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고전 강의 - 오래된 지식, 새로운 지혜 고전 연속 강의 1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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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유원의 『인문古典강의』는 제목 그대로 강의록이다. 서울시 동대문구정보화도서관에서 10개월 동안 진행한 강의 내용을 책으로 만든 것이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 말하듯이 쓴 책이라는 점에서 뿐만이 아니라 워낙 입담이 구수하고 지식이 해박하여 막걸리처럼 술술 넘어간다.

  12권의 고전을 강의했는데, 이 책들은 명성이나 취향에 따라 무작위로 선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신중하게 골라낸 것이다. 한 권 한 권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서양 고전 11권을 연대순으로 세우면 우리 인간의 가치관이 어떤 변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 확연히 드러난다. 문학, 역사, 철학 등이 뒤섞여 있지만 역사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긴밀한 연관을 가진 이 고전들의 조합은 인간과 세계의 총체적 모습을 거시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왜 이런 사회구조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하며 이렇게 살고 있는가? 를 질문해 본 적이 있다면 이 강의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울 것이다.

 

  현대의 우리는 모든 것을 ‘유용성’의 관점에서 따진다. 우리는 먼저 “그것이 너한테 무슨 이익이 되니?” 라고 묻는다. “그것이 정말 고귀한 일이니?” “그것이 신이 바라는 것이니?” 라고 묻는 법을 잊어 버렸다. 희랍 시대에 삶의 기준이 되었던 것들은 이제 우리에게 너무 낯설다. 무엇이 우리의 정신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을까? ‘한 사회의 준거틀로 작용하는 텍스트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그 사회가 지금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저자가 선택한 서양 고전 11권은 각 시대의 패러다임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텍스트이다.

  그러나 누구나 느끼다시피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무한한 인내를 요구하는 지루한 작업이다. 더욱이 아무 맥락 없이 고전에 덤벼들다가는 별 다른 가치도 찾지 못하고 나가떨어지기 십상이다. ‘시대를 뛰어넘어 변함없이 읽을 만한 가치를 지닌 것’ 이 고전이라 해도 한편으로 고전은 그 책이 쓰인 특정한 시대의 정신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한 사회의 준거틀’ 을 그 사회와 무관하게 읽어낼 수는 없다. 고전은 추상적 보편성이 아니라 구체적 보편성을 가진 텍스트이다.

  『인문古典강의』가 가진 장점 중의 하나가 이것이다. 우리가 각각의 고전을 직접 읽는 것만으로는 쉽게 알기 힘든, 시대적 배경과 역사 속의 맥락을 짚어줌으로써 전체 역사 속에서 각 고전이 차지하는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고전들을 살펴보노라면 자연스럽게 인간 정신의 변화를 알아 볼 수 있다. 과거의 삶의 방식은 현재 우리의 것과는 완연히 다르다는 것도, 그리고 미래의 우리 삶은 또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도 떠올릴 수 있다.

 

  이 책이 다루는 마지막 고전은 앞의 11권과는 달리 동양의 대표적 고전인 공자의 『논어』이다. 저자는 정치사상가로서의 공자의 면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공자가 평생 동안 묻고 답한 주제는 ‘어떻게 정치를 할 것인가?’ 이었다. 공자는 정치는 올바름을 세우는 것이며, 올바름은 의이고, 의가 겉으로 드러난 형태가 예라고 말했다. 서구 근대 사상과는 확연히 다른 정치철학이다. 11권의 서양 고전들이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를 낳은 인간 정신의 변화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면, 공자의 사상은 우리가 다른 모습으로 살 수 있었다는 가능성을 말해 주고 있다. 뭐 나는 공자의 사상에 그다지 공감하지는 않지만, 서구 근대정신의 몰락과 함께 ‘물건으로 변해 버린 인간’ 에 대한 저자의 한 가닥 위로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부분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스 윤리학』 그리고 단테의 『신곡』이다. 근대 이전의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텍스트들이다. 고대 희랍 세계에서는 ‘고귀함’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유용성이나 합리성이 아니라 고귀함이 가치 판단의 기준인 것이다. 중세적 삶의 기준은 두말할 것도 없이 신의 뜻이다.

 

 

  둘째 부분은 근대적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일곱 권의 텍스트들이다. 근대적 사고의 신호탄인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인간을 세계의 중심으로 세운 주체성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상업부르주아 계급의 당파적 이익을 국가 통치의 근간으로 만든 로크의 『통치론』, 로크를 토착적으로 수용한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근대 국가를 폭력의 독점적 지배조직으로 바라본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 이익으로 계산 가능한 것만을 합리성으로 인정한 공리주의자 벤담의 『파놉티콘』, 근대 패러다임의 몰락을 통찰한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 있다.

  셋째는 마지막 장에 덧붙여 놓은 공자의 『논어』다.

 

 

 

  근대는 영어로 modern 이다. 그러나 modern은 현대로 번역되기도 한다. 번역자들은 이 둘을 어떻게 구분할까? 나는 늘 궁금했는데, 이 책에서 대답의 실마리를 찾았다.

  「‘모던’이라는 말이 15세기부터 오늘에 이르는 세계를 구조적 틀의 측면에서 가리킬 때는 ‘근대’로 옮기면 적절합니다. 이를테면 ‘21세기 한국사회는 근대적 자본주의 패러다임이 관철되고 있는 시공간’ 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5세기부터 오늘날까지를 역사적으로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앞선 시기는 15세기부터, 과학혁명, 계몽주의를 거쳐 19세기 중반까지이고, 이어지는 시기는 19세기 중반 -굳이 연대를 특정하자면 1850년대-부터 오늘날까지입니다. 저는 앞의 시기를 ‘근대’라 하고 이어지는 시기를 ‘현대’라 합니다. 근대적 패러다임 안에 역사적 시기로서의 근대와 현대가 있는 것입니다. p445」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사실상 근대와 다르지 않다. 근대가 만든 패러다임 안에 그대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연대기 상으로 근대와 현대를 나누고 있을 뿐이다. modern은 근대이자 근대 안의 현대이다. 우리에게 약 600년 전의 고전이 낯설지 않은 까닭은 우리 시대정신의 뿌리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근대적 패러다임, 근대의 정신은 무엇일까? 근대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는 통일국민국가, 자본제적 생산양식, 개인주의 혹은 합리주의 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공기나 물처럼 자연적으로 느껴지지만, 중세 말과 근대 초의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으로 다가왔을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물론 근대사회는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약 600년 전에 처음 등장하여 수 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전환기를 살았던 인간들에게 가장 충격적으로 느껴졌을 변화는 아마도 신의 몰락일 것이다. 세계의 중심을 차지하던 신이 쫓겨나고 인간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근대는 인간이 중심인 세계이다.

