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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운데이션 1 - 위험한 서막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최서래.김옥수 옮김 / 현대정보문화사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2011년 10월28일 카페 과제물입니다. 과제는 '가브리엘 타르드를 소개하시오' 였는데, 이 때는 국내에 타르드(따드)가 번역되기 전입니다. 고로 리뷰상품과는 관계없습니다. 타르드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A4 10매 이상의 글을 쓰는 것이 과제였습니다. 제 글 속에 파운데이션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혹시 ‘히치칵’을 아세요?

몇 년 전, 어떤 책을 읽는데 내용이 어려웠거든요, 그런데 자꾸 히치칵이란 이름이 나오는 거예요.

책이 조금만 쉬웠다면 저도 단박에 아하, 히치콕 했을 텐데, 안 그래도 기가 죽은 터라, 이 히치칵이 그 히치콕인지 정말 알쏭달쏭했어요.

제가 히치콕 영화를 잘 알았던 것도 아니거든요.

나중에야 히치콕을 ‘히치코크’라고도 하고 ‘히치칵’이라고도 한다는 걸 알았죠.

예전 고등학교 시절 윤리 교과서에 ‘키에르케고르’라고 있었거든요.

그 분은 요즘 ‘키르케고르’라고도 불리더군요.

여기까진 일종의 진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좀 더 발음에 충실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경우도 있고요.

또 예전엔 영어 번역본을 다시 번역하는 이중 번역이 많았는데, 요즘은 우리나라 번역자들이 저자의 모국어로 쓰인 원본을 직접 번역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발음이 달라지는 것이 당연한 것도 같아요.

시대를 따라 가야하는 건 독자의 몫이니까 너무 투덜댈 수는 없겠죠.

그런데 한 번은 진짜 황당한 걸 본 적이 있어요.

어느 슬로베니아 학자가 영어로 책을 쓰면서 외국의 어떤 사람을 언급했는데요, 그 학자는 독어로 표기된 이 사람의 이름을 보고서 영어로 옮긴 거거든요. 그러고 나서 우리나라에 이 책이 번역되었는데..... 그 이름이 무엇이냐 하면...

“김영일”

누군지 아시겠어요?

네, 북한의 김정일입니다.

김정일이 돌고 돌아 우리나라 번역가에 의해 김영일로 개명된 거죠.

이럴 땐 그저 웃을 수밖에요.

 

 

이쯤 되면 눈치 채셨나요?

네, 글쎄 ‘따드’가 없더라구요.

할 수 없이 Tarde를 쳤죠.

그제야 영어 사전 항목 안에 검색되는 것이 있더군요.

 

Gabriel, 타르드(1843-1904): 프랑스의 사회학자·범죄학자.

 

아무래도 따드는 영어권을 거쳐 중개 무역 형태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걸까요?

 

어쨌든 오늘 제가 해야 할 일은

“쪽글 10. Garbriel tarde라는 사람에 대해서 조사하시오.” 에 대해 열심히 답하는 거겠죠.

그런데 우리 모두 알다시피 이 따드님이 베일에 싸인 분이라는 거죠.

그리고 선생님은 그 베일을 벗길 생각은 말라고 하셨죠.

어짜피 벗겨봐야 나오는 것도 없을 테니 쓰잘데기 없이 끙끙거리지 말고 차라리 베일에 장식을 달아 보라고 하시네요.

리본을 달건, 꽃을 달건, 방울을 달건 재주껏 달아 보라는 건데, 그렇다고 따드를 김영일 꼴로 만들 순 없잖아요.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김정일을 김영일로 만드는 건 할아버지가 될 판이네요.

하마터면 타르트가 돼 버릴 것 같아서 말이죠.

그 케잌인지 과자인지 애매모호한데 맛있는 것 있잖아요.

‘타르드’를 검색하면 지식백과 아래로 블로그와 웹문서들이 뜨는데 몇 개 안되는 따드 관련 글에 이어 바로 에그 타르트 만드는 법, 딸기 타르트 먹고 싶어요 등등의 글들이 주루룩 달려 있죠.

어쨌거나 거기까진 가지 않아야 할 텐데, 일단 출발해 보기로 해요.

 

 

 

 

따드의 행적을 쫒을 ...라기 보다는 상상할 몇 가지 단서들이 있어요.

제일 눈에 띄는 것이 ‘사회학적 심리학’ 이네요.

다음으로 따드의 가장 유명한 책이라는 ‘모방의 법칙’ 이 있구요.

이런 건 지식백과에 바로 보이는 거라 다들 아시겠죠.

참, 친절하신 우리 카이로스님이 가르쳐 주신 것도 있어요.

따드는 ‘뒤르켐의 논적’이고, 뒤르켐이 자살론 1부 4장에서 따드의 모방 개념을 비판하고 있다죠.

아, 그리고 ‘들뢰즈’가 있네요. 들뢰즈가 따드를 부활시켰다는 소문이 있다고 하시네요.

‘드봉’도 있군요. 드봉의 군중 개념을 따드는 공중 개념과 분리해서 사고했다는 듯하네요.

또 단서를 주신 분이 있는데요.

네이버 블로거 한 분이 타르드에 관한 글을 시리즈로 많이도 쓰셨네요.

다들 찾으셨을 것 같아요.

읽어 보시면 ‘경제 심리학’ 이라는 책 한 권을 읽고 여러 편의 글을 쪼개 썼다는 걸 알 수 있으실 건데요.

다른 분의 글은 거의 없는 셈이니, 자칫하면 우리는 이 분을 통해 따드를 수용할 위험(?)에 처해 있군요.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신 분 같지는 않고, 공부 중인 분 같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어쨌거나 감사를 드리고요,

그렇다 해도 어짜피 저희가 갈 길은 학습이 아니라 상상의 공간이니 각자 필요한 만큼만 참고하심 될 것 같아요.

 

 

 

저는 먼저 심리학에서 시작하고 싶어요.

심리학책이 얼마나 많은지 혹시 헤아려 보셨어요?

물론 저도 안했지요.

그런데 도서관에 가 보니 진짜 많긴 많더라구요.

철학책이 겨우 서가 하나를 차지할 정도라면, 심리학책은 서가 세 개를 채우고도 남더군요.

종류도 참 다양해요.

남성 심리, 여성 심리, 아동 심리 뭐 이런 건 기본이고요.

거짓말 심리, 몸짓 심리, 혈액형 심리, 욕망 심리, 불안 심리, 항공 심리 등등에다 심지어는 사주 심리까지 있더군요.

그렇게 별별 심리를 다 파헤쳐 주는데 왜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서 지지고 볶으며 사는지 모를 지경으로 책들이 많더군요.

뒤바꼈다구요?

아무리 봐도 알 수 없는 게 사람의 심리니 그렇게 책들이 많다고요?

하긴 그렇겠네요.

 

그러면 따드의 ‘사회학적 심리학’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도서관에 “나는 너를 책처럼 읽을 수 있어”라는 책이 있었어요.

음...그렇다는건, 따드를 알면 “우리는 사회를 책처럼 읽을 수 있어”의 수준에 도달하게 될 수도 있겠네요.

사회의 심리를 읽을 수 있다는 건, 사회가 그러니까 사회를 구성하는 집단으로서의 ‘공중’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예측할 수 있다고도 할 수 있을까요?

자꾸 의문문으로 끝이 나니까, 부담스러우시다구요? 저도 부담스러워요.

그래도 이게 최선인 걸 어떻게 하겠어요.

아는 것도 없고, 읽은 것도 없이, 달랑 ‘사회학적 심리학’ 하나로 혀를 풀려니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요.

그건그렇고, 일단 잘만하면 사회구성체로서의 사람들의 심리를 읽을 수 있다는 거잖아요.

그렇게되면 앞으로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도 예측할 수 있겠죠.

주역을 풀거나 점쟁이를 찾아가지 않아도 말이죠.

 

 

그러면 이쯤에서 다들 생각나시는 책이 있을 것 같아요.

선생님이 저번에, 그렇게 말했는데 읽어 보는 놈도 없고 말이야 하셨던, 그 책 말이예요.

저는 그 책을 20년 전쯤에 읽었어요.

어떤 잘생긴 남자가 진짜 재밌다고 해서 몽땅 사서 밤을 새서 읽었죠.

네.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바로 그 책 말입니다.

뭐 한마디로 하라면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 느꼈을 법한 그런 마음이죠.

그 후로 아시모프의 책들을 마구 찾아서 읽었답니다.

‘사회학적 심리학’

요 단어를 딱 보았을 때, 진짜 거짓말 안하고 파운데이션이 떠올랐답니다.

 

샐던이라는 수학자가 모델을 만들었거든요.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행해왔던 행동 패턴들을 대입해서 앞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예측할 수 있는 수학적 모델 말이예요.

요것이 제가 기억하고 있는 내용인데, 거의 20년 전 기억이잖아요.

당연히 믿을 수가 없죠.

책을 찾아볼까 했는데 도서관에 없더군요.

아, 도서관은 왜 그런가 모르겠어요.

퇴마록 같은 책들은 잔뜩 있는데 말이예요.

그래서 또 검색을 할 수 밖에요.

위키백과에 이렇게 나오는 군요.

