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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엔 돌아오렴 -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엮음 / 창비 / 2015년 1월
평점 :
대학교 때 읽은 《강철은 어떻게 단련 되었는가》가 생각났다. 제목만 생각난다. 내용은 다 잊어버렸고, 진짜 읽기는 했나 싶을 만큼 기억도 희미하지만, 제목만은 뚜렷하게 남아있다. 고리키의 《어머니》와 더불어.
『금요일엔 돌아오렴』
그저 안타깝게 울며 읽어야 할 줄 알았다. 진짜 꺼이꺼이 울며 읽었다. 하지만 그 울음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투사로, 단련 되는가를 읽을 수 있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단지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왜 정부의 ‘보상’을 격렬하게 거부하며, ‘진상규명’을 요구하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가 절절히 느껴졌다.
사이가 좋지 않다가 헤어진 게 제일 가슴 아프고 안타깝다는 이창현 학생의 어머니 최순화씨는 이렇게 말한다.
「처음부터 정부에서 우리를 정직하게 대해줬으면 안 그랬을 거야. 사고였는데 최선을 다해서 구했는데 못 구했다 그러면 우리도 받아들이지요. 그런데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고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하다못해 교통사고가 나더라도 그 원인을 밝히는데 이건 304명이 죽은 대형 사고잖아요. 처음부터 투사가 되어 이걸 밝히고 말거야 라는 생각으로 뛰어든 부모, 한 명도 없어요. 그렇게 정부가 우리를 끌고 온 거지요. 너무 얕본 거지, 우리를.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가족들을 몰아붙일지는 정말 몰랐어요. 우리는 국민도 아닌 것 같아요. 대통령이 국회에 연설하러 왔을 때는 거의 경악 수준이었어요. 엄마들이 새벽같이 올라가서 대통령 눈 길 한번 사로잡으려고 살려달라고 그렇게 외치는데 눈길 한번 안 주더라고. 그러면서 웃으면서 지나가더라고. 그게 사람인지요. 정말 그럴 줄은 몰랐는데 ..... 대통령이 그러니 그 밑에 사람들은 어떨까 싶고. p157」
4.16TV(세월호 유가족 방송)에서 활동하는 문지성 학생의 아버지 문종택씨의 이야기는 사고 당시의 대처 상황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진상규명을 위해 찾아다닌 주위 섬들의 어부들은 하나같이 격분했다.
「내가 섬에 내려갔을 때 선주들이 나를 보자마자 하는 첫마디가 “해경 개새끼, 죽일 놈의 새끼들. 저 새끼들이 안 구했어” 였어요. 나보다 성이 더 나갖고 ‘살릴 수 있었는데 안 살렸다’ 고 욕을 하는 거죠.
섬에 있는 동생 옥령이가 그래요. “형님, 나 정말 힘듭니다.” 선원들 중에는 학생들이 유리창을 손톱으로 긁어대고 얼굴을 유리에 대고 숨을 거둬가는 그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섬에도 트라우마가 있었던 거예요. “형님, 저희 선원들은 그 세월호 선원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선주는 배가 생명입니다, 우리는 4톤짜리 고깃배도 안 버립니다.” p179~80」
옥령이는 지성이를 건져 올린 동거차도의 어부다. 그 인연으로 문종택씨와 형님, 동생 사이가 되었다. 정부의 무능함에 신물이 난 문종택씨는 배에 대한 사고에 한해서는 세월호 유가족만큼 전문가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우리도 익히 보았듯이 사고 직후부터 시신수습과정까지 거의 대부분이 유가족의 제안과 요청에 의해 이루어졌다. 심지어 사고 원인 규명과 안전 대책까지도 유가족이 나서서 투쟁하고 있다. 누가 국민이고 누가 정부인가?
문종택씨는 세월호는 ‘왜’라는 물음에서 시작해서 ‘왜’라는 물음으로 끝난다고 말한다. 그 무수한 ‘왜’ 에 대해 아직까지 아무런 해답이 없다.
「저희 유가족들은 지금 세월호를 두 번 타고 있습니다. 그런 유가족들에게 국민이고 정치인이고 언론인이고 할 것 없이 모두 컨테이너를 얹고, 쇳덩어리를 얹고, 쌀가마니를 얹어요. 선원들보다 해경들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어요.
.......
상황이 자꾸 안 좋아지니까 지성이한테 제일 미안합니다. 저는 수사권, 기소권 달라고 목매달지 않았어요. 전 생각이 좀 달라요. 저희에게 기소권까지 다 줘도 진상규명은 안 된다고 봐요. 이 정권이 무너지기 전에는, 대통령이 ‘본인 스스로까지 조사해서 문제가 생기면 이 정권을 내놓겠다’ 는 이야기를 하면 진상규명이 되겠지만, 대통령이 이처럼 성역 없이 수사하라고 해도, 국회의원이 세월호 특별법 100퍼센트 인정해줘 갖고 제가 모든 것을 요구하는 자료를 싹 다 내놓고 묻는 말에 그대로 대답했다고 하더라도 안 밝혀집니다, 왜냐? 정권이, 이 진실이 제대로 규명되는 순간 이 정권이 무너집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밝힐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저희가 기록을 중요하게 여기는 겁니다. 다음 세대들에게 자료를 남겨주려면 우리가 할 일은 최대한 밝혀야 하는 거죠. 알다시피 우리 부모들이 국정원이잖아요. 우리가 국정원이고 조사원이고, 우리처럼 열심히 일하는 국정원이 어디 있겠어요. p187~8 」
유가족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강하고 단단하다. 강철처럼 단련되어 가는 것 같다. 우리 세대에 밝힐 수 없다하더라도 언젠가는 밝혀질 아니 밝혀야 할 진실을 위해 자료를 모으고 기록을 남긴다. 쉬 낙관하지도 않고 쉬 절망하지도 않는 단단함을 품기까지 쏟아낸 눈물은 얼마였을까.
