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이야기 - 라틴어 원전 번역, 개정판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오비디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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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는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짝퉁이다. 기원전 27년 로마는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이행했다. 옥타비아누스 스스로는 프린캡스 즉 제1의 시민으로 만족한다고 공언했지만, 원로원은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바쳤고,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스』를 헌정하여 옥타비아누스를 신격화 했다.  이 시대에 로마에서 쓰여진 신화 모음집이  『변신 이야기』다.  신화 중에서도 metamorphosis- 變身을 주제로 한 이야기를 골라 모은 것이다. 로마 신화라는 것의 대다수가 희랍 신화를 그대로 가져온 것으로 명칭이 라틴어로 바뀌어 있어 오히려 혼란을 주기도 한다.  그래도 『변신 이야기』는 놀라우리만큼 재미있다.

 

 

신화에 관해 읽거나 들어본 갖가지 이야기들이 모두 모인 것도 같고, 셰익스피어나 카프카도 이미 여기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당연히 호메로스의 아킬레우스와 오뒷세우스도 짝퉁스러운 이름으로 다시 등장한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아스도 다시 나타나 위대한 옥타비아누스의 출현을 예언한다. 이 모든 짜집기와 짝퉁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변신 이야기』는 고전일 수밖에 없다.  문장은 유려하고, 비유는 탁월하고, 교훈은 가슴을 때린다.

 

신화들이 으레 그렇듯 인간의 휘브리스는 신의 네메시스를 부른다. 신을 넘보지 않는 인간은 무시무시한 신의 복수로부터 안전하겠지만 어쩌면 짐승과 같을지도 모른다. 신화(神化, deification)를 향한 욕망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신화를 포기한 인간은 물화(物化, reification)하여 한갓 동물이 될 뿐이다.

 

신과 인간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 변신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때로는 신의 응징에 의해, 때로는 신의 연민에 의해 인간은 바위로도 새로도 하늘의 별로도 변신된다. 무엇으로 변신되건 변신을 유발한 인간의 욕망은 애처롭고도 위대하다. 비록 오만의 극치에서 파멸한다 해도 신과 나란히 실력을 겨루려는 자부심, 신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당당함, 금지된 곳으로 오르려는 불타는 갈망을 우리는 '인간다운' 이라 부를 것이다.  오비디우스는  맺는말을 통해  '인간다운' 욕망을, 신화(神化, deification)에의 갈망을 예언으로 노래한다.

 

 "이제 내 작품은 완성되었다. 이 작품은 윱피테르의 노여움도,

 불도, 칼도, 게걸스러운 노년의 이빨도 없앨 수 없을 것이다.

 원한다면, 오직 내 이 육신에 대해서만 힘을 갖는

 그날이 와서 내 덧없는 한평생에 종지부를 찍게 하라. 

 하지만 나는, 나의 더 나은 부분은 영속하는 존재로서

 저 높은 별들 위로 실려 갈 것이고, 내 이름은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로마의 힘에 정복된 나라가 펼쳐져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나는 백성들의 입으로 읽힐 것이며, 시인의 예언에

 진실 같은 것이 있다면, 내 명성은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이천 년을 넘어 우리와 함께 있는 오비디우스의 예언은 진실이 되었으니, 불멸의 이름을 획득한 시인은 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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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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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기원전 12~13세기 경에 실제한 것으로 추정되는 트로이아 전쟁에 관한 서사시이다.  서사시의 배경은 영웅들이 활약하는 청동기 미케네 문명의 마지막 시기로, 이 전쟁 직후 미케네 문명은 남하한 도리아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철기 시대를 맞은 희랍 세계는 이른바 암흑기를 거쳐 기원전 8세기 무렵부터 고전기 희랍문명을 꽃피우는 폴리스 시대로 접어들었다. 

 

호메로스의 실존 여부와 실존 시기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기원전 8세기 무렵 호메로스가  400년 전에 있었던 트로이아 전쟁에 관해 구전되던 전설을 서사시의 형태로 완성한 것이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라고 알려져 있다. 