 

 

“심리역사학자, 해리 샐던(Hari Seldon)이 평생을 바쳐 연구한 심리역사학이 파운데이션 시리즈의 기반이 된다. 해리 샐던은 기체 분자의 운동역학을 인간 집단에 적용하여,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이론을 만들어 낸다. 분자 개개의 행동은 예측할 수 없지만, 공기 전체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인간도 개개인의 행동은 예측할 수 없지만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예측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해리 샐던은 연구를 계속하다, 은하계 전체를 지배하고 있던 은하 제국이 몰락하며, 몰락 후에는 3만년에 달하는 거대한 암흑기가 찾아올 것을 예견한다. 인류는 3만년의 암흑기 후에 제 2제국을 건설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역사의 대세는 제국 몰락으로 흐르고 있었다. 해리 샐던은 제국 몰락을 막을 수는 없지만, 암흑기를 천년으로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이것이 바로 파운데이션(Foundation)으로, 인류가 이루어 놓은 모든 성과를 두 행성으로 피난시켜 암흑기를 줄이는 것이었다. 제1 파운데이션은 터미너스(Terminus)행성에 자리 잡는다. 제 2파운데이션은 제 1파운데이션의 은하계 반대편에 위치하게 된다.

모든 준비는 끝나고, 인류는 해리 샐던이 예견한대로 암흑기를 헤쳐 나가게 되는데‥‥‥.”

 

 

아, 수학자가 아니고 “심리 역사학자” 였군요.

어쨌거나 집단으로서의 인간 즉 생물체로서의 사회는 예측할 수 있다는 거죠.

그렇게 해도 제국의 몰락은 막을 수 없지만, 암흑기를 줄이고 그 이후를 대비할 수 있다는 건데요.

요기서 또 생각나는 것이 영화 ‘2012’ 이고, 당연 연상되는 건 노아의 방주죠.

인간의 궁극적 욕망은 살아남는 것에 있는 걸까요?

도대체 남기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요?

유전자일까요? 문화일까요?

'깨끗하게 멸망하면 되지 뭐' 같은 생각은 반-인간적 배신일까요? 흐흐..

하여튼 2012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이거예요.

함선에 올라 탈 사람을 선정하는 방식이요.

거기엔 민주주의적 방식이라거나 합의라거나 그런 건 전혀 끼어들 여지가 없죠.

그냥 일방적이예요.

사실상 그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도 없고요.

그걸 어떻게 하겠어요?

제비뽑기? 레이디 먼저? 토론? 합의?

통치자들이 무조건적으로 결단하는 방법 밖에는 없어요.

대중에게는 아무런 기회도 없죠.

그저 결정되면 그걸로 끝이예요.

마치 법은 법이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처럼요.

사람들이 법의 기원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면 그것은 더 이상 법으로서 기능할 수가 없지요.

왕에게 네가 왜 왕이야? 하고 묻기 시작하면 왕정은 볼 일 다 본 셈이지요.

그런데 2012가 재밌는 부분이 그 어두운 기원을 감추는 교묘한 속임수죠.

마지막에 막 몰려든 사람들을 태우잖아요, 좌초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이예요.

거기엔 소문 듣고 몰려 든 사람도 있고, 아무 것도 모르고 그 배를 만든 노동자들도 있죠.

쥔공 과학자가 휴머니즘에 막 호소를 하면서 결국 문을 열게 되잖아요.

그걸로 마치 새로운 세계가 인도주의적 바탕 위에 세워진 것처럼요.

한마디로 웃기고 자빠졌죠.

자기들 빼고 전 세계의 모든 인간들이 왜 죽는지 영문도 모르게 죽어가게 해 놓고는 막판에 가서 겨우 수 천인가 수 만명인가 더 살렸다고, 인간성 만만세를 외치고 있으니 말이죠.

애초에 그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구조 자체가 아예 있지도 않았다는 듯이요.

물론 다른 방법이 있었다는 게 아니라, 그 기원의 심연을 그렇게 감추려 하지 말라는 거죠.

 

 

아차차...이런 또 함정에 빠진 기분인 걸요.

‘상상하라’에 사로잡혀 너무 멀리 날아다닌 것 같아요.

'따드'가 '타르트'는커녕 '호떡'이 될 판이군요.

다시 ‘사회학적 심리학’으로 돌아갈께요.

파운데이션의 ‘역사학적 심리학’ 을 거쳐서요.

다른 건 아는 것이 없는 걸요 뭐.

혹시 지금 읽고 계신 분은 이걸 좀 확인해 주실 수 있을까요?

샐던이 죽고 난 뒤에도 중간 중간에 홀로그램으로 나타나잖아요.

자기 예측대로 되어가고 있는지 돌발 변수는 없는지 확인하고, 조언도 하고 뭐 그랬던 것 같아요, 기억은 워낙 희미하지만.

이런 건 검색해도 안 나오더라구요.

파운데이션을 가지고 제대로 쓴 감상문이나 비평문도 없고요.

 

 

샐던 모델에 가장 중요한 하나의 조건이 있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미래를 몰라야 한다는 거죠.

몇 년 뒤에 제국이 망한다는 소문이라도 나보세요, 당장 난리가 날거예요.

돌발변수죠.

시기에 따라 인간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변수로 넣어 놓은 모델일 텐데 여기에 돌발 변수가 들어가면 결과는 끝장 난 거죠.

그렇게 몇 번의 위기가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뭐 아님 말고요.

어쨌든 인간 집단을 연구하든 사회를 연구하든, 연구 대상은 그 연구 자체의 존재나 목적이나 진행 상황을 전혀 몰라야 한다는 건, 그럴 듯 하잖아요?

영화 ‘2012’가 전 인류를 무지 속에 멸망시킨 이유도 사람들이 멸망을 알게 되면 그나마 인류 존속 프로젝트마저 진행하지 못하고, 말 그대로 씨를 말릴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거구요.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의문이 하나 생기는군요.

샐던 모델에는 보이지 않는 제3의 눈이 있어야 하는 거거든요.

인간집단의 심리를 대입해 놓고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바라보려면 인간 집단의 바깥에 존재하는 뭔가가 있어야 말이 되죠.

그런데 요즘 학자들 말로는 그 ‘밖’이라는 건 없다고들 하잖아요.

신이 사라졌으니까요.

사실 요즘 신은 거의 산타크로스와 비슷하지 않나요?

사람들이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척은 하잖아요.

그러면서 크리스마스가 오면 야단법석이죠.

그런데 그게 바로 ‘문화’라는 거야, 라고 하는 사람이 있더라구요.

우리가 진짜 믿지는 않는 것이 바로 문화라구요.

여튼 신이 없는데 누가 인간 바깥의 그 초월적 자리에서 인간 고놈들 참, 그러고 혀를 차겠어요?

샐던요?

모델을 만들었다는 샐던은 가능하다고요?

글쎄 그럴까요?

샐던이 뇌에 무슨 주사를 맞고 자기가 한 일을 깡그리 잊어버리지 않는 한, 오히려 샐던 그 자체가 커다란 변수가 될 것 같은 걸요.

제가 얼마 전 글에 잘 모르면서 아는 체 했던 것 중 하나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인데요.

왜 하나의 체계는 스스로 증명될 수 없는 공리를 적어도 하나는 가지고 있고, 그 체계의 완전성과 무모순성은 체계 논리 자체로는 증명할 수 없다는 거요.

제가 늘 하는 대로 용감무식 거두절미하면 완전한 체계 같은 건 없다는 건데요.

그런데 체계의 구멍은 사실 체계가 만들어진 바로 그 자리에 존재할 가능성이 가장 큰 것 같아요.

‘2012’에서 봤잖아요.

새로운 세계를 열면서 사람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걍 자기들끼리 살아남을 궁리를 다 짜놓고는 막판에 가서 이 세계는 휴머니즘 위에 서있다 요따구로 포장하잖아요.

나중에 그 세계의 후손들은 그 휴머니즘적 전설만 기억하게 되겠죠.

그들의 세계가 자신들의 조상 이외에는 모든 인류를 몰살 속에 방치하고 세워졌다는 그 무시무시한 기원은 싸악 묻혀 진 채로요.

다른 영화도 보통 보면 나쁜 놈이 머리 좋은 놈을 잡아와서 다 만들게 해놓고는 제일 먼저 하는 짓이 그걸 만든 놈을 일단 죽여 버리는 거잖아요.

만든 놈이 있으면 그것의 약점이, 그러니까 구멍이 드러나게 될 위험이 크니까요.

그렇지만 그것으로 그 흔적이 완전히 지워질 수는 없죠.

죽은 놈이 또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니까요.

 

 

갑자기 재밌는 이야기가 하나 생각나네요.

뜬금없으시겠지만 한번 들어보셔요.

사마르칸트의 어느 마을에 총각 하나가 살았는데, 글쎄 자기가 내일 저녁이면 죽는다는 예언을 들어 버렸지 뭐예요.

잠이 올 턱이 없겠죠.

그래서 이 총각이 살아 보려고, 밤새도록 말을 달려서 아무도 없는 어느 사막으로 숨어들었는데, 글쎄 거기서 딱하고 저승사자를 만나 버린거예요.

그런데 이 총각 보다 더 당황한 저승사자 왈,

당신을 데리고 가기 싫어서, 당신을 절대 만나지 못할 것 같은 그 사막으로 도망을 왔다는 거죠.

