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 - 세월호 이후 인문학의 기록 우리 시대의 질문 1
노명우 외 지음, 인문학협동조합 / 현실문화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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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사려던 것은 아니었다. 1주기에 맞춰 준비된 책들이 한꺼번에 나오는 모양새인데 어차피 다 읽기는 힘들다 생각했다.

 

 

열쇠고리. 늘 가까이에 둘 테니 잊지 않을 것 같았다. 세월호 관련 책을 사면 보내준다는 말에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골랐다. 이 책은 알라디너이기도 한 진태원-balmas님의 글에서 알게 되었다. 여는 글이 홍세화의 것이라는 점도 믿음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책 몇 권으로 나불대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홍세화는 이렇게 말한다.

 

“살아남은 자가 염치 때문에 무슨 말이든 하기 버거워 차라리 침묵할 때,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력만이 마구 떠들어댐으로써 세상에 표현되는 언설들이 온통 그런 것들로 뒤덮인다면! p6”

 

이 책에 글을 실은 13명의 인문학자들을 대변한 마음이겠지만, 독자의 마음 역시 그러하다. 단지 읽고, 읽었다고 광고하고, 부끄럽다고 말하는 것뿐이지만, 이것이 세상의 더러운 말을 뒤덮을 수만 있다면, 염치를 무릅쓰고 뻔뻔하고 싶다. 지하철을 탄 세상 사람들의 손마다 세월호 책 한권씩이 들려 있다면, 누구도 섣불리 세월호를 왜곡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글의 질은 고르지 않은 것 같다. 넘치는 감정만 쏟아 놓은 글도 있고, 인문학의 기록이라 하기에는 알맹이가 영글어 뵈지 않은 글도 있다. 어떻게 보면 세월호에 관해 지금 해야 할 물음은 거의 다 하지 않았나 싶다. 세월호는 왜? 에서 시작해서 왜? 로 끝난다고 한다. 그리고 유가족들은 아직도 그 답을 얻지 못했다. 법적, 정치적 책임을 위해 명확히 밝혀져야 할 것들은(공인되어야 할 것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인문학적으로 보면 우리는 누가 책임을 져야하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고 있다. 단지 책임져야 할 주체가 책임을 거부하고, 책임을 물어야 할 주체가 그 힘을 갖고 있지 못할 뿐이다. 해석은 다양하지만, 그 스펙트럼이 넓지는 않다. 신자유주의, 국가의 민영화, 공적 연대의 파괴 등 구조적 문제부터 무능과 부패, 이기주의 등 조직 구성원의 문제까지, 모든 것이 하나의 맥락 안에 있다. 세월호는 브레이크 없는 자본의 무한 질주가 낳은 최악의 참사다.

 

그럼에도 사건의 진실과 인문학적 해석은 반복되어야 한다. 침묵과 망각 속에 빠르게 퍼져가는 것은 오해와 거짓들뿐이기 때문이다. 진실을 밝히기도 벅찬 유족들이 오해를 해명하느라 진을 빼는 모습이야말로 진짜 우리의 수치다. 세세한 사실 하나에서부터 우리를 여기까지 몰아붙인 구조적 문제까지 남김없이 기록하고 바로 세워야 한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력들’이 더 이상 떠들어대지 못할 때까지 반복해야 한다.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 특히 주의 깊게 읽은 글은 두 개다. 진태원의 <세월호라는 이름이 뜻하는 것>과 김동춘의 <국가부재와 감정정치>다.

 

 

 

<세월호라는 이름이 뜻하는 것>을 통해 진태원은 국가와 주체에 관해 말한다. “그렇다면 세월호 사건이 드러낸 것, 그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주체성이 부재한다는 것,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일종의 검은 구멍이라는 것이 아닐까? p144”

 

세월호가 가라앉는 모습을 지켜보며 가장 경악했던 것은 국가가 너무도 무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유가족들이 피울음을 쏟으며 구조작업을 안한다고 외칠 때도 나는 설마 설마 했다. 그 다급한 마음에야 못 미치겠지만, 설마 국가가 손을 놓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사건의 전개과정은 국가의 무능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었다. 단단한 고갱이를 상상했던 그곳은 커다란 구멍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것은 전능한 것으로 믿었던 국가가 사실은 지극히 무능력한 어떤 것이라는 사실이다. p145”

 

게다가 국가는 구조할 생각이나 의지도 없어 보였고, 지금까지 사건에 대해 책임질 의지도 없다. 국가는 우리 편이 아닌 것이다. 세월호 사건이 단순한 연민이나 동정을 넘어 고통과 분노를 촉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난한 우리를 위한 국가는 없다. 가난한 나를 위한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각, 그리고 다음 차례는 바로 내가 될 수 있다는 자각이야말로 그 분노의 원천이었을 터이다. p147”

