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 토마스 모어, 코페르니쿠스, 셰익스피어, 갈릴레이, 세르반테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 눈부신 이름들은 어떻게 중세 천년의 암흑으로부터 한꺼번에 튀어 나왔을까?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십자군 전쟁 이후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교회는 분열했다. 신 중심의 세계에 균열이 일어났다. 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 인간에게는 신을 대신할 새로운 규범이 필요했다. 그들이 찾은 것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였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에 대한 탐구와 더불어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탄생했다.

 

르네상스Renaissancce는 재생이란 뜻을 가진다. 르네상스가 재생시킨 것은 ‘고대’이다. 신에게 얽매이지 않는 자립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었고, 자연과학이 그 방법을 제시했다. 14~16세기 르네상스 시대를 이어, 17세기 과학혁명의 시대가 뒤따른 것은 이런 맥락 아래에서이다. 세속화, 인문주의, 자연과학적 방법은 하나로 엮여 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르네상스를 “화약의 발명에 적응해 간 시대”로 규정한 학자도 있다. 르네상스라고 하면 먼저 피렌체의 예술을 떠올리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화약과 대포가 널리 쓰이게 된 것이다.

 

화약은 전쟁 양상, 도시 설계 방식, 군대 규모, 삶의 방식 등을 바꾸었다. 화약과 대포가 등장하면서 중세의 무기 체제가 쓸모없어졌다. 유지비가 많이 드는 화약과 대포 때문에 지역의 영주가 아닌 중앙의 군주가 세금을 거두어야 했다. 전쟁의 규모와 비용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고 그로 인해 중앙집권적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화약뿐만 아니라 송나라의 3대 발명품인 나침반과 인쇄술 역시 유럽이 중세에서 벗어나 근대로 도약하는 데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동양은 물론 전 세계가 유럽의 식민지로 전락했지만.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교과서적인 의미의 르네상스에 조금 집중해 보자. 르네상스는 14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16세기에는 알프스를 넘어 북유럽에서 꽃을 피웠다. 이탈리아가 먼저 르네상스를 구가했던 것도, 북유럽으로 그 주도권이 넘어간 것도, 모두 중계무역과 관련이 있다.

 

십자군 전쟁이후 지중해 무역으로 부유해진 이탈리아는 상인과 왕의 지원으로 주로 미술 분야에서 ‘부흥’했다. 대표적 후원자는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었다. 그런데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절대왕정 체제를 구축하던 것과는 반대로 내부분열이 계속되던 이탈리아는 무역의 주도권마저 대서양무역로에 뺏기자, 르네상스 문화도 쇠퇴했다.

 

대서양무역으로 급성장한 16세기 (알프스 북쪽) 북유럽은 예술 보다는 사회비판과 종교개혁이 르네상스를 주도했다. 『유토피아』 ,『우신예찬』,『돈키호테』 등의 작품들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으로 현실을 신랄하게 풍자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학자들은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를 ‘서로 경합하는 쌍둥이’ 혹은 ‘종교개혁은 전형적인 르네상스 운동’이라고 말한다. 르네상스는 14~16세기에 걸쳐있고, 종교개혁은 16세기에 일어났다. 14~16세기를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로 잡는다면, 그 안에 중세의 위기와 해체에 해당하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모두 포함된다. 이 시기를 거쳐서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유럽의 근대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 운동이 짧은 시간에 많은 세력을 얻었던 이유는 첫째, 프로테스탄트가 세속적 통치자(제후)와 영합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사람들이 가톨릭에 회의와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은 교황 레오 10세가 면벌부를 팔면서 시작되었다. 처음 루터가 문제 삼은 것은 면별부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남발하는 것이었다. 1517년 뷔텐베르크 교회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 때에도 교황에 대해 완전히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교황 레오 10세의 대처가 미온적이었다.

 

이때부터 종교개혁은 순수한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가 되었다. 교황의 미온적 대처를 목격한 독일 영주들이 자신들의 땅 곳곳에 있는 가톨릭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들은 루터가 교황에 맞설 수 있도록 정치적으로 뒷받침했고, 이와 동시에 영지 내에 있는 교황의 재산을 몰수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시작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립은 30년 전쟁(1618~1648)으로까지 이어졌다.

 

종파분쟁은 극단으로 치달았고, 사람들은 종교분쟁에 환멸을 느꼈다. 겉으로는 신앙의 이름을 내걸고 있지만, 사실상 정치적․ 경제적 싸움일 뿐이며, 종교는 이것을 은폐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30년 전쟁을 겪으며 과학에 대한 의존도가 급속도로 높아졌다. 종교를 명분으로 세상이 극도로 혼란해지자 종교를 대체할 확실한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회의주의적인데다가 느긋하게 생각하는 힘을 필요로 했는데, 당시 사람들의 심란한 정서에 더 이상 맞지 않았다.

 

시대의 요구에 부응한 것은 데카르트와 뉴턴이었다. 고전적 권위에서 탈피하여 수학적 확실성에 의존하는 과학, 과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물리적 세계를 파악하기 위한 새로운 학문들에 대한 요구 등이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지배계급은 재빨리 과학 아카데미를 설립하거나 후원하며 과학을 통한 지배의 정당화를 모색했다.

 

과학이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등장하면서 17세기 중반에 르네상스는 완전히 끝이 났다. 중세의 신을 대신할 규범으로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등장했지만, 종교전쟁의 혼란 끝에 사람들이 선택한 것은 고대로의 복귀가 아니라 과학이었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고대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의 투쟁에서 근대적인 것이 승리했다. 고대적인 것이란 자기 지식의 최종 근거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의 텍스트에 두는 것이라면, 근대적인 것은 과학, 특히 실험과학에 두는 것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았거나 종파간의 대립이 극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수학적 확실성을 추구하는 대신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전통 속에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학교에서 종교개혁을 다루는 방식을 잠깐 살펴보자. 가톨릭이 신과 인간 사이에 반드시 교황과 성직자를 매개로 삼았다면, 프로테스탄트는 성서지상주의를 주장했다. 성직자 따위 없어도 성서를 통해 곧바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독일의 루터파는 파문과 전쟁, 화의를 거쳐 종교적 자유를 획득했다. 개인적 자유가 아니라 제후만이 종교를 선택할 수 있고, 제후가 선택한 종교를 그의 농노들은 무조건 믿어야하지만 말이다.("다스리는 자가 하나인 곳에는 종교도 하나이다.")  개인이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30년 전쟁 이후에야 주어졌다.

 

스위스의 칼뱅파가 주장하는 예정설은 역설적이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과는 아무 상관없이 이미 정해져 있는데, 구원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인간의 노력과 성공이 제시된다. 열심히 일하여 성공하면 그것이 곧 구원에 대한 증빙이 되는 것이다. 노력과 성공이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노력하고 성공한다는 역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무신론자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이런 이유로 칼뱅파는 부르주아지에게 환영받고 자본주의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영국국교회는 루터파와 칼뱅파에 비해서 이질적이다. 이혼과 재정 문제로 국왕이 일으킨 개혁이다. 우리나라의 성공회(聖公會)가 영국국교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545~1563년까지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는 ‘개신교의 종교개혁에 맞선 가톨릭 개혁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개혁이 아니라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탄압을 공식적으로 결의한 것으로 평가된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졌다. 구교는 유럽이 신․구교로 쪼개지자 교세 확장을 위해 예수회를 조직하여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선교에 나섰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30년 전쟁은 유럽의 핵심 강국이 모두 참전한 국제전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제후들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나뉘어 대립했다. 또한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제후의 종교적 자유는 인정하되, 제후의 종교가 곧 그 영지의 종교로 규정되어, 제후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618년 보헤미아(체코)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가톨릭교도인 페르디난트 2세의 탄압에 대항해 일어난 폭동이었다. 이 폭동으로 페르디난트 2세가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스페인과 오스트리아가 개입했다. 그러자 가톨릭 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루터파인 덴마크와 스웨덴이 개입했고 마지막으로 프랑스가 참전했다.

 

30년 전쟁은 주로 독일 땅에서 벌어졌는데, 당시 독일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용병을 고용했기 때문에 전쟁은 더욱 잔인했고, 살육을 위한 살육의 양상으로 치달았다.

 

이 전쟁은 종교에 대한 극심한 의심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종교에 의해 지배되는 낡은 세계에 대해 절망했다. 보통 베스트팔렌조약 이후를 근대의 출발로 보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이 전쟁을 통해 용병전쟁의 문제점이 드러나며 국민군이 탄생했다. 국민군 유지에는 막대한 물자가 필요했다. 상업이 국민군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이른바 ‘군상 복합체’가 만들어졌다. 전쟁과 시장이라는,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두 개의 축이 이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민군은 곧 해외 정복에 나섰다. 서구 제국주의의 막이 오른 것이다.

 

그건 그렇고 베스트팔렌조약으로 루터파는 개인의 종교 자유를 획득했고, 칼뱅파도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종교전쟁이 곧 독립전쟁이었던 네덜란드의 독립도 베스트팔렌조약에서 승인되었다.

