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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운데이션 1 - 위험한 서막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최서래.김옥수 옮김 / 현대정보문화사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2011년 10월28일 카페 과제물입니다. 과제는 '가브리엘 타르드를 소개하시오' 였는데, 이 때는 국내에 타르드(따드)가 번역되기 전입니다. 고로 리뷰상품과는 관계없습니다. 타르드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A4 10매 이상의 글을 쓰는 것이 과제였습니다. 제 글 속에 파운데이션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혹시 ‘히치칵’을 아세요?
몇 년 전, 어떤 책을 읽는데 내용이 어려웠거든요, 그런데 자꾸 히치칵이란 이름이 나오는 거예요.
책이 조금만 쉬웠다면 저도 단박에 아하, 히치콕 했을 텐데, 안 그래도 기가 죽은 터라, 이 히치칵이 그 히치콕인지 정말 알쏭달쏭했어요.
제가 히치콕 영화를 잘 알았던 것도 아니거든요.
나중에야 히치콕을 ‘히치코크’라고도 하고 ‘히치칵’이라고도 한다는 걸 알았죠.
예전 고등학교 시절 윤리 교과서에 ‘키에르케고르’라고 있었거든요.
그 분은 요즘 ‘키르케고르’라고도 불리더군요.
여기까진 일종의 진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좀 더 발음에 충실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경우도 있고요.
또 예전엔 영어 번역본을 다시 번역하는 이중 번역이 많았는데, 요즘은 우리나라 번역자들이 저자의 모국어로 쓰인 원본을 직접 번역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발음이 달라지는 것이 당연한 것도 같아요.
시대를 따라 가야하는 건 독자의 몫이니까 너무 투덜댈 수는 없겠죠.
그런데 한 번은 진짜 황당한 걸 본 적이 있어요.
어느 슬로베니아 학자가 영어로 책을 쓰면서 외국의 어떤 사람을 언급했는데요, 그 학자는 독어로 표기된 이 사람의 이름을 보고서 영어로 옮긴 거거든요. 그러고 나서 우리나라에 이 책이 번역되었는데..... 그 이름이 무엇이냐 하면...
“김영일”
누군지 아시겠어요?
네, 북한의 김정일입니다.
김정일이 돌고 돌아 우리나라 번역가에 의해 김영일로 개명된 거죠.
이럴 땐 그저 웃을 수밖에요.
이쯤 되면 눈치 채셨나요?
네, 글쎄 ‘따드’가 없더라구요.
할 수 없이 Tarde를 쳤죠.
그제야 영어 사전 항목 안에 검색되는 것이 있더군요.
Gabriel, 타르드(1843-1904): 프랑스의 사회학자·범죄학자.
아무래도 따드는 영어권을 거쳐 중개 무역 형태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걸까요?
어쨌든 오늘 제가 해야 할 일은
“쪽글 10. Garbriel tarde라는 사람에 대해서 조사하시오.” 에 대해 열심히 답하는 거겠죠.
그런데 우리 모두 알다시피 이 따드님이 베일에 싸인 분이라는 거죠.
그리고 선생님은 그 베일을 벗길 생각은 말라고 하셨죠.
어짜피 벗겨봐야 나오는 것도 없을 테니 쓰잘데기 없이 끙끙거리지 말고 차라리 베일에 장식을 달아 보라고 하시네요.
리본을 달건, 꽃을 달건, 방울을 달건 재주껏 달아 보라는 건데, 그렇다고 따드를 김영일 꼴로 만들 순 없잖아요.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김정일을 김영일로 만드는 건 할아버지가 될 판이네요.
하마터면 타르트가 돼 버릴 것 같아서 말이죠.
그 케잌인지 과자인지 애매모호한데 맛있는 것 있잖아요.
‘타르드’를 검색하면 지식백과 아래로 블로그와 웹문서들이 뜨는데 몇 개 안되는 따드 관련 글에 이어 바로 에그 타르트 만드는 법, 딸기 타르트 먹고 싶어요 등등의 글들이 주루룩 달려 있죠.
어쨌거나 거기까진 가지 않아야 할 텐데, 일단 출발해 보기로 해요.
따드의 행적을 쫒을 ...라기 보다는 상상할 몇 가지 단서들이 있어요.
제일 눈에 띄는 것이 ‘사회학적 심리학’ 이네요.
다음으로 따드의 가장 유명한 책이라는 ‘모방의 법칙’ 이 있구요.
