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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을 위한 변명 - 혁명가 정도전,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설계하다
조유식 지음 / 휴머니스트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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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겨울은 팟 캐스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들으며 보내고 있다. 팟 캐스트 <빨간 책방>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덕분에 <빨간 책방>은 듣지 않게 되었다. 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20권이라는데, 방송은 90회 정도 되지 않나 싶다. 헤아려 보지 않았지만,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본편이 50 여회 정도, 나머지는 외전으로 되어 있는 것 같다. 본편은 50대 네 남자가 참여하는데, 저자 박시백, 사학과 교수 신병주, 인문학자 남경태, 출판사 휴머니스트 대표 김학원이다. 박시백은 <비정상회담>의 타일러 같이 똘똘한 느낌을 주고, 신병주는 학문적 깊이 보다는 대중 친화력이 높다. 가끔 아니 조금 더 자주, 조선왕조실록에 관한한 교수 신병주 보다 만화가 박시백이 더 박학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남경태는 활력가득 기운을 불어넣지만 서구 중심주의적이라는 의심을 살만하고, 김학원은 진행자로서 ‘어떤’, ‘뭔가’ 따위의 불필요한 단어를 남발하여 마이크를 빼앗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한다. 완벽한 조합은 아니지만, 내용 자체가 훌륭해 겨울 내내 듣고 또 다시 듣고 있다.

 

외전은 휴머니스트에서 출판한 몇 가지 역사관련 책으로 진행되는데, 그 중 하나가 조유식의 『정도전을 위한 변명』이다. 이 책은 1997년 조유식이 <말>지 기자시절에 초판이 간행되었고, 개정판은 2014년에 출간되었다. 조유식은 이른바 운동권 출신의 성공한 CEO로, 온라인 서점 알라딘의 대표이다. 팟 캐스트는 조유식과 박시백 그리고 김학원이 참여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듯 나의 정도전에 대한 관심은 딱 1년 전의 드라마 <정도전>에서 비롯되었다. 정치적 우파로 낙인찍힌 조재현을 비롯해 박영규, 유동근 등의 면면과 ‘국민의 방송 KBS'의 사극이라는 점에서 전혀 볼 생각이 없었던 드라마다. 이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극의 진행과 함께 날아든 ’입소문‘에 흘깃흘깃하다 금방 빠져들었다. 지금까지 보았던 사극들 중 단연 최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가 역사 왜곡의 문제에서 어쩔 수 없는 약점을 가진 것에 반해, <정도전>은 역사를 거의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극적 재미와 긴장이 어떤 팩션 사극보다 더 팽팽했다. 이인임 같은 인물을 생생하게 살려낸 작가의 힘도 컸겠지만 무엇보다 정도전, 이성계, 정몽주라는 당대의 거물들 그대로의 힘과 매력, 그들의 가치관을 둘러싼 치열한 대립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드라마를 통해 마음속에 들어온 정도전이 팟캐스트로 되살아났고, 나는 책 『정도전을 위한 변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문자야말로 내가 가장 깊이 생각할 수 있고 편안하게 대할 수 있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정도전을 위한 변명』의 첫 인상은 이것이 드라마 <정도전>의 원작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줄거리는 물론 이인임을 제외하면 주요 인물들의 성격까지 거의 비슷하다. 드라마에 원작이 있다는 말이 없는 걸로 보아, 책 자체가 원작은 아닐 것임에도 이렇게 유사할 수 있는 것은 책도 드라마도 모두 역사에 충실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시대의 역사야말로 드라마 이상의 드라마이고, 그 시대를 만들어간 인물들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독특한 캐릭터들이다. 작가가 무엇을 더하고 뺄 수 있을까. 그럼에도 『정도전을 위한 변명』은 작가 김유식의 작품이고, 드라마 <정도전>은 정현민 작가와 강병택 연출자 등의 합작품이다. 모든 작품에는 작가의 관점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특히 1997년에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정도전을 이상적 혁명가로 재조명했다는 그 자체가 이미 작가의 가치관을 말해주고 있다. 두 작품 모두 조선의 개국을 단순히 왕조교체에 의한 지배 권력의 이동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민본사상’이라는 근본적 이념에 기반한 혁명적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는 그가 살았던 시대 이상이요, 그가 세운 나라 이상이었다. 고조선 이래 수천 년간 이어 내려온 귀족 중심 체제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기도한 모반자이자, 이미 600년 전에 군주제의 한계를 인식하고 재상 중심의 정치를 실천한 합리주의자였다. 또한 열강들 사이의 일시적 권력 공백을 파고들어 만주 수복을 도모한 야심만만한 국제 전략가였다. 선비인가 하면 정략가였고, 유교 이론가인가하면 군사 지휘자였다. 수학과 의학, 불교에 두루 밝았고, 직접 악기를 제작할 줄도 알았다. 조선의 문물제도, 경복궁과 태평로, 종로 등 서울 도심의 기본 설계, 사대문과 사소문, 그 안의 동네 이름이 다 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건국의 공으로 치더라도 단연 으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시대 내내 만고역적의 대명사였으니, 역사를 주재하는 신은 그에게 너무 각박했던 게 아닐까. p6~7 」

 

드라마 <정도전>을 보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計民授田계민수전, 백성의 수를 헤아려 땅을 나누어준다는 것이다. 정도전이 주장한 민본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정치의 일차적 목표는 백성이 잘 먹고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토대도 그렇고, 정치가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것도 서민 경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정도전은 실제로 모든 땅을 거두어 국유화한 다음 백성의 수대로 나누어 주려했던 반면, ‘서민경제’를 외치는 오늘날의 정치인들은 부자 감세와 서민 증세를 실천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놀랐던 것은 정몽주이다. 정몽주의 丹心단심은 백면서생의 박제된 이상이 아니었다. 그는 정도전만큼이나 치열한 실천적 정치가이자 지략적인 개혁가였다. 다만 그는 혁명가가 아니었을 뿐이다. 더욱이 정몽주와 정도전의 우정은 믿기지 않을 만큼 깊고 애달파서 당연히 극적 효과를 노린 작가의 상상이려니 했다. 그런데 정말 그랬다. 정도전을 가르치고 이끌고 보살피고 정도전과 함께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려 꿈꾸었던 자가 정몽주였다. 그런 정몽주가 마지막 순간에 정도전을 제거하려 칼을 뽑았다. 정도전 역시 정몽주의 목에 칼을 들이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두 정씨의 격돌만으로도 고려 말의 역사는 드라마였다. 세 번째 놀란 것은 이성계라는 인물의 성격이었다. 유동근이 연기하는 저 정 많고 눈물 많고 답답할 만큼 결단이 더딘 사람이 어떻게 한 왕조의 창시자가 될 수 있을까, 이것도 작가가 만든 성격이려니 했다. 그런데 이성계는 진짜로 ‘떠밀려 올라가기’의 달인이었다고 한다. 위화도 회군을 제외하고는 스스로 무엇을 쟁취한 적이 없이 남들이 밀어주고 추대하면 못 이기는 척 하나하나 이루어나가다가 마침내 왕좌까지 올랐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폐위되고도, 이성계가 임금을 안 하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닷새 동안이나 고려도 아니고 조선도 아닌 무정부 상태가 이어지기도 했다. 물론 이성계는 떠밀려가 아니라 떠밀린 척하며 올라가기의 귀재였을 것이다.