 

국가가 구멍, 공백이라는 것은 사실 우리나라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근대 국민국가의 기본 성격이다. “민주주의 정체로서의 근대 국민국가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린다면 아르케 없는 것이다. p150” 아르케는 만물의 근원, 혹은 토대, 그리고 지배나 통치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민주주의가 아르케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민주주의에는 지배나 통치를 정당화하는 자연적이거나 객관적인 원리 또는 토대가 부재하다는 것을 뜻한다. 랑시에르 자신은 이를 민주주의는 ‘아무나’의 정치이며, 정치적인 참여에는 아무런 자격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p150”

 

근대 민주주의에 자연적 토대가 없다는 것은 그것이 존재론적 공백, 즉 검은 구멍 위에 설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에서 정치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행위 이외에는 어떤 기초도 지니지 않는다. 주체적 행위가 없을 때 국가는 다만 치안기계일 뿐이다. 국가의 유일한 관심사는 치안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세월호에 대한 정부 여당의 무관심은 치안기계로서의 국가의 본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치안기계로서의 국가는 포섭과 배제라는 이중 작용을 수행한다. 그들과 우리를 나눈다. 배제의 대상이 되는 우리를 랑시에르는 ‘몫 없는 이들’ (part of no part)이라 부른다. 그런데 몫 없는 이들의 대응방식도 이중적이다. 배제에 저항하기도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포섭의 대상에 포함되기 위해 애쓴다. “국가가 그들의 편이라면, 그리고 우리는 국가 없이는 하루도 살아가기 어렵다면, 내가,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내가 그들에 속하는 길이다. 실제로, 즉 경제적으로 물질적으로 그들에 속할 수 없다면, 상상적인 방식으로라도 그들에 속할 수 있어야 한다. p149” 몫 없는 이들은 저항의 주체이기도 하지만, 저항에 가장 소극적인 과소주체이기도 하다.

 

치안기계로서의 국가를 어떻게 주체적인 것으로서의 국가로 혹은 정치 공동체로 다시 구성할 것인가? 세월호 피해자 및 유가족들이 지금 제기하고 있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주체화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주체화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다시 말하면 세월호는 묻고 있다. 너희가 욕망하는 나라는 무엇인가?

 

  

 

 

 

<국가부재와 감정정치>는 <세월호라는 이름이 뜻하는 것>과의 연관성 아래 읽을 수 있다. 부재하는 것으로서의 국가는 곧 치안기계로서의 국가와 같다. 국가는 치안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즉 그들의 나라를 위해 전 국민적 동감을 허물고 유가족에 대한 혐오를 조장해 왔다. 정작 세월호를 정치화한 것은 소위 불순세력이 아니라 국가 자체였다. <세월호, 새로운 민주주의 담론의 시금석>을 쓴 허경의 말처럼 “하나의 기준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정치적인 것’과 ‘정치적이지 않은 것’을 나누는 행위 이상의 정치적 행위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와 무관한’ 이른바 ‘순수한’ 영역이란 현대 정치학과 철학에서 농담 또는 무지에 불과하다. p287”

 

불행히도 국가의 감정정치에 홍위병을 자처한 것은 고령층과 청년층, 우리 사회의 대표적 몫 없는 자들이다. 그들과의 상상적 동일시를 통해 불안감을 해소하는 과소주체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불행에 견주어 세월호 유족들이 과도한 ‘특권’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동감을 분노와 혐오감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p187”

 

저학력 고연령층이나 일베로 대표되는 청년 신세대들의 공통점은 권력에 집단적으로 맞서본 경험이 없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 시대가 되면서 모든 책임은 개인화되었고 사회적 연대는 해체되고 있다. 분노의 감정은 팽배하지만 동감을 기반으로 한 주체화 세력이 되지 못한다. 국가는 이들의 분노가 피해자를 향하도록 언론을 이용한 선동 정치를 감행하고 있다. 유가족이 요구한 적이 없는 특혜 루머를 퍼뜨려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는 무임승차자’ 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렇게 2014년 한국에서 가장 비극적인 존재가 ‘특권층’으로 둔갑하는 역설이 나타났다. p187”

 

  

 

 

 

‘특권층’ 유족들은 어제도 찬 바닥을 기며 진실규명을 요구했다. 어느 유가족의 말처럼 이제는 잃을 자식도 없는 유족들이 아니라, 알토란같은 새끼들을 품고 있는 국민들이 해야 할 일을 그들이 하고 있다. 주체화란 이들과의 공감과 연대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Save our sou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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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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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국가』는 2014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계간 《문학동네》에 게재된 12편의 글을 엮은 책이다.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 언론학자, 정신분석학자, 정치철학자 등이 각자의 눈으로 바라본 세월호 이야기다.

