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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펭귄클래식 1
토머스 모어 지음, 류경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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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의 『인문 고전 강의』나 『역사 고전 강의』는 매우 재미있는 책이지만, 그가 ‘강의’에서 다루고 있는 ‘고전’들은 읽을 엄두를 내기가 어렵다.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나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기』는 물론이고 단테의 『신곡』, 벤담의 『파놉티콘』 등도 마음만 들썩일 뿐 집어 들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르네상스시기에 대한 역사 공부를 하면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꼭 읽으려 했다. 두 책 모두 강유원이 책과 라디오 방송을 통해 ‘강의’한 것들이다. 『군주론』은 몇 년 전에 읽기는 했는데, 그다지 큰 느낌은 없었다. 딱딱하고 너무 처세술적이어서 당대의 이탈리아에서 어떤 반향을 일으켰던,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던 상관없이, 내게는 그다지 교훈적이지도 흥미롭지도 않았다. 무장한 예언가 armed prophet 정도가 고개를 끄덕일 만 했다. 힘도 없고 비전도 없는 정치 지도자들에게 지쳐가던 때였기, 지금은 더욱 그렇지만, 때문이다.

 

그렇게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게 되었다. 토마스 모어는 1478~1535, 에라스뮈스 1466(?)~1536, 마키아벨리 1469~1527 와 함께 15~6세기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사상가이다. 막 신으로부터 벗어나 인간에 대한 탐구를 새롭게 하던 시대의, 500여 년 전의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책은 놀․ 랍․ 다.

 

펭귄 코리아 판의 서문을 쓴 폴 터너는 또 다른 면에서의 놀라움을 이렇게 쓰고 있다.

 

「진정한 어려움은 이런 것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유토피아 사회의 여러 양상들 때문에 생겨난다. 독실한 가톨릭 저자였던 저자가 과연 안락사, 성직자의 결혼, 성격 불화가 원인인 부부의 협의이혼 같은 일들을 옹호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묘비명에 스스로를 ‘이단자들에게 눈엣가시 같았던 사람“으로 묘사했고, 이단자들을 비난하는 글 수백 페이지를 썼던 사람이 과연 종교적 관용을 권장할 수 있었겠는가? 엄청난 사유지 소유자였으며 나중에 부를 황금 알을 낳는 암탉에까지 비유했던 사람이 과연 최초의 공산주의자일 수 있었겠는가? p15」

 

위키백과 정도의 약력 소개를 보고 『유토피아』를 읽으면 정말로 폴 터너와 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삶이 보여주는 궤적과 『유토피아』가 그리고 있는 이상향의 이런 괴리가 이 책에 대한 분분한 해석과 논쟁을 낳고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폴 터너는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토마스 모어가 살던 당대의 영국이 이런 나라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영국은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단지 음식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교수형에 처해지고 있던 상황에서도, 한 사람이 막대한 부를 향유하는 일이 가능했던 나라였다. .. 개인의 자유에 대해 말한다면, 튜더 왕조 시대의 영국에는 언론의 자유가 없었다. 모어 자신도 그가 실제로 말한 내용이나 행동한 내용 때문에 처형당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결연하게 품고 있던 개인적 견해 때문에 처형된 것이다. 교회의 수장으로 놀랍게 변신한 헨리8세의 처신에 대해 아무런 코멘트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했다. 그가 침묵했다는 사실 자체가 정치적 범죄였던 것이다. ... p23」

 

『유토피아』가 전해주는 유토피아는 우리에게 유토피아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요소가 많다. 집단적이고 획일화된 모습은 언뜻 우리가 그 실패를 지켜보았던 사회주의 국가들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러나 15~6세기의 영국 사회를 감안한다면, 왜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위해 이런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만하다.

 

유토피아의 흥미로운 모습을 몇 가지 옮겨 적으려고 한다. 논자들이 그런 것처럼 이 책은 찬사를 바칠 부분도 비판을 할 부분도 많다. 하지만 새롭지도 재미도 없을 그런 말을 보태기보다는 토마스 모어의 놀라운 상상과 통찰을 새겨 둠으로써 기억의 쇠퇴에 대비하는 것이 유익할 듯하다.

 

 

1. 사유재산이 없는 유토피아에서 외국과의 통상과 전쟁을 위해 필요한 금을 다루는 방식 p143~5

 

이런 상황에서 돈을 만드는 원재료인 금과 은은 유토피아 인 누구로부터도 그것들이 원래 받아야 할 본질적인 가치 이상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두 귀금속의 가치는 철의 가치보다도 훨씬 더 낮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철이 없다면 인간의 생활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불이나 물이 없을 때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금이나 은이 없어도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희소성의 가치라는 바보 같은 개념만 빼놓는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어머니와도 같은 자애로운 자연은 신중하게도 흙, 공기, 물처럼 가장 위대한 은총을 바로 우리의 눈앞에 배치해 놓으셨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게 몰래 감추어두셨습니다.