 

 

 

  15세기 이후에 쓰인 7권의 고전들은 근대적 패러다임이 정치와 경제, 사상에 가져온 변화의 방향을 뚜렷이 가리켜 준다. 현재 우리 사회의 준거틀인  근대적 패러다임이 이 7권의 고전들에 어떻게 나타나있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몽테스키외는 몇 마디로 정리할 내용이 보이지 않아 생략하고 실제로는 6권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는 신이 사라졌다. 『군주론』은 지극히 현실적인 정치학 교과서이다. 도덕과 신을 철저히 배제한 이 현실성이 바로 근대적 사고의 맹아이다.

  데카르트는 주체성의 철학자이다. 코기토를 통해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놓았다. 인간 정신 이외의 모든 것은 심지어는 인간의 육체마저도 동물, 자연 등과 함께 대상으로 전락했다.

  로크는 인간의 정신이 아니라 인간의 ‘소유권’ 을 세계의 중심에 놓았다. 로크는 인간을 이성을 통해 욕망을 충족시키는 존재로 규정했다. 로크는 17세기에 새롭게 대두한 상업부르주아 계급의 당파성을 충실히 대변하는 사상가였다. 영국의 입헌군주국은 개인의 소유권을 최우선 가치로 삼고 자산가의 이익을 극대화시킨 자유주의국가였다. 로크의 사상은 미합중국의 건국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세계를 지배한 영국과 미국의 통치 기반이 된 이 자유주의 사상은 전 세계에 전파되어 지금까지도 확고부동한 원리로 기능하고 있다.

  베버는 이렇게 틀이 잡힌 근대국가의 논리가 얼마나 냉혹한지, 정치가 어떻게 악마적인 힘들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지를 암울하게 설파한다.

  한편 벤담의 파놉티콘은 이익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세계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8세기 산업혁명은 인간을 생산의 주체가 아니라 기계의 부속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벤담은 파놉티콘이라는 감옥을 설계함으로써 감옥 운영과 수감자의 노동력 착취에 최대한의 효율성을 도입했다. 벤담은 감옥뿐 아니라 학교와 병원 등 사회의 모든 기관에 파놉티콘을 적용하여, 감시의 내면화를 통해 경제성을 획득하려 했다.

  폴라니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몰락과 서구 근대 문명의 파산 과정을 샅샅이 탐색했다. 폴라니가 볼 때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상품화가 불가능한 토지, 화폐, 노동을 상품화했기 때문이다. 자기조정 시장은 파산하고 서구 열강은 이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식민지 침략에 나섰다. 1차 세계대전은 식민지를 둘러싼 쟁탈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데카르트적 근대 인간의 몰락을 처참하게 보여주었다.

 

 

  「개인이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가족, 국가, 공동체와의 연결고리를 끊고 오롯이 독자적인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개인 중심주의는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이 명제에서는 나의 생각이 모든 것의 출발점입니다. 데카르트는 철저하게 개인의 주체성을 내세운 철학자입니다. 그가 천명하는 근대적인 주체성은 모든 공동체적 연관,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유산과 전통을 끊어낸, 말 그대로 독자적인 개인입니다. 내 몸과 내 정신은 온전히 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데카르트적 자아의 사회적 함의입니다. 이것과 사적 이익이라는 로크의 사상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로크는 《통치론》에서 인간의 신체와 그 신체의 산물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데카르트적 자아와 같은 맥락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독자적 개인이 존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노동의 산물이 오로지 개인의 것일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개인의 소유권' 위에 세워진 자유주의 입헌국가 역시 허구적인 것입니다. 폴라니는 자기조정 시장의 붕괴가 문제를 일으켰다고 말했지만, 사실 근대 세계는 ’데카르트적 자아‘ 라는 형이상학적인 토대부터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역설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자적인 개인을 강조했는데, 그렇게 하다가는 시스템이 무너질 것 같으니까 개인을 집단 속에 무자비하게 집어넣은 것입니다. 폴라니의 말에 따르면 “사람을 맷돌로 갈아버리는” 파시스트 체제로 귀결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폴라니의 분석을 통해서 데카르트적 자아의 몰락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p512~3」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근대적 패러다임 속에 살고 있다. 구 공산권의 몰락 이후 자본주의 너머를 상상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에 대한 전 세계적 저항이 줄을 이었지만 아무런 성과도 이루지 못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체제에 대한 그 어떤 청사진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유토피아를 꿈꾸지 못하는 세상에서는 그 어떤 근본적인 변혁도 기대할 수 없다. 한바탕 푸닥거리가 끝나면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평화로운 일상이 디디고 있는 발판이 얼마나 쉽게 깨질 수 있는가를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애써 불안을 누르고 행운에 삶을 기대어 산다. 언제까지 우리는 이렇게 버텨낼 수 있을까?    "안녕들하십니까? "  란 물음에 우리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인문古典강의』의 교훈은 인간이 세상을 바꾸어 왔다는 것이다. 신을 쫒아낸 오만한 자신감도 인간의 것이고, 국왕의 목을 단칼에 날려버린 것도 민중의 힘이다. 인간은 역사의 거대한 고비마다 진보의 방향을 틀고 삶의 방식 자체를 바꾸었다. 우리 사회의 준거틀은 영구불변한 것이 아니다. 그 낡은 틀이 우리 모두의 삶을 치명적으로 옥죄고 있다면 그 틀은 깨져야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근대적 패러다임 이후의 세계에 대한 상상력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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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강유원의 라디오 인문학>이 끝났다. 총 55회로 1년이 살짝 넘게 방송했는데, 나는 몇 달 전부터 팟캐스트로 들어왔다. 구수한 말솜씨에 끌려 심심풀이 삼아 듣기 시작했는데, 고전을 읽는 깊이가 만만치 않다. 혼자서는 절대로 읽지 않을 고전의 내용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기도 했다. 1주일에 1회, 한 회에 20여분 정도로, 한 권의 책을 많게는 10회까지 읽기도 하니, 줄거리만 쓰윽 훑고 가는 피상적인 독해와는 많이 다르다. 내가 들어 본 인문학 강의 중 가장 재미있고 유익했다고 평할 수 있다. 틈날 때마다 되풀이 해 들어도 지겹지 않고 좋은 공부가 된다.

