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대서양을
헤쳐 나가는
유럽
1. 바다로 나서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1492년은 콜럼부스가 서인도제도에 도착한 날이다. 이 사건이 세계사의 한 획을 그은 이유는 단지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위상이 뒤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면서 수탈과 착취를 기반으로 하는 제국주의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유럽 국가들은 야만에 가까웠고, 발달된 과학과 눈부신 문명은 동양에서 만개하였다. 몽골의 대도를 찾아서, 인도와 중국의 진귀한 물품들을 구매하기 위해, 유럽의 종교인, 학자, 상인들이 아시안 드림을 꿈꾸며 먼 길을 가로질렀던 것이다.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 남쪽의 캘리컷으로 연결되는 항로를 열었던 것도 이슬람 상인이 차지하고 있는 육로를 피해 직접 인도에 가서 값진 향료를 사오기 위해서였다. 에스파냐의 입장에서는, 육로는 이슬람에, 인도양 항로는 포르투갈에 가로막힌 상황에서, 인도로 가는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밖에 없었는데, 지구가 둥글다면 서쪽으로 가도 결국은 인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서쪽 항로를 개척하게 되었다. 서쪽 바다 즉 대서양을 가로지르던 콜럼부스는 거기가 어딘지도 모른 채, 1492년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하게 되었고, 지구의 지리적 구조에 무지했던 15세기 유럽인들은 그곳을 서인도, 처음 도착한 섬들을 서인도제도, 그곳에 살던 원래 주민들을 인디언이라고 이름 붙였다.
에스파냐인들이 도착한 멕시코 및 남아메리카 대륙에는 아스텍, 마야, 잉카라는 오래된 문명과 거대한 제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확연히 밝혀지지 않은 몇몇 이유들로, 이 찬란했던 문명은 겨우 수 백 명의 에스파냐 침략군에 허무하게 무너졌고, 그 이후 대부분의 지역이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되어 무자비하게 착취당했다. 남미의 많은 국가들이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만이 스페인어 대신 포르투갈을 사용하고 있다. 그들이 매일 사용하고 있는 언어 자체가 치욕의 역사를 아프게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도 한글을 소중하게 지켜 낸 우리민족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요즘에 와서는 모든 국민들이 영어에 목을 매는 희한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지만, 후대에 가면 아마도 이 비정상적인 시대는 희화되어 한낱 웃음거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여하튼 남미 고대 문명의 몰락에 대해서는 총, 칼을 만들 수 있는 철기 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다는 점, 원주민 내부의 갈등이 극심했던 시기라는 점, 그리고 유럽인들이 가져온 전염병에 전혀 내성이 없었다는 점들이 그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에스파냐는 뜻하지 않게 남미대륙을 차지하고 수많은 은광을 독점하면서 16세기 유럽 세계의 최강자가 되었다. 식민지의 부를 바탕으로 스페인의 무적함대, 아르마다는 대서양을 호령하며, 스페인 제국의 위용을 자랑하였다.
2. 유럽의 새 강자, 영국과 프랑스
에스파냐의 지배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세기가 바뀌며 유럽의 강자도 바뀌어 갔다. 16세기가 에스파냐였다면, 17세기는 네덜란드가, 18세기는 프랑스와 경쟁하던 영국이 최종 승자가 되었다.
그 많은 영토와 은광을 가졌던 에스파냐는 왜 몰락했을까? 에스파냐는 국내 공업을 발전시키지 않고 동양의 사치품과 다른 가의 공산품을 사들이는데 막대한 부를 낭비했다. 그러나 더 큰 원인은 펠리페 2세의 극단적인 종교 탄압에 있었다. 펠리페 2세는 카톨릭교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유럽에서 벌어지는 온갖 종교 전쟁에 끼어들었다. 또 에스파냐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펠리페 2세가 이들을 추방하면서 상업과 금융이 붕괴했다.
한편 네덜란드는 펠리페 2세의 종교 탄압에 대항한 끈질긴 투쟁 끝에 독립을 쟁취하고 유럽에서 가장 자유로운 국가가 되었다. 사상과 종교 문제로 탄압받던 유럽의 지식인들과 과학자, 종교 지도자 그리고 에스파냐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대거 네덜란드로 모여들었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등의 근대철학자들도 네덜란드에서 출판 활동을 했다. 또한 유대인들의 선진 금융기법과 다이아몬드 세공 등의 기술을 바탕으로 네덜란드는 상업과 금융 중심지로 일약 발돋움 하였다. 조선술도 발전하여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1/3 정도의 비용으로 상선을 건조해 내었다. 그 결과 전체 유럽 상선의 3/4을 가진 유럽 최대의 해운국이 되었다. 조선으로 표류하여 온 하멜이 하필 네덜란드 사람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유럽 한 귀퉁이의 조그마한 나라가 단번에 유럽 패권을 쥐게 된 것은 사상과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자 유럽의 우수한 인재들이 한꺼번에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과학과 철학은 물론 상업, 금융, 출판 등 다양한 분야의 뛰어난 인재들이 이루어낸 성과야말로 네덜란드가 17세기 유럽의 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이었다.