 

나는 그 중 소설가 박민규와 시인 진은영 그리고 현대정치철학연구자 홍철기의 글에 주목했다. 연민과 분노, 자기 환멸을 넘어선 독창적 관점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김연수와 김서영도 좋았지만, 이 세 편의 글에 한정해서 리뷰를 쓰고 싶다.

 

 

1. 박민규의 《눈먼 자들의 국가》

 

내가 아는 박민규는 비비 틀어서 조롱하기의 대가다. 틀렸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책을 두 세권 보았을 뿐이고, 그것도 오래된 일이니, 책 내용도, 그에 대한 이미지도 흐릿하게만 남았다. 기억은 때로 아주 작은 단편을 전부로 간직하고 있다. 여하튼 그는 낄낄대며 읽는 작가로, 이미지화 되었다. 그런데 이 글은 전혀 다르다. 조롱기도 냉소도 없다. 진지하고 단호하다. 어쩌면 세월호 앞에서 글재주는 사치가 될지도 모르겠다.

 

『세월호를 기록하다』를 읽으며 그날의 실체적 진실에 가까이 갔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잊고 있었던 것들이 이 글 속에서 다시 떠올랐다. 첫째가 언딘이다. 국가가 구조마저 민영화했다고 분노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사실 그건 민영화도 아니었다. 민간업체가 더 전문적이라고 자신을 깎아 내리며 국가가 추켜세웠던 그 언딘은 한 달이 지나자 사실 자신들은 구조업체가 아니라고, 인양을 하러 온 업체라고 항변했다. 그럼 구조는 누가 맡은 거냐는 질문에 언딘은 말했다. “구조는 국가의 의무죠.” 둘째는 6.4 지방선거 결과와 특히 7.30보선 참패다. 이것은 단순히 야당의 패배가 아니었다. 세월호에 대해 국가가 획득한 면죄부였다. 보선을 분수령으로 상황은 급변했다. 정부는 대놓고 국정조사를 가로막고 자료제출을 거부했다. 세월호에 대한 역공이 시작되었다. 세월호 진상규명은 불순세력의 선전선동으로 낙인찍혔다. 면죄부를, 그것을 넘어 탄압의 명분을 준 것은 우리다. 우리 국민이 가장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그렇게 했다.

 

세월호를 바라보는 박민규의 독창성은 사고와 사건에 대한 구분에 있다. 세월호에 대한 그의 정의는 “선박이 침몰한 ‘사고’이자,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 이다. p56”

 

「사고와 사건은 다르다. 사전적 해석을 빌리자면 ‘사고’는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을 의미한다. 반면 ‘사건’은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주목받을 만한 뜻밖의 일을 의미하는데 거기엔 또 다음과 같은 해석이 뒤따른다. 주로 개인, 또는 단체의 의도하에 발생하는 일이며 범죄라든지 역사적인 일 등이 이에 속한다. p57」

 

박민규에 의하면 세월호를 둘러싼 싸움은 명명의 싸움이다. 정부여당은 기를 쓰고 사고를 고집한다. 한낱 불행한 교통사고라는 것이다. 야당은 아무 생각이 없다. 세월호를 ‘사건’으로 규정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모른다. 그러니 바보다. 명명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런 말이 있다. (대충 기억한다.) 적이 우리의 언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승리한 것이다. 프레임의 싸움이다. 세월호가 사고가 되면 남은 것은 법적 책임과 적절한 보상밖에 없다. 뜻밖의 불행한 일에 무슨 대책과 정치적 책임이 필요하겠나? 수습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보상 이외에 진실규명을 위한 일체의 주장은 불순한 세력의 선전선동으로 낙인 된다. 세월호는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 왜? 우리는 그 ‘사건’의 진실을 원한다.

 

 

2. 진은영의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자정에 그림자가 있나? 잠시 의아했지만, 그녀는 시인이다. 그리고 니체로 학위를 받은 철학박사다. 한 다리 건너 아는 시인, 물론 시인은 나를 모르지만, 나는 10 여 년 전 시인과 잠깐 눈인사도 했고, 시인의 시집도 갖고 있다. 시인의 친구가 준 것이지만, 솔직히 나는 시인의 시를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진은영은 그날도 니체 강의를 위해 고민하고 있었다. 니체는 연민을 혐오했다. ‘고통 받는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대신 그 고통 앞에서 수치심을 느껴라. 연민이란 참으로 게으르고 뻔뻔한 감정이다.’ 온 나라가 슬픔과 연민에 빠진 그 시점에 니체야말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철학자이지만, 진은영은 과감히 니체로부터 세월호를 사유한다.