 

“라디오 인문학”이란 프로그램 이름에 걸맞게 <맥베스>, <걸리버 여행기>, <오디푸스 왕>,<유토피아(이것도 소설인가?)> 등의 문학, 철학서로는 플라톤의 <향연>, 역사 분야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갈리아 원정기> 등을 읽었고 그 외에도 <군주론>, <판옵티콘>, <직업으로서의 정치> 등을 읽었다.

 

진행자는 항상 “거리의 철학자 강유원 박사님” 이라고 소개하는데, 헤겔 철학을 전공했고, 학교 보다는 주로 도서관 같은 곳에서 대중을 상대로 강의를 하고, 책을 쓰고 번역을 하는 모양이다. 정치철학을 하며, 역사와 전쟁사, 무기 같은 것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우리 도서관에도 강의를 해 주면 좋겠지만 지방이라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도서관 담당자에게 한 번 제의해 보려고 한다.

 

방송을 마친다는 말에 아쉬워 검색을 해 보니 몇 권의 책이 있다. 그 중 『인문 고전 강의』를 빌려 왔다. 이 책 역시 2009년 서울시 동대문구정보화도서관에서 진행한 강의를 바탕으로 묶은 것이다. 매주 두 시간씩 40주간 진행한 강의에는 <라디오 인문학>의 내용과 겹치는 것도 있지만 주로 다른 책들을 다루고 있다. 그 중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가 있는데, 마침 내년 초 독서회에서 읽을 책으로 소포클레스의 <오디푸스 왕>이 있어, 참고가 될까하여 그리스 비극에 관해 조금 정리해 두려고 한다. <라디오 인문학>에서도 들은 내용이지만, 책으로 다시 읽으니 정리하기가 훨씬 쉽다.

 

 

 

 

고대 그리스하면 우리는 도시국가, 폴리스를 떠올린다. 그런데 폴리스는 단지 도시 혹은 도시국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폴리스는 폴리스에 살고 있는 사람들 즉 인민을 의미하기도 했고, 그들의 공동체를 뜻하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다는 유명한 말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는 잘못 전해진 것으로, 정확하게는 “인간은 폴리스에서 살아가는 존재다.”라고 말했다. 폴리스에서 산다는 것은 ,그리스인의 삶이 공동체의 삶이란 의미이다. 정치적 공동체는 물론 학문, 예술, 운동, 규율까지 모두 함께하는 공동체였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정치가 폴리스의 삶 전체를 관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는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이때의 정치는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좁은 의미의 정치가 아니라 그들의 삶 전체를 의미했다. 운동, 전쟁, 연극 관람까지도 정치적 행위였다. 그러므로 폴리스에서 추방당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삶이 끝났다는 것과 같다. 동물적 목숨만이 붙어 있을 뿐 공동체의 삶이 없다는 의미에서 아감벤이 새롭게 유행시킨 로마의 ‘호모 사케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스 비극 역시 폴리스에서 상연되었다. 그리스 비극은 처음부터 연극으로 상연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읽히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비극 작가 혼자만의 작품도 아니다. 고대의 예술작품은 집단 창작의 성격을 갖고 있다. ‘고독한 예술가’ 라는 이미지는 인류 역사상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최근의 개념이다.

 

그리스 비극은 아무 때나 상연되는 것이 아니다. 매년 3월과 4월 사이 디오니소스 축제에 행해지는 연극 경연대회에서 공연된다. 얼어붙은 대지를 깨우고 풍성한 결실을 기원하기 위해 열리는 디오니소스 축제는 폴리스의 주요한 행사다. 돈 많은 시민들 몇 명을 뽑아 돈을 대게 하면, 코레고스라고 불리는 이 시민들은 합창단원인 코로스를 뽑고 시인과 배우를 모집한다. 이 때 경연을 공정하게 하기 위해 시인과 배우는 제비뽑기로 추첨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돈이 가장 많은 코레고스가 가장 좋은 시인과 배우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아테나이 사람들은 부에 관계없는, 기회의 평등, ‘공정함’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았다. 아테나이의 민주주의는 이런 원칙이 실현된 것이다. 그들은 관직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모두 민회의 추첨을 통해 뽑았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관계없이 누구나 공직을 맡을 수 있다”고 페리클레스는 말했다. 물론 아테나이의 민주주의가 적용되는 것은 폴리스의 구성원들 즉 2~3만 명의 남자 시민들이다. 지금의 평등 개념과는 달리 여자와 노예는 공동체적 삶에 포함되지 못했다.

 

여하튼 이렇게 한 팀이 짜이면, 시인은 세 편의 비극과 한 편의 희극을 써야 했다. 비극 3부작을 트릴로기Trilogy라고 하는데, 우리가 흔히 3부작, 3부작 하는 것도 그 근원이 여기에 있다. 3부작이 되어야 ‘완성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비극 Tragedy 의 어원은 트라고디아 Tragodia다. ‘염소의 노래’란 뜻이다. 트라고스 Tragos가 염소, 오디 Odie가 노래다. 비극을 공연할 때 디오니소스 신에게 염소를 제물로 바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학설이 가장 유력하다. 희생제물을 바치는 이유는 ‘부정을 씻기’ 위해서 이다. 부정을 씻는다는 말이 바로 카타르시스 Katharsis 이다. 카타르시스는 갈등이 해소되어 개운해진 마음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것은 “아~ 깨운하다” 는 느낌이다. 그리스 비극을 상연하는 목적도 바로 이 카타르시스에 있다. 희생제물을 바쳐 부정을 씻어내고 마음을 개운하게 하는 것이다. 최고의 비극은 최고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이다.