 

트로이아 전쟁 10년을 다룬 , 물론 실제로는 10년 중 단 몇일에 관한 노래이지만, 『일리아스』가 영웅들의 대서사시인 반면 전쟁을 끝낸 오뒷세우스가 집으로 돌아기까지 겪어야 하는 10년 동안의 고난을 노래한 『오뒷세이아』가 영웅성을 상실한 현실적 인간들의 이야기에 가까운 것은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이행하는 시대적 배경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청동기 시대는 값비싼 전차를 타고 번쩍이는 무구들을 자랑하며 신들의 도움으로 전쟁을 하는 귀족 영웅들의 시대이지만 철기 시대는 평민들이 전쟁에 참가하여 밀집군단을 이루어 적을 밀어내는 인간들의 단결과 인내와 지혜가 요구되는 시대이다.

 

해설 (p773) 에는 "『일리아스』의 주인공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분노 때문에 수많은 영웅들을 희생시킴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 데 반해, 『오뒷세이아』의 주인공 오뒷세우스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지혜와 끈기로 운명을 개척해나감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다. 그러므로 『일리아스』가 오직 용기와 명성만을 추구하던 옛 가치관을 이상화했다면 『오뒷세이아』는 현실에 유연하게 대처해나가는 새 시대의 가치관을 이상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 두 작품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일리아스』는 영웅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한다. 1권 1행부터 7행까지가 서사시의 내용을 압축하고 있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아카이오이족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숱한 영웅들의 굳센 혼백을 하데스에게 보내고

 그들 자신은 개들과 온갖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한 그 잔혹한 분노를!

 인간들의 왕인 아트레우스의 아들과

 고귀한 아킬레우스가 처음에 서로 다투고 갈라선 그날부터

 이렇듯 제우스의 뜻은 이루어졌도다. "

 

 

아킬레우스가 그들의 지도자인 아가멤논 (아트레우스의 아들)과 다투고 어머니 테티스 여신에게 아카이오이족을(자기편) 패배하게 해달라고 조른 이유는 '명예' 때문이다. 아가멤논이 자신의 명예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일리아스』 에서 명예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전쟁에서 약탈한 여자, 청동 무구, 전차, 세발 솥 등의 물질로 형상화 된다. 아가멤논이 볼이 예쁜 브리세이스를 데려간 것은 여자를 뺏어간 것이 아니라 아킬레우스를 모욕하고 그의 명예를 짓밟은 것이다.  볼이 예쁜 브리세이스는 인근의 도시를 파괴하고 데려온 노예로, 전쟁에서 약탈한 사람과 재물은 공로에 따라 배분되기 때문에 그 자체가 '명예의 선물' 이다.

 

'명예의 선물'을 빼앗긴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함선에 드러누워 트로이아인들과의 전투에서 아카이오이족의 영웅들이 죽어가고 그들이 타고 온 함선들이 불타는 데에도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동료 영웅들이 찾아와 간절히 부탁을 해도 분노를 거두지 않는다. 아카이오이족이 모두 전멸하여 자신이 아니고는 아카이오이족을 구원할 영웅이 없다는 것이 입증되지 않는 한 전투에 참가할 마음이 없다. 명예는 이 세상 전체와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아킬레우스가 마음을 돌린 것은 자신의 머리만큼이나 소중한 파트로클로스를 잃고 난 이후이다. 브리세이스를 빼앗겼을 때의 분노에 비할 수 없는 펄펄 끓는 분노로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를 죽인 헥토르를 죽이고 그의 시신을 모욕한다.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이 아킬레우스에게 진정한 명예를 선택하게 한 것이다. 신들은 아킬레우스가 태어났을 때 이미 두 가지 운명 중 하나를 선택하게 예정해 놓았다. 

 

"나의 어머니 은족의 여신 테티스께서 늘 말씀하시기를,

 두 가지 상반된 죽음의 운명이 나를 죽음의 종말로 인도할

 것이라고 하셨소. 내가 이곳에 머물러 트로이아인들의 도시를

 포위한다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막힐 것이나 내 명성은

 불멸할 것이오. 하나 내가 사랑하는 고향땅으로 돌아간다면

 나의 높은 명성은 사라질 것이나 내 수명은 길어지고

 내게 죽음의 종말이 서둘러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오."