이런 이야기 많이 아시죠?

물론 제일로 유명한 사람이 오디푸스죠.

운명을 피하려고만 하지 않았다면, 그 운명이란 아무것도 아니었을 텐데 말이죠.

인간이란 그런 것 같아요.

어떻게 운명을 알고 네, 알겠습니다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어리석은 인간이지만, 그러니까 인간의 장대한 역사가 또 이렇게 쓰이는 거겠죠.

그런데 도대체 이 얘기와 사회학적 심리학이 무슨 상관이냐고요?

음....글쎄요;;

연관이 될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저도 모르겠어요 흐흐;;;

 

기왕 여기까지 온 것 조금만 더 얘기해 보면요.

결국 운명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 운명을 완성시킨다는 말의 의미는 이런 게 아닐까요?

운명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운명을 받아들여 버린 것과 같다는 걸요.

거꾸로 그래 그게 내 운명이야? 알았어! 운명이라니 할 수 없지 뭐. 라고 하는 겉보기에는 체념적인 태도가 오히려 운명을 가장 효과적으로 허물어뜨리는 방법이 될 수도 있죠.

중요한 건 그 프레임에 갇히는가 아닌가 하는 사실인 것 같아요.

운명을 고민하는 순간, 우리는 바로 운명의 프레임에 갇혀 버리죠.

그리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운명의 늪에 빠져 들게 되고, 그래서 운명은 운명이 되 버리는 거예요.

어제 ‘뿌리 깊은 나무’ 보셨어요?

세종의 마지막 대사가 대충 이거죠.

“너는 너의 길을 걸어라” 그리고 돌아서서 혼자 말을 하죠.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

운명? 너는 너의 길을 가라, 나는 내 길을 갈란다 그렇게 나가면 똘복이가 제 아무리 절치부심해도 세종이 암살당할 염려가 없는 것처럼, 운명이 우리를 막아서지는 못하지 않을까요?

 

 

오디푸스 얘기를 하다 보니 또 떠오르는 것이 있네요.

그런데 이 연상이란 게 참, 좀 그런 것 같아요.

별 관계도 없는 것 같은데 어떤 말을 하다보면 막 떠오른단 말이죠.

제 무의식은 그걸 연관 지워 놓고 있는 걸까요?

언제가 되면 저는 그걸 의식 위로 길어 올려 말이 되게 만들 수가 있을까요?

어쨌든 이번 과제의 표면적 방법론은 ‘상상학’ 이잖아요.

저는 일단 가 볼 테니, 그냥 허허 웃어 주세요.

혹시, 여러분이 그것들을 어떻게 연관 지워 주실 수도 있잖아요.

 

뭐냐하면요, 죄수의 딜레마라는 거요.

 

“공범A,B 두 명의 죄수 중 자수를 한다면 감형을 받을 수 있고

둘 다 묵비권을 행사해서 죄를 인정 안하면 역시 감형을 받을 수 있으나

둘 중 어느 한명이 자수를 했을 때 자수하지 않은 다른 한명은 더 무거운 형벌을 당하는 조건일 때 죄수들은 딜레마에 빠진다는 건데 서로 상대방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엔 서로 자백을 하려한다는 내용입니다."

 

검색하시면 대충 이렇게 나와요.

인간처럼 믿을 게 없다는 말, 많이 듣고 살잖아요.

 

예전 동구권에 이런 일도 실제 있었다는 군요.

어느 날 그 나라에, 휴지가 동이 났다는 소문이 돌았대요.

그런데 사람들은 다 알고는 있었죠.

다만 소문일 뿐이라는 걸요.

실제로는 가게마다 휴지가 많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나냐 하면 실제로 휴지가 동이 나 버려요.

다른 사람을 못 믿는 거죠.

혹시 그 소문을 믿고 바보 같은 놈들이 휴지를 다 사버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돼서 자기는 진짜 믿지는 않지만 휴지를 사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병신 같은 놈들 때문에 개고생이네 어쩌네 하면서 휴지를 사러 가겠죠.

그렇게 해서 그 나라의 소문은 현실이 되는 거죠.

 

이 얘기는 ‘선덕여왕’에서 묘사된 적도 있죠.

덕만이 소문을 내 버리잖아요.

왕실에서 쌀을 푼다고요.

군량미도 확 풀어버릴 거라고 엄포를 놓죠.

그러자 귀족들이 쌀값을 올리려고 비싼 값에 매점매석해 놓은 쌀이 갑자기 똥값이 되기 시작하잖아요.

실제로 왕실에서 군량미를 풀지 못한다는 걸 알지만 귀족들은 당할 수밖에요.

사람들이 쌀을 안 사는데 어떻게 할 거예요.

치킨 게임을 할려면 밑천이 두둑해야 하는데, 군소귀족들은 못버텨요.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들면 한 사람 두 사람 내다 팔기 시작하고 그 때부터 바로 공황이죠.

너도 나도 투매죠.

결국 덕만은 군량미엔 손도 안 대고 쌀값을 잡아내죠.

 

 

사람 심리는 진짜 복잡하죠.

오죽했으면 “내가 누구인지 말 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라고 했겠어요.

저는 이걸 이인화의 책 제목이라고 알았는데, 사실은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에 나오는 구절이라네요.

인간은 좀 불투명한 존재인 것 같긴 해요.

제가 제 속을 들여다봐도 그렇고요.

무의식이라는 것이 있다잖아요.

내 속에 나 보다 더 한 그것이 있다는데 아무리 제 몸뚱이라도 지가 다 안다고 할 수 있겠어요?

몸뚱이 아니라 정신이라고요?

‘정신은 뼈다’는 말도 있다니까요. 정말 이예요.

무슨 말인지는 잘 몰라도, 하여튼 정신은 두개골은 아니지만 또 정신이 뼈라고 안 할 수도 없다고 했다고요.

 

그런데 사람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면 어떨까요?

우리가 속 들여다보인다 보여, 할 때 그 속 말고요.

 

영화 ‘아바타’ 보셨죠?

나비족들이 이크란하고 교감 할 때, 말 꼬리처럼 생긴 긴 머리 꽁댕이를 서로 접촉하잖아요.

그러면 말도 필요 없고 몸짓도 필요 없어요.

그냥 저절로 서로를 알게 되요.

차라리 하나가 된다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소통할 수 있다면 참 멋진 세상이 될까요?

일단 오해의 근원인 말이 필요 없어지겠지요.

서로 싸울 필요도 없고요.

머리를 굴려도 소용없으니 머리 굴릴 필요도 없고 그래서 머리 굴려서 생겨나는 갖가지 못된 짓들도 일어나지 않겠지요.

소용없는 일을 하는 사람도 없고요.

 

가령 이럴 것 같아요.

선생님이 과제를 내면 그 순간 저희는 바로 선생님의 의도는 물론 함정도 다 알 수 있겠죠.

그리고 답도 뻔히 알 테니, 지금 제가 하는 것 같은 삽질 따위는 있지도 않겠죠.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을 필요도 없을 거구요.

다 똑 같을 테니까요.

개성도 없고 상상도 없고 문화도 없겠죠.

아주 멋진 신세계가 되겠군요.

사람의 속을 모른 다는 것, 혹은 인간은 근원적으로 불투명하다는 사실,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그 오해 때문에 소통이 더욱 필요해 지겠죠.

소통의 노력 속에 인간의 역사가 만들어지는 거구요.

결국 인간은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인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자연 속에서 꽃이나 나비처럼 평화롭게 살긴 하겠지만, 인간은 아닐 것 같거든요.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인간성을 버린다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군요.

이야기가 삐딱하다구요?

그래서 저는 아바타 같은 영화에서 제시하는 이상향이 그리 탐탁하지 않아요.

 

 

 

 

자, 이제 ‘따드’의 ‘사회학적 심리학’으로 돌아 갈 시간이군요.

저는 물론 따드의 이 심리학이 무슨 심리학인지 몰라요.

여러분은 어려운 원서도 읽고 논문도 좀 찾아 보셨나요?

저는 심리학이라는 것이 과연 인간을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조금 의문이 들어요.

그 대상이 인간 개인이 아니라 인간 집단인 사회라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고요.

오해라고요?

전 모르죠.

‘따드’도 그렇고 사회학적 심리학도 그렇고 생전 처음 듣는 소리니까요.

그런데 사회를 분석한다거나 해석한다는 말은 많이 하잖아요.

저는 이 분석이나 해석과 심리는 좀 다를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정신분석 있잖아요.

그런데 정신분석 하는 사람들은 심리학 굉장히 싫어하고, 아마 심리학자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프로이트를 두고 서로 당기기도 하는 것 같거든요.

프로이트의 제자 융이 집단 심리학으로 방향을 잡는 바람에 프로이트가 융을 싫어했다는 말도 들은 것 같고요.

심리학을 한 융은 프로이트의 진짜 제자가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라깡학파는 융이나 심리학을 아예 언급하지도 않는 것 같아요.

저는 무슨 학파는 되지도 못하지만 어쨌든 정신분석에 조금 관심이 있어요.

정신분석은 자기 스스로는 못한다고 하는데요, 어쨌든 나는 왜 요 모양의 인간인가에 대해 관심이 많은 편이거든요.

제가 봐도 왜 제가 이런지 도통 알 수도 없고, 쫌 그래요.

