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 Ⅱ

   

 

나폴레옹의 몰락 후 메테르니히가 이끄는 빈체제는 유럽을 프랑스혁명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려 하였다. 하지만 혁명을 경험한 민중들의 의식과 열망까지 되돌릴 수는 없었다.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빈체제에 대한 저항은 거세게 번져갔다.

 

빈체제는 프랑스에 부르봉 왕가를 복권시켰다. 루이18세의 즉위에 이어 샤를10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프랑스의 정치체제는 1789년 혁명 이후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다시 왕정으로 바뀌었다.

 

루이18세보다 훨씬 보수적이었던 샤를10세는 왕권신수설에 기반 한 절대왕정을 부활시키려 했다. 망명 귀족들의 요구에 따라 혁명기간 상실한 귀족의 재산을 보상하는 등 노골적인 반동정책을 폈다. 분노한 시민들은 1830년의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반 국왕 파를 당선시켰다. 샤를 10세는 의회를 해산하고 시민의 참정권 대부분을 빼앗고 언론․출판을 탄압하였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 7월 28일 파리는 다시 혁명의 불길로 타올랐다. 부르주아, 자유주의자, 학생, 노동자들이 주축이 되어 샤를10세를 몰아내고 혁명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혁명의 열매를 가져간 것은 부르주아들이었다. 부르주아들은 공화주의가 너무 과격할 뿐 아니라 자신들에게도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여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였다. 7월 혁명으로 2000여명이 죽었으나 프랑스는 또 한명의 왕을 추대하고 입헌군주제를 채택하는 선에서 혁명을 마무리 지었다.

 

루이 필리프는 처음 ‘시민의 왕’으로 불렸지만, 그의 ‘7월 왕정’은 대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점점 더 보수화되었다. 급진 공화주의자들은 7월 왕정의 입헌군주제, 제한선거(유산계급), 자유방임 경제를 배신으로 간주했다. 7월 왕정은 공화주의자들을 탄압하고 공화주의 협회를 불법화하며 공화국에 대한 옹호도 금지시켰다.

1846년 선거법을 보면 투표권이 성년 남자의 3%에게만 주어져있다. 3%에 속하는 사람들은 은행가, 대상인, 교수, 법률가와 자유주의적 귀족들이었다. 투표권의 확대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수상 기조는 투표권을 얻고 싶으면 부자가 되라고 했다. 참으로 부르주아적 자유 개념이 아닐 수 없다. 투표권은 누구나 자유롭게 획득할 수 있다,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되기만 한다면.

 

소수 부르주아 중심의 지배세력과 노동자와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공화주의자들 간의 대립이 격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1830년 직후부터 공화주의자들은 7월 혁명을 탈취 당했다고 생각했고, 1832년 6월에 군주제를 폐지하기 위한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었다.

 

 <레미제라블>에서 빅토르 위고가 숭고하게 묘사하고 있는 바리케이드 전투가 바로 1832년의 6월 봉기이다. 소설 속의 6월 봉기는 민중의 외면 속에 실패로 끝났다. 실제로도 6월 봉기는 실패였다. 그러나 공화주의자들의 패배는 페르시아 군대에 맞서 끝까지 싸우다 전멸한 스파르타의 테르모필라이 전투에 비유되기도 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848년 2월 혁명에는 다양한 세력들이 총 결집하였다. 산업의 발달에 따라 증가해온 노동자들, 도시 빈민들, 이들과 연대한 공화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선거권 확대를 요구하는 부르주아지들도 혁명에 참가하였다. 나폴레옹 시대를 그리워하는 낭만주의자들, 유럽에서의 프랑스 패권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국수적 민족주의자들까지 합세하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55>

 

프랑스 2월 혁명이 성공하자 전 유럽이 혁명의 불길에 휩싸였다.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영국 등에서 봉기와 투쟁이 일어났고, 빈 회의를 주도했던 메테르니히가 쫓겨났다. 1814년 나폴레옹의 실각과 함께 유럽을 구체제로 되돌리려했던 빈체제가 2월 혁명으로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여전히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혁명세력들은 공화정 수립에 합의했지만 주도권을 놓고 부르주아지를 중심으로 하는 온건파와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급진파가 격렬히 대립하였다.

 

1848년 4월의 제헌의회 선거에서 온건파가 대거 당선되었다. 권력은 또 다시 부르주아지에게로 돌아갔다. 6월, 불만에 찬 사회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정부가 잔인한 진압에 나섬으로써, 4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약 3천 명이 살해되었다. 6월 폭동으로 사회주의 정당이 해체되고 사회주의 신문 발행이 금지되었다.

 

1848년 2월 혁명은 1789년에 시작한 프랑스 혁명의 최종 승리자가 제3계급 부르주아임을 명백히 확인시켜 주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과 함께 손을 잡았던 제3계급과 제4계급은 혁명의 긴 여정 속에 연대와 대립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혁명의 총구를 서로에게 겨누고 수 천 명의 희생자를 낸 2월 혁명은 제3계급과 제4계급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적대관계를 만들었다.

 

부르주아 중심의 제헌의회는 보통선거를 도입했다. 보통선거로 대거 선거권을 가지게 된 것은 농민이었다. 당시까지 정치적, 경제적으로 소외되어있던 농민들은 1848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선택하였다. 루이가 선택된 이유는 딱 하나, 그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농민들은 루이가 삼촌 나폴레옹 1세처럼 프랑스에 영광을 가져다 줄 것으로 생각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전통은 프랑스 농민들에게 나폴레옹이라 불리는 한 남자가 그들에게 모든 영광을 되찾아 줄 것이라는 기적에 대한 믿음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어떤 자가 불쑥 나타나서 자신을 나폴레옹으로 칭했는데, 그 이유는 단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p141”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19세기를 다룬 세 권의 시대 시리즈를 썼다. 1789년 대혁명의 시작부터 1848년 2월 혁명까지는 <혁명의 시대>, 2월 혁명 이후부터 1875년 대공황이 시작되기 전까지가 <자본의 시대> 이다. 홉스봄의 분류는 2월 혁명의 결과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자본의 시대는 곧 부르주아의 시대이다. 2월 혁명으로 유럽 각지에서 불같이 일어났던 혁명들도 금세 사그러 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1848년부터 1875년까지는 유래 없는 호황기였기 때문이다. 홉스봄이 자본의 시대로 분류한 이 시기는 대호황 Great Boom 이었다. 부르주아는 정치, 경제적으로 완벽히 승리했던 것이다. 

 

자본의 시대는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집권한 시기이다. 그는 프랑스 제2 공화정의 대통령(1848~1852)이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프랑스 제 2 제정의 황제(1852~1870)가 되려고 했고 성공했다. 제 2공화정의 헌법은 대통령 임기를 4년 단임으로 규정하고 있어 루이 보나파르트는 중임할 수 없었다. 합법적 개헌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루이 보나파르트가 선택한 것은 쿠데타였다. 의회를 해산하고 국민투표를 통해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키고 프랑스 체제를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꾸었다. 나폴레옹 1세를 계승하여 나폴레옹 3세에 즉위하였다. 프랑스 혁명의 역사는 또 한 번 거꾸로 돌았다.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

 

루이 보나파르트의 군사 쿠데타는 파리의 룸펜 프롤레타리아로 구성된 친위대뿐만 아니라 절대 다수 농민의 지지를 받았다. 농지를 개혁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대한 농민들의 향수 때문이었다. 사실 보나파르트 왕조가 대변하는 것은 혁명적 농민이 아니라 보수적 농민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농민은 나폴레옹의 유령을 열렬히 지지했다.

 

나폴레옹 3세의 정치이념은 애매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민족주의와 보수주의 등이 혼합되어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모호성이 다양한 계층의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 내는 역할을 하였다. 나폴레옹 3세라는 텅 빈 이름 속에 각 계층은 자신들의 이상을 투영하였다. 여기서 보나파르트주의라는 말이 생겨났다. 위키 백과에 의하면 보나파르트주의란,

 

“넓은 정의에서는, 권위주의적 중앙집권을 옹호하고 포퓰리즘적 레토릭으로 철권 통치자 또는 군사 독재자를 지지하는 것을 말한다. 민족주의와 군국주의, 혁명과 반동, 공화정과 황제가 기괴하게 뒤섞인 키메라라고 할 수 있다.”

 

제정 초기 나폴레옹 3세의 정치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된다. 포퓰리즘을 통해 지지를 확보하고, 크림전쟁에 승리하여 유럽 내 프랑스의 위상을 높였다. 그러나 제정 후기로 갈수록 인기가 떨어졌다. 경제 불황과 외교 정책의 실패 때문이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57>

 

독일은 1871년 통일되었다. 10세기 동프랑크 왕국의 오토 1세가 로마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칭호를 받은 이후 이 지역은 신성로마제국으로 분류되었다.(신성로마제국의 명칭은 후대에 붙여진다.) 그러나 제국은 황제가 없는 대공위 시대를 거쳐 일곱명의 선제후들이 황제를 선출하는 황금봉투 시대 등 통일된 제국으로서의 성격을 거의 갖지 못했다. 특히 1618년에 시작된 30년 전쟁으로 영토가 유린된 이후에는 거의 껍데기만 남아 200여 개의 영방 국가가 난립한 상태였다. 그나마 나폴레옹이 원정 당시 공식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해체를 선언해 버렸다.

 

이런상태에서 유럽 다른 나라의 절대왕정과 시민혁명을 보면서 독일 지역에도 강력한 통일국가에 대한 염원이 커져갔다. 독일 지역의 절대 강자는 오랜 전통의 오스트리아와 새롭게 부상한 프로이센 이었다. 1866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7주간의 전쟁을 벌인 끝에 프로이센이 승리하였다. 이제 독일 통일에 가장 걸림돌로 남은 것은 프랑스였다. 프로이센의 총리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를 자극해 전쟁을 유발했다. 1870년에 시작해 1871년에 끝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의 포로로 잡혔다. 프로이센은 파리까지 진격해 들어왔다. 이 소식을 들은 파리에서는 나폴레옹 3세를 폐위시키고 임시 정부를 구성하였다. 프로이센과의 전쟁 도중에 프랑스의 정체가 다시 한 번 뒤바뀐 것이다. 1870년 제2 제정이 폐지되고 제3 공화정이 시작되었다.

 

파리가 프로이센에 포위당하자 임시 정부는 파리를 방어하는데 주력하였지만 극심한 굶주림 끝에 민중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에 항복하였다. 프랑스는 50억 프랑의 배상금과 함께 알자스-로렌 지방을 프로이센에 넘겼다.

 

1871년 1월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가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초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마침내 독일이라는 하나의 통일 국가가 세계사에 등장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이 탄생하였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통일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감정은 처음부터 극에 달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56>

 

굴욕적인 강화조약과 빌헬름 1세의 베르사유 궁 즉위에 분노한 파리의 노동자와 민중들은 스스로 총칼을 들고 프로이센에 맞섰다. 이들은 최초의 노동자 권력인 코뮌 정부(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동맹)를 구성하고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실시해 나갔다. 두 달간 자치정부를 수립했던 파리코뮌은 프랑스 임시정부와 국제 연합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했다.

 

“파리코뮌은 처음에는 프랑스가 전쟁에서 패배한 것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의 성격이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를 추구하는 것으로 바뀌자 부르주아의 대응도 달라졌습니다. 파리 코뮌은 1871년 3월부터 5월까지 불과 두 달간 유지되었습니다. 이 기간에 완전한 의미에서 자치 정부가 수립되었고 10시간 노동, 야간 노동 철폐, 정교 분리, 여성 참정권 보장 등 당시로서는 대단히 진보적인 요구를 내놓았습니다. 몽마르트 언덕을 최후의 거점으로 삼은 코뮌 군을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군, 독일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벨기에 군, 영국군이 나섰습니다. 프랑스 정부군만으로 진압하기 어려워 국제 연합군을 조직한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헤게모니를 장악한 모든 나라가 참전함으로써 ‘국제적 연대를 통한 폭력적 응징’이라는 상징적 효과를 생산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p408 <역사 고전 강의>”

 

파리코뮌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후 유럽의 부르주아들은 소위 민주화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폭력진압의 한계를 깨달았던 것이다. 노동자들에게도 참정권과 피선거권을 주고 계급 갈등을 완화해 보려 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민주주의는 가난한 자들이 지배하는 정치라는 뜻으로 통용되었다. 부르주아가 선호하는 체제는 보통선거 없는 정치 시스템으로서의 자유주의였다. 그런데 더 이상 노동자들을 배제하기 힘들어지자 부르주아들은 헤게모니를 유지할 새로운 방법을 고안하였다. 미국의 상원 제도 같은 것이 그런 것이다. 노동자 농민이 계급적 정체성을 갖지 못하도록 사상적 회유도 시작하였는데, 그 방법이 소위 포퓰리즘이다.

 

프랑스 혁명의 100년은 제 3계급과 제 4계급이 함께 구체제를 무너뜨린 후, 그 성과를 놓고 서로 치열하게 대립한 끝에, 결국 제 3계급이 승리하는 기나긴 과정이었다. 그러나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통해 제 3계급만큼이나 제 4계급도 성장하였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고 노동자들도 계급의식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그 한가운데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있었다.