 

「우리가 마음껏 가엾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고통 받는 이들의 상황에 우리 자신이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생각할 때뿐이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우리는 그렇게 느낄 수 없다. p73」

 

연민을 증오하고 거렁뱅이를 몰아내라고 주장한 니체의 동류는 보들레르다. 철학자와 시인, 진은영에게 알맞아 보인다. 보들레르는 거렁뱅이를 때려눕히라고 외쳤다.

 

「시혜는 강자가 약자에게 제공하는 것으로 불평등한 관계를 전제할 때만 가능한 활동이다. 시혜와 평등은 완벽하게 대립한다. p75」

 

경남 무상급식을 중단한 홍준표를 반대하는 이유도 이것이다. 홍준표는 무상급식이라는 평등을 구걸로 바꾸어 버린다. 가난을 인증하면, 불평등을 인정하면, 시혜를 주겠다는 논리다. 거렁뱅이가 아니라 거렁뱅이를 만드는 자를 먼저 때려눕혀야 한다.

 

여기서 진은영은 한층 놀라운 연상을 한다.  6.4 지방 선거에서 여당이 들고 나온 구호는 ‘도와주세요’였다. 도와달라는 아이들을 외면한 정부여당이 어떻게 저런 뻔뻔한 구호를 외칠 수 있는지 격분했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사람들은 도와주었다. 물에서 건져주자 곧바로 내보따리 내놓으라는 협박에 시달리게 되었지만. 왜 심판을 해도 모자란 상황에서 사람들은 정부여당을 건져주었을까? 진은영은 그것이 선거를 관통한 시혜의 에토스라고 한다. 사람들은 선거의 실상을 잘 알고 있다. 어차피 그들은 우리를 대리하지 않는다. 선거는 자신을 대리할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다. 선거에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은 한순간 시혜자가 되는 기쁨이다. “박근혜 찍었지. 지 엄마 아부지 죽어서 불쌍하다고.” 도착적인 기쁨이다. 선거만 되면 굽실대는 국회의원 후보들이 평소에는 만나기조차 힘든 귀한 몸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표를 찍는 그 순간만은 내가 너를 구해주는 천사라는 기쁨이 더 짜릿할지도 모르겠다. 조금 억지 같은가?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시혜와 평등은 양립할 수 없다는 것, 연민은 나를 그 연민의 대상에서 제외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니체를 저마다의 필요에 따라 가져다 쓴 권력들이 존재했지만, 진은영이 말하는 연민에의 혐오는, 역설적이게도 세월호에 관한한 옳다. 우리가 세월호의 밖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국가 자체가 세월호다.

 

 

3. 홍철기의 《세월호 참사로부터 무엇을 보고 들을 것인가?》

 

홍철기는 신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세월호를 분석한다. 박민규도 세월호의 키워드로‘민영화’를 꼽았다. 홍철기는 박민규보다 좀 더 철학적인 접근을 한다. 2008년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신자유주의는 분명 이론상 패퇴하고 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는 예상하지 않은 곳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주체성이 사유화된 것이다.

 

「사적으로 극히 유능하도록 요구받지만 공적인 능력은 완전히 결여된 주체성을 생산하고 그에 고유한 사회적 관계를 산출한다는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란 정치가 ‘경제’에 의해 대체되는 기획일 뿐만 아니라 보다 본질적으로는 ‘경제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통치의 패러다임” 이기도 하다. p207」

 

신자유주의는 사회를 오직 시장으로만 표상하는데, 이러한 표상에 의거하여 사회가 재편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정치를 경제로 대체할 뿐 아니라, 경제로 대체되도록 정치적으로 개입한다는 뜻이다. 그 결과 공공영역이 민영화 혹은 사유화되는 것은 물론 주체성 자체가 사유화된다. ‘자기경영’, ‘자기계발’ 따위가 그 사례이다.

 

주체성의 사유화는 공적 능력의 상실을 의미한다. 공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징징거리기만 한다. 거꾸로 타인의 말을 공적인 이야기로 들을 줄도 모른다. ‘공적인 이슈들을 다루는 언어’가 사라진다. 말뿐 아니라 시각도 마찬가지다. 홍철기는 한병철의 《투명사회》 를 빌려와 투명사회의 폭력성을 설명한다. 사유화된 영역은 투명한 가시성의 범위에 남겨두고, 공공성을 보이지 않는 사회의 그림자 속에 버려둔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양태를 사적인 당사자로만 규정하려는 시도들은 모두 이와 같은 투명성의 정치미학 논리에 매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우리의 공통의 무능력과 책임의 부재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그저 규모가 큰 교통사고로 치환하려는 사고방식, 혹은 유가족에 대한 보상 문제나 생존 학생의 대학특례입학 내지는 희생자의 의사자 지정에 관한 쟁점으로 논의의 방향을 바꾸려는 시도들은 그 배후의 정치적 의도와 함께 투명성의 폭력이라는 측면에서 비판되어야 한다. p215」