 

조선은 士大夫사대부의 나라였다. 사대부란 士와 大夫 곧 선비와 정치가를 하나로 보는 표현이다. 유가에서는 정치가 곧 선비의 책무이다. 修身齊家수신제가 했으면 治國平天下치국평천하를 하는 것이 도리다. 公子曰, 孟子曰을 예절이나 가르치는 케케묵은 빈말로 경시하는 풍토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공자 사상의 핵심은 정치다. 예란 제상을 앞에 두고 사과와 배를 어디에 놓을지를 다투는 것이 아니다. 禮의 큰 의미는 제도다. 어떤 시스템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가정을 꾸리고, 자기 자신을 닦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유교 이상으로 무장하고 고려 말 새롭게 등장한 신진사대부는 책방 문사가 아니라, 실천적 지식인이자 유가적 관료 정치가였다. 공자와 비슷한 시기의 희랍 철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도 비슷한 유형의 정치를 주장한다. 플라톤의 ≪국가≫에 이상적 정체로 나오는 철인국가의 통치자는 거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스타일이다. 동시대의 동서양 모두 비슷한 생각을, 지금으로 봐도 너무 훌륭한 이념을 가졌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먼저 국가는 출생 신분에 관계없이 아이들에게 균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음악, 체육, 계산, 수학, 변증법 등과 더불어 고통과 긴장과 결핍을 견뎌내는 훈련을 실시한다. 20세가 될 때까지 이런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고위직 후보 자격을 박탈한다. 이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다시 10년간의 교육을 받고 또 한 번 선발 과정을 거친다. 통과한 사람은 5년 동안 철학 교육을 받는다. 35세가 될 때까지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한 사람은 이제 관념의 세계에서 냉혹한 현실공간으로 내려와 15년 동안 생존 현장에서 실전 훈련을 거쳐야 한다. 혹독하고 냉정한 생존 투쟁을 견디고 50세가 되면,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남자로서 지도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세계 철학사』

 

정도전의 전제 개혁안은 말 그대로 혁명적이다. 지금의 눈으로 보아도 그렇다. 그는 어쩌면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자였을 것이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고 썼다. 민본사상의 바탕에 땅이 있는 것이다. 고려 말에 전제개혁을 주장 했던 사람들은 정도전 외에도 여럿 있었으나 정도전만큼 철저한 개혁을 주장했던 사람은 없다. 정도전의 계민수전은 전국의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키고, 모든 농민들에게 식구 수대로 땅을 분배하는 것이다. 이른바 토지공개념인데, 토지 사유를 인정할 경우 토지가 부의 축적 수단이 되어, 한편에서는 지주 한 사람이 토지를 독점하고 한편에서는 송곳 꽂을 땅도 없는 농민들이 유리걸식하는, 부익부빈익빈의 폐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600여 년 전에도 깨달을 수 있었던 사상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나? 경제를 살린다는 미명 아래, 집값에 전세 값까지 폭등시키고 있다. 집을 가진 사람은 더 가지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점점 가지기 힘들게 만드는 것이 이른바 ‘따끈한 국수’ 다. 청문회에 나오는 모든 고위공직자 후보들은 예외 없이 투기를 일삼고도 ‘sorry' 한마디면 끝이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고 시행하는 정책들은 또 다시 부익부빈익빈을 가속화한다. 퉁퉁 불어터진 국수든 따끈한 국수든 국수는 국수다. 먹고 나면 금방 꺼지는 것이 국수다.

 

「옛날에는 토지를 관에서 소유하여 백성에게 주었으니, 백성이 경작하는 토지는 모두 관에서 준 것이었다. 따라서 천하의 백성은 누구나 다 토지를 받았고, 경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빈부 격차가 그리 심하지 않았으며, 그 토지세도 다 나라에 수납되었으므로 나라 또한 부유했다. 《조선경국전》 p192 」

 

그러나 실제로 제기된 개혁안은 정도전의 원안에 비하면 매우 타협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1390년에 실제 실시된 전제개혁안은 이것보다 더 후퇴한 내용이었다. 국역을 지는 백성들과 백정들에 대한 토지 분배가 제외되었다. 다만 군역을 지는 군인들에게는 군전을 지급하였다. 그럼에도 조세 부담 면에서는 농민들의 부담이 크게 완화되었다. 고려 말 일반적이던 1/2 혹은 1/4의 과중한 부담에서 1/10에 가까운 세금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농민의 경작권을 지주가 임의로 빼앗지 못하게 했다. 정도전은 자기의 원래 이상이 실현되지 못해 크게 한탄했지만, 고려 시대보다는 낫다는 평을 남겼다. 쌀밥을 이밥이라 부른 것도 이때부터라고 한다. 이성계가 준 밥이라 해서 백성들이 붙인 이름이 李밥이었다. 정도전의 계민수전 원안이 좌절된 것은 물론 기득권 세력의 극렬한 반발 때문이었다.

 

정도전의 마지막 전쟁은 혁명이 성공한 이후, 혁명 세력들 사이에서 발생했다는 점에 더욱 비극적이다. 정도전은 패하여 만고의 역적이 되었고, 이방원은 태종으로 후세에 기록되었다. 정도전은 왜 이방원과 함께 할 수 없었을까? 이방원의 카리스마와 정도전의 국정 능력이 손잡았다면 조선은 더욱 찬란하게 꽃필 수 있지 않았을까? 보통 정도전과 이방원의 대립을 신권과 왕권의 대립으로 본다. 두 세력 간의 다툼이기도 하지만, 조선의 정치 체제를 결정짓는 이념 투쟁이었던 것이다.

 

「 그러나 역사의 도정에서 정도전이 가야할 길과 이방원이 가야 할 길은 달랐다. 조선 개국에 반대하다 유배당한 하륜을 최측근으로 삼은 데서도 드러나듯이 이방원은 보수·안정 지향적인 정치가였다. 이방원이 귀족적이었다면 정도전은 평민적이었고, 이방원이 우파라면 정도전은 좌파였다. 정도전이 이방원을 적극적으로 세자로 밀지 못한 데는 뚜렷한 이유가 있었다.

정도전은, 자질이 일정치 않은 세습 군주가 전권을 행사하는 왕권 중심주의보다는 천하 인재 가운데 선발된 재상이 국정의 중심이 되는 재상중심주의가 왕조 국가에서 가장 합리적인 정치제도라고 믿었다. 즉 군주는 상징적인 전제권을 가지고, 정치의 대강은 정승이 장악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원래 유가에는 군왕보다 지식인의 역할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다. 공자와 맹자도 임금에게 무조건 맹종하는 기능적 지식인 이 아니라, 임금의 잘못을 깨우쳐 바른 길로 이끌어가는 철인 정치가였다. 정도전의 재상 중심주의는 이러한 유가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그 문제의식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었다. p279~80」

 

왕권중심주의냐, 재상중심주의냐? 제도상으로 절대적인 우위가 있는 것일까? 정도전의 사상은 그 자체로 매우 훌륭하다. 그러나 조선 중기부터 실현된 신권 중심의 정치는 오늘날 우리에게 나라를 말아먹은 당파정치라는 인식을 남긴 것도 사실이다. 왕권과 신권의 대립으로 조선정치를 바라보게 만든 최초의(?) 대중적 작품은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이다. 왕권을 회복하려는 정조와 신권을 지키려는 노론 영수 심환지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추리역사물이다. 이 책의 독자는 보통 정조의 왕권을 강력 옹호하게 된다. 정조가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이루었다면, 조선의 역사가 그리 허망하게 끝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저절로 든다.

