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를 가지고 역사 공부를 시작했다. 역사 문외한부터 재야 고수까지 한 자리에 모인 것 같다. 난이도 설정이 힘들게 되었지만 가급적 초보자 위주로 진행하려고 한다.
이 책은 말하자면 편년체 형식이다. 연대별로 끊어서 각 대륙의 주요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동시대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알기는 쉬우나, 하나의 문명권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보기에는 불편하다. 하나의 흐름으로 체계화하기 위해서는 다른 자료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인터넷을 뒤져 보니,<세계사 연대표>라는 것이 몇 가지 있다. 동일한 자료가 여러 사이트에 있는 걸로 보아 원본이 있을 것 같은데 영 출전을 찾기가 어렵다. 인쇄를 해 보았는데 워낙 콩알만 해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여하튼 그렇게 해서 나도 출전을 명기하지 못한 채 실어 놓는다.
아래 것은 공부하면서 필요한 것만 간단히 그려본 세계 연표이다.
이번 주는 <3장 드넓은 제국, 커다란 믿음> 이다. 제목에 나와 있듯이 대제국이 건설되고, 주요 종교들이 확립된 시기다. 총 6절로 되어 있다. 제국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거대한 영토가 첫 번째 요소이다. 정복전쟁 자체도 힘들지만 공성보다 수성이 더 어렵다고,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민족들을 통합할 수 있는 제도와 사상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제도와 사상은 “길”을 통해 전달 혹은 전파되어야 한다.
“모든 길은 제국의 동맥과 같다. 그리하여 페르시아 제국 내의 모든 길은 페르세폴리스로 통하듯, 로마 제국 내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p53”
페르시아 제국은 관용을, 로마 제국은 로마법을 통치 원리의 하나로 삼았지만, 여러 민족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통일된 사상, 하나의 종교이다.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차라투스트라는 모두 기원전 5~6세기 인물이다. 500년 정도 뒤에 예수가 그리고 또 600년 정도 뒤에 마호메트가 탄생했다. 기원전 6세기라는 까마득한 과거에 약속이나 한 듯이 위대한 사상가들이 한꺼번에 등장한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 아마도 제국의 시대가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을까..
1. 최초의 세계 제국, 페르시아
<EBSi 왕초보 개념 정리, 역사>
<처음 읽는 터키사 >
이 시대의 페르시아 제국은 AD227년경에 세워져 642년까지 지속된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는 다른 페르시아이다. 최초의 세계 제국이라고 부르지만, 서아시아 지역을 통합한 최초의 통일 제국은 아시리아이다. 아시리아가 멸망한 뒤 다시 이 지역을 통합한 것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로, BC700년경에 세워졌지만 제국으로 불리는 시기는 BC559년부터이며 BC330년경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멸망했다.
페르시아 제국은 통합된 여러 민족의 언어나 종교, 고유 풍속을 존중하는 관용 정책으로 약 200년간 서아시아를 지배하였다. 페르시아는 다른 민족의 종교를 인정했지만 자신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다. 기원전 6세기 경 조로아스터(차라투스트라)가 만든 이 종교는 세상을 선과 악의 대결로 보았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다.
페르시아의 치세를 대표하는 왕은 다리우스 1세(재위 BC522~BC486)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다리우스 1세는 약 2400km에 달하는 왕의 길을 만들어,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였다. 왕의 전령은 이 길을 일주일 만에 갈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다리우스 1세는 서양사의 면에서 보면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킨 왕이다. 소아시아에서 일어난 이오니아 반란을 아테네가 지원한 사실을 알고, 다리우스1세가 그리스 원정에 나선 것이다. 1차는 폭풍으로 실패하고, 2차는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그리스 원정은 다리우스1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이어받았지만, 살라미스 해전에서 대패하며 끝이 났다.