 

그러나 만약 유토피아 인들이 이런 귀금속들을 귀중품 보관실에 넣고 자물쇠로 잠가 놓는다면, 거리의 평범한 시민들은 시장이나 벤치이터들이 자기들을 속이고 있거나 그 귀금속들을 이용하여 사익을 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바보 같은 의심을 할지도 모릅니다. (평범한 시민들이 그런 의심을 하는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알고 계시겠지요.) 물론 귀금속을 장식용 접시나 예술 작품으로 환원해 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우 그것들을 다시 녹여야 하거나 용병들에게 지불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그건 주인에게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 난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유토피아 인들은 귀금속을 다루는 한 가지 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들의 다른 관습들과 완벽하게 일치하지만 우리의 관습과 정반대되는 방법입니다. 특히 금을 보관하는 우리의 관습과 반대입니다. 그러니 두 분께서 실제로 직접 보시기 전까지는 이런 일이 도저히 믿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방식에 의하면 접시나 음료 용기는 비록 아름다운 장식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유리나 흙 같은 매우 값싼 재료로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개별 가정이나 공동 식당에서 요강 같은 가정용 비품을 만들 때에 은이나 금도 보통의 재료로 사용됩니다. 그들은 또 단단한 금으로 만든 사슬과 족쇄를 이용하여 노예를 억류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불명예스러운 죄를 지은 자들은 귀와 손가락에 금반지를 달고, 목에 금목걸이를 차고, 머리에 금관을 강제로 쓰고 다녀야 합니다. 그들은 사실 금과 은, 두 귀금속을 경멸의 대상으로 만드는 일이라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합니다.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금은과 헤어져야 하는 상황이 갑자기 생기더라도 누구든 단 한마디도 애석하다는 소리를 하지 않을 거라는 것입니다.

 

 

2. 치료가 불가능하고 극심한 통증을 일으키는 만성 질환을 앓는 환자에게 존엄사를 권장 p174

 

“현실을 직시합시다. 당신은 결코 정상적인 생활을 다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 폐가 되고 당신 스스로에게도 짐이 될 뿐입니다. 사실상 당신은 실질적으로 사후 체험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당신의 삶이 이토록 비참한 마당에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당신은 고문실에 수감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걸 깨부수고 더 나은 세상으로 탈출하지 않습니까? 아니라면 지시만 하십시오. 우리가 당신의 탈출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온갖 손실에서 손을 떼는 일은 상식에 불과한 일입니다. 그리고 성직자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일은 신앙적으로 경건한 일이기도 합니다. 성직자는 하느님의 대변자이기 때문입니다.”

 

 

3. 전쟁을 싫어하지만 꼭 필요한 경우 비날리아 용병(스위스 용병으로 추정)을 고용하는 것에 대하여 p195

 

아시다시피 유토피아 인들은 고용 목적을 위해 착한 사람들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것 못지않게 전쟁 목적을 위해 활용할 악한 사람들을 찾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그들은 넉넉하고도 후한 돈을 미끼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전쟁 사업에 뛰어들도록 비날리아 인들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비날리아 용병들은 좀처럼 무사히 살아 돌아와서 자신이 받아야 할 보상금을 요구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일단 무사히 살아 돌아오는 용병들은 늘 충분한 보상을 받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앞으로도 이 일이 똑같은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유토피아 인들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비날리아 인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는지 괘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 지상에서 비날리아 인들처럼 더러운 인간쓰레기들을 청소하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이 인류에게 더없는 친절을 베푸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4. 종교적 관용 p205~7

 

물론 많은 유토피아 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막으려고 하지도 않고 개종자들을 공격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곳에 있던 동안 우리 신도들 중 한 명이 어려움에 빠진 적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우리가 그러지 말라고 만류했는데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자마자 즉시 기독교 신앙에 대한 대중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설교를 하며 그는 신중한 분별력보다는 다소 과한 신앙적 열정을 내보였습니다. 결국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는 우리 종교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다른 모든 종교들을 비난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는 최고조로 목소리를 높여 다른 종교들은 모두 타락한 미신들이며, 그런 것들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불경스러운 괴물들이고 영원히 지옥 불에 빠져 벌 받는 운명에 처하게 될 거라고 외쳐댔습니다. 얼마 동안 이런 식으로 설교를 계속하고 다닌 끝에, 결국 그는 체포되고 기소되었습니다. 신성모독죄가 아니라 안녕질서 교란죄로 말입니다. 그들 나라의 헌법 내용 중 가장 오래된 원칙 하나가 바로 종교적 관용이었기 때문에 이런 형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런 종교적 관용의 원칙은 그 기원이 정복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정복 전까지만 해도 이 섬나라에서는 끊임없이 종교 분쟁들이 일어나고 있었고, 다양한 적대적 종파들이 심지어 나라를 지키는 일에도 협력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그런 행태를 들은 정복자 유토포스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자신이 그들 모두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승리를 거두자마자 즉시 그는 한 가지 법을 만들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종교 행위를 할 수 있고, 합리적인 설득에 의하여 조용히 예의바르게 하기만 한다면 자유롭게 다른 사람들을 자기 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노력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혹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키는데 실패한다 하더라도 다른 종교들에 대해 적대적인 공격을 가한다거나 폭력이나 개인적인 학대를 행사하는 일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종교 논쟁에서 지나치게 공격적인 태도를 지니는 데 대한 보통의 징벌은 추방이나 노역 형에 처하는 것입니다.