 

사실 중요한 것은 제도 자체가 아닐 것이다. 역사적 국면과 시대적 소명에 따라 제도는 바뀌어야 할 것이다. 정도전이 이방원에 승리하여, 재상중심주의가 기틀을 마련했다면, 조선 500년의 역사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정도전의 사상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 정도전의 죽음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재상중심주의라는 형식이 아니라, 그의 민본 정신이다. 정도전의 《경제문감》에는 이런 글이 남아 있다. “남의 음식을 먹는 자는 남을 책임져야 하고, 남의 옷을 입는 자는 남의 근심을 품어야 한다.” 남의 음식을 먹고 남의 옷을 입는 자는 바로 사대부다.

 

드라마 <정도전>의 마지막 장면은 장엄하고 감동적이다. 그리고 약간은 간지럽기도 하다. 정도전이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렇게 외친다. “두려움을 떨쳐라. 냉소와 절망, 나태와 무기력을 혁파하고 저마다 가슴에 불가능한 꿈을 품어라. 그것이 바로 그대들의 대업, 진정한 대업이다.” 600년을 훌쩍 뛰어, 오늘의 시청자에게 직접 던지는 메시지다. 그러나 IS와 사토리, 증오와 토닭토닭이 뒤얽힌 시대에, ‘불가능한 꿈’에의 주문은 또 하나의 허망한 청춘담론은 아닌가? 옴짝달싹할 수 없이 계층화된 사회에 맨 주먹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있기는 할까? 불가능한 것은 그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라캉은 성구분 공식이라는, 전혀 수학적이지 않은 수학공식을 제시한다. 여성 공식은, ‘모든 x가 남근 함수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남근 함수에 속하지 않는 어떤 x도 없다.’ 이다. 얼핏 들으면 논리적 모순 같지만 이것이 라캉의 여성 공식이다. 다른 말로 하면 , not-all 혹은 not-whole 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예외도 없다. 남성 공식은 ‘모든 x가 남근 함수에 속한다. 단, 남근 함수에 속하지 않는 어떤 x가 하나 있다.’ 이다. 남성 공식은 예외에 기반 한 총체다. 법의 경우와 비슷한데, 모든 것은 법을 따라야 한다, 단 법 자신은 예외다. 법의 최종 근거는 법에 있지 않다. 주권자의 자의적 결단에 있다. 남성, 아버지의 이름, 법은 예외를 바탕으로 닫힌 구조이다. 여성은 예외도 없지만, 전부도 아니다. 닫혀 지지 않은 원이다.

 

혁명이 가능한 것은, 불가능한 꿈이 가능한 것은,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사회 구조로부터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 구조 역시 완전하지 않다는 데 있다. 그 불완전성이 주체를 출현시키는 것이 아닐까? 필요한 것은 목숨을 건 도약, 신념의 도약이다. 혁명은 무수한 도약의 실패를 딛고, 기적적으로 성공한 도약이다. 우리의 도약은 거의 모두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다. 성공한 도약은 개천에서 승천한 용이 아니다. 용만 날아가고, 개천은 여전히 개천이지만, 혁명은 사회구조 자체를 바꾼다. 삶을 옥죄이던 구조를 파괴하고, 그 폐허 위에 새로운 구조를 쌓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더 좋은 사회가 될까? 폐허의 심연을 견디어 낼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모를 일이다. 다만, 그 불확실성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어떤 혁명도 불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두려움을 떨쳐라. 냉소와 절망, 나태와 무기력을 혁파하고 저마다 가슴에 불가능한 꿈을 품어라.” 이 고답적인 외침을 21세기에도 되풀이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달관 세대가 될 것인가, 증오 세대가 될 것인가, 아니면 불가능한 꿈을 품을 것인가. 선택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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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산책
찰스 디킨스 지음, 민청기.김희주 옮김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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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평가단의 1월 주목신간으로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산책』을 추천했다가 떨어졌다. 다행으로 생각한다. 선택되었다면 조금 욕을 먹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점에서 'thanks to'를 주시고 구매하신 분께 참 죄송하다. 관점과 취향은 다양하므로, 좋게 평가하셨을 수도 있지 않을까, 위안을 해본다. 그러셨으면 좋겠다.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산책』은 역사책이라기 보다는 이야기책이라고 해야 더 어울릴 것 같다. 원제목은 <A Child's History of England> 다. 디킨스는 "아이들이 행복하게 읽을 수 있는 책,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역사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 책을 썼다." 고 한다. 처음부터 책으로 쓴 것은 아니고, 디킨스가 자신이 창간한 주간지에 3년 간 연재한 내용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1851년 1월부터 1853년 12월까지 연재했으니, 160여 년 전의 관점으로 쓴 영국 왕실의 역사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은 어린이들이 행복했을까는 잘 모르겠다. 책 전체가 피로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디킨스는 영국의 역사를 철저히 왕위 계승을 중심으로 서술했다.  카이사르(BC 100~ BC44)가 브리튼 섬을 원정해 영국이 로마의 통치 아래 들어간 때부터,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명예혁명을 이룬 1688년까지, 약 1700여년의 영국 역사는 줄곧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반란과 숙청, 전쟁의 연속이었다. 순조롭게 왕위가 계승된 때가 있기는 한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한번은 기억난다. 왕위다툼이 재앙적인 이유는 이것이 단순히 왕과 그를 둘러싼 정치세력 사이의 투쟁에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세력 간에 정쟁이 일어나면 영주들과 기사 그리고 농노들까지 브리튼 전체가 전쟁에 돌입한다. 마을이 온통 불타고 귀족들은 런던탑에라도 끌려가지만 농노들은 그 자리에서 몰살된다. 이런 피바람이 왕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걸 읽고 있노라면, 도대체 당시의 민중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싶으면서, 조선이 백번 나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번 겨울은 내내 팟캐스트 <박시백의 조선왕조 실록>을 듣고 있다. 왕조 자체가 바뀌는 조선 개국의 혼란기에도 백성들이 뿌린 피는 그다지 크지 않다. 고려말 왜구나 북방 오랑캐의 약탈이 물론 있었지만, 그것이 정쟁의 결과는 아니다. 정도전의 찬란한 이상으로 국가의 기틀을 다잡았던 조선초를 거쳐 중기 그리고 후기로 갈수록 나라꼴이 가관이지만, 전주 이씨의 왕조 자체는 유지되어 왔다. 왜란이나 호란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고, 몇 차례의 반정도 있었지만, 왕권을 놓고 백성들끼리 칼질하는 일은 없었다. 사대부의 나라 조선은 영국에 비하면 순탄했다 할 수 있다. 조선은 사대부들이 입으로 싸우는 나라였다면, 영국은 곧바로 칼과 대포로 싸우는 나라였다. 영국보다 조선이 낫다는 것이 아니라, 디킨스가 서술한 왕위계승 중심의 역사를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디킨스는 거의 모든 왕을 욕한다. 그 유명한 엘리자베스 1세도 디킨스에게는 "자질은 뛰어났지만 거칠고 변덕스러운 데다 위선적이었으며, 나이 먹어서도 젊은 아가씨처럼 허영심이 심했다. 전체적으로 나는 자기 아버지를 쏙 빼닮은 엘리자베스가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p493"  디킨스가 유일하게 칭찬하는 통치자는 왕이 아니라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이다. 청교도 혁명으로 잘 알려진 크롬웰은 잉글랜드 공화국의 호국경을 직함을 받아 최고 통치자로 군림했다.

