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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 - 진중권의 철학 매뉴얼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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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17일에 카페 과제로 쓴 글입니다. 진중권의 <아이콘>에서 지젝의 <시차적 관점>에 관한 글을 비판한 내용입니다.

 

 

내게 『시차적 관점』은 특별한 책이다. 세미나라는 새로운 공간을 열게 된 첫 책이기 때문이다. 뭔가 거창한 것 같지만, 사실 우리 세미나는 ‘죽치고 수다 떨기’가 진화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몇 년 동안 함께 수다를 떨어온 지인들이 있고, 다들 책을 좋아하고, 나만 빼고 업이 모두 공부고, 그것도 인문·사회 쪽이고, 그러다 보니 이왕 하는 수다, 좀 체계적으로 해보자고 시작한 것이 내가 3년째 해오는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세미나라는 말에 떨리기는 했지만, 이왕 아는 얼굴들이고, 그것도 반은 반말, 오다가다 존댓말, 나머지는 그냥 어미도 없이 몇 시간씩 수다 삼매에 빠지는 사이라, 창피해봤자 뭐 어떠냐는 배짱으로 시작했다. 나름 업자들 사이에 실력도 족보도 가방끈도 없이 끼어드는 것이 부담이자 민폐였지만, 설레기도 했다. 마침 그때 나는 막 백수 생활을 시작했고, 남아도는 시간과 엉뚱한 의욕으로 퇴사이후 놓았던 공부를 다시 했다. 사실 대학교 때 공부에 별 흥미도 관심도 없었던 터라, 공부도 안 했고 아는 것도 별로 없이 겨우 졸업만 했는데, 회사에 턱 들어가고 보니, 공부를 안 하려야 안할 수가 없어서, 학교 때도 안하던 전공 공부를 진짜 열심히 했다. 이런 이야기하면 요즘 청년들에게는 참 미안한데, 그 때는 그렇게 하고도 어렵지 않게 취직해서 먹고 살았다. 여하튼 그렇게 한 10년 공부하고, 손 놓은 지 또 한 10년이 다 되서, 새까맣게 밑줄도 긋고, 여백에 메모도 해가며 생판 새로운 공부를 하게 됐다.

  보태는 것 없이 배우기만 할 처지고, 시간도 많고 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발제라는 것을 맡게 됐다. 물론 그게 뭔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냥 요약을 하든지, 중요한 부분 발췌를 하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서, 무작정 덤벼들어 발제라고 나름 십여장을 만들었다. 사실은 내심 좀 놀래주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세미나 첫 날, 내가 돌린 발제를 받아들고 다들 놀라던 모습이 생각난다. 예상대로(?) 다들 놀랐다. 내가 했던 발제문은 화려했다. 직장 생활 10년 동안 갈고 닦은 파워포인트 솜씨를 십분 발휘해, 컬러풀한 도표들을 가득 그려놓은 것이다. 사업 기획안이나 제품 교육 자료를 떠올리며 정성을 쏟았다. 피땀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좀 과장하면 그렇게 뻥쳐도 쇠고랑차지는 않을 정도였다. 안 그래도 부실한 허리가 끊어질 듯해도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붙어 앉아 있었다.

  『시차적 관점』은 어려운 책이다. 한 문장을 놓고 각자의 해석이 분분했던 세미나를 떠올려 봐도 그렇다. 이 책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현대 철학이 처한 교착 상태를 돌파하려는 지젝의 도전! 지금까지의 지젝은 잊어라! 지젝 스스로 ‘대작’이라 칭한 문제의 책~ ” 문제의 책, 맞다. 지젝이 주장하는 이론도 문제적이고, 그 이론을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고, 문제 많은 번역도 참기 힘든 문제고. 그런데도 나는 참 용감했다. 시퍼런 칼 날 같이 위험한 지젝의 사유를 서너 단어로 탁탁 잘라 네모 혹은 타원의 도형 안에 얌전히 가두고는 화살표를 착착 그려 넣어, A와 B를 합하면 C가 나온다는 식의 도식으로 만들었다. 나는 요즘 유행하는 뇌구조 그림처럼, 지젝에게 칸트는 뭔가 미흡하고, 헤겔은 훌륭하고, 라캉은 진리고, 그러니까 칸트가 어쩌고저쩌고하는 문장이 나오면 일단 색안경을 끼고 볼 것, 헤겔 운운하면 무조건 수용!, 뭐 이런 식으로 나의 머리를 포맷했다. 사실 그건 내가 해석할 수 없는 문장들을 어떻게 해서든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자 꼼수였다. 그렇게라도 딱딱 갈라놓지 않으면, 도저히 무슨 내용인지 윤곽조차 그리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그건 내 오래된 습관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습득했던 몸에 밴 방법이라, 지금도 나는 그렇게 사고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지,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다는 논리는 그렇게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여하튼 결과를 말하자면, 그렇게 나는 첫 세미나에서 ‘새 됐다.’ “제 과제에서 도식 나오면 전 점수 안줘요 ㅋㅋ" 하던 지인을 민망하게 보면서, 그래도 나는, 일목요연한게 얼마나 좋은데 흥, 속으로 그랬다. 도식은 사유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고 했다. 이미 확정되어 버린, 이미 굳어 버린 사고 속에서 철학적 사유는 더 이상 살아 움직일 수 없다고 했던 것 같다.

 

 

  씨네21에서 진중권의 글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정말 반가웠다. 바로 그 『시차적 관점』을 진중권도 읽고, 글까지 썼다는 사실이 참 기뻤다. 멋진 삼촌 옆에서 괜히 우쭐한 느낌?

  푸른바다님의 막쪽글 과제인, 진중권의 『아이콘』은 2010년 4월부터 1년간 씨네21에 동명의 제목으로 연재했던 칼럼을 묶어 만든 책이다. 이 칼럼은 지금도 연재되고 있다. 주로 서양의 철학적 사유를 우리나라의 시사적 문제와 엮어서 쓴 글인데, 철학의 세계로 이끄는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다. 책 소개를 보면, ‘아이콘을 누르면 복잡한 명렁어 없이 컴퓨터를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듯, ‘개념어’를 누르면 철학 지식을 완벽하게 갖추지 않아도 철학적 수준의 깊은 사유가 가능하다‘ 는 것인데, 읽는 사람들의 판단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중적 칼럼으로는 훌륭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진중권의 『아이콘』에는 지젝의 『시차적 관점』에서 따온 ‘개념어’를 다루고 있는 칼럼이 몇 편 있다. 그런데 그 글들을 읽고 나는 왠지 서운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이 그만큼 좋아해 주지 않을 때 느끼는, 그런 감정..., 여하튼 그랬다. 사실 진중권이 지젝을 좋아할 리는 없을 것이다. 진중권은 사민주의자로 알려진데 반해(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인터넷에서 그렇게 불린다.), 지젝은 사민주의자를 오히려 혁명의 장애물로 여기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것이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내가 ‘서운’ 운운한 것은 사실, 내가 진중권에게 『시차적 관점』을 꼼꼼히 읽지 않았다는 혐의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사적으로 아는 누군가일 뿐이다) 한국의 벤야민이라고 할 정도의 진중권을 두고, 천재적이라고 할 수 있는 진중권을 두고, 그런 의심 자체가 내 자신에게도 깜짝 놀랄 일이지만, 솔직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특히 ‘촛불은 왼쪽에서도 오른쪽에서도 깜박인다.’는 칼럼은 정말 그랬다. 그래서 나는 이 막쪽글을 꼭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상황이 조금 꼬였다. 진중권의 『아이콘』과 진중권이 언급하고 있는『시차적 관점』의 관련 부분을 다시 읽어 보고 썼어야 할 글을 지난 번 『아담의 오류』감상문을 쓰면서 뜻하지 않게 주절거리고 말았던 것이다. 사실 세미나를 할 때도, ‘바틀비’가 우리나라 상황에 적절한 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 유럽은 복지국가와 사민주의를 여러 가지 형태로 시험해 보았거나 실행중인 사회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복지라고 할 만한 것도 없는데, 어쩌면 너무 일찍 온 ‘바틀비’는 대단히 생뚱맞게 보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제대로 끝도 맺지 못한 그 글은 진중권에 대한 성급하고도 잘못된 비판이다. ‘바틀비’는 거칠게 이해하고, 개략적으로 다룰 경우 영락없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대단히 예민한 주제이다. 인디아나 존스에나 나오는 아득한 협곡 위,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나무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다. 떨어져 죽기 십상이다. 더우기 나는 인디아나 존스도 아니고, 존스를 쫒아가다 발을 헛디뎌 떨어져 죽는 나쁜 편의 졸개 정도 급임에랴 말할 필요도 없다. 그 다리 위에는 애초에 발을 디밀지 말아야 했다. 디밀었어도 얼른 돌아 나와야 한다. 내가 지젝의 철학을 자유롭게 다루게 되는 때가 온다면, 그 때 다시 ‘바틀비’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다. 그래서 오늘은, ‘촛불은 왼쪽에서도 오른쪽에서도 깜박인다.’에 대해서만 글을 쓰려고 한다. 죄송하다. 이제 시작이다.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다는 것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 분야에서라면 우리는 이미 오래된 지혜를 가지고 있다. “네 말이 옳다, 그리고 네 말도 옳구나, 허허허” 그 자애로운 웃음으로 황희 정승이 무엇을 목적하고 무엇을 이루었건, 그는 그렇게 조선 최고의 영의정으로 각인되어 있다. ‘중용’이라는 말도 있다. 서적『 중용』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중용’이라면 사전적 의미대로 잘 사용하고 있다. “과하거나 부족함이 없이 떳떳하며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상태나 정도”

  그러면 지젝의 ‘시차적 관점’ 이 이런 교훈을 목적으로 하는 걸까? 전혀 그렇지 않다. 시차적 관점이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것의 정반대, 중용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덧붙일 필요도 없겠지만, 내가 이해한 바에 의하면 그렇다. 진중권 역시 이 점을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기가 가진 입장에 따라 세계는 달라 보이게 마련이다. 물론 저마다 자기의 가치는 ‘해일’만큼 중요하며, 거기에 비하면 다른 문제들은 ‘조개’만큼 하찮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입장의 차이를 넘어 정말로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판정해줄 객관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경우 철학에서는 흔히 ‘통약불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다시 말해 이들 입장을 서로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게 해주는 공통의 지반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 제 입장이 바로 그 공통분모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무지막지한 독단이리라.」

  그런데 진중권은 독단도 아니고, 상대주의도 아닌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싶어 한다. 우리의 현실이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도 옳고, 너도 옳아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 말로 상대주의를 선언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문제는 현실이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한다는 데 있다. 어떤 가치가 진정으로 중요한지 말해줄 객관적 기준 없이 우리는 살기 위해 선택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선택을 대체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 또 그 선택이 선택되지 않은 다른 입장들에 부당한 것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려운 것은 이런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다. 가치의 다원성을 인정하면서도 실천에서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는 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아마도 지젝이 말한 ‘시차적 관점’이 그 해답이 될지 모르겠다. 」

  인터넷 상에서 투사의 이미지와는 달리 여기서 진중권이 추구하는 해법은 참으로 자애롭고 인자하여, 황희 정승을 떠올리게 한다. 그 태도 자체는 비판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해답을 하필이면, 그것과는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지젝을 통해서 찾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지젝이라면 아마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나는 차라리 독단을 주장한다. 그것이 뭐 어떻다는 것인가? 적대세력에게 우리는 부당하고, 우리에게 적대세력 역시 부당하다. 중요한 것은 이 부당함이 누구를 향해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1%인가? 99%인가? 다원성을 인정하며 실천적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는 길은 없다. 그 물음 자체가 불필요하다....아마 이렇게. 진중권의 결론을 읽어 보면서, 내가 왜 이런 무모한 주장을 하는지, 변명해 보겠다.