 (9권 410~416행)

 

볼이 예쁜 브리세이스를 빼앗긴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명예 때문이지만 어쩌면 주어진 운명에서 수명을 선택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약탈에 대한 댓가로 주어진 명예는 사적인 명예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지 않을까.

 

진정한 명예는 '자신을 희생하여 위기에 빠진 공동체를 구하는 것'에 있다.  철없는 분노로 머리만큼 사랑하는 파트로클로스를 잃고 나서야 아킬레우스는 공동체를 구하는 것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지키고 명예를 얻는 길임을 깨닫는다. 깨달음은 그저 오지 않는다. 자신의 반을 잃고 나서야 겨우 얻을 수 있는 것이 깨달음, 지혜이다. 그 겪음을 회피하고는 결코 지혜를 얻을 수 없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파테이 마토스'에 대한 기나긴 가르침이다.  

 

 

 

 

 

자기 희생으로 얻어진 아킬레우스의 명예는 적에 대한 관용이 보태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머리만큼 소중한 파트로클로스의 복수에 불타 올랐던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마지막 애원도 싸늘하게 거절하고 그의 시신을 전차에 매달아 끌고 다니다 개의 먹이로 던져주려고 한다.

 

"이 개자식아! 무릎이나 어버이를 들먹이며 내게 애원하지 마라.

 그대의 소행을 생각하면 너무나 분하고 괘씸해서

 내 손수 그대의 살을 저며 날로 먹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니 그대의 머리에서 개를 쫓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설령 그들이 열 곱절 또는 스무 곱절이나 되는 몸값을 가져와

 여기서 달아주고 거기다 더 많은 것을 약속한다 해도

 아니, 설령 다르다노스의 후예인 프리아모스가 그대의 몸무게만 한

 황금을 달아주라고 명령한다 해도 그대의 존경스러운 어머니는

 결코 몸소 낳은 자식인 그대를 침상에 뉘고 슬퍼하지 못할 것이며

 개 떼와 새 떼가 남김없이 그대를 뜯어먹게 하리라!"

 

그러나 트로이아의 왕인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가 단신으로 찾아와 아들의 몸값을 받고 시신을 돌려 달라고 애원하자, 아킬레우스는 고향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의 아버지 역시 예정된 운명에 따라 다시는 사랑하는 자식인 자신을 볼 수 없을 것이며, 여기 무릎 꿇고 애원하는 프리아모스처럼 슬퍼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아버지를 통해 적개심이 아니라 공감할 수 있는 인간애를 느끼며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인식에 이른다. 아킬레우스의 명예는 사적인 명예에서 시작해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공적인 명예, 더 나아가 인류 전체를 포용하는 명예로 완성된다.  영웅들을 그리는데 한없이 편파적인 『일리아스』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전으로 읽힐 수 있는 이유는 이 마지막 공감과 화해에 있을 것이다.

 

 

『일리아스』에는 수많은 영웅들이 나온다.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지 헤아려 볼 엄두도 나지 않는다.  이 영웅들은 대개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기보다 '~의 아들' 로 불린다. 아킬레우스도 '펠레우스의 아들'로 더 자주 불린다. 아가멤논은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이아스는 텔라몬의 아들, 디오메데스는 튀데우스의 아들, 오뒷세우스는 라에르테스의 아들이다. 심지어는 신들의 왕인 제우스조차도 '크로노스의 아들'로 즐겨 불린다.  

 

 

 

희랍인에게 이름은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 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이었을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에 의해 평가받기 때문이다. 명예로운 아버지를 둔 아들은 명예롭게, 비굴한 아버지를 둔 아들은 비굴하게 여겨질 것이다.