 

이 책의 문제점은, 디킨스 자신에게는 처음부터 그런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역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없다는 것이다.  크롬웰이 호국경이 됨과 동시에 영국은 영국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The Commonwealth of England, 1649~1660) 이 되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 어떤 설명이나 해석을 하지 않는다.  다만 "크롬웰은 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의회를 정리했고, 장교 위원회는 잉글랜드 공화국 호국경의 직함을 주어 크롬웰을 잉글랜드 최고 통치자로 추대하기로 결정했다.p568" 고만 적는다. 의회에 관한 부분도 마찬가지다. 의회라는 것이 어떻게 탄생했고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역사적 해석을 하지 않는다. 그냥 언제부턴가 슬그머니 의회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해서 의회와 왕이 대립하는 양상만을 상세히 기술할 따름이다.

 

디킨스가 19세기 중반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지, 이 책을 쓴 목적이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기 때문인지, 궁금하다. 역사를 고대, 중세, 근대로 나누고, 지금처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하여튼 영국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알기 위해 선택할만한 책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어릴 때 보았던 드라마 <조선왕조오백년> 과 비슷하다. 왕가를 둘러싼 암투들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출판사는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왕을 비롯한 통치자들뿐만이 아니다. 때로는 열렬한 지지를 보내고, 때로는 냉혹한 비난과 감시의 시선을 보내면서 함께 역사를 일구어온 수많은 민중의 삶과 그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이 책 전체에 깔려있다." 고 홍보하고 있지만, 그 수많은 민중은 화면의 배경처럼 깔려 있다. 이 책에 더 많은 것은 민중들 보다는 디킨스 자신의 감정적 개입이다. 거의 모든 국왕들을 멍청이나 악당으로 비난하며 못마땅해 한다. 무성영화의 변사나 셰익스피어의 광대(잘은 모르지만;;) 같은 추임새를 넣고 있다. 그러니 역사서로서 객관성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영국 역사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남의 나라 역사이고, 영국의 아이들만큼이나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비교적 쉽게 1700여년의 영국 역사를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읽듯 훑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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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
절판


『팔레스타인 현대사』를 쓴 일란 파페는 이스라엘인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지금도 극한 대립을 벌이고 있는 비극의 땅, ‘팔레스타인’ 에 관해 이스라엘인이 쓴 역사를 믿어도 될까? 일란 파페는 이 땅에 살면서 초연하고 중립적인 역사를 쓰기는 불가능하다고 고백한다. 사실과 ‘진실’을 고수하라는 동료들의 조언은 오히려 헛될 뿐이라며, 저자는 과감히 ‘편견’을 선택한다. “이 책은 식민자가 아니라 피식민자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 점령자가 아니라 피점령자에 동조하는 사람, 사장이 아니라 노동자 편에 서는 사람이 쓴 것이다.” 불가능한 진실 대신 이른바 몫 없는 자part of no part의 관점을 채택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는 자연스런 균형이 있다. 팔레스타인인의 편에 서겠다는 저자의 단호한 의식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유대인이라는 어쩔 수 없는 민족적 무의식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어쨌든 팔레스타인인을 미화하지도, 유대인을 단순한 악마로 그리지도 않는 미덕이 있다.

 

제목의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 국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1948년에 국가를 선포하고 즉각적으로 영국, 소련의 인정을 받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팔레스타인은 겨우 이 년 전인 2012년 11월에 UN으로 부터 non-member observer state의 자격을 승인받았다. 회원국도 아니고 참관국(?)에 불과하지만, ‘state', 국가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팔레스타인’은 무엇인가? 물론 땅이름이다. 그런데 현재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자기들이 사는 땅을 팔레스타인으로, 그리고 스스로를 팔레스타인 민족과 팔레스타인인으로 여기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팔레스타인은 (근)현대사modern 외에는 역사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의 정체성은 20세기 초 서구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의 침략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과 이스라엘이 없었다면 아마도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도 없었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에 산다는 것은 이제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응집력 있는 지정학적 단위에 속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이런 식민주의의 노력의 결과로 이제 팔레스타인에는 민족과 종교가 조화를 이루는 구조가 어느 정도 자리 잡게 되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하나의 뚜렷한 실체가 아니었던 팔레스타인에게 이런 변화는 과거와의 결정적인 단절을 이루었다 1918년에 이르면 팔레스타인은 오스만제국 시기에 비해 한층 더 행정적으로 통일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세 지역이 하나의 행정 체제로 융합되었기 때문이다. 1923년에 팔레스타인의 지위에 관한 국제사회의 최종적인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 영국 정부는 최종적인 국경선을 교섭하면서 민족운동이 쟁취하기 위해 싸우게 될 뚜렷한 공간을 만들어냈고,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소속감을 불어넣었다. p134」

 

근현대 이전의 팔레스타인 지역은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 이전에는 셀주크 투르크가, 더 이전 그러니까 7세기 무렵부터는 아랍인들의 왕조에 속해 있었다. 팔레스타인인의 대다수가 아랍-무슬림인 이유가 이 때문이다. 투르크 족들도 제국을 이룬 후 무슬림으로 개종했기 때문에, 약 1400년 동안 이 땅은 아랍-무슬림들의 터전이었다. (조금 자세한 내용과 지도는 여기 ^^)

 

‘팔레스타인 문제’라고 할 때 연상되는 것들은 가자지구, 서안지구, 인티파다, PLO, 하마스, 지하드, 정착촌, 점령지, 시온주의 등등이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명쾌하게 아는 것도 없고, 더욱이 어떤 맥락 속에 놓여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복잡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현대사』를 읽다보면 이런 어지러운 개념들이 오롯이 제 자리를 잡으며,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 속에 그 비극적 의미를 드러낸다. 모든 역사는 이야기다. 특히 『팔레스타인 현대사』는 잔인하고 슬픈 이야기다. 우리에겐 더욱 그렇다. 일제 강점기와 미 군정기의 압제와 학살을 겪고도, 동족간의 전쟁으로 땅도 민족도 마음도 나뉘어 원수처럼 대립하고 있는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너무도 익숙하고 그래서 더욱 서러운 이야기다. 말하자면 500쪽이 넘는 이 역사책이, 그것도 팔레스타인이라는 머나먼 땅의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고 그리고 뜻밖에 흡인력이 있다는 말이다.