 

 

그리스 비극의 중심은 코러스다. 코러스 사이사이에 대사가 부차적으로 끼어들어 있을 뿐 대사가 중심이 된 것은 나중에 가서였다. 대사를 에페이소디온Epeisodion이라 불렀고, 이것이 에피소드 Episode의 어원이 되었다. 그리스 비극을 우리가 책으로 읽을 때 코러스 부분을 건성으로 넘기지 말고 자세히 읽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코러스의 역할은 다양하다. 코러스는 극의 전체 이야기를 알려주기도 하고, 관객의 입장을 대변하며 감정을 쏟아 붓기도 하고, 등장인물과 대립하며 함께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코러스를 통해 우리는 비극의 줄거리와 비극을 관람하는 그리스인의 입장까지 모두 알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를 기억해 보자. 시험에 잘 나왔던 것 같은데 지금은 이름도 생소하게 들린다. 그리스 비극의 창시자 아이스퀼로스, 그리스 비극의 완성자 소포클레스, 그리고 별칭이 없는(?) 에우리피데스가 있다. 아이스퀼로스와 소포클레스는 페르시아전쟁을 경험했다. 직접 전쟁에 참여하여 신의 섭리와 신의 위대함을 절실하게 체험한 아이스퀼로스는 그의 비극에서도 신이 주역을 맡으며 인간은 신의 의지를 구현하는 도구로서 신의 의지에 순응하고 신에 귀의한다. 반면 소포클레스는 인간의 한계와 더불어 인간의 위대함이 비극의 주제를 이룬다. 신이 내린 운명에 발목 잡혀 있으나 신의 의지 보다는 인간의 의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인간이 극의 주역이 된다. 소포클레스는 페르시아전쟁뿐만 아니라 그에 뒤이은 조국 아테나이의 전성기를 맛보았고, 뒤이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암울한 그림자가 조국을 덮쳐 오는 불안한 시기를 두루 겪었다. 한편 조국의 영광에 대해서 소문밖에 듣지 못했던 에우리피데스는 전통적인 세계관과 종교관에 회의적이며, 신에 대한 믿음도 인간에 대한 믿음도 굳건하지 않다. 이들 3대 그리스 비극 작가의 작품을 이어서 읽는다면, 세계와 인간의 관계에 따라 어떻게 작품의 서사 양식이 달라지는 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인간의 믿음이 확신에 차 있을 때와 그 가능성이 포기되었을 때의 인간의 모습이 어떻게 다른지 음미해 보는 재미가 있다.

 

소포클레스의 <오디푸스 왕>은 오디푸스 콤플렉스로 아주 유명해 졌고, <안티고네>는 헤겔 뿐만 아니라 현대의 철학자들도 끊임없이 그 의미를 재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콜로노스의 오디푸스>는 'less than nothing'으로, 모든 것을 잃고 눈을 찔러 nothing이 된 이후에야 비로소 something인 된 인물로 지젝에 의해 소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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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알랭 드 보통 지음, 지주형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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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2일, 고속버스의 TV 화면에서 '프루스트'를 보았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그 화면에는 강신주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보였고, 간혹 홍차와 마들렌, 콩브레 따위가 뒷 배경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최근 도서관의 신간 코너에는 펭귄 클래식의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가 꽂혀 있었다. 상경 길에 만난 지인에게 내가 그 지루하다는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웃으며 물었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읽어 봐... 나는 그 유명한 마들렌은 어디쯤 나오냐고 다시 물었고, 다행히 그것은 책 앞 부분, 아주 앞 부분에 있다는 희망적인 대답을 들었다. 그러나 그 사이 도서관 신간 코너에 오랫동안 꽂혀만 있을 것 같았던 그 책의 1권이 사라졌다. 누군가 깁스를 했거나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준하는 어떤 지루한 교통 수단을 이용할 일이 생겼나 보다. 나는 대신 알랭 드  보통의 책 중 가장 재미있었다는 지인의 말을 기억해 내고,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를 빌려 왔다. 표지 제목의 아래에 바싹 붙여 놓은 영어 문장은 " HOW PROUST CAN CHANGE YOUR LIFE" 다. 출판사는 알랭 드 보통에 자신이 없었거나,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질이 누군가 자신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프루스트의 책을 읽는다면 아마 대단히 지루해할 것이 틀림없겠지만, 나는 <넷, 훌륭하게 고통을 견디는 법>에서 프루스트와 내가 비슷한 방식으로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발견했다. 프루스트는 평생동안 여러가지 질환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프루스트가 자신이 말하는 것만큼 아픈 것은 아니라며 빈정댔다. 프루스트는 생애의 마지막 16년 동안이나 자신은 곧 죽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했다니 그럴만도 하다.

 

  「마르셀이 과장을 했던 것일까? 똑같은 바이러스라도 한 사람은 일주일 동안 침대에 눕게 만들수 있고, 다른 사람은 단지 점심 후에 약간 나른하게 만들 수 있다. 손가락이 긁힌 고통으로 웅크리고 있는 사람에 대해 엄살부리지 말라고 비난하는 대신에 택할 수 있는 것은, 민감한 피부를 가진 생명체라면 이 생채기를 우리가 큰 칼에 맞는 것만큼이나 아프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따라서 단순히 우리가 비슷하게 다쳤었다면 겪었을 고통을 근거로 다른 사람이 정말 아픈가를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p88」

 

  남다른 고통은 자극에 대한 감수성이 남다르게 민감하기 때문이다. 이 고통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그렇다. 고통은 불편하고 우울한 감각이지만, 때로는 뜻하지 않은 통찰력을 주기도 한다. 프루스트가 불면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한 남자가 침대에서 뒤척이며 잠들기 전까지의 모습을 열일곱 페이지에 걸쳐 묘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처음에는 출판업자들로 하여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던져버리게 했지만, 결국 그 덕분에 이 책은 위대한 고전이 되었다.