  

 

중세를 끝내기 전에 꼭 덧붙여야 할 것은 마녀사냥이다. 마녀사냥은 십자군 전쟁 이후 교황의 권위가 추락하고, 종교전쟁으로 사회가 혼란에 빠지면서 더욱 심해졌다. 중세의 절정기가 아니라 중세가 붕괴되던 시점에서 마녀사냥의 열풍이 불었다는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교회는 종교적․ 정치적 혼란과 불안의 원인을 모두 마녀 탓으로 돌리며, 책임을 회피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다. 마녀로 몰린 이들은 노파나 하녀, 과부 같은 힘없는 여성들이었다. 통치자들이 궁지에 몰렸을 때 사용하는 전형적인 수법이 등장한 것이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나 공산주의에 대한 매카시즘 열풍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에서도 빨갱이는 사회 혼란기 때마다 등장했다.

 

마녀가 불안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불안이 마녀를 만들어 낸다. 사회의 근본 모순을 은폐하기 위해 화형대 위의 마녀를 필요로 했던 것은 권위를 잃고 추락하던 통치자들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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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중, 5장 '십자가를 들고 가는 유럽' 을 공부하면서 정리해 본 도표이다. 로마제국의 분열부터 중앙집권국가의 형성까지 주요 사건을 살펴보았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흔히 말하는 ‘중세 천년’은 유럽의 시대 구분이다. 기억하기 좋기로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476)에서 비잔티움제국의 멸망(1453)까지 약 1000년이다.

 

로마 제정 말기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비잔티움으로 수도(330)를 옮기며 로마 중흥을 꾀했다. 그러나 쇠퇴기로 접어든 로마제국은 395년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열되었다. 대충 이탈리아 반도와 그 서쪽은 서로마가, 발칸반도와 그 동쪽은 동로마가 차지하였다.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한 서로마 지역은 현재의 서유럽으로, 천년을 더 지탱한 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한 동로마 지역은 현재의 동유럽으로 발전하였다.

 

 

1. 천년의 제국 비잔티움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동로마제국의 원년은 학자에 따라 이견이 있으나 330년을 기준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비잔티움제국이라는 명칭은 후대의 서유럽 학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비잔티움제국은 330년에서 1453년까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무역의 중심지로 혹은 이슬람으로부터 크리스트교 세계를 지켜낸 방패막이로, 천년제국의 명성을 쌓았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하자 비잔티움제국의 황제는 유일한 로마 황제이자 크리스트교의 지배자가 되었다. 비잔티움제국은 황제가 정치의 수장이자 종교의 수장인 황제교황주의를 채택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서유럽은 점차 비잔티움제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비잔티움제국의 최전성기는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이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이탈리아반도를 비롯하여 옛 로마제국 영토를 거의 회복하였다. 로마법의 전통을 이어 받아 <로마법 대전>을 완성하고 , 성소피아성당을 재건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아내인 테오도라는 비잔티움제국을 공동 통치하였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를 훌륭하게 조력하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비잔티움제국은 사산왕조 페르시아 시대부터 이슬람 세력까지, 끊임없이 동양세계의 침략을 받았다. 11세기 이슬람 세계를 정복한 셀주크 튀르크가 예루살렘을 공격해 오자, 비잔티움제국의 황제가 서유럽의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비잔티움제국은 새롭게 이슬람 세계의 주인이 된 오스만제국에 의해 1453년 멸망하였다.

   

 

 

 

2. 또 하나의 크리스트교 세계, 서유럽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중세 서유럽은 두 개의 축으로 지탱되었다. 게르만족이 장악한 정치제도와 로마 귀족이 차지한 크리스트교이다. 서유럽 국가는 두 세력의 연대로 성장하였다.

 

「중세는 '기독교 공화국 respublica christiana' 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res'는 '일', 'publica'는 '공공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레스푸블리카 respublica는 정치적(세속적) 측면 , 크리스티아나christiana는 종교적 측면을 가리킵니다.  '레스푸블리카 크리스티아나'는 레그눔regnum과 사케르도티움sacerdotium의 결합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레그눔은 정치적 권위, 사케르도티움은 종교적 권위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중세 사회는 레그눔과 사케르도티움의 접합 구조 위에 세워진 사회입니다. 중세 사회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것의 깊은 바닥에는 레그눔과 사케르도티움의 대립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아주 쉽게 표현한 말이 '두 개의 칼 two swords'이고, 이는 '황제의 칼'과 '교황의 칼'을 가리킵니다. 즉 중세 시대에는 황제의 세속적 권위와 교황의 종교적 권위가 끊임없이 서로 충돌했다는 것입니다.」 (역사고전강의 p189 )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그런데 왜 두 개의 칼이 손을 잡았던 것일까? 게르만족은 로마인에 비하면 야만족이었다. 중국 한족의 입장에서 유목민이 오랑캐였던 것과 같다. 오랜 로마의 통치 아래 로마시민이 된 서유럽인을 통치하기 위해, 게르만족은 로마교회의 권위를 필요로 했다. 로마교회로서도 보호해 줄 군대도 황제도 사라진 상황에서 정치적 보호자가 필요했다. 동로마제국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로마교회는 게르만족과 손을 잡아야 했다.

 

이런 까닭으로 중세 유럽에 대한 교과서는 정치적 부분과 종교적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고, 2절에서는 먼저 게르만족의 정치 체제를 중심으로 서유럽 사회를 설명하고 있다. 물론 둘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완전히 분리하여 공부하기는 어렵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중세는 몇 시기로 세분화할 수 있는데, 모두 전쟁과 관련이 있다.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중세의 문을 열어젖힌 것은 게르만족의 침입이다. 훈족에 밀려 대이동을 시작한 게르만족은 로마제국 말기부터 로마용병으로 활동하며 로마제국의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킨 것은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게르만 용병은 로마제국의 다양한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지도의 다양한 왕국을 세운 다양한 종족들은 모두 게르만족이다. 대부분의 게르만족은 로마영토를 통치하는데 실패하는데, 그 중 프랑크족이 성공했다. 프랑크족을 이끈 클로비스가 정통 로마가톨릭(아타나시우스파)으로 개종하면서 로마인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프랑크 왕국의 전성기는 8~9세기 카롤루스 대제 때이다. 카롤루스 대제는 로마교황으로부터 서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받기도 했다. 서로마제국은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프랑크왕국은 서로마제국의 이름을 받을 정도로 성장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카롤루스 대제가 죽은 뒤 손자대에 가서 프랑크 왕국은 분열했다. 게르만족의 전통대로 자식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준 것이다. 나중에 서프랑크는 프랑스가, 동프랑크는 독일이, 중프랑크는 이탈리아가 된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이 분열을 틈타 이민족들이 침략했다. 사방에서 침입이 있었지만, 가장 무서운 적은 ‘노르만, 바이킹’ 이었다. 노르만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내려온 ‘북쪽의 게르만족north man’이다.

 

노르만족이 점령한 지역은 키예프공국과 프랑스 북부의 노르망디공국이며, 영국에 노르만 왕조를 세우기도 했다. 키예프공국은 나중에 러시아가 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9~11세기에 걸친 100여 년 간의 노르만 침입은 서유럽 세계를 엄청나게 변화시켰다. 프랑크 왕국의 분열로 약해진 왕권이 더욱 약해지고, 성채와 무장을 갖춘 기사들이 스스로 영토를 보호하며 지켜나가는 자치제가 성립되었다. 중세의 상징인 봉건제가 확립된 것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봉건제는 정치적 측면과 경제적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주군과 봉신(가신) 관계 즉 주종관계가 성립되었다. 봉신은 주군을 섬기고 주군은 봉토를 내리지만, 봉신의 영지 지배에 대해 어떤 간섭도 할 수 없다. 쌍무적 계약 관계에 기반 한 주군-봉신 관계는 지방분권 사회를 확립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125>

 

봉건제의 경제적 측면은 장원제도이다. 영주(봉신)와 농노의 관계를 바탕으로, 봉토를 운영하는 제도이다. 농노는 노예가 아니지만 거주이전의 자유 없이 영주의 장원에서 일정 기간 일을 하고 세금을 내야 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노르만족의 침입 후 봉건제가 확립되고, 11세기부터 서유럽은 중세 문화의 꽃을 피웠다. 인구와 생산력이 늘어나면서 상업과 수공업도 서서히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부르그(도시)가 생기고 부르그에서 사는 수공업자를 중심으로 길드가 형성되었다. 농업 생산력도 증가했고 대학도 생겨났다. 11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이 유행하더니 12세기에는 고딕 양식의 건축물들이 하늘높이 세워졌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3. 서유럽의 영혼을 지배한 카톨릭

 