 「 시차적 관점이란 이렇게 서로 충돌하는 두 입장을 -마치 힘껏 당겨 묶은 활줄처럼- 그 팽팽한 긴장 속에서 함께 유지하는 사유의 새로운 습관이다. 그것이 얼마나 실천적으로 효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A만이 옳다’, 혹은 ‘B만이 옳다’는 독단보다 우리를 현실에 더 가깝게 데려다 줄 것이다. 」

  내가 읽은 『시차적 관점』에서 시차적 관점이란 정확히 이것과 반대의 개념이다. 충돌하는 두 입장을 함께 유지하는 사유의 습관이 아니라, 하나의 입장과 그 공백을 보거나, 반대의 입장과 그것의 공백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물론 두 가지 방법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을 이론의 층위에서 사유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무언가를 보는 행위의 층위에서는, 동시에 두 가지 입장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차는 동일한 X에 대한 양립 불가능한 두 개의 관점으로 구성된 대칭적인 것이 아니다. : 두 관점들 사이에는 환원불가능한 비대칭성, 극소의 반성적 왜곡이 존재한다. 우리는 두 개의 관점들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관점과 그것을 회피하는 것이 있으며, 두 번째 관점은 우리가 첫 번째 관점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공백을 채운다. (시차적 관점 PV, p63)」

  팽팽히 당긴 활시위의 양 끝처럼 대칭적인 것이 아니라, 비대칭적인 것, 혹은 뫼비우스의 띠 같은 것이다. 다른 비유를 하자면 루빈의 꽃병처럼, 하나의 꽃병을 보거나 두 개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둘 다 볼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나도 해봤다. 순간적으로는 가능한 것 같지만, 다만 이경규의 눈알 굴리기처럼 눈이 재빠르게 대상을 바꾸어 가며 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될 뿐이다. 팽팽하게 눈을 부릅떠봤자 눈물이 날만큼 눈알만 아플 뿐이다.

   지젝은 책의 서주에서 두 가지 사례를 들어, 시차적 관점에 관해 설명한다. 그 중 하나가 벤야민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다. 벤야민은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을 하던 중, 나치 요원에게 붙잡히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스페인 국경 마을에서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2003년 놀라운 이야기가 어느 매체를 통해 발표되었다. 벤야민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의 스파이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죽기 몇 달 전 벤야민이 집필한, 마르크스주의의 실패에 대한 충격적인 분석인 『역사철학테제』 때문이다. 『테제』를 우연히 읽게 된 스탈린이, 이 『테제』에 근거한 벤야민의 새로운 집필계획을 알게 되었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출판을 저지하려고 했다. 여기서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벤야민과 스탈린은 결코 조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두 이야기가(나는 한 가지 사례만 소개했다) 공유하는 것은 그것들이 구축하는 관계가 구조적인 이유들로 인해 결코 조우할 수 없는 불가능한 단락의 층위들이라는 것이다 : 예를 들어 ‘스탈린’이 대표하는 것을 ‘벤야민’과 같은 층위로 이동시키는 것, 즉 스탈린적인 관점에서 벤야민의 『테제』의 진정한 차원을 간파하는 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 두 이야기가 기조로 삼고 있는 허상, 즉 두 개의 양립 불가능한 현상을 동일한 차원에 배치하는 허상은 칸트가 “초월론적 가상”이라고 부른 것, 상호 번역이 불가능하며, 어떠한 종합이나 매개도 불가능한 두 지점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일종의 시차적 관점으로만 포착할 수 있는 현상들에 대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믿는 가상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두 층위 간에는 어떠한 관계도 성립되지 않으며 어떠한 공유된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일치한다 할지라도 말하자면 그것들은 뫼비우스의 띠의 상반된 양면에 있는 셈이다.( PV, p13)」

  벤야민의 암살설이 성립하려면『테제』를 놓고 벤야민과 스탈린이 같은 층위, 즉 같은 내용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스탈린은 『테제』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의 실패에 대한 분석을 읽어내지 못한다. 스탈린의 관점에서 『테제』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스탈린이 『테제』를 읽고 벤야민을 암살했다는 것은, 꽃병과 얼굴을 한꺼번에 봤다는 의미다. 왜 지젝이 스탈린을 저차원에 두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 전제에 동의하고 보면 시차적 관점에 대해 무엇을 설명하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테제』는 하나의 실체이지만, 우리는 스탈린의 관점을 갖거나 벤야민의 관점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시차적 관점이다. 두 관점은 동시에 동일한 층위에 존재하지 못한다. 진중권이 해석한 시차적 관점은 이와 반대로, 두 개의 관점을 동일한 활시위에 올려놓고 팽팽하게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이 「‘A만이 옳다’, 혹은 ‘B만이 옳다’는 독단보다 우리를 현실에 더 가깝게 데려다 줄 것이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시차적 관점은 지젝의 시차적 관점과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꽃병과 얼굴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불가능한 주장이기도 하다. 꽃병과 얼굴을 동시에 보려할 때, 현실에 더 가깝게 갈 수 있기는커녕 현실이란 것이 구성되지도 않을 것이다.

 

 

  지난달에 나는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을 읽었다. 지젝은 『시차적 관점』에서 찰스 디킨스의 이 유명한 소설을 헤겔의 ‘부정의 부정’을 설명하는 사례로 들고 있는데, 소설 읽은 자랑(?)도 할 겸하여, 조금 소개한다. 물론 시차적 관점에 대한 구체적 사례이기도 하다.

 「 핍이 “거액의 유산상속인/ 큰 기대를 걸만한 사람 man of great expectations"으로 지목될 때 사람들은 이를 그가 세상에서 성공하리라는 예견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런던의 가식적 화려함을 포기하고 남루한 어린 시절의 공동체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그가 진정 그의 인생에 각인되었던 예언에 따라 살았음을 깨닫게 된다. 런던 상류사회의 공허한 흥분을 떠날 용기를 낸 후에야 비로소 그는 “큰 기대를 걸 만한 사람” 되기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는 여기서 일종의 헤겔의 반성과정(reflexivity)에 대해 논하고 있다. 주인공이 시련을 겪으면서 그의 성품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의 성품을 평가하는 윤리적 기준 역시 변한다. ... 이것이 “부정의 부정”이 의미하는 바다.: 그것은 실패를 진정한 성공으로 바꾸는 관점의 전환이다..( PV, p60~1) 」

  핍은 결과적으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지 못했다. 그러나 유산상속인이 되는 것에 실패함을 통해서 문자 그대로의 man of great expectations이 되는 것에 성공했다. great expectations을 통상적인 어법에 따라 막대한 유산으로 보았을 때 핍은 그것에 실패했지만, ‘커다란 기대’ 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핍이 런던의 화려함 대신 남루하지만 진정한 공동체를 선택한 행위야말로 말 그대로 큰 기대를 걸 만한 사람임을 증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핍이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은 없다. 부가 곧 성공임을 확신하는 고향 마을의 속물들에게 핍은 그저 유산 상속에 실패하고 런던에서 쫓겨난 가난뱅이일 뿐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핍은 결코 man of great expectations일 수가 없다. 반면 핍을 친아들처럼 키워준 조에게는 빈털터리 핍의 낙향이야말로 조의 기대, great expectations에 부응하는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성공이다. 소설을 읽는 전지적 시점에서는 핍은 성공했음과 동시에 실패했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핍은 성공했거나 실패했을 따름이다. 핍이 ‘막대한 유산’과 ‘커다란 기대’를 동시에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누구도 신과 같이 전지적 시점으로 살지 못한다.

  여기서 핍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것은 전적으로 관점의 전환이다. 핍은 돈 한 푼 없이 고향마을로 돌아왔다. 이것은 핍이 막대한 유산을 받을 것이라는 예견에 대한 ‘부정’이다. 헤겔의 ‘부정의 부정’은, 우여곡절을 거쳐, 드라마라면 보통 유산에 대한 거절의 행위가 오히려 행운의 계기가 된다는 식으로 진행될 텐데, 핍이 원래의 유산을 물려받는 것에 성공한다는, 행복한 ‘정-반-합’이 아니다. ‘부정의 부정’에서 실제로 핍에게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핍은 여전히 빈털터리다. 바뀌는 것은 유산 상속의 실패라는 ‘부정’을 제대로 된 인간의 증거로 보는, 인간성의 성공으로 보는 관점의 전환이다. 이것이 지젝이 말하는 ‘부정의 부정’이며, 시차적 관점으로의 전환이다. 이렇게 보면 시차적 관점 역시 별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세상 일 마음먹기 달렸다는 지혜는 중용만큼이나 오래된 교훈일 것이다. 그러나 시차적 관점은 체념이나 달관 따위 현실로부터의 거리두기는 분명코 아니다. 현실의 변혁을 위해 관점을 바꾸는 것이지, 현실에서 물러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관점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진중권은 “촛불은 왼쪽에서도 오른쪽에서도 깜박인다.”고 했다. 지난 촛불집회 때, 전통 좌파와 촛불대중의 갈등을 두고, 진중권식의 시차적 관점을 적용하여 한 말이다. 전통좌파의 관점에서 촛불은 오른쪽에 있다. 촛불(대중)의 관점에서 오른쪽에 있는 것은 오히려 전통좌파이다. 촛불이 왼쪽에서도 깜박이고 동시에 오른쪽에서도 깜박인다는 그의 표현은 여기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왼쪽에서 깜박이는 촛불을 보는 것은 촛불(대중) 자신이고, 오른쪽에서 깜박이는 촛불을 보는 것은 전통좌파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왼쪽과 오른쪽에서 동시에 깜박이는 촛불을 보는 것은 누구인가? 신이 아니라면, 방관자일 뿐이다. 촛불집회를 아무 생각 없이 무심히 바라볼 수 있는 방관자, 다시 말해 촛불집회라는 세계 밖에 있는 제3의 시점만이 차지할 수 있는 관점이다. 그런데 이런 개별적 사례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철학적 사유 속에는 불행히도 세계 밖이라는 것은 없다. 우리는 세계-내-존재 이다. 상대의 입장을 배려하면서도 실천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아름다운 시점은 없다. 물론 좌우의 촛불을 모두 볼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처음 내가 자유주의적 촛불대중이었다고 가정하자. 내 눈에 촛불은 전통좌파 보다 훨씬 왼쪽에 있다. 왼쪽에서 깜박이는 촛불. 그런데 집회에 참가하다가 진보신당에 가입하게 되었고 열심히 공부하다보니 어느 순간 전통좌파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다시 바라본 촛불, 그것은 아마도 분명히 오른쪽에서 깜박일 것이다. 이것의 의미는 내가 왼쪽의 촛불을 본 적이 있다고 해서, 이제 왼쪽과 오른쪽의 촛불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다. 전통좌파가 된 나는 더 이상 왼쪽의 촛불을 볼 수 없다. 촛불 자체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것은 이제 분명히 오른쪽에서 깜박이고 있다.

  그렇다면 타협과 화해는 불가능한 것일까? 사실 우리가 모든 일에서 자신의 관점만 주장하며 살 수는 없다. 대화를 통해 상대를 이해하게도 되고, 하나씩 양보하며 주고받기도 하고 대충 어울려 산다. 그렇지만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진중권이 해일과 조개의 비유를 통해 그 적대의 심각성을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 그 유명한 사례가 최보은일 텐데, 운동권 출신의 페미니스트인 그녀는 오래 전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 진보일 수 있다”고 말해 진보세력을 경악케 했다. 최보은은 진보와 페미니즘을 통합한 듯 보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근본적인 적대를 드러냈다. 지젝은 이 적대를 불가피하다고 본다. 물론 어떤 적대가 가장 보편적인 적대인지 가려줄 객관적 기준은 없다. 관점에 따라 자신의 적대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정통좌파에게 그것은 물론 계급 적대이다. 페미니스트에게는 성적 적대이고, 생태주의자에게는 인공과 자연의 적대이다. 우리는 자신의 적대가 가장 보편적임을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보편은 불변의 진리는 아니다. 그것은 만들어진 보편, 구멍 뚫린 진리이다. 진리는 구성된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이 보편적 진리임을 믿어야 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신학적 차원 없이 혁명은 승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바꾸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것에 대한 비합리적 열정, 신학적인 믿음을 가져야 한다. 시차적 관점으로의 이동은 기존의 관점으로 구성된 세계를 완전히 붕괴시키는 ‘신념의 도약’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왼쪽에서 깜박이던 촛불은 신념의 도약에 의해서만 오른쪽에 자리할 수 있다.