이런 건 지식백과에 바로 보이는 거라 다들 아시겠죠.
참, 친절하신 우리 카이로스님이 가르쳐 주신 것도 있어요.
따드는 ‘뒤르켐의 논적’이고, 뒤르켐이 자살론 1부 4장에서 따드의 모방 개념을 비판하고 있다죠.
아, 그리고 ‘들뢰즈’가 있네요. 들뢰즈가 따드를 부활시켰다는 소문이 있다고 하시네요.
‘드봉’도 있군요. 드봉의 군중 개념을 따드는 공중 개념과 분리해서 사고했다는 듯하네요.
또 단서를 주신 분이 있는데요.
네이버 블로거 한 분이 타르드에 관한 글을 시리즈로 많이도 쓰셨네요.
다들 찾으셨을 것 같아요.
읽어 보시면 ‘경제 심리학’ 이라는 책 한 권을 읽고 여러 편의 글을 쪼개 썼다는 걸 알 수 있으실 건데요.
다른 분의 글은 거의 없는 셈이니, 자칫하면 우리는 이 분을 통해 따드를 수용할 위험(?)에 처해 있군요.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신 분 같지는 않고, 공부 중인 분 같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어쨌거나 감사를 드리고요,
그렇다 해도 어짜피 저희가 갈 길은 학습이 아니라 상상의 공간이니 각자 필요한 만큼만 참고하심 될 것 같아요.
저는 먼저 심리학에서 시작하고 싶어요.
심리학책이 얼마나 많은지 혹시 헤아려 보셨어요?
물론 저도 안했지요.
그런데 도서관에 가 보니 진짜 많긴 많더라구요.
철학책이 겨우 서가 하나를 차지할 정도라면, 심리학책은 서가 세 개를 채우고도 남더군요.
종류도 참 다양해요.
남성 심리, 여성 심리, 아동 심리 뭐 이런 건 기본이고요.
거짓말 심리, 몸짓 심리, 혈액형 심리, 욕망 심리, 불안 심리, 항공 심리 등등에다 심지어는 사주 심리까지 있더군요.
그렇게 별별 심리를 다 파헤쳐 주는데 왜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서 지지고 볶으며 사는지 모를 지경으로 책들이 많더군요.
뒤바꼈다구요?
아무리 봐도 알 수 없는 게 사람의 심리니 그렇게 책들이 많다고요?
하긴 그렇겠네요.
그러면 따드의 ‘사회학적 심리학’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도서관에 “나는 너를 책처럼 읽을 수 있어”라는 책이 있었어요.
음...그렇다는건, 따드를 알면 “우리는 사회를 책처럼 읽을 수 있어”의 수준에 도달하게 될 수도 있겠네요.
사회의 심리를 읽을 수 있다는 건, 사회가 그러니까 사회를 구성하는 집단으로서의 ‘공중’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예측할 수 있다고도 할 수 있을까요?
자꾸 의문문으로 끝이 나니까, 부담스러우시다구요? 저도 부담스러워요.
그래도 이게 최선인 걸 어떻게 하겠어요.
아는 것도 없고, 읽은 것도 없이, 달랑 ‘사회학적 심리학’ 하나로 혀를 풀려니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요.
그건그렇고, 일단 잘만하면 사회구성체로서의 사람들의 심리를 읽을 수 있다는 거잖아요.
그렇게되면 앞으로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도 예측할 수 있겠죠.
주역을 풀거나 점쟁이를 찾아가지 않아도 말이죠.
그러면 이쯤에서 다들 생각나시는 책이 있을 것 같아요.
선생님이 저번에, 그렇게 말했는데 읽어 보는 놈도 없고 말이야 하셨던, 그 책 말이예요.
저는 그 책을 20년 전쯤에 읽었어요.
어떤 잘생긴 남자가 진짜 재밌다고 해서 몽땅 사서 밤을 새서 읽었죠.
네.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바로 그 책 말입니다.
뭐 한마디로 하라면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 느꼈을 법한 그런 마음이죠.
그 후로 아시모프의 책들을 마구 찾아서 읽었답니다.
‘사회학적 심리학’
요 단어를 딱 보았을 때, 진짜 거짓말 안하고 파운데이션이 떠올랐답니다.
샐던이라는 수학자가 모델을 만들었거든요.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행해왔던 행동 패턴들을 대입해서 앞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예측할 수 있는 수학적 모델 말이예요.