3절은 중세를 지배한 또 다른 축인 크리스트교에 관한 내용이다. 313년 콘스탄티누스대제에 의해 공인을 받은 기독교는 392년에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동서로마가 분열되고 서로마에는 로마교회가, 동로마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교회가 각각의 교회를 대표하였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하자 로마교회는 보호자를 잃고, 프랑크족의 지배아래 살아남을 방안을 찾아야 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로마교회와 프랑크왕국은 서로 이해가 맞았다. 로마교회는 정치․ 군사적 보호자가 필요했고, 프랑크왕국으로서도 옛 로마인을 지배하기 위해 기독교라는 이념이 필요했다. 옛 갈리아의 로마귀족은 성직자가 되고, 프랑크 귀족은 전사가 되어서, 각각 정신적 지도자와 정치적 지도자의 역할을 담당했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다음에 지식 엘리트였던 기독교 성직자들은 로마의 전통을 보존하고 -그런 점에서 이렇게 성립된 기독교를 로만 가톨릭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을 게르만 족의 전통과 결합시켰습니다. 남부 갈리아 지방의 로마 귀족들은 주교직을 맡거나 교회 조직을 장악하여 이른바 '기도하는 자'가 되고, 북부 프랑크 게르만 귀족은 전사 계급을 구성하면서도 수도원을 설립하고 유지하는 이른바 '싸우는 자'가 됩니다. 이 두 집단의 결합이 앞서 말한 것처럼 '기독교 공화국'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들은 동일한 지배계급의 일원으로 서로 협조하고 견제하는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 (역사고전강의 p191~2 )

 

한편 비잔티움황제는 교회의 수장과 정치적 수장을 겸한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하자 비잔티움제국의 황제는 로마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으나, 로마교회의 주교가 스스로 로마 교황임을 자처하며, 비잔티움황제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726년 비잔티움황제 레오3세의 성상 숭배 금지령으로 가열된 로마교황과 비잔티움황제의 대립은 1054년 동서교회가 완전히 분리되면서 끝났다. 서유럽은 로마 가톨릭(보편적인 교회)으로, 동유럽은 그리스 정교(바른 전통을 이은 교회)로 갈라섰다.

 

그 과정에서 800년, 프랑크왕국의 카롤루스대제는 로마교황으로부터 서로마황제의 관을 받았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프랑크왕국과 로마교회가 결탁했지만, 하늘아래 두 개의 해가 존재하기는 힘들다. 하나가 해이면 하나가 달이어야 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서유럽세계는 황제의 세속적 권위와 교황의 종교적 권위가 끊임없이 충돌했다. 성직자 서임권을 두고 다투던 황제와 교황의 대립은 1077년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사건을 계기로 교황권의 승리로 끝이 났다. 교황 그레고리우스7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4세를 파문하자, 황제가 교황에게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교황권이 황제권력을 누르고 성장하기 시작했다.  

 

십자군전쟁 전후로 전성기를 찍었던 교황권은 서서히 쇠퇴하여, 두 권력이 역전되는 상징적 사건이 발생하였다. 1309~1377년 사이의 ‘아비뇽 유수’이다. 과세권을 놓고 다투던 프랑스국왕이 교황을 납치하여 유폐했다.  교황이 아비뇽에 유폐되는 바람에 로마에서는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었고 이후 여러명의 교황이 난립하는 교회 대분열 사태가 일어났다. 후스와 위클리프가 성서지상주의를 주장하며 교황과 교회를 비판하며 나섰고, 이는 16세기 초에 시작된 종교개혁의 밑바탕이 되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129>

 

교황권이 황제권을 능가하며 발발한 것이 십자군 전쟁이다. 노르만족의 침입이 그치고 서유럽은 안정된 사회로 접어들었다. 생산력이 발전하고 상공업이 기지개를 켜면서 힘이 쌓인 서유럽세계에 비잔티움황제의 급보가 날아들었다. 1055년에 이슬람세계를 정복한 셀주크 튀르크가 예루살렘을 공격한 것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비잔티움황제는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서유럽세계의 복심은 따로 있었다. 크리스트교세계를 수호한다는 순수한 사명감도 있었지만, 이면에는 그동안 쌓은 힘을 써보고 싶은 팽창욕구가 있었다.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비잔티움제국도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나라였기 때문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1096년 1차부터 1270년 7차까지 서유럽의 십자군은 총 7차에 걸쳐 원정을 떠났다. 예루살렘을 회복한 적도 있었으나 최종결과는 실패였다.

 

성전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목적이 컸던 십자군전쟁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이 4차 침입이다. 예루살렘으로 가지도 않은 십자군은 오히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십자군 전쟁의 패배는 서유럽세계를 다시 한 번 바꿔놓았다. 전쟁을 결정한 교황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고, 200년에 걸친 오랜 전쟁을 통해 제후와 기사 계급이 몰락했다.

 

반대로 교황과 대립하던 왕권이 강화되었다. 제후의 몰락은 지방분권제의 쇠퇴를 가져왔고,  왕권이 더욱 강화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중계무역을 통해 전쟁 특수를 누리면서 발달했다. 비잔티움문화와 이슬람문화가 유입되면서 서유럽은 커다란 자극을 받았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4. 도시와 함께 발전한 중앙 집권 국가

 

어느 시대도 마찬가지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변화는 없다.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도 과도기가 있다. 책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14~16세기에 일어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그리고 중앙집권 국가의 수립을 근대로 가는 길목으로 본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7세기는 과학혁명의 시대이고, 철학적으로 보면 근대 이성의 토대를 놓은 데카르트의 시대이기도 하다. 과학과 이성은 근대의 아이콘이다. “이성의 권위에 대한 계몽의 신앙” 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성은 강력했다. 냉소적으로 말하면 신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 이성이 또 다른 신으로 군림한 시대가 근대라고 할 수 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십자군전쟁 이후 중세사회는 격변기에 들어섰다. 이백년에 걸친 전쟁으로 기사계급이 몰락하고 교황권이 약화되었다. 상공업자가 성장하여 길드를 형성하고, 그들이 만든 도시는 영주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자치권을 획득했다. 자치도시들은 동맹을 맺기도 했다. 상공업자가 사는 도시를 부르그burg라 불렀는데, 부르주아의 어원이 되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14세기에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었다. 대기근과 흑사병으로 유럽인구의 1/3이 죽어나가자 농노의 절대다수가 부족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장원에 농노마저 귀해지자 장원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화약과 나침반, 인쇄술의 발달로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이런 변화의 가장 큰 수혜자는 국왕이었다. 국왕의 견제 세력인 교황과 기사(영주)가 몰락하자  왕권이 강화되었다. 도시의 발달로 상공업자의 힘이 커지고, 차츰 영주의 예속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농민의 위상이 높아지자, 중세사회를 특징짓던 지방분권체제가 쇠퇴하고, 중앙집권체제가 발달했다. 시민과 국왕이 직접 손을 잡게 된 것이다. 13~14 세기에 등장한 신분제 의회는 이런 변화를 상징하였다. 프랑스의 삼부회의가 그 대표적 사례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서유럽에서 가장 일찍 중앙집권국가가 된 곳은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에스파냐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프랑스는 영국과의 백년전쟁이 끝난 1453년, 영국은 백년전쟁에 연이은 30년 간의 장미전쟁이 끝난 1485년, 에스파냐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세력을 완전히 몰아낸 1492년 이후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었다.

 

 

 

중세를 끝내기 전에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 대해 공부해야 하지만, 너무 길어서 일단 여기서 유럽의 중세를 마친다. 물론 따로 한번 정리해 둘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역사고전강의』의 한 부분을 소개한다. 교과서와는 또 다른 관점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르네상스는 중세 말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중세는 무너지고 근대 체제로 이행하는데, 정치적인 측면에서 말하자면 이것은 근대 절대주의 국가가 들어서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중세를 지탱하는 핵심적인 요소들인 교회, 귀족(영주), 도시가 몰락하면서 절대 권력을 가진 왕권 중심의 국가로 이행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에 나타난 중요한 특징을 살펴봅시다. 여러 차례 강조하였듯이 첫째는 화약과 대포입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기사 계급이 몰락하고 지방 영주의 권한이 약화되었습니다. 둘째는 왕과 관료의 중앙집권적 체제가 등장한 것입니다. 전쟁 비용을 감당하지 못한 귀족은 왕의 관료가 되었습니다. 특히 프랑스는 중앙집권 체제가 가장 강력하게 성립한 나라입니다. 셋째는 사업과 정치의 결합입니다. 이것은 아주 독특한 현상입니다. 전쟁의 규모와 양상이 변하면서 더는 세금으로 그 비용을 충당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 결과 왕들은 전쟁을 치르기 위해 사업가들에게 돈을 빌리게 된 것입니다. ...