 

유토포스가 이 법을 만든 이유는 사회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바로 이런 법이 종교 자체에도 최선의 이익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떤 신조가 올바른 것인지 주제넘게 나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그는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숭배를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신조들을 믿게 만드셨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다른 신조를 믿고 있는 사람들을 겁주어서 자신의 특정한 신조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일은 어리석고 오만한 일이라는 점을 명백하고 확실하게 확신했습니다. 설령 진정한 종교는 오직 하나밖에 없고 그 밖의 다른 종교들은 모두 말이 안 되는 거짓 종교들이라 하더라도 이 문제가 조용히 합리적으로 논의되기만 한다면 궁극적으로 언젠가는 참된 진리가 저절로 우세를 점하게 될 거라는 사실이 그에게는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처럼 생각됐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만약 무력의 힘으로 결정된다면 가장 훌륭하고 가장 영적인 형태의 종교가 가장 어리석은 형태의 미신들 앞에서 굴복을 해버리는 결과가 초래될 것입니다. 마치 가시나무나 들장미 넝쿨들이 밀이나 옥수수보다 더 잘 자라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가장 못된 사람들이 항상 가장 집요한 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신앙을 선택하는 일을 자신의 생각에 따라 개인이 결정하는, 자유로운 의사 결정의 문제로 맡겨 놓았습니다.

 

 

 

특히 종교에 관한 부분은, 토마스 모어 자신이 가톨릭의 수호자로서 여섯 명의 루터파를 화형대에 올리고 마흔 명을 교도소에 보냈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 믿어지지 않는 서술이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 어떻게 이토록 다른 두 사상이 공존할 수 있었을까? 이 간극에 맞닥뜨린 토마스 모어는 “여기가 바로 로도스다!”고 외치는 대신 유토피아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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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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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말부터 도서관 신간코너에 꽃혀 있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표지 그림이 눈길을 돌리게 만들었다. 누구의 그림인지 모르겠지만, 외면하고 싶었다. 매일 도서관 앞 작은공원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돌고 또 도는 그녀의 눈과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철학으로 유명한 그 비트겐슈타인이다. "현대 독일어권 문학을 대표하는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자전적 소설" 이라는 광고문구를 보며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라는 파울이 실존인물일까 궁금했다. 위키 백과에는 진짜 파울 비트겐슈타인이 있다. 그런데 그 유명한 비트겐슈타인의 조카가 아니라 형이다. 1차 대전에 참전하여 오른팔을 잃었지만, 왼팔만으로 피아노를 연주한 유명한 피아니스트라고 한다.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으로 유명하다는데, 음치인 나는 물론 들어본 적이 없다. 여하튼 자전적 소설이긴 하지만, 파울은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이다 (어쩌면 동명의 조카가 실제할 수도 있는데, 확인을 못했다). 음악을 광적으로 좋아한다는 면에서 진짜 파울이  ('자전적' 이라는 말을 논픽션으로 받아들인다면, 또 다른 파울, 진짜 조카 파울일 수도 ;;) 모델이아닐까 싶지만, 하릴없는 추측일 뿐이다. 

 

파울은 천재이며 광인이다. 그의 발작은 전조 증세와 함께 시작된다. 갑자기 손을 떨고, "문장을 끝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쉬지 않고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말을 했다. 그의 말을 중단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p60"  말을 중단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면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단 하나의 문단으로 되어 있다. 단락 나누기 없이 파울의 친구인 '나'의 독백이 끝없이 이어진다. 잠깐 덮어놓으려면 도대체 어디에서 중단해야 할지 난감하다. 파울은 정신병으로, 나는 폐병으로 같은 병원의 다른 병동에 나란히 누웠지만, 나 역시 또 다른 광인이다.

 

"파울은 오직 광기 하나만을 갖고 있었으며 그 광기로 인해 존재했지만, 나는 내 광기에 더해서 폐질환까지 덤으로 안고 있었고, 광기와 폐질환 그 둘을 똑 같이 이용했다. 즉 두 가지 병 모두를 어느 날 이후부터 일생에 걸친 내 존재의 원천으로 삼아 버렸다. 파울이 수십 년 동안 정신병자로 살았듯이, 나는 수십 년 동안 폐병환자로 살았고, 파울이 수십 년 동안 정신병자 연기를 해 왔듯이, 나는 수십 년 동안 폐병 환자의 연기를 해 왔다. 그가 정신병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데 이용했듯이, 나는 폐병을 내 목적을 이루는 데 이용했다. 다른 사람들이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재산이나 어느 정도 위대한 예술을 얻고 싶어하고 그것을 움켜쥐고 놓지 않으면서 일생 동안 최대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어떤 상황에서라도 철저하게 이용하면서 마침내는 자기 삶의 유일한 내용으로 만들려고 욕심내듯이, 파울은 자신의 광기를 일생 동안 붙들고 놓지 않으면서 확실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철저히 이용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자기 삶의 내용으로 삼아 버렸다. 나 또한 내 광기를, 그리고 내 폐병을 내것으로 삼아 마침내 거기에서 내 예술이란 것을 탄생시켰다. p33"  

 

현대인은 모두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말은 널리 유포되어 있다.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나도 강박증이 있다. 그 강박증이 적절한 상황과 결합하면 치밀하고 빈틈없는 직장인이 되지만, 현관문을 열다말고 가스렌지 앞에 되돌아와 몇 분을 붙박히게 되면 정신질환자가 된다. 정신증과 광기는 의학적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그 기준이 그렇게 분명한 걸까? 광기말고 라캉의 죽음충동은 어떨까? 인간만이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고 뭔가에 존재 전체를 걸 수 있다. 광기가 예술을 탄생시키고 삶의 내용을 만들어 낸다. 돈이 그렇듯이, 광기도 그렇다. 그런가?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파울은 자신의 정신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죽는 순간까지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정신과 의사들은 파울의 정신병에 끊임없이 새롭고 자극적인 명칭을 붙였지만 그 어느 것도 올바른 병명이 아니었다. 하나의 병명이 나오면 늘 이전의 다른 병명과 완전히 모순되었다.  