 

 

  이 글은 전적으로 내가 이해한 『시차적 관점』의 관점에서 진중권의 ‘시차적 관점’을 바라본 것이다. 이것은 함께 『시차적 관점』을 읽었던 세미나 지인들의 관점과도 일치하지 않을 것이며, 더욱이 지젝 자신의 관점에는 얼마나 근접해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힘껏 생각을 뻗쳐 보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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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란 무엇인가 -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 난장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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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6일, 카페소모임 발제입니다

 

“내 롤 모델은 차인표야.” 등 뒤에서 날아든 목소리. 연기가 전공인 듯한 청년 둘의 대화는 착하게 사는 것, 일상에 감사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 등으로 이어졌다. 카페 귀퉁이에 앉아 책을 읽노라면 별의별 말들이 다 들리지만, 유독 귀를 잡아당기는 이야기가 있다. 휴일 한낮에 카페에 마주 앉아 인생을 논하는 청년들도 드물지만, 어깨만 스쳐도 눈을 부라릴 것 같은 혈기왕성한 청년들치고는 참으로 뜻밖의 내용이라, 나는 은근히 귀를 쫑긋거리고 말았다. “내 목표는 착하게 사는 거야.” “형, 저는 조그만 일에도 감사하며 살고 싶어요.” 착하게, 감사하며, 나누며, 행복하게 ....

  나도 보았다. 차인표의 힐링캠프를. 매사에 비판적인 우리 오빠는 차인표가 보수 정치인들과 같이 논다고 싫어했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어떤가, 보수 아니라 진보를 통 털어도 저렇게 삶 자체가 사랑과 봉사와 희생인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감히 차인표를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힐링캠프에 감동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지, 방송 후 열흘 만에 그가 활동하고 있는 ‘컴패션’이라는 단체에 6,500명의 후원자가 몰려들었다고 한다. 사랑이 사랑을, 감동이 감동을 낳는 참으로 아름다운 ‘차인표 효과’ 다.

  차인표의 힐링캠프가 그렇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것은 그가 참으로 절절한 마음과 진심어린 사랑으로 봉사활동을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달에 4만5천원이면 파리 떼를 쫒을 힘조차 없어 죽어가는 쓰레기 더미 속의 생명 하나를 희망과 미래가 있는 빛 속으로 데리고 나와 교사로, 의사로, 과학자로 길러낼 수가 있는 것이다. 내 한 달 커피 값이면 두 사람의 삶을 바꿔 놓을 수 있다. 그렇게 사는 빈곤 아동들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니고, 단 돈 몇 만원이면 새 삶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니지만, 새삼 차인표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았던 것은 그의 눈빛이, 그의 몸짓이 열정과 사랑으로 아름답게 타올랐기 때문이다. 착한 청년들의 아름다운 롤모델...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 (Violence)』는 물건을 훔쳐낸다고 의심받는 어느 일꾼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매일 저녁, 일꾼이 공장을 나설 때면 그가 밀고 가는 손수레는 샅샅이 검사를 받았다. 경비원들은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손수레는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결국 진상이 밝혀졌다. 일꾼이 훔친 것은 다름 아닌 손수레 그 자체였던 것이다. p23」

  ‘폭력이란 무엇인가?’ 의 답은 사실 이 간단한 이야기 안에 있다. 사람들이 ‘폭력’이라는 단어로 떠올리는 것은 구타, 범죄, 테러 같이 눈에 바로 보이는 것들이지만, 사실 근본적 폭력은 우리가 눈 뜨고도 보지 못하는 수레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수레 안의 물건들만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지만, 문제는 수레 안의 내용물이 아니라 오히려 수레라는 형식, 그것 자체다.

 

 

  「소로스는 무자비하고 극단적인 금융투기를 통해 착취를 일삼는 동시에 고삐 풀린 시장 경제가 불러오는 파국적인 사회적 결과에 대한 인도주의적 관심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의 일과만 보더라도 스스로의 행동을 스스로 상쇄시키는 대위법이 두드러진다. 그는 업무 시간의 반은 금융 투기에, 나머지 반은 탈공산주의 국가에 문화적·민주주의적 활동 지원금을 제공하거나 저서를 집필하는 등, 인도주의적 활동에 할애한다. 궁극적으로 이는 스스로의 투기가 불러올 부작용들과 싸우려는 활동인 셈이다. 빌 게이츠의 두 얼굴은 소로스의 두 얼굴과 꼭 닮았다. 지독한 사업가로서의 그는 실질적 독점을 노리며 경쟁사들을 파산시키거나 사들이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치사한 거래 수법을 동원한다. 반면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규모의 자선가이기도 한 그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지 못하고 이질로 죽어간다면 컴퓨터를 가진다는 게 무슨 소용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의 윤리로는, 자선을 베풀면 무자비한 이윤 추구 행위도 상쇄된다. 자선은 경제적 착취라는 얼굴을 감추고 있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다. 선진국들은 원조와 차관 등을 통해 미개발 국가들을 ‘도움’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후진국의 빈곤에 연루돼 있으며, 공동책임이 있다는 핵심적 쟁점을 회피한다. 이는 초자아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거대한 기만이다. p51~52」

  제3 세계는 왜 가난할까? 제국의 식민지 개척사와 신자유주의 금융 침탈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원인을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금, 석유, 다이아몬드 등 풍요로운 자원을 가진 나라일수록 더욱 철저히 파괴당했다. 그 나라 아이들이 굶주림 속에 죽어가는 것은 단지 통치자의 독재와 종족 간의 분쟁, 인종적 열등함 때문이 아니다. 그 참혹한 현실의 이면에는 선진국의 총칼이나 자본의 욕망이 있다. 그 아이들로부터 집과 음식을 빼앗은 것은 그들에게 바로 그 집과 음식이 필요하다고 호소하는 선진국들과 인도주의적 자본가들이다. 그 아이들의 또 다른 비극은 약탈자에 감사하며 그 은혜를 뼈 속 깊이 새긴다는 것이다.

 

 

  「가장 순수한 사회적-상징적 폭력은 그 대립물,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이나 들이마시는 공기와 같이 무의식적인 것으로 스스로를 드러내 보인다. 이런 이유에서, 폭력에 겁을 집어먹기도 하고, 폭력을 걱정하기도 하며, 폭력에 맞서 싸우기도 하는 세련된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와 분노를 폭발시키는 맹목적 근본주의자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라 할 수 있다. 주관적 폭력과 싸우는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구조적 폭력의 행위자가 되는데, 이 구조적 폭력이야말로 주관적 폭력을 낳는 원인이다. 관용의 정신으로 에이즈 치료나 교육에 수백만 달러를 내놓는 자선가는 그 자신이 금융 투기로 수많은 이의 삶을 파괴한 장본인이며, 그리하여 자신이 타파하고자 하는 불관용 그 자체의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

  지젝은 폭력을 주관적 폭력, 구조적 폭력, 상징적 폭력으로 나눈다. 주관적 폭력은 우리가 보통 폭력이라고 부르는 구타, 범죄, 테러 등 일상적으로 보이는 폭력이다. 반면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은 물리학의 ‘암흑 물질’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폭력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고려해야 할 객관적 폭력이다.

  「주관적 폭력은 세 가지 폭력 중 가장 가시적인 일부에 불과하다. 이 세 가지 폭력 중 나머지 둘은 객관적 폭력인데, 그 첫 번째는 하이데거가 ‘존재의 집’이라고 칭한 언어를 통해 구현되는 ‘상징적’ 폭력이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이 폭력은 습관적인 언어 사용을 통해 재생산되는 지배관계나 선동적인 언어 속에서만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례들은 충분히 연구되었다.) 보다 근본적인 형태로 폭력이 언어 자체에 들어 있으며, 언어가 의미 세계를 대상에 부과할 때 따라 붙는다. 두 번째로, 내가 ‘구조적’ 폭력이라 부르고자 하는 폭력이 있다. 그것은 어떤 경우 우리의 경제체계와 정치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나타나는 파국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문제는 주관적 폭력과 객관적 폭력을 동일 선상에서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관적 폭력은 비폭력을 배경으로 하여 경험된다. 주관적 폭력은 ‘정상적’이고 평온한 상태를 혼란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객관적 폭력은 바로 이 ‘정상적인’ 상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객관적인 폭력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무엇을 주관적 폭력이라고 지각할 때 바로 그 기준이 돼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조적 폭력은 너무도 뚜렷하게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의 정반대이며, 물리학에서 말하는 악명 높은 ‘암흑물질’과도 같은 것이다. 구조적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폭력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고려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폭력은 단지 주관적 폭력의 ‘비이성적’ 폭발로만 보일 것이다. p24」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지젝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객관적 폭력이다. 우리는 이런 폭력을 배제하고 살수 없다. 말 그 자체가 이미 폭력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 자본주의, 사회주의, 국가, 법, 심지어는 민주주의까지, 이 모든 체계들은 이미 구성적으로 폭력적이다. 구조적 폭력은 그 세계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일상적인 경우에는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자연화 된다. 반대로 이것이 정상성의 기준이 아니라 폭력으로 인지될 때, 그 세계는 이미 무언가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FTA가 우리나라를 침탈하는 폭력으로 인지되는 한, 신자유주의 시장 체계는 더 이상 매끄럽게 작동할 수 없다. FTA에 대한 찬반의 팽팽한 대립은 우리가 어떤 이행기에 있다는 지표이기도 하다. 새로운 체계로의 이행에는 반드시 폭력이 수반된다. 알을 깨고 나오는 새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폭력은 대개 현존재의 타협을 통한 일치와 서로 협력하여 만들어준 기준에 비추어 지각된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모든 폭력은 불온 요소이자 위반으로 간주된다.... 폭력적인 자란, 침묵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창의적인 자, 사유된 적 없는 영역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자, 그때까지 결코 일어난 적 없던 일을 일어나게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나게 하는 자이다. 이 폭력적인 자는 언제나 무모하고 위험한 시도를 한다...따라서 폭력을 행하는 이에게는 일말의 친절함도, 회유의 여지도 없으며, 성공인 명성, 혹은 그런 것들에 대한 보장으로도 그를 달래거나 누그러뜨릴 수 없다. p108」

  하이데거의 말이다. 그러므로 폭력이란 그 자체로 선악의 개념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알이 새에게는 구조적 폭력인 것처럼, 알을 깨는 새의 창조적 행위가 알에게는 주관적 폭력이다. 관점과 입장에 따라 폭력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뿐이다. 새인가 알인가. 우리가 알인 동시에 새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구조적 폭력과 주관적 폭력은 동시에 인식될 수 없다. 시차적 관점에 따라 폭력으로 보이든가 또는 정상성으로 보일 수 있을 따름이다.

 

 

 

  지젝의 책은 이 시대에 전 지구적 양상으로 발생되고 있는 다양한 폭력들에 대한 성찰이다. 그런데 이런 폭력의 양태를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삐딱해 질” 필요가 있다.   홀바인의 "대사들"이란 그림이다. 해골이 보이시는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비딱하게 젖히고 바닥을 째려보시라.

  구조적 폭력, 상징적 폭력 또한 이렇게 ‘삐딱하게 보기’를 통해서만 보이는 폭력이다. 지젝은 행동하기 전에 먼저 ‘공부하라! 공부하라! 공부하라!’ 고 한다.

 「궁극적으로는 거대한 체계가 더 부드럽게 작동할 수 있도록 해줄 뿐인 국부적 행위에 참여하기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더 낫다. 오늘날 진짜 위협적인 것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유사능동성이다.... 진짜 어려운 일은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고 철회하는 것이다. p296」

 

  “인도주의적인 봉사를 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 라는 기막힌 주장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아직 이런 바틀비적 태도에 대해 혼란스럽다. 그렇지만 과연 이 시대에 젊은이들이 차인표를 롤 모델로 사랑과 봉사와 감사의 삶을 목표하는 것이 바람직하기만 한 것일까....

 

  우리는 먼저 무엇이 도둑맞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수레 안에는 도둑맞은 물건이 없다. 인도주의적 자본가들은 오히려 어마어마한 돈과 식량을 제3세계 빈민들에게 기부한다. 그런데도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부자들은 더욱 부유해진다. 비밀은 수레 자체에 있다. 그들이 기부하는 식량과 의복, 학교와 미래까지도 모두, 도둑맞은 수레가 만들어 낸 것이다. 그것은 원래 제3세계의 것, 빈민들의 것이었다. 빈민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수레를 되찾는 것이다. 그리고  수레를 되찾는 투쟁에는 아마도 사랑과 감사 보다는 지식과 분노가 더 적절한 무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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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에스프레소 - 위대한 철학자 34인의 일상과 사상
빌헬름 바이셰델 지음, 안인희 옮김 / 프라하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2102년 2월 13일 카페소모임 발제입니다.