 

이름에 의해 인간은 불멸을 획득한다.  아버지는 아들에 의해, 아들은 그의 아들에 의해 그 이름을 불리며 죽음 이후에도 살아간다. 해마다 나뭇잎은 돋아나서 떨어지고 새 잎으로 갈리지만 나무는 그 세월 속에 둥치를 늘려 가듯이 육신은 죽어도 이름은 영원토록 이어지며 명예에 명예를 더하는 것이다. DNA가 육신을 바꿔가며 영원히 유전되는 것은 모든 생물에게 공통이지만 이름으로 불멸을 획득하는 것은 인간뿐이다.

 

아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부르는 공동체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는 그 이름을 아름답게 남기는 것, 명예일 수밖에 없다. 희랍인은 '자신을 희생하여 위기에 처한 공동체를 구하는 것'에 최고의 명예를 주었다.

 

폴리스의 시민들은 『일리아스』의 영웅들을 노래하며, 끊임없이 시민들의 덕성을 길렀을 것이다. 기원전 5~6세기에 만든 도기들에는 서사시의 장면들이 세세히 그려져 있다. 포도주를 희석하는 희석용 동이에도, 술잔에도, 항아리에도, 접시에도 피할 수 없는 운명에 굴하지 않는 당당하고 늠름한 영웅들의 모습이 생생히 살아있다. 그들의 식탁과 잔치에 올랐을 도기들이 보여주는 영웅들이 그들이 되고 싶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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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 그리스어 원전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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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최초의 서사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는 묵직한 돌처럼 가슴 한켠을 누르고 있었다. 이 책들을 입에 올릴 때마다 사기를 치는 느낌도 있었다. 읽어 보지도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죄의식 같은 것을 갖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은 갚지 못한 빚이다. 인문학 강좌가 늘어나면서 읽지 않은 고전들에 대해 듣고 말할 기회도 점점 늘어난다. JTBC의 <차이나는 클라스> 에도 EBS의 <지식의 기쁨>에도 아킬레우스와 오뒷세우스가 되풀이 등장하여 신과 인간과 운명을 노래한다. 

 

내가 호메로스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강유원의 『인문고전강의』를 통해서였다. 'in medias res' - 사건의 한가운데로 돌진하는 서사시의 전개방식부터 흥미로웠고, 무엇보다 이들 영웅의 시대가 추구하는 가치관이 놀라웠다.

 

불멸하는 신의 혈통과 필멸하는 인간의 혈통을 반반씩 물려받은 영웅이란 존재는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플라톤의 에로스처럼 메탁시, 중간자이다. 불멸의 신성을 추구하지만 인간의 필멸성에 발목잡힌 영웅은 짧은 인간의 수명마저 채우지 못하고 자신을 희생하여 위기에 빠진 공동체를 구해야 한다. 영웅의 불멸성은 바로 그때 획득 된다.  그 희생이 영원한 이름을 역사에 새기기 때문이다. 아킬레우스는 신탁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 신탁의 의미를 알기 때문에 죽음을 예언하는 전장에 무구를 갖추고 나아가야 한다.

 

『일리아스』는 일리온의 노래란 뜻이다. 일리온은 트로이를 가리키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트로이 전쟁을 노래한 서사시이다. 이 전쟁을 끝으로 영웅의 시대는 끝나고 인간의 시대로 이행한다. 역사적으로는 청동기를 배경으로 한 미케네 문명이 끝나고 도리아인의 침입과 함께 철기 시대가 시작된다.

 

트로이에서 죽은 『일리아스』의 주인공 아킬레우스가 영웅을 대표한다면, 함께 싸우고도 살아남아 갖은 고난을 겪고 고향으로 돌아온 『오뒷세이아』의 오뒷세우스는 이행기의 인간상을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이다. 

 

명예, 이름을 위해 목숨을 버린 아킬레우스와 달리 오뒷세우스는 스스로의 이름을 감추고 '아무도 아닌 자- 우티스'가 되어서라도 살아 남기를 택한다. 오뒷세우스는 살아서 저승에 내려가, 죽은 아킬레우스를 만나는데, 이때 만난 아킬레우스는 시쳇말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최고' 라며 한탄을 한다.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이름을 남기던 영웅의 시대는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다.'