 

"소위 신경정신과 의사라는 사람들이 어이없게도 친구의 병명을 한 번은 이렇게, 한 번은 저렇게 부르곤 했는데, 그것은 다른 모든 질병과 마찬가지로 친구가 가진  바로 그 질병에 들어맞는 올바른 명칭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으며 항상 잘못된, 항상 오류를 불러일으키는 병명만을 붙여 왔음을 인정할 용기가 없어서였다. p13"

 

용기가 없어서라기 보다는, 정신병이라고 통칭하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닐까? 지문처럼 사람들마다 다 다른 그 정신의 결을 몇 가지 분류만으로 어떻게 이름붙일 수 있을까.

 

비트겐슈타인 가문은 오스트리아의 철강 갑부였다. 실제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모르겠지만 ,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그 많은 유산을 다 줘버리고 시골학교의 선생을 했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의 파울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펑펑 줘버리고 가난 속에 홀로 죽는다. 파울은 삼촌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딱 한번 파울이 이런 말을 하기는 했다. 그의 삼촌 루트비히는 가족 중에서 가장 심각한 미치광이였다고, 억만장자가 시골 학교에서 선생으로 일하다니. 그게 도착증이 아니고 뭐겠어? p90"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파울 비트겐슈타인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는 바보천치일 뿐이었다. 그런 바보천치를, 괴상한 소리만 들으면 대단한 것인 줄 알고 귀가 솔깃해지는 외국인들이 유명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이 집안의 천치 한 명에게 전 세계가 홀라당 넘어갔어. 아무짝에 쓸모없는 인간이 어느날 난데없이 영국에서 유명해지더니 위대한 사상가로 돌변해 버리는군, 하고 웃기는 현상으로 치부해버렸다. 비트겐슈타인 집안 사람들은 지극히 교만했으므로 자기 가문의 철학자를 무시할 뿐 눈곱만한 존경심도 갖지 않았다. p91"

 

실제 비트겐슈타인 집안이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실제와 허구가 섞인데다(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 이라는 말이 더해져, 어디까지가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어쩌면 삶이 그럴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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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 2015-02-12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 후기를 보니 작가의 친구인 파울 비트겐슈타인이 실존 인물이라는 것 같다. 그런데 그에 대한 설명은 책 내용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진짜 실존인물인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만약 삼촌과 조카가 동명이인으로, 두명의 파울이 있었다면, 작가가 한번은 언급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루트비히의 형인 파울은 엄청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는데, 그런면에서 조카 파울이 실존했다면 이름뿐만 아니라 음악 천재라는 동일성을 공통으로 가졌는데, 사람들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언급하지 않았을까?
 
펭귄클래식 6
프란츠 카프카 지음,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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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을 읽은 김에 카프카의 『성』도 읽었다. 몇 년 전에 『변신』을 읽었으니, 유명한 작품은 대충 훑었나 싶지만, 『시골의사』가 남았다. 그런데 작가 소개를 보니 카프카의 고독 3부작이란 것이 있다. 『소송』 ,『성』 그리고 제목도 처음 보는 『아메리카』가 그것인데, 3편 모두 미완성이라고 한다. 『성』은 누가봐도 미완성이지만,  『소송』도 그런지는, 읽어 놓고도 몰랐다. 요제프 K가 처형당하는 10장< 종말> 다음에 미완성 원고들이 6편 실려 있기는 하다. 제목이 <종말>이고, 요제프가 죽었으니 당연히 끝났다고 생각하고, 부록처럼 실려 있는 짧은 글들은 읽어보지도 않았다. 그에 비하면 『성』은 마치 카프카가 마지막 문장을 쓰다가 갑자기 쓰러지기라도 한 것처럼 끝난다.

 

 "그녀는 K에게 떨리는 손을 내밀어 자기 옆에 앉게 하고는 힘들여 말했는데, 알아듣기는 힘들었지만 그녀가 한말은. p453" 

 

그녀는 게어슈테커의 어머니인데, 게어슈테커가 누구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직까지 별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거나 어쩌면 처음 등장한 인물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우리는 그녀가 한 말에 대한 궁금증을 영원히 풀 수 없게 되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다지 궁금한 것도 아니다. 그녀에 의해 뭔가 반전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다. K의 운명도  『소송』의 요제프 K 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죽고 사는 것이 다르다면 다르겠지만.

 

카프카에 대해서는 무수한 연구와 해석들이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도  『소송』과  『성』은 무척 비슷해 보인다....를 너머, 같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요제프 K와 K를 둘러싼 사회는 안개와 같다. 내가 가진 알라딘 책베개에는 김승옥의 『무진기행』 중 안개에 관한 구절이 빼곡이 적혀 있다. 마지막 한 문장은 이렇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는 실체일까? 존재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고, 다가갈수록 흩어져 사라지고, 그러면서도 모든 삶을 지배하는 것. K와 요제프 K가 안간힘을 다해 들어가려는 사회는 그렇게 오리무중이다.  