 

 

 

 

노동자 계급의 등장

 

 

부르주아는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이라는 이중의 혁명을 통해 마침내 시대의 주인공이 되었다. 앙시앵 레짐은 무너지고 자유주의에 기반 한 근대 민족국가가 수립되었다. 프랑스 시민혁명의 이상은 자유와 평등이었지만, 부르주아지가 원한 자유는 사적 소유의 자유였고, 그들이 원한 평등은 구체제의 특권계급과 부르주아 사이에서의 평등이었다. 프랑스혁명의 최전선에서 피 흘리며 싸운 민중들, 재산이 없는 제4계급은 자유와 평등에서 배제되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자신의 몸을 팔아 노동을 할 자유와 굶어죽을 자유 사이에서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인권선언이 명시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가진다.”는 이념은 부르주아지의 전유물일 수는 없었다. 제 4계급은 끊임없이 자신들에게도 자유와 평등의 권리가 있음을 주장했다. 1792년의 국민공회, 1832년의 6월 봉기, 1848의 6월 반란, 1871년의 파리코뮌 등은 제 4계급이 부르주아지에 대항해 자신들의 정부를 세우려 했던 실패한(혹은 잠시 성공한) 봉기들이다. 이때마다 부르주아지는 민중들을 철저히 탄압했고 마침내 그들이 원하는 부르주아적 자유주의 국가를 확고히 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렇게 말했다. “부르주아지, 즉 자본이 발전하는 것만큼 프롤레타리아트, 현대 노동계급도 발전한다.” 공장제 기계공업은 다수의 노동자를 필요로 했고, 인클로저와 기계제 농업으로 농촌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어와 저임금 노동자가 되거나 부랑자가 되었다. 자본의 발전은 노동자를 양산했다.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64>

 

도시는 몰려드는 노동자로 인해 몸살을 앓았다. 도시는 산업혁명이 만들어낸 새로운 삶의 공간이었다. 한편에서는 자본주의의 화려한 불빛이, 한편에서는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이 존재하는 빛과 어둠의 공간이기도 했다. 청년 엥겔스(1820~1895)는 산업혁명의 도시 맨체스터를 관찰하여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를 썼다. 맨체스터의 노동자는 19세기 서구 노동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맨체스터의 공간 배치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권력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간 배치와 계급 구조는 서로 대응합니다. 노동자 계급은 화려한 상점 뒤편에, 중간계급은 도심과 교외 중간에, 상층 계급은 교외 지역에 삽니다. 간선도로는 상층계급이 사는 교외를 도심과 곧바로 연결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사업 지역이 왼편과 오른편에 숨어 있는 냉혹한 비참함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을 몰라도 된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사람은 항상 나의 계급적 정체성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나의 계급적 이익에 철저히 복무하면서 사는 것이 근대인의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계급의식을 조장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이는 근대사회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리고 계급적 정체성을 잘 표현하는 외부의 형태 중 하나가 바로 ‘사는 곳’입니다.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묻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자신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역사고전강의> p337 ”

 

10여 년 전에 유행했던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는 광고가 생각난다. 역겨운 광고였지만 현대사회가 여전히 근대사회의 자장 안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엥겔스가 맨체스터에서 보았던 것은 노동자 계급에 대한 ‘사회의 살인’ 행위이다. 굶주림, 불결한 위생, 질병 등으로 노동자들은 실제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고 일찍 죽었다.

 

“리버풀에서 1840년에 상층계급, 젠트리, 전문인들의 평균수명은 35세였으며 사업가나 좋은 직장을 가진 수공업자의 경우는 32세, 기능공, 막노동자, 서비스 노동자의 경우는 15세였습니다. 노동자계급의 사망률이 이렇게 높은 것은 주로 노동자계급 자녀들의 높은 사망률 때문입니다. <역사고전강의> p349 ”

 

도시 노동자 자녀들의 사망률은 농촌 지역의 사망률보다 높았다. 5세가 되기 이전에 죽는 비율은 농촌이 32%인데 맨체스터가 54%였다. 산업의 발달로 농촌에서 부랑자로 떠돌던 이들이 도시로 와서 도시빈민이 되고 노동자가 되었는데, 그것이 그들의 삶을 더 불행하게 만들었다.

 

엥겔스는 이런 연구를 토대로 결국에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총 봉기하여 부르주아지가 타도될 것이라고 보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 까닭은 부르주아지가 충분히 강했기 때문이다. 과학혁명, 계몽주의, 산업혁명, 프랑스혁명 등 최소한 300년 이상의 발전과정을 거치며 부르주아지는 19세기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자본주의시대를 대표하는 심성구조는 경쟁이다. 프롤레타리아트뿐 아니라 부르주아지 역시 경쟁과 불안에 시달린다. 경쟁이 심해질수록 불안도 늘어난다.

 

“부르주아계급은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혁명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이 주인인 체제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19세기 말에 나타난 세기말적 증상의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끊임없는 혁명은 불안을 낳아 놓습니다. <역사고전강의> p396 ”

 

“화폐를 매개로 한 노동시장이 형성되면서 노동자의 삶은 한마디로 불안정해졌습니다. 엥겔스는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에서 경쟁이 그들의 삶을 지배한다고 말했습니다. 언제 해고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정성이 노동자들의 심성 속에 구조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역사고전강의> p404 ”

 

매년 바뀌는 스마트폰, 가전제품들, 인턴제, 비정규직, 기간제 ... 등등,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살았던 시대와 현대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끊임없는 경쟁과 그로 인한 불안과 우울은 근대로부터 계속되어온 현대인의 만성 질환이다. 'Modern Times'는 하나의 시대임이 틀림없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57>

 

갈수록 커지는 빈부격차와 비참한 노동 현실은 평등과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열망을 낳았다. 억눌린 노동자들의 불만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을 탄생시켰다.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을 발표해 역사적 필연에 의해 부르주아지는 몰락하고 프롤레타리아가 승리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공산당 선언>은 1848년에 일어난 혁명을 계기로 나온 선언문입니다. 1848년 2월 28일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곧이어 3월 2일에는 남서부 독일, 3월 16일에는 바이에른, 3월 11일에는 베를린, 3월 12일에는 빈, 3월 18일에는 밀라노에서 연쇄적으로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공산당 선언>은 이러한 혁명의 영향을 받은 20대 후반의 열혈 청년들이 쓴 것입니다. 그렇지만 영국을 제외한 유럽 전역에서 불같이 일어났던 혁명은 금세 수그러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1848년부터 1875년까지는 유래 없는 호황기였기 때문입니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대호황 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후로 경제는 불황과 호황을 반복하다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최저점을 찍습니다. <역사고전강의> p309 ”

 

<공산당 선언> 자체는 1848년에 그다지 한 역할이 없다. 혁명이 금세 잦아들었고 경제적 호황이 계속되었으며, 1848년 6월 파리 봉기가 실패한 이후 공산주의자에 대한 탄압이 극심했기 때문이다. <공산당 선언>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말부터였다. 이때부터 공산당 선언의 정식들은 노동운동의 창출을 뒷받침했고 수 많은 정치투쟁에 기름을 부었다. 그런데 <공산당 선언>의 예언이 빗나가고, 지구상에 실질적인 사회주의가 거의 종식된 오늘날에도 <공산당 선언>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을까? 그렇다. 왜냐하면 “근대 자본주의에 대한 짧은, 그러나 아직 누구도 능가하지 못한 묘사 때문에라도 고전으로 남을 것” 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이 그런 것처럼 <공산당 선언> 역시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비전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해석 때문에 여전히 유효한 텍스트로 남아있다.

 

“마르크스는 근대 경제의 무제한적인 힘과 지구적인 확장력을 처음으로 환기했다. 그는 세계시장의 등장과 근대산업의 비할 데 없는 생산력의 해방이 채 한 세기도 못 되는 시간에 낳은 놀라운 변화를 처음으로 그렸다. 또한 하나의 현상으로서 근대 자본주의가 지닌, 끊임없이 새로 시작하고 부단히 들떠 있는 미완의 성격을 묘사했다. 그는 근대 자본주의가 새로운 욕구와 그 충족 수단을 발명한다는 것, 물려받은 모든 문화적 관습과 믿음을 전복한다는 것, 신성한 것이건 세속적인 것이건 모든 경계를 무시한다는 것,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위계이건 남성과 여성의 위계이건 부모와 자식의 위계이건 신성시 되는 모든 위계를 흔든다는 것, 모든 것을 판매 대상으로 전환한다는 것 등을 강조했다. <공산당 선언> 서설 p12”

 

자본주의가 모든 위계를 흔들고 새롭게 확립한 위계는 단 하나이다. 資本. 돈이 중심이 되는 세계이다.

 

“부르주아지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명예로운 것으로 여기고 경건한 외경심으로 올려보던 모든 직업에서 그 후광을 벗겨 버렸다. 부르주아지는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학자들을 자신이 지불하는 임금노동자로 바꾸었다. <공산당 선언> p231”

 

“일련의 예스럽고 유서 깊은 편견과 의견으로 무장한 경직되고 얼어붙은 관계들은 모두 쓸려나가고, 모든 새로운 형태의 관계들은 미처 자리를 잡기도 전에 낡은 것이 되고 만다. 모든 견고한 것은 대기 속으로 녹아버리고, 모든 신성한 것은 더럽혀지며, 인간은 마침내 자신의 진정한 생활 조건에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에 냉정히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공산당 선언> p232”

 

모든 견고한 것은 대기 속으로 녹아버리고.... 우리 역시 의미도 모르면서 2G, 3G, 4G 등등 자고나면 바뀌는 세상을 쫓아 살아야 한다.

 

지난 것만 잘 맞춘다는 유명 점쟁이들처럼 마르크스의 이론은 자본주의의 실상을 적확하게 표현해 준 것에 지나지 않을까? 마르크스의 사상을 따른 레닌-스탈린주의는 70여 년 정도의 실험 끝에 실패했다. 그러나 답이 틀렸다고 문제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분명 200년 전에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남겨진 과제는 자본주의의 승리를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해법을 찾는 것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노동자계급의 지위도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과 문제점에 대한 해법을 찾는 과정에서 꾸준히 향상되어 왔다. 영국은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 이후 1차로 선거법을 개정하고 도시 상공인 층에게도 선거권을 주었다. 그래보았자 전체 인구의 4.5%에 지나지 않았지만. 1837년에는 영국의 노동자들도 선거권을 요구하며 차티스트운동을 벌였다.

 

   <EBS중학 필독 중학 세계사>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여 탄원서에 서명하였지만 영국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탄압하였다. 차티스트운동은 실패했지만, 계속적인 노동자 투쟁을 이끌어내었다. 2차 선거법 개정은 1867년에 이루어졌다. 선거권이 대다수의 도시 노동자와 소시민 계층에까지 확대되어 유권자는 전체 인구의 9%가 되었다. 영국의 선거법이 21세 이상의 남녀 누구에게나 투표권을 준 것은 1928년에나 와서 이다. 선거권의 확대는 그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물이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노동자들의 투쟁이 격화되자 ‘위험한 계급’인 노동자들을 국가 체제 안에 끌어들이기 위해 노동자 자녀들에게도 교육의 혜택을 제공하고, 무료 진료소를 설치하고, 노동조합 활동도 점차 합법화하였다. 이런 변화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가져온 성과인 동시에 계급 갈등을 완화하려는 국가 정책이기도 하였다. 이런 양보가 가능했던 것은 식민지에서 막대한 이윤이 들어오기 때문이었으며 그 이윤은 식민지 민중들의 피와 땀에서 나온 것이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검색을 해보면 이런 질문이 많다. 나도 궁금한데 읽어봐도 별 명쾌한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개레스 스테드먼 존스 교수가 펭귄 클래식 판의 <공산당 선언> 서설에서 공산주의라는 말이 어떻게 사용되어 왔는지를 정리해 놓았는데, 그 글을 기준으로 대략 살펴보려 한다.

 

 

로베스피에르가 이끌던 국민공회는 급진적 공화주의를 추구했다. 공화주의의 최우선 가치는 평등이다. 부르주아들이 사적 소유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은데 비해 공화주의는 평등주의적 자유를 추구했다. 평등과 자유! 한 쌍의 부부처럼 찰싹 붙여 사용하지만 평등과 자유는 근본적으로 양립하기 힘든 개념이다. 자유를 추구하다보면 평등을 침해하기 마련이고, 평등을 주장하다보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 자유와 평등, 박애가 프랑스 혁명이념이라 배웠지만, 부르주아지는 자유를 프롤레타리아트는 평등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며 치열하게 투쟁했던 것이다.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급진 자코뱅이 몰락하고, 왕정복고와 제정, 입헌군주정을 겪으며 부르주아지가 주도권을 잡아나가자 평등은 밀려나고 자유주의적 가치들이 중요시되었다. 그런데 1830년 7월 혁명 때 급진공화주의자들이 다시 등장했다. 평등주의 공화국의 지지자들, 특히 인권협회 구성원들은 루이 필리프의 7월 왕정을 혁명에의 배신으로 간주했다. 학생들과 불만을 품은 장인들로 이루어진, 주로 파리에 기반 한 이 급진 공화주의 협회들은 계속적으로 반란을 시도했고, 정부는 점점 더 억압적으로 대응했다. 결국 1835년 공화주의 협회가 불법화되었고 이후부터는 공화국에 대한 옹호도 금지되었다.

 

정부의 탄압을 피해 공화주의 반정부세력의 일부는 지하로 내려갔고, 다른 일부는 합법적인 방법을 선택하였다. 1830년대 말 이들은 공화국이라는 금지된 개념에 대한 평화적이고 비정치적인 대체물로서 ‘공산주의’를 제시했다. 지금은 완전히 거꾸로 사용되지만, 당시만 해도 공화주의는 위험한 이미지를 가진데 비해 공산주의는 온건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1840년대 초에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합류하기 시작했다. 1830년대 말 전에는 이 두 입장 사이에는 공동 기반이 크지 않았다.

 

“공산주의는 정치적이었다. 공산주의는 혁명적 공화주의 전통의 부활을 뜻했고, 평등이라는 대의를 특권의 파괴에서 사유재산에 대한 총공격으로 확대하는 것을 뜻했다. 반대로 사회주의 -생시몽과 푸리에가 영감을 준 일련의 교조들 - 는 혁명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정치 형태에 대해 무관심했으며, 평등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국가보다는 교회에 더 관심이 있었다. 보다 장기적으로 사회주의는 새로운 사회과학에 의해 가능해진 조화의 출현을 지향했고, 그 중간 과정에서 사회생활 및 경제에서의 경쟁과 ‘이기주의’에 의해 발생되는 ‘적대’의 용매로서 '결사‘나 ’협동‘을 지향했다. <공산당 선언> p38”

 

단적으로 공산주의는 정치적 평등을, 사회주의는 경제적 공동체를 지향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회주의를 공화주의 혹은 공산주의와 통합시키려는 노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이 여기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공산주의가 ‘평등의 열망’과 결부되는 공화주의적 뿌리와 분리되어 ‘사회문제’의 일부로 다시 자리매김 되면서 발생기에 있는 정치 외적 세력인 ‘프롤레타리아트’와 관련되었다. 따라서 1841년 5월 보수주의 <프러시아 국가신문>은 공산주의를 ”현대사회의 산업적 궁핍“과 연결시켰고, 공산주의 사상을 ”불행하고 광기에 찬 계급의 비통한 외침“으로 정의했다. <공산당 선언> p39”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통합의 움직임을 보이면서, 공산주의는 공화주의와 분리되면서 프롤레타리아트와 연관되었다는 것인데, 당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지금의 노동자 계급이 아니라 말하자면 슬럼가의 빈민, 부랑자, 하층계급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들은 궁핍, 빈곤, 범죄와 연결되었다.

