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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ㅣ 펭귄클래식 15
프란츠 카프카 지음,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나도, 카프카를 읽었다. 사실은 작년에 『변신』을 읽기는 했다. 그래도 그때는 카프카를 읽은 것 같지 않았다. 잘 이해를 못했기 때문일까? 지난주에 『소송』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카프카를 읽은 것 같았다. 이번에는 카프카를 이해했다는 말인가?
지젝의 『시차적 관점』에는 카프카에 관한 이런 글이 있다.
「... 카프카를 읽는 것은 추출하기라는 지대한 노력을 요구한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적절한 해석적 지평에 대하여) 더 많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카프카의 글이 가진 살아 있는 힘에 노출되도록 전형적인 해석적 기준들에 대한 지식을 버리는 것이다. 세 개의 그러한 해석적 틀이 있다. : 신학적인 틀(부재하는 신에 대한 간절한 추구) : 비판적 틀(소외된 현대 관료주의의 악몽 같은 세계를 무대에 올리는 것) : 정신분석적 틀(“정상적인” 성관계를 불가능하게 한 카프카의 “해결되지 않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 모든 것을 지워야만 한다. : 독자가 카프카의 우주가 가진 살아 있는 힘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아이와 같은 순진함이 복원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카프카의 경우 첫 번째 (단순한) 독서가 흔히 가장 적절한 것이며 두 번째 독서는 주어진 해석의 틀을 카프카에게 강제하여 첫 번째 독서의 생생한 충격을 “지양”하려는 시도가 된다. 이것이 우리가 카프카의 주요 업적 중 하나인 “오드라덱”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p231~2」
덕분에 나는 펭귄 클래식 판의 작품해설에 조금의 미련도 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이와 같은 순진함”으로, 카프카를 느꼈던 것도 아니다. 도대체 오염된 세상에 순진한 아이가 가능한지도 의문이다. 당장 지젝부터 카프카에 대한 해석적 틀을 여러 번 제시해 왔다. 내가 카프카를 읽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에 짓눌린 것도 지젝 때문이다. 『시차적 관점』에는 정신분석의 핵심 개념인 대상a를 카프카의 ‘오드라덱’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드라덱은 분명 라캉이 『세미나Ⅺ』과 그의 중요한 글인 ≪무의식의 위치≫에서 라멜라로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기관으로서의 리비도이자, 신체 없는 “불사의” 비인간적·인간적 기관이며, 신비로운 “불사의” 전주체적 생명-물질이다. 또는 그보다 상징적 속박을 벗어난 생명 물질의 잔여이며, 일반적인 죽음 너머 부성적 권위의 영역 밖에서 어떤 고정된 거처 없이 유목적으로 지속되는 “무두적” 충동의 끔찍한 박동이다. 그러므로 카프카 이야기 이면에 제시되는 선택은 라캉의 “아버지 또는 그 보다 나쁜 것”이다. : 오드라덱은 아버지의 대안으로서 “더 나쁜 것” 이다.p239」
오드라덱은 언뜻 보면 납작한 별모양의 실패 같은데, 꼭 실패만은 아니다. 옛날에는 알아볼 만한 모양이었는데, 마모에 의해 이제는 잔여만 남았다고도 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전체적으로는 무의미해 보이지만 그 자신의 방식으로는 완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드라덱은 특이할 정도로 민첩하고 붙잡히지 않아, 정밀하게 조사할 수도 없다. 다락방, 계단, 로비, 현관에 잠복해 있는데 몇 달간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항상 충실하게 집으로 돌아온다. 내가 죽은 후에는 아이들의 발밑에도 나타날 것 같다. 카프카가 단편 『The Cares of a Family Man』에서 설명하고 있는 오드라덱의 형상이다. 카프카는 “그는(오드라덱은)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나 이후에도 살아남을 것이라는 생각은 상당히 고통스럽다.” 고 쓰고 있다. 『소송』의 마지막 문장도 이와 비슷하다. 「“개 같군!” 하고 그는 말했으나, 자신은 비록 죽어도 치욕은 남을 것 같았다. p303」
카프카는, 우리나라의 들뢰즈 산실(?)이라 알려진(적어도 대중에게는), 이진경의 <수유 너머 N>이 꾸준히 읽고 연구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들뢰즈를 읽다 보면 자연 카프카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카프카는 현대 철학자들의 스타? 혹은 교과서?,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지젝은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에서 카프카와 그의 아버지의 관계를 매우 자세히 다루며, 그의 문학은 “아버지 보다 더 나쁜 것”의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카프카와 아버지의 관계는 매우 심각했다. “카프카를 힘들게 한 것은 아버지의 과도한 현존이다.p129” 그런데 아버지의 과도한 현존은 역설적이게도 아버지의 상징적 기능이 상실되었음을 의미한다.