요것이 제가 기억하고 있는 내용인데, 거의 20년 전 기억이잖아요.
당연히 믿을 수가 없죠.
책을 찾아볼까 했는데 도서관에 없더군요.
아, 도서관은 왜 그런가 모르겠어요.
퇴마록 같은 책들은 잔뜩 있는데 말이예요.
그래서 또 검색을 할 수 밖에요.
위키백과에 이렇게 나오는 군요.
“심리역사학자, 해리 샐던(Hari Seldon)이 평생을 바쳐 연구한 심리역사학이 파운데이션 시리즈의 기반이 된다. 해리 샐던은 기체 분자의 운동역학을 인간 집단에 적용하여,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이론을 만들어 낸다. 분자 개개의 행동은 예측할 수 없지만, 공기 전체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인간도 개개인의 행동은 예측할 수 없지만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예측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해리 샐던은 연구를 계속하다, 은하계 전체를 지배하고 있던 은하 제국이 몰락하며, 몰락 후에는 3만년에 달하는 거대한 암흑기가 찾아올 것을 예견한다. 인류는 3만년의 암흑기 후에 제 2제국을 건설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역사의 대세는 제국 몰락으로 흐르고 있었다. 해리 샐던은 제국 몰락을 막을 수는 없지만, 암흑기를 천년으로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이것이 바로 파운데이션(Foundation)으로, 인류가 이루어 놓은 모든 성과를 두 행성으로 피난시켜 암흑기를 줄이는 것이었다. 제1 파운데이션은 터미너스(Terminus)행성에 자리 잡는다. 제 2파운데이션은 제 1파운데이션의 은하계 반대편에 위치하게 된다.
모든 준비는 끝나고, 인류는 해리 샐던이 예견한대로 암흑기를 헤쳐 나가게 되는데‥‥‥.”
아, 수학자가 아니고 “심리 역사학자” 였군요.
어쨌거나 집단으로서의 인간 즉 생물체로서의 사회는 예측할 수 있다는 거죠.
그렇게 해도 제국의 몰락은 막을 수 없지만, 암흑기를 줄이고 그 이후를 대비할 수 있다는 건데요.
요기서 또 생각나는 것이 영화 ‘2012’ 이고, 당연 연상되는 건 노아의 방주죠.
인간의 궁극적 욕망은 살아남는 것에 있는 걸까요?
도대체 남기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요?
유전자일까요? 문화일까요?
'깨끗하게 멸망하면 되지 뭐' 같은 생각은 반-인간적 배신일까요? 흐흐..
하여튼 2012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이거예요.
함선에 올라 탈 사람을 선정하는 방식이요.
거기엔 민주주의적 방식이라거나 합의라거나 그런 건 전혀 끼어들 여지가 없죠.
그냥 일방적이예요.
사실상 그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도 없고요.
그걸 어떻게 하겠어요?
제비뽑기? 레이디 먼저? 토론? 합의?
통치자들이 무조건적으로 결단하는 방법 밖에는 없어요.
대중에게는 아무런 기회도 없죠.
그저 결정되면 그걸로 끝이예요.
마치 법은 법이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처럼요.
사람들이 법의 기원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면 그것은 더 이상 법으로서 기능할 수가 없지요.
왕에게 네가 왜 왕이야? 하고 묻기 시작하면 왕정은 볼 일 다 본 셈이지요.
그런데 2012가 재밌는 부분이 그 어두운 기원을 감추는 교묘한 속임수죠.
마지막에 막 몰려든 사람들을 태우잖아요, 좌초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이예요.
거기엔 소문 듣고 몰려 든 사람도 있고, 아무 것도 모르고 그 배를 만든 노동자들도 있죠.
쥔공 과학자가 휴머니즘에 막 호소를 하면서 결국 문을 열게 되잖아요.
그걸로 마치 새로운 세계가 인도주의적 바탕 위에 세워진 것처럼요.
한마디로 웃기고 자빠졌죠.
자기들 빼고 전 세계의 모든 인간들이 왜 죽는지 영문도 모르게 죽어가게 해 놓고는 막판에 가서 겨우 수 천인가 수 만명인가 더 살렸다고, 인간성 만만세를 외치고 있으니 말이죠.
애초에 그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구조 자체가 아예 있지도 않았다는 듯이요.
물론 다른 방법이 있었다는 게 아니라, 그 기원의 심연을 그렇게 감추려 하지 말라는 거죠.