 

카프카는 1924년에 폐결핵으로 죽고, 『소송』과  『성』은 그의 유언을 어긴 친구에 의해 사후에 출간되었지만, 정작 집필은 각각 1914년과 1922년에 시작되었다. 20세기 초에 그린 카프카의 세계는 100년 간의 비약적 변화로 탄생한 21세기 초의 현대 세계와 분명히 다르다. 현대는 무엇보다 '투명사회'다. 밥먹는 것은 물론 혼잣말과 무의식적 탄성까지도 투명하게 공개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회다. 투명사회가 유리알처럼 반사한 투명한 빛은 옅은 안개의 가능성마저 날려 버린다. 그런데도 카프카의 이름만 나오면 자동적으로 포스트모던이 따라 나오는 것 같다.

 

옮긴이의 작품해설에 따르면 카프카의 『성』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그의 소설은 근대적인 소설 형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카프카의 '모더니즘'은 문학형식상의 근대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따라서 카프카는 '모더니즘'이란 말조차 그 반대의 의미를 갖는 역설적인 것이 되게 만든다. 카프카의 작품은 읽을수록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이해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만든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은 후기구조주의의 해체주의적 글 읽기에 모범적 범례가 되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의 문맥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p456"

 

말하자면 옮긴이조차 '이해불가능'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해불가능하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일치, 완벽한 공감, K에 대한 독자의 절대적 감정이입인 것 같다. 도대체 이게 뭐야?, 왜 성에 들어갈 수 없지?, 클람은 있기는 한거야?, K는 진짜 측량사이긴 한거야? 등등의 의문은 독자의 답답함이자 그대로 K자신의 의문이기도 해 보인다. 독자의 답답함은  『성』의 독해에 대한 답답함이지만, 또한 삶 자체에 대한 답답함이기도 하다.

 

포스트모던의 시대는 투명사회인 동시에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안개사회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안개사회의 이해불가능성을 일거수일투족을 투명하게 현시함으로써 감추려 애쓰는지 모르겠다. 칸트의 '내 마음 속의 도덕법칙' 도 없고 루카치가 그리워하는 '별이 빛나는 밤하늘' 도 없다. 카프카는 "목표는 있지만 길은 없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망설임일 뿐이다.p455" 고 했지만, 이 시대에 과연 목표라는 것이 있을까... 목표도 없고 길도 없고, 별도 없고 도덕도 없다. 있는 것은, SNS의 투명성과 IS다.  극단적인 일상과 극단적 일탈이 삶을 해체한다. 한편에는 눈만뜨면 아멘처럼 찰칵대며 시시콜콜한 일상을 나열하고, 한편에는 도시락 폭탄에서 삶의 목표를 발견한다.  투명사회는 안개사회의 외설적 이면이다.  대의는 사라지고 일상의 현시를 거부하는 자들은 실재를 찾아 요르단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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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펭귄클래식 15
프란츠 카프카 지음,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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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카프카를 읽었다. 사실은 작년에 『변신』을 읽기는 했다. 그래도 그때는 카프카를 읽은 것 같지 않았다. 잘 이해를 못했기 때문일까? 지난주에 『소송』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카프카를 읽은 것 같았다. 이번에는 카프카를 이해했다는 말인가?

 

 

지젝의 『시차적 관점』에는 카프카에 관한 이런 글이 있다.

 

「... 카프카를 읽는 것은 추출하기라는 지대한 노력을 요구한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적절한 해석적 지평에 대하여) 더 많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카프카의 글이 가진 살아 있는 힘에 노출되도록 전형적인 해석적 기준들에 대한 지식을 버리는 것이다. 세 개의 그러한 해석적 틀이 있다. : 신학적인 틀(부재하는 신에 대한 간절한 추구) : 비판적 틀(소외된 현대 관료주의의 악몽 같은 세계를 무대에 올리는 것) : 정신분석적 틀(“정상적인” 성관계를 불가능하게 한 카프카의 “해결되지 않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 모든 것을 지워야만 한다. : 독자가 카프카의 우주가 가진 살아 있는 힘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아이와 같은 순진함이 복원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카프카의 경우 첫 번째 (단순한) 독서가 흔히 가장 적절한 것이며 두 번째 독서는 주어진 해석의 틀을 카프카에게 강제하여 첫 번째 독서의 생생한 충격을 “지양”하려는 시도가 된다. 이것이 우리가 카프카의 주요 업적 중 하나인 “오드라덱”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p231~2」

 

덕분에 나는 펭귄 클래식 판의 작품해설에 조금의 미련도 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이와 같은 순진함”으로, 카프카를 느꼈던 것도 아니다. 도대체 오염된 세상에 순진한 아이가 가능한지도 의문이다. 당장 지젝부터 카프카에 대한 해석적 틀을 여러 번 제시해 왔다. 내가 카프카를 읽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에 짓눌린 것도 지젝 때문이다. 『시차적 관점』에는 정신분석의 핵심 개념인 대상a를 카프카의 ‘오드라덱’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드라덱은 분명 라캉이 『세미나Ⅺ』과 그의 중요한 글인 ≪무의식의 위치≫에서 라멜라로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기관으로서의 리비도이자, 신체 없는 “불사의” 비인간적·인간적 기관이며, 신비로운 “불사의” 전주체적 생명-물질이다. 또는 그보다 상징적 속박을 벗어난 생명 물질의 잔여이며, 일반적인 죽음 너머 부성적 권위의 영역 밖에서 어떤 고정된 거처 없이 유목적으로 지속되는 “무두적” 충동의 끔찍한 박동이다. 그러므로 카프카 이야기 이면에 제시되는 선택은 라캉의 “아버지 또는 그 보다 나쁜 것”이다. : 오드라덱은 아버지의 대안으로서 “더 나쁜 것” 이다.p239」

