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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물리학 - EBS 다큐프라임
EBS 다큐프라임 [빛의 물리학] 제작팀 지음, 홍성욱 감수, EBS MEDIA 기획 / 해나무 / 2014년 5월
평점 :
내가 머리가 좋다면 꼭 해보고 싶은 공부가 천체물리학이다. 138억 년 전의 우주, 그 찰나의 빛이 세상을 만들고, 아직도 우주는 그 흔적과 기억을 품은 채 질주하고 있다. 그런데 물리의 세계는 진짜 천재들의 세계다. “나는 그 누구도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마음 놓고 말할 수 있다.” 리처드 파인만이 이렇게 말했다니, 그리고 아인슈타인조차 죽을 때까지 코펜하겐학파의 양자해석을 믿지 않았다니, 나로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세계다. 그런데도 나는 거대한 우주와 미시의 양자 세계가 결국 동일하다는 생각만으로도, 들뜬다. EBS 다큐프라임의 <빛의 물리학>이 방송되었을 때도, 거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정신없이 화면에 빨려 들었다. 빛을 따라 갈릴레이, 뉴턴을 거쳐 아인슈타인이 밝혀준 우주 공간을 보았고, 그 빛의 엑스터시 속에 인간의 눈으로는 결코 볼 수 없을 아주 아주 작고 캄캄한 양자들의 세계로 들어섰다. 아무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그 어둠의 세계에는 우주 탄생의 비밀과 모든 생명의 원리가 들어 있다. 그 다큐 <빛의 물리학>이 책 『빛의 물리학』으로 출간되어 도서관 신간코너에 딱하니 꽂혀 있었다.
소설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앨리스는 끝없이 낙하하고 있다. 토끼 굴속에 떨어졌는데, 땅에 닿지를 못하고 계속 떨어지고만 있다. 왜? 작가의 은유와는 관계없이 『빛의 물리학』은 이런 답을 할 수 있다. 앨리스가 땅에 닿지 못하는 것은 땅이 계속 꺼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운동하고 있는 물체는 방해를 받지 않으면 계속 직진한다. 관성의 법칙이다. 우주에서는 한 번 힘을 받은 물체는 영원히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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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성의 법칙에 따른다면 달도, 공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달은 지구 주위를 돌고 있으며, 지구상에서 하늘로 던진 공은 아래로 떨어진다. 그러면 이 공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중 하나의 방법은 공이 닿기 전에 땅을 내리는 것이다. 땅을 계속 내리다 보면, 공이 지나간 궤적은 둥그런 모양이 되고, 공은 계속 지구 주위를 돌게 된다. p82 」
뉴턴의 이 생각이 그대로 적용된 것이 인공위성이다. 자연위성인 달도 인공위성처럼 떨어지면서 지구를 돈다. 뉴턴은 여기서 공이든 사과든 달이든 왜 떨어지는 가에 의문을 품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는 서로를 잡아당긴다. 달은 앞으로 계속 나아가려는 관성과 지구와 달이 서로 잡아당기는 만유인력 때문에 끊임없이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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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인 앨리스씨』의 앨리스는 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삶의 수레바퀴를 돌고 있는 것이다. 삶의 중력을 떨쳐 내고 비상할 힘이 소년 앨리스에게는 없다.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것이 쉽지 않은 것처럼, 추락하지 않고 궤도에 오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초속 7.9킬로미터의 속도를 낼 수 있어야 만유인력과 관성이 균형을 이루어 지구의 궤도에 오를 수 있다. 7.9km/s 조차 없다면 소년 앨리스의 동생처럼 삶의 궤도를 올라보지도 못하고 추락한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나타났다. 뉴턴의 말처럼 모든 떨어지는 것은 그것과 지구 사이의 잡아당기는 힘 때문일까? 서로 당기는 이 힘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뉴턴에 의하면 만유인력은 질량과 거리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데 특수상대성이론을 만든 아인슈타인은 질량과 거리가 관찰자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유인력과 특수상대성이론 둘 중 하나는 틀렸다. 젊은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옳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중력과 가속도는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떨어진다는 것은 중력의 잡아당기는 힘 때문이 아니었다. 물체에 의해 공간이 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낙하란 휜 공간을 자연스럽게 진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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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속도의 힘이 존재하는 공간, 즉 중력이 존재하는 공간은 모든 물체를 휘게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질량이 있는 곳에서 공간은 휘어진다. 태양 주변도 마찬가지다. 태양 뒤에서 오는 별빛은 직진하고 있지만 휘어진 공간을 따라 오게 된다. 에딩턴이 지구에서 볼 수 없었던 별 사진을 찍은 것도 별빛이 휘어졌기 때문이었다. 중력은 잡아당기는 힘이 아니라 공간이 휘어지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답이었다. p110」
다시 뉴턴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사과는 왜 떨어질까? 지구가 만든 휜 공간이 사과를 가장 자연스러운 길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일식 때 태양 뒤의 별빛을 볼 수 있는 것도, 별이 태양이 만든 휜 공간을 따라 오기 때문이다.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는 공간을 휘게 만든다. 당신이 나에게 오는 것은 우리가 서로 당기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만든 휜 공간을 당신이 따라 걷기 때문이다. 질량이 클수록 공간은 더욱 크게 휘어진다.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질량과 거리는 상대적이다. 나를 더욱 무겁게 느낄수록 당신이 나에게 이르는 길은 더욱 가파르게 기운다.