 

 

19세기 팔레스타인은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다. 그러나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노리며 선교사, 의사, 교육자들을 앞세운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 땅에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초기 시온주의자들은 선교사들과 거의 같은 무렵에 이 땅에 도착했다. 팔레스타인은 제국주의와 더불어 시온주의라는 두 마리의 늑대를 맞닥뜨린 것이다. 그리고 시온주의는 100년 가까이 이 땅을 피로 물들이고 있다.

 

「시온주의는 유럽의 현상이었고 따라서 다른 서구인들과 마찬가지로 현지인을 등한시했다. 또한 시온주의는 오스만의 지배자들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취하면서 그 대신 유럽 식민 강대국들의 선의에 의지했다. 다른 식민자들과 마찬가지로, 시온주의자들도 유럽에서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위한 안식처를 만들기 위해 영토를 개척했다. 시온주의는 원래 유럽의 민족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지도자들이 민족 부흥의 전망을 팔레스타인 땅에서 실현하기로 결정하는 순간 식민주의 운동으로 바뀌었다. p67」

 

한마디로 시온주의는 식민주의이고, 남아메리카에서 스페인 개척자들이 그랬듯 팔레스타인에서 원시적인 아랍인들을 내쫒고 문명화된 유대인의 나라를 건설하려 했다. 유럽에서 박해받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그 역할을 뒤집어 박해자가 되었던 것이다. 초기 시온주의 운동에는 그 유명한 로스차일드도 잠깐 등장한다. 막대한 자금력과 서구 열강에 대한 로비력을 발휘하는데, 이후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시온주의에서 손을 떼었다.

 

1차 세계 대전은 팔레스타인 비극의 본격적인 신호탄이 되었다. 전쟁의 결과 오스만 제국은 폭삭 망하고,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 통치 아래 놓였다. 1917년에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영국은 1948년까지 주둔하는데, 이 때 시온주의에 넘어간 영국이 팔레스타인의 운명을 결정짓고 말았다. 1917년 11월 2일, 벨푸어 경은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고국을 세우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벨푸어 선언으로 이스라엘 건국의 토대가 놓인 것이다. 이 시기 팔레스타인에는 무슬림 65만 명, 기독교도 8만 명, 유대인 6만 명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대부분을 유대인이 차지하고 있다.

 

물론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도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지도부와 시온주의 지도부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거의 씨족중심의 생활을 하던 팔레스타인은 명사 가문들이 지도부를 형성했지만, 파벌간의 분열과 대립으로 무기력했다. 시온주의자들은 법률·교육·정치 구조를 확립하고 실질적인 국가기구를 운영했다. 또한 그들은 팔레스타인의 땅을 사들이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아랍인 부재지주들은 많은 돈을 받고 땅을 매각했으며, 그 결과 팔레스타인인 소작인들은 땅을 잃고 쫓겨났다. 농촌은 더욱 빈곤해졌다. 반란이 일어났고, 영국은 벨푸어 선언을 철회한다고 약속했지만, 영국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영국은 2차 세계 대전의 끝 무렵 여러 식민지의 독립운동과 미국의 경제적 압박 등에 시달리다, 1947년 2월 팔레스타인 문제를 UN에 위임했다. 이 무렵 아랍연맹은 팔레스타인에 아랍 독립 국가 수립을 약속했고, 유대인 지도부는 미국에 팔레스타인 전체를 유대 국가로 내놓기를 요구했다. 최후의 결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1947년 8월 UN은 팔레스타인의 운명을 갈랐다. UN이 내놓은 ‘팔레스타인 분할안’은 1400년 가까이 이 땅에 살아온 아랍인들로서는 결단코 수용할 수 없는 폭거로, 분노가 폭발했다. 위키 백과를 빌어 분할안의 내용에 대해 잠시 살펴보겠다.

 

「 당시 인구비에서 아랍 인의 3분의 1, 전체 면적의 7퍼센트만을 소유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 전역의 56퍼센트를 분할한다는 게 이 분할안의 골자였다. 특히 지역 생계 기반인 올리브 농장과 곡창 지대의 80퍼센트, 아랍 인 공장의 40퍼센트가 유대인에게 배정되었다. 이로써 경작 가능한 대부분의 비옥한 땅이 유대인 차지가 된 것이다[1]. 팔레스타인 내(內) 아랍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중동의 반미주의도 이때부터 싹트게 되었다. 아랍인들은 이 분할안 채택이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분할안은 미국과 소련 주도로 강행 통과되었으며, 영국은 기권하였다. <위키백과> 」

 

    

 

 

  

 

UN 결의안이 채택된 뒤 12일 만에 유대 땅으로 예정된 곳에서 팔레스타인인의 추방이 시작되었다. 팔레스타인의 원주민 상당수가 나라를 떠났고, 팔레스타인의 엘리트들은 외국으로 탈출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가 선포되었다. 다음날 미국은 곧바로 이스라엘을 승인하는 내용을 발표했고, 이틀 뒤 소련은 이스라엘을 법적으로 승인했다. 영국은 이스라엘 국가 선포 한 시간 전에 마지막 고등판무관이 팔레스타인을 떠났다. 이제 팔레스타인 땅에는 서구 열강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과 아랍국을 배후에 둔 팔레스타인인 사이에 어떤 완충제도 존재하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1948년 5월에서 1949년 1월까지 계속되었다.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군대들이 아랍군단을 이루었지만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과 동시에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인종청소가 시작되었다. 유대 국가로 지정된 곳 중의 팔레스타인 마을 370개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유대인들은 마을을 파괴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을 학살 또는 추방했으며 팔레스타인인의 재산을 몰수했다. 영국의 위임통치 시절에도 땅을 잃고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있었지만, 이제 바야흐로 대규모의 난민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난민들은 대부분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로 쫓겨났고,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등의 인접국가로도 갔다. 곳곳에 거대한 난민촌이 형성되었다. 난민들은 미국 복지 단체와 국제 구호 기구에 의지하여 살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 난민공동체는 뜻하지 않게도 “과거의 어떤 이데올로기나 정치도 도달하지 못한 수준으로 정치화되었다.” 사실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대대로 살아왔던 땅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나 거지 신세가 된 사람들이 그들을 그렇게 내몬 ‘정치’ 에 대해 무관심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가끔 들어본 무슬림 형제단이 조직된 곳도 가자 지구에서다. 무슬림 형제단은 훗날 그 유명한 하마스, 지하드 같은 조직을 낳는다. 1950년대 말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은 팔레스타인 단독 국가 창설과 난민 귀환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싸워나갔다. 1993년 오슬로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으로서는 두 눈뜨고 빼앗긴 땅인데, 이스라엘을 인정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리 ‘눈앞의 현실’ 이 그렇다 해도.