 

“슈타인의 설명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한데 묶여, 둘 다 프랑스 대혁명을 통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창조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형성에 대한 응답으로 간주되었다. 사회주의는 노동문제에 대한 과학적 응답이 되었고, 이는 사회주의와 국가의 분열을 종식시킬 것이었다.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의 본능적이고 파괴적인 짝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 속에 체현되어 있으니, 프롤레타리아트는 무지와 재산의 결여에 내몰려 실현 불가능한 항구적 재분배를 추구하고 부정의 순환 속에 갇혀 빠져나올 수 없었다. <공산당 선언> p39”

 

<공산당 선언>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구 유럽의 모든 세력들,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의 급진파와 독일의 경찰 밀정이 이 유령을 쫓아내기 위해 신성한 동맹을 맺었다.” 1840년대에 프롤레타리아트는 사유재산에 적대를 가진 극히 위험한 계급으로 인식되었다, 마치 유령처럼. 공산주의는 이런 프롤레타리아트와 동일한 의미였다.

 

그런데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제시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노동자 계급의 의미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산업화의 산물이며, 그들에게 고용을 제공하는 공장들과 그들이 모이는 도시들에 의해 단련되었다. 프롤레타리아들은 바이틀링이 불러냈던 것과 같은 대도시의 궁핍하고 뿌리 없는 빈민과 더 이상 함께 묶이지 않았다. 이 도시 빈민은 전적으로 별개의 부정적인 도덕적 범주에 처해져, 범죄적이며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정의되는 ‘룸펜프롤레타리아트’로 분류되었다. <공산당 선언> p44”

 

<공산당 선언>으로 새롭게 탄생한 프롤레타리아들은 부르주아지들을 타도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게 될 운명이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전율케 하라. 프롤레타리아들이 잃을 것이라고는 그들의 쇠사슬밖에 없다. 그들이 얻을 것은 세계 전체이다. 만국의 노동자들이며, 단결하라! <공산당 선언> p2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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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계몽주의

 

 

18세기 프랑스는 유럽의 사회적· 정신적 발전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프랑스어가 전 유럽의 궁정과 교양인 사이에서 사용되었다. 이런 발전의 배경에는 영국이 있었다. 영국에서 발전한 사상과 이념이 루이14세 사후(1715)에 프랑스로 밀려들어와, 전체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영국에서 시작된 계몽주의도 프랑스를 통해 전 유럽의 정신운동으로 발전했다. 그 대표적 매개자는 몽테스키외와 볼테르이다.

 

  

 

몽테스키외(1689~1755)는 삼권분립으로 유명하다. 삼권분립은 그의 대표작, <법의 정신>의 핵심적인 내용은 아니라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중요한 원칙이다. 삼권분립의 목적은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보호하는 데 있다.

 

권력분립에 대한 이론적 구상은 몽테스키외의 창안이 아니라 로크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로크는 국가 행정권과 입법권을 엄격히 분리할 것을 요구했다. 입헌군주제를 확립한 명예혁명의 승리자(휘그당)다운 주장이다. 군주는 법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회가 결의한 법의 구속을 받아야한다. 그래야만 개인의 자유와 재산이 국가권력의 임의적 간섭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

 

몽테스키외는 여기에 사법권을 추가했다. 사법권의 핵심은 독립성이다. 입법권은 계급의 이익을 충실히 반영해야 한다. 국회에서 여당과 야당이 매일 싸우는 것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도 많지만, ‘싸움’은 입법권의 본질이다. 근대국가는 계층(급)으로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대국가에서는 국민 ‘화합’이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주는 정당을 지지하고 반대 정당을 헐뜯는 게 당연합니다. 이것을 인정한 상태에서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근대국가는 정당정치가 이루어지는 공간입니다.   p441 <인문고전강의>”

 

하지만 사법권은 속성상 특정 계급이나 직업이 독차지해서는 안 되며, 계급이익의 충돌에서 완전히 독립적이어야 한다. 재판관이 입법자나 집행관이 되면 시민의 생명과 자유가 위태로워지며 재판관은 압제자가 될 것이다.

 

 

볼테르(1694~1778)는 소설 <캉디드>의 저자이며, 계몽주의의 걸작 <백과전서>의 편찬자 중 한사람이다.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주축이 된 백과전서파는 학문과 이성을 무기로 구시대로부터 세상을 자유롭게 해방하려 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종교와 철학의 시대는 과학의 세기에 자리를 내주었다!"

 

<백과전서>는 루소 및 볼테르의 저작과 더불어 프랑스혁명의 싹틀 틔운 가장 중요한 온상이었다.

 

볼테르는 역사철학의 창시자기도 하다.

 

“나의 목적은 인간 정신의 역사를 쓰는 것이지, 하찮은 사실을 무수히 열거하거나 위대한 군주들의 역사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 나는 인간이 어떤 단계를 거쳐 야만에서 문명 상태로 진보해 왔는가를 알고자 한다. p561 <세계 철학사>”

 

 

프랑스 혁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루소(1712~1778)는 ‘자연 상태’를 참된 낙원이라 생각했다. 루소는 성찰을 자연에 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인간을 기형적 존재로 보았다. 예술과 학문은 진보가 아니라 퇴보였다.

 

루소는,

“누군가 어느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것은 내 땅’ 이라고 주장해 볼 생각을 했으며 또 그 말을 믿을 만큼 단순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만약 이 때 말뚝을 뽑아 버리고, 토지 둘레의 도랑을 다시 메우고는, 이웃들에게 '저 사기꾼의 말을 믿지 마시오! 과실은 모두의 것이고 땅은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는다면 당신은 파멸할 것이오!' 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면, 인류는 무수한 범죄와 전쟁, 살인, 비참함과 잔혹함을 겪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p573 <세계철학사>” 고 썼다.

 

소유, 정부, 권력은 자연을 떠남으로서 인간이 받게 된 재앙이다. 루소는 <사회 계약론>을 통해 탈출구를 제시하려 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그런데 국가가 발생하면서 권력이 창출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적 자유와 지배적 권력을 조화시키는 방법은 무엇일까? 자유로운 인간들이 자발적인 권력을 만드는 것이다.

 

"적법한 지배의 기초는 오직 합의, 즉 자발적 동의뿐이다. 이러한 합의가 바로 사회계약이다. 여기서 개개 구성원은 자신의 인격과 자신이 소유한 모든것을 내놓고 공동재산으로 간주하여 최상위의 지시체인 일반의지에 종속시킨다. 이렇게 해서 공적 인격이자 정신적 총합체인 국민이 발생한다. 국민은 주권의 유일한 담지자이다."  p575 <세계철학사>

 

개개인의 동의로서 구성된 권력은 개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 권력의 의지가 곧 나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반의지’이다. 그런데 일반의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투표이다.

 

투표의 결과는 곧 일반의지이므로 개개인은 투표에 의해 합의된 모든 법에 동의해야 한다.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채택된 법에도 복종해야 한다. 모든 국가 구성원의 의지가 곧 일반의지이기 때문이다. 내 의견이 아니라 반대의견이 채택되었다면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투표는 내가 일반의지로 여겼던 것이 일반의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 것 뿐이다.

 

루소에게 사회계약은 인간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런데 일반의지에 무조건 복종하라는 루소의 요구는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지키려는 사회계약의 목적과 모순된 것이 아닐까? 루소의 영향아래 폭발한 프랑스혁명의 전개 과정은 사실 이런 모순의 일면을 보여주었다. 자유와 평등은 공포정치를 불러일으켰다. 일반의지는 20세기 사회주의 국가들이 강조했던 인민의 의지처럼 외설적으로 전도되었다. 일반의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것은 절대권위를 지녔다. 일반의지는 개개인 모두의 자유의지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불복종은 자유와 평등에 대한 부정이 되었고, 불복종자는 반동으로 낙인찍혔다.

 

"혁명을 불러 낸 것은 다름아닌 그의 정신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혁명의 진행과정에서 드러난 비극적인 내적 모순 역시 이미 루소의 사상에 예비되어 있었다. 절대적 개인주의에 대한 루소의 요구는 -루소의 확신과는 달리- 《사회계약론》 제2부에서 제기되는 요구, 즉 일반의지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이라는 요구와 끝내 해소되지 않는 모순 관계에 있다. 루소는 이상적인 국가에서는 국가 종교에 대한 일체의 위반 행위가 죽음이나 추방으로 처벌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그러한 복종을 강조했다."  p579 <세계철학사>

 

어쨌거나 프랑스 역사상 중요한 것은 자연적으로 부여된 자유와 평등이라는 개념이 프랑스 혁명의 원동력이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 인권선언의 제1조는 루소의 천부인권사상을 명시하고 있다.

 

 

인권선언 제 1조 :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가진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40>

 

 

문명을 비판하고 자연을 동경한 루소가 프랑스 계몽주의의 대표자라는 사실이 사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기도 한다. 그런데 루소가 말하는 자연은 상당히 인공적인 성격의 자연 즉 이성과 거의 동일시되는 자연이라고 한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루소의 자연상태가 원시 자연상태는 아니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소의 이런 특성은 그를, 18세기 정신에 반발하여 나타난 19세기 모든 정신운동의 선구자로 만들었다. 질풍노도와 낭만주의, 다양한 종교적 개혁은 모두 루소를 원조로 하고 있다.

 

루소는 독일의 칸트와 마찬가지로 계몽주의의 마지막 수호신인 동시에 지극히 신랄한 비판자였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

 

 

단적으로 말하면 근대는 산업혁명과 시민혁명(특히 프랑스혁명)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 이중의 혁명을 통해 부르주아계급은 ‘19세기의 주인공’ 이 될 수 있었다.

 

프랑스혁명은 10년, 25년, 100년 단위로 살펴볼 수 있다. 흔히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1789년 5월 삼부회 소집부터 1799년 11월 9일 (브뤼메르 18일) 나폴레옹의 군사 쿠데타까지이다.

 

프랑스혁명을 25년으로 볼 때는 1789년 삼부회부터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되는 1815년까지이다.

 

혁명을 100년의 긴 호흡으로 말할 때는 1789년 삼부회부터 파리코뮌이 진압되고 제3 공화정이 들어선 1870년대 까지를 가리킨다.

  

 

 

프랑스혁명은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한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혁명과 반동, 성공과 좌절을 거듭하며 공화정 - 제정 - 왕정 - 공화정 - 제정 - 공화정의 긴 역사를 걸어왔다. 혁명의 시대를 산 사람들은 자유와 평등은커녕 고통과 혼란만 보았을 수도 있고, 반동과 퇴보에 좌절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의 역사는 전진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혁명의 발단은 언제나 세금이다. 브랜든 심스의 <Europe>을 보면 유럽은 항상적 전쟁상태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부제는 ‘1453년부터 현재까지 패권투쟁의 역사’ 이다. 루이14세가 잦은 전쟁과 사치로 재정의 곤란을 겪었다지만, 18세기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프랑스는 7년 전쟁(1756~1763) 패배 이후에도 미국의 독립전쟁(약 1775~1781 )을 지원하며 막대한 재정을 소모했다. 국가재정은 파산상태에 이르렀다.

 

  

 

루이 16세는 1787년에 귀족과 성직자를 대상으로 명사회를 소집했다. 농민이 세금을 내는 능력에 한계가 왔음을 알리고 특권신분에도 과세하는 안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1789년 5월에 삼부회가 소집됐다. 1계급은 성직자, 2계급은 귀족, 3계급은 평민으로 구성되었다.

 

제3계급에 속하는 평민은 주로 부르주아들이었다. 관료, 은행가, 금융업자, 법률가, 기업가 등 신분으로는 평민이지만 사회적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계몽주의자들도 제3계급에 속했다. 제3계급은 반귀족적이거나 급진적인 성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지배계급으로 편입하고 싶어 했다. 제3계급은 세금을 내는 조건에 동의하는 대가로 평등한 투표권을 요구했다.(머릿수별 투표)  세금을 내는 대신 정치적 권리를 요구한 것이다. 제1계급과 제2계급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치적 평등은 특권의 폐지이고 그것은 신분제가 폐지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삼부회의가 소집되는 과정에서 제3계급이 주도권을 잡았다. 제3계급은 특권계급과의 연대가 무산되자 제4계급과 결합했다. 교과서에서는 흔히 세 계급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네 개의 계급이 있었다. 유산자인 제3계급에 비해 평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제4계급은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무산자였다. 당시 상퀼로트라고 불리던 제4계급은 독자적 조직력과 군중 동원력을 갖추고 있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투표권 문제로 1,2계급과 대립하던 3계급은 별도의 의회를 구성하고 국민의회라고 칭했다. 국왕이 국민의회의 회의장을 폐쇄하자 이들은 테니스코트에서 새로운 헌법이 만들어질 때까지 결코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테니스코트 서약이다. 이에 당황한 국왕파는 군대를 동원해 국민의회를 해산하려 했고, 이 소식을 들은 파리민중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프랑스혁명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 공격은 제4계급이 주도한 것이다. 하지만 혁명의 지도자들은 모두 제3계급이었다. 삼부회의 이후 만들어진 국민의회도 제3계급이 이끌었다.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는 국민의회는 재산에 따라 투표권을 주는 제한 선거제를 도입하였다. 재산이 있는 사람만이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가질 수 있었다. 제3계급은 가난한 민중들은(제4계급) 무식해서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루이16세는 국민의회가 공포한 인권선언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파리의 여자들이 대대적으로 베르사이유로 행진하여 국왕 일가를 파리의 튈르리궁으로 이송한 이후에 인권선언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국왕 일가는 끊임없이 혁명에 반하여 오스트리아 등과 접촉을 시도했다. 마침내 1791년 6월에 파리를 탈출하여 오스트리아로 향했지만 국경 근처에서 잡혔다. 바렌느 사건이라고 불리는 국왕 탈출 사건은 남아있던 국왕에 대한 우호적 민심마저 이반시키고 여론을 크게 악화시켰다.   