2. 폴리스에서 헬레니즘 세계로
지중해 문명은 이집트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을 받아 태어났다. 서양문명의 근간인 지중해문명은 그리스 폴리스 시대와 헬레니즘 시대를 거쳐 로마로 이어졌다. 단 아래 도표는 지중해 문명권을 장악한 순서를 보여주는 것이지, 건국 순서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의 폴리스 시대와 로마 왕정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그리스 본토와 크레타와 주변 에게해 섬들을 아우르는 에게문명은 신화로 취급되어 왔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이 청동기 문명의 끝 무렵인 트로이 전쟁을 다루고 있다. 트로이 전쟁에 매혹된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에 의해 에게문명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참고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오디세우스가 그리스로 귀환하는 10년간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하면 먼저 떠올리는 폴리스는 에게문명이 끝나고, 갑자기 문명의 흔적이 사라진 철기 초기의 암흑기를 지나, BC750년경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처음 읽는 터키사 >
그리스 폴리스의 대명사,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데, 그 원인은 지형과 인구 구성에 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아테네는 산악지형으로 농사를 짓기 힘들었으므로 주로 해상 교역에 의존했다. 스파르타는 평야를 차지하여 상대적으로 식량 자급률이 높은 편이었다. 여하튼 대부분의 폴리스들은 먹고살기 위해 바다로 진출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소아시아 지역에 많은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소아시아 지역으로 뻗어 나온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는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는 시민이 반 이상을 차지하는 반면, 스파르타는 시민이 6% 정도에 불과했다. 극소수의 시민이 대다수의 노예와 비시민을 다스려야 했던 스파르타는 군국주의적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시민의 비율이 높고 많은 식민지로 인해 경제력이 강했던 아테네는 민주정을 확립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EBSi 이다지의 세계사 개념 다지기>
아테네라고 하면 무어니 무어니 해도 역시 고대 민주정이 핵심이다.
아테네 역시 처음에는 귀족들이 권력을 독점했으나 전쟁이 잦아지면서 큰 역할을 하게된 중장보병들이 점차 참정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중장보병은 스스로 무기를 사서 무장할 수 있는 부농 평민들이었다. 솔론은 부농들의 참정권을 보장하고 귀족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재산에 따라 참정권을 부여하는 금권 정치를 시행하며 조정자로 나섰으나 귀족과 평민 모두의 불만을 샀다. 특히 재산이 하나도 없는 빈농들의 불만이 컸는데 이때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빈농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을 잡았으나 독재를 하면서 아테네의 민주정은 참주정치로 변질되었다. 이후 클레이스테네스는 참주의 출현을 예방하기 위해 도편 추방제를 도입하였다. 또한 500인 평의회를 설치하여 원칙적으로 평민들이 모두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며 아테네 민주정의 기반을 공공히 했다.
아테네 민주정을 꽃피운 페리클레스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에 등장한 지도자이다. 페르시아 전쟁으로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아테네는 외부적으로는 다른 폴리스들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를 바탕으로 내부적으로는 아테네 민주정의 화려한 꽃을 피웠다.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에 가입한 폴리스들이 방위비로 모아놓은 델로스 금고의 돈을 마음대로 꺼내서 가난한 아테네 시민들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수당제 등에 사용하였다. 페르시아 전쟁에 노잡이와 수병으로 참여하여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끈 가난한 시민들이 당당히 참정권을 요구하며 아테네의 민주정은 전진하였으나 그 댓가는 어쩌면 주변 폴리스들이 치러야 했던 것이다.
아테네의 전성기는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끝낸 BC480년부터 펠로폰네소스전쟁(BC431 시작) 사이의 50여년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서양철학을 대표하는 소크라테스와 <오이디푸스왕>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 그리고 아테네 정치의 꽃을 피운 페리클레스가 동시에 활약 할 만큼 융성하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59>
페르시아 전쟁은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페르시아의 통치 아래 있던 이오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 반란을 아테네가 지원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이오니아 반란을 진압하고 아테네를 응징하기 위해 전쟁에 돌입했다.