 

  푸르스트는 이웃의 소음에도 극도로 민감했는데, "어떤 인간에게도 없는, 남들을 분개시키는 능력을 가진 무생물체가 하나 있다. 바로 피아노."라고 했다. 이웃집의 인테리어 공사 때문에 소음에 시달리던 프루스트는 "하루에 열두 명의 노동자가 발작적으로 망치를 수개월 동안이나 두드렸다면 케오프스의 피라미드처럼 웅장한 어떤 것을 세웠음에 틀림없으며, 보행자들은 프렝탕 백화점과 생오귀스탱 성당 사이에 서 있는 그것을 보고 놀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라고 했는데, 물론 피라미드는 보이지 않았고, 이웃집의 변기와 타일이 바뀌었을 뿐이다.  

  나도 몇 번의 이사를 다니며, 층간 소음만으로도 얇은 책 한권 정도는 너끈히 써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남들은 너무 신경이 날카롭기 때문이란다. 어쨌든 훌륭한 작가에게서 닮은 점을 발견한다는 것은, 비록 그것이 고통일지라도, 좋다.

 

 

  <여섯, 좋은 친구가 되는법>을 보면 프루스트는 위선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프루스트는 친구를 사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나치게 친절하고 헌신적일뿐 아니라 비위를 잘 맞추었다. 프루스트의 친구들이 그것을 '프루스트하기' 라 부르며 비꼴 정도였는데, 한편 친교에 대한 그의 견해는  놀랄만큼 신랄했다. "친교의 표현 양식인 대화란, 습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 피상적인 여담일 뿐이다. 우리는 일 분 일 분의 공허함을 무한정 반복하는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평생 동안 이야기를 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친교란 "우리가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믿지 않게 하려는 거짓말" 이상이 아니다. 프루스트는 진짜 위선자일까?

 

  「이 불일치는 그다지 극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가 자신의 '프루스트하기'에 대해 거의 신뢰하지 않았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프루스트하기'를 불러일으킨, 그 뒤에 숨어 있던 메시지에서 그는 거짓이 없었다. "나는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이 나를 좋아하길 원합니다." ...... 자랑스럽게 자신의 시집이나 갓난아기를 보여주는 친구들에게 듣기 좋은, 그러나 허울뿐인 말을 해주는 것은 항상 필요한 일이다. 그런 정중함을 위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부분적으로는 거짓말을  해왔음을 간과하는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악한 의도를 감추려는 것이 아니라, 놀라움의 한숨과 찬사를 보내지 않는다면 의심받을 수 있는 우리의 호감을 확인시키기 위한 것이다. p171~2 」

 

  우리가 매일 하는 인사도 마찬가지다. "안녕하세요?" 물으며, 상대방의 마음과 몸이 평안한지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습관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  진심으로 상대방의 안녕이 궁금하지는 않기 때문에 위선적이지 않으려고 상대방을 만나고 나서도  "안녕하세요?" 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단지 상대의 안녕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너를 무시하고 모욕한다는 적대적인 의사의 표현이 되어 버린다. 중요한 것은 인사의 내용이 아니라 인사를 한다는 형식 자체이다. 허울뿐인 말은 우리가 서로에 대한 호감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형식적인 확인이다. 프루스트하기적 대화 역시 마찬가지다. 그 대화의 내용은 '공허함을 무한정 반복'하는 것일 뿐이지만, 대화의 형식 자체는 관계 유지에 필수적이다.

 

 

  마지막 <아홉, 책을 치워버리는 법>은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각해 볼만한 문제이다. 프루스트는 "친애하는 친구여, 우리 시대 사람들 사이에서의 일반적인 풍조와는 반대로, 나는 한 사람이 문학에 대해 매우 고결한 생각을 가질 수 있는 동시에 그것을 악의 없이 비웃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고 앙드레 지드에게 말했다.  여기에는 책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할 때 생기는 위험들, 책을 물신적으로 숭배하는 태도에 내재한 위험들에 대한 경고가 있다.

 

  얼마 전 도서관에서 주최하는 '채만식 문학기행'에 다녀 온 적이 있다. 채만식 문학관과 채만식이 주로 살았던 임피의 생가터, 학교, 역, 묘소를 둘러 보는 기행이었다. 생가터는 잡풀만 드문드문한 빈터이고, 임피역은 화물차만 드물게 지나다니는 작은 시골역이고, 묘소는 언제 벌초를 했나싶게 황폐한 봉분과 낡은 묘석만 덩그런 무덤이었다. 학교는 그야말로 학교. 여기에서 내가 무엇을 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콩브레 역시 다르지 않다. 콩브레는 가공의 지역으로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지만, 프루스트가 콩브레의 모델로 삼았다는 이유만으로 일리에라는 도시는 이름을 일리에 콩브레로 바꾸고 수많은 관광객을 받고 있다. 관광객들은 경쟁이 치열한 빵집들 중 한 곳에서 산 마들렌 봉지와 카메라를 들고 아미오 아줌마의 집으로 향한다. 관광 안내소의 책자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깊고도 신비한 느낌을 포착하고 싶다면 그 책을 읽기 전에 일리에 콩브레를 방문하는 데 하루 전체를 바쳐라. 콩브레의 마법적인 힘은 오직 이 특별한 장소에서만 진정으로 느낄 수 있다." 고 씌어 있다. 그러나 정작 프루스트는 어떤 책의 서문에 이렇게 써놓았다.