 

사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하이데거의 이름을 아주 들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슬라보예 지젝은 헤겔주의자, 라캉주의 좌파, 레닌주의자 쯤으로 불릴 수 있겠지만, 그의 철학적 연구는 하이데거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의 3장은 사실 하이데거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하이데거가 생소했다. 그 책에는 하이데거에 관한 ABC는 없다. 그 장의 제목은 “급진적 지식인들, 혹은 왜 하이데거는 1933년 (비록 잘못된 방향일지라도) 올바른 발걸음을 내디딘 것일까?”인데, 하이데거의 정치적 참여와 그 한계가 하이데거의 사상과 어떻게 공명하는지를 논증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 보다 더 오래 전에 읽었던 <까다로운 주체> 1장 역시 온전히 하이데거론이라 할 수 있는데, 제목은 “초월적 상상력의 곤궁, 혹은 칸트 독자로서의 마르틴 하이데거”이다. 말하자면 초급 수준이 아니라 고급 중에서도 특 고급 수준이라, 사실 읽었다고 할 수도 없다. 이 어려운 내용을 간신이나마 읽어보기 위해 내가 개발한 꼼수는 ‘존재적’과 ‘존재론적’이라는 용어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반복해서 나오는 이 용어들의 의미는 물론 몰랐다. 어쨌거나 ‘존재적’이 나오면 부정적, ‘존재론적’이 나오면 긍정적이라고 딱 구분을 해 놓고 읽었다. 우리 편 저쪽 편을 갈라놓은 것인데, 왜냐하면 워낙 문장이 복잡해서 저자가 옹호하는 것인지, 비판하는 것인지도 잘 구분을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턱도 없는 방법이었지만... 그렇게 접했던 하이데거였다. 그래서 <철학의 에스프레소>에서 하이데거를 읽었을 때, 진짜 모두 처음 보는 내용이었다. 하다못해 헤겔하면 변증법, 칸트하면 정언명령, 키르케고르하면 죽음에 이르는 병 정도는 들어 보았는데, 하이데거는 아무것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존재적’과 ‘존재론적’이란 용어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니 사실 거짓말을 하고 싶어 한 것은 아니다. 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거짓말일 것이다. 어쨌든 하이데거 발제를 하면서 지젝이 떠올랐고, 다시 그 책들을 찾아보았다. 여전히 ‘존재적’과 ‘존재론적’ 은 설명하기 힘들뿐이고!!이고, 더욱이 지젝이 옹호하려고 하는 하이데거의 이론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비판하는 하이데거의 오류에 관해 요약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이왕 다시 읽은 김에 흥미를 끌 만한 내용을 몇 가지 추려서 소개해 보려고 한다. 그렇지만 아래 인용문들이 이 책들의 주요 내용은 절대 아니다.

 

 

  하이데거와 아렌트를 둘러 싼 스캔들은 단순히 유부남 스승과 여 제자 사이의 불행한 연애 사건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죽을 때까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비본연적’인 것으로 거부했다. 반면 아렌트는 역설적이게도 ‘최초의 자유주의적 하이데거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1.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184~ 185>

  하이데거와 아렌트 사이의 난해한 관계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자유주의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하이데거의 집요한 비난으로, 그는 죽을 때까지 자유민주주의를 인격들 간의 특이한 결합관계가 아닌 것으로, ‘비본연적인 것’으로 보고 거부했다. 아렌트는 여성 대 남성의 대립 축과 ‘세계적’ 유대인 대 ‘지방적’ 독일인이라는 이중적 대립 축에서 하이데거와 대립될 뿐 아니라, (이 점이 훨씬 더 중요한데) 최초의 자유주의적 하이데거주의자로서, 하이데거의 통찰을 자유-민주주의적 세계에 재결합하고자 시도한 최초의 사람이다. 물론 세밀한 독해를 통해서 아렌트가 하이데거의 통찰에 기본적으로 충실하면서도 자유주의를 지지할 수 있게 한 것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 그녀의 반-부르주아적 입장, 경쟁적이고 탐욕적인 부르주아 사회의 표현으로서, 정치를 ‘이해-집단’의 정치로 간주하는 입장에 대한 비판적 경멸 말이다. 그녀는 부르주아 사회의 실용적 공리주의와 영웅주의의 결핍에 대한 불만의 측면에서 대가 보수주의자들과 입장을 공유한다.

 

2.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186~7>

  어떻게 아렌트는 부르주아 문화 속에서 그녀가 존중하는 것을 분리해 낼 수 있는가? 그것의 구성주의, 근본적 인권의 확신, 법 이전의 평등성, 정치적인 것으로부터 면제된 인간 삶의 사적 지대에 대한 고집, 종교적 관용 등을, 그녀가 동의하지 않는 것, 즉 그것의 세속주의, 자기-이익의 보편성에 대한 냉소주의적 확신, 인간의 가치에 대한 화폐 가치의 도착된 영향, 탈정치화하는 경향, 전통과 장소 감각에 대한 위협으로부터 분리해 낼 수 있는가? 달리 말해서 이것들은 동일한 현상의 두 측면이 아닌가? 그래서 아렌트가 어떠한 공리주의적인 이해관계의 계산에도 오염되지 않을 정치적인 실천의 윤곽을 진정한 ‘세계의 돌봄’으로 주장했을 때 그녀가 환기할 수 있는 것들은 모든 시민들이 공회당에서 회합했던 초기 미국의 전통에서 독일 혁명에서의 혁명적 평의회까지 혁명적 상황에서 자기-조직화의 형식들인 것은 너무 당연하다. 이러한 사례를 환기할 때 그녀가 정치적으로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유토피아적’이라는 것, 그것들은 그녀가 여전히 신뢰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질서와 결코 화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찌즘에 손가락을 데이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하이데거는 여전히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고 한다.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어떤 정치 체계가 현대의 기술에 가장 적합하냐는 질문을 받고, ‘나는 민주주의가 그 대안이라고 확신하지 않는다.’고 했을 뿐 아니라, 니체 강의에서도 ‘유럽은 언제나 민주주의에 집착하고 있으며 이것이 유럽의 치명적인 죽음을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을 보지 않으려 한다.’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이 가능할 뿐 아니라 실제로 유명한 사상가들이 오랜 역사 동안 꾸준히 민주주의에 대한 그들의 의혹과 경고를 표명해 왔다는 사실을 나는 최근에야 알았다. 놀라웠다. 민주주의는 결코 성역이 아니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인권에 대한 의식이 발달하지 못했던 과거라는 시대적 한계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 개념 자체가 내포한 위험성과 모호함 때문이라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단적으로 말해 민주주의란 그 텅 빈 형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현실화 될 때는 반드시 그 대립물에 의해 채워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난번 세미나에서 이영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유·평등·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급진적 민주주의는 이후 자본주의 국가를 통치하는 법체계의 토대가 되었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을 대변할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날은 ‘자유’ 라는 개념으로 토의되었고, 나는 조금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속임수 혹은 유토피아에 불과하니 폐기해버려야 할 가치라고 할 수 있을까? 아직 머리가 어지럽지만, 최근에 읽은 책들에는 다양한 관점이 드러나 있다.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왜 민주주의는 증오의 대상인가? > <대중들의 공포>

 

  여하튼 하이데거는 나찌즘을 통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항할 새로운 정치 체제의 가능성을 본 것이다. 하이데거가 어떻게 그런 무시무시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나에 관해서 여기서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존재와 시간>에서 보여주는 그의 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언뜻 생각하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실존적 결단이 세인들의 관습과 통념에서 벗어난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이 어떻게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거부에 연결되는 것일까?

 

3. < 까다로운 주체 p32~4>

  이런 폭력적 부과 행위에 대한 하이데거의 명칭인 기획투사는, 주체가 내던져져 있으며 또한 방향을 잡지 못하고 길을 읽은 상황을 ‘뜻이 통하게’ 해주는 근본적 환상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하이데거가 유한하고 우연적인 상황 속으로의 내던져짐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그러고 나서는 자신의 길을 본래적으로 선택하는 행위라는 기획투사 개념을 사용하는데, 그것이 개별적 층위와 집단적 층위라는 그 연관성이 숙고되지 않은 두 층위에 걸쳐 있다는 것이다. 개별적 층위에서, ‘언제나 오로지 나만의 것’인 죽음과의 본래적 조우는 나로 하여금 나의 미래를 본래적 선택 행위 속에서 투사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공동체 역시 자신의 운명을 선택해야하는 우연적 상황 속에 내던져져 있는 것으로 규정된다. 하이데거는 반복이라는 개념을 통해 개별적 층위에서 사회적 층위로 이행한다. ‘존재해온 실존가능성 -현존재가 자신의 영웅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의 본래적인 반복은 실존론적으로 앞질러 달려가 보는 결단성에 근거하고 있다.’ .. 앞질러 달려가 보는 결단의 행위에서 본래적 존재 양태를 획득하고 ‘자신의 운명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개별적 현존재의 ‘내던져진 기획 투사’로부터 과거의 가능성의 반복으로서의 앞질러 달려가 보는 결단의 집단적 행위 속에서 자신의 역사적 운명을 역시 본래적으로 떠맡는 민족이라는 인간 공동체로의 이와 같은 이행은 현상론적으로 적합한 방식으로 근거지어지지 않았다. 집단적(사회적) 거기-있음의 매개는 온당하게 배치되지 않았다. 즉 하이데거가 놓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다만 헤겔이 ‘객관적 정신’이라고 칭했던 그것, 상징적 대타자, 상징적 위임들의 ‘객관화된’ 영역 등등인데, 이는 아직 ‘비인칭적’ das Man이지만 또한 더 이상 전통적 삶의 방식으로의 전근대적 몰입도 아니다. 개별적 층위와 집단적 층위의 이런 위법적 단락은 하이데거의 ‘파시스트적 유혹’의 뿌리에 있으며, 바로 이 점에서 <존재와 시간>의 암묵적 정치화는 가장 강력하다. 일상적 관심사를 따르느라 분주한 근대적이고 익명적이고 분산된 ‘그들’의 사회와 자신의 운명을 본래적으로 떠맡는 민족 간의 대립은 광란적 거짓 활동의 퇴폐적 근대적 ‘미국화된’ 문명과 그것에 대한 보수적인 본래적 반응간의 대립과 공명하지 않는가?

 

  우선 기획투사라는 말이 어렵다. 이것은 세계-내-존재인 인간이 자신이 내던져진 이 세계가 자신의 선택항들을 제한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 조건 속에서 그에게 허용된 가능성을 검토하고, 그 중에 제일 적절한 것을 선택하여 그것을 자신의 기획으로  떠맡는다는 것으로 보통 이해된다고 한다. 이것이 하이데거의 시간성 개념에 독특한 면이라고 하는데, 지젝은 여기서 조금 다른 곳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과거, 미래, 현재 중 우선권을 가지는 것은 미래라는 것인데, 조금 뒤에 인용할 반복이라는 개념과 함께 설명될 수 있다.

  여하튼 실존적 결단, ‘앞질러 가보는’ 결단은 개인적인 행위로 설명되는데, 하이데거는 별 다른 매개 없이 이 개인적 결단을 집단적 선택으로 바꾸어 놓는다. 개인의 의지가 집단의 의지가 되려면 상식적으로도 선거라든가 여론이라든가 하는 위임의 절차가 필요하다. 이 위임 과정 없이, 개별적 결단이 곧바로 민족적 운명의 떠맡음으로 번역된 것이 어떻게 나찌즘에 대한 찬양과 곧바로 연결되는지 분명하게 이해되는 건 아니지만 , 하이데거가 말하는 실존이라는 것이 개인주의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4. <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215~6>

  오직 반복만이 순수한 차이를 발생시킨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의 유명한 분석에서 현존재의 시간성이 갖는 탈-존 구조를 미래로부터 과거를 통해 현재로 진행되는 순환운동으로 기술했다. 이것을 미래에서(나에게, 나의 기획에 개방된 가능성들에) 출발한 내가 과거로 되돌아가(내가 던져진 역사적 상황의 결들을 분석하고 그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여) 거기로부터 나의 기투를 실현하기 위해 현재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이데거가 미래 자체를 ‘존재해 온 것 having-been'으로 규정할 때, 혹은 보다 정확히 ‘존재해온 것으로 존재하는 is as having-been’ 어떤 것으로 규정할 때 그는 미래 자체를 과거 속에 자리매김한다. 물론 이것은 모든 미래적 가능성이 이미 과거 속에 포함되어 있어서 우리는 오직 과거로부터 상속된 구조로 현재화된 것만을 반복하고 실현할 수 있을 뿐인 닫힌 세계에 살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과거 자체의 ‘개방성’이라는 보다 급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과거 자체는 단순히 ‘거기 있었던 것’이 아니다. 과거는 비현실화된 잠재성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진정한 미래란 바로 이 과거의 반복/부활이다. 이 반복은 이미 있었던 것으로서의 과거를 반복하는 게 아니라 과거의 현실 속에서 실현에 실패하고, 배신당하고, 억눌려진 그런 요소들의 반복이다.