아차차...이런 또 함정에 빠진 기분인 걸요.
‘상상하라’에 사로잡혀 너무 멀리 날아다닌 것 같아요.
'따드'가 '타르트'는커녕 '호떡'이 될 판이군요.
다시 ‘사회학적 심리학’으로 돌아갈께요.
파운데이션의 ‘역사학적 심리학’ 을 거쳐서요.
다른 건 아는 것이 없는 걸요 뭐.
혹시 지금 읽고 계신 분은 이걸 좀 확인해 주실 수 있을까요?
샐던이 죽고 난 뒤에도 중간 중간에 홀로그램으로 나타나잖아요.
자기 예측대로 되어가고 있는지 돌발 변수는 없는지 확인하고, 조언도 하고 뭐 그랬던 것 같아요, 기억은 워낙 희미하지만.
이런 건 검색해도 안 나오더라구요.
파운데이션을 가지고 제대로 쓴 감상문이나 비평문도 없고요.
샐던 모델에 가장 중요한 하나의 조건이 있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미래를 몰라야 한다는 거죠.
몇 년 뒤에 제국이 망한다는 소문이라도 나보세요, 당장 난리가 날거예요.
돌발변수죠.
시기에 따라 인간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변수로 넣어 놓은 모델일 텐데 여기에 돌발 변수가 들어가면 결과는 끝장 난 거죠.
그렇게 몇 번의 위기가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뭐 아님 말고요.
어쨌든 인간 집단을 연구하든 사회를 연구하든, 연구 대상은 그 연구 자체의 존재나 목적이나 진행 상황을 전혀 몰라야 한다는 건, 그럴 듯 하잖아요?
영화 ‘2012’가 전 인류를 무지 속에 멸망시킨 이유도 사람들이 멸망을 알게 되면 그나마 인류 존속 프로젝트마저 진행하지 못하고, 말 그대로 씨를 말릴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거구요.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의문이 하나 생기는군요.
샐던 모델에는 보이지 않는 제3의 눈이 있어야 하는 거거든요.
인간집단의 심리를 대입해 놓고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바라보려면 인간 집단의 바깥에 존재하는 뭔가가 있어야 말이 되죠.
그런데 요즘 학자들 말로는 그 ‘밖’이라는 건 없다고들 하잖아요.
신이 사라졌으니까요.
사실 요즘 신은 거의 산타크로스와 비슷하지 않나요?
사람들이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척은 하잖아요.
그러면서 크리스마스가 오면 야단법석이죠.
그런데 그게 바로 ‘문화’라는 거야, 라고 하는 사람이 있더라구요.
우리가 진짜 믿지는 않는 것이 바로 문화라구요.
여튼 신이 없는데 누가 인간 바깥의 그 초월적 자리에서 인간 고놈들 참, 그러고 혀를 차겠어요?
샐던요?
모델을 만들었다는 샐던은 가능하다고요?
글쎄 그럴까요?
샐던이 뇌에 무슨 주사를 맞고 자기가 한 일을 깡그리 잊어버리지 않는 한, 오히려 샐던 그 자체가 커다란 변수가 될 것 같은 걸요.
제가 얼마 전 글에 잘 모르면서 아는 체 했던 것 중 하나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인데요.
왜 하나의 체계는 스스로 증명될 수 없는 공리를 적어도 하나는 가지고 있고, 그 체계의 완전성과 무모순성은 체계 논리 자체로는 증명할 수 없다는 거요.
제가 늘 하는 대로 용감무식 거두절미하면 완전한 체계 같은 건 없다는 건데요.
그런데 체계의 구멍은 사실 체계가 만들어진 바로 그 자리에 존재할 가능성이 가장 큰 것 같아요.
‘2012’에서 봤잖아요.
새로운 세계를 열면서 사람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걍 자기들끼리 살아남을 궁리를 다 짜놓고는 막판에 가서 이 세계는 휴머니즘 위에 서있다 요따구로 포장하잖아요.
나중에 그 세계의 후손들은 그 휴머니즘적 전설만 기억하게 되겠죠.
그들의 세계가 자신들의 조상 이외에는 모든 인류를 몰살 속에 방치하고 세워졌다는 그 무시무시한 기원은 싸악 묻혀 진 채로요.
다른 영화도 보통 보면 나쁜 놈이 머리 좋은 놈을 잡아와서 다 만들게 해놓고는 제일 먼저 하는 짓이 그걸 만든 놈을 일단 죽여 버리는 거잖아요.