김다영 학생의 아버지 김동현씨의 삶은 30년 현대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87년 6월 항쟁의 그 거리에서 그는 세상이 완전히 바뀔 줄 알았다. 88년 졸업 후 안산의 철강회사에 들어가 결혼하고 아이 셋을 낳고 살았다. 세상의 모순은 잊고 애들 키우며 빠듯이 먹고 살았다. 1997년 IMF로 다니던 회사가 부도나고, 2009년 제2 금융위기 때는 자신이 운영하던 회사가 망했다. 그래도 다시 일어나 열심히 일하며 살았다. 그리고 딸이 희생당했다. 이 사회는 소신을 지키며 살기도, 먹고 살기도, 가족을 지키며 살기도 힘들다.
「돌이켜보면 내 삶은 우리 현대사의 급류에 휩쓸려왔고, 그 끝에서 참사의 당사자가 되어 이렇게 길거리에 앉아 있어요. 87년 6월 항쟁부터 거의 30년이 지났는데도 세상은 그때하고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요. 어떻게 이렇게 변한 게 없을 수 있을까 싶어요. 오히려 더 나빠진 것 같아요. 사회의 모순은 고착되고 견고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동안 허울만 좋은 민주주의에 국민들이 완전히 속았어요. 참담하죠. 내 딸을 잃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간절해졌어요. 우리가 꼭 진실을 밝힐 거예요. 이 문제를 지금 해결하지 못하면 30년 후에 나 같은 사람이 또 가족을 잃고 이 자리에 앉아 있지 않겠어요? p310~1」
우리 또래는 다 그렇다. 87년 민주화로 다 된 줄 알았다. 민주가 그때는 자유인 줄 알았다.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민낯을 상상하지 못했다. 평등 없는 자유는 동물의 왕국이라는 걸 몰랐다. 계층의 고착화는 밀림의 서열과 같다. 날카로운 이빨 대신 돈이 그것을 가른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세월호 증개축과 과적, 고박불량, 선원, 심지어는 해경과 언딘까지도 철저히 돈의 논리에 따랐다. 세월호 인양을 두고도 돈이 핵심으로 떠오를 것이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 다른 것처럼 유가족들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참사와 마주하고 있다. 강철처럼 단단해진 투사도 있고, 아직 아이의 이름도 입 밖에 내기 힘든 부모도 있다. 장례를 치르자마자 안산을 떠난 분도 있고, 아이의 모든 것을 고스란히 보존하며 오래 기억하기 위해 100살까지 살 것을 다짐하는 분도 있다. 그러나 그 슬픔과 분노가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문상을 가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맨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는 너무 의례적이어서 아무 말도 아닌 것 같고, 가만히 두어도 울음이 터질 텐데 얼마나 슬프냐고 울음을 재촉할 수도 없고, 피붙이의 죽음을 눈앞에 둔 이에게 그깟 건강을 챙기라는 말도 터무니없어 보이고, 차라리 눈을 피하고 자리를 피하고 싶어진다. 하물며 세월호 희생자의 가족을 대면하는 사람들은 어찌해야 할까. 그런데 딸의 시신을 찾고도 다시 진도로 돌아가 실종자의 가족 곁을 지키던 임세희 학생의 아버지 임종호 씨는 이렇게 말한다. “그냥 옆에 있는 거지. 뭔가를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등 두드려드리고 같이 밥 먹고 옆에서 자고 또 담배 같이 피우고 그렇게. p264”
뭔가를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름들을 기억하고, 분노를 잊지 않기 위해서 나는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읽었다. 열세명의 아이들의 이야기는 304명 희생자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일반인 희생자들도 아이들과 같은 꿈과 삶과 가족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중에서도 특히 ‘김건우’란 이름만은 잊지 않도록 되새기고 또 되새기기로 했다. 김건우 학생의 어머니 노선자씨는 치매가 걸려 모든 것을 잊어도 건우만은 기억할 것이라 말한다.
「저는 앞으로 오래 살려구요. 오래 오래 살아서 우리 아들 기억해 줘야죠. 시간이 지나면 우리 아들 잊는 사람들도 많아질 거고 벌써 잊은 사람도 있을 텐데 나는 오래 버텨야 되겠는데 ....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어느 날은 그랬어요. “건우 아빠, 나는 아흔 살 백 살까지 살 거야. 내가 건우를 혼자서라도 끝까지 기억해줘야 할 것 같아”라 했더니 “아흔 살? 너무 많지 않아”라고 해요. 그래도 나는 그때까지 살 거라고 했어요. p42」
김건우.
건우 엄마처럼 나도 김건우란 이름을 오래 오래 기억하려 한다. 김건우는 세월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