 

5. <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213~4>

  키르케고르가 이미 지적한 것처럼 반복은 ‘역전된 기억’이자 앞으로 향한 운동이며 새로움의 창조이지 낡은 것의 재생산이 아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말은 반복에 대한 가장 강력한 대조 어법이다. 그래서 반복은 단지 새로운 것의 출현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것은 오직 반복을 통해서만 출현한다. 이 역설의 핵심은 물론 들뢰즈가 잠재적인 것(Spirit)과 현실적인 것(Letter)의 차이로 지칭한 것이다. 칸트와 같은 위대한 철학자의 경우를 들어 보자. 칸트를 반복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칸트의 자구적 의미에 집중하다가 신-칸트주의의 정신 속에서 그의 체계를 정교화하고 바꾸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칸트가 자신의 체계를 현실화하면서 배반했던 창조적 충동을 다시 획득하는 것이다. (즉 이미 ‘칸트 속에 있는 칸트 이상의 것’, 그 명시적 체계 이상의 것, 그 체계의 잉여적 중핵과 접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를 배반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진정한 배반은 최고의 충실성 속에서 일어나는 윤리-이론적 행위이다. 즉 우리는 칸트적 사유의 ‘정신’에 충실하기(그것을 반복하기) 위해서 칸트의 문자를 배반해야 한다. 칸트의 문자에 충실한 것은 진실로 그 사유의 핵심, 그 근저의 창조적 충동을 배반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로부터 끄집어내야 하는 결론은 어떤 작가(그 사유의 현실적 문자)를 배신할 때 진정으로 그에게 충실할 수 있다는 것만이 아니다. 근본적인 차원의 진실은 거꾸로다. 어떤 작가를 반복함으로써, 그 사유의 핵심에 충실함으로써 우리는 진실로 그를 배반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작가를 반복하지 않고 단지 그를 비판하기만 한다면 그래서 에둘러 다른 곳으로 가고자 한다면 이것은 자신도 모르는 새 그의 지평과 개념 장 속에 남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미래가 과거를 구원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참으로 아리송했다. 과거는 이미 실행되어 굳어져 버린 사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 말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승자는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다. 과거의 패배로 묻혀 버린 역사적 사실들을 다시 발굴하여 새롭게 배치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되는 듯이 보이는 것은 그 순서이다. 승자의 관점에 의해 과거를 재해석 한다는 것과 미래 자체를 과거 속에 자리 매김한다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전자의 관점에서는 사실 반복이라는 개념이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후자의 관점에서는 반복이 혹은 반복만이 미래를 창출한다.

  어떤 것이 옳다고 생각하든 간에, 어쨌든 하이데거, 들뢰즈, 지젝으로 이어지는 ‘반복’의 개념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철학책을 읽으면 끊임없이 과거의 철학자들이 등장한다. 저자의 취향(?)에 따라 때로는 플라톤이 때로는 칸트가 또 때로는 스피노자, 니체, 헤겔이 되풀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지난 시대의 죽은 철학자들을 끊임없이 불러대는 이유가 아마 이것이 아닌가 한다. 위대한 사상가의 문자 letter가 아니라 그들이 문자화하지 못했던 그 정신spirit를 반복함으로써 그들을 뛰어 넘기 위해, 진정으로 그들을 배반하기 위해서. 단순히 그들의 문자를 반복하기 위해서라면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미 그 문자들은 충분히 오랫동안 존재해 왔던 것이니 말이다. 철학책을 읽는다는 것 역시 그들을 반복하는 것이다. 시작이야 어짜피 문자를 반복하는 것만도 어렵고 힘든 일임이 분명하지만, 언젠가는 그들의 문자를 배반하며 그들의 정신을 반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 소수의 사상가에게만 허용된 축복일지 모르지만, 꿈은 야무지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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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에스프레소 - 위대한 철학자 34인의 일상과 사상
빌헬름 바이셰델 지음, 안인희 옮김 / 프라하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2012년 2월 6일 카페 소모임 발제입니다.

 

 

도팽님 말씀처럼 <철학의 에스프레소>에 나오는 34명의 철학자 중 유명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2,500년도 더 되는 철학의 역사에서 추리고 추려낸 34명을 두고, “모모씨는 듣보잡인걸요.” 운운은 자신의 무지에 대한 당찬 고백일 따름이겠지만, 어쩌겠는가!, 이름도 못 들어본 사람에 이름만 겨우 들어본 듯도 한 사람까지, 줄잡아도 10여명은 생판 모른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 중에 한 사람이 하이데거다. 똥 싼 주제에 매화타령이라고, <존재와 시간>이라는 대표작은 독일 사람들도 독일어 번역본이 언제 나오느냐고 물을 정도라고 하니, 당연히 넘겨 볼 엄두도 내지 않았지만, “여기 있음”인지 “현존재”인지 당체 알아먹을 수가 없으니, 발제라고 몇 자 끄적이려면 어린이 도서관이라도 어슬렁거릴 수밖에 없다. 주니어 김영사에서 나온 만화 <존재와 시간>을 뽑아들고, 위층으로 올라가 도 찾아 놓았다. How to read 시리즈는 예전에 라캉편을 읽었는데, 비교적 쉬웠기 때문에 용기를 냈다. 이 시리즈는 영국 그란타 북스라는 곳에서 기획한, 세기의 사상들에 대한 일종의 안내서이다. 저자들 역시 세계의 석학이라고 하는데, 세기의 사상가도 이름이 가물가물한데 세계의 석학이라고 해봐야 당연히 처음 들어보지만, 그렇다니까 그러려니 믿는다.

  다행히도 두 책 모두 쉽게 읽혔다. 물론 그래서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일반인을 혹은 어린이를 상대로 정교한 사상을 쉽게 전달하자니, 10,000 피스 퍼즐을 100피스 퍼즐로 그려 놓은 것과 같을 것이라고 해야 할까, 뭐 까다로운 개념들을 무 자르듯 숭덩숭덩 잘라놓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지만 그거라도 읽으면 대강 윤곽이라도 잡힐까 싶어서 열심히 읽었다 ㅋ;;. 어쨌든 엿가락 늘이듯 구질구질 사연을 읊어대는 것은 ‘열(10)매’에 대한 트라우마는 아니고, 알아서들 읽어주시길 바라는 맘에서 다.

 

 

 

 

  하이데거의 문장은 이런 식이다. <존재와 시간> p78 이란다.

  「현존재Dasein는 그의 존재에서 이해하면서 이 존재와 스스로 관계하는 존재자다. 이것으로써 실존의 형식적인 개념이 제시되었다. 현존재는 실존한다. 게다가 현존재는 그때마다 나 자신의 존재자다. 실존하는 현존재에게는 각자성이 본래성과 비본래성의 가능성의 조건으로 속해있다....」

  의 저자께서는 영어로 제대로 번역할 수 없는 하이데거의 이런 낯선 용어들과 문장 때문에 영어권 독자들은 하이데거에 절망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그걸 다시 한글로 번역한 이 책을 읽고 있는 나는 뭔가 싶어 먼저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섣불리 그렇기 때문에 영어 독해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둥 하는 결론을 내리지는 마시기 바란다. 나는 결사반대다. 영어 안다고, 독어 안다고 이 책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유의 능력은 언어 능력과 반드시 일치한다고 볼 수 없다. 금상첨화기야 하겠지만 나는 비단 짜기도 힘이 부치는 사람이다. 헤일 수 없이 많을 영어학· 영문학하는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카이스트에서 모든 과목을 영어로 강의하는 바람에, 강의하는 선생님이나 듣는 학생 모두 정작 전공과목 자체는 뒷전이고 영어에 목을 매고 있다는 것인데, 영어만 하면 과학은 저절로 다 해결된다는 것인지, 정말로 상식 밖의 일이 백주대낮에 벌어지고 있다. 급기야는 멀쩡히 수학천재 소리를 듣던 학생이 견디다 못해서 제발 우리나라말로 강의를 해 주실 수 없냐고 탄원서를 뿌리기에 이르렀단다. 대학에서 하는 수학 강의는 하나도 알다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왜 세종대왕께서 ‘어린백성이 니르고저 홇배이셔도 마참내 제 뜨들 시러 펴디 못할노미 하니라’ 하셨는지 백번 공감이 된다. 멀쩡히 만들어 준 한글은 버리고 왜 남의 나라 말에 유아원 아기부터 머리 허옇게 쉰 아줌마까지 개고생을 해야 하는지 나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내 오랜 지인은 이 영어 광풍으로 일찌감치 대학 교수에의 꿈을 포기했다. 동양철학 전공인 지인이 대학에서 공자를 가르치려면 먼저 미국 유학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교수 자격을 위한 일종의 스펙일 뿐 아니라, 공자를 영어로 강의해야 하기 때문이라는데, 그 짓만은 죽어도 하기 싫단다.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들어 온 공자, 논어를 두고 confucius, the Analects of Confucius 따위를 찾아 외워야 하는 학생들은 도대체 學而時習之의 뜻이나 제대로 새길 틈이 있을까 싶다. ...... 다혈질은 아닌데, 갑자기 열이 ;; 여하튼 계속....

 

  하이데거는 그 만큼 어렵다는 것이 통념이라고 한다. 그런데 내가 깜짝 놀란 것은 저 두 권의 해설서를 통한 하이데거는 어이없게도 대단히 쉬웠다는 것이다. 칸트처럼 물자체가 있느니 없느니, 범주가 어쩌고저쩌고 뜬 구름 잡는 소리도 하지 않고, 헤겔처럼 절대정신이니, 정신은 뼈니 하는, 카이로스님 표현대로라면 정신 나간 그런 정신 어지러운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지금 내 삶을 대입해 보면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가 가는 현실적인 사고에서 출발하고 있다. 철학이 이렇게 단순해도 돼?, 하는 의문이 살짝 들 정도로 말이다. 물론 후기 하이데거에서는 그것이 다시 역전되어 무슨 말인지 요령부득인 개념으로 바뀌기는 하는데 일단 <시간과 존재>의 전기 하이데거는 비교적 명료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 ‘있음’의 철학자다. Sein이라는 독어는 영어로는 being, 우리말로는 존재라고 보통 번역되는데, <철학의 에스프레소>의 역자는 ‘존재’ 대신 ‘있음’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 이유는 p39~40에 걸친 *주에 상세히 나온다. 핵심만 말하자면 Sein이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영원히 그대로 있음’이라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란다. 그렇다 해도, 옛날부터 들어온 존재라는 말이 더 편하다. 있음은 왠지 어정쩡해서 귀에 착착 감기지가 않는다. 존재론을 있음론이라고 하면 영 이상하잖아 -.-;;

  어쨌든 하이데거에 대해 말해보려면 일단 이 존재 또는 현존재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현존재 Dasein’은 ‘Da, 거기에’와 ‘Sein, 존재’가 결합된 것으로 ‘거기에 있음’을 뜻한다. 그러면 거기는 어디? 거기는 ‘세계’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세계-내-존재’라고 한다. 당연한 소리다. 그럼 사람이 세계 안에 있지 밖에 있을까, 물론 하이데거의 의미는 조금 더 심오하다. 하나마나한 소리로 철학자 34명 안에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현존재는 세계-내-존재이기도 하고 또 ‘공동 존재’이기도 하다. 대략 그림이 그려진다. 현존재는 세계 내에서 다른 현존재와 공동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인간을 현존재로 보는 이유는 인간이 돌이나 나무와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데카르트 이후 근대 철학이 인간 정신(사유 res cogitans)과 사물(연장 res extensa)을 주체와 객체로 나누어 개발과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비난하면서 사물들 역시 ‘존재자’로 인간과 관계를 맺으며 세계를 구성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존재방식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 인간 고유의 존재 방식이 바로 ‘실존’이다. ‘실존’ 혹은 ‘실존주의’라고 하면 내게는 제일 먼저 까뮈나 사르트르가 떠오르지만, 실존주의는 야스퍼스와 하이데거뿐 아니라 그 이전의 파스칼, 하이데거, 니체를 통해 이어져 오는 전통이라고 한다.