만든 놈이 있으면 그것의 약점이, 그러니까 구멍이 드러나게 될 위험이 크니까요.
그렇지만 그것으로 그 흔적이 완전히 지워질 수는 없죠.
죽은 놈이 또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니까요.
갑자기 재밌는 이야기가 하나 생각나네요.
뜬금없으시겠지만 한번 들어보셔요.
사마르칸트의 어느 마을에 총각 하나가 살았는데, 글쎄 자기가 내일 저녁이면 죽는다는 예언을 들어 버렸지 뭐예요.
잠이 올 턱이 없겠죠.
그래서 이 총각이 살아 보려고, 밤새도록 말을 달려서 아무도 없는 어느 사막으로 숨어들었는데, 글쎄 거기서 딱하고 저승사자를 만나 버린거예요.
그런데 이 총각 보다 더 당황한 저승사자 왈,
당신을 데리고 가기 싫어서, 당신을 절대 만나지 못할 것 같은 그 사막으로 도망을 왔다는 거죠.
이런 이야기 많이 아시죠?
물론 제일로 유명한 사람이 오디푸스죠.
운명을 피하려고만 하지 않았다면, 그 운명이란 아무것도 아니었을 텐데 말이죠.
인간이란 그런 것 같아요.
어떻게 운명을 알고 네, 알겠습니다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어리석은 인간이지만, 그러니까 인간의 장대한 역사가 또 이렇게 쓰이는 거겠죠.
그런데 도대체 이 얘기와 사회학적 심리학이 무슨 상관이냐고요?
음....글쎄요;;
연관이 될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저도 모르겠어요 흐흐;;;
기왕 여기까지 온 것 조금만 더 얘기해 보면요.
결국 운명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 운명을 완성시킨다는 말의 의미는 이런 게 아닐까요?
운명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운명을 받아들여 버린 것과 같다는 걸요.
거꾸로 그래 그게 내 운명이야? 알았어! 운명이라니 할 수 없지 뭐. 라고 하는 겉보기에는 체념적인 태도가 오히려 운명을 가장 효과적으로 허물어뜨리는 방법이 될 수도 있죠.
중요한 건 그 프레임에 갇히는가 아닌가 하는 사실인 것 같아요.
운명을 고민하는 순간, 우리는 바로 운명의 프레임에 갇혀 버리죠.
그리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운명의 늪에 빠져 들게 되고, 그래서 운명은 운명이 되 버리는 거예요.
어제 ‘뿌리 깊은 나무’ 보셨어요?
세종의 마지막 대사가 대충 이거죠.
“너는 너의 길을 걸어라” 그리고 돌아서서 혼자 말을 하죠.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
운명? 너는 너의 길을 가라, 나는 내 길을 갈란다 그렇게 나가면 똘복이가 제 아무리 절치부심해도 세종이 암살당할 염려가 없는 것처럼, 운명이 우리를 막아서지는 못하지 않을까요?
오디푸스 얘기를 하다 보니 또 떠오르는 것이 있네요.
그런데 이 연상이란 게 참, 좀 그런 것 같아요.
별 관계도 없는 것 같은데 어떤 말을 하다보면 막 떠오른단 말이죠.
제 무의식은 그걸 연관 지워 놓고 있는 걸까요?
언제가 되면 저는 그걸 의식 위로 길어 올려 말이 되게 만들 수가 있을까요?
어쨌든 이번 과제의 표면적 방법론은 ‘상상학’ 이잖아요.
저는 일단 가 볼 테니, 그냥 허허 웃어 주세요.
혹시, 여러분이 그것들을 어떻게 연관 지워 주실 수도 있잖아요.
뭐냐하면요, 죄수의 딜레마라는 거요.
“공범A,B 두 명의 죄수 중 자수를 한다면 감형을 받을 수 있고
둘 다 묵비권을 행사해서 죄를 인정 안하면 역시 감형을 받을 수 있으나
둘 중 어느 한명이 자수를 했을 때 자수하지 않은 다른 한명은 더 무거운 형벌을 당하는 조건일 때 죄수들은 딜레마에 빠진다는 건데 서로 상대방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엔 서로 자백을 하려한다는 내용입니다."
검색하시면 대충 이렇게 나와요.
인간처럼 믿을 게 없다는 말, 많이 듣고 살잖아요.
예전 동구권에 이런 일도 실제 있었다는 군요.