3차에 걸친 페르시아의 침공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그리스가 승리하였지만, 그리스의 승리는 그리스 세계의 분열을 가져왔다. 아테네는 2차 침입 당시 마라톤 평원에서 대승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3차 침입 시에는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함으로써 단숨에 폴리스 세계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스파르타는 3차 침입 시 테르모퓔라이에서 300인의 정예병이 결사항전을 하였지만, 스파르타 왕이 전사하며 패하였다. 페르시아 전쟁으로 인해 아테네는 폴리스 세계에 대한 패권적 야망을, 스파르타는 질투와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강유원의 『역사 고전 강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페르시아 군의 제3차 침입은 육지와 해상에서 동시에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육군은 테르모퓔라이에서 스파르테군을 만나 승리를 거둡니다. 이때 스파르테 왕이 전사합니다. 반면 해군은 살라미스에서 아테나이군을 만나 대패합니다.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해군력을 키운 아테나이의 적수가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에서 거둔 두 번의 승리는 아테나이로 하여금 패권적 야망을 갖게 합니다. 반면 전투에서 패배한 스파르테는 아테나이에 대한 질투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페르시아 전쟁의 결과로 인해 희랍 세계 내부에서 반목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중에 자세하게 살펴보겠지만, 투키디데스가 말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이 바로 이것입니다. 즉 아테나이의 야망과 스파르테의 두려움이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입니다. p49」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폴리스 세계를 둘로 조각내었다. 아테네 동맹 즉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동맹 즉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나뉘어 잔인하고 비열한 내전 끝에 스파르타 측이 승리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승자는 스파르타가 아니라 페르시아의 황금이었다고 할 정도로, 펠로폰네소스 전쟁 후 폴리스 세계는 지리멸렬해지다,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종말을 맞았다. 이 전쟁은 페르시아의 꿈이 이루어진 전쟁 혹은 그리스의 자살이라고도 불린다.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강유원의 『역사 고전 강의』를 참조하면 좋을 것 같다. 예전에 읽을 때 요약해 둔 글이 있는데, 링크해 둔다.
http://blog.aladin.co.kr/753199155/6812974
폴리스 세계가 마케도니아에 의해 멸망한 뒤 현재 우리가 그리스라고 부르는 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이룩한 제국은 얼마 가지 못해 망하고, 뒤를 이어 로마 제국이,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는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이 지역을 다스렸다. 근대 그리스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1821~1829년까지의 독립전쟁 결과 탄생했다. 그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도 그리스가 고대 폴리스 세계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리스 특유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알렉산드로스(재위 BC336~BC323)가 갑자기 열병으로 죽은 후 50년 가까운 내전 끝에 제국은 세 개로 분할되어 알렉산드로스 휘하 장군들의 후손에 의해 지배되었다.
<용선생 세계사 2>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초 단명했지만, 그가 통합한 지역을 통해 그리스 문명이 이슬람 세계는 물론 인더스강 유역까지 전파되었다. 헬레니즘 문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이름은 헬라스였고, 헬라스의 시민들을 헬레네스라 했다. 헬레니즘은 여기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를 비롯한 정복지 곳곳에 자신의 이름을 본 딴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다. 알렉산드리아는 학문의 중심지로, 그리스의 철학과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의 과학이 두루 섞이며 자연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이후 중세를 거치며 유럽인들은 이 시대의 과학적 업적을 잊었지만, 이슬람 학자들이 이를 이어받아 이슬람 과학을 꽃피웠다.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등이 활동하였다.
헬레니즘 문화는 인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의 잘생긴 조각상을 본 따 불상을 조성하게 만들었다. 이 간다라 미술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까지 전파되어 석굴암의 본존불상에서 꽃을 피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더불어 희랍철학의 대표자이지만 출신은 마케도니아이다. 여하튼 알렉산드로스는 희랍 문명의 세례를 받았고 그가 건설한 제국에서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세계시민주의를 주창하여 동서양을 하나로 묶으려 했다. 그러나 하나된 세계에서 유행한 철학은 철저히 개인주의적이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현세의 쾌락을, 스토아 학파는 금욕을 가르쳤다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철저히 탈정치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준 폴리티콘-폴리스에서 사는 동물)"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철저히 정치적이었던 폴리스 시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점차 쇠퇴하여 헬레니즘 시대에 끝이 났다.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에피쿠로스 철학입니다. 사이좋은 친구들끼리 모여서 동아리를 만들고 놀자는 탈정치적인 철학입니다. 둘째는 스토아 철학입니다. 이 세상은 덧없는 것이고 진정한 행복은 우주적 질서와 교감할 때 얻을 수 있다는 탈현실적인 철학입니다. 이러한 철학들은 현실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전혀 없을 때 등장합니다. 사실상 패배자의 철학입니다. 셋째는 퀴니코스 학파(회의주의) 입니다. 이 학파의 대표적인 사람이 '통 속의 디오게네스' 입니다. 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일화는 사실 여부를 떠나서 상징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는 통 속에 살고 있었는데, 알렉산드로스가 현자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자 "햇볕을 가리지 말아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통은 집이 아닙니다. 그저 내 몸 하나 뉘일 수 있는 공간일 뿐입니다. 희랍인은 자기 땅을 소유한 시민이었는데 그걸 포기하였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는 알렉산드로스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완전히 탈정치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민회에 나가서 나라의 일을 격렬하게 토론하던 폴리스 시민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p141」
그리스 시민들을 생생히 살아 움직이게 했던 정치와 현실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허무주의가 만연했던 것이다. 플라톤 철학이 주장하는 '이데아'는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플라톤은 비록 현실의 질서가 무너졌다고 해도 불변의 진리는 존재한다는 것과 우리 삶은 그 진리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라톤 철학은 무너진 공동체를 일으켜 세우고 이를 악물고 현실 세계를 올바로 살아내기 위한 허무 극복의 철학이었다.