하여튼 그래서 저는 심리 보다는 분석 쪽을 신뢰하는 편이예요.

사회를 대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심리 파악이 아니라, 구조 분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예전의 경험이 또 하나 생각나네요.

얼마 전 MBTI인가 애니어그램인가 뭐 그런 성격 분석 프로그램이 유행한 적이 있잖아요.

그 전에 한의학에서는 또 사상체질이라는 게 유행했죠.

둘 다 사람을 어떤 유형으로 나누어 분석하는 거죠.

주로 심리를 분석하죠.

어떤 경우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어떤 걸 선택하느냐 뭐 그런 질문들로 분석을 했던 것 같아요.

하여튼 제게 사상체질을 가지고 제품 개발을 하라는 업무가 떨어졌어요.

저는 열심히 책도 읽고 의사들도 찾아다니고 그랬죠.

그런데 결론은 이거였어요.

정확한 체질은 사실 아무도 모른다는 거였죠.

아니면 우리나라 오천만 인구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체질이 있다는 거구요.

편의상 몇 가지로 분류를 했지만, 그게 다 맞아 떨어지지도 않고, 실제로 병이 나고 그래서 치료를 해봐야 사후에나 정확히 그것도 추론할 수 있을 뿐이라는 거죠.

인간의 내면을 분석하고 그걸로 어떤 틀을 씌운다는 것 사실 딱 봐도 좀 엉성해 보이잖아요.

그런데도 그런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건 어쩌면 역설 같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만큼 심리란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라는 방증이기도 한 것 같아요.

쉽게 알 수 없고, 어렵게도 알 수 없고, 잘 알 수 없으니까 자꾸 알고 싶어지는 것 아닐까요?

 

 

‘따드’의 ‘사회학적 심리학’ 하나로 참 쓸데없는 말을 길게도 했네요.

아직 뒤르켐이나 드봉, 들뢰즈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했는데 말이죠.

더 할 말이 남았냐구요?

말이 돼야 한다는 압박만 없으면 말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요, ㅎㅎ.

제가 처음 보면 말도 없고 숫기도 없고 그런데, 가만가만 말을 시켜 놓으면 또 끝도 없이 주절대는 버릇이 있어요.

말리고 싶어도 못 말리실 거구요.

그 땐 그냥 자리를 떠버리세요.

 

 

이번 과제는 꼭 10매를 채워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사람이란 게 또 한 번 나아가면 뒤로 물러나기가 쉽지는 않잖아요.

기왕에 오기가 생기는 거죠.

사실 이번 과제가 너무하긴 해요.

책도 읽을 필요 없다, 자료도 별로 없다, 그러면서 이름 하나 달랑 던져 주시고는 과제를 3편이나 제출하라니요.

여기서 없는 얘기 다 지어내고 나면, 나머지 두 편을 뭘로 채우나 걱정이 많이 되긴 돼요.

역시 뒤르켐이나 들뢰즈는 남겨 둬야 할까요?

그래도 이왕 말도 나왔고, ‘Garbriel tarde라는 사람에 대해서 조사하시오’가 과젠데, 사회학적 심리학 말만하고 끝내기에는 좀 성의가 없어 뵐 것 같아요.

나름대로 들뢰즈가 어떤 말을 했는가도 찾아 봤고, 뒤르켐이 자살론에서 따드를 비판하는 부분도 다시 읽었거든요.

그렇게 그저 먹은 것은 아니라고 ㅎㅎ 주장하고 싶어요.

 

 

제가 어떻게 들뢰즈를 알게 되었냐하면요.

몇 년 전에 도서관에서 우연히 노마디즘이란 책을 보게 되었어요.

물론 완전 우연은 아니고요.

이진경이라는 분이 유명하잖아요.

1980년대의 그 전설적인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은 읽어 보진 못했지만 소문은 듣고 있었죠.

그 후에 이진경은 프랑스로 가서 들뢰즈를 연구했나 봐요.

저는 ‘철학과 굴뚝 청소부’, ‘철학의 모험’ 같은 책을 보게 됐고 이진경에 관심을 가졌죠.

‘노마디즘’은 이진경이 들뢰즈의‘ 천의 고원’을 읽기 쉽게 풀이해 놓은 책이라 할 수 있어요.

일종의 해설집이죠.

지금도 수유N이라는 공간에서 노마디즘 강의를 하는 걸로 알아요.

어쨌든 들뢰즈가 따드를 부활시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저는 ‘노마디즘’을 뒤졌죠.

‘천의 고원’은 본 적도 없고 볼 생각도 해보지 않았으니, 노마디즘을 찾는게 당연한 순서겠죠.(물론 노마디즘을 다 읽은 것도 아니예요 ㅎ)

‘9장. 미시정치학과 선분성 : 거시정치와 미시정치’ 의 ‘3) 믿음·욕망의 흐름과 권력’ 편에 따드가 3쪽 정도에 걸쳐 언급되고 있어요.

복잡한 얘기여서 옮길 재주는 없고요.

그리고 지금 여기는 상상의 장이니, 딱딱한 이야기 별로 필요도 없을 것 같아요.

다만

“사회적인 집합표상 내지 표상체계와 같이 거대한 것에 관심을 갖고 있던 뒤르켐과 달리 타르드는 미시적인 믿음이나 태도 등의 흐름에 관심이 많았어요.”

라는 표현만 소개해 드릴께요.

들뢰즈의 용어로 하면, 뒤르켐은 몰적인 대상에, 따드는 분자적 대상에 관심이 있었다는 거죠.

그리고 분자적 대상을 주 테마로 하는 들뢰즈는 당연 따드를 좋아했겠죠.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은 또 까다로운 개념 정립이 필요하니 직접 읽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 그런데 들뢰즈와 가타리(천의 고원은 둘이 함께 쓴 책이예요) 는 따드가 하려고 했던 것이 개인적인 것이나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믿음이나 욕망의 흐름 내지 파동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전파되는가 하는 데 관한 것 ”이었다고 이진경이 설명하고 있군요.

 

 

음...이렇게 되면 또 어떻게 되나요?

제가 앞에 풀었던 상상의 나래는 이 산이 아니고 저 산으로 날았던 셈인가요?

어쨌든 따드를 쫒아가니 뒤르켐은 물론 들뢰즈가 나오고, 들뢰즈가 나왔으니 스피노자까지 나와야 하는 걸까요?

어려운 이름들이 나오기 시작하니 슬슬 지치는 군요.

아직 한 사람이 안 나왔는데 말이죠.

드봉이라고.

‘군중 심리’ 라는 책이 대표작이라는데, 이건 또 서점에 떡하니 꽂혀 있더라고요.

앞부분만 살짝 넘겨봤는데 군중이란 얼마나 우매한 우중인가로 시작하는 듯 했어요.

요것도 읽어 보실 수 있겠죠?

 

 

자, 이제 진짜로 끝낼께요.

저도 온 몸이 뒤틀리는 군요.

이런 저런 자료들의 단서는 우리 모두 알고 있으니

“Garbriel tarde라는 사람에 대해서 조사하” 는 것은 각자의 노력에 달려 있겠죠.

아니, 각자의 상상력에 달려 있다고요?

뭐 어쨌거나 숙제를 해야 한다는 것만이 분명한 사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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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이었던 남자 - 악몽 펭귄클래식 76
G. K. 체스터튼 지음, 김성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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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7월 25일 카페 과제물입니다.  체스트턴의 책 리뷰는 아니고, 책에 나오는 ' 철학경찰'에 착안한 글입니다. 과제는 내가 어떤 학파의 태두가 된다면? 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과제는 순전히 소설이다. 태두는커녕 학파에 한 다리 걸쳐볼 꿈도 꾸기 힘든 판이니 학파의 정의고 태두의 정의고 뭐고 그냥 소설로 나가야겠다. 이 때 소설은 그 소설이 아니고 소설 쓴다, 소설 써! 의 그 소설이다 ;; 



나는 철학 경찰 학파의 태두이다. 물론 처음 철학 경찰을 제안한 그 분은 일종의 사상 검열 같은 역할을 철학 경찰의 임무로 주창하셨지만, 우리 학파의 임무는 전혀 다르다. 일단 그 분은 하이데거가 파시즘에 논리를 제공하고, 맑스가 스탈린식 전체주의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것에 열 받으시어, 전체주의 같은 극악무도한 체제의 씨앗이 될 수 있는 위험한 철학을 발본색원 하시기를 염원하셨다. 그러나 히틀러가 하이데거의 책임이고 스탈린이 맑스의 책임이냐에 관한 논의는 여전히 분분하고, 우리 학파는 사실 그런 거창한 문제에는 각별한 관심을 가질 깜냥도 주제도 못되는 바, 단지 철학 경찰이라는 이름만을 그 분에게서 빌려왔음을 밝혀둔다. 또한 오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미리 말씀드리는바 우리 학파는 그 분의 철학 경찰 이론을 지지하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물론 경찰이라는 것의 본분이 민중의 몽둥이 인 것이 사실이다. 국가는 민주적 법으로 지탱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법이라는 것의 실체가 몽둥이이다. 이해하시기 어려운 분들은 2008년부터 2010년 현재까지 대한민국의 신문들만 주욱 훑어보시면 된다. 이왕 보시는 김에 조중동 말고 한겨레, 경향 같은 것들로 보시면 좀 더 상황 판단을 빨리 하실 수 있다. 물론 다음 아고라를 이용하셔도 된다. 그러나 몽둥이도 사용하기에 따라 지팡이가 될 수 있다. 그것이 우리 학파가 오해의 여지를 무릎 쓰고 철학 경찰 학파로 이름을 삼은 이유이다.