어느 날 그 나라에, 휴지가 동이 났다는 소문이 돌았대요.
그런데 사람들은 다 알고는 있었죠.
다만 소문일 뿐이라는 걸요.
실제로는 가게마다 휴지가 많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나냐 하면 실제로 휴지가 동이 나 버려요.
다른 사람을 못 믿는 거죠.
혹시 그 소문을 믿고 바보 같은 놈들이 휴지를 다 사버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돼서 자기는 진짜 믿지는 않지만 휴지를 사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병신 같은 놈들 때문에 개고생이네 어쩌네 하면서 휴지를 사러 가겠죠.
그렇게 해서 그 나라의 소문은 현실이 되는 거죠.
이 얘기는 ‘선덕여왕’에서 묘사된 적도 있죠.
덕만이 소문을 내 버리잖아요.
왕실에서 쌀을 푼다고요.
군량미도 확 풀어버릴 거라고 엄포를 놓죠.
그러자 귀족들이 쌀값을 올리려고 비싼 값에 매점매석해 놓은 쌀이 갑자기 똥값이 되기 시작하잖아요.
실제로 왕실에서 군량미를 풀지 못한다는 걸 알지만 귀족들은 당할 수밖에요.
사람들이 쌀을 안 사는데 어떻게 할 거예요.
치킨 게임을 할려면 밑천이 두둑해야 하는데, 군소귀족들은 못버텨요.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들면 한 사람 두 사람 내다 팔기 시작하고 그 때부터 바로 공황이죠.
너도 나도 투매죠.
결국 덕만은 군량미엔 손도 안 대고 쌀값을 잡아내죠.
사람 심리는 진짜 복잡하죠.
오죽했으면 “내가 누구인지 말 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라고 했겠어요.
저는 이걸 이인화의 책 제목이라고 알았는데, 사실은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에 나오는 구절이라네요.
인간은 좀 불투명한 존재인 것 같긴 해요.
제가 제 속을 들여다봐도 그렇고요.
무의식이라는 것이 있다잖아요.
내 속에 나 보다 더 한 그것이 있다는데 아무리 제 몸뚱이라도 지가 다 안다고 할 수 있겠어요?
몸뚱이 아니라 정신이라고요?
‘정신은 뼈다’는 말도 있다니까요. 정말 이예요.
무슨 말인지는 잘 몰라도, 하여튼 정신은 두개골은 아니지만 또 정신이 뼈라고 안 할 수도 없다고 했다고요.
그런데 사람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면 어떨까요?
우리가 속 들여다보인다 보여, 할 때 그 속 말고요.
영화 ‘아바타’ 보셨죠?
나비족들이 이크란하고 교감 할 때, 말 꼬리처럼 생긴 긴 머리 꽁댕이를 서로 접촉하잖아요.
그러면 말도 필요 없고 몸짓도 필요 없어요.
그냥 저절로 서로를 알게 되요.
차라리 하나가 된다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소통할 수 있다면 참 멋진 세상이 될까요?
일단 오해의 근원인 말이 필요 없어지겠지요.
서로 싸울 필요도 없고요.
머리를 굴려도 소용없으니 머리 굴릴 필요도 없고 그래서 머리 굴려서 생겨나는 갖가지 못된 짓들도 일어나지 않겠지요.
소용없는 일을 하는 사람도 없고요.
가령 이럴 것 같아요.
선생님이 과제를 내면 그 순간 저희는 바로 선생님의 의도는 물론 함정도 다 알 수 있겠죠.
그리고 답도 뻔히 알 테니, 지금 제가 하는 것 같은 삽질 따위는 있지도 않겠죠.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을 필요도 없을 거구요.
다 똑 같을 테니까요.
개성도 없고 상상도 없고 문화도 없겠죠.
아주 멋진 신세계가 되겠군요.
사람의 속을 모른 다는 것, 혹은 인간은 근원적으로 불투명하다는 사실,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그 오해 때문에 소통이 더욱 필요해 지겠죠.
소통의 노력 속에 인간의 역사가 만들어지는 거구요.
결국 인간은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인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자연 속에서 꽃이나 나비처럼 평화롭게 살긴 하겠지만, 인간은 아닐 것 같거든요.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인간성을 버린다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군요.
이야기가 삐딱하다구요?
그래서 저는 아바타 같은 영화에서 제시하는 이상향이 그리 탐탁하지 않아요.