 

이 세 가지가 정치적 측면이라면 지성사적으로도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첫째는 자연과학에 대한 열망이 강력하게 생겨난 것입니다.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확실성에 대한 추구가 생겨났는데 이것은 17세기 과학혁명을 이해하는 중요한 시대적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회의입니다. 가톨릭이냐 프로테스탄트냐를 떠나서 신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였습니다. 17세기를 대표하는 학자 중에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한 학자들로는 토마스 홉스와 베네딕트데 스피노자 그리고 리샤르 시몽을 들 수 있습니다. p2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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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을 다녀온 친구들은 인도에 대해 극과 극으로 평가한다. 인더스문명이 발원한지 4500년도 더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카스트라는 계급차별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라인 동시에 거지도 철학을 한다는 행복한 영혼의 나라. 인도는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어 이런 극과 극이 공존할 수 있는 걸까?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인도문명은 세계 4대 문명 중의 하나이다. BC2500년경 인더스강 유역에서 모헨조다로나 하라파 같은 도시를 이루고 살았는데, BC1500년경 아리아인들이 이동해 와서 BC1000년경에는 갠지즈강 유역에 정착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카스트제도는 소수의 아리아인들이 원주민을 지배하기 위해 만든 제도이다. 브라만교는 윤회와 업을 바탕으로, 현세의 신분을 받아들여 그 역할을 잘 수행해야만 다음 생에서 좋은 계급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카스트제도를 정당화하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그러나 거듭되는 전쟁과 상업의 발달로 성장하게 된 크샤트리아와 바이샤의 불만이 커지면서, BC6세기에 석가모니에 의해 탄생한 불교가 이들 계급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석가모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으며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평등의식을 설파했다. BC321년경 찬드라 굽타가 북인도에 세운 마우리아 왕조와 AD105년경 서북인도에 들어선 쿠샨왕조에 의해 불교가 크게 융성하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마우리아 왕조 시기의 소승불교는 개인의 해탈을, 쿠샨 왕조 시기의 대승불교는 중생의 구제를 강조했다. 소승불교는 바닷길을 통해 동남아시아에, 대승불교는 비단길을 통해 중국 등 동아시아 3국으로 주로 전파되었다.

 

 

 

1. 힌두 세계의 울타리를 세우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쿠샨 왕조가 쇠퇴한 뒤 북인도에는 4세기부터(320년경) 굽타 왕조가 성장하였다. 굽타 왕조는, 중국의 한나라가 오늘날의 중국 문화를 완성 하였듯,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인도의 기틀을 다졌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주변 민족의 잦은 침입에 대항하며 인도인이라는 민족의식이 성장하였고, 원래의 인도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 결과 불교에 의해 쇠퇴하였던 카스트제도를 강화하고, 브라만교를 기본으로 불교와 각종 종교를 혼합한 힌두교를 탄생시켰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그 외 수학과 천문학 등의 자연과학도 발전하였다. 굽타 왕조는 4세기 초에서 6세기 말까지 존속하며, 인도다운 인도를 만든 왕조이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p147>

 

 

 

2. 인도에 찾아온 이슬람 세력

 

굽타왕조가 약해지고 인도는 분열의 시대를 맞았다. 그사이 아라비아 반도에서 세력을 키운 이슬람이 인도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11세기 서아시아 지역에서 아랍인을 물리치고 이슬람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한 셀주크 투르크와 동일한 투르크족, 그 돌궐족이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투르크족은 10세기 말에 가즈나 왕조를, 12세기 말에 구르 왕조를 세워 북인도를 침략했다. 그러나 인도에 독자적인 이슬람 왕국이 들어선 것은 1206년, 구르왕조의 무함마드가 인도에 두고 온 노예 아이바크에 의해서였다. 아이바크가 세운 인도 최초의 이슬람 왕조를 노예왕조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p155>

 

델리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운 노예왕조의 지배자들은 바그다드의 칼리프로부터 술탄의 칭호를 받게 되는데, 이후 등장한 이슬람 왕조를 델리 술탄 왕조라고 한다. 이슬람 왕조는 평시에는 이슬람의 교리에 따라 알라 앞에서의 인간평등을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에 인도의 많은 하층민들은 이슬람을 지지했다.

 

인도의 마지막 이슬람 왕조는 독특하게도, 몽골의 후예를 자처한, 바부르의 무굴제국이다. 무굴은 페르시아어로 몽골을 뜻한다. 이슬람을 믿는 몽골인이 인도에 나라를 세운 것이다. 무굴제국은 1526년부터 1858년 영국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300년 이상을 지속하며, 인도에 힌두-이슬람 문화를 꽃피웠다.

 

 

3. 더 넓은 인도를 찾아서

 

인도는 남쪽의 데칸고원을 경계로 북인도와 남인도로 나뉜다. 우리가 아는 인도의 주요 역사는 대부분 데칸 고원 북쪽에서 벌어졌다. 인도 전체가 지금처럼 통일된 것은 근대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부터다.

 

남인도 지역의 왕조는 북인도 왕조의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고유의 독자적 정치, 문화 체제를 확립했다. 카스트제도도 미약하여 계급적 차별이 고착화되지 않았고, 여성의 지위도 상당히 높았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p158>

 

남인도 지역은 인도양을 지나는 바닷길의 중심지여서 무역이 발달하였고, 따라서 외국과의 문물교류도 활발하였다.

 

 

4. 뭍과 바다를 품은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라는 유럽인이 붙인 명칭처럼 인도와 중국 사이에 위치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중국과 인도의 영향을 받아들이면서도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해 갔다. 동남아시아의 중심국가로는 베트남, 앙코르, 인도네시아 등이 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구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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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아시아는 근동, 중동 등으로도 불려왔다. 최근 세상을 뒤흔들고 있는 이슬람이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7세기나 되어서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 동․서 교역로의 강대국,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개방적 지형으로 고대로부터 여러 민족의 침입이 있었고 왕조 교체가 잦아서, 이 지역의 역사를 세세하게 공부하기는 매우 힘들다. 최초의 통일제국인 아시리아가 가혹한 통치로 단명하고, 진정한 고대제국이라 할 수 있는 페르시아 제국이 서남아시아를 차지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1 p90 >

 

그냥 페르시아 제국이라고 할 때는 BC559에서 BC330까지 통치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를 말한다. 이 페르시아는 그리스의 폴리스 세계와 ‘페르시아 전쟁’을 치렀다.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에 의해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가 망하고 뒤를 이어 파르티아 왕국이 400여 년간 이 지역의 강자가 되었는데, 오랜 기간의 존속에도 불구하고 세계사적으로 특기할만한 세력은 아닌지 별 언급이 없다. 동·서무역의 주역자리를 지키며, 전성기의 로마제국과 여러 차례 충돌했다는 정도이다. 파르티아는 이란계이고, 박트리아는 그리스계이다.

 

파르티아왕국을 무너뜨리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차지한 것은, 페르시아제국의 부흥을 내세운, 사산왕조 페르시아이다. 사산왕조는 로마제국과 대립하면서, 동·서무역의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신라까지 페르시아 문물이 들어왔다는 증거로 삼는 물병도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것이다. 사산왕조는 페르시아의 관용정신을 이어받아, 동·서 문화의 중심지로서 다양한 문화를 발전시키며 227년경부터 642년까지 이어졌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1 p92 >

 

지도만 딱 보아도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로마제국(비잔티움제국)은 동서교역의 패권을 놓고 충돌하게 되어 있다. 두 제국의 충돌은 예기치 않게 서아시아 세계에 거대한 변화를 몰고 왔다. 아라비아반도의 성장이 그것이다. 동·서 교역을 주도하던 상인들은 두 거대 제국의 충돌로 육상 교역로가 위험하게 되자 아라비아 반도를 돌아가는 해로를 모색하게 되었다. 부족 단위로 유목과 오아시스 농경을 하던 아라비아인들은 아라비아 반도가 새로운 교역의 중심지로 떠오르는 것을 보며, 동·서무역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이에 따라 해안가의 메카와 야스리브(메디나) 같은 도시가 급속히 성장했다. 아라비아인은 모두 상인이라는 등식도 이때부터 성립하게 되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2. 아랍에서 이슬람교가 일어나다.

 

잉여농산물과 함께 계급이 생겨났듯이 (인간문명이라는 것이 왜그런지),  발전할수록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경향을 띤다. 메카 등은 상업 활동으로 부유해졌으나, 아라비아인은 부를 독차지한 귀족과 먹고살기조차 힘든 빈민으로 극명하게 나뉘어졌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7세기 무함마드가 “신 앞의 모든 신자는 평등하다.”를 외치며 예언자를 자처하자, 빈부격차에 시달리던 많은 사람이 그를 따랐다. 평등을 인정할 수 없는 메카 귀족들의 박해로 무함마드는 야스리브(메디나)로 피신하였다. 헤지라(622)로 불리는 이 사건은 이슬람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작성자 미쉘>

 