 

세월호 사고는 사적인 것이, 세월호 사건은 공적인 것이 된다. 세월호는 사건이다.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

 

 

 

* 제목으로 삼은 <진실은 수장될 위기에 처했고, 슬픔은 거리에서 조롱받는 중이다.>는 편집자인 평론가 신형철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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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를 기록하다 - 침몰·구조·출항·선원, 150일간의 세월호 재판 기록
오준호 지음 / 미지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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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들고 답답했던 것은

첫 째, 그 빌어먹을,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누가 왜 반복했냐는 것이고,

둘 째, 맹골수도에서 급변침한 이유는 무엇이며,

세 째, 왜 구조는 그따위로 엉망이었는지 이다.

 

그 방송만 아니었다면 훨씬 많은 생존자가 돌아올 수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명백해서 누구나 안타까움과 울분을 금하지 못했다. 급변침에 관해서는 당시 조타실을 맡았던 항해사와 조타수가 버젓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그런 기초적인 사실조차 확인하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구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해경 그 누구도 선실 안으로 들어가지도, 탈출하라고 방송 한 번 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잊고 있었다. 유병언이 백골로 발견되자, 당시에는 진짜 유병언이 맞는가 말도 많았지만, 금방 그것은 기정사실이 되고, 언론도 사람들도 세월호에 대해 급격히 관심을 잃어갔다. 간간이 재판 소식이 들려오고, 1차 재판의 최종 선고가 내려지고, 그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양형이 생각보다 적다는 생각을 잠깐 했을 뿐, 어떤 실체적 진실이 밝혀졌는지 자세히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전 세월호에 탔던 화물기사 김동수씨가 많은 아이들을 구조해 놓고도 스스로 살인지라고 생각하며 자살을 시도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리고 벌써 4월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주문하다가 우연히 『세월호를 기록하다』를 보았다. 발행일이 2015년 3월 20일이니 출판된 지 열흘 정도 된 책이다. ‘150일간의 세월호 재판 기록’ 이란 문구가 눈에 들어왔고, 세월호를 제대로 정리하려면 이 책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300여 쪽의 분량이지만 하루 만에 빨려들듯 읽었다. 잠깐 청소를 하려고 책갈피를 끼워놓았다가 다시 책을 펼치며 깜짝 놀라기도 했다. 책갈피를 잘못 꽂았다고 생각했다. 조금밖에 안 읽은 줄 알았는데 어느새 반이 넘어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에 근거한 가장 객관적인 글’ 이란 평처럼 재판 기록을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한 책인데 어떤 픽션보다 더 몰입도가 높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희생자들이 참 운이 없었다는 생각을 했다. 세월호가 침몰하기까지 그 많은 과정들 속에서 누구 한사람, 어떤 과정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행동하고 지켜졌다면, 브레이크를 걸었다면, 그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어쩌면 한결 같이 이기적이고 무능하고 부패했는지, 이럴 수도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그런데 운의 문제가 아니었다. 세월호가 특별히 불운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 사고는 일탈이 아니라 정상이, 우리가 정상으로 믿고 있던 시스템이, 필연적으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그런 결과였다.

 

「그런데 세월호 사고는 과연 국가의 정상적인 상태로부터 일탈한 사고인가? 어쩌면 이 사고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세월호 사고를 낳은 것은 우리가 ‘정상적인 상태’라고 여긴 바로 그 국가, 그 사회 시스템이란 사실이다. …… 상식을 초월하는 이 사고에는 당연히 상식을 초월하는 어떤 거대한 ‘일격’이 있었을 것 같지만, 나는 재판 과정을 통해 참사의 배경에 있는 것은 촘촘하게 결합된 비겁하고 이기적이며 무책임하고 무능한 행동들이란 사실을 알았다. p324」

 

“세월호를 무리하게 증축하지 않았다면, 화물적재 기준을 초과하지 않았다면, 고박을 잘 했다면, 운항 관리자가 규정을 지켰다면, 조타수가 조타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비상사태에 매뉴얼대로 했다면, 123정이 제대로 판단했다면...” 이렇게 무수히 상상해 본다. 그런데 너무너무 불행하게도 이 모든 것들이 딱 맞아 떨어졌다. 아마도 이렇게 많은 가정 아래 어떤 사건을 재구성한다면 대부분은 음모론이라 할 것이다. 어떤 특수한 상황이, 정상에서 벗어난 어떤 일탈적인 행위가 이렇게 연속적으로 일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그것들이 우리 사회를 움직인 정상적인 시스템이었다는 뜻이다.