부언이지만 재미있는 사실 하나.
고대 마케도니아는 현재 세 나라에 걸쳐 나뉘어져 있는데 서로 마케도니아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마케도니아 공화국과 그리스가 그렇다.
<용선생 세계사 2>
3. 로마 제국과 크리스트교의 만남
에게문명이 꽃을 피우고 헬레니즘 문화가 시작될 때까지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작은 도시 국가였다. BC750년 건국된 로마는 BC510년까지 왕정체제였는데, 우리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역사이다. 로마 정치제제의 특징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이행했다는 것이다. 로마 정치 체제를 대표하는 공화정은 BC510년부터 BC27년까지 이어졌으며, BC27년에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고 실질적인 황제권을 행사함으로써, 로마는 제정 시기로 접어들었다.
로마제국은 AD 330년에 비잔티움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395년에 공식적으로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으로 분할되었다. 서로마 제국은 유목민인 훈족(흉노족)의 침입에 따라 밀려 내려온 게르만족에 의해 476년 멸망했다. 서로마 제국이 망하고 서유럽 세계는 프랑크족(게르만의 일족)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카롤루스 대제 때 전성기를 누린 후 몇 개로 쪼개진 프랑크 왕국은 9~10세기 즈음 노르만족의 침략으로 약화되었다. 노르만족과 싸우며 지방의 기사 세력이 성장했고, 이후 서유럽은 영주(기사)를 중심으로 한 중세 봉건사회로 진입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1000년 이상 로마의 명성을 유지했다.
<EBSi 이다지의 세계사 개념 다지기>
로마의 입법과 행정은 크게 두 세력이 나누어 맡았다. 귀족과 평민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평민이 정치와 행정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로마 공화정의 시작은 귀족 공화정이었다. 여기에 전쟁을 통해 큰 기여를 하게 된 로마 중장보병 즉 평민들이 참정권을 요구하며 투쟁해 나가는 과정에서 공화정이 점차 확대되어 갔던 것이다. 귀족들로 구성된 원로원은 지금의 입법 기구와 비슷하고, 원로원에 의해 선출된 집정관은 지금의 대통령과 유사한 통치자였다. 평민들의 발언권이 점차 강화되면서 이런 귀족 정치에 대항하며 평민회가 만들어졌다. 평민회는 호민관을 선출하여 귀족들로부터 평민들을 보호할 수 있게 하였다. 호민관은 원로원이 만든 법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집정관은 2명이었는데, 처음에는 원로원에서 모두 선출하였으나 리키니우스법을 통해 집정관 1명은 평민회에서 선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호르텐시우스법이 통과되며 평민회도 원로원과 동등하게 입법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로마 공화정은 절정에 도달했다. 로마는 일련의 민권 확장을 법을 통해 성문화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로마 공화정이 발전하는 동안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 재해권을 넘보기 시작했다. 로마가 지중해를 장악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포에니 전쟁이다. 포에니 전쟁은 약 120년의 기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벌어지는데 결정적인 전쟁은 2차 포에니 전쟁이다.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피레네와 알프스를 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며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와 12년 동안 한번도 패한 적이 없지만 전쟁의 최종 승리자는 로마였다. 카르타고를 물리친 로마는 서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며 세계 제국으로의 발돋움을 시작하였다.