무함마드는 세력을 확장하여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였다. 일부는 전쟁을 통해서지만 대부분의 부족은 외교와 담판으로 이슬람세계에 통합되었다. 우리나라의 고조선이 단군왕검이 지배하는 제정일치 사회였듯, 이슬람 역시 무함마드가 종교적 지도자인 동시에 정치적 지배자인 정교일치의 사회를 이룩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이슬람교는 어떤 종교보다 정치 및 일상적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무함마드가 메디나로 이주한 것은 무작정 도피한 것이 아니다. 메디나에서 한 부족이 제3자에게 분쟁조정을 의뢰하고자 무함마드를 초청했던 것이다. 이후 무함마드는 신의 예언자일 뿐 아니라 정치 지도자이자 입법자로 자리매김 하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무함마드가 죽고 난 뒤 이슬람은 더욱 세력을 확장했다. 중세의 이슬람 세계는 크게 네 시기로 분류해 볼 수 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먼저 정통 칼리프 시대가 이어졌다.  4대에 걸쳐 선출된 칼리프가 이슬람 세계를 이끌었다. 칼리프란 무함마드의 후계자 혹은 대리자를 뜻한다. 마지막 칼리프인 알리는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이다. 알리는 1대 칼리프 선출때부터 유력 후보자였으나 젊은 나이로 인해 선출되지 못했다. 이때부터 칼리프의 자격을 두고 논란이 있었고, 4대째 선출된 알리가 암살된 이후에는 대립이 격화되었다. 알리를 지지하는 세력은 칼리프는 무조건 무함마드의 혈통이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반대 세력은 혈통과 관계없이 무함마드의 언행(순나)을 이어받은 사람은 칼리프의 자격이 있다고 맞섰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이어지는 시기는 우마이야 가문이 칼리프를 세습한 우마이야 왕조 시대다. 우마이야 왕조가 열리면서 알리를 따르는 무리들은 극렬 반발했고, 이로부터 1400년에 걸친 시아파(시아 알리: 알리를 따르는 무리)와 수니파(무함마드의 언행)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우마이야 왕조를 연 무아위야는 시리아의 총독이었다. 시리아의 중심지인 다마스쿠스가 수도가 된 것은 이때문이다. 우마이야 왕조는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런데 정복된 곳의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바람에 우마이야 왕조는 재정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슬람교에 의하면 모든 무슬림은 평등하기 때문에 개종만하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다.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를 믿을 수 있었지만 지즈야라는 세금을 내야했다. 피정복민들이 초기에 대거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은 이 세금 때문이었다. 종교적 성공이 역설적으로 경제적 위기를 불러 왔던 것이다. 결국 우마이야 왕조는 교리에 위배됨에도 불구하고 개종한 비아랍인들에게 세금을 계속 물리는 등 차별정책을 실시했다. 이런 아랍인 제일주의는 비아랍인과 시아파의 불만을 폭등시켰다. 우마이야 왕조가 급속한 팽창에도 불구하고 90년 정도로 단명한 것은 이때문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3. 세 대륙을 품은 이슬람

 

아바스 왕조가 그 뒤를 이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아바스 제국은 민족차별 없이 이슬람법에 따라 평등하게 통치하는 "진정한 의미의 이슬람 제국"이었다. 하지만 신실한 아랍 무슬림들에게 개종한 이민족 무슬림들은 이슬람교에 철저하게 복종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 불만을 아바스 제국은 움마와 울라마를 통해 해결했다. 행정적 통치는 칼리프가, 종교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은 울라마라는 이슬람 지식인 혹은 (종교)법률가들에게 맡겼다. 무슬림은 움마라는 (종교)공동체 안에서 코란을 필두로 한 샤리아(이슬람법)에 철저히 복종하며 살았는데, 이 샤리아를 해석하고 개개 행위가 샤리아에 적법한 것인가를 판단하는 일을 울라마가 담당했다. 무슬림의 삶에 중요한 것은 국가가 아니라 움마가 되었다. 중앙권력은 세금을 걷는 등 행정적으로 관여했을 뿐이다. 아바스 제국의 이런 정책은 이후 모든 이슬람 국가에 영향을 미쳤다. 이슬람 세계가 다른 종교에 관대했던 것은 이슬람 움마처럼 다른 종교에도 움마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즉 이슬람 세계 안에서 각각의 종교인들은 종교 자치체를 꾸려 각각의 종교와 관습에 따라 살 수 있었다. 

 

"율법의 자율적 운용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된 중요한 결과는, 울라마가 무슬림의 생활을 인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종교집단의 지도자들 역시 자기네 신자들의 개인적 · 종교적 문제를 지도하고 규제해주기를 무슬림 정치 당국이 기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교나 유대교 공동체에 폭넓은 자율성이 보장되었다." 『세계의 역사』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1 103>

 

하지만 아바스 왕조가 이슬람 세계를 모두 다스린 시기는 없었다. 이베리아 반도에는 후우마이야 왕조가, 북아프리카에는 파티마 왕조가 각기 이슬람 세계를 다스렸다. 10세기에는 페르시아계 부와이 왕조가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정치적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이 시기 칼리프는 여럿이었지만,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이슬람 제국은 절정기를 맞고 있었다.

 

이베리아반도를 차지한 후우마이야 왕조에는 이슬람, 비잔티움, 그리스의 문화가 어우러져 화려한 꽃이 피었다. 종교적 차별 없이 아랍인과 유럽인, 이슬람교도와 크리스트교도가 어울려 살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카이로를 수도로 삼고 북아프리카를 차지한 파티마 왕조는 이슬람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다. 파티마는 무함마드의 딸로 4대 칼리프였던 알리의 부인이다. 즉 파티마 왕조는 시아파가 세운 이슬람 국가로 무함마드의 혈통만을 칼리프로 인정했다.

 

아바스 왕조의 수도인 바그다드는 이슬람세계의 중심지였다. 유럽과 지중해, 아시아를 잇는 교역로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바그다드는 ‘세계의 시장’ 이었다. 탈라스전투를 통해 당으로부터 비단길을 빼앗은 이슬람 상인들은 낙타를 이용하여 아프리카 내륙에서 중국까지 왕래하였고, 배를 이용한 해로를 통해서는 인도양과 남중국해를 거쳐 고려까지 왕래하였다.

 

 

 

4. 이슬람세계에 부는 바람

 

이슬람에 새로운 주인이 나타났다. 무함마드 이래 이슬람세계의 주인공은 아랍인이었다. 그러나 이제 튀르크인이 이슬람세계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튀르크인은 우리역사에 돌궐로 등장하는 민족이다.

 

<처음 읽는 터키사>

 

 

셀주크 튀르크는 1037년에 건국되어 13세기 몽골의 침입으로 크게 쇠퇴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바그다드를 점령한(1055) 토그릴 베그가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로부터 술탄이라는 칭호를 받음으로써 이슬람세계는 처음으로 정교분리의 체제를 갖게 되었다. 칼리프는 종교적 상징으로만 남았다. (움마를 인정한다해도 칼리프는 무함마드의 후계자로 종교적 수장이다.)

  

 <처음 읽는 터키사>

 

서양사에서 셀주크 튀르크는 십자군 전쟁으로 등장한다. 셀주크 튀르크가 아나톨리아 반도를 차지하면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를 사로잡았다. 비잔티움제국은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를 계기로 약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1096~1270)이 벌어지게 되었다. 십자군 전쟁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살라딘이다. 살라딘은 사로잡은 크리스트교도들을 풀어 주어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관대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1 128>

 

그러나 지중해를 둘러싼 비잔티움 제국과 이슬람의 아웅다웅은 한방에 날라 갔으니, 몽골군이 해일처럼 밀어닥쳤다. 1258년 바그다드는 몽골에 함락되고, 몽골세력은 이 지역을 일한국으로 편입하였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몽골은 이슬람의 새로운 수호자가 되었다. 셀주크의 명맥은 1308년까지 이어졌으나 술탄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각 지역의 튀르크족이 점차 떨어져 나가 크고 작은 나라를 세웠다. 그 중 하나가 1299년 오스만이 세운 오스만 공국이다.

 

  <처음 읽는 터키사>

 

이후 튀르크족이 다시 한번 서아시를 통일하는데, 1차 세계 대전 때까지 거대제국을 형성했던 오스만제국(1299~1922)이다. 오스만 후기에 여러 민족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함에 따라 대부분의 영토를 잃고 아나톨리아반도의 터키 공화국으로 존속하게 되었다 . 오스만제국의 통치를 받았던 여러민족들은 독립하여 각각 현대의 여러국가를 건설하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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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를 가지고 역사 공부를 시작했다. 역사 문외한부터 재야 고수까지 한 자리에 모인 것 같다. 난이도 설정이 힘들게 되었지만 가급적 초보자 위주로 진행하려고 한다.

 

이 책은 말하자면 편년체 형식이다. 연대별로 끊어서 각 대륙의 주요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동시대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알기는 쉬우나, 하나의 문명권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보기에는 불편하다. 하나의 흐름으로 체계화하기 위해서는 다른 자료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인터넷을 뒤져 보니,<세계사 연대표>라는 것이 몇 가지 있다. 동일한 자료가 여러 사이트에 있는 걸로 보아 원본이 있을 것 같은데 영 출전을 찾기가 어렵다. 인쇄를 해 보았는데 워낙 콩알만 해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여하튼 그렇게 해서 나도 출전을 명기하지 못한 채 실어 놓는다.

  

 

아래 것은 공부하면서 필요한 것만 간단히 그려본 세계 연표이다.

 

 

 

이번 주는 <3장 드넓은 제국, 커다란 믿음> 이다. 제목에 나와 있듯이 대제국이 건설되고, 주요 종교들이 확립된 시기다. 총 6절로 되어 있다. 제국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거대한 영토가 첫 번째 요소이다. 정복전쟁 자체도 힘들지만 공성보다 수성이 더 어렵다고,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민족들을 통합할 수 있는 제도와 사상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제도와 사상은 “길”을 통해 전달 혹은 전파되어야 한다.

 

 

“모든 길은 제국의 동맥과 같다. 그리하여 페르시아 제국 내의 모든 길은 페르세폴리스로 통하듯, 로마 제국 내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p53”

 

페르시아 제국은 관용을, 로마 제국은 로마법을 통치 원리의 하나로 삼았지만, 여러 민족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통일된 사상, 하나의 종교이다.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차라투스트라는 모두 기원전 5~6세기 인물이다. 500년 정도 뒤에 예수가 그리고 또 600년 정도 뒤에 마호메트가 탄생했다. 기원전 6세기라는 까마득한 과거에 약속이나 한 듯이 위대한 사상가들이 한꺼번에 등장한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 아마도 제국의 시대가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을까..