 

「요컨대, 이렇게 무수한 요인의 동시다발적인 진행을 ‘소수의 일탈’로 볼 수 없다. 진실은, 우리 사회가 이런 행동들을 묵인했거나 심하면 대세로 보아 부추겼으며 그 위에서 성장과 발전을 이룩했다는 데 있다. 지붕이 무너진 것은 마지막에 떨어진 눈송이 때문만은 아니다. p325」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세월호 재판의 한계를 세 가지로 짚으며, 이렇게 평가한다. 객관적인 서술로 일관하던 저자가 그 자신의 판단과 사유를 직접 표출한 부분이다. 여기서 저자는 ‘하인리히 법칙’이란 것을 설명한다. 미국 보험사 직원인 하인리히가 직업상 연구한 산업재해 사례를 토대로 내놓은 법칙이라고 한다.

 

「산업재해 중상자가 1명 발생했다면, 그 전에 이미 경상자가 29명 발생했고, 부상을 당할 뻔한 잠재적 부상자의 수는 300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1:29:300의 하인리히 법칙은 하나의 대형 사고가 일어나기까지 반드시 그보다 작은 규모의 사고들이 ‘징후’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p318」

 

세월호 참사 이전에도 우리사회에는 무수한 징후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여전히 무수한 징후들이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세월호 참사가 가장 큰 사고가 아니라 무수한 징후들 중의 하나가 될 만큼 끔찍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당장 잠실 롯데 제2월드는 공포의 대상이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 책이 기록한 세월호 재판은 단지 법적 책임을 묻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징역 36년의 가장 무거운 형량을 받은 이준석 세월호 선장이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걸까?

 

저자에 의하면 미국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영은 ‘법적 책임’과 ‘정치적 책임’을 구분한다. 법적 책임은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사람에게 제한적으로 물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책을 죽 읽어보면 느끼겠지만 이준석 선장 같은 사람을 만들어 낸 배후의 시스템과 그 시스템을 만든 권력이야말로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 아이리스 영은 “책임을 져야 할 결과에 기여한 이들이 법적 책임이 없다고 하여 정치적 책임마저 면제되는 건 아니다. p323” 고 했다. 우리는 아직 그 누구에게도 정치적 책임을 묻지 못했다. 누구도 정치적 책임을 지려하지 않고 적반하장으로 세월호 관련자들에게 그만하라고 다그치는 실정이다.

 

 

『세월호를 기록하다』에는 어떤 거대한 음모 같은 것이 발견되지 않는다.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세 가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는 있지만, 오히려 허탈하다. 어떤 악한 의도나 숨겨진 비밀 때문이 아니다. 어린 학생들보다 더 공포에 질려 넋을 놓고 있는 선장과 울고 있는 항해사, 아무 생각 없이 와서 갈팡질팡하는 123정장, 조타실의 지시를 기다리다 자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 방송을 되풀이한 가엾은 승무원이 있을 뿐이었다.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무능하거나 무책임하고,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는 권력 또한 무능하면서 뻔뻔했다.

 

세월호 재판과 그 재판을 기록한 이 책은 세월호의 진실을 모두 밝히지 못했다. “세월호 재판에서 ‘확정된’ 사실관계는 최선의 경우에도 확률적 가능성을 가질 뿐 다른 가능성이 절대로 없다고 할 수는 없다. p321” 세월호는 여전히 바다 아래 있고, 그 속에는 진실의 또 다른 부분이 묻혀있을지도 모른다. 세월호 인양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인양에 대해 토의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권력이 책임을 회피하고 있고, 여론은 세월호 진실을 두고서가 아니라, 정치적 추종세력에 따라 묻지마 적대를 형성하고 있다. 사실 세월호 참사에서 가장 답답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어린 학생들의 무수한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수꼴과 좌좀으로 나뉘어 사건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세월호를 기록하다』로 조금 객관적인 시선을 가져 보자고 한다면, 통할까?