 

1967년 팔레스타인은 더 큰 비극으로 빠져든다. 1967년 6월에 발생해 6일 만에 끝난 소위 ‘6일 전쟁’에서 팔레스타인 지역 모두가 이스라엘에 점령당했다. 요르단강 서안, 가자지구, 시나이 반도, 골란 고원이 모두 이스라엘의 수중에 떨어졌다. 한마디로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와 시나이 반도까지 이스라엘이 장악한 것이다. 이 지역을 이스라엘은 점령지로 지배했다. 요르단강 서안 59만 명, 가자지구 38만 명이 이스엘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동예루살렘은 새로운 유대인 주거지역이 되었다. 시나이 반도에서는 1977년이 되어서야 이스라엘 군대가 모두 철수하였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팔레스타인 문제들의 대부분은 이 6일 전쟁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근본 원인은 1947년의 분할안 이지만 말이다.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는 보호관리 지역으로 선포되었다. 그것은 이 지역 팔레스타인인의 인권과 시민권이 박탈되었음을 의미했다. 이스라엘은 점령지에 대한 제네바 협약을 무시하고, 가옥파괴, 추방, 가택수색, 통행금지, 검문, 재판 없는 구금을 실행하였으며, 이때부터 점령지에 대한 메시아 담론을 확산시켰다. 점령지역을 성스러운 땅으로 규정하고, 종교적인 근거에 따라 향후 이 지역에서의 철수를 금지했다. 유대 율법으로 팔레스타인 전역에 대한 이스라엘 지배를 정당화한 것이다. UN은 아랍국가들과의 평화 유지를 대가로 점령지에서 이스라엘의 철수를 결의했지만,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철수를 거부하였다.

 

    

 

 

  

 

이스라엘이 새로 점령한 지역에서 도망치거나 강제로 쫓겨난 사람들에 의해 난민 공동체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등록된 난민만 1972년에 150만 명, 1982년에 200만 명이었다. 난민들은 이스라엘과 인접 국가들의 최하층 프롤레타리아가 되거나 UN의 기금으로 생존했다. 난민들은 팔레스타인 사회의 땅 없는 프롤레타리아가 되었다. 난민들은 매일 출퇴근을 하면서 이스라엘 검문소에서 아침마다 학대와 괴롭힘을 당했고, 노예시장이라 불리는 곳에서 하루 일당의 노동자로 선택되기 위해 기다려야 했다. 사실 이스라엘 경제는 점령지에 의해 유지되었다.

 

「1987년에 이르면 이스라엘 경제는 이미 레이건이나 대처식 자유 시장 자본주의 체제로 바뀐 상태였다. 이런 경제는 점령 지역 출신의 값싸고 유순한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이는 지방자치 복지, 경제 등의 권한을 협조적인 지방의 시장들과 의회 수장들에게 위임하는 일종의 신식민주의적 관계를 통해 촉진되었다. 이런 구조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점령 지역이 제공해야만 하는 모든 것을 완전히 착취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경제는 여러 면에서 점령 지역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p360」

 

이런 상황에서 민중봉기와 테러리즘은 이상할 것이 없다. 1987년 12월 1차 인티파다가 일어났다. 봉기로 번역되는 인티파다는 ‘뒤흔들기’ 라는 뜻을 가졌다. 1947년 UN 분할 40년, 1967년 이스라엘 점령 20년 만에 대규모의 민중봉기가 발생한 것이다. 가자 난민촌에서 시작된 인티파다는 농촌마을로 불붙었고, 여성과 어린아이와 청소년이 가세했다. 난민촌과 유대지역 안의 팔레스타인인들이 협력했다. 그 결과 1993년 오슬로 협정이 체결되었다.

 

오슬로 협정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처음으로 서로의 존재를 인정했다. 이스라엘은 PLO를 협상의 상대로 인정하고, PLO는 팔레스타인 분할을 처음으로 공식 인정했다. ‘눈앞의 현실’은 턱없이 달랐지만 그때까지도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을 몰아내고 아랍민족의 단일 국가를 세운다는 이상을 품고 있었다. 1993년 9월 유대국가의 생존권 승인과 그 대가로 요르단 강 서안 지구, 가자 지구에 5년간의 잠정자치를 단계적으로 도입하는 '잠정해결'을 위한 오슬로 합의(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잠정설치에 관한 원칙선언)가 선언되었다. 오슬로 협정에 따라 1994년 5월부터 5년간에 걸친 잠정자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협정은 수시로 위반되었다.

 

「국경 폐쇄가 되풀이되고 가자 지구를 벗어나는 이동에 자의적인 제한이 가해지면서 오슬로 과정이 가자 지구를 팔레스타인 국기만 걸렸을 뿐 이스라엘 병사들이 지키는 거대한 감옥으로 바꿔 놓았다는 인식이 생겨나는 데는 1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슬람 저항 단체인 하마스와 이슬람지하드가 협정에 반대하는 캠페인의 일환으로 폭탄 공격을 가하자 이스라엘은 국경 폐쇄를 재개했다. p379」

 

「1996년 경 정치 지도자들이오슬로 과정에 관해 만들어낸 이미지의 자리에 현실이 들어섰다. 그 뒤에는 이제 오슬로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으로 찢긴 땅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는지 여부가 아니라 근시안적인 정치인들이 팔아먹은 환상을 위해 사람들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가 문제가 되었다. p380」

 

2000년 10월 2차 인티파다가 발발했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해 미국은 항상 이스라엘의 관점을 받아들였다. 이스라엘의 관점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분쟁은 1967년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 지구를 점령하면서 시작되었고, 따라서 평화란 이 두 지역에서 철수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문제의 시작은 시온주의와 1947년의 UN 분할안이었다. 미국과 오슬로 과정은 팔레스타인에게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는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 대한 제한된 주권일 뿐임을 설득했다. 그것은 UN이 인정한 권리인 1948년 이스라엘에 의해 추방당한 난민들의 귀환권을 포기하라는 주문이었다. 2000년 여름 클린턴은 팔레스타인 지도부에 이를 승인할 것을 요구했고, 팔레스타인은 거부했다.

 

이스라엘은 국경폐쇄, 검문소에서의 학대, 가옥 파괴, 군사·정치 활동가 암살, 대규모 체포, 요르단 강 서안 지역을 이스라엘 영토와 분리하는 장벽 건설 개시 등을 계속해 나갔다. 분리 장벽은 1990년대 중반에 이미 가자 지구에 먼저 건설되었다. 가자 지구는 전기 담장과 감시탑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포로수용소가 되었다. 최고 8m 높이의 요르단강 서안의 장벽은 지금도 건설 중이다. 올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분리 장벽 앞에서 평화의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국가는 여전히 두 개의 거대한 포로수용소이다.

   

 

 

 

 

2차 인티파다 중에 자살 테러가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 자살 테러는 알려진 것과는 달리 종교와는 무관하다. 이슬람법은 자살을 비난하며, 팔레스타인의 이슬람주의자들이 속한 수니파 이슬람은 지하드보다는 관용과 평화를 장려한다. 종교는 법으로든 경전에 근거해서든 자살 행위를 전혀 지지하지 않는다. 자살 폭탄 테러는 정치적 이슬람 그룹이 투쟁에서의 독창성과 헌신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선택한 전술의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2차 인티파다 무렵 자살 폭탄 공격이 무력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방식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전투기와 탱크에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살 폭탄으로 대응했다.