우리 철학 경찰 학파의 임무는 아래와 같다.

1.  각종 철학 관련 서적의 번역판을 저자별로 분류하여, 번역상의 오류를 낱낱이 밝혀낸다. 단, 이 때 철학서라 함은 일반인들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입문서나 기초서로 너무 전문적인 영역은 우리 학파의 능력을 넘어서는 관계로 다루지 아니한다.

2.  오류가 허용 범위를 넘어서면 번역가를 소환하여 진술서를 작성한다. 이때 허용 범위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① 주어 술어 목적어의 관계가 불분명하여 문장의 뜻이 완전히 바뀔 수 있다.

    사실 이것이 우리 철학 경찰 학파가 탄생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영문 서적의 번역본을 예로 들면 영문에서는 문장이 길어지는 경우 주로 S+V+O+which ~ 구문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때 문장의 목적어는 명확하다. which 구문은 단지 목적어를 설명하거나 수식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말로 번역될 경우, 동사가 문장의 맨 나중에 나오는 문장 구조 상 동사의 진짜 목적어와 which 구문 안의 여러 명사가 뒤엉켜 어느 것이 목적어이고 어느 것이 which 구문 안의 목적어인지 구별 불가능할 때가 많다. 심각한 경우에는 이것 때문에 문장의 의미가 전혀 다르게 바뀌기도 한다.

② 주요 개념어의 번역상의 불일치로 독해를 쓸데없이 힘들게 한다.

    이를테면 noumenal의 경우 본체적, 예지적, 가상적 이란 말이 병용된다. 도대체 본체와 예지와 가상이 어떻게 같은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철학에는 철학 용어의 정의가 따로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일반인도 읽을 수 있으려면 (우리는 일반인도 철학책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최소한의 용어 통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본 본체와 저 책에서 본 가상이 동일한 noumenal이라는 것을 알 수 없는 한,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그 개념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축적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학자에 따라 혹은 번역가에 따라 그 단어를 꼭 고집하는 이유가 있겠지만 그럴 때는 각주를 통해 자기가 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단어를 버리고 다른 단어를 사용하지는 설명해야 한다고 본다.

③ 읽어도 도통 무슨 소린지 알 수 없고, 누가 봐도 앞뒤가 안 맞는 문장이어서, 책 자체를 누더기로 만든다.

   슬프지만 이런 번역 책 더러 있다. 앞 문장에서는 그렇다고 했다가 뒷문장 가면 뜻이 완전히 바뀌어 어느 것이 저자의 견해인지 알아먹을 재간이 없을 때가 있다. 또한 한글 문장으로만 두고 봤을 때 육하원칙은커녕 중이 염불을 하는 건지 강아지가 풀을 뜯어 먹는 건지 문장 구조가 성립되지 않을 때도 있다.  

그 외에도 기타 등등 많지만 사소한 것들은 허용 범위로 인정하고 넘어 간다.

3. 이상의 기준으로 범죄 요건이 성립되면, 1차 수정을 권고한다. 시행되지 않으면 2차 수정을 강제한다. 계속 버티면 3차 책을 모두 모아 폐기한다.

4. 이미 발간되어 배포된 책에 대해서는 수정분을 부록으로 발간하여 별도로 발송하거나 웹상에 공지한다. 아직 배포되지 않은 책은 수정분을 별첨하여 판매한다.


우리는 철학 경찰의 실질적인 임무와 철학 경찰 학파라는 학술적 임무를 동시에 부여 받는다. 우리 철학 경찰은 임무의 특성상 상부 기관인 검찰이나 별도의 판결 기구인 사법부를 따로 두지 아니한다. 우리의 권력은 순전히 일반 민중으로부터 나온다. 우리 민중은 전문 학자들처럼 철학 서적을 읽을 권리와 일종의 의무를 가진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국가를 일부 철학 엘리트의 손에서 농단되는 것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중 스스로 지배자의 꼭두각시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 주기 때문이다. 우리 민중도 스스로 사고하고 함께 논의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 능력은 원서를 읽을 수 있는 어학 실력 따위에 의해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누구나 한글만 깨치면 모든 학문에서 소외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우리 철학 경찰의 임무는 매년 열리는 일반 민중 철학 총회에서 새롭게 인준 받거나 수정 받는다.



네, 이상의 소설은 제가 몇 몇 책을 읽으면서 느낀 답답함에 대한 한풀이입니다. 그런데 진짜 번역 좀 잘 나왔으면 좋겠어요 ㅠ.ㅠ.... 진짜 내용 파악하기도 힘든데, 말도 안되는 문장 만나면 참으로 막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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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1~3권 세트 - 전3권
강풀 지음 / 재미주의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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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6월 22일 카페에 썼던 글입니다.

 

“지금부터 내가 검사고 이 총이 판사야.”

  영화 <부러진 화살>의 석궁을 떠올리게 하는 이 장면은 드라마 “추적자”의 첫 장면이다. 영화 <부러진 화살>이 전 성균관대 교수 김명호가 현실에서 쏘아 올린 화살을 스크린에 명중시킨 것이라면, TV에서 울리는 백홍석(손현주 역)의 총소리는 화면 밖 우리의 현실을 정 조준하고 있다. 그러나 법관을 겨눈 활, 법정을 울린 총이라는, 외형이 보여주는 것과는 정반대로 이들이 원하는 것은 법이 원칙대로 지켜지는 것뿐이다. 법전에 쓰인 대로 재판받기를 원하고, 죄 지은 자가 처벌받기를 바랄 뿐이다.

  비극의 시작은 이 당연한 바람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에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죄를 지은 자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법이 중립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다는 사실은 국회의원 강동윤(김상중 역)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법대로 해야지” 라고 말할 때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때 “법”은 보편적 합의나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 강자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포장된 도구에 불과하다. 편리하게도 “법”은 대부분의 서민들을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만드는 마법의 주문이다. 사악한 마법사들은 자신들이 만든 “법”이라는 주문으로 세상을 지배한다.

  사실 법은 대부분 상식적으로 작동한다. “법”이 주술력을 가질 수 있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권력 스스로가 위협받을 때, 법은 본모습을 드러낸다. 중립적 가면 밑에 감춰진 법의 이면은 권력의 외설스런 욕망이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바로 내가 무릎 꿇고 도와 달라 애걸했던 그 얼굴이, 나의 모든 믿음과 희망을 걸었던 그 얼굴이, 다름 아닌 범인의 얼굴이라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법이 범죄의 도구라면 도대체 진실은 어떻게 밝힐 수 있을 것인가?

 

 

  강풀의 만화 <26년>이 이제 정말 영화로 만들어 진다. 출연자도 발표되었고, 첫 촬영에 들어갔다는 소식도 들린다. 지난 번 청어람에서 모집한 클라우딩 펀드가 실패했을 때, 아!.... 했다. 십만 명이 만원씩이면, 만 명이 십 만원씩이면 10억인데, 결과는 4억을 채우지 못했다. 카드결재만 가능하다는 문제도 있었고(나는 인터넷상에서 카드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편 카드를 흙..), 홍보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광주 비디오를 보면서 이를 갈며 울었던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인데, 그럴 수 있는가 싶었다. 게다가 소위 “그 사람”은 그 유명한 29만 원짜리 도깨비 통장으로 별의별 호화생활을 하다하다, 최근엔 육군사관학교에 거액을 기부하고 사열까지 받았다고 하니, 세상이 뒤집혀도 단단히 뒤집혔다.

  국가내란죄의 수괴로 1심 사형선고, 2심 무기징역형을 받았고, 김대중의 요청으로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사면했으니, “그 사람”에 대한 법적 단죄는 끝났다. 그래서 광주는 이제 끝난 것인가? 5.18은 애도를 마쳤는가?

  만화 <26년>은 그에 대한 단호한 응답이다. 끝나지 않았다. 현실은 여전히 그 때 그 시간에 붙잡혀 있다. “그 사람”은 경호원과 추종자에 둘러싸여 역사를 농락하며 활개를 치고 있다. 죽은 시민군의 자식들은 고통과 분노 속에 숨죽이고 있고, 학살의 죄책감은 암처럼 계엄군의 목숨을 갉아먹고 있다. 진실은 기록도 되기 전에 벌써 잊어지고 있다. 무엇이 끝났다는 말인가?

  법과 정치는 서둘러 “그 사람”을 용서하고 광주를 봉합하려 했다. 그러나 사죄도 없는 용서와 화해는 한바탕 쇼에 지나지 않았다. 이득을 챙긴 자들과 구경꾼들이 흥에 취해 떠난 자리에, 진정으로 상처받은 자들만이 모멸과 분노 속에 남겨졌다. 광주에서 벗어나길 누구보다 간절히 염원했던 그들만이. 이 현실이 <26년>의 그들을 모았다.