 

내게는 꾀 많은 오뒷세우스보다 운명에 곧바로 뛰어드는 아킬레우스가 여전히 매혹적이지만 인간의 길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오뒷세이아』이다. '참을성이 많은' 오뒷세우스가 기나긴 고난을 빠짐없이 겪고 나서야 고향으로 돌아와서 아들과 아내와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러할 것이다.  지름길은 없다.  지름길은 삶 자체가 빠진 길이다. 굽고 휘어진 그 기나긴 길 위에서 비로소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이 먹고 자고 뒹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유에 있다고 믿는다면, 인간의 본질이 정신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희랍인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파테이 마토스 pathei mathos' , 지혜는 고난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므로.

 

『오뒷세이아』를 읽는 것은 예상과 달리 어렵지 않았다. 역자의 말처럼 가능한한 서사시의 운율에 맞추어 번역했기 때문인지, 소리내어 읽어도 묵독을 해도 리듬을 타면서 술술술 읽혔다. 오뒷세우스의 기이한 모험도 그 모험이 담고 있는 의미도 놀라웠다. 『길가메쉬 서사시』를 읽을 때도 느꼈던 것처럼, 수 천 년 전의 인간, 문명의 여명기의 인간들의 사고의 깊이가 지금 우리의 그것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 하는 존재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오뒷세이아』는 신이 아닌 인간이 진정한 앎에 이르는 방법, 지혜를 얻는 방법에 관한 기나긴 서사이기도 하다. 이제  두려움 없이 『일리아스』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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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는 발음상으로도 재미있는 낱말이다.  국어문법 공부에 나름 열중인 상황에서 '읽다'가 활용될 때 나타나는 다양한 음운현상이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책을 읽다가도 한참씩 음운만 생각할 때도 있다.

 

 

1. 읽다 〔익따〕 : 자음군 단순화

 

쌍받침 'ㄺ'은 자음군 단순화에 의해 'ㄱ'이 음가를 가지고, 'ㄹ'은 탈락한다. '일따' 아니고, '익따'.  우리 발성기관으로는 받침의 자음 두 개를 모두 소리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2. 읽어 〔일거〕 : 연음

 

어간 '읽-'에 어미 'ㅓ'가 붙어 활용할 경우, 예를 들어 "책을 읽어 보아라' 에서  '읽어'는 자음군 단순화가 되지 않는다. 어미 '어'에 초성이 없기 때문에 받침 'ㄺ' 중 'ㄹ'은 받침으로 남고, 'ㄱ'은 연음되어 뒤 음절 초성으로 넘어간다. 'ㄱ+ㅓ →거' 로 되므로 읽어는 '일거'가 된다. 사이좋게 하나씩 나누어 가지기?

 

3. 읽는 〔잉는〕 : 자음군 단순화 → 비음화

 

일단 자음군 단순화가 일어나야 한다. 뒤 음절 초성에 'ㄴ'이 버티고 있으니까, 차지할 자리가 없다.  ㄹ 이 탈락하여, '읽는 → 익는' . 여기서 끝이 아니다. 코를 막고 '익는'을 해보면 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익는'은  대부분 코로 나오는 음운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코로 나오는 소리를 비음이라고 하는데, 비음에는 'ㅁ,ㄴ,ㅇ'가 있다. 비음이 어찌나 영향력이 센지 바로 앞에 오는 자음도 비음으로 만드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익'의 받침 'ㄱ'은 뒤에 오는 '는'의 초성인 'ㄴ'에 의해 비음으로 변한다. 'ㄱ'의 비음은 'ㅇ'이다. 따라서 '읽는 →익는→잉는' 로 음운 변동이 일어난다.

 

4. 읽지 〔익찌〕 : 자음군 단순화 → 경음화

 

읽지는 먼저 '익지'로 'ㄹ'이 탈락한다. 자음군 단순화. 그런데 '책 좀 읽지!" 를 소리내 보면 '익찌'가 된다. 왜? 물론 '일찌' 하는 사람도 있는데, 교양있는 현대 서울인의 발음은 아니다. 이른바 표준 발음법인데, 일찌 X, 익찌O.  다시 돌아가서 '익지→ 익찌' 로 즉 'ㅈ→ㅉ'이 되는 현상을 된소리되기 (경음화)라고 한다. 쌍자음이 된소리다. 이유는 '익'의 받침 'ㄱ' 뒤에 예사소리(평음) 'ㅈ'이 연이어 오기 때문이다. 이때 뒤의 예사소리는 된소리가 된다. 