 

「실업률이 50퍼센트에 육박하고, 요르단 강 서안 도시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봉쇄가 계속되고, 전기 장벽이 가자 지구를 에워싸고, 정치적 해결책에 대한 희망이 전혀 없는 가운데, 이제 설교자나 ‘진리의 전달자’는 필요가 없고 폭발물과 수류탄의 끊임없는 공급만이 필요했다. p436」

 

희망이 전혀 없는 ‘포로수용소’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살 테러를 선택했다고 해서, 우리가 쉽게 비난할 수 있을까? 이 책은 2004년에 씌어졌고, 당시에도 별다른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딱 10년이 지난 지금도 하마스와 팔레스타인은 서로 로켓을 주고받고 있다. 물론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은 팔레스타인 쪽이다. 지난 달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토지를 강제 수용하고 초대형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30년 만에 최대 규모의 강제 수용이 될 것이란다. 미국마저도 철회를 촉구했지만, 팔레스타인의 운명은 갈수록 위태롭다.

 

 

『팔레스타인 현대사』를 읽으며 든 생각은 팔레스타인 문제는 해법이 없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해결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속내는 팔레스타인 전체를 이스라엘 영토로 삼는 것일 테니 어떤 중재도 내심 귀찮게 여길 것이다. 미국은 중동의 아랍 국가들을 견제하기 위해 강력한 이스라엘이 필요하다. 아랍 국가들은 각기 자국의 이해타산에 따라 친미적 혹은 반미적 성격을 띤다. 그들에게 팔레스타인 문제는 자국의 이해를 실현할 기회가 될 때만 의미가 있다. 초기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명사 가문들로서 팔레스타인 전체 보다는 가문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다. 하마스와 지하드 등의 무장 단체는 어쩌면 팔레스타인 민중의 적대를 먹고 산다. 남한과 북한이 서로의 적대 위에 정권을 유지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극우주의자도 팔레스타인의 근본주의자도 서로의 적대에 뿌리박고 있다. 적대가 사라지면 존재도 사라질 것이다. 절박한 것은 오직 고통 속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민중뿐이다. 그 누구도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을 것이다. 인권에 호소하는 것은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을지라도, 결코 실질적인 해법은 되지 않을 것이다. 국제 관계는 희랍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대의 그것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눈앞의 현실 즉 힘의 관계에 의해 결정될 뿐이다. 운 좋게 국제 역학관계가 뒤집어 지지 않는 한, 남아 있는 방법은 오직 힘을 기르는 방법뿐일 것 같다. 두 차례에 걸친 인티파다는 민중봉기의 힘을 보여 주었다. 비록 또다시 꺾인다 해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저항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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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레스타인’은 도대체 무엇에 대한 명칭일까?

 

이스라엘이 쏜 백리탄에 뼈가 하얗게 탄 아이들의 사진이 SNS에서 공분을 일으킬 때, 독서회 회원들이 9월에 읽을 책으로 선택한 책이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이다. 만화책인데도 결코 읽기가 쉽지 않다. 내용이 어려워서라기보다 그림체가 무섭고(어릴 때 일본 순정만화에 길들여진 터라, 강풀 등의 웹툰체에도 아직 거리감이 남았다), 여백을 가득 메운 깨알 같은 글씨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팔레스타인에 대해 내가 가진 지식이 너무 없다는 것이 더 큰 이유다. 조 사코는 일제강점기나 미군정기의 4.3사건을 연상하게 하는 박해와 고문, 강제 소개령 등을 세밀하게 그려내며,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워낙 기초지식이 없는 터라, 이 모든 것들이 왜 시작되었는지, 한줌도 안 되는 이스라엘을 빙 둘러싸고 있는 아랍 국가들은 왜 그렇게 무력한지, 비인도적이고 반인륜적인 이스라엘을 왜 국제사회는 묵인 혹은 비호하는지 궁금증만 커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팔레스타인’은 무엇을 가리키는 이름인지, 무심코 불러왔지만 정작 그 이름이 땅이름인지 국가이름인지 조차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래서 고른 책이 일란 파페의 『팔레스타인 현대사』이다. 발제 때까지 팔레스타인의 비극의 원인을 모두 밝혀내리라, 야심차게 도서관 희망도서 목록에 올려놓았는데, 막상 책을 받고 보니 500쪽을 살짝 넘는 무서운 분량이다. 우리나라 현대사도 이렇게 자세히 읽어본 적이 없는데, 이상한 양심의 스멀거림과 두께의 압박으로 한풀 꺾인 채 시작했는데, 의외로 재미가 있다. 그런데 이 책도 워낙 현대사이기 때문에, 읽다보니 또 궁금한 것들이 생겼다. 먼저 ‘팔레스타인’은 도대체 뭐냐? 정확한 위치는 어디냐? 원래는 누구의 지배아래 있었느냐? 등등의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래서 검색질과 세계사책에서 몇 가지 사전 지식을 찾아보았다. 이 분량이 만만치 않고, 지도들이 많아, 일단 1차 자료정리를 해두려고 한다.

 

 

 

‘팔레스타인’은 현재 국가명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 국가로 인정받은 것은 2년이 채 되지 않은, 2012년 11월 29일(현지날짜)의 사건이다. UN이 미국과 영국 등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non-member observer state로 인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아직도 미국과 서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출처는 파악하지 모했는데, 지도의 회색국가들이 인정을 거부하는 나라들이라고 한다. 잘 보면 우리나라도 회색이다. UN 결의안 통과 때는 기권했다고 한다.

 

 

   

 

그럼 이전의 ‘팔레스타인’은 무엇이냐? 주변의 몇 개 지역이 통합된 명칭인 것 같은데, 여하튼 우리가 지금 팔레스타인 ‘땅’이라고 부르는 지역은 1차 세계 대전 무렵까지만 해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영토였다.

 

오스만 투르크는 1453년 동로마제국을 끝장내고 이스탄불을 차지한 거대한 제국이었다. 색칠되어있는 지역은 모두 오스만 투르크의 영향아래 있는 땅이었다. 유럽의 발칸반도와 서남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북부까지 지중해 연안의 세 대륙을 차지한 거대 패권 국가였다.

  

 

 

 

 

그런데 19세기 초부터 슬슬 유럽 제국주의의 손아래 들어가기 시작해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손잡았다가 패망했다. 영토의 반 이상을 상실하고, 지금 남은 것이 터키 공화국이다.

  

 

 

 

 

투르크와 터키? 맞다. 터키는 영어식 명칭이고, 터키어로는 '튀르키예'(Türkiye)다. 투르크(Türk)는 강하다는 뜻인데, 우리역사에서는 돌궐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돌궐이 투르크고, 투르크가 터키의 전신이다. 오스만 투르크는 투르크족의 오스만 가문이 세운 제국이고, 그 이전에 셀주크 가문의 셀주크 투르크가 지중해 패권을 장악했다. 그 악명 높은 십자군들이 예루살렘을 회복하겠다고 쳐들어간 나라가 바로 셀주크 투르크다. 10세기 무렵에 벌써 팔레스타인 땅은 투르크족의 지배아래 있었던 것이다. 이후 잠깐 칭키스칸에 의해 평정됐다가, 오스만 투르크가 다시 장악했다. 그런데 왜 이 땅의 사람들은 대부분 무슬림인가? 7세기에 모하메드가 이슬람제국을 세우고 아라비아반도를 넘어 영토를 확장하면서 이 지역을 차지했다. 이후로 지배한 투르크족들도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이 땅은 천오백년 가까이 무슬림의 영토였다. 아래 지도는 셀주크 투르크 전성기의 이슬람세계 영역이다. 그런데 여기를 유대인들이 약속의 땅이라고 우기며, 신화인지 역사인지 모를 책 하나를 달랑 내밀며 나라를 세운 것이다.