 

 

  사적 복수를 해야 하는 시대는 병들었다. 사적 복수로 내몰린 사람들은 처절하게 고통 받는다. 그러나 눈을 감고 살 수도 없다. <추적자>의 강동윤은 잡혀온 백홍석에게 소리친다. “왜! 왜! 왜! 왜! 포기하지 않는 거야!” 백홍석은 말한다. “난 수정이 아버지니까.” 백홍석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딸의 죽음이 아니다. 딸의 죽음이 왜곡되고, 이용되는 방식이다. 짓이겨진 딸의 죽음은 딸을 정당하게 애도하고 떠나보낼 수 없게 만든다. 백홍석이 원하는 것은 거창한 정의가 아니다. 지지율 60%를 웃도는 대통령 후보의 사악한 실체를 만천하에 드러내야 한다는 사명감 따위는 더욱 아니다. 그런 것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 곱게 잠재운 딸 위에 그 자신 곱게 잠들 수 있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적 복수는 뜻하지 않게 공적 정의와 만나게 된다. “추적”을 통해 드러나는 진실은, 공적 정의가 무너진 곳에서는 초라할 정도로 소박한 개인의 꿈마저도 보호될 수 없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정략적 목적으로 도우려는 변호사에게 백홍석은 여전히, 싸움은 니들끼리 하라고 냉소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점점 더 정치의 한 복판으로 떠밀리게 된다.

  만화 <26년>의 사적 복수는 훨씬 더 직접적으로 공적 정의와 일치한다. 사적 형식을 빌고 있지만, “그 사람”에 대한 처결이 정의의 실현이 아니라면 그 무엇일 수 있을까. “그 사람”이 주창한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도착적 구호는 “그 사람” 자신에게 돌아갈 때에야 비로소 그 의미를 획득할 것이다.

 

 

  만화 <26년>은 2006년 연재 당시 “일일 조회 수 200만 건과 매회 댓글 수 2,000 건 이상”의 기록적인 관심을 받았다. 이 관심은 그것 자체로 “그 사람”에 관한 공적 심판이기도 하다. <26>년의 그들은 사적 복수를 실행하지만, 만화<26년>이 표적하는 것은 공적 정의의 천명이다. 어떻게 보면 모든 사적 복수의 목적은 복수가 가진 정당성에 대한 공적 승인일 지도 모른다. 그것이 덧없는 복수가 될지, 여론의 전폭적 지지를 얻는 정의의 실현이 될지는 대중들의 평가에 달려있다.

  만화가 강풀은 <26년>에 관한 다음과 같은 작품 후기를 남겼다.  영화 <29년> 역시 그렇게 제작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성공한다면, 재밌다는 소문만으로 영화관을 찾은 사람들조차 화인처럼 찍히는 그 무겁고 슬픈 역사에 뜨겁게 가슴을 불태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하나의 시작이 될 것이다. 정의란 그것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될 때, 그것에 대한 공적 담론이 피어날 때, 드디어 첫 발을 디딜 것있기 때문이다.

 

 

사전 조사를 하고 직접 취재를 하면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나는 이렇게 무거운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만화로 풀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런 슬픔과 아픔을 만화로 풀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이 만화를 그리는 것이 옳은 것일까.

.......

오랜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은 두 가지 였습니다.

첫 번째.

“무조건 재미있게 하자.”

내가 대중 만화가이니 다른 것은 다 차치하더라도

무조건 재미있게 그려서 더 많은 사람들이 보게 하자.

어떠한 방식의 전개를 하고, 어떤 소재를 끌어 쓰더라도

그것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해보자.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

두 번째.

“현재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우리는 광주 이야기를 할 때는 항시 과거의 시제로 이야기하게 된다.

광주의 이야기는 과거가 아니라

지금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다.

광주로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자.

그 날의 아픔을 간직한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금 현재에서 벌이는 이야기를 하자.

무조건 재미있게 그려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읽게 하고,

지금 현재의 이야기로 현 시대 사람들의 공감을 얻도록 하자.

그런 고민 끝에 나온 만화가

바로 “26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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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집 1 펭귄클래식 25
이디스 워튼 지음, 최인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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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23일 쓴 글입니다.

 

 

  도서관의 서가를 훑어 가다가 <순수의 시대>에 눈이 멈춘 것은 순전히 슬라보예 지젝 때문이다. 그의 책에는 올렌스카 백작 부인과 아처의 은밀한 사랑이 이렇게 해석된다.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에서 젊은 뉴랜드의 물신은 그의 아내 자신이다. 그는 아내가 알지 못하는 한에서만 올렌스카 백작부인과의 불륜을 추구할 수 있다. 아내가 처음부터 그의 불륜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아처는 더 이상 백작부인과의 사랑을 지속할 수 없게 된다. 그의 아내가 죽고 더 이상 백작 부인과의 결혼을 방해할 사람이 아무도 없음에도 말이다. 」

 

 

  지젝의 책에는 참으로 많은 영화와 책과 그림, 음악들이 등장한다. 어떤 것들은 여러 권의 책에 되풀이 인용되기도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순수의 시대>이다. 나는 이디스 워튼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고, 더욱 솔직 하자면 이 이름을 알게 된 것도 지젝을 통해서이다. <순수의 시대>라는 영화에 대해서도 다만 니콜 키드만이 나오는 걸로 알고 있을 뿐이다.

 

 

 

 

  하루만에 <순수의 시대>를 읽고, 그 다음날 <기쁨의 집>1,2권을 빌려왔다. 재미있는 것은 작가별로 정리된 서가에, <기쁨의 집> 바로 옆에 <열락의 집>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는 것이다. 기쁨과 열락이 동어일 수 있을까 잠깐 혼란스러웠다가, <기쁨의 집>을 읽기로 했다. 같은 책이긴 한데 번역 문체가 확연히 달라서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었다. <열락의 집>은 마치 해방 전후의 한국 소설을 읽는 느낌이라고 할까.. 놀랍게도 2009년에 번역된 것인데도 말이다. 구약 성서에서 따온 the house of mirth의 mirth가 열락에 더 가깝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내가 읽었던 파멸한 여자들의 이름을 떠올렸다... 안나 까레리나, 보바리, 차탈레이..? 그 보다 스탕달의 적과 흙에서 줄리앙의 성별이 바뀐 것이 아닌가?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떠올랐던 것은 제인 오스틴의 여자들이다. <기쁨의 집>의 릴리에 비하면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는 얼마나 안전한 사랑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인가?  <오만과 편견>이 침대 머리맡에서 가슴을 두근거리고 들을 수 있는 동화라면, <기쁨의 집>은 벌떡 일어나 앉아 인상을 쓰고 읽어야 하는 냉혹한 이야기이다.

  19C말~20C초 뉴욕 상류 사회의 위선과 허위와 공허가 릴리가 딛고 서 있어야 하는 얼음판 같은 현실이라면, 오스틴이 묘사한 영국 상류 사회의 위선은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의 진정한 사랑을 위한 무대 장치로 여겨질 정도이다. 오스틴의 소설들은 브리짓 존스의 일기나 하이틴 로맨스물의 형태로 행복하게 반복(질이 떨어지긴 하지만;;) 될 수 있지만, 이디스 워튼의 소설은 1등만 기억하는 이 더러운 세상 (개콘의 술푸게 하는 세상은 얼마나 멋진 풍자인지!)에서 그 자체로 현실적인 의미를 가지며 우리 자신의 모습을 생생히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1등과 1등이 결혼하는 세상, 장동건은 고소영과만 결혼하는 세상에서, 장동건과 결혼하길 꿈꾸는, 가진 것 없이 콧대만 높은 아름다운 아가씨의 앞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비참할지 생각해 본다면... 루저녀 역시 그녀 자신이 가진 것이 달랑 170cm가 넘는 키 뿐이라면, 그녀의 앞에 놓인 것은 180cm가 안되는 루저남이거나, 키만 180cm가 넘는 또 다른 루저남일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이다.

그러니 소위 루저남들께서는 그렇게 핏대를 높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위너를 꿈꾸는 태생적 루저녀의 비극적 행로가 이미 100년 전의 <기쁨의 집>에 고스란히 경고되어 있으니 어떻게 연민 없이 볼 수 있을까..

 

 

 

 

 

  릴리는 아름답고 우아한 기품이 몸에 밴 상류계급의 아가씨다.