 

  「우리는 밀레가.... <봄>을 통해 보여준 들판을 가서 보고 싶어 한다. 우리는 클로드 모네가 우리를 센 강의 양안에 위치한 지베르니로, 아침 안개 속에서 분별할 수 없는 그 강의 굽이로 데려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사실 밀레나 모네가 그 근처를 지나가거나 거기에 머물게 되고 다른 것보다 그 길, 그 정원, 그 들판, 그 강의 굽이를 그리게 된 것은 가족이나 지인이 우연히 거기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이 세계의 다른 것들과 다르게, 그리고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알 수 없는 그림자처럼 그 속에 천재가 포착할 수 있었던 인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그들처럼 고유하고 독창적으로, 그들이 그렸을 수도 있는 모든 풍경의 유순하고 무관심한 표면 위를 방황할 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p268」

 

  프루스트적인 것이 콩브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눈을 통해 세계를 바라볼 때 그 어느 곳이라도 콩브레가 될 수 있다. "프루스트에 대한 참된 경의란 그의 눈을 통해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지, 우리의 눈을 통해 그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닐 것이다."  책을 읽었다면, 다음으로 우리가 할 일은 책을 치우고 책에서 얻은 눈으로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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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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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블로거 베스트셀러'에 『살인자의 기억법』이 올라온 지 꽤 된 것 같다. 김영하라는 소설가를 알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그의 책을 읽어본 적은 없다. 몇 년 전  "김영하 vs  조영일" 논쟁이라는 것이 세간의 화제가 되었을 때,  그가 꽤 유명한 소설가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밥과 김치'를 남기고 고인이 된 최고은이라는 작가 때문에 그 논쟁은 더욱 뜨거워졌고, 김영하는 착잡한 마음을 피력하며 논쟁의 글들을 모두 지우고 한동안 침묵에 들어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몇 달 전 아이패드를 통해 그를 다시 만났다.

  스마트폰도 없이 지내다 지방으로 내려오면서, 뭔가 주변부로 밀려나는 듯한 쌉쌀한 마음에 아이패드를 샀다. 말로만 듣던, 강처럼 흐르는 트윗이라도 하게 되면, 세상의 중심에 있는 기분이라도 낼 수 있을지 모르니까. 지금도 여전히 나의 트윗은 강물은 커녕 달팽이처럼도 움직이지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SNS보다 뜻밖의 수확은  팟캐스트다. 집안일을 하며, 잠들기 전에 등등, 짜투리 시간에  팟캐스트를 듣는다. 강유원의 "라디오 인문학"은 혼자서는 절대로 읽지 않을 고전들을 듣는 재미가 적지않다. 플라톤의 향연,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전쟁사,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기,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등. 거리의 철학자라는 강유원의 입담도 만만치 않다. 나꼼수류의 시시껄렁한 입담이 아니라, 곰국같이 구수한 입담이다. 설겆이 물소리 때문에 군데군데 들리지 않아도, 이방저방 돌아다니느라 드문드문 빼먹어도 그 뿐, 다음에 또 들어도 질리지 않고 재미있다.

  이동진의 "빨간책방"도 기분이 쳐질 때 들으면 상큼하다. 작가라는데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말솜씨만은 전문 MC에 빠지지 않는다. 약간 높은 톤의 밝고 활기찬 목소리, 상큼한 사과를 한입 베어무는 기분이다. 남자들도 저렿게 생기발랄할 수 있구나 싶다, 더구나 작가가.   

  그리고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이 있다. 설마 했는데, 진짜 그냥 책을 읽을 때가 많다. 장편소설의 한 구절을 뽑아 그대로 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을 때도 있는데, 중저음의 침착한 목소리 하나만은 듣기에 좋다. 혼자 녹음하고 직접 팟캐스트에 올린다고 하는데, 재주도 많은가 보다. 호기심이 많거나, 부지런하거나.

 

 

  『살인자의 기억법』을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왠 횡재인가 싶어 냉큼 빌려왔다. 읽어야 할 다른 책이 있는데, 한 며칠 묵히더라도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정유정의 『28』이나 조정래의 『정글만리』등 조금 유명한 신간은 빌려 읽기가 엄청 힘들다. 도서관에 돌아오기 전에 벌써 다른 사람이 빌려버리는지, 검색할 때마다 '대출중'이다. 여기 도서관에는 대출중인 책은 예약할 수 없다. 시스템이 안되어 있단다.

 

 

  예상외로 얇고,행간도 넓고, 글씨도 널널해서, 막상 읽는데는 반나절도 필요하지 않다. 술술 읽히는 것을 보니 재미가 있긴 한가보다. 그런데 이게 왜 베스트셀러인지는 모르겠다. 이야기 자체는 무척 흥미롭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없다. 다만 한두가지 의문이 들뿐이다.

 

  화자는 알츠하이머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연쇄살인범 노인이다. 그런데 그의 사고력은 너무 뛰어나다. 알츠하이머 화자가 과거의 기억은 또렷할 수 있지만, 그것들에 대한 표현력이 이처럼 훌륭할 수 있는 걸까? 화자와 작가는 물론 다르다. 그러나 이 책의 서술 방식은 화자의 생각이나 말을 그대로 옮겨 놓는 것이다. 화자의 일기장 같은 것인데, 너무 논리적이고 너무 사색적이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언어를 잃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망각 속에서 언어를 잃는다. 건망증의 가장 흔한 증상은 단어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나는 모른다. 말기의 알츠하이며 환자가 이런 일기를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가진 선입견으로는 뭔가 부자연스럽다. 나의 선입견이 선입견이 아니라면, 이 소설은 부자연스러운 서술 방식을 택한 것이다. 물론 모든 소설이 다 그럴지도 모른다. 작가들은 인터뷰에서 인물들이 스스로 살아 움직인다고 하지만, 인물들의 말도 생각도 모두 작가의 말과 생각이지 않은가. 그래서 소설이든 드라마든 등장인물들의 말투가 천편일률적으로 같을 때가 많다. 재벌 회장도 주먹 깡패도 똑 같이 비유법 좋아하고, 회고하기 좋아한다. 양아치 짓을 하다가도 멀쩡하게 교사처럼 설교한다. 드라마 <황금의 제국> 이야기다. 재미있고 좋은 드라마인데, 너나 할 것없이 똑같은 말투가 기분을 팍 잡친다. 여하튼 단순한 의문이다. 치매 환자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  표현이 아니라 그냥 생각만이라 하더라도 가능할까? 생각 역시 언어로 구성된 것 아닌가? 언어를 잃고 사고를 또렷이 할 수 있을까?