 

오드라덱은 언뜻 보면 납작한 별모양의 실패 같은데, 꼭 실패만은 아니다. 옛날에는 알아볼 만한 모양이었는데, 마모에 의해 이제는 잔여만 남았다고도 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전체적으로는 무의미해 보이지만 그 자신의 방식으로는 완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드라덱은 특이할 정도로 민첩하고 붙잡히지 않아, 정밀하게 조사할 수도 없다. 다락방, 계단, 로비, 현관에 잠복해 있는데 몇 달간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항상 충실하게 집으로 돌아온다. 내가 죽은 후에는 아이들의 발밑에도 나타날 것 같다. 카프카가 단편 『The Cares of a Family Man』에서 설명하고 있는 오드라덱의 형상이다. 카프카는 “그는(오드라덱은)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나 이후에도 살아남을 것이라는 생각은 상당히 고통스럽다.” 고 쓰고 있다. 『소송』의 마지막 문장도 이와 비슷하다. 「“개 같군!” 하고 그는 말했으나, 자신은 비록 죽어도 치욕은 남을 것 같았다. p303」

 

카프카는, 우리나라의 들뢰즈 산실(?)이라 알려진(적어도 대중에게는), 이진경의 <수유 너머 N>이 꾸준히 읽고 연구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들뢰즈를 읽다 보면 자연 카프카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카프카는 현대 철학자들의 스타? 혹은 교과서?,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지젝은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에서 카프카와 그의 아버지의 관계를 매우 자세히 다루며, 그의 문학은 “아버지 보다 더 나쁜 것”의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카프카와 아버지의 관계는 매우 심각했다. “카프카를 힘들게 한 것은 아버지의 과도한 현존이다.p129” 그런데 아버지의 과도한 현존은 역설적이게도 아버지의 상징적 기능이 상실되었음을 의미한다.

 

「 우리는 또다시 인과율의 고유한 질서를 명심해야 한다. 아버지의 과도한 활력이 그의 상징적 권위를 무너뜨린 것은 아니다. 반대로 카프카가 아버지의 과도한 활력에 진저리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부성적 권위의 결핍을 전제하는 것이다.

아버지-의-이름Name-of-the-father의 진짜 기능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확히 주체로 하여금 아버지를 ‘상징적으로 살해’하도록 하는 것, 그의 아버지를(그리고 폐쇄적인 가족의 회로를) 단념하여 자유롭게 자기 삶의 길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카프카가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아버지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지시한다.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는 주체가 영원히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그를 리비도적 곤경에 빠뜨린 것은 주체 자신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카프카가 아버지의 이름을 거부한 것은 아버지의 포획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포획의 가장 명백한 징표이다.p130」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상징계의 진입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징계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인가? 지젝이 자주 그러듯, 도스토예프스키의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여기서 뒤집혀야 한다. “신이 없다면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상징적 아버지가 아니라 원초적 아버지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아버지 즉 주인에는 두 가지가 있다. 공적인 상징적 주인과 비밀스럽게 활동하며 실제로 모든 것을 조정하는 악마적 마법사, 원초적 아버지가 그것이다. 아버지의 이름, 즉 가부장적인 상징적 권위의 해체는 새로운 주인의 출현을 예고한다. 카프카에게 아버지는 상징적 권위를 상실하고, 외설적인 원초적 아버지로 돌아온다.

 

「라캉의 용어로, 상징적 동일화의 특질이나 자아 이상이 중지될 때, 주인이 상상적 이상으로 축소되어 버릴 때, 그것의 괴물 같은 형상으로 우리의 삶을 조종하는 전능한 악신의 초자아 형상이 출현한다. 이런 형상 속에서 상징적 권위의 고유한 효력은 중지되고, 그로 인해 상상계(외양)와 (편집증의) 실재가 중첩된다. p135」

 

프로이트는 주체를 윤리적으로 행동하게 몰아가는 세 가지 작인을 제시했다. 이상적 자아, 자아 이상, 그리고 초자아가 그것이다. 프로이트는 이 세 가지를 혼용했지만 라캉은 이 세 항을 엄격히 구별한다. 이것은 라캉의 삼항조인 ISR, 즉 상상계I-상징계S-실재계R에 상응한다.