  그러나 그녀에겐 그녀를 지켜 줄 부모도 없고 돈도 없다. 오로지 태생적인 아름다움과 명민함을 자산으로 상류 사회의 이 집 저 집에 유용한 식객으로 불려 다니고 있을 뿐이다. 그녀를 이 곤경에서 구해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번번이 성공의 문턱에서 알 수 없는 이유들로 그 기회들을 스스로 놓치고 만다. 무엇인가 그녀를 가로막고 있다. 그렇게 계속해서 기회는 지나가고 그녀는 점점 궁지에 몰리게 된다. 경제적 곤궁 속에서 친구의 남편은 그녀의 얼마 남지 않은 돈을 투자해 주겠다고 하고 그녀는 아무 의심 없이 그 호의를 받아들이지만, 결국 그 돈은 투자의 대가가 아니라 그녀에게 모종의 호의를 기대하는 친구 남편이 지불한 일종의 부정한 돈임이 밝혀진다. 그녀는 친구로부터 버림받는다. 연이어 다른 돈 많은 귀부인이 그녀를 자신의 은밀한 사랑놀이에 대한 방패막이로서 이용하다가 그녀를 배반하고 그녀는 결국 상류 사회에서 완전히 추방당한다. 그녀는 다시 옛날의 상류 사회로 돌아가려는 열망 속에 계속해서 나쁜 선택을 하게 되고 그 결과 한 단계씩 한 단계씩 떨어지던 그녀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추락을 한다. 결국 모자 가게의 견습공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녀는 결국 그 노동자의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삶을 마친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방어가 철저한 사람일수록 반드시 이기심을 분출할 한 가지 커다란 탈출구를 찾게 마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릴리는 지금까지 그라이스 씨에게 아메리카나가 했던 역할을 자신이 대신할 작정이었다. 그가 아낌없이 돈을 쓸 만큼 충분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단 하나의 소유물이 되려는 것이다. 릴리는 이런 식의 관대함이 사실은 천박함의 한 가지 형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의 허영심과 자기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해서, 그녀의 소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곧 남편에게는 가장 세련된 방식의 자기 탐닉으로 여겨지게끔 만들 것이라고 굳게 결심했다. 」

 

 

  릴리가 상류 사회에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상류사회의 관습에 수동적으로 얽매여 자동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남자의, 완벽한 대상a, 주이상스가 되는 것이다. 아메리카나는 ‘역사적인 유물, 민담, 혹은 미국이나 미국인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모아 놓은 일련의 간행물이다.(인것 같다) 릴리가 점찍은 이 남자는 역사학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희소가치가 있다는 이유로 탐욕적으로 수집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릴리는 잘 알고 있다. 남자의 단조롭고 지루한 삶은 그 자체로 완벽하게 통제되는 것 같지만, 아무짝에 쓸모없는 과잉적 존재인 아메리카나라는 은밀한 탈출구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것을 릴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릴리가 노리는 것은 릴리 자신이 바로 이 과잉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아메리카나를 대신해 그녀 자신에게 막대한 돈을 쏟아 부음으로 해서 그 남자의 허영심은 완벽히 충족되고 바로 이 허영심이 그 남자가 속한 무의미한 세계,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상류 사회의 숨 막히는 속박, 공허로부터 그 남자를 지켜주는 환상의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 관대함은 그러나 천박함이다. 그 사회에 아무런 의문도 없는 그 남자는 그것을 관대함으로 믿고 그 자신의 세계가 아주 단단한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녀는 그것이 천박함 혹은 그 남자의 의미 없는 세계를 가려주는 위태로운 장막일 뿐임을 느끼고 있다. 이것이 또한 그녀의 성공이 항상 마지막 문 앞에서 좌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녀는 한 남자의 허영심과의 완벽한 동일시가 아니라 그녀 자신으로 살고자 하는 진정한 욕망에 의해 결국 상류 사회에의 정착에 실패하고 만다.

 

 

  「비록 불만에 차서 다른 세계를 꿈꾼 적은 많지만, 그럼에도 릴리는 자신이 정말로 다른 세계의 축을 중심으로 맴돌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결코 해본 적이 없었다. 이 세계를 경멸하기는 쉬웠지만, 머물만한 또 다른 세계를 찾기란 몹시 어려운 법이었다.」

 

 

  그러나 릴리에게는 대안도 없다. 상류 사회의 위선과 공허를 속속들이 알고 있지만 그녀는 그 세계를 떠나서 살 자신이 없다. 그녀에게 다른 세계란 더욱 나쁜 곳이다. 

 

  「릴리는 도시로 다시 돌아온 이후로 패리시 양의 셋집 계단을 자주 오르내리지 않았다. 거티가 베푸는 연민 속에는 무언의 질문들이 담겨 있었고 그것이 릴리에게는 짜증스러웠다. 자신과 너무나 판이한 가치관을 지닌 사람에게 자신의 상황에서 진짜 어려운 점이 무엇인지 솔직히 털어 놓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엄격하고 절제된 거티의 삶이 한때는 자신의 삶과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쫓겨 들어온 궁핍한 삶을 더욱 쓰라리게 상기시킬 뿐이었다.」

 

  거티 패리시는 궁핍하게 사는 상류 계급 출신의 아가씨다. 어려운 노동자들을 도와주는 자선 활동을 하며 작은 수입으로 보잘 것 없는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상류 사회의 모든 친구들과 지인들이 릴리를 버린 후에도 거티는 그녀를 위로하고 도와주려고 애쓴다. 거티는 릴리가 과거의 생활 방식을 모두 버리고 선하고 명민한 천성을 나누며 새로운 삶에 눈을 뜨기를 바라지만 릴리는 거티와 같은 삶을 받아들일 수 가 없다. 그곳은 어쩔 수 없이 쫓겨 들어 온 곳이지 그녀가 원하는 곳은 아닌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쫓겨서 막다른 골목에 이르는 것이지만, 상류 계급에 대한 환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녀는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다. 거기에도 삶이 있다는 것을. 혹은 그 곳에서만이 그녀가 그토록 소중하게 품었던 그 무엇, 그녀를 번번이 성공의 문턱에서 돌아서게 했던 그 무엇의 삶이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결국 거티의 삶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완전히 자신을 하나의 허영으로, 허영 그 자체로 동일시하여 팔아 버릴 수도 없는 릴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저 이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잠드는 것 외에는...

 

 

 

  이디스 워튼은 참으로 놀랍다. 그 시대의 소설가가 (물론 영미 문학을 잘 모르지만) 심지어는 여자 소설가가 (정규 교육을 받지도 못했는데) 이토록 냉철한 글을 쓰다니... 뒤집어 보고 또 그것을 뒤집어 보는, 반성하고 또 반성하는 글쓰기를 하다니... 그것도 이렇게 이해하기 쉽고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로 말이다.

 

  이디스 워튼에게 여성 최초의 퓰리처상 수상자란 수식을 붙여 준 작품은 1920년에 발표한 <순수의 시대>이다. <순수의 시대>는 주인공들이 파멸하지 않는다. 올렌스카 백작 부인은 남편에게 돌아가지 않지만 아처와 불륜의 관계도 맺지 않는다. <순수의 시대>가 보여 주는 것은 오히려 어떻게 그 상류 계급의 사회가 위선과 공허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탄탄히 그 환상의 세계를 유지할 수 있는가가 아닐까 싶다. 아처는 머뭇거리고, 올렌스카 백작부인의 사촌동생인 아처의 부인과 그의 일가는 소리 없는 경고와 압력으로 올렌스카 백작 부인을 조용히 물러나게 하는데 성공했다. 한때 열정으로 타올랐던 아처는 순순히 그에게 주어진 세계 속에 침잠하였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올렌스카 백작 부인과의 은밀한 사랑에 대한 추억이었다.

  올렌스카 백작 부인은 아처의 대상 a인 것이다. 물론 지젝은 아처 부인이야 말로 ‘물신’이라고 했지만 말이다. 아처의 올렌스카 백작 부인에 대한 사랑은, 혹은 사랑에 대한 환상은 아처 부인의 무지에 의해 지탱된다는 면에서는, 지젝의 말처럼 물신의 기능을 하는 것은 아처 부인이다. 30여년의 세월 동안 올렌스카 백작 부인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든 것은 아처와 올렌스카 백작 부인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장애물인 바로 그 아처의 부인, 혹은 그 둘의 은밀한 사랑에 대한 아처 부인의 무지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사랑을 유지시켜 준 대상이자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든 대상이다. 그러나 지젝의 지적대로 아처는 그녀가 죽고 난 뒤에도 올렌스카 백작 부인에게 돌아가지 못한다. 아들을 통해 그녀가 죽기 전에 한 평생 아처와 올렌스카 백작 부인의 은밀한 사랑을 알고 있었다는 암시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아처 부인의 무지를 통해서만 작동하던 둘 사이의 은밀한 사랑이라는 환상은, 아처 부인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앎에 의해서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빛 속에 노출된 고대 동굴의 벽화처럼. 그러나 아처가 자동으로 돌아가는 상류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유지하며 그 긴 세월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올렌스카 백작 부인을 사랑하고 있다는 그의 환상이라는 면에서 아처의 대상 a는 또한 올렌스카 백작부인이라고 하고 싶다. 그러므로 아처는 올렌스카 백작 부인의 창문 아래에서 천천히 돌아선다. 어쩌면 그것만이 아처의 남은 삶을 지탱해 줄 수 있는 환상일지도 모르니까.. 오직 자신이 사랑했던 30년 전의 올렌스카 백작 부인만을 기억하는 것....

 

  이디스 워튼의 두 작품을 읽으며 왜 지젝이 <순수의 시대>를 되풀이 인용하는지 알 것 같았다. 단순히 세 사람의 관계가 적절한 비유가 되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녀의 작품 전반을 흐르는 기조가 대상a와 환상, 그것에 의해 굴러가는 세계를 유비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물신과 대상a, 주이상스의 개념에 대한 적확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는 이 감상문이 얼마나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을지 끔찍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오류에 대한 두려움은 오류 자체다라는 지젝의 말을 다시 한번 오인용하는 만용을 부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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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 프롬 - 개정판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74
이디스 워튼 지음, 손영미 옮김 / 문예출판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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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16일에 썻던 글입니다.