 

  "시인은 숙련된 킬러처럼 언어를 포착하고 그것을 끝내 살해하는 존재입니다. "  문화센터 강사의 말이다.  킬러가 알츠하이머에 걸린 것은 언어를 살해했기 때문일까? 킬러가 연쇄적으로 죽여 나간 것은 사람이 아니라 언어인 것일까? 이 책은 언어에 대한 거대한 메타포일까?  " 다음엔 더 잘 할 수 있을 것" 이라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킬러는 살인을 계속한다. 시인도 그렇게 시를 계속 쓰는 것일까? 언어를 더 완전하게 죽여  시 속에 묻어 두기 위하여?  언어를 완벽하게 포착해 자신 속에 가두어 두기 위해?

  그러나 죽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킬러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인간이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인간을 통해 말한다는 명제도 있다.  개체가 죽어도 유전자는 또 다른 개체 속에 살아 남듯이, 사람은 죽어도 언어는 남는다.  아닌가? 

 

  언어를 완벽하게 살해하는 것, 그것이 작가들의 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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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금강경과 반야심경에 둘러 쌓인 두 농담의 공포 -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from 뚜벅뚜벅 주니우 2013-08-26 12:51 
    문학평론가 권희철씨의 해설에서 인상 깊은 문구 몇 개를 가져왔다. - 잘못된 인식과 고집과 고통이 집합소로서의 자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여기 남은 건 무아의 상태가 아니라 대혼란이다. 무너져내리는 세계 속에서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고 그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바다 위에서 영원히 허우적거려야 하는 고통과 공포가 너의 몫이다. - - 연쇄살인범의 세계에서 주어는 오직 자기 자신 뿐이며 나머지 것들은 주어에 의해 부정당하기 위해 준비된..
 
 
주니우 2013-08-26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번 김영하씨는 일반인들이 스스로를 주인공과 동일화시키기 어려운 '알츠하이머 환자'인 '연쇄살인범'으로 주인공을 잡았습니다. 따라서 '화자의 일기장 같은 것인데, 너무 논리적이고 너무 사색적이다'라는 말씀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는데 꼭 그렇지 말라는 보장이 또 뭐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얘 폴더를 만들어 김영하씩 소설을 관리하실 모양이군요~ 적극 추천합니다.
저는 이 폴더에 '책 읽어주는 시간'에서 소개한 책을 넣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말리 2013-08-26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고 남은 생각이 아무것도 없었는데, 순전히 서재지수 올리려고 ㅋㅋ(이거 은근 중독성 있음. 근데 아직 점수 규칙은 모르겠음) 걍 쓰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이건 언어를 죽이는 시인에 관한 메타포구나. 근데 금강경은 모르니까, 금강경 구절로 앞, 뒤를 맞추면 또 다른 해석이 나오겠지요. 권희철의 해설은 안 보고 반환해서 내용은 모릅니다만. 근데 언어에 촛점을 맞추게 되면, 조금 어색해지더군요. 우리가 내뱉는 것, 표현하는 것만 언어가 아니라, 생각이나 의식 혹은 무의식까지 모두 언어로 되어있다는 전제를 인정해 보면, 언어가 죽어나가는데, 사고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거지요. 언어를 죽이면서 언어를 포착하는 작업으로 보면, 표현이 달라져야 된다는 거지요. 뭐 깊이 생각한 게 아니라, 마음대로 쓰다보니 그런 생각이 설핏들었고 걍 생각나는대로 쓴 글이라 ㅋ. 여하튼 좀 알아 보고는 싶군요. 알츠하이머가 진행되면 사고나 표현은 어떻게 되는지. 근데 어쨌거나 난 언어를 살해하는 킬러라는 착상(내 맘대로 규정한 ? )은 마음에 들어요. 결국 죽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킬러죠. 알츠하이머에 의해 킬러가 죽는다는 것은 자기가 죽인 언어에 의해 결국 죽임을 당하는 거죠.
 
여인의 초상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7
헨리 제임스 지음, 최경도 옮김 / 민음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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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헨리 제임스가 누군지 몰랐다. 지인이 ‘제임스’, ‘제임스’ 할 때마다 제임스 조이스가 떠올랐으며, ‘제임스’란 단어가 이름도 되고, 성도 되는 그들의 문화가 영 낯설 뿐이었다. 헨리 제임스는 19C 미국의 대표 작가라는데 우리나라에 번역된 작품이 얼마 없었다. 도서관에서 찾은 <여인의 초상>은 총 세권 중 한권이 분실되고 없었다. 1997년 ‘인화’ 출판사에서 발간한 그 책은 이미 절판 상태였다. 나는 친구를 통하여 어느 대학 도서관을 통해 이 빠진 한권을 마저 구해서 어렵게 <여인의 초상> 전권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이 한 4년인가 5년쯤인가 전이었다.

 

  작년 말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7,298권으로 <여인의 초상>이 다시 번역되어 나왔다. 연이어 <레미제라블>도 5권이 완역되었다. 영화 <레미제라블>의 열풍을 타고 빅토르 위고의 원작도 엄청나게 팔렸다. 물론 성급하게 5권을 한꺼번에 구매한 독자들이 그 길고 지루한 책을 다 읽었을지 조금 의문이긴 하지만, 어쨌든 나도 그 덕에 <레미제라블>을 읽을 수 있었다. 영화에 감동한 새언니와 오빠를 부추겼는데, 오빠는 아직도 2권의 워털루전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고, 그걸 본 새언니는 입시공부라도 할 마음의 준비가 되기 전에는 손을 댈 수 없노라 선언했다.