 

 

 

추기 1 : 재판부의 세월호 사고 원인

 

첫 째 세월호는 증개축으로 복원성이 약해진 선박이었고, 둘째 해운사가 화물 최대 적재량 기준을 어기고 과적하여 복원성을 더 악화시켰으며, 셋 째 화물을 제대로 고박하지 않은 상태로 출항했고, 넷째 이런 세월호를 주의하여 운항해야 할 당직 항해사와 조타수가 4월 16일 전남 진도군 병풍도 앞바다에서 우현으로 대각도 조타를 하는 운항 과실을 범하여 8시 48분경부터 배가 우현으로 급선회하며 원심력으로 좌현으로 기울었으며, 다섯째 과적된 채 부실하게 고박된 화물이 좌현으로 쏠리면서 복원력이 상실되어 배가 30도 이상 전도되었다. 이후 침수가 시작되어 점점 크게 기울어지다가 10시 17분경 전복되었고, 10시 30분경 완전히 침몰했다. p18

 

 

 

추기 2 : 선원 재판 , 법정 외 증인 신문, 단원고 유소은 학생 (가명)

 

저희는 수학여행을 가다가 단순히 사고가 난 것이 아니라 사고 후 대처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이 죽은 건데, 이런 것을 교통사고라고 표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p107

 

 

 

추기 3 : 추천사 <사실에 근거한 가장 객관적인 글>  중

 

대한민국이 정상적인 시스템이 확립된 나라였다면 세월호 유가족들은 절대로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국가 기관의 엄정한 수사 결과를 믿고, 법원의 객관적인 판단을 믿으면서, 먼저 간 아이를 추억하고 명복을 빌며, 힘들겠지만 일상으로 돌아가서 건강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면 되었을 것이다.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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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고 연구소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12년 출간된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을 통해서다. 책보다는 우리나라의 청년들이  슬라보예 지젝을 직접 인터뷰했다는 사실 자체에 놀랐었다. 유명학자도 아닌 청년들이 슬로베니아로 날아가 지젝을 만났다니, 만날 수 있다니, 평범한 사람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니, 부럽고도 놀라웠다.

 

인디고 연구소는 인디고 서원에서 출발했다. 인디고 서원에서 인문학을 함께 공부한던 청소년들이 청년으로 성장하여 만든 공부 공동체가 인디고 연구소다. 2008년에 문을 연 인디고 연구소는 2012년 '공동선 총서' 1권으로 슬라보예 지젝 인터뷰를,  2014년 '공동선 총서' 2권으로 지그문트 바우만 인터뷰를 출간했다.

 

「공동선 총서는 불가능한 꿈에 과감히 도전한다. 공동선을 열망하는 철학자의 사유와 더불어 불가능한 미래를 가능한 미래로 바꾸고자 한다. 공동선의 사유를 통해 자유와 평등을 향한 공동투쟁의 장에서 잠재된 혁명의 무수한 이름들을 이 세계에 살려낼 것이다. 불가능한 꿈의 시도야말로 인문학의 본질이자 가능한 미래의 징후가 아니겠는가.」

 

'공동선 총서'를 기획하며 던진 인디고 연구소의 출사표다.  짧은 문장에 공동선, 자유, 평등, 혁명, 인문학, 사유, 본질, 투쟁 등 온갖 '선한' 단어가 난무한다. 청년들의 패기가 느껴지기도 하고, 치기가 엿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공동선이란 무엇인가?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의  <차례>에는 이례적으로 길다란 질문이  붙어 있는데, 인디고 연구소가 여기서 정의한 개념은 이렇다.

 

"공동선이란 개인의 주관적 가치가 보편적인 윤리적 질서와 만나는 지점, 즉 나의 좋음이 세상의 옳음과 맞닿는 곳에서 창조되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좋은 말같은데, 매우 추상적으로 들린다. 인문학이 아니라면 사실 공동선이란 말 따위야 정의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착하게 살자! 그러나 인문학이라면 인디고 연구소가 내린 공동선의 정의는 그 자체로는 아무 내용이 없다. 좋음도 옳음도 보편적인 윤리적 질서도 모두 채워져야 할 텅 빈 단어일 뿐이다. 이 텅빈 기표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 인디고 연구소가 공동선 총서를 통해 하려는 것도, 해야 할 것도 바로 이 작업일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작업의 첫 번째로 슬라보예 지젝을 택했을까? 이 책을 보며 제일 먼저 떠올랐던 의문이다. '선'이란 개념은 지젝과 그닥 친밀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젝이 'commons' 를 강조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common goods'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있다. 지젝에게 윤리는 차라리 근본악과 더 밀접하다. 말하자면 세상이 망하더라도 나는 물러서지 않겠다... 뭐 이런. 지젝도 인터뷰 첫머리에 '선'에 대한 문제 의식을 제기한다. 공동선에 대한 정의부터 다시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공동선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새롭게 변화된 시대에 맞는 공동선에 대한 정의를 먼저 정립해야 합니다. 공동선을 묻는 작업이 이렇게 새로운 의미의 공동선을 정의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저는 여러분의 기획에 동의합니다. p45

 