 

  이디스 워튼의 <이선 프롬>과 <겨울>을 함께 읽었다. 지난 달에는 <순수의 시대>와 <기쁨의 집>을 함께 읽었는데,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이 “쌍”들의 연관성이 꽤나 긴밀해서 오히려 놀라웠다. <순수의 시대>와 <기쁨의 집>이 뉴욕 상류 사회를 배경으로 한데 반해 <이선 프롬>과 <겨울>은 미국 하층 계급의 삶을 그리고 있다. 이디스 워튼이 뉴욕 상류 계급의 손꼽히는 가문 출신이라는 점에서는 물론 <이선 프롬>과 <겨울>이 의외의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디스 워튼은 잘 알지도 못하는 세계를 피상적으로 그렸다는 비판에 대해 10년 동안이나 작품의 배경이 되는 뉴잉글랜드의 산간 지방에 거주하며 그들의 삶을 자세히 알게 된 후에 쓴 글이라고 반박했다. 하층 계급에 대한 워튼의 묘사가 얼마만큼 사실적인지 나는 잘 모르지만, 사실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다. 흥미로운 것은 다만 그 소설들의 문제 의식이 현 시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이선 프롬은 가난한 시골 농부이다. 한 때는 엔지니어나 화학자의 꿈을 가졌지만 잇따른 가정의 불행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산골 마을에 붙박혀, 나이 많은 아내와 살고 있다. 아내는 이선 프롬의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함께 살게 된 먼 친척인데, 어머니가 죽은 후 혼자 남게 된 프롬과 결혼을 했다. 병간호를 할 때는 무엇이든 척척해내든 아내는 정작 결혼 후 1년 남짓 만에 자신이 환자가 되어 이선 프롬을 옭아매는 짐이 되어 버린다. 아내의 요청으로 아내를 대신해 집안일을 할 여자 아이를 불러 오는데, 이선 프롬은 곧 아내의 친척인 이 처녀를 사랑하게 된다. 오갈데 없는 고아인 이 처녀는 비록 하녀의 신분인 셈이지만 이선 프롬의 다정함 속에서 은밀한 행복을 누린다. 그런데 둘의 관계를 눈치 챈 아내가 이 처녀를 쫒아 내다시피 돌려보내려고 한다. 그러나 이 처녀가 돌아갈 곳은 사실상 없다. 이선 프롬은 이 처녀를 데리고 서부로 도망가려 하지만, 그들의 현실은 기차표를 살 돈도 없이 암담하다. 결국 처녀를 돌려보내려고 마차를 타고 가던 중 둘은 예전에 약속한 눈썰매를 타기로 하는데, 언덕에서 가파르게 내려오던 썰매는 커다란 느티나무를 향해 돌진한다. 이십 사년 전에 일어난 이 이야기를 방문자에게 전해 주는 이선 프롬은 다리를 절룩이는 늙은 노인이다. 그의 집에는 두 명의 노파가 있는데, 한 명은 그의 아내이고, 또 한 명은 척추를 다쳐 불구가 된 그 처녀이다.

  이선 프롬의 집을 떠나 갈 곳이 없는 처녀는 무섭게 내달리는 눈썰매의 황홀경 속에서 이선 프롬과 함께 죽기를 소망한다. 그것이 유일하게 열려 있는 그들의 탈출구이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한다. 그리고 삶에 대한 모든 욕구를 잃은 늙은 이선 프롬과 갑자기 생기를 되찾아, 불구가 된 처녀를 이십 사년 동안 간병한 늙은 아내와 의자에 파묻힌 채 온갖 불평을 해대는 노파가 된 처녀가 폐가 같은 집에서 유령처럼 살고 있다.

이디스 워튼은 <이선 프롬>에서 가장 잔인하다. <기쁨의 집>의 릴리에게는 허용되었던 죽음마저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죽지 못한 이선 프롬은 자신이 사랑했던 그 처녀가 실제는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것일 뿐임을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 그 처녀는 아내의 반복이다. 결혼 이전에는 그토록 눈부신 능력을 가진 것으로 보였던 아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환자임이 드러난 것처럼, 그 처녀의 거부할 수 없던 매혹의 빛 역시 사고와 함께 사라지고 남은 것은 아내와 똑 같은 불평 덩어리의 불구일 뿐이다. 멀리서 보았을 때 숭고했던 그 대상은 가까이 다가 왔을 때 그저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사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 처녀를 그토록 아름답게 보이게 했던 그 매혹의 중핵은 그 처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선 프롬은 그 처녀와 함께 죽거나 그 처녀를 보내야 했다. 그 처녀는 상실됨으로써만 영원히 이선 프롬에게 살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해 그 처녀는 상실됨으로 인해 이선 프롬의 숭고한 대상으로 영원히 살아 남아 이선 프롬의 삶을 지탱하는 은밀한 보충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처녀에 대한 추억이야말로 아내와의 불행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지지대이다. 그러나 그 처녀는 살아남아 또 하나의 아내가 되었고, 그래서 이선은 살아 있는 유령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환상에 의지해 살거나, 혹은 환상을 빼앗긴 유령이 된다.

 

  그러나 하나의 질문이 남아 있다. 환상 없는 유령의 삶이 나쁜 것인가? 어떤 면에서는 우리 모두는 환상 없는 유령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턱없는 과장이라면, 우리 결혼한 부부는 모두 환상 없는 유령이라고 해두자. 결혼 6개월 혹은 일 년이 못되어 우리는 우리 배우자에게 “그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사랑했던 그것, 우리를 도취시켰던 그것, 우리가 알지 못한 채 한 없이 끌렸던 그것, 그 미지의 X. 그것은 그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통해 우리가 분명히 보았던 그것, 바로 그들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그것. 그토록 눈부신 광휘를 뿜어내던, 손 안에 잡히지 않아 더 눈 부셨던 그 보석은 그저 하나의 돌덩어리에 지나지 않았음이, 어느 차가운 아침에 오롯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인가? 나는 답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윤리적인 것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나? 우리의 돌덩어리가 빛을 잃었다면 우리는 새로운 빛나는 또 다른 돌을 찾아 떠나야 하는 것인가? 그것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것인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것이 진정으로 윤리적인 것인가? 욕망이란 그런 것인가? 역시 답을 알지 못한다. 다만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내가 선택한 돌덩어리를 끝까지 인내하고 견뎌내는 것, 그것이 사랑이고 윤리라고. 차가운 돌덩어리의 공허를 견디기 위해 눈부시게 빛나 보이는 새로운 돌을 찾아 헤매는 것은, 혹독한 현실을 대면하지 않으려 끝없는 마약 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중독자와 같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어지는 또 하나의 질문이 있다. 모든 결혼은 혹은 모든 최초의 선택은 끝가지 무조건 지켜져야 하는 것인가? 다시 한번 그것이 윤리적인 태도인가? 여전히 그들의 답은 이해의 너머에 있다. 다만 그들이 보여 준 어떤 예를 하나만 들어 보자. 다스 베이더가 되기 직전 아나킨은 오비완 커노비와 마지막 대결을 한다. 명백히 패배가 보이는 곳에서, 그것도 선이 아니라 악의 편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나킨은 선의 길로 돌아오라는 오비완의 마지막 요청을 거절한다.

“아나킨은 이를 거부하고, 비록 이미 치명적으로 부상을 입었지만 마지막 힘을 모아 다시 그를 공격하려 한다. 나는 아나킨의 고집을, 석상의 구원에 대한 마지막 제안을 거절하는 모차르트의 돈조반니와 유사한, 본격적인 윤리적 입장으로 인식하고자하는 마음을 거둘 수가 없다. 두 경우 모두 내용적인 층위에서 악의 선택으로 보이는 것이 형식적 차원에서는 자신의 윤리적 일관성을 주장하는 행동이다. 즉 그들은 모두 실용적인 자기중심적 계산의 관점으로는 악을 거절하는 편이 적절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모두 생의 최후의 순간에 악의 선택을 고집하는 것이 어떤 이익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괴할 만큼 윤리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도전적인 행동으로 그들은 용기 있게, 어떤 물질적인 또는 정신적인 이익에 대한 약속 때문이 아니라 원칙에 따라 자신들의 선택에 충성을 다한다.”

  이선 프롬이 처녀와 함께 도망가지 않은 것은 다만 기차 삯이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선 프롬은 자신이 떠남으로 그의 아내가 어떤 곤궁에 처할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늙은 이선 프롬이 입을 다문 채, 그의 아내와 불구가 된 그 처녀를 이십사년 간 묵묵히 지켜온 것 또한 마찬가지 이유에서이다. 모든 이혼이 비윤리적인 것도 아니고, 모든 결혼의 유지가 윤리적인 것도 아니다. 단순히 경제적 사회적 이익 때문에 결혼을 유지하는 것은 오히려 비윤리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최초의 선택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최초의 선택과 그 선택의 유지와 폐기 사이에 있는 어떤 것들의 관계가 그것을 윤리적인 것으로도 혹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도 만드는 것이 아닐까? 모든 이혼이 비윤리적인 것이 아닌 것처럼 모든 가정의 유지가 윤리적인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를 매혹시켰던 그 빛남이 우리 상대들의 소유가 아니었던 것처럼, 그 빛의 사라짐 역시 그들의 책임이 아니다. 그것을 견뎌내지 못하고, 그 책임을 그들에게 물으며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 그것이 사랑에 윤리가 개입하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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