 

5. 읽고 〔일꼬〕 : 자음군 단순화의 예외

 

표준 발음법의 예외에 해당한다.  '읽다'는 표준 발음법에 의해 '읽다 → 익따'로 'ㄱ'이 남는데,  어간 말음 'ㄺ' 다음에 'ㄱ'이 오는 경우는 예외적으로, 'ㄺ' 중에 ㄱ 이 탈락하고 ㄹ이 남는다. '읽고 → 일고 → 일꼬'. 경음화가 일어나는 이유는 탈락하기 전의 'ㄱ'이 뒤 음절 '고'에 영향을 주어 경음화가 일어나는 것으로 추정한다. 

 

6. 읽기 〔일끼〕 : 5와 동일

 

어간 말음 ㄺ 다음에 ㄱ으로 시작하는 어미뿐 아니라 접미사가 와도 예외가 적용되어 읽기→ 일기 → 일끼 로 변한다.  '일기' 가 무조건 '일끼' 변하는 것은 아니다. 어릴 때 숙제로 매일 썼던 일기는 발음도 그대로 〔일기〕 이다.

 

 

 

 

 

 

 

'읽다'는 발음만 다양한 것이 아니다. 읽는 행위 자체가 다양함이다. 같은 책도 어릴 때 읽는 것과 중년이 되어 읽는 것이 다르고, 학생이 읽는 것과 선생이 읽는 것이 다르고, 철학자가 읽는 것과 문학가가 읽는 것이 다르다. 이런 다양한 다름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것이 책들에 관한 책을 읽을 때이다.

 

 

 

얼마 전에 강유원의 『책읽기의 끝과 시작』을 읽었다. 책 제목에 그의 야욕이 드러나 있는 것일까? '야욕'은 강유원 선생의 강의에 가끔 등장하는 낱말이다. 요즘도 예전에 다운 받아 놓은 강유원 선생의 서양 철학사 강의를 다시 듣곤 한다. 다섯 단락으로 글을 쓰지 않으니 제대로 배웠다고 할 수도 없지만, 그의 강의처럼 여기 저기 샛길로 빠져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것도 세상사는 즐거움이니 나도 그 즐거움으로 산만한 생각을 그냥 따라간다.

 

 

책읽기의 끝과 시작은 곧 책읽기의 모든 것이란 뜻으로 전해진다. 책을 읽는다는 것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주마라는 야욕을 가감없이 드러낸 그 야욕이 강유원 선생이라 믿음직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책을 선택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서평을 쓰는 것으로 완결된다. 그냥 마구잡이로 책을 읽는 나같은 경우야 우연히 발견한 책을 중간에 던지지 않고 끝까지 읽어 내는 것만으로 다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고서는 책읽기를 완료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서평을 통해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을 추출해 내고,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을 덧함으로써 사고력을 발달시키고 사유를 확장할 수 있으니 지극히 올바른 가르침이다. 다만 서평은 언감생심 버겁고, 그저 독후감이라도 시작해 보아야지라고 생각을 해본다.

 

 

 

 

 

 

 

 

 

 

 

 

 

 

 

코로나 19로 집에 붙박이가 되면서 뒤늦게 알게 된 일들이 있다. 황현산 선생이 타계하신 것을 그의 두 번째 산문집을 통해 알게 되었다. 『사소한 부탁 』 하나를 세상에 남겨 두고 가셨다.

 

여러 종류의 글들을 모아 놓은 산문집이지만, 책들에 대한 글들도 꽤 많이 있다. 직접 번역한 「어린 왕자」를 비롯한 불문학뿐 아니라 우리나라 작품들에 대해서도 여러 글들을 남겼다. 나는 특히 시 「광야」에 대한 선생의 해석이 맘에 좋았다. 