  나는 대학 2학년 때에 어쩌다가 까뮈의 ‘시지프스의 신화’를 읽게 되었다. 지금도 가지고 있는 그 책의 시작은 이렇다. "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그 때부터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철학이 있었다. 밤늦도록 실험실에 갇혀서 쥐나 토끼와 씨름을 할 때도, 도서관에 처박혀 알쏭달쏭한 공식들에 넌더리를 낼 때도 시지프스가 굴려 올리는 바위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까뮈의 책들을 샅샅이 찾아 읽고, ‘부조리’, ‘자유’ 같은 말들에 취했다. 그리고는 물론 오랫동안 잊어 버렸다. 그래도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실존이라는 말만 들어도 괜히 설레기도하고 슬프기도 하다. 정작 실존주의가 뭔지 그런 것은 하나도 몰랐고 지금도 모르지만 그렇다.

 

  어쨌든 이 기회에 실존이 무엇인지 조금 들어보자. 하이데거에 의하면 실존이란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비본래적’인 존재 방식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세계-내-존재 혹은 공동 존재라는 것은 인간의 존재 조건이다. 예를 들어 밀림에 야생으로 살던 늑대 인간이 문명 세계로 들어오면 그는 이 세계 내의 존재일까? 하이데거식으로 하면 늑대 인간은 세계-내-존재가 아니다. 문명 세계의 어떤 존재자와도 적절히 관계 맺지 못하고, 현존재들과도 공동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늑대 인간의 세계는 밀림이다. 거꾸로 문명인이 밀림으로 들어가면 그는 그 세계 안에 존재하지 못한다. 단순히 말해 세계란 지구 내의 국가들의 총합이나 대륙이나 바다와 같은 공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현존재의 존재 방식에 의해서 비로소 열리는 것이다.

 「 하이데거는 데카르트 이후 근대 철학이 그래왔던 것처럼, 인간을 인위적인 고립 속에 남겨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모든 인간이 자신의 ‘세계’를 가지며, 그가 다른 존재들 사이에서 다른 인간들과 함께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이 ‘세계-안에-있음’과 ‘다른 것들과 함께 있음’을 말한다. 이런 개념에서 보면 인간은, 그가 개입하지 않으면 닫힌 채로 남아 있는 세계가 그를 통해 열리고, 세계가 인간에 의해 관찰되고 인식되고 감각된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존재보다 뛰어나다. ‘있는것(존재자) 전체 속으로의 침입’을 통해 이 전체가 ‘열리게’ 된다. 」 철학의 에스프레소, 프라하판, p450~1

  그런데 세계는 인간의 마음대로 열리는 것은 아니다. 레고 블록으로 집을 짓듯이 그렇게 세계를 만들 수는 없다. 오히려 세계 안의 다른 존재자들과 공동 존재들에 의해 인간은 존재 방식을 제한받게 된다.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배우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살다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국회의원을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를 갖고 있지만, 그 투표권에 의해 내가 원하는 국회의원을 뽑을 것이라는 희망은 거의 품지 않는다. 최악이 아닌 차악 정도만 얻어도 성공이라고 할 판이다. 다른 예로는 제자에게 철학을 하지 말라고 권유한 스승을 들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여건상 철학을 공부하겠다는 것은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운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사실상 선택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일할 자유 혹은 굶어 죽을 자유는 일세기 전의 낡은 구호만은 아니다. 나도 그 분의 마음을, 그리고 그 분에게 격하게 공감하는 분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세계-내-존재는 우리가 늘 특정한 방식으로 세계에 처해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우리는 ‘거기에’를, 즉 의미 있게 구조화된 상황을 갖고 있는데, 그 상황에서 행동하고 실존하게 마련이다. 현존재의 한 가지 존재 구성 틀은 세계가 언제나 우리로서는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특정한 방식으로 짜여 있거나 기분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구성 틀은 우리 자신이 언제나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들과 관련해서 기분에 젖어 있고 또 그 사물들이 언제나 어떻게 해서든지 간에 우리를 습격한다는 사실이다. 」How to read 하이데거, p69

  사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로운 선택을 하기는 힘들다. 밥도 먹어야 하고, 스마트 폰도 사야하고, 그럴듯한 명함도 있어야 하고, 자동차도 집도 필요하다. 남들보다 낫지는 못해도 남들만큼은 살아야 한다. 사람들, ‘세인’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아직도 서점에는 자기 계발서라는 책들이 쏟아진다. 이렇게 살아라, 죽기 전에 이건 꼭 해봐라, 마흔이 되면 이 책은 꼭 읽어라,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 아침에 푹 자는 것이 낫다 기타 등등에 목을 매는 것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살기위해 기를 쓰는 것에 다름 아니다. 왜?

 「 우리가 접하거나 우리가 행하는 거의 모든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우리가 언제나 타인들과 공유하는 세계에서 거주한다는 사실에 의해서 상당한 정도로 결정되어 있으며, 우리가 이러한 세계에서 실존하는 방식은 늘 본디부터 타인들에 의해서 구조화되어 있다. 즉 “현존재의 세계는 공동세계다.”라는 말이다. 결국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해석은 언제나, 적어도 처음부터 타인들이 사물들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에 의해서 정해진 이해와 해석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How to read 하이데거, p98~9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바라는 존재 방식이 딱 이것이다. 소위 엄친아들의 방식.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런 존재 방식을 ‘비본래적’ 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본래적인 존재방식은 무엇일까? 현존재는 세계 안에,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현존재에게 세계가 단 한 가지 가능성으로만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실존을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거나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현존재의 가능성으로 묘사한다. 나는 내가 사는 방식으로 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내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당사자는 나 자신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문제는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할 것인가 말 것인가이다. 말하자면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책임을 내가 솔직하게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문제다. 이렇게 볼 때 하이데거가 앞에 인용된 문장에서 적고 있듯이 현존재의 근본 특징은 ‘각자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의 존재는 나의 것이라는 말인데,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는 나의 특징을 이루는 것이지 다른 어떠한 사람의 특징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 존재에 대한 책임을 떠안고 있는 그러한 실존의 성격을 놓고 하이데거가 붙이는 명칭은 ‘본래성’이다....본래적인 현존재는 자기 자신이 된, 즉 개인이 된 사람을, 이렇게 해서 현존재로서 자기 자신에게 가장 고유한 것을 자각하게 된 사람을, 요컨대 자신의 각자성 또는 홀로 자신의 고유한 존재에 대해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떠맡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비본래적인 현존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을 떠맡아 오지 않았기에 남들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삶의 방식을 좇아서 산다. 하이데거가 생각하기에, 실로 한 사람이 누구여야 하고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결단할 수 있는 권한을 남에게 양도하는 경향성이 만연되어 있다. 책임이란 무서운 것이다. 비본래적인 존재에서 현존재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존재는 이 비본래적인 존재마저 책임져야 한다. 내가 비본래적이라고 해도, 내 비본래적인 존재는 여전히 내 것이라는 말이다. 」How to read 하이데거, p28~9

 

   실존은 자유와 책임이다. 하이데거는 자유가 무한하다고 보지도 않았지만, 자유가 불가능하다고 보지도 않았다.

 「모든 현존재는 모종의 ‘거기에’ 처해 있다. 나의 거기에 자체는 나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나의 자유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사물들에 대한 나의 종속 사이의 긴장으로 꽉 차 있다.」How to read 하이데거, p61

 

  그런데 인간은 어떻게 이런 실존적 선택을 하게 되는 걸까? 등따시고 배부를때? 하이데거가 제시하는 것은 ‘죽음’ 이다.

「 ‘세계-속에-있음’을 실존으로 보고, 그것을 더욱 정교하게 해석하면서 하이데거는 인간의 일상적인 상황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인간은 맨 먼저, 그리고 대부분 자기 자신으로 있지 않고 세계에 추락해 있다. 그는 그 자신이 아니라 ‘사람들, 그들’일 뿐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넘겨져 있다. 그의 과제는 이렇게 얽힘에서 벗어나 정말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 근본적으로 자기가 어떠한지를 알려주는 근본정서, 그리고 아무 반성 없이 편하게 살기와 망상에서 그를 밖으로 끌어내는 근본정서에서 분명해 진다.

  근본정서들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을 하이데거는 불안이라 부른다.... 불안 속에서 그는 죽음을 피할 수 없음과 세계가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님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인간은 ‘죽음을 각오한 단호함’과 ‘아무 것도 아닌 실존’에서 자기 자신이 된다. 그는 낯선 법칙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장 고유한 바탕으로부터 실존하기로 결심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된다.」 철학의 에스프레소, 프라하판, p452

  인간이 죽음이라는 불안 앞에 직면할 때 오히려 더 독하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은 이해가 가는 듯 하면서도 선뜻 무릎이 쳐지지는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죽음이 부쩍 가깝게 느껴지는데, 그러니 책을 읽어야지 하다가도, 맛있는 것 많이 먹고, 좋은 곳 놀러 다녀야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려면 먼저 돈을 벌어야 한다. 예전에 아버지는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 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듣는 것은 깨닫는 것이고, 깨닫는 것은 행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도 세계에 대한 ‘이해’는 인식이 아니라 ‘행위’라고 했다. 그러니 하이데거라면 배고픈 자에게도 철학을 권할 수 있지 않을까? 철학을 한다는 것이 단순히 이론을 깨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전제한다면, 배고픈 자도 철학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하이데거는 사상이 실존 안으로 파고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의 결과는 비극적이게도 나찌의 ‘국가사회주의’였을 지라도 말이다. 하이데거는 “한동안 죽음을 향한 여기있음을 영웅적으로 견디기라는 자신의 사상이 국가사회주의에서 실현되었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현실 정치에 거리를 두게 되었고, 이후 후기 하이데거의 사상에는 많은 변화가 왔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하이데거가 자신의 사상을 철회했던 것일까에 대한 새로운 반론이 제기 되고 있다. 하이데거의 사상과 나찌 참여 그리고 한나 아렌트와의 스캔들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여기서 다시 시작하기는 힘이 달리고, 세미나 전에 다른 글로 발제할 수 있었으면 한다. 보통 하이데거는 나찌 참여까지의 전기와 그 이후의 후기로 나누어진다고 하는데, 나찌 참여 기간을 중기로 잡아서 세 시기로 세분하는 하이데거주의자도 있다. 어쨌든 오늘의 발제는 <존재와 시간>에 나오는 전기 하이데거에 관한 것이다.

 

  끝으로 하이데거 사상에 대해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란 질문을 해 보고 싶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하이데거는 논리 보다 기분을 중시했다고 하는데, 기분으로 말해보자면 글쎄... 우리 사는 세계를 외형적으로는 잘 설명하고 있는 듯한데, 어째 복잡한 사회와 뒤엉킨 사유의 회로를 날카롭게 파헤치는 예리한 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이 해놓고 날카로움 운운할 처지는 아니지만, 하여튼 뻔뻔하게도 그렇다, 기· 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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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에스프레소 - 위대한 철학자 34인의 일상과 사상
빌헬름 바이셰델 지음, 안인희 옮김 / 프라하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2102년 1월 25일, 모임 후 쓴 글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꽤 있었는데, 아쉽다. 말 재주도 없지만, 확실히 아는 것도 아닌데 반풍수 될까봐 더 그랬던 것 같다. 혜초님이 후기에서 ‘도전 정신’이 생긴다고 하셨는데, 나도 살짝 공감했다. 도핑님이 멋지게 칠판 앞에서 설명하시는 걸 보며, '아! 나도' 했더랬다 ㅋ. 마이크 잡고 서 본지 십 여 년이 훌쩍 지난 것 같다. 다음번엔 펜을 들고 서 보고 싶지만, 하필 ‘하이데거’라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이 책 저 책에서 조금씩 눈 동냥한 하이데거는 너무 어려울 뿐 아니라, 우리하고 별로 친숙하지도 않다. 나찌 연루설이라든가, 한나 아렌트와의 연애(?)라든가 풍문만 조금 들어봤을 뿐이다. 여하튼 세미나에서 못했던 이야기, 그림도 그려가며 조금 정리해 놓고 넘어가고 싶다. 본 글에 들어가기 전에, 깜짝 놀라움을 선물하시며, 구성원들의 투지를 자극해 주신 도핑님께 그날 전하지 못한 감사를 드린다.