 

「이상적 자아는 주체의 이상화된 자기 이미지(내가 되고 싶거나 타인이 나를 이렇게 봐 줬으면 하는 상)를 의미한다. 자아 이상은 그 응시로 나의 자아 이미지를 각인시키려는 작인, 나를 지켜보며 내가 최선을 다하도록 독려하는 대타자, 내가 따르고 실현하고 싶어 하는 이상적 ‘나’이다. 그리고 초자아는 그 작인의 집요하고 가학적이며 징벌하는 측면이다. 이 세 항의 구조화는 명백히 라캉의 상상계-상징계-실재로 이루어진 삼항구조이다. 이상적 자아는 상상적인 것으로, 라캉이 ‘작은 타자’라고 불렀던 내 자아의 이상화된 분신 이미지다. 자아 이상은 상징적인 것으로, 내가 상징적으로 동일시하는 지점, 내가 대타자 속에서 나 자신을 관찰하는(판정하는) 지점이다. 초자아는 실재적인 것으로, 나에게 불가능한 요구를 퍼붓고 그것에 부응하지 못하는 나의 실패를 조롱하는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작인, 그 시선 속에서 나의 ‘나쁜’ 갈망을 억누르고 그 명령에 따를수록 점점 유죄가 되는 작인이다.p137~8」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어느 것이 정말 윤리적인 작인일까? 보통의 특히 미국의 정신분석학자들은 나쁜 초자아에 맞서 좋은 자아 이상을 수립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아버지-의-이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가장 평온한 방법이다. 기존의 사회-상징적 질서에 따르면, 쉽고 편안하다. 그러나 라캉은 이런 손쉬운 방법에 반대하면 네 번째 작인을 주장한다. 라캉이 가끔 ‘욕망의 법’이라 부르는 것으로, 우리의 욕망에 부응하는 행동을 요구하는 작인이다.

 

「라캉에게, 우리를 성장과 성숙으로 이끄는 자비로워 보이는 자아 이상은 우리로 하여금 기존의 사회-상징적 질서의 ‘합리적’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욕망의 법’을 배반하게 만든다. 초자아는 그 과도한 죄의식 속에서 자아 이상의 필연적 이면일 뿐이다. 초자아는 ‘욕망의 법’에 대한 우리 자신의 배반에 관하여 참을 수 없는 압박을 가한다. 간단히 말해, 라캉에게 초자아의 압박 속에서 경험하는 죄의식은 환영이 아니라 실제적이다. “우리의 죄는 오직 우리의 욕망에 의해 주어진 토대와 관련해서이다.” 그래서 초자아의 압박은 우리의 욕망에 대해 우리가 실제로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p139」

 

라캉이 제시하는 것은 네 번째 작인, 욕망의 법이다. 사회의 질서에 순응하며 아버지-의-이름을 받아들이는 것은 외견상 쉽지만, 대가를 요구한다. 주체의 욕망을 억압해야 한다. 그러나 억압된 욕망은 초자아의 압박으로 돌아온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가끔씩 일탈을 꿈꾸며 초자아를 적당히 달랜다. 욕망은 억압되고 초자아는 가상의 세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그 대가로 우리는 사회 질서에 성공적으로 적응한다.

 

카프카는 결혼을 하려 했다. 초자아적 아버지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아버지-의-이름을 받아들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에 의해 훼방당하고, 마침내 ‘아버지 보다 더 나쁜 것’을 선택한다. 카프카는 이 모든 과정의 고통과 저항을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 남겼다. 마지막에 카프카는 『소송』의 ‘법정 문’의 우화처럼, 아버지의 격분은 오직 그를 위해 존재했던 것임을 깨닫는다.

 

『소송』에서 평생을 법의 문 앞에서 들여 보내주기를 기다리던 시골남자는 문지기에게 이렇게 묻는다. “누구나 다 법을 얻으려고 노력하지요. 오랜 세월 동안 나 말고 아무도 들여보내 달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대체 뭐요? p285” 남자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안 문지기는 이렇게 대답한다. “다른 사람은 누구도 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소. 당신만이 이 입구로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난 이제 가서 입구를 걸어 잠그겠소. p285” 요제프 K는 이 이야기를 해주는 신부에게 문지기가 시골남자를 속였다고 하지만, 신부는 반론을 편다. “그런데 사실 시골남자는 자유롭기 때문에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는데, 다만 그에게는 법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 금지되어 있을 뿐이지요. 게다가 그것도 한 사람의 문지기에 의해서만 금지되어 있어요. 시골남자가 문 옆의 의자에 앉아 거기서 평생 동안 지냈다면, 그것은 자유 의지로 일어난 일이지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p290 ”

 

카프카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의 진정한 수신인은 카프카 자신인 것이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의 카프카에 대한 내용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런 식으로 카프카의 주체적인 동일시는 (아버지의) 치욕인 ‘거의 아무것도 아님’으로부터 ‘전혀 아무것도 아님’으로 -미세하게, 하지만 모든 것을 바꾸면서 - 옮겨진다. 만약 그 모든 것이 ‘나 때문이라면’ 나의 무가치함은 더 이상 (타인의) 치욕일 수 없다. 그래서 편지 결말의 변화는 죽음으로부터 승화로의 이동이다. 자신을 무nothing의 자리에 놓는 카프카의 선택, 말라르메식으로, ‘장소 말고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최소 존재로의 환원은 창조적인 승화(문학)를 위한 공간을 창조한다. 다시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에 나오는 모토를 바꿔 말하자면, (라캉의 말장난에 따라) 대지의 표면을 더럽히는 오물litter인 ‘문학litturaterre’, 그 글쓰기의 더러운 순수함에 비하면 자그마한 성적 위반의 더러움이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p144~5」

 

카프카는 아버지 보다 더 나쁜 것인 무無, 즉 문학을 선택함으로써 두 아버지 즉, 초자아로부터도 자아이상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소송』 자체에 대한 감상은 지젝의 조언대로, “첫 번째 독서의 생생한 충격”을 위해 어떤 해석의 틀 안에 가두지 않고 그냥 충격으로 남겨둔다. 그래봤자, 아이와 같은 순진함은 존재하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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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kofiev 2015-01-20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1세기 자본 리뷰보다 서재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편안한 감상자의 주조같은 게, 보기 좋네요. 배경적으로 알아가는 것도 있습니다. 좋은 책 많이 접하길 바랄게요.