 

 

1. 최초의 세계 제국, 페르시아

 

 

 <EBSi 왕초보 개념 정리, 역사>

 

 <처음 읽는 터키사 >

 

 

 

이 시대의 페르시아 제국은 AD227년경에 세워져 642년까지 지속된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는 다른 페르시아이다. 최초의 세계 제국이라고 부르지만, 서아시아 지역을 통합한 최초의 통일 제국은 아시리아이다. 아시리아가 멸망한 뒤 다시 이 지역을 통합한 것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로, BC700년경에 세워졌지만 제국으로 불리는 시기는 BC559년부터이며 BC330년경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멸망했다.

 

페르시아 제국은 통합된 여러 민족의 언어나 종교, 고유 풍속을 존중하는 관용 정책으로 약 200년간 서아시아를 지배하였다. 페르시아는 다른 민족의 종교를 인정했지만 자신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다. 기원전 6세기 경 조로아스터(차라투스트라)가 만든 이 종교는 세상을 선과 악의 대결로 보았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다.

 

페르시아의 치세를 대표하는 왕은 다리우스 1세(재위 BC522~BC486)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다리우스 1세는 약 2400km에 달하는 왕의 길을 만들어,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였다. 왕의 전령은 이 길을 일주일 만에 갈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다리우스 1세는 서양사의 면에서 보면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킨 왕이다. 소아시아에서 일어난 이오니아 반란을 아테네가 지원한 사실을 알고, 다리우스1세가 그리스 원정에 나선 것이다. 1차는 폭풍으로 실패하고, 2차는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그리스 원정은 다리우스1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이어받았지만, 살라미스 해전에서 대패하며 끝이 났다.

 

 

 

2. 폴리스에서 헬레니즘 세계로

 

지중해 문명은 이집트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을 받아 태어났다. 서양문명의 근간인 지중해문명은 그리스 폴리스 시대와 헬레니즘 시대를 거쳐 로마로 이어졌다.  단 아래 도표는 지중해 문명권을 장악한 순서를 보여주는 것이지, 건국 순서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의 폴리스 시대와 로마 왕정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그리스 본토와 크레타와 주변 에게해 섬들을 아우르는 에게문명은 신화로 취급되어 왔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이 청동기 문명의 끝 무렵인 트로이 전쟁을 다루고 있다. 트로이 전쟁에 매혹된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에 의해 에게문명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참고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오디세우스가 그리스로 귀환하는 10년간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하면 먼저 떠올리는 폴리스는 에게문명이 끝나고, 갑자기 문명의 흔적이 사라진 철기 초기의 암흑기를 지나, BC750년경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처음 읽는 터키사 >

 

그리스 폴리스의 대명사,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데, 그 원인은 지형과 인구 구성에 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아테네는 산악지형으로 농사를 짓기 힘들었으므로 주로 해상 교역에 의존했다. 스파르타는 평야를 차지하여 상대적으로 식량 자급률이 높은 편이었다. 여하튼 대부분의 폴리스들은 먹고살기 위해 바다로 진출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소아시아 지역에 많은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소아시아 지역으로 뻗어 나온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는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는 시민이 반 이상을 차지하는 반면, 스파르타는 시민이 6% 정도에 불과했다. 극소수의 시민이 대다수의 노예와 비시민을 다스려야 했던 스파르타는 군국주의적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시민의 비율이 높고 많은 식민지로 인해 경제력이 강했던 아테네는 민주정을 확립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EBSi 이다지의 세계사 개념 다지기> 

 

아테네라고 하면 무어니 무어니 해도 역시 고대 민주정이 핵심이다.

아테네 역시 처음에는 귀족들이 권력을 독점했으나 전쟁이 잦아지면서 큰 역할을 하게된 중장보병들이 점차 참정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중장보병은 스스로 무기를 사서 무장할 수 있는 부농 평민들이었다. 솔론은 부농들의 참정권을  보장하고 귀족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재산에 따라 참정권을 부여하는 금권 정치를 시행하며 조정자로 나섰으나 귀족과 평민 모두의 불만을 샀다. 특히 재산이 하나도 없는 빈농들의 불만이 컸는데 이때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빈농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을 잡았으나 독재를 하면서 아테네의 민주정은 참주정치로 변질되었다. 이후 클레이스테네스는 참주의 출현을 예방하기 위해 도편 추방제를 도입하였다. 또한 500인 평의회를 설치하여 원칙적으로 평민들이 모두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며 아테네 민주정의 기반을 공공히 했다.

 

아테네 민주정을 꽃피운 페리클레스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에 등장한 지도자이다. 페르시아 전쟁으로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아테네는 외부적으로는 다른 폴리스들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를 바탕으로 내부적으로는 아테네 민주정의 화려한 꽃을 피웠다.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에 가입한 폴리스들이 방위비로 모아놓은 델로스 금고의 돈을 마음대로 꺼내서 가난한 아테네 시민들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수당제 등에 사용하였다. 페르시아 전쟁에 노잡이와 수병으로 참여하여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끈 가난한 시민들이 당당히 참정권을 요구하며 아테네의 민주정은 전진하였으나 그 댓가는 어쩌면 주변 폴리스들이 치러야 했던 것이다.

 

아테네의 전성기는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끝낸 BC480년부터 펠로폰네소스전쟁(BC431 시작) 사이의 50여년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서양철학을 대표하는 소크라테스와 <오이디푸스왕>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 그리고 아테네 정치의 꽃을 피운 페리클레스가 동시에 활약 할 만큼 융성하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59>

 

페르시아 전쟁은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페르시아의 통치 아래 있던 이오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 반란을 아테네가 지원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이오니아 반란을 진압하고 아테네를 응징하기 위해 전쟁에 돌입했다.

 

3차에 걸친 페르시아의 침공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그리스가 승리하였지만, 그리스의 승리는 그리스 세계의 분열을 가져왔다. 아테네는 2차 침입 당시 마라톤 평원에서 대승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3차 침입 시에는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함으로써 단숨에 폴리스 세계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스파르타는 3차 침입 시 테르모퓔라이에서 300인의 정예병이 결사항전을 하였지만, 스파르타 왕이 전사하며 패하였다. 페르시아 전쟁으로 인해 아테네는 폴리스 세계에 대한 패권적 야망을, 스파르타는 질투와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강유원의 『역사 고전 강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페르시아 군의 제3차 침입은 육지와 해상에서 동시에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육군은 테르모퓔라이에서 스파르테군을 만나 승리를 거둡니다. 이때 스파르테 왕이 전사합니다. 반면 해군은 살라미스에서 아테나이군을 만나 대패합니다.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해군력을 키운 아테나이의 적수가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에서 거둔 두 번의 승리는 아테나이로 하여금 패권적 야망을 갖게 합니다. 반면 전투에서 패배한 스파르테는 아테나이에 대한 질투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페르시아 전쟁의 결과로 인해 희랍 세계 내부에서 반목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중에 자세하게 살펴보겠지만, 투키디데스가 말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이 바로 이것입니다. 즉 아테나이의 야망과 스파르테의 두려움이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입니다. p49」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폴리스 세계를 둘로 조각내었다. 아테네 동맹 즉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동맹 즉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나뉘어 잔인하고 비열한 내전 끝에 스파르타 측이 승리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승자는 스파르타가 아니라 페르시아의 황금이었다고 할 정도로, 펠로폰네소스 전쟁 후 폴리스 세계는 지리멸렬해지다,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종말을 맞았다. 이 전쟁은 페르시아의 꿈이 이루어진 전쟁 혹은 그리스의 자살이라고도 불린다.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강유원의 『역사 고전 강의』를 참조하면 좋을 것 같다. 예전에 읽을 때 요약해 둔 글이 있는데, 링크해 둔다.

 

http://blog.aladin.co.kr/753199155/6812974

 

폴리스 세계가 마케도니아에 의해 멸망한 뒤 현재 우리가 그리스라고 부르는 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이룩한 제국은 얼마 가지 못해 망하고, 뒤를 이어 로마 제국이,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는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이 지역을 다스렸다. 근대 그리스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1821~1829년까지의 독립전쟁 결과 탄생했다. 그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도 그리스가 고대 폴리스 세계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리스 특유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알렉산드로스(재위 BC336~BC323)가 갑자기 열병으로 죽은 후 50년 가까운 내전 끝에 제국은 세 개로 분할되어 알렉산드로스 휘하 장군들의 후손에 의해 지배되었다.

 

 <용선생 세계사 2>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초 단명했지만, 그가 통합한 지역을 통해 그리스 문명이 이슬람 세계는 물론 인더스강 유역까지 전파되었다. 헬레니즘 문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이름은 헬라스였고, 헬라스의 시민들을 헬레네스라 했다. 헬레니즘은 여기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를 비롯한 정복지 곳곳에 자신의 이름을 본 딴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다. 알렉산드리아는 학문의 중심지로, 그리스의 철학과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의 과학이 두루 섞이며 자연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이후 중세를 거치며 유럽인들은 이 시대의 과학적 업적을 잊었지만, 이슬람 학자들이 이를 이어받아 이슬람 과학을 꽃피웠다.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등이 활동하였다.