 

 

 

  데카르트는 무조건 Cogito, ergo sum 이다. 데카르트 자신이야 어떠했던, 우리에게 데카르트는 그렇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처음 데카르트에게 cogito는 포괄적인 ‘생각’이라기보다는 ‘의심’이었던 것 같다. 칠일 만에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이 하늘과 땅과 동·식물은 물론 인간까지 창조하셨으니, 그 모든 것의 존재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더구나 나는 엄연히 살아있고, 밥 먹고 잠자고 이것저것 할 건 다할 뿐 아니라 그때마다 즐겁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는 등, 그 모든 것에 대한 생생한 느낌을 갖고 있다. 여기에 무슨 의심할 것이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는 이 모든 것을 의심했다. 신을 의심하고 사물의 존재를 의심하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 의심했다.

  의심의 극단에서 데카르트는 자신의 육체조차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걸 느꼈을까? 그런데 그건 아닌 것 같다. 텅 빈 우주에서 한 점 ‘생각’으로 움츠러들었던 데카르트는 그 ‘생각’으로부터 ‘생각하는 물건’인 실체로 돌아왔다. 생각하는 물건 res cogitans의 res 는 物, 즉 실체, 물건을 뜻한다. 저자 바이셰델은 “이것으로써 인간적인 있음인 ‘나’의 고유성에 대한 응시가 가로막혔다”고 하는데,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라는 책에서 어떤 단서를 얻을 수는 있을 것 같아, 조금 길지만 인용해 본다...고 썼다가, 너무 길고 어려워서 인용문¹은 맨 아래에 덧붙였다.

 

 

  cogito 와 res cogitans의 차이를 이해하기는 물론 쉽지가 않다. 인용문¹의 데카르트적 주체와 칸트의 ‘초월적 통각 transcendental apperception’ 사이의 차이점을 통해서 좀 더 명확해질 수 있지만, 사실 칸트의 ‘초월적 통각’이라는 개념은 더욱 만만치가 않다. ‘초월적’과 ‘통각’이 분명 한글이긴 한데, 그 의미는 전혀 우리의 상식 범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핑님은 더 어려운 칸트의 개념들도 잘 설명해 주셨다. 도핑님이 설명하신 내용들은 아마도 주체가 세계를 구성하는 방법에 관한 내용이었던 듯하다. 칸트는 세계가 우리가 보고 있는 모습 그대로(이걸 표상이라고 하는 것 같다),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전제한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물物 자체’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아무튼 칸트에게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는 주체의 감각, 지성(오성), 이성을 통해 구성되어진 것이다. 그리고 세계를 구성하는 이 주체는 바로 ‘초월적 통각’이다.(가끔 순수통각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초월적 통각’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나’라고 생각하는 그 ‘나’는 아니다. 어떤 ‘실체’는 아니라는 것인데, 다시 말하면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사물 res cogitans' 이 아니라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에서 생각의 주체인 ‘나’, 그러니까 생각을 하고 있는 ‘경험적인 나’가 실체적으로 존재한다는 확신을 끌어낸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다.’고 해서 그 내가 진짜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걸까? 여기서 좀 쉬운 길을 통해 돌아가 보자. 세미나에서 잠깐 언급했고, 영실업님이 생각을 연장해 주신 영화들이 있다. <매트릭스>와 <블레이드 러너>.

  단순히 말하자면, 매트릭스가 보여주는 세계는 빨간 약의 세계와 파란 약의 세계로 나누어진다. 파란 약의 세계는 매트릭스 안의 세계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런 세계. 바쁘고 힘들고 정신없지만 또 한편으로 즐겁고 안락하고 매끄러운 세계. 24시간 빈틈없이, 한 치의 오차 없이 흘러가는 세계. 이산화탄소의 과다 배출로 오존층이 구멍 나지 않을까 걱정은 하지만, 이 세계 자체가 이미 구멍 뚫린 세계라는 생각은 전혀 할 수 없는 완전한 세계. (w)hole! 라캉은 세계를 이중적 의미에서의 (w)hole 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이런 세계에도 꼭 네오 같은 사람들이 있다. 뭔가 아닌 것 같고, 뭔가 이상한 것 같고. 뭔가 세계의 ‘틈’, 구멍을 느끼는 사람들. 빨간약을 삼키는 사람들. 그들이 본 것은 거대한 인큐베이터 공장, 엄마의 자궁 같은 시험관 안에서 환상을 보며 실제로는 에너지를 빨리고 있는 인간 모양의 육체 덩어리들이다. 매트릭스 1편은 이렇게 매트릭스라는 가짜 세계와 진짜 세계인 시온을 대비시키고 있는 듯하다. 여기서의 문제는 간단하다. 빨간 약을 먹고 잠에서 깨어나 진짜 인간의 의식으로 돌아오면 거짓된 환상의 세계를 끝장낼 수 있다. 그런데 3편으로 가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시온 뿐 아니라 기계와의 전쟁까지 그 모든 것이 사실은 프로그램의 일부이다. 그 안에서 버그인 네오와 또 다른 변종인 스미스 요원 등등, 이야기는 복잡하게 얽히고 해석자에 따라 다양한 관점이 가능하지만, 어쨌든 우리 주제와 관련해서 단순화시켜 본다면 인간이 생각한다고 해서 그 생각의 주체가 실체로서의 나, 생각하는 사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세계를 ‘의심’한 네오마저도 여전히 가상의 프로그램일 뿐, 실체로 존재하지 못했다.

  <블레이드 러너>는 도주 중인 리플리컨트를 추적하는 형사에 관한 이야기인데, 놀랍게도(혹은 예측하신대로) 그 형사 역시 리플리컨트임이 밝혀진다. ‘스스로를 인간으로 (오)지각하는 리플리컨트’ 에 관한 이 영화에서 우리의 결론은 우리 역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주인공 형사는 자신이 쫒던 리플리컨트가 ‘자신을 인간으로 (오)지각하는 리플리컨트’라는 것을 알고 나서, “어떻게 그것은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가?” 라고 놀라워한다. 물론 우리는 그 놀라움을 주인공 형사에게 되돌려야만 한다. “어떻게 너는 네가 리플리컨트임을 모를 수가 있니?” 하지만, 그 질문이 ‘자신을 인간으로 지각하는 우리 인간’에게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일찍이 세익스피어께서, “네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라고 던졌던 그 질문에 우리 인간 역시 뚜렷한 답을 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 밖에서 우리의 존재를 확인해 줄 그 무엇이, 혹은 신이 존재한다고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오류는 여기에 있다. 의심은 곧 존재에 대한 증거이고, 그것은 또 인간 보다 더 완전한 신에 대한 증명으로 이어지고, 다시 이 완전한 신은 인간이 인간임을 확인해 줌으로써, 데카르트의 존재 증명은 순환 논리가 되고 만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처음 ‘의심’이라는 부피 없는 한 점으로 응축되어 세계의 심연을 들여다 본 순간, 철학의 역사는 이미 되 돌이킬 수 없이 방향을 바꾸었다. 신에게서 인간에게로, 그리고 세계에 대한 확신에서 세계에 대한 의심으로. 칸트가 데카르트적 주체를 이어 받아 ‘초월적 통각’ 이라는 개념으로 해낸 일은 인간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세계인 물 자체에 대한 허망한 사고는 일단 접어두고, 인간 이성으로 확신할 수 있는 세계를 구성해 내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주워들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이다. 하지만 그렇게 구성된 세계에서 우리는 우리 존재를 확신한다. 레스 코기탄스로. 이것이 칸트가 데카르트를 논리적으로 선행한다는 주장이 가능한 이유일 것이다. “칸트는 일종의 ‘사라지는 매개자’를, 데카르트적 레스 코기탄스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사라져야만 하는 계기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p28>”

  영실업님의 글과 관련해서, 나는 세계 밖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리플리컨트나 좀비나 프로그램이라고 혹은 아니라고 확인해 줄 수 있는 세계 밖의 신이나, 아키텍터나 거대 컴퓨터 기업은 없다. 다만 뭔가가 이상하고, 찜찜하고, 흰 토끼가 나타나면 따라 나설 것 같다는 생각에 가끔씩 시달릴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체성identity이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내가 누구라고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내 살아 온 세월은 대하소설로도 모자라다는 엄마의 넋두리를 곧이곧대로 받아 적어 진짜 대하소설을 쓴다고 해도 아마 그 속에도 엄마 자신이 고스란히 모두 담겨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 동일성은 불가능하다. identity는 정체성이자 동일성이다. ‘법은 법이다’ 라거나 ‘나는 나다’라는 동어반복은 아무 내용도 담고 있지 않는 동어반복이 아니고는 그 정체성을 그것 자체와 동일하게 표현할 방법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정체성/동일성은 사실 불투명하다. “피라미드의 비밀은 이집트인 자신에게도 수수께끼다.” 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모른다. 데카르트의 res cogitans가 자기 투명한 주체임에 반해 칸트의 초월적 주체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다는 듯이 행동한다. 누군가 나를 부를 때, 나는 그 상황에 따라 매번 다른 부름에 동일하게 응답한다. 엄마, 아줌마, 고모, 이모, 여보, 선생님, 고객님 등등.... 이런 호명에 “나는 과연 누구인가?” 따위의 생각으로 망설이다가는 정신병원에 격리되기 십상이다. 현실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진짜 내가 누구인가와는 상관없이 각종 부름들에 적당하게 혹은 적절하게 응답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상징적 정체성의 떠맡음’ 이라고 하는데, 이 정체성은 가만히 있으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촉박한 동일화 precipitate identification'를 통해 스스로 그 무엇이 되는 것이다. 라캉은 죄수 이야기를 통해 이 동일화의 제스처를 설명하고 있는데, 역시 길고 까다로운 인용문²이어서 맨 아래에 덧붙인다. 죄수가 쓰고 있는 모자의 색깔을 함께 맞춰 보시면 재미있을 것이다. 죄수 셋, 모자는 하얀 모자 셋, 검정 모자 둘이다. 죄수는 각각 하나씩의 모자를 쓰고 있고 상대방의 모자 색깔은 볼 수 있지만 자신의 모자색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자기 모자 색을 맞추어야 한다. 모두가 하얀 모자를 쓰고 있는 경우가 ‘촉박한 동일화’의 경우에 해당한다. 요점은 “내 모자는 하얀 색이다”를 외치는 순간에도 주체는 자기 모자의 색깔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이 상징적 세계의 일원이 된다. 내가 인간인지 리플리컨트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나는 스스로를 인간으로 떠맡음으로써 이 세계에서 인간적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저자 바이셰델은 데카르트에게 두 가지 혐의를 씌웠다. 코기토를 레스 코기탄스로 환원함으로써 “한 순간 인간의 여기있음을 독특하게 해석할 전망을 열었다가 다음 순간에 그것을 도로 덮어버렸다 p201”는 것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데카르트와 더불어 현실이, 한편에는 세계 없는 주체로, 다른 한편에는 단순한 객체로 나뉘어버리는 근대의 특성도 시작되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인간에 대한, 그리고 세계에 대한 철학적 부담이 되고 있다. p202” 는 것이다. “단순히 의식 속에 살고 있는 ‘나’는 물건들과의 접촉을 잃어버렸다. p202” 길어봤자 20페이지 정도에 한 철학자의 일생과 사상을 담고 있는 이 책의 구성 방식상 이런 언술들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는 매우 어렵다. 레스 코기탄스에 관한 부분은 두어 해 전에 읽은 지젝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를 다시 떠올리며 나름대로 이해해 보려 노력했다. 물론 자신은 없다. 칸트와 헤겔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을 제대로 읽었다고 말 할 배짱은 없기 때문이다. 말이 되든 안 되든 일단 내 속에 들어있던 것을 끄집어 내 보았다는 것에 약간의 뿌듯함도 있지만,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는 죄송스런 마음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 글은 읽히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쓰기 위해 쓴 글이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데카르트에 의해 주체와 객체가 분리된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맨 먼저 떠오른 것이 영화 <아바타>였다. 바이셰델의 의도와 동떨어진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아바타>는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를 가진 영화다. 주체와 객체라는 이분법을 사용한다면, 판도라 행성을 침공한 인간이 근대적 주체의 자리에, 그리고 나비족과 판도라 행성의 자원이 객체의 자리에 놓일 수 있을 것이다. 서구 역사상 근대는 식민지를 개척한 제국주의 시대이기도 했다. 서구인들은 피식민지 원주민들을 자신과 동등한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하나의 대상, 자원으로 취급했다. 근대적 발전은 자원의 개발 혹은 자원의 착취와 나란히 진행되었으므로, 근대적 주체가 판도라 행성을 공격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바타>는 이런 근대적 주체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자연과 하나가 되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나비족과의 대비를 통해 고발하고 있다. 물론 영화가 강력하게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는 우리 역시 잃어버렸던 낙원인 유기체적 공동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 ‘잃어버렸던’ 낙원이라는 것이 잃어버리기 전에도 존재한 적이 있었을까? 그 낙원은 오직 잃어버린 후에만 사후적으로, 회고적으로 존재하게 된 것은 아닐까?