 

한편 1791년 9월에 입헌군주정과 제한 선거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헌법에 의해 구성된 입법의회에는 국왕을 지지하는 입헌군주파와 공화파인 지롱드와 산악파(협의의 자코뱅)가 서로 대립하였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연합하여 입법의회를 압박하였고 입법의회는 혁명전쟁을 선포했다. 1792년 4월 혁명전쟁이 시작되었다. 혁명을 지키려는 부르주아와 민중은 의용군을 만들어 스스로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반혁명 동맹군에 맞서 싸웠다.

 

프랑스 의용군이 전쟁에서 거듭 패배하며 민심이 더욱 악화되었다. 루이16세 일가가 오스트리아에 프랑스 정보를 빼돌린다는 의심이 확산되자 1792년 8월 튈르리 궁전을 습격하여 왕권을 중지시키고 루이16세의 모든 가족들을 탕플탑에 유폐하였다. 

 

1792년 9월 발미전투를 계기로 프랑스군은 프로이센에 대한 반격에 성공했다. 혁명전쟁의 진행과 더불어 전투에 기여도가 높은 제 4계급(상퀼로트)의 정치적 권한이 강해졌다. 제4계급은 로베스피에르, 마라, 당통이 이끄는 산악파를 지지하였다. 1792년 9월, 입법의회는 해산되고 산악파는 공화정을 선포하고 국민공회를 구성하였다.  1793년 1월 루이16세가, 뒤이어 왕비 마리 앙뜨와네트가 처형되었다.  

 

제1 공화정은 자코뱅(광의의 자코뱅)의 한 분파인 산악파(협의의 자코뱅)와 제4계급이 결합하여 탄생했다. 국민공회의 핵심인물은 로베스피에르이다.  로베스피에르는 마라, 당통과 함께 제3계급 출신의 산악파였다. 세계 역사에서 혁명의 주체는 민중이어도 지도자는 부르주아지나 지식인인 경우가 많다.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체계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철학과 지식에 접근 가능해야 했기 때문이 아닐까..

 

로베스피에르는 부르주아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중과의 굳건한 연대만이 혁명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혁명의 각종 세력 중 로베스피에르 파가 가장 민중과 가까이 있으며 민중의 사랑을 받았다. 부르주아지들은 평등은 외면하고 사적 소유권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체제를 수립하려 하였다. 민중이 요구한 것은 부르주아적 자유가 아니라 평등자유였다.

 

국민공회는 귀족의 재산을 몰수하고 누구에게나 평등한 투표권을 주는 보통선거제를 도입하였다. 인민주권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투표권이 없었다.

 

제1 공화정은 공포정치의 시대기도 했다. 하루에도 수 백 명이 기요틴 아래 목이 잘려나갔다. 하지만 공포정치를 로베스피에르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 없다. 공포정치의 가장 큰 원인은 주변의 왕정 국가들이 연대를 강화하며 프랑스를 고립시킨 것이다. 유럽 열강이 반혁명 연대를 맺자 프랑스는 내부적으로 결속할 수밖에 없었고 반혁명 혐의자를 강력하게 처벌해야 했다.

 

“로베스피에르가 무장한 예언자로 등장하면서 프랑스혁명은 공포정치의 시대로 들어섰습니다. 이는 단순히 과격한 시도가 아니었습니다. 로베스피에르를 옹립했던 혁명적 군중은 국내에서는 제3계급이 중심이 된 온건파와 적대관계를 형성하고, 국외에서는 유럽의 왕정국가와 적대관계를 형성함에 따라 고립되었고, 그 결과 불안과 의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상대를 절멸시키겠다는 의지와 혁명이 원하는 궁극적인 유토피아를 세우겠다는 의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고 이 유토피아를 지키기 위해 아주 강력한 내부 결집을 시도했습니다. p366~7 <역사고전강의>”

 

로베스피에르는 ‘피에 굶주린 몽상가’가 아니라 ‘혁명적 집단 심성의 체현자’였다. 르페브르는 “그의 권력은 파리 대중의 권력이었으며, 그의 공포정치는 파리 대중의 공포정치”였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민중들이 그를 버렸을 때 그는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 7월 테르미도르 반동에 의해 체포되었다. 테르미도르는 혁명력으로 7월이다.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에 떨던 반대파들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쿠데타는 공안위원회의 반 로베스피에르 파가 주도했지만 이미 민중들의 마음도 로베스피에르를 떠나있었다. 파리시민이 그를 버렸기 때문에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에 올랐던 것이다.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으로 혁명의 주도권은 다시 부르주아지에게 넘어갔다.

 

 

 

 

나폴레옹과 빈체제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45>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등장한 총재정부는 무능했고 혁명은 혼란에 빠졌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등장하기 쉬운 것이 군부세력이다. 나폴레옹은 혁명전쟁 초기부터 발군의 전투 실력을 뽐내며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지친 민중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고 나폴레옹은 재빨리 이 기회를 낚아챘다.

 

나폴레옹은 혁명의 수호자일까? 반혁명 독재자일까? 지리멸렬했지만 1799년 당시 프랑스는 공화정 체제에 있었다. 1799년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은 공화정 체제를 존속한 채 제1 통령에 올랐으나, 사실상의 일인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마침내 1804년에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프랑스 정치체제를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국민투표를 통해 이루어진 변화였지만, 박정희의 유신헌법이 그러했듯이 형식적 행위에 불과했다. 프랑스 제정은 혁명에 대한 명백한 반동이자 퇴행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을 1789년부터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킨 1799년까지로 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폴레옹이 혁명의 수호자, 혁명의 전파자로 인식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눈부신 업적을 남겼습니다. 현대 ‘민법전’의 효시인 ‘나폴레옹 법전(1804)’은 인민주권을 확고하게 법률화했습니다. 코르시카 섬 출신의 나폴레옹은 이념과 연줄로부터 자유로웠고 그만큼 강력하게 혁명의 과업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직업 관료제, 상비군, 경찰제도 등이 정착되었고, 그 결과 중앙집권적 근대 국민국가 체제가 성립했습니다. 이 체제는 급진파의 인민주권론, 초보적인 의미의 사회주의, 국가주의가 서로 어우러진 것이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프랑스혁명을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의 국가에 살고 있는 국민이라는 국민의식, 국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주권 의식, 국민들 각자가 역사를 만들어 가는 주체라는 역사의식을 갖게 되었고, 이는 근대정신의 주요한 성과라 할 수 있습니다. p365 <역사고전강의>”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46>

 

나폴레옹은 체제를 역행시키기는 했지만, 혁명의 가치를 그대로 계승했다. 나폴레옹은 이렇게 선언했다.

 

“혁명은 모든 특권의 폐지, 즉 영주의 재판권 폐지, 낡은 농노제의 폐지, 봉건적 의무의 폐지를 뜻하며, 동시에 국가가 전 시민, 전 재산에 대해 세금을 매기는 것을 의미한다.”

 

나폴레옹 법전에 따르면 법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소유권은 절대적으로 보호되었다. 그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극소수의 부르주아들뿐이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나폴레옹은 혁명군의 이름으로 유럽 전역에 원정을 나섰다. 유럽의 부르주아와 민중들도 처음에 나폴레옹의 군대를 환영하였다. 나폴레옹은 “나는 나의 법전을 받아들이는 모든 곳에 자유의 씨를 뿌리려 한다.”며 정복지에서 신분제와 농노제를 폐지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에 대한 평가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브랜든 심스의 <Europe>에는 혁명의 수호자가 아니라 혁명의 파괴자로서의 나폴레옹의 면모가 드러나 있다.

 

“나폴레옹은 계속되는 전쟁을 통해 국내 정책과 위성국가들의 정책을 다듬어 나갔다. 1790년대 혁명파들은 구체제 시절 잃었던 프랑스의 대외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효과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정책을 추진했지만,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귀족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프랑스는 물론 모든 동맹국에 봉건제도를 다시 도입하려고 했다. ( .....) 1808년 3월, 나폴레옹은 관직에 따라 직책이 정해지고 대를 이어 인계할 수 있는 귀족제도를 전면 도입했다. 귀족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후대에 국가에 큰 공헌을 하지 못하는 가문은 귀족에서 제외시키는 내용도 포함시켰다. 새 귀족들에게 분배해줄 영지로는 이탈리아와 저지대 지역, 그리고 독일 영토를 활용키로 했다. p274<Europe>”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45>

 

나폴레옹군은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하여 서유럽 대부분을 프랑스의 손아래 넣었다. 그는 유럽 전역을 하나의 체제로 통합하려고 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갈수록 혁명군이 아니라 정복군, 학살자의 행태를 보였다. 점령지 주민들은 나폴레옹군에 격렬히 저항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45>

 

나폴레옹은 러시아원정에 패배함으로써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에 패배한 나폴레옹은 1806년 영국과의 교역을 금지하는 대륙 봉쇄령을 내렸는데, 러시아가 이를 어기자 1812년 원정에 나섰다가 패하였다. 나폴레옹의 불패 신화가 깨어지자마자 유럽 각국이 나폴레옹에 대항해 일어났고, 나폴레옹은 1813년 라이프찌히 전투에서 동맹군에게 패배한 후 1814년 엘바 섬으로 추방되었다. 1815년 엘바 섬을 탈출하여 다시 유럽을 긴장시켰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고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된 후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나폴레옹의 원정이 유럽 전역에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이다. 나폴레옹은 정복지의 농노제와 신분제를 폐지하고 프랑스혁명의 이념을 퍼뜨렸다. 민족주의는 자유주의와 달리 나폴레옹에 대항해 형성된 것이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약탈자로 돌변하자 정복지의 주민들은 프랑스에 대항해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하나의 민족이라는 관념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프랑스혁명 초기 프랑스혁명군이 만들어졌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프랑스혁명군은 유럽의 반혁명연대에 맞서 혁명을 지키기 위해 조직되었다. 프랑스혁명 전만 해도 유럽은 별다른 민족의식이 없었다. 혁명 초기의 프랑스나 나폴레옹 원정 이후의 유럽 각국이나 모두, 민족주의는 외세에 대항해 스스로를 지키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외부의 적은 내부의 단결을 촉발한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47>

 

1814년 나폴레옹이 추방되자 승전국들이 빈으로 모였다. 2년에 걸친 빈회의에서 유럽의 왕정국가들은 유럽을 혁명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기로 합의했다. 빈회의 이후로 성립된 유럽의 새로운 국제질서라고 해서 이것을 빈체제라고 부르는데, 오스트리아의 총리인 메테르니히가 주도했다. 4국 동맹 혹은 신성동맹이 주축이 된 빈체제는 보수반동 체제로서 프랑스혁명이 불러일으킨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탄압하려 하였다. 프랑스는 빈체제에 의해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가 복위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하지만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없듯 역사의 흐름도 거꾸로 돌리기는 어렵다. 빈체제는 곧바로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의 자유민족주의자들은 빈체제를 비난하며 저항운동을 펼쳐나갔다. 그리스와 라틴아메리카는 독립에 성공했다. 자세한 내용은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의 3장과 4장에서 공부할 예정이다.

 

 

 

* 내가 읽은 프랑스 혁명에 관한 책들

 

1. 두도시 이야기 http://blog.aladin.co.kr/753199155/7158531

2. 고리오 영감 http://blog.aladin.co.kr/753199155/7181872

3. 공산당 선언 http://blog.aladin.co.kr/753199155/7287110

4.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http://blog.aladin.co.kr/753199155/6444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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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이라는 단어는 볼 때마다 이상하다. 근대면 근대, 현대면 현대지, 왜 단어 하나를 두고 때로는 근대로 때로는 현대로 사용하는 걸까?

 

  “모던(modern)이라는 말은 ‘근대’로 번역되기도 하고, ‘현대’로 옮겨지기도 합니다. ... ‘모던’이라는 말이 15세기부터 오늘에 이르는 세계를 구조적 틀의 측면에서 가리킬 때에는 ‘근대’라고 옮기면 적절합니다. ... 그런데 15세기부터 오늘날까지를 역사적으로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앞선 시기는 15세기부터 과학혁명, 계몽주의 등을 거쳐 19세기 중반까지이고, 이어지는 시기는 19세기 중반부터 오늘날까지입니다. 저는 앞의 시기를 ‘근대’라 하고 이어지는 시기를 ‘현대’라 합니다. 근대적 패러다임 안에 역사적 시기로서의 근대와 현대가 있는 것입니다. p445 <인문 고전 강의>”

 

 

 

과학 혁명과 계몽주의

 

근대는 곧 현대이기도 하다. 근대는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의 틀을 만든 시대이기 때문이다. 유럽은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산을 넘어 근대로 진입하였다. 17세기 과학혁명과 18세기 계몽주의가 그 진군의 발판이 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유럽은 30년 전쟁을 겪으면서 과학에 대한 의존도가 급속히 높아졌다. 종교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자 신중심의 세계관도 무너지고, 미래는 불확실해 졌다. 신을 잃고 불안한 사람들에게 확실성에 대한 믿음을 준 것은 과학이었다.

 

갈릴레이(1564~1642)는 우주의 작동원리가 성서의 계시가 아니라 수학을 통해서 서술될 수 있다고 믿었다. 갈릴레이는 수학이야말로 학문의 언어라고 했는데, 갈릴레이를 이어받은 사람이 데카르트, 뉴턴 등이었다.