 

1942년 독립운동가 이육사가 일본 경찰에 의해 압송되던 기차 안에서 이 시를 구상했다고 한다. "민족의 가장 처절한 고난이 자신의 한 몸을 꿰뚫었던 그 시간을 민족이 자랑해야 할 가장 거룩한 시간으로 바꾸었다" 고 평하며, 「광야」를 민족의 서정시라고 규정한다. 육사가 뿌린 가난한 노래의 씨는 이제 우리가 목놓아 불러야 할 민족의 서정시가 되었다.

 

1945년 해방의 해에 태어난 황현산 선생은 민족의 현대사와 더불어 사셨다. 그의 산문집에는 굴곡 많은 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세상일을 꼬집을 때도 ,역에 대한 전문적 소견을 밝힐 때도, 서평을 할 때도 그의 글들은 민족의 삶에 뿌리내리고 있어 울림이 크고 생생하다.  고답적이지도 어렵지도 않다.  '매화향기' 처럼 '홀로 아득' 한 글이지만, 그 깊고 높은 품격이 독자에게 거리를 만들지는 않는다.

 

 

 

 

어제 다 읽은 책이다. 독어독문학 전공인데 제목은 『철학자 김진영의 전복적 소설읽기』 이다. 약력에는 철학과 미학을 공부했고 철학 아카데미의 대표를 지냈다고 되어 있다. 책은 보르헤스의 『칠일 밤』이 연상되는 구성이다. 

 

2010년에 진행된 〈전복적 소설 읽기 : 소설을 읽는 8개의 키워드〉라는 제목의 강의 녹취록을 정리한 책이다.  '전복적' 이라는 수식에서 그의 철학적 관점이 얼핏 짐작된다. 

 

8개의 작품 중 내가 읽은 것은 카프카의 『변신』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2권과 카뮈의 『이방인』 이다. 고전과는 악 소리나게 다른 현대 소설들이다. 읽기는 하는데 뭔지는 모르겠는, 뭔가 있긴 한데 콕집어서 말할 수 없는, 그런 작품들이다.

 

현대 소설의 기점을 조이스, 울프, 카프카, 프루스트로 본다고 한다. 현대 소설에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괴테에 이르기까지 유지되어 온 서사, 이야기가 없다.  이야기가 없으니 흔히 말하듯 '밑도 끝도 없다.'

 

없는 이야기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전복적 책읽기'는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불가능하게 만든 시대를 읽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전통 사회에서 이야기란 겪음 혹은 고난을 통한 삶의 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삶의 완성이 불가능하다. 세상은 『이방인』의 뫼르소의 그것처럼 낯선 곳이고, 현대인은 그 속에 불쑥 던져진 존재다.

 

'완성' 이란 목적론적 의미를 갖고 있는 낱말이다.  삶의 완성이란 인간에게는 목적이 있다는 뜻이다. 죽기 전에 그 목적을 완전히 다 이루었다면 그 삶은 완성된 삶이다. 이 목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무엇으로부터 부여된 것인가? 인간이 궁리하고 궁리하여도 '신' 이외에 답을 찾기는 어렵다. 그런데 근대, 모던은 신과 결별하며 탄생한 시대다.

 

신 없이 홀로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는 아마도 두 가지 길이 있을 것이다. 스스로 삶의 목적을 부여하거나, 목적없이 밑도 끝도 없이 살거나. 하나가 더 있긴 하다. 죽은 신을 살려 내거나.

 

처음 신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은 신났다. 해방이 아니라 새로운 신을 맞이한 셈이었다. '이성의 권위에 대한 계몽의 신앙' 이라는 말이 있다. 이성이 신이었다. 이성은 인간에게 완전가능성을 꿈꾸게 했다. 얼마가지 않아 이성이 광기를 뿜으며 모던은 박살이 나고 포스트 모던이라 불리는 시대가 왔다. 진짜 밑도 끝도 없이 던져진 세상이 왔다.