「 우리는 또다시 인과율의 고유한 질서를 명심해야 한다. 아버지의 과도한 활력이 그의 상징적 권위를 무너뜨린 것은 아니다. 반대로 카프카가 아버지의 과도한 활력에 진저리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부성적 권위의 결핍을 전제하는 것이다.
아버지-의-이름Name-of-the-father의 진짜 기능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확히 주체로 하여금 아버지를 ‘상징적으로 살해’하도록 하는 것, 그의 아버지를(그리고 폐쇄적인 가족의 회로를) 단념하여 자유롭게 자기 삶의 길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카프카가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아버지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지시한다.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는 주체가 영원히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그를 리비도적 곤경에 빠뜨린 것은 주체 자신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카프카가 아버지의 이름을 거부한 것은 아버지의 포획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포획의 가장 명백한 징표이다.p130」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상징계의 진입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징계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인가? 지젝이 자주 그러듯, 도스토예프스키의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여기서 뒤집혀야 한다. “신이 없다면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상징적 아버지가 아니라 원초적 아버지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아버지 즉 주인에는 두 가지가 있다. 공적인 상징적 주인과 비밀스럽게 활동하며 실제로 모든 것을 조정하는 악마적 마법사, 원초적 아버지가 그것이다. 아버지의 이름, 즉 가부장적인 상징적 권위의 해체는 새로운 주인의 출현을 예고한다. 카프카에게 아버지는 상징적 권위를 상실하고, 외설적인 원초적 아버지로 돌아온다.
「라캉의 용어로, 상징적 동일화의 특질이나 자아 이상이 중지될 때, 주인이 상상적 이상으로 축소되어 버릴 때, 그것의 괴물 같은 형상으로 우리의 삶을 조종하는 전능한 악신의 초자아 형상이 출현한다. 이런 형상 속에서 상징적 권위의 고유한 효력은 중지되고, 그로 인해 상상계(외양)와 (편집증의) 실재가 중첩된다. p135」
프로이트는 주체를 윤리적으로 행동하게 몰아가는 세 가지 작인을 제시했다. 이상적 자아, 자아 이상, 그리고 초자아가 그것이다. 프로이트는 이 세 가지를 혼용했지만 라캉은 이 세 항을 엄격히 구별한다. 이것은 라캉의 삼항조인 ISR, 즉 상상계I-상징계S-실재계R에 상응한다.
「이상적 자아는 주체의 이상화된 자기 이미지(내가 되고 싶거나 타인이 나를 이렇게 봐 줬으면 하는 상)를 의미한다. 자아 이상은 그 응시로 나의 자아 이미지를 각인시키려는 작인, 나를 지켜보며 내가 최선을 다하도록 독려하는 대타자, 내가 따르고 실현하고 싶어 하는 이상적 ‘나’이다. 그리고 초자아는 그 작인의 집요하고 가학적이며 징벌하는 측면이다. 이 세 항의 구조화는 명백히 라캉의 상상계-상징계-실재로 이루어진 삼항구조이다. 이상적 자아는 상상적인 것으로, 라캉이 ‘작은 타자’라고 불렀던 내 자아의 이상화된 분신 이미지다. 자아 이상은 상징적인 것으로, 내가 상징적으로 동일시하는 지점, 내가 대타자 속에서 나 자신을 관찰하는(판정하는) 지점이다. 초자아는 실재적인 것으로, 나에게 불가능한 요구를 퍼붓고 그것에 부응하지 못하는 나의 실패를 조롱하는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작인, 그 시선 속에서 나의 ‘나쁜’ 갈망을 억누르고 그 명령에 따를수록 점점 유죄가 되는 작인이다.p137~8」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어느 것이 정말 윤리적인 작인일까? 보통의 특히 미국의 정신분석학자들은 나쁜 초자아에 맞서 좋은 자아 이상을 수립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아버지-의-이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가장 평온한 방법이다. 기존의 사회-상징적 질서에 따르면, 쉽고 편안하다. 그러나 라캉은 이런 손쉬운 방법에 반대하면 네 번째 작인을 주장한다. 라캉이 가끔 ‘욕망의 법’이라 부르는 것으로, 우리의 욕망에 부응하는 행동을 요구하는 작인이다.