말리 2015-01-20 20:54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TV에서 <빨강머리 앤>도 <알프스 소녀 하이디>도 <플랜더스의 개>도 보지 못한다. 불후의 명작 <캔디 캔디>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도 TV에는 어떤 아름답고 슬픈 만화 주인공들이 아이들의 마음과 영혼을 사로잡겠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내가 모르는 그 누구들도 나의 주인공들처럼 오래오래 아이들의 가슴 속에 꿈으로 살아있겠지만, 나는 앤과 하이디와 캔디캔디와 넬로를 모르는 아이들이 어쩔 수 없이 안타깝다.

 

위더의 『플랜더스의 개』를 직접 읽은 것은 처음이지 싶다. 효령이와 함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비룡소 출판사의 완역본을 읽었다. 별 생각없이 읽기 시작해서 한밤중에 나는 펑펑 울었다. 작년 한해 내내 읽은 어떤 책도 그렇게 내 감성을 무방비로 뒤흔들지 못했다. 꺼이꺼이 삼키려던 눈물은 딸국질로 변하고 콧물이 숨구멍을 막아버릴 것 같았다. 다 아는 이야기에 왜 그렇게 울음을 쏟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언제나 ,왜? 라고 묻기를 좋아하지만, 나는 왜?라고 한마디도 묻고 싶지 않았다. 황현상 선생은 트윗에서 환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세월호 참사로 슬퍼하는 한국인에 대한 글을 쓰라는 숙제에서 초등학생이 오빠와 나는 울었다로 썼다." 울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이 환유다. 나도 이제 이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영화 <더 리더> 의 마지막에 케이트 윈슬렛은 감옥에서 자살한다. 자살하기 전 그녀는 혼자서 글자를 배운다.... 기 보다는 터득한다. 책 속의 글자와 책을 녹음한 말을 하나하나 비교하며, 단어를 깨우친다. 케이트 윈슬렛이 읽는 책은 안톤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이다. 나는 그때부터 이 책이 궁금했다. 그런데도 이제야 읽었다. 나는 그녀의 자살과 이 책의  내용이 관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작가가 아무책이나 고르지는 않았을테니까. 그런데 모르겠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아주 짧은 단편이다. 내용은 무척 단순하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젊은 여자가 얄타의 휴양지에서 자신보다 두 배는 나이가 많은 남자를 만나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다. 여자가 집으로 돌아간 뒤 이 바람둥이 남자는 다른 많은 여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금방 잊어버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진정한 사랑임을 깨닫고, 여자를 찾아가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다. 둘은 속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행복을 찾을 방법을 고민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나는 혼자 이렇게 소리쳤다.  "아니! 진짜 이렇게 끝나는 거야?" 진짜 그렇게 끝났다. 영화 속 케이트 위슬렛이 깨달은 '문자'와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가 얻은 '사랑'이 같은 것일까? 그 보다 이 책이 왜 고전인거야?

 

 

얼마전 JTBC 뉴스룸에 김혜자가 나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인터뷰를 실시간으로 보면서  많이도 키득거렸다. 그렇게 재미있으면서 따뜻한 인터뷰는 처음이었다. 압권은 당연히 김혜자의 '손석희는 깍쟁이', 발언이다. 그 인터뷰는 영화 홍보의 하나였지만, 길이길이 남을 인터뷰가 될 것이다. 김혜자가 출연한 영화는 좋은 평을 듣고 있지만, 상영관이 별로 없어 고전하고 있다. 그 영화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이다.

 

마크 해던의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이란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이 책이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인 줄 알았다. 둘 다 이름치고는 긴데다가, 개와 의문의 사건과 훔친다는 단어들이 뒤섞이니, 하나로 들릴 법도 하지 않은가. 여하튼 개에게 무슨 일인가가 발생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와 책은 아무 상관이 없다.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은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처럼 정작 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열다섯 살의 크리스토퍼는,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수학천재 자폐아인 듯하다. 이 책은 이 아이가 쓰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는데, 일종의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  성장소설과 자폐아, 대강은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감동의 요소도 있고, 반성의 계기도 있다.

 

그럼에도 크리스토퍼가 만약 현실에 출현한다면 상황은 그렇게 녹록할 것 같지 않다. 크리스토퍼는 나름의 사고체계와 행동지침을 가지고 있다. 이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면 크리스토퍼의 행동은 충분한 개연성을 갖는다. 이해할만 하다. 그러나 스위스제 칼을 가지고 다니며, 낯선 사람과는 말도 하지 않으려 하고, 조금이라도 자신을 건드리는 사람은, 말 그대로 어깨나 팔등이 살짝 건들리기만 해도, 거칠게 밀어 쓰러뜨리고, 백화점 한복판에서 뒹굴며 악을 쓰는 크리스토퍼를 현실에서 맞닥뜨린다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경우에 따라 대단한 위협을 느낄 수 있다. 크리스토퍼는 진짜로 스위스제 칼을 휘두를 수도 있다. 타인을 이해하려 하지만, 타인을 이해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타인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이 한권의 책으로 해결될 수 없는 어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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