 

'전복적 소설 읽기'가 전복적인 소설을 읽는 것이든 소설을 전복적으로 읽는 것이든, 밑도 끝도 없는 세상을 이야기해야 하는 소설의 어려움, 그럼에도 밑이나 끝을 부단히 이야기하려는 소설의 열망, 밑이나 끝을 찾아 헤메는 인물들의 불가능성의 가능성, 방향없는 세상을 방향없이 이동(유목)하는 자유 같은 것들에 대한 독법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막연히 한다.  그러고 보니 밑은 근원(존재의 참된 원인, 아이티아)이고 끝은 목적(telos)인가?  

 

 

 

 

고전의 완결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헤겔 전공자 강유원의 책읽기와 처음 읽는 분이라 규정할 수는 없지만 이야기가 불가능한 현대 소설에서 삶을 찾으려는 김진영의 책 읽기는 대조적이지 않을 수 없다.  황현산 선생의 책이 '세상 읽기'로는 편안하고 그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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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독교보다는 불교적 세계관에 더 끌리는 편입니다. 苦集滅道. 중생을 깨우침은 에 있을 것이지만 문득문득 한순간에 에 이르기를 갈망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인생의 리셋버튼을 누르는 것에 대한 갈망' 이 아니라 우주의 티끌로도 남고 싶지 않은 소멸에의 갈망입니다.

신천지를 잘 모르지만 귓결에 들은 말로는 12지파와 십사만 사천 명. 요한 묵시록에서 구원을 약속한 하느님의 종들입니다. 현실에서는 출구가 없지만 약속된 그날이 오면 맨 먼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 과연 그것을 진짜로 믿고 있는 것일까요?

근대의 밤하늘은 별이 없다고 합니다. 가야할 길의 지도가 되어주던 별이 없는, 이 없는, 깜깜한 길을 걸어야 하는 근대인은 눈앞의 욕망을 쫓습니다. 눈앞에 있는 것들은 유한한 물질입니다. 나눌수록 커지는 사랑도, 나눌수록 아름다운 선함도 아닌 이 슬픈 물질은 더 많이 움켜쥐어야만 빛이 납니다. 별빛은 아니어도 삶의 길을 밝히는 불타는 욕망의 덩어리입니다.

하늘에 별도, 손아귀에 돈도 없는 인간들은 무의미한 동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붙잡아야 합니다. 지푸라기라도 사기꾼이라도 잡아야 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십사만 사천 명이 함께 잡으려는 지푸라기는 금강석보다 더 단단할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칠십팔억의 인간이 움켜쥐려 목숨을 거는 부가 지푸라기와 다르기는 한 것일까요?

인간의 역사는 지푸라기의 역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푸라기가 욕망이 되고 욕망이 별이 되어 인간은 무엇인가를 꿈꾸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꿈이 없는 인간은 인간일 수 없으니까요. 헛 꿈이든 가짜 꿈이든 그런게 있다면 진짜 꿈이든,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만들어 주는 것이 꿈입니다. 철학(형이상학)이, 종교가, 혹은 사이비 종교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의미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인간의 꿈 때문일테니까요.

은 두려운 갈망입니다. 하지만 를 닦아 업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삶은 영원회귀하며 에 이를 수 없습니다. 문제는 산다는 것입니다. 삶은 길 위에 있고 그 길은 걸어보지 않고는 알 수도 없고 끝나지도 않습니다. 천국을 예약하는 리셋 버튼이란 것도, 단숨에 이르는 도 없습니다. 겪어야 할 것들을 겪고 싸워야 할 것들과 싸우고 두려워해야 할 것들에 얼어 붙으며 그 끝에 다다랐을 때 그때 아마도 무엇인가가 보이겠지요.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그 찰나의 순간 누추했던 삶의 의미도 드러나겠지요. 신적 앎이란 것이 있기를 바랍니다. 는 파토스인 것 같아요. 희랍인들이 즐겨 말했다는, 파테이 마토스.

 

리셋 버튼 없이, 천국에의 환상없이 滅에 이르기 위해 소소한 삶에 정성을 기울입니다.

 

 

 3부 시대를 읽는 주제 서평들 _ 근대와 정치 그리고 인간

    4. 열린 지향점으로서의 이념과 독단 : <약속된 장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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