자, 이제 ‘따드’의 ‘사회학적 심리학’으로 돌아 갈 시간이군요.
저는 물론 따드의 이 심리학이 무슨 심리학인지 몰라요.
여러분은 어려운 원서도 읽고 논문도 좀 찾아 보셨나요?
저는 심리학이라는 것이 과연 인간을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조금 의문이 들어요.
그 대상이 인간 개인이 아니라 인간 집단인 사회라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고요.
오해라고요?
전 모르죠.
‘따드’도 그렇고 사회학적 심리학도 그렇고 생전 처음 듣는 소리니까요.
그런데 사회를 분석한다거나 해석한다는 말은 많이 하잖아요.
저는 이 분석이나 해석과 심리는 좀 다를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정신분석 있잖아요.
그런데 정신분석 하는 사람들은 심리학 굉장히 싫어하고, 아마 심리학자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프로이트를 두고 서로 당기기도 하는 것 같거든요.
프로이트의 제자 융이 집단 심리학으로 방향을 잡는 바람에 프로이트가 융을 싫어했다는 말도 들은 것 같고요.
심리학을 한 융은 프로이트의 진짜 제자가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라깡학파는 융이나 심리학을 아예 언급하지도 않는 것 같아요.
저는 무슨 학파는 되지도 못하지만 어쨌든 정신분석에 조금 관심이 있어요.
정신분석은 자기 스스로는 못한다고 하는데요, 어쨌든 나는 왜 요 모양의 인간인가에 대해 관심이 많은 편이거든요.
제가 봐도 왜 제가 이런지 도통 알 수도 없고, 쫌 그래요.
하여튼 그래서 저는 심리 보다는 분석 쪽을 신뢰하는 편이예요.
사회를 대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심리 파악이 아니라, 구조 분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예전의 경험이 또 하나 생각나네요.
얼마 전 MBTI인가 애니어그램인가 뭐 그런 성격 분석 프로그램이 유행한 적이 있잖아요.
그 전에 한의학에서는 또 사상체질이라는 게 유행했죠.
둘 다 사람을 어떤 유형으로 나누어 분석하는 거죠.
주로 심리를 분석하죠.
어떤 경우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어떤 걸 선택하느냐 뭐 그런 질문들로 분석을 했던 것 같아요.
하여튼 제게 사상체질을 가지고 제품 개발을 하라는 업무가 떨어졌어요.
저는 열심히 책도 읽고 의사들도 찾아다니고 그랬죠.
그런데 결론은 이거였어요.
정확한 체질은 사실 아무도 모른다는 거였죠.
아니면 우리나라 오천만 인구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체질이 있다는 거구요.
편의상 몇 가지로 분류를 했지만, 그게 다 맞아 떨어지지도 않고, 실제로 병이 나고 그래서 치료를 해봐야 사후에나 정확히 그것도 추론할 수 있을 뿐이라는 거죠.
인간의 내면을 분석하고 그걸로 어떤 틀을 씌운다는 것 사실 딱 봐도 좀 엉성해 보이잖아요.
그런데도 그런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건 어쩌면 역설 같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만큼 심리란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라는 방증이기도 한 것 같아요.
쉽게 알 수 없고, 어렵게도 알 수 없고, 잘 알 수 없으니까 자꾸 알고 싶어지는 것 아닐까요?
‘따드’의 ‘사회학적 심리학’ 하나로 참 쓸데없는 말을 길게도 했네요.
아직 뒤르켐이나 드봉, 들뢰즈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했는데 말이죠.
더 할 말이 남았냐구요?
말이 돼야 한다는 압박만 없으면 말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요, ㅎㅎ.
제가 처음 보면 말도 없고 숫기도 없고 그런데, 가만가만 말을 시켜 놓으면 또 끝도 없이 주절대는 버릇이 있어요.
말리고 싶어도 못 말리실 거구요.
그 땐 그냥 자리를 떠버리세요.
이번 과제는 꼭 10매를 채워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사람이란 게 또 한 번 나아가면 뒤로 물러나기가 쉽지는 않잖아요.
기왕에 오기가 생기는 거죠.
사실 이번 과제가 너무하긴 해요.
책도 읽을 필요 없다, 자료도 별로 없다, 그러면서 이름 하나 달랑 던져 주시고는 과제를 3편이나 제출하라니요.
여기서 없는 얘기 다 지어내고 나면, 나머지 두 편을 뭘로 채우나 걱정이 많이 되긴 돼요.