  요즘 금요일 밤에는 ‘남극의 눈물’을 본다. 펭권이 너무 귀여워서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연 다큐들이 다 그렇듯이, 그것이 전달하려고 하는 의도와는 별개로, 자연의 세계라는 것은 참으로 잔인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펭귄은 제 새끼를 먹이려고 바다 속의 물고기들을 잡아먹어야 하고, 자이언트 패트롤이라는 새는 또 제 새끼를 먹이기 위해 아기 펭귄의 목덜미를 찢어 놓는다. 코끼리 해표가 새끼를 낳자마자 새들이 날아와 자궁 속까지 부리를 들이밀고 태반을 먹어 치우는 모습에는 속이 느물거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자연이다. 남극의 밤하늘과 푸른 빙벽과 차가운 바다가 아름다운만큼이나 그 속의 생명들은 잔인하고 처절하다. 철저하게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이다. 인간은 바로 그곳, 그 대자연의 질서로부터 안간힘을 쏟으며 빠져나왔고, 어쩌면 그것이 바로 인간의 역사이다. 인간은 자연과 단절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판도라 행성의 나비족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나비족은 언어를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 그들에게는 언어가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어 없이도 교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비족들은 그들의 머리채와 이크란의 갈기 같은 것을 맞대는 것으로 서로의 생각을 저절로 알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직관적 지성’ 이다. 칸트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는 직관과 지성 사이에 벗어날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함을 주장했다. 무한한 존재(신) 속에서만 직관과 지성은 일치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직관적 지성이 가능하다면 인간들 사이에 오해는 없을 것이다. 오해의 근원인 말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저 한번 쓰윽 보거나 그윽하게 응시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투명하게 읽혀진다. 신 앞에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 그런데 말도 필요 없고, 오해도 없는 세계는 무지하게 심드렁한 세계일지도 모른다. 서로를 알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인정받거나 이해하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고, 사랑을 감추고 눈물 흘릴 일도 없을 것이다. 그저 느끼면 되고, 느낀 대로 행하면 된다. 느낀 대로 행하지 않으면 된다고? 그런데 그런 자유가 가능할까? ‘자유’라는 주제는 ‘주체’의 문제와 함께 철학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논쟁거리라고 알고 있다. 이 묵직한 주제에 관해서는 아직 남아있는 철학자들과 함께 생각해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니 여기서는 그냥 질문으로 남겨둬야 할 것 같다. 벌써 자정이 지났다.

  <아바타>에서 내가 진짜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 한 가지만 이야기하고, 이 지겨운 글은 이제 끝을 내야겠다. 판도라 행성과 나비족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가장 필요했던 것은 다름 아닌 근대적 주체인 제이크였다는 사실이다. 침입자였던 제이크의 근대적 문명(사고) 없이는 나비족의 거주지는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을 것이다.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에는 “상처는 상처를 낸 창으로만 치유할 수 있다” 는 대사가 있다고 한다. 적합한 비유인지 알 수 없지만, 자연으로의 회귀가 근대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돌아갈 수 있는 그 ‘자연’은 잔인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바로 그 자연일 뿐이다. 우리가 돌아 갈 수 있는 판도라 행성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인용문 :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중에서 ....

 

 

1. 인용문¹

 

  데카르트는 존재론적으로 일관적인 우주 속에 최초로 균열을 도입했다. 절대적 확실성을 “나는 생각한다.”라는 점으로까지 단축시킬 때, 잠깐 동안, 내 등 뒤에서 나를 지배하고 내가 “현실”로 경험하는 것을 조종하는 사악한 천재의 가설이 열리게 된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에서 <블레이드 러너>의 타이렐 박사에 이르기까지 인조인간을 창조하는 과학자-조물주의 원형. 그렇지만 데카르트는 코기토(나는 생각한다)를 레스 코기탄스(생각하는 사물)로 환원함으로써, 말하자면 현실이라는 직물에 그가 낸 상처를 꿰맨다. 칸트만이 자기의식에 내재한 역설을 완전하게 표명한다. 칸트의 “초월적 전회”가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주체를 “존재의 대사슬” 속에, 즉 우주라는 전체 속에 위치시키는 것의 불가능성이다. 오히려 주체는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탈구되어 out of joint” 있다. 주체는 그 자신의 자리를 구성적으로 결여하고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라캉은 주체를 수학소 $로, “빗금쳐진” S로 지칭한다.p26.... 코기토 에르고 숨에서 절대적 확실성의 지점에 도달할 때 데카르트는 아직 코기토를 현실 전체에 상관적인 것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현실의 외부이고 현실에서 제외되어 있으면서 현실의 지평을 윤곽 짓는 지점으로서 파악하지 않는다. 데카르트적 코기토는, 자신에게 대립된 객관적 세계를 "자발적으로” 구성하는 자율적 행위자라기보다는, 내속적인 개념적 사슬관계를 따름으로써 우리를 상위의 다른 표상들로 인도하는 표상이다. 처음에 주체는 코기토가 어떤 내속적으로 결함이 있는 존재에게 속하는 표상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의심은 불완전성의 표시이다) 그러한 것으로서 그것은 불확실한 것이 없는 자유로운 완전한 존재에 대한 표상을 함축한다. 결함이 있는 하위의 존재자나 표상은 상위의 존재자나 표상의 원인일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므로, 완전한 존재(신)는 있어야만 했다. 더 나아가 신의 진실한 본성은 외부 현실에 대한 우리의 표상이 믿을 만하다는 것을 보장해준다. 기타 등등. 따라서 우주에 대한 데카르트의 최종적 관점에서 코기토는 복잡하게 얽힌 총체 속에 있는 수많은 표상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며, 현실의 일부이며 아직은 현실 전체에 상관적이지 않다.(혹은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오로지 “즉자적으로”만 상관적이다.) p27 ..... 데카르트는 모든 대상 표상에 수반하는 텅 빈 “나는 생각한다.”에서 우리가 (사고하는, 그리고 사고하는 그 능력에서 스스로에게 투명한) 어떤 실정적 현상적 실체, 코기탄스를 붙잡는 것이라고 잘못된 결론을 내린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식은 내 안에 있는 사고하는 “사물”을 자기현시적이며 자기투명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형식과 생각하는 실체 사이의 위상학적 불일치를, 즉 “나는 생각한다.” 속에 포함된 사고의 논리적 주체의 동일성identity에 관한 분석 명제와 생각하는 사물-실체로서의 어떤 인격의 동일성에 관한 종합 명제 사이의 차이를 잃게 된다. 칸트는 이 구분을 표명함으로써 논리적으로 데카르트에 선행한다. p28.... 경험적인 “나”의 자기경험을 초월적 통각의 “나”로부터 분리시키는 이 틈새는 경험적 현실로서의 존재와 논리적 구성물로서의 존재, 즉 수학적 의미에서의 존재의 구분과 일치한다. 칸트가 말하는 초월적 통각의 “나”의 지위는 필수적인 동시에 불가능한(그것의 개념이 직관된 경험적 현실로 결코 메워질 수 없다는 바로 그 의미에서 “불가능한”) 논리적 구성물의 지위이다. 요컨대 라캉적 실재the Real의 지위이다. 데카르트의 잘못은 바로 경험적 현실을 실재적인-불가능한 것으로서의 논리적 구성물과 혼동한 것이었다. p29

 

 

2. 인용문²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주체의 상징적 동일화는 언제나 예기적인, 서두르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1940년대에 라캉이 그 유명한 논리적 시간에 대한 논문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 상징적 동일화, 즉 상징적 위임의 떠맡음의 근본적 형식은, “X에 속하는” 자들의 공동체에서 나를 쫒아낼지도 모르는 타인들을 따라잡기 위해서 “나 자신을 X로서 인지하는”, 나 자신을 X로서 선언하고 공표하는 것이다.... 교도소장은 특별 사면으로 세 명의 죄수 중 한 명을 석방할 수 있다. 누구를 석방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그는 그들이 논리적 테스트를 통과하게 한다. 죄수들은 세 개는 하얀 색이고 두 개는 검은 색인 다섯 개의 모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모자들 중 세 개를 죄수들에게 나누워 준다. 그러고 나서 죄수들은 삼각형으로 앉는다. 즉 죄수 각각은 나머지 둘의 모자 색을 볼 수 있지만, 자기 머리에 쓴 모자 색을 볼 수는 없다. 승자는 자기 모자 색을 가장 먼저 알아맞히는 사람이다. 색을 알게 된 죄수는 일어나서 방을 나가는 것으로 이를 신호한다. 가능한 세 가지 상황이 있다. p145~6

 

 

 

- 검정 모자 둘, 하얀 모자 하나.

- 검정 모자 하나, 하얀 모자 둘.

- 하얀 모자 셋.

 

  내가 하얀 모자를 쓴 경우, 첫 번째는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약간의 유추가 필요하다. 내 눈에는 검정 하나, 흰색 하나가 보이고, 나는 흰색일 수도 검정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내 모자가 검정일 경우, 흰 색 모자를 쓴 다른 죄수의 눈에는 두 개의 검정이 보일 것이므로 그 죄수는 바로 일어나 나갈 것이다. 그런데 그 죄수가 망설인다. 그렇다면 나는 흰색이 분명하다. 문제는 세 번째의 경우다. 역시 내 모자는 흰색일 수도 있고 검은 색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검은 색이라면, 흰색을 쓴 다른 죄수는 내가 두 번째 경우에 생각한 방식대로 추론해 나갈 것이다. 즉 제 3 죄수의 움직임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 모자는 흰색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죄수의 제스처가 의미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내 머리에서 검은 모자를 봤기 때문에 망설인 것인지, 나의 추론과 동일한 추론을 했기 때문에 망설인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서둘러 내 모자가 흰색이라고 외쳐야 한다. 두 망설임 사이의 차이를 확인할 충분한 시간을 가지게 된다면 다른 죄수가 나 보다 먼저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 p146~7 책 내용을 축약했다)

 

 

  우리는 촉박한 주체적 제스처를 통해 “우리가 〔그것〕인 그 무엇이 된다.” 이 촉박한 동일화는 대상에서 기표로의 이행을 내포한다. (하얗거나 검은) 모자는 내가 〔그것〕인 그 대상이며, 내가 그것을 볼 수 없다는 점은 “내가 대상으로서 〔그것〕인 그 무엇”에 대한 통찰을 결코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내가 “나는 하얀 색이다”라고 말할 때 나는 나의 존재에 관한 불확실성의 공백을 메우는 상징적 정체성을 떠맡는다. 이 예기적 앞지르기를 설명해 주는 것은 인과사슬의 비결정적 성격이다. 상징적 질서는 “불충족이유율”에 의해 지배된다. 상징적 상호주체성의 공간 내부에서 나는 내가 무엇인지를 단지 전혀 확인할 수가 없는 것인데, 바로 이 때문에 나의 “객관적” 사회적 정체성은 “주체적” 예기를 통해 확립된다.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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