「라캉에게, 우리를 성장과 성숙으로 이끄는 자비로워 보이는 자아 이상은 우리로 하여금 기존의 사회-상징적 질서의 ‘합리적’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욕망의 법’을 배반하게 만든다. 초자아는 그 과도한 죄의식 속에서 자아 이상의 필연적 이면일 뿐이다. 초자아는 ‘욕망의 법’에 대한 우리 자신의 배반에 관하여 참을 수 없는 압박을 가한다. 간단히 말해, 라캉에게 초자아의 압박 속에서 경험하는 죄의식은 환영이 아니라 실제적이다. “우리의 죄는 오직 우리의 욕망에 의해 주어진 토대와 관련해서이다.” 그래서 초자아의 압박은 우리의 욕망에 대해 우리가 실제로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p139」
라캉이 제시하는 것은 네 번째 작인, 욕망의 법이다. 사회의 질서에 순응하며 아버지-의-이름을 받아들이는 것은 외견상 쉽지만, 대가를 요구한다. 주체의 욕망을 억압해야 한다. 그러나 억압된 욕망은 초자아의 압박으로 돌아온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가끔씩 일탈을 꿈꾸며 초자아를 적당히 달랜다. 욕망은 억압되고 초자아는 가상의 세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그 대가로 우리는 사회 질서에 성공적으로 적응한다.
카프카는 결혼을 하려 했다. 초자아적 아버지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아버지-의-이름을 받아들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에 의해 훼방당하고, 마침내 ‘아버지 보다 더 나쁜 것’을 선택한다. 카프카는 이 모든 과정의 고통과 저항을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 남겼다. 마지막에 카프카는 『소송』의 ‘법정 문’의 우화처럼, 아버지의 격분은 오직 그를 위해 존재했던 것임을 깨닫는다.
『소송』에서 평생을 법의 문 앞에서 들여 보내주기를 기다리던 시골남자는 문지기에게 이렇게 묻는다. “누구나 다 법을 얻으려고 노력하지요. 오랜 세월 동안 나 말고 아무도 들여보내 달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대체 뭐요? p285” 남자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안 문지기는 이렇게 대답한다. “다른 사람은 누구도 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소. 당신만이 이 입구로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난 이제 가서 입구를 걸어 잠그겠소. p285” 요제프 K는 이 이야기를 해주는 신부에게 문지기가 시골남자를 속였다고 하지만, 신부는 반론을 편다. “그런데 사실 시골남자는 자유롭기 때문에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는데, 다만 그에게는 법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 금지되어 있을 뿐이지요. 게다가 그것도 한 사람의 문지기에 의해서만 금지되어 있어요. 시골남자가 문 옆의 의자에 앉아 거기서 평생 동안 지냈다면, 그것은 자유 의지로 일어난 일이지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p290 ”
카프카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의 진정한 수신인은 카프카 자신인 것이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의 카프카에 대한 내용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런 식으로 카프카의 주체적인 동일시는 (아버지의) 치욕인 ‘거의 아무것도 아님’으로부터 ‘전혀 아무것도 아님’으로 -미세하게, 하지만 모든 것을 바꾸면서 - 옮겨진다. 만약 그 모든 것이 ‘나 때문이라면’ 나의 무가치함은 더 이상 (타인의) 치욕일 수 없다. 그래서 편지 결말의 변화는 죽음으로부터 승화로의 이동이다. 자신을 무nothing의 자리에 놓는 카프카의 선택, 말라르메식으로, ‘장소 말고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최소 존재로의 환원은 창조적인 승화(문학)를 위한 공간을 창조한다. 다시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에 나오는 모토를 바꿔 말하자면, (라캉의 말장난에 따라) 대지의 표면을 더럽히는 오물litter인 ‘문학litturaterre’, 그 글쓰기의 더러운 순수함에 비하면 자그마한 성적 위반의 더러움이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p144~5」
카프카는 아버지 보다 더 나쁜 것인 무無, 즉 문학을 선택함으로써 두 아버지 즉, 초자아로부터도 자아이상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소송』 자체에 대한 감상은 지젝의 조언대로, “첫 번째 독서의 생생한 충격”을 위해 어떤 해석의 틀 안에 가두지 않고 그냥 충격으로 남겨둔다. 그래봤자, 아이와 같은 순진함은 존재하지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