  

 

데카르트(1596~1650)는 세계를 기계장치처럼 생각했다. 세계가 움직이는 원리와 작동방식만 알면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데카르트는 인간 사유 이외의 모든 것을 대상화함으로써 세계를 사고의 주체와 객체로 양분했다. 이른바 사유(res cogitans)와 연장(res extensa)이다. 데카르트의 이분법은 근대 사고의 초석인 동시에 파국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17세기 과학혁명은 뉴턴(1642~1727)에 와서 완성되었다. 뉴턴 과학은 과학뿐만 아니라 18세기 유럽 사상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 서구 과학자와 기술자 또는 학자들 사이에 퍼져 있던 사고방식 전반을 뉴턴주의라고 하는데, 뉴턴주의에는 수학적, 형이상학적, 실험적 주장이 섞여 있다. 뉴턴주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해 낼 수 있는 인간의 능력 자체에 대한 낙관적 믿음을 전파했다.

 

근대과학자들은 ‘세계의 법칙을 만들어내는 주인은 나’ 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종교나 철학보다 과학을 더 신뢰한다고 할 수 있다. 병이 나면 병원을 먼저 찾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과학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근대적인 사고방식에 기초해 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계몽주의는 영어로 enlightenment, 독어로 Aufclärung이다. 빛을 비추다, 명확하게 한다는 뜻이다. 계몽주의자들은 이성을 통해 과학을 발전시키고, 과학적 방법을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하면, 인간의 지식이 점차 확대하여, 행복한 미래를 맞을 것이라 믿었다. 과학적 이성에 대한 믿음은 인간이 완전가능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컸다. 그러니 ‘이성의 권위에 대한 계몽의 신앙’이라는 후세의 빈정거림이 지나치다고 할 수도 없다. 오늘날 인간의 완전가능성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계몽의 기획은 실패한 것일까?

  

 

“17세기 과학혁명의 시대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는 공통으로 ‘이성의 시대’ 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 17세기 과학혁명의 이성이 자연의 제 1원리를 탐구하는 과학적 이성이었다면, 18세기 계몽주의의 이성은 사회적 처방을 내놓은 ‘사회 운동의 원리로서의 이성’ 이었습니다. p286 <역사 고전 강의>”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세계사 선생님들은 참 힘들 것 같다. 세계사뿐만 아니라 한국사도 그런데,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인류 탄생 이래의 모든 것을 공부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크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로 나누어 설명하지만 철학이나 과학 등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물론 깊이 있는 설명이 불필요하기도 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불가능하기도 하다. 학생들이 이해하기 힘들뿐더러 역사 선생님이 철학자나 과학자는 아니니까.

 

홉스, 로크, 루소의 철학 혹은 정치사상을 도식화한 이 표도 한눈에 들어오기는 하지만 조금 무리가 있어 보인다. 강유원의 <인문고전강의>에 나오는 홉스와 로크로 살짝 보충해보면 어떨까 싶다. 물론 이 글의 대부분이 강유원이 쓴 두 권의 ‘강의’를 짜깁기한 것이기는 하지만 ^^ ;;

 

절대왕정은 중세 봉건제가 근대 시민사회로 이행하는 중간 단계에 나타난 정치체제이다. 절대왕정을 뒷받침한 사상은 왕권신수설이다. 강력한 왕권의 정당성을 신으로부터 찾은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 시민 사회의 토대가 된 사회계약설은 이 왕권신수설에 대한 부정이다. 왕의 권한이 막강하던 미약하던 간에 그 권한은 신이 아니라 사회적 계약에 따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계약 이전의 인간은 어떤 자연 상태에 있었던 것일까? 자연 상태, 자연권, 자연법 등등에 대한 설명은 사상가들마다 다르다.

  

  <위키 백과사전: 리바이어던>

 

홉스(1588~1679)하면 떠올리는 것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과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이다. 홉스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타고난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권이다. 그런데 자연권과 자연권이 충돌하면 약육강식의 동물 세계가 되고 인간 세계는 곧 파멸할 것이다. 그 해결책으로 등장한 것이 사회계약이다.

 

사회계약의 핵심은 자연권의 일부를 절대주권에게 양도하는 것이다. 절대주권은 공권력을 가지고, 계약을 어긴 자에게 제제를 가할 수 있다. 말하자면 죽기 싫으면 자연권을 약간 포기하고 평화를 사야 한다는 것이다. 홉스의 상징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이지만 그가 제시한 것은 평화의 정치학이라 할 수 있다.

 

홉스는 절대왕정을 지지했다. 잉글랜드 내전을 고스란히 겪었던 홉스는 절대군주만이 사회계약을 수호하고 평화를 지킬 힘이 있다고 믿었다. <리바이어던>의 표지는 절대군주의 강력한 힘으로 유지되는 안정된 사회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로크(1632~1704)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17세기 신흥 상업 부르주아 계급의 당파성을 충실히 대변한 사상가’ 라 할 수 있다. 로크의 사상이 ‘소유권’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로크가 주장하는 자연 상태와 사회계약은 무엇인가?

 

로크는 “자신의 소유물과 인신을 처분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의 상태”를 자연 상태라고 한다. 그렇다면 소유물 즉 소유권의 근거는 무엇일까? 간단하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세계를 공유물로 주었고, 그것에 노동을 보태면 자신의 소유가 된다. 즉 신이 주신 선물에 나의 노동을 더하면 내 것이다. 

 

서부개척 영화를 보면 주인 없는 땅에(사실은 주인이 있지만 백인들의 눈에는 하느님이 준 공유물일 뿐이다.) 울타리를 치고 깃발을 꽂으면 자기 땅이 된다. 실제 벤자민 플랭클린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 빈 땅을 발견하거나, 원주민이 살고 있더라도 그들을 쫓아내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로크가 미국 건국 이념의 아버지라는 말이 실감 난다. 플랭클린도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다! 여하튼 이런 생각을 학문적 용어로 말하면 ‘노동가치설’ 이다. 노동가치설이라고 하면 보통 마르크스를 떠올리지만, 사실 노동가치설의 원조는 잉글랜드의 자유주의 정치철학이다.

 

로크의 자연 상태의 핵심은 소유권이다. 사회계약이 필요한 이유는 소유권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서부영화처럼 내가 애써 울타리를 쳐놓은 땅에 다른 놈이 나타나 총을 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서 법과 국가가 필요해 진다. 소유는 법적 승인을 받아야 한다. 법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계약에 의해 만들어진다. 국가의 역할은 소유권을 침해하는 일체의 폭력으로부터 재산을 지키는 것이다. 소유권 보호를 최고의 임무로 삼는 이른바 경찰국가가 로크주의적 국가인 것이다.

 

로크의 대표작 <통치론>은 영국혁명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이다지 선생님은 로크의 <통치론>이 영국혁명 이후에 출간되어 영국혁명을 사후에 옹호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최근 로크 연구가들은 <통치론>이 명예혁명 이전에 초고가 완성되었다는 데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래슬릿은  <통치론>의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다.)

 

“래슬릿은 <통치론>이 배척위기의 와중에서 사실상 혁명에 대한 요구와 선동으로서 집필된 것이지, 이미 일어난 혁명을 옹호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집필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p396 <인문고전강의>”

 

잉글랜드 내전은 표면적으로는 왕당파와 의회파의 싸움이었지만 내적으로는 대토지 소유귀족과 신흥 상업 부르주아의 싸움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통치론>은 새로 등장하는 부르주아의 당파성을 대변하는 텍스트입니다. 17세기 잉글랜드의 경제적 상황에서 주요한 것 중의 하나가 인클로저 운동입니다. 토지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운동이 일어나자 경제적 이익의 즐거움을 알게 된 사람들이 많아졌고 로크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입법을 시도했고 그것을 관철했습니다. 이것이 본래적인 의미의 자유주의 국가입니다.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 상업 부르주아와 지주 계급은 경제력을 앞세워 의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나아가 왕권을 제한하면서 자신들의 이권을 극대화하는 입법을 시도하고 관철했던 것입니다. 자유주의 국가의 목표는 자산가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국가를 만드는 것입니다. p394 <인문고전강의>”

 

로크가 전제왕정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 것이 <통치론>이다. 지상의 통치자는 그들의 통치권을 신으로부터가 아닌 인간에 의해 체결된 계약으로부터 끌어낸다는 것과 인민은 계약을 위반한 통치자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킬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논증했다.

 

 

루소(1712~1778)는 강유원의 책에 몇 줄만 나오는데, 옮겨보면 이렇다.

 

“그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문명의 발전이 인간의 삶을 황폐화시켰다는 것입니다. 과학적, 수학적 확실성을 추구하는 삶보다 전통적, 도덕적 삶을 추구하는 삶이 더 훌륭한 삶이라는 것이 루소의 메시지입니다. 그가 살았던 18세기가 되어서야 분열된 세계 속에 살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루소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정신을 차린 게 아니라 그의 이야기가 영향력을 끼칠 정도로 이미 사람들이 사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p366 <인문고전강의>”

 

17세기를 풍미한 데카르트의 이분법과 낙관적 뉴턴주의가 18세기에 와서 벌써 비판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과학적 수학적 확실성의 세계에 대한 신랄한 풍자이기도 하다.

 

여하튼 18세기 인물인 루소는 영국혁명과 관련이 없다. 루소에 대해서는 그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프랑스혁명을 공부할 떄 조금 더 상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영국 혁명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영국은 의회가 일찍 발달한 사회였다. 13세기에 이미 parliament 라는 단어가 쓰였다. 물론 귀족들의 협의체였지만, 왕에 대항해 성직자와 귀족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왕권을 견제하는 기구로 성장하였다. 의회가 다루는 주요 안건 중 하나는 과세문제였다. 왕은 전쟁 등의 이유로 자금이 필요할 때 의회를 소집해야 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영국은 1688년 조용히 시민혁명을 완수했다. 100년 뒤의 프랑스 혁명과 비교하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명예로운 혁명이었지만,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것보다는 오랜 투쟁과 적지 않은 피의 대가이기도 했다. 영국혁명의 시작은 엘리자베스 1세의 죽음으로 거슬러 간다.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처녀왕으로 후계 없이 죽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올랐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에 속해있지 않았다.) 튜더왕조가 끝나고 스튜어드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제임스 1세와 그의 뒤를 이은 찰스 1세는 영국의 의회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고 종교 문제에서도 의회와 충돌하였다. 의회는 찰스 1세로부터 ‘권리청원’을 받아냈으나 찰스 1세는 이후 11년 동안 한 번도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1640년에서야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의회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의원들은 찰스 1세를 비난하며 탄핵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찰스 1세가 강경 대응을 하면서 내전이 발생했다. 영국 내전 혹은 청교도 혁명(1642~1651)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은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약 10년간에 걸쳐 지속되었다. 초기 열세였던 의회파는 크롬웰이 이끄는 철기군이 옥스퍼드를 함락시키면서 승기를 잡았다. 3차에 걸쳐 일어난 내전은 1651년 우스터 전투를 마지막으로 의회파가 승리하였다.

 

의회는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공화정(1649~1658)을 선포했다. 영국역사상 전무후무한 짧은 기간의 공화정이다. 1649년 크롬웰을 호국경으로 추대하여 출발한 공화국은 1658년 크롬웰이 사망하면서 붕괴하였다. 크롬웰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영광을 되찾으려 노력하였으나 엄격한 금욕정치로 인해 독재자로 낙인찍혔다.

 

크롬웰 사후 왕정이 복고되어 찰스 2세, 제임스 2세가 연이어 재위하였으나, 이 왕들 역시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의 전철을 밟았다. 특히 제임스 2세는 친 가톨릭 정책으로 의회를 불안하게 하였다. 의회는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그의 남편 윌리엄을 왕으로 추대하며 제임스 2세를 몰아냈다. 딸과 사위가 아버지를 몰아내는데 가담한 것이다. 영국이 자랑하는 무혈혁명인 명예혁명(1688)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여하튼 메리와 윌리엄은 의회가 제시한 ‘권리장전’에 승인함으로 절대왕정을 끝내고 입헌군주제를 수립하였다.

 

스튜어드왕조의 마지막 왕인 앤여왕 때 영국은 소위 그레이트 브리튼이 된다.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공식적으로 병합한 것이다. 약 100년 뒤인 1801년, 그레이트 브리튼은 다시 아일랜드를 병합하며 덩치를 키웠다. 아일랜드의 남쪽지역은 오랜 독립투쟁 끝에 1921년 남아일랜드로 분리 독립하게 된다.  

 

여하튼 앤여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자, 1714년 독일 출신의 조지 1세가 영국의 왕위를 계승하며 하노버 왕조를 열었다. 조지 1세는 영어를 하지 못했고 정치적 실권은 총리와 내각이 장악하였다. 이때부터 '국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영국의 전통이 만들어졌다. 영국은 지금까지 이 통에 따라 의원내각제 유지하고 있다.  

 

 

 

 

유럽에서 근대가 시작되다 :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장

 

1절. 자본가와 노동자가 등장하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영국이 가장 먼저 산업혁명(1770)에 성공한 것은 제일 먼저 여건이 성숙했기 때문이다. 무역이란 이름으로 식민지를 착취하여 자본을 축적하고(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이를 기반으로 성장한 신흥 상업 부르주아들이 시민혁명의 주역이 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획득하였다. 16세기부터 유행한 인클로저 운동은 노동자를 대량 양산하였다. 영국에는 석탄과 철광 같은 천연자원도 풍부하였다.

 

 

2절. 산업 혁명이 시작되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차 인클로저 운동은 영국의 모직물 산업 때문에 시작되었다. 모직물의 인기가 치솟자 지주들은 소작농들을 쫓아내고 그 땅에 울타리를 쳐서 양들을 길렀다. 1516년에 출간된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 이미 “영국에서는 양들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1차 인클로저가 목적한 바는 아니었지만,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들은 대거 도시로 몰려들었고 산업화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했다. 초기의 산업은 매뉴팩처 즉 공장제 수공업의 형태였다. 가내 수공업이 선대제 수공업으로 발달했고 다시 매뉴팩처로 진화된 것이다.

 

그런데 산업혁명은 왜 하필 방직산업에서 시작된 것일까? 이 궁금증은 2015년에 방송된 KBS 다큐멘터리 <바다의 제국> 3부를 보면 풀리는데, 산업혁명이라는 눈부신 성과 뒤에는 융성했던 한 나라의 처절한 몰락이 있었다.