<용선생 세계사 2>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로마가 카르타고와의 전쟁에 승리하며 급팽창하자, 로마의 민권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오랜 전쟁 끝에 돌아온 고향 로마에서 평민들이 마주한 것은 황폐해진 자신의 땅과, 정복지와 노예를 독차지함으로써 더욱 부유하게 된 귀족과 그들의 대농장(라티푼디움)이었다. 게다가 속주에서 값싼 농산물들이 들어오자 농민들은 급속히 몰락해 갔다.
귀족과 몰락 농민 사이의 갈등은 내전에 가까운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때부터 농민들의 불만을 흡수해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 군인 정치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오랜 전쟁을 통해 강력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거의 사병화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호민관이 된 그락쿠스 형제가 개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로마는 군인 정치가들의 손으로 들어갔다. 원로원은 거의 허수아비 상태가 되었다. 군인 정치가들은 1인자 자리를 놓고 서로 투쟁하였다. 이 시기를 삼두정치 시대라고 하는데, 1차 삼두정치를 이끈 사람이 그 유명한 카이사르이다. 카이사르는 황제가 되려다 암살당했다. 로마를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뒤바꾼 사람은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다. 옥타비아누스는 2차 삼두정치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안토니우스를 물리치고 일인자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를 교훈삼아 황제의 칭호를 거절하고 스스로 제1시민이라고 칭하였다.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바쳤다. 어쨌거나 실질적으로는 황제와 같은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를 기점으로 로마의 정치제제를 제정으로 분류한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로마제국 전체를 통틀어 최전성기는 로마공화정이 아니라 로마제정기의 오현제 시대이다. 이 시기 황제는 세습이었으나 실제로는 세습이 아니었다. 황제는 후계자를 자신의 양자로 삼아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때의 전성기를 ‘팍스 로마나’라고 부른다. 그런데 강유원의 『역사 고전 강의』는 팍스 로마나를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용선생 세계사 2>
「팍스 로마나는 옥타비아누스가 ‘존엄한 자’ 즉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원로원으로부터 받은 서기전 27년부터 -이런 까닭에 팍스 로마나를 ‘팍스 아우구스타’라고도 합니다.- 이른바 오현제 시대가 끝나는 서기 180년까지를 가리킵니다. ... 팍스 로마나는 ‘로마에 의한 평화’ 라는 뜻인데, 정확히 말하면 ‘로마의 군사력에 의한 평화’, 즉 식민지에 대한 폭력과 착취로 유지되는 체제입니다. 로마는 트라야누스 황제 때 최대의 영토를 확보했습니다. 이 국경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 팍스 로마나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는 군사력을 통해 식민지를 점령하고 로마화를 진행했습니다. p178」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66>
<용선생 세계사 2>
어쨌든 오현제 시대가 막을 내리고 로마는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오현제 시대의 마지막 황제는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첫 부분에서 죽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이다. 이 황제가 바로 『명상록』을 쓴 철학가이기도 하다.
로마를 중흥시키려 한 몇 명의 황제가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13년 크리스트교를 공인하고, 330년 제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겼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크리스트교는 80년이 지난 392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그러나 로마는 395년에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열되고, 서로마 제국은 476년에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했다.
4 불교의 가르침을 받은 마우리아
<EBSi 이희명의 대단한 세계사>
인도에 관해서는 사실 아는 것이 많지 않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것은 불교이다. 이 책의 내용도 불교에 관한 것이 가장 많다. 간단하게만 요약해 본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인도 역사상 인도 대부분을 처음으로 통일한 나라는 마우리아 왕조이다. 마우리아 왕조는 BC321년 경 찬드라 굽타 마우리아에 의해 세워졌다. 당시 이미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에 의해 서양과 문물을 교류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 상태였다.