 

 

헬레니즘 문화는 인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의 잘생긴 조각상을 본 따 불상을 조성하게 만들었다. 이 간다라 미술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까지 전파되어 석굴암의 본존불상에서 꽃을 피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더불어 희랍철학의 대표자이지만 출신은 마케도니아이다. 여하튼 알렉산드로스는 희랍 문명의 세례를 받았고 그가 건설한 제국에서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세계시민주의를 주창하여 동서양을 하나로 묶으려 했다. 그러나 하나된 세계에서 유행한 철학은 철저히 개인주의적이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현세의 쾌락을, 스토아 학파는 금욕을 가르쳤다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철저히 탈정치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준 폴리티콘-폴리스에서 사는 동물)"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철저히 정치적이었던 폴리스 시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점차 쇠퇴하여 헬레니즘 시대에 끝이 났다.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에피쿠로스 철학입니다. 사이좋은 친구들끼리 모여서 동아리를 만들고 놀자는 탈정치적인 철학입니다. 둘째는 스토아 철학입니다.  이 세상은 덧없는 것이고 진정한 행복은 우주적 질서와 교감할 때 얻을 수 있다는 탈현실적인 철학입니다. 이러한 철학들은 현실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전혀 없을 때 등장합니다. 사실상 패배자의 철학입니다. 셋째는 퀴니코스 학파(회의주의) 입니다.  이 학파의 대표적인 사람이 '통 속의 디오게네스' 입니다. 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일화는 사실 여부를 떠나서 상징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는 통 속에 살고 있었는데, 알렉산드로스가 현자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자 "햇볕을 가리지 말아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통은 집이 아닙니다. 그저 내 몸 하나 뉘일 수 있는 공간일 뿐입니다. 희랍인은 자기 땅을 소유한 시민이었는데 그걸 포기하였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는 알렉산드로스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완전히 탈정치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민회에 나가서 나라의 일을 격렬하게 토론하던 폴리스 시민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p141」

 

그리스 시민들을 생생히 살아 움직이게 했던 정치와 현실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허무주의가 만연했던 것이다. 플라톤 철학이 주장하는 '이데아'는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플라톤은 비록 현실의 질서가 무너졌다고 해도 불변의 진리는 존재한다는 것과 우리 삶은 그 진리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라톤 철학은 무너진 공동체를 일으켜 세우고 이를 악물고 현실 세계를 올바로 살아내기 위한 허무 극복의 철학이었다.  

 

부언이지만 재미있는 사실 하나.

고대 마케도니아는 현재 세 나라에 걸쳐 나뉘어져 있는데 서로 마케도니아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마케도니아 공화국과 그리스가 그렇다.

 

  <용선생 세계사 2>

 

 

 

3. 로마 제국과 크리스트교의 만남

 

 

  

에게문명이 꽃을 피우고 헬레니즘 문화가 시작될 때까지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작은 도시 국가였다. BC750년 건국된 로마는 BC510년까지 왕정체제였는데, 우리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역사이다. 로마 정치제제의 특징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이행했다는 것이다. 로마 정치 체제를 대표하는 공화정은 BC510년부터 BC27년까지 이어졌으며, BC27년에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고 실질적인 황제권을 행사함으로써, 로마는 제정 시기로 접어들었다.

 

로마제국은 AD 330년에 비잔티움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395년에 공식적으로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으로 분할되었다.  서로마 제국은 유목민인 훈족(흉노족)의 침입에 따라 밀려 내려온 게르만족에 의해 476년 멸망했다. 서로마 제국이 망하고 서유럽 세계는 프랑크족(게르만의 일족)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카롤루스 대제 때 전성기를 누린 후 몇 개로 쪼개진 프랑크 왕국은 9~10세기 즈음 노르만족의 침략으로 약화되었다. 노르만족과 싸우며 지방의 기사 세력이 성장했고, 이후 서유럽은 영주(기사)를 중심으로 한 중세 봉건사회로 진입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1000년 이상 로마의 명성을 유지했다.

 

  

<EBSi 이다지의 세계사 개념 다지기> 

 

로마의 입법과 행정은 크게 두 세력이 나누어 맡았다. 귀족과 평민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평민이 정치와 행정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로마 공화정의 시작은 귀족 공화정이었다. 여기에 전쟁을 통해 큰 기여를 하게 된 로마 중장보병 즉 평민들이 참정권을 요구하며 투쟁해 나가는 과정에서 공화정이 점차 확대되어 갔던 것이다. 귀족들로 구성된 원로원은 지금의 입법 기구와 비슷하고, 원로원에 의해 선출된 집정관은 지금의 대통령과 유사한 통치자였다. 평민들의 발언권이 점차 강화되면서 이런 귀족 정치에 대항하며 평민회가 만들어졌다. 평민회는 호민관을 선출하여 귀족들로부터 평민들을 보호할 수 있게 하였다. 호민관은 원로원이 만든 법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집정관은 2명이었는데, 처음에는 원로원에서 모두 선출하였으나 리키니우스법을 통해 집정관 1명은 평민회에서 선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호르텐시우스법이 통과되며 평민회도 원로원과 동등하게 입법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로마 공화정은 절정에 도달했다. 로마는 일련의 민권 확장을 법을 통해 성문화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로마 공화정이 발전하는 동안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 재해권을 넘보기 시작했다. 로마가 지중해를 장악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포에니 전쟁이다. 포에니 전쟁은 약 120년의 기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벌어지는데 결정적인 전쟁은 2차 포에니 전쟁이다.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피레네와 알프스를 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며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와 12년 동안 한번도 패한 적이 없지만 전쟁의 최종 승리자는 로마였다. 카르타고를 물리친 로마는 서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며 세계 제국으로의 발돋움을 시작하였다.

 

 <용선생 세계사 2>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로마가 카르타고와의 전쟁에 승리하며 급팽창하자, 로마의 민권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오랜 전쟁 끝에 돌아온 고향 로마에서 평민들이 마주한 것은 황폐해진 자신의 땅과, 정복지와 노예를 독차지함으로써 더욱 부유하게 된 귀족과 그들의 대농장(라티푼디움)이었다. 게다가 속주에서 값싼 농산물들이 들어오자 농민들은 급속히 몰락해 갔다.

 

 

귀족과 몰락 농민 사이의 갈등은 내전에 가까운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때부터 농민들의 불만을 흡수해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 군인 정치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오랜 전쟁을 통해 강력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거의 사병화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호민관이 된 그락쿠스 형제가 개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로마는 군인 정치가들의 손으로 들어갔다. 원로원은 거의 허수아비 상태가 되었다. 군인 정치가들은 1인자 자리를 놓고 서로 투쟁하였다. 이 시기를 삼두정치 시대라고 하는데, 1차 삼두정치를 이끈 사람이 그 유명한 카이사르이다. 카이사르는 황제가 되려다 암살당했다. 로마를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뒤바꾼 사람은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다. 옥타비아누스는 2차 삼두정치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안토니우스를 물리치고 일인자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를 교훈삼아 황제의 칭호를 거절하고 스스로 제1시민이라고 칭하였다.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바쳤다. 어쨌거나 실질적으로는 황제와 같은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를 기점으로 로마의 정치제제를 제정으로 분류한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로마제국 전체를 통틀어 최전성기는 로마공화정이 아니라 로마제정기의 오현제 시대이다. 이 시기 황제는 세습이었으나 실제로는 세습이 아니었다. 황제는 후계자를 자신의 양자로 삼아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때의 전성기를 ‘팍스 로마나’라고 부른다. 그런데 강유원의 『역사 고전 강의』는 팍스 로마나를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용선생 세계사 2>

 

「팍스 로마나는 옥타비아누스가 ‘존엄한 자’ 즉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원로원으로부터 받은 서기전 27년부터 -이런 까닭에 팍스 로마나를 ‘팍스 아우구스타’라고도 합니다.- 이른바 오현제 시대가 끝나는 서기 180년까지를 가리킵니다. ... 팍스 로마나는 ‘로마에 의한 평화’ 라는 뜻인데, 정확히 말하면 ‘로마의 군사력에 의한 평화’, 즉 식민지에 대한 폭력과 착취로 유지되는 체제입니다. 로마는 트라야누스 황제 때 최대의 영토를 확보했습니다. 이 국경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 팍스 로마나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는 군사력을 통해 식민지를 점령하고 로마화를 진행했습니다. p178」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66>

 

 <용선생 세계사 2>

 

 

 

어쨌든 오현제 시대가 막을 내리고 로마는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오현제 시대의 마지막 황제는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첫 부분에서 죽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이다. 이 황제가 바로 『명상록』을 쓴 철학가이기도 하다.

 

로마를 중흥시키려 한 몇 명의 황제가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13년 크리스트교를 공인하고, 330년 제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겼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크리스트교는 80년이 지난 392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그러나 로마는 395년에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열되고, 서로마 제국은 476년에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했다.