 

영국은 16세기만 해도 모직물이 최고의 산업이었다. 그런데 17세기 후반부터 인도에서 수입된 면직물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제인 오스틴(1775~1817)의 소설에 나오는 여자들이 하나같이 면직물로 된 드레스를 입을 정도였다. 우리나라는 고려 말에서야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를 들여왔다. 그런데 인도는 기원전 3000년경에 목화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인도의 면직물은 수 천 년의 노하우가 축적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면직물이었다. 영국은 인도산 면직물 (캘리코) 때문에 모직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을 뿐 아니라 막대한 양의 은이 유출되어 무역적자가 발생했다. 영국의회는 캘리코 수입 금지 등의 입법 조치를 취하였으나, 면직물 유행의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자 영국은 인도의 뱅골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고, 인도의 면직물을 공짜나 다름없이 들여오기 시작했다.

 

영국의 욕심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영국에서 직접 면직물을 생산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영국은 인도처럼 숙련된 면직물 기술자들이 없었기 때문에 인간을 대신할 기계를 개발했다. 17세기에 발달한 과학기술과 영국의 풍부한 천연자원 등에 힘입어 마침내 방적기와 방직기를 발명했다. 1764년 제니 방적기를 시작으로 1785년에는 카트라이트 방직기가 개발되었다. 연표에는 보통 영국 산업혁명의 시작을 1770년으로 표기하고 있다.

 

19세기 중반 면직물이 대량 생산되자 영국은 거꾸로 인도에 면직물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더 많은 수출을 위해 영국은 인도의 면방직 산업을 철저히 파괴했다. 공장을 부수고 숙련공들의 손가락을 자르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1835년 당시 동인도 회사 총독 벤팅크 경은 “면방직 장인들의 뼈가 인도의 대지를 하얗게 덮었다.”라고 말했다. 식민지였던 인도는 영국산 면제품으로부터 자국의 산업을 보호할 힘도, 자국민을 지킬 힘도 없었다. 인도는 수 천 년 동안 이어져온 세계 최고의 면방직 산업을 빼앗기고, 영국에 목화를 제공하는 원료 공급지로 전락하였다.

 

면직물은 영국 산업을 공장제 기계공업으로 바꾸어 놓았다. 기계가 널리 사용되자 동력의 개량도 필요해졌다. 와트(1736~1819)의 증기 기관이 문제를 해결했다.

 

기계를 대량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값싸고 질 좋은 철이 필요했는데 마침 영국에는 철도 많았다. 증기기관과 철! 연기를 내뿜으며 움직이는 거대한 쇳덩이들은 산업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증기와 쇳덩이가 결합한 최고의 발명품인 기차가 탄생했다. 1825년에 스티븐슨의 증기 기관차가 객차를 끄는 데 성공하였다.

 

1830년 운행을 시작한 최초의 근대식 철도는 리버풀과 맨체스터를 이었다. 맨체스터 등의 공업지대에서 생산된 상품들이 리버풀까지 기차로 운반되어 세계 각지로 수출되었다. 영국은 세계의 공장이었고, 해가지지 않는 식민지는 거대한 시장이었다.

 

영국의 면직물은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876년 강화도 조약에 의해 무관세로 들어온 영국산 면직물이 조선 후기에 싹트기 시작한 가내수공업을 짓밟았다. 일본이 영국산 면직물을 들여와 다시 우리나라로 수출한 것이다. 쌀과 면직물을 맞바꾼 미면米綿무역으로 곡물가격은 치솟고 가내수공업은 몰락했다. 개항이 경제 파탄을 가져왔던 것이다.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구식군인뿐 아니라 도시의 빈민들이 대거 합세한 것도 이런 영향 때문이다.

 

 

 

반자본주의 운동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인류역사의 아이러니 중 하나는 먹고 살만해지면 오히려 빈부격차가 심해진다는 사실이다. 청동기시대에 잉여농산물이 생기자 계급이 발생했고, 조선 후기에 생산력이 증대되자 농민층이 부농과 임노동자로 분화되었다.

 

산업혁명으로 생산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오히려 노동자들의 현실은 가혹하다 못해 지옥과 같았다. 공장의 중심은 기계가 차지하게 되었고 노동자들은 기계에 딸린 존재가 되었다. 숙련공이나 힘센 남성이 필요 없어진 공장에서는 임금이 싼 아동과 여성을 고용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아이들은 병에 걸려 어린나이에 죽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맨체스터 빈민가에 살던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17세였다. 서기 1000년 노르만 정복 당시 영국 전체의 평균 수명 24세보다 30%가 감소한 수치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하고, 아프리카 흑인을 사냥해 노예로 만들고, 면방직 산업의 메카 인도를 박살내고....산업혁명이란 세계 전역의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분노와 피땀 위에 이룩한 빛나는 성과가 아니던가?  그 달콤한 열매는 어디로 갔기에 영국의 노동자마저 이렇게 비참하게 살았던 것일까? 산업혁명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반자본주의 운동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1810년대 기계화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은 영국의 숙련 방직공들이 기계를 부수기 시작했다. 기계만 없다면 예전처럼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려 보려는 러다이트 운동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기계제 산업은 더욱 발달했고, 노동자들의 의식도 향상되었다. 결국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법률이 필요하고, 그 법을 제정하는 국회의원을 자신의 손으로 뽑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837년 영국에서 시작된 차티스트 운동이 바로 노동자들의 선거권 투쟁이다. 영국 정부는 지도자를 체포하고 운동을 탄압하였지만 조금씩 선거권이 확대되어 갔다.

 

반자본주의 운동의 또 다른 형태는 땅이나 공장 같은 생산 수단을 사회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사회주의 운동이었다. 경제적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운동은 초기 오언과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를 거쳐 후기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로 발전하였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역사가 보여주었듯이 소련과 중국 등에서 실현되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투쟁과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서는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3장에서 다루고 있으므로 그때 가서 상세히 알아보도록 해야겠다.

 

 

 

고전주의 경제학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30~31>

 

노르만의 침략이 끝난 11세기 이후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부르주아가 탄생하였다. 부르주아들은 처음에는 영주의 지배를 받았으나, 점차 자치권을 획득하며 성장하였다. 13~14세기 유럽 각지에 등장한 신분제 의회에는 영주와 고위 성직자 이외에도 도시의 대표인 부르주아들이 참여하였다. 부르주아들은 국왕에게 중앙집권 국가를 확립하는 데 필요한 재정을 지원하고, 그 대가로 독점적 상업 활동을 보장받거나 정부의 관리로 진출하였다.

 

15~16세기 대항해 시대를 거치며 부르주아는 한 단계 더 도약하였다. 대서양 무역과 식민지 경영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축적된 자본은 산업에 재투자하였고 생산된 상품은 해외 식민지를 통해 판매했다. 투자와 생산의 선순환 과정이 거듭되다 마침내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35>

 

산업혁명의 성공으로 부르주아의 위상도 급상승했다. 농민 출신의 부르주아가 하원 의원에 진출하고 총리도 되었다. 부르주아들은 자기 계급의 이해에 맞는 정책을 요구하고 대지주 귀족들과 대립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1846년 영국의 곡물법 논쟁이다. 곡물법이란 지주를 보호하기 위해 값싼 외국산 곡물 수입을 금지하는 법이다. 부르주아들은 곡물법에 반대하였다. 값싼 곡식은 낮은 임금을 유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들은 ‘자유 무역’을 명분으로 곡물법을 폐지시켰다. 곡물법 폐지는 부르주아가 명실상부한 지배 계급임을 입증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19세기에 서유럽 국가들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한 것은 ‘자유 무역’ 덕분이라는 견해가 많다. 영국과 미국은 자유 시장, 자유 무역을 채택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보다 앞설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다르다. 영국은 보호주의의 선구자였다. 

 

“헨리 7세(1485~1509)부터 시작해서 튜더 왕조 군주들은 정부 개입을 통해 모방직 산업을 장려했다. 당시 모방직은 유럽의 첨단 산업이었고 플랜더즈 지방을 중심으로 한 저지대 국가들에서 발달한 상태였다. 영국 정부는 관세를 통해 저지대 국가에서 생산되는 더 양질의 상품으로부터 영국 생산자들을 보호했고, 선진 방직 기술을 손에 넣기 위해 숙련공들을 스카우트하는 작전의 뒤를 봐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플랜더스, 플래밍 같은 성은 당시 스카우트된 플랜더스 숙련 방직공들의 자손들이다. 이 같은 정책은 튜더 왕조 후에도 계속되어 18세기 무렵에는 모방직 제품이 영국 수출 소득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수출 소득이 없었다면 영국은 산업 혁명에 필요한 식량과 원자재를 들여오지 못했을 것이다.   1721년 영국 역사상 최초의 총리로 임명된 로버트 월폴은 광범위하고 야심 찬 산업 개발 프로그램을 도입하면서 정부 개입의 수위를 한층 더 높였다. 이 프로그램에 따라 ‘전략적’으로 중요한 산업에 대한 관세 보호와 보조금이 지급되었다. 영국이 18세기 후반 약진하기 시작한 것은 부분적으로 월폴의 이 산업 장려책 덕분이었다. 애담 스미스가 영국 생산자들을 돕기 위한 보호주의나 기타 정부 개입이 필요 없다고 주장한 것도, 1770년대 영국이 다른 나라들 보다 너무도 월등히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국이 완전히 자유 무역으로 방향을 튼 것은 그의 <국부론>이 나오고도 거의 1세기가 지난 1860년이었다. 바야흐로 산업 최강국으로서의 입지가 확고부동해진 다음이다. p67~68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장하준은 <사다리 걷어차기>로 유명해진 경제사經濟史학자다. 그가 일관되게 주장해 온 것은 후진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적극적인 국가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는 신자유주의나 신고전주의는 선진국들의 ‘사다리 걷어차기’다. 일치감치 사다리를 타고 높이 올라간 선진국들이 사다리를 없애 버린 후에 공정하게 경쟁하자고 꼬드기는 것이 신자유주의인데 이것은 사기라는 것이다. 어른이 아이를 데리고 링 위에 올라가 대등한 경쟁을 운운하는 꼴이다.

 

자유무역이 자본주의가 성장한 원인은 아니다. 그러나 19세기 전반에 걸쳐 자유무역이 널리 확산된 것은 사실이다. 서유럽 국가들 사이에서도 자유 무역 협정이 맺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유 무역의 확산은 대부분 중남미와 아시아 지역에서 벌어졌다. 19세기 유럽과 아시아의 자유무역이라면? 그렇다. 자유무역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이 자유무역은 바로 강화도 조약과 같은 불평등 조약을 말한다. 대포를 실은 배를 끌고 와 무역이냐 전쟁이냐를 강요하며 강제로 통상을 맺던 그 자유무역 말이다. 여기서 자유란 경제적 식민지로 전락한 아시아 국가들의 관세 자주권 상실을 의미한다. 우리도 일본과 조약을 맺을 때 무관세, 무제한 곡물 유출, 무항세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자유무역은 전혀 자유롭지 않은 상태에서 확산되었던 것이다. 가장 악명 높은 불평등 조약은 아편전쟁 후에 영국과 청 사이에 체결된 난징조약이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36>

 

‘자유 시장’에 대한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고전주의 학파이다. “시장은 경쟁을 통해 모든 생산자를 감시하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두면 된다.” 장하준이 한 줄로 요약한 고전주의 학파의 핵심 주장이다. 고전주의 경제학파는 18세기 말에 시작되어 19세기 말까지 경제학의 주류를 이끌었다. 이 학파의 창시자는 애덤 스미스 (1723~1790) 이다. 고전주의 학파를 발전시킨 학자는 리카도(1772~1823), 세(1767~1832), 맬서스(1776~1834) 이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36 : 아담 스미스 (1723~1790)>

 

“고전주의 학파는 경제 주체들이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다 보면 사회적으로 이익이 되는 국부의 극대화라는 결과를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역설적인 결과는 시장에서 일어나는 경쟁의 힘 덕분에 가능하다. 생산자들은 이윤을 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더 싸고 더 나은 제품을 만들게 되고, 궁극적으로 최저 비용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어 국민 경제의 생산량을 최대화 한다. 보이지 않는 손 invisible hand이라고 하는 이 개념은 경제학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비유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스미스 자신은 <국부론>에서 이 개념을 한 번밖에 언급하지 않았고, 자신의 이론을 설명할 때 그다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p120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세(1767~1832)의 법칙은 일단 공급이 있으면 수요는 자연적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수요 부족에 의한 공급 과잉은 없고 따라서 시장은 스스로 균형을 유지한다는 이론으로, 이 법칙에 근거해서 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은 공급 중심의 경제 정책을 주장했다. 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은 실업 문제에 있어서도 이 원칙을 고수했는데, 전체적으로 장기간에 걸친 노동의 초과 공급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실업자는 결국 다른 일자리를 구하게 되기 때문에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이다. 당시 실업은 분업과 생산성 향상에 의해 구조적으로 야기되고 있었다. 하지만 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은 세의 법칙을 고수하며 모든 실업자는 ‘자발적 실업자’일 뿐이라고 했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다른 일자리를 찾지 않고 익숙하고 돈을 많이 주는 곳만 고집하니까 실업상태가 지속된다는 것이다. 오늘 들어도 참으로 귀에 익은 주장이다.

 

고전주의 학파는 정부가 보호주의나 규제 등 어떤 형태로든 시장을 제한하는 것에 반대했다. 리카도(1772~1823)는 비교 우위론을 만들어 자유 무역 논리를 더욱 강화했다. 예전에 고등학교에서 배운 기억이 나는데 비교 우위론에 대한 예시를 수치로 계산하여 입증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무척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비교 우위론의 함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비교 우위론에 의하면 후진국은 선진국이 만들지 않는 것만을 만들어야 한다. 선진국이 만드는 물건을 만들려고 하다간 비교 우위를 확보할 수가 없다. 선진국은 부가 가치가 높은 상품만을, 후진국은 선진국이 내버린 노동집약적 저 부가가치 상품만을 계속 만들어야 한다. 결국 후진국은 결코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없다. 참으로 합리적인 이론이다!

 

맬서스((1776~1834)가 고전주의 경제학자라는 사실은 최근에야 알았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느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 어쩌고 하는 말은 참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런데 이 말의 배경이 그렇게 냉혹한 이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몰랐다.