마우리아왕조의 전성기는 3대인 아소카왕 시기였다. 아소카왕은 조선의 태종보다 더 심하게 수많은 형제들을 죽여 피를 강물처럼 흘리며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이후 자신의 잘못을 크게 깨닫고 불교를 국가 종교로 적극 장려하며 불교 전파에 힘썼다. 아소카왕 당시의 불교는 깨달음을 중시하는 소승불교(상좌부불교)가 유행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아소카왕이 죽은 뒤 얼마 못가 마우리아 왕조가 멸망하였다. 이후 분열된 인도를 다시 통일한 나라는 쿠샨왕조였다. 쿠샨 왕조는 마우리아 왕조보다 조금 더 서쪽 이슬람 지역으로 치우쳐 있다. 당시는 서쪽에는 로마제국이, 동쪽에는 한나라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 거대제국들 사이에는 한나라 장건에 의해 비단길이 열려있었고, 동서양의 문물이 비단길을 통해 교류하였다. 헬레니즘문화는 마우리아 왕조 때부터 전파되기 시작했지만 쿠샨 왕조에 와서는 간다라 지역의 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스의 아름다운 조각상을 본떠 불상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쿠샨 왕조 시기에 유행한 불교는 개인의 깨달음 보다는 중생 구조를 강조한 대승불교였다. 이 대승불교와 불상으로 대표되는 간다라 미술은 한나라를 통해 우리나라에까지 전달되었다. 밀로의 비너스상이 석굴암 본존불에 구현된 것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BC6세기 왕자로 태어난 석가모니는 6년간의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 당시 인도는 브라만교를 바탕으로 한 카스트제도가 엄격하였다. 이런 인도 사회에서 석가모니는 인간이면 누구나 불성이 있고, 도를 닦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평등사상을 전파했다. 현실에서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평등이 가장 시급한 수드라 신분보다 크샤트리아와 바이샤 신분에게 더 환영 받았다. 전쟁으로 세력이 커진 크샤트리아와 상업의 발달로 부자가 된 바이샤들이 권력을 갖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불교가 왕권강화와 귀족계급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인 것과 어쩌면 비슷하다. 여하튼 불교는 이들 계급의 도움으로 인도사회의 주요한 종교로 발돋움하였다.
5. 중국의 울타리를 쌓은 진나라
중국의 전체 흐름에 대해서는 예전에 정리해 놓은 글이 있다.
http://blog.aladin.co.kr/753199155/7479040
인터넷에 중국 연대표는 엄청 많았는데, 나름대로 그려보기도 했다.
그럼 청동기 시대의 은과 주를 지나 춘추전국 시대로 들어가 보자.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춘추시대는 많게는 200여개의 국가가 있었고 ,전국시대로 넘어가 7웅으로 정리가 되었다. 7웅 중 고조선과 가까이 있는 연나라는 BC3세기에 고조선과 한판 붙기도 했다. 이때부터도 중국대륙의 골칫거리는 흉노였다. 진시황이 흉노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춘추전국시대에 조금씩 쌓은 것을 이어서 완성한 것이다. 진나라의 만리장성은 토성이고, 현재 남아 있는 만리장성은 명왕조 시기에 개보수 한 것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중국은 철기시대로 접어들면서 제후국들의 패권다툼이 치열해졌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지만 값싸고 단단한 철제무기가 만들어지면서 전쟁이 많아졌고, 이를 바탕으로 거대제국이 탄생했다.