뉴턴을 과거로 돌려보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세상을 지배했다. 그러나 영원한 독재는 없다. 세계의 저 너머에 무엇인가가 나타났다. 양자역학! 양자역학은 곧바로 상대성이론과 함께 세계를 양분했다. 이 두 개의 물리법칙에는 하나의 영감이 작용했다. 그것은 빛이다. 가장 큰 세계와 가장 작은 세계는 하나였다. 오래된 금언이 맞다. 우리 몸 안에 우주가 있다. 그러나 이 우주는 완전하지도 질서 정연히 아름답지도 않다. 양자역학이 추정하는 코스모스는 카오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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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의 산실 닐스보어연구소다. 보어는 1916년 코펜하겐 대학의 이론물리학 교수가 된 이후, 이 연구소를 양자물리학의 메카로 만들며 코펜하겐학파를 이끌었다.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졌을까? 이것은 아주 오래된 질문이다. 벌써 원자는 희랍에서부터 탐구되었다. 세상이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알갱이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쪼개지지 않을 것 같은 알갱이 속에는 여러 가지 더 작은 알갱이들, 입자들이 있었다.
「1920년대엔 가장 작은 물질이 양성자, 중성자, 그리고 전자라고 생각했다. 1970년대에 이르자 쿼크라는 더 작은 물질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쿼크에 여섯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후 전자와 성질이 비슷하면서 질량이 훨씬 큰 입자인 뮤온과 타우, 3종류의 뉴트리노까지, 12종류의 입자들이 발견됐다. 또 힘을 매개하는 입자인 글루온, 포톤, W± 게이지 보존, Z0게이지 보존과 입자에 질량을 부여하는 힉스 입자가 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들은 이 입자들의 조합으로 이뤄져 있다는 게 현재 물리학의 답변이다.p298」
처음 발견된 것은 전자였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J.J. 톰슨이 원자 안에 음극을 나타내는 작은 입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런데 원자는 중성이니 원자 안에는 전자에 반대되는 양의 전기를 가지는 무엇이 있어야 했다. 원자핵을 실험으로 증명한 사람은 러더퍼드였다. 러더퍼드는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돌고 있는 원자 모델을 만들었지만, 어떻게 양전하를 띤 원자핵과 음전하를 띤 전자가 달라붙지 않는지 밝혀내지 못했다. 이 문제를 풀어낸 사람이 바로 러더퍼드의 제자 닐스 보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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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어의 원자모델에서는 가운데에 원자핵이 있고, 전자는 정해진 궤도를 따라 돈다. 내가 고등학교 화학시간에 배운 것도 이것이다. 그러나 보어 자신도 왜 전자가 궤도를 따라서 도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다음 타자로 나선 것이 닐스보어연구소의 차세대 주자 하이젠베르크였다. 하이젠베르크는 과감히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잘라버렸다. 보어의 전자 궤도를 없애버린 것이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궤도를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슈뢰딩거가 다시 궤도를 들고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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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세계를 두고 일어난 이 논쟁의 승자는 누구였을까? 보어는 슈뢰딩거에 크게 기대를 걸었지만, 슈뢰딩거 역시 전자를 볼 수 없다는 하이젠베르크와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다. 슈뢰딩거의 방정식은 오늘날까지도 양자역학의 핵심에 있지만, 그 자신도 그의 공식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공식을 먼저 만들고 나중에 가서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 양자역학이었다.