영국은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하면서 유럽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초기 영국은 네덜란드와 연합하여 에스파냐에 대항하고, 네덜란드 독립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가 유럽 최대의 해운국이 되자 두 나라는 몇 차례의 전쟁을 통해 패권을 다투었다. 17세기 중후반 무렵부터 네덜란드는 위축되기 시작했고, 영국이 우위를 차지했다.
17세기 후반에는 프랑스가 유럽의 패권을 두고 영국과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며 국력을 신장했으나, 이후 재정의 고갈로 쇠약해졌다. 이후 유럽의 패권은 영국이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다.
3. 서유럽을 따르는 중·동부 유럽
러시아는 그리스 정교와 비잔티움 문화를 수용하며 유럽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며 발전했다. 러시아가 유럽의 일원으로 등장한 것은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 때부터다. 표트르는 서유럽의 정치·경제·군사 제도를 본보기 삼아 러시아를 개혁하였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등의 중·동부 유럽도 프랑스의 절대왕정과 서유럽의 정치,경제 체제를 받아들여, 국력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이들 중·동부 유럽 국가들은 서유럽과는 달리 농노제가 여전히 기승을 부렸다. 서유럽은 봉건제가 붕괴하고, 부르주아가 성장하고, 근대정신과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서서히 근대적 국가로 발전해 나간 반면, 서유럽을 압축적으로 뒤따른 중·동부 유럽은 철저한 체질 개선을 이루지 못한 채 외양만 쫓아갔던 것이다. 그 부작용으로 농노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다.
4. 유럽을 살찌운 대서양 무역
16세기 이후 서유럽 국가들은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아시안 드림을 꿈꾸던 야만적 국가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변신하였다. 보통 17세기는 과학의 시대, 18세기는 산업혁명의 시대, 19세기는 부르주아의 시대로 불린다. 뉴턴과 갈릴레이, 증기기관과 방직기계의 발명이 자본주의시대를 선도해 낸 것이다.
그런데 이 연구 개발의 막대한 자금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콜럼부스 이래 서유럽 여러 국가들이 앞 다투어 침탈한 식민지의 희생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남아메리카의 은광과 대규모 농장, 그리고 아프리카 노예가 오늘날 서구 문명의 밑거름이 되었다. ‘신사의 나라’로 통하는 영국의 이면에는 ‘노예무역’ 이라는 잔혹성이 감추어져 있다.
대규모 은광시대가 끝나자, 유럽 열강은 아메리카 각지에서 담배, 커피, 면화, 사탕수수 등의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여 막대한 이득을 취하였다. 그런데 아메리카 원주민들만으로는 노동력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사냥해 와서 강제 노역을 시켰다. 그러자 노예 자체가 커다란 상품이 되었고 유럽 각국은 노예무역에 뛰어들었다. 사람이 상품이 된 것이다.
삼각무역은 세 대륙, 유럽에서 출발한 상선이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를 거치며 어떤 상품들을 거래하는지 잘 보여준다. 유럽에서 총기와 잡화를 실은 배가 아프리카 해안에 도착하면, 실어온 물건들을 아프리카의 노예와 맞바꾼다. 노예를 실은 배는 다시 아메리카에 상륙해서, 대농장에서 노예들이 생산한 설탕과 면화 등을 다시 실어온 노예와 맞바꾼다. 유럽의 공업제품과 아프리카의 노예, 아메리카의 설탕 등을 엮는 삼각무역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 삼각무역으로 가장 덕을 본 나라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17세기 후반부터 150년 동안 340만 명의 흑인 노예들을 실어 날랐다. 영국 산업혁명의 종자돈은 바로 이 아프리카 흑인들의 눈물이었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유대인 학살, 전쟁의 책임 등에 대한 독일의 사과를 당연시하는 이들 근대 유럽 열강들은 그러나 아직도 아프리카 노예들의 희생, 남아메리카 원주민 학살 등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