 

“ 맬서스는 구빈법이 빈곤을 장려(혹은 심지어 빈곤을 만들어 내기도)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인구에 대한 그의 일반적 분석에 기초한 것이다. 맬서스에 따르면 구빈법은 아이들을 부양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도록 한다. 그의 관점에서 식량 공급은 상대적으로 비탄력적이기 때문에 인구가 늘어나면 식량 가격이 상승하고, 이는 고용된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을 낮춰서 더 많은 빈곤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맬서스는 구빈법이 출생률을 상승시키고, 균형적인 실질임금을 낮추며, 영아 사망률을 상승시키는 것으로 간주한다. p79 <아담의 오류>”

 

언뜻 보기에는 200년 전이니까 통했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싶지만, <아담의 오류> 의 저자 던컨 폴리에 따르면 최근에도 미국에서 이와 유사한 논쟁이 있었다. 연방 복지 정책을 비판하는 보수주의자들은 복지가 실제로 빈곤을 만들어 내거나 최소한 빈곤 문제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장하준의 충고 하나를 새기고 싶다. 경제학은 가치 중립적인 혹은 객관적인 학문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 경제학은 정치경제학이었다. 정치경제학에서 정치를 떼어 낸 것은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이었다.

 

「경제학은 정치적 논쟁이다. 과학이 아니고, 앞으로도 과학이 될 수 없다. 경제학에는 정치적, 도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확립될 수 있는 객관적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경제학적 논쟁을 대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오래된 질문을 던져야 한다. “Cui bono 누가 이득을 보는가?” 로마의 정치인이자 유명한 웅변가였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말이다. <장하준의 정치경제학 강의 p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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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다로 나서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한국학 중앙 연구원>

 

조선 태종 때 그린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다. 원나라의 지도를 들여와 우리나라와 일본을 덧붙여 그린 것인데, 동양에서 그린 세계지도 중 남아있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되었다. 중국이 세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모양이 중화사상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 지도가 영토의 크기로는 엉터리지만 (그럼에도 세계지도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포르투갈이 희망봉을 발견하기 80여 년 전에 바다로 둘러싸인 아프리카 남단을 그렸다는 점에서 소중한 가치가 있다.), 문화와 경제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아주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15세기 초 세계의 중심은 중국과 이슬람, 인도 등 아시아였다. 서양은 동양의 문물에 열광하고 있었다. 유럽 귀족들은 동양의 향신료를 권력의 상징으로 향유했고, 유럽 상인들은 동양과의 교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획득했다.

 

유럽 상인들이 가장 눈독을 들였던 것은 후추, 정향, 육두구 등의 향신료였다. 유럽인들은 향신료를 동방 끝에 있다고 생각한 파라다이스로부터 강을 따라 흘러내려온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현재 15,000원 정도로 살 수 있는 후추가 당시 유럽에서는 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하니, 상인들의 욕망이 이해될 만도 하다. 향신료 무역으로 유럽 상인들은 수십 배에서 수백 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p253>

 

지중해는 동양의 문물이 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베네치아, 피렌체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지중해 무역을 통해 번성했다. 역사 이래 동서양의 교역로를 차지하려는 싸움은 끊임없었는데, 오스만제국이 비잔티움제국을 멸망시키고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차지한데다 프레베자 해전에 승리함으로써, 지중해는 완전히 오스만제국의 손으로 넘어갔다. 오스만제국은 베네치아에 교역 독점권을 주고 지중해를 엄격히 통제했다. 유럽 상인들은 검은 황금, 후추를 얻기 위해 새로운 길을 찾는 데 더욱 더 혈안이 되었다.  

 

   

 

15~6세기는 유럽인들이 “대항해 시대” 라고 부르는 시기다. 첫 항해를 시작한 것은 유럽의 서쪽 끝, 이베리아 반도의 작은 나라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은 100년 가까운 항해 끝에 인도 항로를 개척했다.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시아의 주요 길목에 요새를 세워,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들어가는 항로를 독점하려 애썼다.

 

두 번째 주자는 이제 막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중앙집권 국가를 세운 에스파냐 왕국이었다. 포르투갈에 의해 인도 항로가 막히자 새로운 항로가 필요했는데,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면 서쪽으로도 인도에 도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신반의하면서 콜럼버스를 지원한 에스파냐는 뜻하지 않게 아메리카 대륙을 차지하고 막대한 금은을 채굴하여 단숨에 유럽 최대의 강대국이 되었다.

 

콜럼버스가 도착한 곳은 아메리카의 서인도 제도였으니,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실제로 입증한 것은 30년 뒤의 마젤란 일행이었다. 3년의 항해 끝에 마젤란은 죽었지만 살아남은 마젤란 일행은 에스파냐에 돌아 올 수 있었다. 첫 세계 일주였다.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향신료에 대한 욕망만으로 그 험한 바닷길을 개척할 수는 없다. 송나라의 발명품인 나침반, 화약 등이 원나라를 통해 전해졌고, 유럽은 과학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상선에 대포를 싣고 동양을 향해 원거리 항해에 나설 수 있었다. 이슬람 상인과 아시아 상인이 평화롭게 오가던 바다는 이제 화염과 포성에 휩싸였다. 교역이 아니면 죽음이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인도를 찾아 떠난 콜럼버스로 인해 대재앙을 당한 곳은 아시아가 아니라 아메리카였다. 이슬람, 인도, 중국이 버티고 있는 아시아는 당시 세계 경제의 70~80%를 차지하고 있는 강국이었다. 포르투갈은 인도 각지에 거점을 마련했지만 내륙으로 침범하지는 못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아스텍과 잉카제국은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 못했고 절멸했다. 여전히 청동기 문명권 아래 있던 원주민들은 불과 수백 명의 침략자들에 의해 패배했다. 총칼 보다 더 큰 재앙은 에스파냐인들과 함께 도착한 천연두, 홍역 등의 전염병이었다. 면역력이 전혀 없었던 원주민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고, 에스파냐 침략 100여년 만에 원주민 인구의 90% 이상이 사망하였다. 문명과 함께 종족 자체가 사라져 갔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거대한 비극은 바다 건너 또 다른 대륙의 비극을 잉태하였다. 이후 아메리카 대륙에서 플랜테이션 사업을 벌이게 되는 유럽 각국은 노동력 확보를 위해 아프리카 원주민을 노예로 잡아오기 시작했다. 90%의 아메리카 원주민이 사라져 간 곳에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채워 넣기로 한 것이다.

 

 

 

 

2. 유럽의 새 강자, 영국과 프랑스

   

 

 

대항해 시대가 열리고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자 유럽 각국은 앞 다투어 항해에 올랐다. 해상 무역의 패권과 식민지 지배권을 놓고 유럽은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벌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p260>

 

16세기는 라틴아메리카의 은광을 차지한 에스파냐가 패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번영은 오래가지 못했고, 17세기 전반은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네덜란드의 부르주아들이 이끌어 갔다. 네덜란드는 일종의 화물 운송업을 통해 유럽 최대의 해운국으로 부상했다. 기술혁신으로 저가의 상선을 건조하고 유럽 어느 나라의 배보다 싼 운송료로 대서양을 오가는 화물을 독점했다. 하지만 16세기 중반부터 눈부시게 성장한 영국이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꺾고, 17세기에는 항해법으로 네덜란드를 견제하면서 해상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17세기 후반에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절대왕정을 구축한 프랑스와 영국이 각축전을 벌였다. 18세기에 영국은 7년 전쟁의 와중에 인도와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에 승리함으로써 대서양의 주인이 되었다. 대서양을 통한 삼각무역은 18세기 영국 산업혁명의 밑거름이 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해상 무역으로 성장한 부르주아들과 중앙집권화를 추구하는 국왕이 서로 협력해 나가는 과정에서 서유럽은 절대왕정 체제를 수립하였다.

 

“절대왕정 체제는 중세 봉건 체제와 근대 국민국가 체제 사이에 성립한 일종의 과도기 체제입니다. 절대왕정 체제를 규정하는 요소는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는 관료와 상비군이고, 둘째는 체제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인 왕권신수설, 그리고 셋째는 넓은 의미의 경제정책인 중상주의입니다. <역사 고전 강의> p311"

 

영국의 절대왕정 시기는 헨리7세(1485~1509)에서 찰스1세(1625~1649) 까지고, 프랑스에서는 루이 14세 때 절대왕정 체제가 절정을 이루었다가 프랑스 혁명으로 끝났다. 동유럽은 서유럽보다 100년 가까이 뒤늦은데, 독일에서는 17세기 후반에 성립해서 19세기까지, 러시아에서는 1917년 러시아 혁명 때까지 절대왕정 체제가 이어졌다.

 

절대왕정의 꽃은 프랑스의 루이 14세로 알려져 있다. “짐이 곧 국가다”라고 일갈한 태양왕 루이 14세는 진짜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듯한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다. 귀족과 성직자를 억누르고 부르주아를 지원하고 해외 식민지를 건설하고 막강한 군대를 육성하였다.

 

그러나 절대왕정 체제는 18세기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의 모체로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영국의 절대왕정 체제에 더욱 관심이 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역사 고전 강의>를 통해 영국 절대 왕정의 구체적인 모습을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하자.

 

“절대 왕정 시대를 연 헨리 7세는 귀족들이 보유하고 있던 사병을 철폐하고 귀족들을 관료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관료와 상비군이라는 절대왕정 체제의 첫째 요소가 여기서 발견됩니다. 이 과정에서 귀족들은 관료와 군대의 장교가 되었고 격렬하게 저항하는 귀족들은 처벌을 받았습니다. 헨리 8세는 ‘수장령’을 통해 직접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면서 잉글랜드 전역에 대한 왕의 지배를 강화했습니다. 그런데 잉글랜드 왕정은, 왕이 지방의 지사를 임명해서 파견했던 프랑스처럼 강력하지 않아서 귀족의 지배력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헨리 8세는 귀족에 맞설 세력을 키웠는데, 이들을 ‘젠트리gentry'라고 부릅니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젠트리는 평민 출신이면서 땅을 가진 부농입니다. 헨리 8세는 이들 중에서 치안 판사를 임명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치하는 잉글랜드의 황금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적극적으로 시행된 정책 기조가 중상주의입니다. 이때부터 잉글랜드는 본격적으로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는데, 상징적인 사건이 1600년에 동인도 회사 설립입니다. 이후 잉글랜드의 절대왕정 체제는 잉글랜드 내전(청교도 혁명) 과정에서 처형당한 찰스 1세를 끝으로 종지부를 찍습니다. 그런 다음 잉글랜드는 입헌왕정 국가로 전환됩니다. p312”

 

이 과정에서 농노가 해방되고 독립 자영농이 생겨났다. 그 외에도 귀족의 직영지를 임대해서 경작하는 부유한 농민, 즉 차지농이 있었다. 귀족은 정치적인 지배권을 행사해서 독립 자영농의 토지를 탈취하고 그 땅을 차지농에게 임대해서 돈을 벌었다. 땅을 뺏긴 독립 자영농은 부랑자가 되거나 젠트리 밑으로 들어가 농업 노동자가 되었다. 이 과정은 인클로저 운동이 일어나면서 가속화 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서유럽의 절대왕정을 대표하는 왕들이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유럽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에스파냐로부터 네덜란드의 독립을 지원하고, 영국 해적을 이용하여 에스파냐의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격파하였다. 이 승부의 결과 에스파냐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영국은 세계 제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흔히 말하는 “해가지지 않는 나라”의 영광을 구가한 것은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때이지만, 지금도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여왕은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 1세라고 한다. 이 시기 영국은 셰익스피어(1564~1616)를 배출했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유럽 절대왕정의 상징이다. 엘리자베스1세 시대보다 약 100년 뒤에 프랑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프랑스는 ‘국왕 중심의 강력한 중앙 집권화, 상공업 보호와 군대 육성’을 특징으로 하는 절대주의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무리한 전쟁을 계속하면서 재정이 악화되고, 루이14세의 대표적 실정으로 꼽히는 낭트칙령 폐지로 인해 위그노 부르주아들이 대거 탈출하면서 프랑스 경제는 급격히 기울었다.  

 

 

 

 

3. 서유럽을 따르는 중 ․ 동부 유럽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동유럽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옛 소련의 영향권 아래 있던 나라들이란 이미지만 어렴풋이 있지 역사뿐 아니라 현재의 정치경제 상황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별로 없다. 한마디로 서유럽에 비하면 변방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다지 선생님의 강의에는 동유럽에 러시아를 포함해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이 속해 있다. 동유럽은 서유럽에 비해 대체로 늦은 시기에 절대왕정을 확립하기 시작했으며, 그 주체도 다르다. 서유럽의 경우, 대서양 무역으로 부상한 부르주아와 절대왕권을 추구하던 국왕이 손을 잡고 귀족 세력을 적절히 제어하며 절대왕정 체제를 수립했다면, 바다와는 멀리 떨어져 내륙에 자리 잡고 있던 동유럽은 부르주아 계층이 성장하지 못했다. 동유럽 국가들은 계몽군주가 귀족으로부터 재정을 지원받으며, 관료제와 상비군 체제 등을 확립해야 했기 때문에 서유럽과 달리 귀족의 특권이 지속되었고 농노제는 오히려 강화되었다. 시민계층이 성장하지 못함으로 인해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도 그만큼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4. 유럽을 살찌운 대서양 무역

 

16세기 이후 유럽 경제는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16세기 라틴아메리카의 은과 17~18세기 삼각무역은 유럽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다. 서유럽이 이루어낸 17세기 과학혁명과 18세기 산업혁명은 대서양 무역이 가져다 준 경제적 성과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비롯한 식민지의 희생 없이는 서유럽의 근대화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p270>

 

에스파냐의 지원을 받아 대서양 항로를 개척한 콜럼버스는 서인도제도로의 2차 항해 때 사탕수수 등의 열대작물을 가지고 갔다. 처가가 아프리카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인도제도가 사탕수수 재배에 매우 좋은 기후와 토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현재의 도미니카 공화국에 남미 최초의 사탕수수 농장을 건설했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에서 포토시를 비롯한 대규모 은광이 발견되면서 에스파냐는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두어들인 것은 영국이다. 바베이도스를 비롯한 카리브해 지역에 영국은 수많은 사탕수수 농장을 건설하였다. 유럽은 설탕의 단맛에 푹 빠졌고 설탕의 수요는 급격히 늘어났다.