도대체 전자는 어디에 있는 걸까? 전자는 왜 연속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양자도약을 하는 걸까? 왜 원자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걸까? 하이젠베르크는 다시 생각의 방향을 과감히 틀었다. 원자는 단순히 작아서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말하자면 인식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존재의 불가능성이다. 여기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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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를 정확히 재려고 하면 전자의 운동량이 불확실해 지고, 전자의 운동량을 보려고 하면 어디에 있는지 위치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즉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잴 수가 없다. 결국 우리는 전자가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코펜하겐학파가 최종적으로 생각한 원자 모델은 다음과 같다. 전자는 안개처럼 뿌옇다. 이전 세상은 모든 것이 예측 가능했지만, 이제 세상은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정성으로 가득 찬 모호한 세계가 되고 말았다.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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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코펜하겐 해석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미래는 알 수 없다는 세계관과 인간이 불완전해서 관측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세계관이 격렬히 부딪혔다. 아인슈타인의 신은 주사위 게임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전자의 위치를 확률적으로만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확률이론에 의하면 전자는 발견되기 전까지 다양한 위치에 공존한다. 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고양이 중의 한 마리인 ‘슈뢰딩거의 고양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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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갇힌 상자에는 독가스가 나오는 장치가 있다. 원자핵이 붕괴되어 방사선이 검출되면 망치가 유리병을 깨고, 그러면 유리병에서 독가스가 나온다. 고양이의 생사를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 고양이는 과연 죽었을까, 살았을까? 보지 않을 땐 알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엔 확률적으로 죽은 상태와 살아 있는 상태가 공존할 뿐이다. 슈뢰딩거는 궁금했다. 과연 반은 죽어 있고 반은 살아 있는 고양이가 말이 되는가? 구멍을 열어서 확인해보기 전까지 상자 안의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다면, 고양이는 죽은 걸까, 산걸까? 물론 이 질문은 아직도 그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p266」
표현을 정확히 하자면, 확인할 때까지 고양이의 생사를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확인할 때까지 고양이의 생사는 정해지지 않았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의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한다. 확률적으로 죽음과 삶이 공존한 상태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렇다면 밤하늘의 달도 보고 있을 때만 존재하는 것인가? 보고 있지 있지 않을 때 달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와 같이 철학적 세계관에도 영향을 주었다. 세계는 not-all 이며, Whole은 hole 이다. 세계는 완전한데 단지 인간의 능력으로 인식할 수 없다는 세계관은 칸트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지젝의 헤겔 해석에 따르면, 헤겔은 인식 불가능성을 존재의 불가능성으로 전환했다. 인간이 세계를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세계 자체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리적인 방법으로 구성해내어 산술적으로 참인 명제를 증명할 수 있는 임의의 무모순인 이론에 대해, 참이지만 이론 내에서 증명할 수 없는 산술적 명제를 구성할 수 있다. 즉, 산술을 표현할 수 있는 이론은 무모순인 동시에 완전할 수 없다.
산술적인 참인 명제를 증명할 수 있는, 공리로부터 구성된 산술체계에 대하여 이 산술체계가 무모순이라면 이 산술체계는 스스로의 무모순성에 대한 진술을 포함할 수 없고 그 역도 성립한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내가 이해하는 대로 말하자면, 이발사의 역설에 대한 답과 같은 것이다. (수학적으로는 엉터리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쉽게 이렇게 이해한다.) 스스로 면도를 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면도해 주는 이발사는 스스로 면도를 하는가? 하지 않는가? 이 이발사는 스스로 면도를 하는 사람의 집합에도 하지 않는 사람의 집합에도 속할 수가 없다. 모든 사람은 두 집합 중 하나에 포함된다. 그러나 이 집합을 만든 바로 그 이발사 자신만은 어느 집합에도 속할 수가 없다. 즉 '스스로의 무모순성에 대한 진술을 포함할 수 없다.' 체계를 구성한 이발사 자신이 체계의 완전성을 방해하는 구멍, (W)hole이다. 우리는 세계에 갇혀 있지만, 그 세계의 한중심부는 구멍 나 있다. <설국열차>의 심장은 엔진이지만, 그 엔진의 중심은 구멍 뚫려 있다. 그 구멍을 가리고 있는 것은 한 어린 소년의 뼈만 남은 몸뚱이다. 그 소년을 빼내자, 엔진은 정지하고, 세계는 폭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