아마 이 인터뷰가 아니었다면 지젝이 입에 올리지 않았을(내가 읽은 지젝의 책 중에 공동선이란 말은 없었다고 기억하므로 막 이렇게 과감히 쓴다;;) 지젝의 '공동선'이란 어쩌면 우리가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선의 개념과는 많이 다를지도 모른다. 지젝의 어떤 주장들은 받아들이기에 힘들만큼 상식과의 괴리가 크다. 물론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에는 그런 지젝의 특성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기특한 청년들이 떼로 찾아와 배움을 구하는데, 절정고수의 날카로운 초식을 막 던질만큼 몰인정하지는 않다. 바꾸어 말하면 이 책은 읽기는 편하지만, 지젝 특유의 사유를 제대로 맛보기는 어렵다. 지젝은 공동선이라는 부자유스런 틀 안에서도 할말을 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 틀이다.

 

 

내가 바우만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최태섭의 『잉여사회』에서다. 몇 번이나 인용되는 것을 보고 유명한 사회학자구나, 짐작만 했다. '액체 근대'라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을 발명한 걸로 기억하고 있었다. 인디고 연구소의 '공동선 총서' 2권으로 바우만과의 인터뷰집이 나온 것을 보면서도, 선뜻 내키지는 않았다.  나는 사회학자는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학은 철학에 비해 너무 직접적이고 현실적이어서 딱 부러지기는 하는데 미묘한 매력은 없는 편이다.   

 

 『희망, 살아 있는 자의 의무』도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았다. 바우만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얻었다는 만족감을 빼면 책 자체의 매력은 별로 없었다.

 

슬슬 넘기면서 읽어서, 내가 정확하게 읽었는지 자신은 없지만, 액체 근대란 말하자면 포스트모던에 대한 바우만식 정의인 것 같다. 근대 그러니까 고체 근대는 단단하고 확실하고, 선악도 딱딱 구분이 되고, 아버지의 법도 살아있는 그런시대다. 액체 근대는 이 모든 확실성이 사라지고, 딛고 있는 땅마저 언제 무너질지 모르고, 오늘 기준이 내일은 일탈이 되고, 한마디로 불안정과 불확실성의 시대다. 노동자로 말하자면 프레카리아트, 불안정한 프롤레타리아의 시대다.

 

바우만은 현재의 액체근대를 '공위의 시대' 라고도 표현한다. 고체근대 즉 국민국가의 시대에는 권력과 정치가 통합되어 있었다. 그런데 액체근대에서 권력은 세계화된 자본으로 넘어갔다. 반면 정치는 여전히 근대국가의 틀 안에 놓여 있다. '정치에 의해 규제되지 않은 권력'과 '권력을 빼앗긴 정치'가 남았다. 당연히 UN은 세계화된 자본을 규제할 수 없다. UN은 근대 국민국가의 주권을 상호 침해하지 않기 위해 탄생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귀에 따갑게 들어왔던 대로 꿰맞추어 보자면 토대는 세계화되었는데, 그에 걸맞는 상부구조는 없다. 이것을 바우만은 '공위' 라고 부른다. 비었다. 이 빈자리에 적합한 정치형태가 들어와 권력과 다시 결합하여야 세계화된 자본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인디고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이제 몇 살쯤 되었을까? 책을 읽고 문득 궁금해졌다. 인디고 서원의 청소년들이 자라서 청년이 되고 그러고도 7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니 서른쯤은 되었을까?  함께 책을 읽은 친구들이 어른이 되어가면서도 함께 생각하고 함께 실천하는 그런 삶은 참 좋을 것 같다. 내가 참여하는 작은 독서회도 그렇게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들 주변의 수많은 독서회들이 그렇게 된다면 진짜 신나는 세상이 될 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런데, 읽은 책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너무 심하게 이름들을 끌어다 댄다. 맥락상 별 관련이 없는 지식인들의 이름을 가져오고, 불필요한 인용들을 한다. 핵심을 치고 들어와 머리에 탁 박히는 질문이 될 수도 있을 수 많은 문장들이 "누구 누구의 어떤 어떤 책에 무슨 무슨 말이 있는데,..." 따위의 서두 때문에 산만해지고 만다. 바우만 앞에서 그런 말은 사실 번데기 앞의 주름잡기 같아 읽는 내가 살짝 부끄러워질 지경이다. 이렇게 불러댄 그 많은 학자들과 책들을 제대로 읽고 이해는 하고 있을까 살짝 의문이 들려고도 한다. 그런 것 없이도 인디고 연구소는 충분히 멋져 보인다.

 

 

 

 

 

 

 

 

 

 

 

 

 

 

 

 

 인디고 서원의 이런 책들.... 읽어 보진 않았다. 후루룩 넘겨 보니 아이들이 쓴 독서일기 같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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