말한다. 이 다섯 가지는 상생과 상극의 관계에 있다.

 

사주 四柱는 말 그대로 네 개의 기둥이다. 보통 점을 본다고 하지만, 명리학 같은 동양철학은 점이 아니라 사주를 본다. 우리가 태어난 연월일시年月日時. 이 네 가지가 우리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사주가 진실로 운명을 좌우한다면 제왕절개야말로 부모가 줄 수 있는 최고의 탄생 선물이 될 것이다. 사주가 팔자를 바꾼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맞는 것도 같고 틀린 것도 같다. 사주가 곧 팔자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기둥은 각각 두 개의 글자를 갖는다. 4*2=8. 그래서 사주팔자四柱八字다. 이 여덟 개의 글자에는 내 삶의 음양과 오행이 들어있다.

 

여기서 다시 우리의 주관심사인 육십갑자로 돌아가야 한다. 천간과 지지를 보자.

 

 

 

 

 

해가 바뀔 때 마다 반짝 유행하는 것이 띠와 갑자년이다. 2015년은 을미년, 양의 해다. 갑자년 표기가 뭔지 몰라도 습관처럼 그렇게 한다. 임진왜란이니 병자호란이니 갑오농민혁명이니 하는 것들을 우리 때만해도 고유명사처럼 외웠지, 임진년에 왜구가 일으킨 난이라는 식의 풀이는 생각지도 않았다.

 

갑자년을 구성하는 방식은 천간의 한 글자와 지지의 한 글자를 결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맨 처음이 ‘갑자’가 된다. 두 번째는 갑축이 아니라 ‘을축’ 이다. 병인, 정묘... 이런 결합 방식이기 때문에 절대로 ‘갑축’이 나올 수 없다. 왜 그럴까? 천간이 10개, 지지가 12개이기 때문에 천간을 한 바퀴 돌면 지지는 두 글자가 남는다. 그래서 갑술, 을해, 병자... 로 연결된다. 홀수 천간은 홀수 지지와 짝수 천간은 짝수 지지와만 결합한다. 그 결과 60갑자가 된다. 만약 지지가 11개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110갑자가 되지 않았을까?

 

천간이 10개라는 것은 수험생의 입장에서는 횡재라고 할 수 있다. 서기가 10진법이니 서기년의 끝자리와 갑자년의 앞 글자는 일대일 대응한다. 아마도 옛 문서를 대조해서 찾아낸 것이겠지만, 천간의 갑은 연도 끝자리 4에 해당한다. 1894년은 갑오년, 1904년은 갑진년, 1914년은 갑인년, 1924년은 갑자년, 1934년은 갑술년, 1944년은 갑신년, 1954년은 다시 갑오년. 갑오농민혁명이 일어난 해를 묻는 4지선다형이라면, 정확한 연대는 몰라도 일단 끝자리 4가 붙은 것이 정답 후보가 된다. 그런 행운을 허용하지 않는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할까? 4개 모두 4로 끝난다면, 다른 방법은 없을까?

 

인터넷에는 갑자년의 뒷 글자 즉 지지와 숫자를 대응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나온다. 그런데 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내 방식은 이런 거다.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 중 하나만 외우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05년 을사늑약만은 확실히 외운다. 그렇다면 1904년은? 갑진년이다. 천간의 ‘을’ 앞이 ‘갑’. 지지의 ‘사’ 앞이 ‘진’. 그렇다면 갑오년은 몇 년일까? 갑진년의 전후로 10년 단위씩만 찾아보면 된다. 이걸 어떻게 하냐고? 해답은 천간이 10개, 지지가 12개라는 것에 있다. 천간 한 바퀴에 지지는 두 자씩 남는다. 그러면 두 바퀴에는 네 자, 세 바퀴에는 6자, 네 바퀴에 8자, 5바퀴에 10자, 6바퀴에 12자! 즉 6바퀴 다시 말해 60년이 돌면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환갑이다.

 

  

 

 

 

 

올해는 을미년이다. 작년은 갑오년이었다. 1894년에서 120년, 즉 60년이 두 번 지나서, 2014년이고, 당연히 갑오년이다. 올해는 1895년 즉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120년 되는 해, 2015년의 을미년이다.

 

차라리 그냥 연도를 외우고 말겠다고? 이것이 더 복잡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사주 이야기 조금 보태서 머리를 더 어지럽게 만들어 보자.

 

60갑자는 연도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황제시대라고 하는데, 날짜에 쓰다가, 나중에, 한나라 때부터, 연도에도 60갑자를 사용했다고 한다. 인터넷에 떠도는 것이라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2000년 이상 사용된 것으로, 60갑자는 연도뿐만 아니라 월, 일, 시에도 사용했다. 즉 사주를 모두 60갑자로 표기했다. 그래서 사주가 곧 팔자가 된다. 어떤 사람의 사주가 갑자年 을축月 병인日 정묘時라면, 이 사람은 ‘갑자을축병인정묘’ 라는 8개의 글자를 갖게 된다. 사주팔자. 그런데 이게 뭐? 운명과 이 여덟 글자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걸 파고들면 그때부터 명리학이라든지 뭐 사주팔자를 보는 학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명리학에서 들은 풍월을 조금만 예로 들자면 이렇다. 10개의 천간과 12개의 지지는 각각 오행을 갖고 있다. 갑과 을은 木. 병정은 火. 무기는 土. 경신은 金. 임계는 水. 인묘는 木. 사오는 火. 신유는 金. 해자는 水. 축진미술은 土.

 

나의 기본 성질은 무 토다. 무신일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일간 즉 태어난 날의 천간이 내 본성이라는 말이다. ‘무’는 土이므로, 나는 말하자면 산과 같다. 그런데 여덟 개의 글자, 팔자 중 나는 4개의 金을 갖고 있다. 나의 기본은 토이지만 환경은 금이 세다. 토와 금의 관계는 土生金 즉 내가 생산하는 것이 많다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명리학에서 사주를 보는 방법이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매우 과학적이다. 차라리 매우 수학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이 틀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수학의 공리처럼 사주라는 것이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을 가정해야 한다. 물론 증명할 방법은 없다. 공리는 증명하지 않고 자명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쨌거나 단지 사주의 여덟 글자만으로 인간과 우주의 원리를 풀고자 하는 그 뜻은 매우 흥미롭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