 

설탕 생산의 최대 문제점은 노동력이었다. 사탕수수 재배부터 설탕 제조 공정까지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유럽인들이 침략한지 100년 만에 아메리카 원주민의 인구는 10% 이하로 급감했다. 90% 이상이 학살당하거나 전염병으로 죽었다. 유럽인들은 놀랍게도(?) 혹은 당연한 발상이었을까? ... 아프리카 흑인들을 사냥해서 노예로 들여오기 시작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인종을 뒤바꿔 버린 것이다. 설탕이라는 상품이 새로운 상품인 노예를 만들어냈다.

 

유럽의 강국들은 너도나도 노예 무역에 뛰어들었다. 설탕과 노예를 중심으로 유럽과 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가 하나의 무역권을 형성하였다. 이른바 삼각무역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삼각무역은 쌍방향이 아니라 한 방향으로 상품이 이동한다. 총 등의 공산품을 싣고 유럽에서 출발한 상선은 아프리카에 도착해 총을 주고 노예를 사들였다. 노예를 싣고 아메리카로 향한 상선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노예를 팔고 설탕과 은을 싣고 다시 유럽으로 돌아왔다. 유럽의 별 쓸모없는 공산품은 삼각무역을 통해 설탕과 은으로 교환되어 유럽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었다.

 

그런데 18세기까지 유럽의 은이 최종적으로 흘러들어간 곳은 아시아였다. 유럽은 아시아로부터 향신료나 차를 사들이고,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로부터 착취한 은을 지불하였다. 아시아의 상품들이 유럽에서 인기를 끌면 끌수록 상인들은 돈을 벌어도 유럽 경제는 적자를 면하지 못하였다. 명․ 청 시기 중국에 은이 흘러넘친 것은 유럽과의 교역을 통해 들어온 은 때문이었다.

 

1840년 영국이 세계에서 가장 더러운 전쟁이라고 불리는 아편전쟁을 일으킨 것은 이런 배경 아래였다. 청과의 무역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팔고 그 수익으로 차 등을 수입했던 것이다. 청이 아편 거래를 금지하고 강력 대응하자 영국은 대포로 응수했다. 1,2차 아편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돌아가고 이때부터 청은 서양열강의 ‘밥’으로 전락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삼각무역으로 유럽은 근대 자본주의의 발판을 마련했다. 은이 대량으로 유입하면서 물가가 치솟았고 상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대서양 무역에 많은 투자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주식제도가 만들어지고, 항해의 위험성에 대비해 보험이 탄생했다.

 

영국의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리버풀은 대규모 노예 무역항으로 성장했고, 인근의 맨체스터 등이 공업 도시로서 호황을 누렸다. 리버풀은 인근 도시에서 생산한 총, 모직물 등을 삼각 무역에 연결하였고, 여기서 얻은 이익을 다시 이 도시의 공장에 투자하였다.

 

이런 과정 끝에 드디어 맨체스터의 방직기계가 면직물을 대량으로 생산해 낼 수 있었다. 영국이 산업혁명에 성공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눈부신 산업혁명의 종자돈은 바로 아프리카 흑인들의 피땀과 희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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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불교이다. 기독교에 대한 이해 없이 서양사를 공부하기가 어려운 것처럼 불교의 흐름을 모르고 한국사를 공부하기가 쉽지 않다.

 

석가모니는 기원전 563년 인도에서 태어났다. 인도는 브라만교를 믿는 엄격한 계급차별 사회였다. 석가모니는 카스트제도에 대항해 누구나 도를 닦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평등사상을 전파했다.

 

불교는 기원전 3세기경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에 의해 국가종교로 발전하며 널리 전파되었다. 당시 불교는 개인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상좌부 불교로 바닷길을 통해 주로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었다.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파된 불교는 대승불교이다. 기원후 100년 무렵 북인도를 차지한 쿠샨왕조는 중국과 서아시아의 연결 통로를 차지하며 세력을 떨쳤다. 이 무렵 불교는 개인의 해탈이 아니라 더 많은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는 사명을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불교 신앙을 이끄는 승려들의 교단 조직도 생기고, 불교 경전을 연구하고 교리를 가르치는 강의도 열렸다. 대승불교는 비단길을 통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삼국 중 고구려와 백제는 4세기 소수림왕과 침류왕 때 각각 불교를 수용하였다. 4세기 중국은 위진남북조 시대로, 북부의 전진이 승려 순도를 고구려에, 남부의 동진이 인도 승려 마라난타를 백제에 보내 각각 불교를 전파하였다. 신라는 5세기 눌지 마립간 때 고구려의 묵호자가 불교를 가져왔으나, 6세기 법흥왕 때에 와서야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공인될 수 있었다.

 

석가모니의 불교는 평등사상을 중심으로 하였으나, 삼국시대 불교는 왕권 강화의 하나로 이용되었다. 군장국가 혹은 연맹왕국 단계의 국가를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영토 확장, 율령, 세습 체제를 구축했을 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일체감을 부여하는 불교의 역할이 무엇보다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크게 교종과 선종으로 나눌 수 있다. 교종은 경전을 중심으로 한 지식을 강조하고, 선종은 참선을 통한 깨달음을 강조한다. 지식에 대한 접근성이 일부 지배층에 한정되었던 고대에 교종은 왕권강화와 중앙집권화에 기여했다. 반면, 선종은 누구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평등사상에 기초하고 있어 왕권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선종은 기존권력에 반기를 든 반란세력 혹은 혁명세력에게 인기가 높았다.

 

초기 우리나라에 들어온 불교는 교종이 중심이었고, 선종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기 전후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던 중기에는 선종이 별 인기를 끌지 못하다가, 신라 하대에 와서 지방의 호족 세력을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선종은 풍수지리와 함께 고려건국 세력의 이데올로기적 구심으로 작용하였다.

 

 

1. 원효

  

 

<한국사 능력 검정 시험>

 

삼국통일 전후로 교종은 다섯 개의 분파로 나누어졌다. 통일 전 계율종과 열반종이 개창되었고, 통일 후에는 법성종, 화엄종, 법상종이 개창되어 5교가 성립되었다. 교종은 의례적, 형식적, 지식추구적인 경향을 띠어 귀족에게 신봉되었다. 이 중 화엄종이 귀족층에서 가장 유행하였다.

 

원효(617~686)는 법성종을 창설하였으나, 교종을 통합하려 노력하였다. 원융회통, 화쟁 사상, 일심 사상 등이 불교 통합 작업의 결과인데, 다양한 사상이 모두 하나의 마음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한국사 능력 검정 시험>

 

원효는 불교 대중화로도 유명하다. 왕실과 귀족 중심의 불교를 대중 불교로 확장하고 정토신앙을 도입하였다. 그는 ‘나무아미타불’ 즉 아미타불에 귀의한다는 염불만으로도 죽어서 극락정토에 갈 수 있다고 했다. 원효는 무애가를 지어 널리 퍼뜨렸다. 무애사상이란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란 말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무애의 자유는 그의 사생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인으로 설총이라는 아들까지 두었다.

  

 

2. 의상

 

 

 <한국사 능력 검정 시험>

 

원효가 서민적이라면 의상(625~702)은 귀족적이다. 둘이 함께 당나라로 떠나다 원효는 해골 물 한 바가지로 돌아오고 의상만 당나라에 갔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의상은 당나라에 가서 화엄의 이치를 깨닫고 돌아와 부석사를 창건하고 해동화엄종의 시조가 되었다.

 

 

   <한국학 중앙 연구원 : 화엄일승법계도>

 

화엄 사상의 특징은 현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서로 의존하고 관계가 있다는 연기緣起설에 있다. 연기緣起는 서로가 걸림 없이 통하고 서로 거듭되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언뜻 이해되지 않는 어려운 말이나 모든 것이 연(인연)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 정도로 알면 되지 않을까.. 여하튼 여기서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가 나온다.

 

의상도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실천수행을 강조했다. 원효가 아미타 사상인데 반해 의상은 관음사상을 강조했다. 의상은 낙산사를 창건하여 그 주존으로 관음불을 모셨다.

 

 

  

<한국사 함께 공부한 지인이 그린 것> 

 

선종은 삼국통일 즈음에 들어왔으나 신라하대에 와서야 지방의 호족세력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다. 불경의 습득보다는 참선을 중시하는 선종은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부처가 곧 왕과 동일시되던 신라사회에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신라 하대에 장군이나 성주를 자칭하며 새로운 나라를 꿈꾸던 호족들에게는 매력적인 사상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승려 도선은 풍수지리설을 들여와 신라는 이미 국운이 다했다고 주장했는데, 풍수지리설은 선종과 결합하여 더욱 폭발력 있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였다.

 

 

 

  <한국학 중앙 연구원: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 승탑>

 

호족의 지원으로 성장한 선종은 지방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9산 선문을 성립하였다. 산 속에서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였다. 신라 하대에서 고려 초까지 선종과 함께 승탑이 유행하였다. 탑은 원래 부처의 무덤인데, 깨달음을 얻은 누구나 부처이기 때문에 승려들의 사리를 모신 탑이 성행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고려에 와서 완성되었다. 태조 왕권은 훈요십조를 통해 연등회와 팔관회를 성대히 치를 것을 당부했다. 태조 때 실시된 왕사, 국사 제도와 승록사는 광종 때에 와서 더욱 강화되었다. 광종은 과거제를 시행하면서 승과를 포함시켰다.

 

고려 초기에는 여전히 선종이 유행하였으나 왕권이 점차 안정되면서 왕권 강화에 유리한 교종이 세력을 넓혀 나갔다. 광종 때의 승려 균여는 귀법사를 중심으로 화엄종을 성행시켰다. 문벌귀족들도 교종을 지원하였다.

  

 

3. 의천

 

  <한국사 능력 검정 시험>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은 문종의 아들이다. 왕자 출신의 입지 덕분에 송, 요, 일본 등 각지에서 방대한 규모의 불교 서적을 수집하고 『신편제종교장총록』이라는 목록을 만들었다.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이 목록에 따라 교장을 인쇄하였다. 교장은 불경에 대한 해설서이다.

 

의천 당시의 고려 불교계는 교종과 선종의 대립이 첨예하였다. 의천은 교종과 선종을 통합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귀족출신인 의천은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통합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교관겸수를 주장하였다. 교관겸수는 불교의 이론적 가르침인 교敎와 실천수행 방법인 관觀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사상이다. 이에 앞서 의천은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5교를 통합한 연 후에 다시 교종과 선종을 통합하려 했던 것이다.

 

의천은 중국에서 천태교학을 연구하고 돌아와 국청사를 완공하고 해동천태종을 열었다. 선교의 화합을 도모해 국론을 통일하고 통치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4. 지눌   

 

 

<한국사 능력 검정 시험>

 

지눌(1158~1210)은 무신 집권기에 활동한 승려이다. 문벌귀족을 누르고 정권을 잡은 무신세력은 선종을 강력 후원하였다. 그러나 교종과 선종은 의천의 사후에 다시 분열하여 대립하고 있었다.

 

   <한국사 능력 검정 시험>

 

지눌은 타락한 불교를 개혁하기 위해 결사운동을 전개하였다. 지눌은 수행공동체를 결성하고 <권수정혜결사문>을 발표했다. 처음에는 경상도 팔공산 자락의 거조암에서 시작했으나, 십 수 년 후에 조계산 송광사로 옮겨 결사운동을 지속하였다. 사람들이 몰려들자 송광사를 중창하고 이름을 수선사로 바꾸었다. 우리가 지눌의 불교개혁을 수선사 결사운동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눌은 정혜쌍수定慧雙주장했다.이란 마음을 집중하여 고요하게 하는 것이며, 혜란 지혜를 닦는 것이다. 정과 혜는 별개가 아니라 반드시 ‘함께 닦아야 한다.’ 지눌이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기 위해 정혜쌍수를 내세운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의천과 달리 지눌은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통합하려 하였다. 정혜쌍수의 바탕이 된 돈오점수도 깨달음을 먼저 얻은 연후에 계속해서 연마할 것을 주장한다.

 

지눌은 선은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씀이라고 정의하며, 이를 원래 하나인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는 논리로 삼아, 조계종을 창시하였다.

 

 

5. 그 외  

 

요세는 수선사 결사와 대비되는 백련사(만덕사) 결사를 주창하였다. 천태종에서 시작해서 지눌의 권유로 참선에 참여하였으나, 정혜定慧가 무지한 일반대중이 수행하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천태종으로 돌아와 독자적인 결사운동을 전개하였다. 요세는 법화사상을 바탕으로 참회하고 염불하면 극락왕생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요세의 법화사상은 민간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백련사는 강진 만덕산에 위치한 만덕사를 개칭한 것이다.  

 

지눌의 대표 제자는 혜심이다. 그는 스승보다 더욱 참선에 치중했다. 혜심의 역사적 의의는 유불 일치설을 내세움으로써 불교국가인 고려가 유교국가인 조선으로 이행하는데 있어 사상적 거부감을 완화시킨 것이다. 혜심은 조계종의 2대 종사로 알려져 있다.

 

 

조선은 억불숭유의 나라이다. 조선 건국의 주역 정도전은 『불씨잡변』을 써서 불교를 비판했고, 태조 때 도첩제를 실시하여 승려가 되는 길을 엄격히 제한했다. 태종은 사원전을 몰수하고, 세종은 선교 36개 이외의 사찰을 철폐했다. 그러나 민간이나 심지어 왕비를 중심으로 하는 궁궐 여인들은 여전히 불교를 숭상하기도 했다. 특히 세조는 스스로 불교에 애착을 드러내어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건립하고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경을 간행하기도 했다. 수양대군 시절에는 세종의 명으로 석가모니의 일대기인 『석보상절』을 간행하였다. 명종 때에는 수렴청정을 하던 문정왕후가 불교를 중흥시키려 노력했다. 보우를 등용하여 승과를 부활하면서 집권 사대부와 마찰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양반지주나 부농거상들이 후원한 사찰들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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