 

 

 

 

크림전쟁 직전, 크림전쟁은 1853~1856에 러시아와 오스만 투르크가 벌인 전쟁이다, 팔레스타인 땅에는 5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 중 기독교도 6만 명, 유대인 2만 명, 오스만 제국의 병사와 관리가 5만 명, 유럽인이 1만 명이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아랍어를 쓰는 무슬림이었다. 총 50만 명 중 유대인 2만 명으로 4%만이 토착 유대인이었다. 그러니까 팔레스타인인의 대다수는 아랍인으로 그때도 오스만 투르크의 식민지였다. 그러나 이 때만해도 여러 종교의 여러 민족들이 별 갈등 없이 그럭저럭 살고 있었고, 지역 자치가 인정되고 있었다. 

 

19세기 초부터 서구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에 의해 오스만 투르크는 서서히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 갔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흔히 그랬듯이 서구 식민주의자들은 근대화의 명목으로 선교사, 의사, 교육자들을 선봉대로 파견하여 식민화 작업을 다져 나갔다. 팔레스타인 땅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며 영국의 위임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의 진짜 비극은 다른 곳에 있었다.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민족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시온주의자들이 영국을 대상으로 막대한 로비를 시작했던 것이다. 세계금융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뿐 아니라 전 세계의 그림자 정부로 끊임없이 음모론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대인 금융가 로스차일드 가문도 여기서 커다란 역할을 하고 나선다. 여하튼 자세한 내용은 『팔레스타인 현대사』리뷰에서 정리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1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영국의 위임통치 아래 들어간 팔레스타인 땅에 시온주의자들이 유대인 국가를 세우기 위한 정착 작업을 시작했다는 사실만 적어둔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 땅은 급격히 유대인의 땅으로 변해갔다.

 

 

 

 

2011년 현재 국가로서의 팔레스타인 영토는 노란색으로 표기된 가자지구, 요르단강 서안지구 및 동예루살렘 3곳뿐이다.

  

 

 

 

 

그런데 뉴스에 자주 나오는 서안지구 즉 웨스트뱅크는 도대체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bank는 강둑이란 뚯이니, 요르단강의 서쪽 땅을 가리키기 위해 붙여졌다. ‘요르단강 건널 때’의 그 요르단강이다.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팔레스타인 영토인데 최근 이스라엘이 엄청난 발표를 해서 전 세계의, 심지어는 미국의 비난을 사고 있다. 한겨레 신문 9월 1일자 기사를 긁어왔다.

  

 

 

 

「이스라엘이 31일 서안지구 베들레헴 남쪽 땅 400㏊(4㎢)를 강제 수용할 계획을 발표했다고 영국 <비비시>(BBC) 방송이 보도했다. 정착촌 건설 감시 단체인 ‘피스나우’는 이스라엘이 강제 수용할 땅의 규모가 지난 30년 내 최대라고 평가했다.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는 “수용되는 땅에는 5개의 팔레스타인 마을이 있다”며 “이번 조처는 새로운 정착촌 건설에 길을 터주는 것”이라고 전했다.」

 

도대체 왜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을 끝없이 당해야 하는 걸까? 아마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단 한명의 무슬림마저 절멸시킬 때까지 이 비인간적인 일을 계속 할지도 모른다. 이 엄청난 일이 단지 종교적 신념에 의한 것만도 아닐 것이고, 유대 민족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닐 것이다. 일란 파페의 500쪽이 넘는 『팔레스타인 현대사』가 이 비극의 자세한 전모를 밝혀줄 것이다. 여기까지의 개략적인 상식이 본격적인 책읽기에 속도를 붙여주기를 기대한다. 인샬라. 아니... 인간의 의지가 신을 움직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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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 21세기, 희망의 미래 만들기, 개정판 살아있는 휴머니스트 교과서
전국역사교사모임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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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서와 두 달간에 걸친 세계사 공부를 마쳤다. 윤서가 아직 초등학생이고 시간도 그리 넉넉하지 않아 일단 2권 근대사를 유럽 중심으로 훑었다. 이 책의 취지와는 맞지 않지만 전 세계를 다루기에는 너무 방대한 분량이라 처음 세계사를 접하는 윤서에게는 부담이 될 것 같았다. 두 달 내내 내 이야기를 이해하고 있을까, 너무 어렵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개학하고 1권부터 다시 하고 싶다고 했다. 훨씬 많은 나라와 사건들이 나온다고 겁을 주었는데도 한다니 기특하다.

 

  사실 두 달간의 공부는 윤서의 공부라기 보다는 내 공부였다. 중학교 2학년 때 배운 것 말고는 나도 세계사를 체계적으로 읽어본 적은 없다. 강유원의 <역사고전강의>와 <인문고전강의>를 함께 읽으니 훨씬 재미있고 많은 공부가 되었다. 읽다보니 지도가 꼭 필요해서 <세계사 아틀라스>도 참고 하고 있다.

 

  윤서에게 세계사를 좀 가르쳐달라는 부탁을 받고 알라딘을 클릭하다 선택한 책이 <살아있는 세계사교과서>다. 우선 저자가 '전국역사교사모임'이라 신뢰가 갔다. 기존 교과서와 역사 교육의 문제점을 뼈저리게 느꼈을 선생님들이 쓴 책 보다 더 나은 책이 있을까 싶었다. 학자들처럼 깊지는 않아도 아이들이나 일반인들이 역사에 대한 개괄적인 흐름을 포착하는데 학교의 선생님들 보다 더 도움이 될만한 사람은 없을테니 말이다. 실제로 이 책은 그런 믿음에 충실하게 혹은 넘치게, 흥미롭고도 체계적인 역사서이다.

 

  이 책의 관점은  진보적이다. 역사적 사건을 선택하는 것에서도, 그것을 해석하고 설명해내는 것에서도 그런 관점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윤서에게 열심히 설명하다가 문득 내가 지금 너무 과격한 것은 아닌가 놀랄 때가 있다. 근대가 부르주아의 시대라고 설명할 때, 세계대전의 원인을 설명할 때,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문제점을 짚을 때,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 이야기할 때, 어린 시절 우리의 교육을 떠올리며 나는 속으로 깜짝깜짝 놀라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역사를 사건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살아있는 세계사'로서, 커다란 흐름으로서 읽어낼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학생들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적극 추천하고 싶다. 세계사에 대한 기억이 너무 희미해졌거나,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나 사건이 토막토막으로만 기억되는 어른들에게, 이 책은 빛바래고 조각난 기억들에 살아있는 숨결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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