역시 뒤르켐이나 들뢰즈는 남겨 둬야 할까요?
그래도 이왕 말도 나왔고, ‘Garbriel tarde라는 사람에 대해서 조사하시오’가 과젠데, 사회학적 심리학 말만하고 끝내기에는 좀 성의가 없어 뵐 것 같아요.
나름대로 들뢰즈가 어떤 말을 했는가도 찾아 봤고, 뒤르켐이 자살론에서 따드를 비판하는 부분도 다시 읽었거든요.
그렇게 그저 먹은 것은 아니라고 ㅎㅎ 주장하고 싶어요.
제가 어떻게 들뢰즈를 알게 되었냐하면요.
몇 년 전에 도서관에서 우연히 노마디즘이란 책을 보게 되었어요.
물론 완전 우연은 아니고요.
이진경이라는 분이 유명하잖아요.
1980년대의 그 전설적인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은 읽어 보진 못했지만 소문은 듣고 있었죠.
그 후에 이진경은 프랑스로 가서 들뢰즈를 연구했나 봐요.
저는 ‘철학과 굴뚝 청소부’, ‘철학의 모험’ 같은 책을 보게 됐고 이진경에 관심을 가졌죠.
‘노마디즘’은 이진경이 들뢰즈의‘ 천의 고원’을 읽기 쉽게 풀이해 놓은 책이라 할 수 있어요.
일종의 해설집이죠.
지금도 수유N이라는 공간에서 노마디즘 강의를 하는 걸로 알아요.
어쨌든 들뢰즈가 따드를 부활시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저는 ‘노마디즘’을 뒤졌죠.
‘천의 고원’은 본 적도 없고 볼 생각도 해보지 않았으니, 노마디즘을 찾는게 당연한 순서겠죠.(물론 노마디즘을 다 읽은 것도 아니예요 ㅎ)
‘9장. 미시정치학과 선분성 : 거시정치와 미시정치’ 의 ‘3) 믿음·욕망의 흐름과 권력’ 편에 따드가 3쪽 정도에 걸쳐 언급되고 있어요.
복잡한 얘기여서 옮길 재주는 없고요.
그리고 지금 여기는 상상의 장이니, 딱딱한 이야기 별로 필요도 없을 것 같아요.
다만
“사회적인 집합표상 내지 표상체계와 같이 거대한 것에 관심을 갖고 있던 뒤르켐과 달리 타르드는 미시적인 믿음이나 태도 등의 흐름에 관심이 많았어요.”
라는 표현만 소개해 드릴께요.
들뢰즈의 용어로 하면, 뒤르켐은 몰적인 대상에, 따드는 분자적 대상에 관심이 있었다는 거죠.
그리고 분자적 대상을 주 테마로 하는 들뢰즈는 당연 따드를 좋아했겠죠.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은 또 까다로운 개념 정립이 필요하니 직접 읽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 그런데 들뢰즈와 가타리(천의 고원은 둘이 함께 쓴 책이예요) 는 따드가 하려고 했던 것이 개인적인 것이나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믿음이나 욕망의 흐름 내지 파동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전파되는가 하는 데 관한 것 ”이었다고 이진경이 설명하고 있군요.
음...이렇게 되면 또 어떻게 되나요?
제가 앞에 풀었던 상상의 나래는 이 산이 아니고 저 산으로 날았던 셈인가요?
어쨌든 따드를 쫒아가니 뒤르켐은 물론 들뢰즈가 나오고, 들뢰즈가 나왔으니 스피노자까지 나와야 하는 걸까요?
어려운 이름들이 나오기 시작하니 슬슬 지치는 군요.
아직 한 사람이 안 나왔는데 말이죠.
드봉이라고.
‘군중 심리’ 라는 책이 대표작이라는데, 이건 또 서점에 떡하니 꽂혀 있더라고요.
앞부분만 살짝 넘겨봤는데 군중이란 얼마나 우매한 우중인가로 시작하는 듯 했어요.
요것도 읽어 보실 수 있겠죠?
자, 이제 진짜로 끝낼께요.
저도 온 몸이 뒤틀리는 군요.
이런 저런 자료들의 단서는 우리 모두 알고 있으니
“Garbriel tarde라는 사람에 대해서 조사하” 는 것은 각자의 노력에 달려 있겠죠.
아니, 각자의 상상력에 달려 있다고요?
뭐 어쨌거나 숙제를 해야 한다는 것만이 분명한 사실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