춘추전국시대에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제자백가라 불리는 사상의 폭발이다. 공자, 맹자, 노자, 장자, 한비자, 묵자 등등 어릴 때부터 들어온 그 여러 ‘子’들이 이렇게 오래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놀랍고, 그 사상들이 지금까지도 우리 삶에 깊숙이 뿌리내고 있다는 것은 더욱 놀랍다. EBS 다큐프라임의 <절망을 이기는 철학, 제자백가> 6부작을 보면 각 사상에 대해 개략적 이해가 가능하다. 각 부마다 압축적으로 붙여 놓은 제목도 곱씹을 만하다. ( 1부 묵자, 정의 없는 세상에 분노할 때 / 2부 공자, 인간을 믿을 수 없을 때 / 4부 장자, 불안을 견딜 수 없을 때 / 5부 한비자, 간교한 기득권에 맞설 때) 사상이란 지적 유희나 탁상공론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뇌와 투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춘추전국시대의 오랜 혼란을 마감한 것은 너무도 유명한 진시황이다. 진나라는 BC221년에 중국을 통일하였으나 15년 가량 후인 BC206년에 망했다. 초단명 국가지만 중국대륙을 최초로 통일했을 뿐 아니라 통일한 지역을 통합하기 위한 여러 제도를 마련했다. 이 제도들은 한나라가 물려받아 확립하였다. 법가사상을 바탕으로 한 가혹한 통치와 만리장성 등의 대규모 토목공사로 인한 민생의 황폐화로 중국 최초의 민란이라는 진승과 오광의 난이 발생하며 끝내 멸망했다. 진시황은 중국 역사에 폭군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아직도 논쟁 중이다. EBS 다큐프라임 <불멸의 진시황>에는 그의 업적과 노고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영토 통일 후 12년 간을 제국의 진정한 통합을 위해 쉼없는 개혁을 추진하다 과로로 죽었다는 진시황이 정말 아방궁에서 불로초를 찾으며 흥청망청했다는 그 진시황일까 싶다. 진시황의 여산릉은 아직 발굴하지 않고 있다. 이천 년의 어둠으로부터 훼손 없이 발굴하기 위해 기술이 더 진보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진을 무너뜨린 한에 의해 쓰여진 역사가 아니라 진시황 자신이 직접 쓴 진나라의 역사가 여산릉에는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지 않을까?
6. 중국문화의 기틀을 다진 한나라
한나라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중국'의 기틀을 만든 나라이다. 진이 최초로 중국의 영토를 통일했다면, 한은 문화적인 면에서 하나의 중국을 완성하였다. 한나라는 중국 역사에서 고대국가를 완성한 왕조로 자리매김 된다. 한나라는 BC202년 유방이 초나라의 항우를 물리치며 중국 대륙을 차지하였다.
한나라는 한무제의 전성기를 거쳐 외척과 환관의 횡포에 시달리다, AD9년 외척인 왕망이 세운 신나라에 의해 잠시 맥이 끊겼다. 왕망은 토지사유와 노비매매를 금지하는 등 개혁정치를 폈으나 호족의 반발로 실패하고, AD23년 호족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한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광무제로 그가 즉위한 AD 25년부터를 보통 후한이라 부른다. 후한은 황건적의 난과 그 유명한 삼국시대를 맞으며, 220년 조조의 아들 조비에게 황제자리를 물려줌으로써 400여년 이어져온 왕조를 마감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한나라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건은 거의 한무제(재위 BC141~BC87) 시대에 일어났다.
진시황에 의해 파묻힌 유교를 되살려내 오늘의 공자가 있게 한 것도 무제다. 무제는 동중서의 건의로 유교를 국교로 삼아, 장안에 태학을 세우고 지방에 오경박사를 파견하여 유교를 가르치게 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흉노를 토벌하기 위해 장건을 대월지로 파견했다가, 서역으로 가는 사막길을 개척한 것은 너무도 유명한 사건이다. 이 사막길이 페르시아(당시에는 파르티아 왕국)를 거쳐 로마까지 이어져, 인도의 대승불교와 간다라미술이 우리나라에까지 전해졌다. 비단이 가장 많이 거래되었다고 해서 이 삭막한 사막길은 비단길이라고 불렸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용선생 세계사 2>
무제는 대월지와의 동맹에는 실패했지만 장건이 가지고 온 정보를 바탕으로 흉노를 몰아내고 영토를 확장했다. 영토 확장의 면에서는 우리나라도 한무제의 침략을 받았다. BC108년 고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세워진 뼈아픈 사건이다.
역사책의 고전이라 할 사마천의 『사기』가 쓰인 것도 무제 때이다. 기전체 양식을 확립한 것으로 유명한 이 책은 중국 전설상의 제왕인 요임금부터 무제 초반기인 BC 2세기 말까지의 한나라를 다루고 있다.
다들 알겠지만 한나라의 한은 한문, 한족, 한자 할 때의 그 漢이다. 漢나라가 중국문화의 근간이라는 것이 漢이라는 글자 속에 그대로 담겨있다.
* <세계사 공부> 카테고리 글들은 작성 후 조금씩 수정·보완하고 있습니다.