  <레미제라블>은 1862년, <여인의 초상>은 1881년에 출간되었다. 20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지만, 물론 프랑스와 영국(혹은 미국)이라는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이 두 소설의 배경과 주제는 완전히 다르다. <레미제라블>이 프랑스혁명의 혼돈기를 사는 가난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여인의 초상>은 대륙의 상류사회에 편입하다 좌초하는 미국 상류층 아가씨의 쓰라린 인생담이다.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소설을 가져다 놓고, 왜 이렇게 다르냐고 따진다면 어처구니가 없겠지만, <레미제라블>을 읽은 지 몇 달이 되지 않아 다시 <여인의 초상>을 읽으니 자연히 이런 생각이 들었다. 거의 동시대를 사는 작가가 어떻게 이렇게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을까. 다른 것도 아니고, 유럽을 휩쓸고 있는 혁명인데. 혁명이란 그저 ‘red'가 주는 숭고한 아름다움이나 감동이 아니라, 그 시대의 대다수가 얼마나 가난하고 얼마나 비참하게 살아야 했는지에 대한 분노이자 웅변인데. 1861년, 영국에는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도 있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헨리 제임스가 무슨 죄가 있을까만, 하여튼 이런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여인의 초상>이 흥미롭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여인의 초상>을 한마디로, 속되게 표현한다면 이렇다. 지적이고 독립적인 정신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아름다운 미국인 처녀가 유럽에 건너가서 우연찮게 막대한 유산을 받고 거의 ‘완벽한 여인’이 되었으나,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믿음으로 인해, 스스로 최악의 선택을 하고 인생을 쫄딱 망쳤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이 여인은 어떤 결심을 하고 끔찍한 남편에게 되돌아간다.

  우리 고향 천박한 속담으로 ‘지 눈까리 지가 찔렀다.’고 하는 딱 그런 상황이다. 순진하고 착하고 똑똑한 처녀가 흔히 겪는 비극이다. 세상물정 모르고 당했다가 앗 뜨거 할 때는 대부분 이미 늦었다. 문제는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에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은 환타지다.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는 ‘그 깨달음 이후’의 ‘여인의 초상’을 보여준다. 물론 대중적이면 대중적일수록 여인은 수퍼우먼이 되어 성공하고, 그 성공으로 복수한다는 스토리에 가깝다. 어떻게 갑자기 수퍼우먼이 될 수 있는지 그 비결은 항상 궁금하지만, 뭐 어쨌든 대강 그렇게 되어 해피앤딩이 되면, 환타지든 뭐든 속이 조금 개운한 것도 사실이다. 적어도 화장실 갔다가 물 안 내리고 나온 느낌은 안 드는 정도는 된다. 그러면 또 우리는 그 소설이든 드라마든 영화든 뭐가 됐든 까맣게 잊어버리고, 새로운 판타지를 맞이할 수 있다. 현실은 영원히 유예된 채로.

  헨리 제임스의 <여인의 초상>의 결말은 기이하다. 이사벨은 남편에게 속았다는 것을 안 후, 사촌 오빠 랠프의 임종을 위해 로마에서 런던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사벨은 랠프의 장례를 치르고 난후, 오래 전부터 그녀에게 구혼해왔던 워버튼경과 캐스파 굿우드를 물리치고, 다시 로마로 돌아간다. 왜?

  작가 헨리 제임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1,000쪽에 가까운 장편 소설의 마지막까지 이사벨은 혼란 속에 갈팡질팡하는데, 딱 두 페이지를 남겨놓고, “그녀는 어디로 발길을 돌려야 할지 몰랐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녀 앞에 똑 바른 길이 보였던 것이다.” 는 문장이 나온다. 그리고 다음 날 굿우드가 이사벨의 친구로부터 이사벨이 로마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는 장면으로 이 긴 소설은 끝이 난다. 이사벨은 도대체 어떤 길을 보았던 것일까?

 

 물론 ‘인습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을 꿈꾸는 한 여인이 현실의 시련 속에서 성숙해 가는 과정을 정교하게 그린 19C 미국 소설의 걸작’, ‘20C 현대 소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모범 작품’ 이니 만큼, 그 분석과 해석에 관한 엄청나게 훌륭한 글들이 많이 있을 것이고, 그 각각에 이사벨의 ‘똑바른 길’에 대한 모범 답안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모른다. 다만 민음사판 작품해설은 살짝 읽어보았다. 작품해설을 쓴 사람이 옮긴이인지 민음사 편집진인지 누군지 명기되어 있지 않아 모르겠으나, 이 책의 결말에 대한 해설은 이렇다. “이것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과 고통을 감수함으로써 성숙된 자아에 도달하게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 자신의 진정한 초상이 완성되는 길인 것이다.” 본문이나 해설이나 모호하긴 마찬가지다.

  현대적 관점에서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지적인 여성의 선택은 당연히 ‘이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혼이 스스로 선택한 결혼에 대한 책임 회피라는 논지는 설득력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벨의 선택이 ‘똑바른 길’ 일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1880년대와 2010년대의 차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소설 속 주변 인물들의 태도로 볼 때, 1880년대 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이사벨에게 로마로 돌아가지 말 것을 권유한다. 그렇다면 이사벨은 도대체 왜 돌아간 것일까?

 

 로마로 돌아간 이사벨이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고 싶다. 아마도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사벨은 침착하고 냉정하게 남편과 대립할 것이고, 남편으로부터 의붓딸 팬지를 지키려고 할 것이다. 이사벨은 결코 인습으로 굳어진 유럽을 상징하는 남편 오스몬드를 변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헨리 제임스의 몇몇 소설 중 <데이지 밀러>와 <아메리칸>은 고풍스럽고 아름답지만 폐쇄적인 유럽의 벽에 부딪혀 좌초하는 자유롭고 활달하고 싱싱한 아메리칸들의 실패담이다. 이사벨 역시 실패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극소차이’라고 불리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아무 차이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 차이. 실패한 선택 속에 당황하며 좌절하는 삶과 실패한 선택임을 인정하고 싸우며 좌절하는 삶에 어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이 ‘극소차이’일 것이다. 나는 물론 이사벨이 로마로 돌아가는 것만이 선택에의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사벨이 이혼을 하고 독립하는 것 역시 자신의 실패한 선택에 대한 당당한 인정일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드러난 것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가 바로 선택에 대한 책임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그 태도란 타인의 눈으로는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이사벨의 선택 앞에 어리둥절한다. ‘암흑의 집, 침묵의 집, 질식의 집’ 으로 다시 걸어 들어간 이사벨 앞에, 캐스파 굿우드처럼.

  그러나 이사벨은 그 집 앞에서 아마도 다른 어떤 것을 보았으리라, 이전에도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그 어떤 것을. 。。。하지만 이사벨은 여전히 이해되기 어렵다, 이 시대에는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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