 

 

 

 

4 불교의 가르침을 받은 마우리아

 

<EBSi 이희명의 대단한 세계사>

 

 

인도에 관해서는 사실 아는 것이 많지 않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것은 불교이다. 이 책의 내용도 불교에 관한 것이 가장 많다. 간단하게만 요약해 본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인도 역사상 인도 대부분을 처음으로 통일한 나라는 마우리아 왕조이다. 마우리아 왕조는 BC321년 경 찬드라 굽타 마우리아에 의해 세워졌다. 당시 이미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에 의해 서양과 문물을 교류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 상태였다.

 

마우리아왕조의 전성기는 3대인 아소카왕 시기였다. 아소카왕은 조선의 태종보다 더 심하게 수많은 형제들을 죽여 피를 강물처럼 흘리며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이후 자신의 잘못을 크게 깨닫고 불교를 국가 종교로 적극 장려하며 불교 전파에 힘썼다. 아소카왕 당시의 불교는 깨달음을 중시하는 소승불교(상좌부불교)가 유행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아소카왕이 죽은 뒤 얼마 못가 마우리아 왕조가 멸망하였다. 이후 분열된 인도를 다시 통일한 나라는 쿠샨왕조였다. 쿠샨 왕조는 마우리아 왕조보다 조금 더 서쪽 이슬람 지역으로 치우쳐 있다. 당시는 서쪽에는 로마제국이, 동쪽에는 한나라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 거대제국들 사이에는 한나라 장건에 의해 비단길이 열려있었고, 동서양의 문물이 비단길을 통해 교류하였다. 헬레니즘문화는 마우리아 왕조 때부터 전파되기 시작했지만 쿠샨 왕조에 와서는 간다라 지역의 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스의 아름다운 조각상을 본떠 불상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쿠샨 왕조 시기에 유행한 불교는 개인의 깨달음 보다는 중생 구조를 강조한 대승불교였다. 이 대승불교와 불상으로 대표되는 간다라 미술은 한나라를 통해 우리나라에까지 전달되었다. 밀로의 비너스상이 석굴암 본존불에 구현된 것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BC6세기 왕자로 태어난 석가모니는 6년간의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 당시 인도는 브라만교를 바탕으로 한 카스트제도가 엄격하였다. 이런 인도 사회에서 석가모니는 인간이면 누구나 불성이 있고, 도를 닦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평등사상을 전파했다. 현실에서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평등이 가장 시급한 수드라 신분보다 크샤트리아와 바이샤 신분에게 더 환영 받았다. 전쟁으로 세력이 커진 크샤트리아와 상업의 발달로 부자가 된 바이샤들이 권력을 갖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불교가 왕권강화와 귀족계급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인 것과 어쩌면 비슷하다. 여하튼 불교는 이들 계급의 도움으로 인도사회의 주요한 종교로 발돋움하였다.

 

 

 

5. 중국의 울타리를 쌓은 진나라

 

중국의 전체 흐름에 대해서는 예전에 정리해 놓은 글이 있다.

http://blog.aladin.co.kr/753199155/7479040

 

인터넷에 중국 연대표는 엄청 많았는데, 나름대로 그려보기도 했다.

  

 

 

그럼 청동기 시대의 은과 주를 지나 춘추전국 시대로 들어가 보자.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춘추시대는 많게는 200여개의 국가가 있었고 ,전국시대로 넘어가 7웅으로 정리가 되었다. 7웅 중 고조선과 가까이 있는 연나라는 BC3세기에 고조선과 한판 붙기도 했다. 이때부터도 중국대륙의 골칫거리는 흉노였다. 진시황이 흉노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춘추전국시대에 조금씩 쌓은 것을 이어서 완성한 것이다. 진나라의 만리장성은 토성이고, 현재 남아 있는 만리장성은 명왕조 시기에 개보수 한 것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중국은 철기시대로 접어들면서 제후국들의 패권다툼이 치열해졌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지만 값싸고 단단한 철제무기가 만들어지면서 전쟁이 많아졌고, 이를 바탕으로 거대제국이 탄생했다.

 

춘추전국시대에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제자백가라 불리는 사상의 폭발이다. 공자, 맹자, 노자, 장자, 한비자, 묵자 등등 어릴 때부터 들어온 그 여러 ‘子’들이 이렇게 오래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놀랍고, 그 사상들이 지금까지도 우리 삶에 깊숙이 뿌리내고 있다는 것은 더욱 놀랍다. EBS 다큐프라임의 <절망을 이기는 철학, 제자백가> 6부작을 보면 각 사상에 대해 개략적 이해가 가능하다. 각 부마다 압축적으로 붙여 놓은 제목도 곱씹을 만하다. ( 1부 묵자, 정의 없는 세상에 분노할 때 / 2부 공자, 인간을 믿을 수 없을 때 / 4부 장자, 불안을 견딜 수 없을 때 / 5부 한비자, 간교한 기득권에 맞설 때) 사상이란 지적 유희나 탁상공론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뇌와 투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춘추전국시대의 오랜 혼란을 마감한 것은 너무도 유명한 진시황이다.  진나라는 BC221년에 중국을 통일하였으나 15년 가량 후인 BC206년에 망했다. 초단명 국가지만 중국대륙을 최초로 통일했을 뿐 아니라 통일한 지역을 통합하기 위한 여러 제도를 마련했다. 이 제도들은 한나라가 물려받아 확립하였다. 법가사상을 바탕으로 한 가혹한 통치와 만리장성 등의 대규모 토목공사로 인한 민생의 황폐화로 중국 최초의 민란이라는 진승과 오광의 난이 발생하며 끝내 멸망했다.  진시황은 중국 역사에 폭군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아직도 논쟁 중이다. EBS 다큐프라임 <불멸의 진시황>에는 그의 업적과 노고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영토 통일 후 12년 간을 제국의 진정한 통합을 위해 쉼없는 개혁을 추진하다 과로로 죽었다는 진시황이 정말 아방궁에서 불로초를 찾으며 흥청망청했다는 그 진시황일까 싶다. 진시황의 여산릉은 아직 발굴하지 않고 있다. 이천 년의 어둠으로부터 훼손 없이 발굴하기 위해 기술이 더 진보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진을 무너뜨린 한에 의해 쓰여진 역사가 아니라 진시황 자신이 직접 쓴 진나라의 역사가 여산릉에는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지 않을까?

 

 

6. 중국문화의 기틀을 다진 한나라

 

한나라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중국'의 기틀을 만든 나라이다. 진이 최초로 중국의 영토를 통일했다면, 한은 문화적인 면에서 하나의 중국을 완성하였다. 한나라는 중국 역사에서 고대국가를 완성한 왕조로 자리매김 된다. 한나라는 BC202년 유방이 초나라의 항우를 물리치며 중국 대륙을 차지하였다.

 

한나라는 한무제의 전성기를 거쳐 외척과 환관의 횡포에 시달리다, AD9년 외척인 왕망이 세운 신나라에 의해 잠시 맥이 끊겼다. 왕망은 토지사유와 노비매매를 금지하는 등 개혁정치를 폈으나 호족의 반발로 실패하고, AD23년 호족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한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광무제로 그가 즉위한 AD 25년부터를 보통 후한이라 부른다. 후한은 황건적의 난과 그 유명한 삼국시대를 맞으며, 220년 조조의 아들 조비에게 황제자리를 물려줌으로써 400여년 이어져온 왕조를 마감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한나라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건은 거의 한무제(재위 BC141~BC87) 시대에 일어났다.

   

진시황에 의해 파묻힌 유교를 되살려내 오늘의 공자가 있게 한 것도 무제다. 무제는 동중서의 건의로 유교를 국교로 삼아, 장안에 태학을 세우고 지방에 오경박사를 파견하여 유교를 가르치게 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흉노를 토벌하기 위해 장건을 대월지로 파견했다가, 서역으로 가는 사막길을 개척한 것은 너무도 유명한 사건이다. 이 사막길이 페르시아(당시에는 파르티아 왕국)를 거쳐 로마까지 이어져, 인도의 대승불교와 간다라미술이 우리나라에까지 전해졌다. 비단이 가장 많이 거래되었다고 해서 이 삭막한 사막길은 비단길이라고 불렸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용선생 세계사 2>

 

무제는 대월지와의 동맹에는 실패했지만 장건이 가지고 온 정보를 바탕으로 흉노를 몰아내고 영토를 확장했다. 영토 확장의 면에서는 우리나라도 한무제의 침략을 받았다. BC108년 고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세워진 뼈아픈 사건이다.

 

역사책의 고전이라 할 사마천의 『사기』가 쓰인 것도 무제 때이다. 기전체 양식을 확립한 것으로 유명한 이 책은 중국 전설상의 제왕인 요임금부터 무제 초반기인 BC 2세기 말까지의 한나라를 다루고 있다.

 

다들 알겠지만 한나라의 한은 한문, 한족, 한자 할 때의 그 漢이다. 漢나라가 중국문화의 근간이라는 것이 漢이라는 글자 속에 그대로 담겨있다.

 

 

* <세계사 공부> 카테고리 글들은 작성